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3권) (8/20)

7.

에스퍼란 게걸스러운 종족이었군, 재준이 생각했다.

어젯밤 한번 정도면 될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승운은 계속 들러붙었다. 나중엔 지칠 지경이었다. 재준은 버석한 눈을 비볐다. 눈을 뜨자 흐릿한 모습의 승운이 보였다. 사실은 가까이에 있는데도 잘 보이지 않는다. 눈을 찌푸린 재준은 침대 맡에 둔 자신의 안경을 쓰고 승운을 바라봤다. 그 사이 꺼끌하게 자란 수염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재준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재준이 손을 뻗어 승운의 얼굴에 갖다 댔다. 예쁜 얼굴이라 수염이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희미하게 난 자국을 보니 수염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긴, 잘 생기면 뭐가 문제겠는가. 그때 승운이 눈을 떴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재준이 눈을 한번 깜빡였다.

“아침부터 저 유혹하는 거예요?”

“……좋은 아침입니다.”

재준이 말하자 쪽 하고 입을 맞춘 승운이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섰다. 자는 도중에 가터벨트를 벗었는지 맨 허벅지였다. 탄성이 눈에 보인다.

“양치하고 올게요.”

아무래도 아침부터 혀를 넣는 건 좀 그렇지. 승운이 떨어진 속옷을 꿰어 입고 내려오자 재준도 침대에서 일어났다. 재준은 나신의 상태가 아무렇지 않은 듯 승운과 달리 그냥 나체로 침대에서 내려오며 “같이 하죠.” 말했다.

“야해.”

뭐가.

재준이 먼저 욕실로 들어서 칫솔에 치약을 짰다. 그리고는 제 입에 넣으며 승운이 썼던 칫솔에도 치약을 짜서 건넸다. 지난밤 정사가 개운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집요함에 지쳐 재준은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승운은 그런 재준의 몸을 일일이 닦아준 뒤 양치를 해야 한다며 입에 칫솔을 물렸다. 제대로 하지 않자 제 손으로 이를 닦아주는 모습에 비위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거에 비해 아침은 조금 약한지 비몽사몽한 얼굴이다. 반쯤 눈을 감고 양치를 하던 모습을 본 재준이 수염이 꺼끌하게 자란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다 물과 쉐이빙 크림을 묻혀 면도했다. 승운은 그런 재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면도를 할 때도 안경을 쓰긴 하는구나. 시력이 나쁜가보지.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재준이 세수를 하려고 물을 틀 때 승운은 미리 수건을 건넬 준비를 했다. 꽤 남자다웠다. 남자니까 당연했지만. 재준은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얼굴에 목까지 구석구석 씻었다.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는 물방울을 지긋이 바라보던 승운은 재준이 허리를 펴자 그 자리에 멈췄다. 재준이 내밀어진 손을 보고 말했다.

“아, 고마워요.”

하지만 수건을 받으려는 순간 승운의 손에 힘이 풀린 건지 수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지승운 씨?”

승운이 두 눈을 깜빡였다.

누구?

“수건…… 아니, 괜찮습니다.”

“…….”

“면도기, 안 챙겨 오셨죠? 제걸 쓰면 될 것 같은데.”

“…….”

“지승운 씨.”

“박사님?”

웬 의문형이지? 재준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승운의 옆쪽에 있는 수건을 꺼냈다. 그러면서 맨살끼리 닿았다. 얼굴을 닦아낸 재준이 안경을 찾아 쓰자 승운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양 뺨부터 목덜미, 아니 상반신 대부분이 발갛게 물들어있다. 재준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섰습니다.”

“…….”

그 말에 승운이 자신의 시선을 내렸다가 천천히 올렸다.

“어제 부족했습니까?”

“……어, 아. 아니. 어. 네?”

승운이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하며 칫솔을 내려놨다. 두 눈을 껌뻑거리던 승운은 입을 헹구고 다시 몸을 들어올렸다. 그런 승운을 재준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박사님.”

“예.”

승운이 재준의 양 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틀어 사방을 살폈다. 이게 지금 뭐하는 거지. 재준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현재준 박사님?”

“예.”

재준의 대답에도 승운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놀란 얼굴로 재준을 살폈을 뿐이다. 왜 저래? 재준이 물으려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온 승운의 몸이 지나치게 밀착되어있다.

“지승운 씨.”

“예.”

“닿습니다.”

그 말이 뭔가 자극이 되었던 것인지 아래에서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승운이 몸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박사님, 어디 가서 안경 벗지 말아요. 웬만하면 제 앞에서도.”

그렇게 말한 승운은 아쉽다는 듯 재준을 응시하더니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재준이 물으려던 찰나, 승운이 입을 열었다.

“안경 한번만 벗겨 봐도 됩니까?”

“그러면 제가 앞이 안 보이는데요.”

그러면서도 재준은 뜻대로 하라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런 재준에게 승운이 입 맞췄다.

“……안경 벗긴다면서요.”

“눈을 감길래.”

승운이 말하며 재준의 안경을 벗겼다. 생각보다 가볍다. 플라스틱으로 된 뿔테다. 이걸 벗겼다고 이런 얼굴이 나오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승운이 안경을 벗은 재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누구야, 이 사람은?

재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승운이 안경을 씌우고 바라보다가 다시 벗겼다.

와, 진짜 누구지? 이 미인은 누구지?

이게 현재준 박사라고? 이 사람이? 왜? 너무 예쁘잖아.

원래도 나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이 얼굴이라면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납득이 가능했다. 어떻게 이렇게 생긴 사람이 다 있지? 

승운이 다시 재준에게 안경을 씌웠다. 그리곤 감상하듯 이리저리 살핀 다음 다시 벗겼다.

“와.”

어쩌지? 사실 지금 죽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폭주하고 죽어서 환상을 보는 상황이라거나. 하지만 분명 현실이다. 이 생생한 감촉이 꿈일 리 없다. 흑백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게 꿈이 아니라는거지?

예뻐도 너무 예쁜데. 안 그래도 존재여부만으로 이 사람이 내꺼라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다른 이들이 탐낼까봐 또 두렵다. 물론 지승운은 그 어떤 에스퍼도 이길 자신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기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누구든 현 박사를 탐내면 눈알을 다 뽑아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근데 저 이상한 안경아래에 이런 얼굴을 감추고 있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 현실로 성큼 다가오자 불안감도 함께 했다.

와, 너무 예뻐. 누가 채가면 어쩌지?

이렇게 예쁜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데. 누가 훔쳐 가면 어떻게 하지?

아니, 그 전에 내가 자제를 할 수 있을까? 정말 어떻게 하지? 진짜 살아있는 사람 맞지? 어디서 천사 한명 데려다가 날개 떼고 눈 좀 나쁘게 한 뒤 여기 보낸 거 아냐? 그게 아니면 어떻게 이런 얼굴이……. 

역시 저것 봐 등에 상처가…… 저건 내가 낸 거지.

차마 승운은 자신의 빈약한 표현으로 재준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신기해서 이리저리 살필 뿐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재준이 말하며 안경을 돌려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안 좋은 시력 때문에 거리감과 사물분간이 안됐는지 엉뚱한 곳에 손이 도착했다. 승운은 괜히 심술부리거나 놀리지 않고 잽싸게 그의 손에 안경을 돌려줬다. 차라리 안경을 쓰는 게 더 낫다. 벗은 모습을 보니 자제가 되지 않는다.

동시에 머릿속에선 안경을 벗기고 한번 울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떠오른다. 너무 변태 같은가? 하지만 저 외모를 봐. 왠지 모를 충동성과 폭력성이 솟아난다. 집어삼키고 싶었다. 입에 넣고 빨고 싶다. 이왕이면 아래쪽을, 아니 위를. 입술이라든가. 그냥 잡아먹으면 안 될까? 승운이 결국 자제하지 못하고 재준에게 입을 맞추며 몸을 밀착시켰다. 

몸이 닿자 재준이 흠칫 떨었다. 승운은 속옷을 입고 있었지만 자신은 나체다. 승운이 다시 재준의 안경을 벗겨 내려놓은 뒤 입을 맞췄다. 가볍게 시작하던 입맞춤이 점점 깊어졌다.

“하, 박사님…….”

흥분한 목소리다. 재준이 숨을 내뱉으며 승운을 밀어냈다.

“이러다가 늦습니다.”

“더해주세요.”

“안 됩니다. 늦어요. 지승운씨도 어서 씻어요.”

“…….”

“학회 측에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야 해요. 그 전에 이능청 소환에도 가야하고.”

“박사님.”

“그러니까 나중에—.”

“미안해요.”

뭐가? 재준이 답을 요하는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승운이 조금은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목에 자국이 많이 남았어요.”

“…….”

재준이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가렸다. 아, 자국. 생각을 못했네.

“목 가리는 옷 있으세요?”

“……됐습니다.”

승운이 넘겨주는 안경을 쓰며 재준이 말을 이었다.

“성인 남자가 성행위를 한 게 흠도 아니고. 어쭙잖게 가려봤자 더 상상해요.”

어른 남자 같은 반응이네. 물론 어른 남성이 맞긴 했다. 현재준은 자신이 섹시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승운이 생각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자빠뜨리고 싶다. 자신의 시선에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 두려운 데도 그에게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에는 안 보이는데 남겨요.”

재준이 이어 말했다. 바로 그 점이요. 그 점이 절 미치게 한단 말이에요. 차마 탓할 수 없던 승운은 찬 물을 틀어 체온을 떨어뜨렸다.

***

평소의 재준에게는 성적인 뉘앙스가 전혀 풍기지 않는다. 오히려 금욕적으로 보이는 얼굴이다. 물론 한풀 벗겨놓으면 다르겠지만 몸에 맞지 않는 펑퍼짐한 옷과 건조한 머리카락과 도수가 높은 안경을 모두 끼얹으면 금욕조차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너드 한명이 멍청한 얼굴로 서있다. 

목에는 잔뜩 정사의 흔적을 묻히고.

아, 가려야 하는데. 또 자랑스럽네.

수많은 섹스심벌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가 와도 재준보다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 승운은 머리라도 좀 더 헝클어뜨려서 미모를 감춰야 하나 고민했다. 

시선을 느낀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부드럽게 웃는 모습에 승운이 마주 웃었다. 

왠지 한번 맛보고 나니 참는 것이 더 힘들다.

“이능청으로 가실 겁니까?”

“예, 그리고 오후에는 학술회 주최랑 IPMC를 찾아가야합니다. 그들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말이죠.”

“IPMC쪽의 부상자는 몇 있지만 사망자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능청 소속의 에스퍼와 용병으로 온 에스퍼에서 사망자가 다수 나왔고, 군에서 한명, 괴수학 박사 중에서는 두 명이 사망했습니다.”

“……좋지 않네요.”

“원래 에스퍼들이야 목숨 걸고 일하니까요. 하지만 어제의 일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평범한 학술회일 줄 알았지,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둑시니 종과 뱀파이어 종. 

동유럽이 원산지인 괴수와 한국이 원산지인 괴수의 공통점이라고는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사람처럼 생겼다는 것뿐이다. 애초에 그들이 저렇게 한꺼번에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제 무슨 일이, 도대체 왜 일어났던 거지? 아마 이에 대해서는 국제이능통제원과 이능청에서도 말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괴수학자들 역시.

“박사님. 위험한 일과 연관이 되어있으신 겁니까?”

승운의 물음에 재준이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걱정하는 눈초리에 재준은 거짓말을 할까 하다가 말았다.

“예전까지는 이러지 않았습니다만, 예. 지금은 위험합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인데 거짓을 고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말을 덜 하는 게 낫겠지.

“아직은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굳이 기간을 말하자면, 그래. 적어도 3년 전까지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괴수학 박사 중에도 형질이상자가 있는 건 아십니까?”

“박사님과 아예르 박사.”

“저희 전에 라제쉬 박사님들이 계십니다.”

승운은 모르는 이들이다. 애초에 다른 국가의 유명한 에스퍼 정도라면 알고 있었지만 괴수학 박사들의 연구나 이름을 알 리 없다. 그저 밝혀지면 그랬었대, 그렇다더라 하고 언급되는 정도였다.

“가이드인 리처드 라제쉬와 에스퍼인 멜라니 라제쉬.”

재준이 말했다.

“3년 전 아일랜드에서 멜라니 라제쉬가 괴수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병상에 계십니다. 종종 깨어나시기도 하지만, 아주 찰나입니다. 혼수상태나 다름없다고 보고 있죠. 리처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지만. 그게 아니라도 멜라니 박사님을 습격한 이들이 누구인지만 알면 그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고 하시는 듯합니다.”

“괴수학자들에게 습격이 자주 일어납니까?”

“괴수들의 습격은 종종 일어나지만 그건 저희의 일 때문이고, 이런 식으로 아무런 전조 없이 습격을 받는 일은 없죠.”

“그렇다면 왜…….”

“연구가 밝혀져서는 안 되는 거니까.”

“누구에게요?”

“누구에게든요.”

그것이 괴수들인지, 사람들인지, 형질이상자 길드인지, 아니면 기업들인지는 모른다.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형의 괴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저는 그걸 세상에 발표하려고 합니다.”

“……그건 위험한 일이죠?”

“예.”

재준이 대답했다. 승운의 눈이 가라앉았다.

“지승운 씨.”

위험한 일이다. 재준은 이곳에 승운이 함께 하길 바라면서도, 함께 하지 않기를 바란다. 

“저와 함께 하면 지승운 씨도 위험해집니다.”

“마찬가지예요, 박사님.”

승운이 대답했다. 지금은 상태가 괜찮지만 자신 역시 시한폭탄과 다를 바 없었다. 조금이라도 어긋났다간, 제어를 하지 못했다간,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바로 어제 그런 일이 발생할 뻔 했다.

“저 때문에 박사님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재준이 웃어보였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자신에게는 해당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 그럼.”

내가 네 가이드니까.

“서로를 책임져볼까요?”

재준의 말에 승운이 말갛게 웃어보였다.

* * *

했네. 

승운의 시계를 살핀 이경원이 처음 한 생각이 그것이었다.

아주 새까만 거 보니 했어.

그러고는 경원은 현재준을 바라봤다. 현재준 박사와는 세 번째 만남이었다. 첫 번째 만남의 끝이 좋지 않았다. 지승운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뭐. 그냥 저냥 무난했다.

어쨌든 경원은 재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이드라니.

그래, 지승운이 일반인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치고 다닐 리 없지. 일반인 앞에서 눈물 뚝뚝 흘리며 울 때는 얘가 진짜 돌았나했는데 가이드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본능적으로.

짐승수준의 본능을 가졌는데 또 뭔가 해볼 생각은 안했다는 점이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자제는 왜 하냐고 뭐라 해야 할지. 

“끝까진 안 갔나 봐요.”

“…….”

“쟤 크기 봤죠? 그거면 하루 정도는 못 움직이지. 지금 멀쩡한 거 보니까 아마도.”

“이경원.”

“뭐?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나도 네 크기 알고 싶지 않거든. 이제 네 가이드도 있는데 조신하게 가리고 다녀라.”

경원이 말했다. 

“박사님, 형질 검사 처음이시라고 했죠? 아직 수치는 도착하지 않았는데. 곧 나올 겁니다. 우리는 그 전에…… 아, 마침 메일이 왔네요.”

“얼마야?”

“383.38 피코그램.”

경원의 말에 세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승운이 재준을 바라봤다. 뭐라고? 383.38? 지승운 자신의 E3수치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지승운의 E3호르몬 수치는 401 pg/L.

낮은 등급의 형질이상자라면 모를까 높은 등급에서 그 정도 수치는 거의 동급이라 여겨도 된다. 경원이 잽싸게 말했다.

“지금 순간부터 박사님도 특별관리 대상이 됩니다.”

“…….”

“죄송합니다만 일반 인권 변호사 선임 권리는 없습니다. 이 경우엔 전문 변호사라고 하더라도 힘들겠네요. 공무원이 노동자가 아닌 것처럼 가이드나 에스퍼의 돌연변이 법이 인권보다 우선이거든요. 물론 형질이상자 쪽이 권리 보장이 더 잘 되어있습니다. 노동권이나 뭐 그런 쪽이요. 다만 한 가지… 자유가 없을 뿐이죠.”

“네.”

“물론 노동권 조항도 폐지된다는 말은 있는데, 아무튼 묵비권 행사도 안 됩니다. 아, 범죄 저질렀을 땐 가능해요. 이능청 한정으로 말하는 거니까. 원랜 서명도 해야 하는데, 지금 막 알아낸 거니 약식으로 설명한 겁니다. 이따가 서명도 하러 가셔야해요.”

경원이 말하며 재준을 바라봤다. 여상한 표정이다. 이 사람은 감정 반응이 조금 둔한가? 

그들이야 어릴 때 발현을 하다 보니 이런 말을 들어도 그냥 내가 좀 더 특별하다는 것에 사로잡혀 이게 얼마나 인권 모독적인지 몰랐으나 재준은 성인이었다. 물론 박사학위까지 따는 인간들이 대체로 그렇듯 사회성이 좀 떨어지는 경향이 있겠지만 지금 이 상황이 그에게 좋지 않다는 걸 알 텐데.

뭐, 별다른 반항이 없으면 경원으로서도 편하긴 했다.

“우선 잘 모르실 테니 먼저 설명 드리겠습니다. 형질검사는 총 세 가지로 합니다. 초음파 기계와 에너지 기계, 피검사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피검사는 이미 했고. 우선은 에너지 질량을 파악해야 해요. 그 다음에는 초음파검사를 하는데—.”

“초음파 검사는 알고 있습니다. 형질이상자들은 뇌에 특정한 기관이 있다고 하니까요. 뇌하수체 옆쪽에.”

“……아시네요?”

“괴수들도 있거든요. 특정한 기관.”

“아, 괴수들도 그런 게 있어요?”

“예. 에스퍼들은 그걸 ‘핵’이라고 부르죠. 거길 파괴하면 기능이 정지합니다. 실질적 구조는 내분비기관이랑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만.”

“……그건 몰랐네요.”

“아마 에스퍼나 가이드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핵을 파괴하면 움직임이 사라지죠.”

“뇌니까 당연하잖아요.”

“인간은 뇌에 있지만 어떤 괴수들은 뇌가 아닌 다른 곳에도 있거든요. 아, 참고로 자연물에서 만들어진 괴수 역시도 그런 핵이 있습니다. 그거 역시 자연물의 형태를 띠죠. 인간들이 선호하는, 금이나 보석처럼 말이죠. 하지만 아직 그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지 못합니다. 에스퍼 괴수학자가 더 있다면 좋을 텐데.”

“…….”

이 사람 사고방식 괜찮은 건가? 생각하는 게 좀 무서운데? 경원이 생각했다. 괜찮은 사람 맞지? 어쩐지 박사치고 좀 얌전하게 보였는데 이렇게 말하는 거 보니 박사가 맞긴 한가보다.

“…뭐 어쨌든. 초음파 검사의 경우는 기관 발달 여부나 에너지 정체, 혹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을 때 주로 보고 평소에는 피검사와 에너지 파장 기계 검사로만 합니다. 호르몬 수치는 나왔으니까 이제 양이나 범위를 측정하는 건데…… 특별히 할 건 없고 손을 올리고 있으면 알아서 기계가 측정합니다. 다만 몸속에 뭔가 들어오는 느낌은 있을 겁니다. 헤집는 느낌이라 불쾌할 수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신기하네요. 이걸로 어떻게 측정하죠?”

“반발을 이용한 거예요. 가이드와 가이드는 서로 충돌하니까. 넣는 에너지에 대한 반발력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거든요. 가이드 에너지와 흡사한 형태로 자극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구상했는지는 비밀이지만요. 특허라나 뭐라나.”

“중요하죠.”

“기분 나빠도 참으세요.”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원의 말대로 그의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마치 몸 내부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같은 극을 튕겨내려는 것처럼 흘러들어오던 에너지가 급속하게 튕겨져 나갔다. 그 반발력에 놀란 경원이 “와.” 하고 말했다.

“아주 꽉 차 있네요. 이렇게 빠른 반발은 처음 봐요. 과연, 20대 중후반의 각성자는 이런 건가?”

“어떤 의미죠?”

“높은 등급일수록 각성 시기가 느린 건 성장호르몬이랑 연관되어있거든요. 아, 직접적인 건 아니고 적어도 각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몸이 성장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고 각성 중에 폭주하거든요. 어릴 때 각성할수록 레벨이 낮다는 건 그런 의미죠. 어린 시기에 각성해도 몸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의 힘만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물론 외부에는 다른 식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확히는 어린 시기에 각성한 사람들이 성장해나감에 따라 에너지의 총량이나 질이 늘어날 것이라고 잘못 추측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성장하긴 했지만 결국 총량과 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얼마나 제대로 조절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연구가 지속됨에 따라 형질이상자들 역시 그 사항을 알고 있긴 했지만 굳이 외부에 발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국제이능통제원은 관련해서 그대로 묻어뒀다. 

즉, 재준 같은 편견은 일반인들에게는 흔했다. 형질이상자들에게는 지구 평평설 수준의 이야기였지만.

“사실 박사님 수치를 보면 그렇게 늦은 시기에 각성을 할 만한 수치는 아니에요. 물론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가이드의 수치 중 가장 높긴 하지만. 근데 이 정도의 반발이라면, 질뿐만 아니라 양도 좋다는 걸 의미하겠죠. 왜 이렇게 늦게 각성한 걸까요? 나중에 피 좀 주실 수 있습니까?”

이경원이 말했다. 재준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이런 데이터가 쌓여 세상의 발전에 기여한다면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박사님은 수치 상 S급으로 구분될 겁니다. 대한민국에선 최초네요.”

승운이 재준의 손을 꽉 잡았다. 피부가 닿은 것만으로도 부드러운 파장이 자신의 내부를 파고든다. S급 가이드라니. 좋으면서 무서웠다.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표정 관리를 안 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재준이 괜찮다는 듯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하지만 지금 박사님의 이름으로 가이드 등록을 하면…….”

말을 이어나가던 경원이 두 사람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

“박사님 이름이 특이해서 곤란하겠는데요. 누군지 확실하게 알게 될 테니까. 알겠지만 높은 등급의 형질이상자들은 여기저기서 많이 원하거든요. 근데 박사님은 VIP이기도 하고.”

지승운의 가이드를 찾았다고 공개발표를 할 텐데 이름이 현재준이면 적어도 주변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다 알지 못한다고 해도 괴수학에 관심이 있거나 그게 아니어도 제7센터에 있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

“가이드 명을 다르게 등록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성을 바꾸죠. 제 이름은 흔한 편이니까요.”

“원하시는 성은요?”

“김이박 중 하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김씨로 등록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경원이 패드에 무언가를 입력하며 말했다.

“두 분의 매칭 테스트도 남아있습니다만, 지금은 바빠서 우선은 페어 등록부터 먼저 할게요. 위에서 요구가 있었거든요. 빨리 하라고. 잠시만 기다려요. 시계 조정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경원이 가이드 용 시계를 꺼냈다. 에스퍼 용과 겉보기엔 다르지 않았다. 자석이 내장되어 있는지 패드의 단자에 올려둔 시계가 켜지며 돌아가더니 페어링 퍼센테이지가 생겼다. 경원은 페어링이 완료된 시계를 재준에게 넘겼다.

“시계 줄은 원하는 대로 바꿔도 됩니다. 그리고 매칭은 나중에 DMZ로 돌아가서 하죠. 지금 인력 보충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저도 곧 내려 갈 거거든요.”

옆에서 승운이 자기한테 시계 줄이 많으니까 차보고 마음에 드는 건 사주겠다고 말했다. 재준은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경원이 말을 이었다.

“가이드로서 할 것도 몇 가지 있습니다만 우선 한 분기에 한 번씩 피 검사를 합니다. 일 년에 한 번씩 헌혈도 해야 하는데, 박사님 유럽에서 오래 사셨나요? 보니까 괴수학자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던데.”

“그렇게 오래는 아니고.”

“유럽에 5년 이상?”

“아뇨. 전 세계를 돌아다녀서. 다 합치면 5년까지는 아닐 겁니다. 유럽뿐만 아니라 서아시아나,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아프리카 대륙, 미 대륙에도 있었거든요.”

“그럼 영국에서는요? 3개월 이상 거주했습니까?”

“예, 영국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럼 헌혈은 제외하고 샘플 혈액만 받는 걸로 하죠.”

“왜죠?”

“광우병 위험이요.”

“…….”

“오히려 잘됐죠. 가끔 이상한 노친네들이 에스퍼나 가이드의 피를 요구하기도 해요. 특히 S급이라면 10ml에 수 천 만원이라도 낼걸요? 먹으면 오래 살 거라고 생각하나.”

그런 건 재준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과연 인간의 상상은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다더니. 그렇게 따지면 괴수들의 피나 육체가 몸에 좋다고 한다면 그들은 괴수 역시 잡아먹을까? 딱히 불가능한 일도 아닌 듯 했다.

“자, 시계 차세요.”

경원의 말에 재준이 시계를 차자 승운에게 턱짓하며 “시계 맞대고.” 하고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의 시계가 맞닿자 경원이 패드로 무언가를 조정하는 듯 했다. 시계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아주 옅은 진동은 일분 가까이 지속되다가 사라졌다.

“페어 등록 완료했습니다. 박사님은 굳이 다른 누구를 가이딩 할 필요 없이 지승운 에스퍼를 전담으로 맡아주면 됩니다. 물론 기기 상에서 처리를 먼저 한 거니까 나중에 계약서 다 쓰셔야 해요.”

경원이 말했다. 재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바라봤다. 이능력자들만 착용하는 시계가 제 손목에 있는 게 조금 어색한 얼굴이었다. 이제 된 건가? 재준이 생각했다.

승운은 자신의 시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페어가 등록된 이들은 시계에 상대의 상태가 보인다. 지승운의 에너지 상태가 어떤 지도 재준의 시계에 나타날 것이다.

페어.

내 가이드.

평생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가 바로 옆에 있다. 단순히 환상이라 치부하지 않아도 되는 증거 또한 자신의 손목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승운은 다시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하지만 꾹 참는다.

“잘 지내봐요, 박사님.”

경원이 재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재준이 경원의 손을 맞잡으려던 찰나 승운이 대신 경원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뭐냐?”

“너 맨 손이잖아.”

어디 감히 맨 손으로 남의 가이드를 만지려고 하냐는 뜻이었다. 참나, 아주 염병을. 나도 내 페어 있거든? 경원이 황당해하며 말했다.

“악수 정도로 뭐 어떻게 될 리 없잖아.”

“내 가이드야.”

미친 새끼. 경원이 부적절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IPMC와 괴수학협회는 어제 벌어진 참담한 상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겠지만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괴수 안전 국가였다. 삼면이 바다에 위로는 북한이 있어 괴수들이 드나들기가 쉽지 않다. 물론 해경 해체 이후로 몰래 숨어드는 괴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요즘은 힘들었다. 즉, 한정된 괴수만 처리하면 된다는 뜻이다. 

이능청 차장인 한경애가 IPMC에 만남을 요청했다.

재준의 괴수학부 동기였으나 졸업을 못하고 IPMC로 넘어간 붉은 수염을 가진 마크는 IPMC 총회 밑에 있는 국제협력위원회 소속이었다. 원래는 사무처의 인턴이었으나 그를 눈여겨 본 시어샤 코리건의 눈에 띄어 집행위의 기획위원회에 있다가 정책연구원을 거쳐 국제협력위원회로 옮겨왔다. 모두 시어샤의 능력이었다. 마크는 그저 그녀를 보좌하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괴수인데 여권이 있더군요.”

한경애가 말했다. 시어샤 코리건은 여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대했다. 두 여성의 눈싸움에 마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깔았다. 무서웠다.

사실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IPMC도 손해가 컸고, 괴수학회도 그랬다. 하지만 제일 큰 물질적 피해는 대한민국 이능청이 봤다. 죽은 에스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호텔에 대한 피해 역시도 이능청에서 물어준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IPMC도 어느 정도의 돈을 보탤 예정이었지만 그런 국제기구에서 돈을 내봤자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은 금액일 것이다.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저희야말로 묻고 싶군요. 안 그래도 괴수학자들의 인력이 적은데 여기서 몇 명의 괴수학자들이 살해된 줄 아십니까? 준비를 제대로 해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준비도 적에 대한 정보가 있는 상황에서나 제대로 할 수 있겠죠. 이런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저희도 준비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괴수가 인간의 형태를 가지고 인간의 여권을 소지한 채 공항을 통해 들어온다는 것을 과연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곳에도 인간형 괴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정도는 해봤을 텐데요?”

“인간형 괴수가 있다 한들 그들은 신분이 없으니 쉽게 노출되고 해외에도 갈 수 없으니까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대한민국은 해외와 달리 사회보장번호 같은 게 아니라 주민등록번호를 쓰거든요! 성인이 되면 모든 이들의 지문을 국가 데이터  베이스에 등록하고 말입니다.”

한경애의 말에 IPMC측의 사람들은 마치 인권 침해의 장면을 보는 듯한 얼굴을 했다. 실제로도 대한민국은 많은 것을 국가가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움이 됐다. 적어도 괴수와 인간을 구분하는데 말이다.

“괴수라는 게 티가 나지 않는다니.”

공항에는 괴수탐지기가 따로 없다. 화물칸에는 나름의 형식적인 검역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들이 이코노미 좌석을 타고 올 것이라고는 여태껏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여권을 발급받는 괴수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도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이곳에도 라제쉬 박사의 제자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라제쉬 박사?”

“괴수학 박사 부부로 유명합니다. 더불어 부부가 형질이상자죠. 저희도 몇 년 전에 알게 된 겁니다. 멜라니 박사가 괴수에게 습격당하면서요.”

한경애는 더 말해보라는 듯 가만히 시어샤를 응시했다.

“인간형 괴수에게 습격당했죠.”

“그러니까 괴수가 그 가이드 박사를 습격했다는 건가요?”

“멜라니 박사는 에스퍼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리처드 라제쉬가 가이드죠.”

시어샤가 말했다.

“두 사람이 한 연구가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듯하더군요. 문제는 그 연구라는 게 저희 쪽에서도 극비로 처리되어서 몇몇 사람들과 후원자만 뭔지 알 수 있었죠.”

한경애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현재준 박사도 그런 말을 했다. 비밀서약서에 서명을 했다던가. 이 여자도 모를 정도의 이야기인가? IPMC에서 꽤 높은 자리라고 들었는데 말이다.

“저도 자세히 말 못합니다. 누가 어떻게 얽혀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것을 아는 또 다른 누군가를 늘릴 수는 없으니까요.”

“로마클럽.”

한경애가 말했다. 어제 재준이 했던 후원자 중에 그들이 있었다.

“로마클럽이 후원자라고 하던데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시어샤의 질문에 한경애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대충 알아차린 듯하다. 

라제쉬 박사들의 제자. 그리고 시어샤는 그 제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쟤쭌 휸. 그런 발음이었나. 다른 발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많은 괴수박사들이 그를 닥터 허니라 불렀다. 그 꿀 박사가 괴수들 틈에서 폭주 위협이 있던 에스퍼와 입을 맞추는 장면을 모두 보았다. 그리고 그 에스퍼가 다시 제 힘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

가이드라니.

그 사람이 가이드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안 그래도 유망주인 꿀 박사가 가이드이기까지 하다면 한국에선 그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무슨 복으로 그런 이를 가졌는지. 시어샤는 표정을 굳혔다. 차라리 유럽 쪽으로 진작 귀화를 시켰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로마클럽을 물으신다면, 그쪽도 후원자이긴 합니다. 다른 후원자들도 있지만.”

“정보를 공유해주신다면 충분히 협조할 수 있습니다.”

한경애 차장이 말했다.

“게다가 이번뿐만 아니라 이전에 괴수학자들을 습격했던 이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괴수학자들과 연관되어있다면 대한민국에도 몇 명의 괴수학자들이 있으니 저희도 신경써야한다고 봅니다.”

“……저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만, 저조차도 권한이 크게 없습니다.”

권한이 없는 건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가지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경애 차장도 지금 당장 그녀를 재촉한다고 뭔가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 공유가 가능한지 회의 후에 연락드리죠.”

한경애는 먼저 물러섰다. 어차피 패는 그들이 가지고 있다. 지금 당장 뒤엎을 수도 있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조금은 숙여야 할 필요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당장 이 사람과 뭘 할 필요는 없다. 안 그래도 할 것이 많았다. 우선 괴수연구소에 가서 잡아둔 괴수들을 확인하는 것도 필요했고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들이 나타났는지 보고도 들어야했다.

“회신 기다리겠습니다, 코리건.”

***

그때 괴수학 협회는 괴수연구소와 개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걸 한국에서 독차지하겠다고 하면 어쩌자는 거야?”

재준도 거기에 동의했다. 무엇보다 이것을 차지하는 자의 욕심을 생각하면 말이다. 제대로 된 결과물도 내지 못하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괴수박사들을 저지했다. 그 저지당하는 대상 속에 재준도 있었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허니, 뭐라고 말 좀 해봐.”

내가 말해도 크게 영향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재준이 생각하며 앞으로 나섰다.

어제 리셉션실에서 일어난 괴수 습격에서 수많은 괴수박사들이 괴수를 잡았다. 산 채로 포획한 것도 있었지만 결국 지승운이 전부 죽여 버렸다. 익사조차 아니었다. 그저 기도를 틀어막아 질식사를 시킨 것이다.

박형기 박사는 그 광경을 보지도 못했다. 무서워 문이 열리자마자 도망쳤으니. 재준은 그 뒤에 승운과 다른 에스퍼에게 이끌려 검사를 받느라 몰랐지만 뒤처리는 에스퍼들과 한국중앙괴수연구소에서 했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박사들이 놀란 마음을 달래고 지친 몸의 피로를 푸는 동안 사체를 모두 자신들 관리 하에 둔 것이다. 날강도나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저,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때 나온 사체를 모두 제1연구소에서 차지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무엇보다 제1연구소에는 전문가들도 없지 않습니까.”

“저희는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받을 뿐이에요. 그것보다 현재준 박사님께서는 한국중앙괴수연구소 소속 아니신가요?”

“……같은 소속이라 생각했다면 적어도 지금 대우가 이렇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아시겠지만 괴수 사체의 소유권은 괴수를 잡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즉 이 소유권은 지승운 에스퍼에게 있죠. 지금 중앙 제1연구소에서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습니다.”

“그럼 지승운 에스퍼를 데려오셔야죠. 그리고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한국 에스퍼가 잡은 괴수인데 왜 다른 나라 괴수박사들에게 넘겨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넘기라는 게 아니라 공동으로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재준이 말을 잇는데 뒤편에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에스퍼 제복을 입은 이들이었다. 그녀의 뒤로도 몇몇의 에스퍼가 보였다. 그 사이에 지승운은 없다.

“소란스럽네요.”

한경애 차장이 말하며 들어왔다. 괴수연구소에서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기에 등장하자마자 멈칫하고는 고개를 조아리는 듯 했다.

“무슨 일이죠?”

그녀가 물었다. 물론 한경애가 두려운 존재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능청의 차장이다. 당연히 같은 한국의 행정기관으로서 괴수연구소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는지 연구원이 말을 이었다.

“국외의 괴수학자들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서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저기 있는 분은 한국 분 같은데.”

“예, 그렇긴 한데.”

“현재준 박사님. 무슨 문제이십니까?”

그녀가 자신을 향해 말하자 재준은 움찔했다. 이렇게 눈길을 받는 것은 질색이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서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을 한 괴수박사 동료들의 시선 역시 느껴져 재준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지금 연구소에 있는 괴수들의 공동연구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괴수가 잡혔을 뿐더러, 그에 대한 조사가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이들도 있습니다. 몇몇 괴수는 사체가 금세 부패하여 시독을 내뿜기 때문에, 연구소 내에서 전부 안전하게 처리하기란 인력도 부족할 뿐더러 괴수 후처리가 전공 분야가 아닌 연구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의 도움 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하겠다고 하시는 군요.”

그 말에 한경애가 연구원을 바라봤다. 그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저희도 위에서 내려온 거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연구소는 대통령 직속입니다. 아무리 이능청이라도 저희한테 요구를 할 수는…….”

“괴수사체의 소유권이 연구소에 있나요?”

“……한국의 에스퍼가 잡았으니 한국에 있죠.”

“거기엔 에스퍼 뿐만 아니라 많은 괴수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괴수들을 잡았고요.”

한경애 차장은 재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목적으로 하는 괴수가 따로 있나요?” 물었다. 아, 어떻게 알아차렸나보다. 그랬다. 중요한 괴수가 있었다. 박형기 박사는 감히 알아차리지 못할.

“그 흡혈종?”

재차 묻는 한경애에게 재준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자 시선에서 뭔가 알아차린 것인지 그녀가 “열어주세요.” 말했다. 

“권한이 없으십니다.”

연구원이 반발했다. 괴수연소는 이능청과는 독자적인 관계다. 물론 상호 연계되어 있긴 하지만 정확히는 연구소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었기에 차장의 명령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권한을 가지고 오면 되겠네.”

한경애가 말했다.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며 익숙하게 번호를 입력하고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두어 번의 신호음이 이어지더니 수화기 너머로 ‘예.’ 하고 답하는 승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승운 에스퍼. 지금 당장 괴수 제1연구소 지하 2층으로 오세요.”

한경애 차장은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사체의 소유권자가 올 테니 잘 이야기해보세요. 현재준 박사님, 그리고 다른 박사님들.”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갈 길을 향해 가는 한경애를 다들 멍하니 바라봤다. 정신을 가장 먼저 차린 것은 연구원이었다. 그가 혀를 쯧 차며 재준을 향해 “배신자.”라고 말했다. 재준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저 배신자 소리는 그가 박형기 박사에게서 벗어나 라제쉬 박사들의 밑에 들어갔을 때부터 들었던 말이다.

“어떻게 된 거야?”

재준을 향해 보리스가 다가왔다. 뒤에서 가만히 손만 들어 올리며 온건한 시위를 하듯 ‘보여 달라! 우리에게도 권한이 있다!’ 라고 아주 조용히 외쳤던 보는 뭔가 일이 풀리는 것 같자 잽싸게 재준의 곁에 왔다.

“적어도 볼 수는 있겠어.”

재준이 답했다. 그나마 다행이지. 쉽게 볼 수 있는 괴수종도 아닐 뿐더러, 머리는 날아갔지만 몸은 온전하다니. 연구하기 딱 좋은 상태였다. 하지만 박형기 박사는 못한다. 재준이 몸을 돌려 구석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덥수룩한 수염이 노년의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하는 이는 루마니아 출신이었다.

“흡혈종이면 루마니아 고유 괴수종이었죠, 잠피레스쿠 박사님?”

“그래. 내가 잘 알지.”

“잘 부탁합니다.”

재준의 말에 잠피레스쿠 박사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더니 “자네도 참 고생이 많아.”말했다. 

그가 재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한국 괴수학회가 생각보다 더 고인 물이라는 것을. 

*

지승운이 오자 일은 일사천리로 풀렸다. 상황을 파악한 승운이 흡혈 괴수종에 대한 권한은 누구에게도 있지 않으며 한쪽에서 차지할 수 없다는 말을 하자, 연구소 측에서는 뭐라 말을 하지 못했지만, 괴수종의 권한을 가져간다면 연구시설을 제공해줄 수 없다고 반발했다. 한시가 시급한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박사들이 몰려가 항의를 했지만 연구소 측은 막무가내였다. 재준은 뒤에 물러서서 어떻게 하려는 건가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난투극이었다. 

외부에서 볼 때 괴수학자들은 대부분 연구실에 처박혀 햇빛도 보지 못하고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연구를 한다 생각하지만, 육체노동과 야외활동으로 다져진 괴수학자들은 꽤나 호전적이었다. 

그래서 뜻이 맞지 않으면 종종 난투극을 벌인다. 라제쉬 박사는 마치 결투로 누가 옳은지를 따지던 야만적인 시대의 답습 같다며 웃었다. 

예지 역시 박사들 틈에 끼어서 이때다 싶어 자신이 중앙 연구소에 있을 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승운은 이 광경을 꽤나 신기하게 바라봤다. 재준이 승운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준은 에스퍼들의 오감이 많이 발달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는 듯 했다. 자신 딴에는 들키지 않게 왔지만 승운은 재준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재준이 먼저 손을 잡아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제 손에 그의 감촉이 닿는 순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승운이 놀란 얼굴로 재준을 바라보자 재준이 웃어보였다.

“손잡고 싶어서요.”

“…….”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다. 자신은 평생 겪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온기가 맞닿은 손을 통해 들어온다. 살 것 같았다. 숨을 쉴 수 있다. 매번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던 그런 때와 다르다. 현실에 겨우 발이 닿은 것처럼, 재준이 곁에 있자 제대로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불안하고 무섭다. 이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지.

“울어요?”

“아뇨. 안 우는데.”

“지승운 씨.”

재준의 부름에 승운이 몸을 굳혔다. 

“이런 말 하면 미안한데.”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재준의 손을 꽉 쥔 승운은 왠지 자신의 손에서 땀이 배어나오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하지만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너 울 때 진짜 야해요.”

“…….”

승운의 멍한 표정을 본 재준이 웃어보였다. 꽤나 유쾌한 웃음이어서, 저도 모르게 승운도 웃음을 흘렸다.

“웃는 건 예쁘고요.”

“전 박사님한테 항상 꼴려요.”

“…….”

저기, 남들 다 있는데.

물론 이곳에는 한국인보다 다른 국적의 소유자들이 많았으니 승운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준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다들 싸우느라 바빴다. 

재준은 잡고 있던 손을 다시 깍지로 고쳐 잡으며 승운을 바라봤다. 승운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재준의 얼굴이 다가오자 설마 입을 맞추려는 건가 눈을 감았던 승운은 자신의 귓가에 바람처럼 다가오는 웃음에 목을 움츠렸다.

“나도 너한테 꼴려.”

재준이 귓속말했다. 단정하고 바른 언어만 쓰던 재준이 자신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자 안쪽에서 뭔가 솟구치는 기분이다. 지금 당장 먹어버리고 싶었지만 승운은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단지 맞잡은 손에 힘을 줬을 뿐이다.

***

결국 싸움은 누구의 승리로도 돌아가지 않았다. 

중앙연구소는 괴수의 사체를 내어줄 수는 있지만 연구실을 대여해주지는 못한다고 주장했다. 정 써야겠다면 다른 사체들은 몰라도 흡혈 괴수종은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이들을 보며 결국 유예지는 연구소가 이곳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며 ‘DMZ로 갑시다!’ 외쳤다. 그 모습이 마치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처럼 보였다. 

결국 예지는 흡혈괴수종의 사체를 탈환했다. 중앙연구소에서 막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가지는 괴수학자의 편견에 딱 들어맞는 나약한 중앙연구소 사람들은 크로스 핏과 암벽타기, DMZ에서의 괴수사냥으로 몸을 단련한 예지와 괴수를 찾아 전 세계의 오지를 싸돌아다닌 수많은 괴수학자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물론, 어둑시니 종 그슨대는 중앙연구소에 남아있다. 괜찮았다. DMZ에도 한 마리 있었으니까.

예지는 먼저 다른 박사들과 함께 흡혈 괴수종 사체를 들고 떠났다.

그러며 IPMC에서 뭔 얘기를 하는지 듣고 오라고 말하는 예지를 보며 재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IPMC뿐만 아니라 괴수학회 측에서도 새로 학술회를 열 장소를 찾아야 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올해 연말은 되어야했다. 한국은 대상에서 제외. 아시아권에서는 꽤 많이 열렸기 때문에 이번엔 다시 유럽으로 갈지도 모른다.

“크라쿠프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괴수학자들은 DMZ로 떠났고 아주 일부만 남아있었다. 그 일부 중에 박형기 박사가 있다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형기 박사는 흡혈 괴수종 시체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분노했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멋대로 했으면 그 자리까지는 가지 못할 것이다.

“폴란드는 지금 정세 상 위험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서남유럽 쪽이 나을 것 같은데요.”

“그쪽이라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다른 피해도 있고, 괴수들이 인간과 구분이 안 된다면 오히려 더 문제죠. 홈리스들 틈에 있을 줄 누가 알겠습니까?”

“홈리스가 없는 곳이 어디 있다고?”

“좋게 말해 홈리스지, 집시를 말하는 겁니다.”

“차별적 단어는 이런 장소에서 지양합시다.”

“서남유럽은 지금도 혜택이 많습니다. 그럴 거면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스위스는 저번에도 하지 않았습니까. 중립국이란 위치에 있다고 혜택이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러시아는요?”

“거기 상황을 몰라서 하시는 말입니까?”

“남미에도 올 때가 한번 됐죠. 북미는 자주 갔으니.”

“지금은 신대륙에 갈 차례가 아닙니다. 애초에 아시아를 돌기 이전에 북미에서 한번 열렸는데 다시 남미라니, 이건 너무 그쪽에만 특혜가 가지 않습니까?”

“인도양 쪽 섬은 어떻습니까?”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탈출해야 하는데 섬에서 했다가 학살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요?”

결국 어디에서 다음 학술회가 열릴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화상 회의 후 메일로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학회에서는 먼저 자리를 떴다. 한국을 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재준도 곧 DMZ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괴수학자들은 그곳에 조금 더 있을 예정이라고는 했지만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돌아가기 전에 얼굴을 마주보고 이런 저런 대화를 하려면 적어도 오늘 내일은 고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재준은 자신의 마지막 일정을 살폈다.

IPMC의 시어샤 코리건을 만나는 것.

이로서 당분간의 외부일정은 끝난다.

*

재준이 IPMC의 시어샤를 만난 곳은 호텔의 바였다. 의외의 장소로 불러내자 재준은 조금은 당황했다.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기엔 적절하지 않은 장소였건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틸링 싱글몰트를 주문했다. 재준은 그 옆에 앉았지만 딱히 술은 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시어샤가 같은 걸로 하나 더 시켜 재준의 앞에 놨다.

“가이드라니, 생각지도 못했네요.”

시어샤가 말했다.

“라제쉬 박사들 밑에 있던 건 그것 때문이었나요?”

“다르진 않죠.”

“저한테 언질을 해줄 법 한데요.”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시어샤가 쓰게 웃었다.

“……멜라니 박사님은.”

“예, 아직입니다.”

“유감입니다.”

“어쩔 수 없죠.”

멜라니 라제쉬를 습격한 괴수는 꽤 등급이 높았을 것이다. 그녀 역시 B급 에스퍼로 구분되어 어딜 가도 뒤처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그녀가 감당할 수 없다면 그것보다 더 상위의 괴수인데, 보통 그런 괴수들은 자신의 야만성을 잘 갈무리하며 인간들 틈에 살고 있었다. 

역시, 이걸 발표할 필요가 있을까 시어샤는 생각했지만 멜라니가 가장 원했던 일이기도 했기에 계속 진행하는 중이었다.

“이번 습격 역시 그녀와 연관성이 있다 생각하십니까?”

“있겠죠.”

시어샤가 답했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으니, 그들도 이곳까지 온 게 아니겠어요?”

그들이 노린 것이 다름 아닌 괴수학 박사들이라는 것과 괴수학술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심상치 않다. 유럽도 아니고 아시아의 이런 곳까지 찾아올 정도로 위협을 느끼나?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혹시 해서 묻는 말인데, 그 흡혈괴수종이 멜라니 박사를 공격했던 사람일까요?”

재준의 질문에 시어샤가 그를 바라봤다. 그녀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뇨. 멜라니가 얻은 상처에선 흡혈괴수종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손톱의 길이가 달라 깊이가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 다른 괴수일겁니다.”

“그렇군요.”

재준이 대답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뭔가 결심한 듯 이어 말했다.

“다음 학술회는 유럽에서 하는 걸로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왜 그래야 하죠?”

시어샤가 반문했다.

유럽. 유럽은 위험하다. 

“유럽이면 리처드 박사님이 오실 테니까요. 지금은 먼 곳에 오시지 않으니까.”

단순히 리처드 라제쉬가 보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을까. 시어샤가 재준을 바라봤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동양인의 표정은 유독 읽기 힘들다고 생각한 시어샤는 어떻게 보면 그 선택이 나쁘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오늘 일이 있었으니 대비는 확실하게 할 것이고, 유럽에서 열린다면 각국의 뛰어난 형질이상자들을 다 불러들일 수도 있었다. 항상 말이라곤 죽어도 안 듣는 형질이상자들이었으니 겸사겸사 학술회 경호 겸 불러 IPMC의 일처리도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일단 이야기는 해보죠.”

문제는 괴수학회가 이걸 받아들이느냐 인데. 정 안되면 IPMC에서 장소라도 제공을 하면 된다. 그렇게 결정내린 시어샤가 재준을 향해 “박사님.”하고 불렀다.

“그때 귀화 요청을 좀 더 맹렬히 할 걸 그랬습니다.”

“글쎄요. 저는 제 자리가 어디인지 잘 알아서.”

재준이 대답했다. 그에게 귀화 요청한 나라가 한두 군데는 아니었지만 재준은 그 어느 곳도 내키지 않았다.

“박사님이 정한 한계의 자리겠죠.”

이어지는 말에 재준은 답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시리예와는 만나보셨습니까?”

“아직. 시리예는 지금 다른 박사님들과 함께 DMZ로 갔다는군요. 저도 마음 같아선 가보고 싶지만 위험한 곳인데다 곧 돌아가야 해서요.”

“시리예 말로는 모니카 살레가 의심스럽다고 하더군요.”

“보리스가 있는 연구소의 인턴으로 있는 그녀군요. 박사였나요?”

“아직. 석사 졸업 후 과정 중에 있습니다.”

“의심이 간다니, 뭔가 이유가 있으니 그런 말을 했겠죠.”

“그녀가 싱가포르 출신인건 확실합니까?”

“확인해보죠.”

시어샤가 말한 뒤 술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있는 것이 보였지만, 재준은 그녀를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시선을 돌려 가만히 눈앞에 담긴 술을 바라봤을 뿐이다.

***

시어샤 코리건이 먼저 나가는 것을 봤지만 재준은 나오지 않았기에 승운은 들어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역시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재준이 밖으로 나온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끝나셨어요?”

“예.”

재준이 말했다. 승운은 재준이 다가 올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말 잘 듣는 대형견처럼 주인이 먼저 손 내밀어주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 같았다. 

재준이 승운의 손을 잡았다. 승운이 시선을 내려 마주잡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재준은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과거에 피했던 것이 서운해지면서도 지금 이렇게 다가와주는 것이 기뻤다. 그래도 역시 서운함이 컸지만, 재준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깍지를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재준은 승운의 손을 들어 올려 감상하듯 바라봤다. 

예전에는 몰랐던, 혹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던 애정 어린 시선이 보인다. 그것만으로 승운은 방금 전에 느꼈던 서운한 마음이 가시는 것 같았다. 두 눈이 마주쳤다. 재준이 웃어보였다.

“집으로 돌아갑시다.”

재준의 삶 한 켠에 자신의 자리가 생긴 것 같은 말이었다.

자신의 자리. 있어도 되는 자리.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이라니.

승운이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핑 도는데, 울보 소리를 들을 것 같아 꾹 참았다.

*

DMZ로 돌아오고 나서는 내내 바빴다. 보리스와 시리예, 에르난데스는 먼저 한번 와봤다고 제 연구소인 양 여기저기 헤집었고  비무장지대에 LFE종이 많다는 말을 듣고 사냥을 가야겠다는 말도 했다. 사냥을 가는 건 괜찮았지만 그걸 고국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는 슬퍼했다. 게다가 그들이 여기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별로 없었다. 목요일 밤에는 다들 떠나야 했다. 괴수학술회에서 있었던 일을 전 세계의 각종 잡지와 뉴스에도 나왔기에 연구소들은 그들에게 빠른 송환을 요청했다. 

어쨌든 지금 흡혈 괴수종은 DMZ에 있었다. 재준은 그의 괴수학 동료들이 요구하는 것에 맞춰 실험을 하고 자료를 보내줄 예정이었다.

뭐, 그건 일이니까 그렇다 치고.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수요일 밤, 승운과 함께 고성으로 돌아오며 재준은 승운을 향해“주말에 볼까요?” 라고 말했다. 여기에 어떤 의도가 담겨있는지 승운도 금세 알아차렸다.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다 해봤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에스퍼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저한테 너무 잘해주면 기어올라요…….” 하고 재준을 제지했다. 아직 견딜 수 있나보지. 하지만 재준은 딱히 견딜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성욕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뭐라고 해야 하지.

그 얼굴이 다시 보고 싶다. 

아니, 몸을 보고 싶다? 취하고 싶다? 어쨌든 승운과 닿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이미 진지하게 만나보자는 말을 한데다 이미 한차례 서로 몸까지 다 봤는데 이제 와서 뺄 필요는 없잖아.

재준은 단호했다.

“금요일 밤 부터 시간 비워두세요. 집도 비워두고.”

그 말에 승운은 뭔가 고심한 듯하더니 “준비해 둘게요.” 라고 말했다. 뭘 준비하지? 생각해보니까 남성과의 섹스에 대해 정확히 어떤 것이 필요한지 모르는 것은 오히려 재준 쪽이었다. 

그래서 재준은 생전 처음으로 인터넷을 그런 용도로 사용해봤다. 그러니까, 보통 이런 지식을 인터넷으로 배우는 게 맞는지는 약간 의문이 들었지만 딱히 도움을 요청할 만한 곳이 없었다.

혹여나 자신이 검색한 것이 사내 인터넷 망에 남을까 두려워 데이터를 잡아 랩탑으로 검색하자 이상한 음란 사이트들이 걸렸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게다가 생각보다 좀 더 하드 코어한 클립으로 재준을 유혹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정보를 얻을만한 확실한 방법이긴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물론 재준도 남녀의 포르노와 현실이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남자끼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었지만, 사실 재준에게 필요한건 체위나 섹스의 방식보다 그러한 크기들을 넣어도 몸이 무사할 수 있는가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포르노 클립은 승운의 크기와 흡사한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비슷…… 지승운 쪽이 조금 더 큰가. 

어쨌든 말도 안 되는 사이즈가 수월하게 들어가는 것을 보니 인체에 크게 무리는 없는 듯 했다. 유혈사태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유혈사태가 일어나면 그건 섹스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왠지 모를 두려움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신축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물린 장소인데.

재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짧은 클립을 재생했다. 혹시나 소리가 새어나갈까 이미 음소거로 되어있었지만 계속 음소거 키를 눌렀다. 그런 용도로 보는 건 아니—, 그런 용도로 보는 거라고도 할 수도 있지만 굳이 목적을 분류하자면 음심보다는 학구열에 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던 재준은 생각보다 더 적나라한 장면과 인체의 신비를 탐험하고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저거 좋아하는 거 맞지? 아니, 좋아한다는 반응은 분명한데 아무리 봐도 좋아할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저 크기와 지승운을 비교하자면.

그냥 눈으로 봤을 땐 승운의 크기가 여러모로. 게다가 겪어봤던 강도도. 

뭐, 해보면 알겠지만. 

……가능하겠지?

기분 좋아 보이잖아. 괜찮겠지?

그래도 근육 이완제는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정성들여 넓히면 말이다.

재준은 아무 감정 없는 표정으로 살색의 향연을 보다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다시 검색창을 열었다. 사실상 한국어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가 아는 언어들을 다 동원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나오는 정보에 재준은 굳이? 싶은 얼굴을 했다. 아니, 조금 두려움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취향이 있구나.

이건 좀 아플 것 같은데. 저건…… 저것도 좀 아플 것 같은데. 저런 기구는 너무 그로테스크하지 않나? 어? 회전이랑 피스톤이 동시에 되는 기구가 있다고? 세상이 언제 그렇게 발달을…… 그, 거기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아 물론 항문도 뭔가 넣으라고 만들어진 기관은 아니지만. 잠깐만 저건, MKR의 희귀변종이잖아? 개채수가 얼마 없는 귀한 애로 지금 포르노를 만든 거야? 저거 09번 같은데? 심지어 화분이 세 개야? 번식 어떻게 시켰지?

갖고 싶다.

아니 그런데 진짜 괴수로 포르노를 만든 거라고? 물론 인체에 해는 없는 종이긴 한데, 괴수로 포르노를 제작했다고? 이건 형법에 어긋나지 않나? 아니, 괴수니까 민법인가? 괴수법이 따로 있었나?

이건 신고하자. 

그런데 MKR을 어떻게 구했을까? 번식법은? 뭘 줬을까. 일광시간은? 갖고 싶은데.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 클립을 끄자 또 다른 것들이 튀어 올랐다.

잠시만. 괴수 가면을 쓰고 하는 이건 뭐지? 그러니까 괴수 가면을 쓰고 괴수 꼬리…… 얼굴은 LFE종인데 꼬리는 RCE종이다. 이들은 이종교배가 안 되는데. 아니지, 왜 이렇게 엉뚱한 꼬리를 붙여놨지? 잠시만, 이거 꼬리를 붙인 게 아니라 넣은 거잖아.

그리고.

가이드와 에스퍼 제복도 있다.

도대체 몇 명이서…… 이거 가이딩 장면을 찍은 거야? 제복을 입고? 이거 어느 나라 제복이지?

“…….”

와.

이건 좀 괜찮은데.

재준이 진지하게 에스퍼 제복들을 살펴봤다.

한국 제복도 있는데, 도대체 누가 이런걸. 개인이 올리는 사이트 같은데 이래도 되는 건가? 에스퍼 전투복도 있네. 이것도 괜찮은 것 같—.

“…….”

재준의 시선 앞에 예지가 있다.

“뭘 그렇게 보세요?”

“아냐.”

재준이 랩탑을 탁 하고 덮었다. 

예지는 이내 재준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그동안 쌓인 일들을 바라봤다. 

컨퍼런스가 미뤄지며 좀 더 시간이 생겼다. 다음 컨퍼런스는 올해 말, 유럽에서 열린다고 한다. 아직 어디라고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유럽인 것은 확정이다. 시어샤 코리건이 힘을 쓴 듯 했다. 

영국이면 좋을 텐데, 유럽 연합에서 나와서 이젠 해당이 없으려나? 예지가 생각했다. 그래도 유럽이면 아마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멜라니 라제쉬와 리처드 라제쉬는 스코틀랜드에 있다. 유럽이라면 리처드는 올 수 있었다.

예지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재준은 여전히 다른 생각 중이었다. 

어쨌든 인터넷으로 얻은 정보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을 따르면 근이완제 없이도 그만큼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것도 있었지만 그 부분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니 차치하고,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들도 일단 못 본 척 하자.

결국 정보 값이 알려주는 건 그와 지승운이 섹스를 하는데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젤과 콘돔은 필요할 것이다. 아니지. 형질이상자들은 콘돔 사용을 권장하지 않지. 그러면 젤. 젤 정도는 지승운이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래. 준비는 한 가지만 더 하면 된다. 그러면서도 재준은 뭔가 찝찝함을 느꼈다. 

그래, 그게 들어가긴 할 것 같은데 그에게 답을 내려준 저들이 지승운의 크기를 본 것은 아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 크기는 힘들었다.

결국 재준이 선택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원래 모르면 물어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말이다.

예지는 다른 연구실로 가는 재준을 보고 왜 저래? 하는 얼굴로 봤다. 보통 재준이 저곳에 갈 일은 없었다. 문제가 있으면 예지가 가서 확인을 하는 편이었고 말이다.

재준이 자신에게 뭔가 숨기는 게 있을 리가 없는데. 적어도 괴수에 대한 거라면 말이다. 예지가 혹시 몰라 연구실 문을 열고 뭔 대화를 하나 들으려다 멈칫했다. 재준이 한 말이 예지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예?”

재준의 입장에선 이곳엔 이미 지승운을 겪은 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승운 씨의 크기에 대하여 그게 일반적인지 물었습니다. 보통 보편적 인류의 크기의 평균치가 있습니다만 지승운씨는 돌연변이 형질인류이지 않습니까? 에스퍼의 경우는 그 정도가 평균 수치입니까? 아, 한국인 에스퍼 기준입니다.”

“…….”

“근데 사실 외국인 에스퍼도 그 정도까지는…….”

예지가 재빨리 연구실 밖으로 달려 나왔다.

“사람의 항문이 약물 없이 그 정도로 벌어져도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습니까? 아, 죄송합니다만 성희롱은 아닙니다. 이건 다 이유가 있는데—.”

“아악! 박사님!”

저 입! 저 입! 저 모지리! 박사 학위만 있으면 다야!

예지가 재준을 이끌어나갔다. 예지는 내가 못 산다며 그걸 남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하냐고 했다. 하지만 이미 경험자가 있는데 인터넷에 묻는 건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지승운 에스퍼가 싫어할 거예요.”

“…….”

“그리고 그런 건 그냥 본인한테 물으세요!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그래?”

“그렇겠죠! 적어도 박사님보단 경험이…… 악! 내가 왜 이런 말을 해줘야해! 내가 왜!”

“미안.”

“미안해야죠, 당연히!”

지금 그 발언으로 오늘 지승운과 현재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알게 되지 않았는가. 

알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이미 알게 된 사실을 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예지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그녀도 재준이 가이드라는 것을 이제 알았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래서 라제쉬 박사들이 현재준을 싸고 돌았던 것도. 질투가 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예지도 라제쉬 박사들 밑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곧 그렇게 된다는 서약을 받기는 했지만.

에이, 모르겠다.

예지가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뭐가?”

“박사님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서요.”

예지가 말했다. 유예지 자신은 일단 아직은 안전하다. 그들이 노리는 대상은 명확했으니까. 라제쉬 박사는 국가에서 보호하고 있었고, 시리예 역시도 연구소의 보호를 받음과 동시에 그녀를 지켜줄 에스퍼도 있었다. 하지만 재준은 혼자였었다.

대한민국의 괴수연구소는 재준을 지켜주지 않는다. 한국괴수학회를 박형기 박사가 꽉 쥐고 있는 탓도 있었다. 그 날도 그렇게 홀로 도망을 치더니. 예지가 질린 얼굴로 박형기 박사를 떠올렸다. 언제나 개새끼였다.

“항상 걱정했단 말이에요. 저 뿐만 아니라 박사님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랬을 걸요?”

“그래?”

“그래요. 게다가 잠도 잘 못 잤잖아요.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죠? 박사님 선잠 자는 걸로 유명했던 거 알아요?”

재준이 예지를 향해 웃어보였다. 동시에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예지가 시선을 돌렸다.

“고마워.”

“뭐가요?”

그때 갑자기 나타난 승운이 물었다.

예지가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는 모습이 예쁘장해서 더 재수 없었다. 미친 에스퍼 새끼. 박사님한테 잘해라, 진짜.

“둘이 왜 그렇게 친밀하게 붙어있어요? 저 기분 나쁘라고?”

승운의 말에 예지가 두 발자국 떨어졌다. 개똥같은 에스퍼 새끼. 박사님은 너 때문에 저쪽 가이드들한테 가서 모진 수모…… 생각해보니 현재준이 피의자였다. 질문을 들은 가이드의 얼굴이 새파랗다.

저들은 아직 현재준이 가이드라는 걸 모른다. 그냥 성희롱 한 것이 되겠지. 예지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너무 많은 걸 알게 됐어.

머리를 식혀야 해.

아무래도 오늘 퇴근 후에 해안도로를 달리며 잡생각을 날려야겠다고 예지는 생각했다.

***

재준은 처음으로 승운의 아파트에 왔다. 바다 앞에 지어진 아파트는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종종 봤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방문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살기 좋다는 말은 들었는데 확실히 탁 트인 방과 전경이.

“…….”

바다 밖에 없군.

남극이 떠오른다. 그곳도 넓은 얼음 땅과 바다가 보였었다. 그래도 남극 보다는 볼만 한가? 바다 밖에 없다.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은 아름다울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저 바다뿐이다.

그의 집은 소파 하나 달랑 있는 건조한 공간이었다. 재준이 어색하게 거실에 섰다. 승운이 재준을 따랐다. 제 집인데도 마치 재준의 허락을 받는 것처럼.

적막했다.

어떤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그저 타인의 숨소리만 들린다. 승운의 귀에는 그 숨소리가 더 확연했다. 숨을 쉬며 살짝 벌어지는 입술이나, 작게 들리는 맥박이 평소보다 좀 더 빠르다거나. 약간은 상기된 뺨과 자신을 향하는 재준의 시선에 승운은 당장이라도 그를 잡고 몰아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무서워하면 안 되니까. 

승운이 천천히 다가섰다. 재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재준보다 아주 조금 더 큰 승운은, 딱히 내려다 볼 필요 없이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로 재준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면서도 좋았다.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통통하게 부푼 입술은 색이 옅었다. 그 색이 재준의 성기 색깔과 똑같았다. 어딘가에서 들었더라. 입술 색이 귀두의 색이라고 했던가. 

그래, 그런 색이다. 입술을 볼 때마다 재준의 은밀한 내부를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잡아먹고 싶었다. 승운이 한발자국 다가섰다.

재준이 입을 열었다.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혀를 감아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승운은 재준 앞에 멈춰 섰다.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재준이 말했다. 

“제가 뒤는 처음이라.”

“…….”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처음 몸을 겹칠 때도 그러지 않았는가. 불가능하다고. 아니, 근이완제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그런데 보통은 섹스를 그렇게 각오하고 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근이완제는 먹지 않았는데.”

“……근이완제 진심이었어요?”

“예, 하지만 보통은 먹지 않더라고요. 좀 이상한 용도로 쓰이기도 하는데. 저는 지승운씨와 맨 정신으로 하고 싶습니다.”

승운이 웃어보였다.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몸을 재준에게 밀착시켰다. 부푼 아랫도리가 닿는 자리에 마찬가지로 힘을 받아 서 있는 재준이 느껴졌다. 환상이 아니다. 꿈도 아니었다. 

맞춘 입 사이로 무언가가 들어온다. 흔들리는 자신을 바로잡아주는 힘이다. 이게 가이딩이구나. 그때도 느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확연하게 가이딩의 힘을 느끼는 건 처음이다. 

이게 가이딩이었다.

지승운이 그동안 받은 것은 가이딩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가이딩보다도 몸이 닿아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박사님.”

재준의 허리를 감싼 승운이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탄탄한 등의 건조한 피부가 자신의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재준이 얕게 숨을 내쉬었다. 승운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푹 묻었다. 자신이 낸 상처가 이 자리에 있었다. 그게 마음 아프면서도, 뭔가 흔적이 남았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낀다.

“여기서 더 할 건데.”

승운이 몸을 떼며 물었다.

“감당하실 수 있어요?”

자신을 바라보는 승운의 진지한 얼굴에 재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순간을 위해 뭘 얼마나 찾아봤는지 안다면 이런 말은 안할 텐데. 감당이라니.

“마음껏 맛보시죠.”

재준이 승운의 넥타이를 당겨 입을 맞췄다.

승운은 재준이 움직이는 대로 끌려갔다. 어느새 재준이 넥타이를 놓고 승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재준은 천천히 침실로 이동하며 슬쩍 동선을 살폈지만 입술을 떼진 않았다. 승운이 옅게 숨을 내뱉었다. 입이 떼어지자 흥분 가득한 눈동자가 보였다. 승운이 아쉽다는 듯 이마에 촉 입을 맞춘 뒤 “잠시만요.” 라고 말했다. 왜 그러나 싶어 보자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어차피 밖은 바다라서 볼 사람도 없는데 왜 그러나 싶었다. 의아한 얼굴로 보는 재준의 모습에 승운이 얼굴을 붉혔다.

“아무도 안 보는데.”

“알아요.”

“커튼을 여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에스퍼들은 날 수 있어요.”

승운이 말했다. 재준은 얼마 전에 그가 허공을 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실제로 간혹 비행종 괴수를 잡기 위해 하늘로 솟아오르는 에스퍼들도 있었다.

“혹시 누가 보기라도 하면.”

“제가 지승운 씨와 섹스를 하는 것을 보기 위해 힘들여서 이곳까지 날아오를 에스퍼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전 박사님 몸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요. 그게 설사 달빛이라도.”

“그저 자연물일 뿐인데.”

“괴수들도 자연물이잖아요.”

그…… 괴수들은 현재준과 승운이 붙어먹는걸 보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다른 에스퍼나 가이드들도 둘이 붙어먹는 걸 신경 쓰지 않겠지만 현재준은 가이드로서의 정체성이나 마음가짐이 아직 부족했다.

“제가 그런 것에조차 질투를 하길 바라시나요?”

그리고 지승운은 그냥 정신이 나가있었다.

에스퍼가 가이드에 대한 집착이야 원래 유별나지만 타인에게 몸을 보이거나 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 에스퍼들도 많았다. 승운은 생각보다 자신이 질투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안다고 고칠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재준은 애교를 부리듯 머리를 비비적대는 승운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 네 뜻대로 해라. 이쯤 되면 뭐든 상관없었다.

승운이 재준에게 입을 맞췄다. 안경이 승운의 콧대에 닿았다. 재준이 안경을 벗으려고 하자 승운이 말렸다.

“왜?”

“시력 나쁘잖아요.”

“예. 하지만 키스하는 데 불편하지 않습니까?”

“저는 불편해도 되요.”

승운이 괜찮다는 듯 말했다.

“박사님이 절 봐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오히려 안경을 제대로 씌워주며 재준을 향해 웃었다. 사실 안경을 벗기고 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러면 너무 자극이 될 것 같았다. 처음 하는 건데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도망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누가 박사님한테 박고 흔들어대는지.”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재준의 손을 끌어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댔다. 손바닥에 촉 하고 입을 맞춘 승운이 손가락을 입안에 넣어 핥아 올렸다. 재준이 “후.” 하고 옅게 숨을 내뱉었다.

“똑똑히 봐주세요.”

재준의 팔을 자신의 허리에 두른 승운이 그에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몸을 더듬거리듯 만지다가 재준은 저도 모르게 급하게 승운의 벨트와 버클을 풀었다. 승운이 셔츠 단추를 뜯듯이 풀어냈다. 그가 바지를 먼저 내렸을 때, 속옷 아래로 가터벨트가 드러났다.

아, 셔츠 고정. 맞아, 그게 있었지. 재준이 조금은 놀라운 얼굴로 허벅지에 자리한 검은 가터를 바라봤다. 남성의 가터벨트가 이렇게까지 선정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승운이 고정한 셔츠를 빼어내 벗었다.

속옷에 가터벨트라니.

재준이 입맛을 다셨다. 그 소리가 승운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다. 자기만 욕정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역시 자신에게 발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쾌감이 느껴졌다.

“지승운 씨.”

“네.”

“가터 벗겨 봐도 됩니까?”

“…….”

이걸 기뻐해야하나. 승운이 잠시 멈칫하다가 웃어보였다.

“박사님 하고 싶으신 대로.”

그렇게 말하자 재준이 한쪽 무릎을 꿇고 승운의 앞에 섰다. 마치 구음을 할 것 같은 자세였다. 

와, 씨. 보는 것만으로도 쌀 것 같네.

재준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었다는 사실부터 배덕감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자신도 그 앞에 무릎 꿇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승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리를 벌리고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은 위 엉망진창이 되도록 재준의 좆을 빨아올리고 구멍을 핥아댈 것이다.

벌써부터 그렇게 하면 도망가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됐다.

재준이 승운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탄탄하다 못해 단단하기까지 느껴지는 감촉에 고개를 들어 올린 재준이 몇 번이고 더 허벅지를 주물러댔다. 승운이 피식 웃어 보인 뒤 재준의 턱 끝을 들어올렸다. 조금 건조하다. 하지만 그 날 저 피부가 열기에 촉촉하게 젖어드는 것을 본 승운은 이 건조함 마저 기대가 됐다.

“안 벗겨요?”

그 말에 승운을 올려다보던 재준은 손을 들어 허벅지에 있는 가터를 끌어내렸다. 탄성 있는 밴드가 남긴 붉은 자국에 재준은 군침을 삼켰다. 결국 참지 못한 것인지 반대쪽 허벅지에 입을 갖다 댄 재준이 고개를 들어 승운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얼굴이 다가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승운은 단숨에 굳었다. 허벅지에 혀가 닿는다 싶더니 재준의 치아가 살을 스쳐 가터벨트를 물고 끌어내렸다. 무릎까지 가터벨트를 끌어내린 재준이 벨트를 놓고 승운의 무릎 위에 입 맞춘 뒤 고개를 들어올렸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 것 같은 웃음에 승운이 몸을 굳혔다.

아, 씨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승운이 재준을 일으켜 침대위로 던지듯 밀어냈다. 매트리스는 현재준의 체중이 전부 실려도 흔들리지 않았다. 승운이 재준의 위에 올라탔다.

“박사님.”

“예.”

“현재준 씨.”

승운이 말하며 재준의 티셔츠를 끌어올렸다. 그가 벗기기 편하도록 팔을 들어올렸다. 얼마 전에 봤던 몸이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로 볼 때마다 환희가 일었다. 

승운이 숨을 깊게 내쉬며 재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쪽 쪽 가볍게 입 맞추다 강하게 빨아올리자 재준이 “으.” 하고 낮게 신음했다. 승운이 재준의 벨트와 버클을 풀고 재빨리 바지를 벗겼다. 발목에 걸린 바지를 내린 승운은 양말을 끌어당기며 벗긴 뒤 발목부터 무릎까지 혀로 훑어 올라갔다. 재준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릎에 입 맞춘 승운이 혀로 핥았다. 그러면서도 손은 더듬더듬 위를 향하고 있었다. 

탄탄한 허벅지를 지난 손이 속옷 위를 스쳤다. 제대로 반응하고 있다.

“저희는 콘돔 없이 하는 걸 권장하는 거 아시죠?”

승운이 말하며 속옷 위로 힘을 줘 문지르자 위에서 신음이 떨어졌다. 재준의 강도와 체온이 느껴진다. 

“알고, 있습니다.”

부족하다. 가이딩을 받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부족했다.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싶었다. 승운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팔의 체중에 기대어 앉아있는 재준을 밀친 뒤 위로 올라타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단단한 육체였다. 입맛을 다신 승운이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며 재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흥분한 것이 보인다.

“오늘은 천천히 할게요.”

마치 안심시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하는 말에 재준이 웃어보였다.

“그러십시오.”

“제가 제어 못하면 때려도 돼요. 오늘은 진짜 부담스럽게 안할게요.”

그러면 다음에는 부담스럽게 한다는 건가? 재준은 어서 해보라는 듯 턱을 들어올렸다. 승운이 아래로 떨어져 재준의 허벅지 안쪽에 입을 갖다 댔다. 

재준이 움찔했다. 저번에도 빨린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와 집요함이 다른 느낌이다. 허벅지 안쪽을 빨리며 성기가 만져지자 저도 모르게 허리를 튕겨 올렸다. 재준이 움직일 때마다 복근이 깊어졌다. 승운의 혀가 성기 위 속옷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오다 귀두가 있는 지점에서 멈췄다. 혀로 짓누르자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승운이 웃으며 입으로 드로어즈를 끌어내리자 재준의 성기가 튕기듯 올라왔다. 끝이 젖어있었다. 

승운은 그대로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재준이 움찔하며 승운을 내려다봤다. 승운이 그대로 성기를 머금으며 재준을 올려다봤다. 막기 위해 머리카락을 잡았지만 승운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된 눈으로 재준을 바라보며 혀를 움직였고 손으로 고환과 회음을 자극했다.

“……흐, 읏.”

하반신에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뿐만 아니라 시각으로도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재준은 눈앞이 흐려졌다. 저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선 음란하게 자신의 물건을 빨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재준이 고개를 젖히며 본능적으로 허리를 튕기자 승운은 그것조차도 만족스럽다는 듯 신음을 내고는 재준의 물건을 끝까지 삼켰다.

“으, 아! 자, 잠깐만!”

현재준이 승운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분출할 것 같았다. 일부러 허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등을 매트리스에 붙였지만 자극은 갈수록 심해졌다. 강한 압력으로 빨아들이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흐, 큿! 아…… 아, 승운아! 읏!”

결국 현재준이 승운의 입에 분출했다. 승운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가에 묻은 정액까지 손가락으로 훑어 입안에 넣고 삼킨 뒤 현재준을 바라봤다. 재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그걸 왜…….”

“좋으니까.”

“…….”

“아, 가이딩에도 좋은데…… 그냥 박사님 거라 먹고 싶어요.”

되바라지지 못한 에스퍼 같으니. 현재준이 승운의 아래를 바라봤다. 아직 입고 있는 드로어즈가 뚫릴 듯 성기가 솟아있었다.

“나도 해줄까?”

현재준의 말에 승운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제가 해주고 싶어요.”

승운이 젤을 자신의 손바닥에 발라 문질렀다. 대부분의 가이드들은 성적인 행위가 익숙하기도 하고 스스로 풀기도 했지만, 재준은 그런 경험이 일절 없는데다 가이딩 교육 또한 받지 않았을 게 분명했기에 승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주고 싶었다. 이 행위가 거북하지 않도록.

체온으로 데운 젤을 재준의 애널에 바른 승운은 구멍 주변을 문지르며 가슴을 핥아 올렸다. 바로 침입할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그냥 손가락으로 구멍 위를 쓰다듬자 재준이 어색한 얼굴로 승운을 내려다봤다.

유두를 깨물고 혀로 누르듯 핥자 재준이 움찔했다. 아래쪽도 그랬지만 가슴의 자극도 심했다. 신음을 억누른 재준이 승운의 두피에 손을 넣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승운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왜 그러냐는 얼굴을 했다. 재준의 얼굴이 상기되다 못해 눈물과 땀에 젖었다. 

와. 

승운이 신기하다는 듯 얼굴을 바라봤다.

와, 너무 야해.

“그냥 넣어도 괜찮아.”

게다가 저런 말까지 하다니 큰일 날 사람이네. 승운이 생각했다. 물론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처넣고 싶지만 그러면 재준이 고생한다. 그의 처음을 무턱대고 가질 수는 없었다. 제멋대로 해서 섹스를 싫어하게 되는 것도 싫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승운은 엄지를 구멍에 넣을 듯 힘을 주더니 넣지 않고 다시 문지르고, 다시 침입할 것처럼 힘을 줬다가 뺐다. 낯선 감각인데 나쁘지 않았다. 재준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돌리자 승운이 웃었다.

“좋아요?”

“으…….”

“스스로 움찔거리는 거 느껴져요? 자연스럽게 벌어지면 그때 넣을게요.”

“……거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자극이 있으면 벌어져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계속해서 손가락을 문질러댔다. 힘을 살짝 줬다가 뺐다가 하자 어느 순간 구멍에 폭 하고 엄지가 들어갔다. 아프지 않았다. 이상한 압박감도 없었다. 하지만 낯설어 재준은 저도 모르게 구멍을 조였다가 풀었다. 재준도 승운도 그걸 느꼈다.

승운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자 재준은 부끄러워 얼굴을 가렸다. 차라리 안경을 벗을 걸 그랬나. 하지만 제 몸을 가지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니 안경을 벗었다간 아까울 뻔했다.

승운이 엄지로 재준의 안쪽을 문지르며 손가락을 천천히 넣었다가 뺐다. 이질감이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젤이 충분한 윤활을 해서인지, 아니면 그가 잘해서인지 움직일 때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고양됐다. 가슴부터인지, 하반신부터인지 알 수 없었다. 귓가에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승운의 움직임에 따라 재준도 허리를 틀었다. 헉헉대는 숨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야해.”

“……지승운 씨가 더 야합니다.”

현재준의 말에 승운이 샐쭉 웃으며 엄지를 빼더니 검지와 중지를 넣었다. 생각보다 두껍고 긴 손가락이 엄지보다는 확실히 존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부드럽게 안쪽 점막을 미끄러뜨리는 승운의 손길은 아프기는커녕 이미 선 성기에 더 피를 몰리게 했다. 뭔가 저릿하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재준이 허리를 흔들자 승운이 “하아.” 한숨을 쉬며 재준의 목덜미를 빨아올렸다.

승운은 조심스럽게 현재준의 아래를 넓혀갔다. 빙글빙글 돌리는가 하면 손가락으로 안쪽을 쓸어내렸고 회음부를 엄지로 눌러 자극했다. 손가락 두개로 피스톤질 하듯 안을 헤집을 때마다 재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어진 쾌감에 몸을 떨며 할딱였다. 

승운의 손가락이 잠시 빠지고 세 개가 다시 들어왔다. 어떠한 것도 넣어보지 않았던 곳이 그렇게까지 늘어나자 경이감을 느꼈다. 역시 이완제는 필요 없는 게 맞았다고 생각한 재준이 승운을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승운이 사르르 웃으며 안쪽에서 손을 휘저었다. 

미소에 방심한 재준이 갑작스런 자극에 승운의 팔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질척이는 소리가 자신의 몸에서 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앓는 듯한 소리와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승운이 “좋아요?” 하고 물었다.

“흐…….”

“나 별로예요?”

“좋아.”

재준이 답했다. 보면 알 텐데. 싼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그라들지 않고 계속 빳빳한 자지를 보면 모르나.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건가.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아니면 심술이라도 나온 건가 싶었다. 누가 버릇을 들였는지 모르겠지만 고약하네. 재준이 손가락을 까딱여 승운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승운이 몸을 밀착시켜 얼굴을 갖다 댔다.

“좋아요?”

“응.”

“제가 좋은 거 맞죠?”

그러면서 안쪽에서 손가락을 휘젓는다. 답을 하려던 순간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 닿은 건지 재준이 움찔하며 승운에게 안겼다. 재준의 반응에 승운도 몸을 움츠렸다. 

잘 느껴. 야해. 민감해. 어쩌지. 

딜레이가 생기는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손은 유려하게 움직였다. 재준이 몇 번 더 몸을 움칫했다. 간 건가 싶어 움직임을 멈추자 “후.” 하고 참았던 숨을 내뱉은 재준이 물기어린 눈으로 승운을 바라봤다.

“……멈추지 마요.”

낮게 깔린 목소리가 섹시했다.

“너, 좋아해……. 잘하는 것도, 좋습니다.”

재준이 말하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갈 뻔했다. 구멍 안쪽이 움찔거리는 걸 스스로도 느낀다. 멈추지 않았다면 그대로 갔을 것이다. 사실 아직도 구멍 안쪽에 닿은 손가락과 그 열기에 안쪽이 욱신거렸다.

“후, 승운아.”

이런 때에 이름을 부르면 반칙이다. 승운이 참지 못하고 손을 빼냈다. 안에서 지분거릴 때는 신음을 참을 수 있었는데 빠져나갈 때는 “아읏!” 하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넓혔으면 시도해 볼 만 하겠지, 승운이 생각하며 속옷을 벗었다. 재준은 저게 들어갈까 잠깐 고민했다. 

들어가겠지. 역시 근이완제를 쓸걸 그랬나.

하지만 섹스를 하기 위해 매번 그걸 먹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약간의 비장한 마음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재준을 바라보며 승운은 “저 믿죠?” 물었다. 재준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은 곤란한 얼굴을 한 승운이 작게 내뱉었다.

“믿으면 안 되는데.”

“……그렇습니까?”

“예, 저는 절 못 믿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웃는 승운의 모습에 재준이 넋 나간 듯 바라봤다. 

“하지만 믿는다고 하니까, 잘 참아봐야죠.”

와, 어떻게 저런 얼굴을 가지고 있지? 그대로 머릿속에 간직하고 싶었다. 지승운이 자신의 스스로 표정을 보지 못한다는 게 이렇게 아까울 수 없다. 다른 누군가한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본인은 알았으면 할 정도로 야한 얼굴이었다. 재준이 입맛을 다셨다. 이래서 조상들이 보기 좋은 떡을 찾았나.

“아프거나 싫으면 말해요. 좋아도 말해주고.”

도톰한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 승운이 자신의 몸에 기대면 끌어안고 입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한 재준은 구멍에 닿는 승운의 자지에 움찔하며 구멍을 조였다 풀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다. 기대가 더 컸다.

“진짜, 진짜 아프면 말해야 해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승운이 몸을 기울여 자신과 맞닿았을 때부터, 입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은 진작 날아갔다.

안쪽으로 들이닥치는 귀두부터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따뜻했다. 뜨겁지 않은데 뜨겁다고 느껴지는 체온이 낯설다. 벌어져서는 안 되는 구멍이 잔뜩 벌어지며 침범하자 절로 가쁜 숨이 터졌다.

승운이 귀두를 눌러 재준의 구멍 안쪽으로 넣었다가 뺐다. 빠듯하다. 처음이라 그런지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한 번에 넣으면 아플 텐데. 

풀어줄 만큼 풀어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이었나. 다시 손가락을 넣었다간 재준이 더 무서워할 것 같아 승운은 재차 귀두를 넣었다가 뺐다. 구멍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몇 차례 귀두만 넣었다가 빼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더니 어느 정도 그 크기에 적응을 한 것인지 재준의 애널이 승운의 것을 폭 감싸듯 물었다. 그러고는 오물거리는 것이 이쯤이면 됐겠다 싶어 승운이 서서히 하반신에 힘을 줘 재준의 안쪽으로 침입했다.

“윽!”

재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파요?”

승운이 뒤로 물러서며 묻자 재준이 승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잡았다. 자신의 팔위에 얹어진 손이 떨리는 것을 본 승운은 이대로 홀랑 잡아먹고 싶다는 생각과 그만둬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냥 압박감이…….”

재준이 답했다. 이미 풀릴 만큼 풀려서 아픔은 없었다. 입구가 빠듯하긴 했지만 그것도 몇 번이나 익숙하게 도와줬다. 오히려 그 자극에 성감이 고조되어 자신의 안쪽으로 들어온 승운의 성기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자지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배 안이 녹아내릴 것 같다.

다만 너무 컸다. 눈으로 볼 때도 컸지만 안으로 들어왔을 때 느껴지는 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승운이 빠져나가려 했을 때 내부가 끌려가는 것 같았다. 조금만 틀었는데도 크게 움직인 것 마냥 숨이 헉헉 빠져나왔다. 그러면서도 미끄러지는 감각이 소름이 돋았다.

뭔가 좋았다.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물으면 답하지 못하겠지만 그 감각을 다시 겪어보고 싶었다.

“더, 넣어요.”

그렇게 말하면 못 참는단 말이에요. 승운이 재준의 어깨에 무너지듯 기대며 작게 말했다. 성기가 다시 안쪽으로 들이닥쳤다. 

“아, 윽!”

재준의 안이 지나치게 좁다. 이대로 움직였다가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승운은 무서웠다. 하지만 제 목덜미를 꼭 끌어안고 가쁜 숨을 내쉬는 재준의 모습에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것 같다.

“오늘…… 여기까지, 할 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지만, 재준이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 둘 수 있었다. 재준이 고개를 저었다.

“닥치고…… 넣어. 읏, 아! 좋아…….”

자제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말은 안하는 게 좋은데. 승운이 생각하며 다시 천천히 진입했다. 재준의 호흡에 맞춰 조금씩 넣고 넣다보니 어느 샌가 반절 넘게 들어갔다. 하지만 안쪽에서 무언가가 닿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까지만 넣어야겠군. 승운이 생각하며 재준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허리에 감싸게 했다.

재준은 몸을 숙이며 다가오는 승운을 바라봤다.

승운의 예쁜 얼굴이 눈앞에 다가와 배시시 웃자 순간 힘들었던 것도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이래서 예쁘게 생겼나. 가이드 꼬시려고? 그렇다면 에스퍼 진화에 찬사라도 보내야했다. 자신의 입에 쪽쪽 입 맞추는 남자를 보니 재준은 이것으로도 만족한 기분이었다. 그래, 뭔가가 충족됐다. 텅 비워졌던 것이 차오르는 것처럼.

“진짜 좁네.”

조금만 움직여도 콱 물고 놔주지 않았다. 

“긴장 풀어요, 박사님.”

승운도 아프긴 했지만 재준이 더욱 힘들 것이다. 학 학 숨을 고르며 승운의 손을 맞잡은 재준의 모습에 걱정 말라는 듯 토닥인 승운이 “급하게 안 해요.” 말했다. 

그러더니 정말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재준의 얼굴에 입 맞추고 목덜미를 핥아 올리고 유두를 문지르거나 꼬집었다. 좋은 반응에 손을 좆으로 옮겨 문지르자 재준은 신음을 억눌렀지만 계속되는 자극에 흣, 윽 하고 반응을 하며 구멍 안쪽을 조였다. 

조금씩 움직이며 적응할 수 있게 한 승운은, 자신의 움직임에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꾹 눌렀다가 견디지 못해 터져 나오는 재준의 숨이 야해 승운은 일부러 입을 갖다 대서 내뱉은 숨을 모조리 삼켰다. 

“움직일게요.”

승운이 말했다.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나가는 감각이 그대로 느껴졌다. 보이는 것 보다 더 긴 물건이 빠져나가는데 시간이 꽤 길었다. 그리고 다시 안쪽으로 밀려온다. 나갈 때 어딘가를 긁고 나간다면 들이닥칠 때는 퍽 소리가 나게 특정 장소를 때렸다. 

안쪽으로 드나드는 성기가 생경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지만 흥분했다. 승운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크기 때문인지 내부를 얻어맞는 느낌이다.

몸 안에 이런 공간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처음엔 압박감이 있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니 묘한 감각이 안쪽부터 꾸물거렸다. 기분이 이상하다. 좋은 것 같기는 한데, 좋은 게 확실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제 멋대로 움찔거렸다. 재준은 자신의 물건이 점점 힘을 받아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런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체도 공부를 해볼걸. 승운이 안으로 치받을 때마다 배 속에서 뭔가가 욱신거렸다. 

천천히 움직이던 승운은 희미하게 신음을 내는 재준을 바라보다 성기에 손을 올렸다. 방금 전까지는 조금 사그라들었던 물건이 다시 단단해져있었다. 승운이 웃음을 흘렸다. 

“박사님, 괜찮아요?”

“…으…….”

재준의 눈가가 촉촉하다. 아 핥아먹고 싶다. 저 빌어먹을 안경. 하지만 안경을 벗겼다간 배려도 하지 않고 마구 몰아칠 것 같았다. 그리고 금방 싸버리겠지. 승운은 재준이 너무 예쁘게 생겨서 무서웠다.

승운이 “조금만 속도 올릴게요.” 말했다.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거부할 걸, 하는 생각을 했다.

승운이 퍽퍽 처 올리듯 움직일 때마다 여기 저기 번쩍하는 감각을 견디지 못한 재준이 허리를 뒤틀 때면 승운이 웃으면서 안을 찍어 눌렀다. 천천히 하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도 되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감각에 애가 탔다. 뜨거운 것이 마찰을 일으킬 때마다 물을 만들어내는지 찰박이는 소리가 들렸다. 퍽퍽 처박는 허리짓에 살들끼리 부딪혀 철퍽이는 소리가 침실을 채운다. 

“아흑, 학, 흐…… 아!”

어떤 말도 나오지 않은 채 그저 흐느낌이 담긴 신음을 내뱉던 재준의 다리와 복부가 부들부들 떨렸다. 무언가가 잔뜩 부풀었다가 팍 하고 터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터졌다. 참으려고 했지만 사정감을 견디지 못한 재준의 좆이 튀어 오르며 정액을 분출했다. 동시에 제 구멍 안쪽이 절로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승운이 “큿.” 소리를 내며 더욱 격하게 움직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재준의 정액이 승운의 몸 위로 튀어 올랐다. 승운의 뺨에도 정액이 묻었다.

“학, 으… 읏! 미, 미안!”

“더 싸주세요.”

승운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뺨에 묻은 정액을 손가락으로 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니까 그걸 왜……. 체액이 에스퍼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알지만 굳이 저런 식으로 섭취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민망한 한편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재준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승운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사정 직후의 나른함이 오기도 전에 성감이 먼저 자극되어 재준은 허벅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호흡은 계속 가빠졌다.

“……읏, 으, 흐윽, 하…… 아! 읏!”

“소리 참지 마세요.”

“안…… 참……! 앗! 아읏!”

승운이 기분 좋게 웃었다. 신음을 참는 것이 아니라 신음을 내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그 누구도 현재준을 이런 식으로 자극한 적이 없던 것이다. 지승운 자신 말고는.

“박사님, 재능 있는 거 알아요?”

“흐—… 하윽!”

승운이 내부를 짓누르듯 쳐올릴 때마다 절로 구멍이 조여 들며 복부와 허벅지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금세 일어선 재준의 물건에 황홀감이 느껴졌다. 승운은 섹스를 하면서 상대가 기뻐하는 것에 자신조차 따라서 좋아질 줄은 몰랐다. 자신의 복부에 비벼지는 재준의 자지에는 뿌듯해졌다. 누군가와 자면서 단 한 번도 그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는데, 박아 올릴 때마다 배에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것이 아쉬워 일부러 더 복부를 밀착시켰다.

승운이 재준을 내려다봤다. 쾌락에 젖은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흐르는 침을 핥아 올린 승운이 입을 맞췄다. 쪽 쪽 가볍게 키스하자 재준이 조여 들었다. 

그의 등을 잡던 손이 힘을 놓쳐 척추를 쓰다듬듯 아래로 흘러내렸을 때 승운 역시 참을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강하게 찍어 내리자 현재준이 “읏!” 소리냈다. 승운의 입에서도 달뜬 숨이 나왔다.

동시에 갔다. 승운은 싼 직후에도 천천히 골반을 돌려 움직이며 재준의 옆에 무너지듯 얼굴을 갖다 댔다. 재준이 후들거리는 팔을 들어 승운의 목에 둘렀다. 승운의 움직임에 맞춰서 재준도 엉덩이를 천천히 흔들었다.

“……아. ……그거, 좋아.”

“뭐가? 뭐가, 좋아요?”

“거기…… 아, 멈추지 말고! 큿! 아, 흣…… 하!”

재준의 말에 승운은 참지 못하고 격하게 움직였다.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며 몸을 떠는 재준을 그대로 집어삼키고 싶어졌다. 승운이 체위를 바꾸기 위해 성기를 살짝 뺐을 때 재준이 갑자기 와락 승운에게 안겨들었다.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목을 감싼 재준의 행동에 당장이라도 쌀 것 같았다. 승운이 참아내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재준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승운이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재준이 도리질을 했다.

아파서 그런가 싶어 승운은 재준의 성기를 잡았다. 자지가 말랑했다. 역시 힘든가 싶어 귀두를 문지르는데 축축한 것이 요도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 쌌어요?”

“윽…….”

“엄청, 잘 느끼네.”

승운이 웃으며 죽어가는 재준의 성기를 흔들어 세웠다. 읏, 윽 하고 참는 소리가 났다. 역시 체위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승운이 재준을 안아 올렸을 때 다시 몸을 떨었다.

“으! 흐으! 아! 학, 잠깐만……!”

잠깐이라는 말에도 승운은 멈추지 않았다.

승운이 박을 때 마다 재준은 흥분했다. 승운이 어디를 찔러도 어느 방향으로 틀어도 온 몸에서 쾌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철퍽철퍽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동시에 젖은 물소리가 났다. 성기와 맞물린 구멍이 정액으로 질척거렸다.

“야해.”

위에서 승운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재준이 승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축인 재준에 촉 촉 입 맞추자 승운의 움직임이 더 거세어졌다. 거친 움직임에 견디지 못하고 흐윽, 흑 하고 우는 소리를 내자 승운이 입을 떼어내곤 미안하다며 귀에 혀를 들이밀었다. 재준이 두 눈을 꾹 감았다. 축축한 소리가 귓가에서 들리자 성감이 더 고조되는 듯 했다.

“눈 감지 말고.”

승운이 재준의 뺨에 손을 올렸다. 재준이 눈을 반쯤 떠올렸다.

“저 봐요.”

“보고… 있어.”

재준의 말에 다시 승운이 처 올리기 시작했다.

헐떡이는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안쪽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더 믿어지지 않는다. 전립선을 자극하면 쾌감을 느낀다고는 하지만, 전립선을 자극하지 않았는데도 쾌감을 느낄 줄은 몰랐다. 어쩌면 승운의 성기가 커서 넣는 것만으로도 전립선이 눌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괜찮은 걸까. 이대로 바보가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승운이 체위를 바꾸기 위해 성기를 빼냈을 때 정액이 주륵 흘러내렸다. 재준은 이때다 싶어 몸을 틀었다. 기어서 도망치는 재준의 다리를 승운이 붙잡고 당겼다. 질질 끌려온 재준이 거친 숨을 내며 승운의 복부를 밀어냈지만 그것이 자극이라도 된 것인지 승운은 재준의 손을 붙잡아 손가락을 혀로 핥으며 다시 구멍 입구에 귀두를 맞췄다.

“아……, 읏! 잠깐……. 흐앗!”

그리고는 재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성기를 푸욱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깊게, 그리고 얕게 들어온 좆이 여기저기를 헤집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낮은 웃음소리를 낸 승운은 재준의 좆을 잡고 흔들며 얕게 박았다. 앞뒤에서 오는 자극에 울음기가 있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귀두의 끝이 특정 부분을 찍어 눌렀다. 재준의 허리가 위로 떠올랐다. 

“헉! 아!”

닿은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어 몸을 부들부들 떨던 재준은 그곳이 전립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기에 잔뜩 벌어진 안쪽으로 느껴지는 쾌감에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직접 전립선이 문질러지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저릿저릿한 감각에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아파요?”

승운이 물었다. 재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닿, 닿았……!”

“……어디에?”

승운이 물었다. 현재준은 답 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승운이 현재준의 허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팔로 자신의 몸을 지탱한 재준은 느긋한 움직임에도 흑, 윽 소리를 냈다. 엉덩이와 허벅지, 복부, 아니 어깨까지 온 몸이 떨렸다. 주체할 수 없어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재준의 몸을 승운은 만족스럽다는 듯, 그러나 부족하다는 얼굴로 내려다보며 입술을 핥았다.

“응? 어디에요?”

승운이 웃으며 안쪽을 짓누르자 재준이 무너져 내렸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가 좋아요?”

내벽을 문지르는 통에 재준은 침대에 기대어 엉덩이만 들어 올린 채 학, 학 숨을 내뱉었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 아래로 타액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에 승운은 흥분했다. 그가 성기를 손으로 잡고 현재준이 느끼는 부분으로 추정되는 곳을 돌리듯 문지르다가 찍어올렸다. 

“아! 흣! 윽, 아!”

“너무 얕은데? 여기라면 손가락만으로도 가겠는데요?”

재준이 도리질을 쳤다. 아까의 쾌감이 다가 아니었나. 자신의 몸 안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좋아요?”

재준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싫지 않았다. 좋냐고 묻는다면, 너무 좋아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응?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넣어도 금방 싸겠어.”

그렇게 말하는 승운의 목소리가 조금은 스산했다. 하지만 재준의 귀에는 그저 달달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자신을 탐내고 취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몰랐다. 

재준이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처음에는 그곳을 자극하는 게 무서웠는데 지금은 더 큰 것을 원했다. 그의 움직임에 승운이 씨발 하고 욕을 하더니 퍽 하고 쳐올렸다.

“다른 사람 꺼 넣으면…….”

그렇게 말한 승운은 재준의 골반을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재준이 부들부들 떨며 끌려왔다. 그대로 재준의 다리를 들어 몸을 돌리게 한 승운이 자신의 위에 그를 앉혔다. 승운의 다리에 그대로 앉은 재준은 승운에게 매달렸다. 성기에 꿰뚫리다시피 한 자세였다. 주륵 하고 흰 정액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제대로 싸지도 못했다.

“하, 박사님…….”

“으흑, 흐, 흐으……아, 아! 학! 윽!”

승운이 천천히 움직이며 재준의 성기를 주물렀다.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아 축 늘어졌던 성기가 다시 힘을 받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랑, 하면, 그 사람 죽여 버릴 거예요.”

승운이 재준에게 귓가에 말한 뒤 귓바퀴에 혀를 세웠다. 현재준이 움찔하자 웃는 소리를 내며 입을 떼어냈다. 재준이 흐느꼈다. 눈물로 젖은 얼굴이 지독히도 야했다. 승운이 눈가를 핥아 올렸다.

“제가 박사님을 아프게 할 리 없잖아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현재준이 “흐…… 아, 알아.” 답했다. 

“박사님.”

“아! 아!”

승운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자세 때문에 누웠을 때나 엎드렸을 때보다 훨씬 깊게 성기가 틀어박혔다. 위로 찍어 올릴 때마다 재준은 참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승운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재준을 보며 승운은 더더욱 빠르게 치고 올렸다. 찍어 내리는 게 아닌데도 퍽 퍽 소리가 났다. 젤과 정액이 범벅이 된 안쪽에서 찌걱이는 소리와 물소리가 났다. 무언가가 찰박거렸다. 

“아흑, 윽! 아, 승운, 아! 잠시…… 흐, 좋아…! 조, 좋은데……!”

너무 힘들었다. 말도 안 되는 곳 까지 들어찬 기분이다. 이대로 진짜 미칠 것 같아서 재준은 도망치듯 일어섰다. 빠져나가던 성기가 입구에 걸렸다. 하필 그 지점이 전립선이 있는 곳이어서 현재준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러다 죽으면 어쩌지? 복상사라는 게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 경우는 복하사 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섹스를 하다가 너무 좋아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자극에 힘이 빠진 재준이 주저앉으려고 했지만 승운은 그가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는지 재준의 손목을 잡아 끌어내리며 퍽 하고 쳐올렸다. 재준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며 복부가 꿰뚫렸다. 재준이 승운의 어깨에 무너지듯 기댔다. 미칠 것 같은 자극에 배꼽 부근에 손을 갖다 댄 재준은 그럴 리 없겠지만 왠지 뭔가 볼록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재준이 승운에게 매달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아니겠지. 재준이 생각하며 떨리는 손으로 꾹 누르자 안에 틀어박힌 승운의 성기가 꺼떡였다. 승운이 재준의 귓가에 기분 좋은 신음을 내뱉었다.

힘들고, 조금은 아픈 것 같은데 좋았다. 어쨌든 계속해서 안쪽에 자극이 있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승운이 재준을 내려다봤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에 뿌듯해진다고 하면 싫어할까.

승운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에 맞춰 재준이 허리를 흔든다. 본능적으로 쾌락을 찾아 움직이는 몸짓이었다.

어딘가에 닿았는데, 그게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의 흥을 돋우는 지점이 깊은 안쪽에 있다는 것이다. 아픈데 너무 좋았다. 승운이 조금만 몸을 틀어도 자극점에 닿아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재준의 움직임에 맞춰 승운도 움직였다. 더 깊게 들어갈 수 없다 싶었던 성기가 어딘가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때 재준의 머릿속에 스파크가 일 듯이 번쩍번쩍 무언가가 터져나가며 이명이 들렸다.

“헉! 아! 흐! 흐아!”

몸속에 느끼는 지점이 한 곳이 아니라 두 곳이었다. 전립선 말고 또 다른 어딘가가 있는 듯 했다. 재준이 승운의 몸에 안겨들어 부들부들 떨었다. 

“아아—… 학…… 아—!”

자신이 소리를 치는지도 모른 채 재준은 앞이 새하얗게 변하는걸 보며 눈을 감았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에스퍼의 감정과 표출된 에너지가 어느 지점에서 자신과 뒤섞였다. 흥분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액이 팍 하고 분출되더니 성기를 따라 줄줄 흐르는 느낌이다. 정액 치고는 소리가 이상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데, 계속 사정하는 느낌이 든다. 승운이 재준의 귀두를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복부가 떨렸다. 그가 천천히 성기를 주무르며 내벽을 부드럽게 치켜 올렸다. 재준의 몸이 움찔 움찔 떨린다. 성기에서 흐르는 체액은 승운이 움직일 때마다 멈췄다가 다시 흐르길 반복했다. 사정감이 끊임없이 지속됐다. 이게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고 말하며 재준이 고개를 저으며 흐느꼈다. 배꼽에 고인 투명한 물이 찰랑였다. 눈에서도 물이 뚝뚝 흐른다. 신음소리는 어느 샌가 울음으로 변질되어있었다. 

“박사님.”

재준은 눈을 감았다.

“현재준 씨.”

힘들고 뻐근한데도 나른하고 기분이 좋았다. 승운의 손이 현재준의 머리를 감쌌다.

“절 좋아해주세요.”

승운이 현재준의 귓가에 말했다. 재준은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작게 “이미 좋아해…….” 답했다.

그 말에 승운은 왠지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

승운이 눈을 뜬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안 그래도 해가 일찍 뜨는 여름인데 동해 바다를 앞에 둔 아파트다보니 작렬하는 태양빛이 커튼을 뚫고 흘러나왔다. 승운은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어 자고 있는 재준을 힐끗 보다가 반대쪽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다.

했어.

진짜 잤다고.

그와 몸을 맞닿은 것은 두 번째였지만 끝까지 간 건 첫 번째였다. 상상하는 것 보다 더 대단했다. 그 모습에 홀려 승운이 하고 싶었던 이런 저런 짓들은 하지 못했다. 물론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재준을 홀랑 벗겨먹을지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체력은 나쁘지 않은데, 역시 좀 정력이 떨어지나? 아무래도 몸에 좋은 것들을 잔뜩 먹여야겠다고 생각한 승운은 재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어제 이 얼굴에 미쳐 재준의 몸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물론 그 전에 보긴 했지만, 그래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제 정사 후 몸의 체액을 닦아주고 뒤의 정액을 빼주며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음에는 더 자세히 봐야지. 근육 움직임이나 점, 잡티, 느낄 때의 움직임과 얼굴, 흐느끼며 매달릴 때의 무게와 체온, 정액의 점도 같은 것까지. 그의 몸에 대해 모르는 점이 없도록 말이다.

승운은 조심스레 몸을 틀어 재준이 베고 있던 자신의 팔에 베개를 끼워 넣었다. 누군가가 팔을 베도록 내어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팔베개를 한 직후에는 팔이 저릿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평소라면 거슬렸을 감각이 뿌듯해왔다.

아침식사는 뭘 하지? 한식 파인 것 같던데.

승운의 집에는 그가 좋아할 만한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빵 조가리와 커피뿐이었다. 과일이나 샐러드는 있었지만,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우선 커피…… 는 내리는데 소리가 들릴 텐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이경민이 사둔 허브차가 있었다. 그걸 떠올린 승운이 차를 우려 실온에 둔 물과 함께 침실로 가져갔다. 

재준은 계속 자고 있었다. 그가 나온 지 몇 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깨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승운은 침대 가장자리에 있는 안경을 베드테이블 위로 옮겼다. 그리고 물과 차도 같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재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떻게 이렇게 귀엽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귀여운 거지? 생각이 있으면 이런 얼굴을 하면 안 되지 않나? 승운의 손이 재준의 턱을 쓰다듬었다. 까끌하게 자란 수염조차 귀여웠다.

“…….”

그리고 자신의 수염도 자랐다는 것을 인지한 승운은 재빨리 화장실로 가 양치와 면도를 했다. 재준에게 이런 추잡한 몰골을 보여줄 수 없었으니까.

승운이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도 여전히 재준은 자고 있었다. 피곤했나. 어제 조금 괴롭혔던 걸까. 그렇게 심하게 하지는 않았는데 역시 처음이라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오전 6시밖에 되지 않은데다, 오늘은 주말이니 상관없었다.

어제 밤늦게까지 혹사를 시켰으니 오전 10시에 일어나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허브차는 다시 우려서 줘야겠다고 생각한 지승운은 다시 침대로 올라가 베개 아래로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베개를 천천히 빼자 재준의 머리카락이 팔에 닿았다. 건조하고 약간은 뻣뻣한 재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승운이 웃어보였다. 재준의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얇았다. 석회질에 오랫동안 노출된 듯한 감촉이었다. 해외생활을 오래했으니까. 승운이 생각하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때 재준이 눈을 떴다.

“…….”

“…….”

“좋은 아침입니다, 지승운 씨.”

“…….”

놀래라. 너무 예뻐서 숨 멎을 뻔했네. 어떻게 이렇게 방금 일어난 얼굴도 예쁜 건지 모르겠다.

“승운 씨?”

현재준이 말했다. 잠긴 목소리가 섹시했다. 하지만 지금 그 목소리를 감상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종종 안경 벗은 모습을 보거나 요구하긴 했지만, 이렇게 함께 하고 난 다음날의 아침에 이런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재준은 눈을 깜빡이며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승운을 의아하게 봤다.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재준의 시력엔 그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재준이 승운의 얼굴을 보기 위해 침대 주변을 더듬거렸다. 안경을 찾기 위해서였다. 승운이 재준 위로 몸을 움직였다. 안으려는 건가 싶었는데 베드 테이블에 있던 안경을 들어 재준에게 건네줬을 뿐이었다. 재준이 안경을 쓰며 “고마워요.” 말했다.

그대로 잡아먹고 싶다. 뱃속에 집어넣고 싶어. 아니, 들어가고 싶다. 승운이 팔을 재준에게 두르며 안기듯 가슴에 누웠다. 밀착되자 심장소리가 더 가깝게 들린다. 

안심이 된다.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게 지승운이든, 아니면 현재준이든.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뿐이었다.

재준은 자신의 가슴에 엎드린 채 눈을 감은 승운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승운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눈을 떴다. 기다란 속눈썹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나비의 날개 짓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승운 씨.”

재준이 말했다. 승운은 왜 그러냐는 얼굴을 했다.

“닿습니다.”

“…….”

얇은 이불에 가려져있긴 하지만 빳빳하게 솟아오른 성기를 못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심지어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밀착시켰다.

“아침부터 바…… 활기차네요, 지승운 씨. 어제 그렇게 했는데.”

일단 자신은 다섯 번…… 여섯 번? 하지만 승운이 몇 번이나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걸 세어볼 만큼 여유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도 두세 번은 하지 않았을까.

“진짜 부족한 겁니까?”

이번이 두 번째로 같이 보낸 밤인데, 두 번 모두 이랬다.

“이건…… 박사님이 예뻐서 그런 거예요.”

되도 않는 변명에 재준이 웃어보였다. 그러자 승운의 얼굴이 다시 발갛게 변했다. 달아오른 귀에 재준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승운이 움찔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재준을 내려다 봤다. 

“예쁘다.”

“……박사님이 더 예뻐요.”

나도 눈이 있다, 이 사람아. 재준이 생각했다.

제정신이 붙어있다면 현재준이 지승운보다 더 예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박사님.”

“예.”

“그런데 시력 몇이에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아마 안경사가 알지 않을까요. 전 그냥 맞추기만 해서.”

“박사님.”

“예.”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예쁜 거예요?”

“예?”

“안경 벗지 마요. 얼굴 드러내지도 말고.”

“…….”

“절대, 절대 안 돼요.”

“보통 사람들은 지승운 씨처럼 특이한 취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 눈 높아요.”

아무리 현재준이라도 이건 믿어준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재준은 자신의 외모가 어느 수준인지 잘 알고 있다. 에스퍼의 등급과 마찬가지로 지승운이 특급 외모를 갖고 있다면 현재준은 양이나 가 정도였다. 그런데 저 예쁜 사람이 얼굴을 붉히는 거 보니, 아무래도 미 정도로 올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재준이 “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자 승운이 일어서며 베드 테이블에 있던 물 잔을 넘겼다. 재준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허브차도 있었다. 자신을 배려한 것이 느껴져 눈을 가늘게 하며 웃자 승운이 “그러지 마세요.” 라고 말했다.

“뭘요?”

“박사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저한텐 너무 자극적이에요.”

아무것도 안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재준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

그래, 네 다리 사이가 우뚝 솟은 거 보니 그래 보이긴 했다. 이렇게 예쁘고 이렇게 잘났는데 미학적 관점을 기르지 못했다는 것이 재준으로서는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어야지. 그러니까 지승운 에스퍼가 자신의 옆에 있는 게 아닌가.

“지승운 씨.”

“네.”

“몸 닦아줘서 고맙습니다. 안쪽…… 처리해주신 것도요.”

지쳐 쓰러지다시피 했지만 정신은 깨어있는 상태여서 조금은 수치스러웠다. 자극받은 내부가 어떤 성적인 전조가 없는 손길에도 반응을 하려해서 죽을 것 같았다. 불알이 텅 비어버릴 정도로 사정하지 않았다면 분명 또 다시 쾌락을 쫓을지도 몰랐다.

지승운은 재준을 조금 신기하게 바라봤다. 보통 몸을 섞고 나면 어느 정도 친밀해지는데 재준은 계속해서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 그게 현재준 박사다웠지만, 아쉬웠다. 언제쯤 편하게 말을 해줄까 생각하는데 현재준이 이어 말했다.

“사실 소변을 봤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섹스를 하면서 그런 게 가능하리라곤…….”

“……그거 소변 아니에요.”

승운이 대답하다 픽 웃었다. 분명 흥분이 사그라들 말이었는데 그러기는커녕 귀여움만 느껴졌다. 승운이 손을 뻗어 재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거친 감촉. 다음에 트리트먼트 해줘야지.

“흥분해서 그런 거예요. 사정의 일종. 자주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압니다. 순진한 척 해봤어요.”

재준이 답했다. 성인 남성이 그런 걸 모르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다만 그게 진짜 가능한가는…… 그리고 나름의 첫 경험에서 그런 걸 겪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괴수학자로서 현재준은 생물학에 대한 지식이 꽤 있었다. 단순히 생물학에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깊숙한 것도 알고 있었다.

“전립선 액을 배출한다는 게 이론상으로는 납득이 되는데 직접 몸으로 겪은 것은 처음이어서요.”

“…….”

분수…… 같은 단어를 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전립선 액이라고 하니 뭔가 느낌이 달랐다. 승운의 심정은 생각지도 않은 채 재준이 말을 이었다.

“그거 아십니까? 괴수의 신체 구조도 인간과 흡사한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괴수에게도 전립선이 존재하죠. 물론 특정 생물의 경우는 없지만 기본적 생물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수컷 괴수의 대부분은 가지고 있습니다. 괴수는 발현되어 괴수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 중 일부는 괴수화 이전의 습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성관계를 합니다. 괴수 종이 일치한다면 번식도 가능하죠. 특히 특정 괴수에게서는 동물이나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적 성향을 보이는데.”

“…….”

“이는 수컷과 암컷 가리지 않습니다. 특히나 인간의 신체에 가까운 형태의 괴수들은 음부끼리 비비는 행위를 벌이기도 하죠. 사실상 성적 행위가 굳이 번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 그리고 제가 남극에 있을 때는 정말 신기한 것을 봤는데 괴수종  중에는 고래와 흡사한 형태가 있거든요. 전반적으로는 다른데 고래와 공통점이 숨구멍이 정수리와 등 사이에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 구멍의 크기가 결코 큰 편은 아닌데, 수컷끼리 그 숨구멍에 성기를 집어넣고 비비는 행위가 있었죠. 성기가 꽤 큰데 그 좁은 곳에. 생각해보니 사람의 항문도 작은데 그런 게 들어가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인간으로 치면 구강성교보다는…… 콧구멍에 더 가까운가? 아무튼 숨구멍 섹스라고 치부해야…….”

“박사님!”

승운이 소리치며 재준의 말을 막았다. 승운의 얼굴이 빨갛다. 재준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웃어 보였다.

“그렇죠. 전립선 액에 대해 말을 하려던 거였는데.”

“아니.”

“괴수도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전립선액 사정.”

“…….”

“아직 본 적은 없습니다. 애초에 괴수의 성행위를 살필 만큼 가까이 가기 쉽지 않기도 하고, 곁에 있는 괴수가 동성애적 행위를 한다는 보장도 없어서요. 그래도 그런 기록은 남아있습니다. 논문이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아, 우선 그런 행위를 한 괴수의 학명은…….”

“아니, 아뇨! 안 궁금해요!”

승운이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강렬한 거절에 재준이 피식 웃어 보이며 승운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좋았다는 겁니다.”

재준의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가 승운의 어깨에 진동을 일으켰다.

“저도 지승운 씨 못지않게 성욕이 강하고, 꽤 즐기거든요. 정력은…… 지승운 씨가 너무 강한 거고. 아무튼 제 몸은 튼튼하고 부서질 일이 없죠. 물론, 순진하지도 않습니다. 제 머릿속이 더 더러울 수도 있고.”

당신 머릿속이 더러워봤자 얼마나 더럽겠어요. 승운이 생각했다. 반면 재준도 다른 이유로 눈을 가늘게 떴다.

전립선 액 방출이 자주 있었다 이거지. 누구에게 뭘 어떻게 해줬기에 그게 많았을까. 재준이 생각했다.

에스퍼가 경험이 많은 거야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원래 형질 발현자들은 그랬으니까. 가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재준이 가이드 치고 경험이 별로 없는 것뿐이다. 과거에 질투를 한다니, 정말 추잡했다. 재준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사랑을 나눈 다음에 깨끗한 상태로 개운하게 자는 거 정말 좋았습니다. 게다가 지승운 씨와 함께 자면 저도 푹 잠들 수 있어서요.”

누가 그의 앞에서 뭘 방출했든 간에, 앞으로 현재준 자신이 더 많이 싸주면 되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내가 더 잘 쌀 수 있…… 이게 맞나?’

질투에 눈이 먼 상태로 하는 생각이 이성적일 리 없었지만 어쨌든 재준은 다른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의 인상 깊은 기억들을 남겨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승운의 하반신을 바라봤다. 승운도 재준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그런 노고에 무색하게도.”

재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승운이 그를 내려다봤다.

“제가 또 다시 아침부터 엉망진창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협조해주실 겁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사람!

누가 이렇게 정중하게 저런 말을 하냐고!

“어제 정말 좋았는데. 넌 어땠어, 승운아?”

재준의 말이 끝나자 승운이 이불을 걷었다. 

입고 있던 속옷 위로 드러난 성기의 모양새가 왠지 어제보다 큰 것 같았다. 저 크기였나? 저걸 넣었다고? 그러고도 멀쩡한 것이 신기했다. 승운이 입을 맞췄다. 재준은 여전히 승운의 성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을 뜨고 재준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있는지 알아 승운은 움찔했다. 아래만. 그 모습에 재준이 웃자 승운의 입 안쪽에 얕은 바람이 흘러들어와 간지럼을 일으켰다. 못 참겠다.

“이럴 때만 반말 하는 거 치사 한 거 알아요?”

당연히 알지. 일부러 그러는 건데.

“그리고 어땠냐니? 그걸 말이라고.”

승운이 입을 떼며 현재준의 안경을 벗겼다. 그러자 드러난 맨 얼굴에 저도 모르게 성기가 꺼떡 움직였다.

“박사님은.”

도대체 이 얼굴은 뭐냐고. 왠지 어색해 안경을 씌울까 하다가, 승운은 그대로 입을 맞췄다가 뗐다. 아주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본인이 사람을 얼마나 자극하는지 상기해야 해요.”

승운이 말하고는 다시 입을 맞췄다. 머리카락을 잡고 다가오는 얼굴이 박력 있어 아플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부드러운 혀의 움직임이었다. 현재준은 눈을 감지 않고 자신을 탐하는 승운을 바라봤다. 양 뺨이 붉게 달아오른 승운을 보며 재준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이틀 내내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배고픔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지쳐서 침대 위에 엎드려 있으면 승운이 뒤처리를 해준 뒤 과일을 갖다 줬다. 빨리 에너지로 바뀌는 것들이었다. 알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고기를 구워줬다. 단백질 보충을 해야 한다면서. 안 그래도 내보낸 단백질이 많기는 했다. 승운이 자신은 먹지 않고 재준에게 잔뜩 양보했다. 같이 먹자고 하니 자기는 이미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해서 괜찮다는 말을 했다. 

……정액도 단백질이긴 하지만 체내에서 흡수가 됐던가? 모르겠다. 현재준은 인체에 대해 모른다. 애초에 인체에 대해 안다고 해도 정액의 소화흡수과정까지 알지는 못한다. 

괴수로 그런 결과를 도출했다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괴수가 정액을 섭취했다거나 그런 실험을 한 기이한 학자들은 없었기에 재준이 알 방법도 없었다.

배를 채운 뒤에는 사람 꼴을 해야 할 차례였다. 승운은 예쁘게 보여야한다며 먼저 씻었기 때문에 재준만 씻으면 됐다.

재준이 씻으며 자신의 구멍을 만져 봤을 때, 조금 부어있는 느낌에 괜찮은 건가 싶었다. 승운은 기어코 자기가 보겠다며, 또한 연고를 발라야한다며 들어오려 했지만 일단은 막고 연고만 받았다. 연고를 바르기 위해 안쪽에 손을 넣어봤는데 내부가 부드러웠다.

“…….”

이런 감각이구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재준은 구멍에서 빠져나온 자신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을 씻었다. 욕실 밖으로 나오자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승운이 보였다. 예쁜 얼굴 아래로 목이 엉망진창이다. 깨문 자국은 사라졌지만 멍이 들어있다. 아주 많이.

재준을 본 승운은 조금 당황스러워 하더니 “보이는데 남겨서 미안해요.”말했다.

내가 더 심하게 남긴 것 같은데. 

재준은 말하지 않았다. 저번에 안 보이는 데 남기라고 한 것이 자신이라는 게 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에겐 저런 흔적이 좀 필요했다.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여유로웠다. 승운은 어제 다 탐하지 못한 재준의 모든 곳을 보려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어제는 급해서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는 말은 재준의 그간 성생활을 돌아보게 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담백하게 했었나. 승운은 조금 지나친 편이었지만, 같이 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훨씬 좋긴 했다.

재준이 티셔츠를 챙겨 입으며 승운을 바라봤다. 승운은 재준에 비해 이것저것 많이 걸치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제복을 입는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듯 했다. 속옷 위에 가터벨트만 입은 승운을 보며 재준이 입맛을 다셨다. 찍어서 간직해두고 싶다. 예전에는 그런 짓을 왜 하나 싶었는데, 지승운이라면 이런 저런 장면들을 찍어서 두고두고 보고 싶었다. 승운은 씻는 동안 충전해뒀던 시계를 다시 차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재준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설마 싶었는데 진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 탐난다는 얼굴로.

“마음에 들어요?”

승운이 묻자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딘가에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

그러니까 이렇게 솔직할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단 말이지.

“저도 그래요, 박사님.”

승운이 말하며 재준에게 다가왔다. 헐벗은 몸과 밀착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타인의 체온과 살결이 닿을 때 마다 어딘가가 요동치는 느낌이다. 승운의 재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부딪쳤다가 때냈다. 승운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할 때, 재준은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재준이 멀어져가는 승운의 목덜미를 잡았다. 손가락이 천천히 뼈 위를 더듬는다.

“충전하셔야죠.”

그렇게 말한 재준이 입을 부딪혀왔다.

아, 정말 이대로 죽어도 좋아.

승운이 생각하며 침범하는 재준의 혀를 빨아올렸다. 단순히 가이딩의 충족감, 성적인 충족감과는 달랐다. 마음이 안정됐다. 평생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원히 혼자일 것 같았던 감각은 온데간데없고 행복한 감각만 있었다. 행복이라니. 누군가의 체온에, 살아 숨 쉬는 것을 증명하는 숨결에 행복을 느끼다니. 다른 사람들도 다들 이런 것을 느꼈던 걸까? 세상 사람들 모두 아는 이 달콤한 감각을 지승운 혼자만 몰랐다는 사실이 억울하면서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재준이 입을 떼어냈다.

“더 해주세요, 박사님.”

“저녁에요.”

승운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출근해야 합니다, 지승운 씨.”

이러다간 둘 다 지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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