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승운이 두 눈을 감듯이 웃었다.
저게 뭐야?
지승호, 이경민, 김태환 모두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지승운과 현재준 박사를 바라봤다. 지승운의 뒤에 마치 여우 꼬리 같은 것이 보이는 듯 했다. 헛것이다. 헛것인데, 그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이들 모두 박사님과 박사님 친구들을 경호할 이들입니다.”
그들은 지승운이 저런 얼굴과 목소리를 할 때를 알고 있다. 바로 가이드를 꼬실 때 였다.
지승운은 본부에서 연구소로 이동하며 “예의 똑바로 차려.” 라고 말했다.
아, 예. 그래얍죠. 감히 VIP에게 싸가지 없이 대할 수는 없죠. 일할 때 철두철미한 지승운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설마 그쪽에 대고 예의 없이 반말 찍찍 하며 농담 따먹기라도 할까. 하지만 지승운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늘 있던 것이다. 그들이 경호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라는 것은 일 열심히 해 같은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DMZ 연구소에 도착 했을 때 에스퍼들은 생각보다 큰 연구소 규모에 놀랐다. 승운이 국내에서 연구소가 제일 잘 되어있다고 자랑하듯 말을 하며 자신의 출입증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뒤를 에스퍼들이 따라 나섰다. 들어가자마자 계단을 오른 승운은 유리벽을 통해 현재준 박사가 늘 있던 곳을 살폈다. 하지만 오늘은 그곳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가이드 연구원들이 있는 곳에서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승운이 출입증으로 그 문을 열자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향했다.
“현 박사님.”
승운이 말했다. 순간 에스퍼들이 눈을 크게 뜨며 승운을 바라봤다.
뭐야, 지금. 들었어? 저 목소리 뭔데? 뭐라 묻지도 못한 채 에스퍼들은 승운을 따라 그들 앞에 섰다. 사진으로 봤던 유예지 연구원과 누군지 모르는 가이드들. 그리고 현재준 박사.
“제3센터에서 에스퍼들이 지원 나왔습니다. 이들 모두 박사님과 박사님 친구들을 경호할 이들입니다.”
부드럽게 말하며 승운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다른 가이드들이 침을 흘리며 보고 있다는 것을 에스퍼들은 알 수 있었지만 현재준 박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승운 뒤의 에스퍼를 한번 바라보더니 “아, 예.” 하고 말았다.
“한명씩 소개를 드릴까 하는데 바쁘신가요?”
“어…… 3층 휴게실에 계시겠습니까? 제가 5분 뒤에 가겠습니다.”
현재준의 말에 승운이 알겠다고 웃으며 에스퍼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그늘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 유예지는 휘파람을 불며 “와우.” 감탄했다.
“하나같이 미남이네요. 급수가 꽤 높은가보죠?”
“그러게.”
“미남들 틈에 있는 지승운 에스퍼를 보니까.”
예지의 말에 현재준도 시선을 돌려 움직이는 에스퍼들을 바라봤다. 다들 키도 훤칠하니 미남이었다. 과연. 저런 외모를 가져야 가이드들을 꼬셔낼 수 있는 거군. 이렇게 보니 납득이 된다. 저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 같다.
“진짜 더럽게 잘생겼네요. 일반 사람들이랑 있을 때보다 더 눈에 띄어요.”
꽃 중 꽃인가. 남자에게 할 만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예지는 그 말이 딱 적합하다고 느꼈다. 재준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다 똑같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인데 왜 유독 저 사람만 화려하게 빛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유전자 배합에서 어떤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지나친 아름다움도 때로는 독이라지 않는가.
***
에스퍼들은 승운을 따라 3층에 있는 휴게실로 이동하면서도 승운의 눈치를 살살 봤다. 분명 지승운은 에스퍼로서 현재준 박사를 꼬시고 있었다. 근데 현 박사가 가이드인가? 아니, 그 정보는 없었다. 현 박사가 가이드일리 없는데 왜 지승운이 저기서 저렇게 야살스럽게 웃으며 살랑거리고 있단 말인가?
“형.”
지승호는 간만에 그 호칭을 썼다. 승운이 승호를 바라봤다.
“혹시…… 뭐 약점 잡힌 거 있습니까?”
“약점?”
승운은 모른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태환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장. 혹시 VIP곁에 있으면 뭔가 떨어지는 거라도…… 아니, 애초에 VIP라고 하더라도 S급 에스퍼가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무슨 말이야?”
“형이 지금 현 박사한테 꼬리 내리는 거요.”
태환의 말에 이경민과 지승호는 그건 꼬리 내리는 게 아니라 꼬리 치는 거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태환은 그것이 꼬리치는 걸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태환의 시점에서 못생긴데다 가이드도 아닌 현재준에게 지승운이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현 박사가 가이드 소개시켜줬어요?”
저쯤 되면 쟤도 둔한 편이라니까. 이경민이 승호에게 말했다. 승호는 말을 섞지는 않았다.
“왜 박사한테 고개를 숙여요!”
“고개 안 숙였는데.”
“그 말이 아니라!”
“내가 박사한테 뭘 했다고 그러지?”
“…….”
모르는군. 모르는 것이다. 지승운이 현재준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어떤 식으로 말하고 어떻게 웃는지 지승운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승호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이 지승운과 꽤 닮아있었다. 이경민은 이걸 어쩌나 싶은 얼굴로 바라봤다. 아무래도 먼저 제7센터에 와서 상황을 좀 더 많이 아는 그의 형-이경원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준이 휴게실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딱 5분 뒤였다. 역시 우리 박사님은 시간도 잘 지킨다니까. 승운이 흐뭇하게 웃을 때, 태환은 경계 태세로 현재준을 바라봤다. 승호와 경민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는 얼굴로 재준을 맞이했다.
“유예지 연구원은 같이 안 왔나요?”
“아, 예. 처리해야 할 것이 남아있어서.”
“그렇군요. 어차피 에스퍼들은 박사님들 위주로 경호를 하니까요. 소개드리겠습니다. 이쪽은 A급 에스퍼인 지승호입니다. 옆에는 B급 에스퍼인 이경민, 그리고 김태환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박사님들 경호 잘 부탁드립니다.”
재준이 예의바르게 인사했지만 다들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승운이 그런 그들을 한번 바라보자 일제히 굳은 얼굴로 “신중을 다하겠습니다!” 외치는 모습이 마치 군기가 바짝 든 군인들 같았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이걸로 끝?
진짜 이렇게 인사를 하고 끝내는 건가? 뭔가 별 다른 말없이?
에스퍼들이 의문을 가졌지만 현재준은 정말로 휴게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의 그런 뒷모습을 승운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미쳤나봐.
저 사람이 왜 저래? 우리 대장 맞나? 다른 사람 아냐? 에너지 상태가 좋아지니까 원래의 광기가 나오는 건가? 그럼 그렇지. 저렇게 젠틀한 S급 에스퍼가 어디 있어? 지승호와 김태환이 지승운의 정신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에 납득을 할 때 이경민은 핸드폰을 열어 이경원에게 연락했다.
[형, 승운 형 미쳤어?]
보내자마자 확인을 한 것인지 숫자가 사라졌다. 그러더니 바로 답장이 왔다.
[지랄새끼 진작에 돌았는데 네 눈에도 보임?]
세상에, 진짜 미쳤나봐. 경민이 태환과 승호의 앞에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줬다. 메신저 너머로 이경원이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걔 지금 일반인 좋다고 난리임. 가이딩은커녕 혼자 자위하고 있음.]
“…….”
진짜 미친 거 아니냐고 수군수군 말이 나왔다.
***
지승운이 연구소에 처박혀 어떤 위협에도 휩싸이지 않는 현재준을 경호하겠다고 사라졌을 때 이경민은 자신의 동료들을 데리고 제7센터 검진센터의 방 하나를 차지해서 놀고먹는 중인 이경원을 찾아갔다.
“이건 말도 안 돼!”
김태환이 소리쳤다. 이경원은 그의 팔에서 주사바늘을 빼낸 뒤 알코올 솜을 댔다. 태환은 솜을 잡으며 이어 말했다.
“아니, 뭐 일반인 좋죠! 좋은데! 그것도 예쁜 일반인이라면 몰라 왜 고르고 골라 못생긴 일반인이데요? 게다가 남자인데!”
“너 헤테로였어?”
“난 웬만하면 여자가 좋아!”
태환의 말에 다들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런 것 치고는 남녀 가리지 않고 맘껏 가이딩을 받고 다니지 않았는가.
경원은 ‘그래, 그래.’ 말하며 세 사람의 피를 분석기에 넣었다. 그리곤 승호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패드에 연결해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왜 하필…… 아니, 왜 진짜 일반인인데? 현 박사한테 하는 거 봤어요?”
승호의 말에 경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아직 현 박사 못 봤어. 한번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어찌나 애지중지 하던지. 어때?”
경원이 경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경민이 현재준을 떠올렸다. 어떠냐고 묻는다면…….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승운 형한테 관심 없어 보이던데.”
“걔가 또 지한테 관심 없는 거에 환장하긴 하지.”
“승운 형한테 관심 없는 사람이 있었나?”
“아니. 없었어. 그러니까 환장하는 거 아냐? 걔 이상형이 그거잖아. 자기를 좋아해주지 않는 사람. 이경민, 시계.”
경원이 말에 경민이 자신의 시계를 그의 패드에 갖다 대며 말했다.
“그건 이상형이라기보다는…… 귀찮은 거나 피하자, 이거겠지. 자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가이드 고르고 다닌 것도 그거고.”
지승운은 의외로 지고지순하다. 말이 이상하긴 했지만 나름 가이드에 대한 로망도 가지고 있었다. 일찍 제 가이드를 찾았다면 진작에 각인하고 한 사람만 봤을 타입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냉철했다. 미래의 가이드를 위해 정신적 지조는 지키겠다는 뜻으로 내비쳐졌다.
“현재준 박사라. 그래도 잘 고르긴 했네. 엘리트 중 엘리트, 가장 젊은 VIP.”
“못생겼어요! 못생겼다고!”
“사람은 외모가 다가 아니야.”
“적어도 좀만 더 예쁜 걸 골랐어야지. 이왕 고를 거라면 예쁜 쪽이 먹기 좋잖아!”
“너는 가끔 그렇게 가이드 같은 소리를 하더라. 김태환, 시계.”
경원의 말에 태환이 투덜거리며 손목을 패드에 갖다 댔다. 페어링 되는 것을 지켜보며 경원이 이어 말했다.
“여기 왔으니까 그동안 마음껏 놀다 가. 미각인 에스퍼랑 가이드들한테는 아주 천국이더라.”
“형은 페어 있잖아.”
“그러니까 미각인한테 말이야. 난 페어가 있으니까 참아야지. 태환이는 작작 놀고.”
“내가 뭘요.”
태환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사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태환은 그 생각만 머리에 채워놓고 있었다. 이능력자를 위한 천국! 어디에서 누구와 가이드를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빼지 않고 튕기지 않고 다른 사람과 마음껏 가이딩 해도 질투조차 하지 않는 쿨한 가이드들.
그는 승운과 함께 이 환락의 거리를 걸으며 마음껏 가이드를 품평하고 골라내며 즐길 예정이었는데, 그의 앞에 있는 것은 태환이 알던 S급 에스퍼 지승운이 아니라 웬 일반인에 미친 팔푼이 같은 지승운이었다.
“이럴 수는 없어……. 완벽한 대장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 지옥훈련도 마다하지 않을 예정이었는데.”
“지금 걔 몸 상태를 알고 그런 말을 하냐? 지옥 훈련이라니, 너 죽는다.”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지금 대장을 보라고요. 제가 손만 휘둘러도 헤헤 하고 쓰러질 것 같은데.”
태환의 말에 경원과 승호가 서로를 바라봤다. 얘가 뭘 몰라도 한참을 몰랐다.
지승운은 대한민국 최고의 에스퍼 중 하나다. 그것도 불완전한 가이딩으로도 말이다. 지승운이 해결한 수많은 일들 중 대부분은 승운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승운은 꽤 괜찮은 몸 상태였다. 태환이 손만 휘둘러도 승운이 쓰러질 것 같다니. 지금 상황으로는 승운이 눈 한번 깜빡여도 태환이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원과 승호는 그걸 말해주지는 않았다.
*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 아직 문서화하지 못한 작업이 많은데 벌써 수요일 아침이 되었다. 현재준이 밖으로 나가자 승운이 차에 대기하고 있었다. 예지는 이미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제가 늘 앉았던 조수석의 자리에 에스퍼가 앉아있었다.
B급 에스퍼 김태환이라고 했던가. 현재준은 그가 자신을 내켜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재준은 말없이 뒷좌석에 탔다. 유예지가 “좋은 아침이에요.” 라고 인사했다. 현재준이 웃어보였다. 뭔가 불편했다. 이대로라면 그냥 유예지와 자신의 차를 타고 가는 게 나을 듯 했다.
지승운은 어제 밤 괴수학 박사들이 제7센터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그들 모두 센터에서 준비한 숙소에 머물렀고, 출근 시간에 맞춰 DMZ연구소로 왔다. 연구소로 이동하며 이런 저런 대화들을 나눴지만 대부분은 쓸모없는 내용들이었다. 재준은 대충 대답하며 서류를 봤다. 승운도 더 이상 말을 걸지는 않았다. 옆에 있는 유예지 역시 바빠 보였다.
연구소에 도착한 승운이 먼저 내려 차 문을 열어줬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에 현재준의 표정도 풀렸다. 재준이 차에서 내렸다. 유예지가 뒤따랐다.
“허니!”
시리예가 현재준을 향해 양 팔을 뻗으며 다가왔다. 재준도 자연스럽게 시리예를 안았다. 그녀의 허리에 감긴 재준의 손에 지승운은 멈칫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며 시리예가 양 뺨을 현재준이 볼에 갖다 대며 쪽 쪽 쪽 소리 냈다. 승운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에스퍼들 눈에는 보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 했다.
“허니.”
“에르난데스.”
왜 현재준 박사를 허니라고 부르는 거지? 그 역시 양 뺨을 현재준 박사와 맞댔다.
“달링!”
얼씨구. 허니에 이어서 달링까지. 승운의 표정이 굳어갈수록 에스퍼들은 당황했다. 일반인들은 둔해서 잘 못 느끼겠지만 지금 승운에게서 빠져나오는 기운에 온 몸이 아파왔다. 이 압박감은 뭐야.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기운을 갈무리해서 내뿜지 않았던 승운은 그걸 갈무리할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제어가 되지 않는 건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서로 얼싸안고 볼을 부대끼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박사뿐만 아니라 보리스와 같이 온 싱가폴 여자에게도 볼을 맞댔다. 시리예가 지승운에게 한번 시선을 줬다. 지승운은 표정을 풀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화가 났다.
씨발, 지금 저거 나 보라고 하는 짓인가?
승운이 생각했다. 그 시선을 느낀 재준이 승운을 바라보자 승운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하지만 현재준의 시선이 떨어지자 다시 표정을 굳혔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지 영어를 사용했기에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저 ‘허니’라는 호칭 때문이었다. 김태환은 저들 틈에 끼어있지 않고 자신의 옆쪽에 서 있는 유예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유 연구원.”
“예, 김태환 에스퍼님.”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제가 답할 수 있는 건요.”
“왜 다들 현재준 박사님을 허니라고 부르는 거예요?”
아, 그거. 유예지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박사님 성이 발음하기 힘들어서요.”
예지가 말했다. 승운을 비롯한 다른 에스퍼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요?”
“허니랑 현이랑 비슷하잖아요, 발음. 에르난데스…… 저 뽀글머리 남미 아저씨가 그때부터 그냥 허니라고 불러서 다들 허니라고 불러요. 교수님들도 현 박사님을 허니라고 부르고요.”
“…….”
“보리스는 모두가 허니라고 부르니까 폴리아모리 같다고 자기는 다른 호칭을 쓰겠다고 해서 달링이 됐어요.”
달링은 폴리아모리가 아니고?
“다들 굉장히 친해 보이는군요.”
“괴수학은 어느 대학에 입학하든 첫 학기만 입학학교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학기마다 여러 국가에서 지내거든요. 저 네 분은 학사부터 박사까지 다 함께 했죠. 어, 그러니까 현 박사님이 저들의 까마득한 후배이긴 한데 아무래도 괴수학 전공자들은 유급이 많다보니까요. 사실 현 박사님은 더 일찍 박사학위를 딸 수 있었는데 그래도 저 세 분한테 맞춰서 제 과정을 치렀다고 들었어요.”
유예지가 말했다. 현재준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금발의 여성이 예지를 보더니 손을 흔들어보였다.
“잘 아시나 봐요? 저 노르웨이 사람.”
“저도 저들과 한 3년을 함께 했거든요.”
“미인이시네요.”
“그렇죠?”
예지가 웃어보였다.
“좋은 사람이에요, 시리예. 게다가 현 박사님과 몇 년 교제 했을걸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에스퍼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승운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살을 에는 듯한 압박감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태환은 관심이 사라진 건가? 싶어 고개를 빼어들고 승운의 얼굴을 살폈다가 재빨리 몸을 뒤로 했다.
“…….”
화났다.
지승운이 엄청나게 화가 났다. 자신이 화났다는 것이 밖으로 드러 날까봐 일부러 힘을 내부로 돌렸다는 것을 그때 태환은 깨달았다.
뭐야, 뭐냐고! 저 사람은 왜 이전 애인이랑 끌어안고 있는 건데!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감히 지승운에 일반인이 가당키는 하냐 어쩌냐 생각하던 태환은 금세 태세전환을 했다. 김태환이 제일 잘 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래도…… 지금은 헤어졌죠?”
태환의 물음에 예지가 그럼요! 하고 시원스레 답했다.
“시리예 옆에 있는 에스퍼가 지금 애인이래요. 4년 전부터 계속 같이 살았어요. 아마 서로 파트너로 등록도 해뒀을걸요? 유럽은 이혼할 때 일처리가 거지같아서 결혼은 잘 안하니까.”
그거 정말 다행이었다. 태환은 만족스러운 답에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그런 태환을 향해 경민과 승호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쯤 되면 지승운의 감정도 많이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싶어 다가간 승호는 여전히 굳어있는 승운의 표정에 말없이 물러났다.
아직 멀었다.
*
괴수학 박사들은 DMZ연구소를 제 집처럼 누볐다. 그들은 처음 와 본 연구소인데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아는 눈치였다. 승운을 비롯한 에스퍼들의 그들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시리예와 함께 왔다는 에스퍼 역시도 에스퍼들과 함께 있었다. 그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영어를 사용하며 대화를 했지만, 간혹 그가 알아듣지 못했으면 하는 것들은 한국어로 말을 했다.
“유예지 연구원.”
승운이 그녀를 불렀다. 유예지는 보리스와 함께 온 살레라는 여성과 괴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승운의 말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찬가지로 예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든 살레가 지승운을 보고 얼굴을 붉혔지만 승운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박사들이 이 연구소에 되게 익숙해 보이는군요.”
“아, 이 연구소는 남극에 있는 연구소와 구조가 같거든요. 학부 마지막 학기는 다들 남극에서 보내는데, 아시다시피 거기가 들어가고 싶을 때 들어가고 나오고 싶을 때 나오는 곳이 아니라서 반년씩 갇힐 때도 많아요. 어둡고, 춥고, 밖에는 못나가고. 그러다보니까 다들 연구소에서만 지내서 이 구조가 익숙해지는 거죠.”
“그래요?”
“네, 조금 다른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똑같아요. 현 박사님이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그거였거든요. 연구소의 배치들을 남극 연구소처럼 할 것. 아무래도 거기에서 첫 번째 인턴을 보내다보니까 제일 익숙한 구조실거예요.”
그래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아는 거군, 승운이 생각했다. 이곳의 지도나 구조가 노출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알고 있는 것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위험할 것 같은데. 어차피 괴수학 박사들은 한명 한명이 VIP니까 이상한 짓을 했다간 금방 시선이 갈 것이다.
그래도 승운은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얼굴로 에스퍼들을 바라봤다.
재준은 그들에게 따로 무언가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문서화된 보고서와 결과를 패드로 살핀 그의 친구들이 이런 저런 질문을 하면 그에 대해 답을 해주고, 그가 풀리지 않는 것들을 물어봤다. 괴수학은 전문용어와 약자가 많아 일반 사람들이 들어도 그게 어떤 말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대화하는데 감추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시리예 만큼은 묘하게 현재준에게 달라붙어 승운이 시선을 줬다.
미인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 무릇 남성들이 좋아할만한 얼굴이다.
현재준 박사는 헤테로인가, 아니면 바이인가? 우선 여성을 만났다는 점에서 게이는 물 건너 갔다. 승운이 바라는 것은 그가 바이라는 것 정도였다. 남자도 만나봤을까? 남자를 만날 생각은 있을까? 이 얼굴로 꼬시면 넘어올까? 진성 헤테로라면 그가 어떤 얼굴을 하든 넘어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왕 예쁘게 태어났으니 한번 꼬셔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승운은 생각했다.
……성별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은 뒤늦게 떠올랐다.
일반인과 에스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표정을 굳히고 있던 승운은 멀리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현재준 박사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승운이 웃어보이자 현재준 박사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귀엽네. 어떻게 저렇게 모든 행동이 다 귀여울 수 있을까. 이대로 몰래 납치해서 둘이서만 살 수 있는 섬에 들어가고 싶다. 승운이 생각하다가 그건 아니라고 결론 내려져 피식 웃었다. 둘이서 살면 큰일 나지. 폭주라도 하면 제 손으로 박사를 죽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그냥 근처에서 스토킹이나 하며 박사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다.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그 정도.
하지만 그걸 인정하자 왠지 모를 비참함이 느껴졌다. 그가 재준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엿 같았다. 왜 하필 현재준인가. 아니, 왜 하필 일반인인가.
각성 유도하는 약물이라도 써볼까? 불법이긴 하지만 혹여 가이드가 되면…….
……아니지. 에스퍼가 되면 더 곤란했다. 게다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뿐이라고 해도 이런 불법적인 것 까지 떠올리다니.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들 지경이었다. 승운이 한숨을 쉬며 다른 에스퍼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잘 살피라는 말을 했다. 사실 뭔가 더 살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승호가 다녀오라는 말을 했다. 승운이 몸을 돌렸다.
그 상황을 재준은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오늘 지승운이 이상했다. 웃다가, 한숨을 쉬다가, 노려보지를 않나. 그리고 다시 웃다가 표정을 굳힌다.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건지.
“허니?”
“아, 응.”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현재준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리예가 패드에 있는 보고서를 보며 말했다.
“그것보다 JJO-912…… 이름이 홍시?”
“응. 농익은 퍼시몬.”
농익은 뭐……? 시리예는 그게 뭐냐고 되묻는 대신 말을 돌렸다.
“실험 결과가 흥미롭네.”
“안 그래도 그건 라제쉬 박사님한테 보낼 거였어. 그쪽이 결과가 제일 빨리 도출되더라고.”
“다른 종보다 정신적으로 민감하지. 그래서 죽이는 것도 쉽지 않고. 마취 같은 전 처치를 했다가 결과 값이 틀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기요틴?”
“여기엔 기요틴이 없어. 에스퍼 한 명에게 부탁했어.”
“저쪽 에스퍼?”
현재준의 말에 시리예가 에스퍼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시리예의 말에 현재준이 고개를 돌렸다. 에스퍼들 틈에 지승운은 보이지 않았다. 시리예는 이리저리 살피며 에스퍼를 집어내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아, 지금은 없네.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현재준은 시리예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승운 에스퍼다. 지금 자리를 비운 것은 그 사람뿐이니까. 재준이 “그 에스퍼 아니야.” 라고 말했다.
“도와준 에스퍼는 다른 사람이야. 여기에 상주하는 C급 에스퍼.”
“저 에스퍼는 여기에 상주하는 게 아니고?”
“잠깐 온 거지. 아마 곧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그래?”
시리예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그의 동기들은 연구소를 정말 제 집 쓰듯이 했다. 현재준이 이름 지은 수많은 괴수보고 넌 여전히 그런 짓을 저지르냐는 얼굴을 했다. 예전에 그가 남극에서 ‘피넛’이라고 처음 이름붙인 수중괴수를 본 보리스는 ‘넌 뭔가 문제가 있어.’ 라고 말했다. 현재준은 그때도 지금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외에도 에르난데스는 연구실의 규모나 시설이 마음에 드는지 요청해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마존에 있는 시설 역시도 대대적으로 보수를 해야 하는 데 이곳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하며 허가를 받았고, 재준과 에스퍼들이 에르난데스가 찍은 사진을 한번 검수한 뒤 기밀로 분류되는 것은 삭제했다.
현재준은 그들을 놔둔 채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이곳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이 불 때면 나뭇잎끼리 부딪혀서 비 내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처음 제7센터에 왔을 때는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인가 생각했다. 빗소리 같은 바람소리가 안정된다.
현재준이 1층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있었다. 지승운은 1층 입구에 있는 자판기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다 현재준이 오자 비벼 끄고 웃어보였다. 참 예쁜 얼굴이다. 매일 봐도 예쁜 얼굴일 것이다. 검은 피를 토할 때도 예쁘긴 했었다.
“박사님.”
승운의 부름에 재준이 내외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승운은 그런 모습을 보더니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현재준이 자판기에 사원증을 갖다 대고 물 한 병을 뽑았다. 천 이백원을 내고 주기에 마시기엔 물 값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것이 끌리지는 않았다. 현재준이 물병을 돌려 여는데 지승운이 자신을 바라봤다.
“열어드릴까요?”
승운이 물었다. 재준은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물병을 열었다.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승운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가 올라왔다.
“괜찮습니다.”
이미 열어놓고 거절이었다. 승운은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연한 거다. 현재준 박사는 약한 몸이 아니다. 가운에 가려져 있지만 저 아래 팔에 근육이 그득할 것이다. 그래도 열어주고 싶었다. 그냥 뭐든 해주고 싶은 게 지금 심정이었다. 현재준은 그런 걸 원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승운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물병에 대해서는. 하지만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물어봐야만 했다.
“왜 모두 박사님을 자기라고 부르는 겁니까?”
“…….”
물병을 기울여 물을 마시던 현재준이 멈칫했다. 내뱉거나 뿜어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현재준이 승운을 바라봤다. 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언제 저를 자기라고.”
불렀냐. 그들에게는 한 번도 자기 소리를 듣지 못했다.
“허니라고 불렀잖아요.”
“외국인한텐 현 발음이 어렵습니다.”
“알아요. 그래서 닥터 허니라고 부르는 거.”
아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현재준이 승운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먼저 입을 연 지승운을 보고 꾹 다물었다.
“왜 그렇게 이름이 달콤하죠?”
현재준은 처음으로 당황했다. 이름이 달콤하다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지승운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이게 뭔 개소리야? 평소에 비속어라고는 쓰지 않는 현재준으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승운의 말은 그런 표현을 나오게끔 했다.
“나도 허니라고 불러도 됩니까?”
“……지승운 에스퍼?”
“농담이에요.”
농담 한번 살벌하게 했다. 현재준이 물병의 뚜껑을 돌려 닫았다. 여기서 괜히 같이 있느니 올라가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데 승운이 재차 물었다.
“현 박사님은 여자를 좋아합니까?”
현재준이 그대로 멈춰 섰다가 승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예?”
“그냥 묻는 거예요.”
그냥 묻는 얼굴이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지승운의 얼굴에 현재준은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하지만 어떤 답이든, 솔직한 게 제일 좋았다.
“뭐…… 성별은 딱히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지승운이 웃었다.
“의외로 개방적이시네요. 이능력자가 아니면 그런 거 불편해하잖아요.”
“저도 이능력자와 퀴어 단체를 존중합니다. 그리고…… 아닙니다.”
“박사님, 남자도 만나봤습니까?”
“……예?”
“만나 보셨나 봐?”
"아뇨. 그러진 않았는데.“
사실 현재준은 자신의 성 지향성에 대해 달리 고민해본 적이 없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었다. 그가 태어난 해에 동성혼이 합법화됐다던가. 그러니까 상대의 성별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느끼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된다면 그래. 형질이상정도일 것이다. 가이드와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 상대가 가이드가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재준은 자기를 좋아해준 사람만 만났을 뿐, 먼저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은 없다. 물론 그를 좋아해줬던 사람이 시리예 한 명뿐이긴 했지만. 다른 상대가 있다고 해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보리스였나요. 박사님을 달링이라 부르는 저 사람?”
“그 분은 배우자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배우자가 있어도 다른 사람과 자잖아요. 불륜이 만연하다던데요.”
“…….”
“우리들은 각인하면 서로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평생의 반려자를 선택해놓고 아니다 싶으면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가기도 하죠. 혹은 이혼하지도 않은 채 다른 사람을 만나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부럽다고요. 누군가에게 구애받지 않는 거.”
사실 전혀 부럽지는 않았다. 자신의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과학적 절차도 없이 그저 운이나 한순간의 선택에 맡겨 하는 결혼 따위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지승운 자신처럼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일반인의 삶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두워진 승운의 안색에 현재준이 당황하며 말을 건넸다.
“혹시, 지승운 에스퍼.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아서…….”
“아, 가이드.”
맞아. 그게 있었다. 그가 10년 동안이나 찾아 헤맨 것이 가이드였다. 그런데 현재준의 앞에 서자 그것에 대한 생각을 전부 잊어버렸다. 미쳤군, 승운이 생각했다. 정말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에스퍼가 가이드에 대한 집착과 열망을 잊어버릴 리 없다.
“그러게요. 제 가이드는 왜 안 나타날까요. 내가 마음에 안 드나.”
“그럴 리가요. 지승운 에스퍼를 마음에 안 들어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박사님은요?”
승운이 물었다.
“박사님은 저 마음에 드십니까?”
현재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승운이 쓰게 웃었다.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할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아니, 만에 하나 마음에 든다고 해도 승운의 마음의 크기와 현재준의 마음의 크기가 다를 것이다.
왜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거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승운은 현재준을 좋아한다. 그게 현재 내려진 결론이다.
승운이 재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저 사람은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승운이 되는대로 말했다.
“그렇게 따뜻했는데, 날 살려줬는데. 그걸로 끝이에요. 분명 싫은 거죠.”
“지승운 에스퍼, 그…….”
사실 그 가이드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현재준이 자신을 돌아볼 것만 같았다.
“나타날 겁니다.”
지금처럼.
“그리고 걱정 마세요. 지승운 씨는, 그러니까…….”
“…….”
“예쁘잖아요.”
이어지는 말에 승운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현재준이 가이드 같은 말을 할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렇게 예쁘면 당신이 예뻐 해주지 그래. 하지만 그 말을 했다간 거절의 얼굴을 비출 것 같았다. 사람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타인의 행동에는 관대하다. 하지만 자기를 좋아 한다는 걸 드러내면 혐오감이나 거부감을 표하겠지.
“울지 마세요.”
“안 웁니다.”
승운이 답했다.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준의 눈에는 그가 우는 것처럼 보였다.
“안 울어요.”
그렇게 말한 승운이 현재준에게 다가서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현재준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현재준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닿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완벽한 거절에 승운이 쓰게 웃었다. 울지 않았는데, 지금은 울고 싶어졌다.
*
시리예는 계단에 서서 재준을 향해 서있는 지승운을 바라봤다. 재준이 오랫동안 오지 않아 찾으러 나섰던 유예지는 계단에 서 있는 시리예를 보고는 “왜 그래?” 말을 걸며 그녀 옆에 섰다. 시리예의 시선 끝에 현박사와 지승운이 있었다. 시리예가 입을 열었다.
“예지, 당신.”
시리예가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유’가 자신의 성인지, 아니면 너를 의미하는 건지 유예지는 종종 헷갈렸다.
“응?”
“저 에스퍼, 잘 알아?”
시리예의 말에 예지가 고개를 내밀어 재준 옆에 있는 에스퍼를 바라봤다. 아아, 알다 마다.
“응. 지승운, S급 에스퍼. 한국에 세 명 뿐이지. 공익광고도 종종 촬영해.”
“S급?”
예지의 말에 시리예가 와우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쩐지 예쁘게 생겼다는 시리예의 말에 예지가 웃어보였다. 가이드들이란. 보석을 좋아하는 까마귀마냥 예쁜 것만 있으면 황홀한 눈길을 보낸다. 시리예도 가이드는 가이드였다.
“S급이긴 한데 매칭이 높은 가이드가 없다더라. 그래서 힘들어하더라고.”
“그래?”
시리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 봤다. 예지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그런데 저 에스퍼 말이야.”
시리예가 다시 말했다.
“왜 허니를 꼬시는 거야?”
“어?”
꼬셔? 지승운 에스퍼가 현재준 박사를?
그럴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유예지가 시리예의 옆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조금 묘했다. 이번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몇 번 예지는 그런 느낌이 들긴 했지만, 에스퍼와 일반인 사이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편견 때문인지 그냥 무시했다.
그런데 가이드인 시리예의 눈에는 그게 확연히 보였나보다.
현재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얼굴로 지승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들어 올렸다가 머뭇거리며 내린 현재준을 바라본 예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지승운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댔다. 흘린 눈물이라도 닦는 것처럼.
“…….”
우는 척 하네.
“그러게.”
예지가 말했다. 에스퍼들도 사람이니 감정은 있지만, 그들은 웬만하면 울지 않는다. 그러니까, 감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통 사람처럼 격한 감정을 느끼는 편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소소한 감정은 결여된 상태다. 그러니까 괴수들을 학살하거나 사냥당하고도 PTSD같은 거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에스퍼들이 울 때도 있었다.
가이드 앞에서.
가이드를 꼬실 때.
가이드에게 동정을 받기 위해.
가이드에 대한 집착 때문에.
눈물로서 그들을 붙잡기 위해서.
그런 용도로의 눈물은 에스퍼에게 흔했다.
“왜지?”
왜 지승운이 현재준 앞에서 우는 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드디어 제 가이드를 찾지 못해 미쳤나 예지가 생각했다.
*
시리예가 말한 뒤로 유예지의 눈에는 지승운의 개수작이 더 자세히 보였다. 지승운은 정말 현재준 박사를 꼬시고 있다. 아니, 저 미친놈이 가이드도 모자라서 일반인에 서른 세 살이나 된 우리 더벅머리 모지리 천재 박사한테 마수의 손길을 뻗다니. 예지로서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승운 에스퍼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현재준의 철벽이 어마어마했다.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타국에서 오신 박사님들이 더 중요하죠. 가보세요, 지승운 씨.”
새 공문이 내려왔다.
요약하면 괴수학 박사들을 다시 중구 제 1센터로 모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사님.”
“여기는 안전합니다. 제7센터니까요. 지승운 에스퍼가 오기 전에도 무사했습니다. 이년 넘게요. 그런데 그깟 하루 이틀로 제가 위험해질 일은 없습니다.”
현재준의 말에 승운이 입을 다물었다. 유예지는 생각보다 더 지승운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런 사항을 아는 것은 그녀만이 아닌 듯 했다. 현재준의 철벽을 볼 때마다 에스퍼 무리에도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 사람들도 다들 아는 것이다. 지승운이 현재준을 꼬시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에스퍼가 일반인을 꼬시는 데 가만히 있냐. 뜯어말리진 못할망정. 물론 그들이 뜯어말리지 않아도 현재준이 일당백을 하고 있었다.
“다녀오세요, 지승운 에스퍼.”
없는 꼬리가 축 처진 게 보인다. 아주 시무룩했다.
그런 승운을 놀리기라도 하듯 시리예는 ‘허니’ 하고 현재준을 부르며 그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시리예와 함께 온 에스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들을 봤지만 승운은 아니었다.
만약 현재준이 가이드였다면 승운은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가이드는 가이드와 사귀지 못하고, 에스퍼는 에스퍼와 사귀지 못한다. 서로의 파장 때문이었다. 동일한 파장이 만나면 서로의 에너지가 상승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서 마이너스 파동을 일으킨다. 같은 극의 자석처럼.
하지만 현재준은 일반인이다. 가이드든 에스퍼든 다 만날 수 있었다. 오히려 저렇게 쿨하게 있는 시리예의 에스퍼가 이상한 것이었다.
“저, 대장.”
상황을 보던 김태환이 지승운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건넸다.
“김태환, 네가 남아.”
뭐? 왜 나야? 태환이 생각했다. 차마 따질 용기는 없었다.
내가 현 박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걸 알면서!
그 이유로 본인이 남게 된 것이라는 사실은 태환은 모르는 듯 했다. 재준이 못생겼다고 했으니 적어도 그에게 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승운의 판단이었다.
그래도 여간 찝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승운은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내려온 공문에서 그를 콕 찝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실 승운은 그것을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다. 내키지 않는다고 그냥 거절해도 됐지만, 이왕이면 현재준이 자신을 곁에 두었으면 하는 마음에 공문의 내용을 말했다.
내일 오후에 서울로 올라가는 괴수학자들을 중구 센터까지 호위하라는데, 굳이 제가 할 필요는 없죠? 그런 식으로 가볍게 말하는데 재준은 도리어 ‘잘 됐네요.’ 답했다.
잘되긴 뭐가 잘돼. 승운이 투덜거렸다.
“애초에 왜 이딴 일에 나를.”
“대장이 가장 뛰어나니까요.”
“뛰어난 내가 굳이 해야 하는 일인가?”
“그렇게 따지면 지금 현 박사를 경호하는 것 역시 비슷하죠.”
승운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르지 않다. 위에서 보면 지금 승운은 거의 놀고먹는 상태였다.
폭주 직전이 되니까 폐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등등 말하며 제 발로 이곳에 오게 떠밀었으면서 가이드를 찾았다니 재빨리 부려먹으려는 행태가 정말 정부다웠다.
“제3센터에서는 대장이 빨리 가이드를 찾아 복귀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제1센터는 자기들 쪽으로 오길 바라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지금 원하는 대로 골라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골라서 여기에 왔잖아.”
“형.”
지승호가 한숨을 쉬며 승운을 불렀다.
“지금 이러는 거 이상하다는 거 아시죠.”
이상하다는 걸 모르면 그게 머저리지. 승운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여간 돌아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에스퍼가 가이드가 아닌 일반인에게 집착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해요. 무슨 일 있었던 겁니까?”
“역시 그 MKR-07 때문인가요? 그거 개량종이었습니까?”
옆에서 이경민이 끼어들었다. 경원이 그에 대해 말을 한 듯 했다. 승운이 “아냐.” 하고 답했다.
“당하기 전부터 그랬어.”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보다 전이었다. 아닌가? 그때였나? 하지만 고사리를 만나기 전에 현재준을 볼 때마다 심장 어딘가가 덜컹거렸다. 빨리 뛰는 심박에 빈맥이 아닌가 검사해봤지만 문제는 없었다.
“승운 형. 정신 차려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이경민이 말했다. 승운은 경민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았다. 세상에 안 되는 것은 많지만, 지승운에게 안 되는 것은 별로 없다.
“일단 내일 박사님들의 호송을 논의해보지. VIP의 명령이니.”
승운이 말에 승호와 경민이 따라 나섰다. 태환도 그들을 따라 나서려다가 승운에 의해 저지됐다.
“김태환, 여기서 박사님들 지켜.”
태환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여기서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에스퍼들이 내일 경호를 위해 회의를 하러 떠났을 때 태환은 연구소에 남아 박사들을 지켜봤다. 사실 태환은 연구소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 하는 일이 일반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예지 연구원이 고기 수십 킬로를 수레에 끌고 와서는 “매실이 밥 먹자!” 하고 말했다. 매실이라고 칭해진 괴수가 그걸 알아들었는지 기기긱 소리 내며 울었다.
“뼈 양은 늘렸어?”
“네, 늘렸어요. 아니, 무슨 괴수가 자기 위산이 너무 강해서 탈이 나요?”
“인간들도 그러잖아.”
“쟤는 위산이 악어 수준이란 말이에요! 악어가 탈 났다는 소리 들어보셨어요? 매실이를 너무 과보호했어요.”
도대체 누가 저딴 이름을 붙인 거야. 태환이 인상을 썼다.
유예지 연구원은 그 취향의 예쁘장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가운을 벗자마자 어마어마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 우람한 근육으로 굉장한 힘을 보여주며 고기를 괴수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 옆에서 현재준 박사도 다른 괴수에게 고기를 던졌다. 철창 옆에 ‘살구’라고 적힌 것을 확인한 태환은 매실이라 불리는 괴수에게도 매실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현 박사는 또 왜 저렇게 힘이 쎈 건가? 누가 보면 F급 에스퍼인 줄 알겠다. 물론 외모는 한참 모자랐지만 말이다.
태환은 나름 고생을 하는 그들을 본 체 만 체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다른 박사들 역시 이상한 이름이 붙은 괴수들 앞에서 무언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영어라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그들만 쓰는 용어가 많아서 도저히 대화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태환이 다시 몸을 돌려 현재준을 바라봤다. 살구인지 뭔지에게 밥을 다 줬는지 현재준은 손을 닦아내고 있었다.
“박사님은 왜 괴수학 박사가 됐습니까?”
태환이 물었다. 현재준은 그런 태환을 잠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습니다.”
“애인 있어요?”
두 번째 질문은 좀 더 빨리 나왔다. 보통은 그 다음에 어릴 때 어땠냐고 묻는데 뜬금없이 애인이라니. 마치 첫 번째 질문은 그냥 인사말처럼 한 것 같았다. 재준이 남은 고기를 괴수에게 던져준 뒤 태환을 바라봤다. 애초에 김태환 에스퍼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쯤은, 그걸 넘어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애인이라니.
“……그러는 김태환 에스퍼는 애인 있습니까?”
“저한테 관심 있어요? 왜 그걸 묻죠?”
“그래도 돌려드리고 싶군요.”
이 사람 성격 안 좋네. 김태환이 생각했다. 하긴, 박사인데. 태환이 에스퍼로서 생활하며 느낀 몇 가지가 있었다. 연구하는 것들은 대체로 성격에 문제가 있다. 학력이 높을수록 그랬다. 최악은 교수, 그 다음이 박사들이었다.
“에스퍼나 가이드가 더럽다고 생각하죠?”
태환이 말했다. 한국말로 했기 때문에 그걸 들을 수 있는 것은 유예지와 현재준 뿐이었다. 유예지가 인상을 썼다. 하여튼 에스퍼들이란. 다 그 새끼가 그 새끼였다.
“아무하고나 자고 뒹굴고.”
이어 말하는 태환에 현재준이 웃어보였다.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였다.
“김태환 에스퍼는 그렇게 생각합니까?”
“왜 자꾸 제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십니까?”
“보통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떠보기 위한 거나, 아니면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해서 타인의 의견도 들어보고자 하는 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요.”
뭐…….
태환이 할 말을 잃었다. 둘 다 이기도 했다.
사실 태환은 가이딩 자체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 모두 살기 위한 행동이다. 쾌감은 그냥 동반되는 것이었다. 뭐, 그게 좋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에스퍼와 가이드들을 더럽게 여기고 혐오한다. 남녀 가리지 않고 붙어먹는다나 뭐라나.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태환도 자신들을 더럽게 여기는 일반인들을 좋게 보지 않으니까. 문제는 이경원을 통해 들은 말 때문이었다.
지승운이 혹여 현재준이 자신을 더럽게 생각하면 어쩌냐는 말을 했다는 것.
씨발, 이건 아니지.
어딜 감히. 자기들을 지켜주는 게 누군데 더럽니 뭐니 말한단 말인가.
현재준이 직접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처럼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태환은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무례한 질문을 한 것이기도 했다. 대답해봐, 너 차별주의자지? 그 의도가 현재준에게 닿았다.
“이능력자들이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한 사람하고만 자는 건 아니에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자보셨는데요?”
“……그건 사생활입니다.”
현재준이 대답했다. 예지는 뜬금없이 현재준에게 지분거리는 또 다른 에스퍼에 당황했다. 저건 또 왜 저래? 이놈의 에스퍼들이 왜 갑자기 현 박사한테 관심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때 시리예가 다가오며 예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현재준과 태환이 그녀를 바라봤다.
“허니가 에스퍼들에게 인기가 많네요.”
노골적이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태환이 단번에 불쾌한 얼굴을 했다.
“전 얼굴 봅니다.”
“허니 예쁘게 생겼잖아요.”
뭐라는 거야, 이 사람이. 태환이 현재준을 보다가 시리예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현재준을 본 뒤 시리예를 봤다. 아, 그렇구나. 그것 때문이었군. 태환이 말했다.
“외국인의 아시안에 대한 미의식이 남다르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못…… 평범합니다.”
“그래요? 엄청 예쁜데.”
그렇게 말한 시리예가 손으로 톡 현재준의 볼을 건드렸다.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듯 말하는 시리예의 모습에 태환이 인상을 썼다. 여기 지승운이 없는걸 천만다행으로 여겨라 진짜.
“제가 예전에 잠깐 만났거든요.”
그러니까 저 미인이 왜 저런 사람을 만나냐는 말이다. 뭔가 잘난 점이라도 있나?
어? 설마 아랫도리에 어마어마한 게 달리기라도 한 건가?
“뭐, 헤어진 것도 우리들의 의지가 아니라서 아직 사이좋아요.”
그렇게 말한 시리예는 예지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며 그녀를 이끌었다. 예지는 시리예를 따라 한 괴수 앞으로 이동했다. 괴수를 앞에 둔 두 여성이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것을 한번 본 태환은 고개를 홱 돌려 재준을 봤다.
인상을 잔뜩 쓴 얼굴이었다.
“사이좋게 지내지 마세요.” 태환이 말했다.
“김태환 에스퍼는 원래 오지랖이 있으십니까?”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재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에스퍼, 조금 귀찮다.
*
그놈의 박사들이 뭐라고 이렇게 대접을 해줘야 하는 거지. 승운이 생각했다.
어제 내려온 공문은 여러 미사여구가 담겨있긴 했지만 요약하면 세 명의 괴수학 박사를 서울까지 잘 모시라는 것이었다. 그 요구가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괴수학 박사들의 세계적 위신과 그들의 납치가능성 등등을 따졌을 때 에스퍼가 호위하는 것도 맞았다. 그들이 DMZ연구소까지 올 때도 에스퍼가 호위했다. 하지만 굳이 거기에 지승운이 포함될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승운은 그것을 거절하려했다. 거절의 명분을 현재준이 내세워줬으면 했지만 재준은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다보니 거절을 할 수 조차 없었다. 물어보지 말고 그냥 거절할걸.
뒤늦은 후회였다.
씻고 나온 지승운은 물기를 닦아낸 뒤 속옷을 챙겨 입고 허벅지에 가터벨트를 끼우며 시간을 확인했다. 출발까지 아직 세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승운은 하얀 반팔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방탄조끼를 걸친 다음 깜빡했다는 듯 손목에 찬 시계도 확인했다. 시간이 아니라 에스퍼의 몸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것이었다. 녹색. 아직 괜찮다. 방탄조끼 위에 드레스 셔츠를 입은 승운은 가터벨트에 셔츠를 고정시켰다.
“형, 혹시 가터 남는 거 있어요?”
이경민이 노크도 없이 불쑥 승운의 방에 들어왔다. 승운이 속옷만 걸친 상태의 경민을 바라봤다.
“내 사이즈는 안 맞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운동해야 그렇게 됩니까?”
“기다려봐. 작은 거 하나 있을 거야.”
“양말 가터도요.”
일하러 오는데 가터도 안 챙기고 뭐 했는지. 승운은 옷장 안에서 옛날에 쓰던 가터를 꺼내 던졌다. 조금 헐렁할 수도 있겠지만 가터를 착용하지 않은 것 보단 나을 것이었다. 승운이 양말과 바지까지 챙겨 입은 뒤 자켓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지승호는 이미 옷을 다 챙겨 입고 주방에 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승호가 커피 드릴까요? 물었다. 승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경민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태환이는?”
“아직 씻고 있습니다. 저희보다 느긋하게 출발할 테니까요.”
그렇겠지. 현 박사가 출근하는 시간은 두 시간 반 뒤였다. 승운이 별다른 말없이 있자 승호가 말을 건넸다.
“형,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승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을 하는 건지 골똘한 얼굴을 한 승운에게 승호가 다시 “승운 형.” 하고 불렀다.
“왜.”
“일이잖아요.”
주어를 생략했지만 승운은 승호가 하는 말을 알아차렸다. 일이니 불편한 감정 드러내지 말란 뜻이었다. 자신의 기분이 그렇게 밖으로 드러났나 싶어 승운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알아.”
알긴 했지만 제어가 되지 않았다. 승호의 말에 마음을 다 잡은 승운이 표정을 없애며 말했다.
“차량은?”
“준비됐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한대로, 휴게소 들리지 않고 바로 갑니다.”
“예상시간.”
“막히지 않는다면 3시간 30분입니다. VIP에겐 네 시간으로 고지했습니다만 3시간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고속도로 통제 신청은 했나?”
“하지 않았습니다. 이른 시간에 출발하니까요.”
“별다른 위험요소는 없지?”
“아직까지는요.”
“그래. 이경민, 준비 끝났나?”
“다 됐어요!”
승운의 말에 경민이 방에서 튀어나오며 말했다. 동시에 태환도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젖은 머리를 털며 “이제 가십니까아.” 라고 말했다.
“갔다 올 때까지 박사님 잘 지켜.”
승운이 말한 뒤 몸을 돌렸다. 먼저 현관으로 나가는 그를 보며 태환이 뭐야? 싶은 얼굴로 승호와 경민을 봤다. 오늘 유독 날카로워보였다. 아니, 저게 원래의 지승운이었다. 여기서 본 이틀간의 지승운이 이상했던 것이다.
지승호와 경민이 밖으로 나왔을 때, 승운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하더니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형.”
경민이 말했다. 승운이 그를 돌아봤다.
“정말 그…… 좋습니까?”
“그렇게 티가 나?”
“예, 뭐.”
경민이 대답하며 볼을 긁적였다. 승호도, 태환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 박사는 모르고 있지만.
“응. 좋아.”
승운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게 끝이야?”
“뭐.”
경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어차피 가이드를 찾을 때까지만 일 테니까요.”
그게 에스퍼의 본능인 것을 어쩌겠는가. 당연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자 승운이 멈칫했다.
맞아.
가이드가 나타나면 승운의 집착은 현재준이 아니라 자신의 가이드로 옮겨갈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싫다.
*
공무집행용 에스퍼 차량은 친환경적인 전기차로, 방탄은 물론 웬만한 괴수의 물리적 공격도 막을 수 있도록 처리가 되어있었다. 차에는 번호판 대신 이능청의 로고가 새겨져있었다. 과속을 해도, 신호를 무시해도 어떤 처벌을 받지 않는다. 물론 승운은 도로교통법에 민감했기 때문에 경민은 과속이나 신호위반을 하지는 않았다.
박사들을 태운 차량은 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다가 속초 IC를 통해 고속도로로 빠졌다. 이른 아침에 출발했기 때문에 달리는 차량들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에스퍼 공무차량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어서 근처에 오는 차량이 없었다.
주말이 아닐 때의 강원도 영동을 향하는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영동으로 오는 것도, 서울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차량에서는 라디오 소리만 들렸다. 그마저도 박사들에게는 외국어라 알아듣지 못했다. 도로교통상황을 알려주는 라디오를 들으며 경민과 승호는 서로 눈짓했다. 적막하다 못해 무겁기 까지 한 침묵이었다.
피곤한 것인지 대부분 잠든 상태였다. 깨어있는 사람은 시리예라는 금발의 가이드 박사와 그녀의 에스퍼, 그리고 콜롬비아에서 온 경호원뿐이었다. 승운은 그들과 함께 있었다.
이대로 가면 별 일 없이 도착하겠군, 승운이 생각했다. 이른 아침부터 이동을 하는 사람들도 피곤해서 그런지 깨지 않고 서울에 도착할 것 같았다. 차량이 터널로 진입했다. 어스름한 빛이 차량 내부를 비췄다. 실루엣은 식별이 가능했지만 다른 이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승운은 읽고 있던 종이신문을 내려놨다. 조금만 집중해도 이 정도 어둠이면 볼 수 있었지만 그런데 기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승운은 볼 것 없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량이 터널에서 빠져나왔다가 다시 터널로 진입했다. 그때 딸랑 하고 방울 소리가 났다.
핸드폰 알림음인가? 처음에는 무시하고 넘겼다.
다시 딸랑 하고 소리가 났다. 승운이 인이어에 손을 갖다 댔다.
“무슨 일 있나?”
딸랑, 딸랑.
방울 소리가 더 커졌다.
“아무래도 괴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승호가 말을 전했다. 다시 딸랑, 하고 종소리가 났다. 다음 터널을 앞둔 상황에서 이경민이 “제길.” 하고 소리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터널 입구에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지승호가 “괴수 CED 추정.” 이라 말했다.
다시 딸랑, 하고 방울소리가 났다. 터널에 진입하기 전에 멈춘 차량은, 터널 속에 와 있는 것처럼 어둠속에 삼켜졌다. 갑작스럽게 차량이 서자 잠들어있던 박사들도 깨어났다. 콜롬비아의 마피아 역시 총을 꺼내 호위를 준비했다.
“저게 뭡니까?”
시리예와 함께 온 에스퍼가 물었다.
“저렇게 생긴 괴수가 있어요?”
“있습니다.”
지승운이 대답하며 차 문을 열었다.
“CED-002, 어둑시니 종 그슨대.”
박사들이 지승운과 앞에 있는 에스퍼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시리예가 고개를 빼서 창 너머를 바라봤다. 저건 아이였다. 아이의 모양을 한 괴수라니.
물론 그들이 사는 곳에도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괴수가 있다. 흡혈귀, 늑대인간, 반시. 그렇지만 그들은 외견에 괴수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저 아이는 너무나도 사람처럼 생겼다.
“천 년 전부터 있던 괴수종이죠.”
그렇게 말한 승운이 밖으로 나간 뒤 문을 닫았다.
“보지 마십시오. 볼수록 크기를 키워나가니까요.”
앞좌석에서 이경민이 말했다. 그림자가 점점 커져 차량을 삼킬 듯이 다가왔다. 콜롬비아에서 온 남자가 창문을 열어 총을 쏘려고 했을 때, 지승호가 “그만두세요.” 라고 말하며 뒷좌석으로 이동했다. 순간이동이 가능한 에스퍼가 있을 줄은 몰랐던 남자가 움찔했다.
“저들은 어둠 종 괴수입니다. 어둠은 칼이나 총으로 벨 수 없어요. 오히려 베면 두 배로 늘어나고, 총을 쏘면 그대로 흡수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호위하러 온 이가 누구인지 모르는 듯 했다. 지승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승운이 나간 곳을 바라봤다. 밖은 어둠뿐이다. 점점 커져나가는 어둠.
승운이 밖으로 나갔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바로 뒤에 있을 차량 역시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혼자 나온 것을 알아차린 괴수는 웃으며 승운에게 다가왔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크기가 증가했다. 두 걸음 다가왔을 때는 승운이 작아진 것인지, 그가 커진 것인지 모를 정도의 차이가 났다. 세 걸음이 되었을 때, 그슨대가 표정을 굳혔다.
승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어둠 종 괴수들은 담뱃불에 약했다. 그가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뒤 내뱉었다.
“……당신 뭐야?”
“말을 하는 괴수는 또 오랜만이네. 하긴,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승운이 괴수를 향해 이죽였다.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슨대가 이를 악 물었지만 승운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을 헤집는 듯한 찌르는 아픔이 느껴져 인상을 한번 쓴 뒤 “쉿.” 하고 경고를 줬을 뿐이다.
“시끄럽게 굴지 마. 오늘 기분이 안 좋으니까.”
그렇게 말한 승운이 담뱃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얌전히 있으면 아프지 않게 할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슨대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개소리하는군.”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차량에도 들렸다. 어둠이 점점 더 그를 잠식해갔다. 처음에는 발이 보이지 않더니 무릎이, 하반신이, 명치가, 그리고 한쪽 손조차도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승운이 눈을 한번 깜빡였다. 그때 어디선가 보글보글 소리가 나며 물이 나타났다.
물이 어둠속에서 빛났다. 어둠이 무언가 놓친 것 마냥 깜빡하자 빛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바닥부터 차오른 물이 승운의 다리부터 서서히 차오르다가 사라졌다. 그슨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에 잠식되었던 승운의 몸은 드러나기 시작했다. 승운과 차량이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장소가 물에 잠겼다. 승운이 귀찮다는 듯 하품을 했다. 이른 아침부터 힘을 쓰게 하다니, 예의 없는 괴수였다.
승운이 눈을 한 번 더 깜빡였을 때, 어둠이 거두어졌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된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밖을 바라봤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샌가 어둠이 사라지고 승운만이 자리에 서 있었다.
승운이 반대쪽으로 걸어가 조수석의 문을 열었을 때, 허공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잡았어.”
승운이 말을 하며 차에 탔다.
언제 지승호가 뒤쪽으로 이동한 걸 봤대. 이경민이 생각하며 “안전벨트 매세요.” 라고 말했다. 지승운도 지승호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벨트를 맸다. 경민이 출발한다고 말했다.
반면 지금 상황을 그대로 지켜본 시리예는 당황했다.
지금 뭐가 벌어진 거지? 모든 걸 봤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들이 있던 공간이 마치 블랙홀로 떨어지듯 까맣게 변했다가 그냥 나타났고, 무언가가 허공에서 떨어진 것이 끝이었다. 그건 필히 죽은 자의 것이었다.
“저게 뭐죠?”
시리예가 물었다. 차량은 사체를 지나쳐 터널 안으로 진입했다.
“그슨대라고, CED-002입니다. CED-001의 진화 형인데, 001의 경우는 사람을 놀래키기만 하고 공격하지는 않아요.”
지승호가 답했다.
“아뇨, 괴수 말고 저렇게 떨어진 거. 어떻게 된 거죠?”
시리예가 재차 물었다. 아아, 그거. 지승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고사입니다.”
“고사? 말려죽였단 말씀이신가요?”
“그슨대를 없애려면 빛이 있어야하는데, 지금 우리 중에서 빛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거든요. 놔두고 와서. 그래서 그냥 물을 쓴 거죠.”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어둠인데?”
“어둠 종 괴수지 어둠 자체는 아니니까요. 모든 생물에는 수분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고사라는 건…….”
“물속에서 익사가 아니라 고사를 한 게 신기한 거죠?”
이경민이 앞쪽에서 큰 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아, 그쪽. 지승호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그거야, 괴수 박사님들이 놀라지 않도록 물로 가리고 나서 그슨대에 있는 모든 수분을 빨아낸 거죠. 익사보다 고사 시키는 게 좀 더 어렵다고는 하더라고요.”
아무렇지 않은 승호의 말에 다들 표정을 굳혔다. S급 에스퍼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쉽게 무언가가 해결될 줄은 몰랐다.
보통 에스퍼와 괴수의 싸움은 피와 살이 튀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화재가 발생한다. 하지만 지승운이 한 것은 압도적인 우위가 아닌가.
“S급 에스퍼들은 원래 다 이런가요?”
“아, 지승운 에스퍼가 좀 더 뛰어나긴 해요. 한국에 있는 S급 에스퍼 중에서도 최고죠. 가이드…… 뭐, 그건 제외하고. 다른 에스퍼들도 비슷할 겁니다.”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는데요.”
“전 세계에 500명밖에 없으니까요.”
그러게. 그렇게 귀한 이들이었다. S급 에스퍼 하나의 경제효과가 몇 억 달러라더니, 지금 상황을 보니 납득이 갔다.
“하지만 박사님들은 전 세계에 300명밖에 없으시잖아요? 박사님들이 더 귀하신 몸이죠.”
지승호가 말했다.
승운은 괜한 힘을 뺐다는 얼굴로 글로브박스에서 새니타이저를 꺼내 손에 발랐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켜서 어딘가로 전화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이능청 시설관리팀입니다.] 소리가 났다.
“코드 SSJ204. 미시령 터널에 A급 추정 CED-002 살해 완료. 사체 처리반 출동 요망.”
[확인완료. 한 시간 내로 처리예정.]
대답을 들은 승운이 통화를 껐다. 그리고는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하곤 “잠시 자도 되지?” 물었다. 이경민이 문제없다고 말을 하자 승운이 눈을 감았다.
경호를 이렇게 해도 되냐고 따질 마음도 들지 않았다.
*
서울에 도착한 것은 VIP들에게 고지한 것보다 빨랐다. 4시간이라고 했으나 이능청 총본부가 있는 중구까지 오는데 3시간 반이 걸렸다. 그마저도 서울에 들어서면서 막혔다. 아무리 이능청 공무수행 차량이라고 해도 출근길의 강변북로는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VIP들은 중구 센터 바로 옆에 있는 호텔에서 머물렀다. 이능청 하청의 호텔이었기 때문에 보안이 강해 한국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귀인들은 그 호텔을 애용했다.
호텔 앞에서 VIP들이 내리자 미리 대기를 하고 있던 에스퍼들이 그들을 인수받았다.
지승운은 팀장으로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차량에서 내렸다. 이경민과 지승호는 내리지 않았다.
“VIP 호송완료. 이후 업무는 제1센터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인수 에스퍼 서명해주십시오.”
승운이 패드를 내밀며 말했다. 인수하는 에스퍼가 서명을 한 뒤 승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승운이 손을 맞잡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승운 에스퍼.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승운이 “예.” 하고 답했다. 귀찮았다. 어서 제7센터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제1센터에서 방문을 요구했기 때문에 바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승운이 말하며 돌아서려는데, 시리예가 “잠시만요.” 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에스퍼 지라고 했던가요?”
“예.”
승운이 시리예를 바라봤다.
그보다 한참 작긴 했지만, 여태 본 여성 중에서 큰 키였다. 승운과 현재준의 눈높이가 별 차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현재준과 이 여성의 눈높이는 딱 이상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리예는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지승운을 보며 웃었다. 보통 에스퍼들은 가이드를 저런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그게 각인가이드든, 페어가이드든 아니면 어떤 상대도 없는 가이드든 간에 말이다. 물론 미각인 가이드라면 조금 더 상냥하겠지만, 에스퍼에게 가이드는 본능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고 애지중지했다.
그런데 지승운은 가이드인 시리예 아예르를 경계하고 있다.
에스퍼가 왜? 마치 무언가를 빼앗길까 경계하는 사람 같은 시선이었다. 시리예가 말했다.
“당신 후각이 아주 좋네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 장소에 있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갑자기 웬 후각?
“과연, S급은 달라요. 이제까지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승운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시리예는 그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의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연락처를 적었다.
국가번호 7로 시작하는 것 하나, 47로 시작하는 것 하나였다. 하나는 시베리아에 있는 연구소고, 다른 것은 개인 연락처인듯 했다. 시리예가 수첩을 쭉 찢어 승운에게 내밀었다.
“나중에 허니에 대해 알고 싶으면 연락해요. 다 알려드릴게요.”
승운은 그 종이를 가만히 내려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현재준 박사님과 헤어진 사이라고 하셨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에 질투가 어렸다.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닌 당신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네가 뭔데 현재준 박사에 대해 알려 준다 만다야? 배알이 꼴렸다. 안 그래도 유예지 연구원이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하고 기분이 나빴는데, 그의 예전 여자 친구를 보는 것이 유쾌할 리 없었다.
“그리고.”
승운이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허니라는 호칭은 당신 에스퍼한테나 쓰십시오.”
***
“습격이요? 아, 그슨대? 그슨대가 강원도에 있어요? 아, 완전 내 밥인데. 네? 에이, 됐습니다.”
태환이 수화기 너머를 향해 말했다. 점심시간이었다. 지금쯤이면 지승운과 다른 에스퍼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식사를 하는 도중에 태환에게 전화가 왔다. 태환은 “예, 그렇고말고요.” 답하며 슬쩍 현재준을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태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태환이 핸드폰을 제복 재킷에 넣자,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유예지가 왜요? 하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습격당했대요.”
“그렇게 가볍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그냥 습격인걸요.”
그게 뭐 별거라고. 태환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위험할 텐데. 그슨대면 레벨이 높지 않아요?”
“그래봤자 그슨대죠. 대장이 있잖아요.”
대장이라면 지승운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승운이 있는데 그게 뭐? 예지와 현재준의 시선을 읽어낸 태환이 “허?” 하고 말했다. 아니, 이 사람들 진짜 모르는 건가?
“설마, S급 에스퍼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건 아니죠?”
“뛰어나고 대단한 건 아는데 정작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어서.”
“허이고.”
이래서 일반인들이란. 같은 이능력자끼리는 등급만 말해도 아 저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 답이 나오는데 이들은 그런 거라곤 하나도 모르는 듯 했다.
“S급 에스퍼가 전 세계에 몇 명이나 있는지는 아십니까?” 태환이 물었다.
“300명보다 적어요?”
“……많아요.”
“현재준 박사님이 더 희귀하겠네요.”
“…….”
에이 씨. 저 사람은 왜 답지 않게 대단한 거야? 분명 지승운이 더 대단해야하는데, 아니 더 대단한 것도 맞는데 현재준 박사도 대단하다보니 짜증이 났다.
“그래서 박사님들과 에스퍼 분들은 괜찮으십니까?”
현재준이 물었다. 지금까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태환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도 그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는 건가?
“예에, 대장이 있으니까요. 눈 한번 깜빡하면 죽겠죠.”
“눈 한번 깜빡이요? 에이, 그건 너무 오버다.”
“그래도 조금은 힘들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안 믿네. 진짜 S급 에스퍼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건가?
“힘들다는 게, 저희 대장을 말하는 건 아니죠?”
“아무리 S급이라고 해도.”
“와, 우리 대장 실력을 완전 물로 보네.”
태환의 말에 현재준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B급 괴수를 앞두고 폭주가 일어난 거 보면 S급도 한계라는 게 있는 것 같았다. 힘들지 않으려나. 현재준이 얼마 전에…… 하고 말을 하다가 멈췄다. 태환이 뭐냐는 듯 바라봤지만 현재준은 고개를 저었다.
“지승운 에스퍼 상태가 안 좋아보여서요.”
“아, 뭐.”
태환이 납득했다는 듯 말했다.
“사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죠. 그 상태로 7년을 버틴 것 자체가 대장이 괴물이라는 뜻이지만.”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웃고 다니나? 예지가 생각했다. 지승운 에스퍼의 실력은 모르겠지만, 그의 평소 행동은 내일 없이 우중충한 사람보다는 한순간의 쾌락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 같기도 했다. 요즘은 잠잠했지만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된 지승운이 여러 가이드들을 옆에 끼고 다니는걸 봐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대장은 6년 전부터 폭주 예정 상태였어요.”
6년 전이라. 현재준이 가이드로 각성한 게 그쯤이었던 것 같다.
“가이딩으로 되돌리긴 해도, 항시 터질 준비가 되어있었죠. 이제 가이딩도 안 통해서 이곳에 온 건데. 결과적으로는 대장을 가이딩할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 있어서 다행이죠.”
그렇게 말한 태환이 현재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현 박사님.”
“예.”
“저는 대장이 살 수 있다면 뭐든 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 누가 어떤 방해를 해도요.”
왜 저래? 예지가 생각했다. 어제는 애인이 있니 없니 묻더니 오늘은 협박이었다. 하지만 태환의 그런 태도에도 재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예, 그러십시오.”
“전 그걸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
태환이 입을 다물었다. 내 뜻이 안 전해졌나? 직접적으로 당신 죽일지도 모른다고 말을 했어야 했나? 아니, 이 정도면 그렇게 말을 한 거나 다를 바 없었다. 눈치가 조금 없나? 태환이 슬쩍 현재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공부머리와 눈치는 다르다고 하지만 이건 좀 둔한 거 아냐? 아이고, 우리 대장이 똑똑한 머저리를 좋아하게 됐나보다. 태환이 괜히 고생할 승운을 떠올리며 서글퍼했다.
“김태환 에스퍼에게 살해당하고 싶지 않으면 괜한 짓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야겠네요.”
그때 재준이 말했다.
“아, 물론 저는 지승운 에스퍼의 가이딩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적합한 가이드가 나타나길 굉장히 바라고 있습니다.”
“…….”
이거 둔탱이가 아니었다.
*
이능청 서울 중구 제1센터의 검진센터소장인 이동철은 제 눈으로 지승운의 몸 상태를 확인하면서도 믿지 못했다. 지승운은 제 가이드로 추정되는 이의 마지막 가이드를 받고 한 달 넘게 가이딩을 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안정수치에 있었다.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하다니. 이경원에게서 전달받은 기록을 통해 당시 가이딩이 겨우 40분 동안 진행된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승운아.”
“예.”
“그 가이드 꼭 잡아라.”
“…….”
“이건 거의 네 짝이야. 네 상태는 웬만한 A급 가이드가 60% 이상의 확률로 가이딩을 해도 나흘은 필요했어. 그런데 겨우 40분에 이런 수치라고?”
시계와 페어링한 패드를 보며 이동철이 말했다. 진작 뽑은 피는 정밀 검사실로 보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찍은 MRI, MRA는 물론이고 에스퍼 에너지 측량을 위한 MELM 역시도 문제없었다. 심장 주위가 조금은 뭉쳐있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머리는 깨끗했다.
“이거 등급이 생각보다 높겠는데. 제7센터에 이렇게 대단한 가이드가 있는데 못 찾았다고?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기계를 속일 수는 없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지? 남자랬나?”
“저도 아는 건 없습니다.”
그 대답에 이동철 소장이 여상하다는 듯 승운을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이상했다. 제 가이드를 찾았다며 눈시울을 붉히던 사람은 어디가고 이렇게 덤덤하게 아는 게 없다고 말을 한단 말인가. 보통 에스퍼들이라면 이렇지 않았다. 마치 태도는 제 가이드를 찾은 사람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 뒤로 가이딩이 없었으니 그건 아닐 테고, 이경원의 말로는 웬 일반인한테 목이 매여 있다고 하고.
“찾을 노력은 있나?”
“…….”
“경원이가 너 자위한다더라. 아깝게 왜?”
이동철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일반인이었지만 오랫동안 이 생활을 해오며 이능력자의 삶과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능력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오랜 시절부터 교육까지 시켜왔다. 그들의 삶을 일반인의 시점으로 보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승운의 행동은 몹시 이상했다.
“가이드에 대한 정절을 지킨다 생각했는데, 아니 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너 대상이 일반인이라며?”
“그런 것까지 다 말합니까?”
“네 등급이면 공공재야. 일거수일투족이 보고된다고.”
이동철의 대답에 승운이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사생활이 없는 건 예전부터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에는 조금 신경 쓰였다.
“거 참. 어떻게 네 가이드를 놔두고 일반인한테 빠져? 아, 설마 그쪽이 가이드인건 아냐?”
“아닙니다.”
“혹시 모르잖아.”
“그 분은 서른셋이고, 몇 년 전에 가이드와 사귀셨습니다. 사귀는 사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무슨 일이 있었다면 가이드일 수가 없죠.”
“아…… 가이드랑 사귀었던 사람이었어? 그럼 아니겠네.”
정말 일반인인가보네. 동철이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말이 되나? 어떤 일반인이 에스퍼를 꼬여내?
일반인은 정말 어떠한 능력도 없다. 그들보다는 매칭률이 10퍼센트라도 되는 가이드들이 더 지승운의 눈길을 받을 것이다. 혹시 폭주 직전에 어떤 영향이라도 있었나? 화가 머리에 미쳐 돌았나?
이동철이 고개를 기울이며 여러 가정을 생각해봤지만 납득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에스퍼의 부정적 에너지가 머리에 가득 차있다면 그럴 수도 있었지만 지승운의 머리는 아주 멀쩡했다.
기계가 망가졌나? 그럴 리 없다. 그러면 기계 상태가? ……그게 얼마짜리인데. 당연히 제대로 작동하는지 문제는 없는지 전부 알아보고 구입한다.
“뭐, 어차피 일시적인 거야. 가이드를 만나게 되면 금방 사라질 감정이지. 그러니까, 그냥 뭐. 가이드를 찾을 때까진 이대로 있자. 그래도 가이딩은 주기적으로 받아야 해.”
그 말에 승운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안 그래도 요즘 계속 고민이 되는 것이 그것이었다.
가이드를 만나게 되면 금방 사라질 감정. 이게? 금방 사라진다고? 어떻게?
“지승운 에스퍼.”
“예.”
“가이딩 받으라고.”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거랑 하는 거랑은 다르지.”
이동철은 대답하지 않는 지승운을 바라보다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기가 행동하지 않을 거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기에는 성정이 조금 착했다. 그러니 하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고 끝까지 안한다.
이러다 뒤지면 어쩌려고. 안 그래도 위에서 난리였다. 어떻게 해서든 가이드를 찾아서 각인을 시키고 같이 서울로 올려 보내라는. 하지만 거기 한 달 넘게 있도록 가이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지승운도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에 있을 명분을 만들지 않았는가. VIP 경호라니. DMZ에 VIP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S급이 경호할 만한 인물은 아닐 텐데.
“그래도 몸 상태가 굉장히 좋군. 20대 초반 때랑 상태가 비슷해. 오늘 힘 좀 썼지? 그래봤자 간에 기별도 안가겠지만.” 동철이 물었다.
“예, 뭐.”
“그슨대라며? 몇 살?”
“10대 초반으로 보였으니, 120년은 족히 살았겠죠. 말도 하던데요?”
“말을 했다고? 그러면 확실히 백년 넘게 살긴 했겠네. 그 정도면 그냥 인간들 틈에서 살면 되는데, ……왜 공격했지?”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승운이 대답했다. 그 습격은 확실히 이상한 것이었다.
“일단 그 분께 보고는 드리겠습니다. 명령은…… 저번처럼 공문으로 보내라고 하세요. 오히려 눈에 보일수록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러지.”
이동철이 대답한 뒤 조금은 찝찝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정말 뭔가 있다고 생각하나?”
“뭐. 움직임이 보이니까요. 애초에 그쪽에서 요구한 것도 있었고, 처장님도 계속 거슬리니까 저보고 가보라고 한 거겠죠.”
승운이 답했다. 이동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의 처장이 애를 심하게 굴리는 것도 있었지만, 지승운은 스스로 구르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원래 그쪽은 그런가? 이동철이 생각했다.
“설마 저보고 그냥 죽으라고 7센터로 가라고 했겠습니까?”
승운이 이죽였다. 그러더니 잠시 표정을 굳혔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승운이 이어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냥 저 죽으라고 보냈을 수도 있겠네요, 차장님은.”
***
현재준이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뒤 말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유예지도 마찬가지였다.
김태환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 미친 사람들. 괴수를 앞에 두고 명복을 빌다니.
그슨대의 사체는 DMZ연구소로 왔다. 사실 거리상으로는 화천 연구소가 더 가깝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연구 인력이 부족해서 중구 아니면 DMZ에 보낼 예정이었는데 둘 중에서는 DMZ가 더 가까웠다.
말라비틀어진 그슨대의 사체를 본 유예지 연구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네요.”
이제 열두 살, 열세 살은 되어 보이는 아이다. 어둠의 형태가 아닌 아이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슨대라면 나이가 꽤 많을 것이다.
“응. 한 백 스무 살…… 많게는 150세 정도까지는 됐겠네.”
승운이 말하며 그슨대의 손을 살폈다.
“여기 고문흔이 있는 것을 보니 그맘때가 맞군.”
“고문흔이 있단 말입니까?”
태환이 물었다. 승운이 그를 바라보며 최근에 생긴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닌 고문흔이라니.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뭐, 백 년 전에 괴수를 잡아 고문하기라도 한 사람이 있다는 뜻인가?
“그나저나, 고사네요.”
유예지가 말했다. 사체는 모양새가 예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잘 보존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세포 하나하나의 물기까지 다 빠진 것이 마치 미라처럼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만든 거야? 아니,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유예지가 김태환을 바라봤을 때, 태환이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했잖아요. 대장 실력이 있는데.”
역시 지승운이었나보다.
“지승운 에스퍼는 원소계열이었나요?”
“아뇨, 복합이에요. 원소와 물리. 원소는 두 개 다뤄요. 땅이랑 물.”
“네? 그게 가능해요?”
예지가 되물었다. 보통 에스퍼들은 한 가지의 계열만 갖고 있는데 지승운은 두개의 계열에 원소를 더 다룬다고? 그러면 세 개라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에스퍼에 대한 상식이 없어도 그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예지는 잘 알고 있었다.
“네, 뭐. 밝혀진 바로는 그러니까요.”
“안 밝혀진 바가 더 있나보죠?”
그때 현재준이 물었다. 태환은 예리한 질문에 입을 닫고 현재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현재준은 호기심보다는 그냥 스몰토크였는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슨대를 살피며 “뽑을 피가 없네.” 하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진짜요? 안 밝혀진 게 또 있어요?”
반면 유예지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되물었다. 태환은 모르겠습니다, 하고 답하고는 현재준을 바라봤다.
셋 밖에 없으니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요새 에스퍼들이 왜 자꾸 현 박사를 신경 쓰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새끼들, 현 박사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 예지가 생각했다.
에스퍼들은 괴수를 싫어하는데 괴수를 애지중지하는 현 박사가 내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예지는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이 재준을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운동을 더 해야 했다. 어쩌면 운동을 더 하고 싶은 핑계를 대는 것일 수도 있었다.
*
에스퍼 제복을 벗고 모자를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승운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돌아간다고?]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승운은 “예.” 하고 대답했다.
[찾아냈나?]
“아직요. 그쪽은 움직임이 뚜렷하지 않아서. 하지만 꼬리는 드러났습니다. 지승호를 그쪽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알았어. 나머지는 보고로 올려. 우편으로. 암호문은 세 번째 꺼.]
“알겠습니다.”
[곧 공문을 보내지. 일곱 번째 암호문으로 해석해.]
그렇게 말하고 바로 통화를 끊는 그녀의 행동에 승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튼 계급이 벼슬이었다. 승운은 하루 더 머물라는 이동철소장의 말을 무시한 채 대중교통을 이용해 고성으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예매했다.
터미널에는 사람이 많았다. 버스를 기다리며 승운은 승호와 이경민에게 문자를 남겼다. 문자를 받은 이경민이 대뜸 전화해 같이 가면 될 걸 왜 먼저 가냐고 말했지만 승운은 그렇게 됐다고 말하며 끊어버렸다. 생각할 것이 많은데, 옆에 그들이 있으면 자신의 생각을 방해할 것만 같았다.
사실 그의 고민은 별거 없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의 삶 전체에 영향을 주는 큰 것이기도 했다.
가이드가 필요하다. 가이드를 원한다.
그것이 에스퍼의 본능이다.
승운은 자신의 가이드를 만났다. 비록 그 가이드가 꽁꽁 숨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가이드보다도 현재준 박사가 더 신경 쓰인다.
처음에는 괴수의 체액 때문에 그런 영향이 있었나했지만 그건 하루밖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경원도, 현재준도 그렇게 말했다. 그 기준은 일반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승운 자신은 30분이면 그 독의 효과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승운은 계속 발기해있었고, 현재준 박사를 대상으로 자위하다 못해 꿈속에서 계속 그를 범했다.
지승운은 현재준을 좋아한다.
그러면 가이드는?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가이드를 만나면 지승운은 그에게 빠져 매달릴 수밖에 없다. 늘 하던 것처럼 눈을 휘며 웃고 자신을 봐달라고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리고, 괜히 손을 만지작거리며 가이딩을 요구할 것이다. 본능이니까. 현재준 박사에 대한 지금 감정은 전부 사라질 것이다.
그래, 그게 해피엔딩이겠지.
하지만 지승운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재준 박사를 좋아하지 않는 자신이라니. 다시 그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양 바닷가의 모래를 보듯 볼 자신을 떠올리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했다. 지승운은 가이드도 필요했지만 현재준도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가이드보다는 현재준이 더 필요했다.
내 가이드와 현재준 박사. 둘 중 무엇을 선택하는 게 그의 삶에 더 좋을까?
당연히 답은 나와 있다. 가이드다.
“보고 싶다.”
하지만 승운은 그 선택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이데올로그(Guidéologue) 1권 fin.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