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8/20)

4. 다큐 (1)

예지가 사는 곳과 한국의 시차는 7시간.

일광절약시간제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긴 8시간이나 7시간이나 그게 그거였다. 어차피 그녀가 잠에 들 때 쯤 한국은 하루가 시작되고, 예지가 한창 생활할 때면 한국은 저녁에서 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지는 소식이 한발 느리거나 아니면 아주 조금 빠른 경향이 있었다.

그 날 오후 4시, 퇴근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늘은 왠지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생각하며 받아둔 소스가 남아있던가 생각하며 돌아가는 길에 양배추와 치즈를 사야겠다고 생각하던 예지는 평소보다 핸드폰 배터리가 빨리 닳아있어 뭐지? 하고 잠금을 풀었다.

메신저에 알람이 잔뜩 쌓여있었다.

“뭐야?”

아무래도 시차와 거리가 생기다보면 주위 사람들과 멀어지기 마련이었다. 예지도 이곳에서 반년 가량 지내며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일과 공부도 병행하고, 언어도 좀 익혀야했고, 그 와중에 제 입맛에 맞는 맛집과 적당히 운동할 수 있는 루트, 체육관 등등을 찾느라 바빴기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다. 그나마 재준과는 오고 가는 말이 많아서 여전히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재준보다는 같은 단톡방에 있는 태환이나 승운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승운과 태환은 메시지를 300개 가까이 보낼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뭔데?”

앱을 열자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잔뜩 와 있었다.

하나같이 말하는 게 김재준 어쩌고인데, 도대체 김재준이 뭐야? 김재준 가이드? 생각하던 예지가 아, 현 박사님 말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가장 위에 있는 자신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들어가자 하나같이 도대체 저 잘생긴 사람은 뭐냐, 너 유럽 가기 전에 7센터에 있었다는데 알고 있냐, 저런 사람이 있으면 소개라도 시켜주지 그랬냐 등등의 글이 올라왔다. 어떤 친구는 예지의 이름만 아홉 번을 불렀다.

누가 뭐 잘생겼다고?

“뭔 소리야.”

예지가 혼잣말하며 인터넷 창을 열었다. 현박사님이 가이드인거 극비 아니었나? 도대체 뭐지? 생각하며 포털로 들어가자마자 유예지는 더 이상 검색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대문짝만하게 지승운 에스퍼의 페어 가이드 김재준의 모습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어.”

근데 그 얼굴이 예지가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어?”

이게 뭐지 싶어 클릭을 해보자 화사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 아래에 김재준 가이드라는 자막이 적혀있었다.

“이거 누구…….”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왜 이 사람에게 박사님의 위장신분을……. 사진을 잠시 바라보던 예지가 으응? 하고 황당한 소리를 냈다.

아니, 잠깐만. 머리를 자르고 올리긴 했지만, 이 묘하게 푸석해 보이는 털이나 매끄러운 턱 선이나 좀 높은 코가? 하지만 눈이, 이 눈이 아닌데? 분명 자신이 아는 재준의 얼굴은 좀 더…….

예지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손을 들어올려 입을 가렸다.

“박사님?”

이게 정말로?

***

사실 재준은 다큐를 찍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재준이 처음 확인했던 것은 공익광고였다. 정확히는 현재준 자신의 공익광고 말고, 지승운이 공익광고를 찍도록 도와달라는 요구를 승낙하는 과정에서 이경원 박사는 재준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때 이상하게 생각해봤어야했다. 도대체 왜 설득을 하는데 계약서가 필요한가.

하지만 그날 재준은 바빴고, 어차피 이능력자들은 쓸데없는 일에 계약서를 쓰기도 하고, 또 뭐가 됐든 위에서 하라고 하면 말은 선택이고 존중이라고 해도 그냥 까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재준은 서명을 했다. 즉, 경원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물론 경원은 이것을 매개로 지승운 역시 꼬드겼다.

그러니까 상황은 이렇다.

“아시겠지만 고위등급의 형질이상자들은 필수불가결하게 공익광고를 찍어야 하는데요.”

물론 고위 등급의 형질이상자라고 다 광고를 찍는 것은 아니었다. 슬프게도 세상은 여전히 외모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얼굴 하나로 벌어먹고 산다는 말이 있는 만큼 외적으로 뛰어난 호모 트란스포르미스 E의 경우 수요가 있기 때문에 빈번하게 공익 광고를 찍었다. 물론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고위 등급의 경우는 당연히 공익광고에 출연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지승호가 있었다.

하지만 지승운은 대한민국에 세 명 있다는 S급인만큼 공익광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가이드의 경우.

‘이 얼굴은 좀 아니지 않나?’

예쁜 경우만 해당이 됐다.

광고진흥공사 산하의 공익광고협의회에서 재준의 사진을 보자마자 퇴짜를 놨다. 확실히 재준의 사진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뭐 범죄자도 아니고.’

머그샷 같았다.

“박사님, 도대체 증명사진 어디서 찍은 거예요?”

경원이 물었다.

요즘 혈당 관리를 해야겠다고 말한 이경원은 달달한 디저트 대신 커피만 들이켜고 있었다. 얼마 전에 건강검진에서 나온 상태가 별로였다던가. 한동안은 당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인지 손을 벌벌 떨더니 요새는 또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핸드폰 배경화면이 보기만 해도 달 것 같은 초콜릿 케이크였다. 매일같이 디저트로 배경화면을 바꾸며 눈으로만 먹는 모습이 자린고비를 떠올리게 했다.

“그냥 기계에서요.”

“지하철에 있는 그거요?”

“예, 뭐.”

“배경 색이 좀 다른데? 우리나라는 흰색 아니에요? 얜 회색 배경인데.”

“다른 나라에서 찍었는데, 아까워서 그냥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통은 사진관에 가지 않나? 어쨌든 홍보팀에서 퇴짜를 놨다는 말에 이경원은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그러니까, 현 박사가 함께 하는 거 아니면 지승운도 다시 광고를 찍는다거나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예전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형질이상자가 나타나 제 짝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싫은 광고를 억지로 찍어댔지만 재준이 나타난 상황에서는 그럴 의미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위에서는 계속해서 지승운을 노출시키라고 했다. 아니, 걔가 의지가 없는 걸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요. 그나마 현재준이라도 끼어 있으면 억지로라도 했을 텐데 그마저도 위에서 까였다.

하긴, 이 사진을 보면 까일 만도 했다.

“좀 범죄자 같은데요. 조금 웃기라도 하지.”

“증명사진에 웃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우스워 보이는데.”

“호감 가는 외모를 보여주는 게 좋지 않아요? 여러모로. 이력서…… 뭐, 박사님은 이력서 필요 없겠네요. 모셔가려는 사람이 한가득일 텐데.”

“보통 이력서에는 사진을 안 넣죠.”

“…….”

“어, 한국은 아직 불법이 아닌가요?”

“……이럴 때마다 박사님이 여러 나라에서 살았다는 걸 느낍니다. 아무튼, 공익광고를 찍어야하는 게 필수인데요. 박사님은 공익광고보다는 다른 쪽으로 홍보를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서요.”

“다른 쪽 홍보요?”

“예, 물론 박사님만 단독으로 하는 건 아니고.”

“저도 가끔 방송에 나가지 않습니까. 목소리뿐이긴 하지만.”

“……그건 홍보보다는, 아니. 그걸로 박사님에 대한 평이 안 좋은데요? 오히려 그러면 이능청 홍보에 마이너스가.”

“이능청…… 저로 이능청 홍보요?”

“……그러네요. 박사님으로 이능청을 홍보할 수 없네요.”

목적은 지승운이었으니까 당연했다. 그러니까 현재준은 지승운을 위한 미끼.

“그래서 말인데, 우리 홍보팀 쪽에서 제안을 하나 한 게 있습니다만.”

“홍보팀도 있습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있어요. 그래서 이게 어떤가 하고요.”

이어지는 말에 재준이 눈앞의 계약서를 읽어보려고 했으나 경원이 슬쩍 당겨 계약서를 빼앗았다.

이건, 보지 않았으면 하는 얼굴인데.

“…….”

“근데 아시잖아요, 박사님. 어차피 우리가 이렇게 말을 한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강요에 더 가까운 거.”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입을 터는 것을 보니 정말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 같았다.

“대충 보고 서명하라는 건가요?”

“예, 뭐. 그러면 감사하고.”

“정확히 뭔 일인지 알아야 서명을 하죠.”

재준이 말했다. 이경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허술하던 양반인데 언제 이렇게 똑부러졌지? 물론 재준의 행동이 똑부러진다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보다는 좀 더 나았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속아 넘어가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것만 같았다. 이러면 경원으로서는 곤란했다. 역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싶은 경원이 머리를 긁듯이 털어내며 말했다.

“그게— 다큐예요. 다큐멘터리. 이거면 이능청 홍보도 되고, 뭐 잘 하면 괴수연구소 홍보도 되겠죠. 박사님 연구원 필요하잖아요. 지금 지원이 없다면서요? 시설 홍보 좀 하고 커리어 좋아진다는 식으로 어떻게 끼워 넣어보면 되니까. 근데 하나 문제가 있는 게, 박사님이랑 김재준 가이드가 동일 인물로 드러나면 안 된다는 점이라서요.”

경원이 재준을 슬쩍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지승운이 알면 지랄을 할 텐데, 경원도 물러설 수 없었다.

“변장 좀 하고 찍으면 어떻겠습니까?”

“변장.”

“예, 안경도 벗고 뭐. 옷도 좀 제대로 된 거 챙겨 입고. 그래, 제복을 입는 게 좋겠네요. 박사님 치수 한번 재서 가이드 제복 맞추죠. 어차피 맞춰야하는 거였는데. 그리고 사생활 좀 공개하고요.”

“사생활이요.”

“그냥 큰 건 아니고요. 그리고 이쪽은 사생활 공개해도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니까. 어때요?”

“음.”

“박사니임.”

“글쎄요.”

“이거 반 강제인거 아시잖아요.”

“그렇긴 해도, 사생활 공개 같은 건.”

“크게는 안 해요, 크게는. 그리고 이곳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건 한정적이라 그래요. 알잖아요. 여기는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은 거. 그러니까 적당히 보여줄 수 있는걸 해야 하는데, 박사님 집 정도라면 좋지 않을까 하고.”

“제 집이요.”

“예, 박사님 집이요. 박사님이랑 지승운이랑 뭐 이렇게 저렇게 잘 지내는 그런 거.”

“……목적이 그거였습니까?”

“예에, 뭐. 근데요 박사님. 한번 생각해봐요. 지금 지승운이 가이드가 있다는 게 대대적으로 알려졌다고는 해도 다른 가이드들이 희망의 끈을 놓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내 차례도 오지 않을까, 어차피 페어를 끝내면 그만이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저야 박사님이랑 지승운이랑 매칭도 알고 둘이 죽고 못 사는 것도 알고, 결혼 약속을 한 것도 알지만…… 아예 다큐 찍을 때 결혼식도 할까요?”

“그건 지나친 사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지승운이 임자가 있다는 사실을 박사님도 알려주고 싶지 않아요?”

“…….”

“이건 여러모로 좋은 기회예요. 이능청 홍보에도 좋고, 지승운에게 짝이 있다는 걸 알리기도 하고, 겸사겸사 괴수 연구소도 홍보해서 새 연구원도 구하고.”

그건 필요했다. 언제까지 혼자 하거나 다른 가이드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곳까지 올만한 연구원이 없다.

그건 이곳이 유배지에 가까운 연구소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현재준은 한국괴수학계에서 찍힌 사람이었다. 물론 박형기 박사가 쫓겨나고 이정은 박사가 오며 더 이상 그러지는 않았으나, 연구원들에게 생긴 편견을 이겨내기는 수월하지 않았다.

“또 제가 연구 도와드릴게요. 호르몬 관련해서 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는 거 아시죠?”

“…….”

이건…….

“진짜요?”

이건 꽤 강력한 제안이었다.

결국 재준은 서명을 했다. 지승운 몰래.

재준도 경원도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추후 지승운한테 통보를 하자, 승운은 화가 잔뜩 나서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했다.

벽에 기대서 상황을 바라보는 승운은 웃고 있는데도 곧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3센터에서 내려온 사람이 재준의 치수를 재고 있었다. 제7센터에서도 가이드 복을 맞출 치수를 잴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랬다간 재준이 가이드인 것이 들통 나기 때문이었다.

제3센터의 담당자는 그 유명한 지승운의 가이드를 드디어 보는구나 싶어서 달려갔다가 잔뜩 실망했다. 그래, 가이드는 외모가 다가 아니긴 하지. 에스퍼에겐 매칭이 가장 높은 가이드가 중요했다. 가이드의 레벨이 자신과 맞으면 더 좋았지만 그것보다는 매칭과 효율성이었다. 게다가 못생긴 가이드들도 많았다. 이쪽은 기대한 것에 비해 너무 평범했지만 그래, 평범이 뭐가 문제겠는가.

그래도 몸은 꽤 단단하고, 근육도 차 있었고, 치수도 괜찮았다.

“가이드 시계를 오른쪽에 차시네. 근육이 오른쪽이 더 발달한 거 보니 오른손잡이인데, 특이하네요.”

“아, 습관이 되어서요.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아뇨, 시계를 차면 소맷단 여유가 필요하거든요. 근육도 생각보다 꽤 있으시고. 그건 어느 쪽이세요?”

“예?”

“수납이요.”

담당자가 묻자 지승운이 “왼쪽.” 하고 답했다.

“…….”

“그걸 왜 네가 말 하냐.”

“내가 알고 있으니까.”

와, 진짜 이 평범한 가이드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맞나봐. 남자가 생각하며 재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지승운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왼쪽 허벅지를 조금 넉넉하게 재는 모습이 왜 저렇게 야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질투로 에너지가 풀풀 나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른쪽 허벅지 치수를 잰 다음에는 사타구니부터 발목까지 다리 길이를 쟀다. 승운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다 쟀습니다. 만드는데 일주일 정도 소요될 거예요. 김재준 가이드 맞으시죠?”

“예.”

“재킷은 이름 새긴 거 한 벌이랑 안 새긴 거 두벌 이렇게 나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담당자가 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지승운은 벽에 기댔던 몸을 떼고 이경원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해명해.”

“뭘 해명해.”

“다큐 찍는다는 게 뭔 소리야?”

“뭔 소리긴. 대한민국 최초의 S급 에스퍼, 지승운 에스퍼의 페어 가이드 김재준의 다큐를 찍는 거지. 넌 안 찍어도 돼. 박사님은 이미 계약서에 서명해서 어쩔 수 없지만.”

“이경원!”

“위에 보고서도 올렸다. 변호사 공증도 받았고, 내용증명도 보냈어. 이거 물릴 수 있는 방법 하나도 없어. 박사님 다큐멘터리 찍어야해.”

그러니까 그게 문제였다. 분명 지승운은 이 일을 몇 차례 거절했다. 사실 작년부터 말이 나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가이드 찾기 같은 걸로 하자더니, 재준과 페어가 되고 나서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의 S급 페어 다큐를 찍자고 하지 않나, 그게 안 되자 그러면 일상 다큐라도 찍자는 말에 지승운은 몇 번의 거절과 적당한 쌍욕을 선사했으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나보다. 먼저 재준을 섭외할 줄이야.

“너까지 찍으라는 말 아니라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개새끼야. 이게 어떤 의도인지 모를 만큼 지승운은 멍청하지 않았다. 차라리 재준이 서명을 하기 전에 저에게 서명을 했더라면. 아니, 그건 또 모른다. 애초에 재준 역시 귀찮은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나서서 서명을 했다? 분명 뒤로 오고 가는 일이 있는 것이다.

승운이 억울한 얼굴로 재준을 바라봤다.

저거저거, 또 연약한 척이네. 이경원이 재수 없다는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그렇게 됐습니다.”

재준이 미안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저한테 상의라도.”

“제 일인걸요.”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단 말이에요. 하지만 재준에게 뭐라고 하지 못한 승운은 이경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째려보는 시선에 경원이 움찔했다.

“이경원.”

왜, 왜— 왜. 뭐. 경원이 움찔하며 승운을 바라봤다.

“계약서 가져와.”

승운이 말했다. 경원이 두 눈을 깜빡이더니 씨익 웃었다.

“응? 무슨 계약서?”

“다 알고 있으니까 닥치고 계약서나 가지고 오라고.”

다큐라고 한다면, 그걸 누가 찍을지도 뻔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능청 홍보 기획 중 하나니까 재준에게도 딱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선에서 정성을 들여서 찍겠지만, 지승운은 제 사생활이 공개되길 원하지 않았다.

물론 재준을 나쁘게 그리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촬영된 내용은 편집을 거치면서 얼마든지 악용될 수도 있었다.

이게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얼굴 팔아먹는 직업이라면 모를까 엄연히 공무직에 몸 쓰는 일이건만 도대체 에스퍼고 가이드고 뭐라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목적은 나잖아.”

재준만 그 하이에나 밭에 떨어뜨릴 수 없었다.

승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 서랍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재준이 대충 겉장만 살펴보고 서명을 한 것과 달리 지승운은 꼼꼼히 하나하나 계약서를 읽어가며 이경원에게 이건 왜 이딴 거냐 저건 왜 이러냐 따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쨌든, 이경원은 지승운의 서명이 있는 계약서를 얻어냈다.

“우리 누나가 좋아하겠다.”

“네 처제가 좋아하겠지.”

이경원의 페어가이드의 여동생은 PD였다.

***

이능청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가이드 김재준과 괴수학 박사 현재준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지 말 것. 하지만 김재준은 가이드로서 어느 정도 실적을 맞춰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자신의 가이딩이 아니냐고 지승운이 따졌지만, 애초에 현재준이 가이드로 등록이 되고 나며 추가수당이 들어왔고 그 금액은 지승운의 가이딩 금액으로만 하기엔 너무 크다는 것이 이능청의 판단이었다.

돈 같은 거 안 줘도 되는데.

재준이 말했지만 승운은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어야한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능청도 나름 재준을 어떻게 쓸지 고민이 많았다. 그가 주는 괴수 정보는 에스퍼들의 괴수 사냥에 확실히 도움이 됐다. 그동안의 중앙연구소는 기밀이니 뭐니 하며 정보 요청을 하면 열개 중 서너 개만 승인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준은 요청을 하면 질문보다 더 많은 답을 보내줬다. 심지어 괴수의 성장이나 번식 같은 것도 말했다. 도대체 그게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자택으로 재준의 가이드 제복이 도착했다.

여름용 제복과 봄가을용 제복, 겨울용 코트까지 있었다. 그냥 한 벌 지어줄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정식 제복이 와서 재준은 조금 신기해했다. 이게 인터넷으로만 보던 가이드 제복이구나. 지승운의 새까만 에스퍼 제복과 달리 가이드 제복은 새하얗다.

재준이 신기하다는 듯 제복을 이리저리 살폈다. 제가 평소에 입던 옷보다 조금 작은 것 같았다. 아니, 그가 옷을 크게 입는 편이라 작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너무 딱 맞는 옷은 불편했다. 그래도 한번 입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재준은 그 자리에서 스웻 셔츠를 벗었다.

승운은 그런 재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같이 꿈틀거리는 근육을 감상이라도 하듯 가만히 바라봤다. 바닥에 옷이 툭 떨어지고, 벨트가 풀렸다. 그러다가 재준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승운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재준이 피식 웃으며 더 잘 보이게 몸을 돌렸다.

“스트립쇼라도 해줄까요?”

“진짜요?”

“……해주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네. 다음에 해줄게. 관련 영화 보고 공부해서.”

박사님 영화나 드라마로 보는 거 다 허구라서 곤란했던 적 많잖아요. 지승운은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트립쇼를 제대로 하는 영화라도 찾아다가 재준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유명한 것이 있었다. 하지만.

“공부 안하고 지금 벗어줘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며 재준의 앞으로 다가선 승운이 툭 바지 단추를 풀고 퍼스너를 내렸다. 그러고 나서 은근하게 제 복부를 쓰다듬는 손길에 재준이 옅은 숨을 내쉬며 웃었다.

“지금은 안돼.”

“…….”

“제복 입어보고요. 일단 익숙해보여야지.”

승운이 부루퉁한 얼굴로 물러섰다.

“그런데 가터벨트 있습니까? 저는 평소에 쓰지 않아서.”

“잠시만 기다려요.”

승운이 재빨리 말하고는 옷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봐야했다. 승운이 가터벨트를 챙겨 나왔을 때 재준은 이미 셔츠를 입은 상태였다. 목까지 잠근 셔츠 위로 넥타이가 걸려있었다.

“여기요.”

승운이 가터벨트를 건넸다. 재준은 생전 처음 차게 된 가터벨트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리에 끼워 넣었다. 양쪽 벨트를 허벅지까지 올리고 나서 셔츠를 고정하고 고개를 들자 제 허벅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승운이 보였다.

“지승운 씨?”

“가터벨트 좋아할 만하네요.”

“…….”

너 눈이 무섭다.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재준이 바지를 챙겨 입고 타이를 맸다. 정장을 자주 입는 편이 아니라 타이를 매는 속도가 조금 느렸다. 하프 윈저로 맨 타이가 재준에게 꽤 잘 어울렸다. 그 다음에는 재킷을 걸쳤다. 평소 재준이 입던 품이 큰 옷과 달리 제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자 상상이상이었다.

“어떻습니까?”

“……잘 어울려요.”

벗기고 싶네. 하지만 입자마자 그런 말을 하는 건 실례 같아서 지승운은 제 생각을 꾹 눌렀다.

이제 다음은 렌즈였다. 이경원의 주문이었는데, 일단 렌즈를 껴보고 그래도 같은 사람처럼 보이면 화장을 해서 좀 꾸며보자는 말을 했다. 승운은 그게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안경을 바꾸는 게 낫지 않겠냐 했지만 아무리 가볍고 예쁜 안경테로 해도 재준의 시력이면 한결같은 얼굴이 됐다.

결국 일회용렌즈를 사온 재준은 심난한 얼굴로 렌즈 팩을 뜯었다. 승운 역시 재준의 옆에서 시력을 살폈다. 왜 마이너스가 두개로 나뉘어졌는지, 도대체 이 정도면 시력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지승운의 시력은 양쪽 2.0이다. 그의 인생에 안경 따위는 필요 없었다.

재준은 용약에 담긴 렌즈를 어떻게 꺼내야하나 고민하다가 그대로 손바닥 위에 용액 채로 쏟아냈다. 저게 맞는 건가. 지승운 역시 의문이었다. 어쨌든 렌즈를 얻어낸 재준은 손가락 위에 올린 렌즈를 눈에 넣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

한 손으로는 눈을 감지 않게 고정시키고, 손가락 위에 올린 렌즈를 눈 가까이에 가져가서 눈에 넣으면…….

—되는데 왜 절로 눈이 감기는 걸까.

분명 잡고 있었는데 눈이 감겼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재준이 다시 렌즈를 넣기 위해 시도했다. 이번엔 눈알에 안착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심지어 렌즈가 말렸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고민하며 떨어진 렌즈를 바라보던 재준은 렌즈를 폈다. 이게 제대로 된 방향이 맞나? 찾아보니까 렌즈를 거꾸로 끼면 아프다고 들었는데. 어쨌든 다시 시도했다.

물론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바닥에 떨어졌다. 안 보이는 눈으로 바닥에 엎드려 더듬더듬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승운은 말없이 다가왔다. 그러고 나서 재준이 찾던 렌즈를 주워 그대로 구겼다.

“어…….”

“바닥에 떨어진 걸 넣을 수 없잖아요.”

“…….”

“제가 넣어줄게요.”

물론 승운은 렌즈를 넣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재준이 직접 넣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새 렌즈를 뜯은 승운이 용액에서 렌즈만 빼 손가락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재준의 얼굴 가까이에 서서 “눈 감지 말아요.” 말했다. 제 손으로 재준의 눈을 고정시키며 바라보자 눈동자가 충혈된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눈에 뭔가가 들어가는 것이 처음인지 눈동자가 넘어갈 듯 했지만 어쨌든 제가 넣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 재준이 안간힘을 써서 눈을 떴다. 승운의 손가락이 재준의 눈동자 위에 닿기 전에 렌즈가 마치 흡착이라도 되듯 눈에 붙었다.

놀란 재준이 눈을 깜빡였지만 렌즈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용액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주륵 흘렀다. 그게 마치 눈물 같아서 승운이 움찔했다. 정확히는 아래가 움찔한 것 같았다. 눈물에 발정을 하는 개새끼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재준의 맨 얼굴과 눈물이 의미하는 것이 하나밖에 없어 절로 그 상황이 떠올랐다.

“……다른 쪽 넣을게요.”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번 넣어봤다고 이번엔 덜 감았다. 재준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제대로 앞을 볼 수 있었다.

“잘 보여요?”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안경을 올리는 제스쳐를 취하다가 제 안경이 없다는 것을 알고 민망한 손을 제복에 문질렀다. 승운이 피식 웃었다.

“불편함은 없고요?”

“이물감이 느껴지긴 하는데…….”

재준이 말하며 눈꺼풀 위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렌즈를 낀 상태에서 눈을 비비기가 무서운지 그냥 지긋이 눌렀다가 뗐다.

“…….”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아뇨.”

이 상태로 한번 하고 싶은데.

“아니에요.”

“왜요. 말해.”

재준의 말에 승운이 입을 쪽 맞추고는 “그냥 예뻐서요.” 말했다. 예쁘긴 네가 더 예쁘지. 눈을 접듯 웃는 승운의 모습에 재준이 말없이 승운의 가슴을 툭 쳤다. 승운이 웃어보였다.

“익숙해질 것 같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물감이 심했다. 하지만 렌즈를 뺄 자신 또한 없었다. 이거 어떻게 빼는 거지. 일단 인공눈물을 잔뜩 사오긴 했는데 벌써부터 겁이 났다.

“머리 만져 줄게요.”

승운이 말하며 다시 옷 방으로 들어갔다. 현장에 나갈 때는 꾸밀 필요가 없지만 VIP경호나 해외에 갈 때는 얼굴마담처럼 쓰여 어느 정도 꾸미는 것에 능한 승운은 빗과 포마드를 챙겨 나왔다.

원래는 머리를 말리면서 해야 제대로 나오겠지만 어차피 다큐를 찍게 된다면 전문가에게 맡기게 될 것이다. 자연스러운 장면을 찍느니 뭐니 해도 어차피 이능청에서 홍보 목적으로 만든다면 자연스럽도록 보이는 연출이 분명했을 테니 말이다.

승운이 재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뭘 해도 예쁜 얼굴이니까 상관없겠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이 얼굴을 전국에 생중계해야 하다니.

한편으론 굳이 다른데 내보이지 않고 이 사람이 제 사람이라고 낙인찍어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랑하고 싶은데 또 나만 보고 싶다니. 자신의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아마 하나도 모를 것이다.

“머리를 조금 잘라도 좋을 것 같지만, 그러면 박사님 때 모습도 달라지니까.”

승운이 빗을 내려놓고 포마드를 손에 발라 문지르며 말했다. 제 머리를 이리저리 쓸어 올리는 모습에 재준은 어색하게 승운을 바라봤다. 시선을 자신의 위쪽에 둔 채 집중하는 모습이 섹시해보였다. 승운은 저를 꾸미는데 정신이 팔려서인지 재준이 자신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촬영할 때는 전문가한테 만져달라고 하고 오늘은 그냥 어떤지만 봐요. 와. 누구 애인인지 진짜 잘생겼다.”

승운의 말에 재준이 피식 웃었다.

“안 믿네. 저기 봐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재준의 고개를 거울로 돌렸다. 그래봤자 제 얼굴이 그 얼굴이고 크게 달라질 리 없다고 생각한 재준은 거울 속의 승운과 그 옆에 있는 낯선 모습을 보고 움칫했다.

“제 애인 잘생겼죠?”

“…….”

“박사님?”

분명…… 이 얼굴이 아닌데. 거울 속 어색한 얼굴을 한 재준을 보며 승운이 큭큭 웃었다.

“혹시 제 애인한테 반했어요?”

“저게 나야?”

“와, 진짜 내 애인한테 반했나보네. 그러면 안돼요. 제 거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재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래, 비춰 보이는 게 자신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아니어서 재준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나쁘지 않았다. 지승운 옆에 서 있을 때면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너무 부족해 비교되지 않나 했는데. 이 정도면 옆에 서기 부끄럽지 않았다.

“제 거라고요.”

“알아.”

“진짜 알아요?”

“응. 알아, 네 거야.”

재준의 말에 승운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재준도 마주 웃어보였다.

“박사님.”

“응.”

“나중에 제복 입고 저랑 해요.”

“섹스?”

“섹스도 좋고, 데이트도 좋고.”

“제복 입고 데이트는 너무 눈에 띄는데.”

아무리 그래도 제복을 입고 데이트하는 형질이상자들은 없었다. 제복을 입고 섹스를 하는 형질이상자들은… 그건 많았다. 전국의 모든 센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럼 사복 입고 데이트해요.”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데이트를 할 만한 장소는 없었지만.

재준의 허락에 승운이 좋다는 듯 웃으며 재준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밀착된 몸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재준이 반보 물러섰다. 승운은 물러서는 재준의 엉덩이를 잡아 끌어당겼다.

“박사님.”

목소리가 조금은 잠겨있다.

“이 모습으로 있을 땐 뭐라고 부를까요?”

“뭐라고 부르다니요?”

“제가 김재준 가이드한테 박사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생각해보니 그렇다. 김재준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지만, 일단 그 가이드가 박사일리는 없었다. 아니, 박사일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형질이상자들은 것은 보통 20대 이전에 발현을 하는데다 발현 이후에는 해외에 오랫동안 공부하러 나갈 수 없다. 국가 소속이 되기 때문이다. 간혹 한국에 남아 학업을 병행하는 경우도 있고, 그럴 때 주는 장학금 또한 있긴 하겠지만 지금 이 얼굴을 한 가이드가 박사 학위를 땄다면 그를 아는 누군가가 있어야했다.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박사님은 뭐가 좋아요?”

“이름?”

“그건 우리가 섹스 할 때 쓰는 호칭이잖아요.”

“…….”

아니, 딱히 섹스 할 때 쓰는 호칭은 아니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발기하라고 하는 건가? 다큐에서 그러면 쓸 장면 없어요. 다 쳐낼걸요.”

그렇게 말하던 승운이 “생각해보니 그것도 괜찮겠네요.” 말했다.

“아니, 곤란해.”

재준이 반박했다. 어찌되었든 계약서에 서명을 한 이상 제대로 일은 해야 했다. 그리고 재준 역시 원하는 것이 있었다. 이경원의 노동력은 물론이거니와.

“…….”

말하지 못할만한 것도 말이다.

승운은 재준의 그런 대답에 삐친 얼굴을 했다. 사실 지금이라도 이것저것 따져서 계약을 무효로 시킬 수만 있다면 지승운은 어떤 거든 할 수 있었다. 정 안되면 협박이라도 가능했다. 그가 자신의 지위를 내놓고 협박을 하면 이능청도 힘을 쓸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재준이 이렇게 말하니…….

해야지, 뭐. 원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였다.

“지승운 씨는 어떤 호칭이 마음에 듭니까?”

재준이 물었다.

“형.”

답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재준이 움찔하자 승운이 웃어보였다. 마치 제 호칭이 마음에 드는 것처럼.

“재준 형.”

“…….”

“형 어때요? 박사님 형 소리 좋아했잖아.”

내가 언제.

하지만 맞닿은 하체가 반응을 했다. 현재준 자신보다 지승운이 더 확연하게 느낄 것이다. 나 변태인가? 왜 형 소리가 좋지.

“응? 형.”

지승운은 재준의 반응을 확실하게 알아차린 것 마냥 몇 번이고 “형”, “재준 형”하고 말했다. 재준이 고개를 틀었다. 계속 듣고 있기가 불편했다. 형 소리가 야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배덕감 같은걸 느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반면 아랫도리는 빳빳하게 부풀어 올랐다.

“형, 키스해도 돼요?”

“…더한 것도 하고 싶은데.”

재준이 답하며 자신의 타이를 풀었다.

“제복 더럽히면 안 되니까.”

그러고는 재킷 단추를 툭툭 풀어 벗었다.

“……아쉽네요.”

제복 입은 채로 하고 싶었는데. 승운이 주름 하나 없는 깨끗한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이 셔츠가 엉망진창으로 구겨지고 젖도록 만들고 싶었다. 셔츠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제복 입고 해주세요.”

승운이 말했다. 재준이 승운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

뱀이 허물을 벗은 것처럼 침실까지 이어지는 제복을 주워 올린 승운은 그대로 세탁실에 옷을 갖다 놨다. 다행히 드레스 셔츠나 재킷, 바지가 여분은 있었다. 승운은 비몽사몽 자고 있는 재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손을 잡았다. 깍지를 끼고 손을 쓰다듬고 꽉 쥐는 등, 몇 번이나 손가락을 얽혀대자 재준이 눈을 떴다.

“좋은 아침입니다.”

“눈은 좀 괜찮아요?”

승운의 질문에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렌즈 한 쪽을 빼는데 10분이 걸렸다. 재준도 승운도 차마 렌즈를 뺄 수 없었다. 결국 에스퍼 에너지를 사용해서 렌즈를 눈에서 떨어뜨린 승운은 손을 떨며 “이렇게 무서운 걸 어떻게 눈에 넣는 거죠?” 하고 물었다. 재준도 동감했다.

하지만 오늘도 렌즈를 넣어야했다. 오늘은 가이드 김재준으로 출근을 하기로 둘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셋이었다.

오늘 제작사에서 방문해서 안내사항과 계획을 고지하기로 했다.

렌즈를 끼는데 시간이 걸려 같이 씻기로 했다. 평소라면 같이 씻다가도 딴 짓을 하기 마련이었는데 오늘은 둘다 바쁜 사람처럼 씻는데 집중했다. 그 다음엔 승운이 렌즈를 넣어줬고, 젖은 머리를 빗어 말려준 다음에 포마드로 머리까지 올려줬다.

변신한 재준의 모습이 꽤 흡족한지 승운이 엉덩이를 토닥였다. 함께 옷 방으로 와서는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속옷만 입은 채로 가터벨트를 찬 승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재준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샐쭉 웃어보였다.

“너 진짜 야하다.”

“……그런 말 하면 제 시간에 출근 못 할걸요.”

물론 늦게 출근하면 승운으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까짓 거, 이경원이든 외주사든 기다리라지. 그러면서도 재준에게 가터벨트를 넘긴 승운은 조금은 아까운 얼굴로 재준을 바라봤다. 저 모습이 이제 곧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개된다.

“차라리.”

승운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재준이 “응?” 하고 되물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의문이었지만 재준은 더 묻지 않았다. 재준과 승운은 옷방과 침실 사이의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타이를 맸다. 예전에 이 앞에서 재준에게 박아 넣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나신이었지만, 다음에 거울 앞에서 할 때는 제복을 입힌 상태가 좋을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어떤 게 좋을까 재준을 멋대로 범한 승운은 거울 너머로 마주치는 시선에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그 다음에는 재킷을 들어 재준이 입기 편하게 해주었고, 제 재킷까지 챙겨 입은 다음에는 코트를 걸쳤다.

3월 1일에는 눈이 왔다.

이곳의 개나리는 4월에, 벚꽃은 5월에 핀다.

재준과 함께 밖으로 나온 승운은 그의 허리에 손을 얹고 골목을 나갔다. 늘 그렇듯 아침 출근 시간에는 태환이 차를 타고 대기했다. 승운이 상석의 문을 열고 재준을 태웠다. 그리고 자신도 반대편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노래를 듣고 있던 태환이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인사하며 리어뷰미러로 재준을 확인하다가 멈췄다.

아주 찰나였는데도 그가 굳은 것이 눈에 보였다. 승운이 차에 타고 문을 닫았다. 동시에 태환이 몸을 홱 돌려 재준을 바라보고 승운을 본 다음에 다시 재준을 봤다.

“누구세요?”

그리고 해답을 원하는 것처럼 지승운을 바라봤다.

“이 가이드 누구예요?”

“좋은 아침입니다, 김태환 에스퍼.”

재준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제가 봐도 놀라운 변신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놀라는 거야 이상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게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태환이 귀신을 본 것 마냥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참고로 태환은 괴수보다 귀신을 더 무서워한다. 귀신보다는 지승운이 더 무서웠고, 지금은 현재준이 가장 무서웠다.

그러니까.

“박사님?”

그가 알던 못난이는 어디 가고 웬 미남이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 사람은 또 누구야! 왜 맨날 사람을 놀래키냐고!

“출발 안 하십니까?”

재준이 물었다. 태환이 어버버 거리며 승운을 바라봤다. 지승운의 눈동자가 차갑다. 태환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다시 리어뷰미러를 바라봤다.

와, 와아. 와아아—….

진짜 누구야. 엄청난 미남, 미인? 미남? 모르겠다. 선이 굵지는 않은데, 또 남자다우면서도 예쁘장하게 생겼다. 분명 태환이 알고 있는 재준의 모습이 아니었다.

“김태환, 운전에 집중해.”

승운이 말했다. 그 목소리가 꽤 스산했다.

지금 지승운은 제 가이드를 탐내는 에스퍼를 내리누르는 듯한 행동을 했다. 어차피 탐낼 생각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현재준이 어떻게 지승운을 가이딩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태환은 재준의 가이딩이 통하지 않는다. 저를 가이딩 할 수 없는 가이드에게 매달리는 멍청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태환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리어뷰미러로 향했다.

와, 진짜 존나 잘생겼다.

* * *

박사 현재준 역시 다큐에는 모습을 드러내야했다. 아무래도 승운이 주로 있는 곳도 그랬지만 홍보 목적으로 이런 저런 것을 찍으며 DMZ의 특성을 살리는 게 좋다고 여겼다. 특히 이곳에만 있는 희귀 괴수들에 대한 것도 찍는 것이 어떤가 이야기가 나왔다.

“보다보니까 온실도 있더라고요.”

“모든 MKR을 넣으려고 만든 겁니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그 식물종 괴수가 키워드가 되는 일이 있어서요. 하지만 하다보니까 다른 식물종 괴수들도 모으게 되더라고요. 안그래도 희귀종 괴수들이 좀 있어서 좋을 겁니다. 홍보도 될거고.”

“김 가이드님은 관련해서 잘 아시네요.”

“…….”

재준이 입을 다물었다.

MKR 전용 온실은 예산 내에서 이루어졌다. 지승호에게 도움을 줬던 이중석 비서관은 결국 다른 의원의 보좌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제21대 국회 전반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괴수위원회 괴수 법안심사 소위원회 위원장이었는데 그가 이직을 하도록 도와준 것이 지승호라고 한다.

지승호가 뭘 어떻게 도와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중석 비서관이 뭘 어떻게 하고 의원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예특위 질의답변이 잘 되어 예산안 최종 수정안이 꽤 잘 나온 듯 했다. 게다가 심의가 금요일이었다. 원래 상임위에서 소관 실국 심의를 진행할 때, 금요일에 걸리면 이득이었다. 의원들은 주말에 자기 지역구로 돌아가기 때문에 조금 일찍 끝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비가 아니라 국비라서 더 다행이죠. 마침 이제 슬슬 MKR종 옮겨 심고 하지 않습니까? 박…… 김 가이드님?”

“예, 그렇— 다더라고요. 현 박사님이요.”

사실 현재준의 얼굴은 아주 조금 알려져 있다. 대중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학술지나 인터뷰에 실리는 것 정도로만.

사실 박형기 박사가 쫓겨나고 이정은 박사가 들어오기까지 임시소장을 한 달 반 동안 맡으며 얼굴이 공개되긴 했지만 더벅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쓴 채 사진관에서 찍어 예쁘게 보정한 것도 아닌 어디 범죄자 머그샷 같은 꼴로 공개된 재준의 얼굴은 크게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비호감이라고 조금 소문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재준과 지금의 재준은 공통점이 없어보였다.

“그곳에서 촬영하면 그림 좀 나오겠는데요? 그리고 아무래도 다큐다보니까 사는 곳도 찍게 되는데, 지승운 에스퍼랑 가이드님의 만남 빈도는…….”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아……. 그러면 카메라는 집 하나에만 설치하면 되겠네요.”

“그건 지승운 에스퍼에게 물어보면 될 것 같습니다. 집은 따로 있어서 가끔 물건을 챙기거나 일이 있을 때 가거든요. 지금은 주로 제 집에서 지냅니다.”

“아……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예,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웃어보였다.

그 얼굴에 작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가이드는 에스퍼와 달리 외모 진화가 안됐다는데 이 사람은 뭐야. 하지만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재준은 왜 그러나 싶은 얼굴로 작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고, 죄 많은 사람아.

경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도 대충 재준의 안경 상태를 보고 벗으면 확 달라지겠구나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지승운이 자신을 죽일 듯 바라본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김태환 역시 승운 몰래 몇 번이나 재준의 모습을 훔쳐보지 않았던가. 이경원은 저 새끼가 죽으려고 저러나 싶었지만 승운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제 지승운 에스퍼만 오시면 되겠네요.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봐요.”

“에스퍼들이 하는 일이 광범위하니까요. 보통은 그냥 괴수 사냥만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요.”

“안 그래도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뤄보고 싶어요. 가이드들도 보통은 가이딩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인 실무에도 가이드들이 많이 참여하잖아요. 김재준 가이드님은 연구소에 있다고 하셨죠?”

“어…… 예, 굳이 따지자면 연구소 소속입니다만. 제가 그렇게 자주 보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거 아쉽네요.”

“하지만 집을 공개하니까요.”

별로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재준도 차라리 승운의 집을 공개하고 그곳에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승운의 집에는 이경원과 김태환이 머물고 있었고, 가끔 지승호가 왔다.

사람들도 불편했지만, 재준 역시 집에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식물종 괴수 돌보기라든가……. 사실 그것 말고는 딱히 없었다. 연구 관련해서는 랩탑 하나면 일을 할 수 있었고, 바쁜 시즌이 아니라면 집에서 굳이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집 공개라는 것은 부담스럽긴 하지만, 경원의 말대로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에 누군가가 찾아오거나 할 일은 없으니까 재준은 그러려니 했다. 승운은 그것조차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렇죠. 그래도 사각지대는 있으니까요. 특별히 노출을 원하지 않는 장소도 말해주시면 거긴 카메라 설치하지 않을게요.”

“일단 옷방은 자유로웠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예, 그건 고려하겠습니다.”

어쨌든 나름 사전 인터뷰는 화기애애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일을 끝내고 급하게 온 것인지 숨을 조금 헐떡인 승운은 타이를 당기며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A급 괴수였다. 요즘 들어 A급 괴수들이 꽤 많이 나왔다. 3월 중순에 들어서며 날이 점점 따뜻해져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일 처리 잘 했습니까?”

재준이 일어서며 물었다. 승운은 방안을 둘러봤다. 이경원과 이경원의 페어의 여동생, 그리고 랩탑 앞에 앉아있는 모르는 여자, 현재준 이렇게 네 사람이 방 안에 있었다. 그리고 사전 인터뷰를 녹화하는 카메라 또한 설치되어있었다. 그걸 전부 확인한 승운이 사르르 웃어보였다.

“네, 형. 잘 끝났어요.”

“…….”

이게 뭐야.

형? 형이라고? 그리고 저 미소는 또 뭔데?

이경원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운은 성큼성큼 재준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

저 새끼가 돌았나.

가볍게 맞췄다가 떨어진 입술은 이내 아쉽다는 듯 다시 얽혀들었다. 경원이 질린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재준이 거리를 두며 말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어주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자신들이야 형질이상자이고, 원래 흘레붙는 이능력자라지만 눈앞의 이 PD와 작가는 일반인이었다. 심지어 PD는 제 미래의 처제이기도 했다. 경원이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자 승운이 떨어졌다.

“죄송해요, 충전 좀 하느라.”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재준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움츠러드는 모습이 화면에 전부 찍혔다.

“제가 오랫동안 폭주 위험인건 다 아시죠? 그래서 가이드에 대한 집착이 조금 심해요. 분리불안도 좀 있고.”

승운이 재준의 허리를 어깨를 끌어안으며 무릎 위에 앉았다. 김재준 가이드의 덩치 역시 큰 편이어서 부담되지는 않겠지만, 이 상황에서 마치 타인을 견제하듯 제 가이드의 무릎에 앉아 교태를 부리는 지승운의 모습을 볼 거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말 없이 둘을 바라볼 뿐이었다. 승운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재준에게 애교라도 부리듯 “형.”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저 형 소리는 뭐냐고. 이경원이 거리를 두듯 슬쩍 물러섰다.

“무슨 얘기 했어요?”

“그냥 앞으로의 촬영방향이라든가.”

“아아.”

“그리고 집에서 노출되지 않아야 할 부분이라든가. 옷방처럼.”

“욕실도 안돼요.”

“씻는 모습은 나오는 게 좋은데요.”

“세면대만 나오도록 한다면 좋아요. 나머지는 전부 사각지대로 하고.”

몸 드러나는 건 절대 안 된다. 사실 목 위로 드러나는 것도 싫었다. 이 예쁜 얼굴을 다른 누군가가 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준에게 관심이 없다고 여겨지는 태환 역시 반응이 다르지 않았는가. 이경원도 마찬가지였다.

승운은 모른 척 했지만 주위에서 재준을 바라보는 모든 시선들을 인식했다. 그 중 가이드들은 뭐, 그렇다 치자. 문제는 에스퍼다.

에스퍼들은 지승운과 함께 온 가이드를 핥아먹을 듯 바라봤다. 감히 제 가이드를. 지승운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꼬리를 내리긴 했지만 쏟아지는 시선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뭐, 목덜미나 쇄골이나 혹은 상반신이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다른 새끼들이 무슨 상상을 할 줄 누가 알겠는가.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났다. 이 기획 자체가 말이다.

승운이 표정을 굳혔다. 기분 나쁘다는 것이 절실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사실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승운은 꾸준히 이것을 거절했으니 말이다.

“아, 침실도 안됩니다.” 승운이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모습 정도는 필요해요.”

“에스퍼와 가이드가 사는 집이에요. 가이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잖아요.”

“옷방에서 해, 옷방에서!”

경원이 소리쳤다. 거기서 붙어먹든 핥아먹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소리 들리잖아.”

“……그런 건 다 안 나가게 해주죠.”

“그쪽에서 듣는 것도 싫거든요.”

일반인들이라고 형질이상자로 이런 저런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상상 속에서 뭐 어떻게 할지 누가 알겠냐고.

그런 승운의 어깨에 재준이 손을 올렸다. 승운이 고개를 돌려 재준을 바라봤다. 자신들을 볼 때는 싸늘하기만 하던 얼굴이 재준을 향하자 부드럽게 풀렸다. 재준이 말했다.

“내 집 방음 잘 돼.”

“……형.”

지금 그런 말이 아닌데……. 그래도 다큐 촬영 중에 소리를 핑계로 거부하거나 할 생각은 아닌 듯 했다. 아니, 애초에 재준 역시 성욕이 상당했다. 그것조차 딱 지승운의 취향이었지만.

“예…… 일단 그건 조율해보죠.”

PD가 말했다. 그녀는 그러며 경원에게 시선을 한번 줬다. 뭔가 의미가 담긴 듯한 시선인데 재준은 그 시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면 지승운 에스퍼에게도 촬영 방향이나 기획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PD가 말했다.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큐의 주 목적은 지승운 에스퍼의 건재입니다. 가이드를 찾고, 안정을 되찾은 대한민국의 S급 에스퍼.”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게 목적이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젠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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