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20)

12.

비바람이 몰아쳤다.

재준은 총기를 든 채 쓰러진 태환의 옆에 있었다. 숨이 붙어있다는 것은 확인했다. 헉, 헉……, 가쁜 숨을 쉬며 자신을 바라보는 태환에게 재준이 저도 모르게 맨살에 손을 갖다 댔지만 뭔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가이드 에너지를 어떻게 보내는지 여전히 잘 모른다.

태환 역시 흔들리는 눈동자로 어떻게 된 건지 모르는 얼굴을 했다. 가이딩이 되지 않았다. 재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조끼에 넣어뒀던 진통제를 꺼냈다. 가이딩보다는 못하겠지만, 에스퍼에게도 약물은 통했다.

승운은 가만히 카트린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승운을 응시할 뿐이었다. 마주하는 두 눈이 인간의 것 같지 않게 빛났다. 그러더니 카트린이 움찔 하고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아, 이런.

승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카트린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자 입에서 물이 끊임없이 빠져나왔다.

폐에 직접 물을 채워 넣고 그걸 원하는 대로 빼낼 수 있다니,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방심한 틈을 타 죽일까 하며 손을 들어 올리자 바람이 휘몰아쳤다. 마치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처럼 작은 회오리가 카트린을 감쌌다.

지승운이 손을 한번 까딱였다.

그도 카트린과 같은 이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A급 괴수로는 크게 힘을 쓰지 못했는데 S급 추정 괴수는 어떨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승운이 한번 손짓하자 빗물이 응집되며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비가 오는 날이라 승운에게 유리했지만, 마찬가지로 바람도 강하게 불고 있었기에 카트린 역시 상황이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제가 채워 넣은 물을 다 토해낸 것인지 카트린이 입가에 흐르는 액체를 닦으며 승운을 노려봤다.

카트린이 뭔가 말했지만 승운은 알아듣지 못했다. 정황상 욕일 가능성이 컸지만 모르는 언어로 하는 욕은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바람. 바람이라. 바람을 처리해본 적은 없었다. 흔한 원소계열이었지만, 또 쉽게 이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바람은 흔적이 남지 않는다. 을씨년스럽게 부는 바람에 물방울이 담겨있었다.

승운이 다시 한 번 물을 응집시켰다. 카트린이 있는 장소의 바닥부터 천천히 차오르게 했다. 당황한 카트린이 물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점도가 있는 물은 점점 그녀를 끌어당겼다. 마치 늪처럼 움직일수록 빨려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카트린이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이 물을 흐트러뜨리자 파도가 치는 것처럼 물보라가 쳤다.

“이걸로는 안 통하네.”

원소만을 사용하기엔 상대도 물질원소 사용에 능했다. 이대로 누구 기력을 먼저 소진하느냐를 따진다면, 당연히 승운보다는 카트린이 질 확률이 컸지만 상황이나 위치가 여의치 않았다.

이곳은 을씨년스러운 폐건물이 있는 산 중턱이었고, 비 때문에 산사태가 일어나기 좋은 상황이었다. 더욱이 태환의 상태도 좋지 않아 보인다.

빨리 끝내려면 육탄전 밖에 없었다.

재준은 쓰러져 있는 태환을 이끌었다. 이곳에서 안전한 장소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저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구석에 있는 게 좋을 듯 했다. 재준은 나름 방어막이 되어줄 수 있는 나무들 사이로 태환을 데려갔다. 그는 베인 자국이 아픈지 신음했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재준은 태환의 장갑을 벗기고 손을 잡고서 가이딩을 시도했지만, 역시나 잘 되지 않았다. 재준도 태환도 당황했다.

“……혹시 에스퍼들은 가이드 에너지를 빼가지 못합니까?”

“……그게, 무슨— 드라마 보셨… 어요?

태환이 반문했다.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는 듯 했다. 재준은 가이딩을 못하고 태환은 가이딩 에너지를 가져가지 못하니 방법은 직접 지혈을 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지혈제 등도 가지고 있었다. 괴수 사냥에는 부상이 동반되는 게 일상적이다. 인간도 그렇고, 괴수를 생포해야 하는데 과다 출혈로 죽게 되면 그것도 또 곤란했으니 말이다.

“조금만 참아요.”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가루지혈제를 뿌렸다.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치료를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태환이 끄응 앓았다. 자신의 시계를 살펴보자 주홍빛으로 변해있었다. 퍼센테이지를 확인하자 13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숫자가 떠 있었다.

와, 코드 레드. 김태환 인생의 처음이었다.

“여기 얌전히 계십시오. 숨어있는 게 제일 나을 겁니다.”

재준이 말했다. 태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괜히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방해만 될 것이 분명했다. 눈앞에서는 에스퍼와 괴수가 부딪히며 물이 튀어 오르고 바람이 불었다. 사실 재준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토네이도처럼. 이런 곳에서 일어날 자연현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환의 눈은 날아오른 카트린이나 허공에 떠 있는 지승운이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하늘을 나는 거야 에스퍼들 중에서는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지승운은 원소들과 염력을 다루니, 몸을 띄우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괴물이라니까. 오히려 김태환 자신이 걱정이었다. 여기서 뭔가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겠지만, 3퍼센트만 내려가도 폭주 위험이었다.

도대체 지승운은 이런 걸 어떻게 겪으면서 살았던 걸까.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난다. 그러면서 태환은 재준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총을 들고 자신을 보호하듯 경계하는 모습이다. 민폐만 끼칠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는 좀 고마워졌다. 게다가 지승운의 가이드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나는 가이딩을 못 받는 거야. 지금 당장 가이드가 있다면 뭔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기 위해서라면. 하지만 이쪽은 그림의 떡이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재준이 물었다. 태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더 이상 말을 시키지 말아달라는 뉘앙스에 재준 역시 입을 다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곳을 바라봤다. 제대로 보이지 않아 더 걱정이었다.

“아, 이런…….”

놓쳤다. 지승운은 빈손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손에 뭔가 걸린다 싶었더니 사라졌다. 카트린의 목을 잡아 누르려고 했지만 그녀는 쉽게 손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치 몸이 바람이 된 것처럼 손에 잡았다 하면 놓치기 일쑤였다.

은닉이 특징이라더니 이런 경우에서 그랬나, 승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늘 쉽게 제압하던 터라 이런 상대를 처음 겪은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사라진 카트린을 찾기 위해 승운이 사방을 살폈다.

새처럼 나무에 걸려있는 옅은 바람이 느껴진다. 그쪽을 향해 물을 응집시키자, 바람으로 만든 칼날이 물 밖으로 날아왔다. 대부분은 피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몇 개가 승운의 옷을 스쳤다. 나름 내구성이 좋은 전투복이었는데 쉽게 베여 피가 스쳤다.

맑은 물에 먹구름 한 오라기 피어오르듯 섞여 든 묽은 피가 검게 보였다. 스산한 바람이 어두워진 개울로 불러오듯 움직였다. 자연의 흐름처럼 유려하게 흐르는 물은 실제로는 역행하듯 중력을 거슬렀다. 저에게 다가오는 물을 스쳐 지나가려던 카트린이 순간 멈칫했다. 어디선가 번쩍 하며 불이 빛났다.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카트린이었다.

재준이 놀라 바라본 곳에는 쓰러진 카트린을 밟고 서 있는 승운이 있었다. 승운은 그러고는 재준과 태환이 있는 쪽을 바라본다. 김태환이 상황을 파악하고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바람마냥 빠져나가는 카트린을 가두기 위해 승운의 물에 제 에너지를 푼 것이다. 번쩍이는 빛은 전기에너지였다.

번개에 감전된 듯 몸을 부르르 떨던 카트린의 몸 위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흣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카트린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소름끼쳤다. 보통 괴수들도 이 정도로 당하면 피하기 마련이었는데.

방금 그 일격으로 태환과 재준의 존재를 다시 상기한 듯한 카트린은 재빨리 주변을 살피며 시선을 돌렸다.

승운이 그대로 카트린의 목을 움켜쥐었다. 까맣게 그을렸던 피부는 초마다 회복되어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보통 에스퍼들도 다른 이들보다 회복이 빠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빠르지는 않았다. 이게 가이드가 필요 없는 상태의 에스퍼— 아니, 괴수인 건가?

그 기이한 이질감에 승운이 주저하는 순간, 카트린은 다시 바람을 일으켰다. 날카로운 칼날이 승운의 몸을 베었다. 하지만 승운은 카트린의 목을 놓지 않았다. 이대로 부러뜨린다면 회복을 할까? 아니면 기도 안에 다시 물을 채워 넣을까.

아주 찰나의 고민이었다.

그리고 카트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너, 실수했어.”

카트린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승운의 뒤로 서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머리카락이 잘리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다. 하지만 카트린이 자른 것은 머리카락 같은 것이 아니었다. 승운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카트린은 승운을 밀치며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승운의 시선이 사라진 카트린을 한번 바라보고 그 다음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아주 천천히, 나무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재준과 태환이 있는 자리였다.

놓친 카트린을 다시 붙잡아야 하는지, 아니면 저들을 구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망설일 것은 없었다. 재준과 태환을 구해야했다. 승운이 몸을 틀었을 때, 카트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가 있는 장소였다.

그녀는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만 모습을 드러냈고, 금방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짐과 동시에 나무가 일제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승운이 숨을 들이켰다.

물과 염력을 동시에 사용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래야만 했다. 나무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그 밑에 있던 재준도 태환도 무사할 것이다. 아니, 무사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장소에 재준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태환만이 쓰러진 상태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승운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카트린은 처음 그녀가 있었던 그 장소에 서 있었다.

재준과 함께.

“이런 자리에 가이드를 데리고 오면 안 되지. 이야기 못 들었어?”

승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내가 어떻게 내 가이드를 잃었는지.”

비가 요동쳤다. 중력을 거스르듯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좌우로 흔들렸다. 어떤 것은 눈송이가 춤추는 것처럼 휘날렸고, 어떤 것들은 얼어갔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공격할 것 같은 승운의 태세에 카트린은 제 앞에 누가 있는지 상기라도 시키듯 말했다.

“멈춰, 안 그러면 네 가이드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때 재준은 승운이 멈추든 멈추지 않든 카트린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카트린이 출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재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말은 스카우트라고 했지만 원래 목적은 달랐는지도 모르겠다.

“목적이 박사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승운이 말했다. 카트린이 웃어보였다. 마치 네가 내 목적을 알고 있기라도 하냐는 듯이.

“내 목적이 이거라면 어떻게 할 거지?”

카트린이 물었다.

“내 목적이 모든 에스퍼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카트린 주위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위협이라도 하는 것처럼. 실제로 재준의 목에 손을 갖다 댄 카트린은 승운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가이드가 없으면 에스퍼들은 자유로워 질 거야.”

모든 에스퍼들은 알고 있다. 가이드가 자기 목숨 줄이라는 것을. 그러나 에스퍼는 그 목줄을 기꺼이 그들의 손에 맡긴 것이다. 가이드 없이 못 사는 것이 아니라, 가이드 없이 살려고 들지 않는 것.

“신뢰도가 떨어지는 말이군요.”

승운이 말했다. 그녀 역시 에스퍼였다면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해?”

카트린이 물었다.

“가이드를 잃고 나서 느끼는 상실은 찰나야. 잠깐의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곧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어.”

형상을 갖춘 바람이 칼날이 되어 재준의 목에 닿았다. 승운의 주위의 빗물이 요동쳤다. 방울 하나하나가 한 군데 보여 날카로운 형상을 만들었다. 마치 창처럼. 수십 개의 창이 카트린을 겨눴다. 그 앞에 재준이 있다. 잘못했다간 재준이 다칠지도 모른다. 아니, 재준에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지승운은 가능했다. 하지만 카트린 두자당이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저 칼날을 치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물의 창이 서서히 굳어갔다. 기온이 떨어진 물이 얼음으로 바뀌었다.

“그들 없이 살 수 있어. 너도.”

승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가만히 서서 카트린을 노려봤을 뿐이다.

지승운은 현재준 없이는 살 수 없다.

재준을 잃게 되면 승운은 죽거나, 저들과 똑같이 될 것이다. 하지만 눈에 두려움이 언뜻 비쳤다. 재준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빗줄기 속에서도 흐르는 눈물이. 방울져 내리는 액체는 빗물보다 밀도가 있다.

“너도 이쪽으로 와.”

재준의 목에 닿은 칼날이 피부에 닿자 붉은 선혈을 그렸다. 동시에 얼음으로 된 창이 카트린을 향해 날아갔다. 하나는 그녀의 어깨에 박혔고, 하나는 재준의 목에 겨눴던 칼날을 튕겨냈다.

빗물이 그녀를 옭아매듯 감쌌다. 하지만 카트린은 아무렇지 물 속에서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 재준이 닿았다. 물 너머가 보이는 사람처럼 단숨에 재준의 목덜미를 잡은 카트린이 손에 힘을 주었다.

“컥……!”

숨이 막힌 재준이 소리 냈다. 그 소리에 겁이 난 승운이 카트린을 휘감았던 물을 없앴다. 온 몸이 젖은 채로 다시 드러난 카트린이 웃어보였다.

지금 상황은 지승운 자신에게 유리했다. 바람이 불긴 하지만 사방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조절한다면, 그녀를 옭아맬 수 있다면. 상대하기 어려운 괴수는 아니다. 지승운 혼자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힘을 쓰는 순간 카트린 역시 재준을 헤칠 것이다.

차라리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재준이 웃었다.

“승운아.”

이런 상황에서 웃는 것의 의미는 뻔했다.

“나 믿어?”

자기희생.

승운이 고개를 저었다. 믿지 않는다. 재준이라면 그런 행동을 할 것이 분명하니까, 믿고 싶지 않았다. 승운의 대답에 재준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조금은 허탈하고 섭섭하다는 듯이.

“왜 못 믿어.”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할 지 아니까.

하지만 그 말을 했다간 그대로 이루어질 것만 같아서 승운은 말을 삼켰다. 그 선택을 하지 않기를. 그러나 웃는 모습이 마치 제 예상대로 흐를 것 같아서, 상상만 해도 끔찍한 순간이 도래할 것 같아 승운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눈앞을 바라만 봤다.

무기력하다. 살아생전 그렇게 무기력했던 적이 없는데,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현실이 끔찍했다.

“박사님…….”

작게 내뱉는 소리가 재준에게 닿지 않는다. 하지만 카트린에게 닿았다. 카트린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재준은 여전히 웃는다. 카트린의 손이 좀 더 힘을 줘 재준의 목을 움켜쥐었을 때, 비명은 엉뚱한 곳에서 들렸다.

“악!”

카트린이 재준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제 옆구리를 살폈다. 승운의 시선 역시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옆구리엔 어떤 흔적도 없다. 카트린과 승운의 시선이 천천히 재준에게 옮겨졌다. 재준이 몇 번이고 쿨럭이며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혹시 아팠습니까? 제 괴수들은 말을 못해서.”

비명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는데. 조금은 당황한 재준은 손에 들고 있던 주사기를 잠시 가만히 내려다 봤다. 그렇게 아프게 찔러 넣지 않았는데, 너무 격한 반응이어서 놀란 얼굴이다.

승운이 멍한 얼굴로 재준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괴수를 맞이하러 가려면 필요하다며 챙긴 가방이 있었다. DMZ에 갈 때도 썼던 그 가방이었다.

“저는 에스퍼의 생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카트린은 예상치 못한 얼굴로 주춤 물러서더니, 힘에 부치는 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괴수라면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죠.”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에 젖은 안경 때문인지 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재준의 입술은 꽤나 섬짓했다. 저런 사람이었던가? 무너져 가면서도 카트린은 재준의 낯선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다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핵을 제거하는 게 아니면 괴수들은 쉽게 죽지 않으니까요. 약물 치사량이 얼마인지까지 아직 파악하지도 못했고요. 다른 죽이는 방법은 에스퍼들이 아는 것 같지만.”

카트린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체중을 고려했을 때 마취제를 상당히 과투약한 거였지만, 강한 괴수에게 저 정도는 견딜 만 할 것이다.

“왜 다들 날 순진하게 여기는지 모르겠군.”

재준이 약간은 허탈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승운을 돌아봤다. 여전히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지 못한 사람처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리와.”

재준의 말에 승운이 천천히 일어서 재준에게로 걸어갔다. 발치에는 기절한 카트린이 있다.

“날 왜 못 믿어.”

섭섭하다는 어투에 승운은 천천히 재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박사님이 희생하는 줄 알았어요.”

재준이 카트린에게 붙잡혔을 때, 아니 그 전부터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마치 재준을 빼앗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 그런 느낌이다. 괴수들이 그의 소중한 것을 앗아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재준이 자신을 버리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괴수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날 버리고 가는 거라고.”

그러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널 왜 버려.”

재준이 손을 얼려 제 어깨에 기댄 승운의 머리카락을 넘겨줬다. 예쁜 얼굴을 보며 잠시 미소를 지은 재준이 볼 위에 손을 갖다 댔다.

“몸이 차다. 항상 뜨끈뜨끈하더니. 비 때문인가?”

비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잃을 것 같은 감각에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실제로 몸도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거기서 재준이 희생된다면, 지승운도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 모른다. 카트린을 죽이고 나서.

“곧 있으면 깨어날 거야. 일단 데려가자.”

“어디로?”

“연구소.”

“……연구하게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만, 힘들 것 같아.”

종종, 아니 자주 드는 생각이지만.

“그러니까 피만 잔뜩 뽑아두려고.”

현재준은 항상 상상을 뛰어넘는다.

* * *

카트린이 눈을 떴을 때 새하얀 천장 조명이 보였다. 정말 하얀 천장에, 하얀 조명이었기 때문에 수상한 시설에 끌려온 것 같았다. 실제로도 이상한 시설 같긴 했다. 제 몸은 어딘가에 고정이 되어 있었고, 눈앞에는 마스크를 쓴 재준이 보였다.

카트린이 몸을 움직이며 자신을 포박한 것을 풀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반가죽처럼 보였는데, 뜯어내지 못할 만큼 질긴 것을 보니 괴수 가죽인 듯 했다. 에스퍼 정도만 되어도 일반 철이나 동물의 가죽 정도는 찢어낼 수 있다. 그런 에스퍼를 통제하거나, 혹은 같은 괴수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내구성이 좋은 괴수 가죽과 부산물을 이용해 제어장치를 만드는데, 카트린을 고정시킨 것도 그런 것이었다.

“보통은 말입니다.”

재준이 카트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데서.”

눈과 입, 둘 다 보이지 않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장 나쁜 역할을 맡는 이들은 대부분 과학자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시행하고, 또 모든 것을 망치고, 파멸시키죠.”

그렇게 말한 재준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제 말을 정정했다.

“생각해보면 현실의 과학자들도 인류의 발전과 안녕을 핑계로 인류의 파멸을 일으킬만한 행동들을 하긴 하는 군요. 가는 곳 마다 황무지가 무성하다 못해 썩어버리기 마련이니.”

“…….”

재준의 손에 굵은 주사바늘이 들려있다.

“원래 사람이 박사 과정을 거치면 그런 것 같습니다. 제정신으로 딸 만한 것은 아니죠. 당신도 과학자였으니 알지 않습니까?”

“뭘 하려는 거지?”

“피를 뽑으려고요.”

당연히 보면 피를 뽑으려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관성적인 질문이었다. 물론 피를 뽑아서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조금 많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준은 피를 얼마나 뽑아야하나 고민했다. 보통 혈액 손실량이 30% 전후에 다다랐을 때 과다출혈이 되는데, 괴수도 동일한가? 괴수의 회복은 좀 빠른 편인데 피가 더 빨리 만들어지나? 주기적으로 피를 뽑아 실험을 하긴 했지만, 대량으로 뽑은 적은 없었다.

인간 기준으로 해서 최대 2리터를 잡으면 4회분의 헌혈량이다. 그 정도만 뽑아도 안 죽겠지? 안 좋아지면 수혈을 해야 할까? 수혈을 할 때 누구의 피를 써야 하지?

괜히 고민하던 재준은 나름 양해를 구하듯 말했다.

“S급 괴수의 피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줄 알았어.”

카트린이 말했다. 재준은 잠시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괴수를 상대하는데 마취제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괴수박사는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하물며 인간종 괴수는 더더욱.”

카트린의 이름값도 있긴 했지만, 만약 이름값 따위가 없었어도 아마 그런 것들을 챙겼을 것이다. 재준뿐만 아니라 그 어떤 괴수학자라도.

“앞으로 당신의 거취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저와 만날 기회는 이제 없을 겁니다. 아마 유럽으로 인도될 것 같은데, 미국도 당신을 노리고 있거든요. 그건 다른 이들이 결정할 사항이니 저는 뭐라고 말을 못해주겠네요.”

“어딜 가도 좋은 결과는 안 나오겠군.”

“당신이 괴수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카트린의 팔에 바늘을 푹 하고 찔렀다. 예고도 없이 찌르고 나서는 ‘아, 알코올 솜 깜빡했다.’ 하고 말하는 모습에 카트린이 당황했다. 그런데 괴수한테도 소독을 해줘야하는 건가? 재준이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

“그래. 괴수니까 어딜 가도 안 좋을 거야.”

“시어샤 코리건은 당신이 같은 편이라고 여기더군요.”

재준의 말에 카트린이 그를 바라봤다.

“왜 멜라니를 죽이려고 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카트린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을 뿐이다. 시어샤의 말대로 그녀가 같은 편이었다면 의심을 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마주하고 나서도 그녀가 괴수라는 사실이 잘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너무 인간 같다.

이렇게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다면 그녀를 괴수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것 같았다. 카트린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질투였는지도 모르지.”

뜬금없는 말이었다. 재준이 뭐라 되묻기도 전에 카트린이 이어 말했다.

“그래, 그런 거였어.”

생각보다 박출량이 컸다. 괴수들의 심박이 빠른 건 동물에서 발현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그냥 신진대사의 문제로 심박이 빠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재준이 새 팩을 챙겼다.

“리처드를 죽이려 했는데 리처드를 죽일 수 없더군. 내 가이드가 아닌데도.”

질투라더니.

“다른 누군가의 가이드인데 죽일 수 없었어.”

목적은 가이드를 죽이는 거였나? 하지만 그게 안 돼서 멜라니를 공격한 거고?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카트린이 말했다. 뭐가 마찬가지라는 것인지 재준은 짐작했지만, 짐작한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카트린의 목표는 아마도 자신을 죽이려던 것 같았다. 다만 카트린이 그를 죽이지 못하고 붙잡혔을 뿐이다.

……죽이지 못한 걸까, 죽이지 않은 걸까?

“그들은 어떻게 루트를 죽일 수 있었을까.”

“루트 옌슨은 괴수에게 살해당했다고 했죠.”

“그래, 인간종 괴수에게.”

카트린이 말했다. 그건 몰랐던 사실이다. 그저 등급이 높은 괴수에게 살해당했다는 것만 들었을 뿐, 그것이 인간종 괴수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나는 한 때 너희의 편이었지.”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하지만 에스퍼가 가이드 없이 오래 살게 되면 미쳐버리거든.”

하지만 재준은 곧 호기심을 거둬들였다. 알아서 좋을 것은 없었다.

“나는 내 가이드 곁으로 가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카트린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었다. 재준은 에스퍼가 괴수가 되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괴수가 된 에스퍼를 보는 일은 드물었다. 에스퍼들은 괴수가 되기 전에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괴수들도 마찬가지다. 제정신인 괴수라면 인간 근처에는 오지 않는다. 괴수가 나타났다는 것은 괴수의 폭주를 뜻한다. 괴수화 되는 과정에서의 폭주일 수도 있고, 괴수들이 종종 걸리는 바이러스도 있었다. 광견병에 걸린 너구리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오듯, 사람들 앞에 나타난 괴수도 똑같다.

인간종 괴수는 다르겠지만.

“IPMC에서 당신을 데리러 온다고 하더군요.”

“IPMC라.”

카트린이 큭큭 웃었다.

“후회할 걸.”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재준이 생각했다. 자신은 평범한 학자일 뿐이다. 이능통제기구나 이능청, 협회, 거기에 얽힌 비밀들은 알 바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재준으로서는 연구대상을 놓친 아쉬움 말고는 없다.

“로마클럽만이 다가 아니야. IPMC를 후원하는 곳.”

“오래 산 인간종 괴수들 역시 IPMC를 후원하고 당신도 그 중 한명이라는 말입니까?”

재준이 반문했다.

“그리고 그걸 고위직만 알고 있고?”

“……알고 있었나?”

“아뇨. 말하는 게 그냥 그런 뜻 같아서요. 피는 이 정도면 될 것 같네요. 혹시 침 좀 뱉어주실 수 있나요?”

“…….”

순간 카트린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재준을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마치 모욕당하기를 즐기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다. 재준이 아차 했다.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타액도 연구에 도움이 돼서요. 그리고 구강상피세포도 좀 채취하고 싶은데.”

“…….”

정말 연구 목적인데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힌 기분이었다. 재준은 요구를 살짝 바꿨다.

“…그럼 타액 빼고 상피세포만.”

“다른 괴수들의 타액이나 상피세포도 채취하나 보죠?”

당연한 이야기를. 특정 괴수의 타액을 오랫동안 가열하면 치료제로서도 쓸 수 있었다. 가열하기 전에 독 덩어리지만 잘 조절하면 약이 됐으니까. 물론 카트린에게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카트린은 별 수 없이 제 입을 벌리고, 입안을 면봉이 훑고 가는 모습을 찝찝하게 바라봤다. 타액은 주지 않았다.

“카티야— 카트린.”

재준이 말했다. 그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조금 헷갈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하는 것에 뭔가 숭고한 뜻은 없습니다. IPMC에 비리가 있든 없든 그건 그 내부에서 하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해야 할 일이죠. 게다가 괴수협회에 대한 것도 아니고. 저는 그쪽과는 형질이상자와는 상관없는— 아니, 이제는 상관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일개 과학자인 제가 감히 그런 것에 신경을 써도 이상하고, 쓸 수도 없습니다.”

카트린은 대답 없이 재준을 바라봤다. 카트린은 재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들은 바는 있으나, 멜라니를 통한 것은 아니었다. 그 보고서를 봤을 때 어떤 사람이 이런 내용을 썼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녀가 만나본 재준과 상상 속 재준은 조금 달랐다.

“제가 해야 하는 건 그저 학자로서 맡은 바 소임을 하는 것뿐입니다.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어쩌면 이름을 남기고 싶단 이기심일지도 모르는 것을 잘 포장해서요.”

정의감 같은 거에 취하지도, 자신의 능력이나 위치에 도취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평범하지 않다.

가이드이자 괴수학자.

“당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미래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내가 괴수여도?”

“당신의 존재가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괴수라고 하더라도, 글쎄요. 아직 인간종 괴수와 인간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가이드 없이 존재하는 에스퍼? 뭐가 다르죠? 당신들은 폭주 위험이 있나요? 이젠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던 재준은 마침 잘됐다는 얼굴로 “몇 가지 궁금한 거 물어봐도 됩니까?”하고 물었다. 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질문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재준은 꽤 본격적이었다.

“아, 일단 괴수를 발견한 게 지승운 씨니까 괴수종에는 발견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거 아시죠? 근데 또 명명을 저한테 맡겨서요. 학명에 제 성이 들어가는데 괜찮겠습니까? 아, 거부는 안 됩니다. 그리고 발견지역이, 그러니까 붙잡힌 지역이 한국이라…… 원산지가 한국으로 기록될 거예요.”

“…….”

“프랑스에서 붙잡혔다면 다를 텐데, 참 애매하군요. 그래도 오리지널리티는 프랑스로 기재를 하는 게 좋은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트린 두자당 씨는 신종 괴수입니다만… 문헌상 두자당 씨와 비슷한 형태의 괴수가 있습니다. 지금 추정하기로는 제일 흡사한 건 서유기에 나오는 황사바람을 일으키는 요괴로… 혹시 모래 같은 것도 다룹니까?”

“…….”

“못 다루시는군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역시 그 괴수가 살아있던 지역이 사막이라 황사 바람을 일으켰던 거죠. 그러면 그건 제외하고, 얼마 전에 비행종 괴수들에게만 폭주가 일어난 건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그거 역시 바람의 힘을 쓴 것입니까? 바이러스? 그런 분자를 바람에 담아 의지로 퍼뜨릴 수 있는 겁니까?”

생각보다 말이 많네. 카트린이 생각했다. 그녀가 답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재준이 이런 저런 것들을 묻는 바람에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지금 말을 한다고 제대로 듣고 기억할지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말을 잇던 재준이 말을 멈추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침묵한 재준은 이내 결론을 내렸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헤라클레스 프로젝트가 뭡니까?”

“그건 어떻게 알았지?”

“괴수박사 동료가 알려줬습니다. 지금 연락이 되지 않아서요.”

그러고 보니 아직 에르난데스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겠지. 생긴다 하더라도 에르난데스라면 별 일 없을 것이다. 그의 집안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카트린은 재준이 그것까지 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의외라는 듯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헤라클레스 프로젝트는…….”

*

옷 여기저기가 찢겨나가 있었다.

원래 에스퍼 전투복이야 소모제품이니 다시 요청하면 되지만 제 전투복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S급 괴수라니. 심지어 그 S급 괴수를 잡은 게 승운이 아니라 재준이었다. 보고서를 어떻게 올려야 하나 생각하는데, 문이 열리며 실험실 안쪽에서 재준이 나왔다. 어두운 복도와 대조되는 밝은 실험실 때문에 실루엣만 살짝 보였다. 그래도 온 몸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승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준은 안경을 벗고 뻑뻑해진 눈을 비볐다. 승운이 다가가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다쳐요.”

눈에 뭐가 들어갔나? 승운이 혼잣말하며 재준의 턱을 잡고 눈을 살폈다. 충혈되긴 했지만 뭔가가 들어가진 않았다. 어쩌면 피곤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피곤하거나 졸음이 몰려오면 눈부터 비비는 사람이었으니까. 재준이 반항 없이 가만히 눈을 깜빡이자 승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 일이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뭔가 마음 한 구석에서 심통이라도 이는 것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서운한 건지, 아니면 걱정 때문인지 모르겠다. 걱정할 상황이 지나갔음에도 감정이 계속 남아 머문다.

승운이 안경을 다시 씌워줬다.

시야가 확보되자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승운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평소와 같은데 뭔가 차이가 있었다. 너무 미미해서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재준이 왜 그러냐는 듯 보자 승운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침 뱉어 드릴까요?”

아까 그 대화 들렸구나. 그렇다면 카트린 두자당이 했던 말도 전부 들었을 것이다.

“……이상하게 들리긴 하네요.”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글쎄요. 에스퍼는 제 연구 과제가 아니라서. 하지만 다음에 필요하면 타액을 요구하죠.”

“연구 말고 다른 때에도 타액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실험실에서 요구한다면 분명 연구에 필요해서 요구하는 걸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승운의 가슴께를 툭 쳤다가 탄성이 느껴지는 가슴근육에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힘을 많이 썼는데……. 슬쩍 시계를 살핀 재준이 “김태환 에스퍼는 어떻습니까?” 물었다. 하자고 하면 좀 그런가. 왠지 승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회복중입니다.” 승운이 답했다.

“헤라클레스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습니까?”

“예.”

“보고할 건가요?”

“해야죠. IPMC에도 알릴지 모르겠네요. 관련해서 뭔가를 할 거라면 협조를 요청하라고도 해야 할 테니까요. 그 건은 정부 차원에서도 대응을 해야 할 일이고…….”

그렇게 말하는 승운이 왠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 같았다.

“지승운 씨.”

재준이 부르자 승운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피했다.

“혹시 화났습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던 얼굴이 곧 여상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어떻게 화낼 수 있겠어요.”

그렇게 말을 하는데도 화가 난 듯한 목소리다. 잔뜩 날 선, 하지만 그 대상이 재준 자신이라기보다는 다른 어딘가를 향한 것 같았다. 그렇게 느껴지더라도, 화가 난 이유에 자신 역시 해당된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재준을 향해 승운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

“다시는 목숨 가지고.”

“목숨 건 적 없는데.”

“아뇨. 박사님은 오늘 박사님 목숨을 가지고 절 협박한 거예요.”

피가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 건 평생 느낀 적이 없었다. 제가 죽을 위기에 놓였어도, 살고 싶어 발버둥 쳤어도 그런 감각은 아니었다. 재준이 위험했던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괴수학술회가 열릴 때도 분명 재준은 위험했다. 물론 그때는 지승운 자신이 더 위험했었지만.

“제가 어떤 기분인지 모르시죠?”

그래도 그때와 오늘은 달랐다.

“박사님이 죽으면 저도 죽어요.”

불어치는 비바람에 재준을 상실할 것만 같았다.

“난 카트린 두자당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

제 가이드를 잃어버린 에스퍼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박사님 없이 살지 않을 거라고요.”

그가 없다면 죽는 게 낫다. 그런데.

“날 살려주겠다고 했으면서, 박사님이 날 죽이려고 했어요.”

지승운은 자기가 하는 말이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엉뚱한 화풀이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분노의 대상은 재준이 아니었다.

“절 사랑하면 그렇게는 못하죠.”

스스로에게 느끼는 혐오감이다. 차라리 내가 다쳤어야, 내가 위험했어야, 죽어도 내가 죽었어야.

지승운이 예상하던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카트린은 재준을 죽이지 못했다. 오히려 재준이 카트린을 붙잡아 연구실에 가둬뒀다. 하지만 만에 하나, 조금만 늦었더라면. 카트린이 조금만 빨랐더라면. 올 수 없는 미래를 계속 되뇌며, 승운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 정말 멍청한 짓인걸 아는데 절제할 수가 없다.

재준은 승운의 화가 난 얼굴을 그대로 직면했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문 승운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얼핏 빛나는 눈동자가 마치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혹은 안광일수도 있었다.

“승운 씨.”

눈물일 가능성이 더 크겠지. 재준이 생각했다. 의외로 지승운은 눈물이 많다.

“지승운.”

에스퍼들은 강인하고 자기와 가이드밖에 모른다는데, 그것과 별개로 눈물을 뚝뚝 흘릴 때면 그들이 강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걸 이용할 때가 많다는 것도 알고는 있다.

“미안해.”

재준의 말에 승운이 시선을 마주쳤다가 다시 돌렸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준비를 했다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냥 막연히 잘 될 거라고 생각해서.”

“……예, 잘 됐죠.”

“네가 걱정하던 대로 될 수도 있었지.”

물론 재준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도 S급 에스퍼가 처음이었다. 그 S급 에스퍼가 무해한 얼굴로 인간처럼 행동하고, 이전의 만남에 있어서 그에게 그렇게 큰 위협을 주지 않았지만.

“불안하게 해서 미안. 나도 불안해서 그랬어.”

에스퍼와 괴수 자체는 다르다. 행동하는 것도, 사고하는 것도.

“네가 날 걱정하는 만큼 나도 널 걱정해서 그랬는데, 그것 때문에 네가 더 힘들 거라는 걸 생각 못해서. 그냥 눈앞에 있는 것만 해결하고 싶어서.”

승운은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참는 듯, 쥐고 있는 주먹을 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재준은 승운의 시계를 확인했다. 색상이 연녹색이다. 이어 제 시계를 확인하자 승운의 퍼센테이지가 훅 떨어진 게 보인다.

66퍼센트. 카트린 두자당은 S급으로 분류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지승운.”

재준이 다시 승운을 바라봤다.

“나 좀 봐.”

승운은 여전히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슬쩍 슬쩍 재준을 바라봤다. 그럴 때마다 표정이 조금은 풀어지다가도, 고개를 돌리면 다시 굳어갔다. 재준이 승운에게 손을 뻗자, 승운이 반보 물러섰다.

“…….”

“…….”

“충전 안할 건가요?”

“…….”

“나에 대한 벌이야?”

“아뇨.” 승운이 말했다.

“저에 대한 거예요.”

이건 또 뭔 소리야. 재준이 생각했다. 아직 연녹색이라는건 위험 수치는 아니었지만, 재준은 승운의 퍼센테이지가 8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는 게 싫었다. 자기 핸드폰은 2퍼센트가 되어도 충전을 깜빡하다가 꺼지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충전하는 반면, 승운의 시계가 조금이라도 녹색이 되는 것은 볼 수 없는지 자주 손을 잡아주고 입을 맞춰줬다. 그게 뿌듯하기도 했다.

“제가 박사님을 못 지켜서.”

연녹색. 마치 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저 색깔에 불안해지는 자신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지승운은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거라고 말을 하지만 재준의 입장에선 자신에게 내려지는 형벌 같았다. 됐고 일단 손이라도 잡고 입을 좀 맞추고…….

“스스로 경멸하게 될 지경이에요.”

“승운아.”

“—박사님.”

무언가를 씹어 내뱉는 듯한 말에 재준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는, 절대로, 현장에 같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승운은 여전히 재준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얼굴을 바라보면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제 뒤섞인 제 한심함과, 안도감과, 경멸감을 재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가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박사님은 현장에 오지 마세요. 가이드 지원? 그런 것도 안 됩니다. 무조건.”

무조건…….

승운이 다시 한 번 그 말을 했다.

그래, 그래야만 했다. 그게 맞는 것이다. 에스퍼들이 괜히 가이드들을 떼어놓고 다니는 게 아니다. 카트린 두자당이 제 가이드를 잃고 모습을 감췄을 때, 다른 에스퍼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안전한 곳에 있어요.”

그 이후 관례처럼 가이드들이 안전한 곳에 있게 되어 승운은 몰랐다. 가이드와 함께 현장에 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지.

“박사님이 죽는 것보단 내가 다치는 게 더 나으니까.”

승운의 말에 재준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승운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내뱉은 말인데, 그게 제 진심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속내를 말했다는 부끄러움과 함께 속이 시원했다. 그래, 이게 본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다치는 것보다, 다치는 것을 가정하는 것 보다 자신이 다치는 게 훨씬 나았다. 자신은 에스퍼니까.

“그래요.”

아주 오랜 침묵 끝에 재준이 답했다.

“그럽시다.”

그 목소리가 조금은 차갑게 느껴져 승운은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들어 올려 재준을 바라봤다.

“지승운 씨.”

그냥 느낌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승운은 재준의 저런 얼굴을 처음 본다.

“당신들은 가이드 역시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까?”

승운은 뭐라고 대답하지 못한 채 두 눈을 깜빡였다.

“내 에스퍼가 다쳐오는 거에 대해 어떤 감정도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재준도 딱히 답을 원했던 것은 아닌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늘 보던 장면이었다. 주로 침대 위에서이긴 하지만, 흥분을 하면 열을 식히는 것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는 행위에 승운은 종종 제 손을 재준의 두피 아래로 넣어 뜨겁게 닳아 오른 머리를 잡아보곤 했었다. 좋아했던 광경이었는데 순간 심장 한 가운데가 덜거덕 소리를 낸 것만 같았다.

“오늘 난 집에 안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렇게 말한 재준이 입을 다물고 승운을 잠시 바라봤다.

“너도 가지 말자.”

어? 이건 또 예상 밖이다. 혼자 집으로 들어가라고 말을 할 줄 알고 괜히 손에 힘을 줬다 풀었다 하던 승운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재준을 바라봤다.

“지금 상태로는 운전하기 힘들 거야. 숙직실에 가서 쉬어.”

“……박사님은요?”

승운의 말에 재준이 입을 열었다가 닫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다. 안경 때문일까. 평소와 달리 재준이 멀게 느껴진다.

“아직 못 정했어. 정하게 되면 연락할게.”

그렇게 말하고 재준은 승운의 가슴팍을 슬쩍 밀며 떠나길 종용했다.

*

승운이 떠나고 나서 재준은 복도에 홀로 가만히 서 있다가 휴게실로 올라가 머그컵에 티백과 함께 뜨거운 물을 담았다.

빗물에 번진 휴게실 창 너머로 떠나는 승운의 차가 보인다. 나간 지 조금 됐는데 이제 출발하는 것을 보니 저쪽도 생각이 많았나보다. 재준은 떠나는 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컵을 들고 다시 실험실로 내려갔다.

갑자기 밝은 곳으로 들어가자 눈이 시려 찌푸린 재준은 실실 웃고 있는 카트린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인상을 썼다.

“왜? 나랑 같이 밤을 보내게?”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괴수는 잠을 잡니까?”

“괴수도 생명체니 잠을 잘 수밖에 없지. 며칠 안 잔다고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식사는요?”

“일반 사람처럼 할 수 있어.”

“얼마나 안 먹을 수 있습니까?”

“한 달 정도는 안 먹어도 살 수 있더군.”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한 달까지는 굶어도 물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

“다음에 한번 실험해봐야겠네요.”

누구한테? 카트린이 경계하는 눈으로 재준을 바라봤다. 반면 재준은 느긋한 얼굴로 컵을 기울였다. 뜨거운 차가 담긴 것인지 안경에 김이 서렸다. 홀짝 차를 마신 재준은 따뜻함에 몸이 풀리는지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고 말했다.

“당신으로 할 건 아닙니다. 애초에 전 당신을 건드릴 수 없어요.”

“…….”

“피 뽑은 건 비밀로 해주세요. ADN 체취 한 것도.”

카트린이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일단 IPMC에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허가 없이는 카트린의 신체부위나, 체액, 유전자를 가질 수 없지만 뭐. 잡은 사람이니까 그 정도는 빼도 되지 않을까 재준은 생각했다.

무엇보다 S급 괴수를 다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누워있는 건 편한가요?”

“불편해.”

“어쩔 수 없죠. 당신이 괴수인데. 그래도 안대는 채워드릴게요. 숙면을 취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불을 끌 수는 없어서.”

“……안대가 없어도 잘 수 있어.”

카트린이 소심하게 거절했다. 눈앞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재준은 그런 카트린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방금까지 적대되는 관계였음에도 왠지 모르게 친밀하게 다가서는 재준을 카트린은 조금은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

“라제쉬 박사님이 어떤지 보러 간 적 있나요?”

“어떤 라제쉬?”

“리처드 라제쉬.”

당연히— 본 적 있었다. 멜라니가 그렇게 되고 나서 카트린은 스코틀랜드에 방문했다. 카티야의 이름으로. 꼼짝도 않는 멜라니의 양 손을 잡은 리처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커다란 집에서 쓰는 곳이라곤 멜라니가 잠든 방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봐도 카트린은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굉장히 이상했다.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에.

“제 에스퍼를 잃어버린 가이드가 어떤 꼴인지 압니까?”

“…….”

“다들 가이드를 잃은 에스퍼만 생각하죠. 그들의 고통만을 보고, 그들의 고통만 주목되고. 가이드도 죽어가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입니다. 그저 극적이지 않을 뿐이지.”

“그래.”

“루트 옌슨이 아니라 당신이 죽었다면, 루트 옌슨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예상이 갑니까?”

카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이 가지 않는다. 루트 옌슨 또한 리처드 라제쉬처럼 그렇게 될까? 문제는, 루트 옌슨이 리처드처럼 절망에 빠진 모습을 상상한다 하더라도 카트린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다.

“리처드는 그래도 멜라니의 숨이 붙어있어서 견딜 수 있습니다. 매일 그녀의 손을 잡고, 움직이지 않는 그녀에게 입을 맞춰 가이딩을 할 수 있죠.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카트린은 자신이 이미 오래 전에 인간성을 잃었다는 것을 그 상상을 통해 깨닫는다. 너무 그립고, 애타고, 보고 싶은데 동시에 아무렇지 않다는 것.

“가이드와 에스퍼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가이드와 에스퍼는 서로가 필요하지만.

“에스퍼가 죽은 뒤의 가이드는 어떻게 될까요.”

서로를 영원히 모를 것이다.

“궁금하지만 궁금하지 않군요. 겪고 싶지 않습니다.”

괴수가 된 카트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재준에게 말해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재준은 머그컵을 감싸 쥔 채 허공을 바라봤다. 그렇게 잠시 앉아있었을까, 재준이 벌떡 일어서자 카트린이 시선을 돌려 재준을 바라봤다. 재준은 그대로 머그컵을 의자에 내려놓은 채 문으로 걸어 나가다가 멈춰 섰다.

“안대는 정말 필요 없습니까?”

재준이 몸을 돌려 물었다.

“어딜 가려는 거지?”

“제 에스퍼에게.”

“싸운 거 아니었나?”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겨우 1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고민을 오래 한다고 좋은 결론을 도출하는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한 재준은 그대로 나가며 불을 껐다. 어두워진 실내에서 카트린의 두 눈동자만 짐승마냥 빛을 내뿜었다. 재준은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한번 주었다.

“본 뉘Bonne nuit.”

그리고 문을 닫았다.

*

숙직실 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꽤 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승운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분할 된 화면에는 제 어머니와 이경원, 지승호의 모습이 보였다. 나머지 하나는 검은 화면만 떠 있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블랙요원의 모습은 내부에도 비밀이어서 승운도 그의 목소리만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쪽으로 찾아봐야겠군요.]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이 하는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함께 한 이들은 승운이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김태환이는 어때?]

“—회복 중입니다.”

승운이 답했다. 분명 재준이 태환의 손을 잡기는 했었는데, 이상하게 태환의 상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지혈제와 진통제가 도움이 꽤 된 듯 했다.

“가이딩을 받고 나서는 상태가 많이 돌아왔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다행이죠.”

[S급 괴수를 상대로 당했는데 살아있는 게 용하지.]

모니터에 서로 대화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보였다. 승운도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가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들 알았다. 그럴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제대로 잠도 못잔 상황에서 높은 레벨의 괴수까지 상대했고, 같이 간 제 팀원은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으니. 물론 승운이 정신이 없는 것은 다른 이유였지만 그건 짐작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피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승운, 나머지 보고는 내일 해.]

“알겠습니다.”

승운이 대답했다. 사실 대답을 하면서도 정신은 없었다.

지승운은 화상 통화가 끝난 검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이유를 아는데 그 뻔 한 이유를 그냥 외면한 채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아, 씨발.”

오는 게 아닌데. 가라고 해도 그냥 있을걸. 내가 잘못 말했다고, 그냥 속상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고 버틸걸. 이제 와서 후회하자니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도대체 왜 거기 그냥 놔두고 왔지. 가라고 해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버틸걸. 같이 돌아오자고 할 걸.

힘들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몸 역시 피곤했지만 고단함보다는 자기가 한 말을 돌아보게 됐다. 걱정했지. 저가 걱정한 만큼 재준 역시 걱정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할 틈이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잘못했다고는 해야 하는데, 정확히 뭘 잘못했는지 말을 하기가 애매했다. 행동에 대한 반성도, 재준이 화난 포인트도 알지만 그걸 말로 정의내릴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가만히 앉아서 후회만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후회할 시간에 찾아가는 게 낫다.

승운이 차키를 챙겨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재준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환각인가?

승운이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다, 환각이 아니라 실제다. 젖은 재준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가 눈앞에 보이자 제대로 감각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창밖의 빗소리가 확연하게 들렸다.

“박사님.”

재준이 서 있는 자리 위로 뚝 뚝 떨어지는 물도, 조금은 가쁜 숨과 빨리 뒤는 심장도, 그리고 추운 듯 잘게 떠는 재준의 몸도.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 그대로의 가운 차림이다.

“젖었잖아요.”

“비가 와서요.”

그렇게 말한 재준은 빗물이 묻은 안경을 벗어 흔들었다. 어딘가에 닦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젖은 제 옷으로 닦아봤자 달라질게 없다는 것을 아는 얼굴이다.

“걸어오신 건가요?”

“운전을 못하니까 어쩔 수 없죠.”

차로 가면 5분도 채 안되지만 걷는다면 2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승운이 재준의 머리카락에 있는 빗방울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살얼음처럼 얼어 있었다. 비가 아니라 눈이 오는지도 모르겠다. 재준 역시 체온이 조금 높은 편이었는데, 추운 날씨와 비— 혹은 눈 때문인지 몸에서 찬 기운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으로 그 거리를 왔는지 모르겠다. 재준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승운이 결국 “흐—.” 하고 숨을 내뱉었다. 안경을 벗은 재준은 승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표정이 보일정도로 다가가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승운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 잘못했어요.”

재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잘못한 거 없습니다.”

“박사님.”

“우리 둘 다 잘못한 게 아니야.”

그냥 조금 어긋났을 뿐이다. 당연한 거다.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재준이 보기에 승운은 제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조율해서 같이 지낼 수 있는 쪽이었다. 재준도 그만큼의 노력을 하는 편이었고.

그래, 맞춰 가면 된다.

재준이 손을 올려 승운의 뒷목을 부여잡았다. 차가운 체온에 승운이 목을 움츠렸다.

“승운아.”

“네.”

“네 입에 혀를 쑤셔 넣고 싶은데.”

“…….”

“입 좀 벌려볼래요?”

말이 끝나자마자 승운이 제 입을 열었다. 재준이 벌어진 틈으로 제 혀를 집어넣었다. 입술이 부딪히고 혀가 얽힐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승운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재준의 가운을 벗겼다. 바닥에 떨어진 실험 가운이 물을 머금어 철퍽 소리를 냈다.

승운은 그대로 재준을 끌어당겨 방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재준이 “가운이 밖에—.” 말했지만 승운은 더 이상 재준이 말을 할 수 없도록 입술로 입을 틀어막으며 재준의 옷을 벗겨나갔다. 축축하고 무거운 옷이 벗겨지며 닿는 승운의 체온에 재준이 움찔 움찔 반응했다. 스웻 셔츠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역시 컸다. 승운이 목에 입 맞추자 재준이 옅은 한숨을 냈다. 따뜻한 손이 복부에 닿자 재준이 다시 움찔거렸다. 승운이 멈췄다.

“……미안, 춥죠?”

“아니, 추운 것 보다 대화하러 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옷을 벗길 수 있는지 생각하던 재준은 순간 제가 먼저 입을 벌려달라든가, 쑤시고 싶다든가 말 했다는 걸 떠올렸다. 내가 시작했구나…….

“미안, 나한텐 네가 더 급했어.”

재준의 말에 승운이 큭큭대며 웃었다.

“저도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밀착시켰다. 승운의 허벅지가 자신의 하반신에 밀착대자 재준의 몸이 다시금 움찔했다.

“미안해요, 저도 급해요.”

승운의 목에 팔을 두른 재준이 손목을 살폈다. 방금의 입맞춤으로 그새 퍼센테이지가 올랐다.

“박사님을 만질 때마다 머릿속이 울려요.”

“……그건 좋은 건가?”

“예, 너무 좋아서.”

승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때론 내가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환청이나.”

방문을 열었을 때 재준이 있었던 것 역시 그러했다.

“환각처럼.”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었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앞에 존재했고, 또 자신의 품에 안겨있다.

“나 환각 아니야.”

“알아요. 와줘서 고마워요, 박사님.”

“너도 나한테 오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한 재준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젖은 머리가 그대로 고정되었다. 얼었던 빗물이 서서히 녹아들어 바닥에 떨어졌다.

“일단 급한 것만 해결하고, 대화를 좀 하자.”

재준의 말에 승운이 웃어보였다. 자신이 허벅지에 맞닿은 부푼 물건을 느끼는 것처럼, 재준 역시 흥분한 승운을 느끼고 있었다.

“박사님.”

승운의 부름에 재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욕실에서 할래요?”

“…….”

이건 또 색다른 제안이었다. 물론 재준은 거절하지 않았다.

*

욕실이라는 장소는 생각보다 더 선정적이었다. 소리가 울려서 그런 건지, 질척이는 소리가 평소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숨 쉬는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옅은 한숨과 신음일 뿐인데, 욕실에서는 훨씬 더 크게 들렸다. 귀가 아니라 전신으로 소리가 들어오는 것 같다.

승운은 집요하게 입 맞췄다. 옷을 벗을 새도 없이 뜨거운 물줄기로 저를 밀어 넣은 승운은 마치 잃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밀착시켰다. 벨트와 버클을 풀어서 벗긴 바지가 채 무릎에 걸리기도 전에 급하게 엉덩이를 주물러 대서 웃음이 픽 터졌다. 재준도 승운의 옷을 벗겼다. 가슴에 걸린 셔츠 아래로 보이는 탄탄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추며 혀를 굴리자 낮은 신음이 들렸다. 재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올려보자 살짝 내리깔고 있던 승운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승운이 재준의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그대로 속옷을 벗긴 뒤 성기는 건드리지 않은 채 위로 올라가 복부를 쓰다듬다가 다시 사타구니로 내려왔다. 하지만 애태우듯 주변부에서 손을 뗐다. 재준이 잘게 허리를 추켜올렸다.

“만져줘요?”

승운이 물으며 성기를 쥐었다. 손에 꽉 차는 묵직함에 미소 지은 승운이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재준의 것을 입에 넣었다. 안 그래도 묵직하고 크기가 있는 것이 제 입안에서 더 부피를 키워나가자 승운이 옅은 신음을 내며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손을 뻗어 엉덩이를 주무르다 손가락 하나를 구멍에 넣었다. 물기가 있어 벌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조금 빡빡했다. 이렇게 좁은 구멍에 잘도 제 물건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며 안쪽을 지분거리자 위에서 “아읏!” 하고 신음이 떨어졌다. 들러붙은 옷 때문에 발기한 성기가 아파왔다.

승운이 압력을 가해 빨며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렸다. 손가락으로 특정 지점을 누를 때마다 복부가 움찔거리며 구멍이 조여 왔다. 승운이 올려다보자 볼과 귀, 코끝까지 빨개져서 안쪽을 짓이길 때마다 후들거리는 게 보였다. 옅은 신음이 나오다가도 가끔은 흡 하고 참는 모습에 가슴 한켠에서 솟아난 삐뚤어진 마음이 재준을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을 들어 안쪽을 퍽 하고 처 올리듯 움직이자 재준의 몸이 앞으로 굽어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쪽을 계속 누르자 상반신이 무너지며 승운에게 기대었다.

“앗! 으, 갈 것 같—!”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분출됐다. 승운은 남은 정액까지 쭉쭉 빨았다. 재준의 몸이 흠칫 흠칫 떨렸다. 승운은 제 입안에 고인 정액을 그대로 손바닥에 뱉어냈다. 그리고 그대로 재준의 구멍에 가져갔다. 재준이 몸을 흠칫 떨었다. 정액 범벅이 되는 거야 섹스를 하다보면 있는 일이긴 하지만 자신의 것이 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손가락은 점점 늘어났다. 안을 벌리고 헤집던 손가락이 다시금 어떤 지점을 비벼 올렸다. 헉 소리를 내며 승운의 어깨를 잡았다.

“조금만 더 참아요.”

“으, 빨리—.”

자꾸 자극점을 눌러 견디기 힘들었다. 원래 자신은 이런 몸이 아니었는데, 승운과 만나면서 겪은 색다른 자극에 달아오른 몸이 옅은 성감에 만족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빨리, 넣어.”

재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일부러 허리를 튕겨 오르며 종용하자 승운이 낮게 욕을 했다. 평소에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저도 모르게 나온 말에 재준이 웃었다. 아마 승운은 자신이 욕을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승운이 일어서 재준의 몸을 돌렸다. 욕실이다 보니 눕거나 엎드릴만한 곳이 없었다. 못할 건 아니었지만 무릎이든 어디든 아플 게 분명해서 서서 하는 것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승운이 다시 한 번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뺐다. 작은 구멍이 제 손가락을 오물거리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승운이 성기 끝을 구멍에 맞췄다. 한번 움찔한 구멍은 승운이 밀어 넣자 익숙하다는 듯 물어왔다. 위에서 ‘하아…….’ 하고 낮은 숨소리가 울렸다. 그대로 힘을 줘 천천히 움직이자 재준이 움찔했다. 요동치는 등 근육에 승운이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흣! 아아!”

자신 안을 빠듯하게 채우는 큰 성기와 익숙한 듯 낯선 체온에 재준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안도감과 흥분감을 동시에 일으켰다.

“힘 풀어요.”

승운이 말했다. 평소보다 더 조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풀어주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았다. 너무 급했나 싶어 움직이지 않은 채 복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조금은 진정이 된 것인지 경직되었던 몸이 서서히 풀렸다. 하지만 반쯤 선 좆을 잡고 문지르자 갑자기 조여 들었다.

“읏— 힘 풀라니까, 요.”

그렇게 만지면 힘을 풀 수 없었다. 승운 역시 이대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재준이 뭔가 웅얼거리듯 말할 때마다 진동처럼 안쪽이 울리는 것 같았다. 승운이 ‘미쳐버리겠네.’ 하고 작게 혼잣말했다.

“물어뜯을 것 같아.”

역시 너무 급했다. 승운이 재준의 몸을 세워 귓가를 핥았다. 평소보다 울리는 소리에 재준이 헐떡였다. 반쯤 일어선 성기에서 쿠퍼액이 흘렀다. 길게 늘어진 체액을 손가락으로 당겨 올려 요도구에 비비자 잘게 떨었다.

—오히려 역효과인가. 긴장을 풀게 하려고 했는데 그 반대였다. 물어뜯을 듯한 조임에 승운이 흣, 으읏 소리냈다. 뒤에서 울리는 소리에 재준이 작게 ‘좋아.’ 라고 말하며 벽에 기댔다.

승운이 재준의 엉덩이를 좌우로 벌렸다. 물에 젖어든 피부가 손에 착 달라붙었다. 승운이 천천히 움직였다. 꿈틀거리며 좁은 내벽을 비집고 들어오던 것이 빠져나가면서 안쪽 어딘가를 긁을 때면 뭔가 욱신거리는 듯 했다.

숨을 몰아쉬며 들썩거리는 재준의 모습을 가만히 복 견디기가 힘들었다. 승운이 퍽 하고 처올리며 재준을 벽으로 밀었다. 욕실 벽에 밀착된 재준을 뒤에서 밀어붙이며 볼에 혀를 세운 승운이 쭙쭙 빨고는 복부부터 시작해 가슴까지 손을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격하게 움직여 재준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헉, 읏, 윽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승운 역시 재준의 목덜미에 하아, 흐 소리 냈다.

신음소리와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린다.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승운의 손이 유두를 비틀자 안이 조여 들었다.

“하, 좋아요?”

“읏— 응, 좋아…… 흐읏, 읏!”

아, 어쩌지.

제어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부족했다. 제 아래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망가뜨리고 싶었다. 이대로 엉망진창으로 파괴하고 싶은 마음이 삐죽 솟아올랐다.

저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 어디로도 못 가게 가둬두고 싶다. 재준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저기 보여주고 싶은데, 한편으론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에스퍼 에너지가 폭주하는 것처럼 마음 어딘가의 힘이 폭주하는 듯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억지로 누른 승운은 재준의 골반을 잡고 끌어당기며 퍽 하고 박아 올렸다. 생각보다 훨씬 안쪽에 틀어박혀서인지 재준이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헉, 으, 윽! 읏, 아! 아흐! 흣!”

힘들 것이 분명한걸 알고 있는데 승운은 재준을 배려하거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재준의 입에서 침이 뚝 뚝 떨어졌다. 승운이 갑작스럽게 성기를 빼자 허벅지와 엉덩이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사정한 것인지 정액이 흘러내렸다. 구멍 주변 역시 재준의 것과 승운의 것이 섞인 정액으로 번들거렸다.

승운이 재준을 돌려 그대로 다리를 허리에 감게 했다. 입을 쪽쪽 맞춘 뒤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가 쇄골을 따라 내려왔다. 벽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 받치고 다시 턱턱 처올리자 견디기 힘든지 재준의 양 손이 승운의 허벅지 위에 올라갔다. 나름 힘을 줘 밀어내는 듯 했지만 승운은 속도를 늦출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재준의 체온과 힘에 흥분한 듯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아, 앗! 흐, 으읏!”

허벅지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렸다. 구멍 안쪽에서 일어나는 경련에 승운이 재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사정없이 간 것인지 흐느끼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정복욕을 자극했다. 반쯤 선 성기가 승운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재준의 폐부가 크게 부풀며 몸이 뒤틀렸다. 승운이 웃어보였다.

“야해라.”

“허, 흑! 으— 아, 아!”

재준이 힘을 줘 다시 밀어냈지만 밀리지 않았다. 승운이 “괜찮아요.” 말했다.

“마음껏 싸요.”

재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 많은 거 이미 알고 있어.”

“그, 잠깐— 아!”

재준의 복부가 크게 요동쳤다. 동시에 성기에서 물이 분수처럼 분출됐다. 승운과 자며 몇 번이나 겪은 것이어서 익숙하면서도 인간으로서 수치가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오늘은 그것조차 느낄 힘이 없었다. 재준이 숨을 몰아쉬었다. 지쳐서 흐려진 얼굴에 승운이 군침을 다셨다.

평소라면 지쳐하는 기색이 보이면 멈춰줬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찔꺽이는 소리와 더불어 재준의 깊은 곳에서 젖어든 소리가 났다. 뱃속에 싸지른 정액이 흘러내렸는지 입구에 고였다. 빠질 때마다 조금씩 흘러나온 정액은 들이닥칠 때 다시 들어갔다. 그 중 한두 방울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승운은 재준의 양 다리를 제 허리에 감은 뒤 엉덩이를 잡고 들어올렸다. 갑작스럽게 지탱할 것이 사라진 재준이 승운의 품에 안겨들었다.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승운은 재준을 허공에 띄워 반동으로 제 품에 안기게 했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는데 덕분에 다시 성기가 깊게 박혀 재준이 움찔거렸다.

승운이 다시 날뛰었다. 재준이 허윽, 하고 울며 매달렸다. 몸이 마구 흔들렸다. 견디기 힘든 데도 힘을 받는 제 성기에 재준이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가도 다시 몰아치는 승운에게 매달려 아읏, 하으으, 신음했다. 처박힐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더니 발가락이 굽어졌다.

“으, 아— 아!”

구멍이 움찔대며 복부가 요동쳤다. 승운은 자신의 복부에서 흘러내리는 정액을 한번 바라보다가 웃어보였다. 사정해 늘어져가는 성기와 그 모양새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게 안겨있는 재준도 사랑스러웠다. 승운이 한번 추켜올리자 젖어든 안쪽에서 철퍽 소리가 났다. 재준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대로 성기를 빼내자 안에 싸지른 정액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헉— 흐, 하아…… 하—.”

“후우, 흐…….”

“흣, 으…….”

“……미안, 너무 내 욕심만 채웠어요.”

재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직 고르지 못한 숨을 몰아쉬며 승운을 바라봤을 뿐이다.

“다음엔 박사님이 좋아하는 걸로 할게.”

그게 뭔데…….

물을 힘이 없었다. 평소에 이 정도로 지치지 않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반면 승운은 컨디션이 좋아보였다. 못자고, 비 오는 데 괴수를 잡으러 간 것도 동일했는데 왜 자신만 이렇게 지쳐있는지 알 수 없었다. 비를 맞고 와서 그런 걸까.

재준은 자신을 안아드는 승운에게 몸을 기댔다. 아래로 질금질금 체액이 새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승운이 “빼줄게요.” 라고 말했다. 괜찮다고 거절할 만한 힘도 없었다.

재준을 욕조에 앉힌 뒤 다리 한 쪽을 들어 올리자 살짝 벌어진 구멍이 보였다. 오므라들었다가 다시 벌어지는 구멍 사이로 하얀 정액이 떨어졌다.

아, 씨발… 야해라.

승운이 손가락을 안에 넣었다. 들어찬 정액을 빼주는 것만 하자니, 흐물흐물하게 녹은 안쪽이 손가락을 물어와 참기 힘들었다. 움직임이 달라지자 재준이 몸을 흠칫 떨었다.

“지승운—.”

눈이 마주친 승운이 뭔 일 있냐는 듯 바라봐 재준이 손을 뻗어 승운의 손목을 붙잡았다.

“형 힘들어.”

“…….”

“흐앗, 앗!”

힘들다니까 안쪽을 더 지분거리는 건 뭔지. 재준이 눈을 살짝 내리 깔아 자신의 안쪽에 들어온 승운의 손가락을 보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눈물이 고인 것인지 아니면 흥분에 흐려진 것인지 모를 얼굴에 승운이 반대 손을 뻗어 머리를 감쌌다.

“힘들어요?”

귓가에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재준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입술이 아래로 떨어져 목을 핥다가 강하게 빨아들었다. 그 와중에 손은 여전히 안쪽을 헤집고 있었다. 본래 목적대로 정액을 빼내려는 행위였는데 이상하게 자극이 되어서 움찔거리자 “저 참고 있으니까 자극하면 안돼요.” 하는 목소리가 떨어졌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자극이 됐다는 지 알 수 없었다.

“그 정도 빼내면 됐어.”

재준이 말하며 승운의 어깨에 매달렸다. 아직도 조금은 가쁜 숨소리에 승운이 재준을 끌어안았다. 맞닿은 곳에서 느껴지는 심장소리나, 부풀었다 꺼지는 폐부, 그리고 조금 식었지만 여전히 뜨끈뜨끈한 체온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는 승운을 토닥인 재준이 “걱정 마.” 라고 말했다.

“나 어디 안 가.”

그러니까 손에 힘 좀 풀라고 말을 하던 재준이 이제 피식 웃었다. 승운이 몸을 떼고 재준을 바라봤다. 옅게 웃기 시작한 웃음은 어느 샌가 짙게 번져갔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귀여운데.”

너무 짐승 같기도 하고. 뒷말은 하지 않았다. 승운은 그런 재준을 부루퉁하게 바라보다가 물을 틀었다. 제 손으로 온도를 체크한 뒤 적절하다 싶었는지 바로 재준에게 뿌렸다. 식어가던 몸이 따뜻한 물 때문에 노곤노곤 해졌다. 어쩌면 섹스 후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씻겨줄게요.”

그러고 나서는 정말 어떤 흑심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승운은 재준의 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안쪽에 혹시 정액이 남지 않았나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빼내는 손길 역시도 성감을 자극하던 것과는 달랐다. 재준을 다 씻긴 뒤에는 가운을 입히고 안아들어 침대에 고이 갖다놓은 승운은 이불까지 덮어주고는 제 몸을 씻으러 들어갔다.

승운이 씻고 나오자 재준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승운은 바닥에 떨어져있는 안경을 들어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재준이 실눈을 뜨며 바라봤다. 그는 제 옆에 들어온 게 승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팔을 들어 머리를 끌어안고는 토닥였다.

“…….”

“자자.”

그렇게 말한 재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잠들었나 싶어 시선을 들어올렸다. 눈을 감은 모습을 보던 승운이 대뜸 “미안해요.” 라고 말했다.

“……뭐가.”

아직 잠들지 않았었나보다.

“그냥.”

“응, 나도 미안해. 너 불안해하는 거 아는데, 그냥.”

재준의 말이 천천히 늘어졌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냥, 그냥.’ 하고 몇 번 반복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간다.

“그냥— 나도 불안했던 것 같아. 네가 어떻게 될까봐. 스스로 다치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화가 나더라고.”

그렇게 말한 재준이 대뜸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베고 누워 올려다보는 승운을 불렀다.

“승운아.”

“네.”

“내가 비밀이 있다고 했잖아.”

“네.”

“나 사실 가이딩 하는 거 몰라.”

“……예?”

“나 너만 가이딩 해봐서,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하는지 몰라. 해보려고 했는데 해본 적이 없어서. 김태환 에스퍼 못 도와준 거 미안.”

그렇게 말한 재준이 다시 눈을 감았다. 졸린 건지 손으로 눈을 비비자 승운은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손을 떼어냈다. 재준이 간지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포기했는지 다시 숨을 깊게 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저번에 시리예한테 물어봤는데 이해가 안 됐어. 배워볼게.”

“……가이딩을 할 줄 모르는데 절 가이딩 한다고요?”

“으응.”

“박사님.”

승운이 재준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피곤했는지 승운이 볼을 쿡 찔러도 재준은 어떤 반응도 없었다.

“박사님, 자요?”

자는걸 알면서도 괜히 말을 걸면 일어날까 하던 승운은 그새 깊게 잠든 재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깨우기는 무슨. 이대로 푹 자는 게 낫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으켜서 물어보고 싶었다.

가이딩을 할 줄 모른다니.

“……그거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박사님?”

자신만 가이딩을 할 수 있다니.

“박사님이 내 짝이라는 소리예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재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마 모르고 있겠지. 형질이상자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니. 하지만 상관없었다. 승운이 재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 자요, 내 가이드.”

*

카트린 두자당의 신병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이 많았다.

IPMC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에서도 사람을 보냈다. 이동시간이나 시차 때문에 그들이 도착한건 이틀 뒤였다.

미국에서는 그녀 때문에 발생한 괴수 사태로 인한 피해가 상당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소송을 걸어야한다던가. 그녀의 소속이 스태그비틀 사였기 때문에 스태그비틀에서도 사람이 왔다. 그리고 그녀를 중재하고 소개했던 루카스 영까지 다시 오게 되었다. 또한 괴수협회의 사무국에서도 사람을 보냈다.

괴수의 관리는 전적으로 괴수학회에 있다. S급 괴수를 누가, 어떻게 데려갈 것인지에 대한 대화도 필요했다. 물론 미국 정부에도 괴수협회 측 사람이 있었다.

협회 자체보다는 국적이 더 중요한 것인지 나름 다툼이 있었고, 그 다툼을 중재하는 처지가 된 게 한국이었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재준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카트린은 피가 뽑혔다거나 상피세포를 챙겨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괴수의 상처회복 속도는 인간보다 빨라 팔에 있던 바늘자국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만약 바늘자국이 있다고 하더라도 재준은 괴수를 잡기 위해 마취약을 넣느라 생긴 것이라 핑계를 댈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카트린 두자당.

지금까지 기록된 괴수 중 가장 강하고 가장 위험하며 가장 많은 인간을 살렸던 인간종 괴수. S급 추정.

실제로 S급 에스퍼가 상대했을 때 제어력이 40% 가까이 떨어진 것으로 봐서는 A급 이상, S급 이하에 가깝지만 굳이 분류를 하면 S급에 가까웠다. 학명 아직 정해지지 않음.

괴수의 레벨은 두 가지로 판별하는데 하나는 체외방출 되는 페로몬의 농도에 의한 추정이고 하나는 핵을 기점으로 하는 호르몬에 의한 판별이다. 1차 발현을 한 괴수는 종족마다 다른 부위에 존재하지만 2차 발현을 한 괴수의 핵은 모든 형태를 막론하고 뇌하수체 안쪽에 존재한다.

즉, 괴수의 핵은 두개이다.

“레벨을 정확하게 알려면 호르몬을 확인해 봐야합니다.”

“괴수의 호르몬을 확인한다는 게 그들을 죽이는 거라는 걸 잘 아시면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괴수라는 존재는 크게 도움이 안 되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인간형이라니요.”

“인간종 괴수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습니다.”

또 개싸움이네. 재준은 말없이 머그를 기울였다. 이번에도 여전히, 뜨거운 차에 안경에 김이 서렸다. 재준은 안경을 벗어 흔들면서 차를 홀짝였다.

“페로몬 수치로 확인해도 충분합니다. 애초에 괴수들 역시 그렇게 구분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페로몬 수치로 확인을 한 뒤 추후 호르몬 수치를 다시 확인해서 제대로 아는 거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페로몬 수치와 호르몬 수치가 비례하며 실질적으로 페로몬 수치만으로도 꽤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페로몬 수치로 따지면 저 인간종 괴수는 S급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름이 아니라 인간종 괴수로 불렸다. 재준이 카트린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불편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방관적인 시선으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재준은 뭐라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A급으로 둘 수는 없지 않는가. A급 에스퍼를 이겼다며.”

김태환 에스퍼는 B급으로 아는데 언제 또 이야기가 변질됐나 보다.

“거 A급도 등급을 뭉뚱그려서 그렇지 구분하면 천차만별이지 않나. 각 등급도 세분화해서 숫자를 붙여야한다니까.”

“과거에 그렇게 정해진 걸 이제 와서 개선하면 또 여기저기서 말이 많이 나온단 말일세.”

“그래도 지금 처리해야 가장 비용이 적게 들어!”

그건 맞는 말이지. 재준은 그저 속으로만 동의한 채 사람들을 바라봤다.

각자의 이득을 위해 모인 서로 다른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취하고 얻기 위해 상대를 물어뜯기를 각오한 이들이었다. 여기서 괜히 끼어 들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한국은 카트린을 잡은 에스퍼의 소속국일 뿐이라 이들과 얽힐 일이 거의 없었다. 재준이 아니었더라면 민영화를 위한 집단을 찾다가 어영부영 알아내거나, 아니면 계속 모른 채로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한국 정부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민영화는 물 건너가겠네요.” 예지가 말했다.

“혹시 또 모르지.”

재준이 대답했다. 어제 예지는 간밤에 있던 일에 대해 들으며 미쳤다고 재준의 등을 퍽퍽 쳤다. 아무리 특기가 괴수 사냥이라지만 S급 괴수한테 그렇게 다가가서 마취제를 놓냐고, 죽으려고 환장을 했다며 뭐라고 쫑알쫑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게다가 승운이 예지의 말에 힘입어 “맞아, 정말 죽으려고 환장했었죠.” 라고 말했다. 어제 우리 대화 다 끝낸 거 아니었냐고 재준이 무언의 시선을 보냈지만 승운은 오히려 예지한테 “박사님이 무모하게 다가서서 날 홀아비로 만들려고 했어요.” 라고 한술 더 떴다. 지승운은 그 단어가 정말 안 어울렸지만, 과부보다는 그래. 홀아비가 더 나았다.

그러고는 김태환 에스퍼의 문병을 갔는데, 몸에 있는 날카로운 상처들에 기겁하며 B급 에스퍼를 저렇게 만드는 괴수를 미쳤다고 상대했냐며 예지는 다시금 재준의 등짝을 퍽퍽 때렸다. 김태환 에스퍼도 소식을 들은 것인지 재준을 질린 얼굴로 바라봤다.

“무슨 괴수학자가…….”

S급 괴수를 잡냐. 한방에 폭삭 쓰러진 자신이 민망하게.

괴수를 상대하는데 에스퍼보다 괴수학자가 더 뛰어난 것 같잖아. 물론 태환이 직접 본 괴수학자들은 막 각성한 초보 에스퍼보다 더 괴수를 잘 사냥하기는 했다. 그래도 형질이상자로서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다.

좀스럽게 투덜거리던 태환은 ‘그러고 보니.’ 라고 작게 말했다.

“대장, 현 박사님 진짜 가이드 맞아요?”

“나 가이딩 하는 거 보면 알잖아.”

그런데 왜 난 안 통하냐고.

그날 태환은 정말 죽을 뻔했다. 코드 레드였다. 종종 위험한 구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에스퍼라든가 각인한 가이드가 죽었다든가, 그게 아니면 지승운이라든가, 지승운이라든가, 혹은 지승운일 경우가 아니라면 잘 뜨지 않는 코드 레드. 자신의 시계가 붉게 변한 것은 처음이었다.

에스퍼들에게는 첫 한 번의 코드 레드는 나름의 훈장처럼 여겨졌다. 태환도 나중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랑해야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접 겪으니 그렇게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었다. 정말 죽을 뻔 했다. 지승운은 어떻게 그걸 몇 년간이나 겪었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 제어가 되지 않았고, 눈앞 역시 보이지 않았다. 몸속을 휘몰아치는 힘을 견딜 수 없어 외부로 방출하고 싶었다. 태환이 그러지 못한 것은 외부에서 방출되는 에너지가 태환이 가진 에너지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여기서 힘을 방출했다간 도리어 제가 휩쓸려 온몸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는 에스퍼 본능 때문이었다.

그런 태환의 손을 재준이 잡아줬다. 그리고 재준은 아무것도 못했다. 가이딩이 되지 않았다. 듣기로는 수치가 상당하다는데 도대체 왜 가이딩이 되지 않는 건지, 재준과 자신의 매칭률이 뭐 1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재준은 태환에게 아무 짝에도 도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승운은 현재준 없이는 죽고 못 살 것처럼 굴었다.

가이드라.

“나도 내 가이드 찾고 싶다.”

마치 연애하는 친구 보고 나도 연애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 같네. 예지가 생각했다. 형질이상자들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찾아. 이 기회에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 한번 테스트 해보고.”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왠지 일찍 결혼해서 배우자와 깨 볶는 모습을 보여주며 ‘너도 빨리 결혼해, 정말 좋아.’ 하고 말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난 아직 한 사람에게 정착하기엔 너무 젊어요.”

태환은 나름 혹한 듯 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으이그, 문란한 놈들. 에스퍼가 그러면 그렇지. 예지가 질색했다. 어쨌든 태환의 상태는 점점 좋아졌다. 정말 시간마다 좋아지는 게 보였다. 전부 가이드 덕분이었다. 김태환은 이 기회에 위험수당과 휴가 좀 팍팍 땡겨 달라고 말했다. 생각보다 더 태평한 모습에 예지는 에스퍼 건강걱정은 할 필요가 없구나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오늘, 예지는 다시 한 번 에스퍼에 대한 경멸이 추가됐다.

미국에 FBI가 있고, 영국에 MI-5가 있듯이, MI-6인가? 알게 뭐야. 아무튼 그것이 있듯이 대한민국에도 국가정보원이 존재했다. 이름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비밀스러운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지가 만난 이들은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이능력정보원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에스퍼 국정원이라는 뜻이었다.

“뭐, 그건 좋아 이거예요. 제가 왜 취조를 받아야하는데요?”

“이곳에서 있던 일이 극비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폴란드로 가는 비자를 신청하셨으니까 그에 대해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건 영사관에서 하는 거 아니에요?”

“유예지 씨를 살피는 건 그쪽에서 하는 거지만, 저희가 살피는 건 다른 거니까요.”

“…….”

개 싫어.

“박형기 박사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더 싫어.

“그리고 박요한 가이드는…….”

완전 싫어!

하지만 저 에스퍼 국정원인지 뭐시기인지는 모든 것을 알아내겠다는 일념 하에 예지를 취조했고, 예지는 제가 아는 보잘것없는 정보를 줄줄 불어야했다. 그리고 정말로 아는 게 없다고 판단이 된 것인지, 예지가 신청한 비자는 예상보다 더 빨리 나왔다.

* * *

김태환이 건넨 파일 겉면에는 극비 자료라고 적혀있었다.

승운은 파일 내부를 살폈다. 국외에서 활동하는 요원이 보낸 자료였다. IPMC와 그들을 후원하는 집단인 로마클럽, 그리고 ‘도리스’라는 집단에 대한 정보였다. 파일을 읽어나가던 승운은 혀를 쯧 하고 한번 찼다. 그때 승운의 핸드폰이 울렸다. 폰을 확인한 승운이 미소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예, 박사님. 지금 사무실이에요. 10분 안에 갈게요.”

박형기 박사는 징계면직됐다. 그렇다고 국외로 추방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괴수학계에서도, 언론 쪽에서도 힘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도 워낙 참고자료가 적은 학계라 그동안 낸 책이 조금씩은 팔린다는 소식은 들었다.

박요한 가이드는 여전히 이능청 소속이다. A급 가이드를 그런 이유로 버릴 수는 없었다. 다만 3센터 이상의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만 확정지어졌을 뿐이다. 박요한 가이드는 평생 기피 구역을 떠돌 예정이었다. 물론 더 이상 이능청 소속이 아니게 된다면 사정은 다르지만.

에스퍼와 가이드가 소속된 공적형질이상자관리위원회는 법적으로 계속 이능청 소속이며, 민영화가 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 행정부가 원하는 것이 민영화인 만큼, 이능청 쪽으로 은근한 압박이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박형기 박사는 여전히 알크메네 재단의 고문으로 있다. 그리고 에스퍼와 가이드의 겸직은 국가에서 허용한 곳만으로 축소되어 박요한 가이드는 알크메네 재단에 이름을 올릴 수 없게 되었다.

“청문회는?”

“곧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근데 아마…… 그렇게 좋은 결과는 얻지 못할 거예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지. 난 박사님 뵈러 가야겠어.”

“예에, 그러십시오.”

태환이 마음대로 하라는 듯 말했다.

이능력정보원에 협조를 요청한 이후 사흘 만에 비자가 나온 예지는 잠피레스쿠 박사와 일정을 조절했다. 대부분의 유럽이 그러하듯 1월 중순에 시험이 끝나면 2월 중순까지 짧은 방학이 있다. 결국 학기는 2월에 시작한다. 예지 역시 2월부터 인턴으로 활동을 한 다음에 다음 학기부터 석박사 통합 과정을 밟아야했다. 그렇다면 최소 1월에 출국을 해야 하는데, 출국해서 집을 구하고 기타 등등을 따지면 너무 바빴다. 게다가 12월 후반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어 휴가가 길다. 최소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떠나는 것이 안전했다.

결국 재준은 예지의 퇴사일과 출국일을 조절했다. 연구소는 당장 바쁜 것이 없으니까 떠날 준비를 확실하게 하라고 말에 예지는 뒤늦게 헤어지기 싫다고 엉엉 울었다. 그러고 나서 자주 연락해야한다고 적어도 이삼일에 한번 씩은 연락하라고 하더니 결국 단톡방을 만들었다. 그 단톡방에는 본의 아니게 태환과 승운 역시 들어가 있었는데, 예지가 출국을 하고 나서도 자주 대화를 하다 보니 한국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예지는 시차도 한국시차로 살고 있었다. 아직 적응을 못 했다던가.

그녀가 폴란드로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고, 괴수학 컨퍼런스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예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제가 떠날 때쯤에 학술회도 열리지 않을까요, 같은 말을 했다. 그렇게 되면 같이 가자고 했지만, 여러 사정을 통해 학술회는 미뤄졌다. 사실 12월 말에 열릴 수도 있었지만 모든 서구권 사람들이 격하게 반대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보내야 한다면서.

IPMC는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그들이 은닉한 정보가 드러남에 따라 로마클럽과 각국의 정상들이 이능통제기구에 대한 불신을 가졌다. 그들의 투명성을 위해 상임 이사 선정에 대한 것을 통제기구 자체가 아닌 각국에서 지정을 하자는 말이 나왔다. UN은 이때다 싶었는지 안전보장이사회와 IPMC를 연계하자는 말을 했다. 뭐든, 아직 딱히 정해진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승운이 DMZ연구소로 왔을 때 동시다발적으로 알람음이 울렸다. 재난문자였다. 괴수가 침입했다는 것이었는데 안 그래도 눈앞에 괴수가 보였다.

“악!”

“박사님, 조심해요!”

DMZ 연구소의 빈틈으로 들어온 괴수는 날렵하게 여기저기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가이드가 재준의 옆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유예지 연구원이 사라지고 나서 홀로 고군분투하던 재준은 결국 가이드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서로를 어려워하던 가이드들과 재준은 어찌어찌 협력하는 일이 많아지며 나름 친분을 쌓은 듯 했다.

재준이 “괜찮습니다.” 하고 말하며 장갑을 꼈다.

승운이 차에서 내려 자기가 처리를 하겠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재준의 손이 재빨리 움직였다.

“…….”

저걸 잡네.

“잡았습니다.”

그것도 맨손으로.

승운은 조금은 뻘쭘하고 머쓱한 얼굴로 재준을 바라봤다. 분명 가이드인데. 현재준이 가이드라는 사실은 지승운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근데 가끔 재준은 에스퍼처럼 날렵하게 괴수들을 잡아냈다. 에스퍼 에너지가 아니라 순수한 육체의 움직임이었다.

군사훈련을 받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걸까? 승운이 자신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지승희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재준은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괴수를 들어 올려 살폈다. 나름 앙증맞은 괴수였다. 기껏해야 60cm 정도 되어 보이는… 괴수 치고는 아담한 크기로, 크게 위협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생후…… 10개월도 채 안 되어 보이네요.”

어려서 그렇군. 그것보다 도대체 어딜 보고 그런걸 아는 걸까? 아마 묻는다면 그냥 보면 안다고 답을 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더 크고 오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말한 재준이 괴수를 DMZ 철조망 안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허공에서 몇 바퀴를 돌며 날아간 괴수가 안쪽으로 쿠웅! 하고 떨어졌다. 몸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흙바닥 위를 몇 번이고 구른 괴수가 몸을 바로 세우고 털을 후드드득 털었다.

금어기 철 노가리. 그런 취급이었다.

재준이 일을 마쳤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언제 왔는지 모를 승운을 발견한 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입꼬리를 휘어 보이며 웃었다. 눈에 보이는 애정에 심장 주변부가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지승운 씨.”

“그렇게 입고 안 추워요?”

승운이 물었다. 재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추켜올렸다. 승운도 그렇지만 재준도 체온이 높은 편이었다. 둘 다 육식 짐승마냥 더위를 타서 겨울의 방 온도 가지고 다툴 일도 없었다.

“지승운 씨는요? 얇게 입고 다니면 감기 걸려요.”

에스퍼는 감기에 걸리지 않아요. 하지만 재준의 걱정이 좋아 승운은 “다음엔 따뜻하게 입을게요.” 라고 말했다. 그 대답에 만족스러운지 재준이 고개를 주억였다.

“시간 되실 때 저와 DMZ에 들어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겨울이라 힘든데 먹이도 좀 놔두고 와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쯤 번식을 하는 괴수가 있어서요. 개체도 별로 없거든요. 멸종 위기종이라 각별한 관리를 해야 해요. 괴수가 좋아하는 고기가 보통 양고기라…….”

말을 이어나가는 순간 어디선가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승운이 재준의 어깨를 감싸며 보호했다. 승운의 어깨 너머로 터져나가는 살점들을 바라보던 재준이 안타깝다는 듯 “아.” 하고 말했다.

이곳은 DMZ연구소. 여전히 지뢰가 많다.

* * *

‘학술회 초청장 왔어요!’

단톡방에 예지가 보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재준은 제 메일을 열어봤다. 초청장은 우편으로 도착하지만 간혹 분실되는 경우가 있어 메일로 동일한 초청장을 보내둔다. 일정은 내년 1월 말. 한 달 하고도 조금 더 남았다.

장소는 재준이 원했던 대로 유럽이었다. 여러 장소가 오갔는데 크라쿠프로 선정됐다. 예지는 자기 동네라며 오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흑맥주가 좋다던가. 그러면서 올 때 먹태 좀 챙겨달라는 부탁도 했다. 이왕이면 청양마요 소스도 동봉해서.

먹태는 구하기 힘든 것 같네. 재준은 예지가 보낸 메시지를 공지로 설정해뒀다. 이렇게 하면 잊지 않을 것이다.

재준의 삶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여전히 연구는 진행 중이었고, 시리예와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리처드 라제쉬의 연락은 뜸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받는다.

보리스는 여전히 남극에 있었고, 에르난데스는 연락이 안 된다 싶더니 얼마 전에 연락이 닿아 통화했다. 비행종 괴수들이 아마존 내에 있는 모든 케이블을 뜯어놔서 복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했다. 별다른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카트린 두자당은 미국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최초의 괴수로 치부되었던 남극의 괴수를 보관했다던 51구역의 연구소에 말이다.

그 이후로 어떠한 소식이 없더니 대뜸 카트린 두자당이 폐기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괴수협회에서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항의를 했지만 미국은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좋지 않은 결말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카트린 두자당의 존재 여부가 미국의 것만이 아닌 전 세계의 유산이며, 특히나 그녀의 국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프랑스에서는 가당치 않은 일이라며 국제법에 따라 사법재판소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이렇다 저렇다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학자들은 침묵했고, 미국은 무시했다.

그러나 나중에, 아주 나중에 괴수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녀에 대한 것이 비밀문서로 작성되었다가 공개될지도 모르겠다. 1980년, 51구역의 네바다 주 그룸 호수 공군기지에서 괴수가 탈출한 것에 대한 극비 자료가 추후 공개된 것처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재준은 웬만하면 자신이 나이가 들어 이 업계에서 은퇴를 하거나 죽은 이후에나 벌어지길 원했다. 어떻게 될지는 아직 짐작할 수 없었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승운 씨.”

승운은 제 사무실이 있지만 절반쯤은 이곳에서 보낸다. 오히려 태환이 그 사무실에 더 자주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퇴근 시간이 되려면 조금 있어야 했는데, 승운은 조금 일찍 도착했다. 여기서 노닥거리거나 재준이 일을 하는 것을 보며 시간을 낭비하다가 함께 퇴근하는 것이 요즘의 낙이었다.

겨울에는 괴수들의 활동성이 떨어지니까 이렇게 느긋할 수 있지, 여름이 되면 이것도 힘들 것이다.

승운이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재준에게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재준도 딱히 거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유리벽 너머로 그들을 보고 있는 가이드들이 저게 뭐냐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재준이 가이드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아서, 제7센터에서는 지승운은 일반인 괴수박사와 사랑에 빠진 이상한 사람이 됐다. 애정표현을 숨기지 않은 탓이었다.

여전히 지승운의 김 씨 성을 가진 A급 가이드가 누구냐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지승운의 공식적인 커플은 현재준이었다. 가이드들 사이에서는 그 A급 김 모 씨를 향해 안타까운 위로를 표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 안쓰럽다고 여겼다.

그 A급 김 모 씨로 알려져 있는 S급 현 모 씨는 태평했다.

“곧 다시 괴수 컨퍼런스가 열릴 예정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름이 아니라 계속 겨울에 열리게 되겠네요. 교수님들도 많으니까 1월 중순에서 2월 중순 사이 짧은 방학 기간이 있는데 그때 열릴 것으로 추정됩니다.”

“잘 됐네요. 겨울에는 괴수들의 움직임이 별로 없잖아요.”

“남반구에서 열린다면 좀 힘들겠지만요. 아무래도 남반구는 여름에 괴수들이 덜 움직여서. 그쪽 괴수들은 느린 편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말하며 재준은 자신의 메일로 온 초청장을 보여줬다. 귀여워라. 그렇게 안 보여줘도 되는데. 지승운이 생각하며 핸드폰을 건네받아 살폈다.

“초청장이 두 장이네요?”

“예, 경호원 용이요. 하지만 안 쓰는 괴수학자들도 많습니다. 혹은 표를 암시장에 내놓기도 해요. 학자들이 모두 후원을 받거나 소속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가끔은 제 것까지 팔아서 학비에 보태는 경우도 있죠.”

“그런가요?”

하긴, 괴수학과는 가기도 힘들지만 학비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물론 재준은 전액 장학금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전액 장학금이라니. 제 애인의 능력이 새삼 대단해 승운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재준이 그런 승운을 의아하게 여겼다.

“초청장이 두 장이면 이번에 박사님은 누구와 갈 건가요?”

역시 경호원이 필요하겠지. VIP니까. 그리고 지승운은 그런 VIP를 경호하기 딱 좋은 인재였다. 경호원을 구한다고 하면 냉큼 내가 어떠냐고 어필을 하려는 순간, 재준이 “같이 갈래요?”하고 물었다.

“경호원으로 말고.”

“어?”

“전 휴가 한 달 정도 낼 수 있거든요. 괴수학자들의 특권이긴 하지만.”

원래는 여름에 휴가를 즐겼지만, 겨울도 나쁘지는 않았다. 명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한국에서 지내는 명절과는 좀 다르지만 가족과도 같은 이들과 함께 보내던 시간들에 대한 애정과 따스함이 함께 해서, 재준에게 겨울은 왠지 그리움을 간직한 때였다.

“그런데 에스퍼는 어떤지 모르겠네. 하지만 지승운 씨 휴가 기간에 맞춰서 같이 갑시다. 일주일 정도여도 괜찮아요.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소개요?”

“라제쉬 박사님들이나, 다른 학자들이요. 나한텐 가족 같은 사람들이거든요.”

어—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승운이 멍하니 재준을 바라봤다.

“지승운 씨가 내 배우자가 될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싶어서. 우리 종종 휴가도 같이 보내는 편이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준은 승운이 혹여 불편한가, 내키지 않은가 얼굴을 살폈다. 거북함은 보이지 않았다. 재준이 조심스레 “같이 가 줄 거죠?” 재차 물었다.

“당연하죠.”

승운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저 프러포즈 받은 거예요?”

농담처럼 묻자 재준이 승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답했다.

“예, 프러포즈입니다.”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그럴 리가 없음에도 승운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니면 제가 농담처럼 물어서 농담처럼 답했나? 승운이 두 눈만 깜빡이자 재준이 피식 웃었다. 재준이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제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상자였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승운은 왠지 모르게 기대했다. 한편으로는 기대를 내려놓고 싶은데 저 상자는 너무 승운이 예상하는 그런 거였다.

승운의 앞으로 다가온 재준이 상자를 열었다.

“남성 반지는 투박해서 아쉽네요.”

조금은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승운은 가만히 재준이 내민 반지를 바라보다가 “저도.” 하고 입을 열었다.

“저도 반지 샀어요. 근데 지금 없습니다. 집에 숨겨뒀어요.”

재준이 옅게 웃었다.

“내가 먼저 주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어투에 재준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재준이 “승운아.” 하고 불렀다.

“나 사실 네 반지 발견했어.”

“…….”

“원두커피 옆에 있더라. 요즘 네가 커피를 타서 거기다 뒀나?”

“…….”

“일부러 똑같은 걸로 샀는데.”

그렇게 말한 재준이 반지를 승운의 손에 끼워줬다. 사이즈가 딱 맞았다. 어떻게 맞췄지 싶다가, 요즘 왠지 모르게 손을 그렇게 만진다 싶더니 그것 때문인가 했다. 의외로 세심한 사람이었으니까. 승운은 제 왼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 끼워줄 생각만 했지 받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반지를 받는 것 역시 기분이 좋은 거였다. 애초에 재준이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제가 일방적으로 하는 프로포즈를 거절당하면 어쩔까 전전긍긍했는데.

“박사님.”

지승운이 배실배실 웃었다.

“예.”

“사랑해요.”

승운의 말에 재준 역시 웃어보였다. 승운이 왼손을 뻗어 재준의 안경을 벗겼다. 제 손에 보이는 반지가 번쩍 빛났다.

“박사님이랑 결혼해 줄게요.”

“거절당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제가 박사님을요?”

승운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재준이 자신을 거절하는 거라면 또 모를까.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고, 또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한구석에 있던 불안감은 손에 끼워진 흔적에 전부 사라졌다.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입을 맞췄다.

***

비밀은 언제나 의외의 장소에 숨겨져 있다.

지승운은 리셉션 홀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정장을 입고 총기를 가진 이들이었다. 간혹 정장이 아니라 조금 이상하고 편한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무장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재준은 “생각보다 후원자가 많이 줄었네요.” 라는 말을 했다. 저번에 있던 일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며, 반면에 에스퍼나 용병들은 더 늘어났다는 말을 했다.

“숙소 어디에 잡았어요?”

“야기엘론스키 대학 옆에.”

“와, 완전 중심가네. 하긴 지승운 에스퍼가 있으니까 문제없겠죠?”

그렇게 말하는 예지는 한국에서의 컨퍼런스 때보다 훨씬 더 가벼운 차림새였다. 그나마 슬랙스는 예의를 차린 거라고, 조거팬츠 입고 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얼마 전에 할인해서 샀다며 발을 들어 올려 갖고 싶었다던 닥터마틴을 자랑했다.

“그래서, 지낼 만 해?”

“완전요. 우리가 예전에 살 때랑은 좀 다르다고 해야 하나. 근처에 한식당 맛있는데 있어요. 가격대도 뭐 나쁘지 않고.”

그렇게 말한 예지가 지승운을 슬쩍 바라봤다.

“박사님은…… 뭐 잘 지냈겠죠.”

잘 지냈을 것이다. 지승운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연락해서 재준이 좋아하는 거나 습관이나 혹은 알아둬야 할 것, 알고 싶은 것 전부 물어봤으니까. 어째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연락을 자주했다.

“반지 잘 어울리네요, 둘 다.”

예지가 말했다. 사이즈는 다르고 똑같이 생긴 반지였다. 처음 지승운 에스퍼가 제7센터에 올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비단 그것만은 아니다. 살다보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로 인생이 흐르기 마련이었다. 예지의 삶 역시 그러했다.

“내일 발표 하는 거죠?”

예지가 물었다. 홀로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 보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에르난데스가 들어왔다. 저 둘은 참 친한 것 같다고 말을 한 예지는 뒤이어 오는 시리예를 향해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응. 내일 발표해야지.”

“잘 되겠죠?”

“글쎄. 모르겠네.”

재준이 답했다. 이것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인간이 감히 어떻게 짐작이나 하겠냐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니 우리는 수많은 안 좋은 선례를 많이 봤잖아.”

“에이, 뭐 기껏해야…….”

예지가 말을 하다가 멈췄다. 기껏해야 정도가 아니었다. 산업사회의 인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은 그것이 전쟁무기로 둔갑하는 것을 보며 절망했고,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아 전쟁을 종식시켰으나, 그 자체가 결국 죽음—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떠오르는 인물들을 잊기 위해 고개를 휙휙 저은 예지가 나름 위로라도 하듯 말했다.

“우리는 뭐, 핵이나 폭탄이나 그런 게 아니니까.”

설마 오펜하이머처럼 절망의 비를 내리기나 하겠어요? 예지의 말에 재준은 그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에스퍼들에게, 혹은 그들과 페어나 각인을 한 가이드들에게 이 사실은 절망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래, 그렇지.”

재준이 웃어보였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괜찮아.”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재준은 감내해야 할 것이었으니까. 재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테이블 위에 있는 샴페인 잔을 들어보였고, 그의 가족 같은 친구들이 이곳으로 다가왔다. 곧, 컨퍼런스의 개막이었다.

비밀은 언제나 의외의 장소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발견자가 숨겨졌던 비밀 하나를 밝혀낸다고 해서 죄인이 될 수는 없다.

뒤 편에서 자신보다 앞선 발표자를 바라보던 재준은 손이 차가워지는지 몇번이고 스스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재준의 옆에는 승운이 있다.

“예전에 멜라니 라제쉬 박사가 그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재준이 말했다.

“가이드는 태양이라고.”

승운이 두 눈을 깜빡였다. 멜라니 라제쉬가 말했다면 아마 과학적인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승운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가이드는 항성, 에스퍼는 혹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제 와서 보면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제가 누군가의 태양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못했다고 할 수도 있고. 그냥 그런 관계가 제 삶에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시엔 태양이 좋은 것만 같지도 않았고.”

“왜요?”

“그냥. 지금 우리의 삶에 영향을 많이 끼쳤으니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지만 태양이 없다면 살 수 없다.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은 자주 바뀌니까요. 진실이 자주 바뀌는 것처럼.”

“진실이 자주 바뀌나요?”

“예, 과학은 쉽게 낡으니까요.”

진실과 진리는 다른 것이었다. 뭐, 진리라고 평생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재준이 밝혀내는 것은 어쩌면 미래에는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었다. 과거 에스퍼나 괴수를 단순히 괴물, 요괴, 도깨비 등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지금의 발표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과학은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을 뿐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에스퍼와 괴수에 관한 것도, 더 좋은 식으로 바뀐다면 좋겠다. 이것은 그러기 위해서 거쳐야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래도 조금은 두렵다.

“저 좀 안아주십시오.”

재준이 말했다. 승운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재준을 꽉 끌어안았다. 긴장한 듯한 굳은 몸이 익숙한 체온에 스르르 풀어졌다.

“두려워요?”

“예, 그렇습니다.”

재준이 답했다.

“아주 조금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언제 생각해도 참 솔직하다니까. 승운이 길게 내려온 재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줬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다시 아래로 흘러 떨어졌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승운 씨는 제 편이니까, 그건 안심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몸을 떼어낸 재준이 사람들이 앉아있는 좌석을 바라봤다. 시리예와 나란히 앉은 예지 옆으로 빈 두개의 좌석이 있었고, 그 뒤로 보리스와 에르난데스가 앉아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시어샤가 있었다. 그때 시어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재준에게 익숙한, 하지만 오랜만이라 조금은 낯선 남자가 걸어 들어와 그녀의 손을 잡아보이고는 볼을 맞췄다. 두 번의 비주에 재준이 옅게 웃어보였다.

리처드 라제쉬가 이 자리에 왔다. 그를 발견한 것은 재준뿐만이 아니었는지 예지가 손을 파닥이며 라제쉬 박사가 있는 쪽을 발견했다. 다른 괴수학자들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라제쉬 박사를 주목했다.

“오늘 환경 및 괴수학 컨퍼런스에 참여해주신 내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제 슬슬 나갈 차례였다.

“박사님.”

그래, 숨겨진 비밀을 밝혀낸 것이 죄인의 낙인은 아니다.

“모두가 박사님한테 등을 돌려도 저는 항상 박사님 곁에 있을 겁니다.”

지승운이 말했다.

“죽을 때까지요.”

그래, 한 사람이면 됐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편들지 않아도 된다. 단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의문이었던 무언가에 대한 실마리가 보이는 듯 했다. 에스퍼는 가이드 없으면 살 수 없다는데, 가이드는 왜 에스퍼가 필요한 걸까? 그들이 가지고 오는 무한한 신뢰와 안정감 때문인가?

재준이 승운의 양 뺨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입을 맞춘다.

“다녀올게요.”

웃는 그 모습에 승운도 따라 웃었다.

지승운은 단상 뒤편에서 내려와 유예지의 옆자리에 앉았다. 예지가 왔어요? 물었다. 승운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단상에 선 재준은 주위를 둘러봤다. 아는 얼굴, 모르는 얼굴, 반가운 얼굴, 서로 얼굴을 붉혔던 이들, 적대했던 이들. 모두가 한 자리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자신의 에스퍼를 보며 재준은 웃어보였다.

‘나의 태양.’

승운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하지만 귓가에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태양.

태양이 시작이었다.

콜럼버스는 태양을 따라가며 구세계를 떠났고.

“안녕하십니까.”

돌연변이는 태양 아래에서 탄생하였다.

“박사 현재준입니다.”

지금 역시 그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비밀은 너무 흥미로운 나머지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죠.”

인간과 에스퍼, 괴수에 대한 모든 것들은.

“지금부터 에스퍼의 폭주 이후, 그 다음 종에 대한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태양 아래에서 다시 구세계를 벗어날 것이다.

가이데올로그(Guidéologue)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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