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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31)화 (31/130)

31화

“각하!”

저 멀리서 검은 가시 기사단의 우장군 알레윈이 달려오며 율란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율란이 니키엘과 함께 있는 걸 바라보고 멈칫거렸다가 다시금 걸음을 빨리 해 그들의 지척으로 다가왔다.

율란이 무슨 일이냐는 듯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알레윈이 어버버하다가 니키엘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니키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됐소. 하고 짧게 인사를 사양했다.

알레윈은 바빠 죽겠는데 왕족에 대한 예법 때문에 시간 낭비하지 않아 십년감수했다는 듯 안도한 표정으로 율란을 향해 말했다.

“왕께서 각하를 찾으십니다. …가 보셔야 하겠습니다.”

율란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가지가지한다는 표정이었다. 니키엘은 이때다 싶어 자연스레 빠져나갔다.

“부왕께서 부르신다니 가 보셔야지요. 나야 뭐…. 그래, 자네 이름이 무엇이더라? 알레리? 자네가 날 좀 왕자궁까지 데려다주면 되겠군!”

“…네?”

알레윈은 자신의 이름은 알레리라는 얼빠진 이름이 아니라는 걸 지적해야 할지, 왕자를 배웅해 달라는 말을 거절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니키엘이 더 빨랐다. 그는 하하, 하며 부자연스레 웃고는 알레윈의 등을 떠밀었다.

“대공, 다음에 봅시다. 가자고, 얼라리요.”

어느새 알레윈의 이름은 알레리에서 얼라리요로 바뀌어 있었다. 당황한 알레윈은 율란을 바라보았다.

율란은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니키엘을 바라보다가 알레윈에게 살짝 턱을 끄덕였다.

검은 가시 기사단의 단장이자 상관인 율란 발트가 그러라고 허락했는데 더 이상 항명할 수 없었던 알레윈은 니키엘을 향해 정중히, 그러나 여전히 마뜩찮은 얼굴로 묵례하고는 왕자궁 쪽으로 등을 돌렸다.

율란은 그들의 등을 잠깐 바라보다가 저도 본궁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물이 나타났다니 왕이 겁을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왕궁 서쪽 숲에 마물이 나타났는데 가 보지도 못한 채 왕명으로 궁을 지키고 있던 참이었다.

근위대라는 것들은 대체 뭘 하는지 마물 대회 때문에 수도에 들른 검은 가시 기사단으로 하여금 궁을 지키게 하다니.

무용한 것들에게 왕국민들의 혈세로 녹봉을 주고 있다는 생각에 저절로 짜증이 일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근위대는 왕의 침전 밖을 지키고 있었다. 근위 대장인 호프만 자작이 왕의 침전 앞에 당도한 율란을 보고 쯧 혀를 차며 말했다. 꽤 건방진 태도였다.

“몹시도 각하를 찾고 계셨습니다.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침전 주위를 경호해 주시라고 왕명으로….”

“그건 근위대가 할 일이지. 신성력으로 떡칠해 둔 침전 밖으로는 나오시지도 않는데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있나. 경의 수고를 알면 제 아무리 마물이라도 금상의 침전을 급습할 수 있겠어.”

율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선은 정면을 고정한 채로 근위대장을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근위 대장은 모욕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와 저 사이에는 코끼리와 노루 한 마리만큼의 완력 차이가 존재했다. 평범한 사람이 마물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저 괴물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근위 대장은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얼른 들어가 보라고 몸을 비켜 주었다. 끝까지 그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은 오만한 북부의 대공이 그를 지나쳐 시종이 열어 준 침전 문 안으로 들어갔다.

“대공…!”

“…….”

예상대로, 왕은 몹시도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눈 밑에 내려앉은 거뭇한 흔적에는 지금 당장이라도 왕의 침전 유리창을 뚫고 마물의 앞발이 그를 낚아채 어딘가로 데려가 버릴 것 같은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율란은 그 공포에 푹 젖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는 그 남창도 마물이 화제로 떠오르면 금세 저런 얼굴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을 애써 더듬지 않더라도, 니키엘의 마물 공포증은 유명한 얘기였다.

‘지적 생명체의 탄생….’

그러나 방금 전 니키엘은 아주 의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가 조음하는 단어는 청명할 정도로 깨끗한 발음이었다.

그것이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율란의 귀에 꽂힌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다. 율란은 그가 본궁으로 향하는 대로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꽤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군.’

왕자궁에 박혀 있을 것이지 난리 통에 돌아다니는 것이 마뜩잖았다. 여차하면 왕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이쪽의 일이었다.

가뜩이나 마물이 나타난 곳에 가 보지도 못한 채 이 한심한 본궁을 지키고 있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참으로 한심한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시니스의 핏줄들은 대충 그렇게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상황 파악은 더 못 하는 종자들이었다. 왕태자인 라피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남쪽 해안 왕국으로 외교 사절을 가 있는 왕태자는 사사건건 율란에게 질투의 검을 빼 들고는 했다.

율란으로서는 모기가 웽거리는 것만큼 귀찮고 시시껄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부자 셋이 다 그 모양 그 꼴이니 왕국을 수호하기로 맹세한 가문 출신인 그의 입장에서는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기사단 중 한 녀석을 골라 니키엘을 왕자궁에 들여다 놓으라고 명령할 참이었다.

그때 니키엘이 그 말을 한 것이다. 전과는 다르게 또렷한 발음으로 말이다.

게다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도 전과는 달랐다.

‘음?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 저녁 식사 시간까지 귀궁하지 않으면 폴이 바가지를 긁어서 말이오. 이만 가 봐야겠소.’

형편없는 연기였지만 전과는 다른 당당한 태도가 엿보였다. 그전까지 니키엘은 어느 귀족이 악취미로 만든 남창 인형처럼 비쩍 곯은 생김이었다.

그때도 아름답기는 했지만 썩기 직전의 과일에서 가장 달콤한 향이 나듯이 건강하지 못한 미형이었다. 종말이 예고된 미인에게는 날파리만 꼬여 대는 법이다.

1년 내내 약에 절어 비척거리는 니키엘은 아름답기는 했으나 딱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니키엘은 뭐랄까….

‘짜증이 난 걸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지.’

찌푸려진 미간이 유려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인상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놀랍도록 건강해 보였다.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대지의 싱그러움을 보는 듯했다. 그전까지 니키엘의 아름다움이 사람의 가장 음습한 부분을 공략하여 그 욕심을 채우게끔 유혹하는 것 같다면, 근래의 니키엘은 만인이면 만인 모두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자연경관 같았다.

저를 탄생시킨 대자연의 위대함을 눈앞의 목도한 인간의 순수한 감탄을 자아냈다는 뜻이다.

상아빛 피부, 장미꽃잎처럼 엷은 홍조, 흐르는 물처럼 싱그러운 벽안, 벌꿀색으로 빛나는 햇빛과 닮은 백금발.

그런 얼굴을 하고도 자신은 다분히 인간적이고 또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 간극이 사람의 어딘가를 긁어 댔다.

그가 율란 앞에서 그렇게 작게 인상을 찌푸렸을 때, 지나가던 왕실의 시종들이나 내궁 근무를 하는 하급 관료들이 모두 얼굴을 붉히고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말이다.

‘…대공은 원래 이렇게 무례하시오?’

게다가 그 발음이라니. 율란은 소드마스터로 그의 검기는 공기를 다뤄 가벼운 폭풍까지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때문에 율란은 공기가 가져다주는 소리에 무척이나 민감한 편이었다. 율란은 니키엘의 발음을 알고 있다. 아니 안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 니키엘의 발음은 쉽게 늘어지고 끝을 맺지 않아 지저분하게만 들렸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꼭 한적한 날 엷은 빗방울이 창문을 톡톡 두들기듯이 말한다.

폭우 같지 않고 소낙비 같지 않게 아주 조용히 두들기다가 비가 왔었나 싶게 멈추는 한낮의 여우비 같은 발음이었다.

톡톡 끊겨 그 입을 강제로 열게 해 더 지껄여 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율란은 그런 생각을 하는 제가 이상했다.

근래의 니키엘은 수상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기억을 잃었다고 했다. 왕국민들은 마귀와 마주친 사람만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다고 생각했다.

백금발, 벽안을 타고난 오시니스 중에 마귀와 마주쳐 기억 상실증에 걸릴 만한 사람이 있을까.

그들은 타고난 신성력이 어마어마했고 그것은 아무리 마귀 떼 수만 마리가 쳐들어와도 어제 먹은 저녁조차 까먹게 하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기억 상실이라니. 율란은 처음에 니키엘의 신성력 저하를 의심했다. 언젠가 레이먼에게 소문을 옮긴 폴락 백작처럼 말이다.

실제로 니키엘이 발을 헛디뎌 제 품에 안겼을 때 역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었다. …아늑하고 안정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뿐. 그러나 아예 신성력이 없다고 단정하기에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전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고도 안온한 공기가 니키엘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신성력의 상징이라면? 교황에게서 나는 몰약의 악취와 그전까지 니키엘에게서 맡을 수 있었던 썩은 향수 냄새와는 다른 싱그러운 향취.

율란은 자신이 니키엘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공,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어서 짐을 살피지 못할까!”

율란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늙은 여우가 깽깽거렸다.

율란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늙은 여우에게 묵례했다. 불안에 젖은 눈동자가 진자 운동을 하듯 휙휙 움직이는 꼴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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