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마물이 나왔다니. 오시니스의 수도인 라시리스는 신성력으로 쳐진 결계에 보호받고 있다.
마물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별안간 마물이 출현했다는 얘기는….
‘그러고 보니 땅 울음이 지독했지.’
서쪽 숲에 나타난 마물은 결계 밖에서부터 땅을 파 수도 내로 들어왔을 것이다. 거대한 지네형 괴물인 히오칸이 아니면 땅에서 사는 무리형 괴물인 욜록일 수도 있다.
히오칸은 거대 지네형 괴물로 수많은 다리에는 인간의 손처럼 보이는 하얀 다리가 수천 개 달려 있다.
괴상하고 소름 끼치는 생김새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원하는 것은 돌벽에 붙어 돌에 있는 물기를 흡수하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가끔 동물을 먹기는 하지만 덩치에 비하면 적게 먹는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주식이 돌 틈의 물기인 만큼, 히오칸은 대리석으로 만든 궁전에는 가장 큰 적이었다.
히오칸이 휩쓸고 지나간 돌벽은 그대로 금이 가 지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에 있는 마을까지 대지가 무너져 거대하게 퍼진 싱크홀로 주저앉게 된다.
이곳이 신성력에 보호를 받는 라시리스라 다행이지, 마물이 많이 나오는 접경 지역이라면 히오칸에 무너진 민가의 주민들은 개미와 같은 군집형 괴물인 닉시에게 그대로 끌려가 여왕 닉시의 밥이 될 것이다.
두더지처럼 땅속에 사는 욜록도 문제였다. 그들은 퇴화된 눈을 갖고 있어 그 점을 보완하고자 무리 생활을 하는데, 지하에 땅굴을 파고 통로를 만들어 왔다 갔다 움직이며 옛 문명이 만든 녹슨 기계들을 의미 없이 끌고 다니며 인간 흉내를 내고는 했다.
저들끼리 노는 것이 질릴 때면 보름달이 떠 그림자가 환한 저녁에 올라와 인간들을 끌고 가 기계를 사용하게 해 본 뒤 그들이 머뭇거리는 즉시 잡아먹는 습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떤 마물이 출현하든 궁전 내 인명 피해는 확실시되었다는 것이다.
니키엘은 마물을 구경하러 가 보고 싶었지만 지금 움직이는 것은 민폐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건강해져 봤자 루시안 같은 허약 캐릭터한테 달랑 들려 짐처럼 옮겨지는 형편인데.’
게다가 원작과는 다르게 니키엘은 무술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전무했다. 그래도 왕자이니 호신술이라도 배운 것은 아닐까 싶어 폴에게 물어봤더니 청천벽력의 답이 돌아왔다.
‘왕자님이 검술을요? 굳은살 박인다고 깃털 펜도 안 드시는 분이….’
폴은 이번에도 희한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했다. 니키엘은 침통했다. 진짜 니키엘은 이날 입때껏 이뤄 놓은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희대의 놈팡이였다.
이런 때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는 검술이라도 익혀 두었다면 바로 마물을 보러 가 볼 수 있었을 텐데. 니키엘은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검술 선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계기였다.
***
“새 새끼는.”
레이먼의 물음에 루시안이 턱을 살짝 들어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거대한 새가 욜록 한 마리의 양어깨를 커다란 발톱으로 꿰뚫듯 움켜잡고는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높이 오른 다음 갈고리처럼 움켜쥐었던 발톱을 열어 욜록을 추락사시킬 생각인 듯했다.
레이먼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걸 올려다보다가 제 프록코트를 벗어 잘 개킨 뒤 수풀 한가운데 단정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꽃을 베어 문 듯한 싱그러운 미소도, 반듯한 말투도 때려치운 것 같은 태도였다.
레이먼은 다른 세 명의 수장들 앞에서는 가식적인 미소를 집어치웠다. 그들에게 먹히지도 않을뿐더러, 나머지 셋 모두 레이먼의 성격이 무척이나 더럽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레이먼은 그대로 어깨를 풀며 비거리를 계산하는 중이었다. 그의 우람한 어깨 근육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곧 있을 공격에 대비했다. 마물들이 이쪽을 향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그는 루시안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루시안이 뭘 쳐다보는 것이냐 묻는 대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검집에서 검을 빼내어 들며 레이먼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웬일로 상태가 좋아 보여.”
“…그러게 말입니다.”
루시안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니키엘과 마주쳤던 일을 떠올렸다.
‘나, 그, 좋다, 느낌.’
‘어법에 맞게 말씀하세요. 말씀을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앵무새처럼 지껄이지 마시고.’
연구실에 찾아온 새 새끼는 실내에서 비행 금지라고 루시안이 벽면에 걸어 둔 문구도 무시한 채로 날갯짓을 해 댔다.
예민한 시료들이 모여진 곳에 날갯짓에 의한 바람이 이는 것이 싫었던 루시안은 짜증을 냈지만 지카리는 멈추지 않았다.
네 명의 수장들 중 짐승화 되고 나서도 이성을 유지하는 이는 지카리가 유일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평상시 이성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왕국이 제국과 견줘도 꿇리지 않을 만큼 세력과 영토가 드넓은 만큼, 네 가문의 힘 역시 다른 작은 왕국들보다 대단했다.
대공가와 두 개의 공작가, 그리고 후작가에서는 이 권력을 놓치기 싫어했다. 그러니 각 가문의 직계들은 늘 불운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지카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머니로 믿어 왔던 계모가 뻐꾸기 알을 밀어 버리듯 제 친형제들을 다 죽이고 정부와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수장으로 앉히려는 걸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 버렸다.
보통의 아이였다면 거기서 충격을 받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지카리는 달랐다.
많은 새들이 지카리를 도와주었다. 누가 보낸지도 모를 암살자들을 피해 그저 새떼 사이에 숨어 두려움에 떨던 어린 새는 그제야 그 암살자를 보낸 이가 자신의 계모임을 깨달았다.
계모가 보낸 암살자들을 역추적하여 계모를 죽이고 부친의 장례 이후 쭉 공석이던 가문의 수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숨기고 살던 등의 날개를 만천하에 펼쳤으나 실어증을 앓게 되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로 믿어 왔던 사람을 직접 죽인 충격 때문인 듯했다.
암살자들을 피하여 새들 사이에 숨어 산 덕분에 지카리는 늘 본능이 우세했다. 어린아이가 생존력을 기르려면 불필요한 것들을 죽이고 본능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수장들 중 유일하게 짐승으로 변모한 채로도 광증에 휩싸이지 않았다. 그 역시 광증을 앓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제 의지로 가슴 근육을 움직여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너무 어릴 때 당한 충격 때문에 소년과 청년 사이에서 성장이 멈춰져 버린 것이다.
성년식을 치르고도 남은 나이지만 그의 외모는 다른 수장들과는 달리 앳되어 보였다.
남성성이 짙은 외모인 율란과 레이먼, 미인처럼 고운 선의 얼굴을 하고도 건장한 청년이라는 것이 뚜렷한 루시안과는 달리 지카리는 신이 내려보낸 종자처럼 사랑스러운 생김을 갖고 있었다.
니키엘이 맑은 햇빛을 엮어 만든 아마빛 백금발이라면 지카리의 금발은 정말로 황금을 녹여 낸 듯이 화려했다.
휘황찬란한 금발에 고수머리인 지카리는 무표정으로 있어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소년 같아 보였다. 이제 내후년에야 성년식을 맞이하는 어리숙한 아름다움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외모와는 달리 말이 없고 과묵하며 이성보다 본능이 깨어져 있어 손안에 사정을 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니키엘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그다. 루시안은 레이먼처럼 프록코트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두며 지난겨울 있었던 연회에 대해 회상했다.
그날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로 안 그런 척하면서도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왕이 값비싼 마법석들을 불태워 연회를 연 날이었다.
창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왕궁 밖 빈민가인 안연 거리에는 곯은 배를 채우기는커녕 추위에 걸린 동상 때문에 손 발가락이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백성들이 득시글거리는데도 유리창 안 샴페인 잔들은 황금색 액체로 찰랑거리기만 했다.
그해에는 가물고 추워 포도 농사가 유독 잘된 한 해였다. 다른 작물들은 생산량을 채우지 못해 평민들은 세금을 내고 나면 남은 것이 없었지만 왕은 포도 농사가 잘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양조장을 짓게 했다.
노역비를 늦게 지급하여 그 시간 동안 배를 곯은 평민들이 겨울을 이겨낼 체력을 확보하지 못해 작은 병에도 쓰러져 죽는 죽음의 겨울이 도래했지만, 그는 상관없이 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그 아무도 평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지 않았다, 토벌 대회에 막 돌아와 노역에 동원 되었던 평민들의 노고를 알지 못했던 네 명의 수장들은 썩은 표정을 하고 연회에 참가했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소리를 꽥 지르는 소음이 들렸다.
‘레이먼 자지는 말자지다!’
루시안은 레이먼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지며 더없이 일그러지는 걸 한숨 섞인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숨을 곳을 찾았다.
오입쟁이 니키엘에게 걸렸다가는 저도 레이먼처럼 공개적인 망신을 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니키엘의 부왕은 그의 그런 무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란도 못 들었다는 듯이 측근과의 대화를 지속하고 있었다.
왕은 제 힘으로는 수장들을 누르지 못하면서도 제 아들의 신성력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그들을 조종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들인 니키엘을 다루는 것이 훨씬 수월한 편이었다. 때문에 왕은 니키엘에게 애정을 주지 않고 정서적 학대에 가까운 양육 태도를 보였다.
수장들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진흙탕 속에서도 연꽃은 피는 법이다. 불행한 시절로 말하자면 왕궁의 담벼락 안에서 비호받고 자란 니키엘에 비하면 수장들의 어린 나날들이 훨씬 더 고달프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니키엘처럼 막 살지는 않았다.
각자 다른 방법으로 지옥의 늪지대 위로 연꽃을 피워 올린 네 명의 수장들이 보기에 니키엘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제가 갖고 있는 무기라고는 신성력과 외모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건지 앞에서는 수장들을 한 손에 주무르려 하고 뒤에서는 여러 인간 말종들과 염문설을 뿌려 댔다.
그는 부친에게서 핍박받은 울분을 타인에게 풀려고 하는 전형적인 소인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