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6/20)

2. 반지

창문 하나 없는 방.

벽과 천장, 바닥까지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조명조차도 밝은 형광등이었다. 오로지 문의 경계에만 검은 홈이 있다. 그것을 제외하면 방 안은 온통 하얘서 이질적이었다. 방 안에 있는 것은 카메라 한 대와 의자 한 개 뿐이었다. 의자 역시 새하얗다.

붉은 불이 들어온 카메라는 빈 의자를 촬영하고 있다.

곧 문이 열렸다.

입고 있는 새하얀 옷은 팔이 양 허리에 고정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벨트로 온 몸이 묶여있었다. 두 눈이 가려져있고 귀 역시 귀마개로 막혀있다. 입 역시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마개로 고정되어있었다.

제 발로 걷지 못하도록 휠체어에 태워진 채 방안으로 들어온 여자는 그대로 들려 카메라 앞의 의자에 앉혀졌다. 여자의 양 발목을 이은 가죽 벨트와 의자를 고정시킨 사람들은 그녀의 목에 무언가를 주사했다. 여자가 몸을 부들 떨었다. 힘을 쓰지 못하도록 주여한 호르몬제였다.

곧이어 안대와 귀마개, 입마개를 뺐다.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자 눈이 부셨는지 눈살을 찌푸린 여자는 조금 지나지 않아 제대로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사람 없이 카메라 하나만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수감자 132333번.

그때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약간의 전자음을 내포한 것이었다. 카트린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눈앞에 보이는 카메라 말고도 다른 곳에 카메라가 또 설치되어있었다. 그 옆에 스피커도 있었다. 다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카트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2022년 11월, 카트린 두자당은 전 세계의 비행종 괴수들에게 특정 매개를 풀어 폭주를 일으킨 혐의를 비롯하여 국가안보법 위반, 불법적인 교역행위, 살인, 시민권 위조 획득, 괴수법위반, 테러를 비롯한 11개의 죄목으로 입건하여 범죄인 인도 조약에 따라 미국으로 이송, 51구역에 수감되었다.

동년 12월 1일, IPMC가 카트린 두자당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했다. 미국은 이에 대해 거절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각기 카티야 가텐과 카트린 두자당의 신변을 넘겨 달라 요구했다. 미국은 이 역시 거절했다.

괴수는 괴수 법에 따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불법이 아니다.

그로부터 4일 뒤, 카트린 두자당은 2022년 12월 5일 폐기된 것으로 기록됐다.

2022년 12월 7일, 카트린 두자당은 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다.

―수감자 132333번. 대답하세요.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그 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답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수감자 132333번. 답을 해야만 할 겁니다.

이어지는 말에도 카트린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슨 말이 먼저 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스피커에서도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잠시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려앉은 침묵에 카트린은 어깨를 추켜올려보였지만, 온 몸이 묶여 있어 제 의사 표현이 제대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감자 132333번. 이 답을 제대로 해주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게 뭔데?”

―당신을 유럽이나 IPMC에 보내주죠.

이어지는 말에 카트린이 하, 하고 한숨 같은 웃음을 내보냈다. 그러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더니 큭큭 웃었다. 낮게 시작한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광기가 느껴질 정도의 웃음에 그 어떤 이도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유럽으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말한 카트린은 고개를 저으며 ‘머저리들.’ 하고 작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을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나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겠어.”

***

미국의 이능통제국에서 한국 이능청에 정보를 요청했지만, 이쪽에서도 딱히 아는 것은 없었다.

에스퍼인 카트린 두자당에 대한 정보라면 프랑스가 더 잘 알 것이고 괴수인 카티야 가텐에 대한 것이라면 독일에서 더 잘 알 것이다.

적어도 그녀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해 이곳에 요구해봤자 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루카스 영과 카트린 두자당의 관계에 대해 파고들고 있나봐. 두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 우리한테 묻는데, 우리도 모르지 않나? 그쪽에서 어떻게 찾아봐야지. 카트린이 한국의 이능청 민영화에 참여하거나 하진 않았을 거 아냐.”

“그렇겠죠. 애초에 이쪽에서 잡힌 건 박사님을 죽이려고 남아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연구를 막는 목적이었다고 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니까 괴수학자가 위험한 직업 같지 않습니까?”

“…….”

재준의 말에 태환은 입을 다물었다. 괴수학자는 위험한 직업이 맞다. 물론 에스퍼들 역시 위험수당이 나오고 목숨을 걸고 일을 하긴 하지만 괴수학자들은 위험수당이 딱히 나오는 것 같지도 않고 목숨은 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괴수학자들의 사망 2위는 실험 및 괴수 채집에 의한 사망이라고 한다. 1위는 청부 살해였다. 각종 기업들이 그들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다. 괴수학자는 정말 위험한 직업이었다.

유예지 연구원이 떠난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았지만 연구실은 적적했다. 새 사람을 뽑긴 해야 하는 데 마땅한 이가 없었다. 애초에 면접을 보러 이는 이들조차 거의 없었고, 재준이 원하는 수준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여기 있는 가이드들을 괴수학과에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추천서라도 써줄까 등등 생각하던 재준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자 일한지 일주일 째였다. 그나마 적적함을 없애는 것이 이곳을 제 집무실처럼 쓰는 승운과 승운을 졸졸 쫓아다니는 태환 덕분이었다.

“미국 내 재판뿐만 아니라 국제사법재판소에도 가겠는데요. 이건 미 측에서 좀 불리하겠네.”

“미국이 이 시대의 악당인건 맞지 뭐.”

미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악당이 있었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그쪽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니 악당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유럽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재판을 해야겠다는 말도 나오는데 과연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카트린을 폐기하지 않았더라면 편했을 거 아닙니까. 왜 우리한테 이런 걸 요청해요. 귀찮게.”

태환의 말에 재준은 옅게 웃어보였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S급 괴수의 폐기에 대한 것은 여러모로 말이 많았다.

IPMC역시 그녀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각기 그녀의 신변을 요청했는데, 그걸 다 무시한 채 카트린을 폐기했다는 것은 의아함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많은 괴수학자들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괴수에 대한 연구가 전력이 되는 시점에서 그런 짓을 쉽게 저지르기도 힘들었다. 결국 눈속임이 분명했다. 다른 곳에서 카트린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그나저나 요즘 중동 쪽도 말이 많더라고요. 얼마 전에 그쪽에 파견된 에스퍼한테 들었는데 여기도 민영화에 관심을 가진다던데요?”

“왜?”

“뭐…… 에스퍼는 무기니까요. 원래 아랍 국가들이 핵무기를 향한 열망이 있었잖아요. 말은 핵 보유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이웃 국가가 개발하면 신속히 맞설 거라는데. 미국이 핵 합의에서 탈퇴한 게 언제더라? 그때 이란이 핵 개발 가속화했다가 NPT 핵 확산 금지조약

에 서명한 걸로 아는데. 그러니까 이제 다른 쪽을 키우겠다는 거죠. 애초에, 원자력 분야 안전보다야 에스퍼가 더 관리하기 쉽다고 여기는 건지도 모르고.”

“그런가? 인간이 더 위험할 것 같은데.”

태환의 말에 승운이 답했다.

“솔직히 무기가 위험한 건 그걸 쓰거나 쓰고자 하는 인간이 위험하기 때문이잖아. 인간이 좋은 의도로만 움직일 거라는 건 일종의 환상이야.”

지승운은 의외로 염세적이다. 재준은 그게 종종 어색하다고 느껴졌다. 재준에게 승운은 긍정적인 사람이란 인식이 있는데 오히려 회의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좋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죠.”

반면 현재준 자신은 부정적인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더 강했다. 인류에 대한 희망이나, 미래에 대한 더 나은 가능성 같은 거.

“박사님처럼요?”

“……제가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연구도 어떻게 쓰일지 모르고. 그럼에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죠.”

그게 좋은 사람이라는 뜻 같은데. 승운이 생각했지만 더 말하지는 않았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 필요는 없다. 자신에게만 주어진 특권 같은 걸로 여기고 싶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승운은 자신의 독점욕이 조금 질렸다. 그래도 누군가가 이 장점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아무튼 핵 기술은 특권인데, 위험성이 크니까요. 전쟁을 할 때 에스퍼를 쓰는 게 훨씬 더 낫다고 보는 거죠. 적어도 다 같이 죽을 일은 없으니까.”

승운이 패드를 스크롤하며 말했다. 도대체 저 패드에는 어떤 정보들이 어떻게 들어가 있을까. 재준이 생각했다. 재준 역시 정보부에 소속되어있는 몸이긴 했지만 이름만 올려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가 정보를 공유할 이유도, 소속 업무를 할 이유 또한 없었다. 가끔 정보부 쪽에서 괴수 관련 정보를 원하는 것 같긴 했지만 사냥하는 데 도움이 될 정도면 되는 듯 했다. 그런 정보는 재준도 아끼지 않았다.

“예전에 핵 기술 관련으로 러시아의 지원이 있었네요.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에너지 판매를 통해 회수했다고. 수익을 얻는 쪽이 원자력 수출 국가들이긴 하죠.”

결국 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자국을 우선시하고, 타국을 짓밟더라도 우위에 서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로 인한 피해가 생기더라도.

“그러고 보니 모니카 살레에 대한 정보는 아직인가?”

“경민 형한테 연락 한번 해볼게요.”

태환이 답하며 핸드폰을 두드렸다. 메시지라도 보내는 듯 했다.

“헤라클레스 내부 정보도 부탁해. 걔네가 어떻게 움직일지 대비해야지.”

이어지는 승운의 말에 태환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경민은 태환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태환과 승운이 업무 때문에 다시 자리를 비웠다.

승운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과 별개로 재준은 평소보다는 한가한 편이었다. 괴수학자들은 여름 학회 때 휴가를 몰아 쓰기 때문에 그 직전이 가장 바빴다. 그나마 11월 말에 예지가 떠나서 다행이었다. 내년 여름이 되기 전까지 적당한 사람을 구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재준은 메일을 확인했다.

……연구소 지원자가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될지 모르겠네. 곤란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던 재준은 유독 적적하게 느껴지는 연구실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얼굴이 다시 모니터로 향했다.

* * *

승운의 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몇 년을 두고 보는 일이니 당장 끝날 일은 아니었다.

카트린 두자당은 헤라클레스 프로젝트가 에스퍼 괴수화 방지 백신 프로젝트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중에 멜라니와 카트린의 의견이 틀어지게 되었고, 카트린이 멜라니를 공격한 이후 괴수화 방지 백신은 물 건너 갔고, 헤라클레스 프로젝트는 에스퍼 괴수화 프로젝트가 되었다가 중국에 넘어갔다고 한다.

카트린은 그 다음에 대한 것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서 손을 뗐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인간종 괴수가 있다고 전했다. 그녀보다 훨씬 더 오래된, 더 예전부터 이어내려온.

재준은 왜 에르난데스가 헤라클레스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남미? 남미와 중국에 무슨 관계라도 있나? 재준이 의문을 표하지 승운은 잠시 뭔가를 고민하더니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하고 말했다.

중국은 조용히 미국의 뒷마당에 포석을 깔았다.

그들이 목적으로 한 곳은 중남미다.

2002년 세계 국제무역기구에 가입한 중국이 중남미에서 빠르게 입지를 넓혀온 사실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2001년 부시 대통령은 테러 때문에 그쪽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으며 2009년 버락 오바마는 자국 외교 전략의 중심축을 아시아와 태평양으로 이동 추진하며 중남미를 후순위에 뒀다.

반면 중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제 자본시장에서 금융 조달이 어려운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등등에 차관을 제공하였고, 현재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지역의 최대 교역국이자 채권국이다. 이것은 비단 무역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곳의 에스퍼들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경민의 말에 따르면 헤라클레스 프로젝트 산하의 자금조달은 국내에서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했다. 다만 이 계획의 윗선이 어디까지 닿아있는지는 알 수 없다.

빌어먹을 왜놈들 돈이나 공산당 돈이나 하여간 돈이라면 다 좋아한다면서 윗대가리 욕을 한바탕 한 이경민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출국했고, 지승호는 국회 쪽을 보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것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원래 한 번에 하나씩 업무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러 개를 동시에 시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애초에 별 일 아닌데 자신과 같이 등급 높은 사람을 불러오는 것도 귀찮았지만,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공무직이다.

“정보는 정확한 거 맞아?”

승운이 물었다. 태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던데요.” 라고 말했다.

“예지 능력 있는 에스퍼가 봤다니까 거의 확실하겠죠.”

“요즘 에스퍼들은 별 일을 다 하네. 테러까지 일으키려고 하고.”

승운이 말하며 셔츠 위에 검은 방탄조끼를 입었다.

오랜만에 오는 영종도였다. 하필이면 해상 격돌인데, 지금 서해는 괴수들이 많아 사람만 상대하기엔 위험했다. 헬기라도 띄웠다간 진작에 알아차리고 도망칠 것이 분명했다.

“어느 팀이랑 하는 거야?”

“미선 누나네 팀이요.”

“거기 B급 이상만 모인 곳이잖아. 그런데 너랑 나까지 필요하다고?”

“그 팀만 갔더니 우리 측 사상자도 있었대요. 대장이 있으면 여러모로 안전하니까요.”

괜히 등급이 나눠진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물 위의 작전이라면 지승운이 더할 나위 없었다.

사실 꾸준히 제1센터나 제3센터에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기는 했다. 물론 승운에게도 이쪽에 있는 것이 훨씬 좋았지만 재준에게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DMZ에서 연구하는 것이 있기도 했고. 멋대로 오자고 하거나, 혹은 따라와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떨어져 있다가 주말에만 만나자니 그것 역시 내키지 않았다. 하루 이틀 떨어져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오늘 안에 돌아갈 수 있겠지?”

“어차피 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잖아요.”

승운의 말에 태환이 대답했다.

저렇게 좋을까.

태환은 페어 가이드가 없고, 그냥 아무한테나 가이딩을 받고 있었다. 여러 사람과 접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페어 없는 에스퍼로서의 즐거움이라 여기는 자유로운 영혼인 태환은 지승운이 저렇게 제 가이드에 집착하거나 떨어져 있는 걸 견디지 못할 때마다 도대체 페어 가이드가 뭐길래 저러나 싶다.

그렇다고 태환이 그런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약간의 호기심 뿐.

“나도 축지법 같은 거나 익혀볼까?”

“그거 염력으로 가능해요?”

“글쎄.”

딱히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에스퍼라는 게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이들이니 해보면 알겠지. 나는 것도 가능한데 설마 축지법이라고 못할까.

“그래서, 이 헤라클레스 프로젝트라는 것이 궁극적 초인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네요. 아마 중국에서 매매하는 괴수와 연관된 것 같습니다. 그 도움을 카티야… 카트린 두자당이 준 것 같아요. 카트린을 협낙 뭐시기에 소개한 게 루카스 영 같고. 그러니까 회사를 인수하게 만든거죠. 거기서부터 시작된 인연 같습니다.”

“지금 루카스 영은 어때?”

“일상생활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요.”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 되겠지.”

말하던 승운은 순간 모니카 살레를 떠올렸다. 강도라고 위장됐지만 실제로는 살인사건인 그것을 보지 않더라도 미국은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십상이었다.

“……피습당하지 않게 지켜보라고 해.”

어쨌든 한국도 루카스 영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그가 이능청 민영화 계획과 관계된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몇 년은 더 봐야한다. 언제 어떻게 팔아먹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태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어떤 등급의 에스퍼가 붙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은밀한 일은 C급 이상의 에스퍼들이 맡고 있으니 문제없다. 등급으로 따지면 별거 없겠지만 인간으로 따지면 웬만한 특수부대나 살인청부업자는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카트린 두자당이 정말 폐기됐을까요?”

“폐기되지 않았다고 해도 밖에 나오지는 못할걸.”

최초의 괴수처럼 탈출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 시절과는 상황이 너무 다르다. 그녀가 설사 폐기되지 않았다고 한들, 그곳을 빠져나오기는 힘들 테니까.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승운과 태환이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의 영종도가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함께 작전을 할 팀이 복도에 나와 있었다. 모르는 얼굴이 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는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가장 뒤에 있던 여자는 승운과 태환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지승운 팀장.”

“배미선 팀장님.”

“얼굴 진짜 좋아졌네.”

그 말에 승운이 피식 웃어 보인다. 어색한 듯 제 얼굴을 쓸어내린 승운은 딱히 부정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셨어요?”

“늘 그렇지. 그나저나 와줘서 고마워. 안 그래도 이번 건은 좀 애매하더라고.”

“예지 능력 에스퍼 때문에요?”

“뭐, 그것도 있고. 우리만 갔다가 신입 하나가 죽는다고 하잖아. 아까워서.”

“제가 가면 뭔가 달라지나요.”

“지승운 에스퍼가 있으면 완전 달라지죠. 네가 있으니까 수월하게 제압됐다더라.”

“예지능력 에스퍼는 가끔 점쟁이 같다니까요.”

“옛날엔 그래서 신내림 많이 받았다더라. 요샌 미래를 보면 에스퍼 검사부터 해보지만 옛날에는 뭐 신병이니 무당 팔자니 하는 말이 많았으니까.”

이번 예지 능력 에스퍼는 실제로 무당 생활을 하다 와서 그런지 작두도 탈 줄 안다는 말에 승운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예지 능력 말고 신체 강화 능력도 있는지 한번 검사해 봐야한다는 말에 배미선 팀장이 한번 건의해보겠다는 말을 했다.

“그나저나 이경민이한테 들었는데 너희들 뭐 찾는 거 있다며?”

“아, 예. 뭐.”

“사실 나도 들은 말이 있어.”

“어떤 거요?”

“오늘 테러를 일으킨다는 에스퍼들, 사실은 에스퍼가 아니라 괴수라는 말이 있대. 인간종.”

배미선 팀장의 말에 지승운이 입을 다물었다. 아직 에스퍼가 괴수가 된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인간종 괴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인원이 너무 많다고 이상하다더라. 중국과 얽혀있다는데. 너넨 뭐 들은 소식 없어?”

떠보는 말이지만 확신하는 얼굴이다. 안 그래도 이경민이 중국 출장을 간 지금 그들에게는 없는 어떤 정보가 지승운의 팀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했다. 하지만 승운도 아직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알리고 싶었다면 위에서 공문을 내보내든가, 같은 팀으로서 공조라도 하라고 했겠지.

“글쎄요. 중국에서의 괴수 밀수와 판매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 있습니다.”

“그거야 흔한 일이잖아. 너네 저번에도 식물종 괴수 하나 잡지 않았나?”

“아, 그거.”

희귀 MKR종이 건물에 가득 메워진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누가 밀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MKR이 특이한 종이었는지 괴수연구소와 학부는 물론 다른 곳에서도 정보를 요청했었다. 심지어 MKR종이 번식한 건물 자체를 매수해서 연구시설로 쓰겠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지승운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야했— 아니, 예. 대단했죠.”

진짜 엄청났었는데.

아무튼 그 이후 희귀 MKR을 밀수해 번식시킨 사람 역시 찾아냈는데, 괴수 밀수 혐의로 형사 처벌을 받게 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으나 워낙 번식에 난항을 겪던 것이다 보니 처벌대신 사육방법을 제공하고 오히려 괴수 번식 특례로 채용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 나왔다.

“그랬어요.”

“그런 일에 웬만하면 동원되지 않던데. 보통 D급이 주로 가지 않나?”

“그래도 제 등급에 맞는 정도의 실적은 올렸으니까요. 그거 수익 장난 아니라던데.”

승운의 말에 미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듣기는 했었다. 원산지는 어디 남쪽의 섬이라고는 하지만 그쪽에서도 잘 자라지 않았는데, 한국 기후에 적합해서인지 워낙 잘 자란다고. 정말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었지만 끝이 좋았으니 다 좋다고 여기는 게 세상 아니었는가.

다만, 지승운이 그런 일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몇몇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긴 했다.

“소문에 말이야.”

미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가이드 찾았다며.”

이어지는 말에 승운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살포시 웃어보였다.

“소문 아닙니다.”

자랑이라도 하듯 옷을 걷어 제 시계를 보여준 승운은 새까만 화면이 자랑이라도 되는 듯 흔들어보였다.

“저 정말 가이드 있어요.”

진짜 까맣네.

늘 붉은 상태였던 시계가 저렇게 된 걸 보니 놀라웠다.

와, 소문이 사실인가 봐. 그렇다면 A급이라는 것도 사실일까?

안 그래도 A급 가이드는 귀해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웬만한 에스퍼들은 손이라도 잡고 싶어 전전긍긍하는데 지승운의 가이드도 그럴까? 뭐가 됐든 승운이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 가이드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그래도 같은 에스퍼로서 호승심이 일긴 했다.

“좋아 보인다.”

“좋아요.”

승운이 말했다. 풀어진 얼굴에 배미선이 조금은 놀란 얼굴을 했다. 가이드들에게 늘 친절하고 상냥하기는 했지만 저런 식의 얼굴을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냥, 맛있는 밥 정도로만 여겼다고 느꼈는데 이번에는 꽤 좋아하는 얼굴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빨리 끝내고 가보려고요. 혼자 재우는 거 싫거든요.”

“지승운, 네 가이드 진짜 남자야?”

“네.”

“김모씨?”

미선의 말에 승운이 그저 웃어보였다. 알려진 것은 그것 뿐이었다. 그의 가이드가 김씨에, 남자고 또 등급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승운의 웃음을 긍정이라고 받아들인 미선은 조금은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표정으로 드러냈다간 지승운이 지랄할 것이 눈에 훤해 그냥 “좋겠네.” 라고 말하고 말았다.

“좋죠.”

승운이 대답했다. 딱히 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충족한 기분은 처음이에요, 정말로. 이걸 나만 몰랐다는 게 너무 억울한데.”

아니, 보통 너 정도로 그렇지는 않을 거야. 지승운의 매칭은 정말 극악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미선도 어린 시절 막 각성한 지승운을 봤을 때는 질투가 났었다. 에스퍼는 등급이 깡패였다. 군인은 상명하복이라도 있지, 에스퍼는 계급장을 막론하고 자기보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를 향해 저도 모르게 복종하듯 고개가 숙여진다. 친해지면 조금 다르긴 하다지만, 결코 동등하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다. 늘 우위에 있는 것이 어찌나 배가 아프던지. 나보다 어린 주제에.

하지만 지승운은 오랫동안 가이드를 갖지 못했고, 그가 항시 폭주 위험에 놓였을 때는 안타깝기도 했다. 쟤는 정말 저러다 죽겠구나 싶었지.

물론 그렇다고 지승운을 위해 자신의 가이드를 내놓을 에스퍼들은 없었고, 혹여나 제 가이드가 지승운에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것들이 에스퍼들이었다.

지난 몇 년간 형질이상자들의 각인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도 지승운의 폭주 위험성과 에스퍼들의 가이드를 뺏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없잖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늦게 만나서 그런가 더 절절한 느낌도 들어요.”

그래, 어디든 네 가이드가 있어서 다행이긴 하다.

다만 지승운이 제 가이드를 찾았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여러 센터에 소속된 이능력자들은 난리가 났다. 섣부른 각성과 잦은 싸움 등등 때문이었다. 제 짝에 맞아떨어지지 않는데도 빼앗길까 두려움에 서로를 놓지 못하다가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배미선은 그런 것에 얽혀있지 않았다. 그녀도 아직 저에게 맞아떨어지는 가이드를 만나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지승운의 가이드라면 궁금하기는 했다.

“누나도 그래요?”

오랜만에 누나라고 부르네. 배미선이 생각했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목숨이 제대로 붙어있고 싶다면 지승운의 가이드를 탐낼 수는 없었다.

그냥 다음에 한번 소개 받는 정도가 괜찮지 않을까?

같이 수도권으로 올라오면 좋을 것 같은데, 지승운은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 절대 같이 오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예 강원도에 똬리를 틀고 있을 예정인 듯하다.

“글쎄. 나는 너 정도는 아니지만, 사랑스럽지. 가이드는.”

“뭐, 그렇죠.”

“동의하지 못한다는 얼굴이네.”

“정말 제 짝을 만나니까 그래요. 다른 가이드가 사랑스럽다는 걸 느끼지 못하겠어요. 오히려.”

다른 가이드들한테까지 질투 하는 제 모습을 보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을 뿐.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현재준이 제 짝인데.

그래, 내 짝이다.

재준이 그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승운은 알고 있다. 재준은 다른 그 누구도 가이딩 하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만 가이딩 할 수 있는, 유일한 짝이다. 다른 사람이 탐낸다고 하더라도 방법이 없다. 제 것이었으니까.

“진짜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서 세상이 무너지거나 멈추거나 했으면 좋을 정도로. 그냥 고정된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고 싶어요. 매순간 느끼는 기분이 달라요.”

이 사실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것에 환희가 일어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준 역시 알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말 행복해요, 저.”

“그래 보인다.”

배미선 역시 가이드 없이 못 살긴 했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에스퍼들이 그랬다. 하지만 배미선은 아직 각인 가이드도, 페어 가이드도 없었다. 그녀 역시 다른 에스퍼들과 마찬가지로 이 가이드 저 가이드 오고 가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대부분 그랬으니까.

“정말 행복해보이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 미선이 생각했다. 비단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복도에서 대기하는 여러 에스퍼들 역시 지승운의 이렇게 풀어진 모습은 처음 봤다. 늘 웃는 듯하지만 날서 있던 사람은 어디가고 제 가이드를 자랑하는 애처가 같은 모습이라니.

“경원이 말로는 퍼센테이지가 높긴 하다더라.”

“제 짝인걸요.”

“각인했어?”

미선이 물었다. 지승운은 답하지 않고 웃어보였다. 승운의 반응에 미선이 “했나보네.” 하고 말했다.

사실 각인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날 때부터 되어있었으니까. 그가 제 영혼과 육체의 짝이었다. 다만, 지승운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었다. 재준이 안다면 좋겠지만.

“어서 끝내고 돌아가고 싶네요.”

“좀 오래 걸릴 거야. 안 그러면 너희들을 불렀을 리 없잖아.”

“오늘 가려고 했는데.”

그는 가이드나 에스퍼에 대해서는 지식이 부족하다. 전설로만 내려오는 짝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기는 할까? 카트린 두자당과 루트 옌슨의 예시를 들고 말을 해볼까? 아니, 근데 카트린 두자당이 그렇게 되었으니 말을 안 하는 게 나을까?

“오늘 밤 안에 해결하고 내일 가게 될 걸?”

“…….”

고민하던 승운은, 역시 에스퍼나 가이드의 방식 보다는 호모 사피엔스— 그냥 인간의 방식을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일 가게 된단 말이지. 그럼 시간이 될지도 몰랐다.

배미선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된 승운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뭔가 문제라도 알아차린 것인지, 아니면 감이 안 좋아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승운의 이런 얼굴은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미선이 “왜? 느낌이 안 좋아?” 묻자 승운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팀장님.”

“응.”

“보통, 프러포즈 반지는 어디 걸로 하는 게 좋아요?”

“…어?”

에스퍼나 가이드라면 각인을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하지만 아무래도 인간이라면 법적 결속이 최우선일 것이다.

즉, 결혼으로 묶어버리면 된다. 그러려면 우선 프러포즈를 해야겠지.

결혼해달라고 하면 해줄까? 재준이 딱히 거부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승낙할 것 같지도 않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살면서 무서운 일은 겪은 적이 거의 없는데 요즘은 종종 겪곤 했다. 카트린 두자당에게 붙들렸던 재준을 봤을 때처럼.

다시 생각해도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승운의 표정을 굳혔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은연중에 뿜어져 나오는 에스퍼 에너지가 주위 에스퍼들을 곤두서게 했다. 하지만 그 무서움과 별개로 내용은 정말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어어…? 프러포즈?”

“브랜드가 낫겠죠? 사이즈는 일단 알긴 하는데. 이런 건 남자한테 물어봐야하나?”

“……나한테 물어도 되긴 하는데.”

꼭 이렇게 무서운 얼굴로 물어봐야겠니.

“근데 프러포즈하게? 그냥 페어로만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페어라뇨. 미쳤습니까?”

“아니, 뭐. 물론 결혼하는 에스퍼 가이드들도 많긴 하지만……. 네 가이드 남자 아니었어? 보통 동성의 페어는 결혼까지 잘 안 가는데.”

물론 전 세계의 동성 결혼을 합법으로 만든 것이 에스퍼의 페어 시스템이기는 했다. 정확히는 카트린 두자당과 루트 옌슨이 시초이긴 했지만, 오히려 에스퍼와 가이드보다는 호모 사피엔스의 결혼이 더 많았다. 형질이상자들은 매칭만 맞아떨어진다면 동성과도 잘 수 있었지만, 그래도 성적 지향에 따라 선호도가 달랐다. 즉, 제 가이드와 결혼을 하지 않는 에스퍼도 있다.

결혼 따로, 가이딩 따로. 그런 개새끼 같은 에스퍼들도 종종 있었다. 보통 그렇게 되면 가이드의 주적이 되지만 불륜을 하는 인간들마냥 그런 사람도 좋다고 들러붙는 가이드도 있었다. 살다보면 정말 별 일이 다 일어나곤 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못 보내요.”

지승운이 말했다.

“제 거니까.”

어차피 재준은 그 누구에게도 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불가능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역시 법적 구속으로 묶어둬야 했다. 근데 그걸로 족할까?

“갑자기 몸에 이름 새겨서 가면 싫어하겠죠? 같이 문신하자는 말에는 동의했는데.”

“……타투? 같이 타투를 한다고?”

“예, 부병자자 같은 거.”

그건 또 뭐야. 미선이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그냥 알고 싶지 않았다. 얘 왜 이래. 무서워졌네. 원래도 무서웠는데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무서워졌다.

“어, 뭐, 그… 그래. 열심히 해 봐.”

미선이 어색하게 말했다. 이상한 놈. 진짜 이상했다.

더 이상의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승운은 눈을 내리깔고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에너지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는 걸 보니 좋은 생각은 아닌 듯 했다.

게다가 힘이 많이 돌아와 있었다. 배미선 역시 지승운이 뛰어난 에스퍼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 느끼던 에너지와는 달랐다. 항상 폭주 위험에 휩싸여 에너지를 갈무리하고 또 갈무리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널뛰는 듯 했다.

만약 검은색의 시계를 보지 않았더라면 폭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정도로. 그녀 팀의 신입들은 피부를 아릴 듯 흘러나오는 힘이 감당되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리거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때 마침 이 상황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알람이 울렸다. 출동 알람이었다.

지승운은 언제 힘을 드러냈냐는 듯 모든 에너지를 갈무리했다.

와, 진짜 제대로 된 에스퍼네. 배미선이 감탄했다.

“출발 장소는 늘 가던 곳이죠?”

“응.”

“IBS요?”

“아니, 보트.”

그 말을 들은 승운이 슬쩍 웃어 보이며 말했다.

“가죠.”

미선은 먼저 가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앞장서는 지승운의 뒤로 제 팀원들이 쫓아갔다. 이렇게 보니 마치 승운이 팀장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미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새끼오리마냥 뒤를 따르는 제 신입과 팀원들보다는 다른 이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배미선 역시 원소 계열 에스퍼였다. 그녀는 바람을 다룬다. 바람 계열 에스퍼는 은닉뿐만 아니라, 흐름을 차단하는데도 유용했다. 지승운과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자 배미선이 태환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장막을 치고 말했다.

“김태환.”

“네, 누나.”

“쟤 왜 저래?”

쟤? 태환이 승운을 바라봤다.

“아…… 가이드 만나고 나서부터 저랬어요.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해요.”

현 박사가 가이드인 것을 몰랐을 때부터 갖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꼬시듯 꼬리를 내렸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가이드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가 오히려 더 나은 편이었다.

“내가 아는 지승운이 아닌데?”

“예, 제가 알던 대장도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승운이 재준을 알아차렸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뭐.”

제 짝이면 정말 일반인이라 주장해도 알아차릴 수 있는 걸까?

“전보다 더 좋아진 게 많아요.”

태환이 말했다. 도대체 뭐가. 미선은 알 수 없었다.

* *

배미선의 말대로 에스퍼가 아닌 인간종 괴수였다. 그리고 괴수 치고는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당연히 몰살이었다. 위에서 몰살하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배미선은 한두 마리 정도는 잡아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지만, 내려온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승운이 나서 모두 죽여 버렸으니 가지고 갈 수도 없었다. 연구소에서 안타까워하겠다는 말을 했지만 승운은 모른 척 모든 괴수의 시신을 바닷물에 수장시켰다.

분명 누군가는 알고 있다. 이들이 만들어진 괴수라는 것을.

하지만 승운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승운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아무래도 반지였다.

빨리 일을 끝낸 승운은 배미선을 붙들고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곤 태환까지 이끌어 백화점에 가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그놈의 반지를 골라냈다. 어찌나 까다롭던지, 우리 가이드에게는 안 어울린다느니 피부가 하얀 편이라 저쪽이 더 낫다느니, 이건 밋밋해서 별로라며 다이아가 잔뜩 박힌 게 좋다느니 말을 하며 몇 시간을 괴롭혔다.

결국 나름 제 마음에 드는 반지를 골라낸 승운은 지친 태환과 미선을 뒤로한 채 바로 재준의 집으로 달려왔지만 낮인데도 집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숨소리는 들렸다.

승운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혹여 번호 키를 누르면 소리가 날까 싶어 염력을 이용해 안쪽에서 문을 따고 들어왔다. 훅 들어오는 집안의 온기와 저를 누그러뜨리는 냄새에 표정이 풀어진 승운은 제 손에 들려있는 반지 상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특별한 날에 주고 싶은데. 역시 크리스마스 같은 날이 좋을까? 하지만 재준은 무교다. 지승운 자신 역시 딱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단 오늘 주는 건 아닌 것 같다. 반지 말고 준비한 것이 없었으니까. 나중에 날을 잡고 어떻게 해야 할지 인터넷에 검색을 좀 한 다음에 프러포즈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승운은 고민하다가 찬장에 반지 상자를 넣었다. 그 옆에는 원두커피가 있다. 요즘은 제가 커피나 차를 타주니까 재준이 발견할 일은 없을 것이다.

찬장을 닫고 그 위를 두어 번 토닥인 승운이 침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가갈수록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문이 열리자 암막커튼을 쳐서 어두운 방 안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자고 있는 재준이 보였다. 마치 고치 같아서 승운이 피식 웃었다. 그 작은 소리를 알아차린 건지 이불이 한차례 움찔하더니 아래로 떨어졌다.

“박사님.”

재준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윤곽만 대충 보였지만 목소리가 승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승운의 형상이 서서히 다가오더니 제 코앞까지 왔다. 그제야 얼굴이 보인다.

“졸린 얼굴.”

그렇게 말한 승운이 웃어보였다. 아직 비몽사몽한 재준은 그대로 승운의 머리통을 끌어안아 제 가슴께에 가져왔다. 허리를 숙인 채 침대에 기대듯 떨어진 승운의 귀에 재준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저를 끌어안으며 “어서와.” 작게 말하는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뭔가 들뜬 듯한, 부유하는 듯한 감정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동떨어진 것처럼. 기분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것에 더 가까웠지만 이질적이었다. 유토피아에 살게 되면 이런 기분이 들까 싶을 정도로.

승운이 아무런 답이 없자 재준이 머리를 쓰다듬더니 손을 내려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승운이 시선을 올려 바라보자 제대로 눈도 뜨지 못했다.

“다녀왔어요.”

승운이 말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부딪히려고 하자, 재준이 재빨리 손을 들어 승운의 턱을 밀어냈다.

“……왜?”

승운이 상처받은 듯 말하자 재준이 “양치하고 와서 해줄게.” 말했다.

“전 그냥 해도 되는데.”

“내가 싫어.”

재준의 말에 승운은 그러면 빨리 해달라며 재준을 일으켰다. 재준은 안경도 찾아 쓰지 못한 채 욕실로 끌려갔다. 안경이 없어도 칫솔이나 치약을 찾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승운은 굳이 제가 칫솔에 치약을 짜서 재준의 입에 물려줬다. 재준이 떨떠름한 얼굴로 칫솔을 물었다.

“……근데 일은 잘 마무리 하고 온 거야?”

“네, 나쁘지 않았어요.”

승운이 답했다. 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치질을 했다.

승운은 어제 상대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아주 어색한 인간종 괴수. 자신들이 괴수가 됐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카트린 두자당과는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레벨 역시 그러했다.

만들어진 괴수인가? 승운이 생각했다.

재준 역시 에스퍼를 괴수로 만드는 방법을 안다고 했다. 재준이 안다는 것은 그의 교수가 안다는 것이고, 그의 교수가 안다는 건 카트린 두자당도 아는 것이 분명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이 방법이 알려지거나 한다면 정부는 어떻게 행동할까?

에스퍼였던 괴수로 군을 만든다면? 괴수는 에스퍼와 달리 통제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들이나 괴수들도 훈련을 하면 제어할 수 있다. 하물며 말이 통하는 괴수라면 더 쉽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뭐든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승운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입을 몇 번이나 헹군 재준은 칫솔과 입가를 씻고 나서 거울을 바라봤다. 그래봤자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꺼끌하게 수염이 자란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싶었다.

턱을 쓰다듬자 손에 걸리는 게 있었다. 하지만 승운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듯, 양치를 마친 재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키스해줘요, 박사님.”

승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준이 입을 맞췄다가 뗐다. 예쁜 얼굴이다. 다시 입을 맞춘 재준이 입술을 혀로 핥다가 살짝 깨물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혀를 넣어 안쪽을 훑자 제 허리에 올린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얽힌 혀를 끌어당겨 제 입 안에서 몇 번이고 살짝 깨물자 제 몸과 맞닿은 부분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부풀어가는 물건을 느끼며 재준이 엉덩이를 토닥이자 승운이 사타구니를 비벼왔다. 제 물건 역시 반응이 오고 있었지만 재준은 여기까지라는 듯 입을 떼어냈다.

“너무 그리웠어요.”

“겨우 이틀이었는데?”

“그러니까요.”

이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 떨어져있는 것으로도 부족했다. 역시 법적인 구속을 만들어야했다.

“안 그래도 소중한 주말인데, 더 붙어있을 수 있는 시간을 빼앗겼단 말이에요.”

“그러게, 소중한 주말인데.”

그러고 나서 재준에게 짝의 개념도 알려줘야겠다고 승운은 생각했다.

“네가 없어서 어제 밤에 잘 못 잤더니, 오늘 낮까지 늘어지게 잤네.”

“…….”

안 알려줘도 되려나? 떨어져있으면 뭔가 불안한데, 함께 있으면 불안감이 가신다. 함께 있다 보면 재준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결국 재준에 대한 불안감이 자신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왠지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재준은 크게 불안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의외로 사람이 강했다. 정신적으로는 재준이 자신보다 훨씬 더 튼튼하다고 지승운은 생각했다.

“웃어봐, 예쁘게.”

그 말에 승운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가까워 그 정도는 보였다. 재준 역시 마주 웃었다.

“화사하니 좋네.”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승운을 안았다. 서로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이나, 혹은 서로의 허벅지에서 제 존재를 드러내는 부푼 성기에 승운이 옅은 숨을 내뱉었다.

“나랑 같이 잘래?”

재준이 말했다.

“……섹스 하자고요?”

“아니.”

물론 그것도 좋긴 한데. 사실 아직 잠이 부족했다.

“네가 있으면 잠이 잘 와.”

그렇게 말하며 재준은 승운과 밀착한 채 서서히 이동했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며 이동한 재준은 “왜 그럴까.” 하고 말하며 열린 침실로 승운의 몸을 이끌었다. 결국 침대 위로 승운을 밀어 넘어뜨린 재준이 위로 올라타더니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일단 수면욕부터 채우고 나머진 일어나서 하자.”

그렇게 말한 재준의 승운의 옆에 누웠다.

저 지금 섰는데요……. 차마 말하지도 못한 채 부풀어 오르는 아래에 시선을 한번 준 승운은 제 옆에 행복한 얼굴로 누워있는 재준을 바라봤다. 아쉽긴 하지만 피곤한 것 같으니까 자고 일어나서 해도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정말 예쁘다. 어떻게 이렇게 예쁘지. 조형이 정말 예쁘게 생겼다. 나름 감탄하듯 재준의 얼굴을 바라보던 승운은 갑자기 두 눈을 뜬 재준에 숨을 들이켰다.

“지승운.”

“네.”

재준이 팔을 뻗어 승운의 가슴께를 더듬거렸다. 마치 거기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승운은 그런 재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같이 눈을 감았다.

* * *

사실 재준은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카페인은 정신 작용제다. 심지어 석유 다음으로 가장 많이 거래가 되는 상품이었다. 전 인류들은 그 누구도 주도하지 않는 정신 작용제에 대한 실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술이었고, 다른 하나가 커피였다. 카페인을 먹는다는 행위는 그러했다. 심지어 카페인의 반감기는 7시간가량이다.

괴수들은 효소가 더 빨리 작용하여 카페인을 빨리 분해할 수 있는데, 그렇다 해도 괴수에게도 카페인은 안전하지 않았다. 특히나 간에게 말이다. 카페인은 각성제고, 괴수들에게 카페인을 섭취하도록 했을 때 정상적인 작동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 중독성 물질은 시교차상핵의 하루주기 리듬과 아데노신에 영향을 주고 섭취할수록 서서히 쌓이고 쌓여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즉, 재준에게 카페인은 지독한 각성제이자 아주 가끔 밤을 샐 때 마시는 약제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지승운은 커피를 즐긴다. 어떻게 보면 카페인이 효과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일반 커피를 사두든, 디카페인을 사두든 맛의 차이도 잘 느끼지 못하고 뭘 마셔도 잘 잔다. 아무래도 간과 효소가 튼튼한 듯 했다.

동지가 지나고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 길어졌음에도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재준은 승운을 위해 커피라도 내려줄까 싶어 주방의 찬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작은 상자가 들어왔다. 상자의 표면에는 브랜드 네임까지 적혀서.

“…….”

재준이 상자를 꺼냈다. 뭔지 짐작이 갔다. 상자를 열자 안에 반지가 들어있었다. 남성용 반지는 조금 투박해보였지만 다이아가 촘촘히 박혀있었다. 이게 도대체 몇 개야. 그것보다 언제 사온거지? 그동안은 승운이 항상 커피를 내려 알지 못했다.

재준이 피식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이건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커피를 타줘야겠다는 생각도 접었다. 승운의 눈높이와 자신의 눈높이가 비슷해서, 찬장을 열면 바로 원두커피와 반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키가 20센티 가량 작았다면 못 본 척 할 수 있었겠지만 슬프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준은 반지를 한 번 더 살폈다.

이게 프로포즈 링인가 보지. 커플로 산 게 아니라 하나만 산건가? 하긴, 프러포즈 반지를 두개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고 보면 재준도 반지를 주는 입장이었기에 이것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승운이 이걸 사서 여기다 숨겨뒀는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그러고 나서 재준은 반지 사진을 찍었다.

자신이 받는 것도 좋았지만, 승운이 이것을 주는 날 재준 역시 같은 반지를 승운에게 줄까 싶어서였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손가락 사이즈를 재야 하고……. 근데 이게 나한테 맞나? 재준이 반지를 꺼내 제 손에 끼워봤다.

“…….”

맞네.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다.

반지를 제 자리에 돌려둔 재준은 상자를 닫고 다시 찬장 옆에 올려뒀다. 그러고는 침실로 돌아갔다. 승운은 자고 있었다.

자는데 누군가 다가오기만 하면 민감해서 깰 것처럼 생겼으면서 다가가도 어떤 반응 없이 색색 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다. 자는 것이 마치 어린 아이 같았다.

재준은 주위를 둘러봤다. 손가락의 둘레를 잴만한 것이 없었다. 결국 침대 맡에 있는 티슈 한 장을 꺼내 둘둘 꼬아서 줄처럼 만든 재준은 승운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 티슈를 조심스럽게 둘렀다.

승운이 움찔하는 듯 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손가락에 딱 맞아떨어지는 부분까지 돌린 재준이 남은 부분을 뜯어냈다. 나중에 자로 길이를 재서 맞춰보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승운의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지승운이 눈을 떴다.

“…….”

깜짝이야. 안 들켰겠지?

“어…… 박사님?”

“좋은 아침. 놀랐어요?”

사실은 자신이 놀랐지만 재준은 티내지 않고 웃어보였다.

“—여기 계속 있었던 거예요?”

막 자다 일어나서인지 목소리가 잠겼다. 얘는 왜 잠긴 목소리도 멋있냐.

“제가 언제 잠들었죠?”

“나도 잘 모르겠는데. 너보다 먼저 잠들어서.”

“으… 밤이에요?”

“아니, 저녁이야.”

재준의 말에 승운이 눈을 비볐다. 자신이 눈을 비빌 때마다 손을 떼어주던 모습이 생각나 재준도 승운의 손을 떼어냈다. 그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렸는지 승운이 푸스스 웃었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자신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재준의 모습이 보인다. 꿈은 아니겠지. 제 손을 잡은 체온이 꿈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줬다.

“왜 그렇게 봐요.”

“아니, 잘생겨서.”

재준이 답하며 승운의 볼을 쓰다듬었다.

“너 정말 예쁘다.”

당신이 더 예쁜데. 하지만 승운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얼굴을 만지는 재준에게 얼굴과 머리를 비볐다.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곁을 내주는 모습에 재준이 웃어보였다. 그러고는 다른 손에 들린 티슈를 조용히 주머니에 넣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은 것 같다고 재준은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