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
입안에서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데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율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살면서 예쁜 여자는 많이 보아도 잘생긴 남자를 본 기억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TV를 틀어야만 간신히 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평범한 축에 속했던 제 얼굴조차 나름 훈훈하다는 소리를 몇 번 들을 정도면 길거리 얼굴 사정이 얼마나 암담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니키엘은 다니던 대학에 배우 누구누구가 촬영을 왔던 때를 제외하고 저런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들어오자마자 수컷의 페로몬으로 방 안을 꽉 매울 정도였다. 본인이 의식한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렇게 되는 듯했다.
압도적인 기운에 유리처럼 얇디얇고 약하디약한 니키엘의 신체가 바르르 떨릴 정도였다.
‘와, 기운으로만 사람 잡아먹을 것 같네.’
그런 말 외에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주 점잖은 맹수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송곳니가 칼날같이 날카롭고 발톱이 사정없이 두꺼운 어떤 맹수에게 간신히 매너를 익히게 한 뒤 정원을 어슬렁거리게 만들어 둔 느낌.
그 저릿함 속에서도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율란의 두 눈을 못 박힌 듯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무감한 흑청색의 두 눈은 흑요석을 박아 넣은 듯 반질거렸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을 가진 한민족의 나라에서 온 니키엘로서도 처음 보는 매혹적인 검은 눈동자였다.
‘남자가 마음먹고 잘생기면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
니키엘은 멍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 앞에 말을 잃고 넋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율란이 폴을 향해 물었다.
“…전하께서 잠깐 얘기를 나눌 정도는 되시냐.”
그의 얼굴에 넋을 놓고 있던 니키엘은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율란의 물음은, ‘얘 아직도 미친놈이야?’ 하고 묻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한심하다는 눈빛은 덤이었다.
니키엘은 큼, 하고 헛기침했다. 폴이 눈치좋게 다가와 니키엘의 입가에 리넨을 대 주었다.
궁정 말투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니키엘은 이과였기 때문에 언어적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대충 사극 드라마 말투 따위를 떠올리며 말하려 노력했다.
“보다시피 미령 하오. 노크도 없이 왕손의 방에 불쑥 들어오다니. 공과 내 사이가 이다지 막역했소?”
“…말투가 이상하십니다.”
율란이 한쪽 눈썹을 추켜 올린 채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뒤에서 폴이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팔로 엑스자를 만들고 있었다.
이거 아니야? 니키엘이 눈으로 묻자 폴이 그렇다고 열심히 고개를 또 끄덕였다. 이상함을 느낀 율란이 뒤돌아봤을 때 폴은 천연덕스럽게 니키엘의 실내 가운을 정리하고 있었다.
“흠, 이런 책을 보고 잤더니….”
“전하께서 책을.”
율란이 비웃는 것도, 감탄하는 것도 아닌 목소리로 말했다. 니키엘은 이것도 아닌가 싶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왜 왔냐고.”
“…이번 토벌 대회에 참가하시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으러 왔습니다.”
격 없는 말투에, 율란은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애초에 너한테는 기대도 안 했다는 얼굴이었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산 겁니까, 니키엘 씨? 니키엘은 허공에 외쳤지만 당연하게도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것보다, 토벌 대회에 참가하지 말라니.
마물 토벌 대회는 원작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에피소드 중 하나였다. 주인공 니키엘이 각 가문 수장들의 충성을 얻는 것도 이 대회에서였다.
그런데 참가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으러 왔다니. 도가 지나친 말이었는지 폴의 안색이 희게 질린 한편,
“그렇게 하겠네!”
니키엘은 반색을 표하며 긍정했다. 안 그래도 귀찮아 죽겠다고 생각했다.
이왕 소설 안으로 들어온 김에 그대로 공략법을 따라 흑마룡 토벌에 나서 영웅이 되는 것도 좋겠지만 이 세계에서 니키엘은 영웅보다 신부가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율란의 말을 들어 보면 니키엘은 토벌 대회에 참가해야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참가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들으러 왔다는 말을 하겠지.
설정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으니 니키엘은 이 토벌 대회가 자신의 영웅적 서사에 대한 서막을 알리는 대회가 아닌 마누라 찾기 게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현대인의 알고리즘을 무시하지 마라. 나는 가설을 세우고 논증할 줄 아는 시대에서 왔다고.’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킬킬거렸다. 피가 묻은 앞니가 드러나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그걸 바라보던 율란이 폴을 향해 말했다.
“전하의 입을 닦아 드려라.”
“네, 각하.”
폴이 냉큼 대답하고는 니키엘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적대감을 드러내던 이가 왜 저를 챙기나 싶어 니키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남자는 거대한 성체 같은 몸으로 방 한가운데에 우뚝 선 채 왕자의 시종을 제 시종 부리듯 하고 있었다. 그것이 예의가 없다기보다는 익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니키엘과 남자의 사이가 가까운 것처럼 말이다. 니키엘은 제 입가를 닦아 주고 있는 폴에게 속삭였다.
“쟤랑 나랑 친해?”
“…그건 아닙니다. 그것보다, 소드마스터라 이 정도 거리에서는 다 들리실 겁니다….”
폴은 조용히 속삭였지만, 그 말에 놀란 니키엘이 율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니키엘이 속닥거리는 말을 모두 들었다고 해도, 네가 하는 얘기는 쓰레기와 다름없어 전혀 담아 두지 않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 위로 무뚝뚝한 기색이 겹쳐 니키엘에게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흠, 아무튼 토벌 대회는 나가지 않겠네. 목적을 달성했으면 이제 내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아무 인사도 없이 떠나도 좋네.”
생각보다 훨씬 더, 서릿발이 휘날리는 것처럼 싸늘한 음색이 나왔다.
니키엘은 사실 제 박사 논문을 여러 번 반려시킨 교수에 대한 악감정을 제외하고는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쌓아 두는 성격은 아니었다.
한 번 본 율란이 저를 향해 무례한 말과 행동을 한다고 해도 속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세계의 특성상 각 가문의 수장들과 친하게 지내는 즉시 왕이 그럼 그이와 결혼할 테냐? 하고 물을 것만 같았다.
현실의 제 몸이 심장 마비로 죽은 것은 확실하니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도 체념하고 같은 것 달린 놈과 한 침대에 눕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남자랑 결혼하라는 말이 몸서리치게 싫다거나 토악질이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이 세계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런 선택을 하기는 싫었다.
그러니 때때로 싸가지 없게 행동하여 율란의 비호감도를 꾸준히 유지해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니키엘의 생각은 먹힌 것인지 율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더니 울뚝 솟아오른 목울대를 짧게 움직이며 마지못해 목례했다.
정말 마지못한 인사였다. 신분제 사회에 태어나 저도 대공이라는 호칭을 받고 있으면서도 꼴에 네가 왕자라 내 가마까지 보일 정도로 인사를 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
“말을 바꾸시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변덕이 심하실 뿐, 생각은 올바르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각하!”
폴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 너 우리 애한테 말을 어쩜 그렇게 하니! 하고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저도 앞장서서 니키엘에게 무례했으면서 아닌 척은. 니키엘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폴, 대공은 귀가 먹지 않았어. 그 정도 거리에서는 개미만 하게 속삭여도 무리 없이 대공의 귀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해 준 건 자네야. 그리고, 대공. 내가 분명 말없이 떠나도 좋다고 했을 텐데.”
“…실례 많았습니다.”
뭐라 패악을 부릴 줄 알았는지, 니키엘의 말에 다소 의외란 듯이 다시 한번 한쪽 눈썹이 쭉 올라간 율란이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오른쪽 다리를 축으로 몸을 휙 돌려 절도 있는 걸음과 함께 방을 나갔다.
가히 모범이 되는 ‘우향우’, ‘앞으로 전진.’이 아닐 수 없었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다면 틀림없이 교관으로 차출되었을 기가 막힌 동작이었다.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폴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토벌 대회는 왜 안 가겠다고 하신 거예요! 그 대회가 어떤 대횐데!”
“어떤 대회인데.”
심드렁하게 묻는 니키엘의 말에 폴은 일장 연설을 시작하였다.
전하께서 기억을 잃은 김에 중요한 것은 몽땅 다 잊으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 대회는 위대하신 태양신 솔리우스를 기리는 행사로, 낮에 시작하여 어둠을 요람으로 삼던 흑마룡 나시우를 몰아내기 위해 마물을 사냥하는 대회라구요.
2년에 한 번씩 북부, 서부, 동부, 수도인 라시리스를 돌며 행사를 치르는데 올해는 라시리스의 외곽 숲에서부터 시작하는 중요 행사예요! 전하는 이 대회에 가셔서 꼭!
“남편감이라도 사냥하라고?”
“그래요, 남편감을! …아니, 통촉해 주세요, 전하. 저는 그런 말은 내뱉은 적도 없습니다.”
“방금 했잖아.”
“그건 그냥 전하의 말을 따라한 것뿐인….”
“됐고. 그럼 부왕께서 그 행사를 통해 내 결혼을 추진하려 하시는 건 맞네.”
폴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중요한 행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으니 어지간히 속이 타는 듯했다.
반면 니키엘은 조금 기운을 차렸다. 일단 토벌 대회 참가는 뒤로 미뤄 놨으니 그동안 여유를 갖고 이 세계에 적응할 방법을 찾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헉, 쿨럭, 윽-!”
“이런,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매분 마다 각혈을 일삼는 이 비루한 몸뚱어리를 어떻게든 계도 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몰아친 과로에 심장 마비를 겪고 사망했지만, 니키엘은 사실 연구실의 건강 전도사였다.
그는 다분히 이과적인 건강 알고리즘 회로를 세워 근육을 증량하고 생활 운동을 습관화하여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건강한 신체로도 요절하고야 말았지만, 부모님 중 한 분이 심장 질환이 있으셨으니 유전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내 건강법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지금 이 썩은 몸보다는 나을 거야.’
니키엘은 다짐했다.
왕의 미쳐 버린 막내아들이 아예 칩거하여 화병 들기 운동에 돌입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그로부터 딱 한 달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