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20)

5.

“한 잔 하자.”

그 말을 꺼낸 것은 이경원이었다. 이경민은 핸드폰을 내밀었다. 폰 화면에 움직이는 경원의 모습이 보였다. 위치는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해변이었다. 사유지로 취급되었던가? 경원은 속이 비치는 하얀 비닐봉투를 들어올렸다. 맥주로 가득 채운 봉투를 보며 경민이 “가죠?” 말했다. 태환은 이 천국 같은데서 굳이 에스퍼들끼리 술을 마셔야하냐고 말했지만 그도 지금 딱히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바다 냄새가 났다. 동해의 냄새는 서해의 냄새와는 조금 달랐다. 철썩이는 소리와 하늘 위에 어스름히 걸려있는 달 사이로 회색 구름이 지나갔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테트라포트 위로 부딪힌 파도가 하얗게 부서졌다.

편안한 옷차림의 네 사람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오자마자 본 것은 바닷가의 모래사장 위에 드러누워 있는 이경원이었다.

경민은 제 형이 조금 부끄러웠다.

“야, 왔냐?”

경원이 일어나 앉았다. 몸에서 모래가 후두둑 떨어졌다. 저 꼴로 집에 간단 말이지. 과연 이경원이었다. 경민은 그런 경원이 몹시도 거북했다. 으, 그 집 청소도 안하고 모래가 계속 있겠지. 아마 그 집에서 나올 때까지 모래가 있을 것이다. 청소해줄 사람을 불러야하는데 이곳이 민간인 제한구역이다보니 또 부르기가 쉽지도 않았다. 경원은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지도 못한 채 승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승, 시계 좀 보자.”

경원의 말에 승운이 순순히 팔목을 내밀었다. 색상만으로는 가이딩이 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없어 경원은 장시간 시계를 만졌고 이내 얼굴을 구겼다.

“가이딩 안했네, 이 새끼.”

그럴 줄 알긴 했다. 그래도 아무나 만나서 뭘 어떻게 할 줄 알았지. 하기 싫으면 손이라도 잡고 입이라도 맞춰야 할 거 아닌가. 지고지순한 지랄 새끼 같으니. 당장 별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혹시 어떻게 될 줄 알고? 지금 이 상태를 유지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안 그래도 내일 가이드실 예약해 놨다. 하고 와.”

“…….”

“거부하지 마, 이거 일이야. 너 지금 업무태만이라고.”

승운은 대답하지 않은 채 경원이 옆에 앉았다. 그도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더불어, 또 다른 일도 해야 했다. 박요한 가이드. 만나보긴 해야 한다. 아니, 만나는 것에서 끝나면 안 되지. 그로부터 캐낼 것도 있었다.

“그리고 자주 와서 검사받아. 지금 아무것도 안하니까 수치가 괜찮지만 뭔 일 있었다간 금세 불안정해져. 내일 가이드 전후로 피 뽑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결국 가이딩을 회피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박요한 가이드 손은 따가운데. 게다가 손 접촉은 효율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그 이상을 나가자니……. 입맞춤 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마저도 굳이 골라서 할 수 있는 거지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걱정하잖아. 안 그러냐, 승호야?”

“걱정이죠. 안 그래도 맞는 사람이 없는데.”

“그래, 맞는 사람이 없는데 이 새끼는 지금 웬 굴러먹은 박사한테 눈이 멀어서.”

“…….”

“눈 그렇게 무섭게 뜨지 마. 그리고 네가 박요한이 싫으면 그 가이드를 찾거나 해야 할 거 아냐?”

그렇게 말한 경원이 잠시 정지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듯 허공을 바라보더니 “아니다.” 말했다.

“그 가이드는 나중에 찾아. 지금은 박요한이 더 급해.”

“그 말 하려고 불렀냐.”

“뭐, 그 말도 하고.”

경원이 말하며 슬쩍 앞을 바라봤다. 이경민과 김태환은 아무 생각 없이 웃통을 벗고 밤바다에서 뛰어들어 놀고 있었다. 그냥 물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신나다니. 경원이 과연 어린애들은 다르다며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청년들을 가리켜 말했다.

“박형기 박사가 움직였는데 아마 놓친 것 같아. 의외로 약삭빠르던데, 그 박사.”

"놓쳤다고?"

"물증은. 심증은 확실하지. 박형기 박사가 민간업체와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않지만 연락은 하는 것 같아. 밑에 있는 연구원들 감시를 붙였대. 멍청해보였는데 아닌가봐."

“안 그래도 박 박사를 조심하라고 하더군.”

“누가?” 경원이 물었다.

“상황은 어때?”

승운이 말을 돌렸다. 대답하기 싫은가보네. 경원은 더 묻지 않았다.

“그것 외에는 별다른 건 없어. 넌 뭐 찾은 거 없어?”

승운이 어깨를 추켜올리며 승호에게 시선을 줬다.

“승호 넌 들은 거 없냐?”

“박요한 가이드의 소문은 들었는데, 글쎄요. 그 자체만으로는 박형기 박사와 도모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법안이 통과되면 바로 나가겠죠.”

“이쪽 센터장도 은밀히 움직이나봐. 정경유착 사이에 끼어있다는 정도만 추측되는데 아직 꼬리를 밟힌 건 없어.”

“다른 정보들은 뭐 없어?”

“여기서 만난 가이드들 중에는 그렇게 연관되어있는 쪽은 없는 것 같더군. 아무래도 등급이 낮으니까 수도권에서 알아보는 게 나을 거야. 센터장이나 주시해야지. 오히려 정계 쪽을 더 살펴봐야겠던데. 누구랑 접촉하는지. 아, 그래도 C급 가이드의 형제가 이쪽 국회의원 보좌진이라더라고. 국회 의원회관에 아직 요원이 있나?”

“있을 걸? 이따가 보고해야겠네.”

경원이 말하며 핸드폰에 보고 해야 할 것들을 메모해뒀다. 그렇게 짧은 시간 있던 것도 아닌데 알아낸 게 이 정도 밖에 없다니 확실히 제7센터에서는 정보를 취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몰랐다.

“승호 네가 다시 올라가야겠다. 영종도 좀 살펴줘.”

승운의 말에 지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록 나온 민간업체는?”

“추측하는 게 몇 개 있긴 합니다. 주가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요. 에스퍼 주는 방산주와 함께 움직이는데 그 중 대장 격이 될 만한 것들이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방산에서 에스퍼 쪽으로요.”

승호의 말에 경원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가 자연스레 주식창을 꺼내서 관심종목에 담았던 방산주들 몇 개를 살폈다. 투자를 하기 위해 담은 것은 아니었지만 주가가 오르는 모습이나 차트가…….

“사둘까?”

3바닥 찍었는데? 저항선 맞고 하락하기엔 이미 우상향인데? 이거 무조건 오르겠는데?

경원의 말에 승운과 승호가 대답 없이 응시하자 민망해진 경원이 “농담이야.” 말했다.

“발의한 의원 위주로 살펴보는 게 좋겠어. 한번 확인해봐.”

“얘네들은 정보를 어디서 얻냐? 공시도 안 떴는데. 여기 봐봐. 토론방에 이능청 민영화 이야기 있다. 관심 가질 만한 경쟁업체 중에서 얘가 대장이래.”

“그거 피아노 만드는 회사인데요.” 지승호가 말했다.

“그러니까 더 의심 가네.”

승운이 답했다. 피아노 회사가 에스퍼 주 대장 격이라니. 자세한 것은 지승호가 알아서 할 것이다. 승운은 이런 쪽으로 접근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팔려있어서 힘들었다.

“이런 데까지 이야기가 돌았으면 세력들은 이미 다 알았겠네요. 그쪽으로도 살펴보겠습니다.”

승호의 말에 경원이 그래, 그래 답했다. 나중에 대장주도 하나 알려주고 덧붙이는 말을 승호는 무시했다. 어쨌든 이 일도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년은 봐야할지도 모른다. 경원이 ‘씨이발.’ 습관적으로 욕을 하며 그대로 모래사장 위에 드러누웠다.

“아니, 그냥 지금처럼 유지하면 될 거 가지고. 아, 우리는 왜 예산이 안 떨어지냐.”

“국회의원이 우리한테 호의적이지 않잖아. 이능청에 예산 따오느니 자기 지자체에 가는 돈이나 지들 뒷돈만 더 챙기겠지.”

“이래서 에스퍼나 가이드 출신의 국회의원이 있어야해.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예산 깎이면 또 사람 갈아내야 하잖아. 어쩌자는 거야.”

“그러니까 민간 업체니 자유경제니 이야기를 흘리는 거지. 국가 예산으로 감당하기 힘드니까 경쟁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하나 둘 팔아넘길걸. 늘 그랬던 것처럼.”

“돈에 눈 먼 새끼들.”

그렇게 말하는 경원이 주식 앱에서 살 것들을 따로 골라내고 있었다. 네가 할 말이냐. 승호가 이어 말했다.

“안 그래도 입법 관련해서도 에스퍼나 가이드를 꼭 국가 소속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안을 낼 것 같습니다. 형질이상자의 자유 침해 건으로요. 직업선택은 물론이고 국가에 무조건 소속되어야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죠. 마찬가지로 지금은 괴수연구원들도 전부 국가소속이니까, 박형기 박사가 그 부분에 불만을 품은 것 같긴 해요.”

“박형기 박사는 해외 평이 좋지도 않던데, 민간업체와 계약해서 나가면 대우가 좋을 줄 아나보지?”

“주제파악을 못하나보지. 그래서 그 법안 통과되면 어떻게 되는데? 통과 될 수는 있나? 반대하는 의원들은? 부장님이 포섭 안 해뒀대?”

“글쎄요. 어떻게 됐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근데 만에 하나 통과된다고 해도 당장부터 어떻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능력자들이 5년 이상 국가에 의무를 다하면 민간으로 빠져도 되는 쪽이 되지 않을까 추측하기는 하는데.”

“군대랑 비슷해지겠네.”

“그럼 좀 쓸 만해지면 다 나간다는 거 아냐. 아, 씨. 키울 만큼 키워주고 뺏기는 거 아냐? 프랑스는 민영화 한 것들을 모두 국유화 하느라 세금을 어마어마하게 쓴다는데 우리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민간업체 경쟁으로 돌입되면 미국이나 러시아 쪽의 길드도 들어온다고 하던데요. 지금 노리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아니면 국내 작은 길드를 인수할 수도 있고요. 중국도 걱정이고,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아지겠죠. 관리 부분도 그렇겠지만.”

“지역이랑 MOU체결도 있겠지. 몇 년 전에 의료 관련해서 캘커타랑 MOU하자는 말도 있었잖아. 그때 의료민영화는 무산되긴 했지만.”

“동해 쪽 의원 중에 친 러시아가 있었지? 아마 사업 유치 이야기 나올 것 같군.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도 아직 있으니까.”

“지금 러시아 상황이 그래서 힘들 것 같은데. 근데 배를 아직 운행해?”

“그런 걸로 알아.”

“민간업체에 맡기는 것도 문제지만 외국계 길드가 들어왔을 때의 인력유출도 문제죠. 출장 빌미로 유능한 에스퍼나 가이드들 빼돌려서 시민권 주겠다고 하면 우린 속수무책이라.”

“몰라, 씨발. 어떤 새끼들은 또 좋다고 따라가겠지. 일단 우리는 우리 일을 하는 수밖에. 아무튼 이 지역 국회의원이 얽힌 거 맞지? 여기 선거는 에스퍼랑 가이드 표 잡아야하는데 이따위로 하기야?”

“에스퍼나 가이드 표를 잡으려고 하니까 그러는 걸 수도 있지. 우선은 보좌진 쪽부터 접촉해보자. 말단 말고, 최소 7급 비서. 가능하면 5급 비서관 쪽으로. 박형기 박사 맡은 쪽은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

“그럴 겁니다.”

승호가 대답했다. 경원이 “으, 개싫어.” 라고 투덜거렸다.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니까.”

경원이 말하며 몸을 일으켜서는 새 맥주 캔을 꺼냈다. 캔 표면에 맺힌 물에 모래가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승운도 차가운 캔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들의 꼬리를 밟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 승운이 신경 쓰는 건 재준이다. 그가 어딘가에 얽혀있다. 한국과는 연관이 없다고 했다. 그럼 국외와는?

조사를 해봐야할까? 위에 연락하면 재준에 대해 알아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재준도 고생하겠지. 고생…… 시켜야한다. 그가 혹 그들과 연관이 있거나, 그의 존재가 국가나 이능청에 위협이 된다면.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냥 말을 해달라고 해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

비밀서약서.

비밀서약서를 쓰는 곳들이 어디 있지? 그것만 찾아볼까? 승운이 고민했다. 그래, 그 다음에 결정을 하자. 보고는 나중에 해도 될 것이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잔잔했던 바다 위로 바람이 휘몰아친다. 소금기가 묻어난 냄새가 피부를 스쳤다. 파도가 거세지자 경민과 태환은 물 밖으로 나왔다. 옷에서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달빛 때문인지 피부가 약간은 푸르스름하게 보인 그들은 물을 제대로 짜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모래사장 위에 앉았다. 경원은 그들에게 맥주를 건넸다. 파도소리가 들린다. 때로는 규칙적으로, 때로는 불규칙적으로.

비탄 같기도, 절규 같기도 하다. 어쩌면 지승운 자신의 기분이 그런지도 모르겠다.

*

시리예는 에르난데스와 보리스와 함께 한국 관광을 실컷 했다고 한다. 시장에 가서 먹은 음식이 예전에 네가 해준 것 보다 맛있다는 말에 재준은 ‘그건 재료의 문제야.’ 라고 변명을 했지만 사실상 오랜 세월 요식업을 한 사장님들께 재준이 맛으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건 이게 아냐, 시리예.”

[알았어, 알았어. 찾아본다니까.]

그렇게 말한 시리예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영상통화를 켜둔 랩탑에는 자료가 없는 듯 했다. 잠시 뒤에 패드를 들고 나타난 시리예가 이것저것 확인을 하더니 랩탑 트랙패드로 뭔가를 찾았다. 눈을 살짝 찌푸렸다 푼 시리예가 ‘문제 없는데?’ 말했다.

[자료는 그대로 있어.]

“여기만 없어졌나 봐.”

그런 그녀의 뒤로 훌렁 벗은 에스퍼가 지나갔다. 그는 화면 너머의 재준을 보더니 ‘Bon soir’ 말하고는 다시 사라졌다. 재준도 그에게 인사해줬다.

“짐작 가는 사람은 없어?”

[……보는 아닐 것 같은데, 그렇다고 에르난데스도.]

“네 에스퍼도 믿을 만한 사람이지?”

[그런 발언 너무한 거 아냐? 설마 내가 그것도 못 알아 봤을까봐.]

게다가 지금 바로 옆에 있었다. 그는 시리예와 재준이 하는 말을 다 알아 듣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 웃는 소리가 났다. 시리예가 진짜 너무하지 않냐고 말을 하자 남자는 그래서 재준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재준도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대놓고 말하는 게 더 좋지 않은가. 뒤에서 그 사람 문제 있냐고 묻는 것 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짐작 가는 사람이 나라는 말은 하지 말아줘. 우리가 알아온 시간도 있는데.]

“넌 의심하지 않아.”

결과가 나오면 자료를 매번 보내는데 의심할 리가. 시리예가 그쪽에 얽힐 일도 없지만, 만에 하나 얽혔다고 해도 재준의 자료를 삭제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가장 먼저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넌 별다른 문제없지?”

[아무 문제없어.]

“얼마 전에 괴수가 공격했다며.”

[응. 한국 괴수라더라. 천 년은 됐었다나?]

“오래 전부터 있던 괴수종이지.”

[사람처럼 생겼어.]

“아직 덜 성장해서 그래. 말도 했다더군.”

[말을 했다고?]

“응.”

[역시 라제쉬 박사님의 이론이 맞았어.]

“그래, 그녀가 맞아.”

재준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이 있었다. 재준도 시리예도 뭐라고 말을 건네야할지 모르는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재준이었다.

“그들이 한국까지 손을 뻗은 걸까?”

[길드가 괴수들과 손을 잡았다고? 그것도 한국에 있는 이들과? 그렇게까지 연락망이 될까?]

“혹시 또 모르지. 알잖아. 그렇게 된 이상 그들을 구분할 수 있지 않다는 거. 평범하게 사람들 틈에 숨어서 살 수도 있고, 혹은 그들이 길드에 들어갈 수도 있고.”

길드를 창시할 수도 있겠지.

재준은 이어지는 생각은 말하지 않았다. 시리예가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사실 애매했다. 그들을 과연 괴수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괴수는 괴수였지만, 괴수가 아니기도 했다. 재준이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어쨌든 ‘어떠한’ 길드는 이 사실이 세상에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조심해, 허니.]

“난 괜찮아.”

[안 괜찮아. 넌 지금 혼자라고. 네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던 시리예가 멈칫했다. 역시 연락처를 쥐어줬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에스퍼는 시리예 자신에게 적의만 드러냈을 뿐이다. 자극시켰나? 가이드인 시리예는 보편적인 에스퍼의 행동패턴을 알고 있다. 그들이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나고 어느 부분을 싫어하는지, 어떤 말과 행동을 좋아하고 어떤 존재들을 무시하는지 같은 것. 하지만 지승운은 예측가능범위를 벗어났다. 애초에 에스퍼가 가이드인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낸다는 것부터가 지승운의 말이 안됐다.

시리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재준은 “너도 조심해.” 말했다. 이어 자기도 몸을 사리겠다는 말을 했다. 이게 몸을 사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하니 조금은 괜찮았다.

재준이 그녀의 에스퍼에게 시리예를 잘 지켜달라는 말을 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걱정 말라는 대답이 멀리서 들려왔다. 그가 지켜준다면 시리예는 큰 문제없을 것이다. 그리고 재준 자신은.

……뭐, 일단은 괜찮겠지.

적어도 당분간, 적어도 두 달간은 말이다.

지승운을 능가할 만한 이는 없을 테니까. 그가 제 자리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는 다시 스스로 몸을 지켜야했다. 재준이 그들이라면 바로 DMZ로 쳐들어올 텐데 오지 않는 것을 보니 그들도 아직 제대로 파악은 하지 못하는 듯 했다. 단순히 괴수학자들이 많이 탄 차량이라 공격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심하는 얼굴로 턱을 쓰다듬던 재준이 다시 시리예에게 물었다.

“멜라니는…….”

[여전히 병상에 계셔.]

“리처드가 고생이 많으시겠네.”

[그래서 이번에도 참석하지 못하시지. 한국은 너무 머니까.]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학회는 그래도 유럽에서 열리니까 괜찮을 것이다. 일단은 올해를 버텨내는 것이 재준의 목표였다.

“아직은.” 재준이 말했다.

“아직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래.]

“우리가 해야겠지.”

[해야지. 라제쉬 박사님들을 위해서라도.]

화면 너머의 시리예의 얼굴이 꽤 단호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시리예는 재준보다 더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오히려 종종 재준이 그녀에게 의지할 정도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라도.]

“그래.”

[어쩌면 세계를 위해서일수도 있고.]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손가락질 받고 욕먹더라도, 더 이상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시리예의 뒤로 남자의 모습이 드리웠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더라도, 저 남자는 시리예를 떠나지 않겠지.

그녀는 그런 사람을 얻었다.

현재준 자신은?

[우리가 해야 해. 알고 있지, 허니?]

“알고 있어.”

그런 사람을 얻을 생각도 없었지만 얻어서도 안됐다. 위험해지니까. 그 위험함 때문에 예지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유독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다. 이 삶에 다른 누군가를 끼워 넣어서는 안 된다. 자신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위험해지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학자의 숙명이지.”

예전부터 각오는 하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 외롭다.

***

승운은 습관처럼 재준을 데리러 가려다가 그가 연구소에서 철야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지를 태환에게 맡겼다. 지승호와 경민은 오후에 제3센터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른 아침 국회의원 한명을 경호해야한다는 말을 들은 이경민은 왜 하필 자기냐고 투덜거렸지만 별 수 없었다. 승호가 잔말 말고 갈 준비나 하라는 말에 경민은 양말가터를 승운에게 돌려주며 “난 여기가 좋은데!” 말했다. 좋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경호한다던 의원이 법안을 발의한 그 의원인 듯 했다.

승운은 자신의 차를 타고 먼저 제7센터로 들어왔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지승운은 연구소에서 주로 현재준과 유예지, 같은 층에 있는 몇몇 가이드들과 주로 만나지만 괴수연구소를 유지하는 인력은 꽤 많았다. 평소에는 어색하게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지만 재준이 연구실에 보이지 않자 승운은 그들에게 현 박사의 위치를 물었다.

“본부 숙직실에 계실 거예요. 여기는 숙직실이 없어서.”

자고 있나? 늦게까지 잘 사람이 아니었는데. 승운이 다시 차를 타고 본부로 오기는 했지만 숙직실로 가서 재준을 깨우거나 찾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그럼 잠깐 조사 할 겸 사람들이나 만나러 갈까.

그렇게 생각한 승운이 자리를 옮겼다.

*

“그건 몰랐네요.”

지승운은 가이드를 좋아한다. 뭐, 일단 알려지기로는 그렇다.

실제로 가이드라는 존재가 에스퍼에게 어떤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된다면 가이드를 싫어하는 에스퍼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분명히 지승운은 가이드를 좋아한다.

‘저새끼는 박사님한테 울면서 애교부리던 놈이네.’

정확히는 에스퍼가 페어를 해제하자고 해서 화를 냈던 가이드였지만 승운에게는 다르게 기억되고 있었다.

“의외로 이 지역이 그런 면에서는 잘 되어있어요. 언제 한번 같이 가시죠.”

이 새끼가 호빵을 키우는 새끼였나. 호떡인가. 아무튼 겨울 간식이었다.

“그래요? 다음에 가봐야겠네요. 추천 고마워요.”

승운이 대답했다. 물론 그가 추천하는 장소에 갈 생각은 없다. 만약 재준이 가자고 하면 의향은 있었지만 그럴 일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그 날 고백이라도 해야 했나 싶었지만 재준에게 들은 말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승운은 그냥 이야기를 듣는 척 미소 지었다. 저들이 뭐라고 해도 딴 생각이 계속 났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기에는 조금 다른 듯 했다. 본부 잔디밭 벤치에서 가이드들 몇 명을 옆에 끼고 앉아있는 승운의 모습은 평범한 에스퍼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동안 승운이 재준에게 살랑살랑 꼬리치는걸 봐왔던 예지는 남들 다 보는데서 저 꼴로 있는 승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지가 인상을 팍 썼다. 오늘따라 잠이 부족해 샷을 추가했더니 입이 쓴 건지 아니면 에스퍼가 가이드 끼고 어화둥둥 하며 웃는 꼴에 입이 쓴 건지 헷갈렸다.

‘어휴, 시발. 박사님 좋다고 쫓아다니더니 에스퍼가 그러면 그렇지. 괜히 좋게 봐줬네.’

박사님이나 찾아서 밥이나 같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예지가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옆을 가운 입은 남자가 스쳐지나갔다. 예지는 몸을 돌려 그를 보지 못했지만 남자는 지승운이 있는 곳까지 아무렇지 않게 파고들었다.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다들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승운 이 개새끼야.”

“왜 또 이래?”

“내가 오늘 가이드실 잡아뒀다고 했지? 30분 넘게 혼자 기다리고 있잖아.”

“아, 잊었어.”

잊은 게 아니라 무시한 거겠지. 경원이 됐으니까 어서 일어서서 가이드실에나 가라고 손짓했다. 승운이 그렇게 됐다는 얼굴로 일어섰다. 지승운이 떠나는 것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평범한 업무 중 하나였기에 다들 승운을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승운이 웃으며 인사를 받고 돌아섰다. 언제 웃었냐는 듯 일순간 표정이 굳었다.

“야, 웃어라.”

“너 같으면 웃음이 나오겠어?”

“제대로 일 해.”

경원이 말했다.

“살살 꼬셔서 정보나 빼어내라고. 겸사겸사 가이딩도 받고.”

살살 꼬여내기는 무슨. 물론 지금까지 지승운이 했던 일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위험한 현장에 나가는 빈도만큼 가이들과 접촉할 일이 많으니까. 의외로 소문에 빠른 그들은 정보통으로서 유용했다. 특히나 잠자리에서는 원래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는 법이었다.

“알았어. 알아낸다고.”

승운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박요한을 만나기는 했어야했다.

*

이어지던 벨소리가 끊겼다. 조금 뒤에 다시 벨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먼 장소에서 들리는 듯한 소리에 재준이 몸을 뒤척였다. 다시 벨소리가 끊겼다. 재준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멍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봤지만 흐릿한 흰 천장만 보일 뿐이었다. 천장조차 뿌옇게 보일 정도로 엉망인 자신의 시력이 매번 신기한 재준은 몸을 돌려 침대 맡에 둔 안경과 핸드폰을 집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

오후 12시 14분. 점심시간이었다.

게다가 그 밑에는 부재중 전화가 네 통이 와 있었다. 세 개는 예지였고 하나는 시리예였다. 연락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재준이 안경을 막 썼을 때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재준이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 예지야.”

[박사님, 지금 어디예요?]

“숙직실. 늦잠 잤나봐.”

[깜짝 놀랐잖아요.]

“미안. 식사는?”

[알아서 잘 챙겨먹고 있습니다. 옆에 김태환 에스퍼도 있어요. 일도 평소처럼 처리하고 있고. 아, 근데 결과 값 하나가 이상해요. 이건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응, 지금…… 아니.”

재준이 말하며 테이블에 올려놨던 서류들을 바라봤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이능검진센터에 문의를 해보려고 가지고 온 것이었다. 아침에 재빨리 물어보고 다시 연구실로 갈 계획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늦잠을 자서 충격 받은 것인지 재준이 입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나도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머리도 조금 아픈 것 같았다. 너무 오래 자서 그런가? 수면 시간을 보면 개운해야하는데 오히려 몸이 더 뻐근했다.

“조금 이따 들어갈게. 점심 맛있게 먹고.”

[알았어요. 박사님도 식사하세요.]

“고생해.”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재준이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감쌌다. 피곤했다.

어제는 평소보다 늦게 잔 편이긴 했지만 재준은 원래 잠을 일찍 자는 편도 아니었고, 오래 자는 편도 아니었다. 이렇게 늘어져 있을게 아닌데. 시리예와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긴장과 불안에 잠을 더 설쳐야했다.

이건 다른 감각이다.

혼자라는 게 절절하게 느껴져서 오는.

“좋지 않아.”

세상과 격리된 듯한 적막함.

찬 물로 얼굴을 씻어낸 재준이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엉망일 것이다. 사실 잘 모른다. 처참한 시력이 코앞에 있는 자신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제 얼굴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 안 난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 재준은 밖으로 나와 옷을 챙겨 입으며 서류를 살폈다.

가이드 호르몬 수치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에게나 물어볼 수는 없지만 재준도 대충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이드 검진센터에 있는 가이드 중에서 재준에게 피를 제공하는 가이드들도 일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박요한 가이드와 다른 가이드들의 수치와 상태를 비교 해석하는 데 그들이 협조를 할지, 혹은 협조요청을 해도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가이드들 사이의 규율 같은 것을 모르니까 이것이 예의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류를 챙겨 검진센터로 간 재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검진센터 근처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역시 이건 아니야.

다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던 찰나, 누군가가 “현재준 박사님?”하고 말을 걸었다.

재준이 그쪽을 바라봤다. 모르는 얼굴이다.

“진짜 현재준 박사님이네. 생각보다…… 키가 크신데요?”

그가 재준을 위아래로 살폈다. 재준이 남자를 내려다봤다. 자신보다 시선이 조금 아래에 있었다. 이런 남자를 알고 있었나? 익숙한 얼굴은 아니다. 지나가며 한두 번 봤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새로 온 사람이라면 그쪽도 재준을 몰라야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재준이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잊었다는 듯 ‘아차.’ 말했다.

“제가 소개를 안했네요. 검진센터 소속 연구원인 이경원 에스퍼입니다. 제 동생이랑 친구가 박사님께 신세를 지고 있죠? 이경민 에스퍼요.”

아, 그러고 보니 이경민 에스퍼의 형이 이곳에 있다고 한 걸 얼핏 들었다. 지랄새끼니 뭐니 하면서 말이 오갔던 것을 보면 지승운과도 아는 사이일 것이다.

“승운이하고는 불알친구예요. 제 어머니랑 승운이 어머니 둘 다 군인이셨거든요. 지금은 제 어머니만 군에 계시지만.”

“아.”

“지승운 여동생도 있는데 걔도 군인이에요. 이 근처에 있는데, 옆 동네에.”

“그렇군요.”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잘 안 오지 않나요?”

그렇게 말한 경원이 넉살 좋은 얼굴로 재준의 옆에 들러붙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재준이 물러섰다. 명백한 거부반응이었지만 경원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검진센터에 볼 일이 있다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뭔가 도움을 요청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말한 경원이 재준을 향해 “일단 제 방으로 갑시다!” 말했다. 재준은 경원이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올리는 손을 피했다. 경원은 그것조차도 신경 쓰지 않고 먼저 나갔다. 재준은 됐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경원의 뒤를 따랐다.

어쩌면 다른 가이드들보다는 에스퍼가 좀 더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검진센터에 있다면 가이드에 대한 것도 잘 알 테니까.

재준은 이경원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이경원은 재준에 대해 꽤 잘 아는 듯 했다. 그가 “커피 안 드시죠?” 라면서 둥굴레차를 내밀었을 때, 재준은 얼떨결에 종이컵에 담긴 차를 받았다. 정확히는 이른 아침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 편이었지만 커피보다 차가 좋기도 했다.

그런데 일회용품……. 어쩔 수 없지. 몇 번 더 쓰는 수밖에. 재준이 차를 홀짝였다. 경원이 커피를 종이컵에 타서 뜨거운 물을 붓고 스틱으로 휘휘 저었다.

환경호르몬……. 아니지. 환경호르몬은 나오지 않는다고 했지. 하지만 재준은 그를 보자마자 장담했다. 나랑 잘 안 맞을 것 같아. 그렇다고 도움을 거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경원이 종이봉투를 내밀며 “꽈배기 드실래요?” 물었다. 재준이 고개를 저었다. 경원은 그 단 커피와 꽈배기를 함께 우물거리며 재준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니까 저 박사가 지승운이 그렇게 빠져있다던 사람이지. 대충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물로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평범한 인상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키와 덩치가 꽤 있었다. 박사라고 하길래 그동안 그가 검진센터에서 봤던 박사들처럼 힘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고 허여멀건 할 줄 알았는데 꽤.

꽤…….

“안경 몇 번이나 압축했어요?”

“예?”

“안경이요.”

“네 번 압축입니다.”

“시력 엄청 안 좋으신가 보다.”

경원이 말하며 생각했다.

‘어디가 못 생겼다는 거야.’

안경 굴절 때문에 눈이 작아 보이긴 하지만 모난 데가 없다. 물론 안경을 쓰지 않은 사람들은 안경 하나로 눈 크기가 얼마나 극적으로 달라지는지 알지 못하는 편이지만, 안경과 렌즈를 번갈아 착용하는 경원의 경우는 대충 알았다. 이 사람의 겉모습이 나쁘지 않다는 걸.

벗겨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만, 뭐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겠지. 경원은 손에 묻은 꽈배기 설탕을 가운에 슥슥 닦은 다음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재준에게 떼지 않았다.

재준은 말없이 경원을 바라봤다.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진다. 연구원들의 성향은 대부분 거기에서 거기였다. 마치 친구와 같은 친숙함이 느껴진다. 물론 재준의 친구들, 그러니까 괴수학자들은 저런 식으로 일회용품을 남발하지는 않았지만.

“박사님은 주로 무슨 연구를 하세요?”

“그냥 괴수에 관한 전반적인 것들을 합니다. 국가에서는 괴수를 좀 더 쉽게 처리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내는 것을 원하지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의뢰를 받으니까요.”

재준의 대답에 경원이 ‘흐음.’ 하며 흥미를 보였다.

“근데 그러면 검진센터에는 왜 오신 겁니까?”

“연구 하는 도중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요. 도움을 받을까 했습니다.”

“어떤 부분인데요?”

“가이드의 호르몬 수치에 대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가이드 등급 설정에 대한 것도 알아보고요.”

“왜요?”

“가이드의 파장이 끼치는 영향을 알기 위해서요.”

“박사님은 괴수학 박사잖아요.”

“예.”

“근데 가이드의 파장이 왜 필요하지? 에스퍼가 아니라?”

예리하네. 지금까지 그 부분을 지적한 사람은 없었는데. 재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안 그래도 작아 보이는 눈이 더 작게 보였다.

“연구 중인 사항이라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거 뭔가 있는데, 경원이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다.

“뭐, 그래요.”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아마도? 호르몬은 제 전문이거든요.”

“호르몬 연구를 하십니까?”

“예, 아무래도 친구가 맞아떨어지는 가이드가 없으니까요. 아직 가이드 작용이 어떤 식인지 정확하게는, 아시잖아요. 계속 밝혀지는 게 다르니. 이거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면 아니고. 그래도 가이드가 네거티브 수용체라는 걸 기준으로 여러 실험을 하고 있긴 한데 막상 효과가 좋지는 않아요.”

“안정시키는 호르몬이 부신 옆에서 나오죠? 그러면 부신피질 호르몬제와 비슷한 형태인가요?”

“뭐, 그렇다고 봐야죠. 사실 부신 옆에 작게 붙은 샘이라 실질적으로는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부신피질 호르몬제를 써보긴 했는데요. 이게 면역억제 쪽은 작용을 해도 에스퍼 에너지를 낮추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염증억제나 림프 활성 작용 때문에 에스퍼들이 더 힘이 넘쳐요. 거참, 분명 옆에 있는 샘인데 하나는 힘을 내게 하고, 하나는 힘을 억제하고. 게다가 호르몬제 쓰는 게 쉽지 않잖아요. 부작용 발생도 쉽고, 한꺼번에 줄이면 또 문제가 일어나고. 어디, 그게 박사님이 궁금한 거예요? 서류 봐도 됩니까?”

“예, 여기요. 강도가 약한 걸 지속적으로 써보는 건 별로였습니까?”

“강도를 약하게 하면 효과가 없고, 강하게 하면 미쳐서 날뛰어서요. 결국 에스퍼의 부신 옆 내분비선에서 뽑아낸 건 크게 효과가 없었어요. 뽑아낼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런 건 가이드에게서 뽑아내야하죠. 그래서 전 가이드 학 전공인데…… 이 수치는 어느 가이드죠?”

“박요한 가이드와 함필관 가이드님입니다. 함 가이드님은 여기 제7센터의 부센터장이십니다.”

“아아, 그럼 이쪽이 박요한 가이드군요. 생각보다 수치가…….”

“수치가 어떻죠?”

재준의 물음에 이경원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걸 말해도 되나 하는 얼굴이었다. 잠시 고민한 경원이 ‘아니요.’ 말하고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이경원 박사님, 아니…… 에스퍼?”

“박사도 맞아요. 현 박사님과 비교하면 햇병아리지만요.”

“어느 쪽이 듣기 좋습니까?”

재준의 물음에 경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건, 신선하네. 그가 에스퍼라는 것을 알면 다들 에스퍼라고 부르지만 재준은 처음으로 그에게 어떤 식으로 불릴지 물어봤다. 경원이 정신계 에스퍼라고는 하지만, 정신계 에스퍼라고 다 똑똑하거나 머리가 좋은 건 아니다.

결국 정신계라는 건 타인의 정신에 작용을 주느냐 마느냐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지, 자신의 머리를 조작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이경원은 타인의 기억을 조작하는 쪽으로 특화되어있었지만 머리 자체는 평범했다. 그가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다들 정신계 에스퍼니까 똑똑하겠지 하고 지레짐작 했을 뿐. 코피 쏟아가며 딴 박사학위를 그저 정신계 에스퍼라는 이유로 쉽게 땄다고 치부되다니 그렇게 원통한 일이 또 있겠는가.

“박사님한테는 박사 소리를 듣는 게 더 좋겠네요.”

“예, 이경원 박사님.”

뭐야, 이 사람 괜찮잖아. 난 찬성이다, 승운아.

그러던 경원이 잠시 멈췄다. 아니, 이 사람 가이드가 아니었지.

착각했다. 이상하게 가이드와 비슷한 느낌이…….

안 나는데? 경원이 다시 재준을 살펴봤다. 위아래로 꼼꼼하게.

역시 가이드 같지는 않은데? 왜 방심한 거지?

“박사님, 제가 궁금한 것은 박요한 가이드의 등급이 아닙니다.”

재준이 말했다. 경원이 웃어보였다. 물론, 에스퍼나 가이드의 등급은 공공재였지만 정확히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런 등급을 받았는지는 검진자 재량이다. 경원이 보기에 질로 따지면 이건 B급 가이드다. B급 치고는 상위였지만, A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아마 에너지 총량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아슬아슬하게 A로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가이드 수치에 대해 모르는 저 사람이 굳이 저런 말을 했다는 건.

“박요한 가이드가 A급을 받을 수 없다는 걸 미리 아셨나 봐요?”

“함 가이드님과 수치에서 차이가 나니까요.”

“예, 생각보다 많이 나네요. 함필관 가이드님? 이 분은 생각보다 더 수치가 좋네요. 왜 제7센터에 계시지?”

“중구에 계셨다가 10년 전에 이쪽으로 지원하셨다고 합니다. 고향이라던데요.”

“아아, 제가 모를 수도 있겠네요. 전 그때 교육생이어서.”

경원이 물었다.

“그럼 박사님이 궁금하신 건 뭔가요?”

“제가 궁금한 건 가이드의 질, 그러니까 등급을 따지는 호르몬의 정확한—.”

그때 쿵 소리가 났다.

“—수치 구분표와…….”

말을 하던 재준이 멈춰 문 쪽을 바라봤다. 경원도 마찬가지였다.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그러더니 알람이 울렸다. 재준은 알람 소리만 듣고 뭔지 알지 못했지만 경원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해갔다.

“이경원 박사님?”

“이런 미친!”

경원이 뛰쳐나가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이게 뭐야? 재준이 황당한 얼굴을 하다가 경원이 나간 방향을 따라 나갔다. 뭔지 모르지만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재준은 뭔가 터졌다면 자신의 쓸모없는 손이라도 빌려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경원 에스퍼의 뜀박질은 재준의 기준에서 굉장히 느렸다. 그때 다시 한번 멀지 않은 장소에서 쾅! 소리가 났다.

“지승운 이 미친 새끼야아아아아!”

“…….”

거북이걸음만큼이나 느린 속도로 달려가는 이경원을 재준은 적당한 속도로 따라갔다. 뭔지 몰라도 지승운에게 일이 생긴 듯 했다.

***

박요한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지승운을 기다렸다. 조금 늦었나 싶었던 게 10분, 무슨 일이 있나 싶었던 게 30분, 설마 잊어버린 건가 싶었던 게 45분. 그리고 50분이 되었을 때 지승운이 가이드실로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잊어버렸어서.”

승운이 가볍게 말했다. 박요한은 황당했지만 우선 웃어보였다. 나쁘게 대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아닙니다, 지승운 에스퍼.”

많이 기다렸냐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승운은 박요한을 한번 쳐다보더니 “그래요?” 하고는 빈 의자에 앉았다.

가이드 실은 뷰가 괜찮은 평범한 비지니스 호텔 같았다. 보통 호텔과 다른 점은 커튼이 암막으로 되어있다는 것 정도다.

말이 좋아 가이드 실이지 대부분은 섹스를 위한 공간이다. 솔직히 말하면 승운은 이런 가이드 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름 분위기를 내어주겠다고 이상한 홍등을 걸지는 않았다. 숲이 보이는 광경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거나 바캉스에 온 것 같았지만, 승운은 여기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박요한 가이드.”

“예, 지승운 에스퍼.”

일단 한번 떠보는 게 좋겠지.

“이곳에는 적응을 잘 하셨나요?”

“예? 아……. 뭐, 나쁘지는 않지만 제가 적응할 필요는 없죠. 곧 돌아갈 테니.”

“거제도로 말이죠?”

“음, 아뇨. 전 이번에 영종도로 갈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퍽이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이드를 보는 에스퍼가 그렇듯이. 하지만 사랑스러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승운이 힐끗 자신의 시계를 바라봤다. 여전히 녹색. 가이딩을 받는다고 해서 검게 변할 것 같지는 않다.

“박요한 가이드, 미안한데.”

승운이 힐끗 박요한을 바라봤다. 기대하는 얼굴이었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다.

“입술까지만 해도 됩니까?”

“예?”

“이곳이 성교합을 위한 곳이라는 건 아는데, 제가 상황이 그렇게 안 좋지 않아서요. 입맞춤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박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승운이 재차 말했다.

“준비해왔을 텐데 미안해요.”

“……아뇨, 어쩔 수 없죠.”

박요한이 대답했다. 생각보다는 깔끔한 결말이었다. 승운은 그가 거부라도 할까 조금 성가셨던 마음을 내려놨다. 적당히 입만 맞추다가 정보를 들고튀면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박요한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그가 뭔가를 꺼냈다. 틴 케이스였다. 뚜껑을 열자 알싸한 멘톨 냄새가 났다.

“지승운 에스퍼, 이거 드실래요?”

“뭐죠?”

“목캔디요. 아무래도 입맞춤이다보니.”

“…….”

뭐, 민트 냄새가 더 낫긴 하겠지. 승운은 잠시 고민하다가 “예, 주시죠.”말했다. 박요한이 웃어보였다. 승운이 손바닥을 뻗자 사탕 두어 개를 손에 떨어뜨렸다. 생각보다 작았다. 생긴 게 조금 이상하긴 한데, 냄새로 봐서는 목 캔디였다. 마치 의심이라도 할까 싶었는지 박요한은 먼저 목캔디를 입에 넣었다. 그것을 본 승운 역시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포도당 가루인지 아무 맛도 나지 않았고, 입 속에서 쉽게 부서졌다.

차라리 민트 맛이 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순간 승운이 멈칫했다. 귀 안쪽에서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몸 안쪽, 깊은 곳. 마치 엔진 장치가 기폭을 일으키듯 내장이 터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승운이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씨발, 포도당. 다른 곳을 거칠 필요 없이 바로 흡수된다. 박요한이 준 사탕에 뭔가가 있다. 독? 아니, 이건…….

승운이 숨을 몰아쉬며 박요한을 올려다봤다.

“과연, 에스퍼들은 신체 순환이 빨라서 금방 통한다더니. 가이드들은 조금 늦게 통하거든요.”

“……뭘, 먹인 거죠?”

승운이 물었다. 요한이 웃어보였다. 그가 그대로 승운의 손목을 이끌었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승운을 이끌기는 쉽지 않았다. 그가 가이드 에너지를 흘려보내자 승운이 움찔했다. 기저부터 깔리는 힘이 승운을 안정시키는 듯 했다. 안정감과 함께 구역질이 올라왔다. 기분 나빠.

원래 가이딩이 이런 거였나?

“뭐긴, 서로 좋은 시간 보내자는 거죠.”

결국 승운을 이끌지 못한 박요한은 그대로 의자에 앉아있는 승운의 위에 올라탔다. 묵직하게 솟아있는 것에 시선을 한번 준 요한이 피식 웃고는 승운의 얼굴을 봤다. 승운이 자신의 시계를 만져 확인했다. 박요한은 ‘몸 상태에는 이상이 없을 거예요.’ 말했다. 승운이 시계에서 시선을 떼 요한을 바라봤다.

“정말 잘생겼네요, 지승운 에스퍼.”

가이드들이 늘 하는 말이었다.

“인체에 해롭지 않아요. 어차피 에스퍼는 금방 빠져나가잖아요? 신진대사가 좋으니까.”

에스퍼는 신진대사가 좋아서 독도 더 빨리 돈다. 금방 중독되었다가 금방 해독된다. 그렇다고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빨리 정상화된다고 해서 독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승운이 판단하기에 박요한이 자신에게 먹인 건.

“전 지승운 에스퍼가 굉장히 필요하거든요.”

……그런 종류의 것 같다. 하지만 보통 그런 것이 에스퍼에게 이 정도 효과를 내지는 않는다.

“난 아주 높이, 높이 올라가고 싶어요. 지승운 에스퍼도 겨우 여기에서 만족하는 건 아니잖아요?”

“……높이, 어디?”

“어디든.”

박요한이 대답하며 승운의 목덜미에 자신의 팔을 걸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입을 맞추려고 했다. 승운이 고개를 틀어 얼굴을 피했다. 박요한이 그런 승운을 내려다봤다. 밑에서부터 몰아치는 열기 때문인지 양 볼과 귓가가 울긋불긋했다.

“후우.”

승운이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분홍빛으로 물든 눈가와 물기어린 눈에 박요한이 군침을 삼켰다.

“열이 오르나 봐요.”

“박요한, 가이드.”

승운이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박요한은 승운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높이 가는데 제가 필요합니까?”

“지승운 에스퍼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어디…… 거기가 어딘데?”

“길드요.”

길드. 그래,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지. 승운이 생각했다. 머릿속까지 흐릿하게 변질되어가는 듯 했다. 이게 무슨 약인지 알 수 없었다.

“중국 쪽에서 돈을 많이 주기로 했거든요.”

“이능력자는 정부 소속인데요…….”

“법이 바뀔 거예요.”

그렇게 말한 박요한이 승운에게 입을 맞췄다. 승운은 그냥 가만히 입을 벌려준 채 요한을 바라봤다. 눈을 감지 않는 승운의 모습에 요한이 흥분이라도 한 것인지 눈이 번들거렸다.

“어때요? 좋죠?”

기분 나빠. 역겨워.

머릿속이 뒤엉키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 좋다니, 뭐가?

“나랑 하면 다를 거예요. 하하, 내가 그쪽이랑 40퍼센트대 매치라니. 이게 웬 횡재야. 30퍼센트랑은 크게 다를걸요?”

그렇게 말하며 무릎으로 사타구니를 누른 요한은 허벅지의 천 너머로 느껴지는 생각지도 못한 크기에 승운의 얼굴과 아래를 번갈아 보더니 웃어보였다. 그가 바지를 벗기기 위해 벨트에 손을 얹는 순간, 승운이 요한의 손을 잡았다.

“박요한.”

“바쁘니까 말하지 마요.”

“잠깐, 잠깐만요.”

승운이 손에 힘을 줬다. 뭐야, 왜 이렇게 힘이 세? 요한이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쥔 승운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요한이 물러서려고 했지만 승운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법이…… 바뀐다니?”

“이번 발의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선 이것부터 놓고.”

“먼저 말하면 놓을게요.”

요한이 인상을 썼다. 아니, 먼저 놓고……. 하지만 뭐라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자 승운이 손에서 힘을 약간 풀며 말했다.

“위로 올라갈 자리라며.”

낮게 깔린 목소리에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박요한이 그런 승운을 보며 와 하고 감탄했다. 그동안 왜 그렇게 멀리 있었을까. 가까이만 있다면 금방 이걸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요한이 “그쪽이 더 좋아요?” 물었다. 승운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봤다.

“하긴, 당신이라면 세계무대에서 놀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일단 한번 빼고 시작하면 안돼요?”

그렇게 물은 박요한은 대답조차 듣지 않고 잡힌 손을 통해 가이딩을 시작했다. 승운이 “읏.” 소리 냈다. 기분 나쁜 에너지가 몸을 헤집는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역겹다. 하지만 이게 제 삶을 늘려준다고 하니 매달리고 싶었다.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안도가 됐다.

승운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살기 위해 매달리고 집착하려는 스스로가 싫다.

에스퍼는 다 짐승새끼라더니.

맞는 말이었어. 지조 없는 짐승새끼.

그러나 그 짐승새끼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퍼뜩 떠올랐을 때, 승운은 있는 힘을 다해 박요한을 밀어냈다.

“말 먼저 해.”

박요한이 움찔했다. 서슬 퍼런 눈이었다. 에스퍼에게선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시선이다. 마치 괴수를 상대할 때의 그들처럼 인간답지 않은 푸른 안광이 나오는 눈동자를 보며 요한은 입을 열었다.

“제 삼촌이 괴수학 박사예요. 해외랑 자주 일을 하는데 한 길드에서 제안을 하나 했나 봐요. 우선 길드 하나를 만들어서 거기에 에스퍼랑 가이드를 데려오면 인수하는 쪽으로. 규모가 꽤 있어서 괴수연구원도 지원을 할 건가봐.”

“박형기 박사?”

“알아요? 하긴, 삼촌 유명하지.”

“법안은, 발의한 의원들 전부…… 거기에 얽혀있나?”

“그럴 리가요. 하지만 영종도와 거제도, 그리고 여기 고성 지역의 국회의원들이 손을 잡긴 했죠. 제가 괜히 왔겠어요?”

“그들이 주축?”

“우선은.”

“어떻게……?”

“대학 동기요. 저희 삼촌도 원래 괴수학을 전공하진 않았거든요.”

요한이 말했다. 승운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내부에서 무언가가 날뛰었다. 승운이 “하아.” 하고 숨을 내뱉자 박요한은 드디어 됐다는 얼굴을 했다.

“힘들죠, 지승운 에스퍼?”

그가 다시 벨트를 잡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제가 편하게 해줄게요.”

“아니.”

승운이 말했다.

“괜찮아.”

“예?”

박요한이 멍한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하얀 연기가 그의 등 뒤로 어깨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리며 올라오는 스모그에 요한이 뒤로 물러섰다.

승운이 차고 있던 시계의 불이 깜빡거린다. 녹색이었던 것이 금방 노란색으로 변했다. 승운은 에스퍼 에너지를 사용해 몸에 있던 약 기운을 내몰았다. 하지만 몸 밖으로 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자 모공을 통해서 나가는지,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승운의 차가운 얼굴이 요한을 내려다봤다.

쿵!

박요한이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벽이 파였다.

왜?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는데? 요한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벽을 한번 바라보고 승운을 바라봤다.

“박요한 가이드. 이거 이능법 위반인거 아시죠?”

승운이 말할 때마다 악의가 밖으로 빠져나와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니, 실제로 입에서도 나오는 검은 연기가 마치 그를 악마처럼 보이게 했다.

“응? 아냐고, 이 씨발 새끼야.”

승운이 요한의 목덜미를 잡았다. 가냘프다고 해도 남성의 목이었다. 그러다보니 승운은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능법 위반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승운이 손에 힘을 주자 살의 일부가 파고들어 승운의 손가락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다.

“크…… 으읏!”

목울대를 손바닥이 누르자 박요한은 숨을 쉴 수 없는지 꺽꺽 소리를 냈다. 툭 하고 바닥에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 곧 물이 차올랐다. 바닥부터 서서히 젖어 들어가더니 이내 천장에도 물방울이 맺혔다. 박요한의 눈동자가 사방을 바라봤다. 물방울은 비처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고 중력을 거스르듯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윽, 커헉! 흑…….”

에너지가 휘몰아친다. 찰박찰박 차오르던 물은 어느 샌가 소리 없이 공간을 잠식시켰다. 박요한은 살이 관통하며 느껴지는 아픔보다 숨을 쉴 수 없는 순간의 공포가 더 심했다. 그런데 물까지 차오르자 이대로 죽을 것만 같은지 발버둥을 쳤다.

승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요한을 바라봤다. 확실히 힘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이건 나쁘다. 괴수 때문에 폭주에 돌입하려 했을 때보다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지승운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제어가 안 된다.

쾅! 하고 무언가가 터져나갔다. 뭐가 터졌는지 승운은 보지 못했다. 창문이 쩌적 갈라졌다. 물이 그 위까지 차오르더니, 갈라진 틈 사이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륵주륵 흐르던 물은 압력이 가해진 것처럼 방 안에서 파도를 쳤다.

가이드 실 안에 있던 물건들이 물 위를 떠다녔다. 다시 한 번 쿵 하며 벽의 일부가 파였다. 지승운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에스퍼 에너지가 멋대로 날뛰었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는 녹색을 넘어서 노란색으로 변했다. 승운의 눈의 푸른 안광이 사라졌다. 노란색은 다시 주홍빛으로 바뀌었다.

“크…….”

요한이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의 시계를 눌렀다. 순식간에 삐삐삐삐— 소리를 내며 시끄러운 알람이 방안을 채웠다. 구조요청이었다. 그러면서도 요한은 두려운 얼굴로 승운을 올려다봤다. 누군가가 오기 전에 지승운이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이미 그의 턱 끝까지 차오른 물은 박요한의 이지를 상실하게 했다. 얼굴이 푸른 빛에 가깝게 변해가는 요한과 달리 승운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사, 살…… 려, 살…….”

요한이 극심한 공포에 시달려 이대로 죽는 게 낫다고 판단되는 순간, 멀리서 누군가가 지르는 고함이 들렸다.

“지승운 이 미친 새끼야아아아아!”

박요한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더니 곧 실핏줄이 터지고, 눈머리를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문이 열렸다. 방안을 가득 채웠던 물이 열린 문으로 빠져나갔다. 물은 스스로 움직이듯 파도를 치며 복도를 빠져나가더니 이내 알아서 증발했다.

“너, 그 손 당장 놔! 야, 인마! 사람 죽이겠다!”

경원이 말하며 다가왔지만 허공을 떠다니는 물건들에 제대로 다가오지 못했다. 승운의 핏발 선 눈이 경원을 향하자 그가 움찔했다. 폭주 직전의 모습이다. 그런 승운의 눈에 재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환상인가? 왜 박사님이 여기 있지?

하지만 경원이 박사님한테 ‘여긴 왜 또 오셨어요?’ 말을 하는 것을 듣자 환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허공을 떠다니던 물건들이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무릎까지 차오른 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모를 물방울들이 중력을 거스르며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승운이 숨을 내뱉었다.

재준이 자신을 보고 있다.

놀란 얼굴이었다. 손은 당장 박요한을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며 내숭이라도 떨고 싶었지만 힘이 풀리지 않았다. 머리가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재준의 시선이 지승운의 손에서, 이어 그가 잡고 있는 박요한의 목으로, 그리고 손가락이 파고든 그 자리에 머문다.

승운은 애써 힘을 풀었다. 눈의 붉은 빛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다시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더니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제어할 수 없어.

구해줘.

살려줘.

소리치고 싶었지만 승운의 입 밖으로는 어떤 말도 나오지 못했다.

“야아아아아, 미친! 지승운!”

그나마 열린 문틈과 깨진 창문으로 물이 빠져나간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빗방울처럼 허공에 물이 방울방울 져있다.

우주에 내리는 비처럼.

경원이 다가와 박요한을 끌어내려했지만 승운의 손아귀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어디가 어떻게 망가졌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박요한의 얼굴이 새파랗다. 사람이 이렇게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건 좋지 않았다. 게다가 피를 많이 쏟은 것 같았다. 경원으로서는 지승운을 혼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박요한이 쓰러지기 전에 알람을 울려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겠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경원이 재준을 향해 소리쳤다.

“저거 막……!”

씨발, 저 사람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니지.

“박사님! 박사님은 도망쳐요!”

일반인이 여기에 있다가 휘말리면 더 큰일이었다.

알람을 멈추지 않자 소리는 사이렌으로 바뀌었다. 근처에 있는 에스퍼들과 가이드들이 달려왔다. 몇몇의 에스퍼가 승운을 막으며 박요한을 떼어냈다. 뒤이어 가이드들이 승운의 팔다리에 매달렸다. 재준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지승운 좀 잡아! 거기 잡으라고!”

승운의 입에서 후욱 후욱 숨이 내쉬어질 때마다 안개 같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어느 샌가 검은 색은 사라지고 흰 연기만 나왔다. 스모그 속에서 탄생하는 괴수처럼.

지승운의 눈이 붉다. 폭주의 전조다. 하지만 승운의 손목에 있는 시계는 주홍빛을 띄고 있을 뿐이다. 아직 폭주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싶은 순간 경원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바지 위로 도드라진 물건을.

경원의 시선을 따라 다른 사람들 역시 그곳을 바라봤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듯 했다.

“이 씨발,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경원이 쓰러진 박요한을 향해 소리쳤지만 그가 답해줄리 없었다. 재준이 다가가 요한의 호흡이 정상적인지 살폈다. 호흡이 없다. 재준이 경원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경원이 욕을 하며 가운을 벗고는 박요한의 고개를 젖혔다.

“가이드들 있는 대로 다 불러와요! 지금 쟤 막아야하니까.”

경원이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가이드들이 계속해서 안으로 들이닥쳤다. 경원은 요한의 위에 올라타 CPR을 했다. 지승운의 숨소리가 들린다. 곧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경원이 가슴압박을 하면서도 “지승운! 정신차려!” 소리쳤다. 승운의 시선이 경원에게 향했다. 이어, 그의 옆에 있는 재준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순간 승운이 멈칫했다.

하고 싶어.

도와줘. 살려줘. 부족해.

재준을 보자 알 수 없는 욕구가 피어올랐다. 몸이 타오를 것 같은 욕정이다.

시계가 다시 한 번 빛났다. 주홍빛이 더 붉게 물들려고 하자 가이드들이 승운의 몸에 자신을 밀착시켰다. 에스퍼는 불가능하지만 가이드는 어떻게든 그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팔다리에 들러붙는 얄팍하고 희미한 에너지에 충족할리 없었다. 마른입에 물이 한 방울 씩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죽는다.

그걸 인지한 것은 승운만이 아니었다.

여러 명의 가이드가 합심해 승운을 침대에 눕혔다. 승운이 발버둥 쳤지만 가이드들이 흘려보내는 에너지에 굴복하고 말았다.

부족해.

가이딩이 필요해.

죽을 것 같다. 살고 싶다. 당장 아무에게나 들러붙어야했다.

그래야 산다. 가이딩을 받아야 한다. 가이딩이 필요하다.

하지만 승운의 시선 끝에 재준이 닿아있다.

그가 있는 장소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가이딩을 받는다고?

그동안은 남들이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이 순간은 치부를 들킨 것처럼 승운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역겨움을 참을 수 없었다. 승운은 재준이 이 공간에서 떠나길 바랐다. 그럼에도 눈앞에 있기를 원했다.

어서 떠나기를, 하지만 곁에 있기를.

상반되는 감정을 욕구가 질식시켰다.

해야 한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느 가이드든 괜찮다.

승운은 이런 자신이 싫었다. 어느 가이드든 괜찮다니.

살고 싶다.

한편으로는 죽고 싶다.

승운이 손을 들어 올려 눈앞을 가렸다. 살짝 벌린 손가락 틈으로 재준을 이끄는 경원이 보였다. 나가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재준의 시선이 승운은 무서워졌다.

반쯤 감긴 눈 사이로 새하얀 손 하나가 승운의 셔츠 단추를 푸는 것이 보였다.

재준의 손은 이렇게 얇고 예쁘지 않다. 누군가가 벨트를 풀고 버클에 손을 댔다. 차갑고 부드러운 손길에 의지를 해야 하는데도, 이 순간이 끔찍하다.

부족해. 하고 싶지 않아.

부족해.

살고 싶어.

살아야했다.

살아야 계속 볼 수 있다.

누구를?

누구를? 누구를? 누구를?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조금만 더.

몸에 들러붙는 몇 개의 체온을 느끼며 승운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지만 머릿속은 엉망진창으로 치달았다. 어떤 의미도 되지 않았던 입맞춤이 지금은 끔찍하게 느껴진다.

재준은 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것이다. 바지가 벗겨지고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다. 셔츠를 벗기던 손과는 달리 투박한 느낌에 재준의 손이 떠올랐다.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그 손이 닿으면 이럴까. 에스퍼 에너지를 가이딩하지도 못할 그 손이 너무 갖고 싶었다. 몸이 부서져도 좋으니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다.

승운이 눈을 감았다. 위에 올라타는 사람 대신 재준을 떠올렸다. 감은 눈앞에 재준의 모습이 선연하게 보인다. 특유의 표정 없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재준은 이내 입을 달싹이더니 경멸의 시선을 보인다.

“흐—…….”

신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자신에게 들러붙은 가이드들 덕분에 몸이 조금씩 안정될수록, 머릿속은 더 크게 날뛰었다. 상상 속 재준이 더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재준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재준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그는 에스퍼와 만나지 않는다. 형질이상자와 일반인들은 다르니까. 만나지 않는다고 말을 했다.

묻지 말걸. 그러면 희망이라도 가졌을 텐데.

상상 속 재준이 지승운을 혐오한다. 여러 사람들과 뒹구는 모습에 역겨움이라도 느끼듯 눈을 찌푸렸다. 승운은 재준과 함께 할 자신을 떠올리고 싶었는데, 상상 속 재준은 그저 승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끔찍한 것을 보듯이.

그래,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은 현재준보다 자신에게 어떤 감정이 있는 현재준이 더 나았다.

차라리 미움이라도 받는다면 오래 오래 기억이라도 될까.

그래도 미움 받고 싶지 않아…….

그가 자신을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안다. 들러붙는 가이드들에 재준을 대입해 봐도, 그건 그저 상상일 뿐 승운은 재준과 얽힐 일이 없다. 몸이 쾌락과 젖어들고 에스퍼 에너지가 안정에 접어들수록 승운은 더욱 비참해졌다.

살고 싶어.

부족해.

미움 받기 싫어.

죽을 것 같아.

부족해.

부족해.

제발 누군가가 날 안정시켜줘.

누군가?

누구?

누가 필요하지?

몰라, 좋아해줘.

누구라도 상관없어.

아니, 아무나는 싫어.

“으…….”

당신이.

“읏……!”

당신이—.

“흐윽.”

…—당신이 날 구해줬으면 좋겠어요.

“하—.”

박사님.

승운이 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관자놀이로 흘러내려갔다. 승운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무력하고, 부족하고, 끔찍한 순간이 지속된다.

‘당신이 날 구해준다면.’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지승운은 아주 잘 알고 있다.

*

재준은 경원과 함께 가이드 실 밖에서 기다렸다. 방음을 워낙 잘 해둬서 그런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행위를 하는지, 진동이나 소리들은 들리지 않았다. 이경원은 초조한 얼굴로 자신의 시계를 내려다봤다. 녹색 화면 아래로 떠오른 시간을 살핀 경원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얼굴이 상기 된 가이드 두 명이 나왔다. 그리고 안쪽으로 가이드 한명이 더 들어갔다. 한 시간이 더 지났을 때 다시 두 명이 나왔고, 한명이 또 들어갔다.

한 시간이 또 지났을 때는 세 명이 나왔고 더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시간이 더 지났을 때, 가이드 두 명이 나왔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냄새와 열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수 없었다.

“이제 끝났나보네요.”

그렇게 말한 경원이 일어서서 재준을 내려다봤다.

“어쩌실 겁니까, 같이 들어가실래요?”

경원이 물었다. 그래도 되는 건가? 재준이 생각했다.

아무래도 가이딩 직후이니, 안정은 되겠지만 사생활을 지나치게 침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던 재준이 역시 거절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경원이 선수 쳐 “들어가시죠.” 말했다. 승운이 좋아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경원은 일부러 이런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승운은 알아야한다.

이 사람이 가이드가 아니라는 것을. 일반인과 어떻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되새겨야했다. 그에게 경멸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아니 애초에, 가이딩을 받았으니 현재준에 대한 감정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확인사살 용으로 써먹어야지. 그게 맞는 일이다. 지승운은 쓸모 있는 에스퍼였고, 현재준은…….

쓸모 있는 괴수학자이기는 하지만 에스퍼에겐 필요 없었다.

경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 위에 무릎을 세워 앉은 승운은 양 팔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얇은 시트가 체액으로 젖어 승운의 벗은 몸의 윤곽을 드러나게 했다. 경원이 혀를 차더니 방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확 열었다. 승운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졌다. 검푸르게 물들어가는 하늘에 붉은 장막 한 폭이 깔린 것 같은 하늘이었다. 창을 열자 새 소리가 들려왔다.

“지승운.”

경원이 승운을 불렀다. 승운은 그저 얼굴을 보이지 않게 숙이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경원이 그런 승운의 팔을 휙 들어올렸다. 시계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시계가 주홍색이었다. 지금쯤이면 노란색으로 바뀌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색은 주홍색이다. 곧 붉은 색으로 변할 것 같았다. 이거라면, 박요한이 멀쩡한 채로 와서 가이딩을 한다 해도 돌아오지 못한다. 지승운의 가이드를 빨리 찾아야했다.

“녹음했어.”

승운이 말했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있었다.

“뭐?”

“박요한이 한 말, 녹음했다고. 시계에 있으니까 가져가.”

이 새끼는 그 상황에서도……. 경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승운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경원에게 물었다.

“박사님은.”

그 질문에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어깨나, 팔꿈치 같은 관절이 연동된 부위에 열기라도 남은 듯 불긋했다. 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경원은 재준에게 시선을 한번 줬다가 승운을 향해 말했다.

“옆에 있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승운이 고개를 홱 들어올렸다. 정사 후 색정적인 모습을 생각한 것과 달리 통통하게 부은 눈과 빨개진 코가 보였다. 얼굴 전체가 울긋불긋했다.

귀부터 입술까지.

울었나?

재준이 생각하며 한발자국 다가오자 승운이 고개를 다시 팩 숙였다. 그리고는 시트에 가려진 자신의 몸을 보더니 발치에 있는 천까지 끌어와 몸을 가렸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얼굴까지 둘둘 감은 승운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입을 달싹였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오래 지났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긴 시간 밖에서 재준이 기다렸다는 건,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부 안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짐작만 하는 것과 밖에 있었다는 것의 의미는 다르다.

보이고 싶지 않다.

상상 속 재준이 그를 더럽게 본 것처럼 지금의 재준도 그럴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승운은 재준을 보기 두려웠다. 아니, 어쩌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할까봐 두려웠다. 그에게 자신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빌어먹을 이경원 이 개씨발새끼. 뭘 같이 기다리고 있던 거야. 어서 돌려보내지. 늘 바쁘고 할 일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걸 떠나서라도.

…—알리고 싶은 순간일리 없잖아.

승운이 고개를 푹 숙였다. 방금 전까지 휘몰아치던 감정이 사그라 들지 않는다.

좋아한다.

가이딩을 받으며 현재준을 떠올렸다.

감히 당신이 내 구원자이길 바라면서.

“지승운 에스퍼.”

“…….”

자신을 경멸스럽게 바라보던 환상 속 현재준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열락을 띄었다. 실제로는 그의 위에 올라탄 건 재준이 아니라 모르는 가이드였지만 승운은 재준을 상상했다. 눈을 감으면 나을까 싶었는데, 재준의 향이 나지 않았다.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촉각조차도.

재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괜찮습니까?”

승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눈물 어린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의 약한 점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이미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잔뜩 보여줬으니까.

이것까지 보여줄 순 없었다.

“지승운 씨.”

“…….”

“목이 쉬었던데 말하기 힘들어요? 제가 다가가도 됩니까?”

“……아뇨.”

승운이 답했다.

“오지 마세요.”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목소리에 울음을 머금었다는 것을.

“그냥……. 그냥 거기 있어요, 박사님.”

목이 트이자, 울음을 더 참을 수 없었다.

“가지도 마시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승운을 재준은 당황스러운 듯 바라보다가 경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경원도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울어? 지금? 왜? 왜? 아니, 왜?

가이딩 한 뒤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아니, 저 새끼가 부끄러움 같은걸 가질 리 없다. 열 명과 뒹굴고 나온걸 들켰어도 아무렇지 않게 그 위풍당당한 나체를 드러내며 씻고 나오던 놈에게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지승운은 다르다.

정사 후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지 시트로 잔뜩 가리고 있었고 물기어린 목소리로 재준을 거부했다. 거부? 아니, 옆에 있어달라는 말 같기도 했다.

떠나지도, 다가오지도 말라고.

“예.”

재준이 말했다.

“여기 있겠습니다.”

그러자 승운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운 흔적만 보였는데, 이번에는 확연하게 눈물이 뺨에 흐르는 것이 재준과 경원의 눈에 들어왔다.

“저는—.”

승운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잠긴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싫은 듯 했다.

허, 미쳤네.

경원이 생각했다. 정말 미쳤다. 지금 이 상황이 뭔지 경원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형질이상자가 된 것이 너무 오래전이라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감각이지만, 대충 지승운이 어떤 심정인지 왜 저러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지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가 저지른 행동, 그리고 가이딩 이후의 상황을.

정말 좋아하는 거였어.

“저는.”

돌연변이 괴수종에게 당해서 호르몬 교란이 일어난 게 아니라, 정말 저 사람을 좋아하는 거였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에스퍼가 가이드도 아닌 일반인을.

“지승운 씨 잘못이 아니니까요.”

지승운이 현재준을.

“어떤 말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심으로 좋아하다니.

*

얼마간 그렇게 대화 없이 있었을까. 조금 안정된 듯한 승운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흐느끼는 소리나 울음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승운의 두 눈은 여전히 젖어있다. 경원은 이걸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가 혀를 쯧 차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경원으로서도 복잡한 심정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시선을 준 재준이 다시 승운을 바라봤다. 얼굴은 들어 올렸지만 시트는 여전히 뒤집어쓰고 있어서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려던 재준이 순간 멈칫했다. 여기서 그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승운은 다가왔다가 떨어지는 재준의 손을 바라봤다. 닿고 싶지 조차 않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안쪽이 아렸다.

“박사님.”

승운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저.”

승운이 고개를 돌려 재준을 바라보자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재준이 멈칫했다. 아, 예쁘네. 이런 말이 굉장히 실례라는 걸 아는데 젖은 얼굴의 지승운은 예뻤다. 이래서 사람들이 누군가를 울리고 싶어 하는 건가, 스스로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하는 생각치고는 지나치게 저질스러운 것 같아 재준은 시선을 살짝 피했다.

하지만 승운은 계속 재준을 바라봤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재준은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재준이 다시 용기 내어 승운을 바라봤다. 눈가가 붉게 물든 승운의 새까만 눈이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저 박사님이 좋아요.”

승운이 말했다.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왜?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목 언저리에 들어찬 것처럼 울컥했다. 승운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저, 박사님이 정말 좋아요.”

눈에 고인 물이 찰랑였다. 곧 떨어질 것 같았지만 그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눈물을 구성한 물 분자의 표면력이 그의 눈 안에서 안정을 찾은 것처럼 그렇게 고여 있다. 물방울이 유리처럼 투명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반대로 지승운은 눈물에 안정감을 빼앗긴 사람처럼 목소리를 떨었다.

“가이딩 받고 싶지 않아요.”

재준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입을 다물었다.

맞아, 그럴 수도 있었어.

그는 항상 이 체계가 가이드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해왔다. 가이딩을, 성적인 접촉을 가이드만 싫어한다고 여겼다. 에스퍼들은 살아야 하니까 가이딩이 필요했고, 또 그러한 것을 즐긴다고 생각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입장에서 감정적 우위는 가이드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사회전반의 지위와 우위는 늘 에스퍼들이 차지했으니까. 그 관계에서 손해를 보는 것은 가이드뿐이니까. 그냥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다.

에스퍼 역시 가이딩을 원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박사님, 저는—.”

그걸 이제야 알아낸 것 같았다.

“저는.”

매끈한 승운의 얼굴이 눈물 한 방울이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눈물이 방울방울져 아래로 흘러내렸다.

“좋아하는 사람과 닿고 싶어요, 박사님.”

승운은 재준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감히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그저 재준 대신 자신의 몸에 두른 시트를 움켜쥐었을 뿐이다.

“박사님, 정말 좋아해요.”

비참했다. 이런 식으로 고백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예쁜 장소에서 준비한 꽃을 내미는 것 따위가 아니라, 이지를 상실해 가이드 한명을 죽일 뻔하고 폭주하듯이 힘을 방출시켰다가 다른 가이드들에게 붙잡혀 침대 위에서 엉망진창으로 흩어진 에너지를 가이딩 받은 이 끔찍한 장소에서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영영 놓칠 것 같다.

다시는 가까워지지 못할 것 같아서 승운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좋아하는데.”

비참하다.

“……제가 좋아하는 거 싫으신가요?”

아니.

비통에 더 가까웠다.

승운은 재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신이 얼굴을 피하면 재준이 아무래도 그렇다고 말을 할 것 같았다. 재준은 가이드가 아니었지만 가이드처럼 얼굴을 밝히는 편이라, 그나마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신의 얼굴을 들이 민다면 거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승운이 재차 말했다.

“제가 박사님을 좋아하면 안 됩니까?”

“그……건 아니지만.”

재준이 답했다. 재준의 걱정하는 얼굴에 오만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그가 자신의 이 꼴을 보고도 더럽거나 혐오스럽다는 시선이 아니라 걱정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희열감.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과 함께 하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

“지금 지승운 에스퍼한테 필요한 건 제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이런 정론을 말할 때의 처참함.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냥 받아주면 안되냐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승운은 그러지 못했다. 이 관계가 좋게 끝날 수 있다면, 아니 좋게 시작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승운은 끝을 안다.

‘아니지.’

승운이 웃었다.

끝을 안다고?

시작조차 하지 못할 관계다.

이 관계는 끝이 존재할 수 없다. 끝을 아는 것 보다 비참했다.

그래도 괜찮다.

빛을 볼 수 없다면 온기라도 취할 수 있기를.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는 제가 정해요. 좋아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계속 좋아할 겁니다.”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가 풀었다. 어떻게 저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지 의아할 정도로 승운의 눈에서 물이 구슬 져 떨어졌다.

“박사님이…… 박사님이 가이드였다면. 아니, 차라리.”

승운이 다시 말했다.

“내가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자기가 일반인이었다면. 그를 따라 괴수학을 공부하며 이곳에 남아 곁을 차지하며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늙어 죽을 때까지. 양쪽 모두가 나이 들어 젊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도, 머리가 하얗게 새고 주름진 몸을 하고 있더라도,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 못하고 아프다며 골골대면서 하루를 시작하더라도. 자신이 일반인이었다면 그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텐데.

지승운은 처음으로 에스퍼인 자신이 싫었다.

“박사님.”

하지만 자신은 에스퍼다.

“저 좋아해 주면 안 돼요?”

처음 빠져보는 절망이었다.

사실 지승운은 절망이 뭔지 안다고 생각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몸, 제어가 안 되어 날뛰는 힘, 아무리 가이딩을 받아도 답답함과 부족함이 지속됐다. 그것이 지승운이 아는 절망이었다. 하지만 그 절망은 어느 정도 해결책이 있었다. 한 사람으로 부족하다면 여러 사람이면 됐다. 간혹 통하지 않는다면 약을 먹으면 됐다.

존경할 만한 학자들은 지승운의 절망을 해결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정 안되면 그래. 죽으면 돼. 더 살고 싶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원래 에스퍼의 삶이라는 게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 절망은.

이 절망은.

이토록이나 달콤하고 끔찍하다니.

사랑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에 어찌나 골칫거리인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저지른 죄와 전쟁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서도 사랑이라는 걸 하는 인간들을 보면 멍청함을 이겨내지 못하나 했었는데. 아니다. 멍청한 건 지승운이었다.

절망을 깨닫는 것이 절망으로 빠져드는 시작이라고 했던가. 사랑 역시 절망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사랑을 깨닫자 빠져든다. 사랑스럽고 미운 감정이 혼재하면서도, 그럼에도 그것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당신을 취할 수 없다. 스스로가 이렇게 증오스럽고 무기력하고 자기파괴를 일으킬 줄.

몸속에 흐르는 검은 피, 검은 독 때문에.

에스퍼는 감히 일반인을 만날 수 없다.

사랑하니까,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옆에 있고 싶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몇 년도 안 될 거예요.”

고대의 노예처럼 바닥에 엎드려 발에 입이라도 맞추면 들어줄까.

“몇 년간만 저와 있어주면 안됩니까?”

의아한 말이었다. 재준이 “예?” 하고 작게 되물었지만 승운은 듣지 못했는지 자신의 말만 이어나갔다.

“저를 딱하게라도 생각해 주세요.”

딱하게 생각하다니. 재준은 승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박사님, 저 살고 싶었는데.”

승운이 말을 하다 멈췄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한 것인지 잠시 침묵하던 승운이 재차 입을 열었을 때 울음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너무 살고 싶어서,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절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기에 제 가이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 다행이라 여겼는데.”

그렇게 말한 승운이 재준에게 슬며시 다가오자 재준이 뒤로 물러섰다. 명백한 거부에 헛웃음이 나왔다.

울고 있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탄식 같은 소리에 재준은 거대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아니, 죄책감이랑은 조금 다르다. 이게 뭐지? 이게 어떤 감각이지?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재준이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감각이라는 것이다.

재준이 처음 겪는 생소한 기분에 혼란스러워 할 때 승운은 나락에 떠밀린 기분이었다. 현재준은 에스퍼와 얽히지 않는다. 자신은 에스퍼였다. 아무하고나 뒹구는 더러운 에스퍼. 그러니까 저런 것이다.

자신이 일반인이었다면 현재준은 분명 자신을 잡아줬을 것이다. 제 마음을 받아주지는 못하더라도 밀치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은 죽고 싶어요, 박사님.”

그 가이드는 됐으면서 난 왜 안돼요?

이렇게 물으면 죄책감이라도 느껴질까?

하지만 승운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죄책감이라니. 죄책감에 자신을 만나 달라 떼를 쓸 순 없었다. 그리고 안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도 않았다.

받아주지 않아도 돼.

“절 좋아해주지 않아도 되니까 미워하지는 마세요.”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어.

“그냥 곁에서 좋아할 수 있게만 해주세요.”

승운이 말했다.

“제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말에 현재준이 멈칫했다. 죽을 때까지 라니.

“제가 죽을 때까지 박사님 지켜드릴게요, 그러니까.”

승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재준은 금세 알아차렸다. 그는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다. 폭주 직전에 이곳에 왔다.

“몇 년만 옆에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지승운의 시계는 지금도 불안정하다. 왜지?

“몇 년까지도 안 걸릴지 몰라요. 그러니까 그 기간 동안만 옆에 있게 해주시면 안돼요?”

이상했다. 가이드들이 몇 명이나 들어갔는데 왜 상태가 저렇지?

“제발.”

제발요. 승운이 다시 애원했다. 잠깐이면 된다. 끔찍하고 절망이 가득했던 삶으로 끝나지 않고, 그가 좋아하는 사람을 지키다가 떠난다면 승운은 그것만으로 족했다.

“저 거부하지 마세요, 박사님.”

승운은 재준이 좋다. 너무 너무 좋아서 당장 죽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좋았다. 자신의 삶이나 능력을 그를 위해 쓰고 싶었다.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나 거짓이라고 느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능히 가능한 것이라 여겨졌다.

어차피 한계가 있는 몸이라면, 죽을 날을 앞두고 있다면 그를 위해 쓰고 싶다.

“지승운 에스퍼.”

“네.”

“죽지 마세요.”

“…….”

“죽지 마세요, 지승운 씨.”

“…….”

“죽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

“살아요.”

“싫어요.”

“지승운 씨한테 맞는 가이드를 만나면.”

왜 수치가 안 오르지? 자신이 뭔가 놓친 게 있나 재준이 생각했다.

“말하지 마세요.”

승운이 말했다. 울음기가 남아있었지만 꽤나 단호한 어투였다.

“전 박사님 옆에 있을래요. 박사님이 거부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건 다짐이나, 혹은 협박처럼 느껴졌다. 재준이 입을 다물었다.

승운이 헛웃음을 지었다.

가이드, 가이드, 가이드.

다들 가이드 이야기뿐이다.

지승운의 감정 따위는 상관없는 것처럼. 그래, 그랬다. 승운 역시도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다. 살려준다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어쩌면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좋아한다는 건 살고 싶다는 욕구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 가이드, 찾으면.”

승운은 가이딩 따위 받지 않을 것이다. 죽어도 괜찮았다. 그의 삶에 현재준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끼워 넣지 않을 것이다. 다른 가이드를 만나서 그에게 가이딩을 받거나 그와 자거나,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다. 누구든 승운과 매칭이 높은 가이드가 나타나 자신의 감정을 뒤흔들려든다면.

삶에 대한 열망으로 자신에게서 현재준을 빼앗는다면.

‘죽여 버릴 거야.’

지승운은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가이드를 죽이는 것이라도.

***

승운은 재준을 기어코 돌려보냈다. 걱정하는 얼굴로 움직이지 않는 재준을 향해 박사님이 있으면 옷을 갈아입을 수 없다는 말을 하자 재준은 그를 배려해 밖으로 나갔다.

재준이 나간 것을 확인한 승운은 몸에 들러붙어 굳어가는 체액을 시트로 닦아냈다. 그 사이 말랐는지 제대로 닦이지 않아 결국 시트를 걷어내고 침대에서 일어서야 했다. 몸은 개운하지 않다. 찝찝하고 막혀있는 듯 하며 부족했다.

기분 나빠.

정체된 에너지가 온 몸을 옥죄이는 것 같았다. 승운은 가이드 실에 있는 욕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찬물이 조금 나오다가 금세 따뜻해졌다. 하지만 머리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식어갔다.

몸을 씻은 뒤에도 장시간 물을 맞던 승운은 방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에 물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옷은커녕 수건조차 걸치지 않은 승운의 나체를 정면으로 본 경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저런 흉한 걸 그냥 내보이냐.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경원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승운을 보며 아까는 내숭을 떤 건가? 생각했다. 아니, 그건 분명 운 얼굴인데. 내숭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사라지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을 하는 지승운을 보니.

‘그래, 에스퍼가 다 그렇지.’

자신 역시 에스퍼니까 알고 있다. 근데 보통은 그 대상이 가이드인데, 얘는 왜 엉뚱한 일반인한테 집착을 하냐는 거다. 참 이상하지.

경원이 고개를 저었다. 한편으로는 짜증도 났다.

그가 승운에게 자리에 앉으라며 턱짓했다. 승운은 경원이 가리킨 의자를 바라보다가 발로 퍽 하고 찼다. 의자가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의자를 보며 경원이 황당한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너 뭐 하냐?”

“저, 씨발 더러운 의자.”

“…….”

저 또라이 새끼, 진짜.

경원이 됐다는 듯 먼저 침대에 앉아 그 옆자리를 두드렸다. 승운은 별다른 반항 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피 뽑자.”

도대체 박요한 가이드가 지승운한테 뭔 짓을 했는지 알아야했다.

지승운이 시계에 녹음한 대화들은 일단 확보가 되었지만, 그가 먹인 목캔디가 뭔지는 알 수 없다. 성분을 조사해 봐야했다. 이미 대부분은 밖으로 빠져나가기는 했겠지만, 혹시 모른다. 체내에 잔존하는 성분이 있을지.

일종의 약 같기는 한데, 도대체 그 미친 가이드는 뭔 생각이었대?

경원이 고개를 저었다. 등급 높은 것들은 다 또라이들이다. 에스퍼고 가이드고 가리지 않는다.

“…….”

그런 것치곤 박요한 가이드의 등급은.

그냥 그쪽은 성격이 이상한 거라고 경원이 생각했다.

박요한 가이드는 죽지 않았다. 깨어나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귀한 가이드이니 치유계 에스퍼들이 들러붙어 어떻게든 제 상태를 만들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승운이 침대에 앉아 팔을 내밀었다. 경원이 주사바늘을 꽂으려는 순간 승운이 말했다.

“앞으로 가이딩 안 받을 거야.”

“……아오, 시발. 엉뚱한데 꽂을 뻔했잖아.”

경원이 말했다. 그가 황당한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지승운이 현재준을 좋아한다. 그래, 그건 이제 납득이 됐다. 이해는 못하겠지만 일단은 알고 있다.

“야, 지승운.”

하지만 그는 일반인이다. 지승운을 안정시켜주지 못한다.

“너 그러다 죽어.”

“알아.”

만약 지승운의 등급이 조금 더 낮았더라면, 지승운 만한 에스퍼가 스무 명 쯤 있었더라면.

……그래도 국가는 포기하지 않겠지만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가정이 무색하게도 지승운은 S급 에스퍼였고 국가의 자산이다.

“괜찮아.”

“괜찮다니 뭐가!”

“나 어차피 죽을 거였잖아.”

“그…… 건.”

그랬다. 어차피 지승운은 못 버틸 것이었다. 다들 이곳에서 승운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마땅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게 지승운의 마지막 일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는 그의 가이드가 있으니까.

“가이드도 안 찾을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네가 여기 있을 필요도 없어.”

“그걸 지금 시발, 말이라고 하냐?”

“내 끝은 내가 정해.”

“야!”

“내가 죽을 곳은 내가 정한다고, 이경원.”

경원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내가 맡은 일은 끝까지 처리할 테니까.”

어차피 그런 용도 아니었냐는 듯 말하는 승운의 얼굴은 서늘하게 굳어있었다.

*

지승운이 가이드 하나를 죽일 뻔했다. 심지어 가이드 찾기를 포기했다고도 한다.

당연히 본청인 제1센터와 지승운 에스퍼가 원래 소속되어있던 제3센터에는 비상이 걸렸다. 사건이 벌어진 제7센터와 피해자인 제2센터도 마찬가지다. 제2센터는 A급 가이드를 죽일 뻔한 지승운의 징계를 요청했다. 애초에 가이드를 죽이려 드는 에스퍼라는 게 말이 안 되며 이것은 범죄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피해자인 박요한 가이드가 지승운 에스퍼를 강간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 참.”

에스퍼와 가이드들 사이의 직급에 의한 강제 가이딩에 대한 문제는 많았다. 말이 강제 가이딩이었지 강간협박이었다.

보통은 에스퍼가 위계를 이용해 가이드들을 협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능력자 인권 위원회에서는 이러한 사건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하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피해자들의 등급을 생각하면 크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징계 정도.

반면, 이번에는 S급과 A급 사이의 피해이니 큰 이슈가 될 터였다.

“언론에 이게 빠져나가면 안 됩니다.”

게다가 피해자가 가이드가 아닌 에스퍼. 가이드가 피해자인 것은 흔한 일이라지만 에스퍼가 피해자인 것은 드물어 아마 언론에선 잡아 뜯기 좋을 만한 사건이었다.

가이드 인권위에서는 이 사건이 달갑지 않다.

“그걸…… 아니, 에스퍼가 당한답니까?”

“그 표현은 차별적이군요. 여기 보시면 지승운 에스퍼에게 약물을 먹이고 강제 가이딩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것 참…….”

아니, 어떻게 지승운을…….

그냥 가이딩도 아니고 강간해서 가이딩을 해주려고 하냐.

이능청에 지승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니, 전국적으로 지승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디어 매체를 극단적으로 혐오하여 어떤 정보도 접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물론 이능청은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 보다 지승운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10여년 만에 나온 S급 에스퍼는 기존의 두 S급 에스퍼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다른 가이드들과의 매칭이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이드를 열심히 찾았지만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가이딩을 위해 등급과 상관없이 가능한 사람들 모두에게 가이딩을 받았다.

즉, 오는 가이드 안 막고 가는 가이드도 안 잡고 어떤 가이드든 상관없이 보듬어 웃어주는 에스퍼다. 그런 에스퍼가 가이딩을 거부했다는 건 뭔가 사유가 있다는 것 같은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가이드가 강간미수를 저질렀다니.

“아니, 그래도 에스퍼인데 그 정도 약물이…….”

“가축용 발정제랍니다.”

“…….”

약물을 써도 하필 그게 뭐야.

“아니, 그래도 박요한 가이드는 제2센터의 재산입니다. 그걸 훼손시켜 놓고…….”

“하지만 박요한 급 가이드는 어디에나 있죠. 게다가 질보다는 양이 더 많은 가이드였잖아요? 등급 자체만으로 비교하면 지승운 에스퍼가 훨씬 중요합니다.”

“아니, 그도 즐겼을 것 아닙니까!”

“제2센터장님! 그 발언은 부적절합니다!”

“아, 거 참. 저희 쪽 피해도 심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젊은 A급 가이드가 어디 쉽게 지방으로 온답니까? 안 그래도 위로 올라가려는 거 겨우 설득해서 잡아놨더니.”

“이 경우는 강제 가이딩을 일으키려던 박요한 가이드도 징계를 받아야하지만 그렇다고 가이드를 죽이려고 한 지승운 에스퍼도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죄질을 따져서 얼마나 징계를 할지…….”

“하, 징계를 하는 건 둘째 치고 말이죠. 센터장님들. 지금 지승운이 가이딩을 거부하고 있잖아요. 그게 제일 큰 문제란 말이에요. 저거 저러다가 죽어요!”

“지가 가이드들이랑 매칭이 안 맞는 걸 뭐 어째요? 아무리 S급이라고 하더라도…….”

“S급 에스퍼 하나가 창출하는 경제효과와 외교 이익이 얼마인지는 아세요? 지승운을 죽게 만들면 안 되죠!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한다고요. 근데 가이딩 거부라니.”

“그러니까 박요한이랑 잘 했으면 되는 걸, 왜!”

“그 가이드가 강간을 하려고 했다잖아!”

“거, 강간이 뭐요! 강간이! 강제 가이딩이지…!”

“강제로 성교합 가이딩을 하려고 했으면 그게 강간이지, 다른 게 강간입니까?”

엉망진창이었다. 검진센터 소장으로 이 회의에 참여한 이동철은 박요한이 지승운에게 사용한 싸구려 가축…… 용 발정제의 성분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이 좋아 싸구려지. 이건……. 아니 이걸 어떻게 구했대? 뭐든 범죄다. 범죄를 넘어섰다.

“어쨌든 징계는 불가피합니다!”

“우리 애는 지금 병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해!”

“그쪽이 먼저 잘못한 거죠. 이건 정당방위예요!”

“거 정당방위가 너무 심하잖아! 어? 지승운이 죽었어? 죽었냐고!”

“박요한 가이드도 아직 살아있습니다!”

아니, 거부했으면…… 그냥 포기를 하지, 이게 뭔 짓이야. 쟤는 또 왜 애를 죽이려들어. 그냥 한대 좀 때려주고 말지. 정말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더 큰 문제도 있었다.

박요한이 했던 말들.

그것은 이 소집회의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분명 위에 올라갈 것이다.

***

지승운 에스퍼, 감봉 3개월.

“나쁘지 않네요.”

김태환이 말했다. 지승호와 이경민은 서울에 있는 괴수학 박사들의 경호를 위해 올라갔다. 그들과는 컨퍼런스 당일 합류할 예정이었다.

“대장.”

승운이 태환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태환이 커피를 받았다. 그가 찝찝한 얼굴로 물기가 맺힌 플라스틱 컵 표면을 닦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들 밖으로 나와 잔디밭에 드러누워 있었다. 어떤 이들은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기도 하고, 돗자리를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태환은 먼저 걸어 나가는 승운을 뒤따라 걸었다.

제7센터는 평화로웠다. 영종도 센터는 매일매일이 전쟁 같았는데 이곳은 다르다. 이곳에서 편하게 있는 지승운을 볼 때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불과 얼마 전에 깨졌다. 사흘 전 지승운이 가이드 하나를 죽일 뻔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승운이 뭐가? 라는 얼굴로 태환을 봤다.

“이렇게 가면 진짜 죽어요.”

“알아.”

“알긴 뭘 알아요. 대장은 모릅니다.”

태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가이딩 받아요.”

“괜찮다니까. 아직.”

“아직 괜찮기는 무슨, 그거 지금 주홍색이에요!”

“널 만날 때도 이 색이었지, 아마?”

“그러니까!”

녹색이었던 것이 한순간에 주홍색으로 바뀌었다. 그 약 기운을 날려버리기 위해서.

싸구려 가축용 발정제…… 라고 이동철 박사는 순화해서 말했지만, 이경원이 하는 말로는 괴수용 발정제였다고 한다. 애초에 가축이나 일반인에게 통하는 것이 에스퍼에게 제대로 통할 리 없었다.

연구소 말고도 등급이 낮은 괴수들을 사육하는 사설업체들이 있다. 사설업체들은 대체로 제약회사와 연관되어 있는데, 거기서 괴수들을 번식시키는 데 쓰이는 거라고 한다. 그것을 해독하느라 쓴 힘은 지승운을 죽음의 문턱에 더 가깝게 다가가도록 했다.

“곧 다시 그렇게 된다는 거 아닙니까.”

미친 박요한 새끼. 그냥 죽어버리라지.

“전 대장 죽는 거 못 봐요. 가이딩 받으십시오.”

“김태환.”

승운이 태환을 불렀다. 단호한 얼굴은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내 일이야. 네가 신경 쓸게 아니라고.”

“전 걱정하는 거예요!”

태환이 소리쳤다. 그러자 주위에서 다들 그들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지승운 강간사건의 이야기로 떠들썩한데 여기서 태환까지 그에게 소리치자 이목집중을 넘어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씨발!”

그래, 들렸다. 빌어먹을. 귀가 좋은 에스퍼들에게 그들이 어떤 말들을 하는지 똑똑히 들렸다.

“몰라, 마음대로 하세요.”

태환이 말을 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던지려다가 내려놨다가 다시 던질 듯하더니 내려서 빨대로 남은 커피를 한 번에 쭈욱 빨고는 음료용 쓰레기통에 얼음을 분리해 버린 뒤 플라스틱 통에 분리수거까지 하고 훌쩍 떠났다. 떠나면서도 씨발 씨발 거리는 소리가 승운에게 들렸다.

“허.”

빨대는 일반쓰레기야…….

그 말은 태환에게는 닿지 않았다.

사실 승운은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어차피 그가 뭔 행동을 해도 좋게 볼 사람은 좋게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한다. 박요한에 대한 안 좋은 소리와 비웃음만큼이나 승운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어 댔다.

뭐야, 갑자기 웬 가이딩 거부. 강제 가이딩은 무슨.

그래서 그런 소리들에도 승운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현재준은 그렇지 못했다. 유예지도 마찬가지였다. 지승운에게 불거지는 비난을 예지는 참지 못했다.

‘아니, 에스퍼냐 가이드냐를 떠나서 피해자는 지승운인데 왜 지승운이 욕 먹어요? 에스퍼라서?’

미친 이능력자 놈들. 누가 피해자인지도 모르네. 투덜거리는 예지를 보며 사람들은 뭘 모르고 편을 든다고 했다. 태환은 그런 예지에게 역시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유 연구원밖에 없다며 눈물콧물을 짜내며 울었다.

‘으, 추잡해.’

하지만 예지는 우는 태환을 방치하는 대신 맥주 한 캔을 손에 쥐어줬다. 물론 퇴근 후의 이야기였다. 태환은 맥주 몇 캔을 연달아 들이킨 다음에 재준에게 매달리듯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외쳤다. 아마 술버릇인지도 모르겠다. 재준은 태환의 술주정을 받아주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요한이 쓴 약이 괴수용 발정제라는 사실이 퍼졌다. 여론은 한순간에 바뀌었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계속 지승운을 탓하기도 했다. 그깟 가이딩이 뭐라고. 어차피 매칭도 좋다는데 받으면 될 걸 왜 굳이 일을 크게 만드냐는 말이다.

유예지는 이능력자들이 지조뿐만 아니라 도덕의식까지 없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어 이능력자 혐오에 박차를 가했다. 며칠 내내 그 사건으로 연구소가 어수선했다. 직접 말을 하진 않지만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재준과 예지가 승운을 아무렇지 않게 대했기에 다들 뭐라 표현하지는 못했다. 태환은 처음으로 이능력자들이 아닌 일반인들 틈에 있는 것이 편하게 느껴졌다.

연구소 앞 자판기에서 물을 뽑은 재준은 마침 차에서 내리는 승운을 바라봤다. 감봉이어도 출근은 해야 했다. 차라리 자택에서 근신이라도 하라고 했으면 지승운의 귀에 안 좋은 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연구소 건물로 걸어오는 승운을 보며 현재준이 “지승운 에스퍼.” 하고 불렀다.

“예, 박사님.”

“자리를 옮길까요?”

현재준이 할 말이 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7센터는 넓고 단 둘이 있을 장소도 많았지만 이미 그곳은 낮부터 내내 다른 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승운을 데리고 DMZ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서, 재준은 나름의 비밀 장소에 가자는 말을 했다.

센터에서 차로 10여 분간 떨어진 산 중턱에는 비행종 괴수를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터가 있었다.

제7센터 소속의 땅이었지만 연구원들 말고는 잘 오지 않았을 뿐더러, 비행종 괴수는 포획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마저도 자주 사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종종 견학 때나 쓰일까.

이곳에 깔려 있는 데크와 돌을 보면 공터라기 보단 공원에 더 가까웠다.

두 사람 모두 차에서 내렸다. 고도가 높은 곳에 오니 바람이 더 많이 불었다. 이곳에는 지승운과 현재준밖에 없었다. 비행종 괴수인지, 아니면 근방에 사는 새인지 모를 것이 허공에 무리지어 날았다.

“소식 들었습니다. 감봉 3개월이라면서요?”

먼저 입을 연 것은 재준이었다.

“밥 사줄까요?”

그 말에 승운이 웃어보였다.

“저 돈 많아요.”

현재준 박사가 얼마나 버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지승운은 위험수당으로 벌어들인 돈이 아주 많았다. 당장 월급만 해도 몇 천만 원이다. 공무원 치고는 몹시 잘 버는 것이다.

“그래요?”

“사주신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물론 그가 사주는 밥을 먹어보고 싶긴 했다. 하지만 먹여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오히려 제가 쓰고 싶은데요. 뭔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세요. 지금부터 부지런히 써도 다 못 쓰고 죽을 테니.”

그 말에 현재준이 표정을 굳혔다. 지승운이 죽는다는 말을 할 때마다 기분이 나빴다.

“지승운 씨는.”

“예, 살 겁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살겠다, 그건 제가 정하는 거니까요.”

승운이 대답했다. 승운은 현재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사실 피하고 싶었다. 바라만 봐도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서 먼 곳을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두 눈에 각인하고 싶기도 했다.

“저한테 가이딩 받으라는 말 하지 마세요, 박사님.”

“지승운 에스퍼.”

승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재준이 다시 한 번 불렀다.

“지승운 씨.”

“예.”

“제가 좋습니까?”

“예.”

“얼마나요?”

안 울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나 좋습니까?”

“많이요. 아주 많이.”

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지승운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저렇게 솔직하게 자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박사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요.”

재준이 말했다.

“그러면 방법을 찾아보죠.”

무슨 방법? 승운이 묻기도 전에 재준이 입을 열었다.

“화요일부터 컨퍼런스입니다만, 저희는 토요일에 올라갈 예정입니다. 호텔은 센터에서 준비해뒀다더군요.”

내일이었다.

“유 연구원과 저, 그리고 경호 에스퍼이신 지승운 씨와 김태환 에스퍼. 총 네 명이 간다고 보고 올렸습니다. 일정에 차질이 있으십니까?”

“아뇨, 함께 가야죠.”

승운이 대답했다. 한편으로는 재준이 말을 돌린 ‘방법’이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또 다른 가이드를 만나라, 결국은 가이딩을 받아야 된다 등의 말이 나올까 두려워 승운은 용기내지 못했다. 단지 업무를 가장하여 말을 건넸을 뿐이다.

“토요일에 집 앞으로 가겠습니다. 몇 시쯤이 좋으시죠?”

“오전 9시쯤이 좋겠군요.”

재준이 답했다. 사실은 일요일이나 월요일에 가도 되지만 재준은 먼저 가서 할 일이 있었다. 시리예를 만나는 것. 그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가이드는 그녀뿐이었다.

그녀에게 물어봐야했다.

가이딩이 정확하게 뭔지.

어떻게 하는 건지.

“그날 뵙죠.”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야했다.

***

가이드 호르몬과 에스퍼 호르몬은 한 종족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종류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가이드 호르몬은 세 가지 종류가 있으며, 에스퍼 호르몬도 마찬가지로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그것들은 각각의 분비샘에서 나오는 다른 종류의 호르몬들이지만 모두 에스퍼와 가이드의 대사에 관여하기 때문에 공통으로 분류한다.

에스퍼에게도 대사산물로서 가이드 호르몬이 나온다. 가이드에게도 에스퍼 호르몬이 생성되기는 하지만 중화효소가 있어 에스퍼 호르몬을 가이드 호르몬으로 변환이 가능하다.

가이드의 호르몬 중 하나인 G3호르몬의 수치는 가이딩의 질을 나타내는 척도로서 형질 분류 등급에 영향을 준다.

가이드의 G3호르몬과 에스퍼의 E3호르몬은 성 호르몬과 마찬가지로 콜레스테롤로부터 유래한다. 콜레스테롤의 잔기가 잘려나가면 중간체인 안드로스텐다온이 테스토스테론으로 전환되고, 여성의 경우 대체경로를 통해 에스트론을 거쳐 에스트라디올로 전환된다.

G3, E3호르몬은 잔기—유기 화합물에서 원자단이 탈리한 후 남은 원자였다. 다시 말해 비 반응성 원자다. 일반 사람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에스퍼와 가이드들에게 이 호르몬의 양은 가이드와 에스퍼의 등급을 나타낸다. 콜레스테롤이 성호르몬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탈락한 잔기로부터 시작된 수용성 호르몬 G3, E3은 G1, E1인 지용성호르몬, 즉 우리가 흔히 가이드 호르몬과 에스퍼 호르몬이라 지칭하는 호르몬을 체내에서 생성한다.

즉 G3, E3호르몬의 배열은 G1, E1의 1차 구조이다.

그리고 성호르몬의 잔기에서 시작된 만큼, 가이드와 에스퍼들은 성욕이 강하며, 성관계를 자주 가질수록 호르몬 품질이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 외 도파민, 옥시토신, 엔트로핀, DHEA등이 분비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 종과 동일하지만, 체액의 교류를 통해 일어나는 호르몬 안정과 균형 유지의 작용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이능청에서는 이능력자들이 주기적으로 성행위를 가질 것을 권고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기도 한다.

영국 대학 연구센터에 의하면, G3호르몬은 E3호르몬은 서로를 자극한다고 한다. 각 호르몬의 구조식과 흡사한 물질을 cGMP구조와 흡사한— 다시 말해 비아그라에 섞어 만든 정제를 섭취하면 발정 징후를 일으킨다.

이것은 보통의 인간종인 호모 사피엔스에게 영향이 미미하다. 있다고 하더라도 비아그라의 효과뿐이지 발정 징후를 일으키지 않는다. 오로지 호모 트란스포르미스, 즉 에스퍼와 가이드 그리고 괴수에게만 영향을 끼친다.

연구실로 돌아온 재준은 경원이 준 수치표를 바라봤다.

G3 가이드 호르몬의 정상범위가 적혀있었다.

혈액 검체의 정량검사 결과 G3 호르몬 수치 상한값은 500pg/ml이다. 상한치를 정해놓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500을 넘어서는 이들은 없다.

일반인의 경우는 G3호르몬이 아예 없으므로, 아주 조금의 호르몬 반응이 보일시 그는 가이드로 규정한다. F급 가이드의 G3 정상 범위는 0.1 pg/ml 에서 15.9 pg/ml이다.

E급 16.0 - 29.9 pg/ml

D급 30.0 - 66.9 pg/ml

C급 67.0 - 91.9 pg/ml

B급 92.0 - 120.9 pg/ml

A급 121.0 - 332.9 pg/ml

S급 333.0 - 500 pg/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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