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21)화 (21/130)

21화

때문에 혼자 힘으로 나머지 수장들을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남은 놈들이 지카리 그리프랑 또 누구였더라…. 루시안 투르운이었던가.’

지카리 그리프 후작 가문의 선조는 발트, 볼트윅, 투르운과는 다르게 평민 출신의 용사였다. 오로지 실력 하나로만 용사단에 포함된 영웅이었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왕은 광룡 나시우를 처단한 대가로 큰 상과 함께 후작 지위를 내렸다.

그리프 가문은 그때 받은 포상 등으로 정보 길드를 설립하여 왕국 내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거대 길드가 되었다.

‘원작 설정이 어땠었지.’

커다란 매로 변할 수 있는 지카리 그리프는 광증을 앓아도 다른 수장들보다는 비교적 조용한 타입이었다.

그것은 그가 과묵해서 그렇다기보다도, 다소 동물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 애초부터 이성과 본성의 경계가 흐릿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광증에 휩싸일 때마다 거대한 짐승으로 변모하여 민가를 덮치거나 재앙 수준으로 난리를 부리는 다른 수장들과는 달리 지카리는 그저 숲으로 날아가 새들과 어울리는 등 아예 자신이 인간임을 잊고 지냈다.

물론 그동안 소동물들과 날짐승들이 물어 오는 소식들로 정보 길드를 더욱 번성시키기도 했다.

‘야생성이 넘쳐서 광증이 일지 않아도 가끔 사라진다고 했었지.’

니키엘은 원작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본궁에 속하는 관료청 건물로 가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지카리 그리프가 원작의 설정과 같다면 니키엘이 먼저 그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제 수하들도 그들의 수장이 어디로 날아가 버린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로 날아가 버린 새를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니, 남은 것은 루시안 투르운뿐이었다.

루시안 투르운 공작은 마도 약제사였다. 마법과 약학을 접목한 그의 약제 실력은 상당하여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약들을 만들어 내고는 했다.

생리 의약학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연금술이라 불리는 이 시대의 화학에도 조예가 깊어 간단한 폭탄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두뇌캐였다. 그 와중에 오시니스 마법국 장관이라는 설정도 있었다.

니키엘은 오늘 이 루시안을 공략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봤자 손을 잡는 게 다겠지만 일단은 그 정도의 스킨십으로는 수장들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알아 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스킨십을 무기로 꼬셔 광증을 가라앉힐 생각 없느냐 딜을 해 볼 생각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제 편으로 만들어 둔 뒤 이 오시니스인지 육시니스인지 하는 왕국이 도대체 어떻게 굴러먹는 나라인지, 또 토벌 대회에는 어떻게 펼쳐지는지에 대해 겸사겸사 물어볼 요량이었다.

‘뭐, 스킨십으로 신성력을 소모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스킨십의 강도가 중요한지 아니면 스킨십의 유무가 중요한 것인지도 알아야 했다. 레이먼에게 손목을 잡힌 적도 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좀 더 깊은 접촉에만 효과가 있는 건가 궁금했다.

니키엘은 걷다가 중간에 강아지풀을 하나 꺾어 인중 사이에 끼운 채 손깍지로 뒤통수를 받친 채 걸었다.

날이 선선하니 걷기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막혀 있던 신성력이 각혈과 함께 터져 나온 터라 버티기도 수월했고 폴이 가져다준 아침으로 배도 든든하게 채운 참이었다.

니키엘이 흥얼거리며 인적이 드문 풀숲으로만 걷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 마. 그게 어쨌다는 거야.”

오, 누구지. 궁이 넓은데도 불구하고 니키엘은 어디를 갈 때마다 누군가와 마주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또 마주치면 왕자님이 여긴 어쩐 일이냐느니, 숲으로만 걸어 다니면 뱀에 물린다느니 귀찮게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가로수로 심어 둔 듯한 커다란 나무 뒤로 휙 숨어 버렸다.

그러고는 빼꼼 응시하자 머리카락이 눈처럼 새하얀 장발의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을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새가 마구 쪼아 대고 있었다.

‘어! 저 검독수리!’

니키엘이 아는 새였다. 다친 걸 고쳐 줬더니 인사도 없이 사라진 배은망덕한 바로 그 새였다. 니키엘은 다가가 알은척하고 싶었지만, 옆에 있는 남자의 생김이 심상치 않아 그대로 멈춰 섰다.

‘아니, 이 나라 애들은 왜 이렇게 큰 거야. 쟤도 크네.’

큰 것뿐만 아니라 근골격이 멀리서 봐도 옹골찼다. 가까이서 보면 니키엘보다 시선이 위일 것 같았다.

널따란 어깨와 프록코트 위로도 티가 나는 덩치는 그가 무도를 익힌 사람이라는 걸 시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니키엘은 어딘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생김새가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특이한 왕국민치고도 무척이나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알비노인가…?’

남자는 백설 같은 하얀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을 하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색소가 모자란 백색증 같았다. 루비처럼 빨간 눈동자는 눈이 내린 듯 하얀 속눈썹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피부 역시 눈처럼 하얗기는 마찬가지인데 골격 자체가 장대하여 사내다운 느낌을 주다가도 얼굴의 생김이 미남보다는 미인에 가까운지라 그 괴리에서 오는 매력이 있었다.

니키엘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루시안이라는 놈이 알비노 아니었던가. 선천적으로 앓는 병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니키엘이 지난 기억에 대해 반추해 보던 그때였다. 남자가 제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도는 새를 향해 말했다.

“혼자 가시면 될 일을 왜 나를 끼워 넣으려는 건지 모르겠군.”

…미친놈인가? 왜 새한테 말을 걸고 있지. 그것도 존댓말로.

니키엘은 일전에 저 새를 치료해 줄 때 자신 역시 하루 종일 새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도 잊고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이것도 기회라고 다가가 말을 걸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킨십에 대한 말도 나누고 연금술에 대해 물어볼 수만 있다면 오늘의 수확으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니키엘이 천천히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치리리 하고 울던 새가 방향을 휙 틀더니 니키엘이 있는 쪽으로 쇄액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지키!”

남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날아오는 검독수리를 안아 들었다.

사냥감을 잡을 때처럼 발톱을 쫙 펼친 채 달려오던 녀석이 발을 오므린 채로 니키엘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니키엘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어이구, 이 녀석!”

니키엘은 가속도가 붙어 날아온 새에게 충격이 가하지 않게 끌어안고는 웃었다. 오랜만에 보니 더욱 반가웠다.

새가 보기에 인간의 생김새가 모두 비슷하듯 인간인 니키엘 역시 완전히 알아보는 건 어려움에도, 어떻게 녀석이라는 걸 한눈에 깨달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새를 보자마자, 자신이 알던 바로 그 새라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그리고 새 역시도 그를 알아본 듯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제 부리를 니키엘의 턱에 마구 문질러 짐승의 페로몬을 묻히고 있을 리 없었다.

“왜 말없이 사라졌어. 놀랐잖아.”

“피로로-. 피리리-.”

새가 품 안에서 뭐라 뭐라 열심히 설명하는 걸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어 주었다. 니키엘이 한참 새와 통할 듯 통하지 않는 대화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니키엘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새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던 예의 그 남자였다.

니키엘처럼 살짝 고수머리도 아닌 남자의 장발이 은하수처럼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오른손을 제 가슴팍에 가볍게 댄 채 니키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궁중 예법이었다.

‘와 저게 폴이 말하는 오시니스 수도식 인사 예절이구나.’

니키엘은 속으로 감탄하며 마주 고개를 까딱였다. 남자는 차분한 얼굴로 니키엘을 마주했다.

품 안에 있는 새의 깃털을 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니키엘은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루시안이 맞는 것 같지. 이름을 어떻게 확인한담?’

비둘기도 아닌 주제에 니키엘의 품 안에서 순하게 구구구 거리는 수리를 흘끗 본 남자가 설핏 한숨을 내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저를 보고 한숨을 내쉬지 않는 이는 시종인 폴밖에 없었기 때문에 니키엘은 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공작…. 께서는 예는 어떤 일로?”

“잠시 관료청 후원을 산책 중이었습니다.”

공작이라는 칭호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서 남자는 이 나라의 단둘뿐인 공작, 루시안 투르운이 맞는 듯했다.

‘나머지 한 명이 성격 더러운 레이먼인 이상 눈앞의 남자가 다른 한 공작이라면 루시안이 맞겠지.’

오시니스 왕국은 영토가 넓은 반면, 고위 귀족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공작이라는 칭호에 당황하지 않는 걸 보면 남자는 루시안이 틀림없었다.

니키엘이 짱돌을 굴리는 동안 루시안이 그의 품 안에 있던 새를 가리켰다.

“…그 새와 친하십니까.”

루시안의 물음에 얌전히 있던 새가 예쁘게 울던 것은 집어치웠다는 듯 갑자기 날개를 퍼덕이며 경고하듯이 쇄액거렸다.

루시안 역시 지지 않고 새를 노려보았다. 빨간 눈동자 안의 검은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지는 걸 본 것 같은 니키엘이 놀라 새를 제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래도 루시안 투르운의 가문 상징이 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맹금류들은 뱀을 먹기도 하지만 ‘저것’은 그런 방울뱀 따위가 아니라 독을 품은 타이판이나 기간토피스에 가까웠다.

‘크기로 따지자면 이무기나 강철이겠지만.’

이무기나 강철이는 실재하지 않는 뱀들이지만 루시안이 화한 뱀은 크기가 그 전설 속의 것들과 맞먹을 것이다.

이 귀엽고 작은 새가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그런 뱀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니키엘은 그의 시선에서 새를 가리기 위해 좀 더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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