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20)

6.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제복을 챙겨 입은 승운의 모습이야 늘 그렇듯 완벽했지만 오늘 재준이 가지는 시선은 평소와 좀 달랐다. 승운도 그걸 알아차렸다.

읽고 있던 책에 집중하기에는 재준의 시선이 집요했다. 평소와 비교할 것도 없었다. 재준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뭐지, 이 찝찝함은.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싶은데 여상한 표정이어서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승운은 그것을 물어보기보단 재준을 향해 웃어보였을 뿐이다.

“…….”

재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박사님?”

재준은 승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예지는 피곤했는지 안대를 끼고 자고 있었고 태환은 운전을 했다. 그리고 재준은 창밖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승운을 응시했다. 승운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재준이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러지? 내가 부담스러운가? 이제 와서?

고백을 한 이후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승운은 평소처럼 지냈고 재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늘 재준이 이상했다. 뭔가 불안하기라도 한 건가? 승운이 지레짐작할 때 재준은 다른 이유로 고민이 많았다.

재준은 자신의 GPF수치의 오류가 있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몇 차례 검사해도 달랐다.

재준은 발현이 늦었던 탓에 자신이 가이드로서 아예 쓸모없다고 판단한 뒤로 자신을 실험군으로 넣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의 체액을— 정확히는 타액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개인적인 실험에서 사용했지 대조군으로는 넣지 않았다. 괜히 실험에 혼동을 주는 것을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것이 잘한 짓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현재준 자신의 수치가 대조군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진작 알았더라면.

“……하아.”

“박사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승운이 물었다. 재준이 “지승운 에스퍼.”하고 불렀다. 승운은 보던 책을 접은 채 말하라는 듯 재준을 바라봤다.

“오늘 유독 예쁘네요.”

“…….”

그림 속의 떡인 걸 알았을 땐 별다른 감정이 없었는데, 먹지 못할 떡이 제가 좋다느니 어쩌니 하더니 먹어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심지어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있을 때는.

……당연히 먹어야겠지?

근데 이래도 되나? 괜히 어린 애를 홀랑 잡아먹는 행위가 아닐까? 겨우 세살 차이임에도 재준은 고민했다. 혹시나 그가 무슨 짓을 하게 된다면 이것 역시 일종의 위계에 의한— 근데 누구 지위가 더 높은 거지?

아무튼 그림의 떡이 눈앞의 떡이 되니 재준도 슬슬 어떻게 해볼까 생각했으나 여전히 고민인 것은 이 남자를 탐내도 되냐는 것이다. 하지만 딱히 탐내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고민이 지속되는 건 그래.

“예?”

“예쁘다고요, 지승운 씨.”

자신이 지승운을 속이고 있다는 점이 걸리기 때문일 것이다.

말해야지. 말을 해야 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뜸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사실은 내가 가이드였고 그때 널 가이딩 한 게 나였어요, 짜잔! 할 수도 없었다. 그럴 성격이 되지 못했다.

물론 머릿속 현재준은 현실의 현재준보다는 조금 더 발랄했지만 현실의 재준은 그걸 그대로 구현할 수 없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승운의 반응이 어떨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갖고는 싶어. 예쁘잖아. 한번 정도라면…… 아니지. 한번은 아쉽지. 그런 생각이 이어지면서 재준은 스스로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보통 그는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탐내지 않는다. 누군가뿐만 아니라 무언가에도 이렇게 탐욕을 내비친 적은 없다.

이상해. 저 사람 때문인 것 같아.

그게 나쁘지는 않지만 이상하고 이질감이 들었고 조금은 불안했다.

승운은 재준의 말에 조금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이내 사르르 눈을 접으며 웃어보였다. 기쁜 말을 들은 사람처럼 “그래요?” 하고 되묻는 목소리에 상냥함이 묻어나와 재준은 멈칫했다.

웃으니까 정 들 것 같다. 어쩌면 이미 정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감정의 크기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의식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외모 때문인가? 하지만 지승운 만큼 예쁜…… 경우는 드물긴 하겠지만 그래도 세상에 미남 미녀는 꽤 많다. 시리예도 분명 예쁜 사람이었고.

“얼마나요?”

승운이 되물으면서도 뭔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여겼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재준이 승운에게 예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꽤 많았다.

……외모에 약한 것 같지?

이상한 건 아니다. 오히려 자주 들었다. 대부분은 가이드들에게 들었지만 인간들도 그런 편이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을 뿐.

그들이 자신의 외모를 평하는 데 승운은 별다른 생각은 없었지만, 눈앞의 이 남자가 외모를 보느냐 마느냐는 상관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시리예 아예르 박사도 예쁜 편이었지.

역시 얼굴을 밝히나?

좋은 겉가죽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불만은 없었지만 또 큰 장점 역시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쓸모가 있을지도 몰랐다. 재준이 외모에 약하다면 이용해먹는 것이다.

“박사님, 제가 얼마나 예쁩니까?”

“제가 본 에스퍼 중에 제일 예쁩니다.”

“에스퍼 중에서만요?”

승운이 되물었다.

“가이드를 포함해서는요? 일반 사람들 중에서는?”

“에스퍼들이 누구보다 더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시잖아요.”

“사람마다 취향이란 게 있잖아요. 내가 박사님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

“…….”

“어때요, 취향입니까?”

취향이다마다.

재준이 뭐라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다가 말았다. 승운이 재차 “어떤데요?” 물었다. 대답은 재준이 아니라 예지에게서 나왔다.

“어휴, 진짜.”

예지가 안대를 벗었다.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는지, 예지는 조금 짜증난 얼굴로 안대를 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둘이 썸타요?”

짜증어린 목소리였다. 홀로 떨어져 운전을 하던 태환도 예지의 말에 동의했다. 아주 염병을 해라, 염병을 해.

*

괴수학 컨퍼런스는 이능청 중구 제1센터 옆에 있는 호텔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재준이 묵는 곳 역시 그곳이었다.

시리예도, 보리스나 에르난데스도 같은 호텔이었다. 원칙 상 괴수학자들은 한 곳에 머물거나 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지는 않지만 이번 컨퍼런스의 장소가 대한민국 이능본청 옆이라는 이유로 어쩌다보니 한 호텔에서 머물게 되었다.

재준은 어제 시리예한테 고지했다. 토요일에 도착하면 찾아가겠다고.

차에서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예지는 내일까지 깨우지 말라는 말을 하며 호텔 방 안에 틀어박혔다. 태환은 다른 에스퍼들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는지 진작 사라졌고 승운은 재준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밖으로 나갈 거라면 경호를 하겠다는 말에 재준은 호텔 안에만 있을 것이라 답했다. 승운은 그런 재준을 가만히 바라보다 알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재준이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바라봤다.

안으로 들어와 짐을 푼 재준은 곧바로 시리예에게 연락했다.

시리예는 어딘가 나가지 않고 방에 있는 듯 했다. 텍스트로 호수를 받은 재준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카드키를 챙겨 나왔다. 재준이 문을 닫고 복도를 빠져나가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쯤, 재준의 옆옆 방에 머물던 승운 역시 문을 열고 나왔다. 승운의 표정이 조금 굳어있었다. 승운이 복도를 바라봤다. 이미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승운은 알아차렸다. 통화소리가 들렸으니까.

“에스퍼가 귀가 좋다는 사실을 모르나 보네요, 박사님은.”

시리예 아예르를 찾아가다니.

승운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좆같다.

***

“뭐라고?”

반면 시리예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재준이 찾아 왔을 때는 분명 그 자료를 지운 범인이 누군지 유추해보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토요일에 올 필요는 없었지만 시리예로서는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서울의 주말을 견디는 것이 쉬울 것 같지 않아 재준의 방문을 환영했다.

그래, 우리 의심 가는 사람들을 서로 말해보자— 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재준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가이딩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진짜 가이딩을 하는 방법을 물은 건가?

왜? 시리예의 동공이 좌우로 흔들렸다. 어디를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는 얼굴로 재준을 보던 시리예가 “가이드인거 밝히게?” 물었다.

“진짜? 아니, 왜?”

물론 이제 와서 밝힌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재준은 지금 한국이었고, 지금 가이드인 것을 밝히면 평범하게 대한민국 소속의 가이드가 될 것이다.

평생을 일반인으로 살아온 재준으로서는 가이드들이 해야 하는 일들이 거북할 수도 있지만 가이드들에 대한 대우가 나쁘지 않으니까…… 아니, 그래도 왜?

“밝힐 생각은 없는데.”

“그런데?”

“없었는데.”

“말이 왜 바뀌지?”

“그냥.”

재준이 말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모순을 느꼈다. 하지만 어쨌든 살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러니까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살릴 수만 있다면.

이상했다. 재준은 누가 죽어나간다고 해도 크게 동정을 느끼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형질이상자들은 전전두피질이나 전두엽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덜했다. 반면 특정 종족들에게는 집착하거나 너그럽기도 했고 말이다. 그가 에스퍼라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가? 하지만 그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래, 굳이 고르라면.

“가이딩을 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탐욕이다.

자신의 가능성을 알게 되어서인가, 재준은 지승운에게 탐심이 생기는 듯 했다. 이게 맞나? 아닐 수도 있었다. 사실 헷갈렸다.

“그 S급 에스퍼?” 시리예가 물었다.

“……어떻게 알아?”

“그 에스퍼가 널 꼬셨잖아.”

“언제?”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건 몰랐는데, 이상하게 지승운 에스퍼 주위에서 날 경계하는 건 느껴졌지만.”

김태환 에스퍼가 특히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에스퍼들이 경계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김태환 에스퍼처럼 대놓고 말하면 상대라도 해줄 텐데 기저에 깔린 묘한 거부감이나 불쾌감이 있어 재준은 그들이 별로 좋지 않았다.

사실 재준에게 에스퍼들은 익숙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가 살아오며 가깝게 지낸 에스퍼는 멜라니 라제쉬 뿐이다. 그 다음이 지승운이다. 두 사람 모두 재준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에스퍼들이 대부분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형질이상자들과 사람들은 서로를 차별하고 구별짓고 있었으니까.

비슷한 이유로, 지승운이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가 말했던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재준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자신에게 좋아함을 고백하던 남자를 떠올렸다.

역시 탐욕이 맞아. 그래, 이 감각은 탐욕이다.

“날 꼬신 거였구나.”

“그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거 보니 뭔 일이 있었나보네?”

“고백 받았어.”

재준의 대답에 시리예가 ‘허어?’ 반응했다. 아니, 뭐야 이건.

고백? 고오백? 뭐 입을 맞추거나 넘어뜨린 것도 아니고 고백을 하고 고백을 받아? 이 풋풋함은 뭔데? 시리예가 가이드로 발현했던 16세 이전에도 이렇게 순수한 감정은 느껴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네가 가이드인 건 알아?”

“모르는 것 같은데.”

“밝히는 것이 우선이겠네.”

시리예의 말에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괜찮지 않을까. 시리예가 생각했다. 그 에스퍼가 자각하지는 못한 듯하지만, 분명 재준에게 뭔가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이딩을 해주려고?”

시리예가 물었다. 재준은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다가 멈췄다.

가이딩이라.

사실 재준은 아직도 가이딩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승운의 손을 잡았을 때 뭔가가 이루어지긴 했다. 그러니까 재준이 바라는 건.

“살리고 싶어.”

지승운이 죽지 않는 것.

“그러니까 알려줘.”

재준의 답에 시리예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네가 가이드임을 밝힐 만큼의 가치가 있냐고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마음을 정한 얼굴이었으니까.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리예가 생각했다. 재준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쉽게 바꾸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가이드인 것을 밝히지 않겠다고 한 것은 시리예와 라제쉬 박사들의 말을 들어서도 있었지만 자신이 살아가는데 그게 더 합리적이라고 여겨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가 대뜸 가이딩을 하겠다니. 겨우 고백으로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은데.

“그러고 싶어. 지켜주고 싶은 느낌도 들고.”

얼굴인가? 그건 말이 된다. 시리예도 자신의 에스퍼에게 화가 나다가도 얼굴이 보면 금방 풀려버리지 않는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시리예는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말려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뗐다.

“에스퍼들은 다 살려고 그러는 거야. 가이드들이 자기를 구해주니까. 그들의 소유욕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넘어가는 가이드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너도 그렇게 되려고 그래?”

“아냐.”

재준이 대답했다.

“가이딩은 필요 없대.”

“너한테?”

“아니, 내가 가이드인건 모른다니까.”

정말 모르는 건가. 분명 냄새를 맡은 것 같았는데. 시리예가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가이딩도 필요 없대.”

“그래? 상태가 좋길래 꾸준히 가이딩을 받는 줄 알았는데.”

시리예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리예는 나쁘지 않은 상태의 지승운만 봤을 것이다. 재준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재준이 화면을 확인하자 지승운의 이름이 떠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 아예 가이딩을 안 받겠다 선언 한 거야?”

“응.”

“왜?”

“내가 좋아서.”

“뭐?”

“나 잠시 전화 좀 받을게.”

재준의 말에 시리예가 입을 다물었다. 진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예지한테 물어보면 알려줄까?

“예, 지승운 씨.”

[박사님, 지금 어디세요?]

“호텔 안입니다.”

[알고 있어요. 방에 없으셔서. 지금 어디 계세요?]

시리예가 잽싸게 예지한테 텍스트를 날렸지만 확인하지 않는다. 자고 있나보다. 나중에 알려주겠지.

“아, 여기 아예르 박사의 방에.”

[아예르 박사의 에스퍼도 함께 있나요?]

“아뇨, 외출했습니다.”

[…….]

“지승운 씨?”

[거기 몇 호예요?]

“오시게요?”

그렇게 말한 재준이 슬쩍 시리예를 바라봤다. 딱히 싫어하는 얼굴도 좋아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예. 박사님들처럼 귀한 분들이 에스퍼 없이 있으면 위험하잖아요.]

여기 호텔인데. 별 일 없지 않을까. 이 정도 규모의 호텔이라면 괴수 대책 용병들을 고용한다. 그게 아니어도 이능본청 바로 옆에 있는 호텔이 위험에 빠질 일은 없다. 재준이 입모양으로 ‘괜찮겠어?’ 하고 시리예에게 물었다. 시리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1321호입니다.”

[금방 갈게요.]

그리고는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마치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 태도다. 어차피 그들이 머무는 8층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온대?”

“응.”

와, 집착 봐.

그거 좀 떨어졌다고 이럴 필요가 있나? 게다가 시리예는 가이드가 아닌가. 아, 그쪽은 가이드라는 걸 모른다고 했지. 그리고 재준 역시 그 에스퍼가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건 모르는 듯 했다. 어떻게 보니 잘 어울리긴 하네.

“그러면 뭐, 그 에스퍼는 일반인인 너랑 같이 지내겠다 이 의미인 거지? 가이딩 받지 않고?”

“그렇다는군.”

“왜?”

“나도 잘 모르겠지만.”

잘 모르긴. 타인인 시리예는 잘 알 것 같았다. 허니는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데, 묘하게 자기 일이 되면 잘 알아차리지 못한단 말이야. 그것마저도 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이 죽을 때까지 날 지켜 줄 거라고 하던데.”

재준이 그러니까 시리예, 하고 그녀를 불렀다.

“난 방법을 알아야 해.”

시리예가 양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움켜쥐었다. 두피 안쪽부터 쥐가 나는 것처럼 머리가 아파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몇 분 가량 머리를 싸매던 그녀는 한숨을 푹 쉬고 나서 그래, 뭐라도 하는 게 낫겠어, 라고 생각하며 손을 내렸다.

“좋아, 해보자.”

“그리고 또 가이드에 대해 궁금한 것도 있는데.”

“그래, 물어봐. 궁금한 거 다 물어봐.”

“가이드 에너지 레벨 말이야.”

재준이 질문을 하려던 찰나 노크소리가 들렸다. 재준과 시리예가 동시에 문을 바라봤다. 안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승운이 다시 노크를 했다.

“박사님.”

재준과 시리예가 서로를 바라봤다. 둘 다 박사인데. 물론 여기서 칭한 박사는 재준일 것이다. 안에서 여전히 대답이 없자 승운은 “들어갑니다.”말했다. 아니, 열어줘야 하는데. 생각하는 순간 철컥 하고 안쪽에서 문고리가 움직였다.

“…….”

저게 뭐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어떻게?

높은 등급의 에스퍼라고 하더라도 저게 가능한 거였나? 게다가 시리예가 봤던 지승운은 물 관련 능력이 있었다. 물리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응집된 물이라도 보여야했다.

문이 열리고 승운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복을 입었던 오전과 달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온 승운은 방 안으로 한발자국 들어서며 사르르 웃어보였다.

“일 이야기 중이셨어요?”

밖에서 듣기로 가이드 에너지 레벨 어쩌고 하는 것을 보니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승운은 생각했다. 업무 이야기라니 다행이지. 혹시나 그가 생각하는 여타 일이 발생했었다면 쉽게 웃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위험하니까 저도 같이 있을게요.”

여기에서 가장 위험한 상대를 고르라면 지승운 같은데, 재준이 생각했다.

“들어가도 되죠?”

그렇게 말한 승운은 진작 들어와 있었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시리예와 재준이 앉아있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재준이 당황하며 “어…….” 하고 말했다. 승운이 시리예를 한번 보다가 재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저희가 중요한 이야기 중인데.”

그래서 뭐? 그게 뭐가 문제 있냐는 얼굴을 한 승운이 가만히 시리예와 재준을 내려다보자, 둘이 서로를 바라봤다.

시리예는 재준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재준도 마찬가지였다.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예쁘지?’

‘응, 예쁘네.’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었다. 시리예와 재준은 마치 한 몸처럼 고개를 들어 승운을 바라봤다. 거절해야하는데, 참 예쁘게 생겼다. 그래도 누가 먼저 거부의 말을 해야 했다.

“곤란…… 하지?” 재준이 말했다.

“곤란, 한데.”

시리예도 동의했다. 아무래도 가이딩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보니 승운이 없는 것이 좋았다. 그게 아니면 이 자리에서 재준이 가이드인 걸 밝히는 건……. 시리예가 생각하며 재준을 보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승운이 물었다.

“곤란합니까?”

“…….”

곤란하지, 인마. 뭔 당연한 소리야.

하지만 문제가 있다. 지승운이 에스퍼라는 것과, 두 사람이 가이드라는 것.

예쁘긴 예쁘다. 괜히 허니가 넘어간 게 아니라고 생각한 시리예는 저도 모르게 “뭐, 어때.” 말했다. 재준 역시 시리예가 말함과 동시에 “예, 있어도 됩니다.”대답했다. 서로 이런 대답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진짜 이렇게 말하다니 실망이었다.

시리예와 재준이 서로를 질타의 눈으로 바라봤다. 외모에 약한 것을 보니 어쩔 수 없는 가이드들이긴 했다.

승운은 조금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의 허락이 동시에 떨어졌으니 문제없다고 여기며 자연스레 침대에 걸터앉았다. 테이블에는 의자 두개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 선택이었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재준이 생각했다.

“저 에스퍼, 프랑스어 못하지?”

“그런 걸로 알아.”

“다행이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데?”

재준이 묻자 시리예가 재준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자연스럽게 잡힌 손에 재준도 손에 힘을 풀고 깍지 상태를 유지했다. 맨 살끼리 닿자 미약한 반동이 느껴졌다. 마치 공기의 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밀도가 서로의 존재감을 나타낸다.

“이렇게 손을 잡아서…….”

“…….”

마찬가지로, 시선이라는 것이 눈으로 보일 리 없음에도 지승운의 시선이 레이저처럼 흘러나와 두 사람이 마주잡은 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쪽도 좋아서 잡는 게 아닌데.

너무 따갑다.

“떼자. 나 무섭다.”

시리예의 말에 재준이 손을 놨다.

“말하자면 딱히 어떤 걸 할 필요는 없어.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 에너지가 흘러가도록. 너는 일종의 통로인거지. 가이딩이라는 건 자연스럽게 인도하는 거지, 에너지를 어딘가로 이끄는 게 아니야. 마찬가지로 치료해주겠다, 낫게 해 주겠다 이런 생각 따위도 쓸데없는 거지. 손을 대고 있으면 에너지가 알아서 자기가 조율해야하는 곳으로 흘러가.”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는데. 재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시리예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가이드 에너지를 네가 제어하려고 하면 안 돼. 에스퍼의 불안하고 정체된 에너지를 가이드가 가지고 오려고 해서도 안 돼. 그 고통은 가지고 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너는 그냥 가이드야. 인도하는 자.”

그렇게 말한 시리예의 검지 끝이 재준의 손 위에 내려졌다. 시리예의 손가락이 재준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같은 극의 자석이 밀어내는 것 같은 기묘한 파동이 일었다. 몸에 희미하게 들이닥친 시리예의 힘이다.

“정체된 에너지가 풀어지도록 길을 만드는 거야. 자연스럽게.”

조금만 더 힘을 보내도 튕겨져 나갈지 모르는 에너지. 가이드끼리는 같은 극의 자석이라면 가이드와 에스퍼는 다른 극의 자석이다. 이런 반발력이 아니라 뭔가가 들러붙는 느낌이겠지. 재준이 유추해봤다. 받는 입장에선 대충 알겠는데, 하는 입장은 어떨지 모르겠다. 재준이 승운에게 시선을 줬다가 뗐다.

“넌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냥 닿기만 해도 가능한 거니까. 아니, 제일 좋은 건 그냥 성관계를 하는 거야. 그래서 막 가이드가 되면…….”

그렇게 말한 시리예가 입을 다물었다. 이거 말해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한 시리예가 재준을 가만히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애들은 들으면 안 돼.”

“나 서른셋이야.”

그래, 그렇지. 재준이 애가 아니라는 건 시리예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이런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데. 고민하던 시리예가 사실대로 말했다.

“……난교 같은걸 시키거든.”

“난교.”

순간적으로 고성의 환락가가 떠올랐다. 거기도 비슷했다. 인간의 입장에선 다분히 모럴이 없으나, 그들에겐 아무렇지 않았다. 재준도 별다른 생각을 하진 않는다. 원래 그러한 존재니까. 문제는 막 가이드나 에스퍼로 각성한 이들의 나이였다.

“애들인데?”

“형질이상자는 돌연변이 이전의 사람과 다르게 취급하거든.”

그것도 그렇지.

“그리고 하다보면 알아서 돼.”

“…….”

“아, 물론 국가마다 방법이 다르다고는 하더라.”

재준이 다시 승운을 바라봤다.

난교.

난교라.

난교 했을까?

저 예쁜 얼굴로 가이드들과 함께?

생각해보니 얼마 전의 일도 있었다. 그것도 난교라면……. 난교보다는 치료에 가까운가. 그래도 조금 아쉬운 마음과 더불어 뭔가 응어리가 진 것처럼 불편했다. 난교란 말이지.

“뭐, 근데. 그게 아니라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네가 그 나이에…… 애들이랑 섞여서 뭐 하기는 좀 그렇잖아. 결국 혼자서 체득하든, 다른 에스퍼의 도움을 통해 체득하든 해야지. 사실 이건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거라서, 말로 알려준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야.”

“호흡의 작용 기전은—.”

“그만. 작용기전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불수의근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너 호흡근 조절 가능해?”

재준이 고개를 젓자 시리예가 “가이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에스퍼가 전전두피질의 인식을 넘어 분자를 3차원화 하는 건 알지? 에너지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힘은 가이드들도 똑같아. 단지 그게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작용하는 거지. 에스퍼들이 물이나, 불이나, 바람이나, 타인을 조종하는 능력, 염력 등등을 자연스럽게 쓰는 것처럼 가이드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인식을 넘어서서 힘을 쓰는 거야. 본능이긴 한데, 막 각성한 상태에서는 잘 모르니까 우선 그걸 알 수 있는 상황에 던져 넣는 거지. 일단 피부접촉부터.”

뭐, 그 이상의 것까지.

“……하다보면 익숙해져. 네가 가이드인 걸 밝힌다면 국가에서 알아서 훈련시키겠지. 네가 있는 마을도 그런 장소라며? 형질이상자들의 환락가.”

“나도 그런 걸 해야 한다?”

“글쎄. 너는 나이가…… 미안한데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어. 그리고 우리야 어릴 때 형질이 발현되니까 그게 이상하다거나 거북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일반인들은 기겁하는 내용이긴 하지.”

확실히, 다른 가이드들이 그런 걸 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거나 거북하지는 않았다. 원래 가이드들은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성 착취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가이드법이 강화되어 거부한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재준 역시 그러하려나? 하지만 그것도 가이딩을 할 줄 아는 가이드를 대상으로 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면 어떻게 그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지? 호흡근의 움직임을 안다고 호흡을 조절할 수 없듯, 가이드의 에너지 사용을 안다 해도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힐 때 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근데 만약 네 에스퍼를 만난다면 자연스럽게 될 거야. 그게 아니면 시간이 걸린다고 봐야지.” 시리예가 말했다.

“어?”

재준이 되물었다.

“내 에스퍼라니?”

이 말은 승운도 알아들었다. 내 에스퍼. 아주 직관적인 단어였으니까. 저건 뭔 말이야? 설마 시리예의 에스퍼를 말하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프랑스어를 배워두는 거였는데. 승운이 눈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참으로 친밀해 보이는 관계라 더더욱 짜증이 났다.

“루트 옌슨이라고 처음부터 가이딩을 할 줄 알았겠어?”

재준이 두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웬 역사 이야기야.

“그녀가 카트린 두자당의 가이드였기에 처음부터 가이딩이 됐던 거야. 페어, 짝 말이야.”

“그건 그냥 임의로.”

“임의는 무슨. 그건 제 짝이었어. 그냥 말로 ‘페어’니 뭐니 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내 에스퍼’나 ‘내 가이드’라고 부를 수 있는, 운명의 짝 같은 거. 모든 형질이상자들의 꿈이지. 거의 환상에 가까울 걸? 실제로 그런 경우는 그들 밖에 없었으니까.”

역사적으로는 그랬다. 언제 어디서 자신의 짝을 만난 사람이 또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진짜 짝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제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된 이후니 저절로 되는 가이딩 따위를 알아차릴 수 없으니까.

“가이드는 자신이 형질이상자라는 것을 각성열 말고는 알아차리기 힘들어. 그런 루트 옌슨이 어떻게 아무런 훈련 없이 카트린 두자당을 가이딩 했겠어? 그녀가 자신의 짝이어서야. 페어라는 단어는 그들로부터 나온 거야. 그리고 가이드 전쟁도 그들 덕분에 일어났지.”

1986년부터 3년간 일어났던 끔찍한 전쟁으로 수많은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죽었다. 괴수는 점점 더 늘어나는데 괴수를 처치할 이들이 서로를 죽이다 못해 도시까지 파괴했다. 그건 일종의 광기였다.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타인의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며 제 가이드들을 죽인 에스퍼들도 많았고 그들을 지키기 위한 에스퍼 집단까지 얽히며 세계는 엉망진창이었다.

다만 한국은 그 피해가 좀 덜했다. 학생정치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한국은 가이드들도 화염병을 제작해 던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제 몸을 지킬 수도 있었고 정치적 상황이 여의치 않아 에스퍼들끼리 전쟁을 하기도 힘들었다.

기록된 역사에 의하면 말이다.

“설마 그냥 평범하게 가이드를 얻기 위해 싸운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시리예가 말했다.

외부에 알려진 역사와 실제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제 진정한 짝을 원했다. 지금이야 각인이라는 체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각인도 뭣도 없었고 가이드들 역시 제 힘을 사용할 줄 몰랐다. 전쟁을 통해 여러 가지를 겪었기에 가이드 역시 제 에너지를 쓸 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모르던 이전에는 말 그대로 제 짝을 찾지 못하는 에스퍼는 죽었다.

아주 많은 에스퍼가 폭주를 일으키고 형질이상자들이 죽으면서 밝혀진 사실들 중 하나는 폭주한 에스퍼는 어쩔 수 없지만, 폭주 하기 직전의 에스퍼는 짝이 아니어도 어느 정도 가이딩이 된다는 것이다.

“에스퍼는 제 짝을 원해. 강제로 일으키는 각인 말고, 날 때부터 각인되어 있는 제 짝. 소울메이트, 페어. 뭐 그런 거 말이야. 각인을 할 때 시간이 걸리는 건 원래의 짝을 없애고 그 자리에 자신들을 채워 넣기 때문이야. 한편으론 이게 더 낭만적이긴 하네. 운명을 거스른 거니까.”

“제 짝이라는 걸 어떻게 아는데?”

“나도 몰라. 난 아직 내 짝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시리예가 말했다. 요즘 에스퍼들은 폭주 위험에 놓이는 경우도 없으니 앞으로 알 일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불안하지. 운명을 거슬렀다 해도 언제 누군가의 짝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각인을 했어도, 결국 운명에는 굴복하게 된다더라고.”

재준은 시리예와 그녀의 에스퍼를 떠올렸다. 그들은 상성도 잘 맞는 듯 했고, 서로를 소중히 여겼다. 세상에 둘도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짝이 아니라니.

“한 가지 알려진 것이 있다면.”

시리예가 덧붙였다.

“에스퍼의 폭주시기에 맞춰 각성을 하는 가이드들이 제 짝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해. 그래서 그 전쟁이 더더욱 커졌지. 폭주가 시작되면 에스퍼들은 자신의 가이드를 찾을 수 있는 확률이 커지기 때문에 그걸 합리화한 이들이 있어. 일부러 몸을 제어하지 못하도록 더 많은 에너지들을 써서 말이지. 하지만 그렇게 되니까 또 시기가 맞지 않더라고. 아직 이것에 대해선 연구 중이지만.”

시리예가 말했다. 재준은 승운을 바라봤다.

폭주시기에 맞춰 각성한 가이드. 자연스럽게 되는 가이딩.

“만약 제 짝을 찾을 수 있다면 에스퍼들은 폭주를 충분히 감수할 수도 있는 이들이지. 제 짝을 만난다는 건 굉장히 행복한 거라고 하니까.”

재준이 눈을 깜빡이자 승운이 왜 그러냐는 얼굴로 웃었다.

감기듯 내려앉는 속눈썹이 사락 소리를 낼 것 같았다. 아니, 소리가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승운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을 모른다. 그럼에도 좋다고 말했다.

사실 재준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저렇게 예쁜 사람이 좋아한다는 말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 재준을 보고 승운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다가왔다. 하지만 닿지는 않는다.

“박사님?”

설마.

“왜 그러세요?”

내 에스퍼라니.

*

가이딩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에는 평범하게 일 이야기를 했다. 시리예는 요 며칠 놀러 다니며 의심 가는 사람을 알아차린 것 같다고 했다. 놀면서 용케 그걸 찾았다고 재준이 말하자 알게 모르게 행동이 드러났다던가. 혼자 독단적으로 있는 일이 많다는 말에, 재준은 그녀가 고른 사람이 그냥 너희들을 불편해해서 그런 게 아닐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시리예가 말했다. 그들은 괴수박사들과 함께 DMZ 연구소로 왔다. 재준은 자신의 동기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렇게 가까운 곳까지 그들이 사람들을 침투시켰다는 점은 불안했다.

시리예의 에스퍼가 돌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보가 잔뜩 취했어.”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러시아계이긴 하지만 미국인인 보는 술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소주 세 잔에 맛이 갔다며 흥을 떨어뜨렸다고 말한 시리예의 에스퍼는 그녀와 함께 한잔 하자며 나갔다. 그 와중에 어디 맛있는 데가 없냐는 말에 호텔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의 막걸리 집을 추천받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호텔 방 주인들이 나가자 그곳에 더 이상 있게 되지 못한 재준과 승운도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그들이 머무는 층까지 내려왔을 때도 어떤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승운은 재준을 방문 앞까지 데려다줬다. 그래봤자 옆옆 방이었다. 재준의 시선에 승운의 시계가 들어온다. 붉은색에 가까운 주홍빛.

재준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승운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지승운의 시선이 항상 자신에게 닿아있다.

내 에스퍼.

“지승운 씨.”

페어, 짝.

“이런 상태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싫어요.”

“……내가 뭔 말을 할 줄 알고?”

“다른 가이드를 만나라고 하겠죠.”

재준은 그가 예상한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박사님.”

역시,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얼굴이다.

“저를 받아주지 않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제 감정을 버리라고 강요하면 안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요.”

“저기, 지승운 씨.”

“싫다니까요.”

“저랑 만나보실래요?”

“싫어…… 어?”

“싫어?”

“아뇨. 좋아요.”

승운이 재빨리 대답했다. 싫을 리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승운이 의심했다.

만나보자고? 왜? 나를? 진짜? 날 받아준다고? 동정해서? 동정이면 뭐 어때? 그래도 되는 거야? 정말? 갈피를 못 잡는 승운의 눈동자가 떨렸다. 제법 가까운 거리여서 재준은 승운의 감정을 고스란히 바라볼 수 있었다. 제가 들은 말이 맞나 의심을 하는 얼굴이다. 재준이 피식 웃었다.

“좋아요?”

“좋아요. 너무 좋아요. 만나요. 아니, 뭐라고 해야 하지?”

승운이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목덜미에, 그리고 두피 아래에 소름이 돋은 것 같았다. 머리를 쓸어 올렸던 손을 그대로 목 뒤로 가져가 주무른 승운의 양 뺨이 조금은 상기됐다.

“저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요.”

재준이 피식 웃어보였다. 자신도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의외로 순진해 보인다.

그럴 리가 없지. 발랑 까진 에스퍼가 가이드 앞에서 내숭을…… 자신이 가이드라는 걸 모르지. 그러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내숭을?

지승운이 가이드도 아닌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참 생경했다. 좋은 것 같기도 하면서, 본능인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놈의 운명 같은 것 때문일까 싶기도 했다.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운명을 꿈꾸는 듯하지만, 재준은 시리예가 말했던 대로 운명을 거스르는 만남이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운명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역시 축복이겠지.

순진한 척이면 뭐 어때. 재준은 승운의 내숭에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나 누구랑 만나본 적 없는데.”

……진짜 순진한 에스퍼인가? 성적으로만 조금 문란한?

“내가 뭘 해야 하죠?”

“어.”

재준이 말했다.

“어…….”

그러게. 뭘 해야 하지. 일단 만나보자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 다음 뭔가를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신이 가이드라는 걸 밝히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이드라고 밝히는 것은 민망했다. 재준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야 했다.

“일단은.”

재준이 말했다.

“모레를 준비합시다. 바쁘니까요.”

“그게 끝이에요?”

승운이 되물었다.

“정말 이게 끝? 모레를 준비하자고? 내일도 아니고요?”

그러게. 일단 먹이를 눈앞에 줬는데 참으라고 하는 것은 조금 미안한 일인가? 재준이 생각했다. 스스로를 ‘먹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가 화요일에 컨퍼런스에서 발표가 있어서요.”

재준이 말했다. 오늘 저녁부터 예지와 함께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다. 승운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만나보자며. 재준이 자신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이긴 하지만, 당장 이게 끝이라니. 너무 아쉽다. 승운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물었다.

“입을 맞춰주거나 하지는 않고요?”

“그건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아요.”

모르는 사람과 초면에 떡 치는 게 일상인 에스퍼에게 재준의 말은 터무니없었지만 이게 일반인들의 시선인가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손잡는 건?”

“그건…… 모레.”

“왜 모레예요? 내일도 아니고?”

“부끄러우니까요.”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말해도 안 믿을 판에?

게다가 왜 내일도 아니고 모레냐고. 내일이든 모레든 지금 어떠한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기다려야한다면 하루라도 줄어드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난 잡고 싶은데.”

“모레 잡아요.”

“내일은 안 됩니까?”

“내일은 바쁩니다.”

손잡는 거랑 바쁜 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냥 손만 잡아주면 되는데. 승운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지금 당장 손을 뻗으면 닿을 텐데, 그냥 눈으로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그래도 평생 보기만 해야 한다 생각했는데 그를 만질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와, 이게 진짜 무슨 일이지? 죽기 전에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그건가?

“안 그래도 할 말도 있고.” 재준이 말했다.

“할 말이요? 뭐요?”

승운이 물었다.

“지금 하면 안돼요?”

“네.”

“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무슨 말을 하는데 마음의 준비를 해요?”

“중요한 말이에요.”

중요한 말을 지금 하면 안 되는 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설마 지금 이 말이 농담이라거나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어야했다. 재준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갖고 놀지는 않을 것이다. 승운의 아쉬운 얼굴에 재준도 무언가 충동이 일어났다. 그 충동이 정확히 뭔지 몰랐다. 한번 만나보자는 말을 했을 때, 재준 역시 승운을 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닿았다가는 승운이 놀랄 것 같았다. 고삐는 승운에게만 걸린 것이 아니라 재준에게도 걸렸다.

아쉽네. 예쁜 얼굴인데.

“지승운 씨.”

그리고 사실 재준도 많이 양보해준 것이다. 원래는 화요일 컨퍼런스 이후에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재준도 화요일까지 참는 것은 힘들었다. 월요일이면 적당할 것이다. 컨퍼런스 전날 호텔 리셉션에서 괴수학자들이 모인다. 친목 도모도 있었고, 새로운 사람을 소개하고 소개받는 일도 있었고, 가볍게 샴페인 정도를 즐기다보면 마음이 풀어져 고백을 하기 조금 더 수월할 것이라 생각한 재준은 역시 월요일이 적당하다 생각했다.

지금이나 내일 승운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왠지 못 견딜 것 같았다. 뭘 못 견디는 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사실 월요일도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컨퍼런스가 끝날 때까지 견디기엔 재준은 인내심이 강하지 않다.

“모레 리셉션이 끝나면요.”

재준이 작게 말했지만 승운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우리 애인으로 만날까?”

“…….”

승운이 저도 모르게 재준에게 한발자국 다가섰다가 두발자국 물러섰다. 재준이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먼저 들어가세요.”

“어?”

“들어가세요. 지금 당장. 안 그러면 큰일 날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재준이 말을 하다 멈췄다. 승운의 양 뺨과 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반응은 거기에만 오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아래로 떨어진 재준의 시선이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째, 저번에 슬쩍 봤던 것 보다 더……. 아차, 실례지. 하지만 뭐 곧 보게 되지 않을까? 바지 위로 도드라진 정도야. 근데 제복이라 크게 티가 나지 않을 텐데 용케.

재준은 나름 겉으로 승운의 크기를 측정해봤다. 보통 크면 발기가 그렇게 티가 나지 않을 텐데, 승운의 허벅지 위로 묵직하게 드러난 걸 보니 티가 안 날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처음 고사리의 체액에 닿았을 때의 승운도 떠올랐다. 어, 그때랑 비교했을 때 더…….

“박사님.”

승운이 말했다. 어딘가에 긁힌 것처럼 쇳소리가 담긴 목소리였다.

“예.”

“박사님으로 자위해도 돼요?”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재준이 당황했다.

“그걸 묻고 합니까?”

“허락받고 싶어서.”

“…….”

허락 안 해주면 안 할 거고?

재준이 승운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결코 얌전한 생각은 아닌 듯 했다. 명도가 조금 낮은 승운의 눈동자는 검은색 보다는 회색에 더 가까웠는데, 지금은 새까맣게 보인다.

이렇게 보니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야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하다.

“하세요.” 재준이 답했다.

“박사님은? 절 상대로 그럴 건가요?”

“지승운 씨의 얼굴은 꽤 좋아합니다.”

“얼굴만?”

“몸도 좋은 거 알아요.”

재준의 말에 승운이 피식 웃었다. 몸 좋은 게 움직일 때나 일을 할 때만 유용하다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 자극이 되는 용도로도 꽤 쓸모 있는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승운이 한발자국 다가섰다. 하지만 재준에게 닿지는 않는다.

자신과 눈높이가 그렇게 차이나지 않는 재준이라, 승운은 고개를 숙이거나 할 필요 없이 목을 조금 빼는 것만으로도 귓가에 닿았다.

“오늘.”

소리의 진동과 숨소리가 동시에 귓바퀴에 걸리듯 닿는다. 재준이 순간 움찔했다. 승운이 속으로 와 하고 감탄했다. 민감한 타입. 너무 좋다.

“박사님 오늘 제 생각하면서 하면 안돼요?”

“…….”

“난 박사님 생각하면서 할 건데.”

“그…….”

재준이 뭐라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성적 이런 식으로 성적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해본 적 없다. 하지만 승운이 자신을 생각하며 뭔가를 한다면.

음. 나쁘진 않다. 오히려 기분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하니 조금 민망하다.

“내일도 할 거예요.”

낮게 스며드는 목소리가 귓바퀴에 걸린 듯 머물렀다. 재준이 마른 침을 삼켰다. 이대로 넘어가 버리는 게 사실은 자신이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마음껏.”

그렇게 대답하는 재준의 목소리도 조금은 가라앉은 듯 했다.

“제 상상 속에서 엉망진창으로 울릴 겁니다.”

“그러십시오.”

“박사님은 저한테 안 서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시선을 슬쩍 아래로 떨어뜨렸다가 들어올렸다.

“…….”

재준은 뭐라 대답하지 못한 채 승운의 시선을 피했다. 겉보기엔 티가 나지 않을 텐데도, 지승운은 알아차린 듯 했다. 재준이 자신의 몸을 모를 리 없다. 그렇게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승운이 자신을 상대로 자위해도 되냐는 말을 할 때부터 그랬다.

사실 기대가 됐다. 재준이 고민했다.

‘나도 어쩔 수 없나.’

가이드들이란 늘 이렇다. 예쁜 것들만 보면 가지고 싶어서 달려든다. 보석을 원하는 까마귀처럼. 자신은 아닌 척, 좀 더 고상한 척 해봤자 가이드는 가이드다.

그래, 재준은 지승운이 갖고 싶었다. 지승운이 자신을 원하는 것처럼.

“박사님의 뜻 잘 알았어요.”

역시 눈치 챘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인내란 말인가. 승운은 지금 당장이라도 재준을 홀랑 벗겨 먹고 싶었다. 하지만 뭐, 그래. 이틀. 기다릴 수 있었다.

“약속했어요. 모레 애인으로 만나는 거.”

그렇게 말한 승운은 입을 달싹이더니 물러섰다.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재준이 정한 내일이라는 기준에 맞춰주기로 했다. 며칠만 더 참으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상대를 실망시키는 일 따위 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

이틀을 더 참으면 이루어진다니.

바라기는 했지만 장담하지 못했던, 꿈꾸는 정도로만 여겼던 그게 가능하다고? 이틀이 지나면? 그런데 그걸 못 참으면 그게 짐승새끼지 사람새끼겠는가?

승운은 더 있다간 절제를 하지 못하겠는지 먼저 돌아섰다. 그러면서 힐끗 재준을 돌아보고 다시 걸어가다가 힐끗 돌아봤다. 재준은 그런 승운을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저 귀여운 건.’

***

학술대회 장소가 한국이 된 것은 근 30여년 만에 처음이었다. 괴수들이 나타난 게 그 정도 됐기 때문에 그냥 처음이라고 봐도 됐다.

각국에서 학술개최지인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타고 조심스럽게 이동한 괴수학자들은 중구의 이능본청 근처의 호텔이나 레지던스, 아파트를 빌려 머물렀다. 아무래도 대회장이 호텔이다 보니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지와 재준도 어제 늦은 밤까지 준비하던 것을 마무리하고 대회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은 컨퍼런스가 아니라 리셉션 파티였다.

어제 예지와 재준은 밤새 발표할 자료를 정리하고 골아 떨어졌다. 예지는 침대를 차지했고 재준은 소파 행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온대요?”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재준을 향해 예지가 물으며 방탄조끼를 챙겨 입었다. 재준 역시 하얀 방탄조끼를 입고 그 위에 셔츠를 걸친 상태였다. 괴수학자들의 컨퍼런스는 생각보다 위험했다. 여러 위협들이 있기 때문이다.

“글쎄, 한 500명 정도 되지 않을까?”

아마추어와 전문가, 석박사 과정 중에 있는 이들, 길드나 업계에서 온 사람들과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용병 및 에스퍼들까지. 그 정도 인원은 될 것이다.

“아, 그냥 학술회 끝나고 리셉션이나 하지.”

예지가 투덜대며 총기를 챙겼다. 재준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다.

괴수학회에서도 자금원과 수입이 필요했다. 물론 그들은 괴수학자들에게 일정의 금액을 받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유지하기는 조금 어렵다. 일 년에 한 번씩, 컨퍼런스를 열어 여기저기서 후원을 받아야 유지가 됐다.

서로의 정보를 공개하는 장소이니만큼 괴수학자들에게는 무료로 제공되는 강의였지만, 컨퍼런스 이후에 이루어지는 리셉션은 돈을 받았다. 처음 재준이 학술회에 참여했던 학부생일 때는 29달러였는데 어느새 59달러로 올랐다. 물가반영이다.

에르난데스 같은 부자들은 리셉션 참가비 59달러가 부담은커녕 푼돈도 되지 않았지만, 한 푼 한 푼이 소중한 고학생들은 공짜 강연만 듣고 홀랑 내빼기 일쑤였다. 그래서 학회는 리셉션 파티를 연 뒤 학술회를 열었다. 물론 학술회가 끝나고 두 번째 리셉션이 있었다. 그때는 학술회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 학자들에게 시상식을 한다.

“전 이런 예쁜 총기 말고 베레타 같은걸 갖고 싶어요.”

예지가 말했다. 글록이…… 예쁜 총기라고 하기엔 애매했지만 뭐 쓰기엔 나쁘지 않겠지. 그러는 재준도 글록을 선호하기는 했다. 시리예나 에르난데스는 장총을 선호했고, 보리스는 총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으로 휘두르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도 정장에 베레타를 들고 다니기는 그렇잖아. 안 그래도 리셉션인데.”

“보통은 리셉션에 이런 총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괴수학자들밖에 없을걸요.”

“위험하니까 어쩔 수 없지.”

재준의 말에 예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괴수학자니까 어쩔 수 없지. 괴수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괴수뿐만이 아니다. 각종 길드나 기업, 괴수를 돈벌이로 삼는 여러 집단들 역시 그들을 납치하거나 죽이거나 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어떠한 것은 밝혀지면 안 되어서, 괴수를 이용한 불법 행위에 반대해서. 어떤 경우는 반군이나 정부의 배후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환경학자나 환경운동가와 비슷했다.

한 해 피살되는 환경운동가가 약 227명.

피살된 괴수학자는 7명.

그들이 환경운동가와 다른 점은, 괴수를 직접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받아서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는 것 정도.

“가자.”

재준이 말하며 정장 재킷 안에 총을 넣었다.

예지도 따라 일어섰다.

재준이 예지와 함께 회장에 들어갔을 때는 아직 사람들이 들어차지 않은 때였다. 리셉션 장은 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곧 이 호텔의 홀이 사람으로 가득 찰 것이다.

경호를 위해 모인 에스퍼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개중에는 용병으로 일을 하는 에스퍼들도 있었는지 외국인들도 보였다. 시리예의 에스퍼 역시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다.

여러 에스퍼들 사이에서도 지승운은 눈에 띄었다. 그는 재준도 아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태환, 이경민, 지승호. 그들이 팀처럼 움직이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유명한 사람들이었는지 재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승운을 바라봤다. 입고 있는 옷들이 에스퍼 복장이다. 에스퍼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에스퍼라.

이렇게 보니 새삼 잘났네. 재준이 생각했다.

저렇게 잘난 인간이 어쩌다…….

물론 재준도 어디 가서 남부끄럽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비교한다면 지승운이 더 잘난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누군가에게 줄 생각도 없지만.

멀리서 느껴지는 시선 때문인지 승운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재준과 눈이 마주쳤다. 약간은 서늘하게 내리 깔았던 눈이 재준을 발견하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크림처럼 부드럽게 변했다.

“박사님.”

승운이 말하며 재준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승운이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며 고개를 돌렸다. 홍해를 가른 모세도 아니고, 이게 무슨 광경이야.

예지가 민망함에 어딘가로 가려고 했지만 딱히 그녀를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빨리 와요, 제가 아는 분들. 그나마 여기서 아는 사람이라곤 김태환을 비롯한 두 에스퍼였는데 차라리 저 에스퍼들 틈으로 갈까 예지는 고민했다.

반면 재준은 그것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재준은 저런 시선을 종종 받았다. 괴수학회에서 말이다. 물론 저 시선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지승운이다.

선망, 동경, 질투를 동반한 그런 감정들.

지승운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승운이 말했다. 토요일 오후에 보고 나서 처음 보는 재준이었다. 일요일에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방 너머로 들리는 침묵의 소리와 간간히 수치니 뭐니 이야기하는 말들이 심각해보여 승운은 괜히 재준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제 생각 했어요?”

말은 생각했냐고 물었지만 결국 자기를 대상으로 자위를 했냐는 질문이었다. 재준이 승운을 가만히 바라봤다. 당연히 안했겠지. 재준이 어떤지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금 담백하지 않을까 하고 승운이 지레짐작했다.

성적으로…… 야해 보이긴 하는데 이게 지승운 자신이 재준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았다.

처음 재준을 봤을 땐 성적인 것이 연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금욕적이어 보였다. 그게 야하단 말이야. 어떻게 이 몸을 앞에 두고 참을 수 있지? 고문도 아니고.

하지만 그것도 오늘 까지였다.

“네?”

승운은 재준의 얼굴이 닳아 오르며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할 것을 기대하며 물었다. 재준이 그런 승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답했다.

“예, 했습니다.”

“…….”

이…… 건 예상을 못했는데.

“지승운 씨는요?”

“세 번 정도.”

재준의 옆에 있던 예지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오, 시발.

저 미친 에스퍼 새끼.

“매일.”

그게 그냥 생각만 한 거냐.

게다가 대화를 통해 유추해보니 재준도 그에게 잘 응해준 것 같았다. 저 문란한 에스퍼 놈이 현 박사까지 물들인 것이다.

저런 말을 어떻게 이런 홀 한 가운데에서 하냐. 듣는 사람도 있는데. 하여간 형질이상자들의 뻔뻔함이란 원래 그랬지만 도대체 현 박사가 왜 거기에 응해주는지도 예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아악, 듣고 싶지 않아!

역시 이 옆에 붙어있을 순 없었다. 이 둘 사이보단 에스퍼들 사이가 낫다. 그게 아니어도 혼자 있는 거 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예지는 재빨리 그 두 사람에게서 떨어졌다.

재준도 승운이 이렇게까지 답할 줄은 몰랐어서 입을 다물었다.

“박사님.”

말하는 승운의 목소리에 숨소리가 섞였다. 조금은 음습하고 축축한 것 같았다. 일부러 목소리를 낮춘 것인지, 울림처럼 느껴졌다.

“다음에 보여주세요.”

뭘 보여줘?

“저도 보여드릴게요. 원하신다면.”

그러니까 뭘?

재준이 입을 다물었다. 지승운이 뭘 원하는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도 같은 남자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혼자 그런 짓을 하는 지승운을 굳이…….

보고 싶군.

보고 싶네.

이왕이면 두 번 보고 싶었다. 한번 얼굴만 보고 한번은 아래만……. 전신을 포함해서 세 번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재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행히 승운은 못 알아차렸다.

단지 표정을 굳힌 모습에 이건 너무 나갔나? 싶은 추측을 했을 뿐이다. 사실 이틀 전의 일이 꿈같았다. 지금도 꿈이 아닌가 싶었다. 저를 대상으로 자위했다는 재준이 앞에 있다니. 이게 가능해? 가능한 건가? 사실 나 폭주해서 죽은 거 아냐? 천국에 와서 원하는 순간을 겪고 있나?

“저희 지금부터 연인인거죠?”

“아뇨, 저녁…….”

그 정도 참는 거야 일도 아니었지만 조금은 의아했다. 왜 하필 저녁이지? 저녁에 뭘 하려고? 승운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추잡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왠지 재준이 그런걸 의도한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대상으로 자위를 했다는 말을 들으니 그게 썩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제가 지승운 씨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하세요.”

“지금은 좀…… 잠깐 떨어지면 안 됩니까?”

“왜요?”

“진도가 빨라서.”

“……그 진도라는 걸 도무지 모르겠어요. 어떤 게 평범하지?”

승운이 물었다. 일반인들은 보통 진도를 어떻게 나가는 걸까? 손잡는 것에도 며칠의 시간이 걸리다니. 만나자마자 입을 맞추고 배를 맞추는 것에 익숙한 에스퍼의 시각에서 이 진도는 거북이걸음보다도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재준이 원한다면야 못 맞춰줄 것도 없었다.

“가르쳐줘요, 박사님. 진도는 어떻게 빼나요?”

“저도 하고 싶기는 합니다만.”

“…….”

“일단 오늘 일이 끝난 다음에. 그때 할 말이 있습니다. 그걸 말하기 전까지는 전 지승운 씨와 연인이 될 수 없어요.”

“……왜요?”

되묻는 승운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있다. 재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승운을 바라봤다. 눈이 거의 사라질 지경이었다.

“제 양심의 가책이.”

도대체 무슨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에.

승운이 피식 웃어보였다. 그래도 오늘이라 다행이었다. 컨퍼런스는 내일부터 일주일간 지속된다. 정확히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 마지막 리셉션이 있다. 팸플릿에 나온 학술 프로그램 안내서에 따르면 그랬다.

“그래도 오늘이라 다행이네요. 일주일간 참으라고 했으면.”

그렇게 말한 지승운이 잠시 멈칫했다. 그렇다면.

“참아야지, 뭐.”

미움 받을 수는 없지. 어떻게 얻어낸 옆자리인데. 죽기 전까지 이런 거 저런 거 다 즐기다 가려면 시간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쯤 품어본다는 것이 어딘가. 학술회가 끝날 때까진 크게 뭔가를 할 수 없겠지만 주말이 되면 내내 침실에 가둬두고 벗긴 뒤 할 이런 저런 짓을 생각하던 승운의 눈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다.

DMZ연구소에 왔던 사람들이다.

그 틈에 시리예 아예르 박사도 있었다.

시리예가 누군가를 찾는 듯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승운과 눈이 마주쳤다. 승운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재준에게 다가서며 시리예를 바라보고 웃었다.

그리고 시리예는 승운의 표정이 뭘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어이구, 저 바보들.

아주 삽질을 해라, 삽질을 해.

괜히 저 틈에 끼어드느니 다른 쪽에 있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시리예는 홀로 술을 들이키는 예지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재준 역시 그의 동기들이 들어온 것을 봤다.

에르난데스와 마피아로 보이는 그의 경호원.

보리스와 함께 들어온 석사과정의 모니카 살레.

그 중에서 시리예가 의심을 한 사람은…….

“허니!”

그때 보리스가 소리쳤다.

“전 다른 사람들이 박사님을 허니라 부르는 게 싫어요.”

재준이 승운을 잠깐 바라보다 다시 보리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보리스와 모니카, 에르난데스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경호원은 그들보다 두어 발자국 뒤에 있다.

“그럼 지승운 씨도 그렇게 부르세요.”

재준이 말하며 앞으로 나갔다. 승운이 “예?” 하고 되물었다.

허니라고? 아니면 자기라고?

그래도 돼?

승운이 물어보려고 했지만 이미 재준이 저 앞으로 나아갔기에 그저 빠른 걸음으로 재준의 뒤를 따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들이 은밀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사람들이 꽤 찼다. 승운의 눈에 비친 학자들의 모습은 예상과 좀 달랐다. 어떤 이들은 정장을 입었지만 어떤 이들은 군인 같은 모양새이기도 했다. 아니, 용병에 가까운가? 하지만 대화를 하는 것을 들어보면 틀림없이 괴수학자들이었다.

“일찍 왔네.”

보리스가 다가오는 재준을 향해 말했다. 재준이 보리스 뒤의 모니카를 한번 바라봤다. 그녀도 예의상 재준에게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싱가포르 쪽도 고개를 숙여 보이는 문화가 있었나? 재준이 생각했다. 우즈베키스탄 쪽은 그런 문화가 있긴 하던데.

“뭐.”

재준이 대답하며 에르난데스를 바라봤다. 그의 경호원은 재준에게는 흥미가 없어 보인다. 재준이 말했다.

“그런데 샷건을 메고 온 거야? 어디서 구했어? 호텔에서 제지 안 해?”

“미군 측에서 빌렸어. 밀수가 아니면 여기서 총기를 멋대로 갖고 다닐 수는 없지. 정부 측에서도 학술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니까 허가했고.”

“IPMC 관계자들 오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

애초에 지금 재준이 지닌 총도, 예지가 지닌 총도 전부 군에서 제공한 것이다. 괴수학자들과 주최 측이 위험성을 이야기하며 허가되지 않으면 참석을 못한다는 말을 했다나. 처음엔 반대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한국은 총기 규제국가라 괴수학자들에게 제공하는 총기와 탄의 출처를 일일이 조회할 수 있어서 결국 허락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샷건을 주지는 않는데. 이곳이 미군이 영향을 끼치는 구역도 아니었고. 재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아차린 에르난데스가 웃었다.

“난 연줄이 좀 있어서.”

한국 정부에? 군부? 아니면 미군에? M870인거 보면 한국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보는.”

“난 총이 싫어.”

보리스가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무기는 충분한 듯 했다. 그의 허리춤에 차 있는 군용 단검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여긴 한국이잖아. 안전한 편이지.”

“미국이나 콜롬비아에 비하면 그렇지.”

한국인 입장에선 거기가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에르난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때로는 위험도 필요한 법이라고 말을 하는 모습이 재준이 고개를 저었다.

“IPMC도 이번 리셉션에 참가하나?”

“그렇겠지. 일단 얼굴 도장 찍은 다음에 학술회에서 괜찮은 발표 하는 사람 있으면 마지막 리셉션까지 남아있을걸?”

“겨우 이딴 거에 인당 600달러 정도 주면서 올 거라면 학자들이나 좀 지원해주지. 돈도 졸라게 많으면서.”

“그 돈을 다 노동력 착취해서 모은 거잖아. 아직도 IPMC 인턴들 무급이야?”

“그럴걸? 걔 기억나? 마크라고 미국 출신. 학부 졸업 못하고 IPMC에 인턴 지원했는데 돈이 하나도 안 나와서 그 앞에서 텐트 치고 살았잖아.”

“성이 뭐였지?”

“나도 몰라. 아무튼 마크. 붉은 수염에 곰처럼 생긴 애. 지금 꽤 괜찮은 자리에 가 있다던데? 텐트 치고 버틸 만 했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틈에서 승운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괴수학자들은 그저 연구소에 처박혀 일나 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치적인 부분도 있는 듯 했다.

“뭐, 아무튼 IPMC도 새로운 인물을 원하긴 할 거야. 요즘 연구들 지지부진한 것도 있는데 샛별이라도 나오길 바라겠지. 안 그래, 샛별?”

“몇 년 전 이야기를 하는 거야.”

재준이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잡은 물고기에는 정성을 다하지 않더군.”

“왜, 잡은 물고기가 다른 어딘가로 갈까 전전긍긍하기도 하는데.”

보리스가 턱짓으로 멀리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오네. IPMC사람.”

대회장 입구에 들어서는 사람이 보였다. 희끗한 머리를 가진 여자와 붉은 수염을 가진 남자였다. 그 뒤로도 목에 붉은 이름표를 건 사람들이 들어왔다.

“저 마크?”

“그래. 저 마크.”

“시어샤를 보좌하는 쪽으로 바뀌었나본데?”

마침 그들이 재준이 있는 곳을 봤는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아, 막혔다.”

하지만 그 사이를 누군가가 막아섰다. 승운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뭔가 익숙한 얼굴인데, 그가 만나본 적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서류에서 봤던가? 누구지? 생각하는 순간 그의 옆에서 보리스가 말했다.

“닥터…… 뭐더라? 닥터 정원?”

“닥터 공원이야.”

“…….”

그래, 박형기 박사. 그가 IPMC 사람들 앞에서 뭔가 얘기를 했다.

“여전히 욕심이 그득그득 하다니까.”

국외에서도 평이 안 좋군. 승운이 생각했다. 국내에서도 그렇게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정치적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했다.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겠지만.

붐비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홀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승운은 “저는 그럼.” 하고 말했다. 리셉션이 시작되면 그도 경호를 하러 가야했다.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그가 뭔가 입을 열려는 순간, 쿵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으로 향했다.

대회장의 문이 닫혀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사람 한명이 서 있었다. 기껏해야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아이였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아는 사람이야? 묻는 사람은 많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딸랑— 하고 방울소리가 울렸다.

“한국인?”

에르난데스가 물었다.

“아뇨.”

승운이 대답했다.

저건.

“조금 어리지 않아?”

괴수다.

“저거.”

그런 아이의 뒤편으로 누군가가 다가섰다. 금발의 여성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보호자와 같이 왔나보네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주위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딸랑—

다시 한 번 방울 소리가 들린다.

에르난데스와 보리스가 동시에 움찔했다. 그들의 경호원도, 지승운도 마찬가지였다. 이 소리. 익숙했다.

딸랑— 딸랑—

저게 뭐냐고 보리스와 에르난데스는 묻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겪어봤기 때문이다. 에르난데스와 그의 경호원이 샷건을 들어올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시리예도 자신의 총기를 꺼냈다. 승운은 자신의 시계를 바라봤다. 붉은색에 가깝다.

헛웃음이 나온다. 하필 이런 날이라니.

사방에서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방울은 보이지 않았다. 문을 기점으로 명암이 생겼다. 어둠에 잠식되듯, 아이의 모습이 사라져간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와 대비되는 금발의 여성이 한발자국 다가서며 말했다. 몸에 잘 맞는 붉은 정장을 입은 여성이 구두의 발뒤꿈치를 부딪쳤다. 윙팁 장식이 되어있는 구두는 남성용 같았지만 조금 더 얇게 빠져있었다.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웃는 여성의 붉게 칠해진 입술 사이로 조금은 색이 탁한 혀가 드러났다.

“이 아름다운 서울, 괴수학회의 학술회 전 리셉션에서 여러분을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누군가가 ‘저거.’ 하고 말했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장 하나가 의심을 증폭시켰다. 사람이 아니다.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은 평범한 에스퍼인가 싶었지만, 저 기괴한 느낌은 에스퍼와 같은 인간 종에게서 느껴지지 않는다.

“흡혈괴수종?”

“어둠 괴수종과 함께 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군.”

수군거림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는다. 상황을 경계한 에스퍼들과 용병들은 각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괴수학자들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샌가 예지와 시리예가 곁에 와 있었다. 예지가 다가와 “괜찮아요?” 물었다. 재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밖에서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건지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장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문 쪽을 바라봤다. 밖에 있는 사람은 운도 좋네, 누군가가 말했다.

여자 뒤로 서서히 어둠이 밀려든다.

“잘 어울리네.”

“박사님, 지금 그게 할 말이세요?”

예지가 말했다.

“그래. 그게 할 말이냐. 오늘이 우리 다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날일지도 모르겠는데.”

보리스도 한마디 견주었다. 재준과 시리예가 동시에 누군가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각자 무기를 쥐고 사람들은 경계했다. 본능이든, 훈련을 받아 저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든. 지금 이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은 다들 알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

여자가 테이킹 어 보우로 인사했다.

“부디 즐거운 시간되시기를.”

순간 어둠이 장내를 뒤덮었고, 잠시 뒤 누군가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탕, 탕!

총 쏘는 소리가 났다. 연속으로 발사되는 소리에 옆에서 움찔하는 것을 느낀 재준이 “괜찮을 거야.” 말했다. 그저 앞이 보이지 않을 뿐,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헤어지지는 않았다. 그때 갑자기 어둠이 깜빡이더니 빛이 드러났다. 재준은 자신의 눈앞까지 다가와 입을 벌리는 비행종 괴수를 발견하고 발로 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끼기기 하고 기이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보리스의 “와우.” 하는 감탄사가 뒤따랐다.

“괴수학계가 30여년은 퇴보하겠군.”

이대로 다 죽으면 오십 여년은 더 넘게 걸리겠어. 이어지는 보리스의 말에 재준이 “그러게.” 하며 동의했다.

그때 가까이서, 아니 어쩌면 멀리서 “아뇨.” 하고 승운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말했잖아요, 박사님.”

승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지켜드리겠다고.”

그러더니 근처에 있던 인기척 하나가 사라졌다. 그 뒤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적어도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종종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괜찮다는 말도 있었다. 그래도 희생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밖에서는 쿵쿵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대회장 문이 닫히고 비명이 들어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재준도 총기를 들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을 내리찍었다. 총으로 쏘는 것이 제일 빨랐지만 지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서 사용했다간 사람이 다칠지도 모른다.

여러 소리가 중첩됐다. 쿵 쿵 밖에서 울리는 소리가 마치 북소리처럼 느껴졌다. 고대의 전쟁터처럼. 그때도 괴물들과 사람들이 이렇게 싸웠을까. 재준이 생각하며 팔을 휘둘렀다. 에르난데스의 “으악, 나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다시 어둠이 깜빡인다.

빛이 드러났다. 그리고 다시 어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빛이 드리운다.

어둠이 몇 번이고 들이닥쳤지만 빛이 조금 더 강했다. 곧 어둠이 걷혔다.

재준이 문 앞을 바라보자 지승호와 김태환이 아이를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A급과 B급이 달려들어서 잡을 수 있는 괴수라. 등급이 꽤 높아 보였다. 괴수는 죽은 건지, 그저 잠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금발의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밝아오자 괴수들을 처리하는 것은 더 쉬웠다.

보리스가 기이한 미소를 가지고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시리예의 손에는 베레타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역시 이게 잘 안 맞는다며 예지와 총을 바꿨다. 베레타를 받아 든 예지가 신이 나 괴수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재준은 승운을 찾았다. 장내를 둘러봐도 승운은 보이지 않았다. 금발의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쿵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커흑! 쿨럭, 쿨럭!”

여자였다. 붉은 정장이 짙게 물들어있었다. 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액체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그녀의 위로 승운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승운의 모습이었지만 지금 상태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도 있다. 재준도 그 중 한명이었다. 지승운의 시계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너, 꽤 훌륭하구나?”

여자가 말했다. 피 끓는 소리가 끄륵 하고 들렸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발 때문에 일어서지 못한 여자는 지승운을 탐나는 얼굴로 바라봤다.

“몸 상태도 아주 좋아.”

좋기는. 승운은 짜증이 난 상황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다. 너무 위험해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방심해도 에너지가 사방으로 날 뛸 것 같다. 한순간에 처치할 수 있는데, 제어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일부러 내리눌러야 하는 힘은 답답하다는 듯 승운의 몸 여기저기를 헤집어댔다. 억눌린 자신을 해방하라는 것처럼.

“그런 거에 머물지 말고 널 해방시켜.”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풀풀 났다. 그러더니 일순간 안개처럼 흩어졌다.

“너도 이쪽 세계 사람이잖아.”

여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러고는 깔깔깔깔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의 몸을 움츠러들었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소리였다. 연기는 이내 응집되더니 수십 마리의 박쥐 떼로 변했다. 도망치려는 박쥐 몇 마리를 승운이 낚아채 퍽 하고 터뜨렸다. 어디선가 “아아악!” 하고 흡혈괴수종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장내는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심하지 않다고 에스퍼들은 생각했다. 한국의 이능청에서 경호를 목적으로 제공한 에스퍼들도, 그리고 괴수학자들을 직접 목도할 일이 없었던 용병인 에스퍼들도 괴수들을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괴수학자들의 몸놀림을 보고 놀랐다. 20대의 젊은 청년층부터 60대의 장년층까지 자연스럽게 무기와 총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모를 기관총이 다다다다 소리를 내며 괴수들을 향해 발사됐다. 저거, 어떻게 들여온 거야? 예지가 생각하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괴수를 잡아 내던졌다. 그녀에게 날아들었던 괴수가 벽에 부딪혀 퍽 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몇 번이나 부들부들 떨던 괴수는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아오, 씨발. 줄기차게 나오네, 그냥!”

“남극에 있을 때 같네!”

남극이 세상에서 괴수가 가장 많다고는 하는데 도대체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잘 싸워.

괴수학자들이 쏘는 총에 맞은 괴수들은 모두 움직이지 못했다.

원샷 원킬. 아마도 괴수의 핵을 노린 듯 했다.

대체로 에스퍼들은 루키와 베테랑을 아랑곳않고 산산조각 내는 것을 선호했지만, 그들은 괴수 생태를 잘 알아서 그런지 움직임이 깔끔했다.

보리스가 어디에서 주워왔는지 모를 몽둥이로 괴수들을 내리쳤다. 재준도 달려드는 괴수들을 발로 차고 밀치며 승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박쥐 몇 마리를 더 터뜨린 승운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아래로 떨어진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가 승운을 올려다봤다.

위험해.

재준이 생각했다. 위험하다. 뭐가 위험한지 모르겠는데, 그냥 위협을 느꼈다. 불안하다.

무슨 일이 터질 것처럼.

승운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고 들어올렸다. 이대로 죽여야 할지, 아니면 살아서 데려가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의 순간, 그녀가 승운에게 달려들었다. 피하려고 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흡혈종 괴수답게 그녀가 이를 세워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맞으며 흐흐흐 웃는 모습이 기괴했다. 승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앞이 조금 흐렸다.

흡혈괴수에게 피를 빨린다고 해서 흡혈괴수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흡혈귀가 될 것이라 두려워했다. 물론 지식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문제는 빠져나가는 피와 떨어진 살점이 신체 기능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승운이 신음을 삼키며 여자의 머리통을 쥐었다. 숨통을 틀어막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힘을 조금이라도 덜 썼다간 승운이 당한다. 레벨이 높아 보였으니까.

결국 승운은 평소에 쓰지 않던 물리력을 손끝에 실었다.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잡던 힘이 강해지자 그녀가 당황스러운 듯 벗어나려고 했지만 승운이 더 빨랐다. 퍽 소리와 함께 살점이 터져나갔다. 어쩌면 뼈가 부서졌는지도 모르겠다. 인간형 괴수 종들은 모두 머리가 약점이었기에 그녀가 살아날 일은 없었다.

승운도 마찬가지였다.

부족하다.

힘이 부족하다.

아니, 넘친다.

숨을 쉴 때마다 세상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자신의 심장인지, 아니면 타인의 심장인지 알 수 없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울리는 심장소리에 머리가 아파왔다. 물어뜯긴 목에서 살이 돋아났다. 빠른 회복에 목덜미가 아파온다.

부족하다.

눈앞이 흐렸다. 아니, 까맣다.

부족하다.

부족하다.

온 몸의 구멍에서 연기가 나는 듯 했다. 검은 연기다. 연기인가? 아니면 물인가? 알 수 없는 힘을 신체가 감당하지 못하고 밖으로 빠져나온다.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자신의 몸을 제어할 힘이 부족하다.

승운은 그때 깨달았다. 지금 몸이 더 이상 감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폭주다.

몸이 제어가 되지 않자 승운은 뒤늦게 후회가 됐다. 내키지 않더라도 가이딩을 조금이라도 받아둘 걸. 성적 가이딩이 아니라면 입술이라도. 적어도 누군가의 손이라도 잡을걸.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폭주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눈앞이 새까맣게 변해 적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았다.

“지승운 에스퍼!”

“피해! 피해요!”

지승운의 폭주의 전조를 다른 에스퍼들도 눈치 채고 있었다. 쿵 쿵 거리는 소리가 거세어졌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대회장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에스퍼들과 군인들이 장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엉망진창이었다.

어딘가에 숨어있었는지 박형기 박사가 열린 문틈으로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괴수들은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자 본능처럼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지승운이다.

에스퍼의 힘은 형체를 가지지 않는데, 승운의 힘은 검은 형체를 가진 채 풀풀 흩날렸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짙은 안개를 만들어냈다. 안개에 닿은 물건이 뒤틀리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건물의 기둥에 균열이 갔다. 이대로 곧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재준이 승운에게 달려갔다.

“지승운!”

승운에게도 재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데 그의 모습만큼은 승운에게 뚜렷하게 보였다.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승운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재준에게 손을 뻗어 더 이상 다가오지 않도록 했다.

“지승운 씨.”

차분해보였지만, 평소보다 높은 톤이었다. 걱정하는 것이 귓가에 들리자 머릿속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아, 빌어먹을.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아.

마지막이라고 선물이라도 주는 것처럼, 따스한 목소리와 상냥한 얼굴이 보인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밀착되어있다. 입 맞추고 싶다. 그냥 안고 싶다. 마지막으로 체온이라도 닿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너무 위험했다.

“지승운 씨.”

재준이 한발자국 더 다가오려고 했다. 승운이 “지승호!” 하고 그의 사촌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어느 샌가 목소리가 탁해져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괴물에 잠식되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된다.

“……대피, 시켜.”

그나마 이지가 남아있어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승운의 눈에서 무언가가 줄줄 흘러내렸다. 눈물인지 피 인지, 아니면 까만 덩어리인지 알 수 없다.

“어서 현, 박사님을…… 대피…!”

제대로 이어지지 않던 말 사이로 울컥하고 검은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우웩 소리를 내며 검은 덩어리를 토한 승운의 시야에 재준이 걸렸다. 지승호가 재준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승운은 안심이었다.

최대한 멀리, 빠르게 도망치면 현 박사는 괜찮을 것이다. 자신이 그를 죽이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겠지. 말했던 대로, 그를 지키다가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이거면 됐어.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 승운의 뒤편으로 무언가가 쾅 하고 부딪혔다. 재준이 다시 한번 “지승운 씨!” 소리쳤다. 승운의 뒤로 괴수가 나타났다. 위험한 괴수는 아니었다. 재준이 그를 걱정했지만 승호는 지금 현재준 박사가 더 걱정이었다. 승운이 폭주하면 이 도시 자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 도시가 망한다면 대한민국이 망하는 거겠지.

이쯤 되면 도망치는 게 소용없지 않나 싶었지만, 그래도 승호는 재준을 이끌었다.

“박사님, 어서.”

승운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이미 승운의 눈앞에는 뭔가가 보이지 않았다. 검은 안개가 그의 몸 위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치 스모그 현상처럼. 폭주하기 직전의 에스퍼들은 저런 안개가 피어오른다. 재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승호는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강제로 재준을 이끌려고 했다. 하지만 재준이 몸을 틀어 승호에게서 벗어났다.

어떻게 빠져나갔지? 승호가 인식하기도 전에 자연스레 몸을 튼 재준은 바닥에 떨어진 총기와 탄창을 챙겨 들었다. 그 인기척에 승운이 다시 뒤를 돌았다. 눈이 붉다못해 새까맣게 변한 승운에게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박사님!”

지승호가 소리쳤다. 승운이 손을 뻗었다. 그대로 재준을 구겨버릴 것 같았다. 승호가 그를 빼내려고 달려드는 순간, 승운의 손이 재준의 몸에 닿았다. 재준은 그런 승운을 한 손으로 끌어안고 총기를 정면에 고정했다. 승운의 몸이 멈칫한 순간, 재준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승운의 뒤에 있던 괴수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퍽 소리를 냈다. 머리가 터지는 소리, 그리고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아주 단순한 세 개의 소리가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이어졌다. 떨어지는 괴수에게서 시선을 들어 올린 승호는 다시 승운과 재준을 바라봤다.

재준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을지 보기 두려워 천천히 고개를 돌렸지만 막상 아무렇지 않은 재준의 모습에 멈칫했다.

재준의 팔은 승운을 감싸 안았고 손끝은 목덜미에 닿아있었다. 승운은 마치 그대로 굳어버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재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피스톨을 괴수에게 겨냥했다. 그리고는 다시 퍽 소리가 나며 괴수가 터졌다. 동시에 반동에 의해서 재준의 몸이 흔들렸다. 겹쳐진 승운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앞에 있는 하급 괴수 다섯의 머리통을 박살낸 현재준은 탄창을 분리한 뒤 승운과 밀착했던 몸을 떼어냈다.

“지승운 에스퍼.”

재준이 손을 목덜미에서 얼굴로 가져갔다. 매끄러웠던 뺨에 검은 자국이 있었다. 여전히 몸 위에서는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승운의 눈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괜찮습니까, 지승운 씨?”

재준이 다시 물었다. 승운이 가라앉은 눈으로 재준을 바라봤다.

어느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했었다.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부수고 사라지게 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앞이 보이지 않자 다른 감각이 발달했다. 후각, 청각, 촉각. 자신을 공격하려고 했던 괴수를 그대로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한 승운은 그들에게 달려들기 전에 자신의 뒤에서 다가오는 무언가를 감지했다. 그것이 공격성을 띠고 있지 않음에도 승운은 다가오는 생물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이것부터 죽여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뻗었을 때, 승운은 그 낯선 촉감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 번도 닿은 적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현재준이다. 그 냄새를 기억한다.

쾌락을 야기할 것 같은 무서움. 고양감을 일으키는 불안함.

그의 몸을 파고든 자신의 손가락이, 생생하게 살을 뚫는 것이 끔찍해 떼어내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다. 현재준이 죽는다. 자신이 미쳐서 날뛰고 죽는 것 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 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차라리 스스로를 죽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 때 몸에 있는 모든 힘이 터지듯 부풀어 올랐고 열기가 감당이 되지 않아 몸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현재준이 자신을 끌어안았다. 승운은 이대로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을 뒤흔드는 범종 소리만 아니라면.

조금은 서늘한 체온에 부푼 열이 식었다. 총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몸이 뒤흔들렸다. 현재준은 지승운을 놓지 않았다. 그와 닿은 면적이, 목덜미에 있는 손이, 뺨에 닿은 재준의 목덜미가.

모든 곳에서부터 승운을 뒤흔들었다. 몸을 잠식하는 검고 끈적끈적한 것을 정화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승운은 재준의 몸에 기대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재준이 괜찮냐는 말과 함께 몸을 떼어냈다.

부족했다.

“지승운 씨.”

내리깐 승운의 눈이 현재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은 비스듬한 고개의 각도가 지금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재준은 그런 승운을 다시 한 번 안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안정될 때까지 이러고 계십시오. 제가 살려드릴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재준이 총기에 탄창을 결합했다. 승운의 손이 재준의 허리를 감쌌다. 만족스러운 숨이 재준의 목덜미에 닿았다. 촉촉한 습기가 재준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승운은 최대한 많은 면적을 닿으려는 듯 재준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재준은 다가오는 괴수를 향해 다시 총기를 겨눴다.

지승호는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분명 폭주 직전의 상황이었던 지승운이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현장에 있는 에스퍼들과 몇몇의 가이드들 또한 마찬가지로 비정상적이던 지승운의 몸이 서서히 돌아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다시 총소리와 함께 현재준이 괴수의 머리를 쐈다. 비단 재준뿐만이 아니었다. 컨퍼런스에 참석한 괴수학 박사들은 하나같이 침착하게 괴수들을 공격했다. 지승호는 괴수들을 잡는데 정신이 팔려 다른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인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지승운이 안정되어 가고 있고, 밖에서 지원 나온 에스퍼들과 내부의 사람들에 의해 줄어든 괴수들을 보며 조금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괴수학자들이,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무기를 들고 괴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때 DMZ에서 재준과 예지가 무기를 다루는 것을 보고 그럴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그들은 생각보다 더 이 싸움에 익숙한 듯 했다. 점점 괴수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조금 여유가 생긴 것인지 태환이 승호의 옆으로 다가왔다.

꽤 힘든 상대를 한 것인지 어깨부터 난 긴 자상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 어떻게 된 겁니까?”

태환의 물음에 승호는 뭐라 답을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두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지승운은 현재준의 허리를 잡았던 손 하나를 떼어내 재준의 얼굴에 갖다 댔다.

재준이 “지승운 에스퍼?” 하고 불렀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박사님.”

승운의 부름에 재준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확실히 아까에 비하면 상태가 좋아지긴 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잠시 피해서 쉬고 있는 게…….”

말을 하던 재준이 돌연 멈칫했다. 승운이 재준에게 입을 맞췄다.

마주한 입술로 숨이 부드럽게 다가왔다. 입안에 바람이 부는 것처럼 들어온 숨결에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그곳을 특정할 수 없었다. 마주친 입술은 부드럽지는 않았다. 철 맛이 나는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닿은 말캉한 감촉이 소리를 내며 아랫입술을 빨아 들였을 때 재준은 저도 모르게 흐 하고 소리 내며 눈을 감았다. 승운의 혀가 재준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춥 민망한 소리를 내며 입안을 쓸어낸 말캉한 혀가 닿을 때마다 목덜미와 귓가에 열이 올랐다. 생각보다 더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승운이 재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두피를 쓰다듬듯 풀었던 손이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얼굴을 살짝 떼어낸 승운은 별안간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러고는 재준의 다시 입술을 깨물고 먹이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사람들은 도망치고 괴수들이 죽어나가며 에스퍼들과 괴수학 박사들이 상황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에 마치 저들만 있는 것처럼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을 몇몇 이들은 황당하게 바라봤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 비명소리 사이로 젖은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승운이 입을 떼자, 재준도 눈을 떴다.

지승운이 웃고 있다.

“……이제 움직일 수 있습니까?”

재준이 물었다. 승운은 답하지 않았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승운은 떨어지기 싫다는 듯 재준의 입에 쪽 소리 나도록 가볍게 입을 맞췄다.

움직일 수 있냐고?

“당연하죠.”

승운이 말하며 재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항상 이러고 싶었다. 이 몸에 닿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으나 재준은 한 번도 자신에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이래서였군. 승운이 생각했다.

“해야 한다는 말이 이거였어요?”

승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디에선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났다. 어쩌면 물거품 소리일지도 몰랐다. 허공 곳곳에 물방울이 생겨났다. 작은 방울들은 마치 하나의 개체인 것 마냥 서로를 찾아 응집했다.

“당신이 내 가이드라는 거.”

승운의 눈동자가 사람 같지 않은 빛을 내뿜었다.

허공에 응집된 물은 중력을 거스르며 자신이 공격해야할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것처럼 이리저리 대상들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사라진 물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곳곳에 스며들었다. 입, 코, 귀, 기도, 폐부. 습격한 괴수들의 육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물거품이 쏟아져 내렸다. 하나같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숨통을 쥔 듯, 공기라곤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갑자기 던져진 것처럼 몸이나 땅을 긁어댔다.

대량학살이다.

피 한 방울조차 튀지 않는.

시리예 아예르는 잡고 있던 샷건을 내려놨다. 더 이상 총기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 날 그가 한국형 괴수를 죽였던 때처럼 차오른 물이 괴수들을 죽여 나갔다.

별다른 힘을 쓰지 않은 채.

물을 다루는 에스퍼들은 고작 반 컵의 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던가. 기도로 들이찬 물에 꺽꺽 소리를 내며 동시에 쓰러져가는 수십의 괴수들에 괴수학 박사들이 전의를 상실할 때, 지승운은 재준을 향해 어여쁘게 웃으며 말했다.

“연구하기 편하게 잡았어요.”

마치 잘했다는 칭찬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

현재준이 가이드였다.

그 누구도 몰랐던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몇 명 정도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현재준이 가이드 형질 검사를 거절했다는 데 있다.

지승호는 자기가 이 자리에 있게 될 줄 몰랐다. 적어도 거기 있던 한국의 에스퍼 중 재준을 아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박형기 박사는 진작 도망쳤으니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괴수학 박사들 역시 괴수를 사살하느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재준의 능력을 알아차렸다. 그나마 거기 있던 에스퍼들이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 자리는 부담스럽다고 지승호는 생각했다.

취조실의 거울 안쪽에는 지승운과 김태환, 이동철 소장이 있었고, 승호와 함께 이경원 에스퍼와 치료계 에스퍼 한명이 재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재준의 어깨에 난 상처를 살폈다고 봐야했다.

“성함 말씀해 주십시오.” 승호가 말했다.

“현재준입니다.”

재준은 지금 반쯤 헐벗고 있었다. 정장 재킷은 의자에 걸려있었고 드레스 셔츠의 단추는 전부 푼 상태로 한쪽 팔을 소매에서 빼낸 상태였다. 치료계 에스퍼는 조금 아플 거라는 말을 했다.

“나이는요?”

“만으로 서른 둘 됐습니다.”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대통령 직설 상설기구인 괴수연구위원회 소속 연구원입니다.”

“괴수연구위원회라면?”

“괴수 생태를 비롯하여 에스퍼의 괴수 사살에 도움을 주고 사람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연구소들로 정부조직법 상 중앙행정기관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연구소에서의 역할은요?”

“DMZ연구소를 맡고 있는 수석 연구원입니다.”

“주로 어떤 연구를 하시죠?”

“괴수생태학입니다. 주 전공은 환경호르몬을 비롯한 내분비교란물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해줄 수 있습니까?”

경원의 말에 재준이 ‘음.’ 하고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DMZ에 온 이후로는 내분비교란 물질이 괴수의 내분비기능과 생식 기능에 미치는 영향 및 LFE 종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박사 학위는 내분비교란 물질이 괴수의 핵 내 수용체에 미치는 영향으로 받았고 이 부분은 현재 하급의 에스퍼들이 괴수를 사살하는데 기초가 되는 이론을 보강한 것입니다. 그 외 내분비교란 물질에 노출된 MRQ종의 기형성, 내분비교란 물질의 독성이 MKR종을 비롯한 다른 식물 괴수종의 기형성에 미치는 영향, 내분비교란물질인 노닐페놀이 EIS 종의 산란과 부화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잠깐, 거기까지요.”

뭐야, 뭐 어디까지 말하려는 거야? 승호는 당황했지만 오히려 경원은 “혹시 그때 그 가이드의 호르몬 수치를 물었던 게 가이드 호르몬이 내분비교란물질로 정해져서인가요?” 라고 질문까지 했다.

맞아. 엉망진창이었지만 저 사람도 박사였어.

그들끼리 뭔가 통하는 게 있기라도 한가. 승호가 입을 다물자 인이어 너머로 ‘가이드 형질검사 강요해.’ 라고 이동철 소장이 말했다. 정확히는 이능청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헌법에서는 사람은 형질이상자 검사에 대한 강요를 할 수 없다고 나온다.

헌법 제 10조에 따라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문제는, 형질이상자는 ‘인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돌연변이 인류’니까. 형질이상자와 일반인들의 법이 다르다.

그래도 인간일 때는 이 검사를 거부할 수 있다. 물론 그 시기의 형질이상자들의 검사 의무는 법정대리인에게 있으며 이것을 거부할 시에는 법정대리인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검사를 피할 방법이 없다고 봐야 했다.

그 법망을 피한 것이 현재준 박사다.

그래서 현재 폭주 직전의 에스퍼를 구한 가이드이자 괴수학 박사인 현재준은 지금 구속 상태였다. 구속이라고 해서 진짜 수갑을 채운 것은 아니었지만 취조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상태다.

“치료 끝났습니다.”

치료계 에스퍼가 말했다. 재준이 어깨를 만져보자 새로 돋아난 여린 살이 조금 따끔했다. 하지만 푹 파였던 방금 전과는 달랐다. 자신의 일을 마친 치료계 에스퍼가 나가자, 경원은 지승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실 경원은 그 자리에 없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듣기로는 지승운이 폭주 직전이었다, 혹은 폭주였다 하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폭주 직전인 에스퍼를 잠재운 것과 폭주한 에스퍼를 되돌리는 것은 다르다.

“본론부터 말하죠. 현재준 박사님은 지금 당장 가이드 검사를 받고 등록해야합니다.”

재준도 그럴 각오는 하고 있었다.

“저도 그래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시겠지만 저는 대통령 산하의 행정기관에 있다 보니 다른 곳과 병행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에스퍼와 가이드가 소속된 곳은 이능청 산하 행정기관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곳 역시 이중적으로 등록을 할 수는 없죠.”

“저흰 이중 업무 가능합니다.”

“…….”

“박사님 밑에서 일하는 가이드 연구원들 있잖아요.”

그렇군. 그게 있었다.

“뭐, 그건 차차 말하고 우선 등급 확인을 위한 검사는 필수입니다. 매칭도 물론이고요. 특히나 지금 지승운 에스퍼를 가이딩 할 수 있는 가이드는 없습니다. 그런데 박사님은…….”

그러니까 이 사람이 처음의 그 가이드였단 뜻이었다. 지승운을 제대로 가이드 한 첫 번째 사람이자 가이드인 걸 숨겨서 일반인이라고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승운을 발정하게까지 만든.

“지승운 에스퍼는 제가 가이딩 하겠습니다.”

“…….”

“가이딩을 하지 않을 거라면 그 장소에서 그러지는 않았겠죠. 제가 담당할 겁니다. 하지만 다른 에스퍼들은 싫습니다. 가이드 등록을 하면 주어진 임무에 따라 에스퍼들을 거부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지승운 하나만 맡으면 다른 에스퍼와 뭔가 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건 모르는 것 같다. 경원은 그 사실을 말을 해주려 입을 오물거리다 말고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이야기를 안했습니까? 가이드인 거요.”

진작 말했으면 일이 얼마나 수월하게 풀렸을까.

“안하는 게 낫다고 들었습니다.”

“낫다니…… 엄연히 돌연변이 법 위반입니다. 이거.”

“그렇긴 한데 국가 분쟁보다는 나으니까요.”

“국가 분쟁?”

“제가 가이드로 각성한건 남인도에서였습니다. 즉, 가이드 형질각성 신고를 하면 전 지금 인도의 시민권자가 되어있겠죠.”

그건…… 곤란하지. 이경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취조실에서는 거울로밖에 보이지 않는 창이었지만 이동철 소장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잘하셨습니다.”

인도에 뺏긴다고 하면 아찔했다. 사실 지금 와서도 문제였다. 그가 인도에서 각성했다는 증거가 있다면 인도에서는 그를 귀화시키려고 할 것이다. 거절해도 일단 시민권을 들이밀겠지.

그래, 안 밝힌 게 다행이지. 늦게 밝힌 게 다행이다. 현재준은 몇 년간 인도에 간 적이 없으니 가이드 각성시기를 허위작성하면 된다. 아니, 그게 아니어도 빨리 가이드 등록을 하면 인도에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경원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지승호도 마찬가지였다. 선례가 없다. 원래 공무원들이 그렇듯 선례가 없으면 선뜻 뭔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 뻔했으니까.

지승호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던 찰나, 철컹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중년의 여성이 들어왔다. 단아해 보이는 외모였지만 왠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지는 여성은 취조실 안쪽을 훑어봤다. 권위감이 느껴진다. 현재준은 이런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외인부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많이 봤었다.

군인?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남자 역시도 비슷한 분위기가 풍겼다. 군인이 아니라면 군 출신일 수도 있었다. 근데 누군가와 닮았다.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차장님.”

지승호가 말했다. 차장이라면 이능청장 바로 밑이다. 그녀는 이경원을 바라보더니 “나가 봐.” 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승호는 계속 그 자리에 있어야했다. 그녀는 CCTV의 사각인 구석으로 가 섰다. 그녀와 같이 들어온 남자가 이경원이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현재준 박사님. 지금부터 조서 작성에 들어가겠습니다. 이 상황은 전부 녹화, 녹취되고 있으며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박사님은 돌연변이 형질인류법에 따라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모든 정보는 이능청 관리 하에 보호됩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가 재준을 바라봤다.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승호가 작성한 것을 이어 바라봤다. 내분비 교란이 괴수의 생리에 미치는…… 이건 뭔지 몰라서 지웠다.

“가이드로 발현한 때가 언제입니까?”

“스물일곱 살 생일 때였습니다.”

생년월일이 1월 29일.

“그러면, 5년 전이군요.”

“아, 만 스물여섯입니다. 6년 전이죠.”

이어지는 재준의 말에 차장이 움찔했다. 뿐만 아니다. 취조실을 바라보고 있던 이동철 소장이나 막 들어온 이경원 역시 흠칫 하더니 지승운을 바라봤다.

그때부터였지. 지승운의 폭주 위기가.

진짜 제 짝인가? 두 부자가 생각했다.

“각성 장소는 어디죠?”

“인도 서남부 께랄라 주의 깐누르 시티입니다.”

“거기라면.”

“공식적으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 에스퍼이자 가이드가 없어서 사망했던 아미르 수드의 고향이죠.”

“가이드 각성 시 각성 열이 발생했을 텐데 어떻게 숨겼습니까?”

“가이드 각성 열 인줄 몰랐습니다.”

“열이 상당했을 텐데요? 의사가 보면 금방 알아차리고 이능청에 신고했을 텐데요.”

“거리에서 파는 파인애플 주스를 마신 뒤라 이질에 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처방은 그렇게 받았고요. 그쪽은 물을 조금만 잘못 먹어도 큰일이 나는 터라……. 죽는 경우도 상당하고요.”

“…….”

그것 참 운 하나는 끝내주네. 그런 식으로 각성 열을 숨길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아니, 이 경우가 거의 처음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래서 인도 정부에서 숨길 수 있었다. 그러면 한국에 와서는 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법적으로 특정 나이 이상의 경우 형질검사는 물론이고 형질돌연변이를 신고할 의무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누군가를 가이딩 할 예정이 없었습니다. 특히 아시겠지만 제가 늦은 나이에 각성을 했으니까요.”

“예, 그렇죠. 그래서 더 그러는 말입니다.”

“20세 이전에 각성을 하는 일반 형질이능력자들과 달리 저처럼 늦을 경우…….”

“…….”

너무 뛰어나지. 그래서 경계 대상이 되어야한다. 늦게 각성하면 각성할수록 국가가 더 통제해야 하는 법이었다. 에스퍼라면 그랬다. 가이드라면…… 위험하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소속이 된다면 위협이 되겠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재준이 말했다.

응?

다들 똑같은 반응을 했다. 뭐라고? 별 볼 일이 없어?

“제가 알기로는 보통 어릴 때 각성을 할수록 등급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어…….”

그렇게 배포되기는 했다. 과거에는. 그래야 어린 가이드들이 자진신고를 하니까. 일종의 기대감을 이용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도 이능청 소속이 되면 그게 잘못된 정보라는 것을 알고 실망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하면 아무리 등급이 낮아도 연륜과 경험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에 늦게 각성한 에스퍼들 못지않았다. 게다가 형질이상자들 역시도 호봉제이기 때문에 일찍 일할수록 좋기도 했고 주위의 선망 역시 받을 수 있으니 서로 모른 척 눈감아주는 경우도 다분했다.

“그러다보니 굳이 누군가를 가이딩 해봤자 별 효과도 없을 것 같았고.”

이 양반 진짜 하나도 모르네.

“게다가 진행 중이던 연구가 있었습니다. 박사과정 때였는데, 초기였습니다. 마침 전공 교수님도 바꾸게 됐고 굉장히 바빴습니다. 다른 데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요. 일단 학위를 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그렇게 지금까지 지냈을 뿐입니다. 물론 얼마 전 가이드들의 혈액을 통해 수치를 분석해보니 뭔가 다르긴 하더군요. 그러니까 제 수치가 다른 가이드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딱히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조언을 구하려고 할 때마다 방해가 있었고, 사회가 심어준 편견에서 헤어 나오기에는 데이터가 부족했습니다.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 것을 단정 지을 순 없으니까요.”

재준이 말했다. 경원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 그날인가. 결국 현재준은 가이드 호르몬 수치표를 받아갔다. 그러면 그때 알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자신이 지승운을 살려달라고 부탁했던 날.

“그리고 지금 연구는 가이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연구를 함에 있어 저를 대조군으로 두지는 않았지만 다른 개인적인 연구에는 제 타액이나 피를 사용하였고, 가이드의 호르몬이 내분비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개인적으로 연구에 몰두하기에 좋았기 때문에…… 그냥 논문 번호 알려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각성 이후 연구만 하고 다른 이들과는 접촉하지 않았다?”

“예. 동료 박사와 교수님을 제외하면요.”

“그들은 현재준 박사가 가이드라는 걸 알고 있습니까?”

“예.”

“그들에게는 고지하고, 국가에는 알리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제 교수님은 가이드와 에스퍼 부부이십니다. 그리고 제 동료 역시 가이드죠. 제가 가이드라는 걸 감추자고 한 것도 그들입니다. 국가 분쟁이 일어난다고 알려줬죠.”

“그들이 귀화를 요청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바라지 않았겠죠.”

“왜죠?”

“가이드라는 게 밝혀지면 의무적으로 국가에 봉사를 해야 하니까요. 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저도 싫었지만 제 동료들도 바라지 않았거든요.”

시리예는 연구 도중 할당을 채워야한다며 자리를 비운 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라제쉬 박사가 몹시도 비통해했다. 라제쉬 박사들은 서로 각인을 했기 때문에 어차피 국가에서 활용을 못하고, 다른 용도로 봉사를 하고 있었지만 시리예나 재준에게는 다른 일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연구는 무엇이죠?”

“가이드와 괴수와의 관계입니다.”

“정확히 어떤 내용입니까?”

이게 조서를 작성하는데 필요한가? 재준이 생각했다. 재준은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다 “비밀서약서에 서명했기에 밝힐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비밀서약서?”

“IPMC와의 계약입니다.”

재준이 대답했다. 그 기관의 이름이 나오자 남자가 눈썹을 까딱 들어올렸다.

“한국 역시 상임기국 중 하나이니 아시고 싶다면 허가를 받으셔야 할 겁니다. 이 사항에 대해서는 IPMC와 이 연구를 후원하는 로마클럽과 비공개 집단, 그리고 책임지는 박사들을 제외하면 그 어떤 기관도 알지 못합니다. MI6, 노르웨이 경찰치안국인 PST, FBI, DCRI, 유로폴 그 외 모든 기관도, 단지 무언가 연구 되고 있다는 것만 알 뿐.”

무슨 연구를 하고 있길래?

“물론 국정원도, 대한민국의 다른 어떤 기관도 이것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확인을 하고자 한다면 IPMC의 허가를 받아오셔야합니다.”

재준이 말했다. 남자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닿은 차장이 두어 발자국 나와 CCTV를 한번 바라봤다. 그리고는 “현재준 박사.”하고 부르며 재준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처음 뵙습니다. 한경애 에스퍼입니다. 이능청의 차장입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에 굳은살이 잡혀있다. 재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총기를 만졌던 흔적들이었다. 역시 군 출신인 듯 했다.

“반갑습니다.”

미인이네. 이어지는 생각은 말하지 않았다.

“더불어 대통령 산하의 이능력정보원의 원장이기도 합니다. 이능청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기관이자 비밀리에 존재하는 곳이니 아마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기관이 있었나? 재준이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비밀기관이라면 국가정보원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면 밖에 알려진 정보기관이 과연 정보기관인가에 대한 의문은 있었다. 물론 국정원도 블랙요원이 따로 있다고는 하지만.

“아시겠지만 이능력자들에 대한 법은 따로 있습니다. 각성을 했음에도 알리지 않은 것은 처벌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죠?”

“…….”

“확실히 처벌대상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으신 것 같군요. 돌연변이 법 위반이시니까요.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당시에 가이드 각성 신고를 하지 않으신 건 잘하신 일이 맞습니다. 괜한 분쟁이 줄어들었으니 저로서도 그 부분은 감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봐준다는 의미인가? 재준이 생각했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IPMC. 여기에 정보를 요청해봤자 당장 승인나지야 않겠죠. 아직 연구 중이십니까?”

“예.”

“연구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습니까?”

“아직은 더 두고봐야합니다.”

“비무장지대 연구소에서는 종종 높은 등급의 가이드들을 요구했죠. 알아볼 것이 있다며 피도 뽑아가고. 그것도 연구와 관련된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 연구의 결과가 나오면 공개됩니까?”

재준이 한경애를 바라봤다. 재준은 그녀가 질문하는 의도를 알지 못했다. 어쩌면 어떤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괜히 꾸미거나 속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 정도는 말해도 문제 될 것이 아니니까.

“IPMC에 소속된 모든 국가에 공개가 됩니다. 다만 아주 일부만 알게 되겠죠.”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희도 묻지 않겠습니다. 공평해야 하니까요.”

세상에 공평한 것은 없다. 이미 한국에서 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이 유리한 입장이 되었을 테니까. 더불어 재준은 MI6나 PST, FBI가 모른다고 말은 했지만 그들 중 또 누군가가 알고 있을지는 몰랐다.

“그 부분은 뒤로 하고, 우리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죠.”

한경애가 말했다.

“현재준 박사는 왜 가이드 검사를 미루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제가 가이드인 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면 가이드라는 게 드러나지 않으면 가이드 검사를 받아도 상관없다는 겁니까?”

“……누군가를 가이딩 하는 것도 좀. 그리고 행정기관에서 일하다보니 부업을 하는 것 역시도.”

가이드는 부업이 아닌데. 다들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재준의 인식이 다른 듯 했다.

사실 가이딩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재준은 가이드였지만 어린 시절 각성된 이들과 다르게 일반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길다. 가이드들에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를 떠올리면, 재준은 그렇게는 살지 못했다.

물론 그도 가이드답게 예쁜 외모가 좋기는 했지만 그것 하나만 보고 자신의 몸을 내어줄 만큼은 아니었다.

몸……. 입술 정도는…….

음, 역시 그것도 힘들었다.

“그럼 한 사람만 가이딩 하는 건요?”

한경애가 말했다. 재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 얼굴을 뭐라고 해야 할까. 한경애는 재준의 표정을 뭐라 평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좋게 말하면……. 아니, 좋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도 없는 멍청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괴수학 박사이니 멍청이는 아닐 테고. 형질이상자로서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게 아주 파격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그 탓이겠지.

“박사님의 요구대로 지승운 에스퍼만 가이딩 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한경애가 말하며 트랙패드를 이용해 작성된 조서를 훑었다.

만 32세의 박사라. 중간에 이상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건 그냥 넘긴 한경애 차장이 “지승운 에스퍼는 6년 전부터 폭주에…….” 하고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지승운이 폭주했다던가, 폭주할 뻔 했다던가 하는 말이 돌았다. 둘 중 어느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시기로나 상황으로 너무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그가 DMZ에 있었다면.

“6년 전에 각성하셨다고 하셨죠?”

“예.”

그래, 한때는 그런 말이 있었지.

“……예. 아무튼 그때부터 폭주 예정이었습니다.”

에스퍼의 가이드들은 에스퍼가 폭주가 일어나기 전쯤에 각성을 한다던가. 마치 운명처럼. 자신의 에스퍼를 살리기 위해서.

원래는 그들을 페어라고 불렀다. 혹은 짝이나, 반쪽, 소울 메이트 등등의 명칭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꿈과 같은 일이라 지금은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애초에 카트린 두자당과 루트 옌슨이 죽은 이후에 그런 의미의 ‘페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대단하죠. 실제로 폭주 위험이 두어 번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한번, 그리고 얼마 전에 한번. 마지막으로 이번에.”

한경애 차장이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물었다.

“그때도 현 박사님이셨습니까?”

“아마 저인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현 박사님.”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신인 것 같다고 하는 거 보면 그때 도와준 게 이 사람인지도 모른다. 마침 연구소 근처에서 일어났다고 했었지. 그래, 이 사람일 것이다.

지승운을 살릴 수 있는 그만의 가이드.

“지금 지승운 에스퍼는 가이드가 없습니다. 그와 상성이 맞는 가이드가 단 하나도 없어요. 가장 최근에 제일 높았던 게 40.1퍼센트라고 했죠? 그 정도면 30퍼센트 대랑 크게 다르지 않죠. 거의 효과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현 박사님은 지승운 에스퍼를 두 번의 폭주위험에서 되살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짧은 가이딩을 통해서.”

한경애도 보고는 받았다.

“가이드 검사 하시죠.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현재준 박사님의 이름으로 기록을 하거나 등록하지 않겠습니다. 정보원의 비밀요원으로 등록하면 외부에 정보가 공개되지 않을 겁니다. 행정법상은 물론 이능법상으로도 문제없습니다. 가이드를 하고 매칭테스트를 해주십시오. 그리고 50퍼센트 이상의 매칭이라면 박사님은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 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최소 80퍼센트는 될 것 같으니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고.”

그녀가 말했지만 재준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건 이능청 부청장이나 정보원장으로서 부탁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한경애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현 박사님.”

“……아.”

그제야 재준은 그녀의 얼굴에서 보이는 지승운의 모습을 알아차렸다.

“아드님이 어머니를 닮으셨네요.”

“…….”

“미인…… 죄송합니다. 이런 말은 실례인데, 제가 예의를 차리지 못했습니다.”

재준이 이어 말했다. 순간 한경애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차피 형질이상자 중에선, 특히 가이드들은 타인의 외모에 대한 평을 함부로 하기는 했다. 원래 가이드라는 종족이 그랬다.

현재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주 전형적인 가이드의 말투다. 이렇게 외모를 밝히는데 어떻게 가이드인 것을 들키지 않았지? 의문이다.

***

결국 재준은 피를 빼앗겼다.

어차피 지승운을 가이딩 할 생각이었고 그런 식으로 요구하기도 했지만 들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근데 그쪽에서 같은 조건에 제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까지 곁들였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서명을 할 테니 서류를 갖다달라는 말에 녹화와 녹음이 증거가 될 것이라는 확인을 받은 재준은 자신의 핸드폰에도 녹음을 할 수 있게 해 달라 요구했다.

더불어 이 기회에 자신의 수치를 제대로 파악해 실험을 하는데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 재준은 나름 이능청을 상대로 이런 저런 요구를 했지만, 사실상 별거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가 꽤 괜찮은 조건을 알아냈다고 뿌듯해하는 것을 보며 이경원은 역시 사람이 사회생활도 좀 하고 그래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이구, 저렇게 제 먹을걸 다 놓쳐서야.

그러니까 현재준 박사는…… 박사였다.

자신의 분야 말고는 다른 부분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은 좀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사람이 똑 부러지게 생겼는데 아무래도 안경 때문에 생기는 편견 같기도 했다.

이경원은 G3호르몬 수치를 확인하는데 약 20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가이드와 에스퍼 호르몬 학을 전공한 이들은 어떻게 하는 건지 알겠지만 재준으로서는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재준이 팔위를 알코올 솜으로 누르며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승운이 서 있었다.

“박사님.”

“지승운 씨, 얼굴이.”

재준이 손을 뻗었지만 닿지는 않았다. 늘 닿지 않도록 신경 썼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멈춘 것이었다.

승운의 뺨이 붉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맞은 것 같은데 여기서 지승운에게 폭행을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은…….

“괜찮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요.”

뭘 했길래 가치가 있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재준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들도 재준이 숨긴 진실에 대해 놀랐겠지만, 재준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이능청 외부에 형질이상자들로 이루어진 정보요원이라는 게 있는 줄 몰랐습니다.”

“예.”

“지승운 에스퍼.”

재준이 승운이 불렀지만 대답은 듣지 못했다.

“지승운 씨도 비밀요원입니까?”

재준이 재차 질문했다. 승운은 대답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재준을 바라봤다. 승운이 입을 열었다.

“예. 이능청의 에스퍼와 가이드 중 1%는 정보원에 소속되어있습니다.”

“제7센터에 온건 폐기 예정이어서가 아니라 조사할 것이 있어서입니까?”

“겸사겸사.”

“지승운 씨는 어디에 더 중점을 두시는데요?”

“전 죽을 생각이.”

“있었죠.”

그렇게 말한 재준이 승운의 뺨에 손을 갖다 댔다. 닿은 면이 부드럽다. 재준 자신의 피부와는 다르다. 승운이 “후우.” 하고 숨을 내뱉었다.

“저한테 그렇게 말했잖아요. 제 옆에서 죽겠다고.”

“……제가 그러긴 했죠.”

제 가이드를 만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한 건 말하지 말아야지. 승운이 생각했다. 물론 그건 재준이 가이드라는 것을 모를 때의 이야기였다.

“죽지 마세요.”

가이드라니. 현재준이 가이드라니.

재준이 다른 손도 뻗어 승운의 뺨을 감쌌다. 순간 승운은 안쪽에서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예쁘게 생겼네. 재준이 생각했다. 설탕이 묻어나올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핥아먹는다면……. 이건 좀 그렇겠지 생각하며 말했다. 그런 건 더 가까워진 다음에 해야 했다.

“전 지승운 씨가 죽는 게 싫습니다.”

승운이 눈을 감았다.

“제가 살려드린다고 했잖아요.”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생각보다 울보인 것 같기도 하고.

재준이 피식 웃었다. 우는 사람 앞에서 웃는 행동이 예의가 없다는 것은 아는데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승운이 서럽고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때는 사정이 있었어요.”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제가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식으로 알게 되게 한 것도 미안합니다.”

“박사님.”

승운이 재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피부가 닿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면서 동시에 희열이 일었다. 하아, 하고 낮게 숨을 내뱉은 승운의 눈동자가 조금은 흐리다. 물기에 흐린 건지, 아니면 다른 열기에 흐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박사님이 가이드인 게 너무 좋아요.”

“…….”

“박사님이 제 가이드라는 게 정말 좋거든요. 그런데 저는 박사님을 가이드라는 이름으로 옆에 묶어두고 싶지 않아요.”

승운이 말했다. 재준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떤 의미냐고 물으려는 순간 승운이 다시 말했다.

“가이드 말고, 연인이 되어주세요.”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에스퍼와 가이드 그런 거 말고 그냥.”

마치 거절을 각오한 사람 같다. 재준은 승운의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승운이 느릿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으로 지내면 안 됩니까? 오늘부터 애인으로 만나자고 했잖아요.”

가이드와 에스퍼. 형질이 달라서 가질 수 있는 그런 관계로 치부되고 싶지 않았다. 승운은 조금 더 특별한 걸 원했다.

“다른 형질의 이끌림 같은 거, 그런 거 말고요. 저는 박사님이 가이드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가이드인 박사님은 너무 좋지만. 전 박사님이 가이드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박사님이 일반 사람이라 해도 에스퍼라고 해도, 그래도 괜찮아요.”

에스퍼는 좀…… 곤란했다.

“가이드로서 저한테 묶이지 말고.”

승운은 괜찮을지 몰라도 재준 자신이 곤란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제 연인이 되어주세요, 박사님.”

자신이 가이드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예, 알겠습니다.” 재준이 대답했다.

재준으로서는 제 짝이나 운명이 정해져있는 돌연변이 인류가 더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그들에겐 다른 걸까.

“형질과 매칭도로 인한 이끌림 말고.”

어떤 면에서는 알기 힘들지만, 지승운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알 것 같다. 어떤 말로 포장을 하지 않아도,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도. 사실 승운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재준은 알 것 같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들에,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거스르고 싶은 마음이다.

그게 아니어도 널 좋아했을 거라고.

“사람 대 사람으로 끌리는 그런 거 해 봐요.”

네가 보통 사람이었어도, 혹은 자신과 같은 형질이었어도.

“연인으로 시작합시다, 우리.”

운명을 거스르지 않지만, 또 거스르는 것처럼.

*

이능청에서 다시 호텔까지 오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재준과 승운은 호텔에 도착해서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키를 갖다 대고 올라오는 순간까지도 대화는 없다. 하지만 서로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카펫이 깔린 복도 바닥이 모든 발걸음 소리를 숨겨줬다. 호텔 방 문을 열고 들어선 재준이 몸을 돌려 승운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를 승운의 얼굴은 차게 가라앉은 듯 했다. 문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데, 마치 투명한 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재준이 입을 열었다.

“지승운 씨.”

눈이 퉁퉁 부어있다.

그 날 같았다. 울면서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날.

“예.”

목소리도 조금 가라앉았다. 재준은 고민하다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승운의 제복 넥타이를 끌어당겼다. 방심한 승운이 두 눈을 깜빡이며 그대로 끌려왔다. 힘을 제대로 주지 않았는데도 쉽게 끌려오는 모습에 재준이 피식 웃었다.

승운은 제 손으로 방문을 닫았음에도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왜 안 들어 오고 가만히 계십니까?”

“예?”

“우리 마음 통한 거 아니었어요?”

“그…… 렇죠.”

“오늘 애인으로 만나자고 했잖아요.”

그거 아직도 통용되는 거였어? 아니, 그렇지. 그래야했다. 승운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게다가 방금 연인이 되자고도 했고.”

“예.”

“싫어요?”

“……아뇨.”

승운이 대답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계에 치달은 듯 했다.

“하고 싶은데.”

승운이 입을 달싹이며 “어제 진도가 너무 빠르다고…….” 말했다. 저를 두고 자위를 세 번씩이나 했다면서 막상 뭔가 하려니 빼는 모습에 재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와서 순진한 척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부끄러운 건가? 안 그래도 귀에 열이 몰린 것이 보였다.

“가이드인 걸 걸리면 안됐으니까요. 적어도 내 입으로 말하고 나서 뭔가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준이 말하며 양 손으로 승운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지금은 알았잖아.”

아, 역시 따뜻했다. 귀 뿐만 아니었다. 몸을 밀착시키자 아랫도리에 팽팽하게 부푼 것이 닿았다.

“우리 둘 다 머뭇거릴 나이도 아니고.”

이 얼굴을 바라보니 저번에 그의 동기들과 비주를 할 때 분위기가 이상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뭔가 했더니 지금 보니 질투였나 보다. 재준은 마치 상이라도 내려주듯 승운의 볼에 자신의 볼을 맞대고 쪽 쪽 쪽 소리 냈다.

“흐…….”

볼과 볼이 닿을 때마다 새하얀 빛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부를 잠식한 꿀렁이는 끔찍한 액체들이 놀라 날뛰었다. 자신의 얼굴을 잡은 재준의 손 위로 승운이 손을 갖다 댔다. 제어되지 않을 정도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착하지, 가만히 있어.”

현재준이 승운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숨결을 통해 빛이 내리쬐었다. 몇 번이나 촉 촉 가볍게 입을 맞춘 재준이 입술을 떼고 승운을 바라봤다. 승운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재준을 응시했다.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재준이 “응?” 하고 승운에게 말했다. 딱히 질문이 정해지지 않은 권유 같은 말이었다.

“좋아해요.”

승운의 고백이 옅은 숨과 함께 빠져나왔다. 아주 나지막한 말이어서 얼굴을 가까이 맞대야만 들을 수 있었다. 재준의 웃음과 함께 빠져나온 숨결이 승운의 인중을 간지럽혔다.

“가이딩이요?”

재준이 물었다.

“아니면 나?”

“당연히 박사님이죠.”

가이딩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가이딩보다도 이 사람과 닿아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저도 만지고 싶었는데요.”

재준이 말했다. 승운은 사실 자신이 그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재준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벅차올랐다. 그의 시선에 입술이 닿았다. 입 맞추고 싶다.

“그림 속의 떡이어서 잠깐 거리를 뒀습니다.”

말캉한 입술을 한 입에 집어 삼키고 싶었다. 낮에 닿았던 그 짧은 순간의 애달픔과 아쉬움으로는 부족했다. 엉망진창으로 무너뜨리고 싶었다. 안에 숨을 불어넣고 혀를 빨아올리고 치열을 훑고 타액을 뒤섞어 색욕에 휘몰아치는 흐릿한 얼굴로 만든 다음 그대로 침대로 무너뜨려서 몸 여기저기도 빨고 싶다. 자신의 추잡스러운 머릿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승운은 표정을 굳혔다. 재준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져 봐도 됩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승운이 고민했다. 만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져줬으면 좋겠다. 근데 그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가? 아니면 자신도 재준에게 손을 대어도 되는 건가? 허락인가? 아니면 그냥, 정말 가이딩 같은 것만 말하는 건가?

“지승운 씨?”

재준이 승운을 바라보다가 상태가 이상해보였는지 손을 볼에 갖다댔다.

재준의 손길이 자연스럽다. 그동안 자신을 피했던 이유가 가이드임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승운은 그동안 쌓여 응어리진 마음이 살살 녹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자제하기가 쉽지 않다.

다정하게 해주면 괜히 기대를 하게 된다. 뭔가를 바라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지승운 씨.”

“네.”

“키스해도 됩니까?”

“…….”

이어지는 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승운이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자 재준이 다시 한 번 “좀 진하게 하고 싶은데.” 말했다.

“진짜요?”

승운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진짜 키스해도 되요?”

“제가 제안했는데.”

“해주세요.”

그렇게 대답한 승운이 대뜸 눈을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사락 소리를 내는 듯 했다. 현재준은 피식 웃으며 안경을 올리며 입을 살짝 맞췄다. 승운은 눈을 뜨지 않았다. 재준이 입을 떼고 다시 안경을 쓰자 승운이 그제야 눈을 떴다.

“진하게 해주신다면서요.”

아쉬워하는 승운의 말에 재준이 피식 웃으며 이번엔 눈을 뜬 승운에게 입을 맞췄다. 입안에 혀를 집어넣자 에스퍼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승운 역시 재준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숨을 통해 드나드는 서로의 힘이 뒤엉키며 풀어지고 뭉쳤다.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가이딩에 모든 피로가 다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승운은 그것보다 정신적인 충족감이 더 컸다.

좋아한다.

이대로 그냥 세상이 멈췄으면 좋을 것 같았다. 영원히 닿아있고 싶었다.

맞닿은 입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승운에게 키스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재준과 하는 것은 달랐다. 이어지는 입맞춤에 재준은 승운을 밀어내며 입을 뗐다.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하…… 박사님.”

욕망에 승운의 눈이 번들거렸다. 승운은 견디지 못하고 재준의 목을 끌어당겨 다시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다른 손으로 재준을 더듬거렸다. 조금 난폭함에도 불구하고 재준은 그 거친 손길에 흥분했다.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복근을 문질러대던 승운의 손이 별안간 위로 향했다. 그가 가슴의 말랑한 근육을 손으로 주무르며 충족스런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그곳에 자리 잡은 작은 돌기를 손가락으로 뭉근하게 문질러댔다. 반쯤 서 있던 재준의 물건이 힘을 단단히 받았다. 승운이 손가락으로 유두를 잡아 비틀었다. 아프지는 않지만 흥분을 촉진하기엔 충분했다.

“흐…….”

재준이 몸을 떨며 허리를 튕겨 올렸다. 승운의 몸이 맞닿았다. 그가 허벅지로 재준의 사타구니를 눌렀다. 압박감에 허리가 떨린다. 재준의 허벅지에도 발기한 승운이 느껴졌다.

“잠, 잠깐만요. 잠깐, 윽, 승운아!”

재준은 밀착됐던 몸을 떼어냈다. 자제하지 못하고 멋대로 할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승운은 얌전하게 재준의 말을 기다렸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열기 때문일까, 방안이 습하게 느껴졌다.

“침대로 가서 해.”

낮게 잠긴 재준의 목소리에 흥분이 담겨있었다. 승운이 웃으며 재준을 끌어안았다. 쪽 쪽 입을 맞추며 셔츠를 벗기며 이동했다. 옷이 바닥에 던져지듯 떨어졌다. 생각보다 더 야한 몸이 드러났다. 언젠가 이 몸을 상상했던 적이 있다.

아니, 당장 어제만 하더라도 상상 속에서 별별 짓을 다 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가면 분명히 도망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망상 속에서 뭘 하든 재준은 그저 야한 소리를 내며 눈물과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야했는지.

그런데 지금이 더 야하다. 신음을 억누르며 옅은 숨만 내뱉는 것이 훨씬 자극적이었다. 상상과 실제는 다르다.

침대에 재준을 앉힌 승운이 복부에 입을 맞췄다. 복근의 굴곡을 따라 혀로 쓸어내린 승운은 배꼽부터 가슴까지 입을 맞추며 올라갔다. 재준이 달뜬 숨을 내뱉었다. 미쳐버리겠네. 숨소리가 최음제 같았다. 승운이 몸을 일으켜 입을 맞추다가 멈칫했다. 재준의 어깨에 자신의 손가락 자국이 있었다. 살을 파고 든 자국이다. 이미 상처는 나았으나 흉터가 자리했다.

승운이 멈추며 자신의 어깨 아래를 바라보자 재준이 승운의 두피 속으로 손을 넣어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나한테 집중해.”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재준을 내려다보던 승운이 “뭘 원해요?” 물었다.

“우선 내 혀를 빨아 봐요.”

아, 시발. 일부러 이렇게 말을 하는 거지? 승운이 잡아먹을 듯 재준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재준은 턱을 쥔 채 입을 맞추는 승운을 향해 숨을 불어넣었다. 승운이 낮은 신음을 내며 재준의 혀를 감아올렸다. 입을 떼지 않은 채 재준이 승운의 제복을 벗겼다.

누군가의 옷을 벗기는 행위가 지나치게 오랜만이었다. 재준이 타이를 끌어 내렸을 때 승운은 재준의 벨트를 풀었다. 퍼스너가 내려지고 손을 안으로 넣어 주무르자 재준의 복부가 수축하며 굴곡이 더 깊게 드러났다.

손길이 닿기 전에도 잔뜩 성이 나 있었는데 승운의 손길이 닿자마자 쌀 것처럼 끝이 젖어왔다. 자신의 손길조차 오랫동안 닿지 않은 곳에 타인의 손이 묵직하게 닿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승운은 자신의 퍼스너를 내린 뒤 성기를 꺼내면서도 현재준의 목덜미 여기저기를 빨고 핥고 깨물었다. 재준이 스스로 바지를 벗기 위해 엉덩이를 들자 승운이 한순간에 속옷까지 끌어내렸다.

탄탄한 엉덩이를 손으로 주물럭거린 승운이 다시 성기를 문지른다. 재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승운을 바라봤다. 자신을 향한 욕정에 휩싸인 남자의 모습에 흥분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역시 내가 안기는 쪽이겠지.

재준이 생각하며 승운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

세상에, 저게 뭐야.

“박사님?”

재준이 멈춘 것을 알아차린 승운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해요?”

재준을 내려다보는 승운의 얼굴이 욕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현재준은 아주 조금 그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무서움보다는 성적 긴장감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탐하는 것이 절실히 드러나는 시선이었다. 그것이 감각을 날 서게 했다. 생전 처음 겪을 미지의 문을 앞둔 재준은 그것이 무서웠고, 기대되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지승운 에스퍼.”

하고 싶다.

“박사님도 저한테 집중해주세요.”

재준도 몹시 하고 싶었다.

“집중해서 그러는 겁니다, 지승운 에스퍼.”

하지만.

“너무 커요.”

재준이 말했다. 이건 생각했던 범위를 넘어섰다. 당연히 클 것이라는 건 알았다. 발기했던 것을 옷 너머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크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거 갈무리한 거였구나. 어떻게 그 크기를 감출 수 있었지?

재준이 한 말에 저도 모르게 승운의 성기가 껄떡 움직였다. 승운은 물론이고 재준도 그 묵직한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그런 말 하면 큰일 나요.”

“하지만 정말 너무 큽니다. 아무래도 이건 각오를 해야 가능한 범위 같습니다.”

각오라니. 그 정도로 심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재준이 이어 말했다.

“근육이완제가 필요해요.”

승운이 재준을 끌어안았다.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큭큭 웃는 승운 덕에 목과 어깨의 경계에서 일어난 진동과 숨결에 배꼽 아래가 간질거렸다. 긴장감과 기대감에 재준의 자지도 움직였다. 재준의 좆이 자신의 복부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을 알아차린 승운이 기분 좋게 웃으며 얼굴을 떼고 현재준을 내려다봤다.

“근육이완제?”

“진담입니다.”

“알겠어요. 끝까지 안할게요.”

“그러셔야죠.”

그렇게 대답한 재준은 자신과 승운의 좆을 양 손으로 감쌌다.

“하지만 맞닿는 것은…… 읏, 좋네요.”

재준이 말하며 손과 함께 허리를 움직였다. 승운도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겹치며 허리를 흔들었다.

“하아…… 으, 읏! 아!”

“박, 사님! ……흣!”

서로의 신음이 뒤엉켰다. 맞부딪힌 성기에서 나는 질척이는 소리와 요도 끝에 맺힌 프리컴을 바라본 재준은 조금은 부끄럽다는 생각과 더불어 자신으로 흥분하는 승운에 대한 이상한 충족감을 느꼈다. 현재준이 손가락으로 승운의 요도 끝에 맺힌 체액을 문질렀을 때 승운이 어깨를 흠칫 떨며 신음했다.

“……읏.”

야해라. 어떻게 이렇게 야하고 예쁘지. 과연 에스퍼다. 가이드들이 이 얼굴에 살살 녹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재준 역시 별 수 없는 가이드였나 보다.

흥분에 흐려진 승운의 얼굴을 바라보던 재준이 한쪽 팔을 목에 두르며 입을 맞췄다. 승운은 자신의 물건보다는 현재준의 자지를 더 정성들여 만졌다. 그가 재준이 했던 것처럼 요도 입구를 문질렀을 때 재준도 움찔 움찔 떨 수밖에 없었다. 젖은 손이 귀두를 문질러댔다. 견디기 힘든 쾌감에 허릿짓이 더 빨라졌다.

승운의 입 속으로 재준의 숨이 짧게 치고 들어왔다. 재준이 몸을 움찔 하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튀어 오른 정액이 재준의 복부와 승운의 턱에 튀었다.

미쳐버릴 것 같아.

재준이 말했다. 언어가 숨을 통해 승운의 입 속에 들이 닥쳤을때 승운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사정했다.

승운이 요도구 밖으로 빠져나온 정액들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두 사람의 귀두에 펴 발랐다. 그러고는 다시 재준과 자신의 좆을 한손에 휘어잡았다. 가쁜 숨을 내쉬던 재준이 의아한 듯 보자 승운이 기분 좋게 웃는다.

“부족해요, 박사님.”

“지승운 씨.”

승운이 재준의 몸 위에 늘어져 목덜미를 춥춥 빨며 아직 입고 있는 드레스 셔츠를 벗겼다. 가라앉지 않은 성감이 다시 고조되는 듯 했다. 승운이 재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예전엔 왜 이 얼굴을 못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를 핥아먹고 싶었다. 승운이 코에 입을 맞춘 뒤 입술을 부딪쳤다.

안경이 걸렸다. 벗길까 싶었지만 그랬다간 재준이 자신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이 그를 보는 것도 좋지만, 역시 재준이 제 모습을 봐줬으면 했다.

눈이 얼마나 나쁘지?

그런 생각이 일순간 들었지만 쉽게 열린 재준의 입술에 눈이 멀어 생각이 단숨에 기화했다. 재준의 입안에 웃음을 불어넣은 승운이 이내 혀를 밀어 넣었다. 부딪히는 혀에 기분 좋은 신음을 낸 승운은 조금 구차함을 느꼈다.

왜 키스를 잘 하는 거지. 나쁜 건 아닌데 속상했다.

입술을 떼어낸 승운이 몸을 일으켰다. 재준의 배 위의 정액을 문지르던 승운은 손에 묻은 체액을 핥아먹었다. 야한 광경에 재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족해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바지를 벗었다. 셔츠와 연결된 가터벨트가 눈에 들어왔다. 승운이 벨트에서 셔츠를 빼내 던지고 다시 재준의 성기를 부여잡았다. 속옷을 벗어 던지긴 했지만 급한지 가터벨트를 벗을 겨를이 없었다.

금방 사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성기가 껄떡였다. 재준 역시 반쯤 힘을 받고 있었다. 승운이 재준의 것을 문지르다 잡아 흔들자 살덩이가 점점 크기를 키워나갔다. 꽤 무게감이 있다. 제법…….

이 정도라면 에스퍼든 가이드든 일반 사람이든 그를 탐내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왜 몸도 좋지? 근육으로 탄탄한 가슴과 복근은 크기가 적당해 일부러 키운 몸이 아니라 실전용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승운이 재준의 가슴을 주무르자 위에서 “흐.” 하고 작게 내뱉는 소리가 났다.

“가슴으로 느껴요?”

“……읏.”

“누가 개발해줬어요? 아니면 원래 야한 몸이에요?”

이런 말을 들어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재준이 벅찬 숨을 내뱉으며 고민했다.

“응? 설마 그 사람은 아니겠죠?”

원래 섹스할 때 좀 심술궂은 타입인가?

“누가…… 개발해 주진 않았는데.”

재준이 말했다.

“네 테크닉이 좋은 거 아니면 내가 야한 게 맞나봐.”

승운이 멈칫했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의 예상하는 반응을 한 번도 안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근데 그 예상 되지 않는 것이 너무 좋았다.

“너 좋으라고, 후으, 야한 몸을 갖고 태어났나…….”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에 승운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유두를 잡아 문지르자 재준 허리가 뒤틀렸다.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복근과 배에 붙었다 떨어지는 재준의 성기에서 나온 쿠퍼액이 길게 늘어졌다. 승운이 입맛을 다셨다.

“입으로 한 번 만요.”

재준이 긍정이나 부정을 하기도 전에 승운이 아래로 내려갔다. 자지를 단숨에 집어삼킨 승운이 귀두 위로 혀를 굴렸다.

“흣, ……아!”

승운은 말 그대로 재준을 구석구석 맛봤다. 귀두만 머금은 채 기둥을 쓸어 올려 자극을 주는가 하면 성기를 흔들며 불알을 핥았고, 요도구에 혀를 문지르기도 했고 목구멍 안쪽까지 재준을 밀어 넣기도 했다. 승운이 뭘 하더라도 재준은 반응이 좋았다.

와, 어떻게 이렇게 민감하지? 부끄러운 지 아니면 느껴서인지 절로 오므라드는 다리를 일부러 의식해 벌려줄 때마다 그대로 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내보내기엔 너무 아까웠다. 승운이 재준의 양 허벅지를 벌리며 성기를 머금었다. 목구멍에 들이차는 압박감을 스스로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으, 승운아…….”

위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재준에 화답하듯 승운이 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재준은 참지 못했는지 허리를 흔들었다. 승운이 좀 더 속도와 압력을 가하자 재준의 허리와 엉덩이가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를 접지 못하도록 손에 더 힘을 줘 누른 승운은 곧 입안에서 껄떡이는 성기를 느끼며 웃어보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재준이 신음을 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승운은 곧 목구멍 안으로 분출되는 정액을 느꼈다. 그가 재준이 싸지른 것을 그대로 꿀꺽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입에서 성기를 뺐다. 젖은 승운의 입술을 바라보며 흐린 눈을 한 재준이 숨을 몰아쉬었다. 승운은 재준의 성기를 깨끗이 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귀두를 머금고 요도구에 남은 정액까지 쭉쭉 빨아댔다.

“아, 그거…… 잠깐!”

반응 야해. 승운이 귀두를 혀로 문지르다 떼곤 손바닥으로 비비며 물었다.

“좋아요?”

재준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너무 좋아서 무서울 지경이다. 움찔거리며 “위험해…….” 나지막하게 말하는 재준의 반응에 승운이 나른하게 웃으며 올라와 입을 맞췄다. 방금 전까지 입에 제 성기를 물고 있었음에도 왠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얽혀드는 혀가 비릿한 맛을 선사했지만 상관없다.

“박사님.”

“예.”

재준이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한번 만 더.”

“……지승운 에스퍼.”

“승운아, 하고 불러주세요.”

“…승운아.”

“한번만 더요, 네?”

“…….”

“힘들게 안할게요.”

이게 젊음인가. 아니, 지승운과 자신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겨우 세살이었다. 삼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큰 차이를 일으킬리 없었다. 체력인가? 어디 가서 체력이 뒤떨어진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 아, 정력이구나.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기대하는 얼굴이다.

“딱 한번만 더 해요.”

더 내줄 것이 없는데. 하지만 승운이 아직 굶은 얼굴을 하고 있다. 뭔가를 주지 않는다면 뼈에 붙은 살이라도 삭삭 발라먹다 못해 뼈째로 아작아작 씹어 먹을 듯한 얼굴을 해서 결국 재준은 거부하지 못했다.

뭘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마음껏 해봐라. 재준이 생각하며 승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승운이 재준의 얼굴에서 입을 맞추기 시작해 목으로 내려왔다. 닿는 숨결과 치아에 재준이 목을 움츠러뜨렸다. 승운은 거의 재준을 핥아댔다. 온 몸에 자신이 모르는 곳을 만들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목에서 배꼽을 지나쳐 성기까지 핥아 올리더니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재준을 뒤집은 승운은 목 뒤와 어깨부터 시작해 입을 맞춰나갔다. 자신이 만들어낸 상처에는 조금 움찔했지만 재준은 괜찮다는 듯 승운의 머리를 감쌌다.

“등에 점 있는 거 알아요?”

승운이 말하며 손으로 따라 그렸다. 등 뒤를 볼 일이 없었기에 재준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점이 이렇게 야하게 났냐는 말도 안 되는 표현에 웃음을 흘린 재준은 멋대로 하라는 듯 제 몸을 승운에게 맡겼다.

“박사님, 너무 좋아요.”

승운이 말했다. 탄탄한 엉덩이 위로 이빨을 세운 승운이 손가락으로 엉덩이 골 안쪽을 쓰다듬었다.

“안 넣을게요.”

재준은 거부하지 않았다. 어차피 머지않은 시간에 일어날 일이었으니 지금부터 준비를 해두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승운은 뭔가 미안하다는 기색을 한 채 변명하듯 말했다.

“그냥 핥기만. 정말로.”

“……마음대로 해봐.”

재준이 말했다. 스스로도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가라앉아있는 줄 몰랐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되듯 승운이 재준의 엉덩이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한쪽 손으로 골을 벌리고 다른 손으로는 자위를 하는 승운의 모습을 고개를 틀어 바라본 재준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고양감을 느꼈다. 재준이 “잠시만.” 하고는 몸을 틀었다.

“얼굴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한 재준이 몸을 돌려 누워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자 승운의 성기가 절로 껄떡였다. 구멍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분홍빛으로 물든 것 같은 색에 흥분된 숨을 내뱉었다. 뺨과 양 귀도, 좆도, 구멍도, 무릎과 팔꿈치의 관절도 핑크빛이다.

왜 저런 곳만 저런 색이지? 좋아서 돌아버리라고?

“미쳐버리겠네, 진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지만 둘 밖에 없는 적막한 공간이어서 재준의 귀에도 흥분한 승운의 말이 들어왔다. 승운이 들어 올린 다리를 손으로 고정하며 다시 얼굴을 묻었다. 천천히 핥아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던 혀가 어느 샌가 안으로 침입하려는 듯 꼿꼿하게 섰다. 재준의 성기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감각이다. 뒤가 핥아지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재준은 닳아 오르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지만 다리를 잡고 있는 승운의 손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윽, 윽 짧은 신음을 낸 재준은 결국 뒤를 핥아지는 것만으로도 사정했다. 몇 번에 걸쳐 짧게 분출된 정액의 색이 조금 옅었다. 배꼽에 고인 정액을 핥아먹으며 올라온 승운이 재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 자신의 성기를 잡고 뒤흔들었다. 승운이 다시 입을 맞췄다. 혀를 쓰지 않고 가볍게 뽀뽀하듯 몇 번이고 입을 맞대면서 자위하는 모습에 재준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얼굴도 보고 싶은데 아래도 보고 싶었다. 둘을 동시에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 아읏, 박사님.”

“이름, 이름 불러요.”

“재준, 형?”

생각지도 못한 표현에 재준이 웃어보였다.

“그것도 좋고, 재준 씨도 좋고.”

이왕이면 이름 쪽이 더 좋았다. 형이라 불리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런 호칭 없이 이름만. 재준이 승운의 엉덩이를 잡아 주무르며 자신과 배를 맞췄다. 서로의 성기가 밀착됐다. 단단한 승운의 성기와 달리 제 성기는 세 차례의 분출로 힘을 잃었지만 왠지 밀착되자 다시 흥분이 올라오는 듯 했다.

승운이 다시 입을 맞추며 “재준 씨.” 하고 말했다. 갈증이 일어났다. 그를 가지고 있는데도, 충분한 충족감이 있는데도 뭔가 부족했다.

갖고 싶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박고 싶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걸 안다. 참는 게 힘들지만 어쩔 수 없지. 승운이 재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몸에…… 싸도, 돼요?”

그도 이제 한계였다.

“……에.”

재준이 말했다. 너무 낮은 소리여서, 혹은 자신이 너무 흥분해서 승운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승운이 “네?” 하고 되묻자 재준이 다시 또렷하게 말했다.

“입에 싸요.”

“…….”

그 말로 사정할 뻔 했다는 건 알고 있을까. 승운이 분출되지 않도록 힘을 줬다. 재준이 몸을 일으키자 승운도 덩달아 몸을 세웠다. 의아한 듯 재준을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승운을 밀쳤다. 쉽게 뒤로 무너진 승운의 위로 재준이 몸을 드리웠다. 재준이 승운에게 입을 맞춘 뒤 턱과 목을 지나 가슴과 복부를 혀로 핥아 내려갔다. 배꼽에 혀를 넣자 승운이 “흣.” 소리 냈다. 성기를 잡고 옆으로 밀어내 배꼽과 사타구니 사이에 입을 쪽쪽 맞춘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가터벨트, 야해.

그리고 시선이 자신이 잡고 있는 성기로 옮겨진다.

손 안에서 움찔하는 것의 무게나 감촉이, 체온이 적나라했다. 물론 그것도 그거지만.

‘진짜 크네.’

그와 함께 하려면 여러모로 각오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재준이 승운의 성기를 입에 머금었다.

“…….”

잘 안 들어간다. 귀두만 물고 멀뚱멀뚱하던 재준이 좀 더 입을 열어 승운을 담아내려했다. 하지만 이가 기둥을 긁었다. 승운이 신음했다. 아무래도 이건 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아. 재준이 생각하며 담고 있던 기둥을 빼고 귀두만 입에 담았다. 그리고 승운이 했던 것처럼 기둥과 고환을 손으로 주무르며 혀를 굴렸다. 잔뜩 흥분한 승운이 허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재준이 놀라지 않도록, 또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절제하는 듯 했다. 그래도 치아가 긁혔다. 그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몇 번의 허리 짓 이후에야 승운이 사정했다. 제 입안에서 성기가 껄떡이며 터지듯 체액을 분출해냈다. 재준이 승운의 귀두를 빨아올리며 입을 뗐다.

“뱉어요, 박사님.”

승운이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확실히, 이걸 먹는 데는 꽤 용기가 필요한 듯 했다. 비위도 좋지. 재준이 입안에 머금은 정액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알만 도로록 굴리자 승운이 웃었다.

“안 먹어도 돼요, 뱉어요.”

한 번 더 권하자 재준이 마지 못한다는 얼굴로 승운의 손에 정액을 뱉어냈다. 붉은 혀 아래로 정액과 침이 뒤섞여 떨어졌다.

“아, 씨발. 야해….”

그렇게 말한 승운이 다시 재준에게 입을 맞췄다. 나 방금까지 네 꺼 물고 있었는데.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재준도 자신의 것을 먹은 승운에게 입 맞췄는데.

얽혔던 혀가 떨어지고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승운이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그래, 아무렴 어때.

“한 번 더 해도 돼요?”

그건.

“…….”

그건 좀 힘들 것 같았다.

가이데올로그(Guidéologue) 2권 fin.

3권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