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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22)화 (22/130)

22화

그러자 루시안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섞어 말했다.

“기가 막히는군.”

…아니 여기 놈들은 죄다 왕자를 아주 여물통으로 보는구나. 뻑하면 반말에, 대놓고 욕을 하질 않나.

그러나 니키엘은 참았다. 루시안에게 얻어 낼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두 놈들보다는 낫다. 한 놈은 가는 길을 막지를 않나, 한 놈은 지가 먼저 침실로 쳐들어와 놓고 이 왕자님께 음탕하다고 하질 않나.’

니키엘은 유난히 무례했던 두 미남을 떠올리며 루시안의 무례 정도는 그 축에 끼지 못한다는 평가를 내렸다.

적어도 루시안은 공손히 인사하지 않았던가. 저 역시 석박사 시절에는 한 교수의 등에 대고 가운뎃손가락을 올렸었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하는 마당에 미흡하나마 예의를 지키려고 하는 게 크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니키엘의 악명을 생각하면 루시안의 반응은 좋아 보일 지경이었다.

얌전히 품 안에 안겨 있는 새를 몇 번 더 쓰다듬으며 니키엘은 루시안을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쪽 찢어져 있던 동공이 제 크기를 찾자 루시안은 예의 그 무감하고 약간은 핏기 없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뱀독이 혈관을 타고 흐르느라 몸이 좋지 못하다고 했었지.’

광증에 빠진 뱀으로 변할 때마다 루시안의 몸에는 독이 흐르게 되는데, 문제는 인간의 몸으로 돌아온 뒤에도 독이 체내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내성이 생겨 죽거나 하지는 않지만 약한 장기를 파고든 독이 만성 염증을 일으키는 듯했다.

루시안의 경우 그것이 폐로 퍼져 폐렴과 천식을 앓는 모양이었다. 중세인이 천식에 걸렸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겠지만, 원체 강골이라 그저 기침 몇 번만 하는 것에 그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건강한 것은 아닌지라 루시안은 늘 자신의 약제 실력으로 약을 지어 먹어 왔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천식이 가라앉을 때가 바로 니키엘의 신성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일 테지.’

니키엘은 자신이 있었다. 진짜 니키엘이 워낙 등신 같이 행동한 덕분에 네 가문의 수장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고 있지만 적어도 니키엘의 쓸모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진짜 쟤들이랑 연애할 것도 아닌데 그냥 나도 쟤들이 쓸모 있고, 쟤들도 나를 유용하게 여기면 되는 일 아닌가.’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이었다. 니키엘은 품 안의 새를 다독이며 루시안에게 손을 뻗었다. 악수를 통해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간만에 뵈니 반갑소. 한동안 격조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군. 악수나 한번….”

“꽤액-!”

꽤액? 루시안에게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뻗었던 니키엘은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놀랐다가 그것이 제 품 안에 있던 검독수리가 내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얘가 왜 갑자기 까마귀처럼 울고 그래. 점심에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니키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점잖고 얌전해 예쁘던 새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듯 지저귀질 않나 푸드덕거리며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기도 했다.

품 안이 답답하여 그러나 싶어 힘을 풀어 주는데도 날아가지는 않은 채, 니키엘의 블라우스를 발톱으로 집고는 루시안을 향해 위협적으로 푸드덕거렸다.

당황한 니키엘은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며 흥분한 새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왜 그래, 너. 괜찮아, 진정 좀 해 봐.”

날갯짓이 장한 걸 보니 그때 다쳤던 날개는 다 나은 듯한데 하도 푸드덕거리니 루시안과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니키엘이 몇 번 도닥여 주고 두 손으로 조심히 안아 주자 삐로로 거리면서도 두 날개를 격하게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얘가 왜 이럴까. 원래는 얌전했는데….”

“전하, 그 새는 얌전한 개체가 아니옵니다.”

루시안이 묵직하지만 감정의 고저가 없는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새가 하도 난리를 쳐 대니 눈앞에 있던 그를 잠시 잊고 있던 니키엘은 그제야 루시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새에 대해 아는 이를 만나 반가웠다.

“오, 이 새에 대해 잘 아오? 그렇다면 이 새가 공의 새요?”

“절대 아닙니다. 저 빌어먹을 새는-.”

루시안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 새가 다시 한번 날갯짓을 하더니 루시안에게서 등을 돌려 니키엘의 목을 껴안듯이 한쪽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래, 착하다. 그때 왜 사라졌어. 먹이를 좀 더 챙겨 주고 싶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공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려 하셨었지?”

“…아닙니다.”

루시안은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니키엘은 사람을 앞에 두고 너무 새만 챙겼나 싶어 아차 했다.

“그, 들어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번 토벌 대회에 나도 참가하게 되었소.”

좀 더 어색한 분위기를 깨 볼까 하고 건넨 말이었다. 토벌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한다는 인사도 할 참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전하.”

대답이…. 그게 다야?

율란이나 레이먼처럼 대놓고 욕은 안 해도 성의가 완전히 맛 가 버린 반응이었다.

‘대체 니키엘은 어떤 망나니짓을 해 댔길래 이렇게 얌전한 총각도 학을 떼게 만드냐.’

한심할 지경이었다. 니키엘은 그와의 스킨십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반응이 저렇게 없는데 갑자기 손목을 덥석 잡는 짓이야말로 니키엘이 기존에 해 왔던 신나는 치한 짓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나 겨우 남은 ‘간신히 예의 차리는 놈’까지 ‘니키엘 얼굴만 봐도 이를 가는 놈’으로 진화시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궁정 내 제일 변태로 소문나도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된 이상 내일을 위한 후퇴뿐.’

니키엘은 조용히 결론지었다. 게다가 새를 안고 있으니 애니멀 테라피라도 되는 것인지 몸 안을 빵빵하게 채우던 신성력이 물 흐르듯 편안하게 혈류를 도는 느낌이 들었다.

‘…새랑 놀고 싶기도 해.’

무엇보다 오랜만에 만난 새와 과일이나 먹으며 책을 읽고 싶어졌다. 또 한 번 눈앞에서 저를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이를 만나니 아무리 니키엘이라고 해도 피로해진 것이다.

니키엘은 남이 저에게 뭐라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저를 밑도 끝도 없이 혐오하는 사람들 앞에 서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자꾸 날 패잖아. 누가 나서서 맞고 싶겠어.’

심드렁하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니키엘의 표정에서 영혼이 빠져 버렸다.

잘 구슬려 악수라도 하여 신성력을 소모하고 루시안에게 제 존재를 각인시키자는 기존 계획에 대한 열의가 그대로 빠져 피곤함을 느꼈다.

‘다 귀찮아. 이대로 아기 새의 깃털이나 쓰다듬으면서 마물학 개론이나 읽다가 하체 운동을 해야겠어.’

오늘의 힐링 테라피 목록에 대해 떠올리며 니키엘은 급격히 시작되었던 대화를 급격하게 마무리 지었다.

표정도 더없이 시큰둥해진 지 오래였다.

“뭐, 그래요. 내 참가 소식을 공께서도 알고 계시군.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

니키엘은 입꼬리만 올려 짓는 미소를 선보이며 새를 쓰다듬는 걸 멈추지 않는 채로 몸을 돌리려 했다. 이대로 왕자궁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전하.”

루시안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말이다. 두 말 하지 않고 그를 보낼 것 같았던 루시안이 다시금 말을 걸자, 니키엘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 더 있소?”

“…아닙니다.”

루시안은 짧게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곧이어 고개를 저었다. 니키엘은 다시 시큰둥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오.”

품 안의 새는 기분이 좋은지 고롱고롱 거리고 있었다. 얼른 가서 양고기 살점을 잘라 줄 계획이었다.

얌전하고 점잖은 새니 어깨 위나 무릎에 올려 두고 마물학개론을 양피지에 한글로 정리하면 기분이 째질 것 같았다.

니키엘은 서둘러 왕자궁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곧 발자국 소리가 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음? 관료청은 이쪽이 아닌데, 공.”

“…예, 전하.”

슬쩍 뒤를 바라보니 루시안이 니키엘을 뒤쫓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놀라 멈칫한 니키엘이 이쪽은 관료청 쪽이 아니라는 걸 짚어 주었다. 그가 주로 머무는 마법국은 관료청 건물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안은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예의 그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약간의 답답함이 올라왔다.

“아니, 대답을 원한 게 아니라…. 왜 나는 공이 나를 쫓아오는 것 같지? 그게 궁금한 건데, 지금.”

“…왕자궁까지 에스코트 해 드리겠습니다.”

에스으코오트으? 니키엘은 영구 박 터진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가냘픈 귀부인도 아니고 신체 건강한 성인 남성인데 웬 놈의 에스코트?

얼른 돌아가 새나 쓰다듬을 생각으로 되었다고 거절하려던 참에 니키엘은 불현듯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손이라도 잡아 보는 거야.’

치한 취급 받을까 봐 수정했었던 계획을 다시금 떠올리며, 니키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상대의 제안은 꽤 친절한 편이었다.

루시안은 적어도 니키엘의 몸이 허약하기 그지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둘 다 병약한 몸이라고 해도 루시안은 그 본체가 거대한 뱀과 닿아 있는데다가 골격근량도 장대해 보이지만 니키엘은 원체 뼈대가 얇고 근육이 쇠약해 지금처럼 되기까지 수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루시안이 보기에 니키엘은 지금도 길거리에서 픽 쓰러질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매너는 좋네. 앞에 두 놈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군.’

물론 율란과 레이먼에게 그런 취급을 받게 된 것은 니키엘의 행실이 문제였지만 어쨌든 제가 한 행동은 아니었다.

사람이 마음잡고 좋게 살아 보려는데 그런 식으로 벽에 밀어붙이고 음탕하니 뭐니 욕을 퍼붓는 놈들에 비하면 루시안은 신사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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