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빡대가리이던 시절이 오래되어 이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동화책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책을 보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느낌이었다. 동화책을 펼쳐도, 그래 네 수준이 그랬지. 하는 눈빛으로 니키엘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니키엘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 나라를 알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정서를 알 필요가 있지.’
니키엘은 오시니스라는 나라에 인문학적으로 접근했다. 어떤 설화가 퍼져 있는지, 어떤 정서가 오시니스에서 보편적인지를 알아야 했다.
왕국민들의 국민성을 알아야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세계의 종교인 솔리우스교에 대해서도 동화를 통해서 아는 것이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접근법이었다.
보통 어린아이들의 교육부터 시작해야 포교가 쉬우니 말이다. 때문에 니키엘은 가장 쉽게 주신 솔리우스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기적인 새끼던데….’
니키엘은 막힘없이 주신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주신 솔리우스는 이기적인 놈이었다.
‘믿는 사람만 살려 주고 안 믿는 사람은 다 죽여 버리고 지는 신의 핏줄을 뿌린답시고 이 땅에 내려와 애먼 유부녀를 강탈하고 순진한 처녀를 희롱하고 그 처녀의 남편 될 사람을 이도교로 몰아 박해하고….’
그렇게 강간과 강압에 의해 태어난 반인반신들은 제 아빠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고 또 죄악을 저지르다가 주신의 눈 밖에 나 지옥 구덩이에 떨어졌다.
그런 솔리우스가 오시니스 왕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주교로 승격한 이유는 다 광룡 나시우 덕분이었다.
‘나시우 아니었으면 오히려 저 망나니 신을 몰아내자고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을걸.’
가뭄에 먹을 것도 없는데 재물을 요구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 인신 공양하는 등, 비인도적인 짓을 하게 해 놓고는 그것이 신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단다.
‘어째 교리도 그리스로마신화나 여러 종교를 짬뽕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떨 때 보면 함무라비 법전 같기도 하고 어떤 관점으로 보면 또 이슬람교도 같기도 했다. 종교의 안 좋은 점만 다 끌어다 모아 놓은 것 같은 주교를 왜 믿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주신 솔리우스는 이 땅에 자신의 피를 가장 많이 타고난 영웅, 오시니스를 안배하셨다. 오시니스 왕국의 시작이었다.’
니키엘은 그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오시니스 왕국은 고조선처럼 왕과 제사장의 통합이었던 것이다.
신권 정치가 이루어지는 국가란 말이다.
‘권력자 놈들이 왕가의 핏줄에 신성성을 더한 것이구나.’
물론 근거는 완벽했다. 니키엘의 존재 자체가 신의 증명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빛 백금발과 창창한 푸르름을 뽐내는 벽안.
오시니스 왕국에 백금발이 태어나는 확률은 극히 적었다. 금발이라고 할지언정 더티 블론드의 수가 가장 많았다.
그러니 백금발이 벽안일 확률은 0에 수렴했다. 오로지 왕가의 핏줄만이 백금발에 벽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도 직계 왕손만이.
때문에 니키엘의 존재는 신성성의 증명이었다. 아직 네 수장들 중 한 명과 결혼하여 저주를 해주한 것은 아니니 그의 능력을 증명하지는 못한 상태이지만, 니키엘의 존재만으로도 왕국민은 왕손들을 우러러봤다.
니키엘 하나만으로도 국왕은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니키엘이 망나니 같이 행동한다고 한들 다 봐주었겠지. 멍청하여 왕위를 노릴 머리가 안 되는 막내아들이 왕권을 공고히 해 준다면 웬만해서는 봐주고 싶지 않겠는가.
왕에게 니키엘의 존재란 그러했다. 니키엘은 제가 읽은 단순한 책들에서 그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왕자이니 누군가에게 뚜렷하게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들을 만한 구석이 없었기 때문에 100프로 확신은 못 해도 말이다.
그동안 니키엘은 오시니스 국민들의 생활사에 대해서만 탐구했다. 간간이 모르는 것이 나오면 기억 상실을 핑계로 폴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폴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다가도 니키엘의 원래 성질이 워낙 괴팍했는지 더 묻지 않고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읽을 책들은 아직 넘치지만, 마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토벌 대회에 갈 수는 없지.’
다시 말하자면 니키엘은 자발적으로 대학원에 들어간 연구 오타쿠였다. 석사만 끝내고 관련 직종에 취직하는 동기들과는 다르게 니키엘은 끝을 보고 싶었다.
너 노벨상 탈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해, 하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도 굴하지 않았다. 파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팠으며 알고 싶은 것들은 무궁무진했다.
그런 성격은 니키엘의 몸 안으로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로 유지되었다. 마물이라는 생물 자체에 탐구심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니키엘은 곧이어 서재에 틀어박혀 대출한 책들을 펴 놓고 커다란 양피지를 꺼냈다. 잉크병을 문진처럼 양피지 끄트머리에 두고 마물에 대해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
전하, 제발요.
제발요, 전하.
앞뒤 순서만 바꾼 애원으로 폴이 니키엘 앞에서 읍소했다.
그가 니키엘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전하 제발 목간이라도 하시고 잠도 좀 주무세요!”
그렇다. 니키엘은 도서관에서 마물 관련 책들을 빌려 온 바로 그날부터 약 사흘간 자지도 않고 책만 봤다.
근 손실이 걱정되어 벤디에게 말해 닭가슴살을 잔뜩 다져 넣고 밀가루의 양은 최소화시킨 미트파이를 요청해 틈틈이 섭취하거나 시간 맞춰 운동을 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운동 후에도 목욕은 했다. 그 목욕이라는 것이 니키엘의 수준에서는 샤워와 동일했지만 폴의 기준으로는 등목과 다름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비누칠 후 물만 휙 뿌리고 마는 것이 무슨 목욕이냐고 폴은 니키엘을 야만인 대하듯 했다. 그러나 니키엘은 억울해하지 않았다.
대답할 시간도 없고 정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재미있다. 미치겠다. 너무 재미있어서 미치겠다.’
니키엘의 좋은 점은 탐구열이 있다는 것이다.
‘어떡해. 너무 재미있다. 마물? 나 사랑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나쁜 점은 탐구열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나쁜 점은….
“벌써 며칠째예요! 제발 주무시라니까요! 근래에는 몸 관리도 잘하시던 분이 대체 왜!”
“폴아….”
“네! 뭐든 말씀만 하세요! 이부자리 준비해 둘까요?!”
“양피지 좀 더 가져와.”
동물 덕후라는 것이다. 니키엘은 학부 동기들이 취업을 하거나 의학 전문 대학원 준비를 한다며 각자의 길을 걷던 그때에도 꿋꿋이 대학에 남아 석사 과정을 밟았다.
석사를 따내고 석사 동기들조차 이제 취업하겠노라 관련 기관들의 문을 두드릴 때 오로지 앞만 보며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그의 동기들은 저런 놈이 교수를 해 먹는구나, 하며 놀라 했다. 사실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교수일수록 좋으니 대학 쪽 취업에 포문을 열어 둔 것이지, 니키엘은 연구 기관에 취직해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렇다. 니키엘은 그냥 연구가 좋았다.
연구가 왜 좋냐하면 동물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 종은 이래서 좋았고 저 종은 저런 특징이 있어 좋았다.
많은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개체적 특성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 상어가 상어를 낳고 피라미가 피라미를 낳는 그 정해진 약속이 너무나 경이로웠다.
그리고 또 한 번, 니키엘은 마물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넨이라는 개체는 전염병을 발병시키는군. 꼬리에는 매독균이 묻어 있다는 것 같은데…. 넓은 들판이나 숲 근처에 살고 나무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다는 건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나무 위에 오른다는 뜻인데 넨을 먹는 포식자는 어떤 놈일까.’
책은 마물 각각의 특성만이 나와 있고 그들 사이의 먹이 사슬 등은 소개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시니스인들은 마물을 동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들은 광룡 나시우에게서 태어난 사특한 존재들로 왕국민들을 오래도록 괴롭혀 왔으니 말이다.
때문에 그들에게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습성은 파악해도 그들을 세세하게 연구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니키엘에게는 이것이 금광으로 보였다.
‘아무도 연구하지 않은 영역이라니!’
자연 과학대쯤 되면 연구 주제가 풍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란 기존 연구를 다시 하고 또 하고 한 번 더하는 것이 많았다.
내가 떠올린 연구 주제는 옆 랩실의 쟤도 떠올릴 수 있는 주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도 연구하지 않은 무궁무진한 영역이라니.
니키엘은 피가 빠르게 도는 걸 느꼈다. 재미있어서 죽을 것 같았다.
“양피지는 무슨 양피지란 말씀이십니까! 전하는 지금 쉬셔야 한다니까요!”
니키엘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양피지를 가져오지 않는 폴에게 그럼 내가 가져가지 뭐, 하는 단순한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니키엘이 양피지를 가져오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아….”
“전하!”
그렇게 건강을 신경 썼던 주제에 한 번 몰두할 것이 생기자 모두 까먹어 버린 니키엘은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현기증이 도는 것을 느꼈다.
폴이 저 멀리서 놀라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을 열자마자 쿨럭거리며 선혈이 주륵 흘러 내렸다.
잠잠했던 각혈이 도진 것이다.
‘망할 놈의 신성력.’
몸 안에 쌓이고 쌓인 신성력이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는 매처럼 몸 안의 장기를 공격하면, 역설적이게도 그 신성력이 다시금 니키엘의 손상된 부분을 회복시켰다. 그것도 완전히는 아니고 그냥 목숨만 붙여 놓는 꼴이었다. 온몸을 도는 신성력이 마치 니키엘더러 아무 활동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듯 날뛰었다.
‘이 각혈 좀 어떻게 해야겠어.’
피가 모자라 멍한 머리로, 니키엘은 바닥으로 찬찬히 무너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전하! 폴의 목소리가 지천을 울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