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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26)화 (26/130)

26화

그와의 접촉으로 광증을 가라앉혀야만 하는 수장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멸해 마지않는 니키엘에게 은혜를 입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부친을 닮아 간악한 구석이 있는 니키엘은 분명 그를 계기로 수장들을 제 입맛대로 주무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장들은 늘 글자 그대로, 앓느니 죽는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니키엘은 꽤 멍청한 구석이 있었고 완전히 악인으로 보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문제는 그의 뒤에 있는 왕이다. 왕은 전면에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걸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그의 방식은 늘 은밀하며 지속적이었다. 니키엘이 주는 신성력으로 광증을 씻어 낸다고 해도 그 후에 왕이 펼쳐 둔 정치적 그물에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가서 니키엘을 멀리한다고 해도 이미 광증 없는 삶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지를 알게 된 수장들은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광증에 대한 자유가 얼마나 달콤할지 아예 맛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네 가문의 직계들 중, 저주는 그 대에 태어난 모든 이들 중 수장이 될 만한 아이를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몇 번째로 태어났든 자라 성인이 되면 수장이 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저주는 어서 익숙해지라는 듯 그들의 어린 시절부터 끈질기게 달라붙어 그들을 괴롭히고는 했다. 누이가 선대 수장이었던 레이먼조차 어린 시절부터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고는 했다.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점찍어진 아이들은 미열처럼 광증을 앓으며 자란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예고편이었다는 듯이, 그들을 은밀히 괴롭히던 나시우의 저주는 그들이 각 가문의 수장 자리를 임명받고 난 뒤부터는 아예 골수에 새겨지듯 잔인한 통증을 일으킨다.

저만 아프고 말 것이면 그들은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시우의 저주는 힘을 추구하여 점점 속부터 곪아 들어간 각 가문에 맞지 않게 항상 한 세대에 한명쯤은 정의로운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면 그 아이는 내정되듯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진흙 속에서 피어오른 연꽃처럼. 그들은 수장이 된 이후로도 욕망에 눈이 멀어 아귀 떼처럼 달려드는 제 친지들 사이에서 홀로 고독해야만 했다.

그렇게 주변에 사랑할 것들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수장들은 광증 그 자체보다는 광증 때문에 자신이 파괴한, 또 파괴할 무언가가 안타까워 미쳐 갔다.

발작하듯 짐승으로 변모하게 되면 주위에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싶은 욕구에 휩싸인다.

그것은 덩굴처럼 변모한 짐승의 몸을 옭아매는 것이다. 이성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면 그들에 비해 연약한 것들이 너무 많이 다치고 죽어 있음을 볼 때마다 인간이 갖추고 있던 무언가가 조각조각 갈라지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그런 광증을 이겨 내기 위해 수장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왔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니키엘에게 매달리라니.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때문에 루시안은 아예 더러운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연회장 기둥 뒤편으로 숨어든 참이었다.

레이먼을 모욕 준 니키엘이 그 근처를 향하고 배회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불운한 쪽은 지카리였다. 연회 같은 사교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는 지카리는 그날따라 왕의 완곡하고도 끈질긴 명령에 의해 불편한 얼굴로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참이었다.

실어증을 핑계로 왕이 주관하는 모든 행사를 불참하던 지카리는 토벌 대회를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왕에게 붙잡혀 연회에 대한 참석을 강요받았었다.

평소 지내던 서부 레달 지역의 영지에 있었다거나 새로 변하여 사라졌다면 왕의 사신이 그를 찾지 못하였을 텐데, 토벌 대회가 끝난 뒤 수도로 귀환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왕이 그를 붙잡은 것이다.

레이먼과 율란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에 비해 루시안과 지카리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들 관계에서 우정은 없었기 때문에 루시안은 제가 숨은 기둥 뒤가 제일 눈에 띄지 않는 자리라는 걸 말해 줄 정도의 의리는 없었다.

그리고 불운한 지카리는 만취한 니키엘을 마주했던 것이다.

‘이게 누구야! 후작이네?’

니키엘은 꽃과 같이 웃었다. 그의 웃음은 실로 아름다웠다. 알맹이에서 악취가 나서 그렇지.

지카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요령 있게 피하는 루시안과 말로 상대를 죽이는 레이먼, 살기를 잔뜩 내뿜어 접근을 용이치 못하게 만드는 율란과는 달리 지카리는 사회성이 약간 떨어져 한번 이런 자리에 오면 니키엘의 표적이 되고는 했다.

‘…….’

니키엘이 저를 부르는데도 지카리는 대답은커녕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만취한 니키엘은 상관없이 지카리의 어깨에 제 이마를 비볐다.

기둥 뒤에서 이른 시기에 오크 통에서 꺼내진 터라 아직 어려 떫은맛이 살짝 나는 브랜디를 마시고 있던 루시안은 놀라 굳어 버렸다.

니키엘의 그런 접촉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남창의 동정으로 장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니키엘의 부왕은 수장들과 니키엘 사이의 접촉을 금지했다.

니키엘은 그 말을 아주 잘 따랐다. 그것이 그가 갖은 유일한 열쇠였으니. 그런데 제가 먼저 닿아 온 것이다.

지카리의 두 눈 역시 전에 없이 커졌다. 야생에서 산새들과 지낸 시간이 오래되어 짐승 특유의 무표정을 지을 때가 많던 지카리라고 해도 그때만큼은 깜짝 놀란 사랑스러운 소년처럼 보일 정도였다.

지카리가 덩치는 약간 더 컸고 두 사람의 키는 엇비슷했기 때문에 니키엘이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지카리의 어깨에 이마가 닿을 수 있었다.

니키엘은 그대로 이마를 문지르며 지카리를 껴안으려고 했다.

‘사랑스러운 후작, 나를 좀 안아…. 으억!’

그러나 그 포옹 시도는 지카리가 니키엘을 퍽 소리 나도록 밀친 나머지 불발되었다. 니키엘은 허우적거리며 느리게 중심을 잃었지만 지카리는 잡아 주지 않았고 결국 대리석 바닥에 엉덩이를 찧어야 했다.

지카리는 토악질이 나온다는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루시안은 만취한 니키엘이 소리를 치기 전에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니키엘을 수습하게 했다.

그러고는 지카리를 따라나섰다.

‘거기서 그런 식으로 뿌리치면 어떡합니까. 그냥 피하면 될 일을 빌미를 주다니.’

루시안이 후원으로 뛰쳐나간 지카리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지카리는 후원 뒤에 세워진 버찌나무를 부여잡고 토악질을 해 댔다.

그러고는 토기에 새빨개진 눈가로 이렇게 말했었다.

‘이상하다, 저것의 기운이. 구토감, 저것이 나를 만진 순간.’

전서구처럼 목적어만 말하는 지카리의 화법을 익히 알고 있던 루시안의 미간이 사정없이 좁혀졌다.

구토감이 일었다고? 신성력과 닿았는데?

그때까지 루시안은 내심 기대했었다. 지카리가 황급히 자리를 피한 이유도 신성력에 닿아 황홀경에 휩싸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신성력에 대한 수장들의 기록은 모두 그러했으니까.

‘수천 개의 부드러운 날개들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

‘찬란한 금빛 물결에 몸을 담그는 느낌.’

‘황홀경, 만족감, 태고로 돌아간 것 같은 안정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안도감.’

미사여구들은 수 없었다. 그들이 겪어 온 생의 고통이 어떤지는 다음 대의 수장들만이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황홀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하나같이 뚜렷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토악질이 날 것 같다니.

루시안은 약간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카리는 야생에서 자란 만큼 감이 좋았다. 그가 니키엘로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나머지 수장들도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을 것이다.

어째서?

니키엘은 분명 벽안에 백금발을 갖고 있다. 넘치는 신성력이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노라고 솔리우스 주교의 인증도 있었다.

신전은 왕국의 비호를 받을지언정 왕족의 진정한 주인은 솔리우스, 즉 자신들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집단이었다. 그들이 왕의 꼬임에 넘어가 니키엘을 향해 거짓 인증을 내주었을 리도 없다.

루시안은 그때 실망한 채로 그대로 연회를 나섰었다. 그런데 니키엘이 죽을 뻔하다 깬 이후로 이상하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개망나니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부인과 바람을 피우다가 남편이 몽둥이를 갖고 오면 그 부인의 치마에 몸을 숨길 비겁한 놈이 웬일로 멀쩡한 차림새로 돌아다닌단다.’

‘왕과의 알현 자리에도 최음 성분이 있는 꽃의 향유를 뿌리지 않았단다.’

‘심지어 책까지 읽는단다.’

소문은 무성했다. 그러나 루시안은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았다.

니키엘은 당시에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깨어났었다. 그런 고비가 오면 사람이 바뀌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많이는 말고 한두 달 정도만 바뀔 것이다.

그러니 니키엘의 그런 고무적인 변화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연구실에 들어온 새 새끼 하나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달라짐, 그, 신성력, 황홀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구실에서 비행 금지라고 써 붙인 표어가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프 후 때문에 붙여 놓은 겁니다.’

‘극도의 해방감, 맑은 기운.’

새는 계속해서 삑삑거렸다. 루시안은 믿지 않았다. 새 새끼가 또 여름철 한때 발정기를 맞이한 새들이 가득한 숲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구애의 노래를 하도 들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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