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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29)화 (29/130)

29화

루시안은 마물을 처리하러 이곳으로 오는 길에서도, 마물을 사냥할 때도, 마물을 사냥하고 뒤처리를 할 때도 계속해서 니키엘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니키엘의 벌꿀색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옅은 연꽃의 향을 맡을 수 있었던 것과 푸른 호수 같은 벽안이 저를 올려다볼 때 느꼈던 희미한 희열 등을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반복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사이 지카리가 공중을 두어 번 선회했다. 욜록의 처리도 끝났다는 얘기였다. 레이먼이 땅에 박아 둔 칼을 뽑아 들었다.

거대한 칼을 뽑아 든 그가 삽시에 기색을 부풀리며 말했다.

“우리 개새끼는 끝까지 안 나타나네. 내가 그 이유를 꼭 좀 듣고 싶은데 말이야.”

분홍빛 조개껍질을 박아 둔 듯 빛나던 니키엘의 손톱 따위를 떠올리고 있던 루시안은 레이먼의 말을 듣고 두 눈의 초점을 흐렸다.

거대한 순록과 늑대가 싸우는 장면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저 둘의 신경전에 휘말리면 가뜩이나 쇠약한 신경이 다 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루시안은 오늘 너무 많은 외출을 감행했다. 뱀 굴처럼 어두운 제 연구실로 돌아가 마법학 책을 뒤적이다가 양피지로 옮겨 적는 것에 매진하고 싶어졌다.

루시안은 파리한 안색으로 레이먼이 들리지 않게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레이먼의 말 대로 마물을 처리하는 곳에 율란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율란 혼자의 일이 될 것이다.

자신은 그저 원인이 나오기 전까지는 연구실에 처박혀 니키엘에 대한 생각을, 아니 요즘 공들이는 마법 연구를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눈앞에 바로 마물이 출몰했는데 저는 보지 못한다니.

단념했음에도 불구하고 니키엘은 피눈물 나는 심정이었다. 기깔나는 연구 시료들이 도착했는데 우리 연구실 것이 아니라 옆 연구실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군자는 때를 아는 법. 니키엘은 오늘의 후퇴가 내일의 백보 전진임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나댔다가는 루시안이 저를 경멸하듯 볼 것은 물론이거니와, 니키엘 저 자신의 목숨도 보장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맹수의 아가리에 뛰어드는 꼴이 아니겠는가. 니키엘은 개죽음만은 면하고 싶었다.

죽음을 겪는 것은 딱 한 번으로 족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완전히 포기하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당장 본궁으로 향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귀동냥 정도는 해도 될 것이라 여겼다.

니키엘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려면 일단 저를 연행하듯 에스코트 중인 두 어벙 군바리를 상대할 필요가 있었다.

“이보게, 경들.”

“말씀하십시오, 전하.”

평소에는 코 파면서 조는 거 다 아는데 루시안이 한 번 왔다 간 뒤로는 군기가 바짝 들어 대답하는 꼴이 매우 눈꼴사나웠다.

‘아주 그냥 나를 좀 그렇게 섬겨 볼 일이지. 공작 말은 철썩 같이 듣고 왕자 말은 개떡이다 이거야?’

니키엘은 왕자궁에서 근무하는 주제에 저를 무시한 두 경비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사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 전, 투르운 공이 나를 극진히 뫼셔라 명한 건 알겠지마는 이제 이곳은 왕자궁 뜰 안이고 나는 이미 안전하네. 그러니 이렇게 죄인 연행하듯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그렇지만 전하,”

“아니면. 나랑 뭘 어떻게 해 보고 싶어서 이러는 겐가? 그러고 보니 자네들 접촉이 수상쩍어. 그냥 안내하면 될 걸 왜 이렇게 팔짱을 깊게 끼냐 이 말이야. 자네들은 나와의 궁정 연애라도 꿈꾸고 있는 겐가?”

“다, 당치 않으십니다…!”

“그럼 이제 놓으라니까!”

그 말에 놀란 경비병들이 니키엘에게 끼고 있던 팔짱을 쑥 빼냈다. 루시안을 향한 충심으로 니키엘을 연행하다시피 모셔 온 것인데 니키엘과의 염문이 나면 예비 정혼자 중 한 명인 루시안을 볼 면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왕궁의 경비병은 언제 어떻게 승진하여 금위대에 들어갈지 모를 일인데 그렇게 되면 높은 분들을 자주 뵐 수 있다. 루시안 역시 그 높은 분 중 하나이니 껄끄러워지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딱 봐도 실력 없어 보이는데 금위대를 꿈꾸는 것도 같잖지만, 주인도 몰라보고 루시안 말부터 듣다니. 이것들이 빠져 가지고 옆 사단 병장을 지 짝사수로 여기는 꼴이랑 뭐가 달라.’

니키엘은 더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오늘치 기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운동을 하여 체력을 기른 탓에 전보다 나은 형편이었지만, 원체 갖고 있는 체력이 한미하기 그지없어 근육량을 늘려 보아도 실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좀처럼 길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낮잠을 자든 간식을 먹든 해야 하는데 니키엘에게는 서쪽 숲속에서 일어난 일이 더욱 중요해 보였다.

그러니 어서 이 떨거지들을 털어 버리고 본궁으로 향해야 했다. 체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투르운 공에게 맡겨 둔 손수건이 있네. 자네 둘 중 한 명이 그걸 찾아와 주면 좋겠군. 난 내 방에서 좀 쉬고 있을 테니 말이야.”

거의 루시안의 팬처럼 보이는 떨거지들이 니키엘의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두 명은 ‘제가 가겠습니다!’와 ‘아닙니다, 저는 심부름을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같은 쓸데없는 경쟁심을 불태우며 니키엘 앞에서 핏발이 선 채 토로했다.

니키엘은 한심하다는 어투로 둘 다 다녀오라고 대답한 뒤 손을 내저었다. 경비병들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저놈 새끼들 둘 다 모가지다. 이름도 외워 놨어.”

오후 교대가 마치지도 않았는데 궁을 비웠노라고 폴에게 찌르기만 하면 궁내 시종 간 정치 공작의 일인자인 폴이 알아서 다 해 줄 것이다.

니키엘은 폴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는 기분으로 바로 본궁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니키엘이 향하는 곳은 본궁에 있는 사고 처리과였다. 궁내청장 산하 기관 중 하나인 부서로 궁내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 사고들을 관리하는 과였다.

그곳에 가면 마물들이 모두 몇 마리가 출몰했는지, 대략적으로 어떤 종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알아내도 큰 수확일 것이다. 그 후에는 얌전히 왕자궁으로 돌아와 궁에 출몰한 종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들의 생활사에 대한 리포트에 한 줄 글귀를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설렌다. 어떤 애들일까. 땅 울음이 이는 걸 보면 땅을 파먹고 이동하는 종 같은데….’

니키엘은 마물에 대한 잡지식들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개했다. 괜히 아까처럼 수풀 쪽으로 걷는 짓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사람이 지나다니는 대로 쪽으로 걸어야 이런 에피소드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주인공의 민폐 크리티컬을 피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이곳에 적응한다고 해도 니키엘은 이세계가 소설 속 세계임을 잊지 않았다. 정해진 서술과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굵직한 사건들은 다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이때쯤이면 니키엘의 민폐스러운 행동에 수장들이 휘말려 고생을 하다가 전우애를 다지는 뻔한 에피소드가 나와 주게 되어 있다. 전개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최대한 인적이 많은 길로 다녀 사고 발생률을 줄여 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게다가 니키엘이 향하는 곳은 본궁. 마물들이 쳐들어오지 못하게끔 주교의 축언을 받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왕자궁도 마찬가지로 축언을 받은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궁과 궁전 사이를 잇는 대로의 보도 벽돌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궁전 근처에 마물이 나타났다고 해도 바로 본궁으로 쳐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궁에서 꽤 멀리 떨어진 서쪽 숲으로 들어왔겠지.

니키엘이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온통 시꺼멓고 커다란 천막 같은 것이 걸어다니길래 흠칫 놀랐던 니키엘은 그것이 검은색 망토를 뒤집어 쓴 율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덥지도 않나…. 왜 저렇게 검은 천을….’

그의 키가 워낙 장대하고 덩치 또한 우람한 탓에 망토로 쓰인 천만으로도 성인 여성 세 명의 옷을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니키엘은 그가 무표정으로 어딘가로 향하는 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지금 저이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게다가 율란의 성격은 레이먼 만큼이나 나빴다. 마주치면 피곤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니키엘이 아예 몸을 숨겼다가 그가 사라지면 다시 사고 처리과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각하, 히오칸 세 마리와 욜록 스무 마리였습니다.”

붉은 머리를 한 남자가 다가와 율란에게 짧게 보고했다. 니키엘은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히오칸 세 마리라고? 히오칸은 보통 성체 한 마리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마물이다. 그들의 크기, 즉 길이가 무척이나 크기 때문에 땅속에서 꼬리라도 얽히게 되면 굶어 죽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성체가 아닌 새끼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성체 히오칸은 새끼들과 함께 사냥을 다니지 않는다.

그들의 사냥법은 극히 단순하기 때문에 어린 새끼들에게 따로 가르칠 만한 사냥법 따위가 없다.

그들은 유전자에 새겨진 명령에 따라 사냥을 한다. 때문에 새끼들의 독립 또한 빠른 편이었다.

성체의 크기가 족히 10m를 넘는 반면, 막 태어난 새끼는 50cm가 채 되지 않는데도 새끼가 태어나 3m가 되기 전에 독립하여 다른 영역권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것은 여러 문헌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본 다음 니키엘이 내린 결론으로서, 마물들의 생활사와 생태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오시니스 사람들은 모르는 내용이었다.

‘근데 세 마리라니. 걔들이 동시에 수도로 왔다고?’

니키엘은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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