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13)화 (13/130)

13화

‘신탁이 그렇게 강력한가? 근데 난 불교 신자인데. 법명도 있는.’

니키엘의 법명은 법왕심(法王心)이었다. 법당 주차 할인도 되고 낙산사나 불국사에서는 입장 할인도 되는 조계종 신도증도 있었다.

‘내가 모시는 신도 아닌 놈이 불교 신자한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가? 나 꽤 독실한데?’

그러나 레이먼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그들도 신탁이 그런 식으로 내려와 이상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신탁이 뭐라고 내려올지 공이 어떻게 아시오?”

일단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레이먼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공개 전에 저희 네 가문에 먼저 밀지가 내려온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나는 아주 잘 알지. 공도 그걸 안 까먹고 잘 알고 있나 확인해 본거지.”

레이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니키엘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찌되었건 신탁이 내려왔다 하니 그 내용이 궁금하기는 했다. 니키엘은 찻잔으로 손을 내리며 물었다.

“그래서 신탁 내용이 뭔데.”

입가를 가려 남의 일처럼 그저 흥미롭기만 해 보이는 표정을 간신히 가렸다.

니키엘로서는 마물인지 나물인지의 토벌 대회 따위는 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근데 이세계의 종교가 좀 이상하다는 말이지.’

이세계의 종교는 니키엘이 원래 살던 곳에 있던 모든 종교들을 조금씩 섞어 놓은 모양새였다.

그걸 말로 내뱉었다가는 신의 은총을 타고 태어나 금발에 벽안인 니키엘이 사특한 악의 저주를 받았다며 그대로 화형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입을 다무는 것이지 사실 제가 갖고 있는 신성력이라는 것도 실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니 제가 알고 있던 종교와 이곳의 종교가 얼마나 다른지 계속해서 확인해 보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니키엘을 향해 레이먼이 눈매를 좁혀 떴다. 입매에 물고 있는 사근한 웃음은 그대로였지만 눈빛이 날카로워 니키엘은 뜨끔하는 중이었다.

“그런 화제에도 관심이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장하십니다, 전하.”

그 말투에는 너는 네 얼굴 가꾸는 것과 아무개 기사가 아무개 귀부인에게 고백하여 뒤로 붙어먹는다는 가십 외에는 관심도 없던 놈이 아니었냐, 하는 물음이 들어 있었다.

니키엘은 흠, 하고 헛기침을 한 다음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래? 나에게는 알려 주지도 않는 신탁이니 그럼 내가 갈 필요도 없겠소. 집에 있지 뭐…. 요즘 날씨도 안 좋고.”

“…….”

레이먼은 는지럭거리며 말하는 니키엘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한번 쳐다보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청명한 날씨에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평화로운 날씨를 보며 레이먼이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해 준 신탁의 내용은 이러했다.

너희의 행사를 햇빛의 머리카락을 한 자에게 맡기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건지리니, 너희는 필히 성공을 이룰 것이다.

“그 말인즉 이번 토벌 대회에 전하를 모시고 가라는 뜻입니다.”

레이먼은 다소 모자란 이를 대하듯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었지만 저변에 깔려 있는 니키엘을 향한 경멸은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러 시비를 거는 느낌인데.’

니키엘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그것보다 이 신탁이라는 것이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 행사를 맡기라는 것 때문에 토벌 대회에 참석하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게 토벌 대회가 아니면 어쩔 건가. 단순히 작은 일일 수도 있는데.”

니키엘의 말을 들은 레이먼의 표정은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쯧.”

이제는 대놓고 혀까지 차다니. 거기에 더하여 제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니키엘과 눈을 마주친 상태로 씩 웃고 있었다.

바르게 생긴 미남자의 웃음은 호감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니키엘은 얼굴에 홀릴 뻔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왜 이렇게 잘생긴 거야. 대놓고 나를 모욕하고 있는 중인데.’

생각해 보니 그것은 ‘진짜 니키엘’의 신체가 주는 반응 같았다. 사실 니키엘은 레이먼이 이 방에 들어온 뒤부터 살짝 쿵덕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부정맥을 의심했는데 그것이 상대에 대한 성적인 호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딱히 남성을 연애 상대로 느껴 본 적 없던 니키엘이 그럴 리는 없으니, 니키엘의 신체가 레이먼에게 반응하는 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약간 자존심이 상한 니키엘은 무엄한 레이먼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성격이 어딘가 뒤틀려 있는 것 같은데 그걸 고쳐 줄 단 한 사람이 저는 아닐 것이다.

‘저렇게 살아도 공작이니까 사람들이 아무 말 안 했겠지. 언젠가 큰코다칠 거다.’

니키엘은 몇 살이니, 너. 하고 묻고 싶은 꼰대력을 억누르며 저를 한심하게 보는 레이먼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건 신탁이라고 해도 해석의 여지가 넓으니 굳이 내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네.”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레이먼은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도 상대를 압박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방 안에 퍼진 기운에서 그가 불쾌해하고 있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니키엘의 목을 눌러 설골을 부러트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행동에 옮기지 않는 것은 그저 레이먼의 자비와 관용 덕분이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니키엘은 기가 막혔다. 왕족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고 있는 공작이라니.

대체 이 나라의 왕자가 얼마나 하찮은 자리길래 공작이 저렇게도 무례하게 구는 걸까.

그러다가 니키엘은 곧 깨달았다. 레이먼은 왕자라는 직위에 무례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니키엘에게 무례하려고 작정한 거라는 걸.

‘…말 거시기 사건 말고도 꽤 레이먼을 귀찮게 했나 보군.’

그게 아니라면 남들 앞에서는 성격 좋은 척을 관두지 않는 남자가 제 앞에서만 저렇게 재수 없이 굴 리가 없었다.

진짜 니키엘은 약간 멍청한데다가 성격까지 좋지 못해 분명 먼저 무례를 저질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진짜 니키엘의 잘못이지 제 잘못은 아닌데 약간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티를 낼 수 있는 부분은 아니기에, 니키엘은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신탁이 그렇게 네 가문에만 전해지는 밀지가 아니라 정식으로 내려왔을 때 다시 논의하자고. 아직 ‘공식적’으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 아닌가.”

니키엘의 그 말에 레이먼의 한쪽 눈썹이 살짝 솟았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이 자식, 내가 덧셈도 할 줄 안다고 말하면 까무러치겠는데. 아, 배알 꼴려.’

갑자기 상황이 신물이 나 니키엘은 레이먼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건강해 보여도 아직 몸이 좋지 않으니 공사가 다망한 공작을 더 잡아 둘 수는 없겠소. 이만 돌아가시오.”

군더더기 없는 축객령에 레이먼은 모욕당한 것보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을 하고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식은 차나 홀짝일 뿐이었다. 그는 곧 들어왔던 것처럼 예의 없이 떠났다. 인사 없이 훌쩍 떠나 버린 투르운 공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니키엘은 목을 두득 꺾었다.

“엇, 빨리 가셨네요.”

떠나는 모습은 보지 못한 것인지, 방문이 열려 있자 의아하게 여긴 폴이 니키엘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니키엘은 폴에게 손짓했다.

“얘, 폴아.”

“안 돼요. 밖에 볕이 얼마나 따가운 줄 아세요? 지금 나가셨다가는 홀라당 다 타 버려서 피부가 갈색 조랑말 같이 변하실 거라구요.”

폴은 니키엘이 이만 나가 운동을 하겠다는 것으로 알아들었는지 놀라 손사래를 쳤다. 나가려던 것은 아니지만 오후에 해야 할 하체 운동을 걸렀다는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더 급한 것이 있었다.

“그건 아니고, 토벌 대회에 대해 자세히 설명 좀 해 보려무나.”

“마물 토벌 대회 말씀이시지요?”

어쩌다 네가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거니, 하는 표정으로 폴이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인이 묻는 말에 대답을 아니 할 수는 없는지라 폴은 최대한 간단히 대답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

“가지가지 하는군.”

레이먼은 짜증이 났다.

그의 인생은 잘 짜 놓은 덫처럼 흘러갔다. 레이먼의 인생은 혹독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그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수장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부의 발트, 서부의 그리프, 동부의 투르운과 수도의 볼트윅. 네 가문은 거대 왕국 오시니스를 지탱하는 기둥들이자 신화에도 기록된 영웅 가문이었다.

그러나 가문의 수장들은 광룡 나시우의 저주를 받아 어느 대건 그 끝이 좋지 못했다. 끝만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시작도 불우하기 그지없었다.

저주는 계승되지만, 해주만 된다면 수많은 이익이 존재했다. 짐승, 그것도 집채만 한 맹수로 변할 수 있는 데다가 그 힘을 무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수장의 힘을 등에 업은 채로 네 가문은 승승장구해왔다.

제국이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커다란 왕국에서 네 가문은 대귀족으로서 깊게 뿌리내렸다.

그렇게 수장의 희생을 발판 삼아 네 개의 가문들은 세력을 불려 온 것이다. 딱 오시니스의 역사만큼 오랜 세월 동안.

그러니 저주가 내려온 수장들이 당해야 할 고통 따위는 등한시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예로, 전대 볼트윅 공작은 레이먼의 손위 누이였다.

그녀 역시 불우하게 태어나 불우한 삶을 살다가 덧없이 가 버렸다. 그 이후로 저주는 레이먼에게 계승되었다.

누이에게 자식이 없는 탓으로, 그녀와 가장 가까운 피 중 제일 어렸던 레이먼에게로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개개인의 고통 위에 핀 연꽃처럼 창창한 가문은 이번에도 레이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각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 니키엘 전하의 선택을 받으셔야 합니다.’

볼트윅 가문은 방계 귀족들이 만든 장로회를 허용해 주었다.

초기에는 수장을 보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라는 취지였겠지만 인간이 둘만 모여도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개같은 짓거리들을 벌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장로회는 어느새 가문 내 이익 집단으로 변모하여 당대의 수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레이먼의 누이인 리아 볼트윅이 공작으로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장로회와의 중재를 힘써 보았지만 흙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그녀의 노력이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런 압박감이 그녀로 하여금 율란 같은 개자식을 마음에 두게 했을 수도 있다. 기댈 곳 없는 이들은 쉽게 사랑을 시작하니 말이다.

‘근데 씨발 사람을 대놓고 종마 취급하네.’

레이먼은 궁정을 막힘없이 걸으며 아주 싱그러운 표정을 하고도 속으로는 욕을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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