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4권) (11/20)

10.

경원의 말대로 월요일 오후 5시 55분에 공문이 내려왔다.

왜 공문은 꼭 퇴근 직전에 보내는 걸까. 아니, 그래도 이때 보내는 건 양반이었다. 당일 오전 8시에 보내는 경우도 허다하단 말이지. 예지는 협조를 바란다는 문서를 보며 혀를 찼다.

“박형기 박사가 수요일에 온다면, 난 월요일부터 불행해질 거예요.”

수요일에 박형기 박사가 DMZ로 내려온다는 내용이었다.

“날짜가 가까워 올수록 점점 더 불행해지겠죠. 화요일엔 진저리를 치고, 수요일에는 안절부절 못할 거예요. 죽빵을 날리지 않으려고 컨트롤하려는 내 마음이 얼마나…….”

“만약 박형기 박사가 사전 알림 없이 무턱대로 찾아오면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니 공문에 반가워하자고.”

그렇게 말하니 차라리 공문을 받는 것이 낫군, 예지가 생각했다. 그래도 싫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아, 왜 오겠다는 거죠? 여기에 뭐가 있다고?”

“글쎄.”

재준이 답했다.

그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지승운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재단의 대표 이사 중 하나라고 했던가. 그럼 재단과 관련된 일일 텐데, 그 재단이 뭘 하는지는 모르겠다.

재준이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알람이 울렸다. 동시에 울려 퍼지는 재난문자에 예지가 핸드폰을 열어 확인했다.

평범하게 괴수 발생 문자였다.

“또 괴수네. 봄이랑 가을은 이게 문제예요. 괴수들이 너무 많이 나와.”

여름이나 겨울에 괴수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유독 봄가을이 심했다. 예지가 알람 소리를 끄며 말했다. 재준은 딱히 끄지 않았지만, 알람은 몇 번 더 울린 다음 알아서 멈췄다.

“그나저나 요즘 다들 바쁜가보네요.”

“아무래도 날이 이러니까. 지금 해상 괴수가 제일 잘 나오는 시기고.”

덕분에 지승운도 출동이었다. 물을 다루는 에스퍼다 보니 바다에서도 활용도가 높다던가. 연구할 만한 걸 산채로 잡아오겠다는 말에 재준은 아쉬움을 내비쳤다.

‘해상 연구 시설이 안 되어 있어서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 예산을 넉넉히 받는다면 그 연구 시설도 준비해보고 싶지만 중앙에서 나눠줄지 모르겠다. 괴수연구소 쪽 예산은 항상 충분했지만 DMZ는 항시 가난하다.

“슬슬 사냥 가야하는데.”

“겨울 되기 전에 한번 가긴 해야겠죠. 박형기 박사 가면 하루 날 잡고 잡으러 가요. 그 전에 괴수 모았다간 트집 잡으면서 기존에 줬던 것도 뺐을 걸요?”

“그래야지.”

“맞다, 박사님. 저 유럽 가기로 했어요.”

“그래?”

“네. 1월에 가니까 슬슬 새 연구원을 구해야 할 텐데.”

이어지는 말에 예지와 재준 모두 침묵했다.

사람을 구하는 건 늘 어렵다. 성에 찰 만큼 실력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두루두루 오래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특히 재준처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한 사람은 더 그랬다. 반면 예지는 다른 것을 걱정하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올까요?”

여타 연구원들이 그렇듯, 지방에서 일하기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괴수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괴수학자들 역시 중앙 연구소를 최고로 치니까. 커리어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실력을 쌓기엔 이쪽이 좋은데.

“안 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여기 걱정 안 해도 돼. 넌 앞으로 나아가야지.”

“박사님이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타입이라.”

한국사회에서는 특히나 더 그랬다. 만약 현재준이 이 나라에서 멀쩡하게 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했다면…… 빌런이 됐을지도 모르겠네. 역시 그건 아니었다. 예지는 지금의 재준이 더 낫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멈췄다. 한때 재준의 삶을 걱정하는 것은 시리예나 예지의 일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하긴, 이제 저 말고 박사님 돌봐줄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겠죠.”

사실상 내가 지승운을 돌보는 게 아닌가? 재준이 생각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 정말 상황 파악을 못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아무튼 둘이 잘 지내고 있으니 앞으로 제가 할 일은 없었다. 이게 바로 딸, 아니 아들을 넘기는…… 어머니의 마음인가? 재준이 간혹 자신을 딸처럼 여기곤 했는데, 예지도 비슷하게 재준을 아들처럼 여겼다. 아이고, 우리 모지리를 누가 데려가나 했는데 대한민국 최고의 에스퍼가 데려가네.

“그래도 일단 연구원 모집 글은 올려둬야겠어요. 후배들한테도 연락 좀 넣고.”

“후배들이랑 잘 지내나보네?”

“제가 또 중앙 연구소에 있을 때 한 인기 했거든요.”

예지의 말에 재준이 피식 웃어보였다. 어딜 가나 인기가 있는 타입이었지. 어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재준은 간혹 왜 예지가 자신을 따라 이곳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재준으로서는 참 고마운 일이었지만.

“크로스핏 이용권 무료 양도 걸면 좀 올까요? 1년 치 결제했는데 10개월 남았거든요. 1월부터면 반년은 다닐 수 있는데.”

“…….”

“여기에 안 낚이면 김태환 에스퍼한테 팔아야겠어요.”

“그래, 그게 낫겠다.”

재준이 대답하며 핸드폰을 바라봤다. 승운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일이 끝났나보지. 재준이 일어서며 말했다.

“퇴근하자.”

***

박형기 박사가 이능청 제7센터에 방문했다. 물론 이능청과 괴수연구소는 협력관계일 뿐이기 때문에 그를 대접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박형기 박사가 예우를 원했다. 이능청은 협조하지 않았다.

“이거 갑질이야, 어?”

갑질같은 소리 하고 있네. 유예지가 생각했다.

“이능청 차원 갑질 실태 조사가 권고 규정이 아니라고 우리 중앙연구소를 이렇게 무시하는 거라고! 이거 국감에 제기해야 되는 건이야!”

예지는 화요일부터 스트레스였다. 아니, 월요일 오후부터. 예지는 업무 스트레스가 별로 없는 편이었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고, 일이 바빴지만 사람들이 괜찮아서 직장에 대한 만족도가 컸다.

역시 사람이 문제야.

중앙 연구소에 있을 때 받았던 미칠 듯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난다 싶었더니, 저 양반의 하루 반나절 방문에 벌써 미쳐버릴 것 같다.

박형기 박사와 함께 온 이들 중 몇몇은 중앙연구소 소속 수석 연구원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기도 하고, 석사 과정을 밟고 있기도 했는데 지도 교수가 모두 박형기였다. 예지도 한때는 저 틈에 있었다. 수료 딱지가 붙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석사 수료라 다행이었지. 자신과 같이 박형기 밑에 있던 남자 중 한명은 여전히 노예로 살고 있었다. 그 외에 세 명의 외국인도 동반했다. 한명은 정장과 선글라스를 입은 것을 보니 경호원처럼 보였다.

재준은 그 중 한명인 루카스 영을 바라봤다. 루카스 영은 재준의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마주치며 웃어보였다. 그러며 옆에 있는 여자에게 뭔가 말을 했다. 40대 중반처럼 보이는 여성은 빗지 않은 갈색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재준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닥터 이에온?”

여자가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인사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박형기 박사가 조금은 당황스러워했다. 재준 역시 조금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루카스 영보다 이 여자가 더 영향력이 큰 인물인가?

재준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닥터 현입니다.”

“카티야 가튼입니다.”

H발음을 묵음으로 하기에 프랑스인인가 했더니, 이름이 독일계다. 재준은 자신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는 카티야를 보며 조금은 의아함을 느꼈다. 의아함이라고 해야 할지,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섬뜩하기도 했다.

“카티야.”

“종종 봬요.”

과연 그럴 일이 있을까? 재준이 생각했다. 반면 박형기 박사는 뭐가 불만인지 계속 어색한 미소를 남겼다. 그녀가 손을 놓자 이어 “루카스 영입니다.” 하고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현 재준 박사입니다.”

“닥터 현.”

이쪽은 발음이 꽤 좋았다. 재준이 앞쪽에서 악수를 할 때 예지의 주변으로 익숙한 사람들이 다가왔다. 한때는 동료였고, 얼마 전 괴수 탈취 때는 적이었던 연구원들이다.

“잘 지냈냐?”

“조온나 잘 지냈다. 피부 탱탱한 거 보여? 넌 피부랑 눈 밑이 썩었다.”

“폴란드로 간다고?”

“응. 그쪽 연구소. 잠피레스쿠 박사님 밑에. 원래는 라제쉬 박사님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번에 날 잘 봐줬나봐.”

“……잘됐네.”

“훨씬 잘됐지. 그러니까 너도 적당한 때 나오지 그랬어?”

“그게 뜻대로 되나.”

그렇게 말하며 박형기 박사를 보는 동료 연구원의 시선에 예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뜻대로 안되긴 해. 거기 있으면 어떻게든 살 길이 있다고 여기잖아. 하지만 그건 다 박형기 박사의 농간이었고 꼬드김이었다. 원래 저런 사람이 꼭 감언이설로 사람을 속인다.

“그런데 가이드 한명도 온다고 하던데 없네?”

“연구소 쪽은 보기 싫다고 다른 곳으로 빠졌던데.”

“흥. 그 가이드 박 박사 조카인건 알아?”

“…….”

“아주 썩었어, 그냥. 이 바닥 전부 다 썩었다고.”

예지가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박형기 박사 역시 “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둘러봅시다.”하고 말하며 사람들을 안내했다. 제 연구소인 것 마냥.

박형기 박사는 겉으로는 시찰이니 뭐니 하는 말을 썼다. DMZ연구소가 맡고 있는 국정 과제 이행 현황도 파악하고, 인력 수급 문제도 검토해야한다는 등을 말하면서 말이다. 특히나 과대하거나 과소시키는 대표 오류 데이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감시 프로그램을 설치해서 검토하는 게 낫지 않냐는 말 등을 하며 예지의 흡혈 괴수종을 노리기도 했다.

박형기는 R&D예산 이월금 집행 관련해서 단 년도 회계 원칙의 예외 규정을 도입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그 규정이 어떤 건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뭐든 예산을 아껴서 쓰면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선 이런 기초적인 건 좀 뒤로 하고 다른 것들을 봐야하지 않나?”

“글쎄요. 물론 그런 개발사업도 중요하긴 하지만, 본연 연구를 강화하는 것이 궁극적 발전이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우리나라는 기초과학이 약한데, 저는 현장 중심의 규제를 개선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이득이 별로 없지 않나.”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죠. 국가연구소가 이런 걸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업이야말로 이득을 극대화하니까요.”

“국가도 이득을 좀 챙겨야지!”

그건 네가 민영화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겠지. 차마 말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예지는 저 괴수연구원들도 민영화 얘기를 아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건 DMZ연구소에서 할 일입니다. 그리고 현장 연구원 규제를 강화해 연구 자율성을 낮추는 것이 문제라고 작년 국감에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부 규정 수정 검토가 안 되었던데 그 부분 참작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그거야…… 연구자 중심으로 개선하면 또 일선 연구자들이 느끼는 체감이—…. 거 참, 그나저나 말이야. 요즘은 기술 유출이 문제야.”

박형기가 말을 돌렸다. 넌 이능청을 팔아먹으려고 하잖아. 뿐이겠는가. 그가 한국중앙괴수연구소장이라는 것 자체가 연구소의 존립 자체를 걱정하게끔 만들었다.

“어? 산업 기술 유출이 지속되는 것에 재발 방지 대책을 좀 세워야 해. 뭐가 유출 행위인지 명확하게 몰라서 그러나? 안내나 가이드라인이 명확하게 필요한데 말이야. 어? 현 박사가 좀 그 부분에 대해 참여하는 건.”

“바쁩니다.”

“…….”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는 게 좋긴 한데, 그래서 박사님이 미움 받는 건지도 몰라요. 예지가 생각했다.

“그것보다 과학 기술 지역 격차 해소를 위해 지역 혜택을 좀 주십시오. 연구소 지원 강화가 필요합니다. 또 인력수급 문제도 검토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번에 메일 드렸는데 아예 확인을 안 하셨더라고요. 혹시 제 메일이 스팸에 들어가 있지는 않으시죠?”

“…….”

결국 박형기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괜히 루카스 영에게 이곳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했다. 재준은 그런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뒤 따랐다. 단지 루카스 영과 박형기 박사의 옆에서 걷던 카티야 가튼이 조금은 의미심장하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재준을 돌아봤을 뿐이다.

* * *

“루카스 영.”

박형기 박사와 루카스 영은 그 외에도 몇 차례 만난 것인지 사진마다 옷이 달랐다. 그렇다하더라도 DMZ까지 그를 데리고 올 것이라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뭘 계획하는지 알 수 없다. 민영화를 노리면서 동시에 외국기업에 지분을 팔아넘기기라도 할 건가? 그게 그렇게 단숨에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1987년 1월 5일생, 뉴올리언스 출신. 로젠버그 Ltd.에서 2012년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근무 후에 볼리비아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행적이 묘연한 편이지만 엘살바도르, 멕시코 쪽에서 활동하는 모습이 알려지긴 했다고 하더군요. 2020년에 다시 뉴욕으로 복귀해서 로비스트로 활동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환경 쪽 로비를 주로 담당하고 있는데 고객의 이익을 위해 국회의원들에게 호화 여행, 고급 스포츠 티켓 등을 제공한 혐의도 있군요. 실력은 대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괴수와 연관된 쪽 일은 하지 않던데요.”

“로젠버그에서 일할 때의 직무가 명확하지 않네.”

“위험한 일이라도 했나보죠.”

“지금 도착했나?”

“예. 박형기 박사와 함께 둘러보고 있습니다. 혹시 몰라서 다른 B급 에스퍼한테 경호를 부탁하긴 했어요.”

“검문은?”

“군에서도 한차례 하고, 이능청에서도 한차례 했습니다. 문제 없어요.”

아무것도 안 걸렸다고 하니 불안하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이런 곳에 무기를 챙겨 올만한 정신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더 무서울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이곳에 온 사람은 그 뿐만은 아니었다. 지승운은 그와 동반한 여자의 정보가 적힌 서류를 바라봤다.

“이 풍뎅이는 뭐야?”

승운의 말에 이경원은 슬쩍 고개를 내밀어 서류를 보더니 “그거 사슴벌레야.”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얼굴에 ‘이경민이…….’ 하고 핑계를 댔다. 승운은 곱게 무시한 뒤 얼굴을 바라봤다. 40대 중반? 아니면 50대? 그의 어머니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외모다.

“카티야 가튼.”

“이번에 루카스 영과 같이 온 사람인데, 스태그비틀 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CRO회사네요.”

“그게 뭔데?”

“임상시험 수탁기관 전문 회사야. 기다려봐.”

경원이 말했다. 그래서 로고가 사슴벌레였구만. 하고 작게 말하며 패드로 이것저것 검색을 하더니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이어 말했다.

“생동성이나 괴수 대상 비임상시험을 주로 하는 곳이군. 이번에 사람 대상 임상 시험도 하려나본데. 본사가 독일. 바이오 쪽은 독일도 유명하니까.”

“괴수 전문이라.”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괴수와 인간이 함께 살아간 지 4~50년이 된 지금 괴수를 대상으로 하는 기업이나 단체, 길드들은 많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묘하게 거슬리는 구석이 있었다.

“투자자는 이게 전부란 말이지.”

“다른 투자자들은 서울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더라고요. DMZ라고 하니까 막연하게 위험하다고 느끼나 보죠.”

“비무장지대를 제일 안전하게 여겨도 되지 않나? 오히려 서울이 더 위험할 텐데. 주요 시설이 다 거기에 있으니까 공격해도 그쪽을 할 게 분명하잖아.”

“여긴 휴전 중인 국가의 최전선이다, 이거죠.”

“별것도 아닌데.”

“우리한테나 그렇겠지.”

상황을 잘 모른다면 민방위 훈련이나 주말 아침 중고가전 구매 트럭 소리에도 벌벌 떨지 않는가. 외국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한 승운은 카티야 가튼과 루카스 영의 신상이 적힌 서류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놨다.

“서울에 있는 투자자들은 1센터에 있는 정보원들이 맡을 테니 우리는 이쪽에 온 사람들이나 확인해보자고.”

***

박형기 박사는 이곳이 제 연구실인 것처럼 누볐지만 정작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다. 유예지는 그런 박형기를 경계했다. 연구실 위치를 잘 모르는 박형기는 안내를 원하는 눈치를 충분히 줬음에도 모르는 척 웃어 보이며 “네?” 하고 되묻는 예지를 답답해했다. 그렇다고 해서 재준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없는 듯 그저 재준을 한번 바라보고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특히나 흡혈괴수종 이야기를 할 때면 예지는 그런 극비사항은 외국의 교수들에게 권한이 있어서 자신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며 시종 발을 빼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결국 박형기 박사는 반은 얼버무리고 반은 얼기설기 설명하며 루카스 영에게 연구소를 소개했다.

연구소는 왜 소개하는 거야? 이것도 팔아먹으려는 건가?

예지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박형기 박사가 고개를 돌릴 때면 대외용 웃음을 지어보이며 “왜 그러시나요?” 하고 되물었다. 가히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이것이 바로 사회생활의 정수였다.

반면 카티야 가튼은 박형기 박사의 설명에는 관심이 없는지 어느 정도 따라다니다가 뒤로 빠져 재준에게 다가왔다.

“박사님.”

“가튼 씨.”

“카티야라고 불러요.”

카티야는 브루넷에 갈색 눈을 가진 마른 체형의 중년 여성이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확신이 없었다. 재준은 말없이 카티야를 바라봤다. 박형기 박사와 그녀가 무슨 사이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보니, 그녀가 여기로 온 것은 박형기 때문이 아니라, 루카스 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곁에 붙어서 대화를 하지 않고 왜 이쪽으로 왔는지 재준은 의아했다. 자신은 박형기 박사의 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둥 마는 둥 걷고 있었을 뿐이니 말이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보고서가 떠돌더군요.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카티야가 말했다. 그는 그러며 박형기 박사를 바라봤다. 박형기는 루카스 영에게 친근한 듯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루카스 영은 별다른 반응 없이 연구소를 둘러보다 카티야가 있는 쪽을 한번 바라봤다. 두 사람이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재준은 알지 못했다.

“저쪽 박사는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 봐요? 최근 괴수학 박사들 사이에서는 유명해졌던데.”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재준은 모른 척 대답했다.

“에스퍼가 괴수가 된다는 거 말입니다.”

반면 카티야 가튼은 모른 척 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재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알려졌을 내용이다. 고위층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에스퍼가 아닌 경호원을 달랑 하나만 달고 이렇게 오지 않았을 테니까. 에스퍼들은 일 할 때 에스퍼 제복을 입는 것이 필수였고, 저쪽에 있는 남자는 정장 차림이었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는지 알 수 있습니까?”

IPMC와 연관된 사람인가? 그렇다면 재준이 알 가능성이 크다. 물론 최근에 들어온 사람들까지 파악할 수 있진 않지만, 그녀 정도 연식이 있는 사람이 IPMC쪽에 있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출신이요?”

“그 정보를 아는 분들은 많지 않아서요.”

“스태그비틀 사에서 왔습니다.” 카티야가 답했다.

“아, CRO회사.”

그렇다면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 재준도 그 회사는 알고 있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애초에 재준의 전공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라제쉬 박사님께서 종종 신세졌다고 들었습니다.”

“멜라니가 그렇게 된 건 참 안타까워요.”

하지만 시리예나 멜라니 라제쉬라면 다를 것이다. 그들이 하는 일에 CRO회사는 없어서는 안됐으니까. 카티야가 한 발자국 가까이 재준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그런데 그런 내용까지 저한테 비밀로 할 줄은 몰랐습니다. 에스퍼가 괴수가 된다는—.”

“듣는 귀가 많습니다.”

재준이 카티야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한 발자국 물러서자 카티야가 웃어보였다. 곁을 내주지 않으려고 하네요, 작게 하는 말에 재준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재준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카티야 가튼이라는 이는 조금 위험해보였다. 정말 멜라니 라제쉬와 아는 사이가 맞을까? 그녀는 에스퍼로서도, 괴수학자로서도 유명했기 때문에 아는 사이가 아니어도 관련 직종이라면 이름 정도는 누구나 안다.

스태그비틀이라는 말에 무조건 신뢰를 할 수는 없다고 재준이 생각한 순간, 카티야가 “괴수화 방지 백신.” 하고 말했다.

“…….”

그건 시리예와 멜라니가 연구하는 것이었다. 정말 아는 사이였나? 하지만 카티야의 말에 따르면, 에스퍼가 괴수화 된다는 정보를 멜라니에게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알았더라면 저에게까지 비밀로 했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테니까. 괴수화 방지 백신이라는 건 그 보고서를 통해 알아낸 것일 수도 있다. 카티야 가튼이 멜라니와 아는 사이인지는 차치하고라도, 그 보고서를 읽을 정도의 위치가 된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뇨, 그건 제가 하는 게 아닙니다.”

재준이 말했다.

“저는 작용기전을 밝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것이 되어야 그 다음 단계에 넘어가겠죠. 그리고 그걸 하는 건 다른 학자고요.”

“결국 아예르 박사의 연구는 당신의 결과에 따라 다르겠군요.”

그렇게 되긴 하겠지만……. 재준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카티야를 가만히 바라봤을 뿐이다.

“재밌네요. 라제쉬 박사들이 시작한 일을 이제는 그들이 아닌 당신들이 한다는 게. 아무래도 멜라니가 그렇게 된 이유가 컸겠죠?”

그렇게 말하는 카티야의 모습이 제법 즐거워 보여서 재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스태그비틀이라면 그녀와 오래 거래했을 텐데, 병상에 있는 것에 대한 위로나 애도는커녕 흥미로운 듯한 태도가 거슬렸다. 재준이 표정을 굳힌 채 입을 다물자 카티야가 다시 웃어보였다.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타입인지, 정말 이 상황이 즐거운지 모르겠지만 재준은 이런 타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카티야가 재차 물었다.

“박사님은 다른데서 연락이 오지는 않습니까?”

“스카우트를 말하는 거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어머나, 많이 겪어보셨군요?”

의외라는 듯 말하면서도 카티야는 “그럴 것 같았어요.” 이어 말했다.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재준을 바라봤다. 그 보고서가 인상 깊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카티야 가튼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달갑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타인을 경계하지 않는 재준이었는데, 자기 자신조차도 이상했다.

“한국 정부가 딱히 해주는 것이 없을 텐데 굳이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는 뭡니까?”

카티야가 물었다. 재준은 고민하다가 “처음에는.” 하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식사였죠.”

“…….”

“요즘은 어디든 쉽게 구할 수는 있지만, 예. 한때는 돌아올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언어나 문화, 공부보다는 그게 제일 힘들었거든요.”

“농담이시죠?”

“그렇게 받아들이셔도 됩니다.”

진담이었지만 자신이 이런 말을 하면 다들 농담으로 알아들었다. 농담으로 알아듣던, 진담이라 생각하던 재준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박사님.”

카티야가 재준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오더니 움찔했다. 재준이 의아한 얼굴로 카티야를 바라보자 그녀가 표정을 굳혔다. 웃지 않는 얼굴이 되자 제법 독일인 같다는 생각을 들었다. 그 이전에는 독일인보다는 남부 유럽 출신으로 보였다. 카티야는 의아한 얼굴로 재준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재킷의 주머니에서 명함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하나 빼 재준에게 건넸다. 재준이 손을 뻗어 명함을 받아들었다. 손이 스치지 않았음에도 카티야는 재준이 다가오자 한 번 더 움츠러들었다.

재준이 명함을 바라봤다. 명함에는 그 곤충이 새겨져있었다.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장수풍뎅이. 아니, 사슴벌레겠지.

“스태그비틀 사에서는 박사님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카티야가 자리를 옮겼다.

카티야는 재준에게 명함을 넘긴 것으로 용건이 끝났는지 이쪽은 돌아도 보지 않았다. 그 편이 더 좋기도 했다. 그리고 박형기 박사가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자기네 구역이 아닌데도 멋대로 드나드는 사람을 예지는 불편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곳이 어떻게 구획되어있는지 모르는 박형기 박사는 정작 중요한 구역은 소개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중앙 연구소와 구조가 다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모를 수가 있나 싶을 정도라 예지는 좀 더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박형기 박사를 바라봤다.

“그래서 이쪽은 주로 DMZ의 괴수들을 연구하는데…….”

이어 말하던 박형기 박사가 시선을 느꼈는지 유예지를 바라봤다. 예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어보였다.

“…—예, 이쪽에 주로 서식하는 괴수들은 아시다시피 LFE종으로 괴수들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주 특징을 가지고 있죠.”

일반 사람들도 아는 기초적인 말을 하고 있어. 예지가 슬쩍 뒤로 물러서며 재준에게 물었다.

“에스퍼나 가이드들만 길드화 시키려는 거 아니었어요?”

이렇게 보여주는 거 보니 왠지 괴수 연구소도 가만히 둘 것 같지 않았다. 재준이 고개를 저었다. 박형기 박사가 얽혀있다는 점에서 그럴 가능성을 놓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는 알 수 없었다.

지승운이 온 것은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바로 갈 줄 알았던 박형기 박사는 며칠 더 이곳에 머물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내일은 DMZ 투어를 하자는 말을 했다. 투어는 무슨. 거기 들어가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무슨 어디 마실 나가듯이 말한대? 예지가 혐오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마저도 DMZ는 위험하지 않냐면서 에스퍼들에게 경호까지 요청했다. 그 절차가 하루 만에 이뤄지겠냐고.

결국 퇴근시간 전까지 공문을 작성해서 넘기며 갖은 욕을 다 한 예지는 승운의 차에 올라타며 쾅 하고 문을 닫았다.

“죄송.”

승운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추켜올렸다.

제7센터 소속의 B급 에스퍼 한명이 그들을 임시로 경호하게 된 듯 했다. 승운은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승운을 알고 있는지 고개를 까딱여 보였었다. 어디로 이동하냐고 물었을 때 귀빈들을 모시고 호텔로 갔다가 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호텔이면 이곳에는 없을 테니 외부까지 나갈 것이다. 지승호가 비서관을 계속 미행하고 있으니 아마 그들과 만난다면 승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재준이 조수석에 타자 살포시 웃어 보인 승운이 고개를 돌려 B급 에스퍼의 차량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박형기 박사와 두 명의 연구원, 그리고 세 명의 외국인.

“저쪽이 루카스 영이랑 카티야 가텐, 그리고 페드로 곤살레스인가요?”

승운이 물었다. 경호원의 이름이 곤살레스인가보다.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와 카티야가 차에 타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보였다. 승운은 조금은 이상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사진과 좀 다르네요.”

“루카스가 말입니까?”

“아뇨, 카티야 가텐이요.”

지승운이 말했다. 사진에는 어떻게 나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유럽의 증명사진은 대부분 포토마통을 이용하다보니 머그 샷처럼 보이기 마련이었다. 재준도 범죄자처럼 나온 사진이 있긴 했다.

“에스퍼인가요?”

승운이 재차 묻자 재준이 “예?” 하고 되물었다. 에스퍼. 그런 기미가 없어서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애초에 일반인과 에스퍼를 구분하는 방법은…… 따로 있겠지만 재준이라면 주로 손목에 있는 에스퍼 시계를 보고 확인한다. 길드 소속이든, 국가 소속이든 에스퍼들은 항상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니까. 그녀의 손목에는 시계 따위는 없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시계는 차고 있지 않았어요.”

“서류상에도 그런 내용은 없긴 했는데.”

승운이 말했다.

“아닌가?”

하지만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간혹 반지 형태로 된 에스퍼 상태 확인 기기가 있긴 했지만 핸드폰이나 다른 기기와 연동해야 하는 데다가, 두꺼워서 잘 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일 에스퍼 호위 요청했다면서요? 저도 신청했어요.”

“괜찮습니까?”

“저는 한가한 편이니까요. 박사님이랑 같이 있고 싶고.”

내일 직접 만나보면 다르겠지. 승운이 생각하며 재준을 바라봤다. 걱정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에 승운이 사르르 웃자 재준도 마주 웃어보였다. 염병하네. 유예지가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 뒤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인지 눈에서 아주 꿀이 뚝뚝 떨어졌다.

“다행히 며칠 머문다고 하니 그동안 조사해보기 편하겠어요.”

“지승운 씨가 직접 합니까?”

“전 박사님 경호해야죠. 그게 제 일인걸요.”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재준의 뺨 위에 손을 올렸다.

“저기, 저도 같이 타고 있다는 거 잊지 말아주실래요?”

더 이상 참지 못한 예지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예지를 한번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

오늘 집에서 밥 해먹기 싫다는 예지와 함께 근처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돌아오자마자 재준은 카티야의 명함을 승운에게 보여줬다.

“장수풍뎅이.”

“사슴벌레입니다.”

둘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 물론 재준이라고 둘의 차이를 아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괴수를 구분하라면 모를까. 승운은 가만히 명함을 내려다보다 “사진 찍어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원하는 대로.”

재준의 말에 승운이 명함을 뒤집었다. 카티야 가텐. 메일주소와 연락처가 적혀있고 그 뒤에는 직함이 있다.

최고 인사담당 책임자라. 확실히 이런 사람이 이곳까지 온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설마 박사님을 스카우트 하러 온 걸까요?”

“스카우트하러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명함은 주더군요.”

그게 스카우트인 것 같은데요. CHO라고 적힌 부분이 유독 찝찝했다. 보통 이런 직급이라면 높은 자리에 앉아 들어오는 서류 위주로 확인하지 않던가? 그런데 직접 왔다고? 한국에? 그것도 DMZ까지? 왜? 마치 누군가를 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회사에서 노릴 만한 거물은 보나마나 한 사람 밖에 없다.

“갈 건가요?”

“그럴 리가요.”

재준이 대답했지만 승운은 내키지 않는지 계속 명함을 바라봤다. 멀리서 얼핏 본 것만으로도 거슬렸는데, 이런 위치라는 걸 알게 되자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저도 모르게 이 사람을 경계했나보다. 지승운은 자기가 에스퍼는 물론이고 재준과 같은 가이드에게도 질투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더불어 에스퍼도 아닌 그녀가 재준을 불순한 의도로 눈독 들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재준을 원하는 모든 다양한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은 에스퍼로서의 본능이었다.

자신의 음습한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재준은 슬며시 옆으로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널 두고 어딜 가겠어.”

손가락 사이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부들부들했다. 윤이 좔좔 흐르는 새끼 짐승 같기도 하다. 어린 동물들의 털이 이렇게 보송보송했던 것 같은데. 승운은 살짝 눈을 내리깔고 머리를 숙여 재준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가만히 놔뒀다.

“다만 좀 이상하군요. 처음에는 그냥 박형기 박사가 연계를 해주는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민영화와 길드화 뿐만 아니라, 괴수 연구소까지 건드리려는 것 같습니다. 안 그러면 굳이 루카스 영을 데리고 이곳까지 올 리 없으니까요.”

재준은 여전히 손으로 승운의 머리카락을 만질거리며 말했다. 승운이 눈을 떠올렸다. 치켜 올리듯 뜬 눈이나 얼굴의 각도가 조금은 묘해 재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재준이 손을 떼자 승운이 왜 그러냐는 얼굴을 했다.

“아뇨, 그냥.”

다른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종종 보는 각도라고 말하면 자신이 너무 쓰레기처럼 느껴질 듯 했다.

“루카스 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봤습니다. 지금 고객사가 베르스틴드 인더스트리더군요. 화석 연료기업인데, 여기 CEO가 기후 위기를 부정하는 단체를 지원하고, 환경 규제와 보조금을 반대한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관련 로비도 자주 하는 것 같고.”

승운이 이어 말했다.

“비상장 기업이라서 법망에서도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지금은 중국의 스타트업 회사와 함께 뭔가를 투자할 계획이 보이긴 합니다만 아직 물밑에서 오고 가는 내용이라 알 수 있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 중국에서 희귀 괴수 거래를 한다는 말도 들리고, CRO회사와 같이 방문을 했다는 걸 보면 뭔가 거슬립니다.”

“기후위기 부정과 중국 발 스타트업, 그리고 임상실험 회사라.”

“그리고 박사님의 보고서.”

승운의 말에 재준이 쓰게 웃었다. 에스퍼가 괴수임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그 보고서 제가 볼 수 있을까요?”

승운이 물었다. 재준은 답 없이 그를 바라봤다. 어두워서 그런지 회색 눈동자가 검게 보였다. 승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보고서에 괴수를 만드는 방법이 적혀있습니까?”

아닌 듯하지만 조금은 강압적인, 취조를 하는 어투였다. 평소의 승운과 다른 모습이 묘하게—.

“아뇨.”

재준이 답했다.

“그건 적지 않았습니다. 제 머리 속에 있죠.”

그렇게 말한 재준은 자신의 랩탑을 열었다. 비밀번호 따위는 없는지 바로 엔터를 치는 모습에 승운은 아무리 개인 랩탑이라도 암호는 설정하는 게 좋다고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나타난 바탕화면에는 어떠한 폴더도 없었다.

“모니카 살레가 가져간 보고서는 아주 일부입니다. 보고서는 몇 개로 나눠서 백업을 해뒀는데, 하나만 봐서는 알 수 없을 겁니다. 논문도 여러 개로 분리해뒀습니다.”

재준은 바로 파인더에서 문서함을 열어 숫자를 검색하더니 몇 개를 훑어본 뒤 특정 파일을 열었다.

“라제쉬 박사님들이 하던 대로.”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승운에게 한번 옮긴 재준은 다시 랩탑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녀가 가지고 간 보고서에는 에스퍼 또한 괴수가 될 수 있다는 것 정도만 있습니다. 실험 보고서는 디지털 파일로 저장해두지 않았으니까요. 어디 있는지 알고 싶으시다면 말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승운이 답했다.

“비밀로 놔둬야 비밀인 거니까.”

그 말에 재준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승운의 표정을 확인하는 듯한 재준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재준이 “여기.” 하고 랩탑을 승운의 앞으로 내밀었다.

“모니카 살레…… 에소노프가 가지고 간 보고서입니다.”

승운이 랩탑을 받아들고 트랙패드로 파일을 살폈다.

[형질전환유전자가 뉴클레오티드 서열에 작동 가능하게 연결된 발현—조절인자를 포함하여…….]

“…….”

[발현—조절 요소가 파괴자 뉴클레오티드 서열의 발현을 억제하여 재조합 효소 인식 위치에 작동 가능하게 하는 연결을 포함하였으며 억제자 뉴클레오티드 서열의 파괴를 매개로…….]

“예에.”

재조합효소? 암호화 서열을 포함하는 활성자 형질전환 유전자?

확실한 것은 승운은 이것을 이해할 만한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였다.

“그렇, 흠. 이런 거군요.”

승운이 랩탑을 그대로 재준에게 돌려줬다. 봐도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경원이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보고서를 요청해도 되나 싶어 말을 꺼내려고 재준을 바라보자,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모습에 승운이 움찔했다.

“왜요?”

“입 맞춰도 되나요?”

“……제가 설마 거절할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죠?”

“그건 아닌데, 그냥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재준의 말에 승운이 웃어 보이더니 눈을 감았다. 원하는 대로 해보라는 듯한 얼굴에 재준이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피부가 손가락에 닿았다. 승운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재준은 승운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잡아먹을 듯 다가섰다.

* * *

당연하지만 지승운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지속적인 가이딩도 물론 영향을 끼쳤지만 정서적인 부분에서 충족이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목에 울혈자국이 상당해서, 재준은 자국들을 터틀넥으로 가렸지만 지승운은 그런 걸 가릴 생각조차 없는지 불긋한 목덜미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제7센터에 있는 대부분의 에스퍼나 가이드들도 지승운의 상대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제 것이라 저렇게 낙인을 찍어둔 모습을 질린 얼굴로 바라봤지만 도리어 승운은 당당했다.

오히려 제 목에는 이런 저런 흔적이 있어야 한다든가, 목줄 같은 것에 관심이 있냐고 언급하던 재준의 모습에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차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의외로 재준은 말만 그렇게 하지 특별한 성벽이 없었다. 단지 조금 밝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건 승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자신을 탐내는 게 지독하게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목줄 정도는 정말 차 줄 수 있는데, 한번 넌지시 말해볼까 싶었다.

“웃지 마라, 무섭다.”

경원이 말했다. 승운의 시계를 체크하고, 피를 뽑고 에너지 레벨을 살핀 경원은 별다른 이상은커녕 오히려 상태가 더 좋아지는 지승운을 보며 조금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르몬 검사 다시 받아볼래?”

“왜?”

“아니, 그냥 뭔가 이상해서.”

“어차피 수치는 안 바뀌잖아.”

“등급이 안 바뀌는 거지. 수치 자체는 조금씩 늘었다 줄었다 하기도 해.”

“필요하면 알아서 해. 자료는?”

“지금 보낼게.”

승운의 말에 경원이 랩탑을 통해 메일 하나를 전달했다. 알람 소리에 승운이 제 핸드폰을 확인했다.

“카티야 가텐.”

52세, 독일 브레멘 출생.

카티야 가텐의 행적은 중간 중간 끊겨있어서 전체적인 흐름을 알기 어려웠다. 학교는 여기저기로 옮겨 다녔고, 개중 몇몇 유럽 대학에서는 제적당하기도 했다. 40대 초반이 되어서야 그나마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마저도 몇몇 제약회사 소속이었던 것 정도뿐이다. 이례적인 승진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지승운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카티야를 바라봤다.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게르만 계통의 생김새는 아니었다. 뭐, 유럽인이니까. 게다가 서독 출신이기도 하고.

지승운과 함께 경호를 하기로 한 B급 에스퍼는 센터 소속이었는데 박형기 박사와 아는 사이인지 진작부터 그쪽에 가 있었다.

DMZ로 이동하는 차는 총 두 대였는데, 길을 아는 것이 예지와 재준뿐이라 둘이 나눠져야 했다. 어차피 초입이라 잘만 따라오면 된다는 예지의 말에도 박형기는 한사코 아는 사람과 동승해야 한다며 거부했다. 결국 예지는 박형기 박사와 함께 가야했다. 싫은 얼굴을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박형기가 재준을 불편해해서 그와는 가지 않을게 분명했다.

이게 바로 말단의 슬픔인가보군, 예지는 끔찍한 얼굴로 박형기 박사와 무슨 뻔뻔함으로 온 것인지 모를 박요한 가이드를 바라봤다. 박요한 가이드는 얼굴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전반적으로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독기가 오른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서워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지.

반면 지승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재준의 옆에 서 있었다. 애정표현을 잔뜩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남들 있는 곳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 재준의 정체가 탄로라도 날까 애써 표정을 숨겼다. 물론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내심 뿌듯해 하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겠지만, 이곳에서 지승운을 잘 아는 이는 없었다.

재준이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승운을 바라봤다. 단정한 옷차림의 경계 언저리에 반쯤 가려진 울혈 자국이 보였다. 역시 조금 심했나 싶지만, 얼핏 들리는 소문에 여전히 지승운과의 하룻밤 정도를 노린다는 가이드들이 있어 저 정도는 해두는 것이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마 승운은 사람들이 자신을 노리는지 모르는 듯했으니까.

카티야 가텐은 박형기 박사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더니 재준과 승운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같은 차를 타려는 듯 했다.

“잘 됐군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재준이 말했다. 그들의 앞까지 도착한 카티야가 재준과 승운을 번갈아 바라봤다.

“카티야, 이쪽은 대한민국의 S급 에스퍼인 지승운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지승운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손을 내밀었다. 카티야는 가만히 내밀어진 손을 바라봤다.

“지승운 씨, 이쪽은 스태그비틀 사의 카티야 가텐입니다.”

“카티야입니다.”

카티야가 손을 마주잡았다. 하지만 뭔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승운이 손에 살짝 힘을 줬다. 웃고 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라는 것을 재준은 알아차렸다.

“반갑습니다.”

에스퍼처럼 보였는데 에스퍼가 아닌가? 승운이 생각했다. 묘하게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느낌이었는데. 이런 경우는 보통 동족이거나 아니면 가이드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이드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진짜 평범한 인간인건가?

“한 차에 다섯 명씩이라 이쪽에 신세를 지려고 합니다. 저쪽은 가이드와 에스퍼, 세 명의 연구원으로 꽉 차서요.”

그 말에 승운이 박형기 박사 쪽을 바라봤다.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의 연구원이 있었는데, 그 중 누구 한명을 보내야 할지 정하지 못한 듯 했다. 이곳에는 재준과 승운, 그리고 카티야 뿐이다.

“유 연구원이 오면 좋을 텐데요.”

“길을 모르니까요. 아마 운전도 유예지 연구원이 하게 될 것 같군요.”

재준의 말에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자신이 운전을 해야 했다. 저쪽에서 누구를 보낼지 정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듯 했다. 승운이 카티야를 향해 슬쩍 미소 지으며 질문했다.

“함께 가시는 건 가텐 씨 뿐입니까? 함께 오신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예, 하지만 그 분은 이런 위험한 곳을 다니지 않아요. 사무직이기도 하고.”

“가텐 씨도 사무직 같은데요.”

“저는 현장에 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승운과 재준이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 현장이라고 하면 이런 장소일 텐데, CFO가 이런 곳에 다닐 일은 없지 않나? 아니면 오지산간이나 괴수출몰지역에 가서 학자들에게 입사를 권유하기라도 한 걸까? 그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승운이 그녀에게 뭔가를 질문하려던 찰나, 저쪽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연구원 한명이 걸어왔다. 그를 예지가 아주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동하시죠.”

승운이 말했다. 재준이 뒷문을 열어 카티야가 먼저 들어가도록 해줬다. 다른 연구원은 제 손으로 조수석 문을 열어 탔다. 엇, 거기는 박사님 자리인데. 승운이 당황해했지만 그렇다고 나오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예지가 운전하는 차가 앞장섰다. 박형기 박사가 순순히 동의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가 따라가는 길을 그대로 가면 되는 승운으로서는 운전하기에는 편했다.

“이곳에 꽤 많은 괴수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뒷좌석에서 하는 이야기에 끼어들기 쉽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LFE종이 많다고 들었는데 딱히 보이지는 않네요.”

“괴수도 야생동물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을 피해 다니니까요.”

“사람들이 들으면 웃겠네요. 괴수들은 사람을 공격한다고 알고 있으니.”

그거야 사람들은 세상이 사람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까. 뭐, 하지만 카티야의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카티야는 심심한 광경이라고 말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곳에 오신 이유가 단순히 괴수를 구경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이런 식의 탐사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재준의 말에 카티야가 시선을 돌렸다. 얼핏 보면 차가운 눈이었다. 하지만 웃자 따스함이 어렸다. 이 느낌을 어디서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래, 지승운과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냥 야생 상태의 괴수들이 보고 싶어서요.”

“DMZ는 사파리가 아닙니다. 그나마 괴수 덕에 지뢰들이 많이 발견되어 터지긴 했지만 어디에 어떻게 있을지 알 수 없어요. 위험한 곳입니다.”

“에스퍼가 동행하잖아요.”

이어지는 카티야의 말에 승운이 웃어보였다. 에스퍼가 동행한다고 유사시에 자신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사치인데.

만약 무슨 일이 터진다면 승운은 재준만 들고 도망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든 그건 그의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운전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조수석에 앉아있는 중앙연구소 소속 연구원뿐이었다.

카티야가 이어 물었다.

“그러면 괴수 개체 수 조절에 관한 연구도 하시는 건가요?”

“……생태학 연구 주제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건드리기엔 모르는 것이 굉장히 많아서요.”

“그래도 다양한 사례를 볼 수 있을 텐데요. 예를 들자면 원형과 괴수가 만난다면요?”

“…—일단 사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교접으로 번식이 가능한지 생물학적 차이를 알아보긴 해야겠지만. 하지만 실험해 보기엔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형질이상자와 인간은 번식이 가능하니까요.”

“그렇죠? 원형이라면 유전자나 염색체 수가 같아서 가능할지도 몰라요. 차이가 유인원과 인간만큼 큰 것도 아니어서.”

그 말에 재준이 웃어보였다. 한때는 동물과 인간이 번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특히 늑대인간의 경우 늑대와 인간이 번식해서 생긴 것이라고들 알려지지 않았는가.

지금 와서 보면 늑대인간 역시 괴수 중 하나였지만, 그들이 어떻게 발생하였고 어떤 형태로 늑대인간의 모습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아직 생포한 늑대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유럽에 개체가 조금 남아있다고는 알고 있는데, 그들 역시 평소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 찾기 어려웠다.

“유인원과 인간의 유전자가 얼마나 차이 나는데요?”

승운이 물었다. 아닌 것 같으면서 이야기를 다 들은 듯 했다.

“한 1%정도?” 재준이 답했다.

“……차이가 나는 겁니까?”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생긴 건 비슷해도 공통점이 없어요.”

굳이 따지면 생김새도 다른 편이긴 했지만,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비슷한 축에 속하긴 했다. 그래도 온 몸이 털로 덮여 있는 것과 털도 꼬리도 없는 인간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인간이 동물들 중에서는 좀 특이하게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원래 모든 종은 유전적으로 변형된 것이니까.”

“고등생물은 전부터 독립적으로 있던 미생물의 유전적 결합으로 생겨난 겁니다. 세포생성에 관여하는 낯선 물질이 동물들의 체내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게 한 거죠.”

재준이 말하자 카티야가 이어 말했다. 나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리어 뷰 미러로 보이는 승운의 눈동자가 좌우로 살짝 흔들려, 이해 못했다는 것을 재준은 알 수 있었다.

“어렵게 말하시지만 쉽게 말하면 그냥 미토콘드리아입니다. 유전자라는 건, 결국 세포와 게놈의 단계니까요. 모든 동물들, 기니피그나 쥐, 초식동물이나 육식동물, 괴수, 그리고 인류 또한 계속 추적해 들어가면 많은 유전자를 달고 있는 세균 단계로 하락하죠.”

“그리고 거기에 태양이 큰 역할을 합니다.”

“큰 역할이요?”

“태양이 미토콘드리아의 에너지 생성을 촉진시키니까요. 햇빛이 없다면 활성화되지 않죠. 다만 지나친 자외선은 DNA 손상을 일으키니까요.”

“괴수의 출현 말이군요.”

승운이 말했다.

괴수의 출현은 1970년대에 일어났던 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던 시기에 오존층과 괴수의 연관성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년 뒤인 77년 오존층의 파괴로 자외선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이들의 생명체를 구성하는 분자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외선은 표피층에 작용해 홍반과 일광화상을 일으켰고 생물체 면역 기능을 저하시켜 특정 세포를 활성화함에 따라 인간 이외의 생물체에 돌연변이 형질이 나타났다.

문제는 오존층이 복구되고 자외선의 95%가 흡수되었음에도 돌연변이 형질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

과학자들은 그것을 뭐라고 볼까? 승운으로서는 알 수 없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들 역시 말해주지 않았다. 승운이 리어 뷰 미러로 뒷좌석을 바라봤다.

카티야는 팔꿈치를 창가에 댄 채 턱을 괴고 재준을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닥터, 저희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도 투자를 할 생각입니다.”

“독일로는 갈 생각이 없습니다.”

“연구소는 미국에 있어요.”

“미국도 딱히.”

“아쉽네요. 생각이 바뀌면 꼭 연락 줘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재준의 무릎 위에 손을 올리는 카티야의 모습에 재준이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승운이 상황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불편했다. 승운은 나름대로 자꾸 재준을 꼬시는 카티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잘난 사람이긴 했지만 굳이 간다고 한다면 스태그비틀 같은 곳이 아니라 좀 더 좋은 곳으로 갔으면 하는 마음이 절반, 중앙연구소나 DMZ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반이었다.

뭐, 사실 어딜 가든 상관이 없긴 했다. 재준이 떠난다면 승운도 휴직계를 내고 따라가면 되니까. 그래도 스태그비틀은 마음에 안 든다.

“제가 파트너가 있어서요.”

재준이 말했다. 승운은 순간 뒤를 돌아볼 뻔 했다.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카티야도 미묘한 표정으로 재준을 바라봤다.

“……파트너 비자도 원하시나요?”

“갈 생각은 없습니다만, 간다면 당연히 파트너 비자가 있어야겠죠.”

“예에.”

사실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갈 생각이었는데 자길 데려갈 생각이 있다는 사실에, 승운은 비실비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 모습을 연구원이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승운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저나 괴수뿐만 아니라 생물체가 살기 좋은 환경이네요. 지뢰만 없다면.”

카티야가 말했다.

“그래요, 이쪽도 나쁘지 않겠어.”

이어지는 말은 조금 의미심장했다. 역시 박형기 박사는 연구소도 민간 쪽으로 돌릴 생각인 걸까? 그 정도의 힘이 있는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위에서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단체는 국가 소속인 것이 훨씬 나았다.

“그런데 이곳의 먹이사슬은 어떤가요? 역시 괴수끼리 잡아먹기도 하나요? 아니면 일반 동물들? 아니면 먹이를 직접 주는 경우라든가요.”

“먹이를 직접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연구를 위해 잡을 때만 주는 편이죠.”

“그거 아시나요, 박사님?”

카티야가 물었다.

“괴수들도 선호하는 고기가 있어요.”

“그렇습니까?”

“예. 사육사들은 잘 알죠. 괴수 종류 별로 어떤 것들을 선호하는지.”

그렇게 말하며 바라보는 카티야의 시선이 의미심장했다. 괴수들이 좋아하는 고기라고 해봤자, 괴수화 되기 전과 흡사할 뿐이다. 그런데 뭔가 비밀인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이…….

사기꾼인가?

재준이 그녀를 의심했다. 하지만 명함이나 박형기 박사가 대하는걸 보면 사기꾼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재준이 말했다.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이직에 대한 거라면 더 환영입니다.”

“굳이 DMZ까지 오신 이유가 뭡니까?”

카티야는 이어지는 질문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더욱이 별로 바라는 내용이 아니라는 얼굴로 재준을 바라봤다. DMZ까지 온 이유라니. 이 장소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연구소를 말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박형기 박사가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줬습니까? 제안이라든가, 정보라든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

그 말에 그녀가 허공을 바라봤다. 마치 박형기 박사가 어디에 도움이 되는지 떠올리기라도 하는 얼굴이다. 하지만 곧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박 박사는 예상대로였어요. 하지만 여기서 생각지 못한 것을 얻긴 했죠.”

그렇게 대답한 카티야는 조금은 서늘해 보이는 눈으로 재준을 응시했다.

“때가 오면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요? 궁금해지네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면서.

DMZ투어를 마친 카티야는 루카스 영과 함께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그들이 뭘 얻었는지,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박형기 박사 역시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이럴 거면 오지 말지 왜 와서 사람 피곤하게 하냐는 예지의 말에 재준도 동의했다. 정말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카티야 가텐과 루카스 영이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을까요?”

예지가 물었다. 재준은 이번에도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상황은 어때요?”

“그럭저럭. 애초에 흡혈괴수종의 생리라는 것을 알아내기가 조금 힘들어서. 아, 맞다. 치아에 구멍이 있더라고요. 뱀처럼. 잠피레스쿠 박사님이 흡혈괴수종은 신경 독을 가지고 있대요.”

“신경 독?”

“예, 목덜미든 어디든 물면 신경독이 흘러나와 인체의 신경을 마비시켜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데, 체내 생성 독이 아니라 특정한 것을 먹어야만 생성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흡혈괴수종이 먹는 건 피 뿐이잖아요. 살아있는 흡혈괴수종이 있으면 좋은데 인간 형태라 유럽 인권단체에서 반발이 많은가 봐요. 그래서 좀 전통적인 방식을 찾아보고 있다는데.”

“어떤 방식?”

“흡혈괴수종이 박쥐로 변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박쥐 형태와 흡사한 흡혈괴수종을 또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기전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것도 비교해보기 전엔 모르니까 역시 인간 형태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죽은 거 말고 산거.”

“인간형 흡혈괴수종은 소통이 가능해서 말만 잘 하면 어떻게 도와줄 것 같기도 한데.”

“……난 도와줄 것 같지는 않던데. 그런데 박쥐 중에선 흡혈하는 종이 드물지 않나?”

“아, 그렇죠? 아무래도 꿀 먹는 애들이 더 많으니까.”

“그래도 근연종이 포유류긴 하니까 찾아보면 되겠다. 그러고 보니 박쥐 형태의 괴수를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던데, 에르난데스한테 연락해줄까? 그쪽이 그런 게 많더라고.”

재준의 말에 예지가 “완전 좋죠!”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이 대화를 듣고 있던 태환과 경민은 조금 찝찝한 얼굴을 하며, 연구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난 저 두 사람이 조금 두려워.”

묘하게 무섭다고. 태환의 말에 경민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한 것도 아니었다. 이상한 사람들이긴 했다.

***

귀찮아.

아니, 귀찮음 보다는 짜증에 더 가까운 상태였다. 이쪽에선 저걸 시켜대고 저쪽에선 저걸 시켜대고. 해야 할 일은 쌓였는데 문제가 생겼으니 본청으로 오라는 말에 지승운은 팔자에도 없는 출장을 왔다. 그것도 1박2일로.

하룻밤을 여기에서 자고 가야하다니.

혹시 모르니 대비하는 게 좋겠다는 말에 재준이 밤새 잔뜩 들러붙어 준 것 빼고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시계 속 퍼센테이지는 99.8%를 유지하고 있었다. 몸 상태는 최고였지만, 정신 상태는 엉망이었다.

지승운은 핸드폰을 꺼내 바라봤다. 재준의 자는 모습을 몰래 찍어 배경화면으로 만든 것인데, 얼마 전에 들켰다. 재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음엔 눈 뜨고 찍은 걸로 해두라는 말만 했다.

지금 전화하면 바쁠까. 역시 업무 시간에는 전화하면 안 좋겠지. 어떻게 다른 에스퍼들은 제 가이드를 놔두고 하루 종일 떨어져 있을 수 있을까. 정말 의문이었다.

지승운은 분리장애가 생긴 사람마냥 단 한순간이라도 재준과 떨어져 있다간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찾았다. 사실 어느 정도 거리는 괜찮았다. 그러니까 연구소와 7센터 에스퍼 건물 정도라면 참을 수 있었다. 떨어져 있는 거야 기껏해야 대여섯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너무 길었다.

역시 다음 출장에는 가이드 동반을 신청해야겠다고 생각한 승운은 조사국으로 향했다. 애초에 왜 그들이 자신을 보자고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뭔가 오랫동안 참여를 해야 하는 일에 투입된다면 귀찮아지는데. 게다가 아직 지승운은 VIP 경호 업무에 배정되어있었다. 설마 그 업무를 마치고 다른 업무에 투입 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핑계를 대며 거절해야 하지? 생각하며 걷는데 반대편 복도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승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쪽도 승운을 본 듯 했다.

굳이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니었다. 승운은 못 본 척, 그를 스쳐지나가려고 했다. 승운에게 말을 건 것은 그쪽이었다.

“지승운 에스퍼.”

생각보다 뻔뻔한 건가. 승운이 남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제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 이는 두려움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제 앞을 막아섰다.

“박요한 가이드.”

그렇게 말한 승운이 팔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10분 정도 여유가 있기는 했다. 시계를 내린 승운이 박요한에게 “저한테 말을 걸 줄은 몰랐는데요.” 라고 말했다. 박요한 가이드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제가 무섭지 않은가 봅니다?”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싱긋 웃어보이자, 박요한의 시선이 얼굴에 고정됐다. 예전이라면 이 시선을 즐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가이드라는 존재들은 외모에 눈이 멀어서 무서워도 다가오는 겁니까?”

그 말에 박요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이는 모습에 귀찮아졌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고, 아니면 말지. 결국 우물쭈물하자 승운이 그대로 박요한을 지나쳤다.

“……후회할 겁니다.”

그때 박요한이 말했다.

“뭘요?”

승운이 멈칫하더니 몸을 다시 돌리며 물었다.

“그쪽 가이딩을 받지 않은 거요?”

“그건—.”

거기에 대해서 박요한은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지승운 에스퍼가 가이드를 찾았다는 기사와 뉴스를 박요한도 봤다. 김 씨 성을 가진 A급 에스퍼라고 했던가. 자신보다 실력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지승운의 상태가 나아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얼핏 본 시계도 녹색이다.

자신보다 더 나은 가이드라니. 이 한국에서.

그게 박요한의 자존심을 건드리긴 했지만, 괜찮다. 어차피 그는 곧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그것과 별개로 제 제안을 거절한 걸 후회할 겁니다.”

“후회할 거라는 걸 알려주려고 온 거라면 됐으니까 내 눈앞에서 꺼져요.”

“지승운 에스퍼. 제가 그때 한 제안은 정말 최고의 제안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체제가 완전히 뒤바뀔 테니까요. 연봉도 지금보다 3600배는 더 받을 수 있었겠죠.”

박요한의 말에 승운이 피식 웃어보였다. 꽤나 구체적인 금액이었다. 국가직 A급 가이드가 받는 연봉은 약 1억 가량. 그러니까 그에게 연봉 3600억을 제시했다는 뜻일 것이다.

돈이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지금이라도 저와 함께—.”

“박요한 가이드.”

가이드에게 돈이 그렇게 중요한가?

“날 데리고 오면 뭔가 보상이라도 준다고 합니까?”

적어도 에스퍼를 꼬시려면 돈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걸 가져와야 할 것이다. 지금 지승운에게 그런 제안을 한다면……. 글쎄, 현재준의 목숨이 걸려있지 않는 이상은 움직일 생각은 없다.

“너 뭘 알고 있어?”

하지만 정보를 위해 떠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박요한 가이드.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겁니까?”

“……저와 함께 갈 생각이 없는 사람한테 말 할 의향은 없습니다.”

그 사이 머리가 좀 자란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지승운 에스퍼는 제 가이딩을 받을 생각도 없잖아요?”

그거야 내 가이드가 있는데 굳이 남의 가이드와…….

“하지만 그 가이드를 놓고 나와 페어가 된다면.”

“아직도 포기 못했나본데.”

머리가 자랐다는 말은 취소다. 박요한은 아직도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상대하는 것조차도 시간낭비였다. 지승운이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늦었다간 아무래도 조사국에서도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지승운이 시선을 박요한에게 옮겼다. 박요한은 입을 움찔거린 채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기다릴 필요조차 없는 말인데, 멍청한 건지 성실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한 지승운은— 그래도 멍청 쪽에 더 가깝다고 결론을 내리며 말했다.

“그냥 꺼져요.”

* * *

“잠피레스쿠 박사님이랑 연락이 안돼요.”

“시차 때문 아니야?”

예지의 말에 재준이 반문했다.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시계를 확인했다. 퇴근 시간이니 그쪽은 이제 막 업무를 시작할 때였다. 조금 있으면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재준의 말에 예지는 “그렇겠죠?” 라고 답했다. 이틀째긴 하지만, 유럽인이니 그 정도는 감안해야했다.

재준도 퇴근하기 전에 메일을 살폈다. 시리예는 메일을 확인했는데, 에르난데스나 보리스는 메일을 확인하지 않았다. 당장 보낸 거야 확인할 수 없다 치더라도 며칠 전에 보낸 것 까지 확인을 하지 못한 것은 조금 이상했다.

“뭔 일 있어요?”

김태환이 물었다. 재준의 퇴근은 항상 승운의 일이었지만 제1센터에 일이 있어 하루 가 있는 동안은 태환의 일이 되었다. 예전이라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했을 법한 태환도 이젠 일이 익숙해져서인지 어떤 반항도 없이 제 직업이 운전수인 것 마냥 행했다. 의외의 사항은 잠시 외부에 나가있던 이경민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어제 승운이 떠날 때 이경민 에스퍼가 올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원래 그들은 한 팀이어서 한꺼번에 움직인다던가. 지금은 지승운이 떨어져 나와 있긴 하지만, 아마 맡고 있는 케이스가 끝나면 전부 한 센터로 올 것이라고 했다. 맡고 있는 케이스가 몇 건이냐는 말에 승운은 대답하지 않았으니 한건은 아닐지도 몰랐다.

경민 또한 “뭔 일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지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대답하니 더 캐묻기도 애매해 경민은 어깨를 으쓱이곤 연구실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 이경민은 전형적인 핸드폰 중독이었고,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당중독인 제 형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별 일 없으면 퇴근 준비 합시…….”

경민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예지와 태환이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재준은 랩탑의 자료들을 저장하고 백업하며 슬쩍 시선을 줬다가 화면으로 돌렸다.

가기 전에 메일의 수신 확인을 한 번 더 확인한 재준은, 그 사이 시리예가 메일을 읽은 것을 확인했다. 곧 답장이 오겠거니 하며 랩탑을 닫는데, 묘하게 주위가 조용했다. 재준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예지와 태환이 이경민 에스퍼의 뒤편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동영상인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재준이 물었다. 그러자 세 사람이 동시에 재준을 바라봤다. 정말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건가?

“박사님.”

예지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그 말에 재준이 그쪽을 향해 다가가다가, 핸드폰에 울리는 알람음에 멈칫했다. “잠깐만.” 하고 말하며 멈춰선 재준이 앱을 열자 시리예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메일에는 10분 뒤에 전화를 할 테니 꼭 받으라는 내용만 적혀있었다. 왜 그러지? 재준이 의아한 얼굴로 이경민 에스퍼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경민이 제 핸드폰을 재준에게 넘겼다.

짧은 클립 동영상이었다.

맑은 하늘 아래로 무언가가 주유소 건물을 부수고 있었다. 끼에에에엑,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며 콘크리트 덩어리 하나가 떨어져나갔다. 화면 너머로 ‘영화야?’ 하고 물으며 웃던 사람들이 이내 사태 파악을 한 것인지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뒤로 물러서며 도망치던 화면이 곧 전환되며 앞으로 바뀌었다. 앞에도 아수라장이었다. 곧이어 펑 소리가 나더니 동영상은 끊어졌다. 하지만 이 영상을 올린 것을 보면 찍은 사람이 살아있는 것은 분명했다.

“지금 미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경민이 말했다. 그것 말고도 비슷한 형태의 클립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미 대륙 전역에서요?”

“미 대륙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일어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경민은 올라오는 클립들을 스크롤 했다. 뭔가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아비규환이 언젠가 일어난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기시감이 아닐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괴수들이 폭주를 일으킨단 말이죠?”

주유소를 부쉈던 것은 BCW 종의 괴수다. 날짐승을 기원으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준이 알기로는 BCW는 저런 식으로 괴성을 지르는 종류가 아니었다.

“유예지 연구원.”

“네, 박사님.”

“잠피레스쿠 박사님한테 다시 연락해봐.”

그렇게 말한 재준은 시리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시리예는 전화를 받지도, 10분 뒤에 전화를 걸어오지도 않았다.

* * *

1981년 12월, 51 연구소에서 탈출한 괴수가 라스베이거스에 나타났다고 한다. 다른 도시였다면 숨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때 사람들이 봤던 괴수와 51구역에 대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미 정부는 해당사항을 온전히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발표를 미뤄 어영부영하는 사이 남프랑스에서 괴수가 나타났고, 괴수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인증된다.

2022년 10월 중순, 다시 미 서부에 괴수가 나타났다.

동시다발적으로 재난문자가 울렸다. 괴수는 동쪽으로 퍼져나갔다. 서부에서 동부로, 다시 유럽으로. 시리예는 물론이고 잠피레스쿠 박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영상이 최초로 올라왔던 것이 그저께라고 했다.

“이게…….”

재준은 퇴근하지 않았다. 퇴근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 여겼다. 각 국가들은 이 사항에 대해 미리 알고 서로에게 언질을 준 듯 했지만 일반 사람들에게까지는 알리지 않았다.

“어떻게 되는 걸까요?”

예지가 물었다.

“음, 아무래도 털 때문인 것 같아.”

재준이 답했다.

“머리털…… 같은 건가? 하긴, 우리도 소름끼치는 일이 있으면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은 들지만. 그건 뭔가 좀 짐승 같지 않아요?”

“인간도 동물이니까. 어쨌든, 다른 누군가가 페로몬을 느껴야한다는 건데, 그러려면 그게 휘발성이어야 한다는 거니까. 하지만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분자를 인식하려면 어느 정도 표면에 유지가 되어야 하는 건데 그러면 인체에서 생성되는 유분일 가능성이 커.”

“머리 기름을 통한 페로몬 인식이라니…….”

“아직 인간에게서 그걸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물에게도 그런 예시가 있으니까. 수컷 염소의 경우 털에서 휘발성 페로몬이 나오거든.”

태평하네. 태환이 생각했다.

여기서 태평하지 않은 건 재난문자 정도였다. 또 다시 울리는 긴급재난 문자를 확인한 태환은 괴수 출현으로 위험하니 외출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알람을 껐다.

아마 지금쯤 영종도는 난리겠지. 물론 고성도 난리긴 할 것이다. 하지만 거주민이 대부분은 군인, 혹은 형질이상자만 있는 곳에서 위험해 봤자다. 그러나 지승운은 절대 재준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말했다.

유난이야, 정말. 물론 태환도 재준의 집에 가봤기 때문에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다. 식물종 괴수라고 하더라도 괴수는 괴수일 테니 폭주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위험한 상황은 아닐게 분명했다. 정 안되면 태환이 처리를 해도 상관없었다. 기껏해야 식물이었으니. 물론 그랬다간 재준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볼지도 몰랐다. 실험용이라고 하니까.

어쨌든 상황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지승운은 자기가 고성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절대 재준을 밖으로 보내지 말고 잘 지키라고 말했고, 태환은 나가지도 못한 채 연구실에 처박혀 재준과 예지를 보고 있었다.

반면 이경민은 몸 풀기 좋겠다며 괴수를 사냥하러 떠났다.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간만에 물 만난 고기처럼 괴수를 처리하러 나갔다. 태환도 그 사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여기에서 웬 머리 기름 페로몬 같은 소리를 듣는 것 말고.

“그러니까 ‘이그노라빌라스’가 물질이 아니라 동물일 수도 있다?”

“동물일 수도 있고 식물일 수도 있겠지. 식물도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름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든 괴수학자들은 뒤로하고 태환은 뉴스나 소셜미디어를 확인했다. 뉴스를 볼 때면 큰 일이 난 것 같고, 동영상을 보면 다들 지구가 망한 것이라고 떠드는데 소셜미디어에서는 다들 이 상황을 신기해하면서 제 삶을 살고 있고, 혹은 괴수 사진을 찍어 올린 이들도 있었다.

어느 지역은 괴수 때문에 통신이 끊겼다가 복구됐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저거 일반인들이 맨 몸으로 복구 시킬 수 없는데 어디 에스퍼 호위라도 붙였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우리나라 기업이 과연 돈을 써가면서 그럴 것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음. 하지만 우리가 에스퍼가 아니니까 그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한 예지가 고개를 홱 돌려 태환을 바라봤다. 김태환은 갑자기 자신에게 몰린 시선에 움찔했다.

“왜, 왜요?”

“박사님 보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예?”

“절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

못… 못생겼다?

처음 드는 생각은 그거였다. 지금은 보다보니까 그냥 평범해 보이지만 뭐. 그랬다. 태환은 자신이 저 눈을 달고 다닌다고 생각한다면 조금 끔찍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로든 세로든 너무 작잖아. 어쨌든 그건 과거의 일이었고, 지금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묻는다면.

“아무 생각도 안 드는데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걸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저한테 무슨 냄새 납니까?”

“…….”

이게 뭐하자는 거야. 태환이 움찔하며 물러섰다. 그러자 재준이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태환이 다시 물러섰지만 이번에는 예지가 다른 쪽에서 다가왔다. 마치 먹잇감을 모는 것처럼 벽 쪽을 향해 태환을 유도한 두 사람이 천천히 태환에게 다가섰다. 주춤주춤 물러선 태환의 등에 유리벽이 닿았다.

“김태환 에스퍼.”

무섭게 왜 이래!

“아무 냄새도 나지 않습니까?”

“어디 한번 대답해보세요.”

누가 나 좀 살려줘! 태환이 속으로 도움을 외쳤지만 지금 당장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대장!”

유리벽 너머로, 지승운의 모습이 보였다.

*

박요한은 떠나는 지승운을 향해 후회할 거라고 몇 번이나 외쳤다. 후회는 무슨. 승운에게 후회란 감정을 줄 수 있는 인물은 세상에 단 한명밖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승운은 그런 상황이 오도록 만들지도 않을 것이었다.

박요한에게 더 이상의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조사국으로 갔다. 그리고 미 서부부터 시작해서 동시다발적으로 괴수가 출몰한다는 정보를 알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괴수의 폭주였다.

후회할 거라는 박요한 가이드의 말이 뭔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런데 박요한 가이드는 이 사태를 사전에 어떻게 알았는가?

“지금 당장 박요한 가이드를 잡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분명 뭔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조사 결과 박요한도 자세히 아는 것은 없었다.

조사국은 박형기 박사 역시 잡아들였다.

* * *

“대장!”

지승운은 유리벽 너머로 재준과 가까이 닿은 태환을 바라봤다.

“어서 와요!”

자신을 반기는 태환과는 반대로 승운은 가슴 한 구석에서 삐죽하니 못된 성격이 나올 것 같았다. 태환과 재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물론 재준이 태환에게 다가 선 것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겠지. 재준의 취향에 태환의 얼굴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안다. 둘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거리에는 승운이 모르더라도 나름 납득 가능한 사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너무 가깝다고.

그걸 태환도 느꼈는지 움찔하는 듯 했다.

재준이 몸을 돌렸다. 동시에 승운이 출입카드를 갖다 대고 연구실로 들어왔다.

“지승운 씨.”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말했지만, 그 얼굴에 반가움이 묻어나 있었다. 방금까지 굳어있던 얼굴이 살살 풀어지자 태환은 이제 살았다는 얼굴로 옆으로 피해 달아났다.

“어떻게, 내일 오는 거 아니었습니까?”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내일 와요.”

승운이 조사국에 들어갔을 무렵에는 인도에서 괴수들의 폭주가 일어나고 있었다.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이상폭주는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확산됐다. 박요한이 붙잡히고 박형기 박사를 소환하는 순간에도 괴수들은 점점 동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승운이 서울에서 출발하려고 할 때쯤에는 이미 한국 역시 괴수 이상폭주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다.

승운이 재준의 허리를 감싸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걱정했어요.”

재준 역시 승운의 등을 토닥였다.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까봐.”

재준은 자신에게 별 일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물론 괴수는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언제든 이 건물로 침입할 수 있었지만, 지하나 사육장에 있는 괴수들은 별다른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에스퍼들이 많은 이곳에서 큰 일이 일어나기는 힘들었다.

다만 걱정인 것은 제 시계와 연동된 지승운의 상태가 서서히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내내 공들여 충전해둔 것이 쭉쭉 줄어드는 것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시계를 뒤집어뒀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 괜찮습니다.”

“괜찮아야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가만히 뒀을 리가 없었다.

“지승운 씨는 괜찮습니까?”

승운은 대답하는 대신 웃어보였다. 역시 자기를 걱정하는 건 재준 밖에 없었다. 다들 어떻게 써먹을까 생각만 하는데.

“퍼센테이지가 많이 떨어져서요.”

“아, 그래도 80퍼센트 이상인데.”

“하지만 100퍼센트는 아니지 않습니까.”

재준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예지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제 핸드폰은 2퍼센트가 되어야 부랴부랴 충전하는 주제에 80퍼센트 넘은 상태인 지승운을 왜 걱정하고 있냐. 폭주 위험 상태로 몇 년을 보냈다는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콩깍지가 쓰인 것인지 재준은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 S급 에스퍼를 홀로 걱정 중이었고, 그거에 좋다고 웃는 에스퍼도 똑같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직 상황파악 중입니다. 다만 괴수들의 폭주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걸 보면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고, 어떤 촉매제가 있지 않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박사님은 뭔가 알고 계신 거 있으신가요?”

“글쎄요. 보통 촉매라고 하더라도 특정 모든 괴수에게 동시에 작용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나타나는 괴수들의 종을 모르겠군요. 재난 문자에도 그냥 괴수 출현이라고만 나오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 비행종 괴수들뿐이다. 재준이 나름 아끼는 비행종 괴수인 ‘빙글빙글’은 아직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나무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승운은 제가 이곳으로 올 때까지 만난 괴수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 날짐승의 생김새였다. 도로를 막는 괴수는 없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거나 공격을 하는 괴수들만 있었을 뿐이다.

태환은 계속 안에 있어서 밖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경민 형한테 전화해볼까요?”

신나서 괴수 사냥하겠다고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뭔가 본 게 있을 것이다. 사실 태환도 여기 있는 것 보다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초창기에는 위험한 괴수사냥 위주로 다녔지만, 지승운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은 이후로는 대부분 첩보활동 위주여서 가끔 지원 나가는 걸 제외하면 괴수를 직접 보는 일이 드물었다.

에스퍼 에너지를 마음껏 방출하며 날뛸 수 있는 상황은 흔하지 않다. 물론 그렇게 한 뒤에 다시 힘을 갈무리해야하니 가이딩은 필수였지만.

“그래.”

승운이 대답했다. 태환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가 멈칫 하더니 끊었다. 예지가 “왜요?” 묻자 태환이 유리벽을 향해 턱짓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왜 저래? 이경민 에스퍼가 유령이 되서 나타나기라도 했나? 예지가 영문 모를 얼굴로 다시 태환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밖에서 쿵 하고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계단 쪽으로 향했다.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이경민이 등장했다. 손에는 사람만한 크기의 생물체의 발목을 잡고 질질 끌고 있었다.

“뭐야, 전화 왜 했어?”

재준과 예지는 듣지 못했지만 태환과 승운은 똑똑히 들었다.

“……박쥐?”

태환이 경민이 끌고 온 괴수를 보며 말했다. 여기에 박쥐가 살고 있긴 했나?

이경민은 연구실 출입카드를 갖다 대며 “형, 왔어요?” 라고 말했다. 질질 끌고 오는 괴수를 어떻게 잡은 건지 바닥의 먼지만 질질 끌고 왔다. 혓바닥이 나온 거 보니 죽은 것 같긴 한데.

“밖에 괴수들 날아다녀요. 이런 광경 처음 봐. 혹시 이거 필요해요? 독특해서 잡아왔는데. 죽긴 했지만.”

경민의 말에 예지가 고개를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귀중한 표본을 본 것처럼 경민에게 괴수를 건네받아 들쳐 메고는 “갖다놓고 올게요!” 하고 발랄하게 말했다. 예지는 한 손으로 어깨에 짊어진 괴수를 지탱하며 다른 손으로 철문을 열었다.

“…….”

저걸 순수한 힘으로 끄네. 인대랑 관절, 근력상태가 아무래도 남자와 비교했을 때 차이가 있을 것이 분명한데 타고난 근력이 강한 건지 아니면 무수한 노력을 한 건지, 대단하긴 대단했다.

“괴수들이 주로 비행종입니까?”

재준이 물었다.

“네, 거의.”

경민이 대답했다. 재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행종 괴수들만 폭주가 일어난다는 건 이상하다. 아니, 애초에 지금처럼 이유 없는 폭주가 일어나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만약 폭주의 원인이 환경에 있다면 특정 종에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은 돌연변이를 유발했던 태양이 이번 괴수의 폭주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면, 괴수의 이상폭주는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뭔가 의도된 듯한 느낌이 찝찝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어떨지도 궁금했지만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재준이 다시 한 번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시리예에게 연락은 없다. 에르난데스도, 보리스도 메일 확인을 하지 않았다. 잠피레스쿠 박사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준은 그 외 친분이 있는 박사들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그들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웬만하면 안부 전화 말고는 하지 않던 라제쉬 박사에게도 연락을 해봤다. 리처드 라제쉬는 언제나처럼 연락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괜찮은지 어떤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럼 이제 집으로 가는 건가요?”

괴수를 아래층에 갖다 놓고 온 예지가 손을 툴툴 털며 물었다. 승운이 경민을 바라봤다.

“민간 구역까지는 나오지 않을 것 같던데요. 우선 해양 쪽은 괜찮습니다. 별다른 이상 없을 거예요. 산 쪽은 위험하지만.”

애초에 마을은 바다 바로 옆에 있었다. 게다가 바다 역시 물이니, 지승운이 있다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예, 돌아갑시다.”

승운이 말했다. 그러고는 예지를 바라봤다.

“유 연구원은 오늘 저희랑 있어요. 혹시 모르니까.”

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일 없기야 하겠지만 혼자 있는 것 보단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나머지들은 에스퍼라 상관없지만 유예지 본인은 일반인이었으니까.

그럼 이제 가자는 승운의 말에 재준이 랩탑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지 역시 오늘 밤에 봐야 할 것들을 챙겼다. 손에 이것저것 챙기는 두 연구원들과 달리 에스퍼들은 가벼운 몸으로 일어섰다. 그때 뭔가가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경민은 떨어진 메모를 주웠다. 메모가 아니라 명함이었다.

“박사님, 이거 떨어뜨렸어요.”

이경민은 명함을 앞뒤로 살피더니 “헤라클레스네요.” 라고 말했다. 떨어진 명함을 건네받던 재준이 멈칫했다.

“예?”

“헤라클레스요. 장수풍뎅이.”

승운이 재준의 손가락 사이에 걸려있던 명함을 빼냈다. 카티야 가텐의 명함이다.

“사슴벌레 아니었어? 회사 이름도 스태그비틀인데.”

“측면이라 사슴벌레처럼 보일수도 있겠는데, 집게처럼 보여서요. 근데 이거 뿔이에요. 가슴 뿔.”

“이경원이 사슴벌레라고 하더라니.”

“우리 형을 믿어요?”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물론 이경원은 신뢰가 가득하긴 했지만 그건 그의 업무에 한정된 것이고 그 이외의 것은 신뢰는커녕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전형적으로 머리만 쓸 줄 알고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쪽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뭔 일 있었어요?”

경민이 물었다. 승운은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박사님, 친구 분과 연락 닿으십니까?”

“아뇨.”

재준이 대답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예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이 얼마 전에 헤라클레스에 대한 자료를 찾아야겠다며 도서관을 가야하나 등등의 말을 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승운이 “그런가.” 말하고는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경민은 여전히 영문 모를 얼굴이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수화기 너머로 [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티야 가텐의 출국정보 요청해.”

*

제7센터에서 집으로 오는 길은 그렇게 험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지와 재준 둘이서 온다고 생각하면 아찔했다. 해가 져서 어두운 하늘 위로 비행종 괴수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간혹 달빛에 모습이 드러날 때면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움직이는 물체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차량이 보이면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달려드는 괴수들은 차에 도달하기 전에 이유 없이 픽픽 땅으로 떨어졌다. 쿵쿵거리며 도로 위로 떨어지는 괴수들을 예지가 질린 얼굴로 바라봤다. 이 광경을 처음 본 것이 아니다. 학술회 때도 괴수가 이런 식으로 쓰러졌다. 물 에스퍼는 진짜 활용이 좋은가봐. 뭔가를 죽이는 데에 특히…….

승운은 아무렇지 않게 떨어지는 괴수들을 피해 운전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식물종 괴수들을 살핀 재준은 문제없다는 것을 살핀 후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정말 뭔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예지가 물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하는데.”

재준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옷을 챙겨줬지만 제일 작은 옷을 줬어도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컸다. 고민하던 예지가 그냥 안 입는 반바지나 달라고 한 뒤 먼저 씻으러 들어갔다. 그 사이 재준은 랩탑을 열어 뉴스를 틀어놨고 승운은 냉장고를 보며 고민했다. 저녁을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한식? 아니면 간단한 거?”

“국수라도 끓일까요. 간단한데.”

“그러고 보니 밖에 애호박 달린 거 있던데 따올까요?”

그리고 샤워하는데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예지는 이 광경을 보며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

재준과 시리예가 종종 주방에 같이 서서 뭘 만들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주 봐서 익숙했는데 그 대상이 지승운 에스퍼로 바뀌자 조금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예지야, 뭔가 먹고 싶은 거 있어?”

금슬 좋은 게이 부부의 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난 단백질이 좋아요, 아빠.”

* * *

뉴스에서는 계속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방송을 했다. 전국의 에스퍼들이 대기발령 중이라는 문구와 함께 에스퍼들이 싸우는 장면을 보내줬다. 그런 것 치고는 고성 쪽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에스퍼 밀도가 다른 지역보다 높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재준과 예지는 뉴스를 들으며 자료를 분석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되게 평온해보이기도 했다. 여전히 잠피레스쿠 박사는 답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해외 소식을 전하는 미디어는 그린란드 해저의 빙하 일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빙하가 사라지면 해수면이 올라야하는데 그러지 않아, 녹은 물이 어디로 갔는가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 뒤로 거대한 괴수가 보인다. 보통 바다 생물의 경우는 자외선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아 물개나 고래 등등을 기저로 하는 괴수들이 많다. 그래서 괴수의 크기도 다른 형태에 비해 더 크다.

“아이슬란드는 괴수 상태가 안정적이네.”

“그렇긴 한데, 빙하가 사라지다니. 이 정도면 자연재해를 넘어선 거 아니에요?”

“해수면에 영향을 주지 않아서 어떨지 모르겠어.”

“저도 그 쪽은 잘 모르는데.”

예지가 말했다. 그들이 보고 있는 화면에 자막이 떴다. 모르는 언어가 쏟아져 나왔다. 아이슬란드 괴수학회에서 이 상황을 새로운 용어로 명명했다며 붉은 글씨로 강조한 자막이 떴다.

“자연환경이 변하는 걸 저렇게 칭할 건가봐. 예전에 학자가 다른 용어 밀지 않았나?”

“몬스터 홀이요. 근데 그거 부끄러워서 다들 안 썼어요. 저거 발음이 뭐예요? 히드그린? 힐드그린트?”

“흘리츠그린트라고 들렸는데. 아, 게이트라는 뜻이라네.”

“게이트면 뭐…… 나쁘지 않은데요?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경우에만 나타나는 회로로 치면 어울려요. 아마 뭐 영어 차용 하겠죠.”

“아무래도 언어가 단순하니까.”

재준이 말했다. 두 사람이 나름의 대화를 하는 동안 승운은 조신하게 커피를 내렸다. 사실상 그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간혹 이곳을 향해 날아오는 괴수들이 있긴 했지만 오기 직전에 다 처리를 해버렸다. 물론 재준이나 예지는 모르는 사항이었다.

승운이 커피를 갖다 주며 “원인은 아직 안 나왔어요?” 하고 물었다.

“딱히 모르겠다는 게 학자들 입장입니다. 저도 모르겠네요.”

“역시 연구실에서 왜 그런지 좀 살펴볼걸 그랬나.”

“미국이나 유럽이 더 빨리 일어나서 그들도 찾아보고 있을 거야. 연구 인력도 훨씬 많이 투입될 거고. 지금 중앙연구소는 어떤지 모르겠네.”

“뭐, 딱히 하는 건 없을 것 같은데. 근데 이상하네요. 보통 이러면 박 박사가 언론에 나와서 열심히 입 털 텐데.”

박형기 박사는 지금 국가에스퍼비밀정보원에서 신병을 확보 중이다. 박요한 가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승운이 랩탑을 바라봤다. 아이슬란드의 상황을 알리는 화면이 지나가고, 유럽의 괴수학자들이 모여 있는 장면이 나왔다.

“잠피레스쿠 박사님 살아있었네요.”

다행이네, 예지가 말했다. 어떤 이는 화상통신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어떤 이는 앵커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저 사람 익숙한데요?”

“그때 괴수학회에서 봤을 거예요.”

승운의 물음에 재준이 대답했다. 예지는 연구소에서 같이 흡혈괴수종을 탈취한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근데 지승운 에스퍼, 커피 잘 내리네요.”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 정도 뿐이라서요.”

그렇게 말하며 재준을 바라봤다. 눈살을 찌푸리며 작은 글씨를 읽어나가던 재준은 시선이 느껴지는지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승운을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저건 또 처음 보는 장면이네, 예지가 생각했다. 역시 오래 아는 것과 연인으로 아는 것은 다른 듯 했다.

뉴스는 끊이지 않고 계속 됐다. 유럽 특정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나와, 지금 상황이 전시 중과 다를 바 없으니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경고를 하면서, 마지막에 붙인 말이 가관이었다.

[공원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자제하십시오.]

“저게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할 말이에요?”

예지가 질문했다.

“근데 걔네들이 공원에서 친구를 많이 만나기는 해요.”

재준도 동의하긴 했다.

이어지는 뉴스는 지루했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줬고, 처음에 미 서부에서 일어났던 괴수의 폭주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다들 기본음으로 하고 있어 누구의 핸드폰인지 알 수 없었다. 승운이 “제겁니다.” 말하고는 발신인을 확인했다. 김태환이었다.

[대장, 식사 하셨습니까?]

“어. 뭔가 들어온 정보 있어?”

[예. 카티야 가텐, 출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뭐?”

재준과 예지가 승운을 바라봤다. 승운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어보였다. 카티야 가텐은 그럼 계속 한국에 있다는 건가? 어디에?

“루카스 영은?”

[그쪽은 출국했어요.]

승운이 머리를 짚었다. 카티야 가텐을 데리고 온 게 루카스 영이 아니었나? 둘 사이를 이어줬다고 생각했는데 왜 루카스만 출국하고 카티야만 남아있는 걸까? 게다가 카티야 가텐은— 뭔가 찝찝했다. 뭐가 찝찝한지, 왜 그런 기분인지 모르겠지만 본능적인 경계가 발동되는 사람이었다. 가이드도 에스퍼도 아닌데.

[일단 어디 있는지 위치 파악 중이에요. 박형기 박사 쪽은 모함이라든가 아무것도 모른다든가 말하더니, 이젠 묵비권 행사 중이랍니다.]

“박요한 쪽도 족쳐봐. 걔는 가이드니까 더 잘 버티겠지.”

[……가이드니까 더 못 버티지 않을까요?]

“잘 버틸 거야. 가이드잖아. 아, 조사관도 가이드로 넣어. 괜히 에스퍼 넣었다가 쉽게 가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일러둘게요. 그리고 승호 형 못 온대요.]

“알았어. 조심하고.”

[대장도 조심하세요.]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승운이 전화를 끊었다. 찾는 중이라면 어디에 있는 걸까? 이곳은 아닐 것이다. 나간 외부인이 쉽게 들어올 수 없으니까. 하지만 산을 넘는다거나 하면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녀가 홀로 산을 넘을 수 있을까? 군사지역이 대부분이어서 누군가가 몰래 다닌다면 쉽게 발각될 것이다. CCTV도 많고. 역시 숨어든다면 사람이 많은 서울일 가능성이 컸다.

“무슨 일 있습니까?”

“사실은—.”

승운이 입을 여는데 다시 벨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핸드폰은 아니었다. 핸드폰과 연동해둔 랩탑에 전화가 왔다는 알람이 떴다. 재준은 바로 보던 뉴스를 멈추고 랩탑으로 전화를 받았다. 영상통화였다.

“시리예.”

[거기 괜찮아?]

받자마자 안위를 묻는 모습에 재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지도 옆으로 끼어들어 “괜찮아?” 물었다. 시리예는 예지를 확인하더니 너도 괜찮냐며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연락이 안됐는데 넌 무슨 일 없어?”

[있다마다. 유럽은 지금 엉망이야. 지금 이 상황이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고. 미국은 더하다더라. 통신 자체가 완전 먹통이어서 그동안 연락을 못 했어. 비행종 괴수가 구식 통신장비나 전깃줄을 죄다 끊어버렸거든. 그나마 지하에 묻은 것 때문에 괜찮은 거지. 트램도 완전 먹통이야. 버스나 좀 다니고. 지금 있는 곳은 큰 피해가 없어서 연락할 수 있었어.]

“비행종 위주로 폭주가 일어나는 것 같던데, 시베리아는 비행종 괴수가 많아서 걱정이네.”

[난 지금 스코틀랜드야. 헬기로 겨우 빠져나왔어. 에스퍼들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스코틀랜드도 비행종 괴수가 많을 것 같은데. 재준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시리예는 문제없다고 말했다. 어차피 그녀의 에스퍼가 함께 하고 있었고, 가이드인 시리예는 괴수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건물이 부서진다든가 하는 간접적인 피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헬기로 탈출할 때도 괴수들이 공격하는 바람에, 여기서 떨어졌다간 그대로 망각의 강을 건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무사했다.

[허니, 멜라니 교수님이 잠깐 깨어났었어.]

시리예가 말했다. 스코틀랜드라는 말에 그녀가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다시 잠드셨지만.]

재준은 순간 리처드 라제쉬의 안위를 물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그 머뭇거리는 순간에 시리예는 [허니.] 하고 재준을 불렀다. 재준은 질문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멜라니를 공격했던 사람— 괴수가 누구인지 알았어.]

“누구?”

재준의 시리예는 긴장을 한듯 입술을 두어 번 깨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카트린 두자당.]

“……카트린 두자당은 죽었잖아.”

[그래, 다들 그렇게 알았지. 루트 옌슨과 함께 죽었다고.]

루트 옌슨과 카트린 두자당은 에스퍼와 가이드의 전설이었다.

그녀들로부터 시작한 것이 많다. 역사에도 많이 언급되었으며, IPMC에서도 그들을 기리는 날이 있었다. 그들의 죽음 역시도 화제가 되었다. 카트린 두자당은 자신보다 더 레벨이 높은 괴수를 죽였지만, 괴수는 죽기 직전에 그녀와 함께 있던 루트 옌슨의 목숨을 앗아갔다. 카트린은 절망했고,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루트 옌슨의 시체와 함께.

그들의 죽음 이후 에스퍼들은 자신의 가이드를 안전한 곳에 두고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아있대.]

에스퍼는 제 가이드가 없으면 버틸 수 없다.

가이드를 잃은 에스퍼는 폭주로 죽거나.

“괴수가 되어서 말이지.”

카트린 두자당이 괴수라니.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승운을 의식하게 됐다. 에스퍼가 괴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보다, 지금 더 그 상황이 힘겹다.

[메일로 사진 보냈어. 혹시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한국은 동양인이 대부분이니까 그냥 모르는 백인이 나타나면 주의해.]

재준이 메일을 열어 확인했다. 그리고 곧 인상을 쓴다. 스캔을 한 듯한 오래된 컬러사진이었다. 색이 바래있었지만, 사진에 찍힌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라제쉬 박사 부부와 함께 있는 두 여자. 한명은 밝은 금발이었고 한명은 브루넷이다.

“나 이 사람 만났어.”

[뭐?]

“혹시 에르난데스한테 헤라클레스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어?”

[그게 뭐야?]

“에르난데스가 연락이 안 돼. 혹시 연락 닿으면 메시지나 메일 부탁할게.”

[어, 어—. 알았어.]

“조심해, 시리예.”

시리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뒤로 손이 하나 다가왔다. 제 에스퍼의 손길에 시리예는 눈을 감으며 영상통화를 끝냈다. 승운과 예지 역시 심각한 얼굴을 했다.

“카티야 가텐이.”

재준이 입을 열었다.

“카트린 두자당인가봐.”

통화가 끊어진 랩탑의 모니터에는 사진이 하나 떠 있다. 낡은 사진은 추억으로 바래있었다. 색이 빠진 하늘이나, 밝게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얇은 옷차림이 여름 어딘가의 바다에서 찍은 것 같았다. 예지는 저 장소를 알고 있다. 몽쁠리에의 바다다.

“죽은 게 아니었어.”

재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승운 역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 있습니다.”

“…….”

“카티야 가텐은 출국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땅 어딘가에 있어요.”

최초의 에스퍼가 괴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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