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0)

9.

이경원은 매칭률 보고를 할테니 알아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승운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얼핏 바라보자 눈가가 붉다. 말 한마디라도 건넸다간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만 같아 재준은 어째야하나 생각하다가 “지승운 씨.” 하고 불렀다. 승운이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차오른 것 같기도 하고.

“웁니까?”

“아뇨.”

생각보다 빨리 나온 대답에 재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눈이 우는 눈인데.”

“그냥……. 그냥, 다행이라서.”

실제로 눈물이 맺혀있긴 했다. 재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업무시간이라 여기저기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뭔가 하지를 않고 손을 뻗어 눈가를 닦자 물기가 묻어나왔다.

안 울기는.

재준이 몇 번이고 눈가를 쓰다듬자 뭔가를 참는 듯 눈가를 찌푸린 승운은 결국 “흐.” 하고 소리 내며 재준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손에 닿는 부드럽고 탄력 있는 피부에 재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 모습에 승운이 움찔했다.

“박사님, 그렇게 웃으면.”

“웃으면요?”

“하고 싶어져요.”

“잘됐네, 나도 그런데.”

“…….”

지금 당장 가이딩 실이라도 빌릴까? 승운이 생각했다. 남는 방이 하나쯤은 있겠지. 하지만 재준이 가이드라는 것은 비밀이어서 그와 함께 들어가는 것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애초에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자랑은 하고 싶지만 누군가가 재준을 아는 것은 싫다.

“오늘 바로 퇴근할까요?”

“……그래도 됩니까?”

“원칙적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대답한 재준이 승운의 손을 잡았다. 맞닿은 체온이 높았다. 그게 다른 순간을 떠올리게 해서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크게 움직인 승운은 제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민망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재준의 따스한 시선에 왠지 마음이 살랑거리는 듯 했다.

“손이 뜨겁네, 너.”

“박사님도 그래요.”

“역시 안 되겠다. 집으로 가자.”

재준이 말했다. 승운이 피식 웃었다.

“원칙적으로 안 된다면서요.”

“급한 상황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재준이 말하자 승운이 손에 힘을 줬다가 풀었다. 벌써부터 아래에 힘이 들어왔다.

“예, 집으로 가요.”

*

재준은 예지에게 일이 생겨 먼저 가겠다는 문자를 남겼다. 알아서 퇴근하라는 말에 예지는 알겠다는 답을 했다. 승운은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며 운전했다. 아무래도 연구소에서 집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국도에는 차가 한대도 다니지 않았다. 곧게 뻗은 해안가를 지나 양 옆이 나무로 둘러싸인 도로에 진입했을 때 재준이 “저쪽이요.” 말했다.

“지름길이 있습니다.”

“……지름길이요?”

이런 곳에? 승운이 되물으며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었다. 재준이 왼쪽 숲길을 가리켰다. 거짓말 같은데. 그러면서도 승운은 깜빡이를 켜고 핸들을 옆으로 틀었다.

길게 이어진 숲길이었다. 오솔길보다 조금 넓은, 차 한대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도로였는데 뭔가 스산하고 음산해보였다.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가 햇빛을 가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승운이 힐끗 재준을 바라봤다. 재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밖을 바라보다가 시선이 느껴졌는지 승운을 바라봤다. 재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어보였다.

“차 좀 세워봐.”

“…….”

설마 했는데 역시 이런 생각이었을까. 재빨리 차를 세우자마자 재준이 벨트를 풀고 승운의 목덜미를 잡았다. 이끄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채 끌려간 승운은 저를 탐하듯 혀를 집어넣는 재준의 입맞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재준이 쪽 쪽 입을 맞추며 승운의 위로 올라탔다. 승운이 시트포지션을 조절하며 재준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재준은 승운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승운이 재준의 다리를 끌어당기며 들어 올리자 천장에 머리가 콩 하고 닿았다.

“…….”

“…….”

먼저 웃음을 터뜨린 건 승운이었다. 이어 재준도 웃어보였다.

“차에서 하는 게 쉽지는 않아 보이네요.”

그렇게 말한 재준이 뒤편을 바라봤다. 좁은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보단 나을 듯 했다.

“뒤로 갈래?”

“그게 나을 것 같아요.”

먼저 뒷좌석으로 이동한 재준 위로 승운이 올라타듯 건너왔다. 제복 넥타이를 당기고 셔츠를 풀며 목에 입을 맞추자 고개를 숙이고 살짝 움츠러드는 모습에 귀여워 쪽쪽 소리를 냈다. 승운의 양 볼과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재준이 손을 올려 목덜미를 쥐었다. 엄지의 위치가 목젖에 닿아 위협적이었다. 손에 힘은 주지 않았지만 장난스럽게 밀착시키자 승운이 옅은 숨을 쉬며 재준을 바라봤다. 눈가 역시 붉다.

“울려고?”

“……절 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아니, 그냥 참는 것 같아서. 마음껏 울어보라고.”

보통 이런 상황에서 우는 건 대부분 재준 쪽이었지만 나름 허세를 부리듯 말하자 승운이 픽 웃어보였다. 울어보라니까 웃어주네. 재준이 그대로 입을 맞추며 손을 내려 벨트와 버클을 풀었다. 옷 위로 제 존재감을 나타내는 물건을 손으로 한번 쓸어 올리며 복근을 만졌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며 드로어즈를 벗기자 성기가 퉁 하고 솟아올랐다. 언제나 그렇듯 위용을 과시하는 크기에 입맛을 다신 재준이 피스톤 질을 하듯 위아래로 흔들다 귀두를 손끝으로 문지르자 승운이 흣 하고 몸을 숙였다. 

“아, 끝에…… 읏!”

재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헐떡였다. 제 손 안에서 커지며 움찔대는 성기와 부풀었다 꺼지는 폐부가 느껴져 웃음을 흘린 재준은 튀어 오르려는 좆을 강하게 쥐어 사정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흐, 하아…….”

헐떡이는 승운의 얼굴을 다른 손으로 들어 올리자 눈물이 잔뜩 고여 뚝뚝 흐르는 눈이 보였다. 재준이 감탄하듯 “와아.” 내뱉자 그 와중에 웃긴지 큭큭대며 웃던 승운은 다시 하반신에 느껴지는 자극에 허리를 튕겼다.

“참아봐. 평소에 잘 참잖아.”

승운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헐떡였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황이었다. 재준이 승운을 밀치자 의외로 몸은 쉽게 넘어갔다. 하지만 큰 체구 때문에 머리를 창문에 콩 하고 박았다. 재준이 당황해 “미안해.” 말했다. 차에서 해본 것이 처음이라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니, 괜찮아요.”

승운이 답했다. 그도 차에서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이런 불편한 공간에서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지금은 급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승운이 눕자 자세가 애매해졌다.

‘불편하네.’

한쪽 다리를 세우고 다른 다리를 아래쪽으로 내려놓고 눕기만 했는데도 뒷자리가 꽉 찼다.

고민하던 재준이 승운의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탔다. 하반신이 승운의 얼굴 쪽으로 향한 것은 민망했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각이 나오지 않았다. 재준이 이런 자세로 올라 올 거라 생각하지 못한 승운이 방심해 아무것도 못하는 찰나에 재준이 덥석 아래를 물었다. 이전에는 귀두만 겨우 넣었던 것 같은데 이번엔 단숨에 기둥까지 삼키더니 숨이 막히는지 헐떡이며 자지를 빼냈다. 그러고는 다시 혀끝으로 귀두를 누르듯 문질렀다. 승운이 허리를 치켜 올리자 웃음을 비친 재준이 다시 승운의 것을 삼켰다.

“으읏…… 아!”

빨아들이는 압력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힘든가 싶을 때 성기를 빼고 손으로 기둥을 훑으며 사정을 유도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퍽퍽 찍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목구멍을 열고 받아들여 승운은 이게 뭐지? 싶다가도 어떤 생각도 못하고 그저 사정하고 싶다는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이나 다시 재준의 입 속에 박아 올렸다. 

이게 뭐지? 도대체 어쩌다가……. 그것보다 얼굴 보고 싶어. 얼굴이 안보이니까 아쉬웠다. 승운이 손을 뻗어 재준의 버클을 풀었지만 아래에서 오는 자극에 그마저도 포기하고 맨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가 반복했다. 갑자기 찾아온 강한 사정감에 참아보려 했지만 귀두 끝을 물고 쭉 빠는 재준의 행동에 자지를 껄떡이며 사정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에 재준은 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당황해 눈알을 도록 굴렸다. 사정 직후 얕은 한숨을 내쉰 승운이 숨을 헐떡이며 “대체…….” 말했다. 

“만회했네.”

재준이 말하며 몸을 돌려 승운의 위에 앉아 내려다봤다. 제 정액이 묻어있는 얼굴과 입가가 야했다. 사정했는데도 물건이 아직 단단했다. 승운이 재준의 손에 입을 넣었다. 침과 얽힌 정액을 긁어 손바닥으로 받아낸 승운은 나른함과 뿌듯함,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묘한 우울함이 동반됐다. 그래, 아마도 마지막은 그것 때문이다.

“실력이 왜 이렇게 늘었어요?”

“싫어?”

“좋긴 한데.”

“시뮬레이션 해봤어.”

“…….”

“어떻게 해야 좋아할지.”

어떤 얼굴로, 아니 무슨 시뮬레이션을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잘 하는데.

“내가 배움이 좀 빨라.”

“그런 것 같아요.”

이전이랑 너무 달라서 다른 사람이랑 하고 온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승운은 재준이 다른 누군가와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뿐더러 다른 사람이랑 한다고 해서 그렇게 빠르게 익히지도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승운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옷 위로 발기한 재준의 물건이 보였다. 빨면서 섰다. 어떻게 저렇게 야하지? 

승운이 재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제대로 핥기 편하도록 목을 틀어준 재준이 제가 입고 있던 스웻 셔츠를 들어올렸다. 승운이 한쪽 손으로 재준의 입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쭉쭉 빨았다. 젖은 손가락으로 재준의 유두를 문지르자 “흣.” 하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튕겼다. 제 정액이 묻은 손을 바지 안에 넣어 엉덩이를 한번 움켜쥐고는 젖은 체액을 재준의 구멍 위로 펴 바르며 가슴을 빨아올리자 앞으로 무너지듯 기댄 재준이 헐떡이며 신음했다. 

승운이 버클을 풀자 불거진 성기가 밖으로 튕겨 나왔다. 제 복부 위에 묵직하게 떨어진 성기를 문지르다 “빨아줄까요?” 묻자 재준이 고개를 저었다.

“한번 안 해도 돼요?”

“지쳐서.”

안 그래도 네 정력을 감당하려면 최대한 사정을 덜 해야지. 귓가에 나지막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담겨있다. 그렇게 말하면 또 참기 힘든데,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예전엔 생각해보지도 않았었지만, 의외로 입안에 들어차는 성기가 꽤 성감을 자극했다. 아마 재준의 것이어서 그런 거겠지만. 승운이 아쉽다는 듯 수음하며 귀두 갓과 요도 끝을 문지르자 재준이 허리를 틀었다.

“아, 흐!”

뒤쪽으로도 승운의 손가락이 박혀들어 특정 지점을 찾듯 비벼지고 있었다. 앞뒤로 오는 자극에 허리를 빼거나 흔드는 것조차 불가능해 재준은 그저 승운에게 매달려 신음했다. 제가 싼 정액이나 침이 윤활제 역할을 하기는 하겠지만 역시 좀 부족한가 싶어 승운이 자지를 주무르던 손을 올렸다.

“빨아요.”

승운이 말하며 손으로 재준의 입술을 열었다. 재준이 들어온 손가락을 살짝 깨물다가 혀로 핥았다. 그러면서 제 옷을 벗기는 승운이 편하도록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바지가 내려가 허벅지에 걸쳐졌다. 그러다 안쪽에 박힌 손가락이 특정 지점에 닫자 손에서 입을 떼고 승운에게 매달리자 승운이 등을 토닥이며 젖은 손을 구멍으로 가져갔다. 양쪽 엉덩이를 벌려 주무르다 애널 위를 문지르자 익숙한 것처럼 손가락을 폭 삼킨 구멍에 슬쩍 웃음을 흘렸다. 벌어졌다는 것을 재준 역시 알아차린 듯 목덜미가 살짝 붉어져있었다.

“이젠 잘 열리네요.”

구멍 안쪽에 손가락이 들어갔다 나오는 게 선연하게 느껴졌다. 재준이 승운의 셔츠를 붙잡았다. 제 셔츠가 구겨지는 것을 보며 승운이 웃는다. 그래도 아직은 뻑뻑했다. 이대로 넣었다간 다치지 않을까 싶어 망설이자 재준이 “어서 하자.” 라며 재촉했다.

가끔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타인의 절제력을 앗아갔다.

“힘 빼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재준의 구멍 위로 자신의 귀두를 맞췄다. 재준이 천천히 몸을 낮춰 승운의 위에 앉았다. 역시 조금 뻑뻑한지 눈을 감은 채 헐떡였다. 삽입하는데 입이 벌어져 다물리지 않았다. 좁은 구멍이 잔뜩 벌어져있었다. 붉게 물든 곳은 아무래도 윤활이 부족해보였다. 이럴 거면 차라리 한 번에 박는 게 낫겠군, 생각한 승운이 재준의 골반을 잡고 아래로 끌어내리며 박아 올렸다.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에 당황한 재준이 승운의 어깨를 잡았지만 이미 안쪽까지 꿰뚫린 이후였다.

“으, 하…… 흐학!”

발가락이 굽어지며 허리가 떠올랐다. 찍어 올린 곳이 하필이면 자극점이어서 온 몸이 움츠러들며 승운에게 안겼다. 승운의 재준의 자지에 손을 뻗어 훑어 올리다가 제 복부에 묻은 정액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넣자마자 갔어요?”

“으읏! 으!”

“엄청나게 쌌는데.”

재준은 답하지 못한 채 그저 승운에게 매달렸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닿은 손이 뜨거웠다. 손톱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악력이 있어서 그런지 손이 닿는 곳이 붉었다. 내일이면 멍이 들지도 몰랐다. 

“좋아요?”

승운이 위로 찍어 올리며 물었다. 

“으, 앗! 좋— 좋아…….”

“흐, 나도. 나도, 좋아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재준의 허리를 감싸며 천천히 박아 올렸다. 별거 아닌 움직임이었는데도 위로 계속 올라가는 통에 목덜미를 잡아 눌러야했다. 힘든가 싶어 튕기듯 안을 긁어내다 속도를 빨리 하자 재준이 못 참겠는지 승운의 팔을 잡아 눌렀다. 승운이 웃으며 손을 빼 골반을 잡고 끌어당기듯 박아댔다.

“아핫, 어읏!”

제 위에서 느끼는 모습이 너무 야하고 좋은데 역시 자세는 좀 불편했다. 재준의 다리를 제 허리에 감은 승운은 한쪽 손으로 재준의 머리를 감싸며 조심스럽게 재준을 눕혔다. 제 손등에 닿는 창문에 머리를 가슴 쪽으로 더 끌어안은 채 아래로 끌어내리자 자세가 좀 맞는 듯 했다. 그래도 낮긴 했다.

승운은 재준의 위에 엎드려 문지르듯이 움직였다. 부드러운 움직임에 안달이 난 듯 재준의 허리가 뒤틀렸다. 승운이 입술을 부딪혀왔다. 쪽 쪽 소리를 내는가 싶다가도 혀를 집어넣어 빨아올리더니 다시 쪽 소리 나게 입을 부딪치곤 쇄골에 혀를 세웠다. 부드럽던 움직임은 다시 거세어졌다. 콱콱 박아 올릴 때마다 위로 밀려나갔다. 하지만 머리를 받친 손 때문에 충격은 거의 오지 않았다. 이 상황이 웃겨 재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승운은 그 웃음을 전부 받아내기라도 하듯 입을 맞췄다가 몸을 떼어냈다. 성기는 여전히 박힌 채였다.

가슴에 걸린 셔츠에 드러난 유두가 서있는 듯 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다 손톱으로 긁자 재준이 신음하며 허리를 들어올렸다. 이미 배꼽 근처는 프리컴과 정액으로 반질반질했다.

승운이 다시 퍽 하고 박자 몸이 두어 번 움찔거리며 떨렸다. 고환을 들어 올려 통통하게 부은 회음부를 쓰다듬은 승운이 삽입되어있는 것을 바라봤다.

제 모양대로 벌어진 것이 정복욕을 자극했다. 승운이 속도를 올렸다. 처박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 재준은 윽 읏 소리 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참을 수 없는지 재준 역시 허리를 움직여댔다. 자기가 느끼는 곳을 찾아 허리를 틀더니 그 지점에 닿은 것인지 몸이 떠올랐다.

야한 광경이었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이런 만족감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재준이 완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졌다. 매칭이 없어도, 결과가 낮아도 재준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매칭률을 얻자 안도감이 동반했다. 더 이상 허공에 붕 뜬 채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도 이 세계에 받아들여졌다는 게 수치로 나오고 공적 문서로 기록되는 것이 다른 의미로 기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 위로 톡 하고 떨어지는 물방울에 재준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가늘게 뜬 눈 너머로 빨개진 승운의 눈가가 보였다. 재준이 손을 뻗자 승운이 몸을 숙여 제 목을 갖다 줬다. 목을 감싼 재준이 승운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눈물은 멈추지 않고 더 후두둑 떨어졌다. 흐르는 눈물을 모두 핥아낸 재준이 승운을 바라보자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이 보였다. 마주친 두 사람의 눈이 모두 붉었다. 재준이 미소 짓자 승운은 부끄러운지 시선을 살짝 피하더니 다시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그리고는 퍽 하고 박아 올렸다.

재준이 몸을 움찔 떨었다. 제가 좋아하는 곳이 어딘지 아는 것은 재준뿐만이 아니다. 승운이 그 지점을 집요하게 찍어 내리자 눈물이 핑 돌았다.

“읏, 흐으, 으, 아아, 아! 아읏!”

결국 다시 사정했다. 불규칙적으로 조이는 구멍에 승운 역시 사정하며 안쪽에서 성기를 몇 번이나 튕겨냈지만 허리 짓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진적이기까지 해서 재준은 승운의 복부를 밀어냈지만 밀리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제 안을 헤집는 승운의 물건이 다시 선 것인지, 아니면 사정을 덜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재준의 허벅지가 달달 떨렸다. 승운이 몇 번이고 콱콱 박아 올리다가 성기를 빼내자 재준이 움찔하더니 요도에서 물이 팍 하고 튀어나왔다. 흘러나올 때마다 복부가 파들파들 떨렸다. 쾌감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흐, 승운아.”

재준이 승운을 끌어안았다. 헐떡이면서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재준은 승운을 토닥여야한다 생각했다. 

“울, 지마.”

승운이 웃어보였다. 오히려 지금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것은 재준이었다. 

“……좋아서요.”

하지만 지승운은 자신 역시 조금은 울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좋아서 그래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재준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정말 좋아해요.”

감정이 보일 리 없음에도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것 같았다. 자신의 위로 쏟아지는 승운의 감정은 기체보다는 액체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물이 몸을 감싸듯 감정이 제 몸을 잠식했다. 

재준은 떨어지는 눈물을 가늘게 뜨며 바라봤다. 이런 물이라면 잠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재준이 눈을 감았다. 제 위에서 숨을 고르는 승운의 숨결이나, 아직 열기를 가진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재준 역시 몇 번이나 숨을 고른 뒤 감았던 눈을 뜨고 웃어보였다. 승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그의 속눈썹에 눈가가 한층 더 짙어보였다. 훌쩍이는 모습에 재준이 눈물을 닦아주자 가만히 제 얼굴을 내주던 승운이 “그런데.” 하고 말을 이었다.

“지름길 거짓말이죠?”

승운의 말에 재준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지름길은 사실이야. 그냥 내가 못 참은 거지.”

재준의 대답에 승운이 꼭 끌어안았다. 재준 역시 승운의 등에 팔을 둘렀다. 조금은 식은 체온은 맞닿자마자 금세 따뜻해졌다.

“그런데 다음엔 차에서 하지 말자. 너무 불편해.”

승운 역시 거기엔 동감했다.

* * *

“비 냄새.”

재준이 말했다. 하늘에 구름이 끼어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맑았다. 구름이 드리워 햇빛이 가려졌지만, 그렇다고 해도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은 아니었다. 저것이 걷히면 다시 맑은 날이 보일 테니까.

“비 냄새가 납니까?”

승운이 물었다. 저번에도 재준이 비 냄새가 난다고 한 적이 있었다. 맑은 하늘이었는데 그 날 저녁 정말 비가 왔다. 유독 공기 중의 분자 냄새를 잘 맡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듣긴 했다. 하지만 물을 제 뜻대로 다루는 승운조차 이 대기 중에서 습도를 느끼진 못했다.

“전 잘 모르겠는데.”

“비 올걸요. 박사님 물 냄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맡거든요.”

유예지가 말했다.

“1년에 비가 열 번도 안 오는 곳에서 뜬금없이 비 냄새가 난다 하면 꼭 그 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더라고요.”

“그래요?”

“예. 그리고 이상 기온 때문에 비 내리는 횟수가 늘어났습니다. 평소 침수가 생기는 곳이 아닌데 그런 일이 벌어지더군요. 어떤 곳은 홍수도 나고, 어떤 곳은 가뭄이 들고.”

“기상 이변이 이상하지 않을 시기니까요. 애초에 괴수도…….”

그렇게 말하던 승운이 입을 다물었다. 괴수의 발생 역시 이상기온을 탓했지만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을 통해서라면 단순히 이상기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면 과거에도 이만큼의 이상 기온이 있었던 걸까.

“물 냄새라.”

승운이 화제를 돌렸다.

“저도 물인데.”

이건 뭐하자는 거지. 지가 물인 게 뭐라고. 예지가 생각했다. 혹시 모를 야한 의미라도 있는 건가 싶어 눈살을 찌푸리는데 재준은 아무렇지 않게 “그러네요. 지승운 씨가 물이었죠.” 말했다.

“여긴 가을쯤에 비가 많이 오더라고요.”

별 의미 아니었나, 아니면 현 박사가 이해를 못하는 건가. 뭘 모르는 것 같지 않은데 일부러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예지는 결국 신경을 껐다. 오늘도 할 일이 넘쳤다.

태환은 예지와 재준을 연구소 앞에 내려놨다. 지승운은 제7센터 임시발령을 정식발령으로 요청했다. 제3센터는 반대했다. 제1센터에서도 이곳으로 오라는 말을 했지만 이능청 차장 선에서 거절됐다. 결국 지승운은 제7센터에 정식 발령되었고, 사무실이 따로 제공됐다. VIP 경호 일도 있지만 이곳은 외부인 침입이 수월하지 않아 연구소라면 현재준 혼자 둬도 상관없었다.

물론 지승운은 계속 같이 있고 싶어 했지만, 유예지의 말대로 언제까지 거기서 위험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가까이 있고 싶어 사무실을 괴수연구소에 내어주기를 원했는데 거절당했다. 결국 에스퍼 전용 건물에 지승운의 사무실이 하나 생겼다. 당분간 승운과 함께 있을 태환 역시도 그 사무실에서 업무를 볼 예정이었다.

에스퍼 건물은 센터의 가장 바깥에 위치한다. 출동이 잦다보니 나가기 쉬운 곳에 둔 것이었다. 혹 센터에 무슨 일이 있었을 때 가장 먼저 선제타격을 입는 곳이기도 했다. 결국 에스퍼들 몸으로 때우라는 의미였다. 어느 센터나 그랬다.

지승운은 제 이름이 적힌 호실을 확인하고 이동했다.

당연하지만 모든 사무실이 그게 그거였다. 특히 공공기관들은 더더욱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 가도 비슷한 모양새에 지승운은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사람에 따라 개인 물건을 갖다 두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승운은 이런 곳에 개인 물건을 갖다 두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 있게 된다는 걸 생각했을 때 좀 챙겨두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재준이 놀러올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놀러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무실과 휴게실, 회의실이 구분되어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승운은 휴게실에 제공된 소파에 드러누웠다. 3인용 소파라고는 하지만 지승운의 키보다는 약간 작아 팔걸이에 다리를 올려놔야했다. 

일하기 싫군.

사실 지승운은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는 쪽을 더 선호했다. 폭주 위험 때문에 계속 사무직을 전전하며 첩보활동을 하긴 했지만 이젠 괴수를 상대하는 최전선에 나가도 상관없다.

이곳에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긴 했다. 그런데 나가서 다쳐오면,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야 쉽지는 않겠지만 다쳐오면 걱정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두개의 발소리는 그가 아는 것일 테니까.

“대장.”

태환이 먼저 머리를 드리웠다. 이어 경원이 커피 트레이를 들어보였다. 옆엔 디저트도 같이 사온 듯 달달한 것이 한가득 이었다. 저러고 또 혈당 걱정을 하지. 

“목록 나왔습니다. 앞으론 이쪽을 통해서 바로 보낸다고 하시더라고요.”

“잘됐네.”

지승운이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경원을 향해 “정보는?” 묻자 “함 가이드님이 갖다 주셨어.” 말했다. 

이경원이 가이드 호르몬 전공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가이드를 만나는데 이렇게 적합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만약 지승운이나 김태환이 그를 직접 만났다면 의심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물론 그럴 의심을 할 만한 머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뒤가 더러운 구석이 있는 이들은 자신이 더러운 만큼 남도 더럽다 생각하기에 타인을 의심하는데 있어 한 치도 방심하지 않는다.

“박형기 박사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보이는 군. 의원 쪽은 접선해봤나?”

“박형기 박사의 동기를 찾아보니 세 사람이 나오더군요. 그 중에서 노용수 의원과 홍운철 의원이 얽혀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도 살펴봐봐.”

경원이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이중석 비서관?”

“노 의원 수행비서관이었다가 지역사무소로 왔어. 이쪽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것 같던데. 지역 행사에 자주 나타나기도 하고, 외부인사들을 꽤 많이 만나. 저 아래쪽에 국제공항 하나 있잖아.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쪽 통해서 손님들이 오는 모양이더라고.”

“서울이 아니라 이쪽에서 만난다고?”

“서울은 눈에 띄니까.”

“혹은 서울에서도 가지고 이쪽에서도 가지는 거겠지. 홍운철 의원도 러시아랑 친하대.”

“어느 지역구?”

“의정부.”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랑 친하다고? 특이하군.”

“외교통일위원장으로 있는 동안 친분 좀 쌓았나봐. 아무래도 대북정책도 그렇고 러시아나 중국이나 일본 등이랑 밀접하게 오고 가는 게 있었으니까.”

“그 중에서 특히 러시아랑 친하다는 게 특이하긴 하지만.”

지금 러시아 쪽 길드 상황은 좋지 않다. 아무래도 국제정세를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었다. 모니카 에소노프가 러시아 스파이라는 추측도 지금 단계에서는 확신할 수는 없었다. 몇 겹의 위장을 걷어내 보니 미국 쪽 사람이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중국 쪽에서 들리는 소식은 없어?”

“길드나 스파이 관련 소식은 없는데, 지금 그쪽이 암시장에 개입한다는 말은 있던데요?”

“어떤 암시장? 괴수?”

“아뇨, 사람이요. 에스퍼들.”

“가이드가 아니라 에스퍼?”

“예. 겉으로는 희귀 괴수니 뭐니 하는데 실제로 그것도 국제 사회의 눈치가 보이니까 공식적으로는 판매 금지를 때리고 암시장에서 암암리에 거래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게 괴수가 아니라 에스퍼였다는 말도 있더라고요. 예전에 상아 암시장 했을 때 아프리카 쪽이랑 손잡고 암거래했잖아요. 그때랑 비슷하겠죠.”

설마 그쪽에서 뭔가 아는 건가. 아직은 장담할 수 없지만 그곳 역시도 일단 리스트에는 올려둬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내부에서 움직인단 말이지?”

“아, 내부라고 확정은 할 수 없고. 들리는 바로는 상하이 방 쪽이던데요.”

“상하이 방이라고? 세력다툼 중인가?”

“뭐, 서로 견제하고 있긴 하죠. 예전에 보시라이 족쳐서 서쪽은 한번 누르긴 했는데 상하이는 세력이 워낙 크고, 또 그쪽 역시도 밀리려고 하지 않으니까.”

“얼마 전 봉쇄가 본보기로 상해 잡으려고 한다는 말이 있긴 했지.”

“그쪽 에스퍼들도 장난 아닌데, 그게 통했겠어요? 아무튼 여러모로 복잡한가 봐요. 이런 거 질색인데. 또 재수 없게 얽히는 거 아니겠죠?”

“뭐, 일단 지금은 미일 동맹 강화라 우리는 한발자국 물러선 위치니까. 솔직히 사드 때 경제보복 했을 때 미국이 도와주는 거 하나 없었잖아. 지금 저쪽 동맹 강화로 일본 책임이 커졌으니 지들이 알아서 총대 메겠지. 애초에 그동안 미중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서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아가도록 조성하면서 한발자국 물러나며 중국 거스르는 발언 자제했지만 이젠 걸치기 힘들 거고.”

승운이 말하며 테이블 위의 서류와 함께 있던 사진 한 장을 들어올렸다. 새로 찍어온 사진이다. 박형기 박사와 함께 있는 남자.

“이쪽이 로비스트일 가능성도 봐야하나.”

“고려해 봐야지. 아직 출국 기록 못 찾았대. 항만으로 밀입국 하지 않았나 고려도 하는 중이야.”

“박형기 박사가 밀입국한 사람을 만났을까?”

“글쎄, 그럴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나쁜 놈들일 수록 조심성이 있잖아.”

말하던 경원이 슬쩍 지승운을 바라봤다. 

“박사님 쪽은 아직 이야기 없지?”

“아직 안 물어봤지만, 오늘 퇴근하면 물어보려고.”

“그쪽에서 정보가 나오면 좋을 텐데. 어째 좁혀지는 인물이 없으니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야.”

“안 나올 수도 있어. 일단 몰라도 내가 박형기 박사가 어디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인해볼게. 김태환.”

“예.”

“나 오늘 안 들어가.”

“…….”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안 들어왔잖아요. 태환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야, 나 너희 집에서 살아도 되냐? 곧 3개월 채우는데 갈 곳이 없어.”

“임시 발령이잖아. 영종도로 돌아가.”

“기간 늘어났어. 올해 말까지 있을 거야.”

경원의 말에 승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경원이 제 집에서 머무는 거야 큰 문제는 안 되는데, 그가 어지르는 것을 청소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뭐, 같이 사는 게 저가 아니니 괜찮았다. 정 힘들면 김태환이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한 승운이 “있어.” 라고 말했다.

“어차피 방 하나 남으니까.”

“어? 진짜?”

“응. 난 잘 안 들어 갈 거고.”

“아주 살림을 차렸구만, 살림을 차렸어.”

좋을 때다, 아주. 경원이 말했다. 자기는 페어 가이드를 인천에 두고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데 누구는 막 찾은 제 가이드와 행복하게 저러고 있으니. 사실 늘 바란 것이긴 한데 실제로 보니 그렇게 내키지는 않았다.

“어, 차렸어. 나중에 선물이나 줘.”

“뭐? 신혼 선물?”

“그럼 좋지. 혼수로 가져갈만한 걸로 줘. 냉장고가 좀 오래됐더라고. 지승호는 언제 다시 내려오지?”

“내일 올 겁니다. 그러고 보니 총기 요청했다면서요?”

“박사님 꺼.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위에서도 그런 말 하던데 무슨 일 있습니까?”

태환이 물었다. 승운이 이경원을 바라봤다. 위에서 아직 말하지 않았나? 아마 고민이 있긴 할 것이다. 어디까지 공개해야하나 싶어서. 지금쯤이면 정보부 윗선은 얼추 알았을 것이고, 아래까지 닿을지는 모르겠다. 승운에게도 들어온 소식은 없었다. 아마 자신에게 들어온다면 같은 계급인 이경원도 알 것이다. 

“딱히, 별 일 아냐.”

승운이 말했다.

“그렇다고 유쾌한 내용도 아니지만.”

“……찝찝한데요.”

승운이 문제없다는 얼굴을 했다. 발현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에스퍼라고 명명된 종족은 괴수 화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어떻게 보면 큰일이기도 했다. 특히나 일반인들에게는 큰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외부에는 절대 공개가 되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엔 글쎄. 그냥 납득 되는 내용이야. 나중에 위에서 내려오면 그때 알게 될 거야. 그것보다 내일부터 어떻게 움직일지 한번 생각해봐. 난 이중석 비서관을 만나러 갈 테니…… 아니, 승호를 보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군.”

승운이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런 쪽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등급이 너무 높아도 경계를 사는 법이었다. 역시 몸 움직이는 게 최고인데. 이젠 멋대로 움직여도 되는데 그럴 기회가 드물었다. 그렇다고 어디에서 괴수가 나타나달라고 비는 것도 별로다. 승운이 슬쩍 태환을 바라봤다. 그래, 몸 움직이는 걸 굳이 괴수 상대로 할 필요 없지. 승운이 서류를 들추며 말했다.

“마무리 하고 시간 남으면 오늘 훈련이나 할래?”

딱히 대상이 없었지만 태환을 향해 하는 말은 확실했다. 이경원은 이 야만스런 육체파 에스퍼들과 연관 없으니 말이다.

“어디서요?”

“바다에 있는 섬 하나에 훈련장 만들어뒀다더라. 배나 헬기 타고 가야하지만.”

“좋죠. 배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쟤는 또 언제 배 모는 법을 배웠냐. 경원이 질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난 이제 간다. 이쪽 일도 해야 해.” 라고 말하며 일어섰다.

*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더니 재준의 말대로 비가 내렸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예지는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흡혈괴수종이 가지는 독 때문에 방호복을 챙겨 입은 예지는 마스크와 고글을 쓰고는 어기적어기적 다른 연구실로 이동했다. 이동한 연구실은 가까워 뭐 하는지 보이기는 했지만, 유리벽 때문에 소리는 차단되어있었다. 

재준은 얼마 전 경원에게 받아온 사진을 시리예에게 넘겼다. 시리예 뿐만 아니라 혹시 몰라 보리스나 에르난데스에게도 보내며 이 사람을 아냐고 물어봤다. 아직 두 사람은 확인을 안했지만 시리예는 금세 확인한 것인지 연락이 왔다. 물론 이 연락은 다른 것을 겸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 아는 얼굴이 아냐?”

[전혀. 우리 쪽과 관련 없는 사람 같아.]

생김새로 보면 유럽에 있을 법한데. 재준이 고민하며 자신이 보낸 메일 속 사진을 바라봤다. 확실히 코카서스 계열 같긴 했다.

[시어샤한테 묻는 건 어때? 아무래도 사람을 많이 만나잖아.]

시리예의 말에 재준이 고민했다. 그녀와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어샤는 이런걸 알려줄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친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으니. 그리고 재준은 자신에게 정보를 주지 않는 그녀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나마 시리예는 시어샤와 가까운 편이기는 했지만.

“혹시 모니카에 대해서 들은 거 있어?”

재준이 물었다. 시리예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선 IPMC가 모니카에 대한 정보를 들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모니카 살레가 아니라 모니카 에소노프였대.”

[러시아계야?]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라는데, 그녀가 빼낸 정보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어.”

재준의 말에 시리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니카의 얼굴이 동양계여서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긴, 우즈베키스탄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나라가 독단적으로 뭔가 하지 않았을 거라 추측한 시리예는 나름 그동안 살면서 얻은 통계를 바탕으로 결론 내렸다.

[이런 일이라면 보통 미국, 중국, 러시아 중 하나긴 하겠지.]

“…….”

동의…… 하자니 그렇고 또 안하는 것도 그렇군. 재준이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이 말은 해야 했다.

“거기에 영국도 넣어봐.”

[……원래 영국이 모든 악의 축이긴 했어.]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

모니카 에소노프가 러시아에서 공부를 했었다고 지승운은 말했다. 러시아에서 무엇을 공부했냐는 것은 묻지 않았다. 그녀의 정확한 나이를 몰라서 러시아에서 몇 년이나 있었는지,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이런 것은 수사관들이나 할 일이었다. 재준은 그저 연구하고, 지금 가진 것들을 잘 지키면 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모니카의 장례식은 미국에서 한다더군. 난 못가지만.”

[아마 대부분 못 갈 거야. 나도 이번엔 참석 못해. 미 대륙에 있는 이들 중에서도 일부만 가겠지.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서울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말한 시리예가 말을 멈췄다. 비단 서울에서 있었던 일 뿐만은 아니었지만 시리예는 그에 대해 더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뭔가 찝찝하긴 하네.]

그렇게 말한 시리예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연구는 어때?]

“아직 잘 모르겠어. 그나마 내 피로 실험을 하고 있긴 한데, 작은 괴수들과 큰 괴수들의 차이가 있으니까. 인체와 비슷한 크기의 괴수들이라면 영장류에서 변이한 괴수들일 텐데 조약 때문에 들여오기가 쉽지 않아.”

[나도 그게 불만이야. 아니 애초에 무슨 워싱턴 조약에 괴수까지 넣어?]

“뭐…… 선견지명이었지. 특정 괴수들은 멸종위기이긴 하잖아.”

[멸종위기이긴 해도 생태계 보호랑은 상관없다고.]

“일단 이 근처에서 한번 찾아보고.”

[그러고 보니 예지는? 물어볼 거 있는데.]

그 말에 재준이 시선을 돌려 예지가 있는 방을 바라봤다. 유리벽이라 뭘 하는지 훤히 보이는 곳에서 예지는 머리를 싸매며 모니터에 대고 손짓 발짓을 했다. 모니터 화면에 뜬 남자 역시도 골머리를 썩는 듯 했다. 재준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피레스쿠 박사님이랑 회의 중.”

[그래? 그럼 그냥 메일 보내야겠다. 그나저나 잠피레스쿠 박사님이 예지를 좋게 보더라.]

“음.”

[라제쉬 박사님들이 언제 복귀할지 모르잖아. 이 기회에 아예 여러 방면으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잠피레스쿠 박사님은 유럽의 대가 중 한 분이시니까. 예지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쪽도 괜찮지.]

“그렇겠지.”

재준이 답했다.

“뭐든 예지가 선택할 일이고, 난 응원 정도밖에 못해주지만.”

[그맘때는 그게 제일 필요해, 허니.]

“떠나는 게 아쉬우면서 기대가 되네.”

네가 아버지냐고. 시리예가 생각했다.

실제로 가끔 그런 느낌이 들곤 했다. 처음에는 웬 한국인 여자를 데리고 와서 밥을 먹였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었지. 그게 일종의 부성애였던 걸까. 그때 당시 재준이 힘들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애정이 이상하게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자신의 소관은 아니지만.

아마 그 에스퍼에게는 이게 거슬릴 수도 있다고 시리예는 생각했다. 처음에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떠나기 전에.”

앞날에 위험이 되지 않도록 해결을 해야겠어.

재준이 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리예는 재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어. 올해는 몇 개월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끝내기만 한다면.

[잘 될 거야.]

시리예가 말했다.

“그렇게 만들어야지.”

*

비는 저녁 늦게까지 내리더니 그쳤다. 훈련 차 섬에 갔던 승운과 태환은 파도와 풍랑에 섬에 고립되어야하나 싶었는데, 마침 훈련 나온 다른 에스퍼들도 있어 헬기로 복귀했다. 태환은 낙뢰위험보단 배 전복이 더 낫지 않냐는 말을 했지만, 어쨌든 헬기로 무사히 귀환했다.

비가 그치자 날은 한층 더 선선해졌다. 바람이 차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그래도 비 온 뒤의 냄새가 좋았다. 유독 짙은 향의 풀냄새가 나는 마당을 보며, 승운은 설마 저거 식물괴수종의 냄새인가 의심했다. 재준에게 물어보자 재준은 그저 웃기만 하고 답을 해주지 않았다.

재준과 함께 퇴근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서로 다른 일을 하더라도 한 공간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웠다. 재준이 일하면서 마실만한 차를 타고 자신은 커피를 탄 뒤 식탁에 앉아 패드를 통해 위에서 내려온 서류를 읽어나가던 승운은 태블릿 위에 뜬 알람을 보고 굳었다.

‘박요한 가이드가 깨어났습니다.’

승운은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로 알람을 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람이 사라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물론 그도 박요한이 죽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깨어날 것이라 생각하지도 못했다. 승운이 슬쩍 재준을 바라봤을 때 재준은 뭔가를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승운이 메시지 앱을 열었다. 지승호가 보낸 텍스트에는 박요한이 깨어남은 물론 이중석 비서관을 만나서 얻은 자료가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곧 이어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고성인데 집에 안 계시네요?’

‘10분 뒤. 기다려.’

승운이 지승호에게 답을 보냈다. 재준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랩탑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봐도 승운이 알 수 없는 수치들이 적혀있었다. 승운이 말했다.

“박사님, 저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지승호 에스퍼가 왔습니다. 보고 받을 것도 있고요.”

이어지는 말에 재준이 뭔가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그렇군요.” 답했다.

“돌아오시는 겁니까?”

“예, 갔다가 올 거예요.”

“다녀오십시오.”

재준이 말하며 웃어보였다. 승운은 그런 재준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살포시 웃어보였다. 왜 그러냐는 얼굴로 재준이 바라보자 승운이 어느 샌가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안경을 벗기고 입을 쪽 맞추자 재준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두 눈을 깜빡였다. 승운이 다시 안경을 씌워줬다.

“다녀올게요, 박사님.”

“…….”

재준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귓불이 조금은 빨개진 듯해서 승운은 즐거운 듯 웃었다. 그동안은 매번 당했지만 이번은 왠지 복수를 해준 것 같았다. 아니, 복수인가? 아무튼 재준을 당황시킬 수 있었다는 것에 즐거워져 다시금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재준의 입술과 뺨과 귀에 입을 맞췄다. 표정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술이 닿을 때마다 피부 위가 울긋불긋 변했다. 마지막에는 목빗근까지 입을 맞추자 재준이 승운을 밀어냈다. 얼굴이 발갛다.

“…….”

“싫었어요?”

“그게 아니라—.”

“좋아서?”

“……제가 목이랑 귀가 약한 건 알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네, 알고 있어서 한 거예요.”

대답한 승운이 다시 목에 입 맞췄다. 재준이 숨을 삼키듯 흡 소리 냈다가 멈췄다.

승운이 입술을 떼고 재준을 내려다봤다. 와, 가기 싫어. 지금 당장 침실로 데려가고 싶지만 지승호한테 10분 안에 간다고 말했으니 어서 가야했다. 정말 가기 싫어.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재준의 몸을 더듬던 승운은 손가락 끝에 걸리는 유두를 지분거리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가기 싫은데, 미루면 안 되겠지. 결국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떼어낸 승운이 아쉬운 얼굴을 한 채 힘겹게 내뱉었다.

“진짜, 진짜 다녀올게요.”

남을 흥분시켜놓고 이렇게 내빼다니. 재준이 멀어져가는 승운을 잡을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돌아온다고 하기도 했고, 이 밤에 나가는 거 보면 급한 일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조심히 다녀와요.”

재준이 말했다. 승운이 눈을 한번 찡긋이곤 현관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승운을 계속 바라보던 재준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다시 랩탑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새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떴다. 에르난데스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Querido로 시작한 스페인어와 인사말 뒤에는 재준이 원하던 내용이 적혀있었다.

메일을 읽어 내려가던 재준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이러니까 모르지.

박형기 박사가 만난 남자는 이능력자나 길드 소속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국가 이능력 정보원들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에르난데스는 그들과 몇 번이나 일을 해본 듯 했다.

“미국의 변호사라.”

정확히 말하면 남자의 직업은 로비스트다. 에르난데스는 그가 변호사 면허가 있다고 했다. 한국의 이능력 길드를 바라는 쪽은 미국 쪽인가? 박형기 박사와는 어떻게 얽혀있는가?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일단 누구인지 알았으니 승운이 돌아오면 알려주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그들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재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어지는 메일 내용을 읽었다. 에르난데스가 혹시 이것에 대해 들었냐는 말과 함께 링크를 하나 첨부했다.

재준이 링크를 누르자 나온 사이트는 바로 무언가를 다운로드 했다. 재준이 다운된 pdf를 열었다. 2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짧은 문서였는데, 첫 머리는 그리스어로 시작했다.

그리스 발인가? 아니, 이후 이어지는 언어는 영어다. 그마저도 짤막하고 나머지는 지도? 건축 도면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아니, 상징인가? 뭐든 유럽 쪽에서 온 것은 아닌 것 같고, 오래된 프래터니티의 묘한 촌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리스어 때문이겠지.

재준이 글자를 읽어나갔다.

“에르고 이라클리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헤라클레스 프로젝트?”

뭔진 모르지만 꺼림칙했다.

*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던 지승호는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았다. 승운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비가 내려 질척질척해진 모래사장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발자국을 남겼다.

“오셨습니까?”

인사하듯 물으며 담배를 꺼내 내민 승호를 가만히 바라보던 승운은 “나 담배 끊었어.” 라고 말했다. 담배를 끊어? 누가? 왜? 어차피 곧 죽을 몸이니 몸에 나쁜 건 전부 하고 가겠다며 향락을 즐기던 지승운은 어디가고?

승호가 뻘쭘한 얼굴로 담배를 넣었다. 담배 끊었다는 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울 만큼 염치없는 지승호이긴 했지만, 지승운 앞에서 그럴 만큼의 깡은 부족했다.

“상황은? 비서관 만나봤다고?”

“예, 그런데 비서관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지역 사무소에서는 사무장이 더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의원의 사돈이라고 하더라고요. 비서관은 이쪽 출신은 아니었는데 선거 초창기에 돕기 시작하면서 계속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가 있냐고 되묻더군요.”

“모른 척이 아니라?”

“빼놓고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죠.”

“하긴, 지역 정치는 연고지에 집착하니까. 그게 아니라면 동문이라도 되어야하는데. 동문이야?”

“아뇨, 다른 곳에서 나왔습니다.”

“일 잘해도 나중에 사내정치하다 틀어지면 쫓겨나겠군.”

“다 그렇죠. 밀어주는 쪽만 밀어주니까. 아무튼 이번에 여기 의원이 그쪽 법안을 내긴 할 건가 봅니다. 다만 법안 통과 자체는 아직 회의적이긴 한데.”

그렇게 말하며 지승호는 승운에게 서류 두개와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하나는 비밀 파일이었는지 앞에 도장이 찍혀있었다.

“회의적이라. 글쎄. 될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당이든 배금주의와 자유주의자가 득세하잖아. 우리나라가 노조 힘이 강한 것도 아니고, 전반적으로 정치인 수준들이 민심을 담기엔 역부족이지.”

승운이 받아들며 봉투 안쪽을 확인했다. 그가 요청했던 총기였다. 정확히는 재준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승운이 봉투를 구겨 옆구리에 끼고 서류를 들췄다. 

“공공기관 3대 분야 기능조정 추진방안? 개소리네. 이거 민간 위탁하겠다는 거잖아. 입안한 거야? 아니면, 협의과정? 정기국회는 아직 멀지 않았나?”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가을이니까요. 그러니까 빨리 처리하려고 하는 거죠. 지금 저희 내부도 시끌시끌하고.”

“여하간 신자유주의에 미쳤어. 업무분장을 분리해서 공급망 관리를 법률적으로 분리해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건 다 개소리라고. 규제 없는 시장에서 경쟁하는 환경을 조성해봤자 실제로 국민들만 손해지. 이능력센터를 길드화 하면 낙후지역은 좆될 텐데.”

승운이 말하며 들추던 서류를 덮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그렇겠죠. 지금과 다르게 수도권 위주로만 갈 수도 있고.”

“운영비용 감축도 하겠지. 우리한테도 손해야. 어차피 등급 높은 에스퍼나 가이드들이야 좋은 쪽으로 이직하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그런 이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물론 지승호와 지승운은 충분히 그런 쪽으로는 이득을 보는 입장이긴 했지만, 사실상 이쪽에 있어도 손해는 없다. 이능력자들을 통제해야하는가 아니면 그들에게 자유를 줘야하는가는 여전히 말이 많이 나오고 있었지만, 적어도 폭주의 가능성이 있는 에스퍼들이 민간기업이나 길드에 소속된다면 그 이후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들이 폭주하는 건 상관없지만, 폭주의 여파나 그 후처리가 문제였다.

“들어보니 미국 쪽이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E사나 T사의 경우는 이쪽으로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쪽이 우주정거장 하나를 민영화한다는 소문도 돌던데.”

“그건 또 왜?”

“모르죠. 팔아먹고 다른데 써먹던가. 우주개발사업이 별로 안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건 저번 정부 때 취소하지 않았나?”

“말은 그렇긴 한데, 또 어떻게 될지 모르죠. 다음 선거가 공화당에 유리하다는 말도 있어서.”

“그거 유지하는데 연간 3조 든다고 했던가?.”

“사대강 추진한 거 생각하면 몇 번이든 할 수 있겠는데요?”

승호의 말에 승운이 피식 웃었다. 그래, 거기 처바른 돈이었으면 괜찮은 이능력 센터 세 개를 더 설립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지만. 승운이 이어 말했다.

“그다지 돈이 안 되니까 우주정거장 팔아먹고 이능력 쪽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겠다는 건가.”

“로비스트들도 활발하고 기업들도 돈을 많이 낼 테니까요. 게다가 미국에는 미친 백만장자들이 많으니.”

“그래, 그 백만장자들이 자국 잡아먹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다른 나라들까지 노리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그리고 한국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환율이 불안정할 때는 더 그렇겠지.

“외국 헤지 펀드들 한번 봐야겠네. 이번 사태 때문에 우리나라랑 태국 쪽을 눈독들이지 않나?”

이런 때에 매각이니 공기업이니, 나아가 길드 화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좋지 않았다. 얼기설기 얽혀서 복잡한 상황에 짜증이라도 난 듯 승운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영국도 포함시켜야 할 겁니다. 아르헨티나나 튀르키예 죽였듯이, 너희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겠죠.”

“기축통화로서 자국을 위주로 가는 건 뭐 그렇다 치는데, 그게 남의 나라 족치는 꼴이 되면 열 받는단 말이지. 국가 신용도도 엉망인데.”

“그거야—….”

국가가 나서서 방어를 해야 하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싶은 심정으로 지승호는 고개를 저었다. 팔아먹기에 급급할 따름이라. 오히려 기회주의자들이 눈독들이고 있어서 곤란했다.

“역시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승호가 말했다. 냉정하다 싶다가도 가끔 돌아버리는 자신의 사촌 동생을 지승운은 곤란하다는 듯 바라봤다. 사실 자신으로서도 그게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여겼다. 이왕이면 그 의원의, 거기에 동조하는 의원들의 길에 괴수를 하나 둘 씩 뿌려서…… 걸리겠지.

에스퍼의 범죄의 경우 이능력 법에 따라 처리되긴 하지만, 국회의원은 한 명이 하나의 헌법기관이라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면책특권만 없더라면 잡아서 족치는 건데. 아무리 에스퍼들의 세계가 골치 아픈 법률보다는 주먹에 더 가깝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문명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어느 선까지는 도덕을 지키며 살아야했다. 특히나 민법은 더 그랬다. 형법은 경우에 따라 종종 어겨도 되긴 하지만 재수 없게 걸리면 시말서를 쓰는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들이 저지르고 싶은 것들은 폐기될 법한 일이라.

“일단 업무대로 하자고.”

“그래야겠죠.”

지승호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우선 법제처 심사에 통과할지 여부도 모르니까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는 놔두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이 정도 말이 나왔더라면.

“기회주의자들은 죄다 들어오겠군. 진짜 실현되면 큰일 나는데.”

괴수는 꾸준히 나타나고, 그것을 사냥하는 에스퍼나 용병들의 수도 꾸준할 것이다. 각성자들은 많이 죽기도 하지만 또 그 만큼 많이 태어나기도 했다. 물론 국내 출생률에 따라 그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한반도 내에서 발생한 괴수들을 처리하는 데는 문제없다.

다만 괴수 처리가 민간업체로 넘어간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민간은 정부기관보다 경제상황이나 정세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소속되어 있는 이능력자도 마찬가지다. 상황에 따라 서비스 비용에 거품이 생길 가능성도 크고, 시장가격변동을 소비자가 내는 요금에 직접 전가할 가능성도 있으며, 괴수처리 면에서도 품질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더욱이 괴수 사체 폐기는 특별한 처리 공정을 거쳐야 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민간업체가 괴수폐기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지 못한다.

“거참…… 도대체 뭐가 좋다고 자유경제정책을 적용하는 거야? 실패하는걸 보면서. 20세기의 사례로 깨달은 게 없나?”

“깨달은 게 있으니까 저러겠죠. 자기 배 불리는 데 유용하다는 거.”

꽤나 회의적인 승호의 말에 승운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음 서류를 들췄다. 비밀안건이라. 사본이다. 승운이 서류를 들추자 특정 단체에 대한 정보가 나왔다. 

“알크메네?”

이게 뭐야. 승운이 서류를 이어 읽어나갔다.

“재단?”

“예, 겉보기엔 그냥 재단인데 찝찝해서 일단 받아왔습니다. 목적 변경 시기가 3년 전입니다. 이중석 비서관이 빼돌린 자료예요. 사무장이 관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비서관이 이런 걸 공으로 넘겼을 리 없고.”

“아직까지 딱히 요구한건 없습니다. 일단 빚으로 달아뒀지만 상황을 봐서 요구를 들어 주든가 버리든가 해야죠.”

지승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제 핏줄이지만 가끔은 무섭다니까.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인 주제에 좋은 사람인 척 하는 게. 덕분에 협상 테이블에서 지승호를 잘 써먹고 있는 처지지만, 적으로 둔다면 꽤 곤란한 상대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정치바닥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위장이었지만, 지승호는 한때 4년간 국회에서 보좌진 생활을 하며 더 교묘하고 악랄해져갔다. 같은 편인데다 사촌이니 다행이지. 승운은 찝찝함을 감춘 채 다시 서류에 눈을 돌렸다.

“이능력 재단이라. 이것도 재단으로 인정해줘?”

“뭐,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까요. 일단 말은 이능력이니 뭐니인데 시작은 문화재단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산경영 회사로 바꿨죠. 서류상으로는 비영리법인이긴 합니다.”

“허, 문화 사업 재정 마련한다고 설립해놓고는 공공재산을 어마어마하게 탈취했구만. 지자체가 여기에 부동산을 무상으로 넘겨줬어? 이건 뭐야? 국영기업 지분 양도?”

“예, 문제는 그 구역이 군사지역이라는 건데.”

“이능청 제7센터 땅도 이 재단 소속이군.”

“무상으로 제공받은 뒤, 자산 형태로 바꾸고 나서 국가에 임대료를 받고 대여중입니다. 임대료 자체는 월 30만원밖에 되지 않습니다만 그건 현재 이능청 소속이기 때문이지 만약 민간기업이 들어오고 길드 화 되면 금액을 올리겠죠. 그게 아니어도 공기업으로 빠지게 되면 지금 임대료가 터무니없다고 이의제기할 겁니다.”

“설립시기가 17년 전이라. 오래전부터 해 처먹을 생각이었군.”

그렇게 말하며 승운은 피식 웃었다. 이능청 제7센터가 설립된 것이 2005년, 이 재단과 설립 시기가 동일하다.

“좋아, 여기부터 뒤져보자고. 당분간 센터 말고 사람들 만나는 쪽으로 해봐. 지역 행사 위주로 다니면서, 유지들도 만나고.”

“알겠습니다.”

승호가 대답했다. 당분간은 정장 위주로 다녀야했다. 에스퍼 제복이나 정장이나 그게 그거였지만.

“아, 그리고 이쪽에 연락해봐. 여기 국정원 번호야.”

“국정원 쪽이요? 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상공회의소 안내 책자에 있던데?”

“예? 상공회?”

“응. 실수로 국정원 연락처를 노출했대. 거기에 전화해보니까 자기 이제 거기에 없다고 후임자 연락처 알려주더라고. 블랙요원은 아니고 그냥 화이트.”

“……괜찮은 겁니까, 여기?”

“원래 세상살이가 다 주먹구구잖아.”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하긴, 아무도 일하지 않고 모두에게 떠넘기는데도 회사가 돌아갈 때가 있었다. 물론 회사뿐만 아니라 꽤나 중대한 기구 역시도 그러했다. 지승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냥 그러려니 하자. 원래 세상이 요지경이지 않던가. 

“일단 잘했어. 집에 가서 한차례 더 확인해야지. 너도 들어가서 쉬어.”

승운이 말했다. 들어가서 쉬라니, 같이 가는 게 아니었나? 승호가 물으려던 순간 “지승호.” 하고 승운이 이어 말했다.

“예.”

“네가 안방 써.”

“예?”

“절대 이경원한테 안방을 내주지 마.”

“……경원 형 그냥 놀러온 거 아니었어요?”

“당분간 그 집에서 살 거야. 왔다 갔다 하겠지만.”

“왜?”

지승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마치 저주의 말이라도 들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에게 자연의 인연을 끊어버리겠단 저주를 받은 파미나보다도 더 파리하고 애절한 얼굴을 한 승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왜요?”하고 되물었다.

“견뎌.”

지승운은 단호했다.

왜 견뎌도 그딴 걸 견디라고 하는 건데. 이경원의 지저분함은 그의 친동생인 이경민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던가. 지승호는 이것만큼은 받아들이기 싫었다.

“형은 어디에 있고?”

“난 박사님이랑 있어야지.”

“…….”

“간다.”

눈꼴시어서 원.

그래, 이 커플보다는 이경원이 더 견디기 쉬웠다.

*

지승운이 돌아온 것은 약 두 시간 정도 뒤였다. 승운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재준은 식탁에 앉아있었다. 랩탑 옆의 유리컵의 차가 반절밖에 차지 않았다. 재준이 들어오는 승운을 향해 웃어보였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승운은 그대로 재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식탁 위에 종이봉투를 올려놓고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역시 소파를 빨리 사야겠다. 의자는 뭔가 불편했다. 허리에 그대로 손을 두르고 어리광을 피우듯 비비자 재준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이 힘들었어요?”

“아뇨, 일은 늘 그래요.”

승운이 대답했다. 재준은 그렇군요, 말하고는 다시 랩탑을 바라봤다. 승운도 슬쩍 모니터를 봤다. 그리스어네. 그리스어도 읽을 줄 아는 건가. 저렇게 유능하면 어떻게 하지. 나 버리고 다른 사람한테 가지는 않겠지? 승운이 괜한 생각을 했다. 시선이 느껴진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뭔가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왜요?” 묻자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있어도 예쁘네요, 지승운 씨는.”

그래, 이게 있었지. 가이드의 외모 밝힘증. 우선 재준이 다른 누군가에게 갈 일은 없을 듯했다. 다른 S급 에스퍼만 나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한국에 있는 다른 두 에스퍼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나이가 들었으니까 아무리 예뻐도 자신을 따라올 수 없다 여겼다.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습니다.”

재준이 이어 말했다. 승운이 허리에 둘렀던 손을 펴고 제대로 앉았다. 재준이 랩탑을 톡톡 두드렸다. 문서가 열려있는 화면에 시선을 돌리자 재준이 아웃룩을 열어 화면을 하나 띄웠다. 승운도 한번 본 적 있는 사람의 사진이다. 박형기 박사와 있는 남자.

“에르난데스가 알고 있더군요.”

“누구인지 찾은 겁니까?”

“예, 로비스트였습니다. 하원 사무국에 등록되어있기도 하고, 뉴욕 주 변호사 자격이 있다고 하더군요. 사실 코카서스 계처럼 보여서 유럽을 생각했는데 주 무대는 남미라고 합니다. 이름은 루카스 영.”

“하원 사무국에 등록되어있으면…… 직접적인 정보 요청은 못하겠지만 알아보기엔 쉽겠군요. 변호사라.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로비를 할 수 있는 이들이 변호사이긴 하지만 해외 변호사는 해당이 없을 텐데.”

“도움이 됐습니까?”

“당연하죠.”

승운이 답했다. 미지의 인물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 와중에 이렇게 재빨리 파악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미에서 주로 활동하는 로비스트, 변호사 자격, 이름. 승운이 재빨리 경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다음은 담당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애초에 재준이나 승운의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 수고를 해줄 거라고는……. 생각을 이어나가던 승운이 재준을 바라봤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모습에 “박사님.”하고 부르자 재준이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과는 달리 표정이 풀어져있다.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죠?”

“예?”

“그냥.”

승운이 답했다. 재준이 승운의 머리통을 팔로 끌어안아 자신의 가슴팍에 갖다 댔다. 심장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 보인다. 힘들어 보이는 것 같기는 한데,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승운은 아직 재준을 잘 모르겠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양이를 쓰다듬듯 머리를 몇 번이나 문지르고 만지작거리더니 손을 뗐다. 승운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저도 드릴게 있는데.”

그렇게 말한 승운이 식탁 위 봉투를 가리켰다. 재준이 가져와 안을 살폈다.

총기다.

“글록이네요. 호신으로 좋죠.”

“웬만하면 쓸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요.”

서울이면 위험할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이곳은 들어오기 힘든 곳이다. 몇 차례의 검문을 통과해서 들어오기는 힘들 것이다. 허가를 받아 온 사람이라면 신분 증명이 확실 할 테니 크게 위협이 될 일은 없겠지만, 혹시 또 모르지.

웬만하면 재준의 옆에 딱 붙어 있으면 좋은데, 간혹 그의 의지와 다르게 움직여야 할 때가 있어서 곤란했다. 

“그러고 보니 지승운 씨는 신화에 대해 잘 압니까?” 

재준이 물었다.

“신화요?”

승운이 좀 곤란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죄송한데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어서요.”

“그렇군요. 저도 모릅니다.”

재준이 답했다. 박사님도 모르는 게 있기는 하구나. 승운이 생각했다. 재준이 이어 말했다.

“헤라클레스에 대한 게 궁금한데, 제가 아는 건 힘이 세다는 것뿐이라.”

그리스 로마 신화라. 승운이 말했다.

“개를 싫어했던 것 같아요. 머리는 주황색에 가까운 금발.”

“……그건 어떻게 압니까?”

“어릴 때 만화영화로 봤습니다. 근데 기억에는 이상하게 춤추는 그림이 그려진 암포라만 남아있네요.”

“아마, 그 만화와 실제는 좀 다를지도 모릅니다. 참고는 했겠지만.”

“……내일 도서관에서 책 빌려올까요?”

“좋죠. 헤라클레스 파트만 따로 있었으면 좋겠는데.”

재준이 답했다. 역시 답은 책을 보는 것 밖에 없다고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며 결론지었다. 

물론, 다음날 그들이 내린 결론을 들은 예지는 멍청이들을 바라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요.”

오늘 출근길에 예지는 동반하지 않았다. 승운의 차를 타고 출근한 재준은 센터 중앙 도서관에도 그리스 신화 관련 서적이 있을까 하는 말을 했고, 예지는 뜬금없이 신화는 왜 묻냐고 말했다. 헤라클레스에 대해 알고 싶은데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만 따로 실려 있는 책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재준의 말을 들은 예지는 도대체 이 사람들 몇 세기에 살아가는 거야? 라는 시선을 줬다.

“바보들.”

인터넷 뒀다 뭐한다고. 20세기에 태어난 티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러는 예지 역시 20세기에 태어나긴 했지만 그 부분은 교묘히 숨겼다.

“그런데 어제 집에 안 갔어? 피곤해 보이는데.”

“네, 할 일이 쌓여서요. 아, 게다가 잠피레스쿠 박사님이 자꾸 시차를 고려하지 않고 유럽 시간으로 저한테 말을 건네다 보니까  자꾸 밤을 새게 된다니까요. 저 지금 자러 갈 건데 괜찮죠?”

“푹 자고 와.”

“밥 먹어야하니까 점심에 잠깐 일어나야겠어요.”

“밥보단 잠이 더 우선이지 않아?”

“안 먹으면 근 손실 일어나요.”

예지가 퀭한 눈으로 대답했다. 

“전화로 깨워줄게.”

재준의 말에 예지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현대인에게 핸드폰이란 생산성 있는 것들을 축약해놓은 기기라 알람이 있으면 충분했다. 특히나 기기는 사람과 다르게 지치지 않아 예지가 일어날 때까지 울어주는 정성을 다 한다.

“왜 인터넷을 생각하지 못한 걸까요.”

승운이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자신의 태블릿을 바라봤다. 검색엔진에 헤라클레스를 검색하자 장수풍뎅이부터 이것저것 다 나왔다. 재준도 하던 일을 멈추고 승운의 옆에 서서 화면을 바라봤다.

헤라클레스. 그리스 신화 최고의 영웅. 신을 이긴 자. 반인 반신. 사자 가죽을 걸치고 몽둥이를 든 모습으로 그리스 신화 속 온갖 괴수들을 때려잡았다.

에스퍼랑 비슷한가? 

모친이 미인이라면 헤라클레스도 미인이겠지. 진짜 에스퍼랑 비슷한 건가? 재준이 생각하는데 승운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있다. 재준이 “지승운 씨?” 하고 부르자 승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박사님.”

“뭔가 알아낸 게 있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승운이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있다.

“여기 알크메네.”

“헤라클레스의 모친 이름이군요. 페르세우스의 후손. 미모와 지혜가 견줄 바 없던 여인.”

그게 어떻다는 거지? 재준이 내용을 읽어나갔다. 미케네 왕족의 아내라. 제우스가 여기저기 지분거리고 살긴 했었지. 신화를 모르는 재준이 아는 것은 그 정도였다.

아무튼 헤라클레스 관련 글을 읽어도 딱히 떠오르거나 연관된 것이 보이지 않았다. 헤라클레스 프로젝트. 에르난데스가 왜 그런걸 보냈는지 알 수 없다. 어디서 어떤 말을 들었나? 

마피아와 연관되어 있는 에르난데스는 다른 괴수학자들에 비해서 정보력이 좋았다. 일단 기억해 뒀다가 큰일이라면 모른 척 잘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재준은 이내 관심 없다는 듯 태블릿에서 손가락을 뗐다. 그리고 승운을 바라보자 그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이다.

“박사님, 실례가 안 된다면 헤라클레스는 왜 알아보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까?”

“파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에르고 이라클리스라고 적혀있는.”

어제 그 그리스어로 된 파일인가? 승운이 생각했다.

“헤라클레스 프로젝트라는 뜻인데, 정확히 뭘 말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지도 같은 것과 시구만 나와 있어서.”

애초에 헤라클레스라는 인물이 그리스 신화 속 많은 신들 중에서도 매우 유명한 편이었으니 이름만 놓고 보면 크게 이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신이 아니라 영웅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알크메네라는 이름이 더 낯설었다.

“지승운 씨는 알크메네와 연관된 걸 찾나봅니다?”

“찾는 건 아니고.”

이미 찾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조사가 필요한 재단이랑 이름이 같아서요. ‘알크메네 이능력 재단’이라고.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좀 찝찝하지 않습니까. 흔히 쓰이는 이름들이 아니니.”

알크메네라면 확실히 특이하긴 했다. 특히 한국에서라면.

“그 재단의 공용 대표와 이사들이 여러 명인데, 박형기 박사도 지분이 있습니다.”

재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박요한 가이드도 거기에 소속되어있고.”

“그게 가능합니까?”

“뭐, 비영리재단이었으니.”

“가이드와 에스퍼에게 부업 허가를 해줘선 안됐는데.”

아니 뭐, 비영리재단이니까. 물론 임원 취임 겸직 동의서가 필요하긴 한데, 보통 이런 비영리재단의 임원 감투 하나 차지하는 경우는 동의서가 안 나오는 경우가 더 드물었다. 

“맹점인가 봅니다.”

“…….”

“알크메네와 헤라클레스라. 우연이면 좋겠네요.”

재준이 말했다. 우연의 일치? 아니면 필연?

“그러게요.”

그냥 찝찝한 것으로 남아있으면 좋을 텐데, 왠지 모르게 음모론과 관련된 생각들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사회격변이 일어나거나 당면한 사건이 상식을 넘어 비현실적 당혹감을 안겨줄 때 세상이 음모론의 온상이 된다던가. 

평소라면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알 수 없었다. 심각하던 승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재준이 “지승운 씨.” 하고 불렀다. 고개를 돌리며 찌푸렸던 미간이 푼 승운이 “예.” 하고 대답했다.

“제가 깜빡하고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어제 밤에 이경원 박사한테 연락이 왔었습니다.”

“경원이가요? 왜요?”

“신혼집들이 하자던데요?”

“…….”

“신혼이라 했습니까?”

“그, 그게.”

그렇게 말을 하긴 했는데 경원이 그런 걸 재준에게 말을 할 줄 몰랐다. 그것보다 왜 서로 연락을 하는 거지? 둘이 뭐 하는데? 

“그래서 초대했어요. 금요일에 오는 걸로. 괜찮죠?”

“그래도 돼요?”

“안될게 뭐가 있겠어요.”

재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 * *

슬슬 밤바람이 서늘해져간다. 지승운은 며칠간 집을 비웠다.

뭔가를 찾느라 바쁜지, 지승운 뿐만 아니라 김태환도 자리를 비웠다. 있다가 없으니 빈자리가 허전하기도 했지만, 언제까지 그가 여기서 자신의 곁을 지키며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들어보니 그동안 여기 붙어있던 것도 가이드를 찾기 위한 명목이라는 말을 들었다. 페어가이드가 등록된 지금은 지승운은 다시 예전처럼 업무선상에 뛰어들었다. 그나마 재준이 제어율 80% 이하가 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가이딩을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에스퍼들이 밤낮이나 주말 없이 일을 한다고 하지만 승운은 주말이 되면 꼭 돌아왔다. 주말에 일하는 수당이 꽤 비싸서 웬만하면 국가에서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요즘은 S급 에스퍼를 쓸 만큼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은 꽤 평화로웠다. 요즘 들어 다시 에스퍼들이 바쁘게 움직이곤 하지만 말이다.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갔다. 이제 막 석양이 드리우는 때, 재준은 눈앞의 괴수들을 보며 물을 줘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밤에 물을 주는 건 좀……. 하지만 괴수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보통의 식물과 달리 튼튼하기도 하고.

제 타액을 섞은 물을 담은 분무기를 가만히 바라보던 재준은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분무기로 물을 뿌렸다. 몇몇 괴수들은 움직임을 보이지만 일부는 반응하지 않는다. 분명 타액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긴 한데, 추후 조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축 처진 잎사귀를 구경하던 재준의 뒤로 “저 왔어요!” 라는 소리가 났다. 유예지였다.

“지금 야밤에 물 주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예지에게 시선을 한번 준 재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괴수들의 상태에 집중했다. 그래봤자 움직이는 것은 한두 개였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와, 그래도 엄청 잘 키웠네요. 겨울은 잘 보내요? 동사하지 않나? 여기서 엄청 죽을 텐데.”

“겨울엔 집안에 들여놔야지. 안 그래도 첫해는 다 죽였어.”

그때는 그냥 땅에서 키워 겨울에 들여놓을 수 없었다. 

맞아, 한국은 이런 날씨였지. 

돌아온 첫 해에는 괴수들뿐만 아니라 사람도 죽을 뻔했다. 코트만으로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추위였다. 왜 그렇게 롱 패딩을 입고 다니나 했더니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기온이 워낙 많이 바뀌어서 괴수들이 좀 덜 나타나는 게 다행인 것 같아요. 겨울에 활발한 괴수들은 여름에 죽고, 더위에 강한 괴수들은 겨울에 죽고.”

“괴수들 크기도 그래서 좀 작은 편이지. 물론 외모와 다르게 레벨이 높다는 게 곤란하지만.”

“한국 에스퍼들 레벨도 높잖아요. 뭐, 그게 그거죠. 여기 선물이요.”

예지가 말하며 튤립 한 아름을 건넸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꽃이었다. 애초에 남성에게 꽃을 선물하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하지만. 재준이 피식 웃으며 선물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꽃 예쁘네.”

“원래 술과 꽃, 초콜릿은 기본이죠. 괜찮은 초콜릿을 구할 수 없는 게 문제지. 그래서 술 두 병 가지고 왔어요. 오늘 오는 사람들 생각하면 두병으로 될까 싶긴 한데.”

그렇게 말하며 예지가 마당에 있는 철제 의자에 앉았다. 재준이 멈칫했다. 그…… 걔는 좀 그런데. 하지만 말해주면 더 곤란할 것 같아 재준은 괜히 다른 의자들을 꺼내왔다. 예지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돕겠다면서 의자를 꺼내고 접이식 테이블을 같이 들었다. 대여섯 사람이 둘러앉기에 충분한 테이블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예지가 그 위에 자신이 가져온 술병을 올려뒀다.

“역시 와인은 이태리예요. 아, 근데 진짜 술 부족할 것 같지 않아요?” 

“안에 술 많아. 너 원하는 거 찾아서 마셔.”

“그럼 전 저번에 선물로 들어온 도라지 술. 그거 다 안마셨죠?”

“그때 너랑 마시고 난 뒤로 그냥 뒀어. 마시고 싶으면 가져와.”

“아싸.”

예지가 신난 얼굴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재준은 철제 의자를 저 멀리 치워뒀다. 확실히 승운이 깨끗하게 치워 어떤 티도 나지 않았지만 양심에는 찔렸다. 많이.

예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술잔과 도라지술병을 들고 왔다. 30년산 도라지로 담가 만든 술은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던 것인데, 왜 선물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쨌든 유예지는 저 도라지 술을 몹시 좋아했다. 예지가 테이블 위에 술병을 내려놓고 빈 의자에 앉았다. 재준 역시 건너편에 앉았다.

“그나저나 지승운 에스퍼는 아직 도착 안 했나 보네요.”

“들어오는 차가 막힌대.”

“퇴근시간이잖아요. 군인들이나 공무원들 집에 가야지. 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뭐예요? 추워지니까 하끌렛 먹고 싶다.”

“다음에 해줄게. 기계 있어. 오늘은 그냥 삼겹살이나 구울까 하고.”

“추운데 찌개도 해주세요.”

“김치찌개 끓여둔 거 있어. 한 번 더 데우면 돼.”

말 나온 김에 준비한 재료들을 가지고 와야겠다며 재준이 일어서자 예지도 덩달아 일어섰다.

“앉아있어. 손님인데.” 

“에이,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앉아서 한 잔 해. 오프너도 갖다 줄게.”

재준이 말했다. 예지는 거절하지 않고 다시 앉았다. 재준이 꽃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예지는 오랜만에 마당을 둘러봤다. 깔끔한 집이었다. 괴수들도 잘 자라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준이 한가득 바구니 같은 것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바구니…… 저거 배달용기 아냐? 아이스박스? 저게 왜 집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예지가 도와주려 일어나려고 하자 재준은 그냥 앉아있으라고 말했다.

재준이 바구니 안에서 재료들을 꺼냈다. 가스버너부터 고기랑 반찬까지 야무지게 챙겨왔다. 이걸 보니 자신이 오기 전에 다 준비를 끝내뒀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박사님 밥 되게 오랜만에 먹네요. 상추 제가 뜯을까요?”

“이따가 지승운 에스퍼 오면 시키면 돼.”

그 사람한테 그런 것도 시키는구나.

“뜯으면서 아예 씻더라고. 물 원소 에스퍼는 유용해.”

S급 에스퍼를 그냥 유용한 도구 취급하는 건가? 

“그나저나 결정은 한 거야?”

재준이 물으며 예지가 가져온 와인을 챙겼다. 왁스 씰이라 달리 나이프로 열 필요가 없어 바로 스크류를 돌리는 재준을 보며 예지가 그 앞에 와인 잔을 대령했다. 코르크를 연 재준이 와인을 따랐다. 콜콜콜 소리가 나며 채워지는 잔을 보며 예지가 “전 좀 더 주세요.” 라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른 재준은 예지의 건너편에 앉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직 확정은 안 내렸어요. 결정되면 말할게요.”

“긍정적으로 보긴 하려고?”

“뭐, 그럴 것 같긴 해요. 생각보다—… 조건이 꽤 괜찮아서요. 유럽은 좀 심심하긴 한데 어차피 이 지역도 유럽이랑 비슷하잖아요. 8시만 되면 조용해지는 게.”

“그렇지. 그리고 워낙 평이 좋잖아. 네가 연구하던 분야와도 비슷하고. 별개로 잠피레스쿠 교수님이 널 마음에 든다는 말을 몇 번 했나봐. 안 그래도 연락이 오더라고.”

“제가 좀 끝내주긴 하죠.”

이게 모두 근력과 체력에서 나온다고 말한 예지는 시간이 되면 등산이나 가자고 말했다. 물론 재준은 거절했다. 유예지가 원하는 산이라면 아마 설악산일 것이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악산이 있다니, 끔찍하지.

재준은 일을 위해 운동을 하기는 하지만 운동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예지는 운동을 위해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운동비용을 벌기 위해…….

재준은 이 화제를 빨리 돌려버리고자 했다.

“간다고 결정하면 1월부터인가?”

“어, 아마 그렇겠죠? 일단 한 학기는 인턴으로 있고 여름 지나고 난 뒤에 9월 학기부터 본격적으로 하겠죠. 언어도 미리 익혀야하고. 말도 지엥쿠이엥밖에 모르는데 고민이에요.”

“가족들은 별 말 안하고?”

“나이도 있는데 이제 와서 가면 뭐하냐는 말은 하죠. 그냥 지금 있는 곳에서 자리도 잡았는데 뒤늦게 고생길 걷는다면서. 아, 또 그런 말 들으니까 마음이 막 갈팡질팡하는 거 알죠? 내가 잘 하고 있나 싶고.”

“너 아직 젊어. 인생은 길고. 하고 싶은 거 해. 좋은 기회인데 아깝잖아. 전망도 좋고, 힘들면 다시 여기 오면 되니까.”

재준의 말에 예지가 웃어보였다.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쉽게 간다고 결정한 거지만.

“힘들다고 돌아올 제가 아닙니다. 제 목표는 한국중앙괴수연구소장이라고요. 커리어 채워야지.”

“기대되는데, 잔 다르크.”

“웬 잔 다르크예요?”

“네가 흡혈괴수종을 탈취하던 거 보고 잔 다르크 같았다는 말을 들었거든.”

“누가 그래요? 보리스죠?”

지승운도 그랬다. 재준은 멋졌다고 말하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흥, 멋지긴. 물론 멋지긴 했던 것 같아. 예지도 그때의 자신을 생각하면 조금은 뿌듯했다.

슬슬 어두워지는 것이 조명을 켜야겠다고 생각한 재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 안의 불과 마당의 조명을 켜면 딱 적당했다. 재준이 불을 켜고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서 “이 안에 집이 있다고요?” 하는 태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네요.” 예지가 말했다. 

아무래도 키가 훌쩍 커서 그런가 곧 태환의 머리통이 보였다. 그 옆에 다른 사람도 있었다. 

“와, 진짜 있네.”

그렇게 말한 태환이 손을 들어보였다. 동행인은 바로 대문을 열었다.

“의외로 고즈넉한데요?”

이경원은 신기한 듯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마당 한 구석 화분 가득한 곳을 보며 흠칫 놀랐다. 아니 저게 뭐야. 저거 다 괴수 아냐? 물리력이나 원소 계열의 에스퍼와 달리 정신계 에스퍼인 이경원은 최전선이 아닌 가장 안전한 실내에서 싸우기 때문에, 이런 괴수들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와…….”

현 박사 진짜 미친 것 같아. 어떻게 이런 걸 키우지? 게다가 괴수들 표면이 좀 젖어있는 게 물을 준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왜 화분에서 키우는 거지? 아니지, 저걸 땅에서 바로 키우는 것도 이상했다. 이경원은 재준을 조금 질린 얼굴로 바라봤다. 반면 태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화분 속 식물종 괴수들을 봤다.

“그런데 여기 안으로 소파 들여올 수 있을까요? 골목이 너무 좁은데.”

“에스퍼 뒀다 뭐하냐. 염력 둬서 뭐하냐고. 알아서 잘 들고 오겠지.”

경원이 대답하며 슬며시 괴수 화분을 피해 이동했다.

“집에서도 괴수를 키워요?” 태환이 물었다.

“예, 실험체요. 지승운 씨랑 지승호 에스퍼는 아직입니까?”

“차가 막힌대요. 아, 집들이 선물도 들고 올 거예요.”

“선물 제가 산겁니다. 소파요.” 경원이 말했다. 

소파가 필요하긴 했지만 그걸 선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재준은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짓다가 “고맙습니다.” 말했다.

“별말씀을요.”

대답한 경원이 제 손으로 와인을 따르며 라벨을 봤다. 이태리 와인이네. 그러며 옆에 앉은 예지를 바라봤다. 몇 번 보긴 했지만 서로 통성명은 하지 않은 사이다. 물론 경원은 유예지 연구원에 대해 간단히는 알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둘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태환은 소주도 사왔다며 비닐봉투를 내려놨다.

“대창도 있는데 혹시 드십니까?”

“저 먹어요!”

“미리 구울까요? 제가 고기 하나는 끝내주게 굽는데. 막내 생활을 엄청 오래했거든요. 그래도 아직 막내지만.”

그렇게 말하며 에스퍼 제복 재킷을 벗는 태환의 모습에 예지가 휘파람을 불었다. 자고로 고기는 남자가 구워야 제 맛이라며 와인 잔을 들어 올린 예지는 “삽겹살 먼저 굽고 나서 다음에 양념입니다.” 라고 말했다. 태환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 집게와 가위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더 멋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예지는 생각했다.

태환이 불을 켜고 팬을 올려 온도를 체크했다. 그러고는 제가 가져 온 소주병을 땄다. 예지가 폭탄주 말까요? 하고 물었다. 우선 낮은 도수부터 시작하자는 태환의 답에, 둘이 몇 번 술을 마셨다더니 취향을 알게 된 모양이라고 재준은 생각했다. 

“안에 구경해도 돼요?”

“예, 지금 들어가도 되고, 2차는 안에서 해도 되고요. 밤에는 추워지니까요.”

“와, 2차도 가려고? 이러다가 다 여기서 자고 가는 거 아닌가 몰라.”

“2차면 럼주로 가죠! 저 박사님이 만들어주는 버터술 마시고 싶어요.”

“버터술은 또 뭡니까? 버터 맥주 같은 건가?”

요즘 유행 하는 거? 태환의 말에 예지가 그딴 것이 유행하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경원은 기껏해야 해리포터 정도나 떠올렸다. 버터맥주랑은 다르다고 말하는 예지에게 도대체 어떤 거냐고 묻자 자세한 레시피를 가르쳐줬는데 태환은 그게 끔찍한 거라도 되는 것처럼 거부의사를 표했다.

원래 처음엔 다들 그렇게 반응하기 마련이라며 실제로 마셔보면 다르다고 말하는 예지를 뒤로한 태환은 못들은 척 고기를 구웠다.

경원은 새 술잔에 도라지 술을 따라 마시며 재준에게 괴수에 대한 이런 저런 것들을 물었다. 재준 역시 가이드 에너지와 호르몬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이 여러 질문들을 했고, 옆에서 듣던 예지 역시도 궁금한 걸 질문하곤 했다. 김태환만 현재 대화에 따라가지 못했다. 

뭐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 대화들에 그저 고기만 굽던 태환의 시야에 허공을 나는 뭔가가 보였다. 비행종 괴수인가 했더니 평범한 가구였다. 태환의 시선에 뭔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올린 경원은 하늘을 나는 소파를 보며 “지승운 왔나 보네요.” 말했다. 저 소파는 제가 산 소파였다. 설마 여기 오는 내내 허공에 띄워 오진 않았겠지. 

“가죽소파 원한다고 했다면서요? 비쌌습니다. 생색 좀 내도 되죠?”

“기꺼이.”

재준이 대답했다. 위에 있어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가격대가 있어 보이긴 했다. 근데 저거 계속 저 위에 떠있어도 되는 건가? 다행히 소파는 오래 위에 머물지는 않았다. 곧 대문 너머로 지승운과 지승호가 들어왔다. 

“다들 벌써 왔네요.”

지승호는 정장을, 지승운은 에스퍼 제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꽤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들이다.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승호는 능숙하게 고기를 굽는 태환에게 다가서다가 뒤편의 괴수 화분들에 흠칫 놀라 물러섰다.

“다녀왔어요, 박사님.”

승운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재준에게 다가가 입을 쪽 맞췄다. 그 모습에 다들 흠칫 놀랐다. 

“와.”

“눈꼴시어.”

뭐야, 저건?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자연스럽게 다녀왔다는 인사라니. 입을 맞추는 지승운도 그랬지만, 현재준 역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매일 일어나는 일인가보네. 왠지 못 볼 꼴을 본 얼굴을 한 경원이나 태환, 지승호와는 달리 예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기를 씹었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심지어 고기도 꽤 맛있었다. 과연 고기 잘 굽는다더니 진짜 잘 구웠다.

재준이 승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경원의 얼굴이 한층 더 굳었다. 아니, 둘이 좋은 사이라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애정 표현을 볼 줄은 몰랐다. 슬쩍 웃어 보인 재준이 말했다.

“온 김에 상추 좀 따요.”

“…….”

“소파 들여놓고 콜랜더 가지고 올게요.”

“…….”

저 새끼는 또 좋다고 상추 따려고 하나보네. 승운이 말하며 허공에 떠있는 소파를 내렸다. 

“으악! 조심조심.”

예지가 말했다. 승운이 미안하다고 손짓하며 거실의 큰 창을 열어 소파를 넣고는 그대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예지가 소리쳤다.

“나올 때 컵도 갖다 줘요!”

“찌개도 안에 있는데 냄비 째로 부탁합니다.”

재준도 덧붙였다. 아주 좋을 대로 다 시키네. 경원이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부려 먹힐 승운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물론 경원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물도 챙겨 나와라!”

“…….”

결국 승운이 나올 때 그들이 요구한 물건들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승운까지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다들 배가 고팠는지 말이 없더니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이곳이 어떤지, 이번 일이 어땠는지 등등으로 시작해서 사적인 이야기까지 오갔다. 예지는 어쩌면 올해까지만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태환은 제 술친구를 잃은 것을 슬퍼하며 “한잔 더!”를 외쳤다. “젊은 친구들이 있어서 좋네.” 하고 말하는 경원 역시 그들과 나이차이가 큰 편은 아니었다.

“와, 근데 진짜 오랜만에 왁자지껄하다. 옛날 생각나네요.”

“옛날에도 이렇게 모여서 놀았어요? 그럴 성격 같진 않은데.”

“한국은 여기 저기 놀 곳이 많긴 한데, 외국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보통은 친구 집에서 모여서 놀았죠. 아니면 기숙사 휴게실 같은데서.”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또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결국 예지는 다시 그 자리를 가게 될 것이다. 물론 이번엔 기숙사 생활은 아니겠지만.

“에이, 어떻게든 되겠죠. 마십시다!”

예지가 말하며 다시 잔을 들어올렸다. 제 취향에 따라 주종이 달라졌다. 예지는 도라지 술을 동낼 생각인 듯 새 술을 따랐다. 재준은 예지가 가져 온 모스카토를 땄다.

“그러고 보니 그 말 들었어요? 곧 중앙연구소에서 사람들 내려온다는데.”

경원이 말했다. 재준은 자신의 잔에 따르기 전에 승운과 경원의 잔에 술을 따랐다. 예지는 샷 잔을 든 채로 굳었다. 중앙연구소라니.

“아뇨? 그런 말이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재준에게 옮기자 재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도 들은 바 없는 이야기다. 예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우리보다…… 죄송한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경원입니다. 에스퍼예요. 검진센터에 있고, 아 저도 박사예요.”

“아, 예.”

네가 박사인데 어쩌라고. 나한테 자랑하는 건가?

예지도 몇 년 뒤면 박사 학위를 딸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그 개 같은 교수 밑에 있지 않을 테니 이뤄낼 수 있었다. 하, 날려먹은 내 시간. 다시 생각해도 열 받았다. 그런데 그 열 받게 하는 대상이 DMZ연구소에 온다고?

“박 박사가 왜…… 그것보다 이 박사님이 어떻게 더 빨리 아시는 거죠?”

“저야 정보원이 있어서.”

“아, 예.”

“아마 월요일 아침에 공문 올 겁니다. 일처리가 다 그렇죠.”

그래도 당일 공문이 아닌 게 어디냐고 덧붙이며 잔을 기울이는 경원을 보며 재준이 피식 웃어보였다. 

“월요일에 알면 되는 걸 찝찝하게 벌써 알았네요.”

재준의 말에 경원은 저 사람 말을 왜 저렇게 하나 싶은 생각을 했다. 예지가 덧붙였다.

“그러니까요. 그 찝찝한 거 좀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요?”

“…….”

두 사람이 좀 똑같— 아니, 닮았네. 사람 말 문 막히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경원이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박형기 박사랑 몇몇 사람들이 와서 투어 좀 한다는 것 같던데요. 연구소 상황도 살피고.”

“내 괴수 노리는 거 아냐?”

내 괴수라는 게 아무래도 흡혈괴수종인 듯 했다. 하긴, 예지가 전담하니 예지의 괴수는 맞았다.

“아, 너무 싫다. 이쪽으론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고성은 출세와는 먼 자리니까 관심이 없을 텐데.”

“그러니까요. 관심 계속 끄지, 왜 온대요?”

예지가 경원에게 물었다. 경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까진 저도 몰라요. 아무튼 같이 오는 사람들 중에 외부인이 있나 봐요.”

“으엑, 외부인이라니. 이 신성한 곳에!”

“저번에 괴수학 박사들이 왔잖아요. 그것 때문에 이번 외부인도 허락하라고 위에서 압박이 왔다더라고요. 민간인 출입금지 걸어놓고 이렇게 외부인을 들이니 원.”

경원이 말했다. 

“뭐, 사실 다른 사람은 상관없는데 박요한 가이드가 다시 온다는 게 좀 찝찝하죠. 아, 그쪽 소속이 제1센터로 바뀌었대요. 고생한 값이라나 뭐라나.”

이어지는 말에 재준과 예지가 고개를 홱 돌려 승운을 바라봤다. 승운뿐만 아니라 다른 두 사람 역시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알았습니까?” 재준이 물었다. 

“예, 뭐.”

“괜찮습니까?”

“전 문제없어요.”

지승운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했다. 정말? 진짜로 아무렇지 않은 건가? 재준은 그날의 승운을 기억한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물론 지승운 역시 당시에 가만히 있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가이드 측에서는 과잉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승운아.”

재준이 말했다. 다들 흠칫 놀랐다. 아니, 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이름을 부르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늘 존대하던 것만 보다가 갑자기 말을 놓는 것을 들으니 왠지 알아서는 안 되는 사생활을 엿본 기분이다. 

“넌 피해자야, 알고 있지?”

그깟 반말이 뭐라고.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떫은지 모르겠다.

승운은 별다른 대답 없이 웃어보였다. 그게 긍정인지 부정인지 타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묘한 침묵에 서로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이 상황을 참지 못한 예지가 말했다.

“어휴, 마셔요. 마셔. 일단 취해요!”

여기 있는 걸로 과연 취할지 모르겠다고 예지는 생각했지만, 뭐 집 안에는 다른 많은 술이 있지 않은가. 어서 다 비우고 2차를 거실로 이동하자고 여긴 예지는 잔을 들어올렸다.

“자, 건배!”

그러고는 시원하게 들이켰다.

*

2차는 예지의 뜻대로 거실이었다. 그동안 선물 받은 수많은 술들을 오늘 다 동내기라도 할 생각인지 자신이 가져온 술을 끝내고, 소주도 끝내고, 폭탄주도 끝낸 뒤에 위스키를 끝내고 럼주까지 조진 예지는 거하게 뻗어 새로 산 소파에 가장 먼저 드러누웠다.

재준 역시 간만에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바닥에 드러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태환은 익숙하게 어질러진 방을 치웠다. 막내생활의 습관이었다. 지승호 역시 태환을 도왔다. 승운은 경원을 데리고 밖으로 데려갔다. 마당 역시 치워야했는데, 경원의 손을 빌리느니 차라리 움직이는 식물종 괴수의 손을 빌리는 게 훨씬 좋았다. 승운은 경원에게 가만히 앉아있으라 말했다. 오히려 저 손을 댔다간 더 지저분해질지 모르니 말이다.

승운이 하나 둘 정리를 하는 것을 바라보며 맥주 캔을 따서 마시던 경원은 “얌마.” 하고 말을 걸었다. 승운이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시선만 한번 줬다가 말았다.

“너 도대체 현 박사 앞에서 얼마나 내숭을 떨었길래 저렇게 널 걱정해?”

“뭐.”

승운이 웃어보였다.

“박사님은 내가 되게 섬세한 줄 알더라고.”

허이고. 섬세가 다 얼어 죽었네. 경원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 에스퍼들이 가이드 앞에서 내숭을 떠는 것은 크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승운은 그 정도가 심했다. 정도가 심하다고 해야 할지, 저를 잘 숨긴다고 해야 할지. 그마저도 재준이 가이드라는 것을 알기 전부터 교묘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강조한 듯 했다. 그러니까 박요한 가이드가 온다는 말에 지승운을 걱정하지. 경원으로서는 지승운이 아니라 박요한이 더 걱정이었다. 이번에 왔다가 진짜 디지면 어쩌나 싶어서.

“죽이지는 마라.”

“안 죽여. 죽이면 내 이미지가 망가지잖아.”

S급 에스퍼는 내숭도 S급인가. 

적어도 경원은 제 가이드 앞에서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하지 않았나? 비슷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지승운 만큼은 아니었다. 여기서 더 말해서 뭐해. 경원이 됐다는 듯 의자에 기대어 맥주 캔을 기울였다. 지승운은 능숙하게 정리하더니 테이블을 접어서 구석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그 구석에 처박혀있던 철제의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왜 저래. 경원이 생각했다.

지승운은 실실 웃으며 철제 의자를 끌고 와 경원의 앞에 앉았다. 여기 의자가 많은데 굳이 저걸 끌고 오는 이유는 뭐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이야기는 들었어?” 승운이 물었다.

“어떤 이야기?”

“에스퍼 말이야.”

“뭐, 폭주 후 괴수 되는 거?”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에스퍼들이 그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보원 소속의 에스퍼 중 몇은 이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들어왔으니 다른 이들에게도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특히나 경원은 고위 정보들을 취합하는 일을 겸했기 때문에 이런 정보라면 당연히 놓치지 않는다.

“어땠어?”

“어땠긴.”

경원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존나 납득 가능하더라.”

“나도 그래.”

그들은 괴수를 알아볼 수 있다. 동족 혐오 비슷한 것도 가지고 있다. 애초에 괴수와 에스퍼의 양은 동시에 늘고 있었다. 거기다 괴수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어쨌든 에스퍼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갔긴. 죽었거나, 괴수가 되었거나.

“왜 다들 몰랐을까? 너무 뻔한 사실인데.”

“인정하기 싫었나보지.”

어쩌면 인간 사회에 속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규정하는 인간 개념의 의미는 잠재적으로나 노골적으로나 자신이 속한 무리의 일원에 한정되니까. 지금도 돋보이는 에스퍼라는 존재인데 과거는 더했겠지. 물론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장군이나 뭐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에스퍼가 있었을까?”

“글쎄. 나 같으면 홀로 산골짜기에 숨어들어 살 것 같은데.”

“네 덩치에 그런데 숨어 살면 도깨비 소리 듣는다.”

“어쩌면 도깨비가 에스퍼일지도 몰라. 인간 모습이라잖아. 덩치도 크고.”

승운의 말에 경원이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고 답했다. 물론 지승운처럼 전투계라면 모를까 경원처럼 머리 쓰는 에스퍼들은 전부 몰래 조정에 들어가 있었겠지. 

“아무튼 괴수는 안 되는 게 좋겠어.”

“왜? 어제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까봐?”

“그런 건 관심 없어.”

“그럼?”

“괴수가 된 에스퍼들은 가이드 없이도 살 수 있대.”

“뭐? 가이드 없이 살라고?”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승운의 말에 경원이 눈을 깜빡이며 “뭐라는 거야.” 말했다. 가이드 없이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살 수 있어서 괴수인건가? 

“그게 살아 있는 거냐.”

경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폭주가 될 정도면, 제 가이드를 잃어버린 이들일 테니까 말은 되네.”

가이드가 없어도 죽지 않는 에스퍼라. 

“괴수가 아니라 귀신이라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거?”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

멍청이같이. 제 가이드를 잃어버렸으면, 더 이상 가이딩 할 존재가 없다면 따라 죽으면 되는데 뭘 꾸역꾸역 살겠다고 폭주를 버틴단 말인가. 

“근데 박사님은 날 걱정하더라고, 귀엽게.”

그러게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현 박사님.

걱정할 이를 걱정해야지. 하필이면 지승운을 걱정합니까.

“혹시나 내가 그런 걸 바라는데 자기가 방해한건 아닌가 하고.”

그렇게 말한 승운이 피식 웃었다. 경원도 황당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난 가끔 현 박사가 좀 모지리 같다고 생각해.”

아니면 이 새끼가 진짜 온갖 내숭을 떨어서 현박사가 그 실체를 모르거나 말이다.

“박사님 입장에서 에스퍼는 가이드가 없으면 죽는 몸이니까. 한편으로는 가이드가 없으면 에스퍼가 완전한 자유를 느낄 거라고 생각하나봐.”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좀 다른데 말이지.”

경원이 말했다. 

일반 사람들이나 가이드들은 알지 못한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라는 존재가 어떤 건지. 그들을 목숨줄로 치는 것은, 그들이 없으면 단순한 물리적 죽음에 이르러서가 아니다. 없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비단 육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를 포함해서 그랬다. 에스퍼는 가이드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가이드 없이 살 생각이 없다는 뜻과 동일하다. 

물론 사람에 따라 제 가이드를 잃고도 살려고 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아직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이들이라면 그들을 찾을 때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지승운처럼.

역시 그때 가이딩 안 받고 죽겠다 어쩌겠다 했을 때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이런 경우를 보지 못해 그냥 넘긴 스스로를 경원은 자책했다. 나도 참 바보였어. 왜 몰랐을까? 증거가 여기저기 널려있는데. 

“근데 너 각인은 했냐?”

“나는 한 것 같은데, 박사님은 잘 모르겠네.”

“일 끝나면 박사님도 가이드 수업 받게 해.”

경원의 말에 승운이 인상을 썼다. 주변 공기가 축축하고 음습하게 변해가는 거 보니 저 물을 제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아니면 완벽하게 제어해서 경원을 협박이라도 하려는 건지도 몰랐다.

“나 네 친구야. 기운 좀 거둬.”

“……난 그거 더러워서 싫어.”

“너도 다 받은 거잖아.”

“내가 가르치면 돼.”

“너 가이딩 할 줄 모르잖아.”

“다른 사람이 우리 관계에 끼어드는 거 싫어.”

“개소리 작작하고.”

그게 어떻게 개소리야. 박사님이 다른 사람을 가이딩 하게 되는데. 애초에 지승운과 현재준은 페어 가이드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페어가이드는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 하지 않는다.

“실습하라는 게 아냐. 가이드 기초 지식은 있어야지. 지금은 너무……. 그게 아니면 영상매체를 참고하게 하던가. 요즘은 온라인 교육도 하고 있는데 그걸 듣게 하거나.”

“그거 내가 같이 들어도 되나?”

“……온라인 수업 들을 때 옆에 있어라, 인마.”

공부는 죽도록 싫어하는 주제에. 경원이 쓴 입맛을 없애기 위해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킨 뒤 캔을 구겼다. 청소를 끝낸 지승운이 경원의 옆에 앉았다. 경원이 새 맥주 캔을 두개 꺼내 승운에게 하나 건넸다.

“이번에 오는 사람 중에 그 양반 껴있더라.”

“누구?”

승운이 맥주 캔을 땄다. 안쪽도 청소를 다 끝낸 건지 지승호와 김태환이 창문으로 나왔다. 

“루카스 영.”

경원이 말했다. 지승호가 의자에 앉으며 “루카스요?” 물었다. 옆에서 태환이 루카스가 누구냐고 물었다.

“미국 로비스트.”

“로비스트? 아직 그 건 안전하지 않아요?”

“미리 공작 들어가려는 걸 수도 있고. 원래 돈에 관련해선 부지런한 인간들이잖아. 몇 년 전부터 준비하는 거지.”

“그러다 뒤늦게 밝혀져서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모르는 일이라 잡아떼겠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죠.”

“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뜻대로 되면 참 좋은 게 가끔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흘러가지 않았다. 제일 좋은 건 예방하는 거지만, 이미 그들 역시 준비가 만반했다.

게다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위에서 회의를 하고 어떻게 할지 정한 다음에야 에스퍼 정보원들이 움직인다. 웬만하면 좋은 쪽으로 빨리 처리가 되어야하는데.

“루카스 영이 언제 오는데요?”

“다음 주 수요일쯤일걸? 오래 있을지는 모르겠고. 괴수 중앙연구소 사람들이랑 같이 올 거야. 그냥 견학이라고 하는데 진짜 목적은 따로 있겠지.”

아아, 아까 말했던 그거구만. 태환이 상관없다는 듯 바닥에 있는 맥주캔을 꺼냈다. 지승호한테도 “하나 줄까요?” 묻자 지승호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도수 높은 술을 마신 다음에 낮은 술을 마시면 다음날 일어났을 때 유독 기분이 나빴다.

“루카스 영만 오는 건가?”

“아니. 몇몇 외국인들이 더 출입신청서를 넣었어. 투자자들 같은데, 일단 신원 확인 중이야. 아주 전 세계에서 날아 오더만.”

“자료 나오면 넘겨. 확인해 볼 테니까.”

“내일 오전쯤이면 나오겠지. 물어보고 나오면 보내라고 할게.”

“김태환, 당분간 승호 따라 다니고.”

“으, 난 정치인들 싫은데.”

김태환이 진저리를 치듯 말했다. 한때 그 역시 모종의 사건으로 정치인 뒤를 캐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다시는 그쪽을 얼씬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악수를 해댑니까? 만나면 악수를 한 세 번 하고 헤어질 때 한 네 번 해요. 손이 찝찝해서 원.”

가이드라면 모를까. 물론 그렇게 생긴 가이드는 태환 쪽에서 사양이었지만 가이드도 아닌 사람의 손을 그렇게까지 잡는 것은 더 싫었다.

“그것도 직업병이야.”

“말도 존나게 많아요.”

“그것도 직업병이고.”

어떻게 지승호는 저런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 웃으면서 그들을 상대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보면 참 철면피다. 정치인에 어울려.

물론 김태환은 그쪽 부류가 아니었다. 하기 싫다는 얼굴을 한 태환의 어깨에 승호가 팔을 두르며 웃었다.

“같이 가보자. 내일부터 출근이다.”

“아니 왜 신성한 주말에 일해요?”

“평소엔 국회에 있고 주말에 내려오니까. 내일 간담회 있던데…… 잠시만.”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확인하는 승호를 보며 경원은 “쟨 일정을 어떻게 빼냈대?”물었다. 

“비서관이랑 친해졌나보지.”

“친해진다고 일정을 저렇게 주냐?”

“해킹이라도 했나보지.”

“오전 8시에 어촌 간담회 있네. 여기 정장 입고 가면 티 나니까 다른 행사 가야겠다. 아, 오찬을 여기서 하니까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보자.”

“……나 그냥 괴수 잡으러 가면 안돼요?”

차라리 그게 더 편할 것 같은데. 하지만 김태환은 선택권이 없었다. 지승운은 승호와 다니고 싶지 않았고, 경원은 머리만 좋았지 다른 능력은 한참 못 미쳤다. 무엇보다 사회성 부분은 경원보다 태환이 더 나은 편이다.

“고생해라, 태환아.”

그들은 결국 막내에게 귀찮은 일을 떠넘겼다. 

가이데올로그(Guidéologue) 3권 fin.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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