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니키엘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가는 길 적적하지 않게 공과 함께 하면 나야 좋은 일이오.”
그러자 또 한 번 새가 품 안에서 푸드덕거렸다. 니키엘은 그런 새를 달래려 노력했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 어디가 아파 그러나 싶어 걱정되기도 했다.
“얘가 왜 이럴까. 점잖기 그지없던 놈이.”
품 안의 새를 추스르던 니키엘은 루시안의 표정이 삽시에 굳는 걸 보았다. 왜 저래, 하고 생각한 순간 루시안이 희한한 것을 본다는 표정으로 새를 바라보며 니키엘에게 물었다.
“이 새가 점잖던가요.”
니키엘은 이때다 싶어 새 자랑을 시작했다. 의외로 말수가 적은 니키엘은 지금까지 왕자궁에서 폴 외의 시종들과 말을 잘 섞지 않았고, 그나마 자주 대화하는 폴은 너무 바빠 니키엘의 새 자랑 같은 것은 들어 주지 않았다.
“그렇소. 무척 점잖고 똑똑한 새요. 다쳐 갖고 와서 걱정했는데 지금은 상처가 없는 듯해 다행이기도 하고….”
니키엘을 향해 고롱거리는 새의 부리 밑을 검지로 긁어 주며 뺨에 쪽 입술을 붙였다. 앞에 루시안이 있다는 걸 까먹고 새가 너무 예뻐 나온 행동이었다.
루시안의 얼굴이 희한하게 일그러졌다.
‘뭐야. 뱀이라 새를 싫어하나.’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루시안은 한동안 새를 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무척 가소로운 행동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니키엘은 그의 시선에서 새를 숨기려 노력했다. 형제가 제 애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걸 본 것처럼 경악과 경멸이 담긴 눈이라 그렇지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뱀과 새는 사이가 좋지 못하니 혹시 몰라 귀여운 새를 루시안의 사정거리 밖에 두고 싶었다.
‘파충류와 맹금류는 원수지간이니 저럴 수밖에.’
종의 태생이 그러한데 루시안 공작이라고 다를 바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루시안은 새를 희한한 얼굴로 보기만 할 뿐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걸었다.
왕자궁으로 향하는 오솔길은 왕족이 걷는 길이 아니라 시종들의 하인이나 왕궁 내 노비들이 걷는 길이라 약간은 험악했다.
그래도 수풀이 우거지지는 않은 편이라 걸을 만했다. 루시안은 한참 걷다가 이상한 듯 물었다.
“…그런데, 전하께서 어찌 이런 험한 길을 가시는지요.”
원체 말수가 없는 남자 같았다. 지금 질문도 정말 의아해 물어보는 듯했다. 그 역시 니키엘의 옛 성격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여기를 왜 걷냐고?’
그야 발목에 좋으니까. 자갈길을 걷는 것을 지속하면 지면이 고르지 못해 발목의 소근육들이 자극을 받아 발목 단련에 좋았다.
아주 얇은 인대로 구성되어 있는 발목을 강화하려면 이런 식으로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 자잘하게 훈련해 주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니키엘은 대충 핑계를 둘러대었다.
“이곳은 나무가 우거져 햇빛이 안 들지 않소. 양산을 들기는 귀찮으니 내게는 딱이오.”
루시안은 대답 없이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평소 미용에 민감한 니키엘의 성격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근데 왜 시종 없이 다니냐고 묻지는 않네. 대놓고 욕은 안 할 뿐 내게 그리 큰 관심은 없는 거지. 그럼 왜 에스코트를 해 준다고 한 걸까.’
아무리 망나니에 제멋대로 산다고 해도 왕자가 숲이나 다름없는 길을 혼자 걷는데 시종은 어디 갔냐 묻지 않는 것이 니키엘에 대한 루시안의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정말 물어본다면 곤란하기도 하지만 데려다준다는 놈이 관심은 없어 뵈니 약간 골치가 아팠다.
‘다른 놈들 빼고 공략해 볼까 했는데 이놈도 쉽지 않네. 다들 잘생겨서 그런가 콧대가 장난이 아니야.’
니키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새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품을 파고들며 고로롱거리는 것이 당최 야생의 새 같지 않았다.
주인이 있는 새 같은데 루시안은 제 새가 아니라고 하니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공, 혹시 이 새의 주인이 공께서 아는 이요?”
“…그런 셈입니다.”
“역시! 주인의 아는 사람까지 알아보다니. 이 천재! 너는 앞으로 커서 학자가 될 새다.”
니키엘은 루시안이 옆에 있는 것도 모른 채 새를 향해 칭찬을 퍼부었다. 어유, 내 새끼, 하며 새의 정수리에 쪽쪽 거리기도 했다. 새는 기쁜 듯 아주 살짝 날갯짓을 했고 루시안의 표정은 갈수록 안 좋아졌다.
한껏 새를 예뻐해 주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본 니키엘이 물었다.
“근데 공께선 표정이 왜 그러오? 어디 미령 하시오?”
“…아닙니다. 비위 상할 일이 있어서….”
병약하다더니 비위도 자주 상하고 그러는군. 니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길을 걸었다.
어느덧 왕자궁이 수풀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니키엘은 루시안을 궁까지 초대할 마음은 없었다.
지난번 같은 사내놈들끼리 방으로 한 번 불렀다고 새파랗게 눈을 뜨고 천박하니 뭐니 떠들던 레이먼이 떠올라 살짝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루시안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데려다주어 고맙소. 이제 나는 그만….”
그러나 니키엘은 그렇게 끝맺음 인사를 내뱉고 나서야 원래 계획이었던 악수 요청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생각나 다급하게 손을 뻗는다는 것이 새를 안고 있던 팔과 헷갈려 버렸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루시안의 멱살을 잡아 버렸다.
거기서 그쳤으면 모를 일인데 반동이 일어 팔꿈치가 굽혀진 것이다. 멱살을 붙잡고 있는데 팔꿈치는 굽혀져 서로 사이의 간격이 좁혀 드니 누군가 한 명은 상대편으로 끌려가야 할 텐데 루시안이 꼼짝하지 않아 니키엘이 그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앗 안 돼, 우리 아기.’
이대로 루시안의 품으로 골인하게 된다면 껴안고 있던 새가 다칠 것 같았다. 니키엘은 급격하게 그의 품 안에서 방향을 틀었다.
차라리 그냥 땅바닥에 구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척추가 회전하며 평소에는 중력을 받지 않은 근육들이 어, 뭐야? 지금 넘어지는 거야? 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연쇄 작용의 여파를 대비하지 못한 니키엘이 다가올 충격을 상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읏….”
"…….”
오시니스 귀족 남성들이 자주 쓰는 향유의 향이 훅 끼쳐 왔다. 흔한 향이라 궁정 내 복도를 지나가기만 해도 맡을 수 있는 향이었는데도 무척이나 싱그럽게 느껴졌다.
다른 감각 기관들이 일하기 전에 후각이 먼저 이상을 눈치챈 것이다. 그다음 느껴진 것은 누군가의 딱딱한 품이었다.
니키엘은 당황스러워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제 옆에 있던 이가 루시안이니 당연히 비틀거리는 저를 잡아 품에 넣은 이도 루시안일 텐데 그걸 인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안긴 것도 아니라 허리가 넘어갈 정도로 안긴 터라 새를 끌어안고 있지 않던 팔은 루시안의 뒷덜미에 두른 채였다.
탱고 춤을 추는 남녀처럼 숲속 한복판에서 루시안의 목을 끌어안고 허리를 젖힌 것이다. 니키엘은 콱 하고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쪽팔려….’
그러나 분별 있는 어른이라면 때로는 쪽팔림조차 수용해야 하는 법. 니키엘은 상황을 모면하고자 그저 살짝 웃어 보였다.
“음, 고의는 아니었는데. 미안하오.”
“…….”
그러나 진심 어린 사과를 했음에도 루시안의 굳은 표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저를 놔주는 것은 또 아니라 니키엘은 루시안의 안색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저기, 공…?”
루시안은 제 품에 안긴 니키엘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충격을 받은 듯 굳은 얼굴이었다.
메두사를 보고 돌이 되어 버린 전사 같기도 했다. 끔직한 걸 겪고 그대로 아무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변해 버린 터라 니키엘은 머쓱해졌다. 그 머쓱함 때문에 접촉에 의한 신성력의 반응에 대해서는 떠올리지도 못했다.
‘아니, 나도 실수인데 저 얼굴은 뭐야.’
어쨌든 제 잘못이니 어디 다쳐 저러나 싶어진 니키엘이 그를 한 번 더 부르려던 찰나였다. 루시안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개진 것이다.
괜찮냐고 다시 한번 물어보기 위해 입을 떼려는데 니키엘의 품 안에서 가만히 있던 새가 퍼드덕거리며 아침 맞은 수탉처럼 꽤액거리기 시작했다.
“꽤액-!”
“어엇, 이 녀석이…. 저, 공…. 나를 좀 일으켜 줄 수는….”
푸드덕거리는 새를 주체할 수가 없어 니키엘은 민망함을 무릅쓰고 루시안에게 저를 일으켜 주기를 부탁했다.
“…실례했습니다.”
루시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인지 짧게 사과하며 니키엘의 중심을 바로 세워 주었다. 니키엘은 그의 뒷덜미에 둘렀던 손을 내릴 수 있었다.
이유 없이 얼굴이 붉어졌던 루시안의 안색은 그런 적 없다는 양 맑게 돌아와 있었다. 니키엘은 어색하게 그에게서 제 몸을 떼어 내고는 몸을 바로 했다. 둘 사이에는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쪽팔리긴 한데, 이것도 나름 스킨십 성공 아니겠어….’
니키엘은 너무 쪽팔린 나머지 긍정 회로를 돌려 보았다. 두뇌가 사고를 거부하며 온 힘을 다하여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판단하기로 명령 내렸던 것이다.
그는 간신히 입꼬리만 끌어 올린 채로 루시안에게 말했다.
“그, 고의는 아니었소. 내가 경을 끌어안으려던 게, 아니 그러니까 강제로 안으려던 게, 아니 그게 아니라….”
“…….”
무슨 변명을 해 봐도 치한 짓을 말 몇 마디로 퉁치려는 성희롱범 같아졌다.
니키엘은 입술을 말아 물며 그냥 입을 닫아 버렸다. 더 이상 말해 봐야 제 팔자만 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루시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쩐지 아무 힐끗 바라보니 다른 생각 중인 것 같았다. 새가 푸드덕거리며 꽥꽥거리지만 않았어도 두 사람 사이에는 천금 같은 침묵이 존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