40화
사실 율란 발트는 꽤 단순한 인간이었다. 속 안에 네발 기는 짐승이 들어 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는 제 저주를 저주하는 한편, 니키엘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피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약한 것의 살점이 강한 것의 식사가 되는 것처럼,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날이 지면 밤이 오는 것처럼 저주받은 자신이 신성력을 가진 니키엘에게 끌린다면 그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했다.
주신의 비호 아래 네 가문 중 하나와 혼례를 올리게 되는 금발, 벽안의 왕족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출산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
후사를 도모하여 이테렌을 굳건히 만드는 것이 율란이 갖고 있는 영주로서의 소임이었다. 그러니 니키엘에게 끌린다면 부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비록 그가 작은 동물들을 희생시켜 제 한 목숨을 지켜낸 비열한 작자라 해도.
문제는 여태껏 그 걸레에게 단 한 번도 끌린 적이 없었다는 거다.
니키엘은 그동안 율란에게 수없이 많은 수작을 부려 왔다. 율란뿐만 아니라 각 수장들에게 늘 그런 식으로 질척거렸었다.
부왕의 명령 때문에 율란에게 직접 접촉할 수는 없었지만 차라리 닿는 것보다 더 값싸게 굴고는 했다.
최음 효과가 있는 꽃인 아노나닐랑 향유를 뿌린 속옷을 편지 봉투 안에 넣어 보내거나, 오시니스 신혼부부들이 결혼 첫날밤에 쓰는 피임 기구를 율란의 망토 자락 주머니에 넣고 가기도 했었다.
소드마스터인 율란이 그의 기척을 못 느낄 리 없으니 아예 연회 등에서 사람들이 율란에게 모인 틈을 타 그런 짓을 벌이고는 했다.
그나마도 니키엘이 네 명의 수장들 중 율란 발트를 가장 무서워하기 때문에 덜 한 것이지, 레이먼은 겨울 연회 한복판에서 아랫도리가 말만 하다는 폭로를 당하지 않았던가.
새와 뱀 새끼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네 명의 수장들은 한 번도 입 밖에 내뱉은 적 없는 단 한 가지의 생각을 공유했다.
‘왜 내 구원이 저 걸레여야 하는가.’
나머지 셋의 운명이 기구하기 이를 데 없듯, 율란 발트의 삶은 처음부터 망한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율란의 조부인 도미닉 발트는 당시 수장의 하나뿐인 동복동생으로, 광룡의 저주가 씐 형을 대공으로 모시며 그에게 백작위를 하사받았었다.
다정하고 온화한 성격인 형에게 열등감이 많던 도미닉은 같이 사냥을 나간 길에 그를 암살하고 대공 자리에 오른다. 그렇게 그 대의 저주가 발트가를 빗겨 나가자, 다시금 광룡의 저주가 씌인 아이를 얻기 위해 며느리를 강간하여 아들이자 손자인 율란을 후계로 생산한다.
낳을 아이가 저주를 갖게 되더라도 늑대로 변하는 가주가 태어난다면 가문이 부흥했기 때문에 그릇된 관계를 통해 괴물 늑대를 발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도미닉은 그 과정에서 자신을 거부했던 며느리를 벌하기 위해 곡식 창고에 가둬 두고 물 한 모금 주지 않은 채 아사시켰다.
당시 마물 토벌에 나가 있던 율란의 부친은 그 소식을 듣고 절망하여 그대로 마물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율란은 그런 잡놈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귀족은 무슨. 이 세상 아주 비천한 것들도 그렇게 더러운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율란은 제가 개돼지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태생부터 드높은 자존감과 그를 이룬 모든 것들이 강하고 아름다운 바람에 모순적인 성격으로 성장하였다. 율란은 해가 갈수록 범인들은 범접할 수 없는 성격이 되었다.
발트가는 흑마룡의 광증에 의한 파장을 가장 심하게 받은 가문이었다. 광증이 섞인 피가 근육을 불리고 뼈를 강대하게 만드는 동안, 율란의 내면에서는 변화가 일었다.
뭇 인간들을 저와 같은 동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율란에게 인간이란 너무도 나약한 것들이었다. 뼈는 무르고 살은 가벼웠다.
도미닉 발트의 마수를 피하기 위하여 아직 어릴 때부터 검을 잡고 마물을 베어 내던 것이 문제였을까. 송곳니가 칼처럼 뾰족하고 혈관에 독이 흐르지 않는 모든 생물들이 나약해 보이기만 했다.
그런 요소들은 율란을 고립시키기만 했다.
범상치 않은 탄생, 역겨울 정도로 비범한 성장 과정, 비약적인 신체와 피에 섞인 광증.
모든 것들이 율란을 인간 외의 것으로 만들었다. 율란은 사실 자신도 어쩌면 마물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다른 수장들 때문에 사유하고 사고하는 마물의 존재가 저 하나 뿐은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점의 선 자들이 겪는 지고의 고독이 율란의 삶을 지배했다. 그러니 나약하게도,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저를 구해 줄 백금발과 벽안의 존재를.
그리고 율란의 두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아랫도리 가볍기가 매독 마귀와 다름없다는 니키엘 오시니스였다. 그때의 절망감이란.
그전까지의 율란은 자신이 백금발과 벽안의 존재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세상에 혼자인 건 당연하다고 여겼었는데, 니키엘을 처음 보자마자 느껴 오는 실망감에 오히려 절망했다.
자신이 ‘기대’를 하다니. 북부의 검은 늑대, 저 혼자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테렌의 괴물 짐승이 사실은 구원을 바랐다니.
네 명의 수장들이 15세가 지난 백금발, 벽안의 왕손인 니키엘 오시니스를 축언하기 위해 처음으로 모인 자리였다.
왕궁 깊숙한 곳에서 태어난 니키엘은 태어난 지 만 1년이 지났을 때 법황의 세례를 받기 위해 왕자궁을 나섰던 일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었다.
‘짐의 아들이 다소간 미령하오.’
전대미문으로 한꺼번에 네 가문 모두에서 광룡의 저주를 받은 이들이 태어났다. 네 가문의 각 원로회는 혹여나 니키엘을 다른 가문에 빼앗길까 경계했다.
그들은 앞다투어 가장 비싸고 고귀한 것을 가주에 손에 들려 수도로 보냈다.
당시의 가주들은 가장 어린 지카리조차 성년이 지난 때였다. 아직 이런 구원을 만나기 위해 수도에 모여든 수장들의 얼굴은 깊게 침잠해 있었다.
아마 그때 수장들은 모두 반쯤은 절망하고 반쯤은 안심했던 것 같다. 저 어린 왕족에게 어서 빨리 구원받고 싶다는 나약한 자신을 조롱하며 말이다.
그러는 동시에 욕심 많고 멍청한 왕의 노예가 될 미래를 암담해하고 있었다. 그 모든 기대와 회환이 뒤죽박죽 섞인 얼굴로 오시니스 왕국군의 제복을 입은 채로 어린 왕족에게 축언을 할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왕의 어린 아들이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수장들은 모두 생각했다.
‘저것은 가짜다. 꽃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향기가 없는 가짜.’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보자마자 알았을 뿐이다. 백금발과 벽안을 타고난 그 어린 왕족에게는 그들을 구원할 힘이 없다는 것을.
율란은 그때부터 단 한 번도 니키엘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제 저주받은 인생이 구원받을 것이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부친이자 배다른 형인 전대 소대공의 뒤를 따라 마물에게 배가 뚫려 죽는 일만 남은 하잘것없는 생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한심하게 죽기까지, 율란은 나름의 의무들을 무감하게 해치우는 중이었다.
썩어 가는 오시니스를 조금이라도 늦게 망하게끔 멍청한 왕을 견제하고, 마물에 고통받는 민초들을 위해 매년 수가 불어나는 벌레 같은 것들을 해치우는 일. 의무만 남은 권태로운 삶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니키엘은 무언가 달라 보였다.
정확히는 마귀와 마주쳐 기억을 잃었다고 소문났던 그때부터.
그렇다. 니키엘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더니 그 이후로 깨어나지 못한 채 부왕의 속을 썩이더니 이윽고 정신을 차린 뒤에는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
멍청하고 욕심 많은 왕은 니키엘이 신성력을 가졌음에도 마귀와 마주쳐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날까 경계하는 듯했지만, 이미 암암리에 퍼진 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니키엘 같은 걸레가 앞이고 뒤고 모두 수절한 채 벌써 두 달째 궁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는 기함할 짓을 벌이는데 소문이 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두 달이면 수도 사교계가 자랑하는 여름 무도회 시즌이 끝날 무렵이다. 그 파티광이, 그 색정광이, 발정 난 공작새처럼 날개를 펼치며 귀부인들과 영식들을 유혹하는 걸 관두고 두문불출 책을 읽는다니.
마귀와 마주쳐 기억을 잃지 않는 이상, 아니 한 번 죽었다 새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율란은 그와 마주치고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확신했다.
‘충성스럽지도 않고 내 신하도 아니니 다음부터 내 앞에서 공 자신을 지칭할 때는 충신 말고 ‘아무개’로 하시오. ‘이 아무개가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하.’라고 하시면 그때는 나도 공의 간절한 말을 경청하도록 하겠소.’
그렇게 말하던 니키엘을 본 순간 그게 그저 소문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토록 명료한 발음과 깨끗한 눈이라니. 늘 미약에 취하거나 마약에 취한 것 아니면 술에 취해 바닷가 시장 가판대 위에서 아가미를 쭉 열고 죽은 생선 같던 두 눈이 시리도록 맑고 깨끗한 푸른색을 띤 채로 저를 올려다보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잊을 수가 없었다. 율란은 뭇 인간들에게 관심이라고는 없는 저라는 짐승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에게 인간이란 사육장에 넣어 놓은 토끼와 다름없었다.
말이 약간 통하긴 하니 듣는 귀와 혀가 발달된 토끼라고 할까. 율란에게 인간이란 그토록 저와는 종이 다른 존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