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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38)화 (38/130)

38화

“전하의 시종은 결혼 전 익혀야 할 몸가짐에 대해서는 전혀 이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외간 사내들 앞에서 웃통을 까고 좋다고 어깨에 침을 질질 흘려 댔냐, 이 말이야.”

결혼 전 몸가짐? 외간 사내들 앞에서 침을 흘려? 나도 사내인데 외간은 또 무슨 말이야?

니키엘은 과학고 시절 자신의 언어 등급 점수를 떠올려 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그러니까 말을 이상하게 하는 건 저쪽이지 못 알아듣는 이쪽의 죄가 아니란 얘기였다.

“아니,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이야.”

니키엘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당하는 추궁이 꼭 굉장히 유교 사상적인, 그러니까 남녀칠세부동석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율란의 태도가 이상하기는 했다. 꼭 니키엘을 수치도 모르고 이성 앞에서 빨가벗고 있는 사람 취급을 했지 않는가.

씨름 경기를 하느라 어깨와 가슴팍이 맞붙은 걸 보고 남창 취급을 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기숙사에서는 동기와 팬티만 입고 지냈던 니키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니키엘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와 율란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니키엘은 설마 싶어 물었다.

“그러니까, 대공이 지금 내게 화를 낸 이유가, 몸가짐을 정숙하게 하지 않아서…?”

율란은 대답 없이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알긴 아는군, 하는 눈빛이었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살짝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사이 율란은 다시금 망토를 집어 들어 니키엘의 상체를 미라처럼 둘둘 감싸 버렸다. 팔 하나 꼼짝 못 하도록 말이다.

“손이 많이 가는군, 나의 전하시여. 이제 그 빌어먹을 깨달음이 끝났으면 당장이라도 왕자궁으로 돌아가 제발 얌전히 사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 귓가에 전하께서 어느 부인과 붙어먹었느니, 어느 남창에게 뒤를 따먹혔다느니 하는 썩어 빠진 소리가 안 들리게끔.”

율란은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니키엘이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니키엘은 화를 참으려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입을 열었다.

“다 좋아, 다 좋은데. 내가 왜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하는데. 내가 그대들 중 하나와 혼인할 거라서?”

“그 대답이 꼭 듣고 싶다면 그렇다고 해 줄 수 있겠지만, 전하께서도 알다시피 걸레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

“말을 꼭 그렇게…! 하, 됐어. 나도 대공과 결혼하고 싶지 않소.”

니키엘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생각보다 이 세계에서 니키엘의 혼인이 중요한 문제인 듯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몸가짐을 조심히 하라니. 왜 나만? 너는 웃통 까고 다녀도 되고 왜 나만 안 되는 건데. 니키엘은 문득 억울해졌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갑작스레 밀려오는 탓에, 니키엘은 눈앞의 무례한 대공이 입을 다문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무감한 목소리가 툭 던지듯 물었다.

“나와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대공 같으면 걸레니 남창이니 눈앞에서 모욕 준 이와 결혼을 하고 싶겠소? 결혼은커녕 짧은 산책도 함께 할 마음이 안 생기는 군! 아니 애초에 왜 남자랑 결혼을 하라는 거야. 난 남자한테 관심이 없는….”

머릿속이 복잡한 통에 저도 모르게 혼자 계속해서 생각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이었다.

경기장에서 맡았던 짐승의 페로몬이 묵직한 향으로 밀려들었다. 남자가 니키엘의 지척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짐승의 거대한 발에 짓밟혀 으깨어진 들꽃의 푸른 냄새도 났다.

“남자한테 관심이 없다, 라-.”

가슴팍이 붙을 만큼 서로의 거리가 가까웠다. 그러나 남자는 딱 거기까지, 더는 다가오지 않고 니키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진 그의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금안을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니키엘은 저가 숨을 멈추고 있는 것도 모른 채였다.

남자와는 경기장에서부터 단 한 번도 닿은 적이 없었다. 시합을 하려고 올라가 톰의 샅바를 쥐었을 때도 톰의 어깨를 끌어당겨 니키엘과 떼어 냈을 뿐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의 접촉은 이제 막 처음으로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니키엘은 갑작스레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음심에 가득 차 몸을 함부로 놀리던 니키엘의 신체가 반응이라도 하는 것인지 율란이 지척으로 다가와 저를 내려다보자 온몸의 신경이 자글자글 끓는 기분이었다.

가슴팍이 간지러웠다. 정점에 피가 몰린 것 같기도 했다. 니키엘은 왜 그런 부위가 간지러워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다가오는 것에 망토 속 제 미미한 신체 변화를 눈치라도 챌까 봐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율란은 니키엘을 들여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니키엘의 등이 복도 벽에 닿아 버렸다. 차가운 돌벽에 닿은 감촉이 망토 밖으로 느껴졌다.

니키엘은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그렇게 기를 쓰고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닌 주제에 남자를 안 좋아한다니 문득 전하가 궁금해져서 그렇습니다.”

모욕적인 높임말이었다. 차라리 반말을 듣는 것이 나을 정도로 무시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존나게 나쁘네? 근데 기분은 나쁜데….’

그렇다. 기분은 나쁜데 신체의 변화가 정말 묘했다. 율란이 지척에 다가온 것만으로도, 그의 강인해 보이는 목줄기에서 흘러나온 페로몬을 맡기라도 한 양, 몸이 들뜨기 시작한 것이다.

니키엘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율란의 귓불이나 다부진 턱, 호두알처럼 굵은 목울대를 훑었다. 눈썹산이 높은데도 단정해 보이는 눈썹에서 시선이 흩어질 때도 있었다.

‘왜 이러는 거야. 내 이상형은 이 대박 건방진 썩을 놈이 아닌데, 대체 왜….’

속으로 아무리 다짐을 해 봐도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서로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 닿은 곳은 없는데도 오히려 그 때문에 온몸이 저릿거렸다.

니키엘의 경동맥이 얇은 피부를 뚫고 맥박을 따라 두근거리는 것을 율란이 볼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니키엘은 냅다 관세음보살님을 찾았다. 신체 변화가 하반신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그런 니키엘의 찌푸린 미간을 바라보던 율란이 피식 웃었다.

“안 좋아하는 거 맞아?”

“…….”

“안 좋아하게 되면 기사단 쪽으로 전서구를 보내 주십시오, 전하.”

그가 불식간에 물러섰다. 썰물처럼 급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니키엘은 그제야 막혔던 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귓등이 터질 것 같았다.

“남자를 안 좋아하는 우리의 전하께서는 대체 어떨지 궁금하니까.”

율란은 그런 비웃음을 남긴 채 돌아섰다. 니키엘은 차마 입 밖으로 ‘좆이나 까라.’ 하고 욕해 주지 못했다.

그가 다시 돌아와 이번에 정말 어디 닿기라도 하면 하반신의 변화가 뚜렷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율란은 그런 니키엘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다시금 걸었다.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니키엘을 울렸다. 그대로 주륵 미끄러져 앉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무리 몸이 바뀌었다고 해도, 아래가 반응하는 성적 취향까지 바뀔 수 있는 거야?’

니키엘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김치찌개가 그리울 때도, 과금을 퍼붓던 게임의 이벤트 날이 생각났을 때도 아닌 바로 오늘, 니키엘은 정녕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

검은 가시 기사단의 우장군 알레윈은 얼라리요? 상태가 되었다.

기사단과 근위단이 벌이던 시타타 시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러 가 보겠다며 나선 단장이 별안간 굳은 얼굴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알레윈의 상관이자 주군인 이테렌의 영주 율란 발트는 대부분 무표정하고 감정의 기복이 없는 편이었다. 화를 내는 것도 드물고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드물었다.

레이먼 볼트윅 공작이 아무리 정치적 공작으로 그를 엿 먹여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전형적인 외골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드물게 얼굴에 나 기분 더럽다, 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넓은 어깨에 커다란 신장을 가진 괴물 같은 신체의 보유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저벅저벅 걸어오자 기사단이 임시로 쓰고 있던 집무동을 청소하던 시종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내뿜는 기만으로도 소름이 끼친 듯한 얼굴이었다. 단장의 실제 모습이 웬만한 농가보다 큰 늑대라는 걸 알고 있는 알레윈으로서는 그들이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져도 크게 졌나 본데?’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었다. 시타타는 오시니스의 대표적인 스포츠 중 하나였다. 체력 단련에도 좋기 때문에 기사단에서도 종종 시타타 시합을 열고는 했다.

비리비리한 근위대 놈들에게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완패를 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율란의 표정이 저럴 리 없었다.

하지만 믿기지 않았다. 검은 가시 기사단이 어떤 이들인가. 1년의 대부분을 마물을 잡기 위해 보내고 남는 날들은 그 마물을 잡을 수 있게 훈련을 하며 보내는 이들이었다.

밥만 먹고 훈련만 하는 이들이 궁이나 빙글빙글 도는 허여멀건한 근위대 놈들에게 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레윈은 다시 한 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열어 궁금한 것을 물었다.

“혹시 기사단 놈들이 지고 있던가요?”

“그 머저리 새끼들한테 소 수레를 메어 주고 연병장을 돌게 해. 노을 질 때까지.”

히익, 알레윈은 숨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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