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이야기였지만, 리욘은 사실 굉장한 노력파였다. 일단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가 노력을 기울이는 대상은 몹시 한정되어 있었다. 자신의 배우자, 그리고 아이들의 엄마, 또 이 나라의 왕비. 결국 셋 다 같은 사람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리욘은 그랬다. 제이에 한해서만큼은 매우 집요하면서도 성실한 노력파가 되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만큼 절실하고 간절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리욘이 제이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이었다. 그때 그는 열아홉 살이었고, 제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리욘은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제노스 출신의 경호원이 굉장히 싫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노스는 그에게 혐오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 싫은 건, 자신이 그 제노스를 처음 본 순간 그를 상대로 강한 성적 욕구를 느꼈다는 사실이었다. 그야 남창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남창치고는 애교도 없고 사람 대하는 태도도 굉장히 뻣뻣했지만, 서툰 척 연기하는 거라고 믿었다. 남창이 아닐 거라고는 추호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은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꽤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남창이. 아니, 남창이라고 생각했던 경호원이. 얼굴만은 완벽한 자신의 취향이었다. 서늘한 눈매도, 날렵한 콧대도, 얇지만 빨기 좋은 모양을 하고 있는 입술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지닌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남창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게 금욕적인 인상을 풍기는 것도 좋았다. 이 단정한 얼굴이 잔뜩 흥분에 젖어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 짧은 순간에도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제노스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하필 제노스를 상대로 발정했다니. 자신에게 이런 끔찍한 경험을 안겨 준 그 제노스가 더욱 경멸스럽게만 느껴졌다. 그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있는 대로 심술을 부리고 부러 못된 말로 상처를 줬다. 모욕적인 언사는 기본에, 자신에게 칩을 가져다주기 위해 찾아온 그의 얼굴에 상처까지 입혔다.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면 리욘은 지금도 혼자인 방에서조차 낯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게다가 그 후에 자신이 심신 상실 상태에서 저질렀던 행동까지 생각하면 정말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물론 제이는 이해심이 많은 데다 사려 깊기까지 한 남자라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도통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제이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리욘은 그만큼 더 제이에게 잘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도 그때의 과오를 다 갚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아껴 주고 싶었다. 과거의 일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지금 사랑 받고 있다는 생각만 들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리욘은 본인이 굉장히 이기적인 데다 독선적이기까지 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제이와는 다르게 배려를 하기 보다는 배려를 받는데 익숙한 타입이었다. 그런 건 타고나는 거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욘은 늘 공부하고 연구했다. 미리 찾아보고 익혀 두지 않으면 절대 본인은 배려 따위 못 할 인간임을 알아서였다.
제이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알아야 챙겨 줄 수 있고 배려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우선 임신과 출산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엄청난 양의 책을 사들였고 수십 편의 다큐멘터리와 의대 강의용으로 제작된 영상물까지 구해다 다각도로 탐구했다. 이렇게까지 학구열을 불태운 건 국제학교를 졸업한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노력에 비해 성과는 영 별로였다. 어차피 모든 임산부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지만, 제이는 아무래도 남자에다 제노스다보니 여러 면에서 평균과 조금씩 어긋나는 증상을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이행하는 건 역시 조금 달라서, 리욘은 본의 아니게 제이에게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를 주고 말았다. 덕분에 제이는 3개월이 훌쩍 지나 입덧을 시작하고 경미한 임신 우울증 증상도 보였다.
물론 임신 우울증 같다는 건 닥터 블리스의 의견이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은 제이는 “글쎄요? 우울증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뭐, 호르몬 영향으로 평소보다 더 잡생각이 많아졌던 걸 수는 있겠군요.”라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넘겼지만 리욘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침통해하는 그가 안타까웠는지 제이의 주치의인 니나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폐하. 임신 우울증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바로 산후 우울증이에요. 뭐든 애 낳고 난 뒤가 더 중요한 법이랍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잘 해 보세요.”
그녀의 말대로 리욘은 이번에야말로 잘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이 사 모은 서적들을 모두 뒤져 출산 관련 항목을 살펴보았다. 진통의 기미를 알아차리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출산 이후의 관리 방법과 효과적인 산후조리법까지 죄다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심지어 전문가를 만나 산후 우울증 예방 프로그램의 매뉴얼까지 익혔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력에 비해 성과가 형편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리욘의 탓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제이 때문이었다. 아니, 제이 덕분이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산모와는 달랐다. 첫 출산 때도 진통 네 시간 만에 아이를 낳았다던 그는 이번에는 진통이 오는 것 같다고 해서 병원에 가자마자 두 시간이 채 안 되어 아이를 낳았다. 남자는 여자보다 골반이 좁아 난산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는데 제이는 그런 것도 없었다. 오히려 여자보다 밀어내는 힘이 월등히 좋아 수월하게 낳은 것 같다고 의사는 말했다.
출산 과정이 비교적 수월해서인지 회복도 빨랐다. 제이는 아이를 낳고 이틀 뒤 병원에서 퇴원했다. 궁에 돌아오고 사흘 뒤부터 시그니와 함께 하루에 두 번씩 산책을 다녔고, 그로부터 다시 사흘이 지난 뒤에는 운동을 시작했다. 당연히 리욘은 대경실색했다.
“운동을 한다고? 아이를 낳은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하마터면 제정신이냐는 소리가 나올 뻔했다. 리욘이 이렇게 나올 걸 알았는지 제이는 미리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그의 귀에다 갖다 댔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니나가 “이제 조금씩 움직여도 괜찮아요. 그리고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과격한 운동이 아니라 출산 후 몸매 다지는 차원에서 산모들이 많이 하는 그런 스트레칭 같은 거예요.” 라며 열심히 제이의 편을 들어 줬다.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 만에 운동은 위험하지 않느냐는 말이지.”
좀 더 안정을 취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는 찰나, 니나가 말했다.
“운동은 산후 우울증 방지에 좋아요. 특히 전하께서는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시잖아요. 저라면 무조건 권하겠어요.”
리욘은 휴대전화의 통화가 끊기기도 전에 제이에게 말했다.
“다치는 일 없게, 조심해서 하도록 해.”
“걱정 마십시오.”
어차피 그렇게 격한 운동도 아니니까요.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제이는 다시 리욘에게 말했다.
“격한 운동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매뉴얼이 단조로워서요. 운동이라기보다는 그냥 동작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이런 하나마나한 운동 대신, 제대로 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전에 다니던 재활 훈련 센터에 나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게 그가 웬일로 대낮부터 집무실을 찾아온 목적이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차라리 트레이너를 왕궁으로 불러서 한다면 모를까, 센터에 직접 나가는 건 안 돼.”
당연히 리욘은 딱 잘라 말했다. 뭐라고 더 부탁의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이는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가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니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폐하. 말씀드렸잖아요. 운동은 산후 우울증 예방에 좋….”
리욘은 전화를 끊고 곧장 제이에게 연락했다.
“뭐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다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회복에 무리만 없다면 상관없어.”
수화기 너머에서 제이가 드물게도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다행히 제이는 운동에 잘 적응을 했…다기보다는 애초에 운동 체질이었기 때문에 아주 즐겁게 체력을 다져 나갔다.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가 대단했다. 연이은 부상과 임신으로 일 년 가까이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던 그였다. 그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남는 시간을 모조리 운동에 쏟아 부었다. 최근에는 왕궁 4층의 수영장에도 드나들기 시작했다. 유산소와 무산소를 병행하며 왕궁에 상주하는 마사지사에게 관리까지 받은 덕분인지 하루가 다르게 몸이 달라졌다. 지방은 빠지고 근육이 붙으면서 말 그대로 탄력 있는 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배우자인 리욘으로서는 싫을 이유가 없었다.
“싫을 이유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요, 폐하. 기뻐하셔야 하는 겁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회복도 빠른 데다 산후 우울증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런데 왜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세요.”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야.”
그렇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었다. 그냥 약간 김이 샜을 뿐.
자신이 그동안 다각도로 연구하고 전문가의 조언까지 얻어 계획한 산후 우울증 방지 프로젝트가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게 리욘은 못내 아쉬웠다. 산후 우울증 방지 프로젝트라고 해서 딱히 뭐 거창한 프로그램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같이 산책하기, 볕 좋은 오후에 티타임 갖기, 대화 많이 하기, 주말에는 반드시 가까운 교외나 근처로 외출하기, 가급적이면 아이들 없이 둘 만의 시간을 자주 갖기 등등, 간단한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간단하다고 해도 리욘의 입장에서 이것들은 모두 시간을 따로 빼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두어 달 전부터 일을 미리미리 처리해 두면서 시간을 벌어 뒀다. 에시르에선 아내가 출산할 경우 남편도 30일간의 출산 휴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리욘에겐 있으나 마나한 제도였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열심히 일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또 그 기간 동안엔 독수공방 신세였다. 막달로 들어서면서 제이는 도통 잠을 자지 못했다. 제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 시기의 임산부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생활이 불가능했으니까. 배가 불러 방광이 눌린 탓에 밤새 몇 번이나 깨는 게 일이었다. 그때마다 같이 잠에서 깨는 리욘에게 미안했던지 제이는 폐하께선 당분간 본궁에서 지내시라고 부탁 비스무리한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다시 본궁으로 쫓겨 온 리욘은 잠도 오지 않는 긴 밤 내내 쌓인 업무를 처리했다. 이번에야 말로 제이가 아이를 낳고 나면, 옆에 붙어서 직접 보살펴도 주고 산후 우울증 따위 얼씬도 못하게 돌봐 줄 거란 일념 하에.
그런데 그 모든 다짐과 계획과 각오와 노력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만 것이다.
“음… 확실히 김이 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잖아요. 에이나르가 말했다.
“어쨌든 전하께서 건강하시고 또 기분도 좋으신 듯하니까요.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재활 센터라면 예전에 잠깐 다니셨던 거기 말씀하시는 거죠? 그때도 다 알아보셨잖아요. 전문 센터라 아마 전하 몸 상태에 맞춰서 프로그램이라든가 운동 메뉴 같은 거 잘 짜 줄 겁니다. 뭣보다 그 방면으로는 전하께서 더 잘 아세요. 무리하는 일 없이 알아서 잘하실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에이나르는 말했지만 리욘은 비서의 말 따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차피 지금 리욘이 걱정하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이의 몸 상태를 걱정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 그는 지금 당장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혹독한 블라스트의 훈련을 견뎌 낸 사람이었다. 제노사이드 소속이라고 해서 가만히 앉아서 초능력으로만 일을 다 처리하는 건 아니었다.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해 일반적인 훈련 매뉴얼도 다 소화해 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그가 한때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용병이었다는 건 그만큼 신체 능력도 발군이라는 뜻이었다. 재활 센터에서 아무리 혹독하게 굴려 봤자 현역으로 구르던 시절에 비하면 그냥 숨 좀 차고 마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행여 다치거나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지금 문제는….
생각하는 찰나, 마치 밖에서 리욘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제이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하.”
머리가 젖어 있는 걸 보니 아마 지금 막 4층 수영장에서 내려오는 길인 듯했다. 게다가 와이셔츠 단추도 두어 개 정도 덜 잠근 걸 봐선 다시 올라갈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죄송합니다. 잠깐 들러 봤는데 마침 쉬고 계시는 중이라고 해서 들어왔습니다.”
노크 없이 들어온 사실에 대해 사과하는 제이에게 리욘은 괜찮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지? 왕비께서 이 시간에 이곳을 다 찾으시고.”
“아, 다른 게 아니라 이번 주말 약속 때문에요.”
몇 시라고 하셨죠? 다가오며 제이가 물었다.
“영화가 여섯 시에 시작이니 다섯 시에는 출발해야겠지.”
“그렇군요. 그럼 트레이너와 시간 조정을 좀 해 봐야겠네요.”
“주말에도 나가는 건가?”
“이번 주부터 그럴 예정이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대는 정말 철인 3종 경기에라도 나갈 셈인가.
한마디 하고 싶은 걸 참고 리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몸에 무리 안 가도록 열심히 해.”
“절대 무리할 정도로는 안 합니다.”
걱정 마세요.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오늘따라 더 예뻐 보여서 리욘은 속이 쓰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돌아서려는 왕비를 리욘은 “제이.” 하고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단추 잠그고 다녀.”
짧게 말하자 제이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덜 잠긴 와이셔츠와 아예 잠글 생각도 없이 풀어 헤쳐진 재킷을 보며 그는 아, 하고 중얼거렸다. 손으로 옷깃을 여미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수영장에 있다가 잠깐 내려온 거라서요.”
“알아.”
그래도, 라고 리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이는 리욘이 보는 앞에서 옷의 단추를 모두 잠근 뒤 다시 한 번 그럼 이만, 하고 인사했다.
그가 집무실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에이나르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와, 그런데 전하 얼굴 엄청 좋아지셨네요.”
“그래?”
“네. 아까 들어오시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왜, 얼마 전까지는 좀 부은 느낌이 있었잖습니까. 그게 확 다 빠지고 나니까 되게 샤프하고 멋있어지셨어요.”
“그리고?”
“아, 그리고 피부도 엄청 좋아지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리고 얼굴 자체가 되게 훤해지셨어요. 표정도 밝아지셨고.”
“그리고?”
“그리고 몸매도 굉장히 날렵해지셨고요. 전처럼 마르지도 않고 딱 좋아 보이세요.”
“그리고?”
“그리고… 더, 뭔가를 말씀드려야 하나요?”
이만하면 된 거 아닙니까, 이 이상 뭘 말해야 합니까… 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또 뭐 달라진 건 못 느꼈나?”
“달라진 게… 또 뭐가 있죠?”
멀뚱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는 에이나르를 보며 리욘은 속으로 외쳤다. 가슴 말이야, 가슴.
“자네 설마 못 본 거야? 아까 셔츠 위로 다 비치는 거 못 봤느냐고. 유두도 커지고 색도 짙어졌어. 저렇게 와이셔츠를 입고 재킷 단추도 제대로 안 잠그고 있으면 다 도드라져 보인단 말이지. 그런데도 신경을 안 써. 아니, 아예 모르는 눈치야. 저렇게 다 보인다는 걸.”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차피 에이나르는 깨닫지도 못했다는데 괜히 말했다가 도리어 다음부터 의식하고 힐끔거리면 그게 더 곤란했다.
“아냐, 됐어.”
이만 나가 봐. 손짓한 뒤 리욘은 책상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댔다. 조심스레 문이 닫히는 소릴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오늘이야말로 제이에게 반드시 말해야겠다고. 당신, 옷차림에 신경 좀 쓰라고.
***
결의를 다진 리욘이 왕자궁에 도착한 건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늦은 시각인데도 제이는 침실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리니의 방으로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를 품에 안은 제이가 유모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아, 폐하.”
오셨습니까. 웃으며 인사하는 제이의 옆으로 다가가자 그는 아이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채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방금 우유를 먹은 참이라서요.”
말하기가 무섭게 아이가 걱, 트림을 했다. 그 우렁찬 소리에 리욘은 깜짝 놀랐다. 보통 성인 남자가 탄산수를 한 병 다 마셨을 때에나 날 법한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이제 태어난 지 한 달 조금 넘은 아이의 어디서 이런 소리가 나는 거지.
그가 당황하여 바라보는 사이 아이는 내가 언제 그런 소릴 냈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다시 제이의 품에 안겼다. 리욘은 허리를 숙여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 아빠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느리게 한 번 눈을 깜박였다. 그대로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은 채 그 짙은 초록색 눈동자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아이의 뺨을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리며 리욘은 말했다.
“리니는 여전히 과묵하군.”
“기특하죠.”
제이의 말에 옆에 있던 유모가 “정말 순하세요.” 하고 웃었다.
예정일이 한참 지나고도 나올 생각을 안 해 리욘을 애닳게 했던 이 아들은 마치 그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 태어난 뒤로는 마냥 순하기만 했다. 아니, 이건 순한 정도가 아니었다. 갓난쟁이들은 눈 뜨고 있는 동안은 우는 게 일이라던데 이 아이는 도통 우는 일이 없었다. 눈 뜨고 있는 동안에는 그저 먹거나, 아니면 가만히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어차피 온몸을 둘둘 둘러 싸매고 있어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말이지 너무나 과묵하고 얌전했다. 가끔 너무 조용해서 자고 있는 건가 하고 들여다보면 여지없이 눈을 말똥말똥 뜬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지긋이 이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원체 아이답지가 않아서 제노스가 낳은 아이들은 다 이런 건가, 시그니도 이랬나 해서 물어 봤더니 그건 또 아니란다.
“리니가 좀 많이 얌전한 것뿐이에요.”
정말 착한 아기라고 제이는 웃었지만 리욘은 이걸 착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어디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가 슬그머니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 발달 검사 이야길 꺼냈다가 아직 한 달도 안 된 아기에게 무슨 발달 검사냐고 니나에게 혼만 났다.
“아예 안 우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기분 좋을 땐 신나서 소리도 지른다면서요.”
그 말대로 이 갓난쟁이는 아주 가끔 신나서 소리를 지른달까… 아니, 뜬금없이 소리를 내긴 했다. 잘 자고 있다가 갑자기 약! 하고 웃거나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던 상태에서 바아! 브! 하는 의미 불명의 소릴 내기도 했다. 그래놓고는 그 소리에 놀라서 쳐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과묵한 아들 덕분에 제이가 한밤중에 자다가 아이 울음소릴 듣고 뛰쳐나가는 일은 없어서 좋았다. 딱히 제 엄마를 찾으며 까탈스럽게 구는 일도 없어 유모들도 이렇게 순한 아기는 처음이라고, 너무 착하다고 입을 모았다. 제이가 지금 마음 놓고 운동에 매진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리니의 협조 덕분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엄마도 좀 찾고, 울기도 하고 그러지 그랬냐.
차마 갓난쟁이한테 말은 못하고 한숨을 쉬자니 아이의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아 주며 제이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폐하께서도 리니라고 부르시는군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왕비가 얄미워 리욘은 조금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다들 리니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이 어린 아들의 진짜 이름은 레오니데스였다. 아이가 이런 거창한 이름을 갖게 되기까지는 물론 사연이 있었다.
아이가 아직 뱃속에 있을 때였다.
“그나저나 이 녀석 이름은 뭐로 하는 게 좋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무뚝뚝한 녀석이 태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리욘은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가는 제이의 배를 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물었다. 시그니의 이름이야 제이 혼자 지을 수밖에 없었다지만(그리고 매우 잘 지은 이름이라고 리욘도 생각하지만) 이번만큼은 둘이 같이 상의해서, 아이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영웅의 이름을 붙여줄까? 아니면 성인의 이름을 붙일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 두 사람 이름에서 적당히 철자를 따서 만드는 것도 좋겠다, 고 말하려던 리욘은 이어진 제이의 말에 경악하고 말았다.
“리니라고 하죠.”
설마 했던 그 이름이 제이의 입에서 나오자 리욘은 당혹스러웠다.
“잠시만 제이. 혹시나 해서 묻는데, 시그니가 시그니라서 이 아이는 리니로 짓고 싶은 거야?”
“네.”
다른 이유가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이에게 리욘은 최대한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런 거라면 난 반대야.”
“음…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굳이 이유까지 묻는 걸 보면 제이는 처음부터 이 이름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유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제이. 난 그 동화를 정말 좋아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서 더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싫지만.”
리니는 얼간이야. 리욘은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얼간이요? 당황하여 묻는 제이에게 리욘은 그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평생,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동화 속 주인공에 대한 신랄한 비난을 시작했다.
“그 자식은 얼간이야. 왕자인 주제에 마녀에게 붙잡혔다고. 심지어 자기 신하들은 아무도 안 잡혔는데 혼자만 붙잡혔어. 왕자가 말이야. 보통 왕자는 그런 꼴 안 당해. 오히려 붙잡힌 사람을 구하러 가지. 그런데 그 자식은 마녀한테 붙잡힌 데다가 심지어 어린 소녀가 자길 구하러 오게 만들었단 말이지. 물론 이 동화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어. 모든 걸 다 갖춘 용사가 아니라 늙은 농부의 딸인 시그니가 왕자를 구하러 간다는 게 정말 멋있지. 그래서 난 시그니를 정말 좋아해. 하지만 리니는 아니야. 그 자식은 정말이지… 왕자의 얼굴에 먹칠을 했어.”
알겠어? 리욘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 쉬었다.
“네, 뭐…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제이는 썩 이해는 안 가지만 어쨌든 이해해 보겠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결국 시그니와 함께 마녀를 물리치고 나중에는 훌륭한 왕이 됐잖아요? 결과가 좋으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싫어.”
리욘은 딱 잘라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그 얼간이 왕자의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었다.
“그럼… 알겠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하죠.”
제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뒤 다시 이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제이는 이야기했다. 뭐든 좋으니 이름에 사자를 뜻하는 단어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리욘은 제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태어난 아이가 워낙에 제이를 쏙 빼닮은 까닭이었다. 수잔이 농담으로 제이 혼자 낳은 아이 같다고 할 정도였다. 에이나르가 옆에서 자신의 편을 든답시고 “아닙니다. 머리카락을 보세요. 폐하의 유전자는 왕자님께 저 아름다운 금발을 물려주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쓰는 바람에 다른 데에는 미처 관여를 못 한 것뿐입니다.”라고 했지만 그래 봤자 결국 닮은 구석이라곤 머리카락 색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보니 제이는 어떻게든 아이의 금발을 부각시켜서 이쪽과 마찬가지로 이름에 사자를 뜻하는 단어를 넣어 균형을 맞추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정말 그렇게라도 해야 겨우 둘이 낳은 자식이라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리욘은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사자를 뜻하는 단어라. 어떤 게 좋을까.”
“똑같이 리욘이라고 짓는 건 싫으신가요? 이곳에선 자식이 부모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도 많던데요.”
그 말대로 에시르를 포함한 북유럽 지역에선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왕실에서는 삼대가 다 이름이 똑같은 경우도 왕왕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리욘은 아들이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건 원치 않았다. 자신이 선대 중 어느 누구의 이름도 물려받지 않고 자신만의 이름을 가졌듯이, 자신의 아들 역시 오로지 그만의 이름을 갖길 바랐다.
그래서 몇날며칠 성인 사전을 뒤적여가며 자신의 아들에게 어울릴만한 이름을 찾았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순교자들 중에 가장 돋보이는 존재이며, 박학한 철학자이기도 했던 성 레오니데스의 이름을 그에게 붙여 주기로 했던 것이다. 제이가 원하던 대로 사자를 뜻하는 단어가 들어간 이름을 찾아낸 리욘은 몹시 뿌듯했다. 어떻게 이런 이름을 찾아내셨냐고 그러겠지. 기뻐하는 제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를 나섰다. 그리고-
“그럼 리니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이에게 리욘은 몹시 당황해서 “왜 그렇게 되는 거지?”라고 물었다.
“레오니도 아니고 레오도 아니고 리니라고? 왜? 어째서?”
“리니가 더 부르기 쉬우니까요.”
“…그냥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은 게 아니고?”
기가 차서 묻는 리욘에게 제이가 말했다.
“그럼 안 됩니까?”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때가 제이가 아이를 낳은 지 나흘 만의 일이었다. 혹시라도 그에게 산후 우울증의 기미가 보일까 리욘이 노심초사하며 닳도록 왕자궁을 드나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니, 안 되는 게 뭐가 있겠어.”
상관없지. 리욘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라도 자신의 말투 하나, 표정 하나에 제이가 마음을 다쳐 서운함을 느끼고 우울증에 빠질까 그는 부러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거지.”
어쨌거나 아이의 진짜 이름은 레오니데스니까. 본명이 리니가 아니면 된 거라고, 리욘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차피 제이 말고는 아이를 리니라고 부를 사람도 없었다. 저 이름은 어떻게 줄여도 리니가 될 수 없으니까.
…라고 생각을 했는데, 한 달이 지나고 나자 어째서인지 모든 왕궁의 사람들이 다 아이를 리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제이가 그렇게 부른 까닭도 있지만 누나가 시그니이다 보니 남동생은 리니라고 부르는 게 다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방에서 리니, 리니, 하고 불러 대다 보니 리욘도 그만 그 이름이 입에 익어버렸다.
“괜찮다니까요.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에요. 그리고 본명도 아니고 애칭이잖습니까.”
리니가 마녀에게 잡혀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깨를 으쓱이는 제이에게 “아니, 이 녀석은 마녀가 붙잡아 가려다가도 왠지 무서워서 제자리에 도로 갖다놓을 거 같아.” 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찰나였다.
“폐하!”
활짝 열린 방문 사이로 시그니가 함빡 웃음을 지으며 달려 들어왔다.
“시그니.”
리욘은 달려오는 아이를 품에 안아 올렸다.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리욘의 어깨에 매달렸다. 똑같이 한나절 만에 봐도 늘 이렇게 반가워하며 기쁜 얼굴로 자신을 맞아 주는 건 이 딸밖에 없었다.
“우리 딸.”
새삼 사랑스러운 마음이 솟구쳐 리욘은 아이의 뺨에 마구 입을 맞춰 댔다. 늘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모자만 보다 봄꽃마냥 환하게 웃는 딸을 보자 마음이 다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제이에게서 이런 딸이 어떻게 나왔을까 생각했는데, 리니가 태어나고 나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 딸은 자신을 닮은 거였다.
“오늘 불어 테스트에서 만점을 받았다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시그니는 뿌듯한 얼굴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래그래, 날 닮아서 머리도 좋은 우리 딸. 리욘은 다시 시그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시그니는 기분이 좋은지 다시 한 번 까르르 숨이 넘어가게 웃고는 리욘에게 물었다.
“폐하, 오늘도 여기서 주무시는 거예요?”
“시그니가 허락한다면.”
여긴 시그니의 궁이니까. 리욘이 말하자 아이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여기서 주무셔도 돼요….” 하고 말했다.
보통 아이가 태어나면 걸음마를 떼기 전까지는 아이를 왕비궁에서 재우며 보살피는 법이었는데, 제이는 본인이 왕자궁으로 옮기길 원했다. 혹시라도 시그니가 소외감을 느낄까 걱정된다는 게 이유였다.
“글쎄. 그런 걸로 소외감을 느낄 것 같지는 않은데. 워낙 어른스러운 아이잖아.”
“어른스럽게 굴어야 한다고 믿는 아이겠죠.”
그 미묘한 차이를 알 것도 같아 리욘은 제이가 왕자궁으로 옮길 것을 허락했다. 당연히 그날부터 리욘도 왕자궁에서 출퇴근을 하게 됐다.
***
…정말로 출퇴근만 할 뿐이지만.
욕실에서 머리를 털고 나오며 리욘은 생각했다. 침실로 들어가자 제이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언제나처럼 얇은 티셔츠 한 장 걸치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자니 어쩔 수 없이 도드라진 가슴으로 눈길이 갔다. 하필 티셔츠도 흰 색이라 더욱 티가 나는 듯했다.
그런데 에이나르는 전혀 눈치를 못 챈 것 같았단 말이지. 그럼 역시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가. 내가 계속 신경을 쓰고 있어서 더 눈에 띄는 걸까.
분명 오늘은 말을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는데, 막상 말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데 혹시 내가 혼자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건가 싶어서. 정말 그런 거라면 제이에게 큰 실례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저 부분이 조금 도드라져 보인다 해도, 그래도 그 말을 제이에게 할 수는 없었다. 가슴이 도드라져 보이는 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수영장에 가면 어차피 다 내놓고 다니는 게 남자 가슴이었다. 그런데 그가 단지 자신의 배우자이고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러지 말아라, 좀 더 조심해라, 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나 제이는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더는 자신의 실수로 그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았다. 특히 출산 후 12주까지는 산후 우울증 요주의 기간이었다. 조금이라도 여지를 줘선 안 됐다.
“운동 잘돼 가?”
결국 리욘은 딴소리만 하며 침대로 올라갔다.
“덕분에요.”
옆으로 몸을 조금 비키며 제이가 말했다. 자신을 보며 옆으로 돌아눕자 티셔츠의 넥라운드가 한쪽으로 흘러내리며 그 틈새로 살짝 오른쪽 가슴이 보였다. 더 넓어지고 색이 짙어진 유륜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다짐을 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자 어쩔 수 없이 조바심이 났다.
“거기서 옷은 뭘 입고 하지?”
침대에 누우며 리욘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평범하죠. 트레이닝 바지에 티셔츠.”
“지금 입고 있는 그런 티셔츠?”
“이거보단 땀 흡수 더 잘 되는 재질로요.”
그런 재질이 도대체 어떤 재질이지?
묻고 싶었지만 참고, 에둘러 말했다.
“듣기론 아이를 낳은 뒤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하던데. 좀 두꺼운 옷을 입는 게 좋지 않을까? 긴 걸로.”
“그렇긴 한데 어차피 실내라 따뜻하니까요.”
그리고 운동하면 더 더워서요. 제이는 찌푸린 얼굴로 웃었다.
“땀이 엄청 나거든요. 길고 두꺼운 옷은 무리예요. 덥다고 벗을 수도 없으니까.”
“그렇군….”
그나마 옷은 훌렁훌렁 안 벗는 거 같으니 다행인가. …아니, 옷 좀 훌렁훌렁 벗으면 어떻다고. 어차피 수영장에선 다 벗고 있는데.
이성과 감정의 격렬한 대립에 괴로워하고 있는데 제이가 취침등을 켜며 물었다.
“그런데 주말에 봐야 한다는 영화는 어떤 영화죠?”
“아, 그거. 그냥 스릴러물이야.”
아마도 그럴 것이다. 리욘도 자세한 건 몰랐다. 그저 오스카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라는 것만 알았다. 마침 개봉이 자신이 원하던 날짜 근처라 잘됐다 싶어 제이에게 말했다. 조카 된 입장에서 당연히 봐 주는 게 예의 아니겠느냐고. 당연히 제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은 안했지만 도대체 언제부터 오스카와 그렇게 친밀한 관계셨습니까? 라고 묻고 싶은 눈치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이유를 하나 더 만들었다. 아이슬란드와 에시르를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야. 이건 봐야 돼. 내가 이런 걸 봐 줘야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사실 영화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왕궁과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따로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러니까,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그럼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건데, 사실은 그러려고 했는데 다음 주말에 시간 비워 두라고 했더니 눈을 깜박이며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라고 묻는 모습에 괜히 부아가 나 저렇게 딴소리를 해 버렸다.
이 무심한 왕비는 아마 그날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겠지. 감도 못 잡고 있을 거다. 그러니 약속을 지난주에 했는데 이제 와서 트레이너와 시간을 조정할 생각을 하고 있겠지.
사실 말하려면 지금 해도 된다. 1년 전, 내가 그대에게 프러포즈를 했던 그날이라고 말하면 되는데, 그러자니 처음에 약속을 잡을 때 괜히 다른 핑계를 댄 게 마음에 걸렸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면 됐을 걸 홧김에 딴소릴 해 버리는 바람에 일이 요상하게 꼬여 버린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몇 달 전부터 기다려 온 날을 제이는 기억도 못 한다는 사실이 은근히 자존심 상했다. 이런 쪽으로 무심한 건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제이는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이건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다. 출산 후 기억력 감퇴를 호소하는 산모가 의외로 많다고 했다. 만약 제이가 무심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아이를 낳고 기억력에 문제가 생겨 이렇게 된 거라면 자신은 또 한 번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리욘은 하고픈 말을 참고 제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잘 자.”
“폐하도요.”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 웃는 얼굴을 보자 서운했던 마음도, 울컥한 기분도 다 가시는 것 같았다. 리욘은 제이의 뺨을 다정히 어루만진 뒤 눈을 감았다.
리욘이 잠든 후에도 제이는 꽤 오랫동안 혼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잠든 리욘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곧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그는 생각했다. 이거, 혹시 그건가.
***
“물론 가능하죠. 통계상으로만 봐도 자그마치 25%나 돼요.”
니나의 말에 제이는 팔짱을 낀 채 음, 했다. 그럼 역시 그게 맞는 건가.
“왜요? 뭔가 낌새라도 있었나요?”
“글쎄요… 낌새라고 해야 하나.”
요 며칠 뭔가 계속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리욘은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뭐든 하고픈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얘기하고 시원하게 원하는 답을 얻어 가는 사람이었다. 아니면 아예 내색조차 않고 혼자 조용히 해결하거나.
그런데 요사이 이상할 정도로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어제는 유독 더 그랬다. 왕자궁에 도착할 때부터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는데 결국 또 아무 말 않고 잠자리에 들기에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한번 들여다봤다. 그리고 굉장히 놀랐다. 정말이지, 별의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고 있어서. 말도 안 되는 비약에 하나마나한 고민까지 하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예전의 자신과 증세가 비슷한 듯했다.
“원인은 뭐죠?”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다들 각자만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잠시 고민하던 니나는 곧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엔, 폐하께서 아마 좀 서운하셨던 것 같아요.”
“서운하셨던 것 같다고요?”
누구한테요? 나한테요? 제이는 자신을 가리켰다. 니나가 조금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제이는 퍽 당황했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니나가 “전하의 잘못은 아니에요.” 하고 먼저 말했다.
“그냥, 폐하께서 혼자 서운해하시는 거죠. 물론 아닐 수도 있어요. 그냥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다는 거니까 참고만 해 주세요.”
그러면서 니나는 덧붙였다. 폐하께선 아마 전하께 의지가 되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임신 중에 많이 못 챙겨 준 것 같다고 굉장히 마음에 걸려하셨어요. 그래서 출산 후에는 그 몇 배로 챙겨 주고 신경 써 줄 거라고 아주 각오를 단단히 다지신 것 같더라고요.”
거기까지만 들어도 벌써 알 것 같았다. 한숨 쉬는 제이를 보며 니나가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 미소 지었다.
“사실 전하께서는 워낙에 다 알아서 하시는 편이니까요. 폐하께 의지하는 경우가 잘 없으시잖아요. 아주 특별한 몇몇 경우, 그러니까 부상을 당했을 때나 임신 중일 때에만 어쩔 수 없이 주변의 도움을 받는 편이시죠.”
그런데 리욘이 생각하기에는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았던 거다. 그야, 이제는 자신이 부상을 입을 일도, 아이를 가질 일도 없을 테니까. 전자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후자는… 웬만하면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리욘도 양심상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더욱 잘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잘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말 그대로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서 보살펴 주고 챙겨 주고 뭐든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수 있는 진짜 진짜 마지막 기회.
“그런데 전하께서 그럴 여지조차 안 주신 거죠.”
니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제이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한숨밖에 안 나왔다.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건강하고 회복이 빠르다는 건 기쁜 얘기지만, 그와 별개로 폐하께선 조금 허탈하셨던 것 같아요. 준비를 많이 하신 눈치였거든요. 그런데 그 준비가 한순간에 다 허사가 돼 버렸으니까요. 그 핑계로 전하와 같이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돼 버렸고요.”
그런데 그 서운한 걸 서운하다고 말도 못하고 혼자서만 삭이려니 더 죽을 맛인 거다. 그 전에 서운해해서도 안 되는 문제란 걸 아니까 더 괴로운 거겠지. 게다가 혹시라도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이쪽이 그 무섭다는 산후 우울증에라도 빠지면 그땐 정말 최악의 남편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거다.
애초에 태어나길 세상에서 제일 잘난 존재로 태어나 평생 남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아 온 사람이었다. 그러고도 모든 이들에게 사랑만 받았던 사람이 성격에 안 맞게 하고 싶은 말도 다 못 하고 혼자서 삭이기만 하려니 죽을 맛이었겠지.
“참 나….”
생각하니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똑같이 우울증을 겪어도 원인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나 싶어서.
아니, 뭐. 근본적으로는 상대방에게 더 잘해 주고 싶고, 도움이 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그러는 거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원인은 비슷한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그렇지, 산후 우울증이 웬 말인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니나가 “의외로 흔하다니까요.” 하고 드문 일이 아님을 알려 준다.
“말씀드렸잖아요. 생후 12주 미만의 아이를 둔 아빠들 중에 25%나 증상을 보인다고요. 네 명 중에 한 명이 겪는 증상이에요.”
“그렇다는 건 12주가 지나면 저절로 좋아진다는 얘긴가요?”
“그 시기가 지나면서부터 조금씩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니까요. 가장 혼란스러울 때잖아요. 아이 태어나고 석 달간.”
엄마도 아빠도 다들 참 힘들구나.
한숨 쉬자니 니나가 말했다.
“이 경우 가장 좋은 건 그거예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고,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고,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떠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 주는 거죠.”
니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제이에겐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었다. 자신은 나름 충분히 표현하고 있고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도 리욘은 늘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런 성격, 성향 차이에서 오는 간극은 아무리 해도 메우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는 수밖에 없겠지만.
“아무튼 고맙습니다, 닥터 블리스.”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나눈 대화에 대해선 폐하께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하자 니나가 그러죠,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로 돌아서려는 제이에게 니나가 “그런데, 전하. 이것 때문에 여기까지 내려오신 거였어요?” 하고 물었다.
“다른 용건이 있어서 오신 거 아니었나요?”
니나의 말에 제이는 그제야 아차, 하며 다시 돌아섰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니나에게 말했다.
“혹시 프로락틴 수치 검사를 좀 해 볼 수 있을까요?”
***
“누구라고?”
왕궁 건물을 나서며 리욘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전하의 예전 직장 동료들이요. 그러니까, 블라스트의 용병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여기 왔다고?”
“네. 왕비궁에서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리욘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필이면 오늘이냐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언제 도착한 거지? 방문 목적은. 몇 시에 떠날 예정이고.”
“지금 막, 15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왜 온 거냐고 하시면… 전하를 뵈러 온 거겠죠. 이따 11시에 비행기를 탈 예정이라고 합니다. 부룬디로 가는 길에 잠시 들렀던 거라고 하더군요.”
리욘은 손목의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1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제이에게는 늦어도 다섯 시에는 왕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해둔 참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세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것도 예정대로 다섯 시에 왕궁에서 떠날 때의 이야기겠지만.
“…미치겠군.”
다시 웃음이 나왔다. 웃는 이유를 알아차렸는지 에이나르가 옆에서 얼른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와의 약속이 먼저잖습니까. 전하는 원칙주의자세요. 아무리 오랜만에 본 동료들이 반가워도 폐하와의 약속을 취소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오늘이 보통 날도 아니잖습니까. 폐하께서 프러포즈를 하신,”
“몰라.”
“네…?”
에이나르가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비서에게 리욘은 참담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이 그날인 줄 모른다고.”
“전하께서요…?”
“그래.”
“마, 말씀 안 하셨나요?”
“안 했어.”
갈수록 어두워지는 국왕의 표정에 에이나르가 숨을 삼켰다.
“왜 안 하셨습니까. 전하 성격에 그런 거 따로 기억해 두고 챙기실 분이 아니란 거 뻔히 아시면서,”
“그래서 안 한 거야.”
리욘은 내뱉듯 말했다. 에이나르가 내가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네? 하고 되물었다. 왕비궁으로 들어서며 리욘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자존심 상해서.”
“…….”
에이나르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설마 국왕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그가 너무 놀라 걸음을 멈춘 사이 리욘은 빠른 걸음으로 왕비궁 1층의 응접실로 향했다. 멀리서 그를 알아본 사용인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 오셨다고.
“네. 네 분이십니다.”
“왕비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겠지. 제이는 오늘 오후 한 시부터 세 시까지 재활 센터에서 또 그 빌어먹을 운동을 열심히 하다 올 예정이었다.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서 바로 출발했다고 해도 앞으로 십 분은 더 있어야 도착할 터였다.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를 향했다.
“폐하.”
수잔이 일어서며 말하자 같이 앉아 있던 네 명의 남자가 놀란 얼굴로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옛 동료 분들이시라고요.”
리욘은 수잔에게 물었다.
“네. 제게는 부하들이고 제이에겐 동료들이죠.”
“소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수잔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부터 차례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크레이그, 막스, 슈킨, 블레어입니다.”
크레이그와 막스는 북미, 슈킨은 러시아계인 듯했고 블레어는 동양계 같지 않은 동양계였다. 마치 제이처럼.
수잔이 소개를 할 때마다 남자들은 나름대로 예를 갖춰 리욘에게 인사했다. 리욘은 그들 한명, 한명과 손을 잡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지막으로 블레어와 악수를 나눌 때 그는 직감했다.
“블레어입니다. 실물이 훨씬 더 미남이시군요.”
아마, 제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졌던 남자일 거라고.
자신을 보는 표정이 그랬다. 다른 세 명과는 달랐다. 크레이그와 막스, 슈킨이 처음 만나는 이국의 왕 앞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동안 블레어는 말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탐색하듯 위아래로 훑는 시선도 그랬지만 악수를 나누며 인사할 때 살짝 올라간 한쪽 입꼬리가 말하고 있었다. 너냐? 네가 바로 그 작자냐? 라고.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리욘은 블레어의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갑자기 세게 붙잡혀 당황했는지 블레어가 “아, 그럴 것 같습니다.” 하며 자기도 뒤늦게야 세게 리욘의 손을 잡아왔다. 제법 악력이 셌다. 하지만 체격에서 오는 힘의 차이를 극복할 순 없었다. 리욘이 웃으며 손을 흔드는 동안 블레어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결국 그는 먼저 손을 빼며 말했다.
“…성격도 좋아 보이시고요.”
“그 말도 자주 듣습니다.”
뻔뻔하게 말하며 리욘은 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도 다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그는 물었다.
“그럼 다들 제노사이드 소속인 겁니까?”
“아아, 아닙니다.”
크레이그가 답했다.
“슈킨과 블레어만 제노사이드 소속입니다. 저와 막스는 텔레키네시스 능력자가 아닙니다.”
“저도 능력이라고 해 봤자 염동력뿐이라서요. 그나마도 C급에 가까운 B급이라 사실 일반 병사나 다름없죠.”
슈킨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은 블레어는 꽤 능력이 뛰어난 제노스란 뜻이었다.
하긴, 동양계니까. 리욘은 생각했다. 어쩌면 제이처럼 슈퍼 프로바이더의 몸에서 태어난 자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든 제이와 공통점이 있다는 게 싫었다. 블레어의 뺀질한 면상을 보건대 그런 것들을 빌미로 제이와 공감대를 형성해 은근슬쩍 수작을 걸었을 확률이 매우 높아 보였다.
“그런데 이 친구도 동료였던 겁니까?”
리욘은 막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크레이그가 사십 대, 슈킨과 블레어가 제이와 비슷한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데에 비해 막스는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이 됐을까 말까 한 어린 청년이었다. 제이의 동료라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다.
“아, 막스는 동료라기보다는 부하라고 봐야죠.”
슈킨의 말에 리욘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수잔이 답했다.
“텍사스에서 잠깐 훈련 교관을 맡았던 적이 있어요. 시그니가 태어나고 일 년 정도요.”
“교관이라고요?”
리욘은 놀라 되물었다.
“아무래도 제이가 갈 수 있는 병원이 거의 없으니까요. 블라스트 훈련 센터 안의 병원에 다니는 게 제일 좋았는데 그 병원은 블라스트 직원들만 이용할 수 있었죠.”
그런데 용병일은 도저히 할 상황이 못 되니 훈련 교관으로 잠깐 훈련병들을 봐줬던 거다.
“아니, 거기서 일한 기간이 얼만데 그 정도 편의도 안 봐 준 겁니까.”
하여간에 해리 필드도 지독한 인간이라니까. 혀를 차는 리욘에게 수잔이 말했다. 제이 성격 아시잖아요.
“편의를 봐 주겠다고 한들 곱게 말을 들었겠어요? 폐 끼치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데. 걘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애예요.”
“…그건 그렇죠.”
리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긴, 제이의 성격에 누가 도와준다고 해서 가만히 그 도움을 받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값을 치르려고 들었겠지.
아무리 그래도 훈련 교관이라니.
왠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그보다 시그니가 태어난 뒤라면 훈련장에 있는 동안 애는 어떻게 한 거지. 생각하기가 무섭게 슈킨이 말했다.
“굉장히 혹독한 교관이었죠. 훈련병들은 제이가 훈련장에 나오는 날을 가장 두려워했지만 우린 좋았습니다. 시그니랑 놀 수 있었거든요.”
“아, 정말 행복했죠. 그때 시그니가 세 살 정도였는데 정말, 정말 천사 같은 아이였습니다. 아니, 그냥 천사였어요.”
“제이를 아주 쏙 빼닮은 아이였어요.”
흐뭇한 표정으로 말하는 블레어에게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시그니는 나를 완전히 빼다 박은 거라고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밖에서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문을 열고 제이가 들어왔다. 트레이닝 집업에 스포츠 백을 메고 들어서는 그를 보며 동료들이 반가워하려다 말고 경악했다.
“제이. 넌 어떻게 왕비가 돼도 꼬라지가 그 모양이냐.”
“야, 그보다 너 정말 운동 다녀온 거야? 애 낳은 지 한 달 조금 넘었다고 하지 않았어?”
“몸 봐. 텍사스에 있을 때보다 더 좋아진 거 같아.”
그사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 제이가 스포츠 백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옛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신경 꺼.”
리욘은 움찔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동료들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굉장히 무미건조했기 때문이다.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건가? 정말 말 그대로 동료일 뿐이었나… 라고 하기에는 옛 동료의 얼굴을 잠깐 보기 위해 일부러 비행기까지 갈아타는 수고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게다가 그들의 도착지인 부룬디라면 위도를 기준으로 에시르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였다.
“여전히 싸가지가 없군.”
“애를 둘이나 낳아도 안 변해.”
“쑥스러워서 저러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냉담한 제이의 반응에도 그를 보는 동료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특히 블레어는 금방이라도 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런 블레어를 못 본건지 제이는 그대로 리욘에게 다가와 옆에 앉으며 말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시끄러운 친구들이라.”
이해해 달라는 듯 말하는 제이에게 리욘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투로 아니, 하고 말했다.
“유쾌한 분들이시잖아. 그리고 자넬 보러 일부러 이곳까지 와 주신 손님들이니까.”
“가다 들른 거겠죠.”
찌푸린 얼굴로 웃은 제이는 곧 동료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어디로 가는 길에 들른 거야?”
“아, 부룬디.”
슈킨이 대답했다.
“부룬디?”
“어. 거기 내전 때문에 난리가 나서.”
슈킨의 말에 제이가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말했다.
“난리가 난 정도가 아닐 텐데.”
그의 말대로 부룬디는 지금 소수파 집권층인 투치족과 다수파 피지배 종족인 후투족간의 전쟁으로 나라가 붕괴 직전이었다. 십여 년을 넘게 끌어온 내전이 주변국의 중재로 겨우 종식되나 했더니 기껏 맺은 평화 협정을 얼마 전 3선에 당선된 대통령이 뒤엎으면서 다시금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유엔에서는 일찌감치 평화 유지군으로 파병했던 군대를 철수시킨 상황이었다.
“그런데 거길 가면서 여길 들렀다고?”
여전히 긴장감이라곤 없군.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리는 제이를 보며 슈킨이 “아냐, 긴장하고 있어.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왕궁 구경은 해 봐야겠다 싶어서 온 거야.”
“맞아. 시그니도 보고 싶고.”
“이번에 태어난 둘째도 봐야지.”
다들 한마디씩 하는 와중에도 막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나이 많은 선배들 틈에서 잔뜩 긴장한 얼굴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는 막스를 보며 제이가 “막스, 넌 왜 온 거야?” 라고 물었다.
“아, 저는! 저도, 부룬디에 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더듬더듬 말하는 막스를 보며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헤이, 그러지 마.” 크레이그가 제이를 말렸다.
“이 자식은 아직도 네 이름만 나오면 오줌 싼다고.”
“크레이그! 아녜요, 그 정도는….”
울먹이는 막스를 향해 제이가 “정말 그래? 막스?” 하고 물었다.
“절대 아닙니다! 오줌은 싸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오줌은….”
“그럼 다른 걸 쌌나 보지.”
낄낄거리던 동료들이 제이의 옆에 앉아 있는 리욘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자세를 바로 하며 “아, 죄송합니다.” 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끼리 농담하던 버릇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리욘은 태연히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늘은 옛 동료인 제이를 보러 온 거지 않습니까. 에시르의 왕비를 알현하러 온 게 아니라.”
에시르의 왕비, 알현, 이란 단어에 힘을 꽉 주고 말하자 그래도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지 용병들이 “아닙니다. 그래도 폐하 앞에서는 조심을 했어야 하는데….” 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도 군인 출신입니다.”
다 이해한다는 듯 리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들 분위기는 파악한 듯하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해심 많은 배우자이자 사석에선 격의 없이 어울릴 줄 아는 친근한 국왕의 모습을 어필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어필이 잘 먹힌 모양이었다. 용병들이 처음에는 조심하며 말투를 신경 쓰는 듯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언제 그랬냐는 듯 언사가 과격해진 것이다. 그래도 제이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최대한 말을 골라 점잖게 표현하려고 애쓰는 눈치였는데, 대화 주제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자 그런 것도 없었다. 특히 자기들끼리 서로 네가 그때 그랬네, 내가 그때 그랬네, 수년 전 일에 대한 책임 공방이 시작되자 그때부터는 제어가 되지 않았다. 흔히 하는 욕설, 그러니까 서로의 부모님을 매춘부로 만들고 상대방을 개와 교미하게 만드는 그런 욕설은 아예 언급도 안 됐다. 그들은 리욘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참신하면서도 다채로운 욕설로 서로를 헐뜯더니 나중엔 그 자리에서 팬티까지 까뒤집어 보여 줄 기세로 소리를 높였다.
충격적인 건, 그들이 그렇게 당장이라도 서로의 헤드샷을 날릴 기세로 길길이 날뛰는데 어느 누구도 말리거나 중재할 생각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가끔씩 터져 나오는 창의적인 욕설에 박장대소만 했다. 이따금 제이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리욘의 귀에 작게 속삭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들은 이러고 노는 게 습관이라서요.”
“아니, 이해해. 군인들이 다 그렇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한 리욘이었지만 사실 그는 굉장한 충격에 빠져 있었다. 어느 정도로 충격이었냐면, 조금 전에 “저도 군인 출신입니다.” 라며 여유롭게 웃었던 자신을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그 정도로 제이의 옛 동료들의 언사는 상상 이상으로 과격하고 저속했으며, 천박하고 상스러운 것을 넘어선, 뭐랄까, 날것에 가까운 형태였기 때문이다.
뒤늦게야 그는 깨달았다. 군인이라고 해서 절대 다 같은 군인이 아니란 사실을.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그 험악한 국경 지대에서 굴렀다 한들, 그곳에서도 여전히 자신은 군인이자 왕자였음을. 게다가 곧 왕세자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 앞에서, 아무리 격의 없이 친근하게 지낸다 해도 이런 식으로까지 막말을 할 수 있는 녀석들은 없었을 터였다. 심지어 그들은 대부분이 부사관 출신이었다. 엘리트 양성소인 사관학교 출신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준 엘리트 집단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새삼스러운 사실에 혼란을 겪기도 잠시, 그는 곧 자신의 옆에 앉은 제이를 바라보았다. 이 난장판 속에서도 제이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가끔씩 피식 웃거나 그건 맞아, 아니, 그건 아니지, 라고 한마디씩 하는 게 그의 반응의 전부였다.
하긴, 원래 과묵한 편이었지.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제이는 리욘이 지금껏 봐온 수많은 군인들 중에서도 유독 언사가 점잖은 축에 속했다. 물론 그도 자신의 앞이라 말을 가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따금 침대 위에서 본인도 모르게 과격한 언사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겨우 그 정도의 낯부끄러운 말밖에 못하는 걸 보면 기본적으로 저속한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게 아닐까, 라고 리욘은 생각했다.
뭐, 그런 것도 다 제이답지. …사실 난 침대 위에서만큼은 아주 천박하고 상스럽게 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절대 제이에게는 그런 취향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찰나였다.
“그런데, 제이. 결혼하더니 정말 많이 달라졌네요. 오늘 나한테 욕을 한 번도 안 했어요. 쓰지도 않을 머리통은 왜 달고 다니는 거냐고 화도 안 냈고요. 무엇보다 크레이그랑 슈킨이 이렇게까지 시끄럽게 구는데 보고만 있다는 게 제일 신기해요. 예전 같았으면 이빨 다 뽑아 버리기 전에 닥치라고 했을 텐데 말이에요. 이빨 다 뽑아 줄 테니 카리조 스프링스로 가서 영감탱이들 좆이나 빨아 주고 오라고요.”
막스가 정말 신기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한 말에 테이블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
“…….”
“…….”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와중에 제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막스를 불렀다.
“막스.”
“네…?”
막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뒤늦게야 내가 뭘 실수했나, 하는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는 그에게 제이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오늘 오줌 싸게 해 줄까?”
“…아뇨.”
막스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표정으로 봐선 이미 오줌을 지린 것도 같았다.
“농담하는 거예요.”
제이는 옆에 앉은 리욘을 향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알아.”
리욘 역시 아무렇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지만, 정말 놀랐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제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놀라웠지만, 다행히 금세 진정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제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놀라운 거지, 사실 영어권에서는 친한 친구들끼린 밥 먹었냐는 인사 대신 쓰는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신도 국제학교 시절엔 저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하물며 군인인 제이가, 심지어 저렇게 엄청난 욕설들을 구사하는 동료들과 함께 지내온 제이가 살면서 그런 단어를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생각하자 오히려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원래 그런 말을 안 쓰는 게 아니라 내 앞이라고 최대한 조심했던 거였군. 그럼 역시 침대 위에서도 한껏 말을 가렸던 건가. 그럴 필요 없다고 하면 앞으로 좀 더 과격하게 요구하고 졸라 대기도 할까.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떠올리자 문득 오늘의 약속이 생각났다. 리욘은 슬쩍 시계를 들여다봤다. 어느덧 세시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제 한 시간 반 정도가 남은 셈이었다.
언질을 주는 게 나으려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제이가 나오려면 알아서 준비를 하고 나올 것이고, 멀리서 온 동료들을 두고 나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면 먼저 이야기를 해 올 것이다. 모처럼, 그것도 일부러 본인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온 동료들이었다. 그 마음이 고맙고, 또 함께 있는 게 좋아 자신과의 약속을 미루고 싶어질 정도라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거였다. 어쨌거나 제이가 지금 이 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얘기니까.
이게 바로 해탈이라는 건가.
마음을 비우니 왠지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면 그 고통스럽던 붓다의 자세도 너무나 편안하게 해 낼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리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따라 일어섰다.
“벌써 가십니까.”
“아이고 이거,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슈킨과 크레이그가 예의상 한 마디씩 하는 와중에도 블레어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폐하.”라며 칼같이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순간 좀 더 있다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관뒀다. 유치하게 일일이 응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리욘은 악수를 건네는 블레어의 손을 다시 한 번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반가웠습니다.”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블레어의 얼굴에 만족감을 느끼며 돌아서는 찰나였다.
“폐하. 오늘 약속 잊으신 거 아니겠죠.”
제이의 말에 리욘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블레어가 놀란 얼굴로 “약속? 무슨 약속?” 하고 외쳤다.
“너 설마 오늘 나가는 거야?”
“그럴 예정이야.”
“맙소사. 우리 너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서 지금 보고 있잖아.”
뭐가 문제냐는 제이의 말투에 블레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옆에서 슈킨과 크레이그도 서운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야, 너무한다. 우리 여기 놔두고 넌 폐하랑 나간다고?”
“손님 대접 이런 식으로 하기냐?”
빗발치는 원성에도 제이는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어. 먼저 약속이 돼 있던 거라.”
팔짱을 끼며 말하는 그에게 블레어가 “미루면 안 돼?” 하고 물었다.
“꼭 오늘 나가야 돼?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되는 약속이야?”
“미안해, 블레어.”
미룰 수는 없을 것 같아. 미안한 듯 웃어 보이며 제이가 말했다.
“굉장히 중요한 날이거든, 오늘.”
그 말에 리욘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중요한 날이라니… 설마?
“중요한 날이라고? 왜, 무슨 날인데?”
블레어가 씨근대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제이는 대답 대신 리욘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제이가 깊게 미소 지었다.
“에시르와 아이슬란드 양국 우호 증진에 크게 이바지할 날이지.”
***
리욘은 정확히 5시에 본인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차는?”
“후문에 대기 중입니다.”
오늘 일정은 모두 비공식적인 것들로, 에시르와 아이슬란드 양국 우호 증진은 매우 비밀스럽게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영화관 예약도 다른 사람 이름으로 했고, 기자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차도 엠블럼이 커다랗게 박혀 이 나라 온 국민이 알아보는 왕실의 공식 차량 대신 리욘의 개인 롤스로이스 차량을 이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려면 당연히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빠져나가야 했고.
“잘 부탁하지.”
오늘 남은 자질구레한 업무는 에이나르에게 맡긴 뒤 리욘은 경호원들과 함께 왕궁을 빠져나왔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로겐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섰다. 오늘은 경호원들도 거리를 두고 따라오기로 했다. 어쨌거나 사람들 눈에 안 띄고 조용히 1주년 기념 데이트를 즐기는 게 리욘의 목적이었다.
…물론 1주년이라는 건 나만 알지만 말이야.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에시르와 아이슬란드 양국 우호 증진에 이바지하는 날이라니. 물론 자기가 말한 거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기서 그런 대답을 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면 이제 정말로, 말을 하고 싶어도 못 할 판이었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 일 년 전 오늘 내가 그대에게 프러포즈를 했단 말일세. 그렇게 말하면 제이는 화를 낼지도 모른다. 저를 놀리신 거냐고. 친구들에게 그런 바보 같은 소릴 하는 절 보면서 즐거우셨느냐고.
만약 옆에 에이나르가 있었다면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전하께선 그러실 성격이 아니에요!” 라고 펄쩍 뛰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순간 리욘은 혼자였다. 그리고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산후 우울증이 초기를 넘어 중기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 그는 평소처럼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이 어려웠다.
이젠 어쩔 수 없어. 오늘은 그냥 에시르와 아이슬란드 양국 우호 증진의 날인 거야.
설마 이러다 내년 11월 20일에는 에시르와 아이슬란드 양국 우호 증진의 날 1주년 기념 데이트를 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쓸데없는 걱정으로 한숨을 쉬며 왕비궁 후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찰나였다.
“솔직히 말하면 많이 서운해.”
낙엽 밟는 소리에 섞여 들려온 음성에 리욘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말이야 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지만… 너 보려고 일부러 왔다는 거 너도 알잖아.”
블레어였다. 리욘은 본능적으로 제 옆의 전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곧바로 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지. 하지만 말했다시피 어쩔 수가 없는 일이야.”
애잔함이 뚝뚝 흘러내리던 블레어의 목소리에 비해 한결 단호한 어조였다. 그래서인지 들리기도 더 잘 들렸다.
“와 줘서 고맙고 기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너희가 일부러 시간을 빼서 이곳에 들렀듯이, 폐하께서도 오늘을 위해 며칠 전부터 시간을 빼야만 했어.”
“여전히 단호하시구만.”
하긴, 넌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번복 안 하지. 블레어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쓰게 웃으며 제이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으리라.
“그래서 너한테는 무조건 처음에 답을 얻어 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알면서도 몇 번씩이나 고백하고 차이고를 반복한 걸 보면 내가 매저키스트인 것 같기도 하고.”
리욘은 적이 놀랐다. 물론 블레어가 제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으리란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몇 번씩이나 고백을 했으리라곤 생각도 못한 까닭이었다. 블레어가 그렇게 몇 번씩 걷어차이면서도 제이에게 계속 고백을 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동안 제이가 한 번도 여지를 주지 않았단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자신이 아는 제이는 물론 단호하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여려서 그 정도로 옆에서 매달리면 한 번쯤은 마지못해 돌아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안해, 블레어.”
이번에도 담담히 말하는 제이의 목소리를 듣자니 비로소 리욘은 알 것 같았다. 제이가 그렇게 마음 여리게 구는 것도 결국 자신 한정이었음을. 유독 블레어에게만 단호한 게 아니었다. 그는 막스에게도, 슈킨에게도, 크레이그에게도 똑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저 자신이 예외였을 뿐이었다. 자신에게만 유독 무르고, 마음 약한 모습을 보였던 거다.
그런 거였군.
자신만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자 새삼 기분이 좋았다. 리욘은 부러 크게 발소리를 내며 전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바로 옆 벤치에 앉아 있던 블레어가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폐하.”
다행히 그의 앞에 서 있던 제이의 얼굴에서는 당혹감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다. 자신을 보며 웃는 얼굴에 리욘은 더욱 흐뭇해졌다. 천천히 제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준비는 다 된 건가?”
“네. 출발하면 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이가 웃으며 말했다. 리욘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제이의 옆에 서 있는 블레어에게 인사했다.
“쉬다 가십시오.”
블레어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리욘은 승자의 거만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그를 내려다보다 돌아섰다. 함께 돌아서는 제이를 향해 블레어가 불현듯 외쳤다.
“제이!”
제이가 뒤를 돌아보자 그는 억지로 만들어 낸 게 분명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행복한 거 같아서 나도 좋다.”
그런 블레어를 향해 제이가 말없이 웃어보였다. 두 사람이 마지막 눈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먼저 돌아서며 리욘은 생각했다. 놀고 있네.
“다른 동료들은 어디 있지?”
차 문을 열며 물었다.
“수잔과 왕자궁에 있습니다.”
“시그니와 같이 있는 건가?”
“네. 아이와 놀다가 아홉 시쯤 여기서 나설 겁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운전석에 오르며 묻자 제이 역시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
“애초에 저보다 시그니가 더 보고 싶어서 온 녀석들이라서요.”
“많이 예뻐하는 것 같긴 하더군.”
“텍사스에 있을 때부터 봤으니까요.”
제이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지만 리욘은 사실 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못 본 갓난아기 시절의 시그니를 그들은 모두 봤다는 얘기니까. 이건 그들의 탓도 아니고, 엄연히 자신의 탓이었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블레어가 그 작은 시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제이와 똑같이 생겼다고 신기해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 아이는 나를 더 닮았다고. 나랑 아주 똑같이 생겼단 말이다!
온 세상에 다 들리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담아 리욘은 아주 부서져라 엑셀만 밟았다.
운전자의 한껏 절제된 폭주 덕분에 차는 스바르트의 무시무시한 주말 러시아워를 뚫고 30분 만에 극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극장 앞에서는 또 다른 정체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이야기가 새어나간 건지 국왕 부부의 영화 관람 소식을 전해 들은 기자들이 일찍부터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경호원들이 이러시면 안 된다고 막아선 사이 극장에 들어가긴 했으나 상영관 안도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다. 곧 국왕 부부가 앉을 자리라고 사람들이 빈 좌석을 두고 벌써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극장 관계자가 와서 “제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곧 영화 시작합니다. 여러분, 다른 관객들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됩니다.”라고 한껏 소리 높여 외쳐 준 덕분에 무사히 자리에 앉긴 했으나 이미 영화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앞자리의 관객들이 영화는 안 보고 내내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국왕 부부의 표정만 살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극장 안에서 흔히 하는 딴짓도 할 수 없었다.
두 시간 반을 눈만 뜨고 스크린만 쳐다보다 나왔더니 기다렸다는 듯 기자들이 달려왔다. 인터뷰는 영화가 끝난 후에 하겠다고 말을 해 둔 참이라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었다.
“영화 재미있게 보셨습니까? 어떠셨나요? 감명 깊게 본 장면이나 대사가 있었다면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밀며 물었다. 리욘의 인생에서 기자들 질문에 이렇게까지 말문이 막혔던 적은 처음이었다. 영화를 봤어야 대답을 해 주지. 그렇다고 “관객들이 영화는 안 보고 제 얼굴만 쳐다보는 바람에 신경 쓰여서 제대로 못 봤습니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주 아주 두루뭉술하게, 그 어떤 영화에 대한 감상이라고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평범하고 특색 없는 소감 몇 마디를 들려 줬다.
기자들의 질문에 늘 위트 있는 대답을 들려주던 국왕이 웬일로 무미건조한 답변을 내놓자 기자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이 영화는 국왕의 외숙부이자 에시르의 가장 유명한 작가인 오스카 스카르페딘손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었던가. 당연히 평소보다 더 재미있는 답변이 돌아올 거라고 기대했던 기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외로 기자들의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 준 건 국왕이 아니라 왕비였다.
“작년에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책을 좀 많이 읽었습니다. 간호사 분께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추리 소설이라고 책을 한 권 권해 주시더군요. 읽는데 첫 페이지에서 바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60페이지 만에 피해자가 네 명이나 발생하기에 도대체 작가가 무슨 생각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제가 아는 분이었군요.”
제이의 말에 기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모르고 보셨나요?”
“네. 책을 볼 때 작가 이름은 잘 보질 않아서요.”
“아직도 작가가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신가요?”
기자의 물음에 제이는 아뇨,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라니 이해가 됩니다. 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십니다.”
기자들이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왕비가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농담처럼 들리는 진담이라는 건 리욘만 알았다. 그래도 기자들 물음에 늘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제이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자신과는 다르게 기분이 제법 좋은 듯해서. 물론 제이 본인은 그저 기자들 앞에서 오스카를 욕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늘 과묵하던 왕비가 웬일로 길게, 그것도 재미있는 답변을 내놓자 기자들은 신이 난 눈치였다. 흡족한 표정의 기자들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랐다.
다행히 저녁 식사 장소로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는 인터뷰를 기다리는 기자도,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관객도 없었다. 게다가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 레스토랑은 당일 다이닝 코스 손님을 딱 한 팀만 받을 뿐이었다. 덕분에 다른 손님이라곤 없는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모처럼 두 사람은 둘 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오붓한 둘 만의 시간동안 두 사람은…
“라가르플리오트 호수의 괴물이 모티프인 줄은 몰랐습니다.”
“영화로 만들면서 좀 바뀐 모양이지. 유명하니까. 아이슬란드의 네스호라고 하잖아.”
“그렇죠. 그렇게 효과 줘서 찍으니까 정말 으스스하더군요. 데티 포스도 의외로 박력 넘치게 잘 찍혔고요.”
“데티 포스는 그래도 실제로 봐야 돼.”
…아이슬란드 이야기만 줄창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하필이면 영화에서 첫 살인이 벌어진 도시가 제이가 살았던 에질스타디르였던 것이다. 자기가 살던 동네가 그대로 화면에 잡히자 제이는 꽤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특히 범인이 검거된 장소가 본인이 자주 가던 술집이란 사실을 이야기할 때는 드물게도 무척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거기 사장이 어부였어요. 자기가 200kg짜리 참치를 잡은 적이 있다는 게 그 사람의 가장 큰 자랑이었죠.”
“200kg이라면 자랑할 만하군. 요즘은 그렇게 큰 거 잘 안 잡히니까.”
“그렇죠. 거기 가면 프런트에 그 참치 사진만 몇 장이 붙어 있는지 모릅니다. 손님들이 계산할 때마다 무조건 보여 주고 자랑을 해요.”
지겹다는 듯 혀를 찼지만 그런 것치고 표정은 밝았다.
“아이슬란드를 좋아하나 보군.”
리욘은 와인 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저 말입니까?”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살짝 눈썹을 들어 올리는 제이에게 리욘은 말했다.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그래.
“당신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드문데 말하는 내내 얼굴이 웃고 있어서. 목소리도 다른 때보다 더 밝고.”
“그랬나요?”
“내가 보기엔 그래.”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합니다. 아이슬란드.”
“그러니까 두 번이나 가서 살 생각을 했겠지.”
“조용한 곳이니까요.”
“그건 그래.”
하지만 살기 좋은 곳은 아니지. 리욘은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춥고, 어딜 가도 온통 짠 내에 음식도 맛이 없어.”
“혹시 싫어하십니까?”
“뭐, 아이슬란드?”
제이가 네, 하고 대답했다. 리욘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하지 않아. 나도 좋아해. 난 반은 아이슬란드 사람인걸.”
“그런데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웃으며 묻는 제이에게 리욘은 퉁명하게 “아니, 그냥.”이라고 말했다.
“좋아하지만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니란 걸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러니까 이제 제발 아이슬란드 이야기 좀 그만하라고, 정말 오늘을 에시르와 아이슬란드 양국 우호 증진의 날로 만들 셈이냐고, 내년 11월 20일에도 이럴 거냐고, 차마 말은 못하고 슬쩍 손목시계만 들여다봤다. 그리고 절망했다. 벌써 열 시가 훌쩍 지나 있었던 것이다. 이 레스토랑이 문을 닫는 시간은 열시 반이었다.
“일어나야 할 시간인가요?”
표정에서 낌새를 차린 듯 제이가 물었다.
“아니, 아직은 좀 더 괜찮아.”
손을 내리며 리욘은 태연히 말했다. 어떻게든 둘 만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 따위 알 리가 없는 제이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말할 뿐이었다.
“직원들한테 미안하니 이만 일어나죠.”
“…그러지.”
리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직원들이 얼른 두 사람에게 코트를 가져다주었다.
“아무튼 저는 아이슬란드가 좋습니다.”
코트를 걸치며 제이가 말했다.
“그런 거 같아.”
“폐하와 만난 곳이니까요.”
한숨을 삼키며 코트를 걸치던 리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영화도 잘 봤습니다.”
재미는 없었지만요. 웃으며 덧붙인 제이는 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욘의 눈을 마주 바라봤다.
“오늘 같은 날 보기 좋은 영화였어요.”
“제이.”
당신 혹시…. 리욘은 어울리지 않게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알고 있었던 거야?”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을 하고선 말없이 코트의 단추를 채울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추를 채우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며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오늘 같은 날 가기 좋은 곳으로 이동할까요?”
***
제이가 말한 ‘오늘 같은 날 가기 좋은 곳’은 스바르트 시내 한복판에 있는 5성급 호텔, 아슬란의 최고층 스위트룸이었다. 비록 핀란드의 이글루 호텔처럼 침대에 누워 하늘의 별을 볼 순 없었지만, 대신 그만큼 찬란하고 화려한 도시의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하루 숙박료가 2만 달러를 호가함에도 창가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야경과 완벽한 시설로 인해 늘 반년 간 예약이 밀려있는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제이가 뒤늦게야 문의를 했을 땐 해당 날짜에 이미 예약이 완료된 상태였다. 결국 제이는 먼저 예약을 한 예약자에게 직접 찾아가 양해를 구하고, 해당 숙박료의 무려 세 배에 달하는 금액을 보상금으로 지불한 뒤 11월 20일의 예약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단 하룻밤을 묵기 위해 무려 8만 달러를 지불하고 빌린 그 호텔방을,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사람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뒤늦게야 전(前) 예약자가 나타나 깽판을 쳐서도 아니었고, 호텔 측에서 투숙을 거부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리욘이 거기까지 가는 걸 힘들어한 것뿐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운전에 집중을 못 하겠다고 하니 도리가 없었다.
결국 리욘은 호텔로 향하던 도중에, 시내 구석진 곳의 으슥한 골목길에 자신의 차를 세우고 말았다.
“싫다면 안 할게.”
일단 급한 마음에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긴 했지만, 막상 일을 치르자니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다른 것보다 자신이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응하는 걸 신경 쓰고 있었다.
“싫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제이는 리욘의 다리 사이를 보며 말했다.
“그대 때문이야.”
“그런 걸로 하죠.”
웃으며 말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다른 골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인적이 드문 곳은 아니었다. 당장 옆 골목의 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며 취객들의 고함 소리가 언제든 이 골목으로도 사람이 들이닥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좀 불안한데.”
그냥 호텔로 갈까. 고민하듯 운전대를 두드리는 리욘에게 제이는 말했다.
“로겐이 알아서 잘 가드해 주겠죠.”
그리고 그대로 리욘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능숙하게 허리띠의 버클을 풀고 바지 지퍼를 내린 뒤 리욘의 속옷 안에서 발기한 성기를 꺼내자마자 입에 물었다.
“제이.”
리욘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는 대답하듯 그의 부푼 귀두를 입에 머금고 세게 빨았다. 곧 낮은 신음과 함께 리욘의 손가락이 제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랑곳 않고 제이는 더욱 세게 리욘의 물건을 빨았다. 목구멍까지 이용해 깊숙이 빨아들이자 리욘이 “잘 빠는데.”라며 웃었다.
칭찬에 응하듯 혀를 넓게 펼쳐 그의 귀두를 감쌌다. 부러 젖은 소리를 내며 핥자 머리카락을 움켜쥔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꼭 십 대 때로 돌아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학생 때 차 안에서 제법 했던 모양이었다. 제이는 일부러 조금 세게 깨물었다. 놀랐는지 리욘이 제이! 하고 불렀다.
“매너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딴생각하시는 거.”
제이는 물고 있던 성기를 뱉어 내며 힐난했다.
“아니, 딴 생각이 아니라… 잠깐, 지금 혹시 읽은 거야?”
이번에야말로 리욘은 제대로 당황한 눈치였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이쪽이 본인의 머릿속을 읽을 리가 없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물론 제이는 그의 믿음을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오늘만 제외하고.
“필요할 땐 읽어야죠.”
“뭐?”
리욘이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제이는 대답 대신 다시 그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그가 좋아하는 대로, 조금 전보다 더욱 깊숙이 머금고 세게 빨았다. 그제야 의도를 알아차린 듯 리욘이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서 읽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이건가?”
대체 왜. 리욘이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왜 이러는 거야. 무섭게.”
“뭐가 무섭습니까.”
다시 입에 물었던 걸 뱉어내며 제이는 말했다.
“무섭지. 그대가 이러면 난 무섭다고.”
“저 폐하 좆 빠는 거 좋아합니다.”
뭐…? 리욘이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제이는 대답 대신 좌석 옆의 버튼을 눌러 운전석의 시트를 뒤로 젖혔다. 시트와 함께 완전히 눕는 자세가 된 리욘의 위로 올라타며 그는 덧붙였다.
“씹질은 더 좋아하고요.”
“제이.”
결국 리욘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치겠군. 웃으며 중얼거리는 걸 보니 눈치챈 모양이었다.
“폐하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허리띠 버클을 풀며 묻자 리욘이 “뭐, 씹질?” 하고 웃는다.
“네. 제 구멍에다 박는 거요.”
“아주 좋아하지.”
“박은 상태로 안에다 싸는 걸 좋아하시죠.”
제이는 리욘에게 입 맞추며 일부러 가늘게 웃었다. 리욘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해 줄걸. 생각하며 제이는 몸을 뗐다.
“하지만 오늘은 안에다 하면 안 됩니다. 아시죠?”
바지의 버클을 풀며 묻자 리욘이 “당연하지.” 하고 미간을 좁힌다.
“절대 안 해.”
“믿어 보겠습니다.”
제이는 바지와 속옷을 함께 벗으며 말했다. 리욘의 위에 올라탄 상태로 그의 성기를 붙잡아 이대로 넣을 생각이란 걸 알았는지 그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풀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충분히 젖어서요. 성기 끝을 구멍에 갖다 대며 말하자 리욘이 그런 것 같군, 하고 웃었다.
“잘 젖는다니까.”
“폐하 덕분이죠.”
말하며 천천히 몸을 내렸다.
“으음….”
충분히 젖었지만, 아직은 빡빡한 내부를 가르고 커다란 성기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의 삽입에 어쩔 수 없이 등이 조금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남자의 성기를 기억하고 있는 몸은 곧 한껏 반기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잔뜩 애액을 흘려보내 밑을 더 젖게 하고 몸의 근육을 이완시켜 더욱 수월히 남자의 페니스가 진입할 수 있게 했다. 두꺼운 귀두를 다 삼키자 나머지는 금방이었다.
“……!”
쑤욱, 한꺼번에 깊숙이 들어와 박히는 감각에 제이는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고통을 동반한 쾌감에 엉덩이가 저절로 움찔거렸다. 남자의 물건을 삼킨 뱃속이 뜨거웠다. 성기 표면에 달라붙은 점막들이 일제히 수축하며 꿈틀거렸다.
“제이, 엄청 조이는데.”
리욘이 조금 놀란 듯 중얼거렸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좋아한다고.”
숨을 내뱉으며 말하자 리욘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좋아하는 거야?”
밑에서 슬쩍 쳐올리며 묻는다.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며 제이는 네, 하고 대답했다.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 것 같군.”
끊어 먹으려고 하고 있어. 눈썹을 찌푸리며 리욘이 말했다. 그 말에 제이는 보란 듯이 더 엉덩이에 힘을 주고 남자의 성기를 꽉 조였다.
“맙소사.”
제이! 리욘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는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더 세게 조였다. 리욘의 페니스를 감싼 점막이 잔뜩 오그라들며 수축했다. 직장 벽 안쪽의 가장 약한 부분을 귀두로 문질러져 제이는 눈을 감으며 신음했다.
“거기, 좋아하지?”
웃으며 묻는 목소리에 네, 좋아합니다, 조금 헐떡이는 소리로 답하며 다시 한 번 페니스를 물고 있는 구멍을 조였다. 다시 같은 곳을 귀두가 긁듯이 스쳤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좀 더 세게, 강한 힘으로 문질러지고 짓눌리는 게 좋았다. 굵은 귀두가 그곳을 때리듯 둔중하게 치고 들어오는 감각이 좋았다.
결국 제이는 리욘의 가슴을 손으로 짚은 채 직접 허리를 들었다. 귀두가 구멍에 겨우 걸릴 정도로 한껏 허리를 들었다가 그대로 내렸다. 퍽, 젖은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굵은 성기가 원하던 곳을 강하게 짓눌렀다.
“허윽…!”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떨리는 팔에 힘을 주며 제이는 다시 한 번 허리를 들었다. 무릎에 힘을 주고 세웠다가 주저앉듯 하자 남자의 성기는 이번에도 정확히 같은 곳을 찔렀다. 뇌가 다음 행동을 지시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곳에 닿을 때마다 번쩍하는 쾌감이 좋아 멈출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확 주저앉고 말았다. 순간 푸욱, 하고 뱃속을 깊숙이 찔려 제이는 비명을 지르며 사정하고 말았다.
“벌써?”
리욘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만도 했다. 원래는 이 정도로 빠르지 않으니까. 제이는 신음하며 자신의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이미 더럽혀진 거, 신경 쓰지 않고 리욘의 와이셔츠 위에 정액을 모두 쏟아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그것도 그렇지만.”
제이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웃었다. 바로 알아차린 듯 리욘이 아, 하고 중얼거렸다.
“출산 후에 더 민감해지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지.”
맞아. 그랬던 것 같아. 와이셔츠 위로 비치는 유두를 손끝으로 건드리며 말한다. 지난 며칠간 그렇게 신경을 쓰더니 계속 거기만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에는 잘만 만지고 빨더니 이제 와서 새삼 조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제이는 와이셔츠 단추를 풀며 말했다.
“빨아 주십시오.”
리욘이 다시 “제이….” 하며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제이는 대답 대신 리욘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에 묻게 하며 “대신 깨물면 안 됩니다.” 하고 말했다.
“지금 부어 있어서 좀 아파서요.”
“그래 보여.”
“깨물지만 않으면 되니까요.”
실컷 빠십시오. 베풀 듯 말하자 리욘이 기가 찬다는 듯 웃는다.
잠시 망설인 그는 곧 눈앞에 보이는 젖꼭지에 가만히 혀를 갖다 댔다. 천천히 핥자 그것만으로도 벌써 허리가 떨려와 제이는 신음하며 리욘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빨아 주세요.”
빨리. 작은 소리로 말하자 마침내 리욘이 유두를 입에 머금고 세게 빨기 시작했다. 이미 커다랗게 부어 단단해진 유두는 스치기만 해도 아플 정도였다. 그걸 성인 남자가 입에 물고 강한 힘으로 빨아대니 저절로 신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 더 세게 빨아도 돼요, 하며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게 됐다. 나중에는 아픈 것보다도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저릿한 쾌감에 더 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의 성기를 품고 있는 아래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폐하….”
본의 아니게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이 부르고 말았다. 그게 스위치를 누른 건지 리욘이 가슴에서 입을 떼더니 조수석 시트를 젖히자마자 쓰러뜨리듯 제이를 눕혔다. 그대로 몸을 겹쳐 오는 남자가 정상위로 삽입할 생각임을 알고 제이는 다급히 다리를 벌렸다. 곧바로 푹, 뜨거운 것이 몸 안으로 꽂혀 들어왔다.
“아, 폐하….”
제이는 신음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화답하듯 성기가 빠져나가고, 곧장 다시 퍼억, 깊숙이 쑤시고 들어왔다. 얼마나 깊었던지 단번에 자궁에 닿을 듯했다.
“으….”
이를 악물며 소리를 참는 사이 다시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욱 깊은 각도로 푸욱, 단번에 찔러 올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닿았다.
“폐하…!”
비명을 지르며,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리욘의 목에 팔을 감았다.
“왜? 너무 깊은가?”
멈칫하며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아뇨, 하고 고개를 저었다.
“더, 더 깊어도 됩니다.”
이젠 괜찮습니다. 제이는 헐떡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마음껏 하세요.”
그 말대로 마음껏, 리욘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퍽,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난폭하게 쳐올리고 이따금은 쾅! 하고 위에서 찍어 내리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다 깊고, 거칠었다. 그게 좋았다. 그만하라고, 안 된다고 말할 필요 없이 잔뜩 헤집어지고 쑤셔지는 게 좋았다. 굵은 성기가 자궁에 닿을 때마다 고통을 닮은 날카로운 쾌감에 머리털이 쭈뼛 섰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폐하, 더 세게, 더… 으응, 네, 그렇, 게, 으으윽! 더, 세게요!”
더 깊이 박아 주세요. 잔뜩 쑤셔도 돼요. 아니, 쑤셔 주세요. 제이는 리욘의 허리에 다리를 감은 채 애원했다. 그때마다 리욘은 더 깊게, 잔뜩, 원하는 대로 쑤셔 주고 박아 줬다. 뭉툭한 귀두가 한껏 부푼 점막을 헤집으며 내벽을 긁고, 쑤셔 댈 때마다 제이는 비명을 지르며 리욘의 허리를 감은 다리에 더 힘을 줬다.
“제이.”
리욘이 제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부은 젖꼭지를 입에 물고 세게 빨며 그대로 다시 한 번 허리를 쳐올렸다. 제이는 소리를 지르며 허리를 뒤챘다. 순간 안이 확 조여 들면서 남자의 성기를 품은 뱃속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유두에서 희멀건 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리욘이 놀란 듯 물고 있던 젖꼭지에서 입을 뗐다.
“제이, 당신 가슴에서….”
당황한 듯 중얼거리는 그에게 제이는 쉰 목소리로 괜찮습니다, 하고 말했다.
“빨아도 돼요.”
맛은 없겠지만. 웃으며 말하자 리욘은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그래? 하고 묻더니 곧 조심스레 혀를 갖다 댔다. 흘러내린 유즙을 몇 번인가 천천히 혀로 핥던 그는 이윽고 다시 제이의 젖꼭지를 입에 물고 세게 빨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다시 쳐올리기 시작한 그는 곧 사정이 임박했는지 가슴에서 입을 떼고 제이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러다 아차, 하고 허리를 빼려는 그를 제이는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에다 싸도 되니까.”
그냥 싸세요. 헐떡이며 말하자 리욘이 뭐?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안에다 싸라고?”
“네. 안에다가.”
“하지만….”
리욘이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도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 뭐지? 제이가… 사실은 셋째를 원했던 건가? 아니, 나는 좋지만… 아냐, 안 좋아. 더는 안 된다고.
이러다가는 밤새 망설일 기세였다. 제이는 일부러 남자의 성기를 품은 아래에 힘을 꽉 주며 말했다.
“폐하, 어서요.”
안에다 잔뜩 싸질러 주세요. 제이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제기랄.”
결국 못 참겠다는 듯 리욘이 다시 제이에게 키스했다. 잡아먹을 것만 같은 격정적인 입맞춤 끝에 뜨거운 것이 뱃속에 확 끼얹어졌다. 동시에 내벽이 요동치듯 크게 떨리며 수축했다. 신음하며 제이는 자신도 사정했다.
“제이.”
제이. 몇 번이고 부르며 리욘이 입을 맞춰왔다. 자신이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단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제이는 웃으며 그의 키스를 받아줬다. 그리고,
“아… 그런데, 잠시만. 제이.”
뒤늦게야 정신이 든 듯 리욘이 성기를 빼내며 말했다.
“일단 당신, 그 안에 정액부터 긁어 내야,”
“좀 쉬다가 하죠.”
어차피 임신은 안 하니까요. 제이는 다리를 모으며 말했다.
“제이. 당신 설마….”
약 먹은 건 아니겠지?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웃으며 아닙니다, 했다.
“그건 아니니 염려 마세요.”
“그럼 뭘 믿고 임신이 안 된다는 거야.”
“이따 말씀드릴 테니까.”
일단 좀 쉬죠. 제이는 자신이 깔고 누웠던 옷으로 대충 몸을 덮으며 말했다. 그래도 영 마음이 안 놓이는지 리욘은 조수석의 글로브 박스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다리 사이를 닦아주려는 건가 했는데 엉뚱하게도 자신의 가슴부터 닦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드물게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아까 그, 뭔가 흘러서.”
괜히 민망했는지 묻지도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그에게 제이는 “유즙입니다.” 하고 말했다.
“원래 출산 후에는 아주 가끔씩 나올 때가 있어요.”
“모유는 아니지?”
“성분은 비슷하겠지만.”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제노스가 아니라도 일반인 남자들 중에서도 호르몬 불균형 문제로 유즙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리욘은 그렇군, 하고 중얼거렸다.
“뭐, 그쪽 건 또 성분이 다르겠지만요.”
“아무튼 깜짝 놀랐어.”
안도를 하는 건지 아쉬워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리욘이 말했다. 제이는 그런 리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폐하께서 한 달 동안 제 가슴만 보신 건 계속 여기서 뭐가 나오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이셔서 그랬던 걸 겁니다.”
“뭐, 그럴 수도 있… 뭐야, 그거까지 읽었어?”
기가 찬다는 듯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읽으려고 읽은 건 아닙니다. 폐하께서 워낙 신경을 쓰고 계셔서 저절로 목소리가 제게까지 들린 거죠.”
대충 둘러댄 뒤 제이는 “아무튼 그런 겁니다.” 하고 말을 돌렸다.
“에이나르도 그렇지만 재활 센터 사람들도 제 가슴 같은 건 전혀 신경 안 씁니다. 애초에 남자 가슴을 그렇게 유심히 쳐다보는 사람도 잘 없고요.”
“아니, 나도 남자 가슴을 그렇게 쳐다보진 않는다고.”
졸지에 남자 가슴을 유심히 쳐다보는 사람이 된 게 자못 불쾌한지 리욘이 퉁명스레 말했다.
“압니다.”
제 가슴이라 쳐다보신 거잖아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폐하께선 제가 임신한 뒤로 가슴이 조금 달라진 걸 이미 알고 계셨으니까요.”
알고 있으니 더 그렇게 보였던 거지, 다른 사람들은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애초에 신경을 안 쓰니 그런 거 눈치도 못 챈다고 거듭 말하자 그제야 리욘이 음, 역시 그런 건가, 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다.
“네. 그런 겁니다. 그래도 걱정하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데, 전 재활 센터에서 운동할 때 티셔츠 안에 스포츠 웨어 하나 더 입고 합니다. 압박 소재로 된 거요.”
“그래…?”
“네.”
유두가 옷에 스칠 때마다 아파서요, 라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겨우 본인의 과민 반응을 인정하고 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관련된 얘기는 최대한 안 하는 게 좋았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보지만 뭐 보일 것도 없으니 마음 놓으세요.”
그렇게 말한 뒤 제이는 리욘의 손에서 물티슈를 받아 들었다. 몇 장 뽑아서 온통 정액과 애액으로 흥건한 다리 사이를 닦고 있자니 리욘이 다시 물티슈를 집어 들며 “손 치워 봐.” 한다.
“엄청나군.”
둘 다 오랜만이다 보니 정액의 양도 양이지만 농도가 엄청 진하다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혹 몸 상태가 정상이었으면 백 퍼센트 임신했을지도… 라고 생각하자마자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리욘이 말했다.
“그나저나 왜 임신은 안 된다는 거지?”
정말 피임약 먹은 거 아니야? 다리 사이의 정액을 닦으며 리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건 아니고요.”
프로락틴이라는 호르몬이 있습니다. 제이는 자신도 티슈를 뽑아 허벅지 아래까지 흘러내린 애액을 닦으며 말했다.
“여자들 유즙 분비를 촉진하는 호르몬인데 남자 몸에서도 다 분비됩니다.”
남자의 경우엔 이 호르몬이 전립선 발육에 관여하는 것 같지만 가끔 과다할 땐 유즙이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바로 지금의 자신처럼.
“그런데 이 호르몬이 배란을 방해한다더군요. 그래서 모유 수유를 하면 자연 피임이 된다고들 하는데 제가 지금 프로락틴 수치가 굉장히 높아서,”
“제이.”
갑자기 리욘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제이는 네? 하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얼굴은 더욱 심각했다.
“내가 요 일 년 동안 임신 출산 관련 책을 수백 권은 봤는데 말이야.”
어디 책만 수백 권을 보셨겠습니까, 라고 말하려던 제이는 이어진 리욘의 말에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건 잘못 알려진 임신 관련 상식의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야.”
“…….”
“모유 수유해도 임신은 할 수 있어. 가능성이 낮은 것뿐이지.”
“…정말 입니까?”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내가 알기론 그래.”
“…….”
“…….”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긁어 내는 게 낫겠지?”
한참만에야 리욘이 말했다.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처리부터 하지. 리욘이 물티슈를 한 장 새로 뽑으며 말했다. 그대로 자신의 다리 사이를 벌리려 드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제이는 “아니, 됐습니다. 그냥 두세요.” 했다.
“그냥 두라고?”
“네. 지금 당장 안에 고여 있는 정액만 긁어 낸다고 뭐 어떻게 될 것도 아니고요.”
어떻게든 되겠죠. 제이는 반쯤 자포자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뒤 한숨을 쉬며 자신의 옷을 집어 들었다. 속옷부터 입고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자니 자신의 와이셔츠에 묻은 정액을 닦으며 리욘이 말했다.
“임신하면 어떡하지?”
방금 전까지의 심각한 표정은 어디 가고 어느새 그는 살짝 설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껏 걱정되는 투로 말은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기대되는 마음은 억누를 수가 없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싸늘한 목소리가 나왔다.
“죽여 버릴 겁니다.”
“애, 애를…?!”
리욘이 기겁하며 외쳤다. 제이는 바지의 버클을 잠그며 말했다.
“아뇨, 폐하를요.”
“뭐?”
더욱 기겁하며 외친 리욘이 “아니, 잠시만 제이.” 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안에다 하라고 한 거야. 난 하라는 대로 한 죄밖에 없다고.”
그렇긴 하다. 그렇긴 하지만.
“폐하께서도 애초에 콘돔 준비 같은 건 안 하셨잖습니까.”
본인의 컨트롤 실력을 너무 과신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살짝 힐난하듯 말하자 리욘이 “아니,” 하고 고개를 젓는다.
“난 원래 오늘 할 마음이 없었어.”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그래서 아예 호텔 예약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고.”
“왕궁으로 돌아가서는요?”
“왕궁으로 돌아가서도 마찬가지야.”
당신 출산한 지 얼마 안 됐잖아. 리욘이 한숨을 쉬었다.
“무리 주는 행위는 절대 할 생각 없었다고. 강요할 마음도 없었고.”
리욘의 말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무리… 라고 중얼거렸다.
“제가 운동하는 거 보셨다면 절대 그런 말씀 못하셨을 텐데요.”
“…당신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는 거야?”
“평범한 웨이트입니다.”
물론 유산소 운동도 하고 있고요.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며 말하자 리욘이 “도대체 운동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하고 한숨을 쉰다. 드디어 준비해 둔 답변을 들려 줄 차례였다.
“왜 열심히 하겠습니까.”
제이는 짐짓 태연히 말했다.
“폐하께 좀 더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죠.”
“…정말이야?”
역시 산후 우울증의 늪에 빠진 리욘은 의심이 많았다. 여기서 무작정 믿을 것을 강요하면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제이는 일단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거짓말은 아닙니다.”
“뭐야, 그게.”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는 리욘에게 제이는 “기본적으로 몸이 둔한 상태로 있는 걸 싫어해서요.”라고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시그니를 낳았을 때는 이정도로 열심히 운동하지 않았습니다. 운동도 출산하고 한 달 뒤부터 시작했고요.”
“그 말은….”
“지금 이 정도까지 열심인 건 폐하의 영향이 크다는 거죠.”
정말입니다.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근육 1, 2kg 정도 차이는 옷 입고 있으면 아무도 몰라요. 벗어야 겨우 아는 정도죠. 제 벗은 몸을 누가 봅니까?”
폐하만 봅니다. 제이의 말에 리욘이 음, 하고 팔짱을 꼈다.
“확실히 몸이 아주 멋있어지긴 했어.”
“폐하 취향대로죠.”
“아니, 자넨 어떻게 하고 있어도 내 취향이니까.”
리욘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격했다. 제이는 조금 당황했다. 물론 기쁘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다음에 나올 말은 “그러니 날 위해서라면 이제 운동은 그만해도 될 것 같아.” 라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니 날 위해서라면 이제 운동은 그만해도 될 것 같아.”
예상했던 그대로의 말을 하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신음했다.
운동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제야 겨우 근육이 붙기 시작했는데 겨우 만들어지기 시작한 몸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리욘은 분명 “당신 운동하는 이유가 날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내가 이제 됐다고 하는데도 계속 운동을 하겠다고? 역시 날 위해서라는 건 다 거짓말이었군.” 이라며 지금까지의 말도 다 거짓으로 치부할 게 분명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믿거나 말거나 폐하 마음대로 생각하시라고 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리욘을 이 빌어먹을 산후 우울증에서 건져 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니나의 말대로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고,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고,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떠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를 주지시켜야만 했다.
“…….”
오랜 고민 끝에 제이는 고개를 들어 리욘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욱 당당한 어조로 “아뇨.”라고 말했다.
“전 폐하를 위해서 앞으로 더 열심히 운동할 생각입니다만.”
리욘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제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아까 직접 느끼셨잖습니까.” 하고 말했다.
“하체 운동의 효과를요.”
“하체 운동의 효과?”
내가 그런 걸 언제 느꼈지? 라는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이내 리욘이 “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게 그래서… 그런 거였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에게 제이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겠습니까? 제가 왜 폐하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운동을 해야만 하는지를요.”
리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음, 하고 깊이 고민할 뿐이었다. 아니, 고민하는 척할 뿐이었다.
그리고,
“아니. 그런 이유라면 굳이 운동을 계속 할 필요는 없어, 제이. 하지만 당신이 운동하는 걸 워낙 즐기는 것 같고, 또 실제로 운동이 몸에 좋으니까. 그렇지. 운동이라는 건 몸에 좋은 거야. 그러니까 굳이 내가 그걸 하지 말라고 말을 할 수는 없는 거겠지. 그렇고말고.”
장황한 사설 끝에 리욘은 ‘날 위해 운동을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날 위해 운동을 하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는 답을 내놓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혹시라도 리욘이 말을 바꿀까 제이는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보험 차원에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앞으로 운동 때마다, 폐하를 생각하며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
제이의 필사의 노력 덕분인지, 다행히도 리욘은 금세 산후 우울증에서 벗어나 예전의 그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 반작용인지 전보다 더 거만하고 오만하고 제멋대로 구는 것도 같았지만 제이는 만족했다. 역시 폐하는 저런 모습이 어울린다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꾹꾹 눌러 참는 것보다 할 말 못 할 말 다 하고도 당당하게 구는 게 훨씬 더 어울린다며 흐뭇해하는 것도 잠시, 제이는 곧 리욘은 물론 그를 달래자고 온갖 소릴 다 했던 자신까지도 원망하게 되었다.
“어디 보자. 왕비께서 운동을 잘하고 계신지 오늘도 확인을 한번 해 봐야겠군.”
리욘이 밤이면 밤마다 저렇게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전에는 하지도 않았던 온갖 것들까지 다 요구한 까닭이었다. 심지어 아주 가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싶은 날에는 “왕비, 요즘은 운동을 열심히 안 하는 건가…? 설마 나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건 아니겠지?”라며 서운한 표정을 지어 제이를 더욱 열 받게 만들기도 했다. 하여 얼마 전까지 리욘이 그랬던 것처럼, 제이 역시 한동안 달력을 들여다보며 언제 지옥의 12주가 다 지날까 기다리는 것만이 일이었다.
12주가 지나기 전에 제이는 다행스러운 소식을 하나 얻었다.
“임신, 아니에요.”
니나가 검사지를 흔들며 말하는 순간 제이는 크게 안도했다.
“다행히 내가 그대의 손에 죽을 일은 없겠군.”
리욘도 웃으며 말했지만 제이는 알 수 있었다. 말과는 다르게 리욘이 내심으로는 살짝 아쉬워하고 있음을.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었으므로 그날 밤 제이는 립 서비스 차원으로 리욘에게 말했다.
“셋째를 가지려면 가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폐하. 리니가 좀 더 크고 나면 그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죠.”
그 말은 결국 셋째는 안 가질 거라는 뜻이었지만 무슨 말을 들어도 자기 좋을 대로만 듣고 해석하는 재주를 가진 리욘은 설렌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만약 셋째가 태어난다면 자넬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어, 제이. 난 역시 아들보다는 딸이 더 좋거든.
아직 지옥의 12주가 다 지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혹시나 리욘의 산후 우울증이 재발할까 제이는 그 언젠가의 리욘처럼 하고픈 말을 꾹 참고 너그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안 좋겠습니까, 폐하.
물론 절대 셋째를 가질 마음은 없었지만, 안 가질 거라고 다짐 했지만, 사실 제이는 그런 자신의 다짐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리욘에게만은 한없이 무른 자신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