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오르락내리락거리는 목울대가 그의 분노를 대신 표현해 주었다. 율란은 꽤 화가 나 보였다. 니키엘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쪼잔하게 내가 지 부하들이랑 놀았다고 이러는 거야?’
만날 때마다 니키엘을 경멸하는 태도를 숨기지 않던 율란이라면 제 부하와 니키엘이 어울리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그런 거지, 왜 사람을 망토로 둘둘 감싸 두는데?!’
기사단과 근위대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두꺼운 망토로 니키엘의 전신을 휘리릭 감아 버리다니. 니키엘은 율란이 혹시 분노 조절 장애라도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가기 시작했다.
시합은 엉망이 되었다. 근위대 소속 기사들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검은 가시 기사단 소속들 역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주군이 화났으니 큰일 났다는 표정들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니키엘이 말했다. 이렇게 물어보는 것조차 짜증이 났다.
“왜 화를 내시오. 그냥 시합 중이었소.”
더 불퉁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름 예의를 차린 물음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에는 싸가지가 부재했다.
“사람 돋우지 말고 입 다물어.”
뭐…? 니키엘은 이제 정말 어이가 없어졌다.
저를 대하는 태도가 기사단 소속 종자라도 대하듯 무례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의를 지키지 않는 수준을 벗어나, 아예 니키엘을 제 아래로 보고 있는 듯했다. 물론 대공 정도라면 그 지위와 권력이 왕자인 자신과 비등하겠지만 그래도 니키엘은 이 나라의 왕족이었다.
태자도 아니고 막내 왕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니키엘이 왕손이 아닌 것도 아닌데 저렇게 무례할 수가.
그나마 체면을 생각해 준다는 수준이 니키엘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인 듯하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니키엘의 분노 따위는 상관도 없다는 듯, 율란은 여전히 굳은 턱을 한 채로 소리쳤다.
“얼릭!”
“…예, 각하.”
“해산시켜. 대회는 없던 걸로 하겠다. 그리고 넌, 따라와.”
어쭈? 이제는 아예 반말이구나. 그래 너 오늘 잘 걸렸다. 니키엘은 씩씩거리며 먼저 등을 돌려 경기장을 내려가 버린 율란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걸음이 너무도 빨랐기 때문이다. 결국 약간 모양 빠지게 헉헉거리면서 그의 뒤를 따라야 했다.
남자는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을 빙 둘러싼 복도를 걸어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쫓아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이 은근히 신경질이 났다.
반드시 따라잡아 한마디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뒤쫓는데, 남자가 코너로 몸을 휙 돌아 들어 갔다.
니키엘 또한 걸음 속도를 늦추지 않고 코너로 몸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벽처럼 나타난 남자 때문에 급제동이 걸려 몸이 앞으로 쏠렸다.
“어, 어…?”
니키엘은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두르고 있던 망토를 펄럭거리며 앞으로 휘청거렸다.
이대로 넘어진다면 율란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을 것 같았다.
원수의 품에 안기는 꼴만은 피하려고 그의 팔뚝을 잡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율란이 몸을 슥 돌리는 바람에 잡을 곳 없이 균형을 잃은 니키엘은 그대로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넘어져야 했다.
“이게 무슨…! 대공! 갑자기 몸을 피하면 어떡하오!”
무릎의 아픔보다 분노가 차올랐다. 대체 뭐 하는 새끼길래 왕족이 제 앞에서 넘어지는데 잡아 주지는 못할망정 몸을 피하지? 아니, 내가 왕족이 아니더라도 사람 사이에 당연한 예의 아닌가?!
분노에 찬 니키엘이 벌떡 일어나 율란을 노려보았다. 완전히 엎어지기 전에 바닥을 짚었던 손과 바닥에 갈린 무릎이 얼얼한 만큼 화가 났다.
그러나 니키엘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율란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는 따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또 내 몸을 더듬으려는 수작인 줄 알았지.”
“이익! 내가 왜 대공을 더듬겠소!”
니키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이렇게 화가 난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무릎이 완전히 갈렸다면? 뼈에 이상이 갔다면? 정강이가 비틀려 연골이라도 찢어졌다면? 그렇게 되면 니키엘은 앞으로 3개월 이상 런지와 스쿼트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작은 짐도 옮기지 말라, 그것을 나르다 부상을 입게 된다면, 너는 3개월 간 헬스장을 방문치 못할 것이다.
근육인들의 십계명 중 하나였다. 니키엘은 방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다. 니키엘은 제 무릎의 안전을 위협한 주적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왜 슬슬 반말인가? 대공이 보기엔 내가 어디 시정잡배의 아들로 보이나? 부왕께서 엄연히 살아 계신 마당에, 내가 대공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예가 있는 줄 아오!”
“마땅히 받아야 할, 예?”
율란은 니키엘의 말이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음험한 얼굴이었다.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위험하게 생겼다고 하는 쪽이 더 맞는 듯싶었다.
샛노란 금안을 빛내며 웃는 것이 어둠 속에서 이쪽을 노리는 짐승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인적이 드문 복도의 한 코너에는 천장이 높아 두 사람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 댔다. 율란의 낮은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한층 어둡고 음산하게 들렸다.
니키엘은 순간에 뒤바뀐 분위기에 움칠 놀라려는 몸을 진정시켰다.
‘아나, 이 새끼 분위기 장난 없네…. 쫄지 말자. 내가 왕자다, 내가 왕자야.’
심기일전한 니키엘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율란이 피식 웃으며 짐승이 그르렁거리듯 지껄였다.
“남창처럼 사내새끼들 어깨에 뺨이나 비비고 돌아다닐 때는 언제고 받아야 할 예가 따로 있다는 거야.”
“뭐, 뭐…?”
심기일전은 금세 무너졌다. 남창이라니. 그런 모욕은 또 처음이었다. 게다가 씨름 자세 좀 취했다고 남창이라니? 니키엘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온몸에 오일을 바르고 꼭 다른 이의 손길을 원하는 것처럼 말야.”
율란이 니키엘이 걸치고 있던 망토 자락을 검지로 툭 튕겼다. 묵직한 천이 작게 찰랑거렸다. 니키엘은 그 작은 타격에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에너지가 깎였다.
문득 제가 왜 이곳에서 저런 놈과 이런 대화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빻은 말을 들어 오히려 차분해진 것이다. 니키엘은 흥분했던 표정을 지우고 차분하게 눈썹을 내려트렸다.
그 변화는 도리어 오므리고 있던 꽃망울이 움트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살짝 내려앉은 아마빛 속눈썹이 시린 냇물처럼 파랗게 빛나는 벽안에 반쯤 그림자를 드리웠다.
니키엘은 무감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남창이어도.”
“…….”
“대공의 왕자인 것은 마찬가지야.”
“…….”
“내가 한낱 남창이라면, 그대는 남창의 대공인 셈이지.”
니키엘에게는 그 말이 별 뜻 아니었다. 바보라고 하는 사람이 바보. 라는 대한민국 초등학생들의 놀림 반사법을 차용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듣는 이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린 듯했다. 율란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치솟더니 그가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을 열었다. 질감 좋은 입술을 열고 나온 말은 의외였다.
“…마귀와 마주쳐 기억을 잃었다더니. 꽤 머리도 굴릴 줄 알고.”
저게 진짜. 니키엘은 다시 한번 치솟는 빡침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실상, <산스브리안의 금가지>의 주인공 니키엘이나 빙의되기 전 니키엘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특별히 가진 능력도 없었고 재능도 없는 평범한 범인이었다.
단 한 가지 남들과 다른 점은 신성력인데 그나마도 수장들에게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는 욕심 많고 멍청한 인물상이었다.
그에 비해 율란 발트는 오시니스의 군사 총독이자 북부의 제 1방어선이었다. 그의 영지인 이테렌은 대공국으로 독립하는 즉시 웬만한 왕국보다 부강해질 것이다.
때문에 개인적인 능력으로 보나, 갖고 태어난 배경으로 보나 율란 발트가 니키엘 오시니스보다 더 뛰어난 인물인 것은 사실이었다. 왕손이라고 해도 왕위와는 거리가 먼 니키엘이니 말이다.
한 대에 딱 한 명만 태어나는 백금발의 벽안인 왕족은 왕위 계승권을 갖지 못한다. 네 명의 수장 중 한 명과 혼인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율란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니키엘을 모욕한다고 한들 그로서는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니키엘이 갖고 있는 신성력을 율란이 탐내지 않으니, 율란은 니키엘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니키엘은 지금 이곳에서 물러선다면 수컷끼리의 우위를 차지하는 싸움에서 영영 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위는 비슷하고 보유한 권력은 율란이 더 강하겠지만 니키엘은 악명 높은 자연대의 대학원생이었다.
자연대 대학원생들은 강했다. 왜 강하냐면 박사로 졸업해도 치킨집밖에 없으니까.
그걸 알고도 학교에 붙어 아득바득 학위를 취득한 이들이니 얼마나 강하겠는가. 깡과 악만 남은 인간들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니키엘은 상시 갈굼에 강한 성격이었다. 한 교수 밑에서 석사 2년 박사 3년을 거친 니키엘은 지성의 거탑이 인정하는 강한 자였다.
저를 비웃는 율란을 가만히 바라보던 니키엘은 두르고 있던 망토를 휙 벗어 던졌다. 순식간에 웃통을 깐 니키엘을 보며 율란의 얼굴이 굳었다.
당황 같은 건 모를 거라 생각하던 남자가 그대로 굳어 버리자, 니키엘은 어딘지 모르게 통쾌했다. 율란이 짓씹듯 말했다.
“아예 돌았나? 이게 무슨 짓이야.”
“망토 가져가시오. 나는 대공의 호의를 받기 싫소.”
“최소한의 수치심이라도 있어 봐. 결혼을 앞둔 사람이 이게 무슨….”
“뭐?”
니키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굉장히 충격적인 말을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율란은 한숨을 쉬며 제 앞머리를 걷어 올렸다. 선명한 금안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는 경멸하듯 니키엘을 보더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