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큐 (2)
영상은 흰 배경으로 시작했다. 텅 빈 화면에 누군가가 다가온다. 금욕적으로 느껴지는 검은 제복은 입고 있는 사람의 몸 때문인지 의도와 달리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지승운이 흰 공간에 앉았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회색빛에 가까운 눈동자가 화면을 바라봤다. 밑에는 지승운의 이름과 나이, 에스퍼 등급, 그리고 소속 센터가 자막으로 나왔다.
“질문 드리겠습니다.”
지승운은 대답하지 않은 채 화면을 응시한다.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처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눈이 한번 깜빡였다. 그리고 부드럽게 휘어졌다.
“글쎄요.”
그는 뭔가 부끄러운 듯, 혹은 행복한 듯 웃어보였다.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
그리고 화면이 어둠에 잠식됐다. 잠시 후 ‘지승운은 괴물이다.’ 라는 한 문장이 화면에 떠올랐다.
이제 막 에스퍼가 된 이들은 일을 할 때 캠을 달고 다닌다. 희귀 괴수, 혹은 까다로운 괴수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죽이는지 기록하여 그것을 토대로 정보를 얻기 위함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신입 에스퍼의 약점이나 습관 등을 알기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 현장에 익숙한 에스퍼들은 캠을 달지 않지만, 그들이 훈련시켜야하는 신입의 캠에 모습이 남아 있곤 했다. 지승운의 괴수 사냥 역시도 그런 신입 에스퍼들의 캠에 남아있었다. 모든 자료는 이능청이 제공되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지승운은 매번 피투성이였다. 지승운의 피는 아니었다. 그는 어떤 모습의 괴수 앞에서도 웃어보였다. 그냥 눈 한번 깜빡했을 뿐인데 괴수가 터져나갔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면 땅이 갈라졌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 보는 모습이 무서웠다. 그가 다스리는 물이 중력을 거스를 때면 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홀로 허공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 볼 때면, 인간 같지 않다.
애초에 에스퍼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지만 사람들은 때로 겉모습만 보고 인간이라 칭했다.
쉴 새 없이 전환되는 지승운의 전투 장면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왔다. 각기 다른 목소리가 승운에 대해 말했다.
— 괴물이죠
— S급 에스퍼는 달라요. 다른 에스퍼들과 비교할 수 없죠. 국가에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 다른 국가에서 회유가 많았다고는 들었습니다.
— 하지만 반쪽짜리 에스퍼죠.
— 가이드가 없으니까.
— 가이드가 없잖아요.
— 30퍼센트 대 가이딩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다시 지승운의 모습이 나온다.
그는 여전히 괴수를 학살했다. 하지만 포커스는 지승운이 차고 있는 시계에 맞춰줬다. 검은색, 검녹색, 녹색, 노란색, 주홍색, 붉은색.
— 폭주 직전의 에스퍼라니.
— 붉은색 시계요? 그걸 의미하는 건 한가지입니다.
— 폐기요.
그리고 다시 승운의 모습이 나왔다.
“가이드 없이 산 지 몇 년이었죠?”
“스무 살에 발현되어서 서른 살 까지 가이드가 없었습니다. 그 중 3년은 살 만 했지만, 7년은 끔찍했죠.”
“힘들지 않았나요?”
“지옥이었습니다.”
승운의 표정이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제 가이드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는 산지옥에서 사는 거죠. 단테의 지옥이나, 불교의 지옥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아니, 아니지. 그 지옥을 꾸며내는데 기초가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지승운이 웃는다.
다시 화면이 잠식됐다. 2022년부터 서서히 숫자가 줄어들어 2012년에 멈췄다.
막 각성 되었을 때의 지승운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는 굳은 표정이 많았다. 승운의 각성 직후부터 나이가 드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 모든 영상들은 흑백이었다. 오로지 한 곳만 색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찬 시계.
종내에는 붉은 색만 화면에 가득 찼다. 피투성이가 된 지승운, 피를 토하는 지승운, 힘을 제어할 수 없어 이리저리 날뛰는 물 한 가운데에 있는 지승운. 그리고 그런 그에게 달려드는 수많은 가이드들.
부풀어 연기가 나는 몸.
그를 안정시키는 가이드.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웃음. 헤프게 흘리는 웃음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타국의 에스퍼들과 떠드는 모습, 붉은 시계.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모습, 다시 붉은 시계.
그리고 이경원의 모습이 화면에 떴다.
“지승운이요. 대한민국 최고의 에스퍼죠.”
밑에는 이름과 나이, 센터 소속과 등급이 자막으로 나왔다.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다음은 김태환이었다.
“위험하고, 아름답죠.”
다음 인터뷰를 하는 여자는 배미선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3센터 소속의 팀장이라는 자막이 떴다.
“지승운은.”
그리고 현재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재준이라는 이름 옆에 서른 셋이라는 숫자가, 아래에는 제1센터 소속의 S급 가이드라는 자막이 떴다.
새하얀 제복을 입은 재준의 모습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아니, 잘생겼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예뻤다.
“예뻐요.”
재준이 웃어보였다.
“…….”
이게 뭐야.
예지가 동영상을 멈췄다. 분명 재준의 목소리가 맞았다. 대충 생김새의 디테일이 재준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얼굴 말고. 그 사이에 성형을 했나. 하지만 외적인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저러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시리예가 재준이 예쁘다고 말할 때마다 정말 취향이 특이하구나, 가이드 중에 저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시리예가 맞았던 것 같다. 하긴, 재준이 안경을 벗은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지승운이 그동안 재준에게 다가서는 사람마다 경계를 했던 것이 이런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나? 예지가 생각하며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봤다. 알람은 여전히 200여개가 남아있었다.
예지는 알람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모르겠다는 듯 폰을 끄고 다큐도 꺼버렸다.
예지는 이걸 모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 * *
와, 이건 진짜 사기야.
김태환이 생각했다. 그 역시 다큐를 보긴 했다. 여러모로 놀라웠다. 지승운과 현재준이 염장 지르는 건 많이 봤지만 그가 보던 것과 화면으로 보는 것은 달랐다.
승운은 웃으면서 재준을 “형.”이라고 불렀다. 마치 떨어지면 불안한 사람처럼 집안에서는 재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졸졸 쫓아다녔다. 지승운을 아는 사람이라면 믿지 못할만한 행동이었다. 집에서는 더 염병이었구나. 태환이 생각하며 제 메신저에 뜬 알람을 바라봤다.
김태환은 의외로 사회생활을 잘 하는 편이었다. 지금은 제7센터 소속으로 있지만 언젠가는 제3센터나 제1센터로 갈 예정이었고, 여러 센터에서 만난 이들과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냈다. 태환의 메신저에 있는 몇 개의 단톡방에서 물음표만 있는 메시지가 왔다.
‘저 다큐 진짜야?’
‘저거 지승운 에스퍼 맞아?’
심지어 배미선 에스퍼는 이렇게 보냈다.
‘지승운 사실 폭주로 죽고 다른 사람 지승운으로 위장시킨 거지?’
자신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는 말을 태환은 하지 못했다. 화면에는 여전히 재준의 얼굴이 떠 있었다.
“처음 봤을 때…… 첫 인상이요?”
그렇게 답한 재준은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야, 엄청 예뻤어요. 그래서 예쁘다고 말했죠.”
그래, 그거 정말 가이드 같다.
“그러자 지승운 에스퍼가 절 미친 사람처럼 봤어요.”
곧 이어 화면이 전환되고 지승운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숙여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영상이 지승운의 손가락을 클로즈업한다.
지승운이 곧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승운의 얼굴을 찍던 화면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클로즈업하더니, 다시 승운의 상반신 전체가 나왔다.
“그땐…… 그땐 미안해요, 형. 근데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었어요. 뭐라고 해야 하지. 조금 두려웠거든요.”
“김재준 에스퍼의 뭐가 두려웠나요?”
“……냄새요.”
“냄새요?”
“뭔가, 불안한 냄새였어요. 사실 아직도 그 냄새가 뭔지 모르겠어요. 형한테서는 항상 그 냄새가 나요. 불안한 냄새. 마치 저를 떠날 것 같은 느낌도 들면서, 또 저를 고양시키는 향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삐— 긴장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긴장감 앞에 왜 삐 처리가 되는데요.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때 뭐라고 하셨었죠?”
다시 화면이 바뀌어 재준의 모습이 나왔다. 재준의 왼손에 지승운의 손에 있는 반지와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빙글빙글.”
“예?”
“빙글빙글이라 했어요. 하늘을 가리키면서.”
“왜요?”
“저희 위에 괴수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빙글빙글이라고 하셨다고요?”
“예, 그 괴수의 학명이 빙글빙글입니다.”
“—그렇군요. 학명이 빙글빙글. 어느 나라 말인가요?”
“당연히 한국말이죠. 빙글빙글이잖아요.”
그리고 약간의 침묵이 있다. 도대체 누가 그딴 학명을 지었는가 하는 의문이 느껴졌지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은 채 화면이 넘어갔다.
재준의 집이었다. 태환도 몇 번 가봐서 알았다. 평소의 그 극악한 안경을 썼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재준은 몸에 잘 맞는 니트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내린 상태였지만 얼굴은 잘 보였다. 그가 소파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고, 지승운은 컵 두개에 티백을 넣은 다음에 그대로 재준이 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재준은 승운이 다가오자마자 앉으라는 듯 몸을 일으켰다. 승운이 자리에 앉자 재준이 자연스럽게 승운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
이거 지승운 다큐가 아니라 그냥 연애질 하는 다큐 아냐?
승운은 그런 재준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어보였고 비어있던 잔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지금 에스퍼 에너지로 물을 채워 넣은 거야? 평소에 힘 컨트롤하기 힘들다고 아무것도 안하더니 이젠 제 가이드가 있다고 저렇게 힘을 쓴다고? 심지어 재준은 그런 승운을 바라보고, 제가 차고 있던 시계를 한번 확인한 뒤 승운의 손을 끌어당겨 제 입에 넣었다.
“……악!”
태환이 제 눈을 가렸다. 왠지 축축한 소리가 날 것 같았는데 그냥 적당한 클래식 음악소리만 배경음으로 깔려있었다.
“으, 이게 포르노야 뭐야.”
승운의 손가락을 쭉쭉 빨던 재준이 제 시계를 확인하더니 입에서 손을 뺐다.
“……다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냐.”
아무래도 이 다큐 때문에 에스퍼나 가이드에 대한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태환이 걱정했다.
모든 에스퍼나 가이드가 이렇게 불결…… 하지.
그래. 우리는 좀 더 하긴 하지.
근데 가이딩이 가지는 느낌은 이렇게 간질간질하고 야한 느낌이 아니었다. 좀 더 업무적인 느낌이 강하단 말이다. 도대체 이 다큐의 목적이 뭐냐. 태환이 생각하며 흘러가는 화면을 바라봤다. 이어 제 모습이 나왔다.
“보통 에스퍼들은 가이드가 없으면 3년 이상 버티지 못해요. 대장은 그 3년을 가이드 없이 버텼고, 7년을 폭주 위험 상태로 살았죠. 솔직히 말하면.”
태환의 고민하는 모습이 화면에 보였다. 김태환은 자신이 이런 얼굴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 표정을 구긴 태환은, 마치 과거의 끔찍한 불안감에 잠식된 것처럼 인상을 쓰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저는 지승운 에스퍼가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지승운이 제3센터에서 제7센터로 발령 당하던 날.
“김재준 가이드가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태환은 울었다. 하지만 쪽팔려서 그건 말하지 않았다.
***
지승운 에스퍼의 다큐는 꽤 성행했다.
다큐 제목은 <지승운>이었다.
그 이상의 명칭은 필요 없었다.
재준 역시 그 다큐를 봤다. 지승운과 함께. 솔직히 말하면 부끄러운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다큐를 찍는 내내 사실은 불편했다. 렌즈를 계속 끼고 있어야했고, 제대로 애정표현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다큐에서는 꽤 진득하게 들러붙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구나.”
재준의 말에 승운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박사님은 좀 이상했어요.”
며칠간 형이라고 불렀는데 다시 박사님이 되자 조금은 이상했다. 하지만 재준이 종종 안경을 벗고 있을 때면 승운은 ‘형’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게 마음에 들어 재준은 가끔 안경을 벗고 소파에 누웠고, 그러면 승운은 재준에게 형이라 호칭하며 입을 맞춰왔다.
“저기 박사님 나오네요.”
승운이 말했다. 다큐 촬영 기간 동안 재준은 이중생활을 했다. 가이드 김재준으로서, 그리고 박사 현재준으로서 다큐에 출연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심지어 작가도 알지 못했다. 이경원의 처제가 될 거라는 PD만이 알 뿐이었다.
“뭔가 부끄럽네.”
“뭐가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게.”
더벅머리를 하고, 품이 큰 옷을 입고 두꺼운 안경을 쓴 재준이 화면에 나왔다. 현재준은 새로 지어진 온실에서 패드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그런 재준의 옆쪽으로 승운이 다가왔다. 승운과 재준의 거리가 가까웠다.
‘김재준 에스퍼랑 현재준 박사님, 성함이 같네요?’
“저 질문 듣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박사님 곤란하게 하려는 줄 알고요.”
승운이 말했다. 하지만 화면 속 재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 하고 말하더니 웃음조차 짓지 않은 채 말했다.
‘전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데요. 본 적이 없어서.’
완벽한 시침이었다.
당시 PD는 현재준에게 관심이 많았다. 일단 그가 가이드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였다. 그녀는 자연환경에 관심이 많았고 언젠가 환경 파괴와 괴수에 대한 다큐를 찍고 싶다며 재준에게 연락처를 요구했었다. 바로 저 온실이었다. 그리고 지승운은 당연히 거절했다.
그 PD는 지승운과의 친분이 있었다. 애초에 승운과 경원은 형제와 다를 바 없었다. 이경원의 페어 가이드인 이다연을 제수씨라고 부르는 승운의 입장에서 그녀의 여동생인 이주연 PD는 나름 여동생 비슷한 위치였다.
이 다큐를 기획하는 게 이주연이니 그나마 참고 견딘 거지, 만약 다른 사람이었으면 얄짤없었다.
이주연은 그것을 잘 알았고, 지승운이 가이드 형질자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까칠하게 군다는 것을 알았기에 얌전히 기어주려고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자신이 치근덕대는 게 제 가이드도 아니고 괴수학 박사인데 말이다.
이주연은 괴수 폭주 당시 현재준이 방송에서 하는 인터뷰를 들었고, 그에 대해 약간의 관심이 있었다. 물론 인터넷으로 찾아본 사진이 다분히 범죄자 같아 움찔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보자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승운이 “박사님한테 다가오지 마.” 라며 벽을 채우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뭐! 내가 왜! 내가 뭘 했다고!” 이주연이 따지자 결국 지승운은 재준과 주연을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그러고는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재준의 안경을 벗겼다.
김재준과 현재준이 동일인이라는 것은 두 눈이 있다면 알 것이다.
재수 없는 지승운 새끼. 다 가졌네. 결국 이주연PD는 현재준의 연락처는커녕 다른 장면을 찍을 때도 떨떠름한 얼굴을 해야 했다.
“역시 경계가 필요해요.”
“응? 무슨 말이야.”
“박사님은 지금 이 모습으로도 섹시하다고요.”
아무리 안경으로 얼굴을 가려도 아는 사람들은 알고 접근한단 말이야. 지승운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재준은 제 가이드라고 낙인 찍어놨지만, 현재준은 어쩌지? 이쪽도 내거라고 낙인이라도 찍을까? 파렴치한이라고 불려도 상관없지만 그랬다간 재준이 불륜을 하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꾹 참은 승운은 재준의 어깨에 제 머리를 비볐다.
“박사님.”
“응.”
재준이 대충 답하며 랩탑 너머의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에는 승운의 모습이 있었다. 언제 이렇게 찍었는지 모를 그의 20대 초반 시절의 동영상들이었다. 과거에 그와 함께 일했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에스퍼들이 나타나 한마디씩 말했다. 재준은 그들이 하는 승운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집중했다.
“…….”
그나마 에스퍼들이라 다행이지. 이주연PD가 가이드를 불러서 인터뷰 하자는 걸 승운과 경원이 뜯어말렸다. 지금 누구 차이게 만들 일이 있나. 재준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한편으로는 재준이 어떤 반응조차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 그렇게 된다면 속상할 것 같아 승운은 가이드는 모두 차단시켰다. 이 다큐에 나오는 가이드는 현재준 딱 한명 뿐이었다.
‘지승운 에스퍼. 사실 그런 에스퍼는 처음 봤습니다. 나름 관록이 있고 현장에 잔뼈가 굵다고 여겼는데 그렇게 한 번에 모든 괴수를 학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밑에는 제4센터 소속의 A급 에스퍼라는 자막이 떴다. 눈에는 안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 현장에서 다친 듯 했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다면 죽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
‘제가 다른 나라의 정부 관계자였다면 지승운을 무조건 죽였을 겁니다. 혹은 그의 가이드라도.’
재준이 승운을 슬쩍 바라봤다. 지승운은 여상한 표정이었다. 저 말에 어떤 상처도 받지 않은 사람처럼.
‘다행인 것은 지승운 에스퍼의 가이드가 아주 늦게 나타났고, 지승운 에스퍼는 자신의 가이드가 나타날 때까지 죽지 않았다는 거죠.’
“들었어요, 박사님?”
솔직히 말하면 지승운은 저 에스퍼가 한 말에 동의했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가 재준이 놀라거나 상처받을까봐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만, S급 에스퍼의 존재는 확실히 위험했다. 제대로 크기 전에 죽이는 것이 나을 정도로. 다만 그를 죽일만한 에스퍼를 파견하는 것도 일일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쪽에서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박사님이 늦게 나타나서 제가 산 걸지도 몰라요.”
뭐가 됐든 전화위복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죽지 않고 버틴 것이 자랑스러울 지경이다.
“박사님이 절 울리긴 했어도, 몇 번이나 살렸다고요.”
재준이 고개를 돌려 승운을 바라봤다. 나름 걱정하지 말라고 한 말인데 재준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승운은 제가 뭔가 잘못 말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에스퍼들이 이런 저런 척을 잘 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보편적인 시각에서 에스퍼는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다. 자책감도 없고 PTSD같은 것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환희를 일으키고 살리는 것은 오직 가이드뿐이다.
“승운아.”
“네, 박사님.”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그러니까 가끔 재준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할 때면 승운은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조금은 뜬금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도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라 승운은 배시시 웃었다.
“전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걸요.”
화면 너머에는 자신이 재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다큐는 교차편집으로 이루어져, 사람들의 인터뷰와 폭주 위험에 휩싸인 자신의 모습, 그리고 안정을 찾은 자신의 모습이 번갈아 나왔다.
화면 속 재준이 승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럴 때면 승운은 눈을 감고 재준의 손에 제 머리를 맡기느라 재준의 표정을 알지 못했는데, 화면에 찍힌 모습을 보자 기분이 조금은 이상했다. 그러니까, 좋고 부끄럽고 민망한데 뿌듯했다. 내리깐 눈동자의 절반이 속눈썹에 가려졌지만 자신을 향한 애정이 보였다. 승운이 재준을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준은 자신에게 그런 시선을 보낸다.
“저 정말 행복해요.”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피투성이가 된 지승운은 시체들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대부분은 괴수의 시체였지만 제 동료도 있었다. 저때가 언제였더라. 폭주 위험이 있었던 때였다. 그 날 몇 명의 가이드와 했는지 모르겠다. 살고 싶어서 몇날 며칠을 매달렸다. 지금이라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처리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했다간 힘을 제어하지 못해 폭주할지도 몰랐다.
저 순간이 너무 아득한 과거 같아서, 오히려 지금의 삶 같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살았던 걸까.
아니, 어떻게—.
“그리고 좋아해요, 박사님.”
어떻게 저것과 비슷한 상황에서 승운은 재준에게 만나달라고 매달리고 울며 가이딩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일까. 그가 가이드라는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승운은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저 다큐에서 그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저는 사실 형이 제 가이드라는 것을 몰랐어요.’
그렇게 말한 승운은 화면 너머에서 수줍게 웃었다. 재준 역시 화면을 보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 가이드라는 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는 일반 사람과 만나지 않는다는 말을 했었다. 재준 역시 자신도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때의 승운은 그것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제 가이드가 아니어도 좋았어요.’
재준이 가이드 형질을 숨겼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다큐의 탈을 썼지만, 엄연히 이능청과 형질이상자의 삶에 대한 홍보가 들어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10년간 제 가이드를 찾지 못했던 지승운이 종래에 가이드를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를 보여주는 쇼.
‘좋아한다고 매달렸죠. 나랑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만나달라고 했어요. 그냥 이유 없이 끌렸던 것 같기도 해요. 생각해봐도 제가 왜 형을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겠거든요. 하지만 저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갔어요.’
말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화면이 바뀌었다. 역시 그 장면은 잘렸군, 승운이 생각했다. 저 다음에 재준을 인식한 이후로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그를 생각하며 몇 번이고 자위했다는 말에 이주연PD는 역겨운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썼다.
하지만 자위는 별다른 행위가 아니지 않는가? 물론 형질이상자들에게 자위는 조금 쓸데없는 것이긴 했지만, 오히려 일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 척도가 아니었나? 누군가한테 물건이 선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재준 역시 승운이 하는 말을 들었을 땐 사색이 됐다. 승운은 여전히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재준이 형질이상자에 대한 생각을 잘 모르는 것처럼.
‘나중엔 제가 울며 매달렸어요. 좋아해주지 않아도 되니까 곁에만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말하며 승운은 웃었지만, 재준은 그 날이 항상 마음 아팠다. 자신이 뭘 어떻게 해줘야하는지 몰라서, 혹은 그래도 되나 싶어서.
‘그때는 몰랐어요. 그냥 본능적으로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내 짝인걸 알아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사랑해요. 정말로.”
승운이 말했다. 재준의 시선이 천천히 승운에게 옮겨졌다. 눈이 마주치자 눈을 접어 웃는 승운을 보며 재준이 말했다.
“나도 사랑해, 승운아.”
하필 이 순간 저런 말을 하다니. 승운이 참지 못하고 재준의 안경을 벗었다. 재준 역시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아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승운이 재준의 입술에 키스하며 랩탑을 소파 아래로 내려놨다.
재준이 승운의 목 뒤에 팔을 둘렀다. 몇 번이고 입이 부딪히고 혀가 얽히며 젖어든 소리를 냈다. 승운의 손이 재준의 옷 안으로 미끄러지자 재준이 픽 웃으며 제 니트를 벗었다. 소파 아래로 툭 떨어지는 니트가 랩탑의 화면 일부를 가렸다.
승운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재준의 오른쪽 목에 지승운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연비.
지승운이 넌지시 했던 말을 기억했던 건지 재준은 함께 “생일 선물로 문신 할래?” 물었다.
‘그 날은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괴수들은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고, 앞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죠. 오로지 비명뿐이었습니다. 에스퍼도 많이 죽고, 학자들도 많이 죽었었죠.’
태환의 인터뷰였다.
“아— 흐.”
승운의 혀가 재준의 유두를 눌렀다. 뭉근하게 문지르던 혀를 세워 주변을 핥아 치아로 살짝 깨물자 재준의 몸이 튀어 올랐다. 재준이 승운의 머리채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목덜미를 바라봤다. 똑같이 같은 자리에 현재준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둘 다 드레스 셔츠를 입으면 아슬아슬하게 보이지 않았다. 니트나 스웻셔츠, 티셔츠를 입으면 보이는 자리였다.
‘그리고 지승운 에스퍼의 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지랑이가 흰 색인지, 검은색인지 모르겠습니다. 붉은 색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왜곡된 것 같네요. 하지만 확실한건 그 순간이 굉장히 무서웠다는 겁니다. 이대로 모두 죽을 것만 같았죠.’
승운의 손이 복부를 더듬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재준 역시 승운의 바지 버클을 풀어 아래로 내렸다.
‘사실 아직도 그 상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모두가 지승운 에스퍼를 피하라고 한 순간. 그의 가이드가 자신을 막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바닥에 떨어진 총기를 챙겨 지승운 에스퍼를 보호했습니다.’
이어 태환은 작게 그때 김재준 가이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저 조차도 무서워서 피하려고 했어요. 죽고 싶지 않았죠.’
제 엉덩이를 강하게 쥐며 잡아 벌리는 손길에 재준이 신음 같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이리저리 빨아대는 승운에 아랫도리가 뻐근해져왔다.
‘그때, 뭐라고 해야 할까.’
승운이 재준의 하반신에 손을 갖다 댔을 때, 재준 역시 승운의 성기를 잡았다. 잔뜩 발기한 성기의 끝에 축축한 프리컴이 흘러나왔다. 재준이 입맛을 다시며 승운을 보자 승운이 눈을 내리깔며 웃어보였다.
‘저게 사랑인가 싶더군요.’
“흐, 어떻게 해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궁극적인 사랑이요. 저런 게 아닐까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우선— 아, 네 좆에 내걸 비비고 싶은데.”
‘그들을 보며 제 가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준의 말에 승운이 서로의 성기를 꺼내 한 손에 잡았다. 재준의 성기 끝에서도 투명한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재준이 승운의 손 위에 제 손을 덮고, 다른 손으로는 양 귀두를 감쌌다. 승운이 허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건 기적 같은 일이니까요.’
“아읏, 핫!”
“하아, 박사님. 흐, 읏! 형…….”
승운이 움직일 때마다 재준 역시 승운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들썩였다.
‘김태환 에스퍼는 지승운 에스퍼의 가이드가 기적 같다고 했는데요.’
인터뷰어의 말에 승운이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더니 ‘예, 맞아요.’ 말했다.
‘그가 절 선택하다니.’
승운이 몸을 숙여 재준에게 입 맞췄다. 폐부 밖으로 빠져나오는 숨결이 모두 지승운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눈을 가늘게 뜬 승운은 재준이 느끼는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재준이 눈을 떴다.
“사랑해요, 형.”
따스한 시선에 가슴 안쪽부터 충족감이 일었다. 파정이 다가와 숨을 헐떡이면서도 재준은 승운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작게 “나도.” 하고 말한 재준이 몸을 움찔 떨었다. 승운의 손이 좀 더 우악스럽게 움직였다. 벌름거리는 요도구를 손으로 문지르자 재준이 “으읏!” 하고 소리 냈다.
“같이, 같이— 가요.”
승운이 헐떡였다.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부가 움칫 떨렸다.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응, 으읏— 아!”
‘그리고 그 기적이 당신에게도 올 수 있죠.’
재준과 승운이 동시에 파정했다.
***
소파에서 시작한 페팅은 곧 더 농밀해졌고, 자리가 불편해서인지 승운은 재준을 달랑 들어 침대로 이동했다.
대부분은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하게 하는 승운은 언제 어떻게 할 것이라는 예고는 없었다. 그냥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듯 했다. 그 날은 유독 격렬해서 재준은 섹스 후에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재준의 몸에 남긴 흔적들을 바라보다가 하나하나 닦아내고, 제가 싸지른 정액을 빼낸 뒤 잠든 재준을 잠시 바라보던 승운은 침실 밖으로 나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하나하나 주워 세탁실에 갖다놓고, 바닥에 있던 랩탑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가 물을 한잔 따라 마신 뒤 거실에 뒀던 제 핸드폰을 꺼냈다. 알람이 여러 개 와 있었다.
보나마나 다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다.
조금은 촌스러울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이주연PD의 연출은 나쁘지 않았다. 승운은 쌓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의 가족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고, 어떻게 안 건지 유예지 역시도 메시지를 보내놨다.
— 우리 박사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사람이 달라졌잖아!
승운이 피식 웃었다. 역시 유예지도 재준의 저 모습은 보지 못했나보다. 그의 여동생에게서는 오빠 예비 신랑이 잘생겼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예전에 같이 일했던 에스퍼에게서는 잘 봤다는 메시지가 왔다.
이경원은 역시 날 믿은걸 잘하지 않았냐며 뻐겼는데, 승운은 그 메시지는 읽지 않았다.
개중에는 배미선 팀장의 메시지도 있었다.
— 축하한다, 지승운.
— 반지 잘 어울리더라.
그럼, 누가 어떻게 고른건데.
배미선과 김태환이 이건 어떠냐 저건 어떠냐 할 때도 단호하게 거절해가며 재준에게 어울릴 법한 반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재준 역시 자신이 고른 것과 똑같은 반지를 사서 손에 끼워줬다. 지승운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돌려 제 왼손 약지를 바라봤다. 뿌듯했다.
하지만.
“역시 마지막 장면까지 버텼어야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승운은 거실로 돌아와 랩탑을 열었다.
이 다큐의 마지막 장면을 같이 보고 싶었는데, 도중에 유혹을 이기지 못해 끝까지 볼 수 없었다.
승운이 다큐를 다시 틀었다. 처음부터 시작되는 다큐는 이미 끝까지 봤음을 뜻했다. 하지만 중간의 내용들은 다 필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었다. 이 장면은 이주연PD와 지승운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가이드가 없는 삶은 어떤가요?”
“지독하죠.”
사실은 마지막까지 실을 지 말지 고민한 것이기도 했다.
“언제나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 어떤 순간도 멀쩡한 적이 없었죠. 조금씩 마모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내 육신인지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루에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죠. 어쩌면 상처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했을 뿐이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게 좋지 않나 싶기도 했다. 아마 재준은 끝까지 다 못 본 것을 보겠지만.
“나에게 올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은.”
화면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다. 사실 이건 지승운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이 감정을 알 것이다.
“나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기분이었죠. 매일 매일 나와 전쟁을 치뤘습니다. 종전 따위 없는 전쟁이었죠. 내가 항상 졌습니다.”
사람들은 에스퍼가 강인하다고 말하지만, 에스퍼만큼 불안한 존재는 없었다. 단지 들키려고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가이드 앞에서만 제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승운은 이 감정을 공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떨 때는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죠.”
왜냐면.
“한편으로는 나에게도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찾아다니고, 애태워하고. 하지만 결국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하고. 전 아주 긍정적이거나 아주 부정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아주 여러 가지 생각과 여러 가지 가정을 했죠.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내 가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에스퍼가 괴수가 된다는 것이 알려지고 나면 사람들은 에스퍼를 두려워 할테니까. 그들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이 어떤 감정도 없는 괴물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면.
“어떻게 보면 삶은 끔찍하고,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 않았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죠. 뭐라고 해야 하지. 고요한 우울함이 가득 찼습니다. 처절하게 사무쳐서 부정적인 면모가 드러나는데, 그 부정적인걸 들켰다간 모두가 나에게서 멀어질 것 같아서 유쾌하게 넘기려고 했죠. 매일 매일 죽어 가는데, 죽어가는 걸 들켜서는 안됐어요. 저는 강한 사람이어야 했으니까.”
그들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이 어떤 감정도 없는 괴물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면 더 배척할 테니까.
“형이.”
하지만 사람들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절 걱정해준 사람이었죠.”
항상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저에게 다치지 말라고, 죽지 말라고.”
재준이 자신에게 그러하였듯이.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승운은 제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아무렴 상관없었다.
“형을 믿으라고.”
그래서 더더욱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 중 한명이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여파를 가지고 올 것 같았다. 누군가는 싫어하겠지만, 누군가는 덕분에 이해받을지도 몰랐다.
“짜라투스트라의 재래에서.”
그가 이해받은 것처럼.
“우리의 일은 우리의 운명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나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나의 쓰라림을 달콤함으로 바꿔, 이 고통으로 성숙하게 되리라고.”
가이드를 찾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와 비슷하게 폭주 위협에 시달린다 하더라도.
“저는, 형을 인식한 뒤로.”
혹은 카트린처럼 제 가이드를 놓치고 괴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내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 쓰라림을 달콤함으로 바꿨어요. 그리고 그 고통으로 성숙해졌고, 결국 운명과 하나가 됐죠.”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이해해주기를.
“형이 제 운명입니다.”
절망에 빠진 누군가에게 사랑으로 다가서기를.
“내 가이드.”
승운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 더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그만이 누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었다.
“나의 태양.”
이것은 재준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가이드, 우리의 태양.”
승운이 웃어보였다. 찍을 때는 고민했는데,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았다.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 또한 들었지만, 괜찮다. 승운은 침실 방향을 바라봤다. 정사 후 지친 재준이 저기에서 나체로 잠들어있었다.
“사랑해요 ,형. 저와 결혼해 주세요.”
화면 너머의 자신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답을 받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