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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30)화 (30/130)

30화

게다가 그것들은 욜록과 함께 나타났다. 일반적인 경우에 있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욜록은 히오칸이 파 놓은 땅굴을 다져 지하 도시 통로로 만들기를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오칸과 공생 관계인 것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 지능을 갖고 있는 욜록과는 달리 히오칸은 정말 곤충과 다를 바 없는 지능이기 때문에 공생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요컨대, 개미와 진딧물 정도로 신뢰를 쌓아 온 사이도 아니라는 얘기다.

욜록 역시 저들을 인식하지 못한 히오칸에게 세력권을 어지럽혔다는 오해를 받기 싫은 것인지 잘 숨어 다니다가 그들이 지나간 땅굴이 어느 정도 굳어지면 그제야 통로로 사용하고는 했다.

그러니 히오칸의 바로 뒤를 쫓는 욜록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을뿐더러, 히오칸이 욜록의 냄새를 맡고도 공격하지 않은 채 곧장 일직선으로 수도를 향해 달려오는 일이 일어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수도 근처에 히오칸의 먹이가 될 만한 돌무더기나 돌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능이 없는 히오칸이 한눈팔지 않고 수백 킬로미터를 곧장 달려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히오칸도 가끔은 돌이끼가 아닌 생명체를 먹기는 하지만, 가뭄에 굶주려 인명을 노렸다고 보기에는 수도 라시리스의 주변에는 인구가 많은 여러 소도시들이 있다.

그런데도 방어막을 땅 밑으로 뚫어 신성력으로 떡칠을 해 둔 궁전 근처까지 왔다는 얘기는 이들에게 정해진 사명이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곤충의 지능을 가진 히오칸과 무리 생활 외에는 관심이 없는 욜록에게 사명을 줄 수 있을까.

“지적 생명체의 탄생….”

니키엘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다. 아주 낮은 목소리가 귀 뒤에서부터 들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전하.”

니키엘은 깜짝 놀라 뒤로 훅 넘어갈 뻔했다. 누군가의 단단한 팔이 그런 니키엘의 허리를 감아 받쳐 주었다. 그러자 연쇄 작용으로 두터운 가슴팍과 쇄골이 니키엘의 뒤통수에 닿았다.

등골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니키엘은 삐걱거릴 것 같은 고개로 상대를 뒤돌아보았다. 율란 발트였다.

“아, 대공….”

“간만에 뵙습니다, 전하.”

율란은 도서관에서 니키엘을 겁박한 적이 없다는 양, 공식적인 만남은 오랜만이라는 말을 했다. 니키엘은 짜게 식은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쩝, 입맛을 다지다가 대답했다.

“격조했소. 대공도 안녕하시었소.”

“지적 생명체라,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러나 율란은 니키엘의 마주 인사를 물 흐르듯 무시한 채로 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다시 묻는 어투가 무척이나 단단하여 쉽게 넘어가 주지 않을 것처럼 들렸다.

니키엘은 입꼬리만 당겨 웃으며 말했다.

“음?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 저녁 식사 시간까지 귀궁하지 않으면 왕자궁 담당 시종이 바가지를 긁어서 말이오. 이만 가 봐야겠소.”

그러고는 자연스레 몸을 돌려 왕자궁으로 가는 척하려고 했다.

애초에 니키엘이 알고 싶었던 것은 출몰한 마물들이 총 몇 마리인지, 대략적으로 어떤 종들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다였다. 알고 싶은 건 다 알아냈으니 얼른 토끼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듯싶었다.

‘대체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야. 어딜 나가기만 하면 마주치네.’

그러면서도 속으로 짜증이 솟구쳤지만 나름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러나 니키엘은 인공 새집을 이용하는 조류의 번식 생태를 연구하거나, 소의 사회성에 대한 행동학적 특성을 탐색할 수는 있어도 표정 관리는 잘되지 않는 타입이었다.

담당인 한 교수가 유독 거지 같은 성격이긴 했지만 그가 니키엘을 심장마비로 돌연사시킬 정도로 좆같이 굴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니키엘의 얼굴은 좋을 때도 시종일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싫을 때는 조금 더 쓰레기를 마주친 듯 구겨지고는 했기 때문이다.

율란은 시시각각으로 더러워지는 니키엘의 표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왕자궁 쪽으로 가는 길목은 안전상 이유로 임시 폐쇄되었습니다. 모셔다드리죠.”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바래다준단 것들이 많지? 이것들이 누굴 산책이면 환장하는 뽀삐로 아나…. 니키엘은 짜증이 난 상태로 사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마물 때문에 바쁜 대공을 붙잡을 수는 없소. 안 그래도 공사가 다망하실 터인데 나까지 더해 줘야 쓰겠나. 알아서 갈 테니 궁의 경비대원 한 명만 붙여 주면 될 일이오.”

니키엘의 말에 율란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솟았다. 가당찮은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저번부터 골 때리는 말만 하십니다. 여러 번 말하게 만들지 마시고 그냥 움직이십시오. 시간 남아서 모셔다드린다는 것도 아니니.”

입 닥치고 걸으란 말을 존댓말로 하고 있는 율란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대공은 원래 이렇게 무례하시오?”

“무례가 뭔지 아는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율란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옆에서 약간 뻘쭘한 표정으로 기립해 있던 붉은 머리에게 말했다.

“베네딕, 서쪽 숲에 연기가 오르던데 아마 히오칸의 사체를 처리 중일 거다. 가서 욜록은 태우지 말고 땅에 묻으라고 전해.”

욜록의 사체는 태우는 즉시 작은 구더기들로 변해 버린다. 해충으로 변해 주변 나무들을 갉아먹기 일쑤이니, 그 사체는 그냥 도로 땅에 묻어 그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것이 좋았다.

땅에 묻으면 그 땅은 향후 10년간 비옥한 토지로 변하고는 했다. 그 때문에 간간이 농민들이 욜록을 잡으러 갔다가 되레 잡혀 목숨을 잃고는 했다.

욜록의 사체는 그런 효용성 때문에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니키엘은 올바른 사체 처리 방법을 알고 있는 율란을 흘끗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하악을 가진 남자는 베네딕이 고개를 살짝 숙여 명을 받든다는 몸짓을 하고 떠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쪽을 보지 않는 채였는데 경고를 하듯이 음이 낮아져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 돋게 하는 목소리였다.

“세 번째 묻는다. 지적 생명체의 탄생, 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

와, 이 새끼. 주변에 사람 없으면 바로 말이 짧아지네? 니키엘의 눈썹산이 삐죽 솟았다.

니키엘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율란의 짐승화가 늑대라는 걸 기억해 냈다. 한번 잡은 먹이는 잘 놓지 않는 늑대의 습성에 대해 떠올렸다.

제 쪽에서 포기하는 것이 빠른 일 같았다. 니키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뭐…. 별 뜻 아니었소. 히오칸이 욜록을 꼬리에 달고 다닐 정도로 온순한 마물은 아니지 않소. 그 정도는 왕국민들 모두가 아는 얘기고….”

그렇다. 그 정도는 왕국민들 모두가 알 만한 얘기였다. 그러나 그걸 말한 것이 니키엘이라는 것이 문제지. 율란은 백금발의 벽안을 한 미인을 내려다보며 눈매를 좁혔다.

니키엘은 유독 마물을 무서워했다. 신성력을 넘치게 갖고 태어나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모기형 마물인 넨에게조차 물린 적 없을 텐데도 불필요하리만큼 마물에게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그 공포심은 아무리 의심이 없는 이가 보아도 수상쩍을 만큼 비정상적이었다. 니키엘은 아예 마물에 대한 화제 자체를 듣기 싫어했다.

남들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마물에 대한 지식들도 전무했다. 이를테면 욜록의 사체를 묻으면 그 주위 토양이 비옥해진다는 평민 사이에서까지 유명한 일들을 말이다.

물론 마물에 관심 없는 왕족이나 귀족도 많다. 하지만 니키엘은 그래서는 안 됐다. 그가 이 왕국에서 가장 드높은 신성력을 갖고 있는 이니까 말이다.

솔리우스교의 법황조차 니키엘 만큼 대단한 신성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니키엘의 신성력은 오시니스의 건국 초창기에 태양신이 건네준 바로 그 신성력이었다. 전지하고 전능한 바로 그 태초의 힘. 니키엘이 갖은 신성력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신성력을 갖고도 제게 티끌만큼 해를 끼치지 못하는 마물을 무서워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마물이 니키엘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주변부의 지형을 무너트리거나 폭풍을 일으켜 니키엘을 간접적으로 공격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니키엘은 그걸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니키엘의 공포에는 혐오가 섞여 존재했다. 게다가 율란에게는 한 가지 기억이 더 있다. 니키엘이 사교계에 나온 이듬해, 그 나이 또래와 사냥을 하러 간 니키엘 일행은 마물을 마주치고야 말았다.

마물은 니키엘을 건들지 못했으나 겁을 먹은 니키엘이 온갖 짐승들을 신성력으로 끌어모아 제 방패로 썼다.

숲에 살던 미물들이 수없이 마물에게 짓밟힌 사건이 있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왕궁 숲을 관리하는 사냥부 장관이던 레이먼은 수많은 작은 짐승들이 죽어 있던 꼴을 보고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했다고 한다.

네 명의 수장들은 그 본체가 짐승인 만큼 말 못하는 짐승들을 아꼈다. 사냥을 하는 건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밀접한 일인지라 어쩔 수 없지만, 니키엘이 그날 자행한 것은 명백한 학살이었다.

수장들은 그 이후부터 니키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끊어 버렸다. 미약하나마 갖고 있던 기대들을 말이다.

그런 주제에 뭐? 왕국민들 모두가 알 만한 얘기라고?

“…….”

율란은 대답 없이 니키엘의 벌꿀색 속눈썹 아래 깊게 잠긴 호수처럼 푸르른 눈을 바라보았다.

한낮의 햇빛이 제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양 니키엘에게 전부 쏟아지는 것처럼 빛나는 외모였다.

빛이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니키엘의 미모는 아스라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그는 율란의 의혹과 의심을 모르는 척 넘기려 하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본인이 인식하지도 못한 채 입술을 깨물며 제 초조함을 이쪽에 여지없이 보이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물었다가 놓을 때마다 살짝 젖은 살성이 빨갛게 변하는 걸 보는 건 율란으로 하여금 불쾌한 기분이 들게 했다.

꼭 명치께가 묵직하고 무언가 얹힌 듯 답답했다. 율란은 쯧, 혀를 찼다. 개수작 떨지 말라고 경고하려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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