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이건 한 순간만 가지는 감정이 아니야!
어른들은 언제나 우리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하지만 그건 아니잖아?
지금이기에, 이렇게 어리니까 다른 계산 없이 순수하게 사랑을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해.
씨발. . .누가 뭐라고 지껄여도 좋아.
난 현준 형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난 그를 가지고 싶어.
5월 중반이 되었다.
왠지 점점 더워지는 듯한 날씨.
그러한 날씨에도 남자 아이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언제나 운동장에 나가서
공을 차던 굴리던 뭘 하던 가지고 논다.
현준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면. . .
“으, 으아아악!”
“혀, 현준아. 괜찮아?”
. . . 그는 구기 종목은 꽝이었다.
싸움을 잘 한다 해서 체육까지 잘 하라는 법은 없었다.
현준은 축구든, 농구든, 발야구든. 피구든 공을 가지고 하는 것은 모두 다 좋아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은 정말이지 여자애들보다도 못했다.
축구를 할라치면 어떻게 다쳤는지 다리가 골절이 되고,
농구를 하려 하면 어떻게 되었는지 손에 인대가 늘어나고,
배구를 할라하면 어깨뼈가 탈골이 되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전적을 알고 있는 진수는 현준이 축구를 하는 것을 극구 말렸으나. . .
현준의 그 똥고집으로 무조건 한다고 밀어 붙이다가 결국은 이 모양이 된 것이다.
참 지지리도 공놀이는 못 하는 그였다.
현준은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했다.
분명 이번은 잘 피했다.
그리고 자신이 공을 가지고 골대로 가는 쾌거마저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이었다.
정말 어떻게 그 공을 드리블하며 가지고 가다가 그 공을 밟고 미끄러질 수 있는 건지. . .
게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현준이 공을 밟고 미끄러지는 순간 얼굴부터 먼저 쳐 박혀서 결국 안경마저 부서졌다.
그런 현준의 모습을 보고 진수가 혀를 찼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결국 현준은 양호실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현준은 조용한 양호실에 혼자 앉아서 약을 바르고 있었다.
물론 아까 재석, 인석, 진수, 승현, 승호가 같이 있겠다고 땡깡이란 땡깡은 다 부렸지만
현준 역시 어거지란 어거지는 다 써서 그들을 양호실 밖으로 쫓아냈다.
그렇게 천천히 약을 바르며 현준은 문득 느꼈다.
“그런데. . . 요즘 이상하게 녀석들이 나에게 달라붙는 눈치다. . .?”
정말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현준 평생 살면서 그렇게 앵겨붙는 녀석들은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물론 사나이의 우정이 끈끈한 것은 자신도 인정하겠는데, 이건 끈끈하다 못해 끈적거리기까지 하니. . . .
게다가 갑자기 요즘 진수 녀석도 더 느끼해 지고.
그 나마 변하지 않는 녀석은 인석이 뿐인가?
인석은 언제나 처음의 모습을 고수했다.
그 독설도 여전했으며, 자신에게 너무 앵겨붙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현준에게는 이상하게 그러한 것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왠지 자신들에게 앵겨붙는 녀석들과 있으면 하루 종일 피곤하다고 할까?
자신의 기우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한 기류가 그들에게 흐르고 있는 것 같다.
현준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곧 피식 웃으며 말한다.
“설마 그랄라고.
오늘따라 생각이 쪼매 마이 오바되네.“
그러고는 바르던 약을 정리해둔 뒤 옆에 있는 장부에 자신의 이름과 증세를 썼다.
양호 선생님은 교련 수업 하신다고 안 계셔서 양호실은 언제나 셀프였기 때문이었다.
현준은 약도 다 바르고 해서 그냥 올라갈까 하다가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양호실의 침대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유혹(?)하는 데 안 넘어가면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라는 묘한 철학을 되뇌며 현준은 침대에 누웠다.
침대라고 하기 보다는 방바닥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한 그런 곳이었지만
시원하고 편안 한 게 기분이 王이었다.
현준은 실실 쪼개며 양호실 방바닥에 누워서 베개하나 베고 누워 있다가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그 덕에 양호실은 다시 조용해지고 말았다.
“. . . 이제 자는 건가?”
승하는 자신의 몸을 반쯤 일으키며 말한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다 보고 있었다.
창문너머로 그가 축구를 하고 있는 모습도.
축구를 하다가 엄청난 폼으로 넘어져서 양호실에 오는 모습도.
양호실에서 약 바르고 있다가 멍하니 생각에 잠긴 모습도,
그리고 실실 웃으며 이불위에 뛰어드는 장면도.
현준은 그런 자신을 느끼지 못했는지 혼자 중얼거리다가는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하긴 이불을 푹 덮고 있었으니 자신이라는 것도 모를 만 하지만. . .
승하는 조용히 그의 옆으로 가서 누웠다.
현준이 자는 얼굴은 왠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평소에는 너무나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지금 얼굴은 왠지 너무나 나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다 편안해 질 듯한. . ,
승하는 현준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현준은 그런 그의 손길이 싫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마저 띠며 편안하게 잠이 들어 있다.
승하는 한참이나 현준의 자는 얼굴을 보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현준은 한참이나 잤는데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승하는 그런 현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슬며시 입을 맞추었다.
아마 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겠지?
젠장.
여기서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까?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면 좋을 텐데.
처음으로 맛본 그의 입술은 너무나 달콤했다.
솔직히 이 나이에 키스 한 번 못해봤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래도 밖에서는 알아주는 위치였고 나름대로 꽤 생겼다고 자부도 했다.
그 덕에 여자애들은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엉겨 붙었고, 자신도 그걸 별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짜증나는 여자애들과 하는 키스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저 의례적으로나 하는 입맞춤.
짜릿한 느낌이 든다는 거 애송이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자신이 하게 될 줄은. . .
씨발. . . 닿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짜릿해지다니. . .
계집애들 향수 냄새 보다 현준 형에게서 나는 박하향이 더 좋았다.
승하는 현준의 숨결이 얼굴에 닿음을 느끼며 천천히 오랫동안이나 키스를 했다.
물론 입 안에 혀를 집어넣는다거나 그런 짓은 하지 않았지만 승하는 왠지 키스를 처음 해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왠지 쑥스럽고, 왠지 긴장되는, 그리고 정말 짜릿한 그런 느낌.
승하는 약간 아쉬워하며 현준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곤 머리를 긁적거리며 일어서려 했다.
그 때였다.
“. . . 지금 무얼 하고 있었던 거고. 류승하.”
현준의 목소리였다.
현준은 한참 잘 자고 있었다.
그런데 입술에 무언가 부드러운 게 겹쳐지는 게 아닌가.
그래서 무엇인가 싶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 부드러운 것은 한참이나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준은 이 비슷한 느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떨어져 나가고 나서 눈을 떠보니. . .
젠장 승하였다.
현준은 그냥 나가려는 승하를 향해 말했다.
“. . .지금 무얼 하고 있었던 거고 류승하.”
승하를 향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승하는 아무 말도 없었다.
현준은 굳어 버린 승하의 얼굴을 보다 다시 돌아누우며 말했다.
“난 가스나가 아니다
그 따위 질 나쁜 장난을 칠라면 가스나한테나 가서 해라.“
그런 현준의 말에 승하가 소리쳤다.
“젠장. 난 형을 여자로 보고 그런 거 아냐!”
그런 그의 말에 현준은 그를 향해 다시 돌아누웠다.
현준은 지긋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현준의 표정에 승하는 약간 애처롭게 그를 쳐다보았다.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승하는 자신도 모르게 현준을 향해 말해버린다.
“. . . 좋아해.”
그런 그의 말에 현준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답했다.
“나도 니 좋아한다.”
그러나 승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냐. 그런 좋아함이 아냐.
난. . .“
승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형을 사랑해.”
잠시간의 적막이 그들에게 흘렀다.
아주 잠시간이었지만 승하에게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 긴장감이 맘에 들지 않았던지 승하가 말한다.
“미안. 부담스러웠다면.
하지만 그냥 그게 내 진심이었어.
형에게까지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 그다지 부담스러워 하지 마.
그럼 쉬어.“
그리곤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그 때 현준이 말했다.
“. . . 사춘기엔 그런 일이 있다드라.
같은 동성을 사랑 한다 착각하는 일.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 잘 생각해봐라.“
그 말에 승하가 무서운 표정으로 현준을 쳐다보았다.
현준은 그 표정에 가슴이 뜨끔했다.
승하는 현준에게 다가가며 말한다.
“. . . 웃기지 마.
지금 이 감정이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지금 내가 형을 사랑 한다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젠장.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응? 말 좀 해봐!“
승하는 현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리곤 현준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다시 현준에게 말한다.
“씨발.
내가 어리다고 그 따위로 말하지 마.
내가 바본 줄 알아?
내가 자신의 감정 따위도 잘 모르는 바본 줄 아냐고!
형. 정말 잔인하다. . .
너무 잔인해. . .“
승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현준은 그런 승하를 보며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너무나 복잡한 느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승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니, 남자가 같은 남자인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 사실을.
현준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승하의 마음만은 사실이라는 거.
승하의 눈에서는 눈물이 이미 흘러내리고 있었다.
승하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말한다.
“씨발. . . 그래도 좋아해.
아니, 사랑해.
형이 약간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좋아하는 게 아냐.
형이니까, 젠장 부산 사투리 쓰고, 말 많고, 눈물 많고, 정 많은 형이니까 좋아하는 거야.“
그 말에 현준이 멍하게 그를 보며 말한다.
“. . . 하지만 난 남잔데. . . .”
그 말에 승하가 아프게 웃으며 말한다.
“말했잖아.
난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김현준이라는 한 인간을 좋아한다고. . .“
그러고는 그대로 현준을 끌어 안아버렸다.
현준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쉬고 싶었다.
너무나 피곤해서.
승하의 진심에 왜인지 자꾸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현준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 때 갑자기 문이 드르륵 열리며 인석이 들어왔다.
현준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그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인석은 문가에 기대서며 말한다.
“. . . 자, 이제 그만.
이 씹새끼야. 더 이상하다가는 더 악 효과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서라.“
그 말에 승하는 웬일인지 순순히 물러섰다.
승하는 밖으로 나가며 현준은 들을 수 없을 만한 작은 목소리로 인석에게 속삭였다.
“. . . 네 놈도 현준 형을 좋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왜 그리 뒤로 물러서서 그를 바라보는 거지?”
그 말에 인석이 답한다.
“너희들이 몽땅 현준에게 대쉬하면 현준은 친구가 없어지니까.
난 현준만 행복하면 된다.
그래서 난 차라리 평생 그를 옆에서 볼 수 있는 친구가 되기로 결심했다.“
승하는 그런 그를 향해 비웃음 같은 걸 입가에 머금고 말한다.
“그럼 평생 바라만 보아라. 씹새끼.”
그러고는 그를 지나쳐 가버렸다.
인석은 씁쓸한 미소를 띠며 현준에게 갔다.
현준은 너무나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인석은 그런 그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현준은 그런 그의 품에서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 . . 니 만큼은 내 옆에 친구로 있어 줄기재.”
그 말에 인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씹새끼. . . 당연한 걸 왜 묻냐.”
잔인한 녀석. . . .
현준은 그런 그의 말에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오늘은 왠지 피곤한 하루였다.
인석은 자신의 품에서 자고 있는 현준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너무 맑았다.
젠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