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일 가게 아들내미 -1 (1/6)

과일 가게 아들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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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간 우리 동네에는 과일 가게가 딱 하나있다. 

주황색 천막이 간판 바로 밑으로 드리워져 있는 가게. 

그 과일 가게에는 곰이 한 마리 살고 있다. 

그 곰은 말도 하고, 학교도 다니고, 가끔은 과일도 판다. 

재주가 많은 놈이다. 

게다가 그 곰은 이름도 있다. 

최산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산들바람 맞으며 뛰노는 곰을 상상했다.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나는 서둘러 상상의 나래를 접으며 좀더 유쾌한 상상을 해 보려 노력했다. 

산들바람 맞으며 뛰노는 귀여울..지도 모를 아기곰을... 

그 곰을 차마(?) 산들이라 부를 수 없어, 동네 사람들은 놈을 이렇게 부른다. 

과일 가게 아들내미라고... 

과일 가게 아들내미 -1 

내가 녀석을 곰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내 의지는 아니다. 

나는 그저 뒤늦게 질풍노도의 시기(자기 말로는 그렇다고 한다)에 들어선 

스무 살 먹은 누나의 초절정 히스테리 밑을 알아서 기고 있는 것이다. 

누나는 그 곰을 아주 싫어한다. 누나 말로는 그 곰이 자기를 희롱했다고 했다. 

콩알을 호박으로 만들어 버리고, 여드름 하나를 피부암으로 만들어 버리는, 

허풍쟁이 우리 누나를 잘 알고 있는 나는 '희롱'이라는 단어를 듣고도 

MBC 주말 프로그램 광고만 열심히 보고 있었다. 

"글쎄, 그 곰 같은 새끼가 나더러 뭐라고 했는줄 알아?" 

어, 오늘 주말의 명화에서 씨받이 해주네..이야..이게 언제 적 영화야... 

"그 곰새끼가 글쎄, 내 다리를 보고...아으!! 열받아, 생각만 해도 열받아!!!" 

음...3시 30분부터 야구하는구나. 오늘은 승엽이 형이 홈런 한 방 날리려나... 

"내 다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글쎄...글쎄..." 

그나저나 엄마한테 잘 보여야 되는데...그래야 마음 편히 티비를 볼 수 있는데 말이야.. 

걸레질이나 해 놓을까.... 

"[털이 무지 많네요.], 이러는거야!! 아우! 뭐 그런 재수 없는 새끼가 다 있니, 아악!!!" 

그제야 나는 티비에 붙어있던 눈을 떼어 까만 봉지 하나를 손에 들고 씩씩거리며 서 있는 

누나를 향해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누나의 다리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확실히 관찰력이 떨어진다. 

저 많은 털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야!! 너 무슨 생각해!!" 

"뭘...아무 생각도 안 했어..." 

"빨리 말 안 해?! 말해! 말해!!" 

"아앗..." 

누나는 들고 있던 까만 봉지를 휘휘 휘두르며 내 등을 내리쳤다. 

뭐가 들었는지 정말 오지게 아팠다. 

"빨리 말햇!!" 

"으아앗..." 

"왜 이렇게 시끄럽니?" 

아, 보고싶고 그리웠던 우리 어머니다! 외출하신 지 딱 두 시간 밖에 안 지났지만, 

어머니가 들어오시면 주말 프로그램은 물 건너 간 얘기지만, 그래도 난 어머니가 

눈물나게 반가웠다.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보답으로 내 한 몸 바쳐 걸레질이나 북북 

해 드려야지... 

"엄마! 이 자식이 나 보고 다리에 털이 많다잖아!!"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랬긴 그랬지...속으로.... 

"하영이 너, 내가 몇 번을 말했니. 소리 좀 지르지 말라고 했잖아. 

무슨 여자가 그렇게 목소리가 크니..." 

파이팅입니다, 어머니... 

"아이씨, 속상해 죽겠는데 엄마까지 왜 그래~아우, 짜증나~~~" 

쿵쾅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누나. 

조신하게 좀 걷지...저러다 털 빠질라.....킥. 

"주영이 넌 여태 티비 보고 있었니? 얼른 들어가서 공부 안 해?" 

운명처럼 돌아온 화살에 맞아버린 나는, 

그래도 운명을 거역해 보려 꿈틀! 해본다. 

"엄마..나 야구만 보고 들어가면 안 돼?" 

"시끄러. 곧 고 3 될 애가 무슨 티비를 그렇게 좋아하니. 얼른 들어가, 얼른!" 

리모콘으로 톡하고 티비를 꺼버리신 어머니는 아까 누나에게 맞아 얼얼한 등을 

밀며 고맙게도 위로까지 해 주신다. 

"나중에 대학 들어가서 봐. 그때는 니 방에 티비 놔줄게. 티비랑 연애를 하든 뭘 하든, 

그때는 니 마음대로 다 해. 어서 들어가서 공부해...아, 착하다 우리 아들.." 

엉덩이까지 톡톡 두들기시며 친히 방문까지 열어주시는 우리 어머니. 

엄마, 두고 봐. 난 정말 티비랑 연애할거야... 

방으로 들어선 나는 책상을 외면하고 곧장 침대 위로 벌렁 누워 버렸다. 

눕고 보니 편안하고, 편안하니 슬슬 잠이 온다. 

잠이 올만도 하지. 누나의 때아닌 난동에 심신이 모두 피로하다. 

나는 능률적인 학습활동을 위해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창 밖의 차소리가 가물가물해 지고 온몸이 나른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꿈나라 저편으로 놀러가기 바로 전, 나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저 놈의 기집애...비싼 복숭아를 이렇게 뭉개 놓다니....쯧쯧..." 

누나가 휘둘렀던 까만 봉지 안에는 복숭아가 들어 있었나보다. 

참 우리 누나는 얼굴도 두껍지....어떻게 그 놀림을 받고도 많고 많은 과일 중에 

하필이면 왜 털 많은 복숭아를 골랐을까............. 

아무튼 그 이후로 누나는 과일 가게 아들네미를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 

그 녀석 얘기만 나와도 경기를 하듯 오버를 해댔고, 내가 실수로 

'누나 그 과일 가게 아들내미 말이야...'라고 하면, '닥쳐! 곰! 곰이라고 불러!!'라고 

내게 철저한 쇠뇌교육을 시키기 일쑤였다. 처음엔 누나 눈치 보느라 곰이라고 불렀던 

것이 이제는 버릇이 되어, 독서실 가는 길에 과일을 파는 녀석을 보고 '어, 곰이 돈을 

거슬러 준다...'라고 혼자 중얼거릴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곰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으니. 

그날따라 일찍 퇴근하신 아버지가 웬일인지 포도가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분주하게 저녁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는 생각할 것도 없이 누나를 부르셨고, 

과일가게에 다녀오라는 어머니 말씀에 누나는 얼굴까지 하얘지며 도리도리를 쳤다. 

어머니는 나를 돌아보셨다. 그리고 나는 '엄마, 나 공부해야 되는데?'라는 말도 채 못해보고 

신발을 꿰어 신어야 했다. 어머니 등뒤에서 무섭게 노려보는 내 하나밖에 없는 

누나를 위해...........아아, 과일 가게가 하나만 더 있었어도 난 아버지 옆에서 6시 내고향이나 

보고 있었을 것을....젠장. 

아직도 훤한 초여름 저녁, 짧은 골목을 걸어 나와 곰이 살고 있는 과일 가게로 향했다. 

제법 선선하게 부는 저녁 바람이 반바지 사이로 밀려 들어왔다. 아, 시원하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제일 힘들게 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전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해도 되긴 하지만 어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하셨다. 

이 동네 학교는 물이 안 좋아 죄다 깡패같은 것들 밖에 없다시며 교통비 더 줄테니 

1년 반만 더 고생하라고 하셨다. 그 당시 '교통비 부풀려 삥땅치기'에 눈이 멀었던 

나는 씩씩하게도 "응!"이라고 대답했었다. 결과는? 묻지마라. 우리 어머니가 바보도 

아니시고, 학생 버스비도 모르시겠는가. 머리가 나쁜 나는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똑똑하신 분인지도 깜빡 했던 것이다. 

여튼 그런 이유로 나는 이 동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내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가끔 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 가는 독서실 가는 길이나 겨우 익힐 정도였다. 

그런 내가 과일 가게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독서실 가는 길에 가게가 있기 때문이라는 아주 초라할 정도로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자주 지나치기는 했지만 직접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사실 나는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누나가 말했던 그 곰, 

멀리서만 봤던 그 커다란 녀석을 가까이서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우습게도 설레이기까지 했다. 난 가끔 그렇게 뜬금이 없다. 

과일가게 앞에 도착한 나는 부러 큰 숨까지 들이쉬고 주황색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온갖 과일 향기가 내 얼굴 위로 휙 덮쳐왔다. 

"저....계세요..."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게 안의 반을 채우고 있는 나무 마루 위의 흑백 티비만이 

신나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보고 계실, '6시 내 고향'이다. 

정말...아무도 없는건가.. 

"흠흠....아무도 안 계세요..." 

"뭐야." 

헉....놀라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앞에는 아무도 없는데 어디선가 목소리는 들리는 것이다. 

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앞은 물론, 왼쪽, 오른쪽, 심지어는 뒤에도 없는 것이다. 

나는 쥐고 있던 돈을 꼭 여며 쥐고 그대로 튈 준비를 했다.  그대로 튀어서 나는 누나를 붙

들고 말하고 싶었다. 누나, 과일가게에는 곰이 아니라 귀신이 살아!! 라고... 

"야!!" 

또 한 번 들려오는 정체 모를 목소리에 나는 그만 가게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슬러 가게문을 붙들고 서 있으려니 그 목소리가 이번엔 

웃기 시작했다. 키득키득.... 

"야, 위를 봐, 위를!"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뭔가 굉장히 흉측한 것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에 

그냥 뒤돌아 나와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 놈의 눈이 미쳤는지 지 마음대로 위를 

올려다보지 않겠는가. 결국, 나는 봐 버리고 말았다. 이층방...처럼 보이는 작은 회벽 

사이 조그맣게 뚫려진 사각창문을....그리고, 그 사이로 눈과 코와 입만 쏙 내밀고 

앉아있는 그 곰으로 추측되는 녀석을.... 

"뭐 사러 왔냐?" 

곰이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아버지가 뭘 드시고 싶어하셨더라... 

사과였던가...아니야...그럼, 배? 아닌데....뭐였지..뭐였더라... 

얼마나 놀랬으면 조금 전의 일도 잊어버리는 바보 칠푼이가 되어 버렸을까. 

"뭐 사러 왔냐니까??" 

"아....저...그..그러니까......아 그래, 저거..저거.......요..." 

곰의 눈동자가 쉭 돌아가더니 내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내 쪽으로 눈을 또 쉭 하고 돌렸다. 

"복숭아?" 

"어....예..." 

"잠깐 기다려, 곧 내려 갈테니까." 

하더니, 녀석의 얼굴이 사라져 버렸다. 녀석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쿵쿵......일단은 발소리부터 곰이 맞다.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위로 녀석의 맨 다리가 드러났다. 

슬리퍼를 신고 있는 녀석의 다리는 우리 아버지보다도 굵었다. 

유난히 길다 싶은 다리가 다 끝나가나 싶더니, 드디어 녀석의 커다란 상체가 보였다. 

후줄근한 흰 면티로 가려진 넓직한 어깨, 보기만 해도 단단해 보이는 가슴, 

그리고 그 위에 달린 녀석의 까무잡잡한 얼굴........뭐야...곰이 아니잖아.......타잔이잖아..... 

"몇 개 살꺼야?" 

넋을 빼고 섰는 내게 녀석이 까만 봉투에 훅하고 입김을 불며 물었다. 

나는 손에 쥔 만원을 녀석에게 내밀었다. 

"만원 어치 채워서 줘.......요...." 

다짜고짜 반말 지껄이인 녀석에게 무슨 '....요'자냐 싶겠지만, 

녀석 덩치 한 번 보면, 그런 소리 못한다..... 

녀석은 가지런히 쌓인 복숭아를 이리저리 휘젓더니 조금씩 벌레 먹은 것들만 

쏙쏙 골라서 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게 어찌나 속상하던지, 

말은 못하겠고 아주 속이 쓰려 죽는 줄 알았다. 

"자, 여기." 

녀석은 복숭아 네 개가 담긴 까만 봉지를 한 손으로 성의 없게 내밀었다. 

얼른 받지 않으면 땅바닥에 그냥 떨어트릴 것 같아 잽싸게 받아 채었다. 

봉지를 받은 나는 오늘의 이 무용담(?)을 식구들에게 떠벌릴 생각으로 

허겁지겁 가게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바로 그때, 녀석이 내게 상업적 용어(?) 이외의 말을 건넸다. 

"니네 식구들, 복숭아 좋아하냐?" 

나는 한 쪽 다리는 문턱 밖으로, 나머지 한 쪽은 가게 안으로 들여놓은 아주 

우스운 꼴로 녀석을 돌아봤다. 녀석이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다. 

"며칠 전에 니네 누나가 복숭아 들고 가지 않았냐?" 

아...먹지도 못하고 흉기로만 쓰였던 그 복숭아.... 

세상에...다리털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며칠 전 복숭아 몇 개 사간 우리 

누나를 다 기억하다니........가 아니라, 잠깐, 잠깐. 이 녀석, 어떻게 그 털 많은 

여자가 우리 누나라는 걸 알고 있지? 누나가 떠들어대기라도 했나? 

이러하고 저러하고 그러하게 생긴 놈이 제 동생이랍니다...라고...? 

"나...알아.......요..?" 

겁도 없지. 타잔께서 아신다면 아시는거지, 뭘 아냐 모르냐 따지고 앉았냐 김주영! 

빨리 튀어!! 

"저 골목 끝 집에 살지? 한 달 전쯤 이사 왔잖아." 

녀석은 자랑스러운 듯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퍽이나 자랑스럽겠다.... 

"너, 이름이 뭐냐?" 

"어....예?" 

"이름, 니 이름말이야." 

녀석은 매너 좋게 나를 향해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다시 물었다. 

기다란 갈색 검지의 위력에 놀란 나는 삥땅 뜯기는 초딩마냥, 

잔뜩 쫄은 목소리로 대답해 버렸다. 

"김..주영..." 

"뭐? 안 들려." 

"기..김..주영..." 

"장난하냐? 크게 좀 말해 봐!" 

"김주영!" 

"그래, 그러니까 좀 사내답네." 

나쁜 새끼....처음부터 알아들어 놓고서는... 

"난 최산들이다. 고 2야." 

이름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지 않겠다. 그 엄청난 언밸런스로 인한 쇼크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또 하나의 언밸런스, 녀석의 나이. 

고 2라니....저렇게 크고, 저렇게 늙어빠진 놈이 고 2라니... 

무엇보다도!! 내 '..요'자...내 '...요'자 돌려 줘!!! 

"동갑인 것 같은데 앞으로 아는 척이나 좀 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내 나이까지 꿰고 있던 녀석이 큼지막한 손을 척하니 내밀었다. 

저 손에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나는 얼른 녀석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하하, 친구가 생기다니....이렇게 기쁠..수가... 

"자주 놀러와라, 복숭아 재고 많다." 

"으응...." 

알았으니, 그만 좀 놔라....손 으스러지겠다... 

"그럼...그만 가볼게..." 

"그래." 

"아..안녕...." 

"음, 안녕." 

"저..저기..." 

"왜?" 

"소..손..." 

몇 번을 안녕을 고해도 놔 줄 줄 모르는 녀석의 손을 가리키자, 

녀석이 그제야 손을 놓으며 멋쩍게 웃었다. 

"하하...미안." 

"으응...그럼..." 

나는 혹시라도 허둥지둥 뛰어가면 녀석의 비위를 거스를까 싶어, 

최대한 태연한 걸음걸이로 가게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보 선수 마냥 우스운 꼴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골목 입구가 코앞에 보이기 시작했을 때서야 미친 듯 쿵쾅거리던 심장이 

제 정신을 찾기 시작했다. 

헌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이제 곧 내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어리석은 나는 안심하고 말았고,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는 즉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는 옛날 이야기가 생각났지만, 

미련한 세인 김주영은 어느 새 과일 가게를 향해 뒤돌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가게 앞 도로까지 나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녀석을. 

그리고 나는 들었다. 손나팔까지 만들어 내게 소리치던 녀석의 목소리를. 

"김주영!! 니 다리가 훨씬 예쁘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나는 소금기둥이 되지는 않았지만, 

낮에 먹은 비엔나 쏘세지가 일동 기립하는 것 같아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누나가 내 손에 들려있던 봉지를 휙 잡아 채었다. 

"뭘 하느라 이렇게 늦어? 포도밭에 가서 따오는 것도 아니.......아악!!" 

봉지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던 누나는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정신이 일원 반푼 어치도 없던 나는, '이 새끼, 너 나 놀리려고 복숭아 사왔지! 맞지!!' 

라며 복숭아 봉지를 붕붕 휘둘러대는 누나에게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거실 한 가운데 멍하니 서서 누나 다리와 내 다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볼 뿐.... 

나는 그 날 오래도록 잠이 들지 못했다. 

나는 녀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곰일까, 타잔일까.... 

결론은 이러했다. 

녀석은 곰도 아니고, 타잔도 아니었다. 

누나나 나나, 녀석이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 당해 그런 별명을 붙여버리고 만 것 같다. 

낡은 면티에 색빠진 반바지를 입고 있던 그 녀석은, 

그냥, 과일 가게 아들내미였다. 

평범한....아니, 

조금....느끼한, 

과일 가게 아들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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