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놀아 준다는 말이 레이먼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왕자궁을 지척에 둔 뒤였다.
‘그러고 보니까 이곳 놈들은 내가 그 방면으로 걸신들린 사람인 줄 알 텐데.’
제 뜻은 그저 어린 애와 놀아 준다는 것으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려는 의도가 다였지만 레이먼에게는 다른 의미로 들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내가 저를 유혹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으.’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아무리 레이먼이 남자가 봐도 반할 만한 미남이라고 하지만 제가 앞장서서 유혹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제 평판이 어떤지 말해주지 않으려는 폴을 구슬리고 협박하여 알아낸 결과, 니키엘은 온갖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천하의 난봉꾼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색을 밝히는 것은 자신도 남자니 이해는 가는 터라 처음에 니키엘이 온갖 난봉 짓을 일삼는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그렇군, 하고 단순하게 넘어갔었다.
그러나 ‘진짜 니키엘’의 진면모는 소문이 축소되고 잘 포장된 것으로 보일 정도로 심각했다.
이하 시종 폴의 증언을 들어 보겠다.
‘전하요, 제가 아는 난봉꾼 중에 최고였어요.’
니키엘이 듣기에 이 몸은 정도도 모르는 자식이었다.
궁중 연회에 초청된 귀부인을 꼬시는 것은 물론이요, 그 귀부인이 지쳐 쓰러지듯 잠을 자면 이번엔 그 집 마구간지기와도 붙어먹었다고 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취향에 신분제에서 왕족으로 태어난 주제에 꽤 계몽적이라 신분의 귀천도 마다하지 않는 자애까지 있었다.
유일하게 건드리지 않는 이들은 시종들이었는데 그나마도 왕이 귀찮게 잔소리할까 봐 조심하는 것에 불과해, 귀족가에서 연회가 열리면 그 집 종과 사랑을 나누는 것도 서슴지 않는 무뢰배였다.
니키엘은 다른 것보다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이 체력으로 어떻게?”
왕궁이 넓다고는 하나 하늘 아래 궁이건만 그거 좀 걸었다고 헥헥 거리는 이 체력으로 어떻게 그런 정력적인 활동을 할 수 있냐는 말이다.
지난 한 달간의 운동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듯이 그거 조금 걸었다고 바로 숨이 가빠왔다.
왕궁은 넓고도 넓은 탓에 니키엘이 왕자 궁으로 건너가는 중간에는 숲까지 있었다.
이 숲을 지나면 바로 왕자 궁이 나오니, 차가운 물로 씻은 뒤 낮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 후 낮잠이 몸의 면역계를 활성화 시켜주고, 활력을 끌어올린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건강 상식이었다.
그렇게 좀 더 힘내 보자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치리리, 치리리리-.
어디선가 새소리가 났다. 산비둘기나 뱁새처럼 작은 새가 아닌 커다란 새가 내는 소리였다. 소리가 무척 큰 걸로 보아 새 역시 거대할 것 같았다.
니키엘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리가 낮게 들리는 터라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부츠 정도 오는 길이의 수풀들을 헤치며 걷는데 작은 검독수리가 날갯죽지에 화살을 맞고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 덜 자란 것인지 성체 검독수리보다는 한참이나 작았다. 고작해야 산비둘기 크기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검은색 날개깃에는 윤기가 돌고 눈동자가 흑요석을 박아 넣은 듯 반짝이는 아주 잘생긴 어린 검독수리였다.
“저런….”
이쯤에서 밝히자면, 니키엘의 전공은 동물 생태학이었다. 주 전공은 포유류 쪽이었지만 검독수리의 생활사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니키엘은 천천히 버둥거리고 있는 수리에게 다가갔다.
“쉬, 괜찮아.”
화살은 깃 부분이 부러져 있어 누구의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꽤 깊숙이 박혀 있었다.
수리는 니키엘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경계하듯 눈알을 데록 굴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끽끽거리는 것이 위협하는 듯했지만 니키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수리는 니키엘이 제게 다가올수록 다치지 않은 다른 쪽 날개를 퍼덕거렸다. 다치지 않은 쪽이라고 해도 화살촉이 박혀 있는 어깻죽지가 아프지 않을 리 없는데 버둥거림이 더 심해졌다.
니키엘은 한숨 쉬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리를 만류했다.
“신경질 내지 마. 날개 더 다치고 싶어?”
기대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수리가 흑요석을 박아 넣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를 또 데룩 굴리더니 체념하듯 날갯짓이 멎었다.
축 힘을 뺀 것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보아하니 화살에 맞은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완전히 지혈된 것은 아니라서 상처 주변부에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태학자이지 수의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라 니키엘은 화살촉을 빼내지 않은 채로 제 셔츠를 벗어 조심스레 수리의 양 날개를 감싼 뒤 품 안에 품었다.
안쪽에 입고 있던 아주 얇은 모슬린 셔츠만 입은 채로 니키엘은 수리의 상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삐로로, 치리리-.
새는 무언가 조잘거렸다. 니키엘은 살살 도닥여 주며 속삭였다.
“괜찮아. 헤치려는 거 아니야. 치료해 줄게. 고생 많았다.”
피를 꽤 오래 흘렸는지 피에 젖어 있던 깃이 꾸덕하게 말라 있는데도 니키엘은 수리를 품 안에 소중히 안고 걸었다.
새는 가만히 두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품 안에서 그런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니키엘은 아이를 어르듯 말을 걸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어. 많이 무서웠지?”
피를 흘려 차가워졌던 새의 몸이 니키엘에게 닿자 천천히 따뜻해져 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니키엘은 최대한 조심히 걸으려고 노력하며 서둘러 왕자 궁 안으로 들어갔다.
“폴!”
백화관까지 니키엘을 안내한 뒤 왕자 궁으로 돌아가 있던 폴은 그를 부르는 소리에 나왔다가 여러모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폐하의 시종들에게 안내를 부탁하겠다며 폴을 먼저 보냈던 니키엘이 혼자 돌아온 것도 모자라, 아침에 입고 나갔던 셔츠는 어쩌고 살색이 다 비치는 얇은 모슬린 셔츠만을 입고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하얀색 셔츠는 피에 젖은 것처럼 검붉은색 얼룩이 묻어 있었다. 니키엘이 다친 줄 알고 다리가 풀릴 지경으로 놀랐던 폴은, 곧 그것이 니키엘의 것이 아닌 품에 안고 있는 무언가에게서 옮겨붙은 핏자국임을 깨달았다.
“저, 전하, 그건 뭡니까?”
“수의사, 는 당연히 없을 테고. 여기도 매사냥을 하나?”
“매사냥이요…?”
물론 많은 귀족이 매사냥을 즐기고는 한다. 폴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키엘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럼 매지기를 불러와. 검독수리라 매가 아닌 수리과지만…. 같은 맹금류의 상처를 살필 수는 있겠지.”
“네, 네. 아마 그럴 겁니다. 혹시 모르니 전서구 감독관도 불러올게요!”
폴은 그제야 정신 차린 듯이 니키엘의 품 안에 있던 검독수리의 상태를 보고는 빠르게 시종들에게 지시했다.
니키엘은 그동안 수리를 조심스레 껴안고 있을 뿐이었다. 품 안에서 얕게 숨쉬는 수리의 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걸어 제 방으로 걸어갔다.
“여기는 내 집이야. 곧 있으면 널 돌봐 줄 사람이 올 거야. 상처를 치료하면 소고기를 줄 테니까 먹고 한숨 푹 자면 된단다.”
잡다한 일을 하는 시종에게 매지기와 전서구 감독관을 불러오라고 지시한 폴이 다시금 니키엘의 곁으로 돌아왔다.
“끓여서 한 김 식힌 물이랑 깨끗한 무명천을 가져오도록 해. …여기도 소독제 따위가 있나?”
“소독용 술을 말씀하시는 거죠? 가져오겠습니다.”
술을 증류하기 전에 순수한 알코올의 도수를 높여 소독용으로 쓰는 술이 따로 있다고 했다.
꽤 보건이 발달 했다는 생각을 하며 니키엘은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수리가 더러운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제 침대에 조심스레 새를 올려 두었다.
“좀만 쉬고 있어. 곧 치료해 줄 테니까.”
손님 아닌 손님이 온 왕자 궁은 조금씩 시끄러워졌다.
검독수리는 분명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듯 보였는데도 그런 소리에는 민감하지 않은지, 내내 순한 눈으로 니키엘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것이 귀여워 그 옆에 배를 깔고 누워 한쪽 손은 턱을 괴고 다른 쪽 손 검지로는 새의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착하고 순하구나. 이름이 뭐니?”
“…….”
새가 대답할 리도 없는데 니키엘은 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새의 턱을 긁어 주었다. 맹금류이니 부리가 무기처럼 날카로워 까딱하다가는 손가락 마디 하나가 날아갈 것을 알고 있는데도 어쩐지 이 새가 자신에게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머리를 긁어 주자 눈을 감고 골골거리는 것이 집고양이를 떠올리게도 했다.
“이렇게 얌전한 종이 아닌데. 넌 무척이나 똑똑해서 도와주려는 사람을 구분하는구나.”
니키엘은 계속해서 새를 칭찬했다. 가만히 손길을 받아 내는 것도 귀엽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흑요석 눈동자가 예쁘기도 해 그 뺨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하여 생태학자가 되었던 니키엘로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새는 놀랐는지 갑자기 꽥 소리를 질렀다.
작은 몸짓에 비해 꽤 큰 소리였다.
“이런, 놀란 모양이네. 너를 먹으려던 게 아니라 애정 표현이야. 네가 너무 예뻐서 뽀뽀한 거라고.”
니키엘은 피식 웃으며 새에게만 들리게끔 속삭거렸다. 니키엘의 아마빛 머리카락이 스르륵 내려와 수리의 몸에 닿아 있었다.
수리는 눈알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이내 빤히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좀 전과는 다른 눈빛이었다.
무척이나 집요하고 또 뭐라 말할 수 없이 일렁이는 그런 눈이었다. 사흘은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해 목이 마른 자의 눈빛 같기도 했다.
니키엘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전이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폴이 매지기가 당도했음을 알렸다.
“음, 들라 하라.”
니키엘은 망설이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등 뒤가 따끔했다. 뒤를 돌아보니 새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곧,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니키엘의 시선이 다시금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