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22/22)
  •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사실 시그니에게는 며칠 전부터 크나큰 고민이 하나 있었다.

    뿌뿌에 가고 싶어….

    그랬다. 그녀는 자신이 살던 동네 골목 어귀에 있는 그 작은 카페가 너무나 그리웠던 것이다.

    며칠 전부터 그 카페의 핫초코가 먹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많이 먹으면 이가 상한다고 하면서도 늘 핫초코 위에 마시멜로우를 듬뿍 띄워 주던 카페 주인 카리나도 그리웠고, 그녀가 핀란드에서 가져온 알록달록 예쁜 무늬의 컵과 테이블보도 그리웠다.

    하지만 그 말을 누군가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일레나가 말했기 때문이다. 왕녀님께서는 절대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굴면 안 된다고.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분이시니까요. 항시 의젓하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누구에게라도 떼를 쓰고 곤란한 부탁을 하시면 안 됩니다. 특히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는 절대로 그러시면 안 되어요. 차라리 저희에게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중요한 이야기들은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 말씀을 드릴 테니까요.”

    일레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시그니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전부 다 폐하와 제이에게 전해지지는 않을 거라는 걸. 일레나는 ‘중요한’ 이야기들만 두 사람에게 전달하겠다고 했으니까. 뿌뿌에 가는 일은 결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시그니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침대에 누워 언젠가 제이와 함께 뿌뿌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잠이 들곤 했다. 그러면 그 밤에는 항상 뿌뿌에 가는 꿈을 꿨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금요일이었다.

    “시그니, 나랑 잠깐 외출할까?”

    제이의 말에 시그니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와 함께 외출을 나가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함께 병원에도 다녀오고, 성당에도 다녀오고, 수잔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정말로, 정말로 제이와 단 둘이서만 왕궁을 나섰던 것이다. 늘 옆에 있던 경호대원 아저씨들도 없었고 수잔도 없었다. 심지어 제이는 리니도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제이, 리니는?”

    시그니가 묻자 제이는 “리니는 자고 있으니까.” 라고 했다.

    “오늘은 둘이서만 다녀오자.”

    그리고 제이는 오랜만에 직접 운전을 했다. 차는 성당을 지나고 병원도 지나고 백화점과 레스토랑이 있는 시내도 지나서 예전에 자신들이 살던 동네로 향했다. 익숙한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조금씩 두근거리던 시그니의 심장은, 늘 꿈에 그리던 골목길에 차가 멈춰서는 순간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가자.”

    제이가 우산을 씌워주며 말했다. 제이는 어디로 가자고 말하지 않았지만 시그니의 발걸음은 이미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시그니!”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리나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이게 얼마만이니. 아가.”

    카리나는 몹시 반가워하며 시그니를 끌어안았다. 순간 시그니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족들이나 수잔 외의 누군가가 자신을 시그니, 아가, 라고 부른 게 너무나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나, 왜 우는 거야?”

    놀라 화들짝 몸을 떼는 카리나에게 제이가 웃으며 “좋아서 그래요.”라고 말했다.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 뒤 그는 시그니를 데리고 늘 앉던 창가 자리로 갔다.

    “핫초코 하나랑 맘버그 주세요.”

    아직도 울고 있는 시그니를 대신해 핫초코를 주문한 뒤 제이는 메뉴판을 카리나에게 돌려줬다.

    “마시멜로우 많이?”

    “네, 아주 많이요.”

    카리나가 웃으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제이는 그때까지도 울고 있는 시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있잖아, 시그니.” 하고 말했다.

    “뭐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면 돼. 어차피 시그니가 바라는 것들은 큰 게 아니니까, 그냥 얼마든지 말해도 돼. 정말 만약에 시그니가 어려운 부탁을 한다면 그땐 폐하랑 내가 상의해서 결정을 할 거니까, 판단은 우리에게 맡기고 시그니는 일단 원하는 걸 말하면 되는 거야.”

    제이의 목소리가 너무나 다정해서, 언제나 이곳에서 마주 앉아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이의 목소리 그대로라서 시그니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실은 핫초코도, 카리나도, 뿌뿌의 찻잔과 테이블보도 모두 다 그리웠지만 무엇보다 그리운 건 제이와의 시간이었다. 뿌뿌에서 제이와 함께 보냈던 단 둘만의 시간.

    물론 왕궁에서도 제이는 늘 자신과 함께 있어 줬다. 하지만 왕궁에는 제이 외에도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제이는 단 둘이 있을 때는 제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지만,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순간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왕궁 밖으로 나가면 더더욱 사람들이 많아졌다. 일레나는 절대로 밖에서는 제이를 제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고 했다. 말투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래서 시그니는 제이와 외출을 하는 게 좋았지만 힘들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수할까 봐 말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그니는 제이와 함께 외출하는 게 좋으면서도 싫었다.

    “미안해. 빨리 못 알아차려서.”

    제이의 말에 시그니는 고개를 저었다. 제이가 사과하는 건 싫었다. 제이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오히려 제이가 이렇게 사과하게 만든 자신이 잘못한 거였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 거였는데, 아예 뿌뿌에 오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으면 되는 거였는데, 그걸 못해서 결국 제이가 사과하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미안해, 제이….”

    “아냐, 이건 시그니가 사과할 게 아니야.”

    제이의 손길이 더욱 다정해졌다. 아직도 훌쩍이는 시그니의 뺨을 손으로 닦아 주며 제이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더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나온 김에 다 하고 가자. 뭐든 다 들어 줄게.”

    “정말…?”

    시그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응, 하고 제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아예 그러려고 시그니랑 단 둘이 나온 거니까.”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어디 가고 싶어? 다정하게 묻는 제이의 말에 시그니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말로 말해도 되는 걸까. 뭐든지. 내가 원하는 걸 전부 다.

    하지만 막상 말하려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제이와 함께 뿌뿌에 온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래도 말해 봐. 지금 만약에 하느님이 나타나서 소원 한 가지를 들어 준다면 뭘 말하고 싶어? 그걸 나한테 말하면 되는 거야.”

    그 말에 시그니는 코를 훌쩍이며 되물었다.

    “지금 딱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하면?”

    “응. 지금 딱 한 가지만, 바로 생각나는 걸로.”

    시그니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 만약 하느님이 나타나서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준다면… 그럼 나는 아마도….

    ***

    “오셨다.”

    제이가 말했다. 시그니는 얼른 창밖을 쳐다봤다. 검은 승용차 한 대가 골목길에 멈춰 서 있었다. 곧 차의 문이 열리고 리욘이 차에서 내렸다. 그는 우산도 쓰지 않고 곧장 카페를 향해 걸어왔다.

    “시그니.”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향해 웃는 리욘에게 시그니는 눈을 크게 뜨며 “폐하, 리니는 왜 안 왔어요?” 하고 물었다.

    “리니는 다음에 데리고 오려고.”

    “다음에… 또 와요?”

    “물론이지. 또 올 거야.”

    그렇게 말한 뒤 리욘은 시그니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시그니랑만 같이 있을 거야.”

    “정말요…?”

    시그니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물론이지.”

    리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맞은편에 앉은 제이에게 말했다.

    “여긴 뭐가 맛있지?”

    “탄산수요.”

    제이의 말에 리욘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건 맛이 없나?”

    소리를 낮춰 묻는 그에게 제이가 역시 소리를 낮춰 말했다.

    “다 너무 달아요.”

    “그래? 난 단 것도 상관없긴 한데.”

    그 말에 시그니는 “핫초코요!” 하고 외쳤다.

    “핫초코가 제일 맛있어요, 폐하.”

    “그래? 핫초코가 맛있어?”

    웃으며 묻는 리욘에게 시그니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시멜로우도 넣어서 먹어야 돼요.”

    “그럼 마시멜로우를 넣은 핫초코로 하지.”

    리욘이 말하자 제이는 약간 미묘한 표정으로 웃더니 곧 카리나를 향해 “카리나, 여기 마시멜로우를 넣은 핫초코요.” 하고 말했다.

    핫초코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리욘은 연신 시그니의 머리를 쓰다듬고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신이 당장 소원 한 가지를 들어 준다고 하면 나랑 리니를 이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할 거라니.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특하다는 듯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짓던 그가 제이에게 말했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당신 딸이야.”

    “전 이렇게 안 착해요.”

    “그럼 역시 내 딸인가 보군.”

    “…….”

    “뭐지 그 표정은?”

    아닙니다. 제이는 고개를 돌렸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향해 눈썹을 한 번 꿈틀거려 보이고는 이내 제 옆에 앉은 시그니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무튼, 시그니. 제이가 말했겠지만 넌 좀 더 멋대로 굴어도 돼. 아직은 그래. 아직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도 되는 시기인 거야.”

    나중에는 아마 그러고 싶어도 못 그럴 거거든. 리욘이 씁쓸한 미소로 말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자신과 같은 자리에 올라 같은 책임과 의무를 지고 살아가야 할 딸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이내 제이를 향해 말했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이 아이는 안 바뀔 거야. 절대 제멋대로 굴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지? 당신 딸이니까.”

    리욘의 말에 제이가 말없이 웃었다.

    “자아, 마시멜로우가 듬뿍 들어간 핫초코가 나왔습니다.”

    카리나의 말대로 핫초코에는 마시멜로우가 잔뜩 들어 있었다. 컵 위로 수북하게 올라온 마시멜로우를 보며 리욘이 이게 뭐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곧 그는 옆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딸에게 물었다.

    “마시멜로우 먹고 싶어?”

    “네!”

    “좋아. 그럼 이 마시멜로우는 모두 시그니에게 줄게.”

    “정말요?”

    “정말이지, 그럼.”

    말하며 그는 스푼에 가득 마시멜로우를 떴다. 너무 많습니다, 폐하. 제이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직접 아이의 입안에 넣어 줬다. 시그니는 곧 마시멜로우를 입에 가득 담고 열심히 오물거렸다.

    “맛있어?”

    시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는데.”

    리욘이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시그니는 지금 무척이나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리니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리니가 자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아주 잠깐 했다. 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왕궁으로 돌아가면 리니랑 더 잘 놀아 줘야지.

    굳게 다짐하며 어린 왕녀는 입안의 마시멜로우를 꿀꺽 삼켰다. 삼키고 나자 달콤한 향은 더욱 진하게 입안에 남았다. 그 달콤함이 아이를 더욱 행복하게 했다. 아이는 평생 기억하리라 다짐했다.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지금의 이 달콤한 순간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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