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밥그릇 가득 퍼다 준 깍두기들에 눈시울을 붉히며 숟가락으로 마구 퍼먹었다. 역시 이 맛이다. 내가 사는 이유, 내 삶의 활력소, 내 존재의 의미다. 난 이것을 위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어디서 담근 건지 이 집 깍두기는 정말 맛있다. 입에 넣는 순간 새콤달콤한 냄새와 함께 달달한 무가 혀에 착착 감기고, 특히 끝 맛이 굉장히 시큼해서 입안에 침이 한 사발은 고인다. 밥 한 숟갈, 깍두기 한 숟갈 해가며 먹고 있으니 석희와 석현이가 한참 나만 바라보면서 제 밥은 안 먹고 있다.
이 맛있는 걸 눈앞에 두고도 안 먹는 게 진짜 이상하다. 이미 질리도록 먹어 와서 이게 맛있는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들이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고마운 줄을 모르다니, 이래서 돈 좀 있는 것들은…….
성질을 내가며 깍두기를 한참 퍼먹다가 둘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어, 어, 뭔데?”
석현이가 눈에 별을 달고 물어본다. 부담스러워 눈을 밥그릇으로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 깍두기 누가 담근 거야?”
왠지 이 새끼들 친어머니 되시는 분은 절대 아닐 것 같다. 그렇다면 할머니나, 요리를 좋아하는 친척 중 누군가가 해다 준 게 아닐까 싶다. 그럼 차고 넘쳐날 테니 갈 때 좀 얻어가고 싶다. 입 안 가득 돌아다니는 새콤한 향을 음미하면서 밥을 부수고 있자 한참 가만히 있던 석현이가 어딘가로 자신의 손가락을 옮겨 가리킨다.
혹시 그녀, 혹은 그의 음식 솜씨를 찬양하는 뜻에서 액자에 사진을 넣어 식탁 옆에 걸어 놓은 건가 그 손가락을 따라 벽을 바라봤다. 그런데 거기엔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채소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인상을 쓰면서 석현이를 보다가 석희를 돌아보자 석희가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연다.
“내가.”
들고 있던 숟가락이 내 무릎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예상치 못한 사실에 놀라서 내가 생각해도 터질 듯이 크게 뜬 눈으로 석희를 바라본다. 내 인생 최대에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
석희와 석현이는 현관을 나서는 나를 배웅해줬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더니 의외로 석희는 데려왔을 때에 비해 초딩처럼 굴지 않고 순순히 풀어주었다. 혼란스러운 내 얼굴과 달리 석희는 굉장히 여유로워 보였다. 자신이 그 깍두기를 담가왔다는 사실로 상황이 유리하게 풀려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알면 알수록 애 같고 재밌는 새끼다.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라고 깍두기까지 싸줬다. 새콤하고 달달한 깍두기의 냄새가 내 심장을 더욱 흔들어 놓는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이번엔 진짜 멀미약이라며 쥐어준 것도 실컷 먹고, 태종이네로 향하는 버스에서 자는 동안 품에 안은 깍두기와 태종이가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쓴 편지에 관해 꿈을 꾸었다.
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고, 깍두기 왕자의 얼굴을 전부 먹어치웠더니 거기엔 석희의 얼굴이 나왔다. 그리고 석희 뒤로 태종이다 나타나서 검은 그림자로 가려진 어떤 여자애에게 편지를 전해주며 말한다.
‘사귀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내 마음만 알아줬으면 해. 난 니가 좋아.’
여자는 태종이의 팔에 팔짱을 낀 채 내게 부케를 던지고, 나는 그것을 받지 않아서 발밑으로 떨어진다. 아무도 내가 부케를 받지 않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모두 어디로 떠나버린다. 발밑을 내려다보자 거기에 놓인 부케가 알고 보니 깍두기로 만들어진 거였다. 거기에 주저앉자 태종이가 상을 차려줘서 부케를 상 위에 올려놓고 밥과 같이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갑자기 내 옆에 나타나는 석현이는 왜 우냐고 그런다.
깍두기를 다 먹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이수가 나타나서 밥 다 먹었으면 가자고 나를 끌고 간다. 내 손은 이수에게 붙잡히는 동시에 힘을 못 낸다. 그냥 이수를 따가라는 게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학생, 학생! 일어나, 학생 내려야 한다며!”
내게 깨워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아줌마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비몽사몽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꾸벅 인사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다신 못 올 줄 알았던 태종이네 동네다. 품에 깍두기를 안고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태종이 집을 찾아갔다. 가다가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배가 묵직해서 가스를 배출하자 마주 오던 여자가 인상을 쓰면서 오던 길을 틀어 도로 돌아가 버린다. 바람 때문에 냄새 별로 안 나는데.
코를 깍두기 통에 대고 냄새를 맡으면서 걸었다. 냄새가 너무 좋다, 이걸 석희가 만들었다니. 이렇게 새콤한 냄새가 나는 깍두기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 걸까, 직접 만드는 건 너무 귀찮고 비법만이라도 전수 받아서 태종이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좋다. 그럼 태종이가 깍두기를 담가줄 수 있는 거다.
가뜩이나 나 먹여 살리느라 등골 휘는 태종이에게 깍두기 만드는 것까지 부탁하면 내가 너무 나쁜 놈이 되는 것 같다. 아니, 그냥 만드는 건 내가 해야겠다. 나는 깍두기를 만들고, 태종이가 일 하면 밸런스가 딱이다. 문제는 게으른 내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다. 또 귀찮아서 석희에게 타먹거나 사먹게 될 게 분명하다. 그럼 그냥 계속 석희한테 타먹어야겠다.
“아, 비켜!”
우르르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싶더니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세게 밀친다.
통에 대고 코를 킁킁거리며 걷던 나는 깍두기 무게를 못 견뎌 떨어뜨리고 말았고, 내 사랑하고 소중하고 목숨과도 같았던 깍두기들이 전부 터져 나와 바닥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다. 그에 따라 내 가슴도 시뻘겋게 물들어간다.
내 목숨! 내 사랑! 나의 보물! 내 삶의 이유가!
무릎을 꿇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통을 들춰보았다.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모든 깍두기들이 떨어진 충격으로 전부 튀어 나와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벌겋고, 새콤하고, 달달하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천국의 맛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버렸다. 온몸이 팔팔팔 떨리자 미처 지나가지 못하고 어물쩡거리던 무리들 중 몇 명이 바닥에 있는 깍두기를 발로 차본다.
“씨발, 앞을 똑바로 보고 다녀야 할 거 아니야!”
“아, 개새끼! 내 바지에 다 튀었어! 씨발, 이게 얼마짜린데!”
“야, 나 옷에 묻었어!”
“내 손!”
각자 깍두기 국물이 튄 영광스러운 자리를 보여 가며 비명을 질러댄다. 그 중 몇 명은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고딩 양아치들인 모양이다. 평소의 나라면 그냥 짜지고 비켜갔을 것을 지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안 든다. 공포고 두려움이고, 지금의 감정으로는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석희가 이 플라스틱 통을 건넸을 때 받았던 감동, 버스 안에서 행여나 바닥으로 떨어질까 온 몸을 웅크려가며 껴안고 불편한 자세로 자야 했던 그 노력들, 그리고 태종이네를 향하며 냄새를 맡아갔던 그 행복!
내 눈은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다. 참을 수 없다. 원래 벌건 통이었지만 깍두기 국물이 흥건하게 묻으며 더욱 뻘게진 통을 냅다 나를 밀친 그 새끼의 머리에 씌워버렸다. 커다란 통 안으로 쏙 들어가는 그 얼굴은 비명을 지르며 통을 빼달라고 난리다. 냄새가 어쩌고, 김치 국물이 어쩌고 소리 지르는 걸 보면서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저건 내가 해보고 싶었던 건데, 깍두기 다 먹은 통을 뒤집어쓰고 지내고 싶었는데, 저 씨발 새끼!
“내 깍두기 내놔, 이 개새끼야!”
근처에 굴러다니는 빗자루를 거꾸로 잡아 머리에 뒤집어씌운 통을 마구 때렸더니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간다. 끝까지 쫓아가 마구 떄려 대자 다른 애들은 저들 끼리 수군거린다.
“야, 뭐야?”
“말려야 돼?”
“표정 보니까 빡친 거 같긴 한데.”
“아, 몰라, 나 집에 갈 거야.”
“난 교복에 튀었어, 존나 짜증나. 엄마한테 디졌다.”
“가자, 가자.”
나머지 애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겨우 통을 머리에서 빼낸 그 나쁜 새끼는 얼굴과 머리에 완전히 깍두기 국물을 뒤집어 쓴 채로 내게 욕을 퍼부어댄다. 문제는 그딴 개소리가 내 귀에 들릴 리가 없다는 거다. 주저앉아서 엉엉 울면서 깍두기 물어내라는 나한테 자신을 두들겨 패던 빗자루까지 분질러가면서 한참 소리를 지른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것 같다. 어쨌든 이 나쁜 새끼!
“씨발, 이 새끼가 미쳤나, 김치 하나 때문에 사람을 이 따위로 패?”
“내 깍두기 다 저렇게 해놨잖아, 빨리 물어내, 개새끼야!”
“너 몇 살이야, 어디 학교 다녀?”
식식대면서 이상한 질문을 해오는 개새끼 말에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면서 계속 ‘개새끼야, 개새끼야’ 그러자 내 머리를 한 대 때린다.
“씨발, 이 새끼가……. 너 이일주 알지? 우리 구 재패한 성문고에 이일주, 나 그 형이랑 존나 친하거든? 너 오늘 잘못 걸렸다, 개새끼…….”
뭔 개소린지 몰라서 딸꾹질을 해가며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더 설명을 안 해준다. 우리 구를 재패해? 이게 무슨 짱이나 체인지가이도 아니고 구를 재패했다니, 그럼 전국 재패하면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도 있는 건가? 아니면 무슨 대회라도 따로 있는 건가? 전국 양아치 대회, 우승하면 2년 치 장학금 이런 거?
멍청하게 보고 있는 나를 때리다말고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 새끼는 나를 이리저리 뜯어본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깍두기 국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저에 비하면 묻어 봤자 게임도 안 될 것 같은데 이상하다. 얼굴을 다 살펴본 그 새끼는 갑자기 좋아 죽겠다는 웃음을 띤다. 본인의 이익이 눈앞에 선할 때 나오는 표정이다. 상당히 이상한 얼굴이다.
“야, 너 가만 보니까 꽤……. 우리 일주형님은 여자를 갖고 놀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고 남자를 대신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거든? 아주 이쁘장하고 악 잘 쓰는 놈으로. 지금 보니까 니가 딱인 것 같다.”
“뭐가 딱인데?”
“우리 형님 개.”
“무슨 개.”
“병신아, 말 그대로 개! 최근에 데리고 놀던 개도 도망가고 없어서 요즘 좀 심심해하시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지금 같은 때에 내가 개를 하나 구해다 바치면 형님 눈에 들 수 있단 거야. 하여튼, 너 어디 학교냐? 빨리 불어, 나중에 찾아가게.”
“나 학교 안 다니는데.”
“뭐야, 학교 관뒀어?”
“아니, 졸업했어.”
내 대답을 듣고 잠깐 멈춰 있는 그 고딩은 다시 나를 찬찬히 살핀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날 가리킨다.
“뻥.”
“진짜.”
“몇 살인데?”
“몰라.”
“몇 년생?”
“몰라.”
“이 씨발 새끼가, 뻥을 쳐도 좀 성의 있게 칠 수 없냐?”
“진짜 모르는데.”
심지어 생일도 태종이가 가르쳐주기 전까진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나저나 개 노릇 2주일 정도 해서 그런지 남들 눈에도 내가 개로 보이나 보다. 목걸이 때문에 그런가, 개목걸이 차서 개처럼 보이는 것일 수는 있겠다. 그래도 이 목걸이 좋은데. 하지만 개로 캐스팅 되는 건 좀 병신 같다. 이러다 나중엔 나갈 때마다 개 아니라고 뒤통수에 써 붙이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겠지?
태종이 생각 했더니 진짜로 태종이가 보인다. 그 새끼 머리 뒤로 보이는 태종이의 반가운 얼굴에 웃어보이자 그 새끼가 편안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잡아끈다.
“진짜 우리 형님이 엄청 이뻐해준다니까, 빨리 어디 학교 다니는지 좀 가르쳐 줘. 그럼 내가 김치통 뒤집어씌운 건 눈 감아 줄게, 응? 우리 형님 개로 들어오면 진짜 여자들이 강아지 이뻐하는 것처럼 엄청 귀여워해주고 힘도 존나 좋거든? 테크닉이 장난 아니야, 아주 살살 녹여줄 테니까 핸드폰 번호라도 좀 가르쳐줘.”
“그 손 안 놓냐, 개 씨발 좆고딩 새끼야?”
온몸을 들썩이면서 뒤를 돌아본 그 새끼는 태종이의 불같은 얼굴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도망가 버렸다. 아, 내 깍두기는 물어주고 가야지!
입을 벌렸다 닫았다 아쉽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새끼를 눈으로 쫓다가 실패하고 한숨을 쉬었다. 석희한테 다시 받으러 갈 걸 생각하면 막막하다. 아직 입도 대보지 못하고 냄새밖에 못 맡아본 게 서럽고 슬프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다시 태종이 쪽을 보자 태종이가 갑자기 날 끌어안는다.
“아!”
너무 세게 껴안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낸 소리다. 엉성하게 손을 약간 올리고 있다가 안은 상태로 더 힘주어 끌어안는 태종이를 느끼면서 가만히 있다가 놀고 있는 손을 태종이 등 뒤로 둘렀다. 손에 국물이 묻어 지저분하지만 나도 태종이를 껴안고 싶은 충동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고개를 깊게 파묻으면서 온몸을 덜덜 떠는 태종이가 느껴져 기분이 이상하다.
태종이가 이런 적이 있었나,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나?
내 어깨를 세게 조이던 손이 올라가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손길이 평소와 다르게 아주 부드럽다. 내 머리를 냅다 퍽퍽 때릴 거라고 예상해서 온몸을 움츠려가며 겁먹었던 내가 병신이 된 기분이다.
“어제 집에 돌아왔는데 없어서……. 진짜 불안하고 무서워 미치는 줄 알았어, 영영 안 돌아오는 게 아닌가 하고…….”
“왜?”
“요즘 계속 술 마시고 푸념하고 해서 나한테 정 떨어졌다는 생각에…….”
요즘 경기가 안 좋아졌다고 정치인들 욕을 하며 술을 퍼마시던 태종이가 생각난다. 그 때문에 내가 무거운 엉덩이 들고 일자리를 찾아 나선 거였다. 뭐, 태종이 술주정이 그렇게 많이도 아니고, 딱 두 번 그래보였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 힘들어서 그렇다는데. 그렇다고 태종이가 원래 그러던 놈도 아니고, 태종이 힘든 거 내가 다 안다.
괜히 또 눈물 날 것 같아서 얼굴을 그 몸에 붙이고 등을 쓸어줬다. 태종이처럼 부드럽게는 안 되지만 내 선에서는 최선을 다한 거였다.
“그거 가지고 내가 왜 나가, 나 아니면 니 얘기 들어줄 사람도 없잖아.”
팔을 풀더니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는 태종이가 보인다. 뭐 말실수 한 줄 알고 당황해서 억지로 웃어보였더니 태종이가 가만히 내 얼굴을 보다가 따라 웃는다.
“잠은 어디서 잤어?”
“응?”
“밤 동안 어디 있었냐고, 집에도 없었던데.”
바닥에 널부러진 깍두기바다를 애써 외면하는 태종이가 모른 척 나를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내 손을 꽉 잡은 태종이는 날 가출했다 돌아온 제 자식 대하듯 한다.
“석희네.”
“석희? 누구야, 친구?”
“아니, 나 잠깐 개로 일했었잖아, 돈 받으러 갔었어.”
“어, 뭐? 그래서 거기서 자고 왔다고?”
“몰라, 깨어나 보니까 그 집이더라고.”
“깨어나 보니까?”
앞만 보던 태종이가 이상한 표정을 하면서 나를 돌아본다. 뭔지 몰라서 병신처럼 쪼개봤다.
“아니, 석희를 길에서 만났던 건 생각나는데 그 뒤로는 잘 모르겠어. 기억은 없고, 그냥 깨어보니까 그 집이더라고.”
“그, 그래서, 무슨 짓 안 당했어?”
순간 석희가 내 똥꼬를 후비던 게 생각났지만 내 변비를 해결해주는 고마운 계기라 그냥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사귀자는 말 들었어.”
두드리면 딱딱한 소리가 날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태종이가 입 주변을 씰룩거린다. 혹시 화났나 싶어 맞을 것을 대비에 몸에 긴장을 넣었다. 뭔가 잘못 얘기한 것 같지만 그게 뭔지 감이 안 잡힌다.
“대답은?”
“생각해본다고 했어.”
“왜?”
입가가 더 씰룩거린다. 무서워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뭐라고 대답해야 그 화가 풀릴지 모르지만, 일단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면 덜 화낼 것 같아 마음속에 꽁꽁 숨겨뒀던 부끄러운 감정을 털어놓았다.
“돈 안 줄지도 모르잖아.”
씰룩거리는 입가가 조심스럽게 풀린 태종이는 나를 다시 한참동안 내려다본다. 그리고 다시 내 손을 잡고 집에 가자고 말하면서 다음부터는 그런 데 갈 때 꼭 자신과 함께 가야하는 거라고 그런다. 말하는 동안 이상하게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태종이는 자꾸만 손으로 입가를 정돈하며 표정관리에 여념이 없다. 왜 저러지, 내 말이 그렇게 웃긴가.
태종이가 웃는 기준은 정말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