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일 가게 아들내미 -2
다 저물어 가던 어느 날 저녁 무렵, 나는 날짜 지난 신문을 널찍하게
펼쳐 놓고 손톱을 깎고 있었다. 멋대로 자란 손톱을 동그랗게 돌려
깎으며 신문지 바깥으로 손톱이 튀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더 했다.
튀어나간 손톱 찾아 헤매기는 쓰레기 봉투 갖다 버리기 다음으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다.
"주영아, 이것 좀 받아라."
오른 손의 중지 손톱이 반쯤 잘려나갔을 때, 저녁 찬거리를 보러 나가셨던
어머니가 현관에서 나를 부르셨다. 사흘 치 식량을 한꺼번에 사셨는지,
짐이 굉장히 많았다.
"와, 뭘 이렇게 많이 샀어? 이걸 혼자서 다 들고 왔어?"
나는 건네 받은 봉지들을 식탁 위로 올려놓으며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는 시원한 보리차를 컵에 따라 쭈욱 들이키시더니 한참만에
대답을 하셨다.
"아니, 시장에서 과일 가게 아들내미를 만났거든. 어떻게 날
알아보더니 요 앞까지 들어다 주더라....아버지가 시장에서
가게 하나를 더 하시나 보더라. 거기 와 있더라고..."
나는 간식거리를 찾아 뒤적거리던 봉지들을 헤벌레 벌려 놓은 채,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을 때면 버릇처럼 올라가는
내 오른쪽 눈썹을 보시며 어머니는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주신다.
"모르냐? 왜, 저기 하나 있는 과일 가게 아들내미 말이야.
걔가 대문까지 들어다 줬다고."
"대..문까지?"
나는 고개를 돌려 거실 저쪽 커다란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사오기 전부터 심어져 있던 늙은 감나무가 바람 없는 여름 저녁,
피곤한 모양으로 멀거니 서 있었다.
나는 왠지 녀석도 저 감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서 있을 것 같아,
서둘러 눈을 돌리며 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직 다 닫히지 못한 방문 너머로 부시덕 거리는 봉지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톤 높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김주영! 손톱 깍은 거 안 치우고 들어가!!"
아아, 어머니...세상은 잘려나간 손톱 따위에 신경 쓰기엔 너무나 복잡 다양한 곳이랍니다.
세상에....남자 다리가 예쁘다고 손나팔까지 만드는 놈도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한번만 엄마가 치워 줘......
과일 가게 아들내미 -2
나는 그 날(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는 그 날) 이후, 절대 반바지를 입지 않았다.
긴 츄리닝 차림으로 집안을 어슬렁거리는 내게, 식구들은 돌아가며 구박을 해댔다.
"더워 죽겠는데 그게 뭐니? 얼른 반바지로 못 갈아입어?!"
라시며 손수 반바지까지 들고 나를 쫓아다니시는 어머니.
"야, 보기만 해도 더워. 내 눈앞에서 사라져."
라며 읽지도 않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를 들고 설치는 우리 누나.
그리고, 소파에 길게 누워 하얀 배를 우물우물 씹으시며 티비를 보시던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그러다가 고추에 땀띠 난다."
.............괜찮아요....파우더 바르면 되죠...뭐...
그런 갖은 구박을 맞아가며, 하루에 서너 번도 더 샤워를 하는 고생을 해가면서까지
나는 절대 반바지를 입지 않았다. 예쁘다고 칭찬 받은 내 다리가 부숭부숭 털이 덮이고,
투실투실 근육이 붙을 때까지, 절대로, 저얼대로! 반바지는 입지 않으리라....는, 나의
굳은 의지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아기들이나 바르는 파우더를 그러하고 저러한 곳에
골고루 발라주었다.
그런 나날을 보내며 다시 맞은 지난 일요일, 아침부터 '사랑의 스튜디오'를 틀어놓고
속으로 열심히 짝짓기를 하던 나는, 옆으로 느껴지는 검은 오라에 고개를 살짝
틀었다. 청소기 자루를 손에 들고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뭐랄까 마치 광화문 세종로 한 가운데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 흡사했다.
청소기 자루만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면, 아주 똑같았을 것이다.
"왜...? 청소기 내가 돌릴까..??"
나는 오랜만에 잡아 본 리모콘 사수를 위해 비굴한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굳어버린 어머니의 얼굴 아래로 살살 기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내게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은 그런 청소 나부랭이가 아니었으니...
"독서실 가서 공부하고 와."
오늘도 어김없이 독서실 타령을 시작하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나는 차라리 어머니가 내 다리를 예뻐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핫팬츠를 입고서라도 어머니 눈을 즐겁게 해드리며 마음껏
티비를 볼 수 있었을텐데....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간식비 줄테니까 저녁 먹기 전까지 공부하고 와."
체...간식비라고 해 봐야, 겨우 컵라면이랑 음료수 값 밖에 안 주시면서....
"얼른 못 일어나!! 꼭 소리를 지르게 만든다니까!"
쩌렁거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앞뒤로 흔들리는 청소기 자루에 겁먹은 나는
쥐고 있던 리모콘을 떨어트리듯 내려놓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어머니 얼굴이 조금 풀어지시는 듯 하더니, 풀죽어 방으로
걸어가는 내가 조금은 안 되 보이셨는지 나름대로 위로를 해 주신다.
"전원일기 녹화 해 둘 테니까, 나중에 봐. 알았지?"
오늘 전원일기에 전지현이라도 나오면 그렇게 해 주시던지요.......
책 몇 권과 필통이 든 책가방을 매고 거실로 나오자,
어머니는 준비해 놓으신 독서실비와 간식비를 꼬옥 접어 내게 내미셨다.
퉁퉁 부은 얼굴로 말없이 받아 주머니 안에 찔러 넣고 있는데,
그때 안방에 계시던 아버지가 거실로 나오시며 나를 불렀다.
"주영이, 어디 가냐?"
아버지는 뒤에 맨 내 책가방을 힐끗 쳐다보시며 내게 물으셨다.
머리를 푹 숙이고 마치 어디 죽으러 가는 사람 마냥 대답도 없이
현관으로 향하자, 어머니가 대신 대답해 주신다.
"독서실 가라고 했어요. 공부는 안하고 티비 앞에 붙어살려고 하잖아요."
붙어살다니....'사랑의 스튜디오'만 보고 상쾌한 마음으로 공부하려고 했던
내 깊고 큰 뜻을 저리도 몰라주시다니. 정말이지 억울해서 못살겠다.
"제 방에서 공부하라고 하지 왜."
아버지는 그래도 조금은 내 마음을 아시는 것 같기도 하다.
"안돼요. 집에 있으면 잠 안 자면 컴퓨터만 들여다 본다고요."
어머니는, 내 마음은 몰라도 내 농땡이 패턴은 참 잘 알도 계신다....
아, 가자 가. 더 있어봤자 잔소리만 듣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렇게 현관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섰는거냐.....라며 꿰어 신은 운동화
코를 바닥 위로 톡톡 치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현관으로 따라
나오시더니 슬리퍼 짝을 찾아 신으셨다. 나는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가시나보다 하는 생각에 먼저 현관을 나섰고, 그 뒤로
따라 나오시는 아버지를 향해 어머니가 '어디 가요?'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아버지는 대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시며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영이랑 목욕탕 갔다올게. 콩 좀 갈아 놔. 콩국수가 먹고 싶네...."
갈아입을 속옷도 없이 어딜 가냐고, 집에 있는 샴푸랑 비누 두고
왜 사서 쓰냐고, 대문 밖까지 들릴 정도로 소리소리 치시는
어머니를 무시한 채 아버지는 멍하니 쫓아가는 내게 물으셨다.
"너 아침에 속옷 갈아입었지?"
"으응...."
"그럼 됐다. 나도 갈아입고 나왔으니까, 가서 씻기만 하면 돼."
"근데 아빠....나 목욕탕 갔다가 독서실 가면 졸릴텐데..."
"그냥 집에서 공부해. 아빠가 엄마한테 잘 말해 줄테니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책가방 들고 목욕탕 가게 생긴 나는,
얼떨결에 독서실 형벌(?)을 면죄 받았으니 좋아해야 하는건지,
아니면 이 더운 날 뜨거운 목욕탕에 들어앉아 아버지의 넓은 등을
밀어드리게 생겨 슬퍼해야 하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동네로 이사오고 난 후, 처음으로 가는 대중 목욕탕은
전에 살던 동네보다 훨씬 작고 허름해 보였다.
짝짝 껌을 씹어가며 카운터를 보던 아줌마같은 누나(?)는,
타월 두 장과 일회용 샴푸 두 개를 거스름돈에 얹어주며
'남탕은 이 쪽이에요.'라고 말 안 해도 아는 사실을 참으로
성의 없게 알려 주었다.
실내로 들어서자, 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꽤 들어차 있었다.
한 가운데 놓여있는 나무 마루 위에는 배 나온 아저씨들이 하얀 수건만
두른 채 대자로 누워 있었고, 서너 개 걸린 벽걸이 선풍기 앞에는
젊은 남자 몇 명이 벌거벗은 채 젖은 머리를 시원하게 털어 내고 있었다.
"음, 여기다. 34번, 35번. 자, 여기 열쇠."
아버지는 35라는 숫자가 새겨진 열쇠를 내게 건네시고는 34번 사물함을
열기가 바쁘게 옷을 휙휙 벗어 넣으셨다. 나는 일단 책가방부터 벗고
사물함을 열어 그것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흰 면티를 벗고 언제나 눈총 받는
내 사랑스러운 긴 츄리닝을 벗어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솔직히, 다리가
숨을 쉬는 것 같이 너무너무 시원했다.......
"자, 들어가자."
줄무늬 팬티까지 벗어 넣고 사물함 문을 잠그고 나니, 아버지가 한 쪽에 높이
쌓여 있던 하얀 수건을 두 장 집으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탕 안으로 들어서자, 뿌옇게 덮쳐오는 실내 증기에 숨이 턱 막혀왔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답답하기도 하고 무심히 돌아보는 눈길에 뻘쭘해
지기도 하고, 아무튼 영 익숙해지지가 않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주영아, 저기 바가지랑 세숫대야 좀 들고 와라."
라시며 아버지는 작은 거울이 달린 벽 쪽에 자리를 만드셨다.
낮은 의자를 내 자리에 놓으시고는 샤워기로 한 번 씻어내시더니,
내가 가지고 간 바가지와 세숫대야를 받으시며 앉으라는 고개짓을 하셨다.
"얼른 몸만 헹구고 탕 안으로 들어가자. 요즘 몸이 찌뿌둥......"
여기저기서 들리는 샤워기 소리에, 퉁탕거리는 바가지 소리에,
시끄러운 소음들이 후덥지근한 욕탕 안을 가득 채우는 통에 아버지의
뒷말이 잘 들리지가 않았다. 이따가 등 밀어달라는 소리도 잘 안 들렸으면 좋겠다....
비치되어 있던 비누로 대충 몸을 닦아내신 아버지는 밍기적대며
몸의 여기저기에 비눗칠 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나는 아버지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떨어짐과 동시에 가슴께를
슬슬 문지르던 내 손도 차차 아래로 내려갔다. 어디를 보고 계신지
잘 알고 있는 나는 초록색 때 타월로 내 소중한 그것을 슬쩍 가려버렸다.
"손 좀 치워봐라. 우리 아들, 장가보낼 때 다 됐나 보게. 하하하... "
라시며 고개까지 숙여 들여다보시려는 우리 아버지...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후아.....
"아,아빠.....탕에 안 들어가...?"
나는 안 그래도 벌건 얼굴을 더욱 붉히며 아버지 반대편으로 슬쩍 돌아앉았다.
"부끄럼 타긴, 에이 이 놈아!"
라고 말씀하시며 물에 젖은 내 등짝을 철썩 내리치시더니 아버지는 뜨거운
탕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따끔거리는 등을 닿지도 않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다시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허벅지를 문지르는 척하며 소중한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흐음......이만하면 장가 갈 때는 된 것 같은데.....
아버지는 살을 익히실 작정이신지, 들어가신 지 30여분이 지나서야 탕 밖으로
나오셨다. 벌겋게 익은 몸에 찬 물을 끼얹으시며 '어어, 시원하다'라며 연신
중얼거리시는 아버지 옆에서 나는 오른쪽 다리에 이어 왼쪽 다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때가 참 잘도 밀린다. 더운 여름날 긴 바지 탓에 다리가 숨을 못 쉬어서 그런지
때가 다른 때 보다 배는 많이 나왔다. 머리를 써야하는 일에는 산만함의 극치를
달리면서도 단순한 노동에 있어서는 최고의 집중력을 자랑하는 김주영.
마치 세상의 평화가 내 오른쪽 다리에 달려 있는 것처럼 나는 잡념하나 없이
최선을 다해 때를 밀었다. 적당한 굵기에 적당한 색깔로 밀린 때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며 이제 샤워기로 헹구기만 하면 되겠다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쏴아-하고 쏟아지는 샤워기로 다리의 때들에게 안녕을 고한 뒤, 뿌듯한 마음으로
희뿌연 거울 위에도 선심 쓰듯 물을 뿌려 주었다. 말갛게 닦인 거울 위로 나의
자랑스러운 얼굴이 벌겋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흐릿한 목욕탕 불빛 아래 거울 안으로 누군가 저만치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앉을 자리를 찾는지 하얀 수건을 목에 두르고 목욕탕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거울 안으로 비치는 그 누군가의 크기가 점점 커질수록, 내 눈도 따라 팽창하고
있었으니.....하나님, 맙소사! 그 녀석이다!! 희뿌연 증기 사이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덩치 큰 벌거숭이의 정체는 틀림없이 그 녀석이 맞다....라는 확신이
생기자마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망할! 왜 하필이면 가장 만나기 싫은
인간을, 그것도 가장 만나기 싫은 장소에서 만나야 하냔 말이다. 맨 다리
보이기 싫어서 한 여름에 긴 츄리닝 입고 설쳤는데, 하! 이거 웬 걸.
다리도 모자라서 온 몸을 다 보여주게 생겼으니, 나는 왜 이다지도
재수가 없단 말인가!! 오, 신이시여....당신은 정녕 죽었단 말입니까....
그렇게 내 비극적 운명을 비탄하며 슬퍼하던 나는, 불현듯 솟아오르는
운명 개척의 의지를 가슴에 품고 어떻게든 녀석을 피해 이 목욕탕을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탕 속에 들어앉아서,
물 속에 머리 박고 있을까....아니야, 그랬다간 익사하기 전에 잘 익은 수육 되기 쉽지...
그럼 어떻게 하지....그냥, 아버지한테 나 먼저 간다고 그럴까....
"아,아빠....있잖아..."
"그래, 조금 있다가 등 좀 밀어라."
이것도 아닌 것이야.....
나는 꼭 똥씹은 표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허어억......숙인 얼굴로 슬쩍 뒤를 돌아보니, 녀석이 다섯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의자를 들고 서 있었다. 저리가...훠이훠이!!
어라. 내 주문발이 먹혀들었나.....한참을 내 뒤에서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빼꼼이 내다보고
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녀석은 결심을 굳힌 듯 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후아.............살았다......이제부터 쥐죽은듯이 앉아 있다가
아버지 등만 밀어드리고 나가면 되는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주영아, 어디 한 번 시원하게 밀어봐라."
허억. 아빠, 목소리가 너무 커! 여긴 목욕탕이라 소리가 잘 울린단 말이야!!
라는 나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등 돌려 앉으신 우리 아버지가 어찌 들으실까.
유난히 작은 목욕탕 안, 또 유난히 커진 아버지의 음성에 나는 간이 콩알만해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마치 뭐랄까....
돈 달라는 깡패 앞에서 '정말 한 푼도 없어요.'라고 한참 불쌍한 척 하는
찰나, 주책 맞게도 바지 주머니의 동전 두 개가 짤랑-거리며 마찰 할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얼른 밀어 보라니까."
"어어....알았어..."
나는 덜덜 떨리기까지 하는 손에 초록색 타월을 끼우고 아버지 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뒷통수 저 편에 앉아 비누칠을 하고 있을
녀석이 신경에 거슬려 내 손은 등을 밀고 있다는 것보다는,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아주 형편없게 움직이고 있었다.
"똑바로 밀어라..."
"어...."
"아들아...간지럽다......음?"
"어..어...."
"김주영! 제대로 안 하냐!"
어어억....아무리 내가 형편없이 밀었기로서니, 아들 이름을 무슨 동네
똥강아지 부르듯 마구 불러대고 그래! 하긴....아버지가 아들 이름 부르는데
무슨 잘못이 있겠냐마는.........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아,알았어...아빠..좀만 조용해...사,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자식, 쳐다보긴 누가 쳐다봐. 흰소리말고 얼른 빡빡 밀어봐..."
"으응..."
아들의 팔 힘을 과신하신 아버지는 등허리까지 쭈욱 펴 보이시며
밀기 좋으라고 자세까지 잡아 주신다. 에라, 모르겠다. 신경끄자.
신경끄고 등이나 열심히 밀자. 들키면 들키는 거지 뭐! 나만
알몸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녀석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으니,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멋쩍어서라도 아는 척 안 하겠지.....
"안녕."
커억......지금 내 옆에서 '안녕'이라고 인사하는 이 굵은 다리의
주인은 설마...그 녀석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여기서 보네. 오랜만이다."
그 녀석........맞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린다....기필코 안 들리고 말테다....
"음? 넌 누구냐??"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잘만 들리신다....
왠 커다란 녀석이 옆에 서서, 대뜸 아는 척을 해대니 장님에,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어찌 고개가 안 돌아가고 배기겠는가.
"안녕하세요, 최산들입니다."
라며 녀석이 꾸벅 인사를 하자, 아버지는 이미 등 밀기는
포기하고 고개만 박고 있는 나를 돌아보셨다.
아빠, 신경 꺼...저 녀석이 최산들이건, 최건들이건 아빠는
신경 끄고 앞만 봐.....그럼, 나도 팔에 알이 배기도록 등 밀어 줄테니까....
"주영이, 니 친구냐?"
아빠는 오늘 등 다 밀었어.......우씨.......
"예, 주영이 친구예요."
라며 대답 없는 나를 대신해 넋살 좋게 대꾸하더니,
다시 나를 향해 말을 붙여왔다.
"김주영, 아는 척도 안 하냐, 서운하게."
얼씨구, 내가 왜 널 아는 척 해야 하는거냐! 난 다리보다 허리가 더 예뻐, 라고
자랑이라도 하게?? 아앙!!
"이 놈아, 친구를 만났으면 인사를 해야지, 왜 그렇게 수그리고 앉았어?"
씨이......아빠까지 왜 그래, 도대체.....
"이 놈아, 남자는 목욕탕에서 진정한 친구를 만드는 법이야.
아빠는 사우나실 좀 들어갔다 나올테니까, 친구 등도 밀어주고 그래라. 음??"
이라며 한 술 더 뜨시는 우리 아버지......뭐라고 할 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구석탱이에 있는 사우나실로
저벅저벅 걸어가 버리신다.
"산들...이라고 했나? 여튼....여기서 씻어라. 어이구, 덩치도 좋네.
우리 아들놈은 언제나 이렇게 크려나...허허허...."
정말이지, 독서실 칸막이 책상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사우나실로 들어가시자, 녀석은 아버지 말씀대로 자리를 옮겨
내 옆에 털퍼덕 앉아버렸다. 그러더니, 여전히 고개만 숙이고 온몸을
웅크린 채 앉아있는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곳 저곳 열심히 때만 밀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왠지 안심이 되어 슬쩍 곁눈질로 녀석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적당히 그을린 구릿빛 피부, 길쭉길쭉한 팔과 다리, 그리고 운동으로 다져진
듯 한 단단한 허리와 허벅지......솔직히, 나도 저런 몸 만들어 보려고 헬스장에
한 몇 달 다녀봤지만 그것도 타고나는 것인지,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우습게도 질투까지 생기는 바람에, 더욱 기분이 나빠진 나는, 생각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일어서는 순간 전시(?)되고 말 두 다리와
나의 소중한 그것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으, 빌어먹을 여름날의 목욕탕이여.........
"다 씻었냐?"
하다못해 목욕탕 원망까지 하고 앉았던 나는, 녀석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하마터면 삼키던 침에 사래 들릴 뻔했다.
"으응...."
"등도 밀었어?"
"어! 밀었어!!"
나는 행여나 녀석이 밀어준다고 덤빌까봐 고개까지 끄덕이며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도 녀석은 내 말을 믿어 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럼, 나 좀 밀어줘라."
라며 불행이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녀석......
"얼른. 자."
주제에 재촉까지 해 가며 지가 쓰던 타올을 뻔뻔하게 내미는 녀석을,
그제야 나는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씨익-하고
웃어 보인다. 시원하게 찢어진 눈이 '이제야 쳐다보네'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돌아앉아 봐...밀어줄게..."
나는 녀석의 눈이 내 얼굴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얼른 몸을
돌려버리자는 생각으로, 내민 타올을 받아들고 녀석에게
돌아앉기를 명령(?)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꼼짝도 않고
비켜 앉은 내 쪽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타올을 쥔 내 손이 무의식적으로 다리로 내려간다.
서..설마 여길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벗고 보니까....남자는 남자네."
"뭐...뭐?"
"어깨도 적당히 벌어졌고, 가슴도 꽤 단단한데?
다리는 꼭 여자 같더니만, 다른 데는 영락없는 남자네. 흐음..."
푸헛....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래, 나 남자다! 달릴 거 다
달린 남자란 말이다!! 그러니까, 그만 그 느물거리는 눈알 좀 치워주지
않으련??
"아주, 딱 좋아."
으아아아.......치우라는 눈은 안 치우고 뭔가 흐뭇하게 까지 들리는
녀석의 말에 나는 귀가 썩어 버리는 줄 알았다.....
아빠, 아빠, 아빠!! 도대체 왜 안 나오는거야!!
아버지 아들이 지금 성희롱을 당하고 있단 말입니다....
라는 소리 없는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언제 나오셨는지,
아버지가 등뒤에서 나를 부르셨다.
"주영아, 그만 가자."
오, 할렐루야!!
"친구는 아직 멀었나?"
제발, 조금만 더 씻고 나와라. 부탁이다, 최산들....
"예, 다 씻었습니다. 저도 지금 나가려고요."
젠장할............
어떻게 머리와 몸을 말리고, 어떻게 옷을 주워 입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흘긋 보니, 녀석도 머리 말리랴, 옷 입으랴 정신 없어 보였지만,
녀석의 아까 그 '딱 좋아'라는 말이 무진장 마음에 걸린 나는,
옷도 쭈그리고 앉아 겨우 입었다. 어휴, 내 팔자야....
우리는 곧 목욕탕을 나왔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녀석이다.
아직도 우리가 친구라고 철썩 같이 믿고 계시던 아버지는, 나름대로 신경 써 주신답시고,
녀석과 내가 나란히 걸을 수 있도록 몇 걸음 앞 서 걸으셨다. 아무튼, 오늘 우리 아버지,
미운 짓만 골라 하신다.......고 했더니, 알아서 더 해 주신다.
"주영아, 친구랑 아이스크림이나 사먹고 와라. 아빠 먼저 들어갈테니까."
라시며, 반 접힌 만 원 짜리 한 장을 주머니에 꾸욱 찔러주시는 우리 아버지....
사랑해 마지않는 돈님이 오셨건만, 어찌 이리도 슬플까.....
"감사합니다."
엄한 놈만 좋아서 내 대신 인사까지 하고 앉았으니, 세상 참 살맛 안 난다.
"그래, 그럼 잘들 놀고 너무 늦지들 마라!"
"예, 안녕히 가세요."
라며 허리까지 꾸벅 숙여가며 인사하는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정말 아버지 말씀대로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며 끓어 오르는
열 좀 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에 띄는 대로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갈아만든 배로 만들었다는
큼지막한 쭈쭈바 한 개를 골라잡았다. 그리고 녀석에게 '너도 골라'하는
표정으로 조금 비켜서서 아이스크림 통 문을 잡아 주었다.
얼떨결에 녀석을 위해 문을 잡아주기는 했지만, 뭘 찾는지 통 안 깊숙이
휘적거리는 녀석의 손을 보고 있자니, 그냥 쾅! 닫아버리고 싶은 걸
참느라 아주 혼이 났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열심히 뒤지던 녀석이
집어든 것은, '비비빅'이라는 팥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이었다.
'이거 맛있어.'라며 계산도 하기 전에 껍질을 벗겨 입안에 넣는
녀석을 보며 인정하기 죽어도 싫지만, 나는 녀석이 조금 귀엽다는 생각도 했다.
계산을 하고, 나는 하얀 쭈쭈바를, 녀석은 시커먼 비비빅을 입에 물고
집으로 향했다. 마음같아서는 뛰어서라도 집으로 가고 싶지만,
긴 바지에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걷자니 그런 의욕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녀석도 아이스크림 먹느라 더 이상 헛소리 할 생각도 없는 듯 했고,
어차피 주택가로 들어서면 녀석과 나는 그 길로 갈라서게 될테니,
그때까지만 꾹 참고 걷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걸었을까. 언제 다 먹어치웠는지, 까만 살덩이는 사라지고
초라하게 남은 나무 막대기를 입에 문 녀석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니네 누나가 내 얘기 안 하냐?"
켁켁....갑자기 나온 누나 얘기에 나는 아직 반도 더 남은 쭈쭈바를
입에 문 채 잔기침을 해댔다. 내가 그 날 복숭아 봉지에
두들겨 맞은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살이 떨리는구만, 그 날의
원흉인 니가, 지금 이렇게 뻔뻔하게 물어볼 수 있는거냐.......
"우리 누나, 그 날 화 많이 났었어...사온 복숭아도 안 먹고 다 버렸다고..."
차마, 그 복숭아에 죽도록 맞았다는 말은 죽어도 못하겠다.....
"하하, 그래? 화 많이 났었나보네. 그런데 그 복숭아,
니네 누나가 산 거 아니야."
이건 또 뭔 소리래. 그럼, 도둑질 한건가...??
"내가 그냥 준거야. 다리랑 많이 닮았길래, 비싼 복숭아 마음 먹고
선물 한거지. 그걸 안 먹고 버리다니.....쯔쯔..."
나는 그제야 이해 할 수 있었다. 왜, 지난주 일요일 실수로 사간
복숭아를 본 누나가 그토록 경악에 찬 비명을 질러댔는지,
그제야 누나의 그 고통에 찬 절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튼, 누나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줘. 장난이 좀 심했긴 했어."
좀 심했냐, 많이 심했지.....
"니네 누나랑 너랑 많이 닮았더라고.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는데,
다리는 니가 훨씬 예쁘길래 장난 좀 쳐 본거야."
"..........뭐?"
"니 다리 많이 봤었거든. 가게 앞으로 지나다닐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녀석의 관찰 대상이 되었던 지난 날들이
떠올라 잔소름이 우두두 일어서는 것만 같았다.
웬만하면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 녀석,
아무래도 변태같다.....
"김주영."
돋은 소름을 가라앉히며 녀석과 거리를 조금 두고 걷기 위해
옆으로 슬쩍 몇 발자국 비켜서는데, 녀석이 대뜸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다 녹아버린 쭈쭈바 봉지를 한 손에 쥔 채, 대답할 생각은
않고 동네 골목이 보이나 안 보이나만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너 여자친구 없지?"
은근히 자존심 상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여자친구 있냐?' 도 아니고,
'여자친구 없냐?'도 아니고, '여자친구 없지?'라니... 마치, 나는 당연히
여자친구가 없을 만큼 못난 놈이라고 하는 것 같아, 상한 자존심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자 스타일이 어떻게 되냐?"
대꾸도 없건만,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끊임 없이도 물어본다.
젠장할, 대답하면, 왜, 소개팅이라도 시켜주게??
"말해 봐. 어떤 여자가 좋냐?"
에라, 밑져야 본전이라고, 또 혹시 알아. 나처럼 다리 예쁜 남자 좋아하는
예쁜(상상은 안 가지만) 여동생이라도 있을지....
"그..그냥...착하고...조금 예쁘면...좋지 뭐..."
예를 들면, 심은하나, 이영애처럼 말이야.....
"쳇, 시시껄렁하구만."
"...........뭐?"
나는 예상치 못했던 녀석의 반응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뭐? 시시껄렁? 허, 그런 넌 도대체 어떤 여자...나 맞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넌 얼마나 멋진 스타일을 그리고 있길래!!
"야, 그런 시시껄렁한 여자랑 사귈 바에야, 안 사귀고 만다."
웃기는 놈이네....그런 시시껄렁한 여자께서 너랑 사겨 주기나 한대?
체엣.......뭐....여자들이 한 둘은 달라붙을 면상이지만서도.....씨, 자존심 팍팍 상해....
"나..난 그래도 그런 여자가 보기 좋던걸..."
나름대로 고집 피워 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여자들말고, 차라리 난 어때?"
나는 열심히 걷던 걸음을 멈추고 따라 멈춘 녀석을 돌아보았다.
머리 하나 만큼 더 큰 녀석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자니,
녀석의 손이 내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완벽한 카오스 상태에 빠져버린 나는 녀석의 다가오는
큼지막한 손을 보고도 피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마께까지 다가온 녀석의 손 중, 길다란 검지가 쭈욱하고 뻗더니
이해불능의 상태에 빠질 때마다 치켜 올라가는 내 오른쪽 눈썹을
꾹 찍어눌렀다. 그리고는 그것을 잡아 내리며 제 자리로 돌려놓았다.
"예쁘다, 너..."
녀석은 어울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직 내 얼굴 위에 붙어있던 검지를 움직여 뺨 위를 스윽 훑어 내려가더니,
아랫입술 바로 아래에서 멈추어 버렸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내가 방금 전 어떤 말을 들었고, 어떤 짓을 당했는지 깨달았을 때,
녀석의 손을 잡아 힘껏 뿌리쳤다.
"지..지금 뭐 하는거야!"
머리털이 삐쭉삐쭉 설만큼 끔찍한 상황에 닥친 와중에도,
나는 제법 굵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녀석은 웃음기 하나 없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너 내 애인해라. 예뻐 죽겠다, 아주..."
기가차고 어이가 없어서, 나는 더 이상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저런 말은 이 다음에 내가 대학생이 되면 과에서 제일로 예쁜 여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데......그걸 왜, 내가, 그것도, 나랑 똑같은 물건이 달린
사내녀석한테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해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내일부터 학교까지 바래다줄게. 7시까지 골목 앞으로 나와있어.
자전거 가지고 나갈테니까. 알았지?"
라며 지 마음대로 약속해 버린 녀석은, 황당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섰는 나를 뒤로하고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녀석의 넓은 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을 때, 내 눈앞으로 뭔가 굉장히
험난한 미래가 펼쳐지는 듯 했고, 그제야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던
내 온 몸으로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 날, 녀석이 말했던 시간을 피해 30분이나 일찍 등교길에
오른 나는, 푸른색 반소매 교복을 입고 커다란 은색 자전거 옆에 서 있던
그 녀석을, 기어이 만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