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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0)화 (10/130)

10화

새벽에 번쩍 눈을 뜬 니키엘은 설마 싶어 이불을 걷어 보았다가 끙, 하고 앓았다.

어쩐지 민망하여 폴이 들어오기 전에 방에 딸린 욕실에서 시트를 살살 빨아 널어 두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그런 요상한 꿈을 꾸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내내 꾼 꿈에서 니키엘은 웬 건장한 남자와 침대 위를 뒹굴었다. 몽마가 틀림없었다.

몽마는 니키엘에게 못된 손장난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니키엘은 기상 후에도 자괴감에 휩싸였다.

‘남자 신부 후보를 다발로 얻어 버려서 그 여파인 걸까?’

더욱 찜찜한 것은 제 취향의 여성분과 해피 타임을 보내는 것도 아닌 같은 성별의 남자가 나와 이것저것(?)을 한 탓에 이불을 버렸다는 것이었다.

‘욕구 불만인가…?’

저야 원래 욕구 불만 같은 것은 운동으로 풀어 그런 것을 느낄 시간도 여유도 없었지만 이것은 ‘진짜 니키엘’의 몸이 아니겠는가.

평소에도 방탕하게 살았으니 근 한 달간 열심히 운동했다고 해도 몸이 해소하지 못한 잔여 욕구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문란하게 살았다고 하니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 남자를 상대로 그런 꿈을 꾼 것도 다 이 몸 때문이야. 나는 그런 쪽 취향은 없었잖아.’

니키엘은 쉽게 생각했다. 온몸에 근육이라고는 없던 한 달 전이라면 괜히 불안하고 우울하겠지만 지금의 니키엘에게는 고민이랄 것이 별로 없었다.

원체 성격이 긍정적인 것도 있었지만 운동으로 인해 불안증과 우울증이 많이 가라앉은 덕분에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를 굳이 질질 끌거나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운동의 순기능이지.’

니키엘은 일찍 기상한 김에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산책이나 해야겠다 싶어졌다. 어깨 위에 새를 얹어 두고 산책을 나가면 멋지게 보일 것 같았다.

어젯밤만 해도 제 침대에서 같이 자던 새가 없길래 따로 침대로 쓰라고 내준 바구니에 가 보았더니 거기도 없었다.

“얘가 어딜 간 거야.”

새야, 하고 불러 봐도 나오지를 않았다. 혹시나 싶어 창가로 가 보니 창문이 살짝 열려 있고 검독수리의 것으로 보이는 검갈색의 깃털이 떨어져 있었다.

니키엘은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인사하고 가지….”

사람을 잘 따르기는 해도 야생의 새인 이상 아예 복종한다기보다는 워낙 영리하여 말을 알아듣는 느낌이었다.

따로 주인이 있는 것은 아니고 야생 태생이라는 것이니 답답하여 그대로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을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니키엘은 그 새가 좋았지만, 그 새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이었으니까. 대신 떨어진 깃털을 주워들었다.

깃털 펜으로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니키엘은 그냥 떠나 버린 새를 향해 조금 서운한 마음을 가진 채 이른 아침 산책을 나섰다.

아침 해는 이제 막 동쪽 하늘 끝에서 산맥을 타고 오르느라 바빠 보였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기운이 어린 해를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물러나고 있는 중이었다. 니키엘은 들고 왔던 작은 책을 읽기도 하고 해를 바라보며 걷기도 하다가 야생 라벤더를 만나면 그 잎을 따 책갈피 대신 쓰기도 했다.

신체가 ‘진짜 니키엘’의 것이니 뇌와 지능 또한 그의 것인지라 걱정했는데, 이 말썽쟁이 왕자님은 의외로 머리는 좋았던 것인지 책의 구절을 이해하는 속도도 빠르고 무언가를 익히는 것에도 재주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 말하는 망종 짓거리를 일삼은 것에는 그저 그의 취향이 특별하고 그의 성격이 지랄맞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이세계의 학문은 마법과 밀접한 관련이 깊었다. 이세계의 연금술사들은 철을 금으로 바꾸는 것을 성공시켰다.

마나를 이용한 화학 실험이었다. 니키엘이 살던 곳의 기초 화학들이 모두 철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태어났다면, 이곳의 화학들은 마나를 기반으로 점점 더 다양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이라는 과학까지 가능해진 것이다.

‘어떡해…. 너무 재미있다….’

천상 이과돌이에 공부가 좋아 대학원까지 끌려갔던 니키엘은 아직까지 정신도 못 차리고 또 이곳에서도 공부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지금 들고나온 책 또한 ‘기초 마법 입문론’이었다. 제가 알고 있던 지식과 교묘하게 섞여 가는 이곳의 마법에 대해 감탄하는 한편 행복한 기분까지 느끼는 중이었다.

그렇게 걷고 있을 때였다. 사위가 갑작스레 어두워진 것이다.

“어…?”

투둑, 하며 물방울이 가죽 양장 표지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비가 왔나 하고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아직 여명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어슴푸레한 것 빼고는 멀쩡했다.

코에서 무언가 주륵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뭐야.”

니키엘이 의아해하며 손으로 인중을 훔쳤다. 코피가 나고 있었다. 어쩌지, 하고 멍하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빌어먹을 자식이 지평선 너머로 뜨고 있군. 내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누군가, 니키엘의 정신을 통하여 말을 걸어왔다.

음파가 공기를 진동시키고, 그 진동이 고막을 울리는 식의 전달이 아닌, 혼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깊고, 낮은. 커피 위 크레마를 걷는 것 같이 묵직하고도, 어느 성스러운 곳에 매달린 종을 타종하는 듯한 소리.

니키엘은 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고, 눈을 마주쳤다. 세상 모든 슬픔으로 만든 해변에 애상 젖은 파도가 몰아치는 것 같은.

남자의 눈이 딱 그러했다.

붉가시나무의 정상 위에 올라가 있는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 하나 축 처진 모양새가 없었다.

그는 나무의 꼭대기에 달린 나뭇잎 하나에 서 있었다. 니키엘은 눈을 크게 떴다. 삐익-, 하는 이명과 함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불던 바람까지 멈추고 이 땅 위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이 그저 그림이 되어 남자와 저 사이의 배경으로 변한 느낌.

그 초현실적인 감각에 니키엘은 멍하게 그를 마주했다. 남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은 눈썹 뼈, 석탄으로 그린 듯한 눈썹, 밤하늘을 으깨어 바른 듯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속눈썹, 그리고 황금색의 두 눈동자.

그렇게 하나하나 떼어 보면 아름답다 못해 경이로운 생김이라도 얼굴 전체를 인식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니키엘은 그렇게 인상적인 생김을 갖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두 눈을 깜빡이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남자는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가 나를 그렇게 보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또 한 번, 머릿속에 저절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이 지나면 그대도 나를 기억할지 모르지.

남자는 공허하게 속삭였다. 니키엘과 남자의 거리는 꽤 멀었는데도 속삭이는 음성이 귓가에 천둥처럼 찬란했다.

저 빌어먹을 것이 그대의 희고 고운 뺨에 주근깨를 만들고.

남자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을 향해 짓씹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니키엘을 돌아보았다.

시간이 그대를 지나가 지금의 그대보다 훨씬 더 자란다면.

…그때는 나를 기억할지도 몰라.

남자가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젖은 부엽토 위로 뛰어내렸는데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웃자란 풀들은 남자의 발목을 스치지도 못했다.

고운 비단신을 신고 있는 남자는 천천히 니키엘을 향해 걸어왔다. 발걸음 하나하나 땅을 밟는다기보다 공기를 밟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다가왔고 니키엘은 숨을 죽였다. 지척에 있는 남자는 니키엘이 이곳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컸던 레이먼보다 키가 크고 골격이 장대했다.

눈앞에 거대한 산맥이 다가와 니키엘의 앞에 쿵, 하고 제 몸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남자가 니키엘을 향해 말했다.

나를 기억할 수 있겠어?

무얼? 니키엘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내가 그를 알던가. 하지만 니키엘은 그와 같은 생김은 본 적도 없었다.

잠깐, 생김이라니…. 니키엘은 눈을 깜빡이는 그 짧은 순간에도 시시각각으로 남자의 모든 것을 잊어 먹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 순간들을 제외하고, 니키엘은 그를 잊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이 떠오르는 태양의 탓이라는 듯 저 멀리 산령에 걸린 빛을 쏘아보았다. 그것만으로도 다시금 여명이 도래한 듯, 이제 막 밝아지려던 땅이 다시금 살짝 어두워졌다.

그대는 나를 기억해 내야 해.

그대의 기억까지 모조리 껴안고 사는 가련한 짐승을 동정하여.

뼈에 에이는 칼바람처럼 춥고 서글픈 목소리였다. 니키엘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누군가 니키엘의 마음속에서 절규하며 울고 있었다.

그 절규가 너무도 처절하여 니키엘의 뺨이 금세 눈물로 젖었다. 남자는 그런 니키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가 그대의 충실한 종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도록.

남자는 멍하게 서 있던 니키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는 기어코 니키엘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팔을 뻗어 니키엘의 손을 가져간다. 그의 목소리가 좌우로, 마치 바다 한 가운데의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기억해 내. 내 이름을.”

니키엘은 그대로 졸도했다.

산책을 나갔던 왕자가 왕궁 정원 숲 한복판에서 코와 귀, 입에서 피를 흘린 채로 발견된 것은 정오가 가까워 오던 늦은 오전 무렵.

쓰러져 있던 것을 발견한 숲지기가 그를 업은 채 왕자궁을 향해 뛰어갔다. 니키엘은 나흘 내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니키엘이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서글픈 느낌밖에 남지 않은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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