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일 가게 아들내미 -5 (5/6)

과일 가게 아들내미 -5 

찌는 듯한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을 때, 

녀석과 나는 나란히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비록 보름 후면 보충수업이라는 끔찍한 날들이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어쨌든 조금이라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쁘고 즐거웠다. 

하지만 녀석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딱히 방학이 싫다는 표현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방학식을 하던 날 오후 동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연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와는 달리 

녀석에겐 방학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방학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난 후였는데, 

뭐랄까, 나에겐 그 이유가 상당히 최산들이로서는 의외의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한 사나흘이었던가, 여튼 학교를 다닐 때에 비하면 

꽤 오랜 시간을 녀석과 나는 만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과 내게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 신분을 잠시 보류하게 된 녀석은 이제 완전한 [과일 가게 아들내미]가 

되어 밤낮 할 것 없이 가게 일을 돕는 것으로 바빴고, 내 경우는 완전한 

백수가 되어 어머니의 온갖 구박을 이겨내며 거실의 선풍기를 사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뭐 내 경우야 녀석에게 비한다면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우스운 것이겠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18년 동안 유지해온 방학 생활 패턴이었으므로, 

내게는 당연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당시 핸드폰이라는 것이 학생은 물론 직장인에게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우리가 빌릴 수 있는 유일한 첨단의 길은 집 전화 밖에 없었다. 

고민고민 끝에 알려준 우리 집 전화번호를 끝내 이용하고 만 최산들은, 

운 좋게도 누나가 아닌 아버지를 거치게 되었다. 아버지는 산들이를 

기억하고 계셨다. 과일 가게 아들내미라는 것도 어머니를 통해 들으셨는지 

잘 알고 계셨다. 혹여나 녀석이 무슨 벼락맞을 소리를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아버지 옆에 붙어 서서 수화기를 달라는 표정을 짓고 있자, 아버지는 

[언제 한 번 놀러와라]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수화기를 넘기셨다. 

동네 친구가 하나도 없는 내가 안쓰러웠던 아버지는, 알고 보면 때려죽일 놈에게, 

친구가 되어 줬다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계셨다. 

녀석의 용건은 매우 간단했다. [놀이터로 잠깐 나와라. 얼굴 좀 보자.] 

이게 끝이었다. 나는 그때 만해도 여전히 녀석이 무서웠으므로, 

발딱 일어나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지금이니 하는 말인데, 

사실, 반가운 마음이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표정 없고, 여전히 나른한 자태로 그네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녀석은, 내가 주춤거리며 앞으로 다가가자, 

역시나 여전히 느릿하고 여유 있는 어조로 내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다." 

녀석은 엇갈려있던 팔짱을 풀고 한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부스스 

흩뜨렸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통을 뒤로 빼며 조심스럽게 

녀석을 흘겨주었다. 나는 녀석이 요 괴상망칙한 플레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잘 알게 되었지만, 

나는 도무지 그것에 익숙해지지가 않아 언제나 그런 식으로 녀석에게 

항의를 하곤 했다. 그러나 치명적인 것은, 그것조차도 녀석에겐 그 

괴상한 플레이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하간에, 녀석 말대로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남아있던 어색함과 긴장감을 유지한 채, 

서로의 안부와 일상들을 이야기했다. 녀석은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가게 일들에 대해, 

나는 내용은 똑같지만 항상 다양한 방법으로 쏟아지는 어머니의 구박에 대해, 

때로는 조용히 웃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서로의 말에 나지막한 응수를 해주기도 하며, 

우리는 작고 낡은 벤치 위에 나란히 앉아 내려앉는 저녁 노을을 맞고 있었다. 

어느 새 하나 둘씩 아이들이 집으로 들어가고, 이제 놀이터에는 

정신 없이 모래구멍만 파고 있는 아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자 녀석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커다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아, 늦었다. 잠깐만 다녀온다고 했는데, 지금쯤 난리가 낫겠군." 

그다지 걱정스러운 말투는 아니었다. 알만하다. 그 벼락같은 호통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녀석의 뛰어난 재주는, 언젠가 

딱 한번 본 두 모자사이의 대화로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녀석이 

말은 그렇게 해도 속은 얼마나 태평스러울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그래...얼른 가 봐." 

나도 녀석을 따라 일어서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때, 대뜸 녀석이 내 코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찌나 놀랬는지, 하마터면 벤치위로 다시 주저앉을 뻔했다. 

"뭐..뭐야...." 

나는 몸을 조금 뒤로 빼며 작게 불평하듯 녀석에게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흐음--하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잠시 후 매우 심각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뽀뽀할까?" 

마치 [우리, 공부할까?]라고 말하듯 너무나 건전(?)한 표정의 

녀석을 보며, 나는 기어이 벤치 위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예전처럼 [싫어! 절대 싫어!!] 표정은 아니었지만, 

[꼭...해야겠어?]하는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다보고 있자, 

녀석은 이내 피식-웃으며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아, 그래? 그것 참 신선한 농담이구나, 하하하!!..........젠장. 

흩어진 콩가루 모으듯 허둥지둥 정신수습을 하고 있으려니, 

이 녀석이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한껏 정색을 하고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방학이 싫어."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는거지........ 

나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 분주히 눈동자만 굴리고 서 있었다. 

그러자 녀석은 또 한 번 피식-웃으며 팔을 쭉 뻗었다. 

후후, 그러나, 하루에 두 번씩이나 당할 내가 아니다. 

타이밍도 적절하게 나는 녀석의 손아귀로부터 내 머리통을 지켜냈다. 

나는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지만, 녀석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썰렁해졌을 손을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거둬내며 말을 이었다. 

"귀엽긴....여튼, 별말 아니야. 그냥 너랑 만나기가 

힘들어져서 싫다, 뭐 그런 얘기지." 

잠시 침묵, 으으,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어색함... 

"아아--빨리 보충수업이나 시작했으면 좋겠다." 

라며 크게 기지개를 뻗는 녀석을 보며, 이 녀석이 이렇게 공부를 

좋아하는 녀석이었나 싶어 잠시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나는 곧 그 의미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단, 보충수업만 시작되면 자전거 등교라는, 

하루 30분의 데이트는 확실히 보장된다는 심산이 틀림없었다. 

..............장하다 최산들........ 

"그럼, 나 먼저 간다. 못 바래다줘서 미안하고, 또 보자." 

라며 녀석은 우리 집과는 정반대 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잠시 녀석의 커다란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쳇 바래다주긴 뭘 바래다 줘, 계집애도 아니고 말이지...." 

라고 비 맞은 땡중 마냥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방학식 날 보았던 녀석의 그 부은 표정이, 

고작 그런 연유였다는 것이, 왠지 우습기도 하고, 마이 페이스형 최산들과는 

왠지 매치가 잘 되질 않아, 딱히 웃는 것도 아닌 매우 괴상스런 표정을 

지어야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보충 수업이 시작되기 전 한 번쯤은 녀석의 가게로 

놀러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하지만, 여장군과 같은 녀석의 어머니가 계신 그곳에 놀러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가볼까 하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막상 그 오금이 쩌억 갈라져버릴 듯한 녀석 어머니의 카리스마를 

생각하면 금새 도리질을 치며 침대 위로 주저앉아버리는 나였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다보니, 어느 덧 시간은 흘러 이틀 후면 

보충 수업 시작이었다. 

그 동안 두어 번인가 지난번처럼 동네 놀이터에서 잠깐씩 만나기는 했지만, 

그건 언제나 녀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을 때의 일이었기 때문에 한번쯤은 

내가 먼저 녀석을 찾아가는 것이, 그렇고 그런 사이의 예의가 아닐까 싶어 

착한(!) 나는 여간 녀석에게 미안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여, 나는 드디어 굳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고, 어쩌면 녀석의 어머니가 

배달을 나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녀석의 가게로 향했다. 

저 멀리 주황색 과일 가게 천막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흠!하고 마지막 기합을 넣은 다음 

위풍도 당당하게 녀석의 가게문을 향해 걸어갔다. 

바로 그 때. 

"다녀올게요--" 

라는 낯익은 음성이 길가로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예상대로 그 음성의 

주인공이 주황색 천막 아래로 불쑥 튀어나왔다. 

"어..." 

나오자마자 자전거를 향해 걸어가던 녀석은, 

자전거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자 

마치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외마디 탄사(?)를 내뱉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 

"...아..안녕.." 

나는 걷힐 줄 모르는 녀석의 벙찐 시선을 슬쩍 비켜 

애꿎은 자전거 페달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인사를 했다. 

아....민망하다... 

"과일 사러왔어?" 

녀석이 물었다. 과연, 과일 가게 아들내미.....!! 

"어..? 아,아니....그냥...그게....어...그러니까....." 

"설마, 나 보러 온 거야?" 

"................" 

"아닌가...? 독서실 가던 길이었나?" 

내가 대답이 없자, 녀석은 곧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조금 전 보다는 덜 황당한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바보 같은 놈. 독서실 가는데 딸랑 몸만 가는 놈도 있냐?!(....있나?) 

"....아니...노..놀러왔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자, 녀석은 처음엔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가 곧 씨익-웃으며 힘차게 자전거를 

들어 방향을 틀었다. 

"타." 

"......어?" 

"타라고. 나 지금 아버지 가게 가는 길이거든. 같이 가자." 

나는 갑작스러운 녀석의 제안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훌쩍 자전거 위로 올라타는 녀석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빨리 타. 안 그러면 우리 집 마귀 할멈 쫓아 나온다." 

녀석은 내가 제 어머니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지라, 

나른한 표정으로 실실 웃어가며 놀리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무서운 것만은 어쩔 수 없어 

속으로 헉-하고 신음을 내지르며 자전거 뒷자리로 얼른 올라탔다. 

녀석이 힘차게 페달을 밟기 시작하자, 조용히 부유하던 아침 공기가 

선선한 바람이 되어 녀석과 나를 차례로 스치고 지나갔다. 

말로만 듣던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크다는 **재래 시장 입구 앞에서 

녀석이 스르르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여기서부터는 걸어 들어가야 해. 사람이 많거든." 

라며 녀석은 내가 먼저 내리기를 기다렸다. 

내가 주춤주춤 자전거에서 내려오는 것을 확인 한 녀석은, 

긴 다리를 가볍게 돌려 폴짝 땅으로 내려서더니 자전거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조금 많이 걸어 들어가야 하니까, 한 눈 팔지 말고 잘 따라와." 

"내..내가 무슨 애냐..." 

나는 못마땅한 듯 작은 소리로 불평을 해가면서도, 

자전거 뒷좌석 끝을 녀석 모르게 슬쩍 움켜잡는 것만은 절대 잊지 않았다. 

시장 안은 그 입구와는 비교 할 수 없이 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누가 파는 사람이고 누가 사는 사람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혼잡하고 시끄러웠다. 여기저기서 '깎아줘요'와 

'이것도 밑지는 장사라니까'라는 필사적인 흥정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시장을 가면 삶이 보인다, 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거 다 거짓말이다. 보이긴 뭐가 보이냔 말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내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이제 슬슬 까슬까슬 털이 솟기 시작한 최산들이의 

훤한 뒤통수 밖에 없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녀석의 자전거만 열심히 따라 걷고 있으려니, 

녀석이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정신 없지?" 

참 빨리도 물어본다. 

"으응....사람이 정말 많다..." 

"음, 주말엔 더 심하지. 그래도 매일 오다보면 이곳도 재밌어지더라고." 

"...매일 와?" 

"음, 방학 때는 거의 매일." 

"왜?" 

"아버지가 여기서 도매상을 하시거든. 떨어진 물건이 있으면 그거 받으러 와." 

오늘은 어떤 과일이 모자르길래 받으러 왔냐고 묻고 싶었지만, 

때맞춰 멈춰선 녀석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여기야." 

녀석의 말에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틀어 녀석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과일 상자로 가득찬 아주 큰 가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해찬산들 청과물 도매상] 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녀석은......부자집 아들인 것 같았다..... 

"들어가자." 

자전거를 안전하게 세운 녀석이 나를 재촉하며 앞서 걸었다. 

나는 여전히 얼빵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녀석을 따라 걸었다. 

"어, 왔구나 아들." 

따로 문도 없이 시원하게 트인 가게 입구를 들어서자, 

가게 한 가운데 앉아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던 한 남자가 

녀석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내용상으로 볼 때, 그 분이 

녀석의 아버지인 듯 했다. 

"친구도 같이 왔어." 

녀석이 뻘쭘하게 서 있는 나를 돌아보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녀석 뒤로 붙어 서며 녀석의 아버지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적당히 굽혔던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들자, 녀석의 아버지는 눈가 주위로 

여러 개의 주름을 만들어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어서 오너라. 헌데, 이름이 뭐냐?" 

"김주영이요." 

"음, 그래. 자, 여기 앉아라. 먹을 거라곤 과일 밖에 없으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저 녀석한테 말해서 실컷 먹고 가라." 

"아.....예에..." 

친히 선풍기 앞의 의자를 탈탈 털어 내 앞으로 밀어주시는 그 분을 보며, 

달라도 너무 다른 녀석의 어머니와 이 분이, 과연 한 이불 덮고 자는 부부가 

맞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최산들, 이왕이면 카리스마짱 어머니보다는 

사근사근 아버지를 닮지 그랬냐...... 

"아버지, 이거 먹어도 되는거야?" 

언제 사라졌는지 어느 새 가게 구석에 서 있던 녀석이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녀석이 들어 보인 빨간 바구니 안으로 포도 몇 송이가 담겨있었다. 

허락 따위는 애초부터 받을 생각이 없었는지, 녀석의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시기도 전에 그 바구니를 들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먹자." 

라더니, 녀석은 그 큰 손으로 포도알 서너 개를 한번에 

잡아뜯어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우물우물 포도알을 씹고 있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녀석 뒤로 또 다른 포도송이를 

들고 계신 녀석의 아버지가 보였다. 

"모처럼 친구가 왔는데 재고가 다 뭐냐. 그건 너 다 먹고, 

주영이는 이거 먹어라. 깨끗하게 씻었으니까 껍질까지 

다 먹어도 끄떡 없을거다. 하하." 

나는 변변한 인사도 못 한 채 어정쩡하게 고개만 숙이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산들이 녀석은 [그거나 저거나 포도는 다 똑같지 뭐]라는 

표정으로 포도 알들을 후두둑 뜯어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맛있지?" 

내가 포도 하나를 입안으로 밀어 넣자, 

녀석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으응...달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렇게 답하자, 녀석은 뭔가 꽤나 자랑스러운 듯 

씨익-웃으며 우물우물 씹던 포도 껍질을 툭 뱉어냈다. 

"예전에 우리가 하던 과수원에서 가져오는 과일들이야. 

어렸을 때는 시골에서 살았었거든. 진짜 좋았는데." 

녀석은 그 느릿한 말투 와중에도 [진짜]라는 부분에 약간의 

악센트를 주며 그렇게 말했다. 하긴, [곰과 도시] 보다는, [곰과 시골]이 

더 그럴 듯 하긴 하다.... 

"산들아, 뭐뭐 필요하냐?!" 

"포도 네 상자, 복숭아 두 상자!" 

가게 밖에서 몇몇 손님들과 흥정하던 녀석의 아버지가 

큰 소리로 녀석을 향해 묻자, 녀석이 힐끗 돌아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도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거야." 

녀석은 확신하듯 그렇게 말했다. 언제나 제 멋대로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는 것이 녀석의 특기였으므로 나는 달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포도만 열심히 먹었다. 

"산들아, 물건 자전거 뒤에 묶어놨다." 

그렇게 말씀하신 녀석의 아버지는 소형 트럭이 가게 앞에서 

서는 것을 보자 손님을 맞기 위해 다시 가게 밖으로 나가셨다. 

녀석이 문득 집어들던 포도알을 우두두 바구니 안으로 떨어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아, 젠장....깜빡했네." 

"......어? 뭘..?" 

"자전거 말이야. 자리가 모자를 거라는 걸 생각 못했어." 

헉, 그러고 보니 그렇네. 

자전거를 타고도 꽤 먼 거리를 왔던 것 같은데, 

설마.....저만 딸랑 타고 가 버리는 건 아니겠지....? 

"할 수 없지 뭐. 같이 걸어가자." 

나는 녀석의 그 말이, 마치 [같이 죽자]로 들리는 듯 했다. 

서서히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열 덩어리 태양이 가게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을 일그러지게 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알까지 더워지는 판에, 

직접 저 길로 나가서 족히 30분은 될 거리를 걷자고? 

진심이야, 최산들? 응? 진심이냐고!! 

"자, 가자." 

.............그래, 진심이구나........ 

"갈게, 아버지." 

소형 트럭 뒤로 여러 종류의 과일 박스들을 옮겨 싣던 녀석의 아버지가 

송글송글 땀 맺힌 이마를 쓰윽 닦으시며 우리를 돌아보셨다. 

"벌써 가냐?" 

"가야지, 지금도 꽤 늦었는걸." 

"그래, 조심해서 가고 이따 보자." 

말씀을 마치신 녀석의 아버지는 허리께에 차고 있던 묵직해 보이는 

돈가방을 열어 푸른 색 지폐 한 장을 꺼내셨다. 

그리고는 그것을 뜻밖에도 내 쪽으로 내미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더운데 택시 타고 가거라. 남는 돈으로 하드도 사먹고." 

택시....!! 살았다..... 

"가..감사합니다..." 

"그래, 또 놀러 오너라, 주영아." 

"예, 안녕히 계세요..." 

라고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한숨처럼 새어 나오는 그 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자랐으면...딱 저만 했겠구만..." 

"......예...?" 

나는 반쯤 돌아선 몸을 틀어 녀석의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분은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하는 표정으로 되려 

내게 [음? 뭘?]이라고 물으셨다. 너무나 태연한 그 분의 반응에 

나는 내가 헛것을 들었으려니 하며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것은 녀석이었다. 과일 박스를 나누어 들고 시장 입구를 

다 빠져 나오도록 녀석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 알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자꾸만 미끄러지는 

포도 두 상자를 서너 번쯤 고쳐 안았다. 

그리고 보충 수업이 시작되었다. 

말할 수 없는 절망감에 흐느적거리며 교복을 꿰어 입고 현관을 

나서는 내 등뒤로, 우리 어머니는 [아휴, 속이 다 시원하네]라는 

표정으로 손을 흔드셨다. 서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그 설움을 가끔씩 소리나게 웃으며 들어주는 녀석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녀석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소제를 

제공하신 어머니께 감사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함께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하면서, 

나는 점차 녀석에게 어느 정도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가끔씩은 나도 모르게 녀석의 그 탄탄한 팔뚝을 툭툭 쳐가며 웃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정작 당하는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저질러 버린 내가 더 

당황해 하며 주인을 배신한 내 오른손을 서둘러 거둬 냈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처음의 취지(?)와는 다르게 연인이라기 보다는 

친구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 법한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가끔씩은 녀석의 진지한 뽀뽀타령이 삑사리를 내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그것은 자의보다는 타의가 더 컸던 

내 정체성 변화에 대한, 녀석의 죄책감 섞인 배려 덕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뭐 그런 류의 긍정적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대로일 수만은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덫에 빠져 버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던 그 일은, 

우리를 진정한(?) 연인으로 승격시켜 준 기폭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있어서 최초의 (그 후로는 부지기수인) 

사랑싸움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옛날 일이라고 참 속 편하게 

말한다 싶기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건 녀석과 나의 

첫 [사랑싸움]이었음이 틀림없다. 

그 날은 아침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대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저 골목 끝 콩알 모양으로 보여야 할 

녀석과 녀석의 자전거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새 낯익은 풍경이 되어버린 자전거 옆의 커다란 녀석의 모습이, 

마치 지우개로 싹싹 지워버린 듯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마 늦잠을 잔 모양이지, 라고 생각하며 잠시 그 자리를 

배회하며 녀석을 기다렸지만, 십 여분이 지나도록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기다렸다가는 지각을 할 것이 

뻔했으므로, 아무래도 무슨 사정이 있어 못나오는 것이겠거니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모르니 녀석의 가게로 

가볼까도 싶었지만, 기다리느라 버린 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때맞춰 달려오는 28번 버스를 타기 위해 열심히 달려야 했다. 

꼴랑 선풍기 두 대로 말복 더위를 이겨내며 열심히 공부...가 아니라, 

열심히 수면을 취한 나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부리나케 학교를 빠져 나왔다. 

책상 위로 죽은 듯이 엎드려 잘 때만 해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오늘 아침 일이 

문득 생각나,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망설임 없이 녀석의 가게로 향했다. 

그러나, 가게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항상 천막 아래로 진열되어 있던 

과일들은 자취 없이 사라져 버렸고 문을 걸어 잠근 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군데군데 녹이 슨 셔터까지 틈새 하나 없이 내려져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 동네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긴 했지만, 

나는 한 번도 과일 가게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임시 휴업]이라는 종이 쪽지 하나 없이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다니.....나는 마치 동네 주민 대표라도 되는 것처럼, 

묘한 배신감에 기분이 나빠졌다. 알고 있다. 나는 닫힌 문에게 

기분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었던 그 녀석에게 화가 났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렇게 대상도 없이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자초지종이라도 알아야 화를 내던가 말던가 할 것 아닌가. 

그 때, 몇 번인가 오다가다 얼굴만 익힌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옆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는 매우 난감한 얼굴로,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오늘은 문 안 여는 날이지 참...." 

이라고 중얼거리시며 다시 발길을 돌리시는 것이었다. 

정말 이상했다. 마치 오늘은 당연히 문을 열지 않는 날이라는 듯 

쉽게 납득하고 돌아서는 그 아주머니가 내 눈엔 정말 이상하게 보였다. 

하다 못해, [웬일이래]라는 짧은 의문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나는 답지 않게 끓어오르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얼마 멀지 않은 거리의 

그 아주머니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 잡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요?" 

갑작스런 내 질문에 아주머니는 잠시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시더니, 

이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저 과일 가게 말이니? 이사 온지 얼마 안된 모양이네. 

이 동네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 알고 있는데...." 

더욱 궁금해진 나를 애태워 죽이실 작정인지, 아주머니는 잠시 고민하듯 

입을 삐죽거리더니 이내 매우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이 바로 저 집 아들내미 기일이거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잠드신 어머니를 힐끗 돌아본 뒤,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얇은 교복천이 땀에 젖어 맨 살 위로 

달라붙었다. 문득, 참을 수 없이 덥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축축한 교복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책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책꽂이 너머로 손을 뻗어 창문을 활짝 열어 제꼈다. 

느슨한 바람이 소리 없이 책꽂이를 타고 들어온다. 

천천히 땀이 식는다.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에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주머니는 일단 화두가 던져지자, 마치 물 만난 개구리처럼 

신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녀석의 가족을 동정하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는 바람에 말은 겉잡을 수 없이 많았지만, 

결국 결론은 간단하게 끝이 났다. 

과일 가게 아들내미가 어려서 죽었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의 아들내미란 버젓이 걸어다니는 최산들이가 아닌, 

바로 녀석의 쌍둥이 형이라는 것. 

그게 전부였다. 아, 한가지 더 있긴 했다. 

녀석의 가족이 해마다 오늘이 되면, 여읜 아들의 기일을 

챙기기 위해 늘 어딘가를 다녀온다는 것, 그것이었다. 

나는 책꽂이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 다리 건너 

듣게 된 녀석의 이야기가,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여유로워 

보이는 녀석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섣불리 가슴 아파할 수조차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렴풋한 한기에 눈을 떠보니, 

등 뒤 창문 밖에는 이미 어슴푸레 저녁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한 여름 저녁 바람도 제법 서늘하여, 티 하나 걸치지 않고 잠들어 

버린 윗몸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어머니가 보셨으면 한 이틀 치 

잔소리 분량은 족히 되었을 짓거리였다. 

나는 서둘러 책상을 내려 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왔다. 

어머니는 어디를 가셨는지 주방에도 계시지 않았고, 

아버지와 누나는 아직 귀가 전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갈까, 말까, 갈까, 말까....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가고 보자!! 

.....라고 힘찬 기합과 함께 출발했건만, 막상 불빛이 흘러나오는 

녀석의 가게가 눈에 들어오자 걸음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버렸다. 

막상 녀석을 만난다 해도 무슨 말을 어떤 표정으로 해야 하는 건지, 

그제서야 그 중요한 문제가 심각하게 와 닿는 것이었다. 

빵빵---! 

멍하니 길 한가운데 서서 몇 보 떨어진 과일 가게만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뒤쪽에서 요란한 클랙션 소리가 등 짝을 후려치듯 날아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가로 물러섰다. 

그러자 동네 어딘가의 공사장을 드나드는 커다란 자제 트럭이 좁다란 

길을 아슬아슬 빠져나갔다. 트럭이 뿜어낸 케케한 매연이 후덥지근한 

공기 속으로 섞여 들어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콜록거리며 눈앞으로 아른거리는 먼지들을 향해 훠이훠이 손을 저어내자 

흩어지는 그것들 사이로 누군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좁은 길가 건너편, 조금 떨어진 거리의 가게 문 앞에 가만히 선 채 

나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녀석의 어머니였다. 

나는 허우적거리던 두 팔을 황급히 접고,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아주머니의 등이 가게 문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민망해진 나는 애꿎은 뒤통수만 긁적이다가, 아무래도 그냥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급한 김에 끌고 나온 

슬리퍼 안의 모래를 탈탈 털어 내며 슬그머니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마치 내 어깨를 잡아채 듯 들려오는 녀석의 목소리 때문에 

나는 돌아서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야했다. 

멈춰선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 녀석은, 

조금 전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불렀던 것과는 달리, 

매우 나른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녀석은 자신이 맞았음을 확신한 표정으로 

뜬금 없이 내 팔목을 잡아끌며 녀석의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그냥...놀이터로 가자..." 

나는 조금 전에 본 녀석 어머니의 썰렁한 표정을 떠올리며 

약간 주눅이 든 얼굴로 녀석에게 잡힌 팔목을 슬쩍 빼냈다. 

"우리 엄마가 데리고 들어오라고 했어. 걱정하지 마." 

녀석은 내 속을 훤히 꿰뚫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 

쉽게 화제를 돌려버렸다. 

"줄 게 있어. 내 방으로 가자." 

"뭔데...?" 

"가보면 알아." 

라며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녀석이 신고 있던 운동화 주위로 묻어있는 흙먼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녀석 뒤를 조용히 따라 걸었다. 

"친구 왔어." 

저녁 장사라도 하실 모양인지, 녀석의 어머니는 분주한 몸짓으로 

과일 박스들을 정리하고 계셨다. 고개를 숙여 두 번째 인사를 드리자, 

녀석의 어머니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인사를 아그작 씹어버리셨다. 

대신, 내 앞에 기둥처럼 서 있는 녀석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달 들어오면 재깍 튀어나와." 

"알았어." 

녀석은 고분고분하지는 않지만, 당연한 일이라는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나를 데리고 녀석의 그 커다란 창문이 달려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녀석의 방은 여전했다. 그 때 이후로 한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던 녀석의 방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썰렁했다. 눈부신 태양 대신,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들이 하나 둘 기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도 여전했다. 

녀석이 방문 근처에 붙어있던 스위치를 누르자, 기어 들어왔던 불빛들이 

도망치 듯 창 밖으로 사라졌다. 환해진 방 안 한 가운데 멀거니 서서 

커다란 창문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내게, 녀석이 뭔가를 불쑥 들이밀었다. 

"자, 받아." 

녀석의 손에는 까맣고 커다란 봉지가 들려있었다. 

무엇인가가 그 봉지 안에 한가득 담겨 있었다. 

줄 게 있다더니, 아무래도 그 봉지인 모양이었다.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자, 녀석이 뭔가 

조금은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방울토마토야. 오늘 직접 따온 거라서 맛이 아주 좋아." 

녀석은 내 손에 들려있던 봉지 사이로 손을 넣어 

확인이라도 시키듯 작고 빨간 방울토마토 서너 개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는 그 중 하나를 집어 꼭지만 남기고 입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맛있다." 

녀석은 표정 없는 얼굴로 매우 간단명료한 감상을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하나를 집어들어 초록색 꼭지를 똑 따내더니, 

내 쪽을 향해 그것을 내밀었다. 

"먹어 봐. 무공해야." 

나는 잠시 그 빨간 방울토마토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선뜻 받아들지 않는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녀석은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약간 틀어 보였다. 

"왜?" 

녀석이 들이밀었던 손을 거두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녀석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스르르 떨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그냥...아무것도 아니야." 

그러자 녀석은 그제야 뭔가 알겠다는 듯 낮게 탄성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 그래. 아침 일 때문에 그러는구나. 미안해. 사정이 있었어." 

나는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녀석이 나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넌 알 것 없으니, 이쯤해서 

빠져달라는 듯한 느낌. 태어나서 그토록 더러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묵직한 봉지를 들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주영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녀석이 고개를 숙여 

한껏 아래로 깔린 내 시선을 찾으려 애를 썼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되도록 침착하게, 

작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친구 사이라도 이렇지는 않을꺼야....." 

앞뒤가 빠져버린 내 중얼거림에 녀석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예의 그 나른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낮게 신음을 흘리며 

핀트가 나가도 한참을 나간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흐음...화가 많이 났나보네. 혹시, 지각했어?"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나는 들고 있던 봉지를 방바닥 위로 내 팽개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빨갛고 작은 방울토마토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방바닥 여기저기로 굴러갔다. 

녀석은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그것들을 내려다보더니, 

뭐라 한마디 대꾸도 없이 바닥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굴러나간 방울토마토들을 묵묵히 주워 모아 

구겨진 봉지 안으로 다시 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녀석이 하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으니. 

"귀한 거야. 100 퍼센트 무공해산이거든. 

보통 정성으로 키운 게 아니라는 말이지."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왜 화를 내는지 따위는 이제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녀석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로 방바닥을 훑고 다녔다. 

그리고, 바닥을 굴러다니던 방울토마토가 하나도 빠짐없이 봉지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펴 올리며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 우리 과수원에서 재배한 거야. 

형 산소 근처로 난 모퉁이 땅을 빌려, 우리 엄마가 직접 씨를 뿌렸지. 

.............형 얘기는, 이미 알고 있겠지?"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표정은, 어딘가 지루해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지겹다]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조금 전 방방 뜨며 난리를 치던 나 자신이 심히 우스워 보일 정도로 말이다. 

"이 동네 아줌마들, 우리 집 없었으면 심심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새로 이사오는 사람들도 한 두 달 후면 다들 알게 되더군. 

아줌마들, 질릴 줄도 몰라." 

녀석은 애꿎은 오른쪽 귓불 밑을 긁적이며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는 들고있던 까만 봉지를 바닥 위로 내려놓고, 곧 그 앞으로 

철푸덕 주저앉았다. 피곤한 듯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까칠한 얼굴을 들어올려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게 전부 일거야. 

이란성 쌍둥이형이 있었고, 어려서 병으로 죽었어. 

만성신부전증이라는 병이었지. 살려보려고 과수원까지 팔아 치료라는 

치료는 다 받아봤지만, 실망스럽게도 너무 쉽게 죽어버리더군. 

.......이게 끝이야. 미안하게도 더 이상은 해 줄 얘기가 없어." 

녀석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너도 어차피 동네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 

자, 이제 너도 네 가족에게 이야기하러 가야지? 

라며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아, 나는 허둥지둥 녀석을 향해 

자기변호를 하기 시작했다. 

"우..웃기고 있어 정말...나,나는 그 얘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니야...! 

나는....그러니까...나는....네 얘기....네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런 걸 알고 싶었어.....네 형이 아니라....너...바로 너 말이야, 최산들...." 

자꾸만 말이 끊겨 나갔다. 더듬고 싶지 않았지만, 

겉잡을 수 없이 차 오르는 호흡과 뜨거워지는 목덜미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 의도는 분명 다른 것이었는데, 

잘려 나가는 말들이 왠지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그저 답답하고 서러울 따름이었다. 

"주영아." 

녀석이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아무런 대답 없이 땀 차인 주먹을 꼭 쥐고 섰는 내게, 

녀석은 피곤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벌써 7년이 지난 일이야. 아직도 슬프다면, 그건 사치야. 

새삼스럽게 들춰내는 것도 우습고 말이야." 

뜻밖에도 녀석은 내 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감정이 궁금했다. 동갑내기의 형을 잃고 어떠한 생각을 하며 

7년을 살았는지, 내게 보이는 그 여유로움이 혹시라도 거짓은 아니었는지, 

보이는 모습만이 녀석의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내 건방진 추측은, 

결국 녀석에게 있어서는 섣부른 감정 침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그렇구나....공연히 설쳐대서...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나니, 정말 미안한 것도 같았다. 

그렇지 않은가. 정작 괜찮다고 하는 사람에게, 

남이 [너 아퍼. 너 분명히 아퍼.]라고 우기는 것만큼 

우습고 황당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 말이 아니라, 나는..." 

"알았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됐어....그만 갈게." 

나는 서둘러 녀석의 말을 자른 후, 빠른 걸음으로 방문을 향했다. 

그러자 녀석은 엉거주춤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나를 붙잡기 위해 

황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충분히 손이 닿을 거리에 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녀석은 나를 잡지 않았다. 뻗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다시 바닥 위로 

주저앉은 녀석은, 나를 향하던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오늘은 그만 가라. 나중에 보자." 

나는 잠시 그대로 서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새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있었다. 

민둥산 같던 머리통이 잘 깔린 잔디밭처럼 보기 좋았다. 

어쩌면 이제 저 머리카락이 나로 인해 잘려질 일은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무 말 없이 녀석의 방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그 부근 어딘가가 굉장히 가려운 것 같기도 하고,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하여, 

가슴께 이곳 저곳을 긁어보기도 하고 꼬집어보기도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가렵고 따끔거리는 부위가 더욱 넓어지는 것 같아 

더욱 불쾌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밤 새 오른 고열로 인해, 

학교는커녕 우리 집 거실조차도 걸어나가지 못할 만큼, 

지독한 감기 몸살에 걸려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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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몹시 추웠던 어느 겨울 저녁, 나는 습기 찬 베란다 유리창에 

코를 박고 서 있었다. 몇 시간 전, 츄리닝 차림으로 뛰어나가신 

아버지는 들어오실 줄 몰랐고, 어머니는 죽은 듯 엎드려있는 전화기만 

연신 노려보시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계셨다. 

그리고 우리 누나. 

그 날, 누나는.......가출 중이었다. 

누나가 집에 없다는 것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어머니였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누나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곳 끝나는 시간이 늘 일정치 않아, 누나의 귀가 시간도 늘 엉망이었다. 

그래서 그 날도 조금 늦어지나보다, 모두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어머니만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날이 저물었을 때쯤엔, 어머니마저도 누나의 귀가에 

대해 까맣게 잊고 계셨고, 저녁 식사시간, 비어있는 누나의 자리를 

보고서야 모두들 경악을 하며 누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영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황량한 아파트 단지 내를 떠도는 소리가 들리는 듯 싶더니, 

곧 경비 아저씨 목소리가 실내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왔다. 

[아아...에....어린 아이를 찾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인데... 

에....단발 머리에...분홍색 코트를 입었다는데요...에....또...아주...예쁘다는군...요...] 

지금도 생각하는 것이, 그 날 아버지의 그토록 주관적인-아주 예쁘다는-신상 정보만 

아니었더라도 누나를 좀 더 쉽게 찾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몰래, 아주 

몰래 하곤 한다. 

여튼, 결국 밤 10시 정도가 다 되어서야 아버지가 들어오셨고, 

그 뒤로 축 늘어진 어깨를 한 누나가 울먹거리며 따라 들어왔다. 

아침에 입고 나갔다던 분홍색 코트는 때가 탈대로 타있었고, 

머리는 부스스, 얼굴은 꼬질꼬질, 눈을 씻고 봐도, 

그 <아주 예쁜> 누나는 통 뵈질 않았다. 

당시 가출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 상, 나는 누나가 매를 맞을 것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뭐라 말씀도 못하시고 현관문에 붙어 섰던 누나를 휙-잡아끌고 들어오시는 

어머니의 표정이, 며칠 전 내가 어머니의 향수를 화분에 모조리 쏟아 부었을 때의 

표정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얼얼한 볼기짝을 더듬거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찍 소리 못하고 매를 맞을 거라 생각했던 누나의 볼기짝 운명은, 

울먹이는 누나의 단 한마디로 그 길을 달리했다. 

[나도 닭다리 좋아한단 말야----! 으아앙----] 

홍두깨로 봉창을 뚫어도 유분수지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표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설마....그거??]하는 조금전 보다 훨씬 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닭다리라는 누나의 말에, 나는 그 전날 저녁을 떠올렸다. 

어쩐 일인지 밥맛이 없다며 저녁을 거르신 아버지는 치킨이 드시고 싶으신지, 

밤늦게 양념 치킨 한 마리를 배달 시키셨다. 우리 남매가 잠옷 바람으로 

거실바닥을 구르며 환호성을 질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기뻐하던 누나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가기 시작하던 것은 바로, 

배달 된 양념 통닭의 다리 두 개가 나란히 아버지와 내 몫이 되는 순간이었다. 

누나는 웬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퍽퍽한 가슴살 두어 조각을 뜯더니, 

역시나 입을 꾹 다물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날, 그 양념 통닭이 그렇게 맛있지만 않았더라도, 

우리들 중 누구라도 한 명쯤은 누나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통닭은 너무 맛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론이며, 어머니와 아버지조차도 

누나의 그 남모를 설움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더욱 더 서러워진 나의 어린 누나는, 다음 날 아침, 

등교 겸 가출을 시행해 버린 것이다. 

누나는 아기였을 때부터 유난히 질투심이 많았었다고 한다. 

두 살 터울로 태어난 내가, 장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관심을 

한 몸에 받기 시작하자, 어렸을 때부터 한 성깔하던 누나는, 

말이 서툴렀을 때는 틈만 나면 작은 내 몸에 주먹을 휘둘렀고, 

말이 트이기 시작했을 때는, 온갖 술수를 동원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댔다고 한다. 예를 들면, 말은커녕 기지도 못하는 내가 자기더러 

[하영이, 바보]라고 놀렸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누나에게 되돌아가는 것은 온갖 꾸중과 

볼기짝 맴매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더욱더 누나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져야 할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조금 더 자라 같은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누나는 내가 미워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고, 틈만 보이면 

어떻게 하면 이 얄미운 자식을 없애버릴까 하는 고민으로, 

매우 우.중.충.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가 누군가에게 쥐어뜯기는 순간조차도, 

동생인 내가 아니라, 뉘집 자식인지도 모를 상대 녀석 편을 들던 누나였다. 

누나는 늘 나를 괴롭히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언제나 당하고 채이는 입장이었던 나는 결코 불행하다거나 

서럽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 내게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내 대신 누나를 혼내줄 사람이 있었고, 언제든 숨을 수 있는 

어머니의 치마폭이 있었다. 하지만 누나는 아니었다. 가해자였던 누나는, 

언제나 고독했고 서러웠다. 누구도 누나 편을 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누나는 [누나]였다. 부모님이 생각하시는 누나라는 이름은, 

늘 동생을 위해 참고 양보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누나의 행동은 언제나 부모님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고, 

쏟아지는 꾸중 속에서 누나는 그 작은 가슴 안에 질투심대신, 

딴에는 꽤 심각한 서러움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쌓이던 서러움이 그 부피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일명 [통닭 사건]이라 불리는 닭다리 두 개의 

불공평한 분배였던 것이다. 

[나도 닭다리 좋아해---]라는 누나의 절규 이후, 

어머니와 아버지는 확실히 달라지셨다. 그렇다고 티가 나도록 

누나를 편애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최후의, 혹은 

최선의 선택은, 두 명의 '나'가 아닌, 두 명의 '누나'였다. 

둘 중 어느 하나에게 의도하지 않은 설움을 주느니, 

차라리 둘 다 서럽게 키우자, 는 깊디깊으신 부모님 마음. 

다시 말하자면, 그 날 이후, 누나나 나나 서럽게 자라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가출 소동까지 벌였는데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대해 누나는 누나대로 억울해 했고, 

나는 나대로 한순간에 전락해 버린 내 삶의 질(?)로 인해 

한동안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야 했다. 

녀석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그 시절의 누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절대 녀석의 아픔이 철없던 누나의 어리광과는 비교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누나의 감정을 통해, 쉽게 잡히지 않는 녀석의 아픔을 

내게로 전이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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