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가게 아들내미 -4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기가 무섭게 역시나 오늘도 어머니는
내게 독서실 타령을 시작하셨다. 나는 갑자기 배가 아프고 싶었다.
"엄마, 나 배탈났나 봐, 배가 너무 아퍼."
배가 아프고 싶다고 생각하니, 정말 아픈 것도 같았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배를 움켜잡자,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급체를 한 모양이라고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신 어머니는
체한 데는 피를 봐야 최고라며 실과 바늘을 가지고 나오셨다.
결국 나는 양쪽 엄지손톱 위로 새빨간 피를 방울방울 맺히고 난 후에야,
겨우 독서실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사실 그 날 나는 딱히 독서실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최산들이가 나를 찾지 못할 곳이라면 독서실이 아니라, 독서실 할아버지라도 좋았다.
하지만 그곳을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우리 동네 단 하나뿐인,
곰이 살고 있는 과일 가게 말이다.
물론 그때쯤이면 녀석은 한창 시합 중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나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마음이 편하다가도,
막상 길을 나서면 여기저기서 '너 왜 그랬어!'라며 뭔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
대문은커녕 방문조차도 쉽게 열 수 없었다. 여전히 잘못은 제 멋대로 약속을 정해버린
녀석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상할 정도로 초조하고 예민해져 있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커다란 창문 앞 햇살을 등지고 내려다보던 녀석의 두 눈이었다.
방에 틀어박혀 책상에 앉았으나, 공부가 될 리는 만무했다. 따끔거리는 엄지손톱을
후후 불고 앉아 문득 책상을 내려다보았을 때, 책이 거꾸로 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누가 볼까 무서워 얼른 그것을 바로 잡아 놓았다. 바로 잡아 놓고 보니, 그것이
체육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쪽지 시험조차 보지 않는 과목을 공부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지,
연신 바보같은 짓거리만 해대는 스스로가 기가 막혀 체육 책을 덮어 들고 그것으로
머리를 몇 대 후려쳤다. 젠장, 하필이면 모서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아프다.....
다시 침대 위로 누워 버렸다.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만 말짱했지만, 일단 등을 붙이고
누우니 마음도 함께 누운 듯 편안해 졌다. 격자 무늬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누나와 어머니의 전투가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의 기집애야 머리 감고 머리카락은
휴지통에 넣으라고 했잖아, 징그러워 죽겠네 정말! 지금 치우러 가려고 했단 말이야, 그냥
냅두면 되잖아~
.......등등, 심란한 한 사춘기 소년의 마음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저들의 일상사가 우습게 보이
기까지 하다니,
왠지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은 우쭐함에 피식 웃어 버렸다.
뭔가 익숙한 음식 냄새에 눈을 떠보니, 창 밖으로 잔뜩 찌푸린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시침이 아직 오후 4시에 채 닿지도 않았는데 바깥이 어두웠다. 비가 오려나보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어났냐?"
들어서자마자 식탁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힐끔 나를 올려다보셨다.
아버지는 라면을 드시고 계셨다. 나를 깨운 냄새의 정체는 바로 라면이었다.
"배고프면 젓가락 들고 와라. 같이 먹자."
아버지는 배가 꽤 고프셨는지 고개도 들지 않고 후루룩거리며 내게 말씀하셨다.
그다지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뺏어먹는 라면 맛이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나는 얼른 젓가락 한 벌을 들고 아버지 앞으로 앉았다. 아버지는 라면 냄비를 내 쪽으로
조금 밀어주시고는 냄비 뚜껑에 듬뿍 면발을 담아 가셨다.
"엄마랑 누나는?"
나는 면발을 씹으며 아버지께 물었다. 어째 둘 다 안 보인다.
전투가 끝나고 둘이 화해의 마당(백화점)으로 향했는지, 집 안이 조용하다.
"하영이는 낮잠 자고 있고, 니네 엄마는 니 뒤에 있다."
젓가락으로 내 뒤를 가리키시며 대답하시는 아버지를 잠시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자, 어딘가 험악해 보이는 표정의 어머니가 서 계셨다.
"아니, 끼니 때 다 되가지고 라면은 왜 먹고 그래요?"
아, 다행이다. 표적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당신이 잠만 자니까 그렇지. 끄어어억.....아, 배부르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잔소리에는 아랑곳없이 요란한 트림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내려 놓으셨다. 난 겨우 면발 서너 줄 먹었는데 냄비는 벌써 물고기
없는 한강이다. 너무 늦었다. 크흑......
"내가 못살아 정말, 그래놓고 또 반찬이 어떻냐는 둥 투정하려고 그러지...에휴...
그나저나 너!"
헉.....화살이 방향을 틀어 내 쪽으로 날아왔다. 일찌감치 자리를 떴어야 했는데,
그 놈의 라면 국물에 미련이 남아 앉아있었던 내가 죽일 놈이지, 으이구...
"다 먹었어?"
어머니가 물으셨다.
"어, 다 먹었어."
다 먹으나마나, 먹은 것도 없어...!!
"그럼 나가서 두부 좀 사와. 밖에 두부 장수 왔나보더라. 얼른."
어머니는 딸랑거리는 두부 장수 종소리가 사라질까 싶으신지,
급히 천 원짜리를 꺼내 주시며 내 등을 밀어내셨다.
"얼른 가 얼른. 저 아저씨 금방 지나간단 말이야."
나는 내쫓기다시피 하면서 현관을 나왔다. 얼떨결에 대문까지 나오고 나서야
슬리퍼를 거꾸로 꿰어 신었다는 것을 알았다. 제대로 바꿔 신은 후 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침에 보았던 대문 위 하늘은 햇살이 가득했는데, 오후 하늘은
회색 구름으로 가득하다. 습기 가득한 바람으로 보아, 아무래도 한바탕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다.
골목 어귀에 리어커를 세워두고 종을 흔들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나는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두부 한 모를 사들고 다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그거 걸었다고 등이 축축하게 젖어버려 샤워나 해야겠다 생각하며 대문 고리를
잡아 밀려는 찰나, 고리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우유 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일요일인지라 우유는 없었지만, 좁게 조여진 주둥이 위로 둘둘 말린 종이가 들어있었다.
나는 누가 또 전단지를 꽂아놨겠지 싶어 무심코 그것을 빼내었다.
빼내고 보니 작은 글씨들이 틈도 없이 빼곡이 들어찬 [벼룩시장]이라는 무료 광고지였다.
도대체 누가 이딴 걸 집어 넣은거야, 라고 궁시렁거리며 어디다 버릴까 고민하던 나는,
문득 그것이 그냥 [벼룩시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깨알같은 글씨들 위로
한 가득 덮고 있는 커다란 글씨는 분명 매직으로 쓴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 내용으로 보아 편지인 듯 했는데, 애석하게도 그 유치하기 짝이 없는 광고지 편지의
수신인은 나, 김주영이었다.
[김주영. 시간이 없어서 먼저 간다.
12시까지 시합 장소 옆에 있는 피자 가게 앞으로 와라.
올 때까지 기다린다.]
나는 얼른 그것을 구겨 버렸다. 설마 누군가 먼저 이것을 본 건 아니겠지 하며
주위를 둘러봄은 물론이었다. 누가 보기 전에(특히 누나가 보기 전에) 내가 먼저 봐서
다행이지 싶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차라리 못 봤으면 더 좋았을 것을 싶은 것이,
이것도 저것도 다 마땅치 않았다.
"사 왔니?"
"으응..."
거실로 들어서자 멸치 국물 우려내는 냄새가 집안 한 가득이다.
쌀을 씻고 계시던 어머니는 물기 묻는 손으로 두부 봉지를 건네 받으시며
돌아서는 내게 말씀하셨다.
"주영아, 누나 좀 깨워라. 무슨 애가 하루 종일 잠만 자는지 원...."
그 뒤로도 뭔가 더 말씀하셨던 것도 같은데, 내 귀로 그것들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나는 누나를 깨우라는 어머니 말씀에도 불구하고 누나 방문을 그대로 지나 내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꼬깃해진 그 광고지를 다시 펴 보았다.
검은 매직으로 쓰여진 글씨들이 울퉁불퉁 한 것을 보아하니, 아마도 골목
담벼락에 대고 쓴 모양이다. 썩 잘 쓴 글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다.
뭔가 더 쓰려고 했던 모양인지, 검게 칠해서 지워버린 흔적도 있다.
.............그러나 저러나, 12시까지 오라고?
설마 밤 12시는 아닐테고 낮 12시를 말하는 것일텐데, 지금은 4시하고도 20분이다.
이미 늦었다. 물론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는 했지만, 그거야 한 두 시간 늦을 때 얘기지,
설마 네 시간이나 늦었는데 여지껏 기다리는 미련 곰탱이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안 그런가??...........아니......안 그럴 수도 있다. 녀석이라면.....안 그럴 수도 있었다.
녀석은....곰이 아니던가.......!!
"얘, 주영아! 김주영---!"
우렁차게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 목소리에 나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서둘러 들고 있던 광고지를 책상 서랍 속으로 꾸겨 넣은 뒤,
문을 열고 어머니가 계신 주방으로 들어갔다.
"왜 불렀는데...."
설마, 지금까지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누나 목욕한단다, 니가 숟가락 좀 놔라."
하지만 만약 기다리고 있다면....?
"컵이랑 물도 냉장고에서 꺼내 놓고."
아니야, 그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을지도 몰라....
"아참, 아버지 맥주 한 잔 하시게 맥주도 한 병 꺼내고."
하지만 만약 그 정도로 미련하다면....?
그 정도로 나를 좋아하고 있다면.....??
내가 녀석에게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열심히 맞추어 놓은 네 벌의 젓가락을 식탁 위로 아무렇게나 뿌려 버렸다.
차장창 하는 요란한 소리에 어머니가 돌아보셨지만, 나는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겁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 돌아버렸는지, 나는 단 한마디만 남긴 채,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갔다.
"엄마, 내 밥은 푸지 마---!!"
열심히 뛰었다. 걷기만 해도 땀이 물처럼 떨어지는 그 무더운 날씨에,
나는 정말 미친 듯이 뛰었다. 집에서 입고 있던 그대로 츄리닝과 하얀 면 티 차림으로
튀어나온 덕분에, 나는 마치 운동회 날 상품에 목숨 걸고 뛰는, 욕심 많은 아이 같았다.
녀석이 기다린다는 그 피자 가게에 도착할 때까지,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딱
두 번 쉬었다. 한 번은 아무렇게나 구겨 신고 나온 운동화 한 짝이 벗겨지는 바람에 쉬었고,
또 한 번은 빨간 신호등에 걸리는 바람에 쉬었다. 헥헥 거리며 파란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
리고 있는데,
뭔가가 툭하고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빗방울이구나, 하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후두두둑 연달아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우산이 있을 리가 없었던 나는, 내리는 비를 그대로 뒤집어쓰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몸은 젖을 대로 젖어 있었기 때문에, 땀에 젖으나 비에 젖으나 똑같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언뜻 보았던 약도대로 뛰어가자니, 이 길이 저 길
같고 저 길이 이 길 같아 여간 헛갈리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 지고
다리는 점점 풀리고, 그래도 나는 여전히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후에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며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는 최산들이한테 물어보면
대답해 줄 것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땀인지 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물기가 시야를 가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때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녀석이 주었던 그 표에 그려진 그 동네였다. 눈을 몇 번인가 깜빡여
물기를 털어 낸 뒤 여기저기 붙은 간판을 훑어보았다.
찾았다. 지금은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게 길었던 그 시합장의
간판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그리고 곧 그 옆으로 작은 피자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가게 명 [앗싸 피자].
.........그 앞에 녀석이 서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녀석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로 옆 처마가 딸린 건물이 우뚝 솟아 있건만, 녀석은 처마도 없는 그 작은
피자 가게 앞에 선 채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다 맞고 있었다.
가끔씩 면티 위로 걸쳐 입은 체크 무늬 셔츠 자락을 끌어 올려 젖은 얼굴을
닦아 낼 뿐, 그야말로 요지부동의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 피자 가게, 아마 그 날 매상이 적어도 반은 떨어졌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내가 꽤 오랜 시간 녀석을 훔쳐보는 동안에도 녀석은
전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뭔가 넋이 나간 듯한 눈빛으로
멍하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녀석....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내가 후에 물었을 때, 녀석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피자를 사줄까 고민하고 있었어.]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헤치고 녀석이 있는
그 자리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그제야 나를 알아 본 듯 [어...]하며 언제나처럼
싱겁게 인사를 했다. 뭐가 좋은지 씨익-웃어 보이던 녀석은 빗방울이 눈 안으로
들어갔는지 한 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 녀석의 얼굴이 너무 선해 보인다고
느끼는 동시에,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짜증 비슷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많이 젖었다 너."
녀석이 말했다. 언제나 나는 나야, 하는 식의 마이 페이스 최산들은 오늘도 여전하다.
심각하게 굳어버린 얼굴에도 아랑곳없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걱정했다.
나는 말없이 녀석을 바라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속 시원히 해 버리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입은 열릴 생각도 없이 오히려 어금니만 강하게 맞물렸다.
"일단 물기는 털어내고 들어가자. 자, 이걸로 닦아."
라며 녀석이 체크 무늬 남방을 벗어 둘둘 말더니 그것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피자 가게 옆 건물의 처마 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도무지 저 환한 [앗싸 피자] 가게 안으로 들어갈 기분이 아니다.
"어....야, 어디 가."
녀석이 약간은 당황한 듯 나를 부르며 내 뒤를 쫓아왔다.
처마 밑으로 들어간 나를 잠시 밖에서 바라보던 녀석은,
알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따라 들어왔다.
"얼른 닦아, 감기 걸리지 말고."
녀석이 느릿하게 나를 재촉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짜증과, 심술과, 분노가 엉망으로 뒤섞여
내 안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야! 최산들!!"
소리를 질러놓고 정작 놀란 것은 나였다. 녀석에게 소리를 질러본 것도
이것이 처음, 녀석의 이름을 불러 본 것도 이것이 처음.
처음이란 늘 낯설고 놀라운 경험이지만, 일단 하고 나면 두 번째부터는
쉬워지는 법이다. 나는 언제 내가 놀랐냐는 듯,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녀석을 불렀다.
"최산들!!"
녀석은,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 어안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 해! 왜 대답 안 해!!"
"음, 왜."
허억, 그..그렇다고 그렇게 재깍 대답해 버리면 목에 핏대 세운 사람 민망해지잖냐.....씨이..
"대답했잖아, 말 해."
그래, 말 할거야. 말한다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너 같은 건 죽어도 싫다고
말해 버릴꺼야!!
"너, 나한테 이러지 마."
"음? 뭘 이러지 마??"
이게 모르는 척 하면 다야?! 내가 그걸 꼭 입으로 말해야 알겠어? 앙?!
"나한테 잘 해주지 말라고. 나 때문에 학교 지각하지도 말고, 나 때문에 니네 집
과일 축내지도 말고, 나 때문에 이렇게 비 맞지도 말라고!!"
헉헉헉.....생각나는 대로 말은 해 버렸는데, 앞뒤가 제대로 맞았는지나 모르겠다.
"왜?"
녀석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빗물을 쓰윽 닦아내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때 녀석의 그 표정을 보았을 때는 정말 나 거품 물고 기함 하는 줄 알았다.
"왜? 왜냐고? 몰라서 물어! 부담스러워, 부담스럽다고!!"
알아듣겠어? 하는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녀석을 노려보자, 녀석은 그제야 심각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이렇게 말했다.
"부담스러워 할 것 없어. 너 아니어도 나 원래 지각 잘 해. 너한테 갖다 주는 과일도
재고 난 거고, 여름에 비 맞는 것도 원래 좋아해. 원래 잘 하는 짓을 널 위해 하는 것
뿐이야. 그게....그렇게 부담스러워?"
낮고 여유로운 녀석의 음성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1분도 채 안 된 내 말을
모두 틀렸다고 하고 싶을 정도로 상당히 강한 설득력을 가진 음성.
그 음성에 야코가 죽을대로 죽어버렸지만, 나는 이대로 물러 설 수 없다는 생각에
최후의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부담스러워. 왜 하필이면 날 위해서야! 난 싫어! 난 여자가 아니야!!
똑바로 봐! 너랑 똑같은 남자라고! 알아들어?! 이 변태 곰탱아!!!"
있는대로 소리를 질러 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나는 들고 있던 녀석의 셔츠를
더러운 바닥 위로 내팽겨 쳐버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힘껏 밟아주었다.
퍽퍽퍽, 소리가 나도록, 마치 그것이 최산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구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안되겠다, 아무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나는 걸레가 되어버린 셔츠를 버려두고
이번에는 건물의 회색 벽에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쿵! 쿵쿵!! 쿵쿵쿵!!
"으아아아아악--------!!"
결국 나는 짐승처럼 포효 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지 않으면 내 분에 내가 돌아가실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난 지금 죽을 것 같다. 최산들이 마음을 도려내야 할 내 독설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 온 것 같았다. 뾰족한 손톱이 심장을 할퀴어 대는 것 같이, 가슴이
쓰리고 뜨거웠다. 온갖 쑈에 지쳐버린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울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죽을힘을 다해 참고, 또 참았다.
"다 했냐?"
주저앉아 씩씩거리고 있는 내게 녀석이 조용히 물었다.
그래, 다 한 것 같다. 할 수 있는 말은 다 한 것 같다.
하지만......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이런 것이었을까....
"좀 앉을게."
녀석은 내게 허락이라도 받듯이 그렇게 말한 뒤, 대답할 필요도 없이 내 앞으로
나와 똑같은 모양새로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한참동안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예의 그 낮고 강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김주영, 착각하지 마. 난 니가 여자처럼 생겨서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니가 남자여서 좋은 것도 아니야. 난 그냥 니가 좋아.
그래, 너 다리 예뻐. 얼굴도 계집애처럼 곱상하고, 하는 짓도 귀여워.
그래서 널 좋아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설명이 불가능해.
널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 한마디도 못해.
그만큼 나도 어렵고 혼란스러워. 하지만 난 믿어. 넌 내 사람이야.
내 사람으로 태어난 널,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어. 확실해."
고개를 들어 녀석을 건너다보았다. 빗물에 젖은 녀석의 속눈썹 안으로 눈동자가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제발, 알아 줘. 라고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웃기는 소리하지마....."
"난 하나도 안 웃긴 걸."
녀석의 진지함은 왠지 모르게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거부하고 싶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녀석의 말들이었지만,
마치 깊게 박힌 가시를 빼어낸 듯 나는 편안해지고 있었다.
"넌....알고 있었지....?"
잔뜩 잠겨버린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뭘?"
"내가....내가......결국 여기로 올 거라는 거...알고 있었지....??"
"글세..."
"대답해 얼른. 알고 있었지?"
"음, 확신하고 있었어."
......................재수 없어, 우욱.....
"또 알고 있는 게 있는데.....말할까?"
녀석이 떠보듯 물으며 나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더 숙일 뿐이었다.
"너, 나 좋아하지?"
뜨끔, 말 그대로 가슴이 뜨끔했다. 또 한 번 발끈해서 건물이 무너지도록
발길질을 해대 볼까도 싶었지만..........아무래도 녀석이 옳은 것 같았다.
더 이상 내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뱃속의 태아를 빛 한자락 보여주지
않고 낙태시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아팠나보다.
난 아니라고, 난 너 싫다고 도리질치는 것조차도 그렇게 힘겨웠나보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나도 복잡해 죽겠는데...."
"척 보면 알지. 내 사람인데, 그것도 모르겠어?"
녀석이 손을 뻗어 내 젖은 머리를 후두둑 털어 내며 낮게 웃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손을 툭 쳐내며 고개를 숙였다.
"쳇, 겨우 고등학생 주제에 뭐가 내 사람이라는 거야....느끼하고 유치해서
못 들어주겠네, 정말.......씨이........"
결국 난 울어버리고 말았다.
떨어지는 눈물이 눈에 보이니까, 왠지 더 서러워졌다.
정말이지 소리는 내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서러워서 끅끅거리며 울어 버렸다.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 것을, 왜 그렇게 밤낮으로 마음 고생을 했는지,
도무지 억울해서 못 살겠다. 으어어어....
"울지 마."
"냅 둬...씨이....흑흑....흑..."
"울지 마라, 제발.....나 정말 못 참겠어."
"흑.....흐윽.........뭐..뭘 못 참겠다는 거야...도대체...흑..."
".....뽀뽀하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울음이 거짓말처럼 뚝하고 그쳤다. 남아있던 눈물까지 다 손등으로 문질러 낸 뒤
나는 녀석을 향해 힘껏 소리쳤다.
"죽어 그럼-----!!"
그 날 저녁, 녀석과 나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앗싸 피자]의
앗싸 스페셜 피자 라지 한 판을 뚝딱 해 치웠다.
종업원들의 힐끔거리는 눈초리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녀석이나 나나 너무 배가 고파서, 핫소스 같은 건 뿌릴 생각도 없이
꾸역꾸역 열심히 먹기만 했다. 공평하게 4 조각씩 사이좋게 나누어 먹고 난 뒤,
우리는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먹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배불러?"
"응, 살 것 같다, 이제.....너..넌..?"
난 혹시나 이 덩치 큰 녀석이 한 조각 더 먹고 싶지는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깨달음에 약간 당황해 하며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씨익 웃었다.
"나도 딱 좋아."
"아...그래...."
다음부터는 한 조각쯤은 양보해야겠다. 딱 좋다는 건, 그닥 배부르게 먹었다는
말과 같다는 것쯤이야 나도 알고 있다.
"선물 줄까?"
다 마신 콜라 컵의 얼음 조각을 으드득 씹던 녀석이 대뜸 그렇게 말했다.
"....선물...?"
"음, 선물."
이라며 녀석이 내게 내민 것은......다름 아닌, 검정 매직 팬이었다.
언제 어떤 용도로 쓰였을 지가 안 봐도 비디오다.
"귀한 거야. 마침 가게에 있는 팬이 다 거덜나서, 일요일 아침부터
문방구 문 부셔져라 두들겨서 산 거거든."
"..........그렇구나...."
달리 해 줄 말도 없고 해서, 나는 어설픈 웃음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문방구 대머리 주인 아저씨는 오늘 아침,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공포가 무엇인지,
대머리로서는 여간해서 얻을 수 없는 귀한 경험을 한 셈이다.
"또 있어."
팬을 한 손에 쥐고 멀뚱히 앉아 있으려니, 녀석이 아직 축축한 기운이
남아있는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는 곧 무엇인가를 꼭 쥔 주먹
안에 감추어 꺼내들었다.
"받을거지?"
".......뭔데?"
"받는다고 말하면 가르쳐 줄게."
".......알았어, 받을게...."
혹시 뭐 개구리나 뱀 같은 앙증(?)맞은 것들을 주려는 건 아니겠지...?
"메달이야."
라는 말과 동시에 녀석의 커다란 손바닥 밑으로 반짝거리는 메달 하나가
톡 하고 줄에 매달려 떨어졌다. 녀석의 손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것은,
색깔로 보아하니 금메달이 틀림없었다.
".....일등...했어...?"
"음. 너 가져."
짧막한 대답만 남긴 채, 녀석은 다시 얼음 하나를 입에 넣어 으드득 씹어대기 시작했다.
"...고..고마워....그리고.....축하해..."
녀석은 아그작 씹어대던 것을 갑자기 멈추더니,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처음이야."
"....뭐가?"
"가까운 사람한테 축하한다는 소리 듣기는, 니가 처음이야. 고맙다, 김주영."
그렇게 말한 녀석은 조금 전보다 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씹던 얼음을 마저 씹었다.
아주 나중에야 그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가 아마,
우리가 처음으로 합의(!)를 보고 첫키스를 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생각하곤 한다.
그 날 비를 피해 들어갔던 그 회색 건물의 처마 밑에서 녀석이 내게 했던,
길고 두서 없었던, 그러나 한 조각도 빼고 싶지 않은 그 말들을.
내 사람으로 태어난 널,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어.
가끔씩 술 마시고 미운 짓을 하면 이걸 그냥 버리고 도망가 버릴까 싶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런 생각 뒤를 따르는 녀석의 그 한마디가 마치 하나의 주문처럼
나를 사르르 녹게 만들었다. 지금도 종종 그런 말을 하곤 하는데,
그건 주로 어디서 지갑을 잃어버렸다거나 술김에 술값을 모두 자기 카드로
긁었을 때, 바닥을 기며 하는 말인지라 그 때 만큼 그렇게 멋지지는 않다.
여튼,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이제 우리의 앞날은 살살 녹는 솜사탕이요,
보기 좋은 개나리 노란색이었으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만은 않았다. 연애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것만큼 피곤한 놀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하여, 지금부터는 우리의 피곤한 연애 놀이에 대해 이야기 하려한다.
그리고 그 뒤로 필연처럼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녀석의 조금 아픈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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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면 우리 집엔 늘 꼬마 손님 하나가 찾아왔다.
그 녀석은 우리 막내 이모의 늦둥이 외아들로서,
학교 선생님이었던 이모가 방학 연수를 가야할 때면,
늘 우리 집에 떠맡기곤 했던 다섯 살 박이 유치원생이었다.
조금 수선스럽고 요란하며 쉴 새 없이 조잘거린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동생이 없는 나로서는 그런 녀석도
꽤 귀엽게 보였었던 것 같다.
심심하면 녀석이 가지고 온 동화책을 실감나게 읽어주기도 하고,
또 가끔은 부족한 용돈을 탈탈 털어 녀석이 좋아하는
조립 완구 세트를 사주고는 했는데,
그런 이유에선지 녀석은 나를 아주 잘 따랐다.
그 해 여름도 어김없이 우리 집으로 피서(?)를
온 녀석은, 웬일인지 잘 놀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며
며칠을 시무룩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러냐는 둥, 먹고 싶은 반찬이 뭐냐는 둥,
온 집안 식구가 달라붙어 비위를 맞추려 했지만,
녀석은 그런 것 따위가 다 뭐냐는 표정으로
꼬리 쳐진 강아지 마냥 비슬거리며 TV 앞으로 걸어가
하루 종일 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아침 무렵, 어머니는
내게 돈을 주시며 약국을 다녀오라고 하셨다.
감기 몸살로 앓아 누웠던 나도 이젠 멀쩡했으므로,
도대체 누가 어디에 쓸 약인지 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무슨 약?"
라고 묻자, 어머니는 슬쩍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기 난데 바르는 약 달라고 해."
"조..종기..? 엄마 종기 났어?"
뜻밖의 병명에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한층 목소리를 낮추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니라, 영진이가 바를거야. 자는데 보니까,
엉덩이에 종기가 나있지 뭐니...."
어머니는 생각할수록 우스운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얼른 다녀오라는 듯 내게 손짓을 하셨다.
황당하다. 녀석이 그토록 시무룩했던 이유가,
고작 엉덩이에 난 종기 때문이었다니.
역시 동심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후에 이모를 통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녀석의 고민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녀석에게는 고통스러운 고질병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엉덩이 위의 종기]였다.
그 놈의 종기는 마치 녀석의 엉덩이가 제 고향이라는 듯,
규칙적인 텀을 두고 녀석을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프다고 난리를 부리며 유치원도 빠지던 녀석이,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TV 드라마 속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난 후부터는, 밍기적밍기적 한나절을 걸어갈지언정,
절대 아프다며 유치원을 빼먹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종기 손님이 찾아와도,
예전처럼 요란을 떠는 게 아니라, 그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자리에 눌러 붙어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녀석이 본 것이 대체 무엇이냐고 내가 묻자,
우리 이모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매우 실감나는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말아야 하는 법이야.
가슴속의 종기가 곪아터지는 한이 있어도 묵묵히 참아내야 하지."
어설픈 남자 목소리를 흉내내며 훌륭히 연기를 소화해 낸 이모 앞에서,
누나와 나는 딱 죽기 일보 전까지만 웃어댔다.
비장한 표정의 배우를 보며, 가슴속의 종기를 엉덩이 위의
종기와 동일시 해 버린 녀석이 너무 엉뚱하고 귀여워서,
나는 정말이지 웃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나는 녀석을 떠올렸다.
어쩌면 녀석도, 내 귀엽고 엉뚱한 사촌 동생처럼,
그런 시덥잖은 대사에 깊이 감명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녀석이 말했던 [나중]이 너무 많이 지나버린 어느 여름날 오후,
나는 세상 모르고 잠이 든 사촌 동생의 이마를 쓸어 올리며,
작고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