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
배우자 후보라니. 대체 누가 누구의?
니키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현실 부정을 하고 있던 그때, 왕은 제 아들의 기색을 살피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율란 발트 대공이나 루시안 투르운 공작, 지카리 그리프 후작과는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지만 볼트윅 공작이 내궁한 김에, …아니 얘야. 짐의 말을 듣기는 하는 거니? 입이 아프구나.”
물론 니키엘은 왕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대리석에 머리를 박으며 통촉해 달라는 무언의 의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할복이라도 해야….
어떻게든 부왕에게 제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여러 생각을 하던 니키엘의 상념이 맞은편에서 들린 허스키한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폐하, 니키엘 전하께서 쑥스러워하시지 않습니까. 짓궂으신 부분은 여전하시군요.”
“흠, 내가 무얼. …정말 쑥스럽기라도 한 게냐?”
레이먼이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왕이 짐짓 면구스러운지 제 턱을 문지르며 니키엘에게 슬쩍 물었다. 마치 니키엘이 그런 감정은 느끼지 못하
저딴 대사 때문에 지금 내 할복 타이밍을 놓친 건가? 니키엘은 레이먼을 노려보았다. 오늘의 원한을 잊지 않고 녀석을 제 부하로 구슬린 후 마음껏 복수할 생각이었다.
예를 들면 퍽퍽한 비스킷 열 개를 한꺼번에 먹인 뒤 물 한 모금 주지 않는다거나, 햇빛이 강할 때 족구 다섯 판을 연달아 뛰게 한다거나 하는 그런 복수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이 자리가 단순한 아침 식사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설마, 영감탱이 나한테 신붓감 소개해 주는 자리인거야…?’
머리를 대리석에 박고 기절한 지도 어언 한 달, 궁의는 왕에게 그의 아들이 기억 상실증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기억이 없다면 오히려 다행이라는 식으로 아들의 혼사를 서둘렀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동태를 살펴보니 망나니같이 아버지 앞에서 머리를 박고 기절해 버린 아들은 아침 산책도 열심히 하고 고질병이던 패악도 덜 부리며 규칙적인 운동으로 새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였나 보지?
은근슬쩍 멀대 같은 신붓감을 데려와 얘랑 결혼 어떻니? 하고 교양 있게 묻고 있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한 교수보다 악질이군!’
그것은 니키엘의 가장 심한 욕이었다. 한 교수로 말할 것 같으면 니키엘의 지도 교수로서 대머리에 매일 같이 식사 후 양치도 안 하고 믹스커피를 마셨으며 결정적으로 니키엘을 종 부리듯 했다.
그런 놈보다 더하다는 것이 니키엘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미령하여 픽 쓰러지겠나이다, 하며 졸도하기에는 근간에 잘 만들어 둔 근육이 너무도 튼실했다.
니키엘은 하는 수 없이 그들 앞으로 접시를 가져다 두던 시종의 손아귀에서 음식을 빼앗듯 가져와 어른이 먼저 한 수저 뜨시든 마시든 입에 처넣기 시작했다.
“아니, 누가 왕자를…. 굶기기라도 했는가….”
왕이 황망하여 하는 소리에도 니키엘은 입으로 음식을 쑤셔 넣기 바빴다. 그런 니키엘을 가지가지 한다는 표정으로 맞은편에서 레이먼이 바라보고 있었다.
‘뭘 야려. 너도 나랑 결혼하기는 싫을 거 아니야! 나중에는 너도 이 형님을 고맙다고 할 꺼다.’
그렇게 생각하며 접시 하나를 다 비운 니키엘은 절반은 음식물을 으적으적 씹고 있는 채로 말했다.
“아바마마, 저는 아무래도 체한 것 같사옵니다. 이만 물러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뭐…? 체하다니, 그 접시는 네가 다 비운 게 아니면…. 아니, 알겠다. 물러가거라, 니키엘.”
황당함을 감출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더듬거리던 왕은 이내 한숨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니키엘이 그런 괴상한 짓을 한 이유를 깨달은 듯싶었다.
‘봤지, 영감탱. 왕실에 돼지 한 마리 기른다는 소문 나기 싫으면 앞으로는 이런 식사 자리 만들지 마.’
니키엘은 텔레파시로나마 강력하게 경고하고는 식탁보를 들어 입가를 아무렇게나 닦고는 일어섰다.
왕과 시종들이 니키엘을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원채 또라이 같은 짓을 잘했던 니키엘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다른 방식으로 미쳤구나, 하는 듯싶었다.
니키엘은 사뿐하게 걸었다. 아침도 해결했으니 바로 무산소 갈겨 준다. 오늘은 하체 운동을 할 차례였다.
하체, 하체, 하고 중얼거리며 왕자 궁을 향해 직진하는 니키엘은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잡는 힘에 어쩔 수 없이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자식이 왕자님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굴지?’
내내 서민으로 살았으면서 니키엘은 왕자가 된 자신을 120%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 빙의되었을 때 왕자 소리를 어색해하던 건 다 잊은 채 말이다.
자신을 ‘왕자님’으로 3인칭 호칭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왕자님의 길을 막는 놈, 용서하지 않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돈 순간이었다. 니키엘은 이마를 팍 부딪치고야 말았다. 커다란 벽 같은 것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이었다.
뭐야, 어떤 자식이 왕자님의 허락도 없이 복도 가운데에 턱 하니 서 있는 거야!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여전히 방정맞으십니다. 다른 이의 살갗이라면 그게 누구든 군침을 흘려 대며 품 안에 뛰어들기 바쁘시군요.”
뭐라고? 황당한 말을 들은 니키엘이 반문하기도 전이었다. 손목이 아파 왔다. 니키엘의 손목을 쥐고 있는 악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바스라질 것 같은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것을 쥐고 있던 이가 다시 한번 낮게 뇌까렸다.
“오늘은 웬일로 한 마리 금강앵무처럼 화려하고 천한 옷을 입지 않았다 했더니 사내를 유혹하는 향유를 뿌리셨군요. 아프셨다기에 정신이 나갔나 걱정했는데, 여전하십니다. 천박한 나의 왕자시여.”
누가 이렇게 저를 비꼬나 했더니 식당에서 내내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던 레이먼이었다. 여전히 다정한 낯짝으로, 여름의 물푸레나무잎처럼 파릇하고 싱그러운 녹안은 니키엘의 건강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것처럼 따뜻한 온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낯짝에 속기에 니키엘은 너무도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았던 인생이었다. 그는 그저 황당했다.
‘아니 이놈의 나라는 왕족 불경죄, 뭐 이런 죄는 없는 거야? 어디서 공작이 왕자한테….’
거기까지 생각하니 레이먼 볼트윅 공작의 위치에 대해 되새기게 됐다. 고위 귀족이 몇 없는 왕국에서 딱 두 명 있는 공작이자 개국 공신과 다름없는 영웅 가문이 아니던가.
그에 비해 니키엘은 네 가문의 저주를 해주 해 줄 열쇠기는 하나 패악을 부리고 본인이 평판을 너무도 많이 망치고 다닌 탓에 정치적 위치가 애매해 보였다.
‘공작쯤 되면 왕위와는 거리가 먼 왕자에게는 이렇게 심하게 굴어도 된다 이건가.’
니키엘은 어느새 태도를 바로 하고 횡격막을 판판하게 만든 뒤 그 위에 척추를 세워 자세를 곧게 만들었다.
싸움이란 육탄전으로 불거지지 않는 이상 늘 당당한 태도가 중요하니 말이다. 니키엘은 유려한 입술로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공이야말로 꽤 혈기 왕성하군요.”
“그게 무슨.”
“복도 한 가운데서 이렇게 내 손목을 잡지 않아도 나는 공이 하는 대화 신청을 거절하지 않을 거란 얘깁니다.”
니키엘은 그렇게 말하며 내내 붙잡혀 있던 제 손목을 빼냈다.
뭐? 사내를 유혹하는 향유? 그런 향유를 쓰겠다는 폴을 만류하고 말로만 들어도 단정하기 그지없는 연꽃 향유를 가져오라고 했건만, 어디서 건방지게.
니키엘은 고개를 살짝 들고 눈을 내리깔며 저보다 높은 곳에 있는 상대를 업신여기는 표정을 지었다. 백금색 속눈썹이 니키엘의 눈이 깜빡일 때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락였다.
레이먼이 하, 하고 비웃는 듯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것 봐라? 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전하의 말은.”
순록이라고 들었는데 어디서 육식 동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제가 먼저 천박하기 그지없는 전하께 매달리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는 지척까지 다가와 낮게 뇌까린 목소리로 니키엘을 향해 속삭였다. 위장처럼 입가에 걸쳐 두던 미소는 이제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진작 지운 지 오래였다.
눈빛을 보니 어딘가 좀 돌아있었다. 자꾸 니키엘이 먼저 빼낸 손목을 흘끗 거리는 것도 수상했다. 꼭 목마른 사람이 한 컵의 물이라도 바라보듯 갈증이 가득한 눈이었다.
누가 이 자식 아침에만 약을 탄 건 아닐까? 태도가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니키엘은 제게로 한 걸음 더, 불쑥 다가온 레이먼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쫄지 않았다.
한 교수가 아무리 굴려 먹어도 단 한 번도 굴하지 않고 박사 졸업까지 무사히 마친 자신이었다. 게다가,
‘그래 봤자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놈한테 쫄 수야 없지.’
저쪽에서 박사까지 지낸 삼십 대였으니 레이먼은 적어도 저보다 여섯 살 이상은 아래일 것이다.
‘네가 기저귀 찰 때, 형은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 외우고 다녔다.’
물론 이세계에 진사오미 같은 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유교 나라에서 자란 니키엘에게 나이가 주는 든든함은 강력했다. 니키엘은 한 치의 떨림도 없이 레이먼의 녹안을 마주했다.
제 비단신에 박아 둔 에메랄드처럼 맑게 빛나는 녹안이었다. 누군가 정을 대고 세심하게 깎아 만든 것 같은 콧날이 남자다움을 더해 주지 않았다면 유순한 눈매와 섬세한 녹안 때문에 예쁘장하다는 희롱을 꽤 당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잘생기면 형 막 무시해도 되냐?
니키엘은 한쪽 눈매를 가늘게 뜨며 레이먼을 바라보았다.
“물으니 하는 말인데, 솔직히 불량배로 보입니다, 공.”
“…….”
“내가 그렇게 좋으면 알현 신청하세요. 가는 사람 손목 붙잡지 말고.”
니키엘은 레이먼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가벼운 손짓이었는데도 레이먼의 상체가 쉽게 뒤로 물러났다.
니키엘의 말에 황당해 아무런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니키엘은 피식 웃었다. 엉아가 봐준다. 하는 미소였다.
“그러면 또 압니까. 내가 공이랑 놀아 주기라도 할지.”
그렇게 말한 뒤 니키엘은 바로 레이먼의 어깨를 툭 치고는 복도를 마저 걸었다.
쫓아와 어깨라도 잡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걱정과는 달리 복도에는 한 사람의 구둣발 소리만 들렸다.
니키엘은 뛰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조심하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