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화
왕궁은 아름다웠다.
‘공짜로 유럽 여행을 하는 기분이군.’
로코코 양식이나 비잔틴 양식으로도 보이지 않았지만 유럽의 여러 성들을 교묘하고도 아름답게 섞어 둔 느낌이 나기도 했다.
지난 한 달간 제 방이나 작은 앞뜰과 정원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 다였던 니키엘은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의 복도 위로 찬란한 햇빛이 들어오자 순수하게 감탄하는 중이었다.
“저건 뭐지?”
“광석으로 만든 조명입니다.”
복도가 그저 햇빛에만 의존한다고 하기에는 균등하게 밝아 두리번거리니 복도에 일렬로 늘어선 조명 같은 것이 있었다.
폴에게 묻자 저절로 빛나는 힘을 지닌 광석으로 만든 조명이라고 했다. 색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데 주백색으로 빛나는 광석이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된다고 했다.
왕궁 복도에 있는 광석들은 모두 주백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니키엘의 방에도 똑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지난 한 달간 어서 이 곯아 빠진 몸뚱어리를 일으켜야지, 하는 생각 때문에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느라 발견이 늦었던 것 같다.
니키엘이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더 걸었을 때였다. 양각으로 조각된 나팔 위에 금박을 입힌 것을 무늬로 쓴 커다란 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왕궁 경비병 두 명이 서로 마주 본 채 기립해 있었다. 왕이 식사를 하는 백화관이었다.
“고하게.”
폴이 쭐레쭐레 튀어 나가 경비병 옆에 서 있던 시종을 향해 말했다. 시종이 니키엘을 흘끗 보더니 흉곽을 크게 부풀리고 소리쳤다.
“니키엘 왕자 전하 드셨나이다, 폐하-!”
그러자 거대한 문이 스르륵 열렸다. 니키엘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나무로 된 것 같은데 안 무겁나. 잘 열리네.’
조금씩 긴장되던 마음도 백화관에 이르자마자 다 풀어진 상태였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성장한 탓에 왕이라고 해 봤자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왕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늘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정신이 명료한 상태에서 왕을 알현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 교수랑 다를 게 없잖아. 사람을 개같이 굴린다는 점이 아주 비슷하겠지. 나는 더 지독한 왕도 모셔 봤다.’
그렇게 생각하자 없던 적개심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이세계의 학과장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이 그런 생각을 하느라 멈춰 있자 폴이 안 움직이고 뭐 하냐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놀라던 시종이 더 놀라기 전에 니키엘은 발을 옮겼다.
문 안에는 족히 8m는 되어 보이는 기다란 호두나무 식탁이 있었고, 그 끄트머리에 왕이 앉아 있었다.
니키엘이 이세계에서 깨어난 뒤 딱 한 번 본 부왕이었다. 그리고 그 옆, 니키엘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일어나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깨가 장대하게 넓고 신장이 무척 큰 것이 며칠 전 보았던 율란 발트와 비슷해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여기 놈들은 어떻게 된 게 하나 같이 다 고목 나무야.’
니키엘의 키 역시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도 상대는 위압적으로 커 보였다. 어쨌든 왕을 앞에 두고 인사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니키엘은 벼락치기로 알아 둔 궁중 예법으로 부왕을 향해 인사했다.
“강녕하시었습니까.”
…물론 짤막하긴 했다.
폴이 알려 준 예법대로라면, ‘여덟 개 주의 주인이시자 오시니스의 태양을 뵈옵니다. 기체후 일향 강녕하시었습니까.’라고 해야 되었으니까.
멋대로 줄여 버린 인사에 왕이 띠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니키엘은 무시한 채로 낯을 굳혔다. 뭐 잘못된 게 있냐는 듯한 뻔뻔한 태도에 왕은 혼란스러운 듯했다.
항상 화려하게 등장하던 아들이 평소에 비하면 장례식 조문객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얌전히 서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왕은 아주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 얼굴이 좋아 보여 다행이구나. 앉거라.”
니키엘은 망설임 없이 바로 상석에 앉은 왕의 옆자리이자 태산같이 커 보이던 남자의 앞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그런 니키엘을 잠시 바라보는 듯했다. 밀짚처럼 옅은 다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녹안에 훤칠한 미남이었다.
율란도 미남이기는 했지만 둘은 살짝 다른 타입이었다. 약간 내려간 눈꼬리가 인상을 유순하고 다정하게 만들어 보이는 듯했다. 그러다가도 곧은 콧날과 강인해 보이는 턱이 그의 남자다움을 부각하고 있었다.
‘같은 미남이라도 저쪽 얼굴이 더 나은데. 니키엘은 너무 곱상하게 생겼단 말이야. 아무래도 운동 무게를 증량해야….’
얇은 몸이 마음에 안 들어 근 손실이 올까 봐 하품으로도 울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중인 니키엘은 살짝 억울해졌다.
이왕 책 속의 인물로 바뀔 거면 저런 얼굴과 저런 몸이 낫지 않겠는가. 장대한 몸에 맞게 단단해 보이는 목에는 호두알처럼 굵어 보이는 목울대가 달려 있었다.
그의 생김새를 보며 다정한 미소로 유명했던 한국의 배우를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목울대가 미세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꼭 시선을 느끼고 긴장한 사람이 마른침을 삼키듯 말이다.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난 니키엘은 왕의 말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볼트윅 공과는 작년에 보고 처음이지, 아마.”
아, 이 남자가 레이먼 볼트윅이군.
원작에서는 어땠더라. 다정하게 웃는 낯으로 주인공인 니키엘을 챙기면서도 혀는 칼날처럼 움직이는 자였다.
그의 걸레라도 문 것 같은 입과 그 다정한 낯짝에서 오는 괴리감에 상대방이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실권과 이익을 이쪽으로 끌어오는 교활한 면모가 있기도 했다.
모든 영웅물의 특성상, 정의심과 의욕만 넘치고 뒷감당은 하지 않는 주인공을 옆에서 조용히 보좌하며 각종 정치 공작을 성공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루시안 투르운 역시 천재라고 불리는 설정이었는데 니키엘은 이런 식으로 두뇌를 정치적으로 굴리는 캐릭터를 좀 더 좋아하기는 했다.
이 거지 같은 소설에서 몇 안 되는 애정 가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회가 좀 남달랐다.
“…얘야, 사람을 너무 빤히 보는 건 아니니.”
때문에 왕이 넌지시 니키엘을 만류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레이먼을 그토록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맞은편에서 니키엘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레이먼이 다소 의아한, 그러면서도 약간은 쑥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그 다정한 생김새에 맞지 않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투가 사근사근하여 그렇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남성성이 진했다.
“괜찮습니다, 폐하. 왕자 전하를 뵌 지 오래라 저도 반가운 마음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 번 더 웃었다.
웃음 하나로 태산 앞에 선 듯 거대해 보이기만 하던 압박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람이 싱그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니키엘은 그런 미소를 못 본 척한 채로 그의 뒤편 화병을 바라보았다는 듯 시선을 살짝 흐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단지 아바마마께서 저 훌륭한 꽃을 제게 하사해 주시진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응? 꽃? 아…. 저거 말이구나. 그래, 시종장에게 말해 놓으마.”
니키엘의 뜬금없는 꽃 타령에 얘가 왜 이래, 하는 표정을 지은 부왕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따지고 들어 봐야 니키엘과 자신의 체면에 좋을 게 없다는 듯이 말이다.
맞은편에서 레이먼이 살짝 웃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웃는 것이 정말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러나 원작을 알고 있는 니키엘로서는 그의 웃음이 다른 뜻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묘사대로라면, 저건 꽤 짜증이 났을 때 짓는 웃음인데.’
미소가 환하면 환할수록 레이먼은 화가 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다지 성질이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누나인 리아 볼트윅이 원래는 당대의 가주이자 ‘나시우의 저주’를 내려 받은 순록이 됨이 맞지만, 그녀는 율란 발트를 짝사랑하다가 그를 따라나섰던 사냥터에서 사냥개에 물려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순록으로 변한 상태였는데, 볼트윅가의 역대 가주들이 그러하듯 그저 그런 순록이 아닌 작은 초가집 두 채를 합친 것 같이 커다란 순록이었기 때문에 사냥개에 물려 죽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녀의 앞발에 짓밟혀 죽은 마물만 해도 수백 마리는 넘었으니까.
레이먼은 그녀의 죽음을 발트가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레이먼은 율란의 뺨에 흰 장갑을 던지고, 결투를 신청한다.
그러나 누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시우의 저주’를 받게 된 레이먼은 결투 도중 광증을 일으키게 된다. 아직 신체가 거대한 순록으로 변하는 저주를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순록이 민가 쪽으로 향하게 되자, 율란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지만 레이먼의 뿔에 뺨이 긁히게 된다. 레이먼도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발목을 율란이 꺾어 버렸으니까.
그 이후로도 레이먼은 늘 율란을 경계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니키엘만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 모든 음모는 율란이 아닌 백부 다이머스 볼트윅의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시기상 마물 토벌 대회를 떠나고 돌아오는 길에 니키엘이 신성력으로 레이먼이 광증을 일으켰던 이유가 다이머스의 계획 중 일부라는 사실을 밝혀 주던가….’
그 사건으로 레이먼은 니키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자신의 누이가 사교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뒤 사냥개에 물려 죽는 수치스러운 끝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음모에 당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혀 누이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야려 봐도 넌 내 밥이라니까.’
물론 니키엘은 모험을 떠날 생각은 없었지만 레이먼 같은 충직한 부하를 두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왜 저를 저렇게 싫어할까. 지금도 니키엘을 보며 싱긋 웃는 미소에는 아주 옅은 경멸이 묻어 있었다. 미처 지우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지울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진짜 니키엘’이 레이먼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것일까. 니키엘은 다시금 레이먼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 요컨대 한 명은 ‘너 내 부하가 되라.’와, ‘사람 열받게 하네.’의 눈빛을 어떻게 오해한 것인지 니키엘의 부왕이 뜬금없는 말을 툭 내뱉었다.
“공작도 네 배우자 후보 중 한 명이니 단란하게 식사나 하자 싶어 불렀다.”
영감탱 노망났어?
니키엘은 이 일곱 글자를 입 속에서 누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