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저녁은 무슨.
현재준은 현재준 나름대로, 지승운은 지승운 나름대로 바빴다.
함께 있으려고 해도 여력이 되지 않았다. 함께 점심을 하려다가도 시간이 맞지 않았고 잠시 만날 기회가 왔다 싶으면 다시 일이었다. 재준은 나름대로 자신의 일정을 조절하면 되긴 했지만 승운은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했다. 심지어 재준은 승운의 연락처조차 몰랐다. 항상 같이 있었기 때문에 연락처를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승운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재준에게 전화를 종종했다. 문제는 재준이 모르는 번호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바쁜 와중에 찾아와서 왜 전화를 안 받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무려 나흘이었다. 나흘.
막 사귀기 시작한 무렵인데 나흘이나 제대로 함께 할 시간이 없다니 너무한 처사였다. 그래도 금요일에는 볼 수 있었다. 일처리가 모두 끝난 승운이 연구실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사실 일처리는 아직 끝났다고 볼 수는 없었다.
“자문에서 형질이상관리위원회를 존치시켜야 할 명백한 사유가 없다고 말하겠군. 자문위원회에 존속여부를 점검한 뒤에 행정안전부 장관한테 제출해서 점검하고 결과에 따라 아예 공기업화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 같은데. 그 다음엔 민영화 절차를 거칠 거고.”
이능청의 조직도는 다음과 같다.
청장과 청장의 대변인, 그 밑에 차장이 있다.
차장 밑으로는 감사관이 있는데 이는 감사담당관과 감찰담당관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그 아래에 이능정보자료관리단과 운영지원과가 따로 있다.
이능청의 운영지원과는 기획조정관, 국제분담팀, 괴수처리반, 조사국, 지원국, 형질변이자 보호국, 이능검진관, 정보화관리관, 시설관리관, 이능력관리관이 있으며 각 지방의 이능청과 교육원, 상담센터로 운영된다.
그 외 이능청 소속이 아니지만 대통령 직속의 이능력자들 만으로 움직이는 이능력 정보원이 있으며, 산하 행정기관으로 공적형질이상자관리위원회가 있어 에스퍼와 가이드는 이곳의 소속으로 존재한다. 형질이상자관리위원회는 행정과 달리 독립된 분야로서 활동을 담당하는 합의제 기관이기 때문에 에스퍼와 가이드들의 월급은 일반 공무원의 월급보다 높다.
“존속여부 다음 심사가 언제죠?”
“2년에 한 번씩이니 후년이지. 올해 초에 했어. 그때 정기국회에서 못 넘긴 것 같아.”
“지금 국감에서 이능청을 털려고 하는 것 같긴 하던데. 9월부터 또 죽어나겠네요. 얘네들은 지들 일정을 밖으로 알려주지 않으니 원.”
“공무원들이 다 그렇지.”
“아직 존속여부를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아예 공기업이 될 거라 단정 짓는 걸까요? 승호 형이 구해온 자료 보니까 일괄매각 방식을 통한 민영화 시도는 힘들 거라던데.”
“공기업으로 전환한 뒤 추후 이능력자를 빼내겠지. 만약 쓸 만한 인물이 없다거나 하면 기업까지 헐값에 넘길지도 모르고. 근데 이건 뭐야? 예보?”
“예, 근데 날짜가 3년 뒤라.”
“자기들 임기 내에 처리할 생각인가.”
“금융 지주 쪽이나 증권가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나봅니다. 일단 공기업화 되면 주식들을 사 들일 테니, 거기에서 발언권을 얻을 생각도 있나보죠.”
“연기금 쪽이 제일 많이 사들이겠지만. 외인들이 들어와도 걱정이군.”
승운과 태환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재준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런 대화를 합니까?”
“예. 괜찮아요. 박사님이잖아요.”
아니, 그 뜻이 아닌데.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던 재준은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이 장소, 엄밀히 따지면 재준과 예지의 업무장소에서 굳이 타인의 업무를 방해하며 저래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승운의 살랑거리는 웃음에 재준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예지는 황당한 얼굴로 재준을 바라보며 저 사람들이 뭔데 여기서 이러고 있냐는 표정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어서 쫓아내요.’
입모양만으로 말하는 예지의 모습에 재준이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다시 눈이 마주치자 웃는 승운의 모습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휴, 얼굴에 미쳐가지곤.
재준이 머뭇거리자 유예지는 귀찮다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와 에스퍼들을 바라보면서 “일하는데 방해되니까 나가시죠.” 말했다.
축객령이다.
“정말, 여기서 이런 얘기 하지 마세요. 저 이런 위험한 거 알고 싶지 않아요.”
안 그래도 여기엔 위험한 것들 투성이다. 유예지는 지금 흡혈괴수종의 연구로 바쁘다. 정확히는 예지에게 이것을 해 달라 저것을 해 달라 요구하는 수십 개의 메일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달리는 건 재준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해야 할 다른 일들도 많은데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더 많았다.
물론 커리어에 도움은 됐다. 겸사겸사 다른 연구소들의 팁도 얻고 있으니까. 하지만 너무 바빴다. 그런 와중에 저런 에스퍼들이 여기 앉아 노닥거리는 척 위험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꼴을 듣자니 너무 짜증이 났다.
“이미 제일 위험한 걸 알았잖아요.”
김태환이 말했다.
“제가 뭘요? 완전 얌전하게 살고 있는데.”
“현재준 박사가 가이드라는 거.”
“…….”
그래, 그게 있었지. 예지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신나게 괴수를 때려잡던 순간 어딘가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됐다. 마치 새로운 공간이 열리는 것처럼 지승운의 몸 위로 피어난 연기가 아주 오래전부터 관용구처럼 내려온 문장을 떠오르게 했다.
스모그에서 괴수가 나온다.
괴수가 탄생하는 장소에는 항시 기이한 스모그가 따랐다. 하지만 곧 그것이 폭주 직전의 에스퍼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S급 에스퍼의 폭주라니. 곧 모두가 죽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당장 죽는다는 것이 인식되지 않아 두려움도, 도망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준이 지승운을 안았다.
연기는 사그라들고, 재준은 괴수를 죽였다.
지승운은 그렇게 가만히 재준의 품에 안겨 있다가 대뜸 입을 맞췄다.
저게 가이딩이라는 거구나. 형질이상자들과 같은 직장을 다니긴 하지만 가이딩 장면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빛 무리가 보인다고 해야 할지, 그 세계만 뭔가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예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런 한복판에서 키스라니.
“도대체 박사님은 왜 가이드인거예요, 언제부터!”
예지가 소리쳤다.
“시리예랑 만난 건 뭐고요!”
“시리예랑 만나다가 가이드가 되는 바람에 헤어졌어.”
“…….”
“너랑 알 무렵은 가이드가 아니었고.”
이어지는 말에 예지의 표정이 풀렸다. 뭐야, 속인 게 아니었잖아.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그게 뭐 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가만, 시리예랑 만날 때쯤이면 현 박사의 나이가 꽤 있지 않았나? 예지랑 재준이 만났을 때가 2014년도였으니까……. 스물 다섯 살 땐 가이드가 아니었다는 거지?
너무 늦게 가이드로 발현한 거 아닌가?
“아무튼 괴수연구위원회 쪽 정보도 필요한데 그쪽은 어째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나 봐요.”
“애초에 괴수연구소 쪽은 공기업화 될 수 없으니까. 정부출연기관이기도 하고 이능청과도 밀접하니.”
“박형기 박사가 연관되어 있다는 게 그거예요?”
예지가 물었다. 괴수연구소를 이야기한다면 그것밖에 답이 나오지 않았다.
“박형기 박사뿐만 아니라 몇몇의 센터장들도 그렇습니다. 부산도 그렇고, 이곳도 그렇죠.”
“하, 미친 영감탱이. 그날도 가장 먼저 도망치더니.”
예지가 혀를 찼다.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기엔, 박형기 박사는 언젠가가 아니라 언제나 그랬다. 지금 지승운과 김태환이 말하는 게 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기업이니 매각이니 하는 것을 보면 예상할 수 있는 건 뻔했다. 지승운이 물었다.
“박형기 박사의 평가가 어떻습니까?”
“괴수학회에서요? 엉망이죠.”
예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제가 싫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에요. 박형기 박사는 그동안 제대로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도 않았어요. 없는 건 아닌데, 보통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의 연구를 가로챘다고 봐야하죠. 뭐 처음에는 논문 파트너가 되면 어떻겠냐 등등 말을 해요. 학부생이나 연구원 입장에선 좋거든요. 특히 국외로 나가지 않아본 입장에서 우리나라에서 박형기 박사 하면 괴수학계 최고로 치니까. 근데 그렇게 열심히 부려 먹히고 나면 논문에서 이름이 싹 빠지는 거예요.”
그러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아마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누구는 괴수랑 죽을 둥 살 둥 지냈는데 지는 집에서 편안하게 두 다리 쭉 뻗고는. 예전에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자기 정말 바쁘다고, 새벽까지 고민하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내일은 박 연구원에게 뭘 시킬까, 유 연구원에겐 뭘 시킬까, 김 연구원에겐 뭘 시킬까! 이 연구원한테 이걸 하라고 하자!”
재준도 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한국 출신의 석사과정이 드물어 박형기 박사는 학부생에게도 자신의 일을 시켰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런 노예생활이 눈에 띄는 성과를 남들보다 더 빠르게 가져다주기는 했다. 그렇다고 실력을 상승시키게 해준 그 시간이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젠 뭐, 민영화…… 허이구, 참.”
그 사람답다고 해야 할지.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나가서 이 업계에 발도 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예지는 생각했다. 재준은 그런 대화들을 무시한 채 랩탑을 보고 있었다. 승운이 그런 그의 뒤로 다가가 “바빠요?” 물었다. 재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바쁘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재준의 물음에 승운이 고개를 저었다. 저 묘한 기류는 뭐지. 예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자 태환이 자신을 보고 있다. 아마 이쪽도 상황을 대충 알아차린 듯 했다.
“전 당이 떨어져서 나가야겠어요.” 예지가 먼저 말했다.
“전 카페인 부족입니다. 카페인 중독이라.”
그렇게 말하며 앞 다퉈 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승운은 너무 티를 냈나 생각했다. 하지만 재준은 그걸 모르는 듯 했다. 심각한 얼굴로 랩탑을 응시하던 재준이 일순간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승운 씨.”
“네, 박사님.”
승운이 대답했다. 얼굴을 보니까 좋았다. 반면 재준은 자신만큼 기뻐보이지는 않았다. 감정의 크기가 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섭섭했고, 그럼에도 옆에 있어주는 것이 좋다.
“오늘은.”
역시 얼굴로 꼬시는 게 제일인가 생각하던 승운은 “제 집에 오겠습니까?” 하고 이어지는 재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방금 무슨 말을 들었더라? 집에 오라고 했는데.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멍하니 재준을 바라보자 재준은 승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싫습니까?” 물었다.
“정말요?”
“김태환 에스퍼를 언제까지 내쫓을 순 없으니까요. 저는 혼자 살고.”
“내쫓아도 됩니다. 하지만 박사님 집에 가보고 싶어요.”
“기대에 못 미칠까 걱정이네요.”
재준이 말했다. 승운은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에 저런 표정을 짓자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뭔가 불안하게 했나? 그러고 보니 승운은 뭔가 요구하는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전 박사님이 움집에서 산다 해도 괜찮은데.”
이어지는 승운의 말에 재준이 웃었다. 움집이라니, 그건 너무 심했다. 하지만 그만큼 기이한 것이 자신의 집에 있기는 했다.
“움집은 아니지만, 아무쪼록 놀라지 않았으면 하긴 합니다.”
재준이 말했다.
집에 뭐가 있기에 저런 말을 하는지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
승운은 재준이 사는 주택을 문 앞에서만 바라봤지만 안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사실 그가 매번 내리는 건물은 3층 높이여서 주택보다는 다세대인 줄 알았다. 이 주변 전부가 그 정도 높이의 건물이었다.
차를 세우고 내린 두 사람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의 작은 골목이었다.
집이 이런 안쪽에 있단 말이야? 승운이 생각하며 골목 끝까지 가자, 정말 주택이 나왔다. 건물로 둘러싸인 아주 자그마한 마당이 있는 단층집이었다. 건물 사이에 있는 작은 공원이나 한옥의 중정처럼, 그곳만 비어있었다.
특이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콘크리트 정글에 둘러싸인 마지막 대지처럼 느껴지는 곳은 나무나 덤불이 꽤 있어보였다. 정원을 직접 가꾸기라도 하는 걸까 싶어 슬쩍 안을 들여다봤다. 그나마 문이 낮았다. 하지만 승운은 식물에 대해 잘 모른다.
“너무 놀라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재준이 말했다. 딱히 놀라운 건 없어보였는데.
“……박사님.”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을 보자 승운은 탄식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도대체 뭔가요?”
밖에서 봤을 땐 얼핏 나무나 덤불이라 생각했던 것이 들어와서 보니 전혀 다른 종이었다. 아니, 나무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식물종 괴수들이 더 많았을 뿐이다. 이 주택의 정원에.
“실험 대조군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왜 여기 있는데요. 승운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봤다. 다행히 MKR종과 같이 스스로 먹이를 사냥하는 것은 없었지만, 어쨌든 저것 모두 극독이거나 생물을 먹는 것들이다.
“제 힘으로 키우고 있어요.”
재준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힘이라면?”
“가이드 에너지요.”
“…….”
정액?
아니지.
그런 걸 줄 사람으로 보이진 않아. 그러면 피인가?
“침을…… 뱉는데. 사실 그게 좀 힘들 긴 합니다. 타액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더군요.”
“…….”
“에스퍼는 약간의 타액만으로도 괜찮아지는 것 같던데.”
그렇게 말하며 승운을 바라본 재준은 역시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어 말했다.
“물론 제가 가이딩 해 본 사람은 지승운 씨 밖에 없지만.”
“어?”
승운이 되물었다. 놀란 듯 두 눈이 크게 떠지자 맹수 같던 얼굴이 제법 귀엽게 보였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뭔가 생각하던 승운의 얼굴이 순간 달아올랐다. 왜 저래? 재준이 생각했다. 승운이 느릿한 말투로, 홧홧해진 얼굴에 손등을 갖다 대며 물었다.
“저밖에 없다고요?”
“예, 그런데.”
“가이딩을 저밖에 안하셨어요?”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가이딩 하는 방법을 아직 모른다. 시리예가 했던 말을 해석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식으로 수치나 레시피, 혹은 방법이 정확히 나온 것이 아닌 추측성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승운을 가이딩 하는 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재준이 “저는—.” 하고 말을 잇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게 무슨 자극이 됐습니까?”
왜 서있지?
“그,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왜 저렇게 부끄러운 얼굴인지도 알 수 없었다.
“너무— 대단하잖아요, 그건.”
“……미안합니다만 지승운 씨, 제가 형질이상자로 살아오지 않아서 어디에서 그런 걸 느끼는지 모르겠는데.”
“나만 가이딩 해봤다니.”
그러니까 그게 왜.
“앞으로도 나 밖에 없을 거고.”
“그렇죠.”
“어떻게 이런 행운이 다 있지?”
승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재준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데. 형질이상자들에게는 첫 키스나 첫 경험처럼 첫 가이딩 같은 로망이 있는 걸까? 혹은 한 사람하고만 가이딩 하는 것 같은 거에? 그렇다고 해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디에 초점을 둬야 하는지.
“저기, 지승운 씨.”
뭔가 특별하게 보이는 것 같긴 한데……. 재준이 슬쩍 승운을 바라봤다.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승운의 얼굴이 유독 나른해보였다.
“지승운 씨.”
“네, 박사님.”
“눈이 무섭습니다.”
“여기서 해도 돼요?”
“……여긴, 야외라서 안 됩니다.”
“야외가 아니면 되는 겁니까?”
야외가 아니도록 바뀔 리가 없었다. 재준이 머뭇거리자 승운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웃었다. 어떤 힘도 들이지 않은 듯 했는데 갑자기 물로 만든 벽이 쳐졌다. 정확히 재준의 집을 감싸는 정도의 크기였다. 재준이 놀란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이제 안 보여요. 물속이잖아요.”
“물속이 아니라…… 잠깐만.”
재준의 말이 승운의 입에 먹혔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재준이 이건 아니다 싶어 눈을 살짝 뜨자 자신을 보고 있는 승운이 보였다. 눈에 어린 애정에 가슴 한 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재준이 다시 눈을 감자 승운이 입 안으로 웃음을 들이밀었다.
큭큭 웃으며 입을 떼자 재준이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엔 승운이 눈을 감으며 입을 맞췄다. 눈앞에 보이는 승운의 얇은 눈꺼풀과 촘촘한 속눈썹을 황홀한 듯 바라보던 재준은 곧 입을 떼고 멀어지는 승운의 목 뒤를 손으로 붙잡았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손길에 승운이 멈칫했다.
“지승운 씨.”
“예.”
“담배 끊었습니까?”
“……그걸 알아요?”
“맛이 좀 달라서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텐데 왠지 야하게 늘리는 말투에 승운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웃었다.
“내 맛이 어떤데요?”
나지막하게 묻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재준 역시 피식 웃어 보이며 “좋습니다.” 답했다.
사람을 돋울 줄 안다고 해야 할지, 솔직하다 해야 할지. 어쨌든 현재준이 야하다는 건 확실했고 승운은 참지 못하고 재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탄탄한 허리와 기립근을 슬금슬금 만지던 승운이 손을 아래로 내려 엉덩이를 한번 쥐었다가 놨다. 밀착된 몸의 체온이 평소보다 높았다.
“박사님 맛도 좋아요.”
재준은 왠지 자신이 좋다고 한 맛과 승운이 좋다고 한 맛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승운이 다시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러니까 조금만. 핥기만.”
“그 말이 신뢰가 안 가는 거 아십니까?”
“반말로 해줘요.”
재준이 입을 다물었다. 이미 발정 난 것 마냥 눈동자가 돌아있다. 언제 봤더라, 이 눈동자를. 언제 보긴. 얼마 전에도 봤고 그 전에도 봤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느 부분, 어느 대화에서 지승운을 저렇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박사님 꼴리면 반말하잖아.”
“내가 그랬나?”
“그랬어요.”
대답하는 승운의 손이 어느 샌가 벨트에 닿았다. 자연스럽게 벨트와 버클을 푼 승운이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재준이 흠칫하며 “흣.” 신음했다.
“한번만 빨면 안돼요?”
지승운의 한번만이 거짓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박사님 앞에서 무릎 꿇고 싶어요.”
“…….”
“제발.”
애원하는 얼굴을 하면서 손의 움직임은 격했다. 대답할 여유조차 주지 않아 재준은 승운에게 기대다시피하며 몸을 떨었다.
아— 거기 좋아.
재준이 승운의 재킷을 잡았다. 옷깃이 구겨지는 게 보였지만 손에 힘을 풀 수 없었다. 그냥 핸드잡일 뿐인데도 애가 타 몸을 배배 꼬다 참지 못하고 허리를 움직이는 재준을 보며 승운이 미소 지었다.
승운이 재준의 몸을 더듬으며 정원 한 구석에 있는 의자로 데려갔다. 그대로 자리에 앉힌 다음에 그 앞에 무릎 꿇은 승운이 말했다.
“좋아해요, 박사님.”
“……그런 얼굴로 저 꼬시지 마십시오.”
바로 넘어갈 것 같았다. 승운이 재준의 바지를 끌어내리고 다리를 벌렸다. 솟아오른 속옷의 끝이 젖어있었다. 승운이 다시 속옷 위로 뭉근하게 문지르면서 물었다.
“이 얼굴이 좋아요?”
“좋습니다.”
“저도 그래요.”
그 말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재준이 “너도 네 얼굴이 좋다고?” 물었다. 그래, 스스로도 좋아할 만큼의 얼굴이긴 하지.
“이런 얼굴을 가져서 정말 행운이에요. 아니었으면 박사님이 절 바라봐주지도 않았을 테니.”
그렇게 말하며 속옷을 내리자 프리컴으로 번들거리는 귀두가 드러났다. 속옷에 밀착된 부분에 길게 이어진 액체에 입맛을 다신 승운이 “재준 씨.” 하고 불렀다. 재준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흥분할 때 나타나는 습관이라는 걸 단 두 번의 경험이었지만 승운은 알아차렸다. 저 내리깐 눈이 너무 좋았다.
“형.”
“…….”
“형 소리가 좋아요?”
“아뇨, 좋다기보단 배덕감이.”
재준이 답했다.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서요.”
“꼴리죠?”
그런 호칭보다는 네 얼굴이 더 꼴린다는 말을 차마 재준은 하지 못했다. 딱히 가이드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아마 충분히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 꼴립니다. 야외라서 더 그러네요.”
재준이 교묘하게 숨기듯 대답했다. 장소보다는 역시 얼굴이 더 좋다고 여겼지만 너무 외모지상주의 같아 보일까봐 말았다. 이어지는 대답에 승운이 웃어보였다.
“그런데 에스퍼 능력을 이런데 사용하면 어떻게 합니까.”
재준이 타박하듯 말했다. 확실히 이렇게 물의 장벽이 있으니 외부에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익숙하던 자신의 정원이 야외라는 걸 느끼게 해서 재준은 약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니까 박사님이 보충해주세요.”
반면 지승운은 수치라고는 갖고 태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한번만 빨게요, 딱 한번만.”
“……여러 번 빠십시오.”
재준이 포기하듯 답했다.
“고환이 텅 비어버릴 텐데요.”
“그것도 좋죠.”
긍정적인 답에 승운이 웃으며 재준의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승운은 성기 아래의 고환과 아주 살짝 보이는 회음부에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물건도 잔뜩 선 상태였다.
“원하는 만큼 어디 한번 해봐요.”
재준이 말하며 승운의 넥타이를 잡아 이끌었다. 승운이 재준의 복부에 손을 대고 기울어지지 않게 지탱했다. 재준이 피식 웃었다. 어정쩡한 자세라 그런지 잔뜩 선 승운의 물건이 도드라져버렸다.
“그리고 지승운 씨.”
재준이 힘을 줘 타이를 더 잡아당겼다. 승운은 버틸까 하다가 몸을 일으켜 재준의 앞으로 끌려갔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승운을 끌고 온 재준은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다 말했다.
“다음엔 성적인 요구 말고 일상생활에서 하고 싶은 거 말해봐. 들어줄 테니까.”
그러고는 타이를 잡은 손을 풀었다. 승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재준을 내려다봤을 뿐이다.
“나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너도 멋대로 해보라고.”
승운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 못하는 얼굴로 재준을 응시했다. 응석부려본 적이 없나보군. 물론 재준도 누군가에게 응석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힘들면 기대기도 하고 속을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지승운은 그런 경험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누군가의 포용이나 배려가 어색하고 불편한 것처럼 굴었다.
그의 삶을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이 한켠에 있다.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
“너는 나한테 뭐든 바라도 돼.”
“그러면 다음에.”
승운이 입을 열었다.
“같이 어딘가로 가요.”
“그래.”
“식사도 같이 하고, 매일이요.”
“좋아.”
“저도 육개장 만들어주세요.”
“어?”
갑자기 육개장?
“유예지 연구원에겐 만들어줬다면서요.”
아, 그때. 한식이 당겨서……. 사실 고사리를 한국에서 주문해서 소포로 받으려고 했는데 세관에 걸렸다. 그리고 이유 없이 폐기가 되는 바람에, 결국 예지를 데리고 고사리를 뜯으러 갔던 기억이 있었다.
“저도 박사님 위해서 요리 배울게요.”
이거 질투였구나. 재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승운아.”
“네.”
“이름으로.”
“재준 씨.”
“지승운.”
재준의 부름에 승운은 답 없이 그를 내려다봤다. 조금 짙어진 눈이 재준을 응시한다. 표정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아무렴 어떠냐 싶어 재준은 다리를 벌렸다. 승운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꿇어요.”
재준이 말했다. 승운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기분 좋게 해봐요.”
이어지는 말에 승운은 입으로 지퍼를 내렸다. 재준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들어 올리자 승운이 잽싸게 바지를 내렸다. 부끄럼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듯 나서서 다리를 벌려주자 승운이 하복부에 숨을 토해냈다. 일어선 성기에 드로어즈가 들려있다.
“잘 빨아봐.”
재준이 말했다. 허벅지 위로 몇 번이나 입을 맞춘 승운이 손으로 재준의 다리를 벌려 고정했다. 손에 잡히는 근육이 탄탄했다. 천천히 허벅지를 타고 위로 올라오던 승운의 혀가 성기에 닿았다.
그리고 단숨에 집어삼켰다.
축축한 혀가 귀두를 문지르더니 요도에 혀끝을 세웠다. 승운은 한 손으로는 자지 기둥을 쓸어내리며 다른 손을 위로 뻗어 몸을 만졌다. 성기로 이어지는 배꼽아래부터 복근을 따라 올라간 손이 옆구리를 스치자 재준이 몸을 떤다. 승운이 시선만 들어 올려 재준을 바라봤다. 민감하다. 학학대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제 물건 역시 섰다. 승운의 손이 가슴 근육 아래를 스쳤다. 가슴이 움찔한다.
승운이 손을 내려 허벅지를 잡고 기둥을 빨아올렸다. 갑작스런 자극에 “아!” 하고 높은 교성이 나왔다. 움직이지 않으려 의자에 고정시켰던 골반이 천천히 움직였다. 재준이 승운의 입에 얕게 박았다.
“아, 앗, 흐, 아!”
혀로 귀두를 문지르던 승운이 입을 모아 빨며 압력을 주다가 재준의 성기를 잡고 그대로 빼냈다. 폭 소리가 나며 재준의 허리가 떠올랐다.
아, 곧 갈 수 있었는데—.
승운이 야하게 웃으며 재준의 고환을 주무르다가 다시 좆을 입에 넣었다. 재준이 눈을 내리깔며 승운을 바라봤다. 마주치는 시선에 보이는 욕정 때문인지 목 뒤에 소름이 돋는다. 자지 기둥과 귀두를 몇 번이나 빨던 승운이 제 손에 손가락을 넣어 빨았다. 재준이 눈을 깜빡이며 뭘 하나 보던 찰나, 승운이 “젤이 없어서요.” 말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재준의 구멍으로 중지를 찔러 넣었다. 갑작스런 침입에 움찔하기는 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승운은 천천히 침입했다.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침을 묻히긴 했지만 여전히 뻑뻑했다. 조심스레 들어가는 것조차 힘든지 재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손가락을 앞으로 구부리자 몸이 움찔한다.
“흐윽, 힉!
승운이 느끼는 점을 정확하게 찾아 손으로 문지르면서 성기를 계속 주무르는 통에 헉헉거리는 숨이 나온다. 승운은 다른 손으로 재준의 자지를 잡아 문지르다 기둥에 압박을 줬다. 그러고는 다시 풀며 자위하듯 속도를 빠르게 해서 위아래로 문질렀다. 재준이 견디지 못하고 골반을 두어 번 튕겨 오르자 승운이 좆을 놓으며 손가락도 빼냈다.
“헉……!”
조금만 더 하면 갈 것 같은 지점에서 계속 그만두자 애가 튼 재준이 아쉬운 눈으로 승운을 바라봤다. 눈가에 고인 눈물에 왠지 뿌듯함을 느낀 승운이 귀두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는 이번엔 손가락 두개를 넣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승운이 성기를 애무하며 회음에 입을 갖다 댔다. 숨결과 혀가 닫자 놀란 재준이 막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자지를 강하게 주무르자 이도저도 못한 채 벌벌 떨었다. 혀가 점점 아래로 내려와 구멍 위를 눌렀다. 재준의 흉통이 크게 부풀었다가 떨어졌다.
승운은 회음과 고환을 빨고 다시 기둥으로 타고 올라와 귀두를 물더니 손가락을 격하게 움직였다. 쌀 것 같은 감각에 배를 떨자 이번엔 기둥을 강하게 쥐어 싸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제 입을 가져와 귀두를 쭉쭉 빨다가 목구멍 안쪽까지 담아냈다.
“아흑, 읏, 아!”
재준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자극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은데 성기에 가해진 압력 때문에 싸지 못했다. 참지 못하고 허리를 뒤흔들며 움찔거렸다. 승운이 입을 떼자 투명한 선액이 늘어졌다. 재준의 귀두가 침과 애액으로 반들반들했다.
“좋아요?”
좋다 못해 죽을 것 같았다. 당장 싸고 싶다. 게다가 구멍 안쪽을 지분거리는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징징 울린다. 미칠 것 같아.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는 재준의 모습에 승운이 손가락을 더 빨리 움직였다. 안쪽을 짓이기는 것처럼 박아대는 손가락에 재준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재준이 애타는 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승운의 엄지가 회음에, 검지와 중지가 전립선쯤에 닿은 듯 했다. 양쪽에서 가해지는 자극에 재준이 눈물을 터뜨렸다. 이럴 때 우는 것은 마음이 아프기보단 뿌듯했지만, 너무 괴롭히는 것 같아 승운은 자지를 잡던 손을 놓고 안쪽을 더 강하게 문질렀다.
“학— 흐앗!”
재준의 자지에서 정액이 분출됐다. 못 참겠는지 몸을 뒤틀던 재준은 자신의 손을 앞으로 가져와 수음하며 몇 번에 걸쳐 찔끔찔끔 쌌다. 그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승운은 밖으로 쏟아져 몸에 들러붙은 정액을 길게 핥았다.
재준이 숨을 가쁘게 쉬며 그런 승운을 바라봤다. 일어서는 승운의 바지가 크게 부풀어있었다. 숨을 몰아쉰 재준이 승운의 허벅지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도 해줄게.”
“괜찮아요.”
“내 집엔 젤이 없어.”
“…….”
아, 그건 생각을 못했는데. 그렇다면 젖을 것이 필요하긴 했다. 승운은 고민했다. 당연히 빨아주면 좋았다. 재준이 자신의 것을 입에 물고 정액을 머금었을 때의 기억으로 몇 번을 뺐는지 모르겠다.
만나지 못할 때 마다, 재준과 했던 것을 떠올리며 자위한 승운은 이 귀중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준에게 그런 걸 시키고 싶지도…… 시키고 싶다.
마음 같아선 입을 열고 멋대로 박고 싶다는 가학적 심정이 차올랐지만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윤활로 쓸 만한 게 없는데.”
그렇게 말한 재준이 승운의 벨트를 풀고 버클을 벗겼다.
“내가 빨아주는 게 싫어, 승운아?”
“……아뇨, 상상만으로도 쌀 것 같은데.”
실제로 상상하면서 많이 싸긴 했지.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제가 너무 게걸스럽게 굴까 봐.”
이어지는 말에 재준이 웃으며 허벅지를 슬슬 만졌다. 남자들 허벅지가 다 그렇겠지만 단단했다. 처음 이것과 맞닿았을 때 느꼈던 묘한 감각에 아랫배가 움찔거린다. 재준이 앞섶을 열고 바지와 드로어즈를 내렸다. 튕겨지듯 나온 성기가 위로 달라붙었다. 가터벨트에 걸린 속옷에 재준이 입맛을 다셨다.
이런 취미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가터벨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재준이 승운의 자지를 잡고 위를 올려다봤다. 흐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승운은 눈이 마주치가 눈매를 가늘게 접어 웃었다.
“박사님, 섰어요.”
“알아요.”
“막 쌌는데.”
“그러게요. 누굴 보니까 서네.”
대답한 재준이 승운의 자지를 입에 담았다. 그가 해줬던 것처럼 단숨에—.
……단숨에.
“…….”
잘 안 들어가.
자신의 입안이 이렇게 옹졸한 줄 몰랐는데.
아니지, 경우를 따지면 지승운이 큰 거였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도 귀두만 겨우 물었지. 아무래도 뭘 해도 들어갈 것 같지 않다. 억지로 넣자니 입이 찢어질 것 같다. 결국 포기한 재준은 할 수 있는 최대한 입을 벌려 귀두를 머금었다. 이것만으로도 왠지 턱이 빠듯하게 느껴졌다. 이런걸 아래로 그렇게 물 수 있다는 게 새삼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그나마 손을 써서 기둥을 압박하고 고환을 주무르고는 있지만 승운에게선 자신이 느꼈던 그런 반응은 없었다.
간혹 “흐—….” 하고 숨을 내쉬거나 낮게 느끼는 소리는 났지만 자신처럼 좋아서 허리를 뒤흔드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지승운 씨.”
재준이 입을 떼며 말했다. 승운이 숨을 몰아쉬며 재준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은 거칠었지만 누가 봐도 확연한 남자의 손이 제 좆을 잡고 흔드는 것이 얼마나 흥분되는지 알까 싶은 순간, 재준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못해서 미안.”
남자를 상대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지 재준은 테크닉이 떨어지는 스스로에게 조금 실망했다. 승운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수음이든 구음이든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앞으로 자주 해줄게요. 실력도 쌓고.”
“전 충분히 만족하는데요, 박사님.”
승운이 말하며 재준을 일으켰다. 재준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목덜미에 입을 맞춘 승운은 구멍 안쪽이 제대로 열렸나 손가락을 넣어봤다. 이 정도면 빠듯할 것 같기도 한데 천천히 하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승운은 재준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고 그대로 재준을 이끌었다.
“하아— 위에 앉아 볼래요?”
그 말에 재준이 승운의 위에 올라탔다. 의자가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음욕에 눈이 멀어 그 부분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일어선 성기에 구멍을 맞추자 재준은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때는 좋지만 역시 크기가 조금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재준이 천천히 아래로 앉자 승운의 복부가 움찔하며 성기가 꺼떡였다. 미끄러진 성기가 회음을 찔렀다.
“……읏.”
느끼는 부분이 아닌 것 같은데 마찰되자 기분이 이상했다. 재준이 다리 한쪽을 들어 팔걸이에 고정시켰다. 그러자 삽입하는데 조금은 더 수월한 자세가 된 듯 했다.
구멍 안으로 승운의 귀두가 천천히 들어갔다. 윽, 흣, 소리 내며 재준이 눈을 감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허리와 상반되게 얼굴은 잔뜩 풀려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입술에 침을 묻힐 때마다 보이는 붉은 혀에 승운은 한 손으로 재준의 허리를 잡았다. 그대로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다른 손으로 자신의 좆을 잡아 빠지지 않도록 고정한 승운이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는다. 들어갈 때마다 안쪽이 빠듯하게 조여 왔다. 느껴지는 내부의 체온과 꿈틀대는 살에 승운 역시 가쁜 숨을 내뱉었다.
물건이 다 들어가고 나서야 재준은 팔걸이에 고정시켰던. 다리를 내리고 승운의 몸 위에 늘어졌다.
“괜, 찮아요?”
“흐—.”
재준이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승운의 좆이 움찔하며 튕겨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젤이 아니라 조금 뻑뻑한 감은 있었지만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안쪽이 빠듯해질 정도로 벌어졌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어딘가가 욱신욱신했고, 몸을 일으키는 사소한 움직임에도 자극이 된 구멍이 제멋대로 수축했다.
“너무 커, 너.”
그렇게 말한 재준이 승운의 무릎 바로 위에 양 손을 올렸다. 자신의 성기 역시 죽지 않고 빳빳하게 서 있다. 승운은 힘이 들어가 있는 재준의 성기가 뿌듯하기라도 한 듯 손으로 훑어 내렸다.
“으, 잠시만. 지금, 지금 자극 주면…….”
재준이 말하며 허리를 뒤틀었다.
“금방 싸서 안 돼.”
그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위로 박아올리고 싶은데. 하지만 재준이 승운의 가슴을 꾹 누르며 “내가 움직일 테니까.” 하고 말했다. 위에 올라타 시선이 높은 재준을 올려다 본 승운은 뜻대로 하라고 말하며 재준의 목을 길게 핥아 올리다 목젖에 입 맞췄다. 재준이 움찔 하며 허리를 튕겼다.
그나마 자신이 조절을 해서 조금 나은 걸까. 어설픈 움직임이었지만 재준이 위 아래로 피스톤 질을 하며 다리를 벌렸다. 움직일 때마다 성기가 흔들렸다. 그 아래의 회음도, 자지를 집어삼켰다가 내뱉는 구멍도 고스란히 보였다.
아래에만 고정된 승운의 시선에 재준이 손을 뻗어 승운의 턱 끝을 들어올렸다.
“내 좆만, —좋아?”
“……읏, 그럴리가요.”
승운이 대답하며 재준의 몸을 쓸어 올렸다. 배꼽부터 시작했던 손이 명치를 지나 가슴 위에 올라갔다. 가슴근육을 한번 주무른 승운의 손이 옆구리를 타고 내려와 골반 위에 손을 올렸다. 건조했던 피부가 촉촉해졌다. 재준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상기되어 핑크빛이 도는 얼굴과 열이 몰린 듯한 입술색이, 꺼떡이는 귀두의 색과 똑같았다. 머리카락이나 음모는 새까만 것에 비해 유두나 성기는 색소가 옅다.
승운이 다시 손을 옮겨 재준의 성기를 잡았다.
“으…… 아, 좋아.”
재준이 허리를 튕겼다. 마치 승운의 손으로 자위를 하듯 움직이자 구멍도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여전히 빠듯하긴 하지만 쫀득하게 물어왔다. 당장이라도 찍어 올리고 싶은 한편 자신의 위에서 직접 허리를 흔들며 좋은 곳을 찾아 짓누르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다.
승운은 재준의 가슴 위로 입을 갖다 댔다. 첫 접촉은 가벼웠지만 곧 혀를 세워 뭉근하게 유두를 눌렀다. 재준의 허리가 위아래로 튕겨지며 좆이 흔들렸다. 다만 점점 힘을 받고 있어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드물었다. 승운이 재준의 자지를 잡아 문지르며 유두를 깨물었다.
“하윽! 읏!”
재준이 놀라 몸을 움츠렸다. 동시에 복부와 허벅지가 요동치듯이 떨렸다. 승운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준의 귀두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재준이 승운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쌀 것 처럼 성기가 튕겨 올라가고 안쪽이 불규칙적으로 수축했다. 그 자극에 승운도 “큿.”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얼마간 부들거리던 재준이 가쁜 숨을 골랐다.
“갔어요?”
승운이 재준의 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한쪽 손은 여전히 자지를 잡고 있다. 선단은 젖어있기는 했지만 분출된 흔적은 없었다.
“정액은?”
“헉, 하아, 흐으…….”
“안으로만 갔어요?”
재준이 고개를 젓다가 이내 멈추고는 다시 끄덕였다. 안쪽으로만 간 것 같았다. 사실 여전히 그 감각이 남아있다. 고조된 성감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아 재준은 계속해서 헐떡이며 움찔거렸다.
“야해라.”
위에서 승운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다음엔 싸줘요. 먹고 싶으니까.”
“네가—.”
“네?”
“네가, 싸게 만들—…!”
재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운이 골반을 튕겼다. 아래에서 위로 찍어 올리는데도 마치 엎드려 박히는 것처럼 퍽퍽 소리가 났다. 몸을 지탱하지 못한 재준이 결국 승운에게 기댔다.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매달려 울자 자극이 됐는지 승운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박아대며 재준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벌려대는 통에 바르작거린 재준은 이내 안쪽에서 어딘가를 쿡 찌르자 멈칫하며 몸을 굳혔다.
아, 닿았다.
“흣, 으윽, 아, 아—.”
전립선 말고 안쪽 깊은 곳 어딘가에 또 느끼는 장소가 있는데 거기에 승운의 귀두가 비벼지더니 다시 쾅쾅 찍어 올린다.
“아읏! 으, 너무 커.”
“지금, 그런 말…….”
그런 말 하면 더 못 참아요. 승운이 재준에게 입 맞추며 말했다. 말의 반절 정도가 입안으로 들어와 먹혔다. 흐느끼던 재준 역시 못 참겠는지 허리를 흔들어댔다. 안쪽에서 미끄러져나가는 성기의 자극에 도리질을 치던 재준은 다시 거세게 밀려들어오는 성기를 피하려는 듯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승운이 나가지 못하도록 허리를 잡고 뒤흔들었다. 강제로 벌어진 안쪽 전부가 성감이 된 듯 파들파들 떨던 재준이 다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아읏, 아! 으응, 윽, 흐…… 아! 으앗, 하아, 하!”
“더 들려주세요.”
살끼리 맞닿으며 철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찔릴 때마다 안을 콱콱 물어왔다. 재준의 허벅지가 경련하듯 떨렸다.
“박사님 느끼는 거 너무 좋아요. 흐, 읏, 정말 좋아해요 박사님.”
“스, 승운아…… 거기, 더!”
그 말을 들으며 승운이 퍼억 하고 안쪽을 때려 박았다. 동시에 재준이 움찔하더니 승운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승운은 자신의 복부에 쏟아진 재준의 정액을 느끼곤 “후우—.” 숨을 내쉬며 나른하게 웃었다.
동시에 갔다.
재준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재준의 엉덩이를 토닥이던 승운이 손으로 재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눈물과 침으로 엉망이 된 얼굴이 나른하게 풀려있다. 승운이 안경을 벗긴 뒤 입을 맞추며 천천히 움직였다. 재준이 우는 소리를 냈다. 승운은 자신의 배에 들러붙은 정액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려 입에 가져갔다. 그가 정액을 먹는 건 매번 보지만 볼 때마다 야했다. 멍하니 승운을 보던 재준은 손가락을 쪽쪽 빠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구멍을 움찔 조였다. 승운이 웃었다.
“좋아요?”
“……좋아.”
“나도 좋아요. 박사님 잘 느끼는 거 너무 귀여워요.”
“…네가 잘해서 그래.”
“칭찬 고마워요.”
승운이 말하며 늘어진 재준의 자지와 고환을 들어올렸다. 자극 때문인지 회음부가 불긋했다. 그 아래로 자신의 물건을 담고 있는 구멍에서 하얀 거품이 일었다.
“박사님 구멍이 제 자지모양으로 넓어졌어요. 너무 야해.”
승운이 말하며 자지를 빼냈다. 재준이 흠칫 몸을 떨었다. 벌어졌던 구멍에서 빠져나가자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구멍이 제 스스로 뻐끔거렸다. 그럴 때마다 안에서 정액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날이 좀 쌀쌀하네요.”
승운이 말했다.
“우리 안으로 가서 더 할까요?”
이거 괜찮은 걸까. 이러다가 복상사하는 건 아니겠지. 더 이상 정액이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재준이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있는 재준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승운이 배시시 웃으며 안경을 씌우고는 재준을 안아 올렸다. 결코 작은 덩치가 아닌, 웬만한 남자라고 해도 체격이 좋은 자신을 이렇게 가뿐히 안을 거라 생각 못한 재준이 놔달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자신의 구멍에서 툭 하고 정액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제가 나중에 치울게요.”
승운이 말했다.
재준은 승운에게 안긴 상태로 문 앞으로 갔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라는 말에 재준이 여섯 자리를 눌렀다. 제 생일이었다. 승운이 큭큭 웃었다. 이렇게 쉬우면 어쩌냐는 말에, 재준은 자신의 생일을 아는 사람은 이제 없다고 말했다.
들어선 집은 서늘했다. 사람의 온기가 딱히 느껴지지 않는 집이었다. 물건도 별로 없었다. 집 구조는 한국 같았지만, 가구는 1인용이 대부분이었다. 넓은 집에 비해 보잘것없는 가구가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집안에 들어선 승운의 재준의 양쪽 장골에 손을 올리고 아래로 쓸어내렸다. 재준이 움찔 힘을 줬다가 별 일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풀었다. 그러자 또 정액이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한 방울의 정액을 보던 승운이 고개를 들어 재준의 엉덩이를 봤다. 허벅지를 타고 정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침실 어디예요?”
“거울 왼쪽 옆에.”
재준이 대답했다. 거실 정면에 전신거울이 하나 있고 그 거울을 기준으로 양쪽에 문이 있었다. 거울이라니. 왜 저런 곳에? 승운은 침실의 문을 열려고 하는 재준을 붙잡았다.
“뭐…….”
“박사님.”
“왜?”
“여기서 한번만 하면 안돼요?”
변태 같은 놈. 재준이 승운을 올려다봤다. 승운이 재준의 솔직함을 의외라고 여기는 것처럼, 재준 역시 승운의 성욕이 의외였다. 가이딩을 그렇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물론 지금 재준과 승운이 하는 것이 과연 가이딩인지, 아니면 그냥 섹스인지도 모르겠다.
가이딩 자체를 말하라면, 재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승운과 닿을 때 뭔가 공유되는 감각이 있었지만 가이딩이 어떤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재준에게 이건 섹스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재준은 그와 하는 섹스가 좋았지만, 역시 좀 지나쳤다.
재준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승운이 어깨에 머리를 톡 하고 기댔다.
“싫어요?”
마치 자신이 무해한 생물인 것처럼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있었다. 그리고 재준은.
“……너 정말 예쁘다.”
가이드다.
이건 모두 에스퍼 때문이야. 재준이 생각했다. 힘든데 저 얼굴을 보면 거절을 할 수 없었다. 이게 다 에스퍼 때문이라고. 재준은 애써 책임을 승운에게 옮겨 덮으며 승운의 볼에 입 맞췄다.
재준의 허락에 승운이 다시 여기 저기 입술을 대며 흔적을 남겼다.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에 남기려 했지만 가끔은 이성을 잃어 보이는 곳에 자국이 남기도 했다. 재준의 입안을 더듬던 승운이 거울 앞으로 재준을 인도했다.
“거울보고 서요.”
그러면서 살짝 밀치자 균형이 무너져 재준은 거울에 양 손을 댔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홀딱 벗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반면 승운은 옷을 풀어헤치기는 했으나 전부 다 입고 있었다.
“…….”
뭔가 부끄러웠다. 자신만 나체인 상태가.
재준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승운의 손이 다시 재준의 구멍 안을 침범했다. 흘러나오긴 했지만 안은 여전히 촉촉했다. 바로 넣어도 문제는 없었다. 구멍 안쪽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려 성감을 일으킨 승운이 곧바로 들어왔다.
“윽, 읏! 아, 잠…….”
“미안, 늦게 들어서.”
늦게 듣기는. 승운의 성기가 천천히 안쪽을 비집고 들어와 어느 지점을 찌른다.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하자 승운이 손으로 재준의 고개를 거울로 고정시켰다. 자지가 안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흐려지는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민망해 시선을 내리자 이번엔 점점 힘을 받아가는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제 모습을 볼 것이라고 생각은 못했는데. 차라리 승운의 얼굴을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재준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거울 속 승운과 눈이 마주쳤다.
“…….”
살짝 내리깐 눈이 촉촉했다. 야해라. 거울 속으로 보는 것이 조금은 색달랐다. 거울 속 승운을 보고 있자,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승운이 배시시 웃으며 장난치듯 퍽 하고 안쪽을 찔렀다. 재준의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쏠렸다. 서서 해서 그런지 박히는 지점이 달랐는데, 그마저도 좋았다. 도대체 이 안에 좋은 지점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었다.
승운이 찔러들 때마다 요도에서 맑은 프리컴이 줄줄 흘렀다. 또 다시 전립선 액이 나온 건가 싶어 구멍을 막아보려 손을 앞에 갖다 댔지만 승운이 재준의 손을 끌어 고정시키고는 제 손으로 자지를 흔들었다.
“학! 읏! 처, 천천히!”
순간 선단을 타고 하얀 액이 또륵 흘렀다. 거울 너머로 그 장면이 보였다. 자지 기둥에 매달려있던 정액이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준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자세가 뭔가 불편하다 싶은 순간 승운이 자신의 한쪽 다리를 올렸다. 재준은 이게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승운을 바라봤다.
“저한테 기대요.”
기대고 뭐고 간에, 이 자세로 뭘 하려고……. 마치 포르노에서나 볼 법한 자세였다. 재준이 당황해 눈동자를 굴리자 승운이 키들키들 웃었다.
“귀여워.”
재준은 가끔 승운을 이해할 수 없다. 승운은 다리를 한층 더 들어 올린 뒤 남은 손으로 재준의 복부를 쓸어내렸다. 상복부터 배꼽을 지나 하복부, 그리고 자지 뿌리까지 느릿하게 문질렀다가 다시 위로 올라온다. 좆을 만져줄 거란 기대가 한순간에 사라졌지만 왠지 모르게 성기는 제 의지를 배반하고 위로 껄떡였다.
“박사님 코어 좋으시다.”
승운의 말에 재준이 푸흐흐 웃었다. 섹스 중에 웃기지 말라는 말에 승운이 웃기려고 한 말 아닌데. 작게 말했다.
“밸런스가 정말 좋아요.”
역시 운동을 해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때 총기를 다루는 것도 멋졌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다음에 함께 사격에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괴수를 잡으러 갈때나.
“구멍 보여요?”
승운이 말했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재준의 시선이 승운의 말을 따라 이동했다. 들어 올린 다리 때문에 훤히 보이는 구멍이 승운의 좆을 물고 있었다.
“절 집어삼키잖아요. 어떻게 저렇게 예쁘지? 색깔도. 왜 이렇게 야해요? 응?”
그렇게 말하며 자지를 길게 뺐다가 다시 찔러넣는 모습에 재준이 허벅지를 부들부들 떨더니 좆 끝에서 다시 정액이 주륵 흘러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흐—.”
“갔어요? 아직 약하게 간 건가?”
승운이 다시 거세게 움직였다. 한쪽 손은 다리를 잡아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왼쪽 유두를 잡아 비틀더니 손톱으로 긁었다. 재준이 미칠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승운은 그런 재준을 무시한 채 거세게 박아 올렸다. 흔드는 대로 자지가 위아래로 흔들리더니 이내 빳빳하게 서서 더 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야해.”
목덜미에 입을 맞춘 승운이 말했다. 혀로 목을 쓸어 올린 승운이 아차 싶어 혀를 뗐다. 이러다가 또 자국을 남길지도 몰랐다. 조금만 방심해도 아무데나 흔적을 남길 것 같다. 자신은 상관없지만 재준이 곤란한건 안 됐다.
승운이 양손을 이용해 재준을 들어올렸다. 아무리 제 체격이 조금 더 작다고는 해도 거의 비슷한 덩치인데 가볍게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면 매번 놀라는 재준은 그럴 리가 없겠지만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승운의 몸에 등을 밀착시켰다. 승운은 재준을 허공에 든 채로 돌리자 자지가 빠졌다. 구멍에서 정액이 후두둑 떨어졌다. 승운이 다시 성기를 삽입했다. 재준이 목에 매달려 흐윽 울었다. 배에 따뜻한 액체가 튀어 오르자 승운이 웃는다.
“아깝다. 나중에 핥아먹어야지.”
승운이 말하며 침실 문을 열었다. 재준이 어정쩡한 자세로 승운을 올려다봤다.
“지승운 씨.”
존댓말이다. 승운이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재준을 내려다봤다.
“빼고 이동하면 안 됩니까?”
애원하는 듯한 재준의 말투에 승운이 피식 웃어보였다. 존댓말을 하는 거 보니 힘든 듯 했다. 싫은데. 뭔가 핑계를 댈게 없나 생각하던 승운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다.
“제가 안에 너무 많이 싸질러서 그랬다간 청소할 게 늘어나요.”
그거 치우는 게 뭐라고. 눈 한번 깜빡해서 물로 쓸면 되는 것을. 하지만 빼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저거 치워야 하는데.”
승운이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순간 오싹함에 재준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그랬지. 귓속말을 할 때면 묘하게 굳는 것 같더니 이유가 있는 듯 했다. 승운이 “귀가 좋아요?” 하고 나지막하게 묻자 재준이 어깨를 움츠렸다.
“박사님 여기가 민감하더라.”
그러게. 재준도 자신이 어디가 어떻게 민감한지 이제야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진짜 좋아요.”
“야한 거?”
“잘 느끼는 것도 좋지만, 박사님 존재가 너무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재준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당신은 제 구원자예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당신한테 구원받고 싶었는데 정말 그게 이루어졌어요. 하지만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기쁨과 무서움과 두려움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아마 재준은 모를 것이다.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치 제 심정을 알아차린 듯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넌 머리카락도 예쁘네. 부드럽다.”
재준이 말했다.
“어린 짐승들의 털이 이렇게 부드러운데.”
이쪽도 짐승은 짐승이었다. 어리지는 않았고, 좀 되바라진 데다 성욕이 강한 짐승 쪽.
“침대로 가자.”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몸을 뺐다. 구멍에 들어찼던 성기가 주륵 빠져나오자 자극이 되었는지 구멍이 오므라들었다가 벌어졌다 반복했다. 정액이 다시 아래로 흘렀다. 재준과 승운이 바닥에 떨어진 정액을 동시에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건 나중에 네가 치워. 네 거니까.”
“알겠어요.”
그리고 재준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헨젤과 그레텔이 남긴 흔적마냥 길을 따라 떨어지는 정액을 핥아먹고 싶다. 아, 저건 내꺼지. 내 정액은 딱히. 저것이 재준의 것이었다면 이미 바닥에 혀를 갖다 댔을 것이다. 재준은 침대 맡에 안경을 내려놓고 승운에게 오라는 듯 손짓했다.
저 얼굴을 보이는 건 반칙인데. 승운이 생각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안경 없어도 돼요?”
“키스하는데 불편해서.”
그건 그래. 하지만 이 얼굴을 보면.
“제가 너무 거칠게 굴면, 때려서라도 막아요.”
그대로 먹어버리고 싶다.
“예? 아프게 하기 싫으니까.”
지승운은 재준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외모는 인간이 가진 겉가죽일 뿐이다. 중요한건 내부에 있는 것 뿐. 하지만 내부조차 완벽한데 겉모습까지 자신의 취향일 때는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참지 못해서 막 대하다가 부서지거나 망가지면 어떻게 하지. 승운은 그게 두렵다.
한편으론 가이드들이 왜 그렇게 에스퍼의 외모를 샅샅이 핥아먹을 듯 바라보는지도 알 것 같았다. 만약 지승운이 가이드였다면 재준이 같은 가이드이든 아니든 간에 상관하지 않고 어떻게든 붙어먹었을 것이다.
“자제하고 싶은데 안 될 것 같아서 미리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재준의 다리를 벌렸다. 몇 번이나 쌌는데도 물건이 사그라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준의 자지가 늘어져있다. 핥아서 세우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넣는 게 더 급했다.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구멍에 잔뜩 박고 뒤흔들고 싸고 싶다. 더 이상 무언가가 더 들어차지 못할 정도로 정액으로 범벅으로 만들고 싶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우는 모습을 보면 뿌듯할 것 같다.
위험해.
지금까지 누군가와 자면서 부족하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요즘은 갈증이 일었다. 힘은 부족하지 않다. 지승운은 스스로의 힘을 잘 제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제어하는 건 힘들다.
저런 사람을 앞두고 어떻게 절제가 가능하지? 하지만 도망치지 않게 하려면 해야 했다.
승운이 천천히 재준 위로 몸을 드리웠다. 매트리스가 무게에 움푹 꺼졌다. 누운 자세로 다리를 벌리던 재준은 자세가 뭔가 불편한지 몸을 뒤집더니 네 발로 엎드렸다.
승운은 재준이 어떤 자세를 취하든 상관없었지만 저를 향해 엉덩이를 치켜드는 모습은 처음이어서 가쁜 숨을 내쉬고 입맛을 다셨다.
와, 진짜 야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박아야지.
본능처럼 제 좆을 구멍에 맞춘 승운이 재준의 등 위로 체중을 실었다. 그리고 천천히 밀어 넣다가, 어느 순간 쿵 하고 찍어 내렸다.
“아윽!”
“……아팠어요?”
“아, 읏, 아니. 놀라서…….”
아프다고 해야 할지. 아픔보다는 쾌감이 더 컸다.
뒤로 엎드리자 승운의 무게가 더 확연히 느껴졌다. 그동안은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봐준 듯 했다. 승운이 퍽퍽 올려칠 때마다 재준이 위로 밀려났다. 결국 침대 헤드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승운의 손이 헤드에 닿았다. 그리고는 재준을 끌어내린다.
“어흑!”
침대에 있는 베개를 재준의 머리에 받친 승운은 재준의 몸을 옆으로 돌리며 양 다리를 벌렸다. 좆을 빼내자 정액이 빠져나왔다. 승운은 자지를 잡고 귀두로 정액을 모은 뒤 그대로 안에 밀어 넣었다. 빠져나왔던 체액이 다시 안으로 들이찼다. 그럴 리가 없는데 뱃속이 찰랑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승운이 스퍼트를 올렸다. 재준은 자신의 좆을 잡고 흔들었다.
성감이 고조될수록 숨소리만 들렸다. 제대로 신음을 내는 것조차 힘들어 학학대던 재준의 복부가 움찔 하며 다시 정액이 튀어 올랐다. 승운은 그것조차 아깝다는 듯 손가락으로 쓸어 입으로 가져갔다.
“더 싸줘요.”
승운이 다시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옆으로 있던 몸이 누운 자세로 돌아갔다. 도드라진 귀두에 안쪽 어딘가가 긁히는 바람에 재준이 “흐윽, 흐으, 허억……!” 소리 내더니 울음이 터졌다.
울면 멈춰줄 줄 알았던 것과 상반되게 승운은 더더욱 속도를 빨리 했다. 재준이 막으려는 듯 팔뚝을 잡았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승운은 그 손이 거슬리는지 낚아채서 재준의 허벅지 위에 올린 다음 허벅지와 손을 동시에 잡고 퍽퍽 처 올렸다.
“아, 아흣, 아, 학, 흐, 읏!”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잔뜩 쉰 목은 신음을 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헉헉대는 숨소리만 났다. 승운이 박아 올릴 때마다 안쪽을 때려 맞는 것 같았다. 그 압박감과 박는 힘에 자지러진 재준은 자신이 가학적인 것을 선호하나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학, 하악, 아…….”
“좋아요?”
“흐, 좋아, 아읏! 좋아…… 더 쑤셔, 봐…… 아, 흐!”
“읏, 아… 나도 좋아요!”
승운의 움직임이 더욱 격해졌다. 안쪽에서 움찔거리는 자지의 반동에 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재준의 성기에서도 정액이 물처럼 줄줄 떨어졌다. 또 다시 전립선 액이 나온 건가 싶은데 색이 희뿌옇다. 하지만 감각은 그때와 비슷했다. 사정하는 느낌이 멈추지 않는다.
“승운아.”
재준이 말했다. 눈앞이 흐렸다. 승운은 움직임을 멈춘 채 재준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그대로 손을 올려 재준의 눈을 닦아줬다. 눈물이 닦이자 승운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얼굴 보여줘.”
눈이 나쁜 게 불편하다 생각했던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아쉽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재준의 요구에 승운이 웃는 듯한 숨소리를 냈다. 그리고 얼굴이 다가온다. 코앞까지 다가오자 승운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이 상태로, 하자.”
재준이 말하며 제 허리를 돌렸다.
“크읏…….”
승운 역시 천천히 움직였다.
“읏, 승운아. 그, 거기 좋아.”
재준은 승운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후희에 가슴 안쪽 어딘가가 충족된 기분이다. 몸은 힘든데 만족스러웠다. 재준이 승운에게 입 맞췄다. 아래로는 승운이 재준을 잡아먹을 듯 굴었지만 입으로는 마치 재준이 자신을 삼킬 것 같아 승운은 “흣.” 하고 신음했다. 목 뒤를 잡고 조금은 거칠게, 혀를 깨물면서 빨아대는 재준을 느끼며 승운은 다시 성기가 힘을 받아감을 느꼈다. 풀어지던 성기가 다시 단단해져가는 걸 느낀 재준이 흘린 웃음이 입 안으로 들어온다.
“승운아.”
“네, 박사님.”
“내일 휴일이니까 자제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 말을 하면 진짜 자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승운이 재준이 재준의 머리를 받치며 침대에 눕혔다. 재준이 목을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승운도 재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움츠러드는 목에 입 맞춘 승운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줬다. 재준의 눈동자 속에 자신이 비친다.
“좋아해요.”
사랑해요.
“정말 좋아해요.”
부담스러워 할까봐 아직은 말하지 못했다.
재준은 답하는 대신 혀로 승운의 턱을 핥아 올렸다. 곧이어 입이 맞춰진다. 쪽 쪽 가볍게 맞춘 입술이 떨어지고 다시 볼에 맞닿는다. 볼 위에 한번, 코에 한번, 눈꺼풀 위에 한 번씩 재준이 입 맞췄다. 마지막으로 이마에 입 맞춘 재준이 “나도.” 말했다.
***
“박사님.”
승운의 말에 재준이 눈을 떴다.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재준의 눈에 승운이 물수건을 갖다 댔다. 울어서 말라붙은 눈물을 하나하나 닦아준 승운이 손을 이마에 올리며 “힘들어요?”하고 물었다.
열이 나나 체온을 재어 보는 것 같은데 승운의 체온이 더 높았다. 재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감았다. 그리고 조금 뒤에 다시 떴다. 예쁜 얼굴을 한 지승운이 보였다.
이렇게 무해한 얼굴로 그렇게나 해대다니. 짐승이 따로 없군.
그래도 몸이 개운했다. 자는 새에 닦아주고 시트까지 갈았는지 이불도 보송했다.
“전화 왔는데.”
그렇게 하며 얼굴 앞으로 핸드폰을 밀어주는 승운을 한번 올려다보다 재준이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화면을 가까이 가져오자 시리예가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영상통화였다. 승운이 재준의 옆자리에 누워 팔을 툭툭 두드리는 것이 윤곽으로 보였다. 재준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승운의 팔을 베고 누워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말을 하지 않아서 이럴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도 당황해 목을 감싸자 옆에서 승운이 달달한 냄새가 나는 차를 대령했다. 준비성도 철저하고, 다 좋은데 정력이 조금 떨어지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재준이 머그에 담긴 물을 마셨다. 꿀차다.
[안녕, 밤이야?]
“응.”
[옆에…… 에스퍼가 계시네.]
웃통을 벗고 보란 듯이 팔베개를 한 채 말이다. 안경을 벗은 재준의 모습에 시리예는 참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생각하며 승운을 바라봤다. 자신한테 저렇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봤자 이득 될 것은 하나도 없는 듯한데 저 에스퍼는 시리예를 계속 경계했다. 귀엽게 굴긴. 시리예가 말했다.
[시어샤한테 연락이 왔어.]
“……그래? 어떤?”
묘하게 말투가 느렸다.
[허니, 피곤해?]
재준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원래 오래 자는 편도 아니었고 늘 잠을 들기 어려워하더니 저런 졸린 얼굴은 처음 봐 시리예는 조금 신기했다. 하지만 이해가 가기도 했다. 에스퍼는 힘이 통제되지 않아 불안하지만, 가이드는 다른 이유로 불안한 이들이었다. 곁에 함께 해줄 에스퍼가 있지 않는 이상 늘 선잠을 자곤 했다. 시리예도 비슷했었다. 옆에 에스퍼가 없다면 늘 불안에 떨 것이다.
“응, 조금.”
[그럼 내일 이야기 하자. 아니, 메일로 내용 넣을게.]
그렇게 말한 시리예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끊어버렸다. 재준은 까맣게 변한 화면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몸을 틀어 승운에게 안겼다. 조금 뜨거운 듯한 체온이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듯 했다.
“중요한 일이에요?”
“아마도요.”
그렇게 대답했지만 재준의 눈이 계속 감겼다. 승운이 피식 웃더니 이마에 손을 올렸다. 체온이 높아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뜨끈뜨끈한 체온이 몸을 녹이는 듯 했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는 때에 이 온기가 나쁘지 않았다.
“미안해요. 피곤하게 만들어서.”
“아뇨, 좋았습니다.”
재준이 답했다. 여전히 눈은 뜨지 못했다. 자신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있는 재준을 바라보던 승운은 왠지 모를 충동에 그의 턱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처음엔 재준도 아무렇지 않게 응해줬는데 점점 농도가 짙어지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미안한데 더 못해.”
재준이 말하며 눈을 떴다. 몇 번이나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맨얼굴이었다. 예뻐서 무서운 경우가 다 있나. 승운은 내심 신기해하며 재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승운이 답하지 않자 재준이 “진짜 못해.” 하고 말을 이었다.
“알아요. 미안해요.”
“뭐가.”
재준이 물었다. 답이 없자 다시 “승운아.” 하고 부른다.
“네.”
“돈 많이 번다고 했으니까 나중에 장어 좀 사줘.”
“…….”
“넌 먹지 말고. 거기서 더 먹으면 큰일 나.”
“알겠어요.”
“널 상대하려면 정력에 좋은 거 많이 필요할 것 같아.”
“몸에 좋은 거 다 사드릴게요.”
“응. 넌 먹으면 안 돼.”
“전 박사님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
뭘 먹는 거? 정력에 좋은 음식? 아니면 네 정액?
뭔 말을 하던 자신이 입을 열기만 해도 왠지 달려들 것 같은 기분에 재준은 입을 꾹 다문 채 승운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승운도 재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옆으로 끌어안은 채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밀접하게 맞닿은 살에서 느껴지는 체온이나 자그마하게 들리는 심장박동에 안정을 찾는다.
그때 알람이 들렸다. 재준이 눈을 뜨고 이불 어디엔가 올려뒀던 핸드폰을 잡았다.
시리예가 보낸 메일이었다. 액정의 빛 때문에 눈이 부셔 찌푸린 재준이 메일을 읽어 내려가다 벌떡 일어섰다.
“이런.”
“왜요?”
“얼마 전에 이곳에 왔던 사람 중 한명이 죽어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재준이 말했다. 이곳에 왔던 사람이라니. 그럼 괴수학자라는 뜻이다.
“그 중 누구죠?”
시리예는 방금 통화했으니 아니다. 그러면 콜롬비아인 혹은 러시아계 미국인.
“모니카 살레.”
“그 미국인 학자와 함께 왔던 여자 말입니까?”
“예. 그리고…….”
재준이 손을 더듬거려 안경을 찾았다. 승운이 테이블 위에 옮겨뒀던 안경을 건넸다. 재준이 안경을 쓰며 핸드폰 액정을 바라봤다.
“그녀가 다른 쪽 스파이였던 것 같습니다.”
***
시리예는 죽은 모니카 살레에 대한 정보를 찾아 보내주겠다고 했다. 메일의 그 부분을 읽고 난 재준은 그냥 잤다. 어차피 초조해봐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자신의 침대에서 지승운의 품에 안겨— 안겼다고 하기엔 서로의 덩치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그나마 조금 더 큰 지승운에게 안긴 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자 몸이 개운했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옆에 빈자리를 더듬거린 재준이 안경을 찾아 쓰고 밖으로 나오자 당황한 승운이 재준을 바라봤다.
“어.”
엉망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수선했다.
“죄송해요.”
승운이 뻘쭘한 얼굴로 서 있었다. 살짝 탄내가 나긴 했다. 재준이 방문에 기대어 승운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그 날에도 아주 간단한 것만 준비해줬었지.
“한 번도 안 해보긴 했지만 잘 할 줄 알았거든요. 근데 제가 요리를 못 하나 봐요. 고기는 구울 줄 아는데.”
그래, 고기나 빵이나 과일 같은.
보통 잘 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자신이 요리를 못하는 점을 간파할 텐데 생각도 하지 않았나보다. 부끄러워하는 승운을 보며 미소지은 재준이 “설거지는 잘 합니까?” 물었다.
“……물을 다루는 건 저를 따라 올 사람이 없죠.”
아무렴 물을 다루는 에스퍼인데 그걸 못할 리가. 모든 걸 다 싹싹 치울 수 있었다. 겨우 설거지하는 데에 자신의 능력을 써본 적은 없지만.
“기다려요, 뭔가 만들어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재준이 침실 건너편으로 들어갔다가 곧 속옷만 챙겨 입고 나왔다. 저기가 옷방이었나 보다. 재준이 목을 좌우로 풀어주며 승운의 옆에 섰다.
“한식이 좋아요, 양식이 좋아요?”
“전 박사님 원하는 대로.”
“그럼 귀찮으니까 양식으로 하죠. 냉동실에 빵이 있는데 꺼내주시겠습니까? 커피? 차?”
“커피.”
“계란은? 어떤 게 좋습니까?”
“뭐든 괜찮아요.”
“그럼 스크럼블로 만들게요. 후추 뿌리는 거 괜찮습니까?”
재준이 물었다. 승운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이거 뭔가 신혼부부 같아. 서로 존대를 쓰긴 하지만, 상황이 그랬다. 승운이 대답이 없자 재준이 “후추는?” 하고 재차 물었다.
승운의 입이 재준의 입술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양치 안했는데.”
“제가 했으니까 괜찮아요.”
“…….”
“아, 칫솔 새 거 있어서 썼어요.”
“이 집에 있는 건 마음껏 써도 됩니다.”
재준이 말하자 승운이 배시시 웃었다. 순간 머릿속에 이 집에 있는 현재준을 멋대로 휘두르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뭐. 다음에 하면 되지 생각한 승운은 재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박사님은 냄새 안나요. 너무 좋아.”
“정신 차리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준은 승운을 밀어내지 않았다. 자기한테 들러붙어 움직이는 승운을 놔둔 채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는지 확인한 재준이 승운에게 콜랜더와 가위를 쥐어주며 마당에서 야채를 뜯어오라고 말했다.
그 괴수들 틈에 야채가 있긴 했었나? 승운이 생각하며 곧이곧대로 나갔다. 의외로 알뜰한 사람이라니까.
마당으로 가자 실제로 괴수가 아닌 야채들이 있긴 했다. 허리 높이의 나무화분에 가득. 전부 먹을 수 있는 건가 보지. 승운이 대충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만큼을 잘라 안으로 들어오자 빵 냄새가 났다. 어느 샌가 식탁 위에 먹을 것들이 차려져있었다.
승운은 불 앞에 있는 재준의 옆에 섰다.
“일어나면.”
재준이 고개를 돌려 승운에게 시선을 한 번 준 다음 다시 팬 위로 옮기며 말했다.
“뭐 하지 말고 옆에 있어요. 서운할 뻔 했거든요.”
분명 둘이 누워서 잤는데 일어나니 빈 침대를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승운의 집에 있을 땐 일어났을 때 바로 얼굴이, 물론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옆에 사람이 있는걸 알았는데 오늘은 혼자였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뭔가 준비해주는 것도 좋지만 함께 하는 게 더 좋습니다.”
혼자 일어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밤을 함께 보낸 사람이 없자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알겠어요.”
승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보통은 아침에 뭔가 해주면 좋아 하길래 예의상 했던 거였다. 물론 이번은 예의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였지만 재준의 함께 하자는 말이 좋았다.
“커피는 제가 내릴게요. 저 커피 잘 내려요.”
“프렌치프레스 밖에 없는데.”
“할 줄 알아요.”
이번엔 ‘할 줄 알 거예요’ 가 아니라 할 줄 안다는 말이어서 재준은 찬장을 가리키며 꺼내라는 말을 했다. 승운이 프렌치프레스를 꺼내고 제 집인 것처럼 커피도 자연스럽게 찾아 넣는 것을 보며 재준은 옅게 웃었다. 물을 끓이지도 않고 제 힘으로 뜨거운 물을 채워 넣는 건 예상 밖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채소도 다 씻어왔다는 말을 했다. 원소 계열 에스퍼란 편하구나. 재준이 생각했다. 더 할 거 없으니 앉아있으라는 말에 승운이 식탁에 가만히 앉아 재준을 바라봤다. 접시와 컵을 꺼낸 재준이 계란을 옮겨 담고 컵과 함께 들고 왔다. 승운이 일어서 도와주려 하자 “가만히 있으라니까.” 말했다. 의외로 박력 있었다.
승운의 맞은편에 앉은 재준이 말했다.
“다음엔 육개장 만들어줄게요. 몸이 혹사당하지 않은 때.”
“같이 해요. 고사리 뜯는 것부터.”
“……그건 사는 게 더 편합니다.”
한국에서 굳이 그런 고생을 하고 싶진 않았다. 승운이 배시시 웃었다.
“저도 박사님 자는 동안 좀 찾아봤어요.”
“이름으로.”
“예?”
“이름으로 부르라고요. 언제까지 박사님입니까.”
재준이 샐러드에 오일을 뿌리며 말했다. 어제 타액 말고 오일을 썼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용도로 쓰기엔 이 오일은 너무 비쌌다. 역시 젤을 사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재준이 이어 말했다.
“둘이 있을 땐 이름으로 불러요.”
“박사님도 둘만 있을 땐 말 놔주세요.”
“제가 존대가 더 편해서.”
“저랑 잘 땐 말 놓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존대를 쓰는 건 그렇잖아.”
승운은 재준이 어떤 식으로 말해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존대도 존대 나름대로 꼴리는데. 게다가 버거울 때는 거리를 두듯 존대를 쓰지 않는가. 그래, 오히려 그쪽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자제를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 뜻대로 하게 된다면 하는 내내 존대를 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좋은데? 승운이 나름 고민하자 재준이 슬쩍 승운을 바라봤다. 시선이 얼굴이 아닌 아래였다. 마치 식탁 아래에 무언가를 보듯.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밥상머리에서 세우지 마십시오.”
“네.”
의외로 재준이 자신을 잘 파악하는 것 같다고 승운은 생각했다.
반말이라. 평소의 반말.
“역시 반말은 안 되겠어요.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설 것 같아. 침대 위에서만 반말해요.”
“지승운 씨는 침대 위에서만 합니까?”
재준의 물음에 승운이 멈칫했다. 어, 아니지. 그럴 수는 없지. 아깝게 어떻게 침대 위에서만. 승운이 대답하지 못하자 재준이 이어 말했다.
“아니던데. 야외에서도 하고 거울 앞에서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재준의 표정이 여상해서 승운은 저가 잘못한 건지 잘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재준의 입 꼬리가 슥 올라갔다.
“좋다고, 너.”
“섹스요?”
“너. 네가 좋다고.”
저도요, 박사님. 정말 너무 너무 좋다고 말을 하고 싶은데 말로는 그 심정이 차마 표현이 안됐다.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아도 감정이 전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지, 그건 또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넌 안 좋아?”
“좋아요. 진짜 좋아요.”
“그럼 표현해봐.”
“…….”
어떻게? 승운이 고민했다. 좋은걸 표현하라고? 해본 적이 없는데. 아니, 있긴 한데 그 대상 역시 재준이었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좋아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건 이미 말했잖아. 다른 표현이 뭐 없나 생각하던 승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박사님만 보면…… 어.”
“섭니까?”
“…….”
“안서요?”
“당연히 서는데……. 전 조금 더 로맨틱한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도 너한테 서.”
승운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선다는 말이 로맨틱하지 않다는 건 취소다. 와, 자신한테 욕정 한다는 말 듣는 거 좋은 거였구나. 한편으론 역시 이건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서긴 하는데, 물론 좋은데. 그거 말고 더 큰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필요하다.
“지승운 씨.”
“네.”
“내 에스퍼.”
“…….”
그 말에 승운이 일순간 숨을 멈췄다. 재준이 “숨 쉬어요.” 말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나갔다. 승운은 이래도 되는 건가 고민했다. 엉망으로 치달아 더 이상 희망도 뭣도 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삶에 갑자기 찾아온 빛을 그냥 맞이해도 되는 걸까.
사실 빛이라곤 닫지 않을 것 같아 온기만 있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제한을 걸었지만 빛이 자신을 삶으로 이끌고 행복까지 얹어주다니.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독립군이었던 걸까.
승운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좋아하는 사람과 아침을 함께 하다니. 심지어 그 사람이 제 가이드이고 제 페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진짜 나 죽은 거 아니지? 매일 매일이 꿈같다.
재준은 버터 바른 빵을 우물거리며 고개 숙인 승운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촉촉하다. 원래도 안광이 있긴 했지만.
“울면 크리스마스에 선물 안줍니다.”
“……저 산타 안 믿어요.”
“산타 말고 내가 안 줄 거예요. 그러니까 웃어봐.”
역시 울먹이는 목소리다.
“지승운 씨는 울어도 예쁘긴 한데, 웃는 게 더 예쁘더라.”
재준의 말에 승운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응? 예쁜아.”
승운이 두 눈을 깜빡였다. 마치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천천히 내려간 속눈썹을 재준이 탐내듯 바라봤다. 진짜 예쁘네. 눈만 깜빡여도 예쁘다니, 어쩌지. 저런 건 혼자 보고 싶은데 S급 에스퍼라는 게 거의 공공재 취급이어서 그럴 수 없었다.
“많이 먹어요.”
재준은 괜히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말을 돌렸다.
“먹고 청소하자. 아까 보니까 정액이 여기저기 말라붙어있더라.”
재준이 말했다. 승운이 그런 재준을 바라보다 샐쭉 웃고는 “알았어요.” 말했다. 뭘 알았냐고 묻기도 전에 물이 바닥을 휩쓸었다. 재준이 놀라 발을 들어올렸다. 일순간에 바닥이 치워지더니 물기까지 싹 가져간 건지 보송해졌다.
“…….”
정말 청소하기 좋은 능력이었다.
“밖에도 치웠어요.”
“잘했어요.”
“예뻐요?”
“예.”
“예뻐해 줄 거예요?”
“밥 잘 먹으면.”
그 말에 승운이 재빨리 빵을 들어올렸다. 재준이 천천히 먹으라고 말했다. 아닌 것 같은데 아이 같은 느낌도 있었다.
재준이 머그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실 얼마 전에 파일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중요한 파일이에요. 그런데 그녀의 랩탑에서 디지털 화 된 제 파일을 찾았다는군요. 문제는 디지털 파일은 얼마든지 복제가 된다는 거죠.”
파일이라. 승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재준이 물었다.
“찾아 보셨다는 건 뭡니까?”
“죽은 모니카 살레. 조사해보니 싱가포르 출신이 아닙니다. 우즈벡 출신이에요. 원래 성은 에소노프. 가족 중에 외교관이 있더군요. 원래는 고급 카펫을 만드는 집안이던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보원이 있으니까요.”
“해외에도?”
“연관된 기관도 있죠. 적어도 IPMC보다는 정보가 빠를 겁니다.”
IPMC가 안다고 하더라도 재준에게 정보를 공개해 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알기 위해선 다른 곳을 거쳐야 할 텐데 그쪽이 그 단체에 정보를 얼마나 줄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승운이라면 조금 수고를 곁들인다면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모니카 에소노프.”
“러시아에서 공부했었습니다. 언어가 통하니까 문제없겠죠.”
“러시아란 말이죠.”
“재준 씨.”
승운의 부름에 재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박사님이 아니라 재준 씨라니. 말도 잘 듣네. 가까이 있으면 머리라도 쓰다듬을 텐데 거리가 좀 있었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돼요. 비밀로 해야만 하는 거라면 전 입 다물게요.”
“…….”
“만약 제가 정보원이라 믿지 못하겠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재준이 답했다.
“IPMC 쪽에서도 어떻게 대처를 할지 모릅니다. 그들이 취하는 행동에 따라 저도 선택을 할 겁니다. 말을 할지, 말지. 만약 그들이 그 정보를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쯤 되면 사실 공개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전 세계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주 일부에게만 알리겠지. 중요한 위치의 누군가들에게만.
“국가보다는 지승운 씨가 먼저 그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재준이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승운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
재준이 사는 집은 생각보다는 넓었다. 가구가 없어서 넓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옷 방과 서재를 두고도 손님방이 하나 남는다. 손님방이 있긴 하지만 이곳에 찾아온 손님은 아무도 없다는 말에 승운은 조금 안심했다.
평소에는 아껴 사용하던 능력을 청소하는데 펑펑 쓴 승운이 재준에게 들러붙어 입 맞춰 달라 안아 달라 응석을 부리자 재준은 승운을 고민하더니 승운을 제 가랑이 사이에 앉히고 보던 책을 다시 봤다.
이렇게 남의 무릎 사이에 앉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자세가 불편했다. 몸의 반절은 허공에 떠서 운동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재준의 가슴팍에 머리가 닿아있다. 색다른 경험에 승운이 재준을 올려다보자 “좁아요?” 하고 물었다.
“다음에 소파를 하나 사야겠습니다. 혼자 사는데다 누구를 초대하지 않아서 가구가 전부 일인용이거든요.”
“제가 소파 가져올게요.”
“지승운 씨 집에도 딱히…… 소파 하나 밖에 없던데요. 텅 비어 있는 게.”
정말 썰렁한 집이었다. 지금은 김태환 에스퍼만 같이 살고 있다지만 이전엔 거기서 넷이 살았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지 못하고 내내 침실에만 있었군. 다음에 갈 때 차근히 살펴봐야겠다고 재준이 생각하며 자신의 집을 바라봤다. 여기도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다. 의자는 많았지만, 소파처럼 편히 몸을 기댈 곳은 자신과 승운이 앉아있는 일인용 소파밖에 없었다. 튼튼한 편이긴 했지만 장정 둘이 앉으니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느껴졌다.
“그래도 제 집이 조금 더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건 아니었다. 승운은 여기나 거기나 비슷하다고 여겼다. 굳이 따지면…… 자신의 집은 미니멀리즘이라고 퉁 칠 수 있는 범주 내였지만, 이곳은 창고라는 느낌이 강하다.
“똑같은 의자를 사드리고 싶은데 지금 쓰는 건 단종 돼서요. 동일한 일인용 소파를 두개 사던가, 아니면 이걸 서재로 옮기고 둘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소파를 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책을 덮고 승운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팔을 뻗은 뒤 툭툭 쳤다.
“무거울 텐데요.”
“원래 사람 머리통은 무겁습니다.”
사실 맨 바닥에 눕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침대로 가서 누웠다간 대낮부터 옷을 벗길 것 같았다. 싫은 건 아니지만 몸에도 휴식이 필요했다. 승운이 재준의 팔을 베고 누웠다. 일부러 무겁지 않도록 목에 힘을 주자 재준이 승운의 머리통을 꾹 눌렀다. 결국 승운이 그대로 재준의 팔에 기댔다.
아무 무늬 없는 천장이 보인다.
“지승운 씨나 저나 덩치가 있으니 큰 걸로 사야겠어요.”
“가죽 소파로 살까요?”
승운이 말했다. 좋은 걸로 하나 사서 오래오래 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이 집에는 그게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가죽소파라면 표면에 사용했던 흔적이 오랫동안 남아있겠지.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함께 하고 싶다. 재준이 고개를 돌려 승운을 바라봤다.
“왜요?”
“같은 생각을 하나 싶어서.”
같이 살고 싶다고?
“역시 천이면 섹스하기 좀 그렇죠?”
“…….”
딱히 생각이 겹친 건 아니었다. 천이어도…… 정액이나 다른 체액 정도는 금세 지울 수 있었다. 물론 지승운은 자신의 능력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특히나 힘을 조절하기 쉽지 않을 때는 오히려 일반인처럼 조심스레 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필요 없다. 재준이 있으니까.
“제가 밝혀서 싫습니까?”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저도 밝히는 지승운 씨가 좋습니다.”
야해. 멋있어. 거기다 귀엽기까지 하다. 승운이 그대로 재준을 끌어안았다. 제 팔을 내어주다 졸지에 승운의 품에 안긴 재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대로 승운의 등을 토닥였다. 승운이 말했다.
“지금 순간이 영원하면 좋겠어요.”
“응. 나도 그래요.”
***
‘S급 에스퍼 지승운, 가이드 찾다!’
토요일 오후에 올라온 기사였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 뜬 기사는 결국 저녁이 되어서야 뉴스에 나왔지만 재준은 몰랐다. 그의 집에는 TV가 없다. 마찬가지로 주말 내내 재준의 집에 있었던 승운 역시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김태환과 이경원, 예지의 연락을 통해 알게 된 두 사람은 함께 기사를 봤고 별거 없다는 결론을 지었다.
등장한 건 그의 가이드가 높은 등급일 것이란 추정과 김씨라는 것뿐이었다.
승운이 들고 있는 패드에 머리를 들이민 재준은 가만히 기사를 읽다가 말했다.
“딱히 문제 될 거 없죠?”
물음에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준이 기분 나쁘지 않다면 자신도 상관없었다. 가이드를 찾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내부의 정보가 새어나갔다니, 그건 좀 의외였다. 이 정도라면 뭘 제대로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이네요. 센터는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어서요.”
“이쪽도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보니 별다른 일은 없을 겁니다. 방송국이나 기자가 찾아오기 힘들거든요.”
“그래요?”
“예. 그들이 찾아오기 쉬웠으면 이미 정보들이 다 새어나갔겠죠. 더불어 형질이상자들의 천국의 실태니 뭐니 해서 각종 사진들이 올라왔을 거고.”
그렇지. 여기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외부에 퍼진다면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을 것이다. 재준이 이어 “덕분에 저희들도 연구하는데 편합니다. 극비사항이 많아서.” 하고 말했다.
재준이 다시 패드에 시선을 줬다. 기사 속에는 지승운의 사진이 담겨있다. 어디에서 뭘 하다 찍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에스퍼 전투복을 입은 지승운이 헬멧을 한 손에 들고 땀을 닦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은 모습을 바라보던 재준은 자신의 옆에 있는 승운을 봤다. 승운이 왜 그러냐는 듯 웃어보이자 재준이 고개를 젓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불편한 거 있어요?”
“아뇨, 지승운 씨가 예뻐서.”
생경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뜬금없긴 했다. 자기가 예쁜 게 뭔가 문제가 되기라도 하는 건가? 표정이 불편해 보인다.
“근데 그걸 굳이 말하지 않고 부정하는 스스로에게 약간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원래 연인 관계는 솔직해야하는데.”
“…….”
“하지만 예쁘다고 느낄 때마다 예쁘다고 말해주는 건 부담스러울 테니까요.”
역시 너무 솔직해. 지승운에게 취향이라는 건 딱히 좋아하지 않았지만 보편적으로 조금 밀당을 하는 것을 선호하듯이 자신도 그쪽이 아닐까 했는데, 솔직한 게 훨씬 좋은 것 같았다. 사실 솔직하게 좋은 건지 현재준이라서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근데 이 윤곽은 누굴까요?” 재준이 재차 물었다.
“글쎄요.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데.”
승운이 바라봤다. 그냥 랜덤한 사람을 썼을 수도 있지만 묘하게 익숙하다.
“이경원인가?”
아무리 봐도 이경원 박사는 아닌 것 같은데. 뭐 크게 중요한건 아니었다. 재준은 그냥 의미 없는 이미지인가보다 답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진동이 와서 보니 메일이 와 있었다. 메일을 열자 별로 내키지 않은 내용의 단문이 있다. 승운이 “무슨 일 있어요?” 물었다. 재준이 승운을 가만히 바라봤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짐짓 심각한 얼굴에 승운이 걱정하는 듯하자 재준이 “지승운 씨.” 하고 불렀다.
“내일 출근 하자고 하면 싫어할 겁니까?”
“상관은 없는데.”
“그럼 저와 그슨대를 보러 가죠.”
“흡혈 괴수종 말고요?”
“예, 보여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
날씨가 금세 선선해졌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로즈마리 차 하나를 사서 차에 탄 재준은 승운의 말에 안전벨트를 찼다. 사람이 거의 없어 뻥 뚫린 2차로를 운전하는 것이 왠지 데이트 하러 가는 드라이브 같아서 승운은 헤실 웃었다.
제7센터는 한산했다. 당직자 몇 명만 머물 뿐이었다. 주말이니 다들 바다에 갔겠지. 아직 해변은 개장중이다. 그게 아니라면 서로 들러붙어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운동을 하고 있겠지.
이곳의 에스퍼나 가이드들의 삶은 그게 그거였다. 뭐, 중요한 건 가이딩이니까. 지승운도 그랬다. 갑작스럽게 출동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주말 대부분은 그저 그런 가이드들과 보냈었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삶을 살게 될 거라곤.
연구소 앞에 주차한 승운이 먼저 내려 차 문을 열었다. 재준은 그럴 필요 없다는 얼굴로 안전벨트를 풀고 커피를 승운에게 건넸다. 도중에 스치듯 손가락이 얽혔다. 닿기만 해도 가슴 한 구석에 아린 감각이 치밀었다. 이 순간이 날아갈까 봐 두려우면서 좋아서 어쩔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재준이 출입카드를 꺼내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의 연구소에도 당직자는 있었지만 대체로는 조용했다. 승운은 자연스럽게 재준의 뒤를 따랐다. 그의 연구실 앞에서 재준은 다시 출입카드로 문을 열었다.
평소와 같은 재준이었다.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 두꺼운 안경이. 하지만 가운을 걸치지 않고 평상복을 입고 있는 모습에 뭔가 동했다. 왜 이렇게 아래가 당기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하자고 하면 안 되겠지. 승운이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CCTV가 많다. 적어도 막힌 벽이 있으면 좋을 텐데 전부 유리벽이었다. 아쉬웠다.
그래, 직장에서 그러는 건 좀 그렇지. 나름 상식인 행세를 한 승운은 더 깊은 문으로 다가서는 재준을 바라봤다. 철문이다.
승운도 한번 저 아래로 내려가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슨대를 보기 위해서였다.
철문을 열자마자 나오는 계단을 내려가면, 방이 연결된 복도가 나온다. 계단을 내려가서 얼핏 지하처럼 느껴지지만 지상 층에 자리한 창문 없는 복도는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그저 푸른 형광등만이 갈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재준이 사체 안치실로 들어갔다. 괴수용이기 때문에 규모가 꽤 컸다. 그 중 제일 작은 곳에 그슨대의 시체가 있었다. 재준이 그슨대의 시체를 꺼냈다.
재준과 승운이 그슨대를 내려다봤다. 마치 미라 같은 형상이었다. 원래 얼굴이 어떤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비쩍 마른 것은 얼마 전까지 살아있었던 것의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재준이 라텍스 장갑을 끼며 승운에게도 장갑을 넘겼다.
“수분을 싹 날려줘서 보관이 용이했습니다. 피가 없는 건 아쉽지만, 다른 그슨대의 피를 받아왔으니까요.”
“받아왔어요?”
“유 연구원이.”
“그때 잔다르크 같았어요.”
“저는 들라크루아를 생각했죠. 그림.”
아, 그 국기를 들고 앞서는 여성. 승운이 그림을 떠올렸다. 대충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만 정확히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그림과 얼마 전의 유예지를 떠올려보니 확실히 비슷했다. 그녀의 손에는 깃발 대신 마대자루가 들려있었다.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들고 행패를 부리며 흡혈괴수종의 시체를 탈환하던 예지의 모습은 확실히 전사 같았다.
“저번에 말했던 것 같지만, 멜라니 박사님이 몇 년 전 공격당했습니다.”
재준이 말했다.
“인간형 괴수종으로 추정됩니다.”
승운이 눈앞에 있는 그슨대를 바라봤다.
“사실 저는 그 흡혈 괴수종을 봤을 때, 그녀가 멜라니 라제쉬 박사를 공격한 에스퍼가 아닐까 했습니다.”
“라제쉬 박사님.”
“하지만 시어샤 코리건이 아니라고 대답해주더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승운이 물었다. 재준은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물어보라는 얼굴을 했다.
“시어샤 코리건, 그러니까 IPMC의 사람과 어떻게 아는 겁니까? 박사님도, 그리고 그 멜라니 라제쉬 박사님도요.”
“시어샤 코리건은 멜라니 라제쉬의 여동생입니다. 원래 멜라니 코리건이었어요. 아이리쉬. 괴수학회와 IPMC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데다 멜라니 박사님 또한 에스퍼거든요. 한국의 경우 북한 때문에 섬처럼 고립되다보니 아무래도 거리가 있긴 하지만, IPMC는 유렵연합과 비슷합니다. 서로 경계가 어느 정도 풀어져있죠. 다들 가까우니까요.”
그런가. 사실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한국의 이능력자들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승운이야 그쪽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경원이 하는 말로는 대충 에스퍼나 가이드로 잘 발현되는 유전자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형제나 가족 중에 형질이상자로 발현한 이가 있으면 그 집에서 줄줄이 나올 수 있다던가. 지승운도 그랬고, 이경원도 그랬다.
“멜라니 라제쉬면 박사님의 전공 교수님이셨나요?”
“아뇨. 시리예의 전공 교수님입니다. 저는 리처드 라제쉬 박사님께 배웠습니다. 분야가 조금 달라요.”
“이번엔 오시지 않았죠.”
“멜라니가 병상에 있어서 멀리 다니시지 않습니다. 이번 학술회가 연말에 유럽에서 열리는 것으로 밀렸으니 아마 그때 볼 수 있을 겁니다.”
괴수학자들은 모두 에스퍼의 경호를 받는다. 더불어 재준은 가이드인데다 제 페어 에스퍼까지 있으니, 무조건 승운이 함께 갈 것이다. 국가에선 내켜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박사님.”
승운이 말했다. 그의 시선이 그슨대의 팔뚝에 가 있었다. 어린 아이에게 문신이라. 이상한 것이었다.
“그 여자가 저한테 너도 이쪽이라고 말했습니다.”
흡혈괴수종이랑 대화를 했었나? 재준이 승운 쪽으로 몸을 돌려 바라봤다. 지승운은 “그리고.” 하며 덧붙였다. 그때도 이 자리였다. 승운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재준을 좋아한다고 여겼던 순간부터 그가 했던 말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당시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박사님은 그때 저한테 삼켜지지 말라고 했죠.”
그 전에 현재준은 이 그슨대를 보며 어둠에 삼켜졌다는 말을 했었다. 그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말이다. 어차피 그슨대는 죽었고,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과 함께, 얼마 전에 죽인 인간형 흡혈 괴수종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자 이야기가 하나로 귀결된다.
“혹시 제가 생각하는 게 맞습니까?”
에스퍼는 괴수인가?
혹은 에스퍼가 괴수가 되나?
재준은 승운을 바라봤다. 회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재준이 승운의 손을 잡았다. 승운이 놀라 흠칫했지만 재준은 승운을 바라보거나 놀란 얼굴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의 손을 잡고 문지르다 깍지를 꼈다.
“지승운 씨.”
승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가 그때 이 그슨대에게 고문흔이 있다는 말을 한 것 기억하십니까?”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슨대는 이전에 호모 트란스포르미스 E. 였습니다.”
에스퍼는 이후에 괴수가 된다.
“이 분은.”
어떻게? 왜?
“일제강점기의.”
1981년 남프랑스 페르피냥에서 기록상 첫 번째 에스퍼가 나타났다. 하지만, 사실 카트린 두자당은 첫 번째 에스퍼가 아니다.
“에스퍼입니다.”
괴수는 오랫동안 인간들과 함께 했다.
늑대인간, 좀비, 그 외 알 수 없는 형태의 괴물들. 한국에서는 은요불, 그슨새, 야광귀, 어둑시니 등이 있다. 그들은 은연중에 세상에 숨어들어 인간을 해쳤고 때로는 인간에게 사냥을 당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인간들끼리 싸움을 하느라 인간들은 그 이외의 적을 파악하지 못했다.
괴수들.
“……에스퍼라고요.”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괴수는 훨씬 오래 전에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조선이나 고려시대에도 있었고 남북국시대에도 있었고 삼국시대에도 있었죠.”
재준이 말했다.
정확히는 언제부터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역사의 기록에 있는 도깨비, 요괴 역시도 지금 보면 괴수로 분류한다.
물론 아직 한국의 괴수학자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다 그들 역시 존재가 희귀해 일일이 구분하거나 분류할 수 없으며 학명 역시 짓기 애매했다. 그나마 널리 유명한 괴수들은 나름대로의 구분법이 있었지만 세상에는 더 많은 괴수들이 존재한다.
그래도 그들의 개체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1970년이 되기 전까지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 밝혀진 것은 그것이 태양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추측성의 문장을 보면 알듯이, 아직 괴수에 대해 밝혀진 것은 없다. 또한 우리는 태양을 전부 알지 않는다. 하지만 태양이 에스퍼와 가이드를 만들어냈다.
핵융합을 하는 별, 한때의 신.
옛날에는 하늘과 태양과 신을 구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과 태양은 신의 위치에 있었다. 실제로도 태양은 우리 생활의 중심이다. 태양계의 항성은 태양뿐이며,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다. 태양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멈춘다. 대기가 사라지고, 바람도 사라지고, 비도 내리지 않으며, 암흑에 잠겨 기온이 떨어지고 식물은 사멸하며 산소가 다시 만들어질 일은 없다. 지구 같은 혹성에게 태양은 없어선 안 될 존재다.
그러나 때때로 혹성은 항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혹성은 광대한 우주를 홀로 부유하며 서서히 죽어간다.
그래서 멜라니 라제쉬는 가이드를 항성, 에스퍼를 혹성이라 말했다.
가이드, 나의 태양.
그리고 에스퍼, 내 별.
“이 그슨대는 독립군이었습니다.”
재준이 말하며 그슨대의 팔뚝을 가리켰다. 문신자국이다. 아주 오래된.
“부병자자 입니다.”
승운은 그게 뭐냐는 얼굴로 재준을 바라봤다.
“조선 군인의 문신 방식입니다. 저도 확실치 않아 인터넷에서 검색해봤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재준이 팔뚝의 말라버린 살을 늘렸다. 그래봤자 늘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흔적이 보였다. 글씨는 아니었다. 어떤 문양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먹이 많이 번져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군번줄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되겠군요. 실 끝에 먹물을 묻혀 살갗을 통과시키는 점상문신인데, 집안의 남자가 전장으로 나가기 전날 가족이 문신을 새겨주는 겁니다.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죠. 전쟁 통에 이산가족이 생겼을 때는 나중에 서로를 찾기 위해 새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6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하더군요.”
고문흔을 봤을 땐 설마 했는데, 몸에 먹이 새겨진 걸 보자 거의 확신했다. 사진을 찍어 알 만한 사람들을 수소문해 건너건너 사학자에게 닿았을 때 그가 ‘독립군이었던 것 같습니다.’ 라며 이름을 알아다 주겠다고 했지만 재준은 거절했다. 그 말로가 괴수로 남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승운은 문신의 자국을 계속 바라봤다. 관심이 있나? 그러고 보면 에스퍼들 중에서는 문신을 즐겨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자기가 죽인 괴수의 숫자를 새기거나, 혹은 괴수의 모습, 자기의 부대 문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거에 비하면 지승운의 몸은 흠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일반 사람들이 하는 것도 있습니다. 연인끼리, 친구끼리, 그 외 뜻이 맞는 사람끼리 결의를 하기 위해 서로의 팔뚝에 찔러 먹칠을 하는데 푸르기가 멍든 것 같아 연비라고 부르죠.”
“나중에 저랑 같이 문신 하실래요? 같은 문양으로.”
승운이 말했다.
가끔은 사고회로가 참 특이하게 튀는 것 같단 말야. 재준이 생각했다. 하지만 승운의 시선이 뭔가 갈구하는 것 같아 “모양 생각해두세요.” 라고 말했다.
그 대답에 승운이 웃어보였다.
모양이라. 어떤 게 좋을까. 의미가 있는 것이면 좋겠다.
아니, 모양 말고 이름도 좋을 것 같았다. 혹시 죽어도, 다른 곳에서 임무를 하다 죽어도 그의 곁으로 돌아오고 싶다. 어쩌면 자신에게만 문신을 새겨도 될지 모르겠다. 재준이 죽는다면, 자신 역시 살지 못할 테니. 하지만 자신이 죽는다면 재준은 끝까지 살아줬으면 좋겠다.
“오래 산 괴수는 천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흡혈 괴수종— 그러니까 드라큘라 백작 역시도 괴수의 일종이죠.”
한때는 그저 신화, 민간전설로 남았던 이들은 괴수의 존재가 밝혀지고 나서야 실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가 괴수생태학을 전공한 걸 알고 있습니까?”
“말하시진 않으셨지만.”
파일에서 읽었다. 이름, 나이, 생년월일부터 그의 가족관계와 어린 시절, 학창시절에 대한 모든 정보가 있는 것. 중간 중간 빈 정보는 그가 공부를 할 때였지만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도 웬만한 정보는 기록되어있다.
이제 그 역시 이능력 정보원으로 등록이 되어 그간의 자료들이 모두 폐기되겠지만, 지승운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에스퍼 중에서 극히 일부. 폭주에 이지를 상실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이렇게 인간종 괴수가 됩니다. 저희는 임의로 그걸 2차 각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인간종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이나 식물 역시, 혹은 어떠한 공간 역시 에스퍼처럼 특이한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1차 각성입니다. 인간과 그런 괴수의 차이점은, 인간은 각성을 하더라도 육체가 변하지 않지만 인간 이외의 괴수들은 육체가 변이한다는 겁니다.”
DMZ에 괴수가 많은 것은 그곳에 야생동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괴수의 비중은 채 1%도 되지 않아야 했다. 지금 DMZ의 괴수 비중은 9.4%다. 도중에 괴수화 되며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인간 중에서도 각성 도중에 죽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각성열인지, 아니면 질병으로 인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만약 재준이 그때 깨어나지 않았다면, 다들 그를 이질에 걸려 죽은 괴수학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능력이 쌓이고 쌓여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순간 각성을 하여 우리가 아는 괴수화가 됩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인간을 공격하고 제 주위에 있는 것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죠.”
그러나 DMZ에 있는 괴수들의 폭주 빈도는 낮은 편이다. 분명 이 DMZ 어딘가에 괴수의 2차 각성을 막는 것이 있다. 재준은 그것을 임의로 내분비교란물질 ‘이그노라빌리스’ 라고 이름 지었다. 찾아야하는, 아직 찾지 못하는 미지의 물질. 말하자면 동식물에게도 ‘가이딩’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 어쩌면 이것을 찾아내면 인류에게도 적용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은 가이드의 호르몬— 내분비교란물질이 인간 이외의 괴수종에게 적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실험은 계속 실패하고 있다. 이제 와서 본다면, 재준은 자신의 피가 꽤 유용할 거라 생각했다. 호르몬 수치가 그렇게 높은 가이드는 한국에 얼마 없을 테니까.
이경원 박사도 자신이 제일 높다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폭주한 에스퍼는 죽거나 괴수가 됩니다. 대부분은 죽죠. 하지만 이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괴수가 되어 더 이상 가이드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괴수라고 부르지만.”
다만 재준은 이 말을 승운에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선 완전한 에스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확히는 이 말을.
“가이드가 필요 없는 에스퍼.”
가이드와의 매칭이 좋지 않았던 지승운이다. 그가 가이드를 좋아할까? 그건 모르겠다. 자신을 좋아하는가 묻는다면, 재준은 승운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가이드가 없다면, 없어도 된다면, 그것이 더 낫다고 여기지 않을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겁니다.”
두렵다. 내 별이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에스퍼는 가이드를 갈구하고 그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며 매달리지만,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면 가이드들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까? 이전에 재준이 그런 질문을 하자 멜라니 라제쉬는 웃어보였다.
‘혹성은 항성을 떠나길 원하지 않아.’
괴수는 항성을 잃어버린 혹성, 혹은 혜성과 같다고 했다. 긴 꼬리를 달고 여기저기 부딪히며 다른 이들을 파괴하는.
하지만 혜성이 되길 원하는 별도 있지 않을까요, 박사님?
“하지만 그렇게 자유로워져도 괴수들은 가이드에 대한 집착을 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들과 대화해본 적이 없어서. 아마 멜라니 박사님은 아시겠죠. 그녀를 그렇게 만든 괴수와 대화를 했다고 하셨으니까요. 자세히 물어보려 했지만 깨어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멜라니 라제쉬가 괴수에게 공격당한 후, 리처드 라제쉬는 삶의 희망을 잃었다.
그는 더 이상 어떠한 연구도 하지 않고 스코틀랜드의 작은 저택의 방에서 의료기기에 둘러싸인 멜라니 라제쉬만을 지킨다. 반사되는 별이 없다면 태양 역시 제 빛을 보지 못하겠지.
재준은 죽어가는 태양을 안다.
“괴수화 된 에스퍼는 충동적이고 자제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사회성도 함께 낮아져서 집단을 이루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지승운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랫동안 인간들과 함께 했죠.”
그저 말하는 재준을 바라봤을 뿐이다. 내려앉은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되지 않는다.
“늑대인간, 좀비, 흡혈귀, 그 외 할 수 없는 형태의 괴물들. 은요불, 그슨새, 그슨대, 야광귀, 어둑시니, 수살귀, 도깨비.”
무섭다.
사실은 허튼 짓을 한 것 일까봐. 이런 말을 해서. 자신이 필요 없다고 할까봐.
가이드임을 밝힐 때보다 더 무섭다. 이 사실은 아주 나중에 밝혀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까지 친밀해지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모니카 살레— 모니카 에소노프가 빼어간 파일에 이 내용이 있다. 그녀를 죽인 이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재준은 이제야 시리예가 했던 말을 이해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더라도.’
얼마나 무서웠을까.
‘더 이상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더라도.’
“전.”
재준은 차가워진 자신의 손을 옷에 문질렀다. 온기가 빨려나가는 기분이다. 승운은 그런 재준의 손을 맞잡았다. 마치 그가 추운 것을 느끼기라도 하듯.
재준이 고개를 들어 승운을 바라봤다. 차갑다고 생각했던 눈인데 생각보다 따스함이 담긴 것 같았다. 하지만 무서워 시선을 피하게 된다.
“전 인간을 괴수로 만드는 법을 압니다.”
재준은 고개를 숙인 채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내뱉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에스퍼 형질돌연변이를 괴수로 만들 수 있는 법을 압니다. 그러기 위해선 특정 조건이 필요한데, 만들 수는 있어도 정확히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기전을 밝혀내고 있죠. 목적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자 승운 역시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목적은 딱히 없습니다. 저는 연구를 하는 것뿐이니까요. 그냥 해야 할 일입니다. 학자로서.”
재준이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이것이 세상에 기여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저는 만족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승운과 눈이 마주친다. 색이 옅은 눈동자에 자신이 비친다. 어떤 표정인지 보이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재준이 이어 말했다.
“다만 제 목적이 순수한 연구라고 하더라도, 세상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압니다. 이 방법을 원하는 사람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좋지만, 슬프게도 그렇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어떠한 것은 악용되고 어떠한 것은 오용되고 누군가는 피해를 입고 누군가는 이익을 취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별거 아닌 사실이 누군가에겐 돈이 되고 누군가에겐 이득이 된다.
“그리고 이 방법을 원하는 인간종 괴수와, 원하지 않는 인간종 괴수도 있을 겁니다.”
하물며 이런 이야기라니.
“이 실험의 후원자인 로마클럽은 인간 기업가들이 만들었습니다만, 실질적인 돈은 다른 집단에서 나온다더군요. 저나 IPMC는 그들을 직접 볼 수 없지만 로마 클럽에서는 그들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틈과 사회 저변에 그들이 있는지도 모르겠죠.”
위험하다.
“지승운 씨.”
승운은 재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어서 어떤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제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지승운 씨가 인간으로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한 마디 한 마디가 힘겹게 시작된 느낌이다.
“제 옆에서, 저와 함께 늙어가면서요.”
승운은 재준의 손을 꽉 잡았다. 손에 핏기가 없다. 실제로 체온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았다.
“가이드는 인간으로 죽지만 에스퍼는…….”
표정은 그대로여도 신체 반응은 달랐다.
“에스퍼는 인간으로 죽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더니.
“하지만, 괴수의 삶은 가이드의 삶과 다르게 흐르죠.”
폭주한 에스퍼는 죽어서 제 시체도 못 남기고 괴수가 된다는 말이 왠지 모르게 웃겨 승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인간 같지 않아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완전히 뒤바뀌는 이야기였다.
“저는 지승운 씨가 그냥 형질돌연변이로. 저와 평생 함께 하다가, 인간으로 죽었으면 합니다.”
재준은 더 이상 승운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혼자 남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고, 또 외로움에 사무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에스퍼도 혼자 남겠지만, 가이드 역시 혼자 남을 것이다.
죽어가는 태양을 안다. 혹성은 항성이 없으면 죽는다고 하지만, 재준은 잘 모르겠다. 가이드들은 에스퍼의 폭주를 막기 위해 발현했다. 만약 그들이 소중하지 않다면 발현 따위를 해서 그들을 안정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에스퍼는 가이드가 없으면 죽는다는 것에 입건하여 그들만이 고통 받는다 하지만, 제 에스퍼를 잃어버린 가이드는? 제 형질을 바꿔 지키려고 했던 이를 잃어버린다면?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가이드도 에스퍼가 필요하다. 아직 그 기전을 밝혀내지 못했을 뿐, 짝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한 날 한 시에 죽는 것은 큰 희망이니 포기하고.”
이미 재준은 승운을 선택했다. 그가 만약 다른 선택을 하게 되어 자신이 리처드 라제쉬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홀로 남은 가이드가 된다면.
감내해야지.
하지만 바라는 미래가 아니다.
“무섭네요, 박사님.”
승운이 말했다. 재준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라도 죽어서, 폭주해서 괴수가 된다면 무서울 것 같았다. 재준이 입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위로의 말? 유감이라는 말? 뭐든 그런 말을 해서 지승운을 안심시켜야한다고 생각했다. 재준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승운이 빨랐다.
“너무 무서워요. 가이드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몸이라니.”
“그—….”
“정말 끔찍해요.”
그렇게 말하는 승운의 손이 뜨거웠다. 재준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가 들어올렸다. 잡고 있는 손이 떨린다.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인지, 지승운의 손이 떨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박사님, 가이드 없이 사는 건요.”
승운의 얼굴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매끈했지만, 왠지 일그러져보였다.
“당장 숨통이 막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력한 거랑 비슷해요. 그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죠. 곧 죽을 것 같은 감각이요, 보통은 공황장애와 비슷한 수준이래요. 에스퍼들이 튼튼해서 버티는 거지, 매번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살죠. 가이드가 있는 에스퍼들도 마찬가지에요, 박사님. 하루 종일 불안에 시달리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승운은 그랬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장해도 신체반응은 다르다.
“죽을까봐, 수치를 보고 내 몸을 살펴요. 매번 집착하며 자신이 통제 가능한 상태를 보는 거죠. 심박, 심전도, 체온, 혈압, 에너지. 모든 것이 정상범위인지 강박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정상화시키기 위해 내키지도 않는 이들과 몸을 섞죠.”
“…….”
“자다가 조용히 죽을 것 같아서 잠을 못잘 때도 있어요. 오늘 밤에 자다가 폭주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서를 써두죠. 내 몸에 내가 갇혀 죽을까봐. 내 몸을 관짝으로 삼을까봐. 매일매일 아슬아슬하게 옅은 숨을 내쉬며 사는 거예요. 내 가이드를 기다리며.”
지승운의 목소리가 떨린다.
“에스퍼는 가이드 없이 살 수 없어요. 그들이 에스퍼였다면요, 박사님.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죽지 않는 거지.”
아마 저 떨리는 손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승운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요, 박사님.”
승운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는다.
“죽은 상태로 살아가는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인데도 그의 생각을 읽을 것만 같았다. 가이드가 없던 당시를 떠올리는 거겠지. 하루하루 숨통이 틀어 막히고 죽을 것 같은데 그 누구도 그를 제어할 수 없어서, 사막의 물 한 방울을 찾아 끊임없는 고행 길을 걷는 것처럼.
“제가.”
재준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떠한 말이라도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박사님.”
승운은 그대로 재준을 끌어안았다. 조금은 뜨거운 체온이 안정이 되는 기분이다. 재준도 승운을 안았다. 서로의 체격이 비슷해 누가 누군가에게 안긴 상태가 아니라 동등하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제가 지승운 씨를.”
“네, 박사님. 절 살려주세요.”
마치 재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차린 것처럼 승운은 대답했다.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곁에서, 평생.”
사실 승운은 재준이 먼저 그 말을 해줘서 좋았다.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그가 가이드라는 걸 모를 시절부터, 그가 구원자이길 원했을 때부터. 함께 하기를. 평생. 죽을 때까지.
“박사님 말대로, 같이 늙어가다가 인간으로 죽어요. 함께. 한날 한 시면 더 좋고.”
그렇게 말하며 승운은 재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건조한 살결과 특유의 체향이 느껴진다. 이 냄새에 얼마나 긴장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 무서움은 보편적인 무서움과 다른 방향이었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까봐 두렵고 잃을까봐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이제 현재준은 자신의 것이다.
더 이상 무서워 할 필요가 없었다.
재준이 승운에게 둘렀던 팔을 거두고 그를 밀어냈다. 승운이 왜 그러냐는 듯 재준을 바라봤다.
“닿아서요.”
“……죄송.”
“아뇨, 저도 좋습니다. 부적절한 장소가 아니면 응해주겠는데요. 그런데 원래 그렇게 잘 섭니까?”
“……박사님이라 그런 거예요.”
“오늘은 몸에 좋은 거 먹어야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떨어진 재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웃는 모습을 보니까 좋네. 승운이 생각하는데 재준이 안경을 벗고 다가왔다. 그러고는 입을 살짝 맞춘 뒤 “이걸로 참으세요.” 말하고 다시 안경을 쓴다.
“제가 말한 이 사실은— 그러니까 괴수가 에스퍼였다는 사실은 내일 자정에 전 세계의 지도층에 밝혀질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것을 숨기려고 할 겁니다.”
승운도 재준의 말에 동의했다. 파급효과가 큰 이야기일 것이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가 가지는 외교적 가치와 국격이 뒤바뀔 수도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로 남겨두겠죠. 같은 형질이상자라고 해도 아주 일부만 이 사실을 알 겁니다.”
최고의 에스퍼들을 가진 곳에서, 최고의 예비 괴수를 가진 곳으로. 뭐, 일단 미국이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숨기는 게 더 가치가 있는 이야기니까요.”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숨겨야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죠.”
“예. 그렇죠. 다만…….”
재준이 이어 말했다.
“앞으로 좀 힘드실 겁니다.”
“왜요? 괴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아뇨, 그거 말고.”
재준이 말했다. 물론 괴수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은 두렵긴 하지만, 에스퍼들은 지속적인 가이딩이 있으면 괴수화되지 않는다. 그건 크게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 보고서에 제 이름이 적혀있거든요.”
정확히는 네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라제쉬 박사 부부와 시리예, 그리고 재준의 이름이.
다행인건 이 중 세 사람이 가이드라는 것이다. 괴수들은 그들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괴수들이 가이드 박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야 있겠지만, 공격하려고 했다가도 멈출 수 있지. 하지만 인간들이라면. 호모 사피엔스라면 확실히 자신들을 죽일 수 있었다. 에스퍼나 괴수들이 가이드라는 이유로 살상을 거부한다면 군인들을 보내 살해를 하려 들 수도 있었다.
“전 이제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이들의 주적이 됐습니다. 언제 어떤 이들이 공격해올지 모르죠.”
“…….”
“군에서 총기를 받아와야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빌려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정보원도 총기 소유가 됩니다. 하나 신청하죠.”
승운이 말했다. 정보원에서 총기를 준다면 오히려 더 좋았다. 군에 이런 저런 것을 제출할 필요는 없으니까. 승운이 이어 말했다.
“그때 그슨대가 공격한 건.”
“아, 예. 하지만 그때는 누가 이 연구에 참여했는지 알지 못해서 무작위로 한 공격일 겁니다. 파일이 빠져나갔다면 아마 시리예로 특정이 됐을 테니 더 곤란하겠죠.”
그렇게 말한 재준은 예전에 잠깐 있었던 시베리아 연구소의 위치나 주변 환경을 떠올렸다. 사실 지금 그 연구소는 다른 이유로 위험했다.
시베리아 연구소가 러 정권과 상관없이 괴수학회 소속의 독단적인 곳이라고는 하지만 현재 주둔하는 국가가 야기한 대혼란과 제재, 안보 등이 얽혀 있는데다 화학원료나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 문제가 기후까지 연관되어있으니 애초에 그쪽에 계속 있는 것이 좋을지도 알 수 없다.
차라리 스칸디나비아 쪽으로 옮기는 게 나을 텐데, 그건 시리예의 일이었고 재준은 그녀에게 제안할 권한이 없다.
“그나마 그쪽은 시베리아에 있어서 누군가가 찾아들기 힘듭니다. 허허벌판에 있으니 외부인의 침입이 확연하게 보이고요. 여기도 DMZ라 힘들 겁니다. 북한이랑 가까워서 항만으로 접근하기도 어렵고, 항공도 애매하거든요. 서울에 있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서 죽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그래서 처음에 지승운이 자신을 경호하는 에스퍼라고 했을 때 정부가 이 사실을 알아차렸나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네가 있으니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승운은 재준의 말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예, 괜찮을 겁니다.” 하고 말했다.
“박사님한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
세상이 감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겉보기엔 바뀐 것이 없다. 지도층이 어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아래까지 그 이야기가 퍼지지는 않는다. 뉴스는 그것이 아니라 다른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지승운의 가이드가 누구인가.
이곳은 외부인이 출입하기 힘들기 때문에 기자들의 추측성 발언은 없지만, 같은 이능력자들 사이에서도 승운의 가이드에 대한 궁금증은 가시지 않는 듯 했다.
실제로 지승운의 시계는 그가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는 것을 반증해줬으나, 딱히 가이드가 보이지는 않았다. 지승운은 늘 그렇듯 괴수 연구소나 본관 어딘가에 처박혀있었고, 점심시간이나 한번 쯤 얼굴을 비쳤다.
“어떻게 걸린 거예요?” 김태환이 물었다.
“걸렸다기보단 그냥 추측성이잖아요. 이름도 나이도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
예지가 대답했다. 이 윤곽은 누구야? 그냥 아무나 갖다 썼나? 적어도 재준의 윤곽은 이러지 않았다. 진짜 재준이었다면 머리카락이 좀 더 지저분해보였겠지.
“지승운의 가이드, 20대 중반의 남성 김씨.”
“맞아 떨어지는 게 남성이라는 것 밖에 없는데?”
그렇게 말한 예지가 재준을 바라봤다. 온갖 뉴스와 커뮤니티에서 누구냐고 추측하는 저 남성은 지금 MKR종 화분 앞에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MKR종은 괴수종 중에서 유일하게 가이드의 에너지로 제 몸의 힘을 조절할 수 있는 종이다. 물론 일반 인간이나 에스퍼, 그리고 수많은 동물들도 제 힘으로 끌어들여 이런 저런 짓을 한다는 점에서 가이드를 딱히 구별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 행위가 본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나 폭주하는 괴수들 중에서 MKR종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
나타나면 몹시 무서울 것 같기도 했다.
MKR종의 기존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것을 매개로 다른 괴수와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면 괴수 사냥이나 약제 개발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
역시 그 희귀 괴수를 갖고 싶은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없겠지?
“근데 진짜 추측성이 많네요. 이거 박요한 말하는 거 아니에요? A급 가이드 아니냐고. 윤곽이 비슷하다는데.”
“걔요? 아직 살아있나?”
“모르겠는데. 근데 지금 평이 워낙 안 좋아서.”
“A급 가이드인데요?”
“우리가 아무리 가이드라고 하면 물고 빨고 한다지만, 한 짓이 있잖습니까. 그리고 대장을 건드렸다는 점에서 좀 그렇죠. 에스퍼 세계는 계급이 꽤 크게 작용하거든요. 약육강식이니까.”
“군대처럼 말이죠?”
“군대…… 랑은 다르죠. 거긴 상명하복이고. 우리는 말 그대로 약육강식이에요. 원래 이능청을 국방부에 넣으려다가 실패한 게 그것 때문이잖아요. 계급 높은 하급 에스퍼들 개같이 무시해서.”
“아.”
그런 의미구나. 예지가 확실하게 알아들었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야생의 세계구만. 심지어 야생의 세계는 늙으면 자리에서 내려오겠지만 한번 구성된 에스퍼의 에너지 레벨은 떨어지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왕좌를 유지하겠어.
유예지가 재준을 바라봤다. 지금 지승운은 일이 있어 잠시 본관에 있기 때문에 예지는 지승운을 타박하거나 그에게 날카로운 눈초리를 할 수 없었다. 그저 재준을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봤을 뿐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위험한 일은 덜하겠지. 그래, 그러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아침에 재준은 예지에게 인간종 괴수의 비밀을 알려줬다.
오늘 IPMC를 통해 특정 괴수학자들과 각국의 고위층 관료들에게 퍼진 이야기라며, 알고 있으라는 말을 곁들였다. 예지도 나름 짐작을 하는 것은 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의외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척 하고 있으라는 재준의 말에 예지는 입안이 꺼끌거림을 느꼈다. 이런 이야기를 도대체 누구에게 말 하겠어요.
그리고 부고 메일이 도착했다.
“모니카가 강도를 당했다네요.”
예지가 말했다. 재준도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모니카에 대한 것은 아무래도 비밀에 부쳐진 듯 했다.
“안 그래도 사람 얼마 없는 이 바닥에 이런 변고라니. 장례식에 가지도 못하겠네요.”
재준은 예지에게 모니카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리가 있으니까.”
시신은 미국에서 가져가나? 아니면 싱가포르? 우즈베키스탄? 러시아일까?
사실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왜 모니카가 그것을 빼돌렸고, 그걸 어디에다 넘겼는지.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재준이 파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건 그 일의 담당자가 할 일이었으니까. 재준이 할 것은 그저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연구를 이어나가는 것뿐이다.
***
일 때문에 오전 내내 사라졌던 지승운을 다시 만난 건 식당이었다. 아마 길드 화나 민영화 관련된 정보를 찾아다니는 듯 했다. 재준은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깊숙하게 묻지 않았다. 지승운도 마찬가지였다.
지승운은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었지만 오늘은 유독 그랬다. 가이드를 찾았다는 말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여나 그의 가이드가 이 자리를 함께 했을 거라 생각해서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보이는 건 평소와 같은 사람들뿐이다.
두 명의 괴수학자와 두 명의 에스퍼. 가이드는 없다. 그냥 평소처럼 일만 하는 건가 싶어 시선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곁눈질은 계속 됐다.
“오늘 하루 종일 시달렸겠습니다.”
재준이 말했다. 승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예지는 그런 두 사람을 낯선 얼굴로 바라봤다. 생각보다 담백했다. 이대로라면 재준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때 학술회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문다면 말이다. 에스퍼들은 딱히 입을 열지 않을 것이고, 괴수학자들도 그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칠 것이다. 군인들에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승운이 별 문제 없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 지승운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제 가이드에 대해 묻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그 날 차출된 에스퍼는 전부 제1센터에서 온 것이라 이곳에 재준이 가이드라는 것을 아는 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소문이 퍼질 수는 있지만, 애초에 김 씨라고 밝혀진 마당에 재준을 의심할리도 없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조금 있었다.
다른 새끼가 탐내면 어쩌지?
가라앉은 승운의 시선에 재준이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다.
얼굴을 밝혀서 다행이지. 게다가 저가 에스퍼 중에 제일 예쁘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른 이에게 갈 일은 드물다. 그래도 역시 각인은 해둬야 할까봐. 하자고 말하면 싫어하려나. 그것보다 각인 하는 방법은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이딩을 할 줄 아니까 그것도 알지 않을까 싶었지만, 승운도 그냥 그렇다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 각인 가이딩이 정확히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지승운 씨?”
“예, 박사님.”
“하실 말씀 있습니까?”
“식후에 이경원 에스퍼가 잠시 만남을 요청했습니다.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원 박사가 드디어 왔나보군. 이제 위쪽 일이 정리가 좀 됐나보다.
“예, 잘 다녀오세요.”
“아뇨, 박사님이요.”
“……아,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같이 오라고 했습니다.”
“…….”
재준이 입을 다물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인데도 당황한 모습이 보여 승운이 픽 웃었다. 그가 입모양으로 ‘매칭이요.’ 하고 말하자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하지 않았다. 계약서인가 뭔가 하는 서명도 하지 않았었고.
“천천히 드세요, 박사님.”
오늘 전부 끝내버릴 건가보군. 재준이 추측했다.
애석하게도 추측은 반절 정도만 맞았다.
식사 후 본청 앞의 잔디밭에서 노닥거리다가 이경원을 만났다. 한 손에 커피, 다른 손에 와플을 들고 있는 경원은 “요즘 공복혈당이 높아져서 걱정이야.” 라는 말을 했다. 재준의 시선이 와플로 향했다. 사과잼과 크림을 얇게 바른 옛날 길거리 와플 같은데, 저게 그의 혈당 상승에 일조를 하지 않았나 싶었다.
오후 한시가 되어서야 이경원은 일어나 슬렁슬렁 걸었다. 일하러 가보자는 말에 재준과 승운도 그의 뒤를 따랐다.
검진센터의 이경원이 쓰는 사무실에 들어서고 나서는 서명할 것들이 천지였다. 이경원은 눈앞에 있는 것들을 다 서명해야 한다며 가지고 왔다. 비밀서약서나 각서 등등도 포함되었다. 지승운이 서명해야 할 서류도 있었는데 재준이 해야 할 것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았다.
“무턱대고 하지 말고 제대로 읽어보고 하세요.”
“읽어본다 한들 어차피 서명해야 하는 건 동일하지 않습니까?”
“뭐, 그건 그렇죠.”
사실 확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불리한 것들은 없었다. 나름 이능청과 정보원은 재준의 편의를 봐줬다. 재준은 서명을 마친 계약서를 훑어봤다. 소문으로만 듣던 페어계약서도 있었다. 페어 해지하는 게 번거롭다 더니, 해지절차도 몇 페이지나 됐다. 어차피 해지할 일은 없으니 이 부분은 그냥 넘겼다.
“서명하시면서 박사님, 이거 하나만 확인해주세요.”
경원이 말하며 패드를 들고 왔다. 어디 있더라? 말하며 화면을 만지던 경원이 ‘이거요.’ 하고 재준 앞에 패드를 내려놨다.
“박사님, 혹시 이 사람 아십니까?”
사진이었다.
옅은 갈색의 짧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남자의 얼굴이 약간 붉다. 옷은 평범하게 정장이었다.
“박형기 박사 뒤를 밟다가 나온 사람입니다. IPMC쪽 사람인가 했더니 아니더라고요.”
경원이 이어 말했다. 사진의 구도가 몰래 찍은 것 같기는 했다. 서명을 끝낸 지승운이 재준의 뒤에 서서 사진을 내려다봤다. 그가 아는 얼굴 또한 아니었다.
“꽤 자주 접촉했습니다. 에스퍼나 가이드는 아닌 것 같은데, 해외 기업이나 길드인지, 아니면 괴수학계 사람인지 모르겠어서요. 출입국 기록을 파악하기엔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요.”
“이렇게 봐선 모르겠습니다만.”
재준이 답했다. 괴수학자들 중에서도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도 후배들을 다 알 수는 없었다. 나잇대라면, 늦은 시기에 공부를 하는 이들이 있으니 완전히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지만 괴수학자 중에 박형기 박사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할만한 사람은 없다. 특히나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는 쪽이라면.
“한번 알아보죠.”
그가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다면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 만약 아무도 모른다면, 적어도 그쪽을 배제하는 정도의 도움은 될 것이다. 엉뚱한 곳을 헤집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부탁합니다. 서명은 다 하셨습니까?”
경원의 말에 재준이 마지막 페이지에 서명을 한 뒤 서류들을 내밀었다. 경원은 재준과 승운이 서명한 서류를 챙긴 뒤 두 사람을 매칭 테스트 실로 먼저 보냈다. 재준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랐지만 승운은 워낙 자주 갔던 곳이라 제 집 드나드는 것처럼 테스트실로 재준을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기계가 있는 낯선 공간이 드러났다.
재준이 조금 어색하게 그 앞에 있었다. 승운은 그런 재준의 손을 잡았다.
“마지막이네요.”
승운이 말했다.
그동안 했던 수많은 매칭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는 듯 했다. 어릴 때부터 이것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희망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으로 매번 희망을 가지고 테스트를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그래서 그런가, 승운은 왠지 모르게 긴장했다.
재준이 자신의 가이드라는 것을 안다.
제 몸으로 겪었다. 하지만 혹시나 싶다. 매칭 테스트 결과가 나쁘면 어쩌지? 이미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승운은 불안했다. 승운의 손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낀 재준이 승운을 돌아봤다.
“긴장 풀어요.”
“……박사님은 긴장하지 않으시네요.”
“지승운 씨가 제 에스퍼라는 걸 이미 알고 있거든요.”
재준이 대답했다. 승운은 조금 생경한 소리를 듣는다는 얼굴을 했다. 저번에도 내 에스퍼라고 말을 해줬는데, 잊어버린 건가 싶었다. 재준이 승운에게 다시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이는 순간 테스트 실의 문이 열렸다.
“이제 마지막—….”
말을 하며 들어서던 경원이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깨가 쏟아진다, 깨가 쏟아져. 경원이 다가가 마주 잡은 손을 떼어냈다.
“빨리 자리 가서 앉아요. 기계에 손 올리고.”
“…….”
승운과 재준은 별다른 대답 없이 자리에 앉았다.
마주앉은 두 사람이 기기에 손을 올렸다.
“자, 매칭 테스트 시작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기기를 작동시킨 경원이 뒤로 빠졌다. 손에 밀착된 기기가 뭔가를 튕겨내듯 재준의 손을 밀어내더니 제 스스로 에너지를 챙겨갔다. 이게 뭐지? 재준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승운이 웃어보였다. 마치 원래 그런 것이라는 듯.
멋대로 힘을 갈취하는 것 같았기에 기분이 결코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게 가이딩을 하는 것인가, 하는 느낌은 막연하게 들었다.
“이제 손 떼도 됩니다.”
경원의 말을 듣고 그들이 손을 뗐음에도 기기는 계속 돌아갔다. 승운은 긴장된 얼굴로 그것을 바라봤다. 재준은 그저 조금 신기한 느낌이었다. 내부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순수하게 궁금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판독에 시간이 걸려 경원이 눈썹을 찌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세스를 완료한 기기가 작동을 멈추었다. 경원이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을 한 뒤 테스트 실 밖으로 나갔다가 몇 분 뒤에 돌아왔다.
“결과 나왔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승운은 매칭 결과가 어떤지 짐작할 수 없었다.
제발 50%가 넘기를. 물론 그 수치를 넘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경원이 말을 했을 때도 최소 85%는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두려울 필요는 전혀 없는데도 승운은 뭔가 두려웠다.
재준이 승운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경원이 펜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승운과 재준을 번갈아 보더니 씨익 웃어 보인다.
“매칭률 97퍼센트.”
지승운은 참았던 숨을 터뜨리는 것처럼 “흐.” 하고 내뱉었다.
“축하한다, 지승운.”
이경원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