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0)

2.

제7센터에 지승운의 가이드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기존 가이드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페어 가이드도 매칭 해줘요.”

미친놈. 이경원이 생각했다.

페어 에스퍼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의 가이드를 맞이하는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해 제7센터에 남아있던 이경원은 한 달이 지나도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제7센터에 있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같이 있으며 가이드를 찾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S급 에스퍼의 위치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전 제 가이드를 찾을 겁니다. 그게 페어 가이드든 뭐든 상관없어요. 다른 사람이 있어도 됩니다. 가이드를 공유할 수 있어요.”

또 다른 미친 소리였다. 에스퍼들은 자신의 가이드를 공유할 생각이 없다. 가이드를 공유하느니 상대를 죽이는 것이 에스퍼들이었다. 괜히 초창기 에스퍼들 끼리 서로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다. 아무튼 지승운의 요구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이능청은 요구를 들어줬다. 자신의 페어 가이드를 뺏길까 많은 에스퍼들이 반발했지만 슬프게도 에스퍼 등급이라는 차별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문제는 페어 가이드와 각인 가이드 중에서도 지승운과 30퍼센트 대 이상의 매칭이 있는 가이드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2퍼센트의 매칭이 나와 최저의 기록을 세우기까지 했다.

“내 가이드…….”

정말 골 때리는 상황이다. 모든 가이드들과 매칭을 했는데 그의 가이드가 없다. 그러면 저 몸 상태는 뭐란 말인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이경원이 말했다.

*

검진센터에 처박혀 내내 매칭만 받던 지승운이 다시 밖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승운은 여전히 가이드들에게 상냥했다. 하지만 이번엔 이전과 달랐다.

“괜찮아요?”

살랑살랑 웃는 모습이 마치 나른한 고양이 같았다. 지승운이 내민 손을 가이드가 잡았다. 그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가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이쪽도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지승운은 가이드에게 상냥하다. 하지만 남자 가이드에게 한정됐다. 그렇다고 여자 가이드들을 대놓고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자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 가이드를 찾기 위함이겠지. 그 사람이 남자인가? 주위에서 말소리가 들렸지만 지승운은 무시했다.

제1센터와 제3센터, 제7센터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15개의 센터에 지승운의 상태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지승운이 부활했다던가. 드디어 반쪽짜리 에스퍼라는 오명을 벗고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요즘처럼 에스퍼의 능력이 외교의 수단으로 쓰이는 때라면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 가이드를 찾아내 어서 지승운을 써먹어야만 했다.

문제는 그 가이드가 꽁꽁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

“사람이 저렇게 바뀌네요.”

유예지가 말했다. 구내식당에서 어깨 살짝 스친 가이드에게 하는 행동치고는 지나치게 친절했다. 현재준은 유예지의 말에도 관심 없다는 듯 “음.” 하고 대답하며 태블릿을 바라봤다.

“먹태 상태가 안 좋아.”

먹태는 얼마 전에 유예지와 현재준이 비무장지대에 가서 납치해온 식물형 괴수였다. 괴수인데 생선비린내가 나서 먹태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현재준의 말에 유예지는 오늘 간식은 먹태로 할까 생각했다. 그램 수 대비 단백질이 제일 많으니까 간식으로 탁월했다. 예지는 어떤 소스에 찍어먹을까 생각하며 시선을 다시 지승운에게 돌렸다. 훤칠하게 서 있는 남자는 움직이기만 해도 눈에 띄었다. 웃을 때 가늘어지는 눈이 확실히 욕망을 자극하는 것 같기는 했다. 물론 유예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녀는 에스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승운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점이다. 아무한테나 친절하고 아무나 주무르고 아무나 입 맞추고 아무나 손에 허리를 두르고 다니던 때와 달리 지금은 손 이상은 만지지 않았다. 그마저도 이전처럼 조물조물하는 것이 아니라 악수 수준이었다.

“가이드라는 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예지의 말에 재준이 “에스퍼한테는 그렇지.” 답했다.

그래봤자 예지는 자신도 현재준도 그 감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일반인이니까.

“가이드는 왜 안 나타날까요?”

“글쎄.”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있으려나?”

예지가 말하며 젓가락을 움직이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떤 이유요?” 하는 말이 들려왔다. 예지가 화들짝 놀라 으악 소리치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지승운이 예지의 맞은 편, 현재준의 옆자리에 식판을 내려놓고 앉았다.

“연구원님 잘 지내셨죠? 박사님도요.”

왜 여기에 와서 앉냐. 예지가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를 말하시는 거예요? 궁금하네.”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예지를 바라봤다. 예지는 답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왠지 모를 울컥함에 “아니, 그냥 뭐…….” 하고 말을 이었다.

“지조라든가.”

“지조라니. 그런 걸 신경 쓰는 가이드는 없어요. 설마 제 가이드가 일반인일거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죠?”

“원래 모든 가이드들도 일반인이었던 시절이 있어요.”

“스무 살 전까지는 말이죠. 보통 10대 중후반에 가이드 교육을 받게 되면 지조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게 돼요.”

지승운이 웃으며 “짐승처럼요.” 라고 말했다. 흔히 일반인들이 이능력자를 차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했다. 유예지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그런 뜻으로 말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능력자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어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다. 예지가 지승운의 시선을 피하며 젓가락질을 했다. 그런 승운의 눈에 예지의 손이 들어왔다. 거칠어 보이는 손이다. 보통 가이드들은 유예지 연구원보다도 손이 보드랍다. 설마, 저 사람인가? 그럴 리 없음에도 지승운은 살짝 의심했다. 유예지가 “왜요? 뭐요?” 하며 승운을 바라봤다.

“손이 튼튼하네요.”

“아, 보태준 거 있어요?”

“한번 잡아 봐도 돼요?”

“아, 뭐…… 네?”

유예지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지승운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웃어 보이며 자신의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잠시 고민하던 유예지가 그 손을 잡았다. 손을 마주잡은 지승운의 표정이 차게 변했다.

“역시.”

그가 예지의 손을 놨다.

“일반인들은 몰라요.”

유예지일리가 없지.

그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저런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 저런 느낌의 손이었다. 실제로 촉감이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거칠고 따뜻한 손. 승운이 재준을 바라봤다. 그의 손도 유예지와 비슷했다.

“그럼 왜 이 일반인들 틈에서 밥을 먹어요? 좋아하는 가이드한테나 가지.”

유예지는 지승운의 말에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밥은 편하게 먹고 싶어서요.”

지승운이 말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의 오른팔이 현재준에게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현재준의 시선이 지승운에게 향했다.

“저 웃는 거 싫어하거든요.”

지승운이 말했다. 원래의 지승운은 그랬다. 잘 웃지 않았다.

“그런데 왜 웃어요?”

유예지가 물었다. 지승운이 현재준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재준도 지승운을 바라봤다.

“목숨줄이니까.”

얼마 전에 재준이 했던 말이었다. 유예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연구소에서 그들이 했던 말을 다 들은 것이다.

“어쨌든 전 이곳에 제 가이드가 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찾을 때까지 평생 있어야지.”

“그러다 지승운 에스퍼의 가이드가 여기서 나가면요?”

“괜찮아요.”

승운이 답했다.

“나가는 사람 다 손 잡고 테스트 해볼 거예요.”

***

분명 가이딩을 받았는데 가이딩을 한 사람이 없다. 지승운의 가이드가 나타났다는 말에 바로 복귀를 요청했지만 정작 가이드는 찾을 수 없었다. 가이드가 없이는 지승운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왜 가이드가 있는데 가이드가 없냐고.]

이능청 영종도 제3센터의 검진소장 강유정은 지금 이 상황에 황당해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도 지승운의 상태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확인했다. 애초에 거짓말이 아니냐며, 가이딩을 받은 게 아니라 그냥 시계를 조작한 게 아니냐며 의심을 했지만 이경원이 직접 제7센터로 이동해 제 손으로 확인을 하고 검진한 결과를 넘기자 드디어 S급의 가이드가 있다고 믿은 유정은 그런데 왜 그 가이드들 속에 지승운의 가이드가 없는지 의문을 표했다.

“우선 가이드가 아닌 사람들도 검사를 해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구원들 중에는 젊은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뭐, 20대 내에서 확인해 보면 알겠죠.”

“그마저도 절반이니까 더 알기 쉽겠죠. 남자만 확인하면 됩니다.”

경원과 승운이 나란히 말했다. 에스퍼와 달리 가이드는 숨어들기 쉽다. 유정이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보라는 말을 했다. 사실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었다. 폐기처분되는 에스퍼보다는 몇 년을 낭비하더라도 제 역할을 하는 에스퍼가 더 나았으니까.

[문제는 거기 있을 명분인데.]

다만 S급 에스퍼를 이대로 놀릴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떤 일이라도 맡아서 해야 했다. 하지만 가이드를 찾지 못했으니 불안정한 일은 안 된다. 안전하면서, 그의 등급에 맞는 일. 어차피 그건 위에서 정해줄 것이다. 다만 그들이 지승운을 얼마나 배려할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정부는 어떻게든 그를 써먹으려고 들었다.

“곧 공문이 내려오겠죠.”

지승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사실 힘든 일이어도 상관없었다. 컨디션이 좋아서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몰래 하는 일이 있는 와중에 큰일을 하는 건 힘들었다.

“웬만하면 쉬운 일로 보내줬으면 하지만.”

그래야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자신의 본래 목적을 달성해낼 수 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지승운은 힘든 일이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지 모를 자신의 가이드가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주 직전의 에스퍼의 손을 잡고 안정을 취할 때까지 가이딩을 하는 가이드? 그것도 제 에스퍼가 아닌데?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게 웬 루트 옌슨의 재림이야. 그럼 자신이 카트린 두자당이라도 되는 건가? 승운이 웃었다.

가이드들은 겁이 많아 위험한 순간을 회피한다. 때로는 위험해도 맞서는 가이드들이 있었다. 정신력과 자기 통제가 강한 가이드들이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B급 이상이다.

지승운은 자신의 가이드가 그것을 넘어서 최소 A급은 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가이드는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때 버리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지승운이 기억을 하든 못하든, 위험한 상황이 오면 자신의 가이드는 자신을 구하러 와줄 것이다. 왠지 모를 확신이 승운에게는 있었다. 오히려 그런 기회가 오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테니까.

“어떤 일이든 괜찮아요. 여기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건 승운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 뒤, 내려온 공문을 받았을 때 승운은 멈칫했다. 어떤 일이라도 괜찮다고는 했는데.

“어째 내켜하지 않는 것 같다?”

경원의 말에 승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키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야지, 일인데.

“그런데 여기에 VIP가 있었어? 몰랐네.”

이경원이 말했다. 승운도 마찬가지였다. 대충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얼핏 듣긴 했지만 VIP로 분류되는 줄은 몰랐다.

“현재준 박사.”

그렇게 말한 경원이 현재준의 프로필을 읽어나가다가 “어?” 하고 웃어보였다.

“왜?”

승운이 물었다.

“이 사람 생일, 이능청 개소일이랑 똑같다.”

이게 웬 우연의 산물이래? 마치 여기서 일을 하게 될 거란 운명 같잖아. 이어지는 경원의 실없는 말에 승운은 답하지 않았다.

운명은 무슨.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

지승운의 새 업무가 정해졌다. VIP의 경호다.

지승운은 자신의 앞에 있는 현재준 박사를 바라봤다. 박사는 공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다음 장을 확인했다. 어떤 표정변화도 없이 공문을 읽은 재준은 다 읽은 종이를 지승운에게 넘겼다.

“그렇군요.”

재준이 말했다.

“출입증 등록하겠습니다. 다음 컨퍼런스까지 경호니까, 넉넉하게 3개월이면 되겠네요.”

승운은 이제 외부인 출입증을 매일 발급받을 필요 없이 연구소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승운은 이 남자가 얼마나 뛰어나고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느끼는 현박사는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었다.

현재준 박사는 종종 하늘을 바라봤다. 그럴 때면 승운도 마찬가지로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마다 매번 위에 비행종 괴수가 날고 있었다. 빙글빙글. 어떻게 이름을 빙글빙글이라 지었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괴수학은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는 전공이긴 하지만,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효율적으로 괴수를 잡을 수 있었다. 이전엔 높은 등급의 에스퍼들만이 사냥에 나갔지만 괴수학 연구가 시작되며 낮은 등급의 에스퍼도 힘들이지 않고 괴수를 사냥할 수 있게 됐다.

괴수학 과정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외인부대니 하는 것은 몰랐다. 현재준이나 유예지나 확실히 몸이 좋기는 했다. 특히 유예지 정도면 자신의 동생 못지않았다. 군인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현 재준. 1990년 1월 29일생. 미혼.

박사의 프로필과 주어진 정보로 확인한 것은 그가 출국을 하면 정말 A급 에스퍼들이 호위를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300명, 북한을 제외한 한국인 괴수학 박사는 총 세 명이 있는데 전부 VIP였다. 서울에 박형기 박사, 볼리비아에 이정은 박사, 그리고 여기 DMZ에 현재준 박사.

……왜 여기 있는 거지?

실제로 다른 연구소에서도 그의 이동 요청을 하곤 했지만 그는 1년 반 동안 제7센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국가의 명령으로 지원을 나간 적은 있었지만 이동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박사의 권한인 듯 했다. 여기가 좋나? 일반인한텐 굳이 좋을 것도 없는 곳인데. 형질이상자들이 드글드글하지 않는가.

“사과는 어때?”

지승운이 현재준을 바라보다 유예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예지는 아무렇지 않게 ‘사과 말이죠.’ 말했다. 설마, 설마…….

“세포 침윤이 증가했어요. 그래서 수용체 억제제를 써봤고.”

“홍시는 실험결과 도출 예정이네. 스트레스 호르몬 실험이라 마취 및 전처치가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에스퍼 한 명한테 부탁해서 단두해야죠.”

유예지의 말에 현재준이 지승운을 바라봤다. 에스퍼에게 부탁해서 단두라니. 겨우 실험용 괴수…… 괴수지. 일반인들이 머리를 자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도와드릴까요?”

지승운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유예지와 현재준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보고요.” 답했다.

승운은 현 박사가 하는 실험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호르몬과 연계된 것이라는 것은 상황을 통해 알게 됐다. 괴수에게도 호르몬이 있나? 대부분의 괴수는 뇌와 장기를 갖추고 있는 편이다. 어떤 괴수는 뇌가 없고 장기로만 이루어진 경우가 있는 반면, 또 어떤 괴수는 그냥 자연과 똑같이 생기기도 했다. 호르몬이 꼭 뇌에서 나오라는 법은 없긴 했다.

괴수 보관실은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있는데 포획실, 보관실, 육아……? 육아소? 이건 뭔지 모르겠다. 그리고 배양실이 있었다. 승운이 괴수를 배양하냐고 물었을 때 현재준은 세포 배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폐기실이 따로 있었는데 그 옆에는 위령패가 있다. 괴수 위령패라니.

“현 박사님은 좀 특이한 것 같네요.”

지승운의 말에 옆에서 유예지가 ‘허.’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승운이 그녀를 바라보다 예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괴수학 박사들은 다 또라이예요.”

저기, 그거 현 박사가 듣는데. 승운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현재준이 답했다.

“맞아. 내가 거기 10년 동안 있으면서 멀쩡한 사람을 본 적 없어.”

거기에 당신도 포함되는 거 아니냐는 말을 승운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들을 따라 한차례 실험실을 돌아다니다 보니 금세 점심시간이 됐다. 이곳에는 자판기 말고는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었기에 다들 중앙 본부의 구내식당으로 갔다. 승운은 직접 자신의 차에 현재준과 유예지를 태웠다. 그런 그들을 가이드들이 아쉽다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승운은 무시했다.

구내식당에 도착해서도 승운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가이드였지만 에스퍼나 일반인들도 있었다.

그래, 저 얼굴이 잘 생기기는 했지. 괜히 여기저기 지분거려서 문제였지 가만히 있으면 볼만했다.

지승운이 현재준 옆자리에 식판을 내려놨다. 호위라고는 하지만 식당에서 호위할 것이 있나 유예지가 생각했다. 사실 현재준은 딱히 호위가 필요 없었다. 그는 에스퍼는 아니었지만 웬만한 사람들보다 강했다. 작정하고 해치려 들면 큰일 나긴 하겠지만, 감히 누가 이를 건드리겠는가. 특히나 이곳에서 말이다.

“요새는 가이드들한테 안 웃어 주네요.”

유예지가 말했다. 승운이 그녀를 바라봤다.

지승운은 자신에게 시선이 오면 그쪽을 바라보고 항상 웃어줬다. 보고 가이드다 싶으면 애교를 부리듯 눈을 가늘게 뜨며 웃어줬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말이다.

“굳이 웃음을 흘리고 다닐 만큼 상태가 안 좋지 않아서요.”

승운이 말했다. 예지도 그 말을 듣긴 했다. 지승운 에스퍼의 몸 상태가 갑자기 좋아졌다는 말에 매칭이 높은 가이드를 찾았다 싶었는데, 제 7센터의 소속의 가이드들 중에서는 그와 적합한 가이드가 없다고 했다. 여전히 지승운과 매칭결과가 제일 좋은 가이드는 DMZ 연구소에 있는 33퍼센트의 가이드뿐이다.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나 마나였다. 가이드가 숨은 것이다. 제 정체도 밝히지 않은 채.

“뭐, 찾는 가이드도 있고.”

지승운이 말했다. 대부분의 가이드라면 그를 거부하지 않을 텐데 그의 가이드는 어딘가로 꽁꽁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승운은 누군지도 모르는 가이드에 대고 보고 싶다, 만나면 평생 잘해주겠다, 호의호식과 돈 지랄이라는 게 뭔지 직접 경험하게 해 주겠다 등등 말했다.

“그렇게 좋습니까?”

현재준이 물었다.

“당연히 좋죠. 현 박사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제 목숨줄.”

“그 가이드가 못생겼어도 좋아요?”

“현 박사님은 외모로 사람 차별합니까?”

“뭐든 예쁜 게 좋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현재준을 보며 지승운은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 사람은 가끔 가이드처럼 말을 한다.

게다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이전에 현재준 박사가 자신을 향해 ‘예쁘다’ 말한 것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인 승운은 모른 척 음식을 입에 넣어 씹어 먹은 뒤 말했다.

“전 외모 따위 상관없어요.”

지는 그렇게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예지가 생각했다.

“그가 누구든, 몇 살이든, 어떻게 생겼든,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요. 그는 제 가이드고, 저는 제 가이드를 찾아서 지킬겁니다.”

지승운의 대답은 현재준에게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그의 말을 들었다. 다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에스퍼들은 그의 심정을 이해했지만, 일반인이나 가이드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요.”

현재준이 말했다.

“예쁘네요, 지승운 에스퍼.”

“…….”

그러니까 저 사람은 말을 왜 저렇게 하냐고. 갑자기 예쁘다는 말을 하니까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지승운도 눈이 있는데 자신의 외모가 어떤지는 알고 있다. 예쁘다거나 잘생겼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같은 찬양도 들어봤지만, 이상하게 현 박사가 자신에게 하는 말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아, 얼굴 말고 마음이요. 얼굴도 예뻐요.”

살다 살다 마음 예쁘다는 말은 처음 듣네. 승운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젓가락을 움직일 때 현재준의 핸드폰에 진동이 왔다. 현재준은 핸드폰을 꺼내 확인을 하더니 지승운을 바라봤다.

“그러면 예쁜 지승운 에스퍼.”

“…….”

“점심 먹고 비무장지대로 갈까요?”

“……예?”

승운이 되물었다. 건너편에서 예지가 슬쩍 현재준을 보더니 “만두 잡혔어요?” 물었다.

만두? 비무장지대에 만두?

“응. 만두 포획했어.”

“만두만 잡혔어요? 탕수육은요?”

“탕수육은 도망쳤어. 만두가 먼저 잡히고 바로 도망치더라.”

그렇게 말하며 현재준이 핸드폰을 예지에게 보여줬다. 비무장지대에 설치된 CCTV에 어린 괴수가 포획된 것이 찍혔다. 어린 괴수라고 해도 지승운의 몸체만한 것이었다.

“……질문이 있습니다만.”

지승운이 말했다. 예지와 현재준이 동시에 승운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괴수들에게 귀여운 이름을 붙이는 겁니까?”

지승운 에스퍼에게도 저 이름들이 귀엽구나. 유예지가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저 이름들이 굉장히 귀엽게 느껴지긴 했다. 괴수에 붙여지기 아까울 정도로 말이다. 지승운 에스퍼는 예지를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 예지도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유예지는 그러자 지승운이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저 이름들을 자기가 지은 것이라 착각한 것이다. 예지가 소리쳤다.

“아니거든요!”

“예?”

“제가 왜 괴수들한테 그런 이름을 지어요? 그거 다 현 박사님이 지은 거라고요!”

“아.”

예지의 말에 승운이 현재준을 바라봤다. 아니, 이런 모양새를 하고 그렇게 귀여운 이름들을 붙인단 말이야? 길고양이한테나 어울릴 이름들을 비무장지대의 괴수들한테…….

“왜요?”

시선을 느낀 현재준이 물었다.

“이름…….”

“아, 그거. 오래 살라고요.”

“예?”

“음식 이름으로 지으면 오래 산다고 하잖아요.”

그건 반려동물 이야기잖아. 괴수가 오래 살면 뭐 어쩌려고.

“아무튼 만두 상태를 보러 가야하는데, 오늘 유예지 연구원은 홍차를 데리고 검진센터로 가야하거든요. 거기에만 괴수 등급 측정기가 있어서.”

홍차……. 홍차는 또 누구지. 일단 지승운은 오늘 홍차를 만난 적이 없다.

“저와 같이 비무장지대에 가주시겠어요?”

현재준이 정중하게 물었다. 지승운이 멈칫했다. 같이 지옥도로 향해 가자는 느낌이 왠지 고백처럼 느껴졌다. 이게 뭐지? 승운이 생각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이드를 찾는 것인데, 이상하게 이 사람에게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보다 나이가 많다. 서른 셋. 검사대상의 나이를 훌쩍 지난 남자는 더 이상 가이드로 발현할 기미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가이드 자체가 아닐 것이다.

“지승운 에스퍼, 거절이신가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알지 못했다. 이상한 사람이라 그런가?

“제 일은 박사님을 호위하는 건데 거절할 리 있겠어요? 특히나 비무장지대처럼 위험한 곳에 가신다니, 당연히 함께 해야죠.”

승운의 대답에 현재준이 웃어보였다. 안경 너머의 작은 눈이 웃으며 더 작아졌다.

못생겼어.

그런데도 심장 어디가 덜컹한 기분이다. 이게 뭐지? 지승운이 오른 손을 심장 언저리에 얹었다. 부정맥? 얼마 전에 검진할 때는 이런 것이 없었다. 아니, 에스퍼가 부정맥도 걸리나? 가이드를 너무 오랫동안 안 해서 그런 건가?

현재준은 지승운이 명치에 손을 갖다 대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체했습니까? 따줄까요?”

그 이야기를 듣던 유예지는 속으로 비웃었다. 에스퍼가 퍽이나 체하기도 하겠다. 괴수가 체한 것만큼이나 말이 안되는 게 에스퍼의 급체였다.

*

비무장지대는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북한과의 국경은 군인과 에스퍼들이 지킨다. 군인들 중에서도 에스퍼가 있기는 하기 때문에 그들이 있는 구역이 있는 반면, 이능청 주변의 국경은 B급에서 C급 에스퍼들이 번갈아가며 지키고 있었다. 예전엔 이곳을 넘어오는 귀순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괴수들이 나타난 이후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넘지 못한다.

DMZ 연구소에 있는 철책은 도중에 끊겨져있었다. 예전에 괴수 한명이 넘어오면서 끊어놨다고 현재준은 말했다. 복구할 돈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 왜 이런 상태를 두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무렵, 현재준은 문이 없으니까 드나들기 편하다는 말을 했다. 편해서 이 꼴을 놔뒀구나. 인생 참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재준은 자신의 차에서 커다란 가방 하나를 꺼내 지승운의 SUV에 싣었다. 뭔가 싶어 보자 안에서는 총, 쿠크리, 밧줄, 삽, 호미 같은 것이 나왔다. 호미는 대체 왜? 심지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리고 주사기와 검진도구로 추정되는 것들도 있었다.

지승운은 비무장지대에 차를 타고 들어가는 줄은 몰랐다. 유예지는 검진센터로 괴수를 운반하기 전에 승운에게 바퀴자국만 따라 가라는 말을 했다. 차의 바퀴 자국 때문에 풀이 자라지 않은 두개의 맨땅을 제외하면 비무장지대는 풀로 가득했다.

왠지 모르게 길치일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현재준은 길을 잘 찾았다.

이쪽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라, 거기에선 왼쪽 길이다 등등. 분명 유예지의 말대로 바퀴자국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됐지만, 그 바퀴자국이 여러 곳으로 뻗어있어 현재준의 지시 없이는 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운전 잘 하시네요.”

현재준이 말했다.

“에스퍼들은 날아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너지 낭비입니다. 그리고 전 날아다닐 만큼 힘이 넘치지도 않고요.”

“가이드가 없어서?”

“…….”

지승운의 가이드가 없다는 거야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도 딱히 그걸 언급하는 사람들을 기분나빠하지는 않았다. 사실이니까. 하지만 왜 현재준의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신경이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있습니다, 가이드.”

“예. 그렇겠죠.”

“…….”

“가이드가 있으면 날아다닐 수 있나요?”

“그건 왜 물으시죠?”

“날아다닐 수 있으면 비행종 괴수 하나만 잡아주실 수 있나 해서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승운이 황당한 얼굴로 재준을 보다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괴수가 있었다. 목덜미의 싸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급수는 높은 괴수였지만 아직 발달이 덜 됐다. 새끼? 그것보단 조금 더 컸다.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 승운이 차를 세우자마자 재준이 바로 조수석에서 내려 뒤에 실어둔 가방을 꺼냈다. 승운이 따라 내리자 현재준이 “괜찮습니다.” 하고 말했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몰라 승운이 재준을 바라보자 그가 이어 말했다.

“지승운 에스퍼는 힘쓰지 마세요. 어차피 가이드도 없는데.”

“……못 찾은 겁니다.”

승운이 말하면서도 황당해했다. 아무리 가이드가 없다고 해도 S급 에스퍼다. 지금은 몸 상태도 굉장히 안정적이어서 그가 원하는 대로 하늘을 날아 비행종 괴수를 잡아줄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 스무 마리의 괴수의 습격을 받는다고 해도 승운은 유유자적하게 물리치고 현재준을 무사히 연구소까지 호위할 수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가이드가 없으니 힘쓰지 마라니.

“괜히 걸리적거리면 안 되니까 차에 있어요. 큰 괴수가 나타나면 전 무시하고 도망치시고요.”

걸리적…….

“괴수가 나타나면 현 박사님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저는, 어떻게든 살아나올 수는 있습니다만 지승운 에스퍼를 지켜드리진 못합니다.”

이어지는 말에 승운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일반인한테 보호를 받은 건가? 지켜드리지 못한다고? 그는 살아생전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애초에 에스퍼로 각성을 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승운은 어릴 때부터 강했다. 누가 봐도 얘는 에스퍼로 각성할 것이라고 말했고 승운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호신술을 배우고 운동을 하며 미래를 위해 준비했다. 그야 일반인의 몸으로 괴수를 잡을 수는 없겠지만, 제 발로 걸음마를 시작한 이후 누군가에게 지킴을 받아본 적은 없다.

“진심입니다, 지승운 에스퍼. 괜히 괴수가 나타나면 싸우려고 들지 마시고…….”

“언제까지 지승운 에스퍼라고 부를 겁니까?”

승운이 물었다. 현재준은 잠시 승운을 바라보더니 “지승운?” 이라고 말했다.

“존칭은 붙여주시죠.”

“지승운 씨.”

“예.”

“위험하니까 차에 들어가 있어요.”

이런 취급은 처음이었다. 승운이 안 된다고 말을 하기도 전에 현재준은 단호한 얼굴로 차를 가리켰다.

“들어가요.”

그 명령이 너무나도 익숙하고 박력 있어 승운은 말없이 차에 탔다.

재준은 능숙하게 잡힌 괴수의 철책을 손으로 끌었다. 힘이 강하다. 승운은 저게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건가? 생각했다. 재준이 가방 속에서 패드와 주사기를 꺼냈다. 뭘 하는가 봤더니 만두의 상태를 점검하는지 이리저리 살피더니, 장갑을 낀 손으로 괴수를 당겨 살을 잘라냈다. 괴수가 끼기긱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 다음엔 주사기였다. 괴수의 혈액을 빼낸 현재준은 뚜껑을 잘 닫아 가방에 넣은 뒤 다른 주사기와 약병을 꺼냈다. 그리곤 괴수에게 약품을 투여했다. 괴수가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것이 보였다. 현재준은 아무렇지 않게 무너져가는 괴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괴수가 완전히 바닥에 쓰러졌을 때 괴수를 잡아둔 철책의 문을 열었다. 승운이 미친 거 아니냐고 말하며 차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현재준이 그를 바라봤다. 나오지 말라는 얼굴이었다.

재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승운이 있는 차량에 탑승하고 안전벨트를 맸다.

“……뭡니까?”

주어 없는 질문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던 재준은 이내 승운의 질문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아.” 하더니 이어 말했다.

“만두는 비무장지대에서 방생해서 기르고 있는 괴수 중 하나입니다. 어릴 때는 연구소에 있었죠.”

“…….”

“괴수 생태를 알아보는데 유용합니다. 가장 흔한 형태의 괴수니까요.”

“허.”

“학명 알려드릴까요?”

“필요 없습니다.”

“운전하세요. 직진해서 오른쪽으로 빠지면 됩니다. 아, 가기 전에 한 곳 더 들릴 곳이 있긴 한데 근처에 도착하면 말하겠습니다.”

재준이 말했다. 승운이 핸들을 돌렸다.

현재준은 승운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유예지가 예쁘다 잘생겼다 종종 말하기는 했기 때문에 그의 외모가 뛰어난 것은 알고 있다. 그게 아니어도 재준의 눈에도 지승운은 참 예뻤다. 딱히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재준이었지만, 굳이 다른 누군가와 지승운을 나란히 둔다면 지승운을 선택할 정도로 그의 얼굴 하나하나가 마음에 맞아떨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승운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현재준이 “아닙니다.” 답하고 정면을 바라봤다.

“여기서 왼쪽으로 빠지면 커다란 나무가 있을 겁니다. 그쪽으로 가주세요.”

재준이 말했다. 승운은 재준에게 한번 시선을 준 뒤 핸들을 틀었다.

현재준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70년 가까이 인간의 발길이 닫지 않은 곳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많았지만 이 나무는 유독 컸다. 승운이 차를 세우자 현재준이 조수석에서 내리며 말했다.

“위험하니까 나오지 마세요.”

“…….”

그러니까 안 위험하대도.

하지만 승운은 재준의 말을 들었다. 안전벨트만 푼 채 차에서 대기하며 그가 뭘 하나 지켜봤다. 재준은 호미와 쿠크리를 챙겨들었다. 호미는 어울리는데 쿠크리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괴수학 박사들이 저런 무기를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재준은 조심스럽게 나무에 다가갔다. 이곳에 서식하는 괴수는 예민해서 낯선 이가 오면 공격하기 십상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하나만 떼어와야지. 호미를 쥔 손에 힘을 준 현재준은 살금살금 걷다 시피 그곳으로 다가갔다. 문제는 그가 조심스럽게 걸으며 작은 돌맹이 하나를 차며 시작됐다.

톡! 데구르르…….

겨우 엄지손톱만한 돌멩이였다.

구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는데 현재준의 귀에는 똑똑히 그게 들렸다. 그리고 앞에 있는 괴수도 그 진동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이고, 큰일 났네.

현재준이 생각하는 순간 나무 뒤에서 갈색 줄기가 방사형으로 뻗어져 나왔다. 그 와중에 힘이 빠져 손에 있던 쿠크리는 떨어뜨렸다. 차라리 호미를 떨어뜨렸어야 했는데. 그러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재준이 태평하게 이를 어쩌나 생각할 때, 핸들에 기대듯 엎드려 현재준을 지켜보던 승운은 벌어진 사태에 놀라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재준은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식물 줄기에 낚여 거꾸로 매달린 재준을 보며 기겁을 한 것은 오히려 승운이었다. 승운이 바닥에 떨어진 쿠크리를 집어 식물의 줄기를 잘라냈다. 현재준이 순간 “안 돼!” 하고 소리쳤지만 그 말은 무시했다.

현재준이 아직 허공에 있을 때 승운은 괴수의 핵으로 보이는 곳에 쿠크리를 던졌다. 쿠크리가 박히자마자 모든 줄기들이 일제히 멈췄다.

승운은 떨어지는 현재준을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끈적한 것이 재준의 몸에 묻어있었다. 찝찝함에도 불구하고 승운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승운이 현재준을 자신의 몸에서 떼어내며 “미쳤습니까?” 물었다. 현재준이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 무서웠나? 괜히 화를 냈나? 승운이 생각하며 “현 박사?” 하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우리, 고사리가.”

고사리라니. 저 촉수 달린 식물 종 괴수를 말하는 건가.

“기르는데 오래 걸렸는데…….”

“…….”

이거,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저건 괴수였다. 지금 VIP가 괴수에게 공격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 종입니다.”

현재준이 말하며 양 손을 얼굴에서 떼어냈다.

“……그런 걸 왜 이런 은밀한 곳에서 기릅니까? 사람을 안 해치는데.”

“연구소 근처에서 길렀더니 자꾸 사람들을 끌어당겨서요. 특히나 가이드들을.”

그거 충분히 위험이 되는 것 같은데, 지승운이 판단하는데 재준이 이어 말했다.

“그래서 에너지를 섭취하죠.”

“예?”

“에스퍼처럼.”

현재준의 말에 승운이 얼굴을 확 붉혔다. 에스퍼처럼 가이드의 에너지를 섭취하는 식물종 괴수. 당연히 성적인 게 연상이 됐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어떤 식으로 가이딩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성적 교류가 특별히 부끄러운 것도 아니었는데 재준의 입에서 나오자 그게 더 야하게 느껴졌다.

재준은 호미를 든 채 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나무 옆쪽에 작은 줄기가 움직였다.

“다행히 새끼를 쳤네요.”

“…….”

새끼를 어떻게 치는데? 에너지를 흡수해서?

“작은 거 보니 나온 지 얼마 안됐군요. 이제 겨우 본체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데. 뭐, 뿌리 번식이 다 그렇죠.”

그렇게 말하며 현재준이 호미로 괴수의 주변부부터 파고 들어갔다.

뿌리 번식이었구나. 승운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자기가 뭘 떠올렸는지 깨닫고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미친, 미친, 미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왜 저런 사람한테!

애초에 현 박사는 일반인이고 승운에겐 자신의 가이드가 있었다. 아직 못 찾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찾아내 평생 행복하게 해줘야 할 가이드를 놔두고 어디서 되먹지 못한 이상한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건지 모르겠다. 승운이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현재준을 바라봤다. 그가 고사리라고 불렀던 식물종 괴수에게서 나온 체액에 입고 있던 옷이 젖어있었다. 옷을 녹이는 형태는 아닌 듯 했지만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그의 몸 굴곡이 드러났다. 복근이 있었다. 생각보다 가슴도 탄탄했다.

“데려가서 영양을 좀 줘야겠어요.”

그렇게 말한 현재준이 괴수를 안아 올렸다.

영양이라니. 어떤 영양? 순간 승운의 머릿속에 희뿌연 액체와 야릇한 표정의 현 박사, 그리고 저 작은 괴수가 떠올랐다.

……미쳤냐고!

승운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열린 차의 도어 미러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목부터 얼굴까지 새빨개진 모습에 승운이 입을 막았다.

“지승운 씨?”

재준이 승운을 불렀다. 승운은 대답하지 못한 채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아, 그것 때문에. 현재준이 생각했다. 그는 익숙하지만 지승운 에스퍼는 이 상황을 겪은 것이 처음일 것이다.

“괜찮습니다, 지승운 씨.”

“……뭐가 말입니까?”

“고사리의 체액은 원래 최음 효과가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거죠. 한번 겪으면 그 쾌감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현재준이 말하다가 말을 멈췄다. 승운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최음 효과? 근데 왜 저 사람은 멀쩡하단 말인가? 역시,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저 괴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그런데 왜 나만 이렇게 빨갛고 저 사람은 괜찮은데? 이게 정상적인 거 아냐? 왜…….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줄까요?”

현재준이 말했다. 승운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현재준이 턱짓하며 승운의 하반신을 바라봤다. 승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섰다.

미친, 세웠다.

아니, 세운 게 아니라 고사리 때문이다.

고사리가 그런 것이다. 그것보다 섰다. 가이딩을 받을 때도 살기 위해 겨우 세우는 물건이 그런 상황도 아닌데 제 멋대로 서버린 것이다.

승운이 얼굴을 가려야할지 밑을 가려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머뭇거리자 현재준이 피식 웃어보였다. 음란하다느니 지조가 없다느니, 에스퍼들은 다 짐승이라느니 하는 말을 듣고 살았는데 고작 남 앞에서 세운 걸로 저렇게 빨갛게 변하다니. 보통 에스퍼라면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배출을 해 낼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승운이 버벅이며 “이게…… 그게…….” 하는 말만 내뱉었다.

“자리를 피해드릴까요? 빼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혼자 못하십니까? 설마 도와드려야 하는 건.”

“현재준 박사님!”

귀엽네. 현재준이 생각했다. 귀까지 빨개진 지승운은 자신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시선을 잔뜩 피하던 지승운이 슬쩍 재준을 바라봤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승운의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오르더니 대뜸 자신의 제복 재킷을 벗어 현재준에게 건넸다. 현재준이 뭔가 싶어 승운을 바라봤다.

“입으세요.”

“…….”

“입으세요, 속이 다 비칩니다.”

그 말에 현재준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확실히 옷이 몸에 달라붙어있긴 했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자기는 세워놓고…….

이것도 경호의 일종인가? 그것보다 자신이 이 옷을 입는 것 보단 저 재킷을 승운의 허리에 두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재준은 생각했다.

“박사님.”

“저한테 조금 커 보이는데요.”

게다가 입었다간 제복에도 체액이 잔뜩 묻어날 것이다.

승운이 재준을 바라봤다. 맞을 것 같은데. 기껏해야 한 사이즈 정도 차이가 날 것 같았다. 게다가 재준의 덩치가 자신보다 약간 작기는 했지만 어디 가서 뒤떨어질 몸도 아니었다. 제 옷이니 크게 느껴지겠지만, 웬만한 에스퍼보다 몸이 좋다. 특히나 탄탄한 가슴이나 복부의 굴곡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승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걸 남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냥 입으세요.”

승운이 강요하듯 말했다. 재준은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자켓을 받아 걸쳤다. 그러자 승운이 안심한 듯 한숨을 쉬고는 차에 올라탔다. 재준도 뒷좌석에 괴수를 태운 뒤 조수석에 앉았다.

“지승운 씨.”

“……예.”

“세차비는 제가 대겠습니다.”

현재준의 말에 승운이 그를 바라봤다. 현재준은 승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표정이 할 말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승운은 현재준을 보며 한숨을 푹 쉬더니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출발할 겁니다. 박사님도 안전벨트 매세요.”

재준이 벨트를 착용하는 걸 확인한 승운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더니 엑셀을 밟았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차를 보며 역시 운전을 잘 한다고 현재준은 생각하며 지승운을 한번 바라봤다. 승운은 현재준의 시선을 느꼈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현재준의 시선이 자신의 하반신에 꽂혔을 때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연구소로 돌아오자마자 승운은 화장실로 향했다. 현재준은 승운에게 재킷을 줄까 하다가 급하게 가는 모습을 보며 그냥 위층으로 올라갔다.

유리벽 너머로 자신이 승운의 에스퍼 제복 재킷을 입고 오는 것을 본 가이드들이 표정을 굳혔다. 유예지는 아직 현재준을 바라보지 못했다. 현재준이 출입증을 가져다 대자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예지가 “오셨어요?” 묻다가 멈췄다.

“아니, 그 재킷…….”

“어.”

“또 고사리한테 당한 거예요?”

예지가 물었다. 현재준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사리의 표본을 채취하는 과정에서는 늘상 있던 일이었다. 그래도 요새는 익숙해져서 손에만 미끌거릴 정도였는데 걸친 재킷과 젖은 바지를 보니 온 몸에 고사리 체액을 칠하고 온 듯 했다.

“맞다, 고사리가 죽었어.”

“예에? 뭐라고요? 아니 그걸 얼마나 힘들게 길러냈는데.”

“그래서 여기.”

현재준이 말하며 작은 식물종 괴수를 건넸다.

“고사리 새끼 쳤어요?”

“다행이지.”

“어쩌다가 죽은 건데요? 지승운 에스퍼가 그랬어요?”

“내가 공격당하는 줄 알았나봐.”

그렇게 말한 현재준이 얼굴에 묻어있던 체액을 슥 손으로 닦아냈다.

“괜찮아요?” 예지가 물었다.

“응. 백신 맞은 지 아직 한 달 안됐어.”

고사리의 체액이 이상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현재준이나 예지나 다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당하면 하루 종일 성적 충동이 사라지지 않는데, 연구자의 입장으로서 그걸 그대로 당하기도 그렇고 놔두기도 그랬다.

그래서 현재준은 그들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백신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물론 아직 상용화하기는 이른 임상용이었다. 현재준은 자신의 몸을 임상 실험에 사용하고 있었다. 예지도 참여하겠다고 했지만, 위험하니까 자신만 백신을 맞고 고사리에게 다가가겠다고 현재준은 말했다.

“아이고, 두야. 안 그래도 고사리는 잘 죽는 편이라 그만큼 기르는 게 힘든데.”

“고사리 6세가 힘내겠지. 이건 육아실로 보내줘.”

나무 뒤에서 기르던 고사리는 3세였다. 1세와 2세, 4세는 죽은 지 오래다. 5세는 아직 살아있다. 그 자리에 다시 새로 심어야했다. 그곳은 고사리가 제일 잘 자라는 반 음지였으니 말이다.

“알겠어요.”

그렇게 말한 예지가 장갑을 꼈다. 새끼여도 괴수는 괴수라 체액에 닿으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겼다. 아니, 그 전에……. 예지가 한숨을 쉬었다. 현재준 박사는 아무렇지 않게 손에 묻어난 체액을 닦아냈는데, 아마 저 상태로 계속 일을 하려는 듯 했다. 예지가 현재준 박사에게 이리 와보라고 말하자 현재준이 예지 앞에 섰다.

“씻고 하세요. 샤워실 앞에 옷 갖다 드릴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예지가 손을 뻗어 현재준이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겼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현재준과 예지의 시선이 곧바로 문 쪽을 향했다. 지승운이 굳은 얼굴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승운이 물었다. 왜 저래? 예지가 생각했다.

“그건 제 재킷인데요.”

마치 화를 내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유예지 연구원?”

마치가 아니라 진짜 화를 내고 있었다.

***

승운은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현재준이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잔뜩 선 물건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현재준이 그런 자신에게 시선을 줬다가 몸을 돌려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사실은 이대로 끌고 들어가서 박고 흔들어서 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한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니, 이건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 고사리라는 놈의 체액이 그렇다지 않은가. 승운이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현재준 박사의 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대로 자위를 했다간 그 대상이 누가 될지 뻔했다. 이래도 되나? 의문이 들었다. 다른 사람을 가지고 자위를 해도 되나? 그 현재준 박사를 대상으로?

하지만 머릿속과 달리 손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퍼스너를 내리고 드로즈를 끌어내리자 성기가 튀어 올랐다. 이렇게 세운 적은 처음이었다. 승운이 씨발, 하고 작게 내뱉으며 자신의 물건을 잡았다. 복부에 들러붙은 티셔츠 너머로 도톰하게 올라와있던 가슴이 떠올랐다.

“……큿.”

상하로 움직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근육이 두드러진 매끈했던 몸, 단단했던 팔과 거칠어 보이는 손, 그리고 얼굴.

못생겼어.

분명히 현재준 박사는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얼굴이 매끈하고 코가 오똑하기는 했지만 눈이 너무 작았다. 하지만 도톰한 입술은 먹음직스러웠다. 그 입술이 아래에 닿는다면 어떨까? 생각만 했는데도 복부가 떨려왔다.

우악스럽게 귀두를 문지르며 승운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 몸을 빨고 싶었다. 핥아 올리고 싶다. 입술을 깨물고 입 안을 침범하고 싶었다. 입에 박아 넣고 싶다. 체액으로 뒤덮인 셔츠를 벗기고 만지고 싶었다. 가슴을, 복근을, 그 아래까지도.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잔뜩 문지르고 싶다. 그 구멍에 넣어서 흔들고 싸고 싶다. 아니, 얼굴에 싸고 싶다.

안경을 쓴 현재준 박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머리카락을 잡아 올려 이마를 드러내게 한 뒤 안경 위로 정액을 뿌리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승운의 몸이 움찔대며 정액을 배출했다.

“읏…… 흐!”

손에 묻어난 정액을 바라보며 승운이 “하…….”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시여.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누굴 상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충동이 일어난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수많은 가이드들과 뒹굴면서도 성적 충동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그건 그냥 살기 위한 것이었다. 현 박사의 말대로 목숨줄이었기에 박고 흔들어댄 것이었다. 살기 위해서.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섹스하고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현재준 박사와 하고 싶었다.

“아, 제기랄.”

게다가 물건이 여전히 팽팽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화장실에 처박혀 자위를 할 수는 없었다. 승운은 휴지로 묻어난 정액을 닦고 성기가 도드라지지 않도록 잘 수납한 뒤 나와 손을 씻었다.

거울로 보이는 얼굴이 붉었다. 나른해 보이는 표정이 정사 직후처럼 보이기도 했다.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다른 이의 이런 얼굴을 보는 것도, 자신이 보여주는 것도 늘 있던 일이니까.

젖은 손을 닦은 승운이 계단을 올랐다. 현재준 박사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말하지 않아도 그가 자위를 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변명해봤자 구차할 것 같았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현 박사가 있는 방의 유리벽을 바라 봤을 때 승운은 몸을 굳혔다. 그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유예지 연구원이 현재준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겼다. 승운이 출입증을 가져다 댔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지승운에게 유예지는 경계대상이 되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유예지 연구원?”

승운이 다시 한 번 싸늘하게 말했을 때 예지도 인상을 찡그렸다. 미친 에스퍼 새끼. 일반인이 지 옷에 손댄다고 지랄하는 것 좀 봐.

“왜요? 제가 에스퍼 제복 건드리면 안 됩니까?”

“뭐라고요?”

“그럼 세탁은 직접 하시던가요. 박사님은 어서 샤워실로 가서 씻고 나오세요. 언제까지 그걸 묻히고 있을 거예요?”

“어, 잠깐만. 재킷 주지 마.”

현재준이 예지의 손을 막았다. 승운이 표정을 굳혔다. 맞닿은 두 사람의 손에 기분이 나빠졌다.

“지승운 에스퍼.”

“호칭 가볍게 하기로 했잖아요.”

승운이 말했다. 저 새끼는 또 왜 저래? 예지가 생각했다. 재준이 예지에게 “재킷 세탁소에 보내드려 줄래?” 하고 부탁했다. 직접 하라고 할까 하다가 장갑도 없고 세탁소 위치도 모르는 남자가 퍽이나 저걸 들고 갈 것 같았다. 게다가 괴수 체액은 일반 하수로로 내보내서는 안된다.

예지가 재킷을 들고 지승운의 곁을 지나가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지승운 씨.”

“예, 현재준 박사님.”

“고사리는…… 그러니까 괴수 MKR-07번의 체액에는 최음 효과가 있습니다. 직접 겪으셔서 아시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현재준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아래로 향했다. 안 빼고 왔나보네. 생각한 현재준이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지승운은 벌게진 얼굴을 돌렸다.

“저는 백신을 맞아서 상관없지만, 지승운 씨는 그게 24시간에서 30시간은 영향을 받을 겁니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네요.”

“……백신이요?”

“상용화 된 건 아니고 임시로 만든 겁니다. 임상실험은 동물에게만 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서 고사리를 맨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건 저 뿐이거든요.”

아니, 그게 뭐라고 자기한테 직접 실험을 해? 위험하면 어쩌려고? 지승운이 황당한 얼굴로 현재준을 내려다봤다.

“그 재킷을 다시 잡게 되면 묻은 체액의 양이 많아져서 아마 더 오랜 시간 고생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뭐, 지승운 씨의 경우 그러한 상황에 따라 도와주실 많은 가이드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안 해요.”

“예?”

“다른 가이드들이랑 안 한다고요.”

“……지승운 씨가 당신의 가이드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가이딩을 안 받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상태가 좋다고 해도 힘을 조금 쓰면 금세 안 좋아지는 게 에스퍼인데. 가이드를 찾기 전까지는 다른 누군가의 가이딩을 받으셔야죠.”

“…….”

승운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현재준 박사는 당연한 말을 하고 있었다. 에스퍼는 지속적인 가이딩이 필요했고 승운처럼 폭주 상태에 도달했던 가이드들은 더욱 더 신경을 써야했다. 오히려 지금처럼 상태가 좋을 때 가이딩을 해서 더 이상 위험수치로 올라가지 않도록 관리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현재준이 자신에게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하라고 하자 기분이 나빠졌다.

왜지? 그가 내 가이드도 아닌데.

“언제까지 수절을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수절이 아니라…… 가이딩은 가이딩일 뿐입니다. 수절이라니,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아니, 에스퍼가 가이딩을 안 받는 건 수절이랑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현재준이 유리벽 너머를 바라봤다. 가이드 연구원들이 이쪽에 신경을 쓰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서도 승운과 주기적으로 나갔던 가이드가 유독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곳을 응시했다.

“저 연구원…… 그러니까 가이드 연구원도 반차를 쓰게 해드리죠. 오늘은 두 분 모두 일찍 퇴근하세요.”

“현 박사님!”

“왜 그러십니까?”

승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내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왔는지 말을 하면 이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궁금했다. 분명 끔찍하고 혐오스럽다는 얼굴을 하겠지.

애초에 현재준 박사가 헤테로인지 게이인지, 아니면 바이인지 조차도 모른다. 가이드나 에스퍼라면 대부분 바이섹슈얼이겠지만 그는 일반인이지 않은가. 일반인들은 자신이 에스퍼에게 성적 대상이 되는 것이 무서울 것이다. 말을 할 수 없다. 당장이라도 붙들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현재준 박사는 가이드가 아니다.

승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무언가를 부수고 싶었다. 승운은 평소 충동을 억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그는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가 없다. 살고 싶다는 마음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왜 이 사람은 가이드가 아니지? 그 생각이 들자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느껴졌다. 분명 제7센터 어딘가에 내 가이드가 있다. 그가 날 살려줬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그것도 일반인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데, 들러붙은 옷을 입은 현재준 박사의 몸에 자꾸 시선이 갔다. 갈무리해둔 아랫도리에 더더욱 피가 몰렸다. 끔찍하다. 자신이 이렇게 끔찍한 에스퍼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역겨웠다. 누구한테 독점욕을 드러내는 거야, 도대체?

“전 괜찮습니다.”

승운이 씹어 내뱉듯 말했다.

“현 박사님과 함께 퇴근할겁니다. VIP 경호가 우선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하지만 연구소에서는 지금 제가 필요 없을 테니 퇴근에 맞춰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검진 센터에 있겠습니다. 박사님 말대로 고사리…… 괴수의 영향이 있으니 이에 따른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네요.”

승운의 말에 현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유예지가 들어오며 말했다.

“세탁소에 연락해뒀어요. 2시간 뒤에 찾으러 오라고 하네요. MKR 체액이 묻어서 조심하라고도 전달했고요.”

“고마워, 예지야.”

왜 저 여자는 예지고 나는 지승운 씨야? 아니, 그마저도 편하게 부르라고 해서 지승운 씨까지 온 거지 지승운 에스퍼가 기본 호칭이지 않았는가.

“그러면 전 씻고 오겠습니다.”

현재준이 말하며 승운을 지나쳐갔다. 그때 목덜미 사이로 어떤 냄새가 났다. 괴수의 냄새? 아니다. 뭔가 이상한, 고양시키는 듯한 냄새였다. 예지는 나가는 현재준을 향해 옷은 샤워실 앞에 둘게요, 하고 말했다. 현재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것을 아는 듯한 얼굴에 승운은 화가 났다.

그가 유예지를 노려보자 예지는 왜 저래? 하는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지승운 에스퍼.”

“왜 그러십니까.”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딱딱한 목소리로 나갔다.

“옷은 세탁소에서 직접 찾아가세요. 중앙 본부에 있어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검진센터로 가야했다.

***

이경원은 제7센터가 마음에 들었다. 아니, 이 도시- 그러니까 읍내가 마음에 들었다.

일단 에스퍼든 가이드든 다들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승진의 압박 같은 것도 신경 쓰지 않았고 서로 좋으면 붙어먹고 아니면 말고 하는 관용이 있다고 해야 할까. 과연 이능력자를 위한 곳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나도 이쪽으로 발령신청을 할까, 이경원은 절대 하지 않을 일을 생각하며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있는 지승운을 바라봤다. 저 새끼는 등치는 산만해서 저게 뭔 꼴이야. 경원의 시선을 느낀 지승운이 말했다.

“야.”

“왜.”

“나 자위했어.”

“…….”

이 또라이 새끼가. 그걸 자신한테 말해서 어쩌자는 건가? 아니, 그것보다.

“야. 아깝게 왜 자위를 해? 아무나 잡고 뒹굴지.”

“아무하고나 하기 싫어.”

“아, 그래서 얼굴도 모르고 찾지도 못한 네 가이드를 떠올리며 자위라도 했냐? 그게 가능하다니, 잘났다. 새끼야.”

기껏해야 남자 손이라는 거 밖에 모르는데 그걸로 뭘 얼마나 상상해서 했대? 미친놈. 경원의 말에 승운이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그의 가이드를 대상으로 자위를 했으면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경원도 승운의 침묵을 알아차린 것인지 “뭐, 아냐?” 물었다.

“나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와.”

아니, 뭐 그 정도야. 이경원이 생각했다.

“근데 일반인이야.”

미친 새끼 맞네. 이경원이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그것도 곱게 미친 게 아니라 지독하게 미쳤다.

“어쩌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묻는 승운의 얼굴이 상기되어있었다. 얘는 왜 나한테 이딴 얼굴을 하고 지랄이야. 그 표정에 기분 나빠진 경원이 어쩌긴 뭘 어째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

“그 사람이랑 하고 싶어.”

“…….”

“하지만 일반인이잖아. 날 더럽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야, 이…… 미친놈아.”

일반인들이 에스퍼나 가이드에 대한 시선이 그런 거야 유명한 일이었다. 뭐, 실제로 지승운이 그동안 뒹군 사람들이 한두 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에스퍼치고 유독 많은 것도 아니다. 그와 매치가 맞아떨어지는 가이드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만 더 많았더라도 경원은 그래, 네가 좀 많은 사람들과 자긴 했지 말했겠지만 에스퍼에게 그 정도의 상대는 평균이었다.

“더럽다고 생각하면 뭐 어때. 그냥 자빠뜨리던가. 에스퍼랑 자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도 많잖아.”

“그 사람이 게이인지 바이인지 몰라.”

“남자야?”

가이드인 남자라면 모를까 일반인 남자한테 흑심을 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확실히 에스퍼나 가이드라고 해도 사람마다 선호하는 성별이 있기 마련이었다. 경원은 그동안 지승운의 선호도가 여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다만 체력적으로 약하니 남성과 더 어울리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닐지 모른다.

“너 지금 가이드가 없어서 정신적으로 불안해서 그래. 그러니까…… 왜 서 있냐? 빼고 왔다며?”

경원이 승운의 허벅지를 보며 말했다. 하필 제복이 몸에 잘 맞게 재단되어서 그런지 도드라진 물건이 확연하게 보였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어느 정도 발기해도 감출 수 있을텐데 저 새끼는 뭐가 저렇게 무식하게 커서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지 모르겠다. 같은 수컷으로서 자격지심과 부러움을 일으키는 물건에 경원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고사리 때문이야.”

“고사리?”

“괴수 MKR-07의 체액.”

“……아, 그 식물종 괴수.”

왜 그 괴수를 고사리라 부르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다른 생각덕분에 쉽게 잠들었다. 경원이 물었다.

“너 그 괴수의 체액이 닿은 다음에 그 사람이랑 자고 싶은 거야?”

“…….”

“난 또 뭐라고. 네가 진짜 좋아하는 줄 알았네.”

“아니야?”

“아냐, 인마. 그거 그냥 호르몬 효과야. 걔네가 최음 작용이랑 호르몬 조절이 가능해서 그래. 그 체액이 묻은 다음 처음 본 사람을 보면 좋아하는 감정이 느껴지는 거, 다 화학 작용이라고. 그 괴수 별명이 ‘사랑의 묘약’이다, 인마. 고사리가 아니라. 그거 하루만 지나면 사라져.”

“진짜야?”

“그래, 진짜야. 아 씨. 깜짝 놀랐네.”

승운이 “그래?” 하고 물었다. 납득을 하는 얼굴 같지는 않지만 저것도 지금 체내에 작용하는 괴수의 호르몬과 화학성분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자위 대상이…… 아냐. 말을 말자. 어차피 연구소에 있는 사람 중 하나겠지.”

그렇게 말한 경원은 마침 잘 됐다며 피나 좀 뽑자고 말했다. 승운이 망설임 없이 제 팔을 내밀었다.

“자고 일어나면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스스로도 이해 못 할 거다.”

“다행이네.”

승운은 그렇게 답했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정말 이 감정이 좋아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냥 호르몬과 화학작용에 일어난 것일까? 그 작용은 이능력자와 일반인의 경계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 이 감정이 가짜라면…… 어떻게 이 감정을 실제로 느낄 수 있을까? 자신의 가이드를 만나면 그렇게 될까? 승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경원은 뽑은 피에 스티커를 붙이고 알코올 솜을 뜯어 승운에게 건넸다.

“됐으니까 빨리 가이드나 찾아. 아, 그리고 다음 주에 경호 인원 늘린다더라. 아직 공문은 안내려왔는데, 곧 내려 올거야. 난 누나한테 들은 거라.”

승운이 능숙하게 자신의 팔을 알코올 솜으로 누르며 되물었다.

“왜 늘려?”

“세계괴수협회 사람들이 DMZ연구소를 방문한대.”

“컨퍼런스는 서울에서 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 근데 여기도 오겠다는데 어쩌냐. 안 그래도 A급 에스퍼 몇 명도 배치됐다고 미선누나가 말했어.”

“알았어.”

승운이 대답하며 일어섰다.

*

승운은 퇴근시간에 맞춰 연구소로 향했다. 세탁소에서 찾아온 재킷 역시도 몸에 걸친 채였다. 슬슬 여름이 다가와 날이 더울 텐데도 고성은 시원한 편이었다. 그래도 하복으로 바꾸긴 해야 할 것이다. 승운이 오자 가이드들이 반색했다. 자신들을 태워줄 것이라 생각한 듯 했다. 승운은 웃어 보인 뒤 그들을 지나쳐 현재준과 유예지 앞에 섰다.

“태워드릴게요, 박사님.”

그렇게 말하며 승운이 예지를 바라봤다. 경계하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경계가 되는 여자였다. 유예지가 황당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다.”

“박사님 경호가 제 일이에요.”

그 말을 들은 유예지가 “예, 그러세요.” 라 말했다.

“박사님은 지승운 에스퍼 경호를 받으며 오세요.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차에 타서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거는 예지를 보며 재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을 하다가 승운을 따라갔다. 승운이 차에 타서 벨트를 매는 현재준을 확인하고는 어디로 갈까요? 물었다. 그러면서 시선은 예지에게 향했다. 왜 아직 출발하지 않고 저기 있는지 모르겠다.

“유예지 연구원을 따라가면 됩니다.”

“…….”

“왜 그러시죠?”

“설마 유예지 연구원과 함께 삽니까?”

“그럴 리가요.”

현재준이 말했다. 예지와는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그녀와 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연구원들의 연봉이 나쁜 편이 아니라 집세를 아끼기 위해 같이 살 필요도 없었다. 이곳이 같은 모국어 쓰는 사람 찾기 힘든 구만 리 타지였다면 생각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여긴 한국이다. 유예지는 업무동료로서 괜찮았지만 사생활로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저거 제 차입니다.”

현재준이 말하자 승운이 입을 다물었다. 앞서 움직이는 차는 자신을 놓치지 않도록 일부러 천천히 가고 있었다. 사실 추월하고 싶었지만 집이 어디인지 몰랐기에 그냥 따라가던 승운은 재준이 하는 말에 당황했다.

“왜 유예지 연구원이 박사님 차를 운전하죠?”

도대체 얼마나 가까운 사이길래 차를 맡겨? 물밀듯 밀려오는 짜증은 현재준의 다음 말에 사그라들었다.

“제가 면허가 없거든요.”

“취소되셨습니까?”

“아뇨, 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차는 왜?”

“출퇴근 할 때는 필요해서요. 통근 버스랑 시간 맞추기도 싫고.”

이상한 사람이었다. 진짜 이상했다.

승운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현재준을 또라이 취급했다는 것은 잊은 듯 했다. 분명 이상한데 묘하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 승운은 빨간불로 바뀐 신호에 멈춰서며 재준을 바라봤다. 현재준은 승운의 시선을 느꼈는지 승운을 바라봤다. 안경 엄청 두껍다. 승운이 생각했다.

저 안경을 벗기면 어떨까? 아마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안경 아래의 재준의 얼굴 말이다. 그의 시선이 눈에서 코로, 다시 입술로 내려왔다. 입술이 가로로 작고 도톰했다. 한 입에 들어올 것 같았다. 그때 재준이 말했다.

“지승운 씨.”

“예, 예……?”

“파란 불입니다.”

승운이 고개를 돌리며 엑셀을 밟았다. 유예지 연구원이 운전하는 차와 거리가 조금 벌어졌다. 승운은 말없이 운전했다. 현재준도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묘한 긴장감이 차 안에 감도는 듯 했다.

유예지 연구원이 멈춰 섰을 때, 승운도 뒤따라 멈췄다. 그가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거리에 주차를 하고 있었다. 동네의 특성처럼 보였다.

“내일 아침에 제가 모시러 올게요.”

벨트를 푸는 현재준을 향해 승운이 말했다.

“내일은 주말입니다.”

승운이 아차 했다. 그리고는 “월요일에요.” 라고 말을 돌렸다.

“유예지 연구원이 차가 없어서요. 같이 오는 게 낫습니다.”

“통근 버스 타면 되잖아요.”

“그러면 너무 일찍 도착하거나 너무 늦게 도착해요.”

그렇게 말한 현재준은 더 할 말이 있냐는 얼굴을 하며 손잡이를 잡았다.

그 여자랑 같은 차, 타지 마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 여자가 운전해주는 차도 타지 마요.

하지만 무슨 권리로? 지승운은 어떤 권한도 없다. 만약 그가 현재준과 어떤 사이였다면, 적어도 현재준이 가이드이기라도 했다면 승운은 그걸 내세웠을 것이다. 나는 S급 에스퍼이고 당신은 가이드인데 내 말을 들어줘야 하지 않냐고. 하지만 그는 일반인이고, 유예지도 일반인이다. 그들과 이능력자들의 사는 세계는 다르다.

“알겠습니다.”

승운이 말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사라질 감정이었다.

여기까지만 하자고 승운이 생각했다. 그는 재준과 예지를 한번 바라본 후에 다시 핸들을 돌려 빠져나갔다.

현재준은 예지가 던지는 키를 받아냈다. 예지의 집은 그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오늘 지승운 에스퍼 왜 저래요?”

예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고사리 체액이 묻어서 그렇겠지.”

“고사리 체액…… 어? 아아?”

예지가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 그렇지. 그거 묻으면 상대가 누구든 그냥 좋아지지.

예지는 그 체액이 처음 묻었을 때의 현재준을 떠올렸다.

그때 현재준이 처음 본 것이 만두였다. 그러니까, 괴수였단 말이다. 현재준은 그때 만두와 사랑에 빠졌다. 원래 괴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괴수를 사랑하게 되자 좀 더 이상해졌다.

그렇다고 현재준이 괴수를 향해 사랑고백을 한다던가, 절절하게 여긴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좀 더 애정이 어린 얼굴로 괴수를 바라보며 상냥한 말을 내뱉고, 피를 뽑을 때 아플 거라며 경고를 주고 수고스럽게 피를 다 뽑고, 난 뒤에는 잘 참았다며 괴수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그걸 뜯어 말린 게 유예지였다.

그래. 사람과 괴수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데 에스퍼와 일반인이라니.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같은 종이니까.

“와, 그러면 지승운 에스퍼 질투한 거였네요?”

“질투?”

“제가 박사님 재킷 벗길 때요. 뭐하는 거냐며 다가왔는데, 그게 그냥 일반인이 재킷에 손대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아.”

질투 했었군. 현재준이 생각했다. 질투를 할 것처럼 생기진 않았었는데. 애초에 재준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그게 질투라면, 지승운은 에스퍼 치고는 감정이 격하지 않은 쪽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제 가이드가 없이도 10년 동안 폭주하지 않고 살아남은 거겠지.

“어차피 내일이면 싹 사라질 감정인걸.”

“혹시 또 몰라요. 지속될지도. 박사님 여전히 만두 좋아하잖아요.”

“매실이랑 살구도 좋아해. 고사리도, 사과도, 홍차도, 후추도, 올리브랑 라따뚜이랑 귤이도. 홍시…… 홍시의 명복을 빌자.”

“아, 예.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괴수 사랑 어련하시겠어요.”

인간보다, 이능력자보다 괴수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현재준 아니던가. 예지가 됐다는 듯 손을 휘젓다가 차체에 기대며 물었다.

“박사님 내일은 뭐 할 거예요?”

“밥을 먹고, 밥을 먹어야지.”

“내일 저 암벽 등반 하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야외?”

“네, 바닷가 쪽에 있는 거요. 그거 이번에 새로 관리 했더라고요.”

아, 그거. 십여 년 가량 방치되어 있다가 야외활동을 즐기는 에스퍼들의 요청으로 정비했다고 들었다. 유예지는 에스퍼들 사이에 끼어 유일한 일반인으로서 등반 벽 정비 요청을 했었다.

“귀찮아.”

현재준이 말했다. 편한 곳에 사는데 굳이 위험천만한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에스퍼도 아니고 까딱하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다가 몇 달 병원신세라도 지게 되면 연구는 누가 하고 연구소의 아기들은 누가 돌본단 말인가?

“난 내일 하루 종일 쉴 거야. 게다가 수요일에 손님들도 오고.”

“아, 맞다. 그 분들 오시죠? 어디서 머무신 대요?”

“센터 내에 숙소가 있으니까 거기 있겠지. 애초에 읍내는 할 게 아무것도 없잖아.”

“구경할 건 많잖아요. 환락가.”

“한 명 빼고 전부 일반인들이야.”

현재준이 말에 예지가 기억난다는 듯 말했다.

“시리예가 가이드였죠?”

“응.”

현재준은 시리예랑 반년 간 만났던 사이였다.

***

괴수학을 공부하는 이들 중에 이능력자는 거의 없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300명 중에 에스퍼가 한 명, 가이드가 두 명,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가이드가 추가로 한명 더 있었다. 현재준이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가 만났던 시리예가 가이드였기 때문이다.

스물 일곱 살이 되던 날 생일 현재준은 크게 앓았다.

당시에 남인도 깐누르 시에 있었던 현재준은 어제 먹었던 파인애플 주스에 탈이 난건가 생각하며 손을 땄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열은 사흘이 지속되었고 다들 튼튼했던 재준이 움직이지 못하고 내내 아파하는 것을 보며 걱정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재준은 조금 억울해졌다. 괴수에게 공격당한 것도, 독에 당한 것도 아니고 파인애플 주스를 먹고 죽다니. 어쩌면 그 파인애플 주스가 괴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던 현재준은 어느 샌가 몸이 괜찮아지는 것을 느꼈다.

열이 내리자 주변이 조금 인식이 됐다. 자신이 빌렸던 아파트먼트에서 눈을 뜬 재준은 천장에서 돌아가는 팬을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세상이 뭔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준이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근데도 세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시력이 좋아졌나? 하지만 여전히 앞은 뿌옇다. 안경을 쓰자, 반짝반짝 빛나던 세상이 원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착각이군. 아마 앓고 일어나서 순간적으로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나 보다.

현재준이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시리예는 깨어난 재준을 보고는 놀라며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살아났네, 허니.”

시리예의 말에 현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예가 몸을 떼고 현재준을 바라봤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응.”

“넌 가이드야.”

“……응?”

“네가 아팠던 건 각성 열이었어. 너 가이드야.”

“나 스물일곱 살인데.”

“알아.”

“보통 이능력은 20세 이전에 발휘되잖아.”

“응, 너는 늦게 각성한 가이드야. 말하자면 그건 네…… 아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당시 현재준은 시리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늦게 각성한 가이드가 뭔가 차이가 있나? 이능력자에 대한 정보들은 일반인이 접하기 힘들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과 현재준이 알고 있는 사실에는 차이가 있었다. 늦게 각성하면 뭐 더 안 좋나? 레벨이 낮나? 현재준이 생각하는데 시리예가 그의 시선을 자신의 얼굴에 고정시키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일단 라제쉬 박사를 만나러 가자.”

라제쉬 박사는 왜 만나자는 거지? 현재준이 생각하다, 가이드라는 말을 떠올렸다. 괴수학자 중 가이드는 단 두 명뿐이다. 노르웨이의 시리예 아예르, 그리고 인도계 영국인인 리처드 라제쉬. 리처드 라제쉬는 시리예의 전공 교수이기도 했다.

*

리처드 라제쉬는 원래 생태학 박사였다고 한다. 그는 괴수학을 만들어낸 스무 사람 중 한명이었다. 라제쉬는 가족이 괴수에게 살해당하고, 본인도 가이드로 발현하면서 괴수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배우자인 멜라니 라제쉬 역시도 최초의 아이리쉬 괴수학자였다. 그녀는 괴수학박사 중 유일한 에스퍼이기도 했다.

라제쉬 박사들은 해변 근처의 리조트에 머물고 있었다. 리조트에 가는 길에는 군사병원이 있었고, 회교도와 힌두교 사이의 싸늘한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남인도는 북인도보다 이능력자가 훨씬 많은 곳이었다.

현재준과 시리예는 라제쉬 박사들 앞에 앉아있었다. 멜라니는 지금 듣는 황당한 말에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스물 일곱 살에 가이드 각성?”

“엄청나게 늦었구만.”

리처드 라제쉬가 곁들였다. 그들의 심각한 표정에 현재준은 왜 저러나 싶었다.

“가이드들은 보고를 해야 하는데, 미각인 가이드들에게는 제약이 꽤 많아. 실제로 시리예의 경우도 주기적으로 노르웨이로 돌아가 할당된 가이딩을 하고 와야 하지. 그런데 여기서 허니까지…….”

이 귀한 인재를 IPMC에 넘길 수는 없다는 것이 멜라니와 리처드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시리예도 동의했다. 가이드의 삶은 녹록치 않다. 어떤 일반인들은 가이드의 삶이 일반인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허니가 가이드라는 걸 숨기는 건 어떨까요?”

“숨겨?”

“어차피 허니는 길거리에서 파는 아무 파인애플 주스를 먹고 아팠잖아요. 이질이야 남인도에선 흔한 질병이고, 4일 만에 깨어난 경우도 크게 이상하지 않아요. 보고 할 필요 없이 그냥 더러운 주스 때문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시리예가 말했다. 처음 그가 파인애플 주스를 먹고 아팠다는 말에 멜라니는 이런 멍청이가 있나 하는 얼굴로 재준을 바라봤지만 듣고 보니 그 파인애플 주스를 이용하면 가이드라는 걸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네. 게다가 늦게 각성한 가이드들에 대한 국가의 욕심을 생각하면 숨기는 게 나을 것 같아. 인도랑 한국의 분쟁도 귀찮을 거고.”

“분쟁이요?”

“보통 가이드든 에스퍼든 각성한 나라를 기준으로 신고를 하니까. 시민권 발급도 가능해. 강제로 주는 거긴 하지만. 그래서 20세 미만의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잘 안 시키잖아.”

시리예의 말에 재준은 몰랐다는 얼굴을 했다. 가이드 분쟁도 있었구나. 현재준의 얼굴에 라제쉬 박사들과 시리예가 얘는 아는 게 뭐냐는 얼굴을 하다가 말았다. 이런 것들은 일반인에게 노출되지 않는다. 이능력자로 발현한 뒤 교육을 받아서 아는 것이었다.

“허니의 상태를 보기엔, 멜라니는 각인을 해서 안 되고.”

“다른 에스퍼들에게 말 할 수도 없지. 애초에 가이드는 에스퍼와 달리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아도 문제는 없으니까 다행일지도 몰라.”

“하지만 등급은…… 늦은 각성이라 간이 측정기로 해도 제대로 안 나올 거예요.”

“교육도 문제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어떻게 교육시켜야할지…… 가이딩 방법은 누가 알려줄 건데? 급한 상황이 아니면 본능도 안 나올 텐데. 시리예한테 시킬 수는 없잖아.”

“그럼 내가 해야 하나?”

“애초에 가이딩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파악할 수 없어요.”

“이거 곤란하구만.”

그들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들이 심각한지 재준만 알지 못했다.

“우선, 허니.”

리처드 라제쉬가 현재준을 불렀다.

“전공 교수를 바꾸지.”

“예?”

“내 밑으로 오게.”

“아니…….”

현재준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리처드 라제쉬와 멜라니 라제쉬는 괴수학 학계에서 가히 최고의 인사였다. 지금 현재준의 전공 교수인 박형기 박사는 그와 동일한 한국인이었는데, 그는 사실 실력보다는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에 대한 명예욕이 더 큰 사람이었다. 빨리 괴수학을 전공하여 아직 정규 커리큘럼이 만들어지기 전에 박사학위를 땄으며 제대로 된 연구결과가 없이 한국 내 위치에만 연연했기 때문에 몇몇 괴수학자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라제쉬 박사의 제안은 현재준에겐 유로밀리언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감사한 말씀인데, 왜…….”

현재준이 물었다.

“그건 우리의 연구가 가이드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리처드 라제쉬가 말했다. 리처드와 멜라니는 뛰어난 괴수학자였지만 담당 학생들을 골라서 받았다. 실력이 좋고 입이 무거운 이들로.

하지만 그것도 석사까지일 뿐 박사과정은 시리예 단 한 명뿐이었다.

“허니도 이제 가이드니까 알려주는 거야.”

멜라니 라제쉬가 리처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가이드에게선 특별한 ‘향’이 방출돼.”

“괴수들을 안정시키는 ‘향’이지.”

리처드도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멜라니의 손을 잡으며 이어 말했다.

“페로몬 같은 걸 말씀하시나요?”

현재준이 물었다.

“그래. 괴수는 가이드들을 미워할 수 없어. 에스퍼와 마찬가지로.”

아, 그래서였나. 왜 그들이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에스퍼와 괴수는 한 끝 차이야.”

***

거짓말쟁이.

승운이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며, 일시적인 호르몬과 화학작용 때문이라고 한 것을 믿은 자신이 바보였다.

꿈에 현재준 박사가 나왔다. 금요일 밤도, 토요일 밤도, 일요일 밤도 나왔다.

현재준 박사가 자신의 밑에서 허리를 흔들며 얼마나 야하게 울었는지 생각만 해도 아래가 벌떡 설 만큼의 꿈들이었다.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몸은 MKR-07의 체액으로 미끌 거렸다. 복부를 만지작거려도 흠칫 몸을 떨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유두에 손을 얹기만 해도 움찔거리면서 달큼한 신음을 내뱉었고 가슴을 강하게 주물렀을 때는 자신에게 매달렸다.

이거 진짜지? 실제로 일어나는 거 맞지?

물론 전부 꿈이었다.

“씨발.”

왜 깨어났지. 지금 다시 자면 그 꿈을 이어서 꿀 수 있을까?

꿈에서 현재준 박사는 안경을 벗고 있었는데, 안경을 써도 벗어도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분명 못생겼는데 그 모습조차 귀여웠다. 어떻게 그렇게 귀여울 수 있지? 어쩌자고 저렇게 예쁜 거지? 작은 눈이 귀여워서 그냥 핥아먹고 싶었다.

승운이 박사의 그 덥수룩한 머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잘했어요, 현 박사. 얼굴 계속 그렇게 가리고 다녀요. 얼굴 드러내서 이상한 것이 꼬이느니 그에게조차 얼굴이 보여주지 않는 것이 훨씬 좋았다.

승운은 시계를 확인해 자신의 몸 상태를 봤고,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의 다리 사이를 봤다. 몸은 가이딩이 필요하긴 하지만 아직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저 사그라들 줄 모르는 다리 사이다.

“현 박사.”

간밤에 자다 깨서 현재준 박사를 생각하며 분출한 것이 수십 차례였고 스무 살이 넘어서는 하지도 않은 몽정까지 했다.

“현재준.”

하고 싶다.

뭐든 그와 하고 싶었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정도가 아니라 그냥 뭐든. 같이 밥을 먹는 것도 좋았고 아침에 같이 양치를 하고 싶기도 했다. 밤을 함께 하며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없이 끌어안고 잠만 자고 싶기도 했다.

승운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탐한다는 감정을 알았다.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가이드를 만난다면.

하지만 그 상대가 그가 경호해야 하는 VIP라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다.

“출근길에 납치하고 싶다.”

안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승운이 몸을 일으켰다. 찬물로 몸을 식혀야 했다.

***

승운이 현재준을 데리러 집 앞에 갔을 때 이미 유예지는 현재준과 함께 서서 승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심정을 드러낼 수 없어 창문을 내리고 “안녕하세요.” 웃으면서 인사하자 유예지가 다시 한번 보기 싫게 웃었다.

“지승운 에스퍼.”

왜 저래? 승운이 생각했다.

“저번 주에 저한테 질투하셨죠?”

예지가 말했다. 갑작스럽게 정곡이 찔린 탓에 지승운이 표정을 굳혔다. 예지는 그걸 보고도 맞네! 질투네! 하며 웃었다. 자기가 질투를 한 게 뭐 어떻다는 거지? 자랑스럽기라도 하단 건가?

“역시 고사리의 체액 때문에 저한테 날카로웠던 거구나? 그땐 제가 몰라서 뭐라 했네요.”

단순히 고사리의 체액 때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승운은 아직도 예지가 밉다.

“박사님은 백신을 맞아서 효과가 없거든요. 아, 저도 같이 타고 가도 되죠?”

그렇게 말하며 예지가 문을 열었다. 승운은 이미 타고 있는 예지에게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재준도 조수석에 앉았다.

“박사님도 처음에 고사리 체액에 당하고 나서 그랬거든요. 오래전 일이라 제가 깜빡했지 뭐예요.”

유예지의 말에 승운이 움찔했다. 체액에 당하고 나서 뭐? 누구를? 누구긴 누구겠어. 그 체액을 뒤집어썼을 때 곁에 있었을 사람은 한정적이다. 분명 유예지였다.

열 받게 하려는 건가. 배알이 꼴렸지만 승운은 모른 척 웃어보였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치졸한 마음도, 여전히 질투를 한다는 것도. 그나마 어제보다는 덜해서, 심정을 숨기기는 어렵지 않다.

“그래요? 박사님이 누구랑 사랑에 빠졌는데요?”

자신이라고 말하며 우월감에 휩싸일까? 그 꼴은 더 보기 싫었다.

하지만 웃는 예지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만두요!”

“만두?”

재준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제 같이 갔다 오셨죠? 만두요. 만두가 원래 그 나무 근처에서 살았거든요. 고사리한테 당하고 내려오는데 하필 만두와 눈이 딱 마주친 거죠. 그걸 애지중지하듯 잡아와서 어찌나 상냥하게 말을 건네던지. 피 뽑을 때도 따끔하다~ 참아라~ 아프지 않냐. 쓰다듬으려는 걸 제가 막았다니까요? 만두 머리에 있는 털이요. 그거 전부 가시라서 손에 박히면 회생불가예요. 아예 잘라내는 게 속 편할 정도로 고생을 하는데 그걸 맨손으로 만지려고 아주…….”

만두.

그 괴수새끼가 현 박사의 사랑을 독차지해?

승운이 표정이 싸하게 바뀌자 예지가 당황한 듯 “어, 어…….” 하고 말했다.

“죄송해요. 에스퍼들이 괴수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웃긴 일화라.”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괴수를 싫어하는 정도도 에스퍼 나름이었다. 승운은 괴수에 대한 별다른 감정이 없다. 그들 때문에 고생한 적도 없었고,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터져나가던 것들이니 악감정을 가지면 괴수들이 가져야 했지 승운이 가질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승운은 괴수 하나에게 악감정이 생겼다.

감히 괴수 주제에.

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왜 그가 이렇게 화가 치미는 지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현재준의 사랑을 받는다거나, 애정 어린 시선을 받는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승운은 이러한 감정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 건지 알고 있다. 이건 에스퍼가 가이드에 대한 독점과 집착을 나타내는 평범한 지표다.

하지만 자신은 그 평범함조차 누리지 못한 채 가이드도 아닌 일반인에게 독점과 집착을 나타내고 있었다. S급 에스퍼는 남들과 좀 더 다른가? 승운이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미쳐 있어서 이런 걸 까? 아니면 현재준 박사가 지나치게 예쁜 탓일까? 승운은 답을 내리지 못했다.

*

DMZ연구소는 바빴다. 괴수협회인지 뭔지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한 준비도 준비였지만 연구결과를 데이터화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현재준 박사는 능력은 좋았지만 그걸 문서화하는 것은 조금 뒤떨어진다고 유예지가 말하며 당분간은 바쁘니 방해하지 말고 조용한 곳에 처박혀 있으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승운은 검진센터를 찾았다.

이경원은 주말에 제3센터로 가서 다시 제7센터로 발령을 요구했다. 반년짜리였다. 한 달이면 될 줄 알았던 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몸이 이상해.” 지승운이 말했다.

“넌 항상 이상한 상태로 다녔어. 상태 봐봐. 아 씨, 녹색 올라오기 시작하네. 가이딩 안 받아?”

“안 받아. 다른 가이드의 에너지로 더럽히고 싶지 않아.”

“지랄도 작작해라. 그러다가 다시 망가지면 어쩌려고?”

“8년은 버티겠지. 이 상태로 8년을 버텨왔잖아.”

“그때는 이렇게 금방 녹색으로 변하지 않았거든? 기껏해야 5년 정도야.”

“5년이어도 충분해.”

서른다섯에 요절이라도 할 것인가. 경원이 터무니없다는 얼굴로 승운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았던 새끼가 침대 구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유독 궁상맞게 느껴졌다. 또 왜 저러냐고.

“그 5년도 여러 가이드들이 너한테 붙들려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야 얻어낼 수 있는 거야. 개소리 말고 가이딩 받아.”

승운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표정을 굳힌 채 먼 산만 바라보는 모습에 경원이 움찔했다. 저 얼굴과 표정에 대해 경원은 잘 알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승운은 화가 나 있었다. 뻔하지 뭐, 가이드를 못 찾아서 저러는 것이다. 에스퍼들은 원래 가이드들에게 집착하니 말이다.

다행인 점은 승운의 자세 때문에 저 얼굴이 덜 위협적이라는 거였다.

경원이 승운의 몸 상태 결과지를 바라보며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제7센터는 돈이 많나. 커피도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생각하며 차트를 봤다. 신체활성도는 완벽하다. 근육도 지나칠 정도로 충분했고, 체지방은 스무 살 이후 항상 동일했다. 에스퍼 에너지 상태도 이 정도면 평이하다. 계속 가이딩을 받으면 유지될 텐데 저 새끼가 말을 안 들어서 하여간…….

이렇게 되면 손으로 잡는 가이딩이라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차트를 넘기는데 승운이 “이경원.” 하고 그를 불렀다.

“왜.”

“나 일반인 좋아하는 것 같아.”

경원이 그대로 입에 머금던 커피를 차트에 뿜었다.

“……더러운 새끼.”

승운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에이, 씨발.”

정신 나간 소리를 해가지고 사람을 놀래키고 있어 진짜, 저 미친 새끼.

경원이 차트를 내려놓고 커피로 젖은 자신의 손을 털었다.

“너 뭐라고 했냐?”

“일반인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지승운 이 또라이 새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그거 MKR-07 때문에…….”

“사흘 내내 그 사람 생각하면서 뺐어.”

“야, 너……! 그 아까운거 혼자 빼지 말고 가이드 껴서 하라고!”

“나 그 사람이 좋아.”

이거 여간 또라이가 아니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요즘 들어 심해지는 듯 했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지승운의 이 또라이력은 항시 유지가 됐을 것이다. 그가 제 가이드가 없어 본능을 숨기고 여기 저기 살랑살랑 꼬리치고 다녀서 모르는 거지, 이게 원래의 지승운이다.

“어떻게 하냐.”

아니다. 정정하자.

“좋아 미칠 것 같아.”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목덜미를 발갛게 물들이는 지승운을 보니 이거 지승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승운은 그때 폭주해서 죽고 다른 사람이 이 몸을 차지한 거 아냐? 그 뭐야, 그 뭐지? 경원의 동생이 자주 보는 이상한 소설에 그런 내용이 많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승운의 행동을 보니 그 가설이 맞아떨어질지도 모른다고 경원은 장담했다.

지승운 어디 갔냐. 이거 누구지?

경원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가이드를 못 찾아서 그래, 가이드를.”

결론은 이거다. 가이드가 없어서 미쳐버린 것이다. 이미 머릿속이 광기로 헤집어졌는데 그때 마침 그의 가이드가 나타나 가이딩 한번 해줘서 몸만 정상 비슷하게 돌아오고 머리는 여전히 미친 상태로 있는 것. 그래, 그게 훨씬 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승운은 그렇게 말하는 경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번 노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뭐… 뭐, 치게? 경원이 생각하며 양 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했다. 나름의 방어였다. 하지만 승운은 주먹을 날리는 대신 일어서서 문 밖으로 나갔다.

“야, 어디가?”

“점심시간이야. 데리러 가야지.”

“뭐?”

되묻던 경원이 데리러 간다는 게 승운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일반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야, 그걸 네가 왜 가?”

경원이 소리쳤다. 승운은 대답 없이 걸어 나가며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였다.

“미친놈.”

경원이 말했다.

***

“현 박사님은 운동 따로 뭘 하십니까?”

승운이 물었다. 예지는 이 사람 아직 고사리의 독이 남아있나 의심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지승운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예지와 현재준을 보더니 제 손으로 문을 열어주며 타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중앙 본부로 운전했다. 현재준이 “운전을 정말 잘 하시네요.” 말하자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독에 많이 접촉됐나? 하지만 그건 저번 주 금요일의 일이었고 오늘은 월요일이다. 중화되기엔 충분했다.

“별로 안합니다.”

현재준이 젓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늘 구내식당의 반찬들은 그가 선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예지 연구원은 많이 하는 것 같던데.”

“크로스핏 합니다. 암벽타기도요.”

예지가 자신의 팔뚝을 내보였다. 튼실한 팔뚝을 퍽이나 자랑스럽다는 듯 내보이는 모습에 승운은 자신의 동생을 떠올렸다.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역시 유예지는 연구원보다 군인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괴수학 석사 수료증은 그녀가 두뇌파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영락없이 육체파같이 보였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얽히지 않았다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를 위해 힘든 괴수학을 연구했다는 것은 존경사유는 되긴 했지만 그녀를 존경하기에 앞서 둘러싼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별 감정 없어야 할 대상에 미움이 솟아난다. 현재준과 계속 붙어 다니는 이유로.

거슬린다.

“암벽타기도요?”

“괴수 연구원이잖아요. 저희는 근력이 중요해요. 박사님도 암벽 잘 타세요.”

그건 의외였다. 아무래도 현재준을 직접 공략하는 것 보단 유예지를 통해서 현재준의 정보를 알아내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승운은 전술적 친밀함을 떠올리며 시선을 아예 예지 쪽으로 틀었다.

“박사님도 근육이 꽤 있으시던데. 운동 많이 해야 하지 않아요?”

“박사님은 살려고 하는 거죠. 실제로 즐기시지는 않더라고요. 굳이 고르자면 등산?”

“등산? 산 좋아해요?”

“산 보다는…….”

“채집 좋아합니다.”

현재준이 말했다. 채집? 뭔 채집? 괴수 채집?

설마 휴일에 산에 가서 괴수를 잡아오나? 그건 이미 여가활동을 넘어서서 주말에도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유예지가 부가설명을 했다.

“현 박사님 나물을 좋아하거든요.”

“나물이라니.”

“나물 캐는 거요.”

“…….”

안 어울려.

저 몸으로 나물을 캐러 다닌다는 게, 아니 저 얼굴, 아니 그냥 현 박사 자체가 산에 나물을 캐러 다닌다는 게 어울리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근데 그거 불법 아냐? 아니, 합법인가? 산이 사유지면 어쩌려고? 생각해보니 이쪽 산은 사유지보다는 군사구역으로 묶여있는 곳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거 국가 땅인가?

승운이 시선을 현재준에게 줬다가 다시 예지에게 옮겼다. 어서 더 이야기해보라는 뜻이었다.

예지가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프랑스에 있을 때 박사님이 갑자기 운전할 줄 아냐고 묻더라고요.”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이 이야기를 했지만 할 때마다 늘 새로웠다.

“할 줄 안다니까 다짜고짜 산으로 가자고 했거든요. 초면은 아니어도 한 서너 번 봤나? 근데 와, 절 데리고 산으로 가더니.”

예지가 말하면서도 여전히 황당하다는 듯 현재준을 한번 쳐다보고는 “하.” 하고 숨을 내뱉었다.

“글쎄, 물냉이를 캐게 했어요.”

물냉이…… 그게 뭐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물이긴 한가보다. 프랑스에서 물냉이?

“그리고 물냉이 된장국 끓여줬죠. 아, 고사리도 캤고요. 그 고사리 캐서 쪄서 말려서 끓여준 육개장 맛이 끝내주긴 했는데. 아, 그립다. 오늘 저녁 육개장 사먹어야지.”

어떻게 결론이 저렇게 도출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승운도 육개장이 땡겼다. 그냥 육개장 말고 현재준 박사가 끓여주는 육개장. 해달라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것이다. 대신 승운은 화제를 돌렸다. 이번엔 현재준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박사님 나물 좋아해요? 채식주의자이신가?”

“사람아종의 평균인 잡식입니다. 근데 나물반찬은 그냥 좋아해요. 약간 씁쓸하고 풀 맛 나는 게.”

“쓴 거 좋아하면 싸이코패스일 확률이 높대요, 박사님.”

“가능성 있어.”

그걸 당신이 납득하면 어쩌자는 거야.

승운이 이상한 사람을 보듯 재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웃었다.

이상하긴. 그게 또 귀여웠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지? 정말 의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웃던 승운이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홱 하니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는 가이드들도 있었다. 평소라면 웃어줬겠지만 지금은 내키지 않는다. 애초에, 현재준 박사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 웃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들지 않았다. 곤란했다. 정말 곤란하다. 왜 스스로가 통제되지 않는 건지 승운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됐다. 하지만 이 상황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경호가 강화됩니다. 당분간 출퇴근에도 제가 함께 할 거예요.”

“아, 네.”

현재준이 대답했다. 수요일에 세계괴수학 협회에서 손님이 방문한다. 두 달 뒤에 있을 컨퍼런스 때문이었다. 굳이 벌써부터 올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괴수학 박사들은 그 희귀성 때문에 따로 다닌다. 같이 이동수단을 타더라도 전공은 겹치지 않게 한다. 숙소도 여러 곳을 정해 따로 머물고, 컨퍼런스가 있을 때면 각기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먼저 도착해있다. 모든 VIP중에서도 가장 조심스러운 이들이 괴수학 박사들이었다.

미리 도착한 괴수학자들은 대부분은 서울에 머물겠지만 몇몇 사람들은 DMZ연구소까지 방문을 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 세 사람 모두 현재준의 박사 동기였다.

“새로 경호를 하게 될 사람들은 영종도 센터에서 차출된 엘리트 에스퍼들입니다. 박사님들을 호위할 한명의 A급 에스퍼와 같이 오게 되실 분들을 경호할 두 명의 B급 에스퍼입니다. 오늘 퇴근 전에 소개시켜드릴게요.”

승운의 말에 현재준이 그를 바라봤다. 원래 괴수학 박사들은 A급 에스퍼가 경호하는 것이 맞다. 거기다 B급 에스퍼가 둘이나 더 있으니 한국에선 최고의 대우를 해준 것이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 세 명을 경호하는데 차출된 에스퍼와 지금 현재준을 호위하는 지승운. 그들의 계급차가 컸다.

이 사람은 왜 자신을 호위하는 거지? 아무리 명령과 공문이 내려왔다고 해도 지승운은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다.

“박사님.”

“예.”

“많이 드세요.”

승운이 웃어보였다.

가이드 때문이겠지.

가이드라.

“……알겠습니다.”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재준은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고, 승운은 그런 재준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유예지는 그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에 이게 뭔가 싶은 얼굴로 번갈아보다가 식판을 바라봤다. 뭐든 그녀가 끼어들지 않는 것이 속편했다.

***

점심식사 후 현재준과 유예지를 연구소까지 바래다 준 승운은 중앙 본부로 돌아왔다. 사실 그는 연구소와 검진센터, 중앙 본부의 구내식당을 제외하면 다른 곳에는 방문하지 않았다. 청장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청장이 승운을 찾아온 꼴이었다.

승운은 브리프케이스를 든 채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타이를 한번 잡아 올린 뒤 어깨의 먼지를 털어내고 계단을 올랐다.

이능청 강원 고성 제7센터 중앙 본부의 접견실에는 영종도 센터에서 온 에스퍼들이 있었다. 지승운에게는 익숙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한때 지승운의 밑에서 일하는 팀원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A급 에스퍼는 서울 중구 센터부터 영종도 센터까지 7년을 함께 했으며, 나머지 두 사람도 5년 내내 같이 일을 했다.

“오셨습니까.”

지승운이 접견실로 들어서자 군기가 바짝 들어 인사했다. 승운이 됐다는 듯 손을 흔들자 굳은 표정들이 풀렸다.

“대장! 가이드 찾았다면서요!”

B급 에스퍼 김태환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펄쩍 뛰어오르며 기뻐했다. 드디어 지승운이 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태환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제7센터로 가겠다고 했지만 할당받은 임무가 있어서 오지 못했다. 그 뒤 괴수학 박사들의 호위 때문에 DMZ연구소에 가야 할 인원을 차출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지원했다. 지승운과 그 가이드를 보기 위해서다. 날뛰는 태환의 뒤통수를 옆에 있던 에스퍼가 쳤다. 마찬가지로 B급 에스퍼인 이경민이었다. 정신계 에스퍼이자 검진센터 연구원으로 있는 이경원의 둘째 동생이었다. 급수는 평범했지만 발전가능성이 컸다.

“미안해요, 형. 얘가 하도 난리라.”

“됐어.”

“그래도 축하드립니다, 대장.”

마지막이 A급 에스퍼 지승호였다. 지승운의 사촌동생이기도 했다.

“그래, 고맙다.”

승운이 말했다. 그의 반응에 다들 승운이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저래? 태환이 이경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경민이 알 턱이 없었다. 가이드를 찾았는데 저런 얼굴을 하는 에스퍼는 없다. 아, 설마 가이드가 있긴 한데 아직 누구인지 몰라서 저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태환은 “너무 걱정 말아요, 대장!” 이라 큰소리냈다.

“어차피 제7센터 안에 있는 거잖아요.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나름 위로를 해주려는 듯 했지만 실제로 승운은 다른 일 때문에 걱정이었다.

가이드. 중요하지. 가이드, 몹시도 중요하다.

문제는 지금 그가 가이드보다 괴수박사인 현재준을 더 신경 쓴다는 점이었다.

“그래, 그건 나중에 말하고. 우선 업무 분담부터 하지.”

“업무 분담 말고 우리가 머물 곳부터 정하는 게 어때요? 지금 있는 아파트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면서요? 이야. 나도 그런데 살고 싶다. 여기 오면 살 수 있나? 그동안 거기서 머물러도 되요?”

묻는 태환의 뒤통수를 다시 경민이 후려쳤다.

“아, 왜!”

“거기 머물러서 뭐 하게? 가이딩 하는데 너도 참여하게? 안그래도 매일 매일 가이딩 해도 부족한 사람한테.”

“아…… 그렇지. 그렇네요.”

“됐어. 내 집에 와.”

승운이 말하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지금 누구 집에 오라고?

“거기 방 몇 개인데요?”

“세 개. 경민이랑 태환이 한 방에서 자면 되겠네.”

“아니, 아니…… 그럼 대장 가이딩 할 때 우리는 어디 있으라고? 그, 방음 잘 되요?”

“가이딩 안 해.”

“예?”

“안한 지 좀 됐어. 몇 주…… 한 달 가까이인가?”

“한 다알?”

태환이 되물었다. 지승호가 재빨리 승운의 시계를 봤다. 녹색이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본 게 7년 전이었다. 몇 주 동안 가이딩을 하지 않았는데 녹색. 그 전에도 완전히 검은 색은 아니라고 했다.

“……이 색깔 오랜만에 보네요.”

승호의 말에 승운이 시계 찬 손목을 들어올렸다. 태환과 경민은 처음 보는 색이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승운의 시계는 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가이딩은 하시죠. 그래야 이 색이 오랫동안 유지되죠.”

승호의 말에 승운이 “알아.” 대답했다. 태환도 경민도 동의했다. 녹색 상태의 지승운이라니 얼마나 몸 상태가 좋을지 궁금해 근질근질했다. 훈련을 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노란색을 넘어 붉은색에 다가가는 주홍빛에도 지승운은 위험하고 뛰어난 에스퍼였다. 녹색이라니, 오늘 죽어 나가는 거 아냐? 태환이 히죽거리며 작게 말했다. 경민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기대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안 해.”

“엥?”

“왜요?”

“형.”

승운의 말에 다들 의아한 반응을 했다. 이유에 대해 말을 못해줄 것은 없지만 승운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당분간 가이딩은 하지 않아. 문제 없어.”

승운이 말했다.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묻지 말라는 태도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사적인 건 됐고, 집중해. 일 이야기 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한 승운이 가지고 온 브리프케이스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

“우리가 경호해야 할 박사들은 총 네 명. 그 중 한명은 내가 전담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경호할 박사가 세 명이다. 그리고 박사와 함께 오는 사람들이 세 사람 더 있다고 하니까 총 여섯. 경호는 박사들을 우선시 해.”

승운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지승호가 서류를 나눠 경민과 태환에게 넘겼다. 가장 첫 장에 있는 사람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성이었다.

“시리예 아예르, 36세. 노르웨이 출신으로 유럽연방의 시베리아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 특이사항은 이능력자라는 거야. B급 가이드인데 대부분의 에스퍼들과 매칭이 좋아서 노르웨이가 유독 아끼는 인물이야. 시리예와 함께 오는 인물 중에 에스퍼가 있어. 프랑스의 A급 에스퍼. 이쪽은 우리가 신경을 안 쓰는 게 서로 좋을거고.”

“엄청난 미인이네!”

“태환이는 이쪽에 접근 금지.”

태환이 아쉽다는 듯 에이~ 말했지만 그 이상 말을 얹지는 않았다. 그도 국가적인 문제를 일으킬만한 사고를 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프로필을 보니 확실히 엘리트는 엘리트인 듯 했다. 괴수학 박사에 가이드라니,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을 거라고 태환은 생각했다. 승운이 다음 서류를 넘겼다.

“에르난데스 로사리오 크루즈, 39세. 콜롬비아 출신. 아마존 연구소에 있어. 같이 오는 사람은 크루즈 가에서 고용한 경호원이라더군. 총기를 잘 다룬다는데 혹시나 사고 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콜롬비아 마피아 가문이라는 추가 글에 경민이 웃음을 내뱉었다. 지승호도 마찬가지였다. 마피아가 괴수학자? 왜? 그냥 있는 거나 물려받지 싶었다. 아니, 뭐. 괴수를 이용해서 돈벌이나 마약유통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승운이 다시 파일을 넘겼다.

“보리스 세르핀스키 보, 42세. 러시아 계 미국인이야. 지금 남극 연구소에 있다더군. 같이 오는 사람은 모니카 살레. 싱가폴 출신으로 괴수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더군.”

“완전 엘리트들이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왜 온대요?”

태환이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그동안 여러 경호를 하긴 했지만 이런 사람들을 경호하는 것은 처음이다. 괴수학자라니. 에스퍼는 그나마 흔하기라도 했지, 이들은 세계에서도 얼마 없는 존재였다.

“우리의 VIP때문이겠지.”

승운이 말했다.

“현재준 박사요?”

그가 마지막 서류를 보라고 턱짓했다. 태환이 재빨리 마지막 서류를 들췄다. 현재준 박사가 누구일까~ 노래 부르듯 말하며 사진을 본 태환이 일순간 얼굴을 굳혔다.

“못생겼어.”

“김태환.”

경민이 태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확실히 미남은 아니었지만 그냥 평범했다. 태환은 에스퍼 중에서도 유독 외모에 약하고 외적인 것을 많이 보기 때문에 가이드들도 미인들만 만나는 편이었다. 외모차별이라니, 안될 일이지. 속으로 생각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만 대놓고 못생겼다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저것 보라. 지승운이 표정을 잔뜩 굳히고 태환을 응시하지 않는가.

“현재준 박사, 33세. 대한민국 출신 수요일에 방문할 괴수학 박사들의 동기로…….”

승운이 말을 하다 멈췄다. 처음에 받은 그의 프로필보다도 저 자세하게 나온 것이었다. 그때는 대충 훑어봐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현재준 박사가 VIP인 이유가 있었다.

“현재 괴수학계가 주목하는 신진 연구원이자 천재… IPMC에서 상을 받았어요?”

“와, 이거 프로필이 왜 이래? 이 밑에는 다 참여한 연구 논문이에요? 이제 박사 학위 딴지 얼마 안됐다면서. 엄청 젊은데?”

“석사 때부터 꾸준히 참여했다더군. 실제로 해외에서는 현재준 박사에게 귀화 제안을 하는 곳이 많아. 다 거절하고 있으니 우리한텐 이득이지만. 귀화하지 않으면 차라리 박사를 제거하겠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쪽도 있나 봐. 특히 러시아가.”

승운이 파일을 보며 말했다.

“러시아라. 거긴 지금 세계적 민폐를 끼치느라 바쁘니까. 이번에 러시아에서 오는 사람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래.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야. 다른 곳에 넘어가서는 안 되니까.”

“그런 사람이 왜 DMZ에 있어요? 중구센터에 있지 않고?”

“모르지. 본인이 요청을 했으니.”

“북한에 넘어가지는 않겠죠?”

“그럴 리가 있냐. 하지만 납치 여부는 고려해봐야겠다. 엄청 탐내겠는데? 요즘 핵이나 무기보다 이능력자 쪽에 더 투자한다잖아, 거기.”

경민의 말에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어떻게 현재준 박사를……. 무조건 지켜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승운이 순간 멈칫했다. VIP를 지키는 것은 그의 일이긴 했지만, 왠지 사심이 들어간 느낌이다. 애국 때문이겠지? 나라를 위해 지키는……. 나라를 위하기는 개뿔. 그냥 사심이 맞다. 승운은 현재준을 지키고 싶었다.

왜?

왜긴 왜야. 좋아하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가 아파왔다. 좋아한다. 정말 좋아한다.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자신의 감정인데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승운은 자신의 감정을 감춘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이어 말했다.

“러시아나 북한 말고도 미국 쪽도 계속 연락을 하고 있어. 그러니까 보리스라는 사람을 예의주시해봐.”

“그럼 대장은 현재준 박사 곁에만 있는 겁니까?”

“응.”

그 말고 감히 누가 박사의 곁에 있단 말인가.

“현재준 박사 옆에는…… 유예지 연구원? 이쪽은 예쁘장하게 생겼네요.”

태환이 말했다. 그 말에 승운이 유예지 연구원을 떠올렸다. 예쁘장한가? 잘 모르겠다. 확실히 몸은 튼튼해보였다. 현재준 박사와 함께 있을 때는 체구가 조금 작게 느껴지긴 했다. 아무래도 키 차이 때문일 것이다.

“현재준 박사가 이 정도만 됐어도.”

유예지보다 현재준이 더 예쁘구만, 뭘 자꾸 저런단 말인가.

하지만 승운은 태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현재준 박사가 예쁜 것은 비밀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예쁘게 보일 필요가 없다. 그래, 못생겼다고 해라. 처음에 승운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예쁜 못난이가 또 있을까.

“유예지 연구원. 괴수학 석사 수료네요. 석사는 못 받았지만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엘리트 아닙니까? 중구 센터에서도 대부분 학사 수료나 졸업인데 왜 이 연구원은 DMZ에 있대요?”

“글쎄.”

“현 박사 따라온 거 아냐? 알고 보니 좋아한다던가.”

“오, 말 되는데? 둘이 어울…… 유 연구원이 좀 더 아깝다.”

이어지는 말들에 승운이 표정을 굳혔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태환이 또 내가 실수를 했구나 생각했다. 승운이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태환이 먼저 자진신고 하듯 사과했다.

“아, 알았어요. 죄송해요. 일 얘기 하면 되잖아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유예지가 현재준을 좋아한다면? 그건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지만, 그렇다면 승운보다는 유예지의 꿈이 이루어질 확률이 높았다. 그녀는 일반인이고, 여자니까. 그런 승운의 심정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태환이 유예지 연구원이 정말 예쁘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일반인이라 아쉽네. 에스퍼도 만나줄까요?”

“유예지 연구원은 에스퍼 안 좋아해.” 승운이 말했다.

“엥? 왜요?”

“문란해서 싫대.”

“아…… 난 안 문란한데~.”

이 중에서 제일 문란한 놈이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일반인들은 역시 이해를 못해준다니까. 태환이 생각했다. 에스퍼나 가이드를 짐승처럼 보는 사람 중 하나였구만. 그런 사람이라면 이쪽에서도 사양이었다.

“아쉽네요. 근데 뭐, 싫다면 말아야지.”

“일반인들 건드리지 마. 어차피 여기서 할 만한 가이드 찾는 건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안 그래도 들었어요. 여기가 이능력자들의 천국이라면서요? 길에서 떡 쳐도 아무도 신경 안 쓴다고. 심지어 내키면 뒹굴고 있는 아무 사람한테 가서 막 참여도 한다던데.”

아무리 이능력자라도 서넛이 함께 하는 일은 드문 데 이곳은 가능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입맛을 다시는 태환을 보며 이러다가 이쪽에 아예 자리 잡는다고 하면 어쩌나, 경민이 생각했다.

태환은 물리계 중에서도 전기를 다루고 있어서 섬인 영종도에서는 유용한 에스퍼다. 그가 다른 곳으로 가면 똑같은 능력을 가진 에스퍼를 구해 와야 하는데 그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일반인들도 있으니까 너무 놀랄만한 일은 하지 말고.”

“여기 있는 동안 도와줄 사람 좀 찾아볼까? 예쁜 가이드 많아요?”

태환은 먼저 이곳에 와서 이 사람 저 사람과 놀아났을 승운에게 여기 물 어때요? 하면서 가볍게 말했다. 경민이 작은 목소리로 승호에게 “저러다가 지 가이드 찾아서 마음고생 해봐야 안 저러지.” 라 말했다. 작게 말했다 해도 에스퍼인 태환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냅둬. 아직 어려서 그런 거야.”

승호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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