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0)

11.

Katja GARTEN 카티야 가텐.

Catherine DUJARDIN 카트린 두자당.

왜 몰랐던 걸까.

1999년, 밀레니엄을 앞둔 12월의 일이었으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다니, 무슨 영화도 아니고.”

태환이 투덜거렸다. 그 사이 재난문자는 계속해서 도착했다. 외부 외출을 삼가라는 내용이 주였다. 에스퍼들에게는 출동명령이 계속 떨어지는 듯 했다. 실제로 태환과 경민은 집에서 나와 재준의 집까지 오기까지 괴수 수십 마리를 사냥했다.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을 겁니다.”

재준이 말했다. 모든 괴수도 아니고 비행종의 특정 괴수들만 폭주를 일으키고 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비행종 괴수의 수도 한계가 있다. 변이를 일으키는 괴수를 전부 잡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죽인다면 나흘 정도면 될 것이다. 실제로 가장 처음 이 사태가 일어났던 미국은 서서히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다음 소식입니다. 오늘 제주에서 에스퍼 세 명이 임무 중 순직하고, 한 명이 실종되었습니다. 도심 외곽에서 발생한 괴수 폭주와 비행종 괴수들의 이상증식으로 인하여 지원을 나갔던 C급 에스퍼 한 명, D급 에스퍼 두 명이 사망하였으며, 나머지 에스퍼 한명은 수색 중에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진짜 이상해요.”

이경원이 말했다. 경원 역시 태환과 경민과 함께 재준의 집으로 왔지만 머리만 좋고 대체로 몸은 쓸모없는 그가 한 것은 운전이 전부였다. 가끔 떨어지는 괴수들을 보며 으악 하고 소리 지르기도 했지만 그건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과 그녀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글쎄. 별개로 봐야 할 것 같긴 한데.”

태환의 말에 경원이 대답했다. 재준이 거기에 의견을 냈다.

“괴수의 폭주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특정 괴수종의 폭주는 외부 요인이 개입했다는 뜻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재준이 이어 말했다.

“스태그비틀 사는 유전자재조합 기술이 있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카트린 두자당은 괴수이니…… 완전히 별개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연관성을 입증하기도 힘들군요. 그녀가 가이드를 잃은 지 20년이 지났으니 이제 와서 뭔가 한다고 하기엔.”

“하지만 카트린이 나설만한 일도 있잖아요.”

예지가 이어 말했다.

“박사님의 보고서요. 그게 주요 단체나 고위층에게 들어갔다면 카트린도 그걸 봤을 거예요.”

예지는 가정했지만, 실제로 카트린은 그 내용을 봤다. 그걸 보고 재준을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겼으니까. 과연 스카우트가 목적이었을까?

그녀가 카티야 가텐이라면, 재준은 스카우트가 목적이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그녀가 카트린 두자당이라면 죽이기 전에 한번 어떤 사람인가 살피러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괴수화 방지 백신에 대해 말했죠.”

재준이 말했다.

“어?”

“괴수화 방지 백신이요?”

“아, 제가 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아예르 박사의 연구라서. 하지만 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준비를 하는 것이니까요.”

“괴수화 방지 백신은 이미 괴수가 된 사람도 되돌릴 수 있나요?”

“아뇨. 불가능합니다.”

승운의 질문에 재준이 답했다.

“에스퍼나 가이드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하듯이, 괴수로 변한 에스퍼는 다시 에스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카트린이 CRO회사에서 일을 한다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목적은 그 백신이 아니다?”

“그 백신일리 없습니다. 오히려—.”

설마, 그럴 리가 싶으면서도 떨어지는 가설이 하나 있었다.

“카트린 두자당은 멜라니 라제쉬를 공격했습니다. 괴수화 방지 백신은 멜라니 라제쉬의 연구 중 하나였으니, 그녀를 공격한 것에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건 곧 그녀의 연구를 원하지 않았다는 건데.”

그렇게 말한 재준은 자신의 랩탑을 바라봤다.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라제쉬 박사들과 카트린 두자당, 루트 옌슨은 서로 꽤나 친밀한 사이였던 것 같았다.

개인적인 감정……. 그것보다는 연구를 원하지 않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재준의 말에 승운의 표정이 굳었다.

“연구를 원하지 않았다는 건, 곧 카트린 두자당이 박사님을 노릴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하기에도, 카트린은 3년간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연구가 지속되는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멜라니가 그렇게 되고 난 뒤에 리처드 역시 연구를 그만뒀기에 저나 시리예가 이어 연구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2019년, 연구는 잠시 중단됐다. 하지만 카트린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끝났을 것이라 추정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카트린의 목적이 그것이라고 가정했을 때의 일이지만.

“다만 제가 의문인 것은 IPMC에선 이 사실을 알았냐는 겁니다.”

그것 역시 장담할 수 없다. IPMC는 이능통제기구지 괴수협회와는 상관이 없다. 괴수협회 역시 학자들 위주로 이루어져있으며, 거기에 소속된 이능력자는 얼마 전까지 단 세 명 뿐이었다.

모를 수 있지만, 알려고 한다면 알 수 있는 일들.

카트린 두자당은 어떻게 카티야 가텐으로 살게 되었을까? 그녀를 숨기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누구인가? 어떻게 신분을 샀는가? 누가 얽혀있는가?

리처드 라제쉬나 멜라니 라제쉬는 정말 몰랐을까?

만약 알았다면? 시어샤에게 말을 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스태그비틀 사에 대한 정보가 있었더라면…… 그런데 카트린이라면 보통 어떻게 생겼는지 다들 알던 거 아니었어요? 형질이상자들 교육 과정에 없어요? 저나 박사님이야 뭐 일반인이니까— 아니, 박사님은 일반인으로 살았으니까 모른다 치지만.”

예지가 말했다. 아니, 그 사람이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단 말이야? 물론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 비슷하게 생겼구나 하고 말 수도 있었지만, 누군가는 의문이나 음모론을 만들어 볼 생각 같은걸 하지 않았던가? 엘비스 프레슬리가 살아있다는 루머처럼, 카트린 두자당이 살아있다는 루머를 내세운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심지어 이건 이제 루머도 아니다. 카트린 두자당이 살아있다.

“그냥 그랬다는 것만 알고 있지 얼굴을 알고 있던 건 아니어서요. 게다가 뭐, 이미 죽었다고 하는데 닮은 사람인줄 알았겠죠.”

“나이대도 안 맞고. 카트린 두자당이 지금 살아있다면 몇 살이지?”

“환갑은 넘었을걸.”

“그런데 기껏 해봐야 50대 초반처럼 보였잖아요? 서양인들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걸 감안하면 지금 카티야는 40대 중후반이라고 추정될걸요.”

“괴수가 된 시점부터 노화가 멈춘 거군요.”

경원이 말했다.

“노화가 멈췄다는 건 어떤 의미죠? 괴수가 되면 영원히 산다는 건가?”

“아뇨, 괴수도 나이를 먹습니다. 그슨대 종은 어린 아이로 시작해 점점 성인으로 성장해가죠. 성장한 그슨대 종은 아직 본 적이 없지만, 괴수 또한 유기체인 만큼 분자 수준의 기능이 없다고 할 순 없습니다. DNA메틸화를 측정하면 나잇대를 알 수 있는 것도 동일하니까요.”

“그렇다면 노화의 매커니즘이 다르다는 뜻이 되겠군요. 텔로미어?”

“—특별한 구조가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에 대해 말하기는 애매합니다. 다만 후성유전학적으로 특정 유전자가 변이되면 생물학적 나이를 현저하게 가속시키는 것이 밝혀진 것처럼, 괴수화가 된다는 것이 노화를 감속시킨다는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서.”

왜 저렇게 말을 꼬아서 하는 거야. 태환이 생각했다. 이경민은 아예 관심을 끈 것인지 핸드폰으로 이런 저런 걸 확인하고 있었다. 주로 중고거래 같은 거였다.

두 박사와 유예지 연구원까지 머리를 맞대고는 노화전이 조절 대사물질이니, 1차 노화세포니 뭐니, RNA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대로 무시한 태환은 핸드폰으로 오는 문자를 확인했다. 몇몇 사람의 폰에서 동시에 울리는 소리를 보며 현장을 뛰는 에스퍼들에게만 온 듯 했다. 다들 제 폰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TF팀을 세 개나 만든다는 데요?”

“그 정도면 뭐. 안 그래도 에스퍼가 현장에서 사망하기까지 했으니.”

“제주 쪽은 그렇게 안 위험하지 않았어요?”

“평소엔 그런데 지금은 가을이잖아. 원래 가을철이 괴수가 날뛰니까. 아무래도 난류성이랑 한류성이랑 만나는 일도 있고.”

“이쪽은 그렇겠지만 제주는 아무래도 기온변화가 평이하잖아요.”

“그러니까 더 괴수가 살기 좋은 편이지.”

무슨 괴수를 철만난 물고기마냥 이야기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딱히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도 불려가지 않을까요?”

“난 안가.”

승운이 말했다.

“박사님을 지켜야 해.”

“—어차피 위쪽에서도 그걸 고려하긴 할 거예요.”

재준은 괴수학 박사임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가이드 중 가장 높은 등급이다. 무슨 상황에서든 지켜야하는 사람이긴 했다. 게다가 지승운과 페어이니 이능청에서도 떼어낼 명분은 없었다. 오히려 같이 보낸다면 모를까. 하지만 최전선으로 보내기엔 위험했다.

“카트린에 대한 정보는 입수 중이라.”

“밀레니엄이 되기 전에 죽은 사람이잖아요. 그래도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금방 얻겠죠.”

“확실한건 A급이라는 것 정도겠죠.”

태환과 경민이 이어 말했다. 카트린 두자당은 당시에도 등급이 높은 에스퍼였다. 그녀의 능력을 보고 다들 에스퍼는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착각했던 때가 있었다.

A급 에스퍼는 A급 괴수를 죽일 수 있다는 뜻.

그렇다면 A급 에스퍼가 괴수가 된다면.

“최초의 에스퍼이자, 최초의 S급 괴수가 됐을까요?”

태환의 말에 승운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에 S급 에스퍼는 총 세 명 있다. 한명은 지승운이고, 다른 한명은 그의 모친인 한영애 차장이다.

그리고 마지막 인물은…….

“내가 아니어도 다른 곳은 안전할거야.”

애초에 그녀가 원하는 게 과연 다른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 사이 다시 알람음이 울렸다. 재난문자였다. 예지는 랩탑에 뜬 새로 온 메일을 확인했다. IPMC에서 비행종 괴수 전문가에게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재준과 예지도 해당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리예 아예르라면 다르다.

재준은 자신이 시어샤에게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그녀는 아직 메일을 열람하지 않았다.

시어샤가 그걸 보고 답을 할지, 답을 한다면 어떤 답을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하늘은 아직 어둡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칠흑같은 암흑에도, 바닥에 내려앉는 차가운 공기와 습기가 곧 아침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듯 했다.

*

물 냄새가 난다 했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른 새벽 맡았던 물 냄새는 새벽 대지로 가라앉은 차가운 공기가 아니라 비 냄새로부터 기인한 듯 했다.

포털의 기사들의 논조가 좋지 않다.

비행종 괴수의 이상 폭주에 대한 기사들, A급 이상의 에스퍼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냐는 의문 제기. 그 중에는 S급 에스퍼가 이런 때에 굳이 에스퍼들이 많은 강원도에 있어야하냐는 논조도 있다. 이미 두 명의 에스퍼가 수도권에 있는데도 저런 기사가 나온다는 것은 그들이 지승운이 역시도 자신들의 도시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겠지.

“비가 와서 다행입니다.”

재준이 말했다. 비가 오면 비행종 괴수들의 움직임이 잦아든다. 지금이 겨울이었다면 오히려 그들의 처리는 더 쉬웠을 것이다. 괴수도 한계는 있으니까.

역시 화분들은 들여놔야겠군.

재준이 마당에 줄지어 있는 괴수 화분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근원이 식물이라고 비를 맞자 활기가 보인다. 그것도 얼마 가지는 않을 것이다. 가을은 금방 지나가고 곧 겨울이 올 테니까.

재준이 안으로 들어오자 통화하고 있는 승운의 모습이 보였다. 예지는 손님방에서 자는지 보이지 않았다. 승운은 들어오는 재준과 눈이 마주치자 사르르 웃어보였다.

“상황은 어때?”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듯 검지를 올리는 행위에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속 거기에 있으면서 소식 전해줘. 박형기 박사도 족쳐—… 조사해보고. 박요한 가이드보단 그쪽이 아는 게 더 많을 거야. 아니, 중요한 건수 나올 때만. 내가 연락 못 받으면 문자로 넣어주고. 그래, 수고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재준을 살핀 승운이 통화를 끊고 천천히 다가왔다.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재준은 제 앞에 선 승운을 보며 “잘 해결됐습니까?” 하고 물었다.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권 쪽으로 TF팀을 꾸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가만히 재준을 바라봤다.

“비가 오네요. 우산 쓰고 다녀오시지.”

“기껏해야 마당까지만 나갔다 온 건데요.”

물방울 조금 튄 걸로 유난일 필요는 없었지만 승운은 그런 것조차 안타깝다는 듯 머리카락에 걸려있던 물방울에 손을 갖다 대려 하는 순간 아래로 또르르 흘렀다. 뺨에 내려앉은 액체를 손가락으로 슥 훑은 승운이 웃었다.

“무슨 생각해요?”

“그냥. 어떻게 비행종 괴수들을 그렇게 순차적으로 바꿨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탄 것도 아니고.”

“물— 같은 것도 아니겠죠?”

“예, 유전자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뭔가 매개가 필요하기 마련인데.

그런데 카트린 두자당의 능력이 뭐였지? 재준은 카트린 두자당을 잘 알지 못한다. 아직 인간이었을 때도, 괴수가 된 지금도.

승운은 재준의 침묵에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태환에게 다가섰다. 태환이 내미는 패드에 테러 조사표가 있다.

국가에서는 이것을 테러로 구분할 생각인 듯 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를 괴수로 구분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그들이 사람이었다는 것은 세상에 공개하지 말아야 할 것이었으니까.

“오늘 새벽 정상들끼리 화상회담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맞춰서 준비할 거예요.” 태환이 말했다.

“미국은 소강인가?”

승운이 반문했다.

“예, 아무래도. 근데 지금 영국 쪽은 꽤 힘든 것 같던데요. 아시아는 그렇게 심하지 않습니다만 우린 이제 시작이니까요.”

“카트린 두자당에 대한 건?”

“아직까지는요. 아, 위에서 박사님 보호를 우선으로 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형기 박사도 괴수학자다 보니까 지금 당장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의견을 내서, 국민을 안심시켜 줘야한다는 여론이 있나 봐요.”

“위에선 반응이 어떤데?”

“반대가 다수의견입니다. 다만 행정부에서 그러면 대체할 만한 사람이라도 내세우라고 주장해서.”

그렇게 말한 태환이 힐끗 재준을 바라봤다. 얼굴마담이 필요한데, 저쪽이 쉽게 응할지는 모르겠다. 응하는 건 둘째치고 애초에 좋은 대상도, 또 쉬운 상대도 아니었다. 태환이 승운을 바라봤다. 우선 이쪽부터 통과시켜야하는데.

“안 돼.”

“이능청도 같은 생각이긴 합니다. 근데 현 박사가 이능청에도 소속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본 기관은 괴수연구소다보니까. 거긴 대통령 직속이잖아요.”

“연구소에 다른 사람들 많은데 왜.”

“우리나라에 괴수박사는 세 명 뿐입니다. 그 중 한국에 있는 사람은 박형기 박사와 현재준 박사뿐이고요. 볼리비아에 있는 사람한테 방송에 나가라고 할 순 없잖아요. 거리도 있고, 지금 항공편 결항도 많은데.”

“전 상관없습니다.”

“…….”

제가 상관있어요, 박사님.

승운은 대외적으로 재준의 모습이 공개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누가 혹시나 그걸 보고 다가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물론 뭐가 됐든 자신이 이기겠지만 그래도 제 보물을 누군가가 쳐다만 보는 것조차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안 드러내는 게 좋겠지.

승운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밖은 위험해요. 그나마 이곳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고 제한되니까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방송국 까지 이동하기엔.”

“화상으로 되지 않습니까?”

아, 그거.

그래. 그거면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아는 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괴수박사로서 뭔가를 알리고 궁금증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면 저는 그걸 거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거 좋네요. 화상 인터뷰가 있었지. 볼리비아에 있는…… 무슨 박사죠? 이 박사님인가?”

“이정은 박사님이요. 하지만 볼리비아와 한국은 시차도 있고 서식하는 괴수 종이 다릅니다.”

어떻게 해서는 방송출연인지 뭔지를 막아내고자 했는데 재준이 그걸 방해한다.

“뭘 그렇게 불안해 하냐. 너도 같이 나오든가. 시청률 좋겠네.”

그런 승운을 향해 이경원이 말했다. 화장실에서 막 나온 경원은 덜 마른 머리를 툴툴 털었다. 옷은 이미 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난 위쪽 소집이야. 이경민 필요 없으면 데려간다?”

“대장, 나 필요 없어요?”

이경민 에스퍼는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형은 당 중독 같더니, 동생은 폰 중독 같았다.

“……올라가 있어. 필요하면 부를게. 넌 왜 소집이야?”

“취조. 머릿속이나 들여다보라 이거겠지. 애초에 내 주 전공이 머릿속을 헤집는 거긴 해도 그렇게, 샅샅이 들여다볼 수 없단 말이야. 조작이라면 모를까.”

“조작해서 널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그 장소도 그들에게 익숙한 곳으로 여기게 하고.”

“현장 뛰는 놈들은 뭔가 다르다니까. 같은 편으로 만든다. 괜찮네.”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이경원에 대한 살의가 끊이지 않겠지만 뭐. 그럼 자신에 대한 기억까지 지워버리면 되겠다고 생각한 경원은 창밖을 한번 바라보고 재준을 바라봤다. 재준이 왜 그러냐는 얼굴을 했다.

“서울까지 몇 시간 운전해 가야하는데 뭐 주의할 건 없습니까? 괴수들이요.”

“비가 오니까 별 문제 없을 겁니다. 다만 괴수가 나타난다면 아마 저공비행 중일 테니까, 웬만하면 정면을 기준으로 사방 주시가 나을 겁니다. 위쪽보다는.”

재준이 말했다. 경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제 동생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이런 건 몸 쓰는 에스퍼의 일이니까. 경원이 “충고 고마워요.” 라고 말함과 동시에 손님방 문이 열렸다. 예지가 하품을 하며 손님방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좋은 아침이요. 어디 가세요?”

경원을 슬쩍 바라보며 물은 예지가 재준을 향해 “우리 오늘 출근 안하는 거 맞죠?” 물었다.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집이요.”

“아아, 잘 다녀오세요.”

하나도 관심 없다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인 예지가 재준을 향해 케틀벨 없어요? 라고 물었다. 예지의 아침에는 격한 운동이 필수였다. 케틀벨은 커녕 덤벨도 없다는 재준의 말에 하등 도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은 예지는 결국 거실 한 가운데 서서 맨몸 스쿼트를 했다. 자신에게 시선이 몰리자 “아, 전 신경 쓰지 마세요.” 말하는 모습에 다들 신경 안 쓸 수 있겠냐는 생각을 했다.

경원은 여전히 소파에 누워있는 제 동생을 툭툭 쳤다.

“야, 가자. 지승, 도착하면 전화한다. 태환이는 방송 건 협상 잘 해보고, 박사님도 생각 바꾸지 마시고요. 유예지 연구원은…… 운동 열심히 하세요.”

경원의 인사에 예지가 손을 들어올렸다. 나름의 루틴이 있는 건지 스쿼트를 끝내나 싶더니 점핑잭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예지를 조금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 경원은 밍기적거리며 일어나는 제 동생의 목덜미를 잡고 끌었다.

빌린 우산을 함께 쓰고 나가는 형제의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재준이 고개를 돌리자 예지는 플랭크로 넘어간 듯 했다. 무슨 생각인지 태환 역시 그 옆에 서서 같이 플랭크를 하고 있었다.

저들 틈에는 끼고 싶지 않았다.

재준이 주방으로 가자 승운이 그의 뒤를 따랐다.

“커피? 아니면 차가 좋습니까?”

“커피요. 제가 내릴게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커피를 꺼냈다. 그동안 어떤 물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가 만들어지는지 검색해본 승운은 나름 경도까지 맞춰서 만들어낸 물로 커피를 끓여냈다.

역시 원소 에스퍼들의 능력이 탐난다니까. 그 중에서 물이 제일 탐났다. 불도 좋지만, 물이 여러모로 유용했다. 사람은 물 없이 살 수 없으니까. 맞춰둔 타이머가 울리자 예지와 태환이 동시에 일어났다.

제 자리인 것 마냥 식탁에 다가와 앉은 예지에게 먼저 커피를 준 승운은 이어 재준에게도 컵을 건넸다. 태환은 알아서 제 커피를 따랐다.

“비 오는 날 달리는 거 참 좋은데 괴수가 있어서 안되겠죠?”

“오늘은 재택근무야. 일 끝내고 달려. 김태환 에스퍼, 오늘 예지 달릴 때 호위 좀 해주세요.”

“……저 나름 능력 좋은 에스퍼인데 이렇게 써도 됩니까?”

“해줘. 너도 겸사겸사 달리다가 와.”

그냥 두 사람만 있고 싶다는 의미 같은데, 모르는 척 하고 나갔다 와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일 끝나고 달리라는 거 보면 당장 둘이 있겠다는 뜻은 아닐테고.

“그런데 카트린 두자당의 능력은 뭐였을까요?”

재준이 말했다. 승운이 재준을 바라봤다.

그걸 왜 묻냐는 듯한 얼굴이 이내 굳어갔다. 마치 두 사람의 생각이 겹친 것처럼, 승운이 “어?” 하고 멈칫하더니 입을 굳게 다문다. 태환이 “왜요?” 물었다.

“아니.”

이 사태가 카트린 두자당으로부터 일어났다면, 그녀의 능력이 동시다발적으로 특정 괴수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어떤 방법으로?

아니, 그녀는.

“카트린 두자당은 지금 어떤 괴수죠?”

모른다.

그녀가 어떤 괴수인지.

“김태환, 당장 카트린 두자당의 자료 부탁해.”

“알겠습니다.”

“전 온라인에 자료 남아있나 검색 좀 해볼게요.”

예지가 말하며 랩탑을 열었다.

많지는 않지만 분명 남아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사진 하나 남아있지 않네요.”

“정보가 아무것도 없어?”

“아뇨, 있긴 한데 그냥 우리가 아는 상식선에서만 있어요. 무슨 계열의 에스퍼인지도 없고.”

“에스퍼의 계열을 구분한건 90년대 중반에 있던 일이니까 정부 자료에는 남아있을 겁니다. 카트린 두자당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 했었…….”

“카트린 두자당이 참여했다고요?”

“여기 학위는 나오네요. 카트린 두자당은 생물학과 출신이었어요. 여기, ISE에 있었다고 나와 있어요.”

“진화과학연구소Institut des Sciences de L'évolution 출신.”

정작 원했던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새로운 정보에 재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스태그비틀에 있던 건 아닌가보군요.”

적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

잠피레스쿠 박사와는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 유럽의 괴수종 중 하나인 GEFF종—보통명 가고일은 날짐승이긴 하지만 피부가 돌처럼 단단하다.

“천산갑 쪽?”

“비늘이 아니잖아. 오히려 질긴 가죽을 생각하면 코뿔소 쪽이 아닐까?”

“확실히 뿔 달린 쪽도 있으니까요. 가고일 가죽이라. 상품화 하면 좋지 않을까요? 흠집도 잘 안 나고.”

“아무래도 보호 종이라.”

“애초에 괴수 보호 종을 만든다는 게 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며 예지는 사진 속 가고일을 바라봤다. 희귀종인데다 요즘은 보기 힘든 괴수종인데 이번 비행종 괴수들의 폭주 때 그간 보이지 않던 가고일이 나와 괴수학자들이 신이 나서 잡았다고 전해 들었다.

“코뿔소는 못 날잖아요.”

태환이 말했다. 예지가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얼굴을 했다.

“애초에 날짐승이 말과 같은 종류일리 없죠.”

그럼 왜 코뿔소니 천산갑이니 이야기 한 거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괴수학자들 특유의 유머 같은 걸까? 그런 게 유머라면, 태환은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전 박쥐 쪽으로 걸래요. 박사님은요?”

“난 두더지 쪽.”

“날개가 없잖아요.”

“날개 없는 가고일도 있어. 아마 어떤 형태로 1차 때 발현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그거 연구해볼만 한데요? 유전자 분석 결과 나오면 공유해달라고 해야지.”

“벌써부터?”

“몇 개월 안 남았으니까 지금부터 해줘도 되지 않을까요?”

“그건 연구소 의지에 따라 달라서 난 뭐라고 말을 못해주겠네.”

재준이 말했다. 그나마 친한 괴수학자들끼리 서로 정보 공유를 하고 있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여전히 시어샤와 에르난데스에게는 연락이 없다.

보리스는 남극에 있는데 그쪽은 피해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호주 연구소에는 피해가 있다. 그렇다면 해류나 기류는 아닐 텐데, 사람이 직접 옮겼다고 여기기엔 너무 이상하다.

괴수들? 그들이 조직화되기라도 한 걸까?

“박사님, 시어샤는 아직이에요?”

“응, 아직이야. 혹시 카트린의 정보는 나왔습니까?”

“이것저것 오긴 했는데 카트린 두자당의 계열이 뭔지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정신계는 아닌 것이 확실하고, 물리계 아니면 원소계인데……. 물리계에 더 가까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카트린이 상대한 괴수들의 사체 사진들을 보면요.”

승운이 말하며 태블릿을 내려놨다. 괴수 사체들의 사진이었다. 생전의 모습으로 꿰매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토막난 상태였다. 이걸 어디에서 어떻게 받아 온 건가 싶은 사진이다. 밑에는 카트린 두자당의 서명이 있다.

“에스퍼들은 자신이 죽인 괴수 자료에 서명을 하거든요. 그러면서 대충 파악한 등급이나 능력, 약점 등등을 기록합니다. 정보 보존 목적도 있고, 실적이나 수당과도 연관이 있어서요. 카트린 두자당의 서명이 남아 있는 자료로 찾았죠.”

“합법적인 거였죠?”

재준이 혹시나 싶어 물었다.

“…….”

대답이 없는 거 보니 더 묻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그나저나 깔끔하게 잘렸네요.”

어떤 계열이길래 이렇게 자를 수 있는 거지? 이 단면만 보고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에스퍼들이 잘 알지 않을까 했는데 승운도 태환도 달리 짐작은 못하는 듯 했다.

“일단 저는 이렇게 자를 수는 있습니다.”

“…….”

“하지만 그때 만나본 카티야… 카트린은 물 계열이 가지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좀 기묘한게, 정통적인 계열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제가 본 적 없는 계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희귀한 계열일 수 있다는 겁니까?”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많은 에스퍼들과 일 해본 게 아니라서. 게다가 흔한 계열도 레벨이 높게 되면 활용도가 다르거든요.”

승운이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보통 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렇겠네요.”

딱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진 않았겠지.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희귀한 건 아닐 거라고 승운은 말했다. 희귀한 계열이라면 이미 공개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공개되지 않은데다 온라인상에서 정보가 사라진 거 보면 없어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평범한 계열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평범하다고 해도 등급이 높으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지승운 역시 평범한 물 원소 계열 에스퍼지만 S급이라는 것 때문에 다르게 취급되는 것처럼. 물론 자신에게는 복합계열이라는 희귀한 형질이 있긴 했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재준이 “그러면—.” 하고 말을 잇다가 멈췄다. 알람음에 또 재난문자인가 했는데, 전화였다. 시어샤의 이름이 뜨자 재준은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말하고는 서재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재준을 보며 태환이 “어어?” 했다.

“박사님, 인터뷰!”

얼마 안 남았는데……. 재준이 잠시면 된다고 말하며 문을 닫았다.

“시어샤.”

[카트린 두자당이—.]

“예, 살아있습니다. 저도 잘 지냈고요.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습니다. 지금 카트린 두자당이 살아있다고 하셨나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

“혹시 당신이 그녀를 도왔습니까? 돕지 않았더라도, 알고 있었습니까?”

[박사님.]

“구글에 검색해보니 카트린이 진화과학연구소에서 일을 한 적이 있더군요. 멜라니가 그러했듯이.”

시어샤는 말이 없었다. 그게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다.

“멜라니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면, 당신과도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재준은 긍정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알고 있었습니까?”

[저는—.]

“그녀가 멜라니 라제쉬를 죽이려고 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뭐라고요?]

반응을 보니 이것까지는 몰랐던 것 같다. 그러면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은, 멜라니 라제쉬는 카트린 두자당이 카티야로서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카티야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이유를 알고 있을까?

[잠시만,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멜라니가 물었다.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벌어진 문틈 사이로 승운이 보였다.

“박사님. 곧 전화 연결 될 겁니다.”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한 시간 뒤 쯤 괜찮습니까?”

[……한 시간 뒤에 제가 전화 드리죠.]

시어샤가 말했다.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카트린 두자당은 한국에 있습니다.”

재준이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뭔가 말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보다 더 빨리 통화를 끊었다. 다시 걸기에도 애매해서 재준은 떨떠름한 얼굴로 서재 밖으로 나왔다.

정확히 인터뷰하는 방송국이 어느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태환은 공영방송 중 하나라는 말을 했다. 원래는 영상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지승운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마저도 서면 인터뷰는 안 되냐, 저 목소리를 들었다가 누군가가 반하면 어쩌냐 하는 개소리를 태환은 무시했다. 어차피 저 상태라면 영상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재준을 노리는 사람은 기껏해야 그 연구를 반대하는 사람들, 혹은 괴수들일 것이다. 거기까지 말이 나오자 그러니까 모습을 노출시키면 안 된다는 말이 나왔다. 지승운의 주장은 대충 먹혀들었다. VIP의 모습이 드러나서 좋은 것은 없으니까.

“어서요.”

태환이 재촉했다. 인터뷰까지 3분이 채 남지 않았다. 승운이 재준에게 물 컵을 건넸다. 손에 컵의 표면이 따뜻했다. 물을 한 잔 마시자 태환은 음소거를 풀고 재준에게 넘겼다.

‘—그러면 다음으로 괴수학 박사이신 현재준 박사님의 인터뷰 연결드리겠습니다.’

조금은 어색하고 민망했다. 재준이 괜히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는 않은 듯 했다.

‘현 박사님?’

“예.”

‘인사 한 마디 해주시죠.’

“현재준 박사입니다.”

‘……예, 우선 지금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 한 말씀 여쭙고 싶습니다. 전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괴수의 폭주가 일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괴수의 폭주는 일괄적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특정 괴수종— 비행종만이 폭주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외의 괴수종에게서는 일괄적인 폭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비행종만 폭주를 일으킨다는 말씀입니까? 그럼 국민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일반인들은 정부에서 권고한 대로 외출을 자제하고 집 안에 머물며 사태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먼저 이 사태가 일어난 미국의 경우, 초기 발생 시기에 비해 지금은 사태가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추가적인 폭주가 없다면 기존에 폭주한 괴수들을 에스퍼들이 처리하면서 사태는 점점 나아질 겁니다.”

‘괴수의 폭주가 일괄적이지 않다고 하셨고, 특정 괴수종에게만 폭주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제주에서는 비행종이 아닌 다른 괴수에 의한 에스퍼 순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이 될까요?’

“제주에서 있었던 것은 비행종 괴수의 폭주와 무관합니다. 아시겠지만 봄과 가을철은 괴수의 폭주 및 번식이 빈번한 때입니다. 다만 제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가해 괴수종에 대해서는 보고 받은 바가 없으므로 의견을 낼 수 없습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폭주하는 비행종 괴수들은 주로 어떤 식으로 나타납니까? 피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요.’

“비행종 괴수들은 날짐승과 많은 근간과 특징을 공유합니다. 즉 대부분의 날짐승처럼, 비행종 괴수 역시 대기 중의 습도에 영향을 받습니다. 오늘과 같이 비가 올 때면 낮게 날게 되는데, 도심지는 복잡해서 거대한 크기의 괴수들이 저공비행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괴수가 당신을 발견했다면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산에서 금수를 만나는 것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권고대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상황이 끝나길 기다리시라는 것뿐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괴수종의 연쇄적인 폭주 말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우리가 바로 잡을 방법은 없습니까?’

“바로 잡는 법은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연구 결과가, 과학자들의 주장이, 괴수학자들이 이미 수없이 언급했던 일입니다. 모든 것은 기후 변화로 일어났습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원을 낭비한 결과입니다.

기후 변화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이전에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괴수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영구 동토층에 갇혀있던 원시 바이러스가 다시 자외선, 산소, 열에 노출됐을 때 감염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또다시 연구하게 되겠죠. 혹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동토층이 팬데믹의 발원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괴수종은 남극에 제일 많습니다. 그 다음이 북극입니다. 극한의 삶에 적응한 독특한 종들이 폭주를 일으키게 된다면 아마 인간은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고, 우리가 만든 세계를 부정하며, 나아질 것이라는 제법 순진한 방향으로 보고 있죠.

바로 잡는 법. 그것 역시 원인을 알아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폭주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든 것은 역시 인류의 나쁜 습관과 인적 오류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자연계가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나 널려있으며, 괴수 또한 그 여파인 겁니다. 우리는 그들과 공존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더 이상의 방법은 없습니다.”

인터뷰어가 침묵했다. 재준이 말했다.

“이게 제 제언입니다.”

*

허이고, 국민 안심은 무슨.

지구 온난화는 가짜라든가, 발생한 지 몇 십 년이나 된 괴수가 왜 우리 책임이냐는 댓글들을 본 예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사님, 안티 엄청나겠는데요.”

“누리고 살았던 사람으로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보단 낫지.”

“박사님 정도면 그렇게 누리지도 못했을걸요.”

“우리도 일조하고 있잖아.”

재준의 말에 예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보기 싫다고 외면하면 더 끔찍한 미래만 올 뿐이야.”

“뼈가 있는 말이네요.”

누구를 대상으로 해도 통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재준이 이 말을 가장 하고 싶은 상대는 시어샤였다.

데스크탑 오른쪽 위에 전화가 온다는 알람이 떴다. 시어샤의 이름을 본 예지는 서재 밖으로 나왔다.

태환은 식탁에 기대서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금 있었다고 제 집처럼 편하게 있는 모습을 본 예지는 그대로 식탁 의자에 앉았다. 불편하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였지만, 거실에 있는 의자들이 더 불편했다.

“커플끼리 욕을 쌍으로 먹네요.”

그렇게 말한 태환이 자신이 보고 있던 사이트를 들이밀었다. 승운이 피식 웃었다. 욕먹고도 좋다고 웃는 미친놈인지, 아니면 저와 재준을 커플이라고 칭해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승운 에스퍼 찾는 기사들도 많네요.”

“대장이야 뭐, 사랑받는 만큼 욕도 먹으니까요. 비단 대장뿐만 아니라 에스퍼라는 직업이 그렇죠.”

“공개적으로 활동하다보면 그런 일도 있는 거죠. 취조는 아직 안 끝났나? 연락이 없군.”

승운이 핸드폰을 확인하자 태환도 마찬가지로 제 폰을 확인했다. 둘 다 온 내용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끝냈을 땐데 아직인 거 보면 아는 게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태환이 말했다.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분명 결과가 나오고도 남을 정도로.

정말 박형기 박사는 아무것도 모를까? 하지만 그들의 재단이나, 그가 초대한 사람들을 보면 연관성은 있었다. 어떤 연관성? 괴수들이 민영화를 원하기라도 하는 걸까? 무엇을 위해?

하지만 섣부르게 추측하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그저 쓸 만한 것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승운은 서재 쪽을 바라봤다. 서재 안쪽에서는 재준의 목소리가 들린다. 간간이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통화 특유의 진동음 때문에 뭉개지듯 들렸지만, 그들이 대충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지 에스퍼인 지승운은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태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스퍼들은 능숙하게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는 척 넘겼다.

“내일은 정상 출근이래요.”

예지가 말했다. 아, 하루만 더 재택근무 하면 휴일인데, 너무 아까웠다. 일이 좋은 것과 별개로 출근이 싫은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많이 사냥했나보네요. 빠르네. 다른 나라는 이렇게까지 일찍 정상화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생활하는 정도에 문제가 없을 정도는 한 것 같아요. 원래 이런 거 빨리 하잖아요. 내일 출근 귀찮긴 한데, 일단 가서 괴수들 좀 잡아야죠. 희귀 비행종이 나타났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한 예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제 랩탑을 열었다. 그러고는 일을 할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운동 루틴 동영상을 튼 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다시 하체운동을 시작했다.

***

재준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영상통화였다. 마주한 얼굴이 서로 불편한 듯 했다. 이곳은 낮이었지만 그곳은 아직 새벽에 가까운 아침밖에 되지 않은 듯 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시어샤가 말했다.

[알고 있었습니다.]

역시 시어샤가 카트린 두자당을 도와 카티야로 만든걸까? 어떤 식으로 질문을 해야 하던 재준은 상황을 더 명확하게 해야겠다 생각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으셨습니까?”

[카트린이 죽지 않았다는 것.]

“멜라니 라제쉬를 공격한 게 카트린이라는 것은 모르셨습니까?”

[안 그래도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없군요.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한 거죠? 멜라니를 그렇게 만든 게…….]

“멜라니 라제쉬 본인.”

[……그럴 리가 없어요.]

“얼마 전에 멜라니가 잠시 깨어났다고 했습니다. 리처드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거예요.”

[그게 가능할 리가.]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재준이 물었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시어샤의 두 눈이 흔들렸다. 재준이 “시어샤.”하고 이름을 부르자 깊은 한숨을 내쉰 시어샤가 머리를 짚었다. 그러고는 믿지 못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당신이 카트린을 카티야로 살 수 있게 도와준 겁니까?”

[제가 아닙니다.]

표정만으로 봐서는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멜라니가 도왔죠.]

“…….”

이번엔 재준이 입을 다물었다. 분명 카트린 두자당이 카티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누군가가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조력자가 멜라니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왜?

왜 멜라니가 괴수를 도왔지?

그리고 왜 괴수가 된 카트린 두자당이 이십여 년이나 지난 다음에 멜라니를 공격한 거지?

[카트린은 우리 편이에요.]

“우리 편?”

재준이 허탈한 듯 웃었다.

“우리의 기준이 뭡니까?”

시어샤는 답하지 못했다. 그저 곤란해 보이는, 혼란스러운 듯한 시선으로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만 보였다. 재준이 알고 있는 것과 시어샤가 알고 있는 것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카트린의 입장 역시 다를 것이다.

어디가 진실인지 모르겠다. 모두가 자신만의 진실과 사정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만 진실인 사항은 타인에게까지 당위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멜라니 라제쉬를 죽일 뻔 했습니다. 리처드 라제쉬는 산채로 죽어가죠.”

재준보다 시어샤가 그 상황을 더 오래 봤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곳에서 떠난 지 몇 년이 됐고, 시어샤는 재준보다는 자주 그녀를 방문하니까.

“그리고 연구는…….”

재준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연구는요, 시어샤. 그대로 끝날 뻔 했습니다. 적어도 멜라니는 그걸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 역시 그 연구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바가 크지 않았습니까.”

중단된 연구를 재준과 시리예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새로 시작하겠다는 말에 기뻐한 것은 시어샤였다. 오히려 리처드 라제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좋아하지도 않고 내키지 않아하지도 않은 얼굴로 리처드는 열심히 해보라는 말을 했다. 그에게는 연구 따위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멜라니가 그렇게 되었으니.

“그리고 모니카 살레는.”

[그건 IPMC에서 처리할 것이 아닙니다. 괴수학회의 일이죠. 그리고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시어샤가 재준의 말을 끊고 말했다. 알아보겠다는 말을 했던 것은 그냥 예의상이었을까.

“모니카 살레에 대한 것은 더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녀가 빼돌린 보고서가 공개되었을 때, 그리고 각국 정상에 알렸을 때 저는 이 문제가 잘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어떤 파생적인 피해가 일어난다면 그건 시리예나 저에게 일어날 것이라 여겼죠.”

[하고 싶은 말의 의도가 뭔지 알 수 없군요. 부가적인 피해가 박사나 아예르 박사가 아닌 다른 곳에 일어났다는 겁니까?]

“지금 일어나는 일이 카트린과 아무 연관이 없는 것이 확실합니까?”

[지금 일어나는 일이라면, 괴수의 폭주 말씀입니까?]

“예.”

시어샤는 다시 침묵했다. 재준이 던지는 질문마다 예상하기 힘든, 혹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질문뿐만 아니라 그가 알려주는 정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CRO회사에 있고, 진화과학연구소에 있었으며 생물학을 전공했고 괴수와 에스퍼 생태에 대해 어느 정도 알죠. 게다가 지금 벌어지는 이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시어샤는 온전히 부정할 수도 없었다. 명분은 없지만, 카트린이라면 가능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적어도 저는 알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이 상황에서 가장 위험해지는 건 저 일테니 말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만큼 알고 있지 않습니다. 저보다는 리처드 라제쉬가 더 카트린 두자당에 대해 잘 알 겁니다.]

“리처드 라제쉬? 라제쉬 박사님이요?”

[물론 저는 카트린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상했다. 왜 시어샤는 그녀를 그렇게까지 신뢰하는가. 그녀가 에스퍼라면 괴수를 신뢰하거나 믿을 수 없다.

근데 왜 카트린은 다르지?

[그 연구를 시작한 건.]

왜 카트린이 카티야라는 걸 숨겨줬지?

[에스퍼의 괴수화 기전을 알아내고자 했던, 연구 주제 자체를 제안한 건 카트린이었습니다. 괴수가 된 이후의 카트린 두자당과 리처드 라제쉬. 그리고 멜라니.]

“…….”

이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재준이 할 말을 잃은 듯 화면 너머의 시어샤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올려 턱을 쓰다듬었다.

[이 연구 자체가 카트린 두자당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된 건데, 그녀가 연구를 무산시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카트린이 멜라니를 공격했다는 것조차도 믿을 수 없습니다. 카트린이 왜 그런 짓을 하죠?]

그러니까.

이 연구가 카트린 두자당으로부터 시작했다면 왜 그녀가 멜라니를 공격했을까? 그리고 왜 한국에 왔을까? 왜 자신에게 와서 명함을 건네며 스카우트를 하려고 했을까? 루카스 영은 떠났는데 왜 그녀는 떠나지 않았을까.

“시어샤, 혹시 헤라클레스 프로젝트라고는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요. 그건 뭐죠?]

“아닙니다.”

어쩌면 IPMC의 정보가 생각만큼 좋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시어샤는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제가 답해줄 수 있는 질문이라면요.] 하고 벽을 세웠다. 재준이 문제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은 아니었으니까.

“카트린 두자당은 어느 계열의 에스퍼였습니까?”

재준이 물었다. 시어샤는 생각지도 못한 듯한, 그러나 정말 별거 아닌 질문에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시어샤가 말했다.

[바람.]

원소 계열 에스퍼라.

재준이 괴수 사체를 찍은 사진들을 떠올렸다.

그 단면은 바람으로 잘라낸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바람이라면…….

*

서재 밖으로 나왔을 때는 별다른 광경이 펼쳐져있지는 않았다. 예지는 왠지 모르겠지만 다시 플랭크를 하고 있었고, 승운과 재준은 식탁에 앉아 태블릿을 보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카트린은 원소 계열 에스퍼입니다. 바람— 인데.”

재준이 말하며 식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다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다 들으셨겠군요.”

이제야 에스퍼들 귀가 밝다는 걸 인지했나보다. 종종 잊는 듯하더니 말이다.

“바람이라고 하면 납득이 가네요. 결국 비행종 괴수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까지도.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몰라도 웬만큼 조절할 수 있지 않습니까? 기류까지는 못해도.”

“저도 아마 그 영향이 없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동쪽으로 꾸준히 이동했다는 게 이상하긴 한데.”

“동료가 있을지도 모르죠!”

예지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때 이곳에서 괴수학자들을 습격했을 때처럼 다른 괴수들을 포섭했을 수도 있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예지가 컵을 꺼내 물을 따랐다. 지승운이 이곳에서 살다시피 한 이후로는 냉장고에 생수가 있었지만 예지도 재준도 상온 물 밖에 마시지 못하는 타입이어서 하나는 꼭 상온에 보관되어있었다.

물을 단숨에 마신 예지가 숨을 몰아 내쉬고는 “이야, 맛 좋다.”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것도 있군.”

재준이 말했다.

“괴수가 포섭 가능하다는 걸 알면 다들 무서워하겠군요.”

“괴수가 아니라 에스퍼를 무서워할지도 모르죠.”

그 사실을 에스퍼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승운도 태환도 여상한 얼굴이다. 자신들에게 올 시선에는 아랑곳 않는.

오히려 재준이 불안한 얼굴을 했다.

승운은 그런 재준의 손을 잡았다.

아, 또 못 볼 꼴 보겠네. 예지가 알아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환도 마찬가지였다.

눈치들 빠르긴. 생각해보면 이 자리에서 눈치가 제일 없는건 재준일지도 몰랐다. 승운이 잡은 손을 조물조물 주물자 재준이 피식 웃었다.

“왜요?”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너 처음 봤을 때도 이렇게 손을 주물거리더라고.”

내가 언제 그런……. 승운이 결코 좋지 않았던 첫인상을 떠올렸다. 아니, 좋지 않을 리가 없지. 분명 예쁘다고 말했었던 것 같다. 상황은 좀 이상했지만, 아무튼 그때 재준이 저보고 예쁘다고 했던 건 확실했다. 승운이 배실배실 웃었다. 그런데 재준의 손을 이렇게 잡고 주물렀던 적은…….

“……아니에요!”

“뭐가?”

다른 사람 손을 주물렀던 적은 있었다. 그것도 연구소에서. 사방이 유리벽인지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쉽게 손만 주물렀는데, 그게 현 박사는 아니었다.

“저 박사님밖에 없어요!”

“알고 있어요.”

재준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냥 생긴 건 예쁜데 행동이 좀 변태 같다는 생각을 했었거든.”

“…….”

변태…….

변태 같아 보이긴 했겠지. 그때는 그렇게 절박했으니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 절박하고 어떻게 그렇게 타인에게 매달릴 수 있었을까. 승운은 마주잡은 재준의 손을 쓸었다. 거친 남자의 손이다. 건조하고, 딱딱하고, 체온이 높다.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었던.

“싫어요?”

“좋아.”

재준은 제 손을 만지작거리던 승운의 손에 깍지를 꼈다.

“하지만 참자.”

이렇게 손이 얽혀드는데 가만히 참고 있으라고? 무슨 고문도 아니고. 안 그래도 며칠간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몸을 맞대지 못했다. 체온 정도로는 부족했다.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족되긴 했지만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충족시킬 만한, 좀 더 자극적이고 열락을 가져오는.

“입술만.”

승운이 낮게 말했다.

재준이 피식 웃으며 쪽 하고 제 입술을 맞췄다. 승운이 원하는 대로 입술이 스치긴 했지만, 이런 걸 뜻하는 게 아니었다. 아마 다 알고 있으면서 가벼운 키스를 한 것이겠지.

“조금만 더요.”

승운이 몸을 틀며 재준의 허리에 제 손을 둘렀다. 그걸로도 부족한지 의자를 끌어당겨 몸을 밀착시켰다. 얽힌 다리가 샅에 닿았다. 재준이 몸을 움찔하자 오히려 승운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좋아해요, 박사님.”

심장소리가 들린다. 에스퍼만큼 감각이 발달한 게 아닌데도, 재준은 승운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목 언저리, 허리를 감싼 뜨거운 손, 맞닿은 어딘가에서 맥박 치는 진동이 들려왔다. 동시에 무릎에 닿는 부푼 물건에도 묘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조금만 참아.”

재준이 손을 등에 둘러 토닥였다.

“나도 참고 있으니까.”

그 말에 승운이 몸을 확 떼어냈다. 왜 그러냐는 얼굴로 보자 붉게 변한 뺨과 귀가 보였다.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열이 오른 것처럼 홧홧하게 닳아 올라 있었다.

이대로 두기엔 아까운데. 그렇다고 사람들이 있는데서 뭔가를 할 수도 없고. 재준이 아쉽다는 듯 승운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펄쩍 뛰며 도망치듯 하던 승운은 뭔가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재준의 손에 제 얼굴을 내줬다. 재준이 손이 천천히 목덜미로 내려갔을 때, 벌컥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아무렇지 않게 손을 뗀 재준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승운 역시 별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귀는 여전히 열이 몰린 것처럼 붉다.

“대장.”

태환이었다.

“취조 끝났다고 합니다. 곧 메일로 보고서 도착할겁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승운이 말했다.

“잠시 서재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마음껏.”

재준이 흔쾌히 답했다.

***

태환은 데스크탑의 화면 녹화를 시작했다.

박형기 박사에게서 뽑아낸 알크메네 재단에 대한 정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재단비리야 그게 그거였다. 인사 비리로 오가는 뒷돈, 재단 금액으로 하는 사치, 시설비 횡령 등등. 국내에서 벌이는 사소한 비리들.

“외교부 허가도 얻었는데?”

지승운이 말했다. 문제는 이 재단이 외교부 허가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벌써 올해 초 일이었다. 왜 이 정보는 누락됐던 거냐는 식으로 태환을 바라보자 태환이 고개를 돌렸다. 아마 놓친 듯 했다.

[예, 그래서 해외와 교류도 활발합니다.]

화면 너머로 지승호가 말했다. 데스크탑에는 지승호와 이경원, 그리고 이경민이 각기 다른 곳에 있었다. 저 두 형제는 왜 따로 있는지 알 수 없다.

“요건 충족이 된다면 그거야 큰 문제도 아니지만.”

[사학비리 재단들이 워낙 많으니까, 이런 소도시의 작은 재단은 신경을 안 쓰는 편이죠. 사학재단이 업무추진이나 연구비, 장학금에서 빼돌릴 수 있는 게 많고, 비리 또한 비례해서 훨씬 많으니까요. 애초에 외교부 쪽에서 승인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작은 곳이니.]

“어떻게 승인을 얻은 거야?”

[위원회에서 대충 봤거나 뒷돈을 먹었거나 아니겠어? 어디 어디 얽혀있어?]

이경원의 질문에 태환이 뺨을 긁적였다.

“이게 좀 복잡하더라고.”

승운이 고개를 턱을 괴고 제 옆에 앉아있는 태환을 바라봤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얼굴이다.

“베르스틴드 인더스트리라고 저번에 말했던 화석연료 기업이요. 여기서 배터리 업계에 중요 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해 작업을 착수했습니다. 아무래도 친환경을 내세우려는 것 같긴 한데, 목적은 미국에서 가장 큰 배터리 셀 생산 업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번 유엔에서 27차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에 참석하는 정치인들을 좀 후원했더군요. 공장을 중국에 세울 예정인가 봅니다. 보통 미국이면 남미 쪽에 세우지 않을까 했는데.”

“지금 남미는 핑크 타이드 때문에 어려울 거야.”

[남미가 좌파한테 먹혔어?]

경원의 말에 지승호가 답했다.

[우파들이 제대로 된 경제 성장을 못하니까. 흐름은 어쩔 수 없죠.]

[미국이랑 중국은 좀 안정망이 약하지 않나요? 오히려 리쇼어링을 추진하는 게 나을 텐데. 아니면 얼라이쇼어링이라도.]

[그만한 규모의 배터리 셀 회사를 지을만한 곳이 없지 않아?]

경원이 제 동생을 향해 물었다. 이경민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상하군. 지금 미국은 중국이나 러시아를 세계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데 굳이 중국에 공장을 세우려는 회사가 있다고?” 승운이 물었다.

“마땅한 장소가 없으니까요. 베르스틴드는 아마 인플레이션 감축법안 세제 혜택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잘 돼서 생산이 잘 되면 연간 10억 달러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거든요.”

[이 관련 입법을 미 상원의원인 캐링턴이 추진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입법로비와 연관이 된 거죠.]

이어서 지승호가 말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동문이자 법적으로 얽힌 레토츠 의원이 있는데.]

[법적으로 얽혔다는게 뭐야? 부부야?]

[아뇨, 처남이요.]

처남…… 법적 동생이긴 하군. 이경원이 더 설명해보라고 손짓했다.

[이 사람이 이번에 유엔 협약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그를 크립토 펀드 파트너가 후원했더라고요. 그래서 크립토 펀드 파트너를 찾아보니까, 그쪽에 후원한 몇몇 상원의원들이 하나같이 암호가상화폐와 환경규약에 대한 입법을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가상화폐?]

“중간 선거 이후 가상자산 관련 규제가 어떻게 될지 다르니까. 그래서?”

[크립토 펀드 파트너뿐만 아니라 베르스틴드도 이들에게 후원했죠. 저 암호화폐를 통해서.]

지승호의 말을 뒤이어 이경민이 말했다.

[그 모든 것을 중재한 게 루카스 영입니다. 그리고 그 암호화폐를 추적해본 결과.]

“추적이 되나?”

[거의 안 되죠. 암호화폐는 세탁하기가 너무 쉬우니까요. 그래서 양쪽에서 파고들었습니다. 진짜 좆 빠지게 뒤졌다니까요.]

“예쁘게 말해, 이경민. 회의 다 녹화 떠서 위에 제출할거야.”

[……아, 예. 근데 이 정도는 뭐. 아무튼 그 돈들이요. 알크메네 재단에서 시작됐습니다.]

경민의 말에 경원이 허? 하고 숨을 내뱉었다. 마이크에 바람이 울려 태환이 귀를 긁적였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돈이 많았어?]

“돈세탁이지.”

[돈세탁? 맨섬이나 뭐 태국 이런 데가 아니라?]

[맨섬이나 파나마는 너무 유명하고, 태국은 맨날 쿠데타가 일어나잖아요. 게다가 한국 금리나 시장이야 항상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니까 그걸 잘 활용한 거죠. 왜, 한때 환율조작국이니 뭐니 말 나왔던 것처럼. 우리나라를 쓸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재단의 돈줄은.]

이경민이 뜸을 들였다. 슬쩍 승운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니, 결말이 어떨지 뻔했다.

[아직 못 찾았습니다. 이건 암호화폐 연동이에요.]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조사할 시간이 그렇게 많았던 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알크메네 재단의 이사들, 그러니까 박형기 박사는 일종의 바지사장이라고 보면 되고 실질적으로는 다른 곳에서 뒷공작을 펼치고 있죠.]

[박형기 박사보다는 노용수 의원과 홍운철 의원을 뒤지는 게 더 좋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이중석 비서관한테 일정 요청을 해서 살펴봤더니 홍운철 의원은 러시아 쪽과 접촉을, 노용수 의원은 중국과 접촉을 했습니다. 심천 쪽이요.]

이경민의 말을 이어 지승호가 말했다.

[접촉한 곳을 뒤져보니까 에스퍼 길드 하나가 나왔는데, 이게 아주 절묘하더군요.]

“뭔데?”

[협낙극륵사赫拉克勒斯.]

“그게 뭔데?”

승운이 물었다. 태환이 재빨리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더니 “헤라클레스?” 하고 말했다. 헤라클레스. 재준이 찾던 거다. 그것 말고도 스태그비틀의 문양 역시 헤라클레스였다고 이경민은 말했다.

[참고로 리투아니아에 본사가 있습니다.]

[유럽 활동을 위한건가?]

“세금도 아낄 수 있겠군.”

승운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쪽이 그렇긴 하지…….

[정확히는 유럽 기업이었는데 중국에서 인수했습니다. 늘 있는 일이죠. 이 인수에 참여한 게 베르스틴드와 얽혀있는 중국의 스타트업 회사입니다. 그리고 인수하는 돈을 제공한 것이 알크메네 재단. 헤라클레스 길드를 창립했던 모계 회사가 스태그비틀.]

지승호가 이어 말했다.

[졸라게 복잡하네.]

[노의원과 홍의원이 추진하려는 공적형질이상자관리위원회 민영화에 관심을 두는 기업 또한 베르스틴드와 협낙극륵사입니다.]

[우리나라를 아주 날로 먹으려고 드는구만.]

경원이 말하며 제 머리를 양 손으로 쓸어 올렸다. 어쨌든 여러 국가의 기업과 재단이 얽혔다는 것이다. 그렇게 얽힌 와중에, 우리나라의 재단 하나도 얽혀있으며 그들이 민영화 역시 추진하여 에스퍼들을 먹을 계획을—.

[왜 우리나라 에스퍼야?]

“우리나라 에스퍼들이 전반적으로 등급이 높은 편이어서 그럴걸요? 아무래도 기후변화가 극적인 곳에서 살면 좀 단단해지잖아요. 괴수들처럼 사람도.”

[무슨 에스퍼나 가이드가 다른 나라 공원 점령한 칡덩굴이냐.]

“위험한 일 있으면 이 좁은 나라에다가 요청하는 거 보면 그런 취급 같기도 합니다.”

태환의 말에 경원이 택도 않는 소리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승운이 대뜸 입을 열었다.

“러시아는 뭐야?”

[예?]

“홍 의원이 러시아 쪽을 접촉했다며.”

[아, 그거— 그건 아직 못 찾았습니다.]

이경민이 말했다. 애초에 지금 러시아 쪽에서 정보를 얻기는 힘들었다. 뭔가 단서라도 있으면 시작을 할 수 있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러시아 쪽 정보가 뚝 끊겨버려서 짐작을 하기가 힘들다.

“이경민, 모니카 살레 추적해봐. 살레로 추적이 안 되면 에소노프로. 그리고 공정위에 기업들과의 관계 은밀히 뿌려.”

승운이 말했다.

[왜? 어차피 다른 나라 회사들인데.]

“공정위 회사가 우리나라 회사들 합병만 반대하는 건 아니거든. 몇 년 전에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 인수하려고 할 때 유럽연합에서 시장경쟁 해친다고 무산시켰잖아.”

[그랬지. 그런데?]

“저들 하는 꼴로 봐선 기업인수로 해서 전문 민간 경영인한테 팔거나 합작 기업 인수로 진행할 거야. 요즘 시대에 특정인한테 팔지도 않을 거고. 저 회사들끼리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려서, 나중에 결합 같은 개소리가 나오면 무산시키는 데 일조하도록 하고. 그게 아니어도 정보 준다는 식으로 해서 연결고리 하나 만드는 것도 괜찮고. 승호, 노의원이랑 홍의원과 대립되는 의원 몇 알아봐. 발언권 좀 있는 쪽으로.”

[역시 형질이상자 중에 국회의원이 한명 나와야해. 네 어머니는 생각 없으시대? 딱인데.]

“……군 출신 에스퍼를 정계에서 좋아할 것 같아?”

우리나라 역사를 모르냐. 군부라고 해도 반기지 않을텐데 거기다 대한민국 최고의 에스퍼 중 하나다. 위에 사람 없고 아래 사람 없다는.

“입법 관련 일을 하지도 못하고.”

[그걸 의원이 하냐? 보좌진들이 하지. 지승호 데려가면 되잖아.]

“친인척이라 안돼.”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단 말야. 야, 내가 어디 좀 나가볼까? 기초의원부터 시작해서.]

“개소리 말고.”

승운이 말했다. 경원이 그러면 지승호는 어떠냐며, 정치 쪽에 인맥이 있어서 공천받기 쉽다는 소리를 하자 승호가 질색했다.

“상황은 알았으니 잘 활용해보자고. 이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어차피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이었다. 그들이 준비하는 만큼, 이쪽도 준비해서 무산시키는 거야 문제도 아니다. 다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카트린 두자당은 아직도 추적이 안 되나?”

재준을 위협하는 이가 한국에 있다는 것.

***

반면 그들이 하는 대화를 들을 능력 따위는 없는 재준과 예지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랩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준은 여전히 에르난데스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투덜거렸고, 예지는 잠피레스쿠 박사가 메시지를 보낸다며 투덜거렸다.

“왓츠앱 해킹 당했다고 할까요?”

“나도 예전에 해킹당한 적 있는데.”

“사라졌을 때 알아봤어요. 아무튼 통할까요?”

“그냥 자러 간다고 해.”

“아직 시간이 애매해요. 요새 한국 시차를 잘 파악하고 있거든요.”

“널 놓치기 싫은가봐.”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뉴스를 틀었다. 미국은 확실히 안정을 되찾은 것 같다. 그럼 이건 일시적인 거라고 봐야할까? 만약 카트린이 이 일을 저질렀다면, 다른 나라에는 일시적일 수도 있었다. 한국에는 아니겠지만.

“바람 관련 괴수가 뭐가 있더라?”

재준이 물었다. 예지가 괴수, 괴수라……. 말하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 홍길동!” 말했다.

“바람을 일으켜서 하늘을 날잖아요. 축지법도 바람 쓰는 거 아니에요?”

“그건…… 에스퍼 쪽이지. 홍길동이 괴수가 됐다면 뭐 다른 식으로 이야기가 남았을 거야. 서양엔 역시 실프Sylph인가.”

“실프가 조종이랑 은신 위주였죠? 요즘도 있나?”

“멸종위기 괴수종인걸로 아는데. 그러고 보니 바람을 다루면 보통 은신 능력이 기본으로 있는 것 같아. 예전에 양양 지역의 호랑이 괴수도 바람을 다뤘다고 하더라.”

“오, 완전 근처네. 한 동네 괴수네요.”

“한 동네라고 하기엔 좀 멀지만, 호랑이 활동 범위로 치면 크게 다르지 않겠네.”

“그러고 보니 서유기에도 비슷한 거 있지 않아요? 황사 바람 일으키는. 홍해아인가?”

“그건 그냥 유명한 요괴 아냐? 홍해아는 불 괴수였어.”

“홍해아가 불이구나. 그럼 바람은 뭐지? 사오정은 물귀신이었는데.”

물귀신이라. 지승운이 괴수가 될 일은 없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물귀신 같은 것이 되나? 귀신 중에 제일 고약하고 무서운게 물귀신이라는데.

“황풍마왕인가?”

“아, 황사바람 황풍? 그거 아직도 살아있는 거 아니에요? 봄마다 깨어난다든가.”

“그거 의심해볼 만 한데? 안 그래도 동풍이 불 때가 아닌데 자꾸 오잖아. 기상이변을 주장할게 아니라 괴수가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아니면 기상이변으로 봄에 깨어나야 할 괴수가 자꾸 겨울에 깨어난다든가. 그런데 겨울잠을 자는 괴수종도 있나?”

“있어요, 있어. 복슬복슬한 애도 그래요. 그런데 요즘 괴수들은 모래바람 말고 중금속 바람 불러일으키려나? 아무래도 대기를 타고 오는 게. 어우, 끔찍하다.”

예지가 말했다. 끔찍하다는 말과 달리 목소리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카트린이 황풍마귀가 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황풍마왕. 하지만 그녀라면 실프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에이, 실피드Sylphid죠. 여성형 명사. 라 실피드! 라틴어에서 왔잖아요.”

“비물질적인 존재인데 중성명사가 아니네.”

“원래 남성명사 여성명사 그런 건 걔네 느낌대로예요. 나라마다 다르고. 아, 셰익스피어에도 그런 거 나오지 않았어요? 폭풍을 일으키던 요정.”

“응. 템페스트의 아리엘.”

“천사이름 같네.”

“실낙원에선 천사야.”

“뭐, 그 능력이면 천사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어요. 에스퍼였을까요? 의외로 바람을 다루는 에스퍼가 많았나 봐요.”

“가장 기본적인 원소니까.”

[괴수의 이상폭주 현상에 신원불명의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외부 출입을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0시 기준, 괴수의 폭주가 전날에 비해 20% 정도 줄어들었습니다. 여전히 밖은 위험합니다. 외부 출입을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재준이 채널을 돌렸다.

[괴수 이상 폭주로 인한 피해 신고는 경찰서 및 소방서를 통해주시기 바랍니다. 실종신고 경찰서가 아닌 통제국에서 접수를 받고 있습니다.]

“한국 뉴스는 어때요?”

“글쎄, 잠시만.”

재준이 말하며 한국 뉴스로 돌리자 오히려 별다른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는 내용은 물론이고, 자막으로 소식을 전할 뿐 다른 정치적인 견해와 토론만 있을 뿐이다.

[다음 소식입니다. 지금 당과 법무부가 추가 공방을 이어갔습니다. 오찬웅 최고위원은 오늘…….]

재준과 예지가 동시에 멈칫했다.

“…….”

이쯤 되니 논조가 좀 이상한 듯 했다. 재준이 다시 해외 뉴스로 돌렸고 예지는 소셜 미디어를 뒤졌다. 역시 이런 정보는 소셜 미디어가 더 빠르다며 떠도는 동영상 클립을 보여줬다.

“아까 프랑스 방송에서 나왔던 게 이거죠? 신원 불명의 사람.”

“응. 그러네.”

게다가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지?”

“괴수는 마리를 써요, 박사님.”

“인간종이니까 한명이라고 하는 게 어감 상 더 좋잖아.”

“그렇다고 치죠.”

원래 인간이었으니까 인간을 세는 단위를 쓰는 게 더 낫겠지. 예지가 한발자국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클립을 밀었다. 각국의 댓글들이 올라왔다. 그럴 리 없다든가, 영화 같은 거 아니냐든가 하면서. 게다가 중국 정부에서 이게 유출되도록 놔둘 리 없다는 말에 동조하는 댓글도 많았다. 하지만 이 동영상은 진짜다. 괴수학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이들은 완벽한 인간종 괴수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우리가 뭐 어떻게 할 게 있나. 정부나 길드 소속의 에스퍼들이 알아서 하겠지.”

“뭐, 그렇긴 할 텐데. 박사님은 해당 안돼요? 가이드잖아요.”

“아.”

맞아, 나 가이드였지. 재준이 뒤늦게 생각했다. 예지는 그런 재준을 보며 제 정체성도 잊고 있구나 하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하긴, 예지도 종종 잊는 사실이다. 그가 가이드라니. 지승운과 붙어먹는 것을 볼 때나 가끔 상기하지 평소에는 노상 보던 괴수박사인 현재준이었다.

예지가 다음 클립을 넘겼다. 아까는 날아다니더니 이번엔 불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인간종 괴수가 생각보다 많나 봐요.”

“일반 괴수보다 적긴 하겠지만, 비율상으로 따지면 많지. 앞으로 더 많아질 거야. 인구 증가율을 봐.”

“나중에 일반 괴수보다 인간종 괴수가 더 많아지는 거 아닌가 몰라요.”

“우리 세대부턴 충분히 그럴 거야. 몇 년도 안 돼서 인구가 20억 명이 늘었잖아.”

“몇 년까지는 아니죠. 강산 한번은 바뀌었을 걸요?”

“강산이 너무 자주 바뀌는 거 아냐? 10년이란 세월은 짧다고. 눈 깜짝 할 새에 지나가.”

“어우, 아저씨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내 나이면 아저씨 맞아.”

재준의 말에 예지가 입을 다물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하나 싶은 찰나, 저쪽에서 회의가 끝났는지 서재 문이 열렸다. 재준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슬 풀어지는 표정에 예지가 고개를 저었다.

“회의 끝났습니까?”

승운이 소파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왜 저렇게 친하게 앉아있지. 하지만 대놓고 질투를 할 수 없던 승운은 그저 천천히 걸어가 두 사람 사이에 앉아버렸다.

이건 또 웬 염병이야. 예지가 몸을 틀어 공간을 확보했다. 승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재준을 향해 웃어 보인 뒤 예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녀에게도 한번 웃어줬다.

잘생겨봤자 에스퍼지.

“됐고 이거나 좀 봐요.”

예지가 말하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중국에서 인간종 괴수가 날뛰기 시작했다고 하는군요. 진원지는 심천. 근처 국가에 에스퍼 도움 요청한다고 떴습니다.”

재준이 말하며 자신의 랩탑을 돌려 보여줬다. 뉴스 속보 하단에 뜬 글자에 승운이 표정을 굳혔다. 랩탑을 들어 올린 승운이 태환에게 그대로 넘겼다.

“우리 이거 갈 필요 없죠?”

태환이 물었다. 다른 팀들 많은데 설마. 물론 될 수 있는 최대한을 요청하긴 했지만 그게 S급 에스퍼가 들어가 있는 팀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한 국가에 몇 없는데다가 각국이 비상인데 그런걸 빌려달라고 하기엔 너무 양심 없는 일이지 않는가.

……하긴 양심이 있을 리 없지.

그때 승운의 전화벨소리가 들렸다. 태환은 설마 갑자기 중국으로 날아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싶어 뒤로 물러섰다. 아니, 난 못가. 비자도 만기됐다고. 그런 건 비자 만기 안 된 에스퍼들이나 보내라지.

승운은 액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예.”

[단속국입니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47분. 카트린 두자당, 56번 국도 CCTV에서 발견. 46번 쪽으로 빠졌습니다.]

“이동수단은요?”

[도보입니다만.]

차량 이동이 아니라 이건가. 하긴, 차량이었으면 찾기 더 힘들었을 테니 다행이었다.

[속도가 상당히 빠릅니다.]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예지와 재준이 서로를 마주봤다. 예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축지법이네, 축지법.”

“음. 역시 홍길동도 바람 관련 에스퍼였던 거야.”

도대체 무슨 대화야, 저건. 태환이 생각했다.

*

태환이 걱정한 것과 달리 중국으로 갈 필요는 없었다. 그쪽으로 넘어갈 사람들은 태환의 예상대로 아직 중국 비자가 남아있는 이들로만 따로 뽑고 있었다. 이런 비상사태에도 비자는 필수였다.

“그래서 저희 둘이 카트린 두자당을 잡으러 가야한다는 거죠?”

“지금 당장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태환의 말에 승운이 답했다. 이럴 거면 괜히 집에 온 게 아닌가. 태환이 투덜거렸다.

그들은 제7센터로 출근 중이었다. 필요한 것들이 전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재준의 집에 두 사람만 두기엔 위험하기도 했다.

재준은 출발하기 전 필요한 게 있다며 자신의 차에서 가방 하나를 꺼냈다. 언제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차에서 조금 쾌쾌한 냄새가 났다. 그래도 가방 속에 있는 것들은 문제없었다.

태환은 제7센터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가이드 센터 앞에 내려줬다. 하지만 예지와 달리 재준은 내리지 않았다.

“왜 안 내려요?”

태환이 물었다.

“같이 갑시다.”

재준이 답했다.

“…….”

태환도 승운도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웬 개소리야 싶은 얼굴이었다. 승운이 되물었다.

“뭐라고요?”

“방탄조끼 남는 거 하나는 있겠죠?”

“……지금 저희가 어딜 가는지 아시는 거죠?”

“46번 국도.”

“박사님.”

와, 영화다. 태환이 생각했다. 이거 영화에서 봤어. 그냥 좀 얌전히 남아있으면 되는데 괜히 자기도 같이 가자고 끼어들었다가 팀을 몰살시키는 그런 캐릭터.

“저 못 믿습니까?”

“못 믿어요.”

이야, 의외로 매몰차다. 태환은 지승운이 거절도 못한 채 어영부영 재준을 끌고 갈 것이라 여겼다.

“박사님은 못 갑니다, 여기 있어요.”

지승운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너 충전 덜했어.”

아니, 충분한 것 같은데. 시계가 녹색이다. 저 정도면 한 85퍼센트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 정도면 됐지, 뭘.

“그리고 카트린 두자당이 어떤 형태의 괴수인지 모르잖아.”

이건…… 이건 맞는 말이다. 태환이 슬쩍 승운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이런 요구 따위는 하지 않을 텐데 오늘의 재준은 뭔가 이상했다.

“카트린 두자당이 어떤 괴수인데요?”

“—황풍마왕 아니면 실피드?”

그건 또 뭐야.

“아리엘?”

그건 또 뭔데.

“승운아.”

“박사님, 보통 가이드들은 이럴 때.”

“원래 가이드는 에스퍼와 함께 사냥에 나섰다고 하더군요. 전투 도중 에스퍼가 죽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다가 오히려 가이드들이 죽어서 에스퍼들이 애지중지하는 곳에 가이드들을 떨어뜨려놓고 다니지 않았던가. 에스퍼는 자체적으로 치유를 할 수 있지만 가이드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 폭주 전까지 무사히 가이드 곁에 돌아가기만 하면 됐다.

“데려 가.”

“박사님이 있으면 전 제대로 못 싸웁니다.”

“그럼 제가 김태환 에스퍼와 한 팀이 되죠.”

“뭐? 안돼요!”

“…….”

“김태환 에스퍼는 제가 있다고 해도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겁니다.”

태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사님이 죽으면 저도 죽어요. 제가 살아도 대장이 날 죽이겠지. 절대 안 된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죠.”

결국 지승운이 포기했다.

***

맞아, 이 사람 괴수학자였지.

지승운은 현재준을 단순히 가이드라고만 여겼지만 실제로 태환이 본 현재준은 그 이상의 인물이기는 했다.

아수라장이 되었던 리셉션 파티에서, 태환은 총을 든 괴수학자들을 직접 보았다. 에스퍼 중에는 밤눈이 밝은 사람도 있었다. 태환 역시 번개와 빛을 다루다보니 원한다면 어둠 속에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 태환이 어둠 속에서 본 괴수학자들은 하나같이 총질을 아주 잘 했다.

재준이 들고 온 가방에는 여러 도구들이 있었다. 총기도 있었지만 여러 약품들도 있었다.

재준이 스웻셔츠를 벗고 얇은 반팔을 껴입은 뒤 방탄조끼를 걸쳤다.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검은 에스퍼 전투복을 빌렸다. 외부인이 에스퍼 전투복을 입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만, 에스퍼 복을 입는다는 것 자체가 공격대상이 되니까 웬만해서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제 옷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말에 승운은 어깨에 있는 마크를 뗐고, 가슴에 있는 에스퍼 표식도 뗐다.

“전투모도 쓰세요.”

이왕 갈 거 제대로 준비하는 게 더 나았다.

다른 점은 재준의 가방에서 나온 도구들이다. 태환이나 승운과 달리 하네스를 옷 위에 두르고 조끼 주머니에 탄창을 넣고 약물 같은 것을 챙겼다. 그리고는 검 하나를 더 챙겼고 자신의 가슴께에 화상카메라를 달았다.

“화상카메라요?”

“에스퍼들은 안 씁니까? 저희는 나갈 때 쓰는데요.”

“왜요?”

“괴수 잡다가 죽으면 시체가 온전하지 않거든요. 한명만 죽으면 알겠지만 몰살당하면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찍은 걸로 누군지 추측하려고요.”

“……저번에는 안 차지 않았습니까?”

“DMZ는 앞마당이라 괜찮습니다. 한 반년 정도는 차고 다니긴 했지만.”

그렇게 말한 재준이 자신의 총기를 확인했다.

“기능은 문제없네요.”

승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갑시다.”

이젠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 사는 곳의 괴수들은 대부분 퇴치가 됐지만 인적이 드문 곳은 아니었다. 위에서 날아드는 비행종 괴수가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태환은 도로 앞에 떨어지는 괴수를 피하며 작게 욕을 했다. 원래 운전을 하다보면 욕을 하기 십상이었다.

윈드실드 너머로 쏟아지는 빗방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보닛과 루프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끄럽다.

뒤를 살펴보던 재준은 시야 확보가 안 되어서인지 창문을 열어 몸을 빼냈다. 역시나, 이상하더라니 뒤에서 달려드는 비행종 괴수가 있었다. 승운이 말리기도 전에 괴수를 향해 총기를 발사하자 탕! 소리와 함께 뱃가죽에 구멍이 뚫렸다. 그걸로 끝나지 않을 텐데, 하고 생각하던 태환은 리어 뷰 미러로 차체 위로 쓰러지려는 괴수를 확인하고 다시 욕을 하며 엑셀을 밟았다.

“뭡니까!”

“저 괴수는 핵이 위장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재준이 말하고는 총기를 내려놓고 빗물이 고인 안경을 털어냈다. 차 안의 온기와 밖의 온도 차이 때문에 습기가 어렸다.

생각과 달리 재준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승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지승운은 단속국에서 보내준 GPS로 카트린의 이동 경로를 살피며 인이어 수신기로 소통하고 있었다. 도로교통공단의 협조를 얻어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고 있긴 했지만 금세 놓칠 수 있었다.

“전 국도가 싫어요.”

태환이 말했다. 남이 운전하는 차였으면 그대로 게워냈을지도 몰랐다. 강원도 오는 고개들은 왜 이 모양이냐고 투덜거린 태환은 승운에게 “어디로 가면 됩니까?” 하고 물었다. 태블릿을 확인한 승운이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위치가 이상한데.”

“어디로 잡힙니까?”

뒷좌석에 앉아있던 재준이 고개를 빼어들었다.

“여긴 스키장이네요.”

“거기 스키장이 있었어요?”

“폐장했습니다.”

재준이 말했다.

그도 종종 이 근처로 출장을 왔었다. 물론 목적은 스키가 아니라 괴수 사냥이었다. DMZ에도 괴수가 많긴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에도 다양한 형태의 괴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근처 어딘가에 GPS를 식재한 괴수를 풀어뒀는데……. 그건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인건 그가 이곳 지리에 그나마 익숙하다는 것이다.

“가죠.”

재준의 말에 태환이 핸들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빗줄기가 줄어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박처럼 떨어지던 물방울이 추적이는 정도가 됐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라이트로 비춰지는 폐건물에 태환이 목을 움츠러뜨렸다.

“으, 귀신 나오겠다.”

“귀신이 무섭습니까?”

재준이 되물었다. 괴수도 때려잡는데 귀신이 무섭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에 태환은 “당연히 사람마다 무서운 게 있기 마련이죠.” 말했다.

“전 공포영화는 죽어도 안 봐요. 갑자기 튀어 나오는 거 싫어요.”

괴수들도 갑자기 튀어나오는데, 그건 괜찮은 듯 했다. 재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자주 오지도 않았지만, 이곳에 올 때면 항시 낮이어서 밤의 광경이 생경했다.

“다음엔 야간 투시경 같은 걸 가져와야겠어요.”

“다음 같은 건 없어요, 박사님.”

“여기도 종종 사냥하러 옵니다. 다음에 같이 와요.”

“그거 데이트 신청인거죠?”

“……여기 말고 더 좋은 곳으로 가죠.”

“예, 야간투시경도 가지고요.”

저기, 옆에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저 사이에 끼어드느니 그냥 없는 사람으로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태환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시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아무 소리도 없는 공간에 뭔가가 번쩍하는 느낌이었다. 소름끼치는 감각에 재준이 몸을 틀자 저를 낚아채기 위해 달려드는 비행종 괴수의 발톱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그대로 총을 겨냥하고 발포하자 푸드덕 소리가 나며 괴수가 떨어져 내렸다. 이어 몇 마리의 괴수종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

한마리가 아니었다. 재준이 잡은 것은 한 마리뿐이었지만. 재준이 옆을 바라봤다. 승운과 태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력이 좋네. 당연한 소리지만 에스퍼들의 실력을 괴수학자가 따라갈 수 없었다.

에스퍼들은 일제히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해발이 꽤 높아서 등산객들이나 심마니 같은 꾼들이 아니면 가지 않는 길이기도 했다.

“박사님, 저 쪽.”

승운이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서 냄새가 납니다.”

바람은 은닉을 잘 한다. 에스퍼들도 그렇다. 아마 처음 만났을 때 승운이 카트린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녀가 바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가 온다.

물속에서 지승운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

결국 그 숲길로 가게 됐다. 여름과 달리 겨울이 가까워져 오는 지금 많은 식물들이 노란 떡잎이 지거나 말라 비틀어져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황무지는 아니었지만, 몹시 흡사했다. 죽음을 가리키는 것처럼.

도중에도 몇 마리의 괴수가 습격을 했다. 전부 비행종이었다. 그러고 보면 학계에서는 여태껏 비행종 괴수를 그저 나는 형태로 구분을 했는데, 그들도 바람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재준이 생각했다. 바람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어서, 그들이 한시적으로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다.

괴수끼리 교감이 가능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새 관점으로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비에 젖은 흙이 신발 밑창에 들러붙어 질척였다.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나서, 추적 중에 이래도 되나 싶은 염려가 들었다. 하지만 지승운이나 김태환은 그런 발자국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래, 에스퍼는 군인이 아니다. 그들이 상대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괴수였고, 에스퍼는 괴수를 포로로 잡지 않는다. 마주치면 전부 죽인다. 자신의 흔적을 숨기고 다가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여기서 확연히 느껴진다.

재준은 자신의 뒤에서 경호하듯 따라오는 태환을 슬쩍 바라봤다. 승운이 멈췄다. 마치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놓친 것처럼. 빗줄기도 다시 약해졌다. 승운은 한 곳에 서서 여러 방향을 둘러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숲은 적막하지 않은데, 지금은 그저 빗소리와 발자국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무서운지 태환이 다시 어깨를 떨었다. 물터는 소리가 났다. 재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지금까지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뭐였습니까?”

“저요? 전, 글쎄요. 괴수보다는 대장이 더 까다로워서.”

“…….”

그래, 어떤 괴수가 나오든 S급 에스퍼보다는 덜하겠지. 재준은 이번에는 “지승운 씨는요?” 하고 물었다. 승운이 슬쩍 시선을 한번 줬다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전 안개요.”

“안개?”

“예, 각성한 지 2년째였나. 캄차카 반도로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만났었는데.”

그때는 아직 몸이 쌩쌩할 때였다. 그래서 해외 출장도 많이 다녔다. 까다로운 괴수들을 처리하는 용도로.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지만.

“안개와 바람이 결합해서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곳에선 안개정령이라고 불렀죠. 뿌연 수분 때문에 앞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휘몰아치는 바람이 폭풍 수준이었어요. 마치 칼날을 머금은 듯한 거센 바람이 축축한 습기를 가지고 있어서 살이 베이면 그대로 피가 빨렸는데, 생각해보니 그 안개도 흡혈종 느낌이군요. 실제로 연구도 덜 돼서 힘들었습니다.”

“아팠겠습니다.”

“저는 괜찮았어요. 결국 그것도 물 분자였으니까.”

“그건 어떻게 채취할 수 있을까요?”

“…….”

순간 태환과 승운 둘 다 할 말을 잃었다. 승운의 이야기를 들은 태환은 그딴 건 겪어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저 괴수학자는 남다르다.

안개를 채취할 수 있냐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적어도 지금 기술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안개정령. 탐나네요.”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태환은 어쩜 저런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저런 사람이 좋다고 매달리는 승운 역시 이해는 가지 않았다. 듣기로는 둘이 퍼센테이지도 좋고 아주 찰떡궁합 제짝과 다를 바 없다지만……. 그리고 태환은 그 사실에 몹시도 감사하지만, 만약 재준이 자신의 짝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저런 이상한 사람이라니. 얽히고 싶지 않다. 무섭기도 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재준은 아무렇지 않게 승운을 향해 말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세계를 여행해볼까요?”

“세계의 다양한 괴수들을 연구하게요?”

“너만 있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그럼요. 저만 가능할걸요.”

저것 봐. 아주 서로 좋아 죽잖아.

“그러니까 나 버리면 안 돼요.”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듯 했다. 태환은 괜히 발소리를 크게 내며 제 존재를 알렸다. 지승운은 그 사실을 눈치 챈 듯 했지만 재준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이번 일이 끝나면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요.”

“박사님한테 비밀도 있어요?”

“아주 많습니다.”

별로 안 많아 보이는데. 태환이 생각했지만 승운은 그 사실을 믿었다. 재준은 비밀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을 몇 년간 숨겼고, 또한 가이드라는 것을 밝히려고 할 때에도 승운에게 바로 말해주지 않았다. 감질나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해서 사람을 애가 닳게 하더니, 죽음 직전에서 구해내기까지 했다.

“기대되네요, 박사님의 비밀.”

현 박사한테 비밀이 있어봤자 그게 그거겠지. 태환은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 재준의 집 말고, 승운에게 신세지는 그 집으로. 물론 승운과 함께 있지 않고 홀로 그 집을 차지하고 싶었다.

지승운이 물었다.

“박사님은 가장 까다로운 괴수가 뭐였습니까? 연구하는데 있어서.”

“글쎄요. 아무래도 남극에 있었던 괴수겠죠. 남극은 지구상에서 괴수가 가장 많은 지역인데, 오지라서 에스퍼나 가이드들이 많이 없어서 잡기가 힘들었어요. 대부분 괴수학자들이 두꺼운 방한복을 챙겨 입고 나가서 사냥을 해왔죠. 사실상 사냥보다는 추위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라고 여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겨울에만 활동하는 괴수들이 있거든요. 그리고 정 드는 것도 힘들었죠. 특정 괴수들은 어릴 때 굉장히 귀여운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정을 주면— 나중에 죽이기도 쉽지 않고.”

“…….”

“혹은 너무 큰 괴수들은 연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연구소에 들어가지 않거든요. 가끔은 그냥 살점 일부만 떼서 가져가고 싶은데 그것 역시 쉽지 않죠. 에스퍼들은 꼭 사체를 챙기려고 해요.”

“예,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수당과 직결되니 별 수 있나. 그냥 쫓아내는 것과 사체를 가져오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한편으로는 다행이긴 하지만 의문이 들긴 합니다. 왜 에스퍼들이 괴수를 그렇게 경계하는지.”

“저도.”

승운이 말하며 몸을 돌렸다. 빗물이 튄 안경에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습기가 차서 재준 역시 앞이 보일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용케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냥 본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한편으론 알 것 같습니다.”

에스퍼가 괴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거의 확신했다고 봐야했다.

“빼앗길 것 같아서 그래요.”

하지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요?”

승운은 말없이 재준을 바라봤다.

당신이요.

하지만 그 상실감은 단순한 사람에 대한 상실감은 아니었다.

“아주 소중한 것이요.”

그는 가이드를 몹시도 사랑하지만, 가이드는 에스퍼의 감정을 영원히 모를 것이다.

에스퍼가 가이드의 심정을 모르는 것처럼.

“…….”

아주 진짜 염병을 하고 있네. 이럴 거면 단 둘이 오지 그랬어. 태환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곧 끊기고 말았다. 갑자기 목덜미 털이 곤두선 기분이었다. 태환이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과 동시에 뭔가가 목덜미를 스쳤다. 그리고 태환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뭔가가 바닥에 철퍽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재준과 승운 역시 몸을 돌렸다.

흙바닥 위에 무릎을 꿇은 태환이 천천히 쓰러졌다. 그의 뒤에 무언가가 존재했다.

빗줄기가 갑자기 강해지더니 쏴아아 소리를 내며 뿌려졌다. 숨을 내쉬자 입김이 나왔다. 승운이 말했던 캄차카의 안개정령처럼, 밖으로 빠져나온 입김이 춤추듯 흘러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보였다.

젖은 머리가 검은색처럼 보였다. 달빛 한 점 없는 어두운 하늘 아래로, 재준이 들고 있는 총기의 라이트가 얼핏 그녀의 모습을 비췄다.

재준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비가 오고 있는데도, 왠지 몸의 수분이 증발한 것처럼 긴장됐다.

“카트린 두자당, 찾았습니다.”

지승운이 귓가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현재위치는 자동으로 송신될 것이다.

“전 바람계열 에스퍼, 현재 종류 확인 불가.”

그렇게 말하며 태환에게 시선을 준 승운은 태환의 시계에 보이는 퍼센테이지와 심박, 그리고 호흡 소리를 통해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카트린을 바라봤다. 카트린은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한 번도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바람을 다루는 에스퍼들이 가장 잘 하는 것이었다. 은닉.

그런데 그 수준이 평소 승운이 알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명무실이길 바랐건만, 저기 쓰러져있는 태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S급 괴수 추정.”

그렇게 말한 승운이 인이어에서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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