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비밀은 언제나 의외의 장소에 숨겨져 있다.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재준의 발표 이후에도 여러 사람들이 발표를 했지만 아무래도 시선은 그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몇몇 괴수학자들은 짐작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발표를 원하지 않았으며, 혹자들은 숨기고자 한 것이었다. 이 발표가 일으킬 반향이 어찌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그 발표를 한, 정확히는 사고를 쳤다는 느낌에 더 가까운 박사는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미리 빌린 아파트로 오는 길까지는 급했다. 트램을 탈까 싶었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당장 기다리기가 힘들어서 택시를 탔다.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이 그렇듯이 크라쿠프 역시 큰 편이 아니었기에 금방 도착했다.
건물 입구의 패스워드를 누르고 들어와 엘리베이터에 타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근방의 건물들이 대부분 저층이어서 5층임에도 왠지 높게 느껴진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재준은 자신의 코트를 벗기도 전에 승운의 코트를 벗겼다. 승운 역시 급하게 재준에게 들러붙었다. 재준의 머리를 쓸어 올려 주며 입을 맞춘 승운은 제 넥타이를 끌어내리는 재준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 와중에 착실한 한국인들이라, 신발을 벗고 침실로 이동하며 허물 벗듯 옷을 하나 둘 떨어뜨렸다. 침대 위에 오르기 전에 셔츠를 벗어던진 재준은 바지부터 벗는 승운을 보며 큭큭 웃었다. 정복이나 정장 차림 위주로 있는 승운에게 셔츠 가터는 필수이다 보니 습관이 들었는지 집에서 편안한 옷을 벗을 때도 바지부터 벗곤 했다.
승운이 재준의 안경을 벗기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부푼 하반신을 밀착시키며 몸을 쓸어 올렸다. 탄력 있는 가슴을 주물거리다 유두를 손톱으로 긁자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가슴으로 느끼는 듯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 반응하지 않았는데 그동안 잘 만져줘서 그런지 쉽게 얼굴과 목덜미가 붉어졌다. 짧게 내뱉는 한숨에 승운 역시 흥분한 것인지 아래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재준이 피식 웃었다.
“왜 웃어요?”
“아니, 만지는 게.”
그렇게 말하며 아래를 살폈다. 솟아오른 속옷의 끝부분이 젖어있는 듯 했다.
“어차피 다 아는 몸인데도 매번 흥분해서.”
“아는 몸이라서 흥분하는 건데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재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머리를 멋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재준을 내려다보던 승운이 그대로 입을 맞췄다. 잡아먹을 것처럼 거칠게 들어온 혀에 바람을 불어넣자 움직임이 부드럽게 바뀌었다. 하지만 뭔가 불만인지 치아를 세워 혀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입술을 부딪혀오더니 어느 정도 만족했는지 쪽 하고 소리 내며 입을 맞춘 뒤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요, 박사님. 전 박사님이랑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붙어먹는 생각을 해요.”
“그래?”
“그래요.”
그 대답에 재준이 웃어보였다. 승운의 손가락이 복부에서 위로 올라가 가슴을 쓰다듬다가 한번 움켜쥐었다. 태어날 때부터 민감한 건지 유독 반응이 좋아 몇 번이나 문지르다가 다시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린 승운이 재준의 바지와 속옷을 동시에 벗겼다. 발기한 성기가 퉁 하고 튀어나왔다.
승운이 가슴에 입을 맞췄다. 혀로 쓸어 올린 유두를 살짝 깨물자 움찔 튀어 오르는 몸에 비실비실 웃음을 지었다. 그대로 혀를 세워 갈라진 복근 중심을 따라 내려온 승운이 배꼽에 혀를 넣자 재준이 놀라서 흠칫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승운이 몸을 세우며 재준의 어깨를 잡아 눌러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재준이 포기한 듯 몸을 뉘이자 승운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일어선 성기의 끝에 입을 맞춘 뒤 머금은 승운은 입안에서 귀두를 굴릴 때마다 흠칫 흠칫 떠는 재준의 모습을 눈을 치켜뜨며 바라본 승운이 포식이라도 한 것 마냥 웃으며 입을 떼어냈다.
“진짜 좋아.”
“어디에다가 말하는 거야.”
“박사님 자지요.”
그래,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도대체 왜 거기에 대고 그렇게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좋아해주는 것이 싫다는 건 아닌데.
“서 있는 거 너무 좋아요.”
저를 상대할 때면 항상 서 있었…… 때로는 반쯤 서있기도 했다. 아마 조금 덜 선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완전히 발기하면 전립선액 사정이 불가능하다보니까.
“싸는 건 더 좋아요. 야해서.”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다시 재준의 것을 입에 담았다. 일부러 춥춥 소리 내며 엉덩이를 주무른 승운이 구멍으로 손을 가져갔을 때, 손가락 끝에 금속성의 뭔가가 걸리며 재준이 “읏—!” 하고 신음했다.
“…….”
이게 뭐지? 몸을 튕기는 재준의 모습에 승운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다리를 양쪽으로 벌렸다. 갑자기 그럴 거라고 생각지 못해서 당황한 재준이 허우적거리자 승운이 손에 힘을 줘 허벅지를 쥐며 고정시켰다.
발기한 성기 아래로 볼록 솟아오른 회음부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평소와 다른 것이 더 아래에 보였다. 너무 좁아서 제 것이 들어갈까 싶은 작은 구멍은 온데간데없고 금속성의 무언가가 안에 들어차있었다. 승운이 다리 사이를 한번, 그리고 재준의 얼굴을 한번 바라봤다.
재준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안경이 벗겨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승운의 시선이 느껴졌다.
“……박사님, 이거 뭐예요?”
“……플러그.”
보면 안다. 플러그인거. 제 것 말고는 다른 것이 들어간 적 없는 구멍에 금속성 애널 플러그가 들어차 있었다. 승운이 플러그의 끝을 잡아당기자 재준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요?”
“빨리 하고 싶어서.”
“예?”
“푸는데 시간 걸리잖아.”
시간 걸리긴 하지. 근데 그거 얼마나 걸린다고.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이거 넣고 발표한 거예요?”
“…….”
“진짜?”
승운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모를 얼굴이다. 분명 입술은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거야 바로 하고 싶었으니까.
“왜 말 안했어요?”
“…말해야 하는 건가?”
“아뇨, 안하는 게 더 낫긴 해요. 안 그랬다간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덮쳤을 걸.”
그렇게 말한 승운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흥분한 것인지 숨이 거칠었다.
“와, 이걸 무슨 생각으로 넣은 거예요?”
그러게. 재준도 아침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애널 플러그를 수트케이스에 넣고 짐을 붙일 때부터 조마조마했다. 가방에 들어찬 저 물건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울 정도로.
출국할 때 엑스레이에 찍히면 어쩌지, 이상하게 보면 어쩌지 같은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자신의 것이라는 걸 보지도 못할 텐데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재준도 나름 기대가 컸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자 생각보다 더 부끄러웠다.
“나한테 말해줬으면 내가 넣어줬을 텐데.”
승운이 말하며 플러그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너무 야하다.”
천천히 플러그를 빼자 안에서 투명한 액이 흘러나왔다. 점액질 농도를 보니 젤이다. 두꺼운 부분이 나오자 재준이 저도 모르게 읏, 하고 소리 냈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좁은 구멍이 플러그를 오물거리며 놔주지 않았다. 승운이 웃으며 그대로 플러그를 넣었다.
“아! 흐윽—!”
“잘 무네요.”
와, 진짜 야하다. 너무 야했다. 승운이 제 속옷을 내리며 성기에 손을 갖다 댔다. 잔뜩 성난 물건을 문지르며 재준의 뒤에 들어찬 플러그를 꾹꾹 누르다가 갑자기 당겼다. 반쯤 빼낸 플러그를 다시 푸욱 찔러 넣자 재준이 흐읏 하고 신음하며 허리를 뒤틀었다. 뭔가 부족한 듯 허리를 흔들며 제 손으로 수음하자 승운이 입술을 축이더니 몸을 일으켜 그대로 재준 위에 엎어졌다.
가쁜 숨을 내뱉는 재준의 입술에 그대로 입을 맞춘 승운이 웃으며 입안으로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게 간지러우면서도 성감을 자극해서 재준이 허리를 움직였다. 여전히 승운의 손은 플러그를 잡고 있었다. 장난치듯 이리저리 돌리자 재준이 안겨들더니 하앗 앗 신음을 내뱉었다. 귀를 녹일 듯한 소리에 승운이 턱으로 입술을 옮겼다. 살짝 깨물자 재준이 우는 소리를 냈다.
“읏, 아, 지승운!”
“하아— 네, 박사님.”
“장난치지 말고 넣어.”
그렇게 말하며 승운의 목에 손을 두르자 승운이 웃으며 다시 쪽 입을 맞췄다. 동시에 애널 플러그를 빼내자 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부끄러운 소리에 재준이 고개를 숙였다. 승운이 플러그를 그대로 재준의 눈앞에 보여줬다.
“좋았어요?”
“…….”
“다음에 다른 것도 넣어볼래요? 박사님 괴수 꼬리처럼 생긴 거 좋아했죠?”
“내가 언제—.”
재준이 말하려다가 멈췄다. 승운의 손이 그대로 아래로 들어왔다. 평소 풀어줄 때와 달리 젖은 내부가 찰기 있게 들러붙었다. 손가락만 넣었는데도 자극적이어서 성기가 절로 꺼덕였다.
“흐물흐물하네.”
아랫구멍도, 재준의 얼굴도 그랬다. 자극에 견디지 못한 눈이 잔뜩 젖어있었다. 놔두면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냥 넣기 너무 아까워요.”
“—애타게 하지 말고.”
재준이 말하며 허리를 들어올렸다. 승운이 손가락을 빼며 아래로 내려갔다. 벌어진 다리 틈으로 보이는 구멍이 벌어졌다가 오므라들었다.
못 참겠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승운이 제 성기를 바로 갖다 댔다. 잔뜩 풀어진 안쪽이 귀두를 폭 감싸듯 물어왔다.
“아읏!”
“후— 엄청 뜨겁네요.”
승운이 말하며 시선을 아래에 두고 제 성기를 무는 구멍을 음미하듯이 바라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어떻게 이게 들어가지 싶을 정도로 작은 구멍이 제 모양으로 벌어져있었다. 입맛을 다신 승운이 허리를 움직여 위로 찍어 올리듯 문지르자 재준이 펄떡 뛰어올랐다.
“학! 으읏!”
재준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고도 못 견디겠는지 승운의 팔을 붙잡았다. 팔에 느껴지는 악력에 승운이 왜 그러냐는 듯 재준을 바라봤다. 재준이 승운을 노려봤다. 그래봤자 귀여울 뿐이었다.
“하윽……!”
장난치듯 다시 밀어붙이자 재준이 위로 튀어 오르며 소리 냈다. 처음부터 느끼는 곳만 찔러대자 성기 끝에서 투명한 액체가 질질 흘렀다. 처음부터 이렇게 밀어붙이면 앞으로가 더 힘들어졌다. 재준이 주도권을 갖기 위해 승운을 밀쳤다. 승운이 침대 위로 풀썩 무너지며 재준의 손을 당겼다. 그대로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자 성기가 더 깊게 들어왔다.
“으…….”
자극점을 찍어 눌러서 피하려고 올라탄 것인데 하필 그 자리에 닿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사정을 할 것 같아 바르작거리던 재준이 결국 움직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사정은 하지 못했지만 살짝 갔다. 허벅지와 복부가 하염없이 떨리자 승운이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젖혔다.
“—하아, 너무 조이지 마요.”
조이고 싶어서 조이는 게 아니야.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위로 잔뜩 선 좆과 올라붙은 고환을 주무르던 승운이 재준의 허벅지를 당기며 저를 집어삼킨 구멍을 바라봤다.
“제대로 벌어지잖아요. 응? 내 모양으로 잘 벌어지면서.”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움직이자 조금 살만해진 건지 가쁜 숨이 정돈됐다. 재준이 옅은 숨을 내쉬며 승운을 바라봤다. 두 눈이 마주치자 왠지 모르게 안쪽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간질간질하고, 뿌듯한 감정이다.
감정뿐만 아니라 아래도 한층 더 부풀었다. 승운이 제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재준을 바라보다가 끌어당겨 안았다. 재준이 그대로 승운의 목에 팔을 둘러 안겼다. 천천히 위로 올려치던 승운이 속도를 좀 더 빨리했다. 처음에는 부드럽던 움직임이 어느 샌가 격해졌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아래에서 질척이는 소리라 유독 크게 느껴지는 듯 했다.
“소리—.”
“흐? 뭐라고 했어?”
“소리 내요.”
이어지는 말에 재준이 웃어보였다. 그냥 내줄 것 같지 않네, 승운이 생각하며 재준의 허리를 붙들고 퍽퍽 찍어 눌렀다. 그제야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앗, 읏, 아아! 윽, 앗, 흣!”
종마마냥 날뛰는 승운의 몸짓에 위로 들썩이던 재준이 멈추라는 듯 허벅지를 잡아 눌렀지만 승운은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자신을 막으려는 손을 한 손으로 잡은 채 허리를 돌리자 “흐으윽!” 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이미 제 복부와 재준의 복부가 젖어있었다. 전립선 액은 아니고, 프리컴인 듯 했다. 제 품에 기대어 헉헉거리는 소리에 뿌듯해 격하게 움직이자 안쪽이 조여 들었다. 불규칙적으로 조여 들었다 풀어지는 구멍에 승운이 신음하며 위로 퍽 쳐 올랐다. 재준의 몸이 한 번 더 뒤틀리며 승운의 복부에 백탁액이 뿌려졌다. 재준 역시 안쪽으로 체액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몇 번이나 더 움찔거리던 재준이 승운의 몸 위로 늘어졌다.
어느새 놔준 것인지 제 손이 승운의 가슴 위에 올라가 있었다. 탄탄한 가슴에 절로 손이 움직이자 승운이 웃으며 재준의 엉덩이 주물거렸다.
“저 봐요.”
재준은 승운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그저 숨을 몰아쉬었다.
“재준 씨, 얼굴 좀.”
재준이 힘든 듯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상기된 얼굴이 젖어있었다.
승운은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입맞춰줘요.”라고 말했다. 재준이 입 맞췄다. 얽혀드는 혀를 감아올린 승운이 시선을 슬쩍 떨어뜨렸다. 제 배에 들러붙은 정액에 뿌듯해졌다. 아직 힘이 빠지지 않은 재준의 성기도 마찬가지였다. 입 맞추며 손을 아래로 내려 수음하자 재준이 다시 움찔 몸을 떨었다.
“박사님.”
“으, 아읏! 아!”
“너무 잘 느끼는 거 아니에요?”
같은 생각을 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승운과 섹스를 할 때면 마치 동떨어진 세계에 떨어진 것 같았다. 흥분감과 열기와 서로 맞닿은 몸의 체온, 겹쳐진 마음이 피부로 절절하게 와 닿는다.
“오늘 유독 잘 느끼네. 플러그로 흥분했어요?”
재준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진짜 흥분 안했어요?”
“너—.”
“네.”
“너랑 할 생각, 에, 흑! 아읏!”
재준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승운이 다시 움직였다.
“처, 천천히—!”
그 말에 승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박아 올리던 허리짓을 멈추고 뭉근하게 허리를 돌렸다. 재준이 승운의 얼굴을 바라봤다. 가까이 있자 어떤 표정인지, 심지어 그 눈에 비치는 제 모습조차도 보였다. 눈에 담긴 애정에 마음이 충족하는 것 같았다. 재준이 움직임에 맞춰 서서히 움직이자 승운은 빨리 처박고 싶은 것을 참은 채 큿 하고 신음했다.
“지승운.”
재준이 말하며 승운의 왼손을 잡아 제 얼굴에 가져왔다. 자신이 끼워준 반지에 입 맞추자 승운이 움찔하며 멈췄다.
“사랑해.”
재준이 손가락을 입에 넣자 승운이 다시 움찔 하고 떨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것처럼 멍하니 재준을 바라보던 승운의 얼굴이 곧 만개한 꽃처럼 활짝 피었다.
“저도 사랑해요.”
승운이 말하며 재준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재준의 손가락에도 제가 끼워 넣은 반지가 있었다.
“사랑해요, 재준 씨.”
***
가이드, 나의 태양.
멜라니 라제쉬는 가이드가 에스퍼들의 태양이라고 했다.
그 날 이후 리처드 라제쉬는 악몽의 바다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바다에 빠져들어 숨도 쉬지 못한 채 죽는가 싶으면, 가끔씩 눈을 뜨는 멜라니 라제쉬 때문에 꼴딱꼴딱 넘어가는 숨을 겨우 부지했다.
절망의 부력은 리처드 라제쉬를 띄울 만큼 크지 않았고, 리처드 라제쉬는 늪과 같은 검푸른 바다에 영원히 얽매여.
“멜라니.”
얽매여…….
“멜라니?”
리처드 라제쉬가 병상에 있는 멜라니를 바라봤다. 눈을 살짝 뜬 멜라니의 모습에 희망을 가지다가도, 늘 다시 눈을 감는 것을 알기에 체념했다.
“멜라니.”
리처드 라제쉬는 앙상해진 멜라니 라제쉬의 손을 부여잡았다. 곧 이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있다.
“리치.”
하지만 그 날은 아니었다.
“멜라니.”
“많이 늙었네.”
멜라니 라제쉬가 깨어났다.
***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평소의 승운은 재준의 체력을, 정확히는 정력을 안배해 나름 자제를 하고 있었지만 어제는 왠지 자제하지 못했다.
재준은 웬만하면 승운에게 맞춰줬지만 어제는 오랜만에 그만하자고 애원했다. 더 못한다는 말에 “한 번 만요.” 하고 요구하는 승운을 밀어내다가도 결국 “진짜 마지막이야.” 하고 입을 맞췄다. 겨우 끝난다 싶으면 다시 승운은 진짜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하자고 요구했고, 재준은 거절하다가도 결국 승낙했다. 전부 그 얼굴 때문인 게 분명했다.
천장이 새하얗다. 원래 하얀 색이었겠지만 유독 하얗게 보이는 건 지쳐서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아래가 쓰라려 속옷을 입는 것조차 거추장스러울 것 같았다. 반면 아침에 슬쩍 본 승운의 얼굴은 보양식을 먹은 것처럼 반질반질했다.
“……가이드가 제 생명력을 나눠주는 게 아닐 텐데.”
재준이 말했다.
“당연히 아니죠.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승운이 침실로 다가오며 물었다. 막 잠에서 깬 재준의 입에 쪽 하고 입을 맞춘 승운은 만족스러운 듯 웃어보였다.
내가 생명력을 나눠준 기분이 들어서 그래. 재준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학술회 직전이라 아무래도 일주일간 금욕을 시킨 게 문제였을까.
승운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언제 또 예쁘게 단장한 건지 머리도 단정했고 비누냄새가 났다.
“지승운.”
“네, 박사님.”
“혹시 제 안경 못 봤습니까?”
“옆에 뒀어요. 여기요.”
재준이 승운이 건넨 안경을 쓰고 그를 바라봤다.
“…….”
예뻐서 좋긴 한데…… 강경하게 나가려던 말이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듯 보는 얼굴에 설탕마냥 푸스스 부서져내렸다.
“우선, 우리 대화를 나눕시다.”
“대화요? 좋죠. 어떤 대화요?”
“일주일에 몇 번 해야 만족합니까?”
“…….”
갑자기?
“어… 매일 하면 좋죠.”
“매일……. 매일 한번?”
“횟수를 말하는 거라면 매일 두세 번씩은 할 수 있는데.”
네 두세 번이 내 서너 번이 되는 것 같은데. 매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하드 코어한 인생이다. 재준에게도 휴식이라는 게 필요하다.
“매일은 힘듭니다. 일주일에 네 번은 어때요? 주말은 하루 쉬고, 월 수 목 토.”
“……좋긴 한데 갑자기 왜요?”
“넌 금욕을 하면 안 되는 몸이야.”
“…….”
어제 많이 힘들었나보네. 하긴, 웬만하면 애원하지도 빼지도 않고 저에 맞춰 즐기던 재준이 마지막엔 눈물까지 흘리며 멈춰달라고 했다. 사실 승운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플러그가…….
그러고 보니 그거 언제 산거지? 어디서? 무슨 생각으로? 어떤 얼굴로 받았을까. 생각하니 다시 아래가 설 것 같았다.
“목요일은 삽입 말고 입으로 해줄게요.”
……진짜 힘들었나봐.
승운이 피식 웃었다. 나름 진지하게 말하는데도 왠지 재준이 귀여워보였다.
“운동도 같이 하죠. 체력을 길러야겠습니다. 지금 제 체력으로는 부족하니까요.”
그래도 하루 정도 밤을 새도 끄떡없는 몸이긴 했다. 30분 정도를 쉬지 않고 달릴 수도 있었고, 근력도 나름 있다고 자부했다. 괴수들을 다루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 체력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에스퍼는 따라갈 수 없었다.
다른 가이드들은 어떻게 버텼던 거지?
아, 그래서 예전에 몇 명이랑…….
그걸 온전히 제가 감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재준은 자신은 크게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역시 저쪽 정력이 강한 게 문제였다.
“전 일주일에 두 번이어도 돼요.”
“…그럼 일주일에 세 번으로 할까요?”
“진짜 두 번 정도면.”
말을 이어나가던 승운이 굳은 재준의 표정에 곱게 입을 다물었다. 눈치는 있었다. 사실 단순히 가이딩을 떠나서, 연인과 성적으로도 닿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인간으로 산 시간보다 형질이상자로 산 시간이 더 긴 사람들은 다른가? 비슷할 것 같은데.
“난 두 번으로는 부족해.”
승운이 하루에 한번 정도에서 끝내준다면 주 5일은 생각해줬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한 번에 끝 낼리 없었다. 주3회 딱 좋았다. 나머지 4일은 운동을 해서 상대할 체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재준이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승운의 입 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저도요.”
뭐가.
“저도 박사님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는데, 뭐 결과적으로 같은 뜻이긴 했다.
“유예지 연구원이 근처에 한인 마트가 있다고 해서 가봤는데 아직 안 열었더라고요. 근데 멀리서 봐도 뭐, 라면이나 그런 인스턴트 위주였어요. 쌀도 있긴 한데 여기서 해먹기는 좀 그렇고 해서 근처 카페에서 아침 먹을만 한 거 포장해왔어요. 샐러드랑.”
승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준이 이불을 걷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신을 감상하듯 바라보던 승운은 속옷도 챙겨 입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재준을 보며 “박사님!” 하고 불렀다.
“옷, 적어도 속옷이라도—.”
“괜찮아. 너밖에 없는데.”
내가 제일 위험한 거 아닌가? 승운이 생각했다.
옷 안 입는 것 정도야 뭐 어떠냐는 얼굴이다. 승운도 재준과 함께 하다 보니 그의 이런 대충대충 하는 성격이나 습관을 알긴 했지만 큰 창 때문에 밖이 저렇게 훤히 보이는데 재준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올라붙은 엉덩이 위로 제가 낸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아래 허벅지나 오금에도 울혈이 한 가득이었다. 몸이 뻐근한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목을 좌우로 돌리자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
그러니까 이쪽이 위험해요.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저 나체를 만지고 싶었지만 지승운은 나름 절제를 잘 한다. 어쩌면 그냥 미움 받기 싫어서 자제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승운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재준의 엉덩이를 주무르자 황당한 얼굴로 재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옷 입고 올 테니까 기다려.”
이제 진정으로 뭐가 위험한지 알아차린 얼굴이었다.
재준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 수트케이스를 열었다.
속옷을 꿰어 입고 바지를 입은 다음에 셔츠를 꺼내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려 제 몸을 살핀 재준은 일단 겉보기에 위에는 울혈 자국이 없어 얇은 셔츠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얀 반팔 셔츠를 꺼내 입으면서 밖으로 나오는 재준을 향해 승운이 “전화 오는데요. 유예지 연구원이요.” 말했다.
“대신 받아줘.”
그렇게 말하며 셔츠를 내린 재준은 역시 둔부에서 통증이 조금 있는 것 같아 허리 아래를 문질렀다.
“예, 지승운입니다.”
[어? 내가 전화 잘못했나?]
“제대로 했어요. 박사님 곧 바꿔드릴게요.”
[아, 괜찮아요. 오늘 보기로 했는데 기억하고 계신 거죠?]
“그럴걸요.”
[지금 머무는 곳 주소 메세지로 보내주세요. 그쪽으로 갈게요. 아, 그리고 멜라니 라제쉬 박사님이 깨어났대요.]
“예?”
[전해주세요.]
승운이 되묻기도 전에 예지는 망설임도 없이 시원스레 전화를 끊었다. 승운이 꺼진 화면을 바라보다가 제 옆에 다가와 앉는 재준을 바라봤다.
“박사님.”
“응.”
“멜라니 라제쉬 박사님이 깨어났다는데요.”
“어…… 어?”
예지가 온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재준이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기껏해야 두어 시간 지난 상태였다. 예지가 천 가방에서 맥주와 런치박스를 꺼냈다.
“여기 피에로기가 완전 맛집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짐을 넘긴 예지는 현관에서부터 맥주 캔을 따서 꿀꺽꿀꺽 마셨다.
“낮부터 흑맥주야?”
“부드카도 아닌데요, 뭐.”
그렇게 말한 예지는 그거 아냐며, 원래 보드카는 폴란드가 오리지널이라고 말했다. 어쩐지 관용구 중에 폴란드사람처럼 술을 잘 마신다는 말이 있더라니, 차별적인 말이었지만 그 말이 나온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라제쉬 박사님은 바로 돌아갔어요.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아마 박사님 꺼만 듣고 갔을 걸요?”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예에, 그 직후에 사라졌으니까요.”
승운은 예지가 가져온 피에로기를 그대로 접시에 담았다. 뭔가 했더니 만두와 똑같이 생겼다. 예지는 두 번째 맥주 캔을 땄다. 이렇게 마시면 근 손실 잃어난다고 말을 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요, 박사님.”
예지가 말했다.
“혹시 시간 되면 스코틀랜드에 갈래요? 시리예는 어제 라제쉬 박사님이랑 함께 갔어요. 그리고 전 2월 초중순부터 바빠서 시간이 지금밖에 안나요. 크라쿠프에서 왕복으로 가는 항공편이 있어서 모레 가보려고요.”
“그래?”
“네. 모레가 제일 싸요. 편도 3만원 정도.”
내일 바로 가는 건 5만원이었다. 예지는 가난한 연구원이자 학생이었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아껴야했다.
재준은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승운에게 말했다.
“같이 가자.”
승운의 의견 따위는 없었다.
재준의 프로파일은 특이한 점투성이였지만 가족 관계만큼은 평범했었다.
부모님과 형 한명.
다만 그들 모두 2004년에 사망했다. 사유는 괴수의 습격. 재준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괴수학을 전공한 게 가족들에 대한 복수 때문은 아닐까 추측했다.
재준은 07년 18세에 괴수학부로 입학했다. 그가 한국을 아무렇지 않게 떠난 건 가족이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승운은 제 왼손에 있는 반지를 바라봤다. 이제는 가족이 있다. 재준은 승운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저께 항공권을 다 같이 예약했다. 어차피 다른 도시로 이동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숙소는 문제없었다. 라제쉬 박사님들은 성 같은 곳에 살아서 숙소를 따로 잡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승운은 돌로 된 고성을 떠올렸다.
“곧 박사님 생일이네요.” 예지가 말했다.
“알고 있어요.”
“뭔가 준비해둔 건 있어요? 전 그 날 프러포즈라도 할 줄 알았더니 반지는 이미 둘 다 꼈고. 설마 크리스마스에?”
“아뇨, 그것보다 더 전에. 그리고 프러포즈는 제가 받았거든요.”
승운의 말에 예지가 엑? 엥? 진짜요? 하고 되물었다.
“박사님이 프러포즈를 했다고요?”
“예.”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왼손을 들어올렸다. 기다란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냥 보기엔 투박해 보이는데도 다이아는 박혀있었다. 비싸 보이는 반지였다.
“와, 박사님이 지승운 에스퍼 정말 많이 좋아하나 봐요.”
하지만 반지보다도 다른 것이 더 대단했다.
“박사님 결혼생각은 없었던 걸로 알거든요. 뭐 시리예랑 만날 때도…… 이건 말 안하는 게 좋겠구나.”
“결혼 생각이 없었다고요?”
“그냥. 뭐.”
딱히 긍정적으로 여기지도 부정적으로 여기지도 않았지만 재준은 친구들만 있다면 혼자서도 잘 살 것 같았다. 친구가 없어도 혼자 잘 살 것 같았지만.
재준이 가족 같은 친구들을 뒤로하고 아무렇지 않게 한국으로 돌아 왔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덜 친한 관계에 가깝던 예지는 원래 사람이 조금 정이 없나? 생각했다. 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을 주기 무서웠던 거겠지. 나중에 가족 이야기를 듣고 뭘 두려워하는지 알게 됐다.
예지가 슬쩍 승운을 바라봤다. 이쪽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일이 없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우리 박사님 울리지 말아요.”
“우리 박사님이 절 울리지 않게 해주세요.”
지승운이 말했다. 둘 중에서 더 많이 우는 사람을 따지라면 단연코 승운이었다. 재준이 울어봤자 기껏해야 침대 위 정도겠지.
“……가끔은 울려도 되지 않을까요?”
“아 씨. 무슨 상상하는지 알 것 같아. 짜증나.”
예지가 말했다. 마침 볼 일을 마친 건지 재준이 걸어와 승운도 입을 다물었다.
“필요한건 다 샀어요?”
“예. 조금 부족한 감이 있지만.”
너무 급작스러워 멜라니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재준은 그릇을 사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부드카와 날레프카 등을 구입했다. 승운은 혹시 몰라 가방에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왔었다. 한국 전통물품과 술과 다양한 물건들을.
그 중에는 시리예의 것도 있었는데, 전 여친에게 이걸 줘도 되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뭐 어쨌든 그쪽도 제 에스퍼를 가졌으니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질투는 난다. 가이드를 질투하는 에스퍼라는 게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알지만, 승운은 시리예도 예지도 종종 질투한다. 친하게 지내는 건 좋지만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수속은 간단했다. 기내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예지는 조금 자겠다며 편안하게 빈자리를 찾아갔다. 승운은 재준의 옆에 딱 붙었다.
크라쿠프에서 에든버러까지는 세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서울에서 고성 가는 것보다 가까운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라제쉬 박사가 학술회에 올 만 했다고 승운은 생각했다. 뭔가 걱정을 하는 것 같은 승운의 표정에 재준이 “표정이 왜 그래.” 말하고는 웃었다.
“그냥 좀 긴장돼서요.”
“가족 같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가?”
“그것도 있고.”
“라제쉬 박사님들이 저를 아들처럼 여기긴 했습니다. 두 분이 자식이 없었거든요. 여름 바캉스나 연말이 되면 다들 가족들을 찾아가는데 저는 한국에 와도 만날 사람이 없었어요. 계속 혼자 보냈는데 라제쉬 박사님들을 만난 이후로는 그분들과 함께 했죠. 겨우 몇 년이긴 했어요. 그래도, 그 기간 동안 정말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그 말을 하니까 더 긴장되는데요.”
뇌물… 아니,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해야 할 텐데.
“그래도 박사님이 외롭지 않게 보내서 다행이에요.”
처음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언제 감정이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승운이 손을 뻗어 재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덥수룩한 머리가 많이 길어있었다.
“걱정 마요. 다들 좋아할 겁니다.”
“그래야 하는데요.”
“일단 리처드 박사님은 문제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보통 딸이 남자친구를 데려오면 아버지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가. 물론 재준이 딸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들의 남자친구인데 아버지가 더 예민하게 여기지 않을까 승운이 생각했다.
“리처드는 가이드거든요.”
“…….”
아, 그래. 그게 있었구나.
승운은 제가 에스퍼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 * *
성에서 산다더니, 진짜 성이었다.
상상만 하던 고성이었다. 아주 아담한 성. 어떻게 보면 저택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 성보다 큰 크기의 집도 있었지만 모양새가 성이었다. 돌을 쌓아 만든 듯한 외벽과 첨탑 같은 것이 있는 게.
“진짜 여기에 산다고요?”
승운이 묻자 예지가 운전석에서 “네, 저 성이요.” 하고 말했다.
“두 분 다 괴수학자니까요. 학교에 소속되어 있긴 한데, 멜라니가 그렇게 된 이후로 두 분 다 거의 내려놓으셨거든요. 그래도 가끔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긴 하는데, 가끔 직접 실습해야하는 것도 있으니까요. 수업이나 실험할 공간이 갖춰져 있어요. 지하에도 괴수들이 좀 있고…… 아직 있나?”
“그건 잘 모르겠어요.”
재준의 물음에 예지가 대꾸했다.
성은 겉보기와 달리 꽤나 사랑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으스스하고 꾸며지지 않은 날것의 돌 벽을 생각한 것과 달리 간접조명과 함께 꽃이 있었고, 바닥은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있었다. 그것을 신발을 신고 밟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다.
리처드 라제쉬는 시리예와 함께 내려왔다.
인도계 영국인이라고 해서 생각했던 이미지가 있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리처드 라제쉬는 재준을 보자마자 빠르게 걸어와 포옹했다. 그걸 보니 정말 가족 같은 사이라는 게 뭔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감격스런 재회는 짧게 끝났다.
리처드가 옆에 어색하게 서있는 승운을 바라봤다. 리처드는 승운 역시 재준에게 했던 것처럼 끌어안았다. 가족과도 이런 친밀한 접촉이 없었기에 조금 당황한 승운은 “어서 오게.” 말하는 리처드를 보며 조금은 안심했다. 새 가족으로 환영받는 느낌이었기에.
리처드가 몸을 떼어내며 말했다.
“우리 아들이 엄청난 미남을 데려왔군.”
“…….”
가이드는 가이드였다.
리처드 라제쉬는 그동안 머물 방으로 안내했다. 예지가 머물 방은 시리예가 안내했다. 그러며 내일은 에르난데스가, 이틀 뒤에는 보리스가 도착할 거라는 말을 정했다. 결국 이 집에 다 모이게 됐다. 제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되나 승운은 조금 어색하게 느꼈지만, 그런 그를 향해 시리예는 어차피 자기의 에스퍼도 곧 오니까 신경 쓰지 말고 보내라고 말했다. 예지는 크리스마스 같네요, 하고 말했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멜라니를 보러갔다.
멜라니가 머무는 방은 생각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옅은 베이지 색의 벽지에는 밝은 회색으로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침대의 장식도, 방에 있는 꼬모드도 오래된 가구 특유의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위에서 흔들리는 천장 조명뿐만 아니라 사방에 놓은 간접 조명 때문인지, 창밖의 하늘이 어두웠는데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넓은 침대 옆에는 방과 어울리지 않는 의료기기가 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두터운 이불을 덮고 앉아있던 멜라니는 제 방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며 웃어보였다.
“박사님.”
“허니.”
멜라니가 말했다. 그러고는 예지에게 시선을 돌려 “당신.” 하고 불렀다. 재준과 예지가 그녀에게 다가갈 때, 승운은 뒤로 잠깐 물러서있었다. 멜라니는 승운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줬다.
예지가 몸을 숙여 멜라니와 포옹했다. 재준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멜라니의 다른 손을 들어올렸다. 그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마치 경의를 표하듯.
“오랜만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재준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가족이 아니어도 가족처럼 느껴지는 유대감에, 승운은 이곳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
크리스마스 같네. 유예지가 그 말을 할 때는 몰랐지만 왠지 연말 느낌이 났다. 물론 크리스마스는 진작 지났고, 새해가 왔지만 분위기가 그러했다. 시리예가 전통 음식이라며 미트볼을 만들었다. 브라운 치즈가 없다며 체다 치즈를 잔뜩 넣었지만 맛은 좋았다. 예지는 찜닭을 만들겠다고 하더니 고춧가루를 잔뜩 부어버렸다. 결국 수습을 하는 건 재준이었다. 여자가 요리 좀 못 할 수 있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대장부 같았다.
식사 후에는 빵과 치즈를 먹으며 대화를 나눴고, 벽난로 앞에서 날레프카와 위스키를 마셨다. 그 다음에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다. 아마 선물 때문에 크리스마스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화기애애하게 대화가 오갔다. 영어를 기본적으로 썼지만 가끔 승운이 모르는 언어가 나오기도 했다. 그 틈에서 같이 있다가 승운은 잠시 바깥 공기를 쐬기 위해 빠져나왔다.
날이 싸늘했지만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는 빨리 져서 이제 저녁시간인데도 굉장히 늦은 밤처럼 느껴졌다. 공기가 맑고 근처에 숲이 있어서인지 하늘이 유독 깨끗하게 보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오로라도 볼 수 있어요. 여기보다 더 위로 올라가야 하지만.”
그때 뒤에서 말이 들려왔다. 멜라니였다. 숄을 어깨와 머리에 두른 멜라니는 승운의 옆 자리에 섰다.
“혼자 있어요?”
“일어나셔도 됩니까?”
그러자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을 했다. 오랫동안 병상에 있다 보면 근육이 빠져서 걷기 힘든데 그녀는 쉽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에스퍼라 그런 건가? 가이딩을 받는다면 그 정도는 쉽게 해결될 테니 말이다. 멜라니가 “그나저나.” 하며 말을 걸었다.
“허니에게 그런 상대가 생겼다는 거에 놀랐어요.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는데.”
왠지 리처드 라제쉬가 아니라 멜라니 라제쉬가 더 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같은 에스퍼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박사님은.” 승운이 말했다.
“어느 박사요?”
“아.”
여기 있는 사람 다 박사지. 유예지 연구원은 이제 그 과정에 들어갈 거고. 앞으로는 호칭이 조금 애매할 것 같았다. 승운이 다시 물었다.
“현 박사님은 예전에 어땠습니까?”
“얌전했죠. 전형적인 동양인 학생처럼.”
말이 없는 편이어서 처음에는 소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았고, 그냥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열정적인 아이였죠. 몸도 사리지 않았고, 연구에도 몰두했었고. 모르는 게 있으면 그렇게 와서 교수들에게 질문을 했거든요. 너무 많은 질문을 해서 다음 수업을 놓칠까봐 중간에 도망친 이들도 있었어요. 그러면 수업이 끝나고 찾아갔죠. 퇴근도 못하게. 열정적인 학생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없잖아요. 좋은 학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멜라니의 말에 승운이 웃어보였다. 여상한 표정으로 교수들을 쫓아다니는 재준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멜라니가 “하지만.” 하고 말을 이었다.
“불안해 보이긴 했죠. 그냥 훌쩍 날아갈 것 같았거든요. 아마 스스로는 혼자서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외로운 사람들은 티가 나거든요. 나중에 가족들이 어떻게…… 아, 알고 있나요?”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습니다.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지만요.”
“……뭔가 잃어 본 사람들은 그런 경향이 있더라고요.”
소중한 걸 잃은 사람들은, 그 상실감과 함께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나도 소중한 걸 잃어봐서 그 심정을 잘 알고 있었죠.”
시간이 흘러 괜찮아졌다 생각하더라도 어느 순간 물밀듯이 밀려오는 끔찍함과 외로움에 견딜 수 없는 날이 찾아온다.
“난 원래 생리학과 약학을 공부했어요. 리치는 생태학이었고, 우리는 괴수가 등장한 이후 괴수학에 대해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과학자들의 모임에서 만나게 됐습니다. 마침 우리 둘 다 이상형질을 발현한 상태였죠. 카트린 역시 관련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 했었어요. 그때 우리들은 미래가 찬란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흐르지 않는군요.”
멜라니는 카트린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친구였고, 동료였고, 가족과 비슷한 유대감을 가진 이들이었으니까. 카트린 역시 자신의 가이드를 잃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웃고 떠들었을지도 모른다. 오지 않을 미래가, 올 수 없는 미래가 너무 그리워서 멜라니는 쓰게 웃었다.
“그런데 허니는 잘 자나요?”
그 질문에 승운이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언젠가 이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게 언제인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승운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멜라니가 다시 웃었다. 방금 전과 같은 자조적인 미소는 아니었다.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해 잘 알고 있나요?”
“그냥, 남들 아는 선에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오늘 내가 비밀을 알려줘야겠네.”
그 사이에도 비밀이 있나?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에스퍼가 가이드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가이드도 에스퍼 없이 살 수 없어요.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거든요. 아마 허니도 알고 있을 거예요.”
“그게 무슨.”
“가이드도 형질 변이자니까요. 에스퍼와 같은 이능력은 없어도, 그들의 신체 내에도 이질적인 힘이 있어요. 에스퍼는 힘을 바깥으로 발산하니 자신을 제어하는 힘을 길러야 하지만, 가이드는 자신의 안쪽으로 수렴해요. 그 힘은 다른 형태로 치환되기 마련이죠. 에스퍼의 폭주는 바깥으로 분출된다면 가이드의 폭주는 안쪽으로 분출돼서.”
그렇게 말한 멜라니가 손가락으로 톡톡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이 어딘가가 망가져요.”
그건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애초에 형질이상자에 대한 연구는 에스퍼에 치중해 있었다. 가이드들은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사실상 가이딩을 해준다는 것 말고는 형질이상자로서의 특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스퍼 때문에 그들을 필요로 했고, 에스퍼들이 그들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가이드를 나름대로 존중하기는 했지만, 사실 세간에서 가이드는 보통 인간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기 마련이었다.
“겉보기에 문제가 없어 연구가 되지 않았지만, 가이드 중에서는 우울증 환자가 유독 많죠. 내제된 에너지가 안으로 파고들기 때문이에요. 고통, 걱정, 뭐 그런 식으로. 잠을 못 자기도 하고, 이상반응을 일으키기도 하죠. 환각이나 환청에 시달리는 가이드들도 많아요. 요즘은 가이드들을 강제적으로라도 에스퍼에 배정해서 가이딩을 시키니까 그런 거에 시달리는 가이드는 없지만요.”
그렇게 말한 멜라니는 가이드에게도 뭔가 감춰진 것이 있을 텐데, 하고 작게 말했다. 몸이 회복되기 시작하면 그쪽으로도 연구를 해보고 싶다면서. 승운이 멜라니를 바라봤다. 뭔가 말을 건네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얼굴을 마주하자, 멜라니가 웃어보였다.
“뭔가 궁금한 게 있나요?”
“그거…… 가이드한테 많이 안 좋은가요? 어떻게 된다던가.”
“아뇨, 물론 반드시 방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망가지지 않는 가이드들도 많고. 하지만 가이드가 제 에스퍼를 만난다면, 한번이라도 그런 걸 겪어봤다면 그 해방감을 잊을 수 없다더군요. 에스퍼의 충족감과 비슷한 거겠죠?”
충족감과 비슷하다라. 자신이 재준과 함께 할 때 단순히 성적인 자극이 아니라 마음부터 차오르는 감각이 혼자에게만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가이드 역시 비슷한 감각을 느낀다고 들으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일방적이지 않다는 거에 안도를 하게 된다.
“그래서 허니는 평생 누구도 가이딩 하지 않고 혼자 살 거라고 했죠.”
그… 건 또 몰랐네.
“애초에 가이딩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본인의 의지도 없었을 겁니다. 어차피 이론적으로는 실행하지 않아도 되는 거니까요. 저는 사실 조금 반대했어요. 약간…… 이데올로그 적이잖아요.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게.”
그렇게 말하며 멜라니는 몸을 돌려 승운을 바라봤다. 따스한 시선이었다. 처음 본 타인에게 보일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서 저는 허니가 누굴 데려온 것이 기뻐요.”
하지만 승운도 그들에게 알 수 없는 유대감을 느꼈다.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모두 재준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
멜라니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자 이미 대화가 끊어졌는지 리처드와 재준은 제 방으로 올라가고 시리예와 예지만이 술잔을 들어 올린 채 대화하고 있었다. 멜라니는 그들 틈으로 들어가 자신도 한잔 하자며 술잔을 챙겼다. 그러면서 위로 올라가보라는 시선에 승운은 고개를 한번 숙여 보이고 그들이 머무는 방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자 훈훈한 열기가 느껴졌다. 재준은 씻고 나왔는지 타올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어디 다녀왔습니까?”
“잠시 바람 좀 쐬고 왔어요.”
“춥죠?”
“이 정도는 괜찮아요.”
승운이 말하며 다가왔다. 재준은 그런 승운을 침대 쪽으로 안내했다. 뒷걸음질 치며 침대에 도착한 승운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걸터앉으며 재준을 올려다봤다.
“내가 너무 일방적이었나?”
재준이 물었다.
“그냥 소개해주고 싶었거든요.”
“아뇨, 좋아요.”
승운이 말하며 재준의 허리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몸이 밀착되자 심장소리가 들렸다.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여기서 더?”
재준이 웃으며 답했다. 승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우리 매년 여기서 연말을 보낼래요?”
“어…….”
“우리 가족은 명절 안 챙기거든요.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냥. 여기 있는 박사님이 왠지 편안해보여서 좋아요.”
재준은 승운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내가 뭔가 서운하게 했다거나 그랬나? 아니면 외로워 보였나? 아니, 여기 와서 너무 들뜬 게 느껴졌나? 물론 승운은 재준이 들떴다거나 그런 것은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그가 편안하게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제 영역에서 안정적인 고양이처럼, 느긋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재준이 이곳을 많이 좋아하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난 너만 있으면 돼.”
재준이 말했다.
“정말이야.”
승운이 고개를 들어 올려 재준을 바라봤다. 내리깐 눈과 늘어진 속눈썹의 눈의 절반을 가렸다.
“난 욕심 같은 거 별로 없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너는 욕심나더라. 그래서 너랑 결혼하고 싶어.”
그렇게 말한 재준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원래는 결혼 생각이 없었는데.” 하고 말했다.
사실 결혼 생각이 없던 건 승운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가이드를 찾고 싶었지만, 가이드와 페어를 하고 평생 옆에 두고 싶었지만 그것과 결혼을 하고 싶다는 감각은 다르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역시 재준과 함께 하고 싶다. 단순히 몸 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류로서, 법적으로서 얽혀서 영원히 뗄 수 없었으면 좋겠다.
“난 정말 너만 있으면 돼.”
“저도요.”
그래서 하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박사님의 세계가 저로 좁혀지지 않았으면 해서요. 물론…… 저만 있는 박사님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좋은데.”
한편으로는 그를 오롯이 혼자 차지하고 싶다.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그 어떤 이도 겪지 않은 채 제 집에서 저만을 바라보고 저만을 기다리며.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감정은.
“저는 박사님이 모든 걸 다 가졌으면 좋겠어요.”
재준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국한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면서 지냈으면 좋겠다.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고, 또 언제나 기쁨이 함께 하길 원했다.
“그러니까 우리 매년 연말은 여기에서 보내요. 가족들과.”
지승운은 혼자서는 그 모든 것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혼자 채워주기엔 자신이 너무 부족하기도 했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내 안에만 가둬두겠어요.
“사랑해요, 박사님.”
승운은 재준이 빛나길 원했다.
“나의 태양.”
그 무엇보다도 밝고 아름답게.
“내 가이드.”
그것이 제가 줄 수 있는 사랑이었다.
가이데올로그(Guidéologue)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