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실제로 지카리는 종종 여름만 되면 다른 새들의 구애를 받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새라는 날짐승의 특성상 암컷은 구애를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지카리는 늘 그들의 선택을 받고는 했다.
새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편한 날짐승에 가까운 놈인데 암컷 새들의 구애가 귀찮아 그사이에 끼지도 못하니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이었다.
때를 보니 딱 그럴 시기가 왔노라고 혼자 생각하며 루시안은 그의 말을 모조리 무시했었다.
그리고 오늘.
‘극도의 해방감….’
루시안은 당시의 지카리가 울부짖던 그 말이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늘 저를 괴롭히며 온몸을 들끓게 만들던 나시우의 저주가 장마철 소낙비 아래 서 있는 것처럼 쏴, 하는 느낌과 함께 모조리 씻겨 나가는 기분.
그것은 극도의 해방감이라는 언어로 한정하기에는 아까울 만큼 짜릿한 느낌이었다.
그의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루시안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아야 했다.
넘어지는 그를 잡아 주던 그 몇 초 사이에 이제 슬슬 땅굴을 파고 들어가거나 인적이 드문 호숫가에 잠겨 뱀으로 변모한 뒤 광증의 똬리를 틀어야겠구나 생각했던 루시안은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씻겨 나가는 고양감을 겪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극치의 해방감에 아랫배까지 묵직해질 지경이었다. 왼쪽 허벅지 부근의 바지춤이 팽팽해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루시안은 이를 악물어 충동을 이겨 냈다. 니키엘에게 손을 뻗어 그의 햇살 같은 색의 머리타레에 손을 찔러 넣고 뒷덜미를 제게 당겨 오고 싶다는 그런 충동을. 아니, 루시안은 그 순간만큼은 더 큰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그대로 행했다면 니키엘의 모든 것이 얼마나 달큼한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런 충동은 니키엘의 품 안에서 꽥꽥거리던 지카리에 의해 잦아들었다.
제 둥지를 지키는 새처럼 루시안에게 경고의 울음 내뱉던 지카리 때문에 루시안의 혈류를 타고 흐르던 뱀의 본능이 불쑥 치고 들어왔다. 영역을 침범당한 느낌이 들어 뱀의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새와 뱀의 사이는 좋지 못하다. 지카리처럼 강대한 맹금이 지척에서 경고하는 소리에 루시안의 동공도 세로로 찢어졌다. 송곳니까지 쑥 자라기 전에 니키엘이 가로막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꽥꽥거린 적 없다는 듯이 지카리는 니키엘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대체 니키엘과 언제 어떻게 만난 것인지 연약하고 작은 아기 새처럼 니키엘에게 있는 내숭, 없는 내숭 다 떨고 있던 지카리를 보고 루시안은 기가 막혔었다.
‘새 새끼가 저렇게 조용한 건 또 처음 보는군.’
인간인 지카리 그리프 후작으로 돌아갔을 때나 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이지 새로 변한 지카리는 시끄럽고 성가셨다.
루시안의 연구실을 헤집어 놓는 커다란 새가 얼마나 짜증 났던가. 게다가 그 새 새끼는 저보다 다섯 배는 큰 마물의 심장을 쪼는 흉새이다.
그런데 갓 둥지를 떠난 아기 새처럼 니키엘의 품 안에서 고롱고롱거리다니. 루시안은 그 광경을 보고도 믿기지 않아 자꾸 그쪽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잡아 둘 수밖에 없었다.
깡말라 볼품없다고 생각했던 니키엘은 지난 시간 동안 체력 단련을 열심히 했던 것인지 가슴 근육이 조금 올라붙은 상태였는데, 지카리는 그 품으로 파고들어 제 부리를 비벼 대기도 했다.
그 가증스러움이 낯설어 저도 모르게 뚫어지게 바라보다 보면, 니키엘의 가슴을 빤히 응시하는 모습밖에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니키엘은 남성이지만, 오시니스의 역대 백금발과 벽안들은 그 성별과 상관없이 모두 수장들과 혼인을 치렀다.
아무리 루시안과 다른 수장들이 니키엘을 경멸스러워한들, 그들의 인식 속에 니키엘은 예비 정혼자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 이의 가슴을 빤히 바라봤다니. 루시안은 제가 그러고도 당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는 그의 품에 뻔뻔하게 안겨 있던 지카리를 무언으로 지탄하기 위해서였는데 나중에는 니키엘의 가슴팍을 시선으로 더듬었던 것을 부인하기가 어려웠다.
‘…전하께서 체력을 기른다는 소문은 알음알음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루시안은 그런 생각 자체가 굉장한 불경이며 니키엘을 상대로 그만큼의 신경을 쏟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다.
잠시 뒤, 루시안의 그런 생각들은 모두 잊게 해 주겠다는 듯 멀리서 굉음이 일었다.
마물이 틀림없었다. 나시우의 저주는 각 수장들로 하여금 마물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각 수장들 마다 그 능력이 약간씩 다를 뿐 기본적으로 마물의 출현 정도는 먼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루시안은 두 번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은 니키엘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지카리도 마찬가지였다.
굉음이 울리자마자 크기를 줄여 니키엘의 품에서 빠져나간 지카리는 창공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올랐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루시안 역시 니키엘을 안아 들려다가 멈칫했다. 그와 닿는 면적을 늘리면 그대로 아까와 같은 황홀한 신성력이 쏟아지듯 흘러들 것 같았다.
그건 위험했다. 루시안은 그 지옥 같은 기적을 알고 싶지 않았다. 한번 발을 담그면 헤어 나올 수 없는 황금의 늪에 잠기는 것처럼 괴로울 것이다.
그들은 니키엘 없어도 살 수 있었다. 언젠가는 미치겠지만 네 명의 수장들은 저마다 모두 그에 대한 각오를 굳힌 참이었다. 굳이 그 각오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능하면 자신의 대에서 나시우의 저주를 끊고 싶으니 후대를 생산하지 않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욕심 많은 각자의 가문에서 그걸 두고 보고 있지는 않겠지만 왕자와 수장의 침실로 들어와 억지로 후사를 생산하게 만들 수 있는 가신은 없다.
강제로 니키엘과 결혼을 시킬 수는 있다고 한들 잉태의 문제는 부부간의 일이니 말이다.
수장들은 니키엘의 천박함과 왕의 음습함을 느낀 순간부터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러니 니키엘과 닿아 신성력을 흡수하여 그 위대함이 어떤지 절절하게 알고 싶지 않았다.
루시안은 불경이라는 걸 알면서도 니키엘을 제 어깨 위에 짊어 메듯 들어 올렸다.
‘…이래도 감각이 여실한 건 마찬가지군.’
온몸에 차오르는 환희를 무시하려고 노력하느라 이마에 핏발이 설 지경이었다. 루시안은 다리 근육을 부풀려 최대 속도로 달렸다.
그러고는 왕자궁에 그를 내려 두고는 다시금 서쪽 숲을 향해 달렸다. 차라리 새벽까지 마물과 싸우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그대로 니키엘의 손목을 잡아끌어 품 안에 넣고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싶었다. 그의 신성력에 닿을 때마다 온몸의 비늘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저는 지금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기분 좋은 뱀이 쉭쉭거리듯 말이다. 니키엘은 루시안으로 하여금 위험한 본능을 깨우려는 존재였다.
그에 비하면 마물은 단순했다. 죽이면 끝이니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도착한 현장에는 레이먼이 먼저 와 있었다.
레이먼은 루시안의 상태가 좋아 보여 의아한 듯했다. 루시안은 레이먼을 흘끗 바라보았다.
잦은 광증으로 인해 레이먼의 눈 밑은 검게 물든 채였다. 잠을 자는 즉시 광증이 몸을 점령할까 두려워 수장들은 모두 불면증을 친우처럼 여겼다.
레이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워낙 화려하게 생긴 미남이라 티가 나지 않을 뿐이지 눈가의 거뭇한 기미는 지울 수 없는 불면의 흔적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루시안은 어쩐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의 자신은 그 기미라는 것이 사라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때깔이 곱더니….’
루시안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채찍을 빼 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새가 숲이 떠나가도록 괴음을 내며 발톱으로 욜록의 사지를 찢는 중이었다. 기운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지 창공에 포효하는 소리가 꽤 시끄러웠다.
루시안도 나머지 채비를 했다. 가죽에 녹인 유리물을 부어 만든 가시 채찍은 루시안의 손에 알맞게 감겼다. 두두두 거리는 땅 울음이 들렸다.
레이먼이 루시안의 왼편에서 웬만한 성인 여성 키만 한 칼을 가볍게 든 채로 전방을 주시 중이었다.
무기를 정비한 두 사람은 멀리서 쿠궁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허벅지 근육을 부풀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수 있게끔 방비한 두 남자는 거대한 히오칸이 땅을 뚫고 이쪽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공중에서 지카리가 날갯짓으로 돌풍을 일으켜, 흔적 기관으로 남아 있는 두 눈 때문에 후각으로만 상대의 위치를 가늠하는 욜록 무리를 훼방 놓고 있었다.
“개새끼는 왜 안 보여.”
레이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흙먼지 나는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율란을 찾는 것이었다.
저들은 생고생을 하고 있는데 율란이 보이지 않으니 짜증이 난 듯했다.
만약 그가 일찍 도착했어도 레이먼은 다른 시비를 걸었을 테지만, 루시안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그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수도까지 마물이 온 것은 처음이니 원인을 찾고 있을 겁니다. 그보다, 제가 선공할까요.”
“아니, 내가 가지.”
레이먼이 거대한 검을 허공에 휘두르자 검기가 날아가 땅을 갈라놓았다.
찐득한 케이크를 자른 듯 단면이 다 보일 정도로 잘리자 그 속에 숨어 이쪽으로 오고 있던 히오칸이 끼이익, 하는 비명을 질렀다. 다리 몇 개가 잘린 듯했다.
“명중은 못 하셨습니다.”
“공, 나도 눈은 있소.”
레이먼이 짜증 난다는 듯 대답하고는 공중을 박차 올랐다.
그는 그대로 검을 땅에 꽂듯 손잡이를 아래로 하여 잡고는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