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일 가게 아들내미 -6 (6/6)
  • 과일 가게 아들내미 -6 

    죽도록 앓고 일어나니, 입안이 다 헐어 있었다. 

    오톨도톨 올라온 혓바늘을 요리조리 피하며 양치를 하고 나자, 

    물기로 얼룩진 욕실 거울 위로 퀭한 눈으로 서 있는 내가 보였다. 

    괴기 영화가 따로 없었다. 

    모자란 기운 덕에 질질 끌리는 걸음으로 욕실을 나서자, 

    내 방안에서 튀어나오듯 걸어나오시던 어머니가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러 대셨다. 

    "너 이게 뭐야!!" 

    거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어머니의 고함 소리에 

    머릿속이 핑 도는 것 같아 잠시 눈을 꼭 감았다 떴다. 

    그러자, 부들부들 떨리는 어머니 손에 들려 있는 하얀 약봉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이 핑, 이 아니라, 핑핑핑! 돌기 시작했다. 

    이를 어째. 먹기 싫어 베개 밑에 몰래 숨겨 뒀던 저 요망한 것들이, 

    감히 내 허락 없이 어머니 눈에 띄어버리다니....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잘 했다고 소문이 날까나. 

    ".......우..우웩!!" 

    나는 한껏 괴로운 표정으로 헛구역질을 해가며 어머니를 향해 

    휘휘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시며 

    동그래진 눈으로 내게 물으셨다. 

    "왜..왜 그러니, 주영아. 또 구역질나니? 응??" 

    "우에엑-----" 

    나는 꼬이는 걸음으로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가, 변기 안으로 

    머리를 박고 앉아 혼신의 힘을 다해 헛구역질을 해 댔다. 

    그게 뭐 하는 짓이냐 싶겠지만, 감기보다 무서운 우리 어머니의 

    가루약 고문을 면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 보다 더 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세상에...어쩌면 좋니...먹은 것도 없이 그렇게 

    쏟아내기만 하고.......아휴......속상해 정말......." 

    꽤 오버한 탓에 눈물까지 고여버린 눈으로 하얀 변기 뚜껑을 

    바라보며, 나는 등뒤에 서 계신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 

    "엄마....오늘이 몇 일이지...?" 

    "응...? 오늘? 오늘이 그러니까....13일이네." 

    나의 뜬금 없는 질문에 어머니는 날짜를 새어 보시는 듯 

    잠시 뜸을 들이시더니, 곧 왜 그러냐는 투로 그렇게 대답해 주셨다. 

    "혹시....나 찾는 전화...없었어...?" 

    나는 약간 긴장된 얼굴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너무도 쉽게 대답해 버리셨다. 

    "없었는데." 

    나는 조금 더 하얀 변기 뚜껑을 노려보다가, 

    후들거리는 다리에 끙 소리나도록 잔뜩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약봉지 따위는 다 잊으신 듯 다소 의아스러운 얼굴로 

    서 계신 어머니를 조용히 지나쳐 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흘. 사흘이 지났다. 

    사흘을 하루 같이 앓았던 나는, 그 시간이 어느 정도의 길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녀석이 말했던 [나중]이란, 사흘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이었으려니,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감기 기운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지만, 확실히 딸리는 기운으로 인해 

    얼마간은 더 학교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고 2 여름 방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밤낮으로 걱정을 하시면서도, 어머니 역시 좀비처럼 

    집안을 기어다니는 내가 안 되 보이셨는지, 잘 다린 교복 윗도리를 

    옷장 깊숙이 넣어두시며 조금 더 쉬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동안, 어린 사촌 동생이 다녀갔고, 누나는 친구들과 바다를 다녀왔다. 

    사촌 동생의 풋풋한 아기 냄새와 새까맣게 탄 누나가 몰고 들어온 

    짭짜름한 바다 내음을 차례로 맡아가며, 나는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던 

    한 여름 뜨거운 태양을 창 밖의 감나무 뒤로 하나 둘씩 넘기고 있었다. 

    그 시간, 녀석도 나처럼 그 해 지는 감나무 꼭대기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나는 다시 학교를 나가게 되었다. 

    보충 수업이 이제 겨우 이틀 밖에 남지 않았지만, 받아야 할 

    프린트가 꽤 밀렸다는 학교 친구의 전화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려 두었던 교복을 꺼내 입고 이른 아침 대문을 나서야 했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나는 잠시 큰 호흡을 들이쉰 뒤, 

    작정이라도 한 듯 푹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깨끗해진 운동화 두 개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매 마른 땅위를 걷고 있었다. 

    앞을 보고 걷지 않아도 길은 제대로 찾아 갈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지나던 곳이었으니까, 

    항상, 녀석의 은색 자전거가 서 있던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제대로 걷고 있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앞을 보지 

    않아도 떠오르는 칼라마저 선명한 끈질긴 영상이, 

    푹 숙인 고개를 참으로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 지겨워. 

    나는 속으로 한탄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벌써 며칠 째, 보고 듣는 것마다 녀석과 연결되고 있는 것인지. 

    나는 단순한 아이였는데, 가끔씩 친구와 다퉈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언제 그랬냐는 듯 뒤통수 몇 대 갈겨주고는 실실거리는 것이 

    끝이었는데, 도대체 녀석과 나는 뭐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건지! 

    할 수만 있다면 운동화 끝에 일어나는 뿌연 먼지들처럼 

    공중 분해라도 되었다가 어디 나도 모르는 오지에 

    쳐 박혀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하아..... 

    "그 정도로는 땅이 안 꺼지지 아마." 

    나는 나오던 한숨을 집어삼키듯이 막아버리며, 

    어버버 거리는 입 모양을 한 채 녀석을 건너보았다. 

    거짓말처럼 나타난 녀석은, 마치 어제도 그제도, 그 그저께도 

    그랬다는 듯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골목 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푸른 색 교복을 걸치듯 입고 서 있던 녀석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보일 듯 말 듯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얼굴이 반쪽이야. 어디 아프기라도 했던거야?" 

    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묻는 녀석을 잠시 기가 찬 듯 

    올려다보던 나는, 뭐라 대꾸를 하려던 입을 굳게 닫아 버리고 

    쌩하니 몸을 틀어 녀석 옆을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나는 굳은 다짐을 했다. 이 후로는 절대 녀석과 말을 

    섞지 않으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저 하늘의 태양이 쿵하고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결코, never!! 

    "야, 김주영." 

    녀석이 내 뒤를 쫓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이름 아까워, 부르지도 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금 전 했던 결심이 있었으므로 나는 그저 묵묵히 

    빠른 걸음으로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다. 

    "화났구나." 

    "........" 

    "흐음--미안하다." 

    "..........." 

    "주영아." 

    "........." 

    "미안해." 

    "..........." 

    "주영아." 

    ".........." 

    "좋아해." 

    ".........." 

    "주영아." 

    ".........." 

    "사랑해." 

    나는 녀석의 마지막 말에, 굳어 버리듯 자리에 멈춰 섰다. 

    정말이지,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해대는 

    녀석의 얼굴이 얼마나 뻔뻔스러워 보일지가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 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대형 번데기를 연상케 하는 한껏 

    뻔뻔스러운 표정을 한 녀석이 씨익-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아, 돌아봤다. 내가 이겼으니까 상 줘." 

    .....이란다. 내 생애 처음으로 살의를 느껴본 순간이었다. 

    비록 살의라고 해 봐야, 녀석의 저 까슬까슬한 머리털을 

    하나 하나 쥐어 뜯어내고 싶다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말이다. 

    어이가 없지 않은가. 제 말대로 허리가 한 줌이나 줄어들도록 

    헬쓱해 진 내 앞에서, 그런 시덥잖은 농담이나 해댈 기분이 나느냔 말이다. 

    그것도, 그게 누구 때문인지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녀석이!! 

    ".........꺼져." 

    나는 목덜미 위로 핏줄이 파릇파릇 일어서도록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획하니 몸을 돌려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그러자, 녀석은 확연하게 당혹해진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야, 김주영! 야!!" 

    내 걸음은 더욱 빨라지기만 했다. 이제는 걷는다기 보다는 

    차라리 뛰는 쪽에 가까운 속도였다. 허해진 기운 탓에 

    쉽게 호흡이 차 올랐지만, 나는 마치 어설픈 좀도둑 도망가는 

    모양으로 최대한 느긋하게, 그러나 매우 초조한 표정으로 

    더욱 더 속도를 높여 걸었다. 

    "우리 형 이름은 해찬이야. 최해찬." 

    마치 서투른 연극 배우처럼, 두꺼운 대본의 대사 한 토막을 

    잘라 말하듯 녀석은 다소 어색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급브레이크가 걸린 자동차처럼 우뚝 멈춰 선 채 녀석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손으로 턱 아래를 스윽 문지르고 있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겸연쩍은 듯한 표정.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군, 이라는 표정. 

    "후욱---" 

    녀석은 크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곧, 덤덤하지만 여전히 어색해 하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해찬이 얘기, 하러 왔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내 얘기지."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돌려 녀석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리고 쭉 손을 뻗어, 녀석 교복 위에 붙어있던 마름모 모양의 학교 뺏지를 

    뜯어낼 듯이 잡아당겼다. 녀석의 커다란 몸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휘청거렸다. 나는 잡았던 뺏지를 다시 녀석의 가슴께로 밀어붙이는 동시에, 

    뺏지를 쥐고 있던 그 주먹으로 퍽-소리가 나도록 녀석의 가슴을 암팡지게 

    후려갈겼다. 단단한 근육이 내 솜방망이 같은 주먹질에, 간지러운 듯 

    두어 번 움찔거릴 뿐, 그 주인 되는 녀석의 표정 없는 얼굴 못지 않게 

    매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시끄러. 필요 없어. 듣고 싶지도 않아!!" 

    나는 더욱 분해진 마음으로 다시 녀석의 가슴을 두들기듯 갈겨주었다. 

    두 번으로도 부족하다, 안되겠다, 한 번 더 치자 싶었던 마음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폭주를 해 버려, 나는 모난 뺏지에 부딪혀 

    손등이 벌겋게 부어오르는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같은 곳만 

    쳐대고 있었다. 

    "나쁜 새끼!....나쁜 새끼......나쁜 새끼....!!" 

    악에 받혀 욕지거리를 하는 입술 사이로 짭짜름한 것이 스며들었다. 

    분하기가 너무 과해지면 사람은 서러워지는 모양이다. 

    끝까지 분하기만 하면 좋을텐데, 어째서 이 빌어먹을 

    자기연민에 결국엔 울고야 마는 것인지. 

    다 이긴 싸움에 초를 쳐도 유분수지 말이다. 

    "그만해, 피가 나잖아." 

    "놔!!" 

    나는, 매우 심란해진 표정으로 내 손목을 붙드는 녀석을 향해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녀석의 손을 힘껏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뿌리쳐 지도록 녀석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녀석은 있는 건 힘밖에 없다는 듯,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 큰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놔!....놔....!......개새끼야....놓으라고....." 

    안 그래도 허한 기력을 다 소진해 버린 탓인지, 더 이상 소리 지를 

    기운도 없었다. 나는 그저 붙잡힌 손목을 매달리다시피 그대로 방치해 둔 채, 

    남은 한 손을 들어 주책 맞은 눈물을 힘겹게 훔쳐내며 그렇게 말했다. 

    결국, 불타던 전의도 그 눈물에 피시식 꺼져 버리고 있었다. 

    "......미안해." 

    녀석이 낮게 말했다. 동시에, 녀석 손아귀에 들어갔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러나, 녀석은 여전히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벗겨져 나간 내 손등을 제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럽게 덮으며 녀석은 작은 한숨을 섞어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정말, 정말 미안해." 

    나는 잡혀있던 손목을 살짝 비틀었지만, 더 이상 녀석의 

    손을 뿌리치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럴만한 기력도 없었거니와,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나는 두서 없이 녀석을 원망했다. 

    "어떻게 그러냐 너.....어떻게...연락 한 번 없을 수가 있어...독한 새끼.... 

    내가 뭘 그렇게 잘 못 했다고.....뭘....그렇게 잘 못해서.....사람 후회하게 

    만들어........말하기 싫다는 놈......왜 닦달을 해서.....나만 병신 됐나...싶어서.... 

    내가.....내가 얼마나......후회를 했는데...." 

    아, 말이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담고 있자니 서럽고 분해서 못 살겠고, 

    툭하니 뱉어버리면 그것은 한없이 유치해진다. 

    하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 같은데, 뭔가 이건 아니지 싶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좀 더 멋지게 말하고 싶었다. 

    나도 널 지켜줄 수 있어. 

    나는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야. 

    왜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바보같이 질질 짜기나 하고 말이지.... 

    "주영아." 

    "..........." 

    "주영아, 대답해 봐." 

    녀석이 재촉하듯 나를 불렀다. 

    나는 그런 녀석의 교복 끝자락만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한참 후에야 작은 소리로 대답을 했다. 

    "......왜..." 

    "오늘, 학교 가지 말자." 

    녀석의 뜻밖의 말에 연신 솟아오르던 눈물이 끊어지듯 멈췄다. 

    그리고 곧 오른쪽 눈썹이 제 멋대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 녀석은,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이토록 엉뚱 맞은 것일까.... 

    라고 생각하던 것도 잠시,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나는 그것이 

    이미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전거 안 가지고 나왔어.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녀석의 자전거가 없었다. 

    자전거가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아주 가깝거나, 아니면 아주 멀다는 얘기였다. 

    그쯤 해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채긴 했지만, 

    나는 어쩐지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아 

    부러 생뚱 맞은 목소리로 짧게 물었다. 

    "....어딘데." 

    "옛날 우리 과수원." 

    나는 잠시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잡혀 있던 손을 빼내어 아직 눈가에 남아있던 물기를 

    싹 닦아 낸 뒤, 한결 말끔해진 기분으로 이렇게 말했다. 

    "......배고파....."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고속 버스 터미널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일행들과 신나게 떠드는 여행객들부터 시작해, 

    갖가지 보따리를 추려 들고 피곤한 얼굴로 차시간을 기다리는 장사치들까지, 

    터미널 안에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지각색의 사연으로 웅성대고 있었다. 

    나는 터미널 구석에 있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녀석을 기다렸다. 

    몇몇 사람들이 터미널과는 어울리지 않는 교복차림의 나를 힐끗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안 오는거야...." 

    나는 조금 초조해 진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표를 사러간다던 녀석이 어찌 된 일인지 3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를 않았다. 

    이 놈이 설마 나를 이 도떼기시장 한 가운데 떨렁 버려 두고 돌아가 버린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함이 점점 커져가고 있을 때, 저 멀리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걸어오는 녀석의 푸른 색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녀석이 그럴 리가 없지. 내 매운(퍽이나) 주먹맛을 보고도 그런 짓을 

    한다면 살기가 싫은 놈이지 그건..... 

    "아, 사람 진짜 많네." 

    내 옆으로 철푸덕 주저앉은 녀석은, 교복 윗자락을 잡아 부채질하듯 

    흔들어대며 낮은 소리로 불평을 했다. 그리고는 곧 들고 있던 비닐 봉지를 

    내 무릎 위로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20분 뒤에 차가 출발한대. 식당을 들어가기는 조금 시간이 

    모자를 것 같아서, 그냥 김밥이랑 음료수만 사왔어. 괜찮지?" 

    나는 봉지 안에 들어있던 투명 도시락 하나와 사이다를 꺼내며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투명한 뚜껑 밑으로 나란히 줄지어 

    선 김밥들이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봉지 안에 들어있던 

    나무 젓가락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녀석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녀석은, 

    "난 됐어. 그건 그렇고, 먹기 전에 저 쪽 손 좀 이리 내 봐." 

    라며 봉지를 잡고 있던 내 오른손을 눈으로 가리켰다. 

    녀석의 말에 손을 들어올려 꽤 심하게 벗겨진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자, 그제야 조금씩 쓰라려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약국 찾느라고 조금 헤맸어. 연고 바르고 밴드 붙이면 괜찮을거야." 

    녀석은 바지 주머니를 뒤져 하얀 봉지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작은 연고 하나와 밴드 한 통을 쏟아내며 그렇게 말했다. 

    "손 줘 봐." 

    연고 뚜껑을 열어 오른손 검지 끝에 그것을 조금 짜낸 녀석은, 

    나머지 한 손을 내게 내밀며 재촉하듯 다시 말했다. 

    그런 녀석의 내밀어진 손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봉지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슬그머니 풀어 주춤주춤 녀석의 손위로 올려놓았다. 

    녀석은 조심스럽게 하얀 연고를 내 손등위로 펼쳐 발랐다. 

    조심스러운 녀석의 커다란 손이, 문득 십자수를 놓는 곰의 투실한 손등을 

    연상시키는 바람에 나는 고개 숙인 녀석 몰래 슬쩍 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장 심하게 벗겨진 부분에 녀석의 검지가 

    닿자 나는 쓰라린 통증에 한쪽 눈을 질끈 감으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아, 앗......" 

    "아퍼?" 

    움찔거리는 내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쥐었던 손에 힘을 주며, 

    녀석은 마치 제 손이 아픈 듯 살짝 미간을 좁히며 내게 물었다. 

    "아..아니....조금....따가워서...." 

    왠지 모르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나는 눈동자만 굴려 녀석의 곧은 시선을 슬쩍 피하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러자, 녀석은 피식-웃으며 다시 손등으로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게, 칠 데를 쳐야지, 왜 하필이면 꼭 뺏지 있는 데만 골라서 쳐. 

    넌, [너 죽고 나 살자]라는 말도 모르냐. 쯔읏." 

    "시,시끄러....내 맘이야......" 

    나는 벌게진 얼굴로 더듬더듬 녀석을 향해 낮은 퉁을 주었다. 

    그러나 녀석은 그것조차도 재미있는지, 연신 피식거리며 

    하얀 연고가 투명해 지도록, 내 손등을 정성스럽게 문질러주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다 됐다는 듯, 녀석은 꽤 진지한 얼굴로 

    내 손등 위로 후--하고 입김을 한 번 불더니, 밴드 하나를 벗겨 

    번들거리는 상처를 살짝 덮어 주었다. 그리고, 녀석이 말했다. 

    "이거 재밌네. 의사나 해 볼까." 

    너무도 태연한 녀석의 농담(!)에 나는 웃을 기운도 없어, 

    못 들은 척, 그냥 아무 말 없이 김밥이나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김밥과 사이다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다 먹어치우자, 마치 내가 다 먹기를 기다렸다는 듯 코맹맹이 안내 방송이 

    터미널 안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오전 9시 30분 발, ## 행 차량을 이용하실 분들께서는 

    5번 출구로 나와 주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전 9시 30분 발.....] 

    녀석은 표를 꺼내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하더니, 벌떡 일어서며 들고 있던 

    책가방을 들쳐 맸다. 그리고는 천천히 뒤따라 일어서는 나를 힐끗 돌아보더니, 

    씨익-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꼭, 신혼여행 가는 거 같지 않냐." 

    ..............그럼, 우리가 입고 있는 이 교복은 결혼예복이냐? 앙?? 

    커다란 고속 버스에 올라탄 우리는 정해진 좌석이 없는 이유로, 

    아무 좌석에나 자리를 잡고 나란히 앉아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터미널과 마찬가지로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올라타 있었다. 

    하지만, 그 다양한 사람들 중 우리처럼 교복을 입고 앉아 하나는 나른한 

    표정으로, 또 하나는 멀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버스를 올라타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씩은 우리를 

    힐끗거리고 지나갔는데, 시큰둥한 표정의 녀석도 그게 꽤 신경에 

    거슬렸는지 결국은 팔짱을 엇갈려 낀 채 눈을 감아버렸다. 

    "너도 좀 자 둬. 2시간 정도 걸릴꺼야." 

    눈을 감은 녀석의 곧고 강한 이목구비를 흘끔흘끔 훔쳐보던 나는, 

    마치 이제 그만 쳐다보라는 듯, 딱 잘라 말하는 녀석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앞좌석의 갈색 가죽 등받이로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 차가 출발했고, 녀석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흔들리는 버스 좌석을 침대 삼아 곤히 잠이 들었다. 

    "주영아...야, 김주영." 

    이마 바로 위에서 들려오는, 크지는 않지만 적당히 절도 있는 녀석의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꽤 빵빵한 냉방 시설에도 불구하고, 땀에 

    젖어 이마 위로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나는 녀석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민망하게도, 내가 기대고 

    있었던 녀석의 오른쪽 소매가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몽롱한 정신으로도 

    그것이 침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마른 입가를 문지르고 있자, 

    녀석은 발 밑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집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피곤했던 모양이네, 잘 자더라, 너." 

    "어....조금..." 

    녀석의 말에 더욱 민망해져버린 나는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 

    노란색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차창 쪽을 바라보았다. 

    채 가려지지 않은 창의 구석으로 바삐 지나가는 초록 빛깔의 

    그 무엇인가가 보였다. 주춤주춤 손을 뻗어 드리워져 있던 커튼을 

    조심스럽게 쳐내었고, 그와 동시에 나는, 한숨 비슷한 작고 낮은 

    탄성을 올려버렸다. 

    "아아----" 

    창 밖은 온통 초록빛 일색이었다. 하얀 햇살을 끼고 있는 푸른 하늘을 

    무색케 할 만큼, 일말의 틈도 없이 펼쳐진 초록색 푸른 들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길고 늘씬한 전봇대들 너머로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창 밖 세상, 전부를 채우고 있는 그 푸른빛 초록색 진풍경에, 

    나는 한동안 할말을 잃고 벌려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를 못하고 있었다. 

    "멋지지?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곳이야."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나와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녀석이 어딘가 뿌듯해 보이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감탄!]이라는 글자를 이마에 써 붙이고 앉아있던 나는, 

    녀석의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다시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얀 햇살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색 들판을 바라보며, 

    나는 왜 녀석의 부모님이 두 쌍둥이 아들에게 [해찬산들]이라는 

    이름을 나란히 나누어 붙여주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다 왔어. 이제 내려야 돼." 

    쉼 없이 지나가던 전봇대들이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어느 새 버스가 멈춰 선 모양이었다. 좁은 통로 넘어 저 쪽으로 난 창 밖을 

    건너다보자, 이미 버스에서 내린 몇 몇 사람들의 까만 머리통이 줄지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마지막이야. 빨리 내리자." 

    제 가방과 함께 내 가방까지 거뜬히 들어올린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앞서 버스 입구로 걸어갔고, 

    나는 썰렁해진 두 손을 휘적거리며 녀석 뒤를 쭐래쭐래 쫓아 내렸다. 

    "과수원까지 걸어 갈 수 있겠냐? 그냥 버스 탈까?" 

    작고 낡은 대기실을 빠져나오자마자, 녀석은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어째 은근슬쩍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 부러 쌩쌩한 걸음걸이로 녀석 

    뒤를 바짝 쫓아갔다. 그리고는 녀석의 한 쪽 어깨에 걸쳐져 있던 

    내 가방을 뺏어 메며, 작지만 어딘가 다분히 객기 어린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얼마든지 걸을 수 있어." 

    그런 나를 잠시 내려다보던 녀석은, 아 그러냐 하는, 매우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따라오라는 말 한마디 없이 

    낮은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설렁설렁 앞 서 걷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돌아선 녀석의 얼굴이 피식피식 웃고 있을 것만 같아, 

    나는 잔뜩 약이 오른 얼굴로 녀석 뒤를 말없이 뒤쫓아 걸어갔다. 

    ............그러나. 

    나는 곧 내 객기에 대해 무지막지한 후회를 해야만 했다. 

    세상에, 멀어도 멀어도 그렇게 멀 수가 없었다. 

    녀석은 분명히,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곳이야]라고 말했다. 

    그래서 단순하기 그지없던 나는, 녀석이 말한 [여기]가 

    내 눈에 보이는 그곳이 전부인 줄 알았다. 허나, 이게 웬걸. 

    이 허풍돌이 최산들 녀석, 나를 속여도 단단히 속여버렸다. 

    세상 어느 천지에 이렇게 넓고 큰 [여기]가 어딨냔 말이다!! 

    .......라고 이제 와서 땅을 치고 후회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딱 두 번의 정류장을 들른다는 그 버스는 이미 우리가 그 [두 번의 정류장]을 

    지난 지 한참 후에야, 비로소 케케한 매연만 잔뜩 뿜어대며 지나가 버렸거늘, 

    괜한 오기로 녀석의 호의(?)를 무시해 버린 나를 탓해야지 어쩌겠는가 말이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저기 보이는 저 간판이 과수원 입구야." 

    라며 녀석은 여전히 건재한 표정과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땀이 들어가 쓰라린 한 쪽 눈을 질끈 감으며 

    녀석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해찬산들 과수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커다랗고 낡은 나무 판자가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커다란 고목 나무 간판조차도 한순간에 

    초라해 보일 만큼, 넓디넓은 들판이 그 양 옆과 뒤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와아.....무지 넓다....." 

    나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 푸른 땅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나 땀으로 젖은 교복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넋 나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녀석의 한마디에 나는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표현과 딱 맞아떨어지는 

    경험을 해야했다. 

    "들어가서도 한참 더 걸어야 해. 과수원 끝에 형 산소가 있거든." 

    ...........아, 그래. 

    과수원 입구를 들어서고부터, 녀석이 내 가방을 들고 걸었다. 

    앓고 난 후 유난히 떨어진 체력을 이기지 못해 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녀석이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녀석이 

    업어주겠다고 했다면 아마 사양 한번 하지 않고 덥썩 업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지치고 힘든 와중에도, 두 눈만은 이상하게 또렷해져서, 

    나는 마치 테마 열차와 같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리 잡고있는 각양각색의 

    과실 밭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한적한 과수원 사잇길을 말없이 걸었다. 

    "여기가 포도밭이야." 

    녀석이 왼쪽으로 난 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저긴 사과밭. 철이 아니라서 지금은 열매만 맺혀 있을꺼야." 

    먼저 가리켰던 쪽을 채 돌아보기도 전에 녀석은 서둘러 방향을 

    바꾸어 다른 곳을 가리켰다. 녀석이 가리키는 곳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약 오르게도 녀석은 또 다시 

    다른 곳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저 쪽은 딸기밭인데, 얼마 전에 전부 수확을 해서 지금은 썰렁하더라." 

    녀석은 신이 난 듯 했다. 속이 터질 정도는 아니지만, 언제나 느릿하고 

    여유있는 녀석의 어조가 어색하리 만치 흥분되어 있었다. 

    여기는 무슨 밭, 저기는 무슨 밭, 하며 마치 과수원 여행 가이드 마냥 

    내게 조목조목 설명해 주는 녀석을 나는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정말 그곳을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 넓은 과수원에는 어찌나 밭의 종류도 다양하던지, 

    나중에는 결국, 녀석이 [이건 돼지 밭이고, 저건 송아지 밭이야]라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만큼 건성으로 듣게 되었다. 녀석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비슷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밭을 확실히 구별해가며 

    귀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민간인(?)인 내게는 조금 벅찬 일이었다. 

    여하간에, 녀석이 그렇게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내게 여러 종류의 

    밭 이름을 가르치며 걷고 있을 때, 저 멀리 우거진 나무사이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잠시 눈을 찡그려 우리 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알아보겠다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이름을 크게 불러제꼈다. 

    "이 놈, 산들이 아니냐---!!" 

    "어, 안녕하세요 아저씨. 계셨네요?" 

    녀석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 분 앞으로 걸어가 꾸벅 

    허리를 굽히며 그렇게 인사를 했다. 주춤주춤 녀석 뒤를 

    따라가던 나도 힐끗 건너다보는 그 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엉거주춤 허리를 굽혀 보였다. 

    "응, 있었지. 오늘 배달 갈 물건이 좀 있어서. 

    저번에 너희 식구들 오던 날은 하필 장이 서는 바람에 

    얼굴도 못 보고, 왔다 갔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 

    .......그런데....저 아이는 누구냐?" 

    라며 아저씨라 불리는 그 분이 나를 가리키며 묻자, 

    녀석은 옆으로 슬쩍 비켜서며 내 소개를 했다. 

    "제 친구예요. 방학이라서 같이 놀러왔어요." 

    라고 말한 녀석은, 곧이어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과수원 주인 되는 아저씨야. 우리 아버지 친구 되시기도 하고." 

    "아...그렇구나...안녕하세요..." 

    나는 두 번째 인사를 하면서, 그 짧은 순간에 [녀석의 아버지는 

    친구 분에게 과수원을 파셨구나] 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래,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겠구나. 

    뭐 시원한 것 좀 먹여야 될텐데, 뭐가 좋을까...." 

    라며 주위의 밭을 둘러보시는 아저씨를 향해 

    녀석은 넋살도 좋게 어딘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요즘 참외 값이 좀 비싸던데, 이왕이면 그걸로 주세요." 

    그러자, 아저씨는 과일 집 아들내미가 참외도 마음껏 못 먹느냐며 

    허허거리는 웃음을 지으시고는 커다란 고무장화를 신은 발을 

    옮겨 참외밭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곧, 크고 진한 노란색 

    참외 세 개를 두 손에 받쳐들고 나오시더니, 씨익-웃고 섰는 녀석을 향해 

    [옛다 이놈아--]하시며 어딘가 뿌듯한 표정으로 건네주셨다. 

    "잘 먹을게요, 아저씨." 

    녀석은 먹음직스러운 참외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 번 씨익-웃어 보였다. 

    그러자, 아저씨는 그에 어울리는 웃음을 마주 웃어주시며 한결 차분해진 

    음성으로 이렇게 물으셨다. 

    "해찬이 산소 가던 참이냐?" 

    "예, 아저씨." 

    "며칠 전에도 다녀가지 않았더냐?" 

    "바람도 좀 쐴 겸해서, 또 왔어요." 

    아저씨는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시더니, 

    거친 손등을 내저으시며 먼저 인사를 하셨다. 

    "어여 가 봐라. 날 저물기 전에 서둘러야지." 

    "예,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다녀가라." 

    라며 손을 흔드시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우리는 이어진 과수원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앞서 걷던 녀석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을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다. 

    앞으로 보이는 작은 밭과, 그리고 그 끝에 자리 잡은 

    동그란 모양의 작은 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 왔어. 여기야." 

    녀석이 들고 있던 참외를 내려놓으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들고 있던 것을 받아들어 그 역시 

    산소 주위로 난 잔디 위에 내려놓았다. 

    "땅이 좋아서 그런지 때가 아주 잘 자라. 

    잡초도 별로 생기지 않고, 모양도 예쁘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길다란 손을 뻗어 동그란 묘의 잔디들을 쓰다듬듯 

    훑어 내렸다. 파릇파릇한 잔디들이, 녀석의 손길을 따라 스르르 휘어졌다가 

    금새 생생한 기운으로 제 모양을 되찾아 일어섰다. 

    "한 때는, 이 때깔 고운 잔디조차 겁나게 미울 때가 있었는데...." 

    라며 낮게 웃는 녀석의 얼굴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녀석이 동그란 묘 언덕 부리를 두 어 번 손바닥으로 두드린 후, 

    조금 떨어져 있는 나무 그늘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을 때야 비로소, 

    나는 그것이, 언젠가 내 어눌한 축하 인사에 녀석이 지어 보였던 

    그때 그 표정과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좁은 나무 그늘 아래로 걸쳐있듯 나란히 앉아 있었다. 

    태양은 하늘 꼭대기에 우뚝 솟아 작렬하고 있었고, 간간히 불어오던 미지근한 

    바람도 작은 방울토마토 가지들과 동그란 묘 위의 푸른 잔디만 살짝 

    흔들어 줄 뿐,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는 우리에게는 닿지도 못한 채 

    싱겁게 흩어져 버렸다. 덥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도심의 더위와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에 절대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동안이나 앉아 있었을까. 문득 짧았던 나무 그늘이 

    무릎께까지 자라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녀석은 느릿하고 

    나른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해찬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 날 얘기했던 게 전부야. 

    더 얘기하고 싶어도 얘기할 꺼리가 없어. 

    그 녀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제대로 기억해 두지 않았거든." 

    녀석은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버릇처럼 턱을 쓸었다. 

    나는 다소 놀란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며 어눌하게 물었다. 

    "....싫어했어...?" 

    내 질문에 녀석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좋아했어. 한 배 안에 있었던 시간이 얼만데, 싫어할 리가 없잖아." 

    "뭐야....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의 말에 내가 그렇게 끼어 들자, 

    녀석은 턱을 쓸던 손을 무릎 위로 내리며 뒤엉킨 말의 

    매듭을 간단하게 풀었다. 

    "적어도 죽기 전까지는 좋아했었다, 이거지." 

    매듭은 풀렸는데, 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져 버렸다. 

    이해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보통, 죽도록 미워하던 사람이라도 막상 그 사람이 

    다치거나 죽어 버리면, 용서하듯 미움을 버리고 외려 

    미워했던 시간에 대해 후회를 하지 않던가. 

    헌데, 녀석은 그게 아니었다. 살아있을 때는 

    좋았던 형이, 죽고 나니 싫어졌다고 한다. 

    왜, 도대체 왜.....?? 

    "하하....너 또 눈썹 올라간다." 

    녀석의 말에 나는 얼른 눈썹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언젠가 녀석에게 들은 바로는, 그럴 때의 내 표정은 

    녀석을 미치게(헉) 한다고 했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녀석이 미치면 곤란한 상황이었으므로, 나는 안간힘을 

    쓰며 눈썹의 정자세를 사수해야만 했다. 

    "허..헛소리하지 말고....얘기나 해...." 

    민망해진 얼굴을 슬쩍 틀어버리며 낮게 툴툴거리자, 

    녀석은 피식-하고 한 번 웃더니, 여전히 나른한 음성으로 

    다시 이야기를 잇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니가 처음이야. 

    너무 유치해서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었거든." 

    "하고 싶지 않으면....안 해도 돼...." 

    나는 되도록 태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결코 진심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조금 

    과장된 음성과 표정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정말?" 

    "....응...." 

    "얼굴에는 [아니]라고 써 있는데??" 

    ........귀신같은 놈. 

    "푸훗, 신경 쓸 거 없어. 말하지 않고 꽁꽁 숨긴다 해도, 

    유치한 건 어쩔 수 없던 걸 뭐." 

    라고 말하며 녀석은 또 한 번 턱을 쓸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 

    "죽은 사람을 질투하는 것만큼 유치한 게 또 있을까." 

    그렇게 녀석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녀석은 해찬이라는 아이가 죽고 딱 한 번 울었다고 한다. 

    바로 그 아이를 과수원 끝자락에 묻던 날에 말이다. 

    녀석은, 아주 오랫동안 해찬이를 기억하고 슬퍼할 거라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지. 적어도 그 다음 날까지는." 

    녀석의 어머니는 그 날 아침도 평상시와 똑같았다고 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일어난 녀석에게 갈아입을 옷과 양말을 

    챙겨주셨고, 국을 끓여 아침상도 차려주었다. 가게 일로 

    바쁜 와중에도, 실내화 주머니를 들려주는 일 역시 

    잊지 않으셨다. 하지만, 녀석이 챙겨준 옷을 입고 

    차려진 아침 밥상을 먹고, 그리고 실내화 주머니를 

    받아들고 인사를 할 때까지, 녀석의 어머니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나랑 눈을 마주치지 않는거야.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내가 뭘 잘못했던가, 하고 어린 마음에 

    조금 겁도 났고 말이야." 

    하지만, 녀석은 곧 그것에 대해 잊었다고 한다. 

    북적거리는 교실과 먼지 나는 운동장에서 하루의 

    반을 보내다보니 쉽게 잊혀지더라고 했다. 

    그런데, 잊은 건 아침나절 어머니의 냉담한 외면 뿐 아니라, 

    바로 어제, 먼 곳에 두고 온 해찬이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축구를 하다가 생긴 무릎 위 상처를 보고 엄마가 그게 뭐냐고 묻더군. 

    그래서 이러저러해서 다쳤다고 설명을 하는데, 별안간 엄마가 내 뺨을 

    냅다 후려 치는거야. 어찌나 아프던지, 아주 눈물 쏙 뺐지." 

    그렇게 녀석의 뺨을 후려치신 녀석 어머니는, 싸늘한 눈으로 돌아설 뿐, 

    왜 녀석이 그렇게 맞아야 하는지, 그럴 만큼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것도 모를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맞을 짓을 했다고 생각했어. 그렇잖아, 형이 죽었는데 나 몰라라 

    축구나 하고 다녔으니 오죽이나 철이 없어 보였겠냐." 

    의외로 녀석은 진심으로 반성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더 이상 해찬이에 대해서 슬퍼지지가 않더라는 거지." 

    그랬단다. 아무리 슬퍼하려 해도 슬퍼지지가 않더란다. 

    여전히 싸늘하게 자신을 외면하는 어머니만이 어린 

    녀석의 마음을 애타게 할 뿐, 해찬이의 죽음은 

    이제 녀석에겐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이다. 

    "나는 늘 뭔가로 바빴었던 것 같아. 공부도 늘 바빴고, 

    아버지를 졸라 배우게 된 합기도 때문에도 바빴고, 

    이러저러한 시합에 나가 상 받기도 바빴고, 또 그걸 

    집으로 들고 와 자랑하기도 바빴지. 그렇게 하면 될 줄 알았어. 

    그렇게 하면, 엄마도 이제 예전처럼, 그러니까 해찬이가 살아있을 때처럼, 

    그렇게 날 아껴주고 자랑스러워 할 줄 알았지." 

    하지만, 녀석의 어머니는 그런 녀석의 기대를 보기 좋게 무시해 버렸다고 했다. 

    반장이 되었다고 하면, 그런 걸 귀찮게 왜 하냐고 화를 내시고, 

    시합에서 받은 트로피를 들고 오면, 좁은 집안에 그런 걸 왜 자꾸 들여놓느냐며 

    퉁을 주셨다고 한다. 

    "뭘 해도 마찬가지 였던거야. 공부건 운동이건, 내가 그 무엇을 하건, 

    우리 엄마한테는 늘 관심 밖의 일이었지." 

    녀석은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자상한 아버지가 언제나 외면당하는 

    녀석을 위로해 주긴 하셨지만, 그건 그리 도움이 되질 못했다. 

    녀석은, 해찬이가 살아있었을 때, 두 쌍둥이를 대하던 어머니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날 그렇게 미워하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었지. 

    내가 해찬이를 죽인 것도 아닌데 말이야. 슬슬 억울해지기 시작하더라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녀석은, 이제 보람도 없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공부도 하지 않았고, 

    운동도 하지 않게 되었다. 정말, 말 그대로 무위도식, 그 자체였던 것이다. 

    "흥미를 끌만한 게 없었어. 어떤 걸 한다해도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그렇게 모든 것에 심드렁해져 있던 녀석의 관심을 한순간에 끌어 모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난봉꾼 짓이었지. 왜 그거 있잖아, 불량 청소년. 

    글쎄, 그게 그렇게 되고 싶더란 말이야. 하하..." 

    그래서 녀석은, 정말 난봉꾼이 되었단다. 나쁜 짓이라 여겨지는 것은, 

    가리지 않고 다 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고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빨간 불일 때 길을 건너는 따위의 

    규칙 위반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쯤은 나도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사고를 치고 정학을 맞았을 때가 아마 중학교 첫 

    시험이 있기 며칠 전이었을거야. 다들 요란 법석을 떨었지. 

    교장부터 시작해서 담임이나 반 아이들 할 것 없이 말이야. 

    그런데 유독 나 몰라라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우리 엄마야." 

    녀석의 어머니는 여전하셨다. 여전히 무관심했고, 냉담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녀석의 철없는 노력을 그 분도 뻔히 아셨을텐데, 

    왜 그렇게까지 모질게 녀석을 밀어내려 하셨을까. 

    "자그만치 5년을 그렇게 살았어. 3년은 모범생으로, 나머지 

    2년은 천하에 둘도 없는 난봉꾼으로, 그렇게 온갖 쇼를 

    하면서 말이야. 그래도 여전히 변함 없는 우리 엄마를 보면서, 

    나도 이제 슬슬 포기가 되기 시작하더라." 

    포기하고 나니, 의외로 마음이 가벼워졌더란다. 

    더 이상 되지도 않을 일에 조바심 낼 필요도 없었고, 

    스스로를 아껴야 할 이유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였어.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끝장을 볼 때까지는 

    절대 물러나지 않기 시작한 건. 상대가 죽어주면 더 좋겠지만, 

    내가 죽는다 해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았거든." 

    그렇게 죽기 살기로 싸움을 하고 다니던 녀석은, 

    결국 어떤 한 녀석과 밤새도록 치고 받다가 

    둘 다 피갑칠을 한 채로 병원으로 실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정신이 들고 보니, 팔 다리 가슴 할 것 없이 온 몸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더군. 욕 나오더라. 죽이지도 못 할 거, 

    이 꼴로 만들어 버릴 건 또 뭔가 싶어서 말이지. 하하." 

    그래서 녀석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그 병원 어딘가에서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누워있을 다른 한 녀석을 향해 

    끊임없이 저주를 퍼붓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슬며시 눈을 뜨자, 녀석의 침대 옆에 누군가가 등을 돌린 채 

    비스듬히 기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단다. 

    "처음엔 누군가 했더니, 가만 보니 우리 엄마잖아. 

    잠시 고민을 했지. 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하고 말이야." 

    그렇게 고민을 하며 돌아앉은 등만 멀거니 보고 있는데, 

    그때 녀석의 어머니가 뭔가를 벌컥 벌컥 들이키시더란다. 

    등 너머 슬쩍 건너다보는 것만으로도, 녀석은 녀석의 어머니가 

    지금 무엇을 그렇게 시원스럽게 넘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소주였어. 소주 말이야. 하하. 글쎄, 병실에서 소주를, 

    그것도 병째로 마시고 있더라니까. 하하하." 

    놀랍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어진 녀석은, 깨어있다는 인기척조차 

    내지 못하고 그냥 바보 미이라처럼 누워, 보일 때마다 

    눈에 띄게 줄어드는 소주병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술을 마시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실, 

    나도 꽤 당황스럽더라고. 그래서 저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웬걸, 눈 몇 번 깜짝하고 나니까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마셔버린거야. 그제서야,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하더군. 술김에 날 죽여버리려고 그러나 싶은 게 말이야. 하하." 

    하지만, 녀석의 어머니는 소주병을 다 비우고 나신 뒤에도 

    여전히 등만 보인 채 앉아 계실 뿐, 누워있는 녀석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말 없이 앉아있는 엄마를 대뜸 부르기도 그렇고 해서, 

    나도 그냥 자는 척 다시 눈을 감아 버렸지. 못 본 척 해 주는 게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그 때, 엄마가 날 부르는거야. 

    술기운이 조금 올라있긴 했지만, 예전처럼...그러니까, 해찬이가 살아있었을 때,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더라고." 

    그러나 녀석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녀석의 이름을 '부른다'기 보다는, '읊조리고 있다'에 

    가까운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치, 당신 옆에 

    덩그라니 누워있는 최산들이가,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는 한참 뒤에 또 한 번 내 이름을 부르더군. 

    꽤 취했는지 혀까지 꼬여서 말이야. 그때, 엄마는 

    여전히 돌아앉아 있었기 때문에 엄마 표정이 어땠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그 날 엄마가 술기운을 빌어 했던 말들은, 

    지금도 분명히 기억을 하고 있지. 꼭 기억해 둬야 한다고, 생각했었거든." 

    돌아앉은 녀석의 어머니는, 축 늘어진 어깨를 한 채 대본 없는 

    독백을 하듯, 조금은 힘겨운 음성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미안하다....산들아. 정말.....미안하다.] 

    "뭔가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왔어. 화가 났던 건 아니야. 

    그러니까.....그건.....음, 그 때 난, 조금 서러웠던 같아." 

    [....녀석....착하기도 하지....그렇게 모질게 굴어도, 어쩌면 

    원망 한 번을 안 하니......미련한 놈.....어이구, 미련한 놈.....] 

    "미안해지더라. 사실, 그게 아닌데 말이야." 

    [바보 같은 녀석.....차라리 날 붙들고 화를 내지....왜 

    엄한 널 가지고 화를 풀어.....이 미련한 놈아.....] 

    "우는 것 같더라. 아니, 처음부터 울고 있었을 거야 아마." 

    [아니지...아니야....잘못은 다 내가 한거지.....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산 내가 나쁜 년이지....암......그렇고 말고....] 

    "이상하게 가슴이 뛰더군. 방정맞게도, 쿵쿵쿵쿵." 

    [산들이 니 아버지가 그러더라. 하나 남은 너라도 잘 키우자고 말이다. 

    헌데.....난 그렇게 못 하겠더라.....그렇게 하면....너무 빨리 가 버린 

    니 형이.....서운해 할 것 같아서 말이다.....그렇지 않겠냐 산들아.... 

    죽은 것도 서러운데....엄마라는 사람이 그렇게 금새 돌아서 버리면.... 

    그건 또 얼마나 서럽겠냐.......안 그러냐 산들아.....] 

    "..........솔직히 말해서, 그런 생각, 해 본적 없었어." 

    [부쩍부쩍 자라는 널 보면....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해찬이가 먼저 생각나고, 

    운동을 잘 해서 상을 받아오는 걸 보면....뛰기는커녕 걷는 것조차 힘들어했던 

    해찬이가 먼저 생각나는거야.......그래도 꿋꿋이 자라고 열심히 상을 받아오는 

    널 보면.....이 놈도 참 눈치가 없구나....싶었지....] 

    "허탈하더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착한 짓들이었는데 말이야." 

    [녀석....조금만 천천히 자라지 그랬니...엄마 좀 기다리지....어쩌면 그렇게 

    혼자...훌쩍 커버렸어 이 녀석아......] 

    "....어쩔 수 없잖아, 지 멋대로 자라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참...." 

    [결국....다 내 잘못이다....이게 아니다 싶은 건 오래 전부터였는데....어쩌다보니... 

    널 이 꼴로 만들고 나서야.......얘기를 하게 되는구나....그것도 이렇게 

    자고 있는 널 두고 말이다.........불쌍한 내 새끼.....살아서 받는 설움도 설움인 것을... 

    미안하다.....산들아.....너도 내 아들인데......너도 내 배 아파 낳은....내 새끼가 

    맞는데........얼마나 서러웠을까.....어린것이 눈물 한 번 안 보이고.....저 혼자 

    얼마나 서러웠을까........미안하다.....우리 아들......정말....미안하다......]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는 건지, 침대 모서리에 기대앉아 

    곯아떨어질 때까지 계속 그 말만 되풀이 하는거야. 

    ......사람, 진짜 서러워지게 말이지...." 

    한 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난 녀석의 어머니는, 

    놀랍게도 예의 그 무뚝뚝하고 냉기 도는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꿈이 아니었을까, 의심을 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병실 안에 굴러다니던 빈 소주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느 사이엔가, 그 무뚝뚝하고 사나운 얼굴이 우리 엄마한테 

    너무 익숙해져 버린거야. 이제 와서 그걸 뜯어고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린거지. 뭐,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때 녀석에게 중요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덜 혼이 나고 무사히 병원에서 나갈 수 있느냐, 

    그게 중요했던 거지. 하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 녀석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들어야 한다는 것, 보여주지 않아도 

    알아서 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녀석이 녀석 어머니에게 

    적응해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씨, 뭐야 이거. 얘기하고 보니까, 결국 [나 유치했어] 이 얘기잖아, 나 참...." 

    녀석은 민망하고 쑥스러운 듯, 살짝 좁혀진 미간 위로 

    옅은 웃음을 덧씌우며 그렇게 이야기를 끝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저 녀석을 미워했던 것에 대해서는, 나도 반성하고 있어. 

    어찌됐든, 나는 지금 살아있으니까." 

    뜨거운 태양이 조금씩 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밭에 남아있던 나머지 방울토마토들을 마저 따기로 했다. 

    녀석이 가르쳐 준대로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 작은 것들을 따내어, 

    폼으로 들고 다니던 책가방 안으로 쏟아 넣었다. 따로 보면 한 주먹도 

    안 되는 것들이 모아놓고 보니 제법 한 짐이다. 얻은 참외까지 나누어 넣는 통에, 

    녀석 가방이나 내 가방이나, 울퉁불퉁, 올록볼록, 매우 우스꽝스런 모양을 하고 

    있기는 마찬 가지였다. 

    "우리 엄마가 널 처음 봤던 날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두둑한 가방을 뿌듯한 마음으로 툭툭 두드리고 있는데, 

    녀석이 빙글빙글 웃어가며 내게 물었다. 

    "......뭐라고 하셨는데.....?" 

    "생긴 게 꼭 방울토마토 같다고 했어. 하하하....." 

    헉....살다살다 이런 엄한 소리는 또 처음이다. 

    눈매 빼고는 그리 동글맞은 데도 없건만, 

    대체 내 어디가, 이 조막만한 무리들과 닮았단 말인가. 

    게다가 난, 이 놈들처럼 빨갛지도 않고 초록 꼭지도 안 달렸는데 말이다.... 

    "푸후....뭘 그렇게 인상을 쓰고 그래. 귀엽다고 한 말인데." 

    "....이..인상 안 썼어...그냥...좀 의외라서 그런거야..." 

    녀석의 오해를 풀고자 더듬더듬 그렇게 해명을 하자, 

    녀석은 들고있던 가방을 어깨 위로 들쳐 메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말한 건, 니가 해찬이랑 닮았다는 뜻이었을거야. 

    다 자라지 못한 해찬이를 두고 늘 방울토마토 같다고 말했었으니까." 

    나는 그 때, 녀석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 분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제대로 자랐으면....딱 저만 했겠구만.....] 

    다 자라지 못한 해찬이와 나를 닮았다 하시는 녀석의 어머니와, 

    제대로 자랐을 때의 해찬이를 나와 닮았다 하시는 녀석의 아버지. 

    두 분은 그렇게 경우를 달리 해 말씀하셨지만, 나오는 결론은 어차피 하나. 

    나와 해찬이가 닮았다는 것. 

    "내가....해찬이랑 닮았어....?" 

    남은 어깨 위로 내 가방까지 들쳐 매는 녀석을 말릴 생각도 

    않고, 나는 조금 벙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너무 쉽게 대답해 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민망하다...... 

    "그..그런데 왜.....니네...어머니 아버지는.....나한테.....그러니까....그게....." 

    민망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는 나를 보며, 

    녀석은 꽤 오랫동안을 낮게 웃더니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생긴 건 확실히 달라. 닮았다고 말하기엔 정말 다르게 생겼어. 

    그런데.....왜 그런 거 있잖아, 전혀 닮지 않았는데 어딘가 모르게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 말이야. 느낌이랄까...뭐 그런 거지." 

    아, 그건 나도 알 것 같다. 마녀같이 생기지는 않았어도 

    느낌만은 마녀가 틀림없는 우리 누나의 경우가 아마 그런 거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넌 그냥 너야. 게다가," 

    잠시 침묵, 

    그리고 톡하니 녀석의 이마 위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 하나. 

    "니가 훨씬 더 예뻐." 

    ..........후두두두둑...... 

    이젠 셀 수도 없을 만큼 떨어져 내리는 수많은 빗방울들. 

    갑작스럽게 퍼붓는 비를 피해 우리는 다시 나무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조금 좁고,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빗방울이 한 두 개씩 떨어져 내리기는 했지만, 

    햇빛을 피할 때처럼, 비를 피하기에도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빗줄기가 그나마 얌전했을 때의 얘기고,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가 나무 아래로 들이치기 시작했을 때는, 

    녀석과 내가 한쪽 어깨를 딱 붙이고 앉아 있어도 모자를 만큼, 그곳은 너무 좁았다. 

    "정말 무섭게 내린다." 

    "응....그러게..." 

    "금방 그치려나." 

    "...그래야 될텐데..." 

    녀석과 나는, 왠지 모르게 굉장히 어색해진 음성으로, 

    노인정 바둑 두듯 그렇게 한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띄엄띄엄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주영아." 

    맞닿은 어깨는 그대로 한 채, 녀석은 살짝 고개만 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눈동자만 움직여 

    힐끔 올려다보았다가, 거센 빗줄기 한 번 내다보고, 

    다시 녀석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렇게 하기를 수 차례, 

    내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녀석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 내가 지금 뭘 하고 싶은지, 아는 것 같다." 

    녀석의 그 말에, 나는 더욱 수선스런 눈짓으로 온 사방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차라리, 몰라! 정말 몰라! 죽어도 몰라!! 

    라고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 놈의 얼굴은 

    어쩌면 그토록 정직하기도 한 지 [나 지금 거짓말 중] 푯말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으므로, 나는 그런 소득 없는 짓은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고, 애꿎은 눈동자만 열심히 굴리고 앉아있었다. 

    ".....해도 돼?" 

    녀석은 그런 내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분주히 굴러다니던 눈으로 녀석을 한 번 더 올려보았다가, 

    숨겨버리 듯 두 눈을 깊이 내리깔며,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내가 할게...." 

    "......음?" 

    "내..내가 할테니까...누..눈감고 있어....." 

    예상치 못했던 말을 들었는지, 녀석은 꽤 오랫동안 

    벙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싫음 말고....." 

    외려 내가 더 민망해져 어떻게든 이 뻘쭘한 사태를 수습해 보려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언젠가 자전거의 앞자리를 내어주던 그 때 

    그 표정으로, 

    "알았어. 니가 해, 그럼." 

    이라고 말하며 눈가에 잔주름 잡아가면서까지 두 눈을 

    꾹 감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녀석은, 

    .........뽀뽀에 환장 한 것 같았다...... 

    "뭐해, 자냐?" 

    내 말대로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녀석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내가 할까?" 

    "아..아니...! 내..내가 할거야..." 

    "그럼 빨리 해. 눈감고 있으려니까, 진짜 민망하다 야." 

    "아..알았어.....잠깐만...." 

    나는 뭔가 죄지은 사람 마냥 쩔쩔 매며, 비스듬히 몸을 틀어 

    녀석을 마주 보았다. 녀석이 눈을 감고 있어도 어쩐지 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워, 나는 녀석의 코와 입술 근처 어딘가에 시선을 걸쳐둔 채, 

    새어나오려는 짧은 한숨을 소리나지 않게 삼켜 버렸다. 

    그리고 잠시, 제법 곧게 선이 난 녀석의 입술을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나는 주춤주춤 녀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는 풀밭을 짚어 기우뚱해진 몸을 받치고, 

    또 한 손으로는 늘어진 가방 끈을 꼭 붙든 채로,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 나가다 보니, 이제, 잔뜩 내려 깔은 

    눈동자 밑으로 보이는 것은, 녀석의 단정한 입술 뿐. 

    ............그것만이, 내 좁은 시야 속 세상 전부였다. 

    입술이 맞닿는 것은 순간이었다. 언제 그렇게 녀석의 입술에 

    내 것이 닿아버렸는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지금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살짝살짝 콧등을 건드리는 녀석의 엷은 콧바람과, 

    쑥스러운 듯 혹은 겁을 먹은 듯, 조심스럽게 내 치열을 

    더듬던 녀석의 까슬까슬한 혀끝......그리고, 콩닥콩닥 

    뛰는 가슴, 끝없이 팽창하는 머릿속, 거세게 풀밭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의 오랜 울림.......등등등.... 

    찰나의 꿈을 꾸듯,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던 내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추린 것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귓불 아래로 뭔가 차갑고 투박한 것이 닿았을 때였다. 

    갑작스런 온도 변화에 짧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떨자, 

    녀석은 황급히 입술을 떼어내며 내 귓불 부근에 닿아있던 

    제 손을 재빨리 거둬 내렸다. 그리고는, 적잖이 당혹해진 얼굴로 

    내게 서둘러 사과를 했다. 

    "아....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아..아니....괘..괜찮아....조..조금 차가워서....." 

    "......바보같이 생각을 못했어. 진짜, 미안하다." 

    ".....괘..괜찮다니까...." 

    입술을 떼고 나니, 어쩐지 더욱 민망해져 버린 우리는, 

    그렇게 어줍잖은 사과와 용서를 몇 차례씩 반복하며, 

    행여 눈이라도 마주 칠 새라, 애꿎은 빗줄기만 

    주구장창 건너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투르고 어설펐던 녀석과 나의 첫 키스는, 

    그렇게 풋내 폴폴 풍기며, 뻘쭘하기가 짝이 없는 가운데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그 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해 여름이 지나고, 두 번째 여름을 맞던 해에는 녀석의 가족이 

    이사를 가게 되었다. 녀석의 부모님이 부지런히 모은 돈으로 다시 

    과수원을 사셨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듣던 날, 나는 처음으로 녀석의 

    어머니가 웃으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그런 이유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의 

    이별(녀석이 이사가던 날, 나 정말 많이 울었다.)을 해야했는데, 

    민망하게도 며칠이나 지났을까, 보고 싶어서 왔다며 불쑥 학교 앞으로 

    찾아온 녀석이 그 후로도 어찌나 뻔질나게 찾아오던지, 

    사실 그리 슬퍼하거나 그리워할 겨를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녀석과 나는 졸업을 했고 동시에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렇고 그런 대학의 경영학과와 체육학과에 나란히 합격한 우리는, 

    서로 [니 수준에 맞추느라 나도 어쩔 수 없이 삼류대생이 된거다]라며 

    도토리 키 재듯 티격태격 그렇게 2년을 보냈고, 남은 2년 중 1년은 

    지금 이렇게 한 지붕 아래 한 이불을 쓰고 앉아, 여전히 아웅다웅 

    나 잘났네 너 못났네 해 가며, 나름대로 애정확인도 잊지 않고, 아주 잘 살고 있다. 

    뭐 가끔은, 전화에 대고 [내 아들 말아먹은 천하의 빌어먹을 놈]이라고 녀석을 

    칭찬(?)하시는 우리 어머니 덕분에, 녀석 몰래 속상해 지는 날도 여럿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말아, 먹은(!)것만은 사실인 것을...... 

    여하간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풋내기 사랑을 하지 않는다. 

    가끔씩은, 서로의 모습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우리를 보며 놀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동네 작은 호프집이라도 찾아 가, 가게문이 닫힐 때까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그 시절의 우리 이야기를 술안주로 삼곤 한다, 

    때로는 박장대소를, 또 때로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가며 그렇게 술잔을 비우다 보면, 

    우리는 어느 새 그 시절의 어리버리 김주영과 곰탱이 최산들로 되돌아 가, 

    새삼 서로에게 다시 한 번 반하게 되는 것이다. 

    첫사랑. 

    서툴러서 애가 타고, 어설퍼서 부끄러웠던, 

    말 그대로, 처음 하는 사랑, 첫사랑. 

    처음으로 가져보는 낯선 감정으로 인해, 

    늘 허둥지둥, 실수 연발, 수위 조절 실패로 가득한, 

    풋내기 사랑, 첫사랑. 

    그런 사랑을, 사람들은 아름답다 말한다. 

    굽지 않은 도자기의 거칠은 표면 같고, 

    다듬지 않은 글의 매끄럽지 못한 문장과도 같은, 

    그 서투른 감정들을, 사람들은 언제나 너그러운 

    눈빛으로 그것을 추억한다. 

    아마도 그것은, 

    처음, 이라는 단어가 지닌 묘한 매력 때문이 아닐까. 

    서투르고 실수 투성이의 처음일지라도, 그것이 풍기는 풋풋한 향기에 취해,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에서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그 풋풋한 향기에 취해, 

    녀석이 돌아오기를 새벽 두 시까지(으득) 기다리며, 

    ...............열 여덟의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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