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집채만 한 늑대가 대열을 가장 먼저 앞질러 나갔다. 기사들은 피와 땀, 흙탕물에 젖은 채로 앞서 나가는 커다란 늑대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괴수라고 부를 정도로 덩치가 커다란 늑대가 허벅지 근육이 터질 정도로 눈밭을 내달리고 있었다.
말과 기사들을 제치고 커다란 덩치의 늑대가 튀어 나가자 말들이 놀라 히힝, 거렸다.
너무 빨리 달려 늑대의 뒤편으로 작은 소용돌이가 칠 정도였다.
얼릭이 이제는 점처럼 변해 버린 늑대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각하! 그렇게 빨리 달리시면 후미 대열이 흐트러집니다.”
“놔둬라. 들리시겠냐.”
우장군인 알레윈이 얼릭을 만류했다. 얼릭은 고삐를 당기며 큰 짐승에 놀란 말을 얼렀다.
“아니, 성에 멀쩡하게 계시는 분이 도망이라도 가는 것도 아니고.”
“아, 자식이 말이 많다. 너는 각하 호위라는 놈이 이렇게 뒤 쳐져서 되겠어? 얼른 쫓아 가!”
알레윈의 호통에 얼릭이 쯧, 혀를 차며 달려 나갔다.
저 멀리서, 이테니움의 성체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문비나무 숲 사이로 달려 나간 늑대를 쫓아 얼릭 역시 말을 빠르게 몰아야 했다.
중간부터 말을 버리고 늑대로 변하여 직접 달린 덕에 율란은 금세 성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이테니움의 주인이자 북부 이테렌의 영주, 율란 발트 대공, 정확히는 늑대의 검은 형상을 발견한 경비병이 성문의 도개교를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열리고 있는 문틈 사이로, 율란이 뒷발을 굴려 곧장 달려 성안으로 진입했다.
그는 곧장 성체로 달려갔다. 민가를 지나쳐 오지 않으려고 산을 달렸던 탓에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결국 율란이 멈춘 것은 성의 저택 본채로 향하는 정원 앞에서였다.
피와 흙먼지를 무시하고 그대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율란은 마구간으로 향했다. 커다란 짐승을 씻기기에, 마구간이 제격이었다.
유능한 집사인 핀은 율란의 귀가를 눈치채고 이미 마사 앞에 커다란 수건과 갈아입을 옷, 마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고풍스러운 트립티크를 가져다 놓은 상태였다.
오시니스의 건국 설화에 나오는 태양신과 왕을 비단실로 수놓은 천을 입힌 트립티크였다.
율란은 천천히 몸을 변형시켰다. 길었던 발톱이 사라지고 털이 덮여 있던 등이 인간의 것처럼 매끄러워지는 동안 율란은 짧은 신음과 함께 괴로워했다.
집채만큼 커다랗던 늑대의 몸이 줄어들더니 인간 남성의 몸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 맹수가 품고 있던 야생성까지는 모두 지워지지 않은 것인지, 남자는 인간으로 변한 뒤에도 위협적인 신체를 하고 있었다.
등과 옆구리에 크게 또는 작게 나 있는 상흔들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대변해 주었다. 늑대일 때와 비교해도 살을 저미는 듯한 위협적인 느낌이 결코 줄어든 상태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음. 어디 계시지?”
짧게 끄덕인 율란이 짧게 어깨를 휘둘러 잘못된 곳이 없나 살핀 뒤 그대로 핀이 마련해 둔 목욕통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분이 쓰기에는 부적절할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율란은 괘념치 않은 표정으로 그대로 쑥 들어가 앉았다. 물이 흘러넘치는 소리가 났다.
“안쪽에서 각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은 다소 기상이 늦으셨고 아침으로는 시퐁 열매 시럽을 곁들인 팬케이크와 베이컨, 제철 과일을 몇 조각 드셨습니다.”
“…만족하시던가. 입이 짧은 분이네.”
“다행히, 안 남기고 모두 드셨습니다. 구즈 부인의 실력을 매우 칭찬하셨습니다.”
율란은 목욕 시중을 드는 하인도 없이 몸 이곳저곳에 비누칠을 한 뒤 새 물을 가져오게 하여 정수리 위에 부어 버렸다.
물이 촤륵거리며 요란하게 튀는데도 한 발자국 물러서 있던 핀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고귀한 분께서 뭘 드셨다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만으로도, 아랫배가 당기는 기분이었다.
햇빛에 잘 말린 리넨 수건을 건네는 핀에게서 그것을 받고는 이번에도 시중 없이 제 몸을 닦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위협적인 근육에 덮인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다 닦아 낸 천을 다시금 건넨 율란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지나가던 생각이 얻어걸린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다시금 물었다.
“나머지 놈들은?”
“아직 당도하지 못하셨습니다.”
“…서둘러야겠군.”
그 개자식들보다 먼저 그를 뵈어야 했다. 단장을 끝낸 율란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걸음은 빠른데 큰 키에 보폭이 넓으니 경망스럽지가 않고 우아해 보였다. 핀은 쫓아가며 다소 다급하게 말했다.
“각하, 머리라도 말리셔야.”
“…급해.”
정말 급했다. 그 짐승 새끼들이 몰려오기 전에 제가 제일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계단쯤에서는 뛰다시피 했다.
그는 사용인들이 문을 열어 주는 것도 기다리지 못한 채 제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고.
“율란.”
“전하.”
안쪽에서는 그토록 바라던 상대가 있었다. 백금발의 머릿결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율란은 오히려 입매를 굳혔다. 머저리 같이 벌어지려는 입을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발정 난 짐승처럼 어지간히 헐레벌떡 오셨나 봅니다, 대공 각하.”
“…피 냄새.”
“지카리. 다른 사람이 개 같은 꼴을 하고 다녀도 그 앞에서는 직접 지적하지 않는 것이 예의예요.”
레이먼 볼트윅, 지카리 그리프, 루시안 투르운.
개떼들은 이미 몰려와 있었다. 율란은 이를 아득 갈았다.
저 사랑스러운 사람은 개떼들이 제게 무람없이 달려드는 것을 딱히 말리지 않았다.
긍휼심이 높고 자비가 하늘을 찌를 듯이 훌륭한 이였으니까.
이때다 싶어 물어뜯는 모양새가 하나같이 열받았다. 주인 없는 성이 침입하여 주인이 가장 아끼는 보석을 먼저 갈취하려고 든 개 종자들.
그리고.
“다들 말을 왜 그렇게 해. 고생하고 온 사람한테. 율란, 이리 와.”
오시니스의 영웅, 율란 발트 대공은 저도 모르게 허물어지려는 표정을 단속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리하여 아주 작은 웃음이 입매에 걸리고야 말았다. 그를 이렇게 웃게 만드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니키엘 오시니스뿐이었다.
-라는 책의 구절이 생각났을 때, 니키엘은 현실 부정과 함께 눈을 떴다.
“왕자 전하, 일어나세요.”
우리 엄마도 나를 왕자라 부르지 않으셨는데, 대체 네들이 뭔데 나를 이렇게 귀하게 취급해. 니키엘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3일. 딱 사흘 동안, 그는 제가 처한 이 현실을 무척이나 부정해 보았다.
“전하, 이제는 일어나셔야 해요.”
그러나 지금 간드러지는 말투로 저를 깨우는 시종의 목소리는 찐이고 부드러운 실크 담요의 감촉도 찐이며.
‘아, 오늘도 또 시작이네.’
깨달음과 함께 밀려오는 기침.
“쿨럭-! 컥,”
“아이고, 전하! 또 이렇게 기침을-!”
목구멍에서 피맛이 나도록 터져 나오는 이 기침까지도 찐이었다.
삼찐으로 니키엘은 아웃당하고 말았다. 저는 정말로 소설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것도 같은 연구실의 대학원생이 두고 간 거지발싸개 같은 판타지 무협 소설에 말이다.
‘그 자식…, 통계 프로그램 그따위로 돌릴 때부터 알아봤다.’
니키엘은 실크 담요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어 댔다. 각혈한 상태에서 그러고 있으니 더욱 가련해 보일 뿐.
애초에, 그가 빙의된 이 몸, ‘니키엘 오시니스’는 너무도 약했다!
갑작스러운 기침에 가슴을 부여잡느라 내려온 백금발은 물에 녹아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스라이 빛나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 대학, 한국대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까지 수료한 뒤 담당 교수가 부탁했던 시간 강사 일을 해 가며 국가 소속 연구소에 출근을 앞둔 인생이 하루아침에 웬 허약한 왕자님 몸에 빙의된 것이다.
‘내가 그 책을 왜 읽어 가지고!’
그날따라 괜히 퇴근하기가 싫었었다. 잦은 밤샘으로 인한 피로는 축적된 상태였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할 일이 없는데 잠이 오지 않는 불행을 겪다 보니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두리번거리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때 발견한 것이다. <산스브리안의 금 가지>라는 거지 같은 소설을.
소설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태초의 밤에서 태어난 나시우는 고대 산스브리어로 ‘어둠’이라는 뜻을 가진 흑룡이 있었다.
어느 날 흑룡은 영생을 사는 그에게 찾아와 지혜를 구하는 오시니스를 도와 왕조를 건국한다.
흑룡의 비호를 받아 왕국은 나날이 번성한다. 오시니스는 금수의 왕인 흑룡이 준 능력을 이용하여 동물을 관장하게 된다.
문제는 영생을 산 흑룡의 광증이었다.
순수한 존재인 용이 수많은 권속과 생명들을 죽임으로써 흑마룡이 되어 버렸다.
이에 왕이 고민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네 명의 영웅들이 직접 흑마룡을 처치하기 위해 나선다.
흑마룡이 날뛴 탓에 낮이 오지 않은 한 달을 보낸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싸워 흑마룡을 처단한다.
그리고 결단의 날. 한 달 중 처음으로 낮이 찾아왔다.
밝은 하늘 아래서 싸우느라 힘이 약해진 흑마룡은 노을이 타오를 즘 제 죽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렇게 영웅들은 흑마룡을 처단하고, 왕에게 배신당한 흑마룡은 차마 친우였던 왕을 저주할 수는 없어 영웅들에게 금수로 변하는 저주를 내렸다.
세월이 지나고, 주인공 니키엘은 흑마룡의 저주를 받은 네 명의 귀족들을 위하여 저주를 풀고 마물을 퇴치하러 떠나게 된다.
그렇게 소설은 그들의 모험기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니키엘은 주인공 주제에 고난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인생이라 재미가 없었다.
투덜거리면서도 그저 시간이나 보내자 싶어, 그 소설을 읽고 귀가하던 길, 대한민국 연구원이라면 누구나 시달리는 만성 피로에 의한 심장 마비로 인해 사망해 버린 것이다.
심장 마비는 이렇다 할 징후도 없이 찾아왔다. 위기 탈출 남바원에 나오는 의학적 상식을 써 볼 기회도 없었다.
그 후 깨어나 보니 자신이 소설 <산스브리안의 금 가지> 속의 니키엘이 되어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내가 읽은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이렇게 서로 끈끈하지는 않았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꿈에서 율란과 레이먼, 지카리와 루시안은 마치 니키엘을 아주 귀하게 여기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 구절 따위는 책에서 본 적도 없었다.
‘내가 원작을 오해했었나…?’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소설이 모험물이 아니었다면?
장르가 판타지 무협물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면? 피곤해서 심장 마비로 꿱 뒈져 버린 사람이 책 내용이라고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하, 미친-.”
“헉, 전하, 어디가 많이 미령하신 겝니까?”
니키엘은 제 머리를 싸맨 채로 짜증을 냈다. 옆에서 시종이 제 욕설을 듣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당장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각종 보험은 들어 뒀어도 책 속에서 눈 뜨는 것에 대한 보험은 들어 놓지 않았었다.
니키엘은 황당했다. 그러나 이제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곳에서 눈을 뜬 지도 벌써 사흘째.
그 3일의 아침 동안 제 방 천장이나 연구실의 석고 텍스 천장이 아닌 휘황찬란한 비단 캐노피 아래서 깨어나야 했던 것이다.
‘그래. 뭐, 조실부모하고 남은 건 학자금밖에 없는 인생인데 왕자가 나을지도 모르지.’
니키엘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는 다분히 긍정적이고, 적응력도 뛰어나 이미 누가 니키엘 전하, 하고 부르면 고개가 휙 돌아가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적응력에도 불구하고 부왕의 말은 청천벽력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