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저 뽀얀 놈은.”
“근위대 놈이라는데요?”
“근위대에 저렇게 야들거리게 생긴 놈이 있었다고?”
검은 가시 기사단이 수군거리는 말은 니키엘의 남성성에는 상처만 됐다. 근위대가 수군거리는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야, 저 뽀얗게 생긴 놈이 근위대 소속이라고? 어디서 남창을 데려와서는….”
“누구의 종자지? 어떤 미친놈이 기사의 명예도 모르고 제 남창을 종자로 데리고 다니는 거야.”
…남창이라고? 이 왕자님께 니들 다 뭐라 했냐? 니키엘은 약간 열이 받았다.
이토록 모욕적인 관심이라니. 어서 속히 시합을 시작하여 톰이라는 놈을 작살내 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 이세계도 만만해 보이면 덮어 놓고 제 서열 아래로 누르려는 수컷들만 가득한 것 같았다.
동물 생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수컷들의 저열한 생태를 모른 척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눌리면 나중에 참가할 토벌 대회에 애로사항이 많아질 것이다.
이미 서열 밑바닥에 깔린 니키엘을 왕족이랍시고 존경할 이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XY 염색체를 타고나지 못한 개체일 것이다. 한마디로, 수컷들은 강한 자가 아니면 복종하기를 꺼려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니키엘이 왕족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문제였다. 니키엘이 수컷의 몸으로 들어온 이상, 그는 이들에게 자신의 강함을 어느 정도는 증명해야했다.
시작은 그저 히오칸의 꼬리뼈를 연구 시료로 차지하고 체력 증진 물약을 챙길 생각이었지만 목적이 조금 틀어졌다.
제 남성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말이다. 여기서 한 놈이라도 이기는 것이 후일 도모에 좋을 것 같았다.
경기장으로 올라가기 전, 니키엘은 올리브오일을 둔 곳으로 다가가 제 몸에 뿌리고는 상체에 모두 문질렀다. 황금색 올리브유가 니키엘의 하얀 피부 위로 성수처럼 미끄러져 내렸다.
가뜩이나 하얗고 뽀얀 살결이 오일에 적셔져 매끈하게 빛나 보였다. 기사단과 근위대로 이루어진 관객들은 말을 잃었다. 남들 다 벗고 있는 웃통일 뿐인데 니키엘 쪽만 봤다하면 바로 죄악을 짓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야, 저 야하게 생긴 놈은….’
니키엘은 그동안 제 몸에 근육이 붙어 꽤 남성성이 드러나는 몸으로 변모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의 몸은 근육이 붙어도 얄팍하게만 보였다.
아니, 운동을 통해 균형 잡힌 몸매가 되자 더더욱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형태로 변해 버렸다.
도톰한 가슴 근육과 오밀조밀하게 짜인 복근에 흐르는 매끈한 오일이 피붓결을 실크처럼 보이게끔 만들었다.
소년과 청년 사이에서만 볼 수 있는 아슬한 미학이 니키엘의 어깨선을 통해 표현되고 있었다.
가슴에 달린 유실 또한 보통의 남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이 깨끗한 분홍색이었다. 오일에 젖어 있어 매끈거려 보이는 것에 기사단과 근위대는 말을 잃고 침을 삼켰다.
그러나 니키엘은 그런 반응에 대하여 조금 다르게 느끼고 있었다.
‘운동의 효과가 있군! 다들 날 존만이로 봤다가 내 근육에 놀란 게 틀림없어. 봐라, 이것들아. 이게 수컷의 힘이다.’
니키엘은 대한민국 1등 이과 대학의 자연 과학대 박사 출신이지만, 자신의 현재 몸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다.
건강적인 측면으로서는 객관화가 넘치는 반면, 자신의 몸과 외모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 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적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는 니키엘이 제 얼굴과 몸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것이 드물었다. 청동 거울이 있지만 상이 흐릿하여 부러 쳐다본 적도 없었다.
깨끗한 거울이 아무 곳에나 붙어 있던 대한민국에서도, 니키엘은 육군 병장 출신답게 1년에 단 두 번, 명절 당일에만 거울을 슥 쳐다보고 마는 전형적인 이공계 남성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제 외모에 익숙하지 않았다.
두건아래 드러난 이목구비가 얼마나 청초한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어떻게 나비의 날갯짓을 연상시키는지, 그 아래 벽안은 얼마나 깨끗하고 맑아 보이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몇 달간의 운동 끝에 균형 있게 자리 잡은 근육들이 소년기에서 막 깨어난 청년 특유의 아슬아슬함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의 판판한 배를 타고 흐르던 오일에 묻어 브레의 허리춤이 윤곽을 드러낸 것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때문에 니키엘은 호기롭게 먼저 경기장에 올라와 톰에게 검지를 까닥였다. 그것이 남의 눈에 보기에는 유혹으로 보이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그때까지 호기롭게 니키엘을 바라보던 톰 역시 약간 눈이 풀린 채로 니키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니키엘은 톰의 그런 눈빛을 보며 기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다.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선수필승으로 기싸움에서 이기다니. 이건 될 싸움이었다. 경기장에 올라오기 전, 제 이름에 판돈을 걸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톰은 약간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약간 단이 높은 경기장으로 올라왔다. 니키엘은 브레 위에 시타타 경기에서 샅바처럼 쓰이는 천을 둘러 허리띠처럼 고정했다.
오일을 바르는 이유는 경기를 재미있게 만들려는 이유 같았다. 니키엘은 그간 자신이 가꾼 근육들을 자랑스럽게 쓰다듬으며 톰이 자세를 잡고 심판이 경기를 시작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경기장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쩐지 다들 니키엘이 제 몸을 쓰는 손짓을 뚫어져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니키엘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심판에게 물었다.
“…뭐야? 왜 시작을 안 해.”
“아, 흠, 크흠…. 자, 톰. 얼른 준비하라고.”
“아…. 예, 예….”
약간 넋이 나가 있던 심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헛기침을 하며 톰에게 준비 자세를 시켰다. 톰 역시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준비 자세를 취했다.
니키엘은 그들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생각 없이 톰의 샅바를 움켜쥐었다. 그들의 어깨와 상박이 맞물린 듯 닫자 주위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왜들 저래.’
수상하게 행동하여 니키엘의 주위를 분산시키려는 양동 작전인가 싶었다. 그럴수록 더욱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니키엘은 투지를 빛냈다.
심판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을 외쳤다. 니키엘은 두 눈을 번쩍이며 그대로 안다리를 걸어 톰을 무너트렸다.
“윽-!”
“니, 니벤디, 한 점 차지!”
“와아-!”
한 점이라는 것은 씨름의 한판 승 같은 개념인 듯했다. 첫판은 당연하게도 총 3판제라서 그들은 또 한 번 경기를 해야 했다. 톰은 시작도 못 해 보고 고꾸라져 놓고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굳어 있던 대중들이 그제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함성이 터졌다.
그럴 줄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라 니키엘은 일어서려는 톰의 손을 잡아 주며 씨익 웃었다. 열광하는 반응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봤냐? 형 쩔어 주지?’
단언컨대 저는 일부러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야 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남중, 남고, 자연대, 군대, 자연대 대학원까지. 지독하게 남초에서만 생활해 온 니키엘은 수컷들의 서열 싸움에서 힘이 주는 요소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생태학에서도 포유류들의 서열 문화를 심도 있게 다루는 만큼, 아는 것이 힘이라는 의제에 따라 니키엘은 수컷들의 서열 싸움에 꽤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미적지근한 성격이라서 그렇지, 남이 제 머리를 누르는 것은 또 못 견디는 터라 니키엘은 자연스레 같은 성별들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는 했다.
신체 조건으로 누를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고만고만한 것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게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게 편해서 그러는 것이었다. 수컷들 사이에서 한번 자신의 특출남을 인정하면, ‘어어, 쟤는 건들지 말자고.’ 하는 분위기가 되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이 시타타 경기로 히오칸의 꼬리뼈와 체력 증진 물약 외에도 그런 이점을 얻고 싶었다.
나중에 그 시타타의 루키가 바로 나, 왕자 니키엘이었다! 하고 밝힘으로 토벌 대회에서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때문에 니키엘은 톰을 일으킨 뒤 손목을 끌어와 가슴팍을 딱 붙인 상태에서 호기롭게 심판을 향해 말했다.
“심판, 뭘 자꾸 꾸물거려.”
“아, 준비, 시….”
그리고, 그때였다.
“정녕 돌아 버리셨습니까, 나의 전하시여.”
누군가, 억센 힘으로 니키엘과 톰을 떼어 놓았다.
“윽-!”
톰이 신음을 내뱉으며 경기장 바닥을 굴렀다. 가슴팍을 붙이고 있던 상태에서 상대가 빠져 버리자 니키엘은 중심을 잡기가 힘들어 비틀거렸다.
정수리 위로 짓씹듯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내려왔다. 귓가에 아가리를 들이민 포식자의 숨소리처럼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그다음 느껴진 것은 오일에 젖은 제 상체에 둘러진 망토자락의 감촉이었다. 옅은 무화과 향과 풀 냄새가 났다.
들판을 쏘다니다 온 야생마에게서 맡을 수 있는 짐승의 냄새와 말발굽 아래서 아낌없이 으깨어진 들꽃의 싱그러움이 혼합된 향이었다.
니키엘은 의아한 얼굴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율란 발트였다.
“뭣들 보고 있어. 다들 눈알 파내기 전에 등 돌려.”
올려다 본 그의 얼굴은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부진 목울대와 꽉 다문 하악을 볼 수 있었다. 제 영역에 침범한 것들에게 경고하듯, 짐승의 짙은 페로몬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