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재준은 1990년 1월 29일에 태어났다. 지금은 이능청이라고 불리는 당시의 국가이능통제원이 설립되어 건물 앞에서 리본을 자르는 그 순간,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병원에서 첫 울음을 냈다.
이상한 해였다. 괴수가 나타난 지 10년이 되며 세상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괴수가 나타남과 동시에 이능력자, 에스퍼가 나타났다. 에스퍼의 각성에는 인과관계와 이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조건에서 각성이 되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15세부터 20세까지 발현한다고 알려진 이능력이 실은 최소 8세부터 각성을 할 수 있다고 알려진 것도 1990년이었다. 가이드라는 존재의 공식적 인증과 협회가 나타난 것도 1990년이다.
에스퍼와 가이드. 돌연변이 형질 인류.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 사람 돌연변이.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퍼진 유인원의 돌연변이 종이자 이족직립보행을 하며 문화와 언어가 발달한 것은 동일하나, 고도로 발달된 사람의 전전두피질과 인식을 넘어서서 3차원으로 존재하는 시공간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차원, 즉 에너지와 분자로 존재하는 힘을 3차원화 하여 괴수들을 해치울 수 있는 이들과 그들의 파장을 관리하여 안정화시켜주는 이들. 초능력자, 혹은 초감각자.
현생 인종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s.sapiens)가 아닌 호모 사피엔스 트란스포르미스(H.s.transformis)가 공식인증 채택된 것도 1990년이다. 그리고 전 세계 동성혼이 인정된 것도 1990년.
그런 해였다.
가이드의 존재는 10년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1986년이다.
인도 께랄라 주의 에스퍼 아미르 수드가 미쳐 날뛰었다. 그는 3년간 괴수를 죽이며 남인도의 영웅이 되었지만, 어느 날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폭주하였다. 그의 폭주로 인한 손실은 괴수에 의한 피해보다 더 심각했다. 께랄라 주 깐누르 시티의 1/3 가량이 사라졌고 아미르 수드는 사망했다. 그보다 앞선 카트린 두자당은 1985년 폭주했다. 그녀의 폭주로 남프랑스 몽쁠리에의 공원 하나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아미르와 달리 그녀는 죽지 않았다. 누군가가 폭주를 막았기 때문이다. 루트 옌슨. 최초로 기록된 에스퍼를 잠재울 수 있는 자—가이드라 명명된 여성으로 스웨덴에서 남프랑스로 여름휴가를 왔다. 그녀는 여행 중 폭주하는 카트린을 진정시켰고, 그 일을 계기로 카트린과 루트는 가까워지다 1986년 연인임을 발표한다. 그에 대한 비난이 없지는 않았으나 루트 옌슨 만이 카트린 두자당의 폭주를 막아주고 시민의 안전도 가지고 오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서는 그들을 위해 특별법을 제정했으며, 이들은 퀴어 단체의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수많은 괴수들이 발생했던 각 도시에서도 에스퍼들이 폭주를 일으켰다. 그들은 카트린과 루트를 보며 자신을 안정시켜줄 가이드에 대한 본능적 열망에 휩싸였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에스퍼들은 가이드를 쟁취하기 위한 전쟁을 했다. 끔찍한 3년이었다. 괴수보다도 위험한 에스퍼들이 거리에 즐비했다.
더 이상의 피해를 볼 수 없었던 국제기구는 1989년 국제이능통제기구IPMC를 설립하고 위험한 에스퍼를 관리한다. 비영리에스퍼협회의 에스퍼들은 가이드에 대한 인정과 그들을 보호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1990년, 가이드협회가 설립된다. 당시만 해도 IPMC가 유엔을 넘어서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공식으로 인증되며 그들은 IPMC와 국가, 연합등을 통해 관리된다. 어떤 곳은 민간 기업이 주도를 하기도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한 가지는 공통적으로 서명하였다.
모든 세계의 시민들은 14세부터 20세까지 에스퍼와 가이드 검사를 받아야한다는 것.
이에 대하여 세계의 인권단체들이 반대하였지만 에스퍼들은 각성 이후 몇 년 이상 가이드를 만나지 못하면 폭주하게 됐다. 그 기간까지는 보통 3년이다. 비등록 에스퍼의 폭주가 계속 되자 1995년 인권단체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IPMC의 영향력은 더 커졌고, 에스퍼와 가이드의 존재가 외교에서 하는 역할도 커졌다.
18세의 현재준은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소년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시력이 아주 나쁘고, 머리가 조금 좋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돌연변이 형질의 각성을 바랐다. 에스퍼나 가이드가 되면 국가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IMF를 이겨낸 지 10년도 되지 않아 리먼 사태가 터지며 전 세계의 공황이 오자 공무원 같은 철밥통 직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더불어 상위 이능력자들은 때로는 공익광고를 찍으며 연예인만한 인지도를 얻어서 많은 이들이 형질 각성을 바랐다. 돈, 명예, 사람들의 선망을 독차지 하고 싶어 하는 인간적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준은 그런 세속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괴수가 좋았다. 어릴 때 보던 만화 영향이었다. 괴수를 잡으며 여행을 한다던가. 물론 만화영화에서처럼 괴수는 잡아서 기를 수도 없고 다스릴 수도 없으며 반려동물도 아니었지만 현재준은 나름의 로망을 갖고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2007년.
현재준, 18세. 괴수학과에 입학했다. 조기입학이었다.
***
2022년.
괴수들은 스모그를 통해서 나온다는 것은 식상하다 못해 속담이나 고유명제가 된 말이다. 과학적 근거는 없다. 괴수가 탄생하는 곳에 스모그 현상이 일어나긴 한다. 어쩌면 괴수로 형질변이하는 그 순간의 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에스퍼와 가이드들도 각성열이 심하다. 스모그를 일으킬 만큼은 아니었지만.
연구결과에 의하면 괴수는 태양을 통해 만들어졌다. 자외선이다. 오존층의 파괴가 괴수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괴수학자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그저 루머로 취급하고 있었다.
괴수가 공식적으로 출현한지 40년이 넘은 지금도 아직 인간들은 괴수의 정체에 대해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인간인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연구만은 확실했다. 괴수를 연구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미국의 수많은 대학에도 겨우 세 곳, 캐나다에 한곳, 호주와 뉴질랜드 한곳, 유럽은 남프랑스와 러시아에 한곳씩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네 곳. 그 외에도 두바이에 하나, 자카르타에 하나. 동북아시아는 그나마 많은 편이었다. 홍콩에 하나, 교토에 하나, 그리고 서울과 평양에 하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분단국가다.
현재준은 괴수학을 전공했다. 괴수학이라고 해도 학문화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에스퍼들은 멀쩡하게 괴수를 죽여 보내지 않았다. 그들의 세포가 온전히 남아있다면 연구에 도움이 되었겠지만 대부분은 에스퍼의 능력에 의해 연구할 수 있는 분자가 파괴되어 제대로 남은 것이 없었다. 이건 모든 국제 대학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괴수학이 있는 대학들은 전부 교환 학생 연계를 하여 각기 지역에서 한 학기씩 보내도록 했다. 여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한국의 경우 3월에 학기가 시작하는 반면 9월에 학기가 시작하는 곳들도 있었고, 학위과정이 3년인 곳도 있었다.
결국 십여 년의 기간 동안 서로 협의한 대학들은 괴수학 학사 과정을 5년으로 만들었고, 도중에 자퇴하거나 퇴학당하지 않는다면 무조건 석박사까지 해야 했다. 석사 과정은 2년, 박사 과정은 3년. 물론 그 안에 박사를 딸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기에 대부분은 괴수학을 전공하는 이들은 15년 이상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부에 매진해야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머리가 유달리 비상하고 괴수에 대한 남다른 집착이 있던 재준은 모든 정규과정을 다 거치는데 딱 10년이 걸렸다.
사실 8년이면 끝날 일이었지만 도중에 담당교수를 바꾸느라 10년을 채우게 된 재준은 이후 대한민국에서 괴수가 가장 많이 출현하는 곳의 연구소에 스스로 발을 들이밀었다.
DMZ. 비무장지대.
재준이 일하는 연구소는 비무장지대에 있다.
반으로 갈린 대한민국에서 비무장지대는 여러 구역에 걸쳐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동쪽, 수도권에서 제일 먼 최전방은 남달랐다. 대부분 군사지역으로 묶여 군부대 말고는 인프라가 부족했기에 사람들도 많이 살지 않는 지역은 연구소화 되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속초에서 북쪽으로 차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작았던 마을은 이제 군인과 에스퍼, 가이드, 그리고 연구원을 위한 도시이자 민간인통제구역이다.
도시에서 다시 위로 40분간 차를 타고 가면 나오는 곳은 이능청 제7센터로 민간인출입금지구역이다. 연구소는 제7센터에 있었다.
현재준은 이곳이 연구를 하기에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의 친구인 에르난데스가 있는 아마존 강 하구의 연구소보다, 시리예가 있는 시베리아의 연구소보다, 그리고 보리스가 있는 남극의 연구소보다도 훨씬 좋았다.
무엇하기에 좋냐 물으신다면.
“잡았다.”
괴수 잡기에 좋았다. 다른 지역과 달리 DMZ에는 어린 괴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에스퍼들이 토막 내고 분해하여 유전자 분석을 하기 힘들도록 만든 타버린 괴수들로는 연구 진행이 힘들었고, 커다란 괴수는 일반인들인 괴수학자가 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DMZ는 다르다.
현재준 박사, 33세.
이능청 제7관리 센터 강원 고성 DMZ연구소의 수석연구원.
취미 소파에 드러누워 시간 때우기. 특기 괴수 사냥.
*
호모 사피엔스 트란스포르미스 E, 그러니까 에스퍼들은 미인이 많았다. 가이드들을 꼬셔내기 위해서 그렇다. 적나라한 표현이지만 사실이었다.
근육으로 가득 찬 늘씬한 체형들의 에스퍼들은 자신의 외적 조건을 잘 활용했다. 큰 수컷이 작은 수컷보다 짝짓기 경쟁에서 우세하듯 미인도 짝짓기 경쟁에서…… 가이드 차지 경쟁에서 우세했다.
손짓 하나만으로도 괴수를 날려버리는 에스퍼들은 바늘하나 들어가지 않을 두꺼운 면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이드들이 조금만 멀어질라치면 상처받은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그들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떠나지 말고 옆에 있어 달라. 그러면 용케 가이드들은 머물렀다. 거기에는 외모가 큰 작용을 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가이드도 예쁜 얼굴에는 침을 뱉지 못했다. 에스퍼는 가이드로부터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급속도로 예쁜 외모로 진화해갔다. 이렇게 빠른 인류의 진화는 기록된 바가 없다.
당연하게도 에스퍼의 급수는 외모에 영향을 끼쳤다. B급보다 A급이 더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S급이 A급보다 더 아름다웠다.
가이드들은 하나같이 외모를 밝혔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보다 호모 사피엔스 트란스포르미스 G가 더 외적인 것에, 그리고 자극에 약했다. 그러나 선호도와 자신의 외모는 크게 연관되지 않아 가이드의 외모는 돌연변이 이전의 인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은 편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개체별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가이드들은 무해해보였다. 우락부락한 외모를 가진 가이드라 하더라도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분위기가 뭔지 몰랐다.
하지만 현재준은 알고 있다.
향이다.
가이드는 특출한 향을 낸다. 그 향은 에스퍼 뿐만 아니라 괴수에게 안정적이며, 때로는 괴수를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가이드의 등급에 따라 영향이 천차만별이다. 대부분의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현재준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 역시도 괴수학 박사과정 중에 위치를 옮기면서였고, 그건 여전히 이 현상이 연구 중에 있다는 의미였다.
향이 약한 가이드들, 그러니까 등급이 낮은 가이드들의 경우는 괴수들이 영향을 덜 받아 충분히 공격당하지만, 높은 등급의 가이드는 괴수가 접근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이드의 보호를 위해 괴수와 함께 둔 적이 없어서—심지어 가이드와 에스퍼 형질을 연구하는 의학자조차도 그러했다— 그 사실을 모른다.
가이드는 에스퍼 뿐만 아니라 괴수를 안정시킬 수 있는 향을 내뿜는다는 것을.
그리고 현재준은 가이드다.
국가이능통제청에도 국제이능관리기구에도 등록되지 않은 비공식적인 가이드.
“완전 애기네. 이런 애기를 어떻게 죽인다고…….”
그가 이렇게 국가 및 국제기구로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가이드로 발현한 것은 27세 때였기 때문이다. 보통 가이드의 발현보다 10년이나 늦었다. 25세가 넘도록 가이드 발현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더 이상의 검사는 필요 없었다. 즉, 현재준은 공식적인 민간인이었다.
재준이 자신에게 잡힌 애기 괴수의 다리를 잡고 거꾸로 들어올렸다. 괴수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만든 장갑이 치익 칙 소리를 내며 녹아갔지만 재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DMZ연구소에서 일하는 가이드 및 일반 연구원들은 그런 재준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
‘저 자식 사실 에스퍼 아냐?’
‘저 외모를 봐라. 에스퍼라니. 그럴 사람이 아니다.’
‘에스퍼라고 해도 누가 괴수를 저렇게 우쭈쭈 하면서 잡냐? 동네고양이 잡듯이.’
‘동네고양이도 저렇게는 안 잡히겠다.’
가이드인 재준의 귀는 에스퍼들만큼 좋지 않기에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안되겠다. 더 크고 와라.”
재준이 괴수를 놓아줬다. 무슨 금어기 철의 노가리도 아니고, 더 크고 오라며 괴수를 보내주는 연구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재준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지며 떠나는 괴수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펑 소리와 함께 새끼 괴수가 터졌다.
“아.”
흔들던 재준의 손이 멈췄다.
이곳은 DMZ연구소. 아직 지뢰가 많다.
*
괴수학 박사는 전 세계에 3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비행기 하나에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박사들을 다 태울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컨퍼런스가 있어 한 장소에 모여야 할 때도 열 명 이상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비행기는 비인가단체의 테러 및 비행종 괴수에게 공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에 탔다가 괴수 학자들이 전부 죽게 되면 곤란했다.
그런 이유로 괴수학자들은 웬만하면 같은 비행기, 같은 배, 같은 기차, 같은 버스 등을 타지 않는다.
DMZ연구소에 있는 유예지 연구원도 괴수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학사학위까지는 받았지만 석사학위를 받지 못하고 수료했다. 한 과정을 세 번이나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퇴학당한다. 괴수학은 다른 곳보다 더 까다롭게 교육을 시키지만 그에 따른 명예는 거의 없다. 물론 박사까지 된다면 전 세계 어디에서도 그들을 환영하며, 석사…… 아니, 학사만 졸업해도 이런 연구소에 바로 취업이 되긴 하지만, 일반인이나 이능력자들에게는 별반 볼 것 없는 학자 나부랭이들일 뿐이었다.
오히려 돈은 덜 되더라도 이능청의 인간 돌연변이 종 형질 검사연구원으로 있는 것을 더 알아줬다.
“현 박사님.”
유예지의 말에 재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예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건성의 모발을 가지고 있는 재준의 머리는 기름기로 번들거리지 않았다. 덕분에 언제 머리를 감았는지 알 수 없었다. 쓰고 있는 안경은 그의 눈을 네 배 이상 작게 보이게 했고, 더벅머리는 그마저도 반 이상 가려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몸은 키가 컸지만 어깨가 굽고 자세가 나빴다. 그나마 저 몸이 근육질이라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연구원들이 가냘플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괴수학 박사는 괴수 못지않았다.
“우리 매실이랑 살구…… 매실이 몸 상태가 안 좋은데?”
“…….”
괴수한테 매실, 살구가 뭐야.
박사가 저렇게 이름을 지은 괴수들은 괴수 치고는 크기가 작은 편이라고 하더라도 3평의 방 하나를 꽉 채우는 크기였다. 지금 그들이 들어있는 창살의 크기가 딱 3평, 위로는 230cm가 된다.
“매실이 밥 안줬어?”
재준이 패드에 무언가를 기록하며 말했다. 음성녹음을 선호하는 유예지와 달리 재준은 꼭 펜을 이용해 패드에 기록했다. 자기를 디지털 아날로그 세대라고 부르는 남자였다.
“매실이 아침에 200kg 먹었어요.”
“그래? 평소랑 비슷하게 먹었는데. 체했나? 위장 검사 좀 해볼까?”
재준의 말에 예지가 우웩 소리를 냈다. 체는 무슨. 그리고 괴수 위장 검사라니. 저걸 마취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웬만하면 에스퍼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그 어떤 에스퍼도 그걸 내켜하지 않았다. 게다가 전용 검사기구로 내부를 휘젓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검사 도구는 그들의 위산에 녹지 않도록 만들어졌지만, 사람은 그들의 체액에 닿으면 살이 녹는다.
아니, 그 전에 괴수가 체한다는 게 말이 돼? 쟤네 위산이 녹일 수 없는 게 있긴 하나고? 뼈조차도 완전히 녹여버리는데 위장 검사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다.
재준이 괴수들이 갇힌 쇠창살에 손을 얹으며 “살구는 상태가 나쁘지 않네.”하고 말했다.
그때 살구가 재준에게 이를 드러냈다. 저걸 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예지가 생각했다. 그들은 이가 없다. 아니, 애초에 살구는 뼈가 존재하지 않았다. 살구의 몸체가 닿는 모든 것은 녹아버렸다. 그는 그냥 하나의 위 덩어리 같았다. 닿는 모든 것들을 녹인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어도 그렇다.
저 괴수는 눈도, 뼈도, 뇌도, 어떤 다른 기관도 존재하지 않은 채 위와 위산 배출구로만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위산이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재준의 손 위에 액이 닿자 치익 하며 살이 타는 소리가 났다. 재준이 “어허!” 소리를 치며 살구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살구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재준의 손은 언제나 괴수들에 의해 상처투성이지만, 그것도 십년이 지나자 익숙해졌는지 약을 쓰지 않고 놔둬도 언젠가는 회복이 됐다.
움찔하며 커다란 몸을 최대한 뒤로 움직이는 살구를 보며 예지는 고개를 저었다.
진정한 괴물은 에스퍼 그런 게 아니라 괴수학 박사들이었다.
괴수학 박사들은 직접 자기가 연구할 괴수들을 잡는다. 그들에게는 에스퍼들과 같은 능력이 없다. 오로지 몸빵이다. 나약한 일반인의 육체로 괴수를 잡는 이들. 모든 괴수학 박사들은 근육질이었다. 물론 석사 수료를 한 예지 역시도 크로스 핏과 암벽타기를 취미로 하고 있었다.
*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이능청 제7관리 센터는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곳이었다.
괴수 출현빈도로 따지면 제3관리센터인 영종도와 1, 2위를 다퉜다. 하지만 영종도 센터의 경우 수도권, 정확히는 서울로 괴수가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경계를 강화해야 했기 때문에 제7센터보다 힘들었다. 제7센터의 경우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괴수도 많이 나타났지만, 군사지역으로 묶여있던 이곳에 민간인은 거의 없으며 군부대를 제외하면 이능력자 훈련소와 양성소, 연구소가 주로 위치해 있다. 즉 웬만한 괴수가 나와도 큰 피해가 없으며 내부 인원으로 해결을 할 수 있다.(간단한 괴수는 군에서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눈에 띄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이곳에서 눈에 띄게 된다면 제3센터는 물론 제1센터인 서울 중구 센터까지도 바로 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7센터로 몰리는 에스퍼들이 있는 반면, 조용하고 타인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제7센터로 오는 에스퍼들도 있었다.
에스퍼, 가이드, 연구원들이 주축이 된 이 작은 읍내는 일반인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어디에서 가이딩을 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일반인들에 속하는 연구원들은 처음 그런 모습을 접하면 새빨개진 채 고개를 들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연차가 차면 지겹다는 얼굴을 한다.
“환락가구만, 환락가.”
예지가 혀를 차며 핸들을 돌렸다.
본능에 지나치게 충실한 이들과 한 동네에 사는 것은 꽤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재준은 그런 것을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에스퍼나 가이드가 옆에서 발가벗고 서로의 음부를 탐내도 별반 관심이 없다. 차창 너머로 핑크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던 은 커다란 새 한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저기 봐.” 라고 말했다.
“비행종 괴수의 새끼네. 혼자 떨어졌나봐. 저러다 사냥당하면 어쩌지?”
“누가 저런 걸 사냥하겠어요. 현 박사님 아니면요.”
“날짐승을 잡기는 힘들어. 그건 시리예가 잘했지. 걔가 그래서 시베리아에 갔잖아. 거기 비행종 괴수들이 꽤 많거든.”
재준의 말에 예지가 “예에.” 대답했다.
시리예는 노르웨이 출신이었던 여자로 예지도 학부 때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재준과 잠깐 만났던 사이였다는 것도 알고 있다. 도대체 그 예쁜 여자가 왜 이딴 남자랑 만났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었다. 예지는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재준이 조수석에서 내렸다.
“오늘도 고마워.”
“제발 면허 좀 따세요, 박사님. 언제까지 저한테 시킬 거예요?”
예지가 내리며 말했다. 무서워서 운전 못한다는 재준을 향해 예지가 차키를 던졌다.
“운전 못하면서 도대체 차는 왜 샀냐고요!”
예지는 아직 차가 없다. 하지만 재준이 차가 있었기 때문에 그 차로 같이 출퇴근을 했다.
“유 연구원이 없었으면 난 죽었을 거야.”
“…….”
그러게 말이다. 예지가 됐다는 듯 손을 내젓고 몸을 돌렸다.
*
제7센터에 괴수의 출현은 능사였기에 재난 문자가 와도 다들 신경쓰지 않고 하는 일을 했다. 괴수와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일처리를 하겠거니 다들 생각한 탓이다. 오늘도 괴수 한마리가 처참하게 부서졌다.
강원도는 괴수 출현이 심하다. 괴수들은 보통 자연물에서 나온다. 크게는 동물형과 식물형으로 나누며, 포유류나 조류뿐만 아니라 곤충, 바다생물체, 식물형 및 동물형 촉수 등등은 물론 그 밖에 정의내리기 힘든 것들도 있었다. 번개, 불,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연못 같은 말 그대로 자연 자체인 것 역시 괴수로 분류되었다. 괴수학의 연구가 지지부진한건 이 탓도 있었다. 생물 형태의 괴수는 자외선의 영향인데, 자연물의 괴수는 무엇 때문인가?
대부분의 괴수는 자외선에 의한 치사돌연변이, 게놈 돌연변이, 아조 돌연변이, 유전체 돌연변이 등에 따라 구분하지만 자연 형태의 괴수는 자외선을 탓이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인류가 멸망해도 괴수에 대한 것은 알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제7센터가 있는 곳은 산, 들, 바다, 호수가 전부 있었으며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온대림이 있었다. DMZ에서 출현하는 괴수들은 대부분 지뢰를 밟고 터져나가지만 죽는 경우보다는 회복해서 살아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려 이능청이 있는 곳으로 오는 경우는 없지만, 가끔 흘러나오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괴수들은 에스퍼가 처리했다.
“괴수들이 DMZ 지뢰 다 제거 해주는 거 아닌가 몰라.”
실제로 비무장지대의 지뢰 40%가 괴수에 의해 터졌다고 한다. 5%는 짐승, 그리고 1%는 사람 때문에 터졌다.
현재준은 반절 이상 녹은 젤라또 컵을 한 손에 들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비행종 괴수가 이쪽을 떠돈다. 하지만 공격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공격을 한다 해도 이 근방에 있는 에스퍼들이 다 처리할 것이다. 점심시간, 센터의 잔디밭 위에 뒹구는 에스퍼들이 많다. 평화롭다고 생각한 재준은 주위를 둘러보다 약간 이질감을 느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시끌시끌하네?”
재준이 말했다. 예지가 재준을 바라봤다. 씻은 건가, 아닌가. 현재준은 씻지 않아도 딱히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 그러면 씻은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는데 저 푸석푸석한 머리는 씻은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 깔끔을 떠는 사람이니 역시 씻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속 편했다. 지금은 바쁜 시기도 아니었고, 입고 있는 옷의 찌든 부분은 없었고 냄새는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제3센터에서 A급 에스퍼가 하나 온대요.”
“어? 왜? 은퇴한대?”
재준이 물었다. 가끔 은퇴를 앞둔 A급 에스퍼들이 제7센터로 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보통 은퇴 후 서울에서 살고 싶어 했다. 자연을 즐기는 경우나 한적한 곳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모로 서울이 살기 편했다.
“아뇨, 그러기엔 너무 젊죠. 20대 후반이랬나?”
“20대 후반? 애기잖아?”
현재준이 말했다. 18세에 괴수학과를 입학해 박사까지 10년, 28살이 되자마자 인턴으로 남극에서 1년, 아마존에서 1년을 보내고 아프리카에서 3개월, 인도에서 3개월,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반년을 보낸 현재준은 31세가 되자마자 DMZ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 왔다. 그게 벌써 2년 전 일이다.
33세가 된 현재준에게 20대 후반의 에스퍼는 까마득한 애기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젊은 청년이었다.
“몰라요, 스물 아홉? 서른? 그 쯤 됐다던데. 어차피 우리랑 얽힐 사람들 아니라 자세히는 안 들었어요.”
예지가 말했다.
“그러면 유 연구원 또래겠네.”
“그렇죠.”
“잘 지내봐.”
“잘 지내긴요. 걔네들이 우리를 뭐 사람 취급 합니까? 에스퍼나 가이드가 아닌 이상 개무시 할 걸요?”
“뭐, 그건 그렇지.”
현재준이 웃으며 말했다. 현생 인류가 에스퍼와 가이드들을 대상으로 차별을 하듯, 돌연변이 형질 이능력자들도 원형 인류를 차별했다.
“애초에 얽히고 싶지도 않아요. 지조 없는 것들.”
“왜, 지조 있는 이능력자들도 많아. 각인하는 거 봐봐. 한 사람에게 그렇게 충실하기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한 사람에 충실하거든요?”
“우리도 연애 할거 다 하다가 결혼 하는 거잖아. 이혼도 할 수 있고. 하지만 이능력자들은 이혼을 할 수 없으니까.”
현재준의 말에 예지가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식어도 몸을 섞어야한다니.”
“마음이 식을 리가 있겠어요? 그렇게 안정된다는데.”
“에스퍼들은 그렇겠지. 가이드의 입장은 다르지 않을까? 사실상 가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던 현재준이 말을 멈췄다. 가이드는 에스퍼 없이도 살 수 있다. 아마도. 게다가 마음이 가지 않아도 그들에게 몸을 내주기도 해야 한다.
“모르겠다.”
재준이 말했다. 이게 그가 가이드로 각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태를 밝히지 않은 세 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참고로 첫 번째는 귀찮아서였고, 두 번째는 연구를 위해서였다.
그때 웅성거림이 커졌다. 센터 안으로 검은 SUV하나가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차는 도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변의 에스퍼나 가이드들의 시선이 차에 고정됐다. 순간 현재준의 심장 어딘가에서도 덜컹하는 기분이 들었다.
A급 에스퍼.
저 사람인 듯 했다.
*
지승운은 S급 에스퍼로 각성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기술로는 S급 이상을 측정할 수 없었기에 S급이라고 지칭되어졌지만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에스퍼치고는 아주 늦은 시기였다. 원래 등급이 높은 에스퍼나 가이드들은 늦게 각성한다고 한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되어야 돌연변이 형질이 발휘되기 때문이었다.
일찍 각성해봐야 이능청의 실험체가 된다는 것이 자명했으니 늦은 각성이 여러모로 좋았다.
보통 이른 각성자들은 D급이 대부분이며 C급이라고 해도 높은 축에 속했다. B급 에스퍼는 평균 16세, A급은 평균 17세, S급은 평균 18세에 각성한다. 그쯤 되면 이미 실험체로 쓰기에는 머리가 많이 큰 상태였다. 지승운은 그보다 1년이 더 늦은 만 19세, 12월 28일에 각성했다. 그가 2월생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20세에 가까웠다.
에스퍼의 등급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효율은 다르다. 일찍 각성하고 실험체로 쓰인 에스퍼들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 때로는 C급이 A급보다 나은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격차가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C급이 20년 걸린 것을 B급은 10년에 이룰 수 있다. A급은 5년 정도 소요된다. S급은 그 전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완성 상태까지 얼마나 걸릴지 확답할 수 없지만 지승운은 쓸 만할 에스퍼가 되기까지 딱 1년이 걸렸다.
훈련기간을 제외하면 만 8년차 하고도 몇 개월. 여전히 지승운을 능가할만한 에스퍼는 없었다.
대한민국에 딱 세 명 있는 S급 에스퍼. 제3센터와 제1센터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엘리트.
괴수 처리는 물론이고 미등록 이능자 처리, 첩보, 그 외 해외의 커다란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던 지승운이 강원도의 비무장지대로 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폭주합니다.”
지승운은 가이드가 없다.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는 흔하다. 매치를 통해서 자신에게 적절한 가이드들을 찾아 가이딩을 받거나 몸을 섞는 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승운과 매치결과가 높은 가이드들이 없었다. 그가 제1센터와 제3센터에 있으며 받은 수많은 엘리트 가이드들과의 매치는 처참했다.
11%, 17%, 24%, 29%, 33%.
제일 높은 것이 37%였다.
숨만 꼴딱 꼴딱 쉬는 꼴이었다. 아무리 가이딩을 받아도 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안정은 일어나지 않고 그저 끝없는 어둠과 깊은 물 속에 잠기는 기분이었다. 사방이 압력으로 옮아 매는 느낌. 제어 할 수가 없다.
지승운은 살기 위해서는 뭐든 했다. 손을 잡는다든가 포옹을 하는 선은 넘어섰다. 입을 맞추는 것도, 몸을 섞는 것도 상관없었다. 가이드 한 명으로는 도저히 안 돼서 두어 사람과 뒹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조금 살만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매번 두 명, 세 명의 가이드들과 뒹굴었다. 그러다보니 가이드들끼리의 싸움도 일어났다. 그러면 가이드들을 바꿔 또 뒹굴었다.
그 어떤 것도 지승운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폭주. 그 말이 맞았다.
“제7센터로 가겠습니다.”
그 말을 먼저 한 것은 지승운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유배라고 보면 됐다.
강원도 고성.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승운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은 강원도 고성이 익숙했다. 그녀는 최전방의 군인이었다. 고성은 대부분 군인들이 많이 가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스퍼인 지승운은 면제였기 때문에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서 동북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비무장지대와 산, 바다, 호수, 들, 밭이 가득한 곳. 그곳에 가이드들과 에스퍼들의 천국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 어디서 무슨 짓을 해도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이능력자 전용 도시. 일단 행정구역상 읍내였지만, 뭐든 상관없었다.
가이딩을 받을 수 있는 최소 조건, 30%의 매치. 이곳에도 있을 것이다. 몇 명과 함께 뒹굴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곳. 만약 운이 좋다면 40%대의 가이드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지속적인 관계로 잡고, 다른 한명은 번갈아가면서 하면 좋겠다고 승운은 생각했다.
“공기 좋지? 여기가 의외로 살기 괜찮아. 병원이 좀 아쉽긴 한데.”
지승희가 말했다. 승운의 유일한 여동생은 자신의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일반인들은 이능력자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한다.
민간인 통제구역에 앞서 군인 신분증과 에스퍼 신분증을 내민 뒤 무사히 통과한 승운은 바다 앞에 지어진 세 개의 동으로 된 아파트를 바라봤다. 승희가 아파트에 그를 내려줬다.
“가운데 건물. 가장 꼭대기 층이야. 비밀번호는 오빠 지금 집이랑 똑같아. 차는 내일 온다고 했지?”
“어.”
“이거 모래 위에 지어진 건물이라 지하주차장 없어.”
“모래 위? 버티나?”
“15년 넘었는데 멀쩡하던데? 튼튼하게 지었어. 괴수들이 몇 번 기어올랐는데 유리 좀 깨진 게 다야. 그리고 여기 사는 에스퍼나 가이드들 전부 다 등급이 꽤 있어. 비싸거든, 이 집. 난 이제 바로 관사로 가볼 거야. 아마 생활하면서 서로 못 볼걸? 군인들은 옆 읍내에 더 많거든.”
“고맙다, 지승희 하사.”
“고맙긴. 아, 엄마한테 연락해라? 자꾸 나한테 뭐라고 하잖아.”
“알았어.”
“충성~.”
그렇게 대답한 지승희가 운전해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단지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다. 오히려 호텔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승운이 아파트로 들어갔다.
*
이른 아침 도착할 거라던 차는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다. 어차피 출근 첫날은 얼굴 도장만 찍을 터였기 때문에 승운은 늦게 도착하는 차를 기다렸다가 인수받고 바로 제7센터로 향했다. 7번 국도를 따라 위로 쭉 올라가면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 나온다.
대한민국의 최북단, 북한과 가장 가까운 비무장지대에 이능청 제7센터와 산하의 괴수 연구소인 DMZ연구소가 있다.
의외로 땅이 넓어서 그런지 건물들이 시원시원했다. 도로도 넓찍하고 차가 막히지 않는다. 미국이랑 비슷하네, 승운이 생각하며 창문을 내려 바람을 맞으며 운전했다. 곧 도착한 센터 입구에는 안내지도가 있었다. 지도를 보니 웬만한 대학 캠퍼스보다 컸다.
괴수 연구소는 정말 비무장지대에 걸쳐 있었다. 지도를 확인한 지승운은 다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멀찍이 보였던 센터 중앙본부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제7센터는 제3센터와 달리 입구부터 평화로운 듯 했다. 잔디밭에 드러 누워있는 에스퍼나 가이드, 그리고 뒤섞인 일부의 일반인들도 별다른 근심걱정 없어보였다. 어떤 이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지승운은 그 시선을 따라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고 다시 정면을 봤다.
비행종 괴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사냥하지 않았다.
이상한 곳이군, 그게 제7센터의 첫인상이었다.
***
제7센터에 지승운 에스퍼에 대한 소문이 돈 것은 순식간이었다.
우선 그는 소문이 무성했던 A급 에스퍼가 아니라 S급 에스퍼였다. 대한민국에 단 세 명 있다는 S급 에스퍼가 이 강원도 어촌 오지에 왔다는 것에 다들 의문을 표했다. 북한이랑 뭐 한대? 협력이라도 있대? 싸우는 거 아냐? 그런 말이 돌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에스퍼들 사이에서는 유명한지 ‘그’ 지승운 에스퍼가 왔다는 말까지 했다.
이름은 예쁘군, 현재준이 생각했다.
“와, S급이 왜 여기에 왔대요?”
예지가 물었다.
그녀도 지승운을 알고 있다. 공익광고에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금 최고가를 달린다는 연예인이나 아이돌보다 인기가 많기도 했다. 물론 공익광고 이외에 다른 곳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재준은 13년간 타지생활을 한데다 집에 TV가 없어 지승운의 얼굴을 몰랐다.
“글쎄, 나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며 재준은 식판을 들었다.
DMZ연구소에는 식당이 없다. 애초에 괴수연구소의 인원이라고 해봤자 별로 없었다. 수석연구원인 현재준과 차석 연구원인 유예지가 그나마 주축이었고 나머지는 괴수학을 잠깐 전공했던 일반인이나 연구 교육을 받은 가이드들뿐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이곳에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들 서울에 있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연구소가 커다란 것은 괴수들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훈련소로도 쓴다. 훈련생 에스퍼들이 괴수에 익숙해지는 용도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소 내에는 뭐가 없었다. 기껏해야 과자와 음료 자판기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항상 차를 타고 중앙 본부로 와서 식사를 한다. 이쪽 구내식당이 더 맛있기도 했고, 점심시간에 잔디나 벤치에 누워 하늘을 보는 것도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예지와 현재준과 함께 움직이지는 않는다. 예지는 두루두루 친한 편이었지만 재준에게 다가서는 이들은 없었다. 가이드들은 가이드들끼리 따로 움직였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있네.”
재준이 말하며 반찬을 잔뜩 담았다.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두부 무침에 미역국. 어떻게 골라도 저렇게 사람들이 안 먹는 거만 고르지? 다른 고기반찬, 계란, 각종 음식들이 많은데 왜 굳이 저러느냔 말이다. 예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원래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이였다.
예지는 석사 1년 때 프랑스 남부 몽쁠리에에 있었다. 유럽에서 괴수학을 가르치는 두 대학 중 하나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현재준도 남프랑스에 있었다. 서로 안면식도 없던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모노프리에서 재준은 대뜸 예지에게 운전을 할 줄 아냐고 물었다. 운전을 할 줄 안다고 하자 예지에게 차 키를 넘긴 현재준이 내비게이션을 찍어 어딘가로 갈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산으로 운전한 예지는 이 사람이 자신에게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같은 바닥 선배인데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신고를 할 수 있나?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괜히 따라 나선 자신을 탓했다.
아니나 다를까 현재준은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때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현재준이 예지에게 호미를 넘기기 전까지 말이다.
“현 박사님 입맛은 정말 알 수 없어요.”
당시 재준이 말했었다.
‘여기 물냉이가 있어.’
물냉이. 그게 뭐? 일단 예지는 냉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근데 물냉이? 그게 뭔데? 먹는 거라는 건 안다. 그런데 그게 왜?
‘얘네들은 물냉이를 안 먹어. 이 맛있는 걸.’
현재준은 그저 자신과 함께 물냉이를 같이 캐줄 한국인 동료가 필요했던 거다.
‘다음엔 고사리 따러 갈래? 잘 나는 곳을 알아. 얘네 고사리도 안 먹더라.’
현재준이 남극을 거절한 것은, 남극에서는 어떤 방도로든 한식 재료를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아주 나중에 듣고 예지는 기함을 토했다.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남극인데 그깟 한식을 못해 먹어서 싫다니.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현재준이었다.
“왜. 나물 좋잖아. 환경에도 좋고.”
“그놈의 환경.”
“인간이 파괴한 환경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 괴수가 출현했지. 즉, 환경보호는 괴수로부터의 해방과 동일해.”
“거짓말 하지 마세요. 오존층이 돌아온 지가 언젠데. 이미 세상은 돌이킬 수 없다고요. 다 쓰고 죽어야 해.”
예지가 말하며 반찬을 담았다. 물론 다 쓰고 죽자는 뜻은 아니었다. 예지의 식판은 재준과 대조적으로 고기가 많았다. 예지는 근손실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탄단지를 깐깐하게 따졌다. 지방이 별로 없으니 오늘 간식은 견과류로 해야겠다고 말하는 예지를 보며 현재준은 그러라고 답하곤 먼저 빈자리를 찾아 나섰다.
“진짜 그 지승운 에스퍼야.”
현재준이 앉은 자리 옆쪽에서 소리가 났다. 예지는 현재준의 건너편에 앉았다.
“정말 잘생겼더라. 그런데…….”
“왜? 뭔데?”
“지승운 에스퍼는 한 번에 여러 사람이랑 하는 걸 선호한대.”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예지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어휴, 이놈의 지조 없는 이능력자들. 반면 현재준이 ‘호오.’ 하며 귀를 기울였다.
“왜, 지승운 에스퍼가 이곳에 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고 하잖아.”
그게 뭔데. 아무하고나 뒹굴 수 있는 도시라서? 유예지가 생각했다. 확실히 이곳에선 가이드 둘 셋이랑 뒹굴어도 비난하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매칭이 좋은 가이드가 없대.”
“진짜? 엄청 힘들겠다.”
“최고가 30퍼센트 대 중반이라더라. 그러니까 두 세 사람이랑 가이딩을 해야 좀 견딜 수 있다나봐.”
“그럴 수밖에 없네. 근데 지승운 에스퍼면 거의 10년차 아냐? 10년 동안 매칭 되는 가이드가 한 명도 없었다고?”
“그래. 그래서 제7센터까지 온 거지. 폭탄이잖아.”
들리는 소리에 예지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현재준도 더 이상 들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식사를 했다. 즉, 그 지승운 에스퍼도 이곳에 유배를 온 것이다. 폭주 위험 때문에.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는 3년 정도밖에 버티지 못한다. 그 뒤로는 거의 폭탄과 다를 바 없다. 폭주를 앞둔 에스퍼들은 위험하다. 가이딩으로 조절할 수 없는 에너지가 어느 순간 넘치게 되면 이지를 상실하고 모든 것을 부순다. 그런 위험한 에스퍼를 수도권에 둘 수는 없다. 특히 제3센터의 경우 지리적으로 중요하며 높은 등급의 에스퍼들 또한 많다.
덕분에 여타 에스퍼들의 폭주에 대비할 수는 있지만 문제는 지승운 에스퍼의 등급이다. S급은 A급 수십이 와도 감당이 힘들다.
굳이 S급이 아니어도, 종종 폭주 문제로 A급 가이드들이 제7센터를 찾는 경우가 있었다. 폭주를 앞두면 에스퍼들은 제 발로 비무장지대로 간다. 비무장지대에 사람이 들어서면 숨어있던 괴수들이 반응해 달려든다. 폭주한 에스퍼는 괴수와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지뢰를 밟아 너덜너덜해진다. 그렇게 엉망진창이 된 에스퍼를 꺼내와 치유계 에스퍼가 목숨을 붙여놓고 구속구를 입혀 몸 상태가 회복될 때가지 약물을 주입하고 기구 속에 넣어 방치한다. 실질적 인권유린이지만, 위험한 에스퍼들의 폭주를 그냥 맨몸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에스퍼는 기구 속에서 온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 홀로 견딘다. 그 와중에 정신이 무너지는 이들이 많다. 가이드들 역시 주기적으로 가이딩을 해주고, 상담사가 붙어 도움을 주지만 결과적으로 폐기되는 에스퍼들이 더 많다.
유배, 혹은 죽을 자리.
이능청 제7센터는 그런 역할 또한 하고 있었다.
“괜히 들었네.”
유예지가 말했다. 지금까지 저 전철을 밟은 에스퍼는 총 다섯이다. 그 중 네 명은 자살했고, 한명은 조현병을 얻었다.
지승운은 이곳에 죽으러 왔다고 봐야했다.
S급 에스퍼, 10년 만에 폐기 예정이었다.
*
물론 지승운은 죽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있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정신적으로 튼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어도 적어도 40퍼센트 대의 가이드만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살 수 있었다. 아니, 30퍼센트 대여도 상관없다. 이곳에 있는 많은 가이드들과 매칭을 해보고 높은 가이드들만 골라 가이딩을 받으면 된다.
하루에 몇 번이어도 상관없었다. 살 수만 있다면.
하지만 다들 자신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설사 제 발로 지뢰밭에 발을 담는 한이 있어도 지승운은 살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온 것이 폭주를 대비하기 위한 것만도 아니었다. 센터는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지승운을 이용하려 들었다.
지승운이 오자마자 가이드들과의 매치를 요구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7센터에는 총 812명의 가이드들이 있었다. 하루에 10명씩 체크를 한다고 해도 주말이 있으니 세 달은 족히 걸릴 일이었다. 물론 각인 가이드들 또한 있을 테니 그들을 제외하면 넉넉잡고 세달 정도면 됐다. 이곳의 에스퍼들은 1326명. 지승운이 온 뒤 1327명이 됐다. 그 중에서 A급이 17명. B급이 301명. 이 정도면 꽤 많았다. 웬만한 괴수가 나와도 자신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휴양이라고 생각해야지. 지승운이 생각하며 검진센터로 향했다. 승운은 그날로부터 매일 가이드들과의 매치를 확인한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째, 승운과 테스트를 한 200여명의 가이드 중 30퍼센트를 넘기는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절망적이다.
***
지승운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가이드들에게 지분거렸다. 저걸 지분거렸다고 해야 할지. 그는 가이드들에게 친절했다. 자기와 매치가 높든, 높지 않든 말이다. 그와 33퍼센트의 매칭률을 얻은 가이드는 DMZ괴수연구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괴수 세포의 DNA를 분해하는 작업을 했다. 하루 종일 염기서열만 보는 것이다. 예지는 그 가이드가 참 부러웠다. 차라리 저런 일을 하고 싶었다. 간단하고 머리 쓰지 않아도 될 일말이다.
어찌되었든 자신과의 매치가 30퍼센트가 넘는, 적어도 자신에게 가이딩을 할 수 있는 가이드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승운은 DMZ연구소에 발을 들였다. 그러기 위해선 수석연구원인 현재준의 허가가 필요했다.
“소장은요?” 지승운이 물었다.
“DMZ연구소엔 소장이 없어요.”
“왜?”
“연구소장은 원래 한 국가에 한명 겨우 있을까 말까 하거든요. 임의로 소장 자리를 줄 수 있긴 하지만 연구소는 대통령 직속이라, 소장이 한명 있고 수석연구원들이 각 지역 연구소에 배치되어있어요. 그마저도 괴수학 박사가 아닌 이들도 있고. 아, 한반도에는 총 두 명의 소장이 있습니다. 평양에 한명, 서울에 한명. 인구와 면적대비 꽤 많죠.” 유예지가 대답했다.
“그럼 원래 괴수연구소들은 수석연구원만으로 돌아간다는 겁니까?”
지승운의 말에 예지는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다. 사실 현재준의 경우 소장급, 아니 어쩌면 서울에 있는 소장보다 더 뛰어난 실력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한 나라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마 자기가 가고 싶다고 하면 어디든 어서 오세요 하고 시민권을 줄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나이가 어렸고(학자의 시간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간과 다르다), 한국의 정치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 소장 놈보다 우리 현 박사님이 훨씬 뛰어나다고!
하지만 예지는 말하지 못했다. 실력이 좋아도 뒷배와 정치력이 없는 현 박사가 그 세계로 뛰어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단물만 쪽쪽 빨리다가 희생될 테니까. 차라리 여기서 쥐 죽은 듯이 사는 것이 더 낫다.
지승운이 현재준을 내려다봤다. 승운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끔찍한 것을 보는 얼굴이다. 물론 예지도 현재준을 그런 식으로 보긴 했지만 내가 보는 것과 남이 보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저 문란한 에스퍼가 우리 현 박사님을 무시한다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예, 그렇죠.”
재준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어쨌든 권한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지승운 에스퍼한테는 권한을 줄 수 없어요. 오시고 싶으시다면 외부인 출입증을 발급해드릴게요. 6시간까지는 자유 출입 가능합니다.”
“제가 매일 오면요?”
“매일 발급하면 되죠.”
귀찮게. 지승운이 생각했다. 귀찮았다. 그냥 출입허가증을 발급하면 되는데 외부인 출입증이라니. 매일 그 짓을 하란 말인가?
“싫으시면 말고요.”
현재준이 말했다.
“싫을 리가요.”
지승운이 웃어보였다. 귀찮아도 네가 더 귀찮겠지. 어디 한번 좆 돼봐라. 지승운이 생각했다.
*
지승운은 그로부터 매일 DMZ 연구소를 찾았다. 현재준은 매일 그에게 출입증을 발급해줬다. 분명 지겹고 귀찮을 것이라고 지승운은 생각했지만 현재준은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일과에 하나가 추가 될 뿐이었다. 그리고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준이 유예지와 함께 아침에 출근하면 언제 와 있었는지 지승운이 연구소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현재준이 연구소 문을 열고 들어가 지승운의 사원증에 외부인 출입허가를 승낙하면 지승운이 들어올 수 있었다. 지승운은 가이드가 근무하는 곳 근처에서 죽치고 있다가 가이드가 오면 예쁜 얼굴로 인사했다. 그리고는 별거 하지 않는 가이드의 곁에서 살랑살랑 웃으며 힘들지는 않냐든가 연구원님은 어떻게 이런 걸 하는 거냐든가 천재가 아니냐며 열심히 아부를 했다. 그러면 가이드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승운은 그런 가이드의 손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얼굴은 예쁜데 행동은 변태 같았다.
예지와 재준은 건너편에서 그걸 전부 보고 있었다. 연구소 특성상 위험물이 많아 모든 곳이 방은 강화유리로 구분되어 있었다. 즉, 다른 방에서 뭘 하든 다 보인다는 것이다. 위협을 당한다든가, 뭔가를 훔친다든가 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DMZ연구소에서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겨우 30퍼센트 대 가이드한테 왜 저렇게 지극정성이래요?”
예지가 말했다.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50% 이하의 가이드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최소 51%가 넘어서야 조금은 미소를 지어줬으며, 60%쯤은 돼야 저렇게 웃어주며 다정한 말을 건넸다. 하지만 지승운은 조금 지조가 없어 보였다. 아니, 지조가 없다 수준이 아니다. 그냥 가이드면 누구든 저렇게 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살고 싶으니까 그런 거겠지.”
현재준이 말했다. 지승운은 이제 서른 살이었다. 에스퍼로 각성한 지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상태를 좋게 개선하고 싶을 것이다.
“어제 거리에서 가이드 두 명을 차에 태우고 가던데요.”
예지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지승운은 그동안 더 많은 이들과 매치테스트를 했다. 총 800여명의 가이드 중 각인가이드를 제외하곤 약 700명. 그 중에서 500명과 테스트를 한 지승운에게 30% 이상의 매치를 가져오는 가이드는 총 8명. 그 중 4명이 30%였고, 2명이 31%, 한명이 32%. 그리고 이 연구소에 있는 가이드가 33%였다.
“목숨줄이잖아.”
“에스퍼는 고고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목숨줄이니까.”
현재준이 다시 말했다. 예지는 됐다는 듯 말을 돌렸다.
“그래도 예쁘긴 참 예쁘네요. 역시 등급이 높아서 그런 거겠죠?”
“강한 에스퍼일수록 아름답다고 하잖아.”
“가이드들은 외모와 능력이 직결되지는 않는데 말이죠.”
예지의 말에 현재준이 “그렇지.” 하고 웃었다. 강한 가이드들은 냄새가 난다. 괴수들이 사랑하는 냄새. 그리고 그 냄새에 에스퍼 역시 반응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아직 어떤 에스퍼도 재준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마 자신의 등급이 낮아서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것은 연구를 계속 해야 알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재준은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을 숨겨야했다. 발표를 할 만큼의 결과를 얻기 위해선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현재준도 그 실험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예지는 알지 못한다. 아니, 이건 괴수학자들 중에서도 일부만 알고 있었다. 이 실험에 동참해줄 가이드를 찾기 힘드니까. 그런 면에서 현재준이 가이드라는 것은 아주 다행이었다.
*
지승운은 DMZ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덥수룩한 머리도 그렇고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몸도 그랬다. 무슨 냄새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전장의 냄새? 괴수의 냄새. 괴수의 내장 냄새? 아니다, 괴수가 죽었을 때 나는 냄새인가? 그것 역시 아니다. 혹은 살아있는 것을 마주쳤을 때의 느낌? 고양감과 긴장감과 흥분이 뒤섞인.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에게선 불안한 냄새가 난다.
가이드에게 살랑살랑 웃던 지승운이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바라봤다. 강화유리로 되어있긴 하지만 지승운의 귀에는 저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렸다.
겨우 30%대 가이드에게 지극정성이라는 말에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의 가이드가 있다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매칭이 되는 가이드가 없었다. 아니, 50%를 넘어서는 가이드조차 나오지 않았다. 50%는커녕 40%도 나타나지 않는다. 40%대 가이드가 나타난다면 지승운은 당장 그 가이드를 취해 각인이라도 새길 것이다. 만약 그가 다른 에스퍼의 가이드라면 지승운은 그 에스퍼를 죽일 의향도 있었다. 40%정도만 되어도 말이다. 하지만 페어나 각인과는 매칭 테스트를 할 수 없다.
‘살고 싶으니까 그런 거겠지.’
현재준 박사가 말했다. 지승운이 그를 바라봤다. 보통 일반인들은 이능력자들의 정조관념에 대해 끔찍하게 여긴다. 본능에 미친 짐승들이라며. 유예지 연구원이 다시 어제 가이드 두 명을 데리고 갔네 어쩌네 말했다. 유예지 연구원은 지승운을 자주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면 지승운의 차였다. 그 커다란 SUV가 로망이라는 듯, 유예지는 그의 차를 몰래 찍은 적도 있었다. 지승운은 그것을 봤지만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목숨줄이잖아.’
현재준이 말했다. 그랬다. 목숨줄이다. 겨우 33퍼센트 대의 매칭을 가지는 가이드에게 애교를 부리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모른다. 그저 가이드에게 친절한 호색한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S급 에스퍼라고 한들 가이드가 없으면 모두 끝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가이드들은 가이드들끼리, 일반인 연구원은 연구원들끼리, 그리고 현재준과 유예지는 따로 움직였다. 지승운은 자신의 차에 가이드들을 태우면서 현재준 박사와 유예지 연구원을 바라봤다. 둘이 사귀는 사이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성적 긴장감이 떨어졌다. 하지만 둘은 늘 같이 붙어 다녔다.
“현재준 박사요.”
지승운이 핸들을 풀며 말했다. 사람들은 가이드들이 그저 에스퍼에게 다리를 벌리는 것으로 돈을 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가이드들 역시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일반인들보다는 좋은 직업교육을 받긴 했다. 때로는 머리에 비해서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이라는 것은 동의했지만, 그들은 가이드였다. 에스퍼들이 필요로 하는 존재들. 솔직히 말하면 연구소에 있는 가이드들이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라고 지승운은 생각했지만 상관없다. 머리가 나쁘든 좋든 그를 안정화시켜줄 수 있다면 말이다.
“현재준 박사님이요?” 가이드가 되물었다.
“예. 유명하신 분인가요?”
“괴수학계에서는 그렇죠. 괴수학 박사가 전 세계에 300명이 안된다고 하잖아요. 현재준 박사가 최연소래요. 심지어 아직도 괴수학 박사 중에선 제일 어리고요.”
“능력이 뛰어난가 봐요?”
“여기저기 오라는 곳이 많았는데 본인이 DMZ를 선택하셨대요.”
“왜죠?”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던데…… 애국심이 아닐까요?”
만약 유예지가 들었다면 나물반찬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물반찬. 특히 현재준은 고사리와 도라지에 환장을 했다. 그는 간편하게 식사를 때우고자 하면 비빔밥을 먹었고, 정월 대보름에 먹는 나물반찬과 부럼을 사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원래 저러고 다녀요?”
지승운이 물었다. 그 질문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는 가이드들에게 승운이 다시 말했다.
“머리가…… 안경도요. 옷도 품이 좀 큰 것 같고.”
“아, 그건 그렇죠? 근데 뭐. 어차피 학자들은 다 그렇잖아요.”
“학자 치고는 몸이 좋은 것 같더라고요. 유예지 연구원도 그렇고.”
“그게…… 소문으로는요.”
가이드가 말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뭔 커다란 비밀이 있다고 저런담. 지승운이 생각하는데 이어지는 말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괴수학을 전공하는 이들은 군사훈련을 필수로 받는대요. 그 프랑스 외인부대에서요.”
“……예?”
“그게, 괴수를 연구하려면 잡아와야하는데 에스퍼들은 괴수를 쓰러뜨리기만 하고 잡아오진 못하잖아요.”
“아, 그렇죠.”
에스퍼들이 괴수를 건드리면 괴수는 보통 산산조각 난다. 산채로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에스퍼에 따라 정신계 쪽은 가능할지 몰라도 그걸 컨트롤할만한 이는 없다. 게다가 대한민국에는 A급 정신계 에스퍼가 채 백 명도 안 된다. B급은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고 말이다.
그러네. 지승운이 사냥할 때도 괴수들이 산산조각난다. 단순이 그 몸체뿐만 아니라 유전자 감식도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희귀 괴수가 나오면 S급들은 웬만하면 나서지 않는다. B급이나 A급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움직인다.
“큰 괴수를 잡기는 힘들고 어린 괴수를 잡아서 길러 연구해야하는데, 어린 괴수라고 해도 괴수는 괴수니까요.”
“그렇네요.”
“근데 현재준 박사님은 좀 큰 괴수들을 잡아서 길러요. 너무 어린 괴수들은 안 건드리더라고요.”
“왜요?”
“치어 같은 거라고.”
치어? 이게 무슨 금어기도 아니고, 괴수를 어리다고 안 잡아?
“저번에 호미 한 자루로 식물형 괴수를 사냥하는 것도 봤어요.”
“…….”
“사실 에스퍼 아니냐는 소문도 돌긴 하는데.”
승운이 피식 웃었다. 에스퍼라니. 그 외모를 가지고?
“그 외모가 에스퍼라고 할 수는 없죠.”
사람 생각하는 것은 다 똑같았다. 하지만 그 몸은.
……몸은 꽤 괜찮았지.
그렇게 생각하던 승운이 일순간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졌다. 지금 뭐라고? 몸이 괜찮았다고? 가이드도 아닌 일반인의 몸이 괜찮은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지금 그 꼴을 한 일반인의 몸을 볼 생각이 든 건가? 스스로에게도 황당한 일이었다. 게다가 옆에 가이드들까지 있지 않은가. 근데 왜 그 남자를 떠올린 건지 지승운은 알 수 없었다.
아마 특이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특이한 냄새를 풍기고 있어서. 그게 현장을 떠올리게 해서. 현장에서 느끼는 왠지 모를 두려움과 흥분의 냄새가 그 남자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고 있어서 그렇다고 지승운은 생각했다.
*
현재준은 식후에 중앙 본부 앞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원래 이 벤치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해왔었지만 현재준이 매일같이 차지한 이후 마치 그의 지정석처럼 누구도 앉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벤치에 누군가가 있었다.
재준은 아무렇지 않게 벤치로 다가가 빈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현재준이 앉자 놀란 것은 지승운이었다. 아니, 사람이 있는데 그냥 막 앉아? 지승운이 놀란 듯 바라보자 현재준이 승운을 한번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잔디밭을 바라봤다. 지승운이 황당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보통 사람이 있으면 피하지 않나? 무슨 일행처럼 옆에 앉는단 말인가. 하지만 재준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가 하늘을 바라보자 승운의 시선도 하늘로 향했다.
하늘 위에는 비행종 괴수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누구도 괴수를 신경 쓰지 않았다. 태평한 건지. 지승운이 고개를 내렸을 때 현재준은 승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뭡니까?” 승운이 물었다.
현재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위에는 비행종 괴수가 있다.
“빙글빙글이에요.” 재준이 말했다.
“예?”
“저 괴수요. 학명이 빙글빙글.”
“…….”
“제가 지었어요. 빙글빙글 돌아서.”
뭐야, 이 새끼는. 지승운이 생각했다.
빙글빙글? 그걸 학명으로 지어도 되나?
아니, 학명으로 됐다는 건 발표가 됐다는 건가? 괴수한테 빙글빙글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인간을 공격하는 형태의 괴수는 아니에요. 다 크면 5m가 돼요. 마치 콘도르처럼요. 아니, 사실 콘도르도 괴수이긴 한데…… 그러니까 쟤는 콘도르와 같은 종이긴 해요. 근데 이제 명칭이 빙글빙글 현. 한국에서 나온 괴수거든요.”
또라이 아냐, 이거.
현재준은 이상했다. 원래 박사라는 이들이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현재준은 그 중에서도 좀 더 이상한 것 같았다. 지승운이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냥 이대로 자리를 뜰까 고민하는 순간 현재준이 “지승운 에스퍼.” 하고 말을 건넸다.
“가까이에서 보니 예쁘게 생겼네요.”
미친놈이다.
“가이드들이 좋아하겠어요.”
“……예에.”
지승운이 마지못해 답했다.
“일반인들도 좋아하죠. 하지만 전 일반인은 상대 안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현재준은 그렇게 답하는 지승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뭐, 일반인들이 에스퍼와 하지 않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다. 간혹 에스퍼와 밤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에스퍼는 그들로부터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걸 하긴 하나? 금욕적으로 생겼다고 해야 할지.
아니, 금욕적이라기보다는 아예 성적으로 배제된 느낌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혼자서는 하나? 실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지승운은 정말로 궁금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하늘을 바라보던 현재준이 승운을 돌아봤다. 현재준의 작은 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매칭테스트죠? 40퍼센트 대의 가이드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하.”
현재준의 말에 지승운이 한숨을 내뱉었다.
“놀리는 건 아니겠지만 놀리는 것처럼 들리네요.”
“제가 왜 지승운 에스퍼를 놀리죠?”
“예, 그러니까 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만.”
지승운이 이죽이듯이 말했다.
“10년 동안 매치를 해봤자 30퍼센트 대 중반을 넘는 사람도 두어 명밖에 없었습니다. 이 조그마한 제7센터에서 이만큼 많은 가이드들을 만난 게 대단한 거죠.”
“제7센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이능청 센터예요.”
재준이 말했다. 지승운이 할 말을 잃고 현재준을 바라봤다. 지금 누가 그걸 말했나. 애초에 제7센터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질이 떨어졌다. 때로는 질보다 양일 때도 있지만 웬만한 엘리트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제1센터와 제3센터에 있다.
현재준은 자신의 대답이 부족했나 싶어 이어 말했다.
“북한 포함해서요.”
“…….”
북한 포함해도 제일 큰 곳이라는 건 몰랐다. 하긴, 강원도니까 이런 규모의 센터를 지을 수 있긴 할 것이다. 현재준이 이어 말했다.
“보통 자기한테 맞는 가이드는 에스퍼는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하죠. 어쩌면 지승운 에스퍼의 가이드가 북한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끔찍한 소리였다. 북한에 있는 내 가이드라니. 그러면 평생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앞으로의 정세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지만. 그래도 당장 만나는 것은 힘들었다.
진짜 놀리는 거 아냐? 지승운이 재준을 향해 뭐라고 하려는 순간 현재준이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아.” 하고 내뱉었다. 지승운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비 냄새가 난다.”
비 냄새라니. 에스퍼는 여러모로. 감각이 예민하다. 후각도 마찬가지였다. 지승운에게는 비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러더니 현재준은 시선을 돌려 중앙 본부를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유예지 연구원이 손을 흔들어보였다.
“박사님!”
“그러면 매칭 잘 하세요.”
현재준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신을 스쳐 지나갈 때, 지승운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아슬아슬하고 무언가를 상실한, 붙잡아야 할 것 같지만 제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은 것이었다. 그걸 뭐라고 정의내릴 수 없었다.
* * *
비가 내렸다.
지승운의 아파트의 침실의 창은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바다는 고요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칠흙 같은 어둠만이 위아래로 존재했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만이 그것이 외부와 연결된 통로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했다. 지승운은 커튼을 치지 않았다. 누가 볼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사실 본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추는 사람을 승운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이드 특유의 에너지가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힘을 풀어냈다.
“아읏…… 앗! 아, 아…… 아!”
지승운 위에서 가이드가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부족하다.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움직이고 위로 찍어 올렸지만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뿌리 끝까지 박아 올리자 앓는 소리가 났다. 이미 가이드 한명은 지쳐 침대 아래에 쓰러져있었다. 이 가이드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지승운이 가이드의 다리를 들어 올려 체위를 바꿨다. 그리고 그대로 때려박듯 골반을 움직였다.
부족하다.
“앗! 아앙, 아! 그, 처, 천천… 히……!”
부족하다.
부족하다.
“흐으, 으! 응! 아응! 좋, 좋아! 좋아요……!”
부족하다.
“좋아요, 지승운 에스퍼!”
살려줘.
*
밤새 내린 비는 아침까지 지속됐다. 지승운은 간단히 식사를 차려 두 가이드에게 먹였다. 그들의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지만 꾸며낸 표정이었다.
부족하다.
두 명으로는 부족하다.
셋, 넷. 어쩌면 그 이상이어도 부족할지 모른다.
충족되지 않는다. 그들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이 없다간 곧 미쳐버릴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대로 가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했다.
지승운은 그 일을 끝으로 폐기될지도 모른다.
폐기되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미치고 싶지 않다. 평범하게, 아니 평범하지 않아도 좋다. 힘들어도 좋다. 갈증에 허덕여도 좋다. 살고 싶다. S급 에스퍼가 되면 뭐든지 될 줄 알았다. 뭐든지 해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는 영원히 충족할 수 없다.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사는 것조차도.
지승운은 가이드들을 차에 태우고 함께 출근했다. 한명은 중앙 본부에서 내렸다. 다른 한명은 제7센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DMZ 연구소에서 일한다. 그는 지승운이 이곳에서 만난 가장 매칭이 높은 가이드였기 때문에 승운은 그를 위해 뭐든 해줄 수 있었다.
승운에게 손을 흔들며 연구소로 들어가는 가이드를 향해 승운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하지만 저 가이드에게 지승운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그를 탐내는 높은 등급의 에스퍼일 뿐.
지승운은 자기의 등급이 높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니까 30퍼센트 대의 가이드들이 자신과 자주는 것이다. 보통 매치가 그렇게 낮으면 가이드들도 섹스를 꺼린다. 하지만 S급과 뒹구는 경험을 놓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지승운이 살기 위해 그들과 잔다면, 그들은 나중의 자랑을 위해 지승운과 잤다.
비참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비참하기 짝이 없다. 부족하다.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살고 싶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얽혔다. 이런 생각들이 계속 나는 거 보니 지승운 자신의 삶도 얼마 남지 않은 듯 했다. 곧 미쳐서 폭주하겠지. 그리고 제 발로 비무장지대로 걸어 들어 갈 것이다. 거기서 끔찍하게 몸을 난도질당한 뒤 건져내서 포박하고 기구에 처박겠지. 그렇게 얼마나 있어야 할까. 한 달? 두 달? 반년? 일 년? 삼 년?
……깨어나긴 할까?
뭐든, 그 사람은 폭주해 죽더라도 하던 일을 마무리하라고 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씁쓸해졌다.
지승운은 제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담배를 꺼냈다. 끊을까 싶었는데,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할 거 그냥 있는 대로 다 피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담배를 물었다. 하지만 라이터가 보이지 않았다. 제복을 더듬거렸는데도 걸리는 것이 없는 거 보니 아무래도 챙기지 않은 듯 했다.
승운이 “씨발.” 하고 작게 욕을 하며 담배를 손으로 옮기는데 옆에서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기가 느껴졌다. 승운이 고개를 돌렸다.
“불,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현재준 박사였다. 항상 거리가 있어서 몰랐는데 현재준 박사의 키가 생각보다 컸다. 지승운보다 눈높이는 낮았지만, 웬만한 남자들보다 키가 컸다. 입을 맞춰도 목이 아프지 않을 높이군. 지승운이 생각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불이요, 지승운 에스퍼.”
“……감사합니다.”
지승운이 답하며 담뱃불을 붙였다.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었다. 키가 큰 사람을 만나본 적은 없는데, 이 정도 높이면 꽤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가 승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재준은 그런 승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패드를 만졌다.
“외부인 출입 허가증 발급해드리죠.”
“이쯤 되면 그냥 허가증을 주는 게 어때요? 몇 개월짜리로.”
“연구소는 위험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모르시는 것 같은데, 연구소는 위험합니다.”
현재준이 다시 말했다. 지승운이야 말로 재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위험하다니, 당연히 위험하지. 괴수연구소인데. 그러다가 순간 승운은 재준이 하는 말을 알아차렸다. 위험하다는 것이 통상적인 위험이 아니라 승운에게 위험하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현재준 박사님.”
“예.”
“저 S등급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특급 에스퍼.”
특급……. 아니, 특급이 맞긴 한데.
“우수한 에스퍼들만 있는 이곳에 유일한 특급 에스퍼죠.”
“우수……. 에스퍼들을 어떻게 평가하는데요?”
“기존 체계를 이용합니다만, 귀찮을 땐 수우미양가로요.”
“…….”
이거 또라이…….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승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특급 에스퍼. 맞는 말이었다.
“그래요. 저 특급 에스퍼입니다. 저한테 위험한건 없어요, 박사님.”
지승운의 말에 현재준이 승운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봤다. 이건 또 뭐람? 누군가에게 평가당하는 것은 익숙했고, 사람들의 시선도 익숙했지만 현재준의 시선은 그가 일상적으로 받아왔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지승운 에스퍼는 가이드가 없잖아요.” 현재준이 말했다.
“연구소는 위험합니다.”
걱정? 아니면 무시?
지금 현재준이 자신에게 하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다. 무시보다는 걱정에 더 가까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승운은 왠지 무시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건 자신의 자격지심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지승운은 가이드가 없다. 승운이 재준의 얼굴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재준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콜록이지 않는 거 보니 흡연자일지도 몰랐다.
“현 박사님.”
“예, 지승운 에스퍼.”
“전 가이드가 없어도 여기서 현 박사님을 몰래 죽여 묻기에는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요.”
승운이 이죽였다. 현재준이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그래도 장기 출입허가는 안됩니다. 지금부터 여섯 시간, 연구소를 출입하실 수 있습니다.”
“…….”
이 인간 조금 사회화가 덜 된 거 아닌가? 승운이 생각했다.
*
지승운은 현재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유를 모르겠다.
오늘도 가이드들과 매치를 했다. 하지만 30퍼센트는커녕 20퍼센트 대 가이드들만이 태반이었다. 승운이 실망하는 만큼 가이드들도 실망이 컸다. 등급 여하에 상관없이, 40퍼센트만 돼도 S급 에스퍼의 가이드가 될 수 있었다. 지승운이 40퍼센트 대 가이드만이라도 좋으니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이능력자들에게는 유명했다. 제일 높은 사람이 37퍼센트라니, 얼마나 끔찍한 삶이란 말인가. 심지어 그 가이드는 승운이 별로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승운에게는 37퍼센트의 벽을 넘는 사람이 없었다.
목숨줄, 딱 맞는 표현이었다.
희망이 점점 떠내려간다. 이대로 죽음을 향해 갈 것이 분명했다.
일곱 명의 가이드와 매치 테스트를 한 승운은 DMZ연구소로 돌아왔다. 매칭율이 제일 높다는 가이드는 여전히 염기서열을 분해하고 있었고, 수석 연구원과 차석 연구원은 괴수와 씨름을 하고 있다. 이런 저런 기록을 하는 것은 승운의 귀에 명확하게 들렸다.
‘매실이 상태가 좋지 않아.’
‘저번에 그 약물을 써서 그렇죠?’
‘응. 아무래도 효과가 있는 것 같네. 이 정도면 낮은 등급의 에스퍼에게 호신용으로 줘도 되겠어.’
왜 괴수 이름을 매실이라고 짓는데.
‘살구는요?’
‘살구한테는 안 통해. 아무래도 표면이 농도 높은 산이다 보니까……. 알칼리를 이용해서 중성에 가깝게 만든 다음에 무기를 써볼까?’
‘알칼리라. 괜찮은 것 같은데요?’
‘일단 실험해보고 통한다 싶으면 발명 팀으로 넘기자. 스프레이 형태가 좋으려나?’
‘물풍선 같은 건 어때요? 아, 아니면 그물처럼 던져서 펼쳐지는…….’
대화하는 두 연구원을 보며 승운이 창살 너머의 괴수를 바라봤다. 쟨 또 왜 이름이 살구냐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름을 짓는 거야? 누가 지은거지? 유예지 차석 연구원? 일단 현재준 박사는 아닐 것이라고 승운은 생각했다. 저런 외모로 괴수에게 매실 살구의 이름을 붙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라따뚜이는 상태는 어때?’
‘아, 라따뚜이…….’
“…….”
진짜 이름 센스 한번 극악이었다.
*
지승운은 자판기에서 몰티처스를 뽑아 연구소 밖으로 나왔다. 연구소는 DMZ철조망 바로 앞까지 있었다. 이 철망을 넘어가면 비무장지대였다. 말이 비무장지대지, 지뢰밭이다. 간혹 펑 펑 터지는 소리가 나는 것은 괴수 혹은 야생동물이기도 했다. 사람이 밟아도 터지긴 할 것이다. 승운은 자신의 미래가 그려졌다. 역겹게도.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을 보니 정말 폭주가 다가오는 듯 했다. 승운은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봤다. 에스퍼의 현재 상태를 알려주는 시계는 몇 달 전부터 붉었다. 곧 터지기 직전이었다. 가이드들과 뒹굴면 잠시 노란색으로 돌아온다 싶다가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붉게 물들었다.
보통 에스퍼들이 안정적일 때는 시계는 어떤 색도 나타내지 않은 채 검은색을 띤다. 그리고 가이딩이 필요할 때는 녹색, 위험하다 싶을 때는 노란색. 그리고 폭주 직전은 붉은색이다.
어제 두 사람과 뒹굴었는데도 노란 빛은커녕 곧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붉은 빛이 깜빡였다.
차라리 지금 들어갈까.
아직 이지가 남아있을 때 제 발로 들어갈까.
생각하던 승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일이 끝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승운이 죽는 건 신경 쓰지 않더라도 일을 끝내지 못한 건 신경 쓸 것이다. 지옥까지 쫓아와 그를 끌어내 일 마무리 하고 보고서 넘기고 다시 죽으라고 할지도 모른다. 업무적으로는 그랬지만, 개인적으로도 지승운은 조금 더 살고 싶다.
우선 이 초콜릿을 다 먹고 올라가서 가이드에게 입맞춤을 해야겠다. 그래야 부정적인 생각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는 손을 만지작거리고, 포옹을 하고, ……화장실에서 하자고 하면 화를 낼까? 왜 연구소에는 가이딩을 할 만 한 방이 없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왜 방이 전부 유리로 구분되어 있는 거지? 조금이라도 가려지는 곳이 있다면 바로 도움이라도 받을 텐데.
역시 급하면 화장실 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던 지승운은 순간 서늘해진 목덜미에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괴수였다. 아직 철망을 넘어오지 않은 괴수의 주변이 스모그로 뿌옇게 변해있었고 콧김이 풀풀 났다.
좆 됐다. 지승운이 생각했다.
진짜 좆 됐다.
등급은 짐작가지 않지만 그렇게 높지 않다. 이전 같으면 손가락 하나면 해결할 수 있는 허접한 괴수였다. 하지만 지금 지승운의 상태는 좋지 않다. 괴수가 한발자국 더 움직였다. 지승운은 물러서지 않았다. 괴수는 그런 승운을 보며 한발자국 더 내딛었다. 그의 몸이 철망이 있는 곳을 통과하자 시계와 핸드폰에서 진동과 알림음이 났다. 재난문자가 뜬 것이다. 괴수가 센터 내부로 들어온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근처에 자가 감지 시스템이라도 있는 듯 했다.
다만 지승운이 얼마동안 이곳에 있어보며 느낀 것은, 제7센터에 괴수가 들어오는 일은 많아 대부분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에스퍼가 처리하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이었다. 지승운이 피식 웃었다.
오늘이 그의 제삿날이 될지도 모른다.
*
연구소 내부를 꽉 채우는 재난문자 알림음에 재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유예지는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엥? 하고 말했다.
“이거 저희 연구소 쪽으로 들어왔는데요?”
“뭐?”
재준이 되물었다. 핸드폰을 확인한 다른 가이드들도 조금은 두려움에 떠는 듯 하더니 이내 괜찮아졌다. 유예지도 마찬가지였다.
“B급이래요. 뭐, 등급이 높긴 한데 근처에 지승운 에스퍼가 있으니까 괜찮지 않겠어요?”
아무리 가이딩이 부족해도 S급인데 B급에 죽지는 않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재준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설마 S급인데 B급 괴수를 상대 못하겠어? 그런데 유독 오늘 지승운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이딩을 제대로 하기는 했나? 뭐가 됐든 재준이 신경 쓸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찝찝하고 목덜미가 서늘했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괜찮을 리가…….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느니 차라리 잘 있나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웬만하면 가이드가 좋을 것 같았다. 뭔 일 있으면 바로 해결할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저기에서 염기서열을 분해하는 가이드에게 가보라고 하자니……. B급 괴수가 나타났다는 거에도 벌벌 떨었던 것을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물론 지승운 에스퍼가 근처에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괴수가 이곳까지 공격을 하러 올 것이다. 지나다니는 에스퍼가 있다면 해결이 될 것이다.
여러 가정을 하는데도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그래서일까 재준은 우선 나가보기로 결정했다. 정 안되면 괴수를 잘 타일러 보내면 된다. 운이 나쁘다면 자신도 다치기는 하겠지만, 운이 좋다면 B급 괴수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만약 지승운이 근처에 있다면.
……그래도 아직 폭주 위험이나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 만약 폭주라면 바로 비무장지대에 던져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과연 폭주 상태의 에스퍼를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혹여나 괴수가 나타났든 다른 경우는 연구소 근처에서 무슨 일이 생겨 이 연구소가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그가 애지중지 길렀던 괴수들이 한꺼번에 풀려난다. 이곳에 있는 에스퍼들이 다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찝찝한 상태로 있느니, 역시 제 눈으로 확인하는게 훨씬 나을거라 생각한 재준은 가방을 챙겨들었다.
“나갔다 올게.”
재준이 말했다. 유예지가 “예?” 하고 되물었다.
“나가다니, 어딜요?”
“밖에.”
“왜요? 괴수가 나타났는데? 설마 괴수 잡으러 가는 거예요? 아무리 박사님이라도 B급 괴수를 맨손으로 잡는 건 힘들어요.”
“당 떨어져서 자판기에.”
챙겨 든 그 가방은 뭔데. 저기에 뭐가 들었는지 예지도 잘 알고 있었다. 마취제다. 혹시나 괴수를 만나면 마취제라도 넣을 예정인가본데, 저 가방 속에 있는 마취제는 아주 근접해야만 넣을 수 있는 것이었다.
“……가세요. 맘껏 가세요. 뭐 죽기야 하겠어요?”
예지가 말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현재준은 지금까지 아니, 현재준 뿐만 아니라 괴수학자들은 괴수에 의해 죽을 고비를 수십 번 넘겼지만 대부분은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도 종종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괴수학자들은 그 모든 고비를 넘기고 온 것이다.
“혹시라도 괴수 마주치면 잡아오지 마시고 좀 도망쳐요, 알았죠?”
예지가 말했다. 재준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흔들며 계단을 내려갔다. 진짜 괴수를 잡아오면 어쩌지. 예지는 나름대로 재준을, 혹은 괴수를 걱정했다.
*
밖으로 나오자 주변이 조용했다. 괴수가 나타나면 이렇게 조용할리 없었다. 재준이 괴수가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망을 향해 걸었다. 풀숲을 헤쳐야만 가능한 길이었다. 헤맬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괴수는 금방 찾았다. 죽어있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남긴 빵조각마냥 여기저기 흩어져서.
아까워라. 재준이 흩어진 조직을 들어올렸다. 에스퍼가 남긴 흔적이었다. 그래도 조직의 상태가 좋아 재준은 흩어진 괴수 몸체를 따라갔다.
그리고 거기에 예상치도 못한 남자가 쓰러져있었다. 아니, 쓰러진 건 아니다. 눈을 뜨고 있었으니까.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검은자위와 흰 자위의 구분 없이 전부 붉었다.
폭주 직전의 S급 에스퍼였다.
승운은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B급 몬스터에 죽는 S급 에스퍼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널뛰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눈에 선 핏발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지승운은 울고 싶었다. 이렇게 죽는 것은 싫었다. 끔찍했다. 제 발로 비무장지대로 걸어 들어갈 힘도 없었다. 이대로 곧 모든 것을 부시며 폭주가 시작될 것 같았다.
“이런.”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이 머릿속에 인식됐다. 그것은 누구의 것인지 인지할 수 없는 하나의 소리였다.
“지승운 에스퍼, 괜찮습니까?”
안 괜찮았다. 죽을 것 같았다. 살려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여기서 그를 구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꺼……져….”
승운이 있는 힘을 다 해 말했다. 누군지 몰라도 그가 여기에 있으면 죽는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지승운 에스퍼.”
누군가가 다시 말했다. 지승운은 손을 휘저으며 그를 떨쳐 내려했다. 하지만 휘저은 손을 그가 잡았다. 순간 승운의 몸이 흔들렸다. 아니, 몸이 아니라 머리가 흔들렸는지도 모른다. 마치 누군가 두개골에 대고 범종을 치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머릿속에 종소리가 울렸다. 보신각인가? 신년에만 들었던 댕 하고 맑은 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가 잡은 손끝에서부터 진동이 일어났다.
몸속을 잠식하던 검고 썩은 물들이 흔들렸다. 손끝부터 시작된 빛이 지승운의 몸속으로 들어와 썩은 물을 정화시켜나갔다. 어둠보다도 어두운 덩어리가 투명하게 바뀌었다.
“이게 맞나.”
승운은 알지도 못하는 손에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온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잡힌 손에 힘을 주는 것이 승운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괜찮습니까, 지승운 에스퍼?”
누군가 그를 살려내고 있다.
승운이 짧게 숨을 내뱉는 것을 본 현재준은 이게 맞나보다 확신했다. 승운은 검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현재준은 아무렇지 않게 그 피를 닦아줬다. 입뿐만 아니라 그의 온 몸에서 검은 물이 나왔다. 땀방울을 통해서도 검은 것이 밀려나온다. 현재준은 삼십여 분간 가만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흘러나오던 검은 땀이 일순간 투명해졌다.
“괜찮을 겁니다.”
현재준이 말했다. 그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지승운이 흑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갑작스런 반응에 현재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언제까지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현재준이 승운의 손을 떼어냈다.
“가지 마요.”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얕은 숨을 내쉬며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떠나지 마요.”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재준은 승운에게 뭔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해보는 가이딩이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도대체 몸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아니면 원래 에스퍼들은 이런 건가? 자신이 초보라서 이상하게 여기는 건가? 아니면 등급이 낮아서 S급 에스퍼를 가이딩 하지 못하는 건가?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도 없었다. 조각난 괴수조직은 금방 썩어 빨리 보관 처리하러 가야했다. 게다가 이 정도면…….
방금 전과 비교하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죽을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재준이 손을 떼어내자 승운이 “제발.” 하고 애원했다.
“제발, 내 가이드…….”
그가 또록 눈물을 흘렸다. 재준은 그런 승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
승운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 뒤였다.
눈을 깜빡인 승운은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했다. 특유의 소독약 냄새, 기계들, 어수선한 소리.
의무실이다. 왜 의무실에 있지? 승운이 생각했다. 분명. B급 괴수가 나왔다. 승운은 그때 자기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괴수를 죽이며 날뛰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비무장지대로 걸어다가 스스로 쓰러졌다. 이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폭주할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았다. 아니, 구했다. 진짜? 누군가가 자신을 구했나? 이게 꿈이 아닌가? 승운이 생각했다. 그러기엔 몸 상태가 너무 좋았다. 승운이 재빨리 시계를 바라봤다.
검 녹색이었다. 붉은 색도, 노란색도 아니고 녹색도 아니다. 시계의 녹색은 아주 옅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의 몸을 잠식하던 검은 독들이 풀렸다. 살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살렸다.
지승운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가이드가 있다.
“지승운 에스퍼. 일어나셨어요?”
그때 의무실 바깥에서 누군가가 커튼을 치며 물어왔다. 머릿속이 환희로 가득 찼다. 지승운이 “누구입니까?” 물었다.
“저, 저요? 저는 검진센터 의무실 소속의 김하영 연구원…….”
“아뇨. 저를 데리고 온 사람이요.”
“아, 에스퍼셨어요. 연구소 근처에서 B급 몬스터가 출현해서 혹시나 피해가 있나 하고 찾아갔다가 쓰러져있는 지승운 에스퍼를 발견했다고 하더라고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지승운은 그녀를 바라봤다. 김하영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싶어 지승운의 눈치를 봤다. 무표정하던 지승운이 다시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놀라 “괘,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다. 괜찮지 않았다. 아니, 괜찮았다. 그게 괜찮지 않았다.
지승운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 뚝 흘리는 지승운을 보며 김하영 연구원은 ‘어머.’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우는 건가? 왜? 갑작스러운 울음에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무슨 남자가 저렇게 예쁘게 우나 싶어 시선을 떼지 못했던 연구원이 지승운과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며 돌아섰다. 오랫동안 구경했다는 사실이 민망한 듯 했다.
“있었어.”
승운이 말했다. 김하영이 예? 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승운은 그녀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다. 있었다.
“내 가이드가 있었어.”
지승운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두 눈을 가렸다.
“나한테도 가이드가 있었다고.”
살 수 있다. 갈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부족하지 않다. 충족한 감각이 온 몸을 감쌌다. 독처럼 그의 몸을 잠식하는, 압력처럼 그의 몸을 옭아매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가이드가 있다. 하지만 이내, 지승운은 생각을 멈췄다. 가이드가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가이드가 누군지 모른다.
이건 큰 문제였다.
지승운 에스퍼의 몸 상태는 곧바로 제3센터와 제1센터에 보고되었다. 오랜 기간 그를 봐왔던 각 센터의 검진소장들은 한순간에 좋아진 지승운의 상태를 보며 경악했다.
그는 곧 죽을 예정이었다. 아무리 가이드들과 뒹굴어도 해결되지 않던 지승운의 상태가 한순간에 완화되었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빨갛던 승운의 시계가 검은색으로 변한 것이다. 극구 사양하는 지승운에게 제1센터에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유독 커다란 모니터 너머에서 눈을 빛내는 사람들의 모습에 승운은 조금 당황했다. 어쩌면 그들이 더 흥분한 것 같았다.
[누구야? 가이드? 얼마나 했어? 얼마나 했길래 전부 안정시킨 거야?]
“이거 검은색 아냐. 녹색이야.”
[뭐? 야, 그 정도면 그냥 검은색이야!]
소리치며 화면을 가리는 이를 중년의 남자가 밀어냈다. 제3센터의 이능검진팀 소속의 연구원이자 정신계 에스퍼인 이경원은 지승운의 오랜 친구였다. 그리고 이경원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이능청 제1검진센터의 소장이다. 왜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는지 승운은 묻지 않았다.
[지금 상태는 어떻지?]
“아주 좋습니다.”
그렇게 말한 승운이 다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울지는 않는다. 승운이 손을 뗐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화면을 응시했다.
“이곳에 가이드가 있습니다.”
승운이 제 발로 제7센터로 간다고 했을 때 이경원은 뜯어말렸다. 거기에 가면 죽는다고, 살아난다고 해도 사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지만 승운은 가야만 했다. 일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슨 일이 터진다 하더라도 DMZ가 더 나았다. 수도권에서 폭주를 하면 그 여파를 감당할 수 없었다. 사실상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며 온 제7센터에 지승운의 가이드가 있었다. 아니, 아직 자신의 가이드라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승운은 그것을 제 가이드라 여겼다.
[그래서 그 가이드가 누구야! 등급은? 이럴게 아니라 위에 보고를 해야……!]
이경원이 다시 자신의 아버지를 밀어내며 화면에 등장했다. 승운이 입을 다물었다. 그게 문제였다.
[어떻게 그런 인재가 제7센터에 있었지? 아니, 가이딩을 얼마나 한 거야? 키스? 아니면? 끝까지 갔어?]
“……손만 잡았어.”
[뭐? 손만?]
그렇게 되물은 이경원이 할렐루야를 외칠 때(이경원은 불교다) 그의 아버지인 이동철 소장도 [진짜? 진짜 손만 잡았나?] 물었다. 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만 잡았어요. 얼마 안 잡은 것 같은데, 그래도 한 시간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정도면 등급이 꽤 높겠군. 잘 됐네. 사람을 보낼 테니 그 가이드와 함께 다시 제3센터로 복귀, 아냐. 제1센터로 오지. 자네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 이제…….]
이동철 소장이 이런 저런 테스트를 해보자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승운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뭐든 말해. 사소한 건 다 여기서 해결해줄 수 있어. 자네가 지금 가이드를 얻었는데!]
“그게 문제예요.”
[…….]
승운의 말에 화면 너머로 이경원과 이동철이 침묵했다. 설마, 하며 경원이 입을 열었다.
[남의 가이드야? 그, 각인 가이드? 아니면 페어?]
[각인이면 아예 가이딩 효과가 없지. 페어인가? 페어라고 해도 그 정도면 해지하고 자네한테 갈 걸세. 너무 걱정 말고.]
“그게 아니라.”
승운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가이딩을 누가 했는지 모릅니다.”
[…….]
“폭주 직전이어서 앞이 안 보였어요.”
이런 머저리가 다 있나. 이동철과 이경원이 표정이 딱 그랬다.
제 가이드를 찾았는데 그게 누군지 몰라? 가이드가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유리구두를 남기듯 그의 몸을 정상으로 돌려놓고 사라지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아니, 신데렐라면 흔적이라도 남겨뒀지. 애초에 지승운은 S급 에스퍼다. S급 에스퍼의 페어 가이드 위신을 생각하면 그렇게 사라질 리 없다. 꿈 아냐? 꿈 꾼 거지? 하지만 그의 손목에 위치한 에스퍼 상태를 나타내는 시계를 보면 분명 가이딩이 된 것이다.
[……우선.]
이동철 소장이 말했다.
[가이드를 찾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
지승운은 기분이 좋았다. 몸 상태도 최고였다.
그는 요새 가이드들과 함께 퇴근하지 않았다. 아니, 가이드들을 보러 오지조차 않았다. 당연히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던 가이드들은 지승운이 없는 연구소 앞을 보며 당황해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유예지는 웃었다.
“다른 가이드를 찾아갔나 봐요.”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다. 재준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째 지승운은 DMZ연구소에 오지 않고 중앙본부 옆에 있는 검진센터에 죽치고 있었다. 아직 매치 테스트를 하지 않은 이들 중에 그의 가이드가 있을 것이다.
매치 테스트를 하기 전에 지승운은 건강검진부터 했다. 제7센터는 새로 지어진 만큼 이런 저런 장비가 있었다. 한걸음에 영종도에서 강원도까지 달려온 이경원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지승운의 상태를 확인하며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좋냐?”
“좋아.”
지승운은 안정적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다. 경원은 승운의 상태를 체크한 뒤 파일을 제1센터와 제3센터로 보냈다. 그가 오랫동안 있었던 센터인 만큼 과거의 자료들이 남아있어서 비교하기가 쉬웠다. 서울과 인천에서도 지승운의 상태에 대한 말이 많았다. 그 누구와도 매칭이 되지 않던 S급 에스퍼가 반나절 만에 컨디션을 되찾았다.
“아, 파일 왔다.”
이경원이 말했다. 그의 현재 몸 상태를 보낸 지 채 2분도 되지 않아 과거 언제쯤과 비슷한지 비교한 파일이 왔다. 지승운의 나이 22세 때의 파일이었다. 보통 에스퍼들은 가이드 없이 3년간은 제정신과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면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22살 때의 지승운이라니.
날아다녔지, 그때. 이경원이 생각했다.
실제로 지승운은 날았다. 비행종 괴수처럼. 에너지가 넘쳐서 나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와, 진짜 장난 아니네. 이것 봐봐. 그 가이딩 한 시간도 아냐. 40분이라고.”
이경원이 승운의 시계를 이리저리 만지며 확인했다. 에스퍼들은 잘 때나 씻을 때도 시계를 착용하고 있다. 가이딩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이딩의 시간도 전부 기록된다. 어떻게 40분 만에 몸 상태를 이렇게 만들지? 이경원이 생각하며 이전 자료를 살피다가 표정을 굳혔다.
“야.”
“왜?”
“넌 도대체 누구랑 가이딩을 다섯 시간 동안이나 했냐? 어? 살아는 있어?”
“두 사람이었어.”
“……그래. 그 두 사람과 해서 상태를 2퍼센트 안정시켰구나. 한 사람당 1퍼센트야?”
그렇게 말하며 이경원은 가이드들과의 매치를 살폈다. 아무리 매칭율 30%대라고 해도 다섯 시간 동안 내내 밀접한 가이딩을 했는데 2퍼센트가 올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매치는 이렇다 쳐도 등급에서 차이가 많이 났을 것이다.
“네 가이드는 40분 동안 네 상태를 77퍼센트를 돌려놨어. 지금 87퍼센트. 안정적이네.”
이경원의 말에 지승운이 배시시 웃었다. 좋아죽겠다는 얼굴에 뭐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이경원 자체도 알고 있었다. 처음 2-3년의 지승운은 자신의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며 가이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3년이 지나자 몸은 급속도로 안 좋아져서 웬만한 가이딩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아무 가이드하고 몸을 섞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직 지승운도 희망을 갖고 있었다. 가이드만 찾는다면 더 이상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7년이 됐을 때, 지승운은 포기했다. 그리고 아무 가이드하고 뒹굴었다. 그에게 가이딩을 해줄 수 있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10년, 지승운은 스스로 폐기용 에스퍼의 길로 걸어 들어갔다. 이경원이 아는 바에 의하면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가이드를 찾았다.
“그런데 널 이렇게 돌려놓았다면, 그 가이드도 등급이 제법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경원이 “야, 넌 니 가이드도 모르냐?” 라며 타박했다.
“폭주 직전이었다니까.”
“한번 보면 아, 저 사람이 내 가이드다 하고 아는 거 아니냐고.”
“넌 그렇게 알았냐?”
“아니. 난 매칭으로.”
어떻게 얼굴만 보고 알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매칭이지. 과학적 데이터가 최고다.
“뭐 기억나는 건 없어?”
……손이 따뜻했다. 기억나는 건 그 정도였다.
“혈액순환이 잘 되는 사람 같았어. 어느 정도 튼튼하고.”
그렇게 말하던 지승운이 “아.” 하고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왜? 누군지 알겠어? 얼굴 기억나?”
“아니, 남자야.”
“남자? 남자야?”
하긴, 그를 감당하려면 여자로는 힘들 것이다. 남자 둘과 다섯 시간동안 섹스로 가이딩? 이건 약과였다. 예전엔 다섯 명과 열 몇 시간을 했던 때도 있었다. 그때 역시 폭주 직전이었다. 그를 살리려고 다섯 명의 가이드가 들러붙어 반나절을 썼음에도 지승운의 상태는 10퍼센트 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멍청한 새끼. 그러게 왜 기억을 못해서.”
“폭주 직전이었다니까.”
“야, 그래도 어쨌든 네 가이드가 있다는 거잖아. 이게 얼마나 희소식이냐?”
“……그렇지.”
“근데 왜 안 나타난대?”
“어차피 매칭 테스트를 하면 알게 될 테니까 상관없어.”
“그래. 등급 높은 애들 먼저 해보자.”
남은 가이드라고 해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아무리 매칭이 좋아도 등급에서 차이가 크면 이런 효율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분명 A급 이상의 가이드일 것이다. 지승운은 경원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경원은 지승운의 가이드를 찾는 순간을 함께 하고자 했다.
하지만 제7센터의 모든 가이드들과의 매칭이 끝났음에도, 지승운의 가이드는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