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0/22)

리욘이 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되긴 했지만, 왕비궁의 접견실은 나름의 모양새를 잡아가고 있었다. 먼저 접견 신청자의 수가 대폭 줄면서 한 사람당에게 주어지는 접견의 시간이 전보다 길어졌다. 애초에 지금의 이 접견이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왕비를 뵙기를 요청한 자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깊은 속내를 털어놓거나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앞서 방문했던 사람들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조금 덜 의례적인 대화를 한두 마디 정도 더 나누는 것뿐이었다.

의외로 한 번 다녀갔던 사람이 또 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주로 귀족 부인들이 그랬다. 남편과 한 번 다녀갔던 부인이, 다른 귀족 부인들과 함께 또 접견실을 찾아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이다. 딱히 검은 속내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고 싶어 그러는 사람이 대부분인 듯해 제이도 굳이 재접견 요청을 막지는 않았다. 물론 또 뵙는다거나, 어쩐 일로 또 오셨느냐는 등 아는 척을 하지도 않았지만.

어쨌거나 전반적으로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더 호의를 드러내는 편이었다. 접견 신청자 성비도 갈수록 여성 쪽이 높아지는 추세였고.

“그야 전하가 잘생긴 젊은 남자니까 그렇지요.”

헤르타는 무슨 당연한 소릴 하느냐는 반응이었지만 제이는 그래서 더 의외였다. 국왕의 아이를 가져서 배까지 조금 나와 있는데도 용케 그런 식으로 보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뭐가 됐든 무조건적인 경계와 의심만으로 가득했던 초반의 분위기보다는 지금의 이 여유롭고 온화한 분위기가 제이는 더 마음에 들었다. 다음 주가 되면 접견을 하루에 한 시간으로 줄여도 될 것 같다, 고 생각하며 다음 접견 대기자를 들여보낼 것을 명령했다.

“에, 다음은… 피엘투레르 공작가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하르트만을 쳐다봤다.

“피엘투레르 공작가라고요?”

“네.”

하르트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여는 찰나, 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젊은 아가씨 하나가 들어왔다. 아. 제이는 순간 중얼거렸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예를 갖춘 자세로 수줍게 인사하는 아가씨를 가리키며 하르트만이 속삭였다. 피엘투레르 공작의 둘째 따님이십니다.

“클로에라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병환 중이셔서 송구하게도 제가 먼저 전하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려니 자기도 민망한지 클로에가 살짝 낯을 붉히며 말했다. 말 많은 부친 때문에 딸이 고생이로군. 측은하게 생각하며 제이는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클로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왕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공작가 영애답게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마다 기품이 넘치고 말투도 단정했다. 병원에서 환자들이 입방아를 찧어대던 것에 비하면 얼굴도 꽤 예뻤다. 눈에 확 띄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차분하고 이지적인 분위기가 퍽 매력적이었다. 과연 왕세자비 후보로 거론될 만하구나. 클로에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제이는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한 아가씨도 눈에 안 찬다고 못마땅해하던 전국의 어르신들께서 도대체 난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모르겠다고.

지극히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대화를 마치고 클로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인사를 하기 위해 자세를 잡던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 끝에 “저어, 전하….” 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 주말에 광장에서 자선 바자회가 열리는 걸 알고 계시는지요.”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아암 환자를 위한 행사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라고 클로에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멘글라다 부인회에서 이번에 해당 행사에 참여하게 되어서요. 바자회에서 쿠키를 만들어서 팔기로 했거든요.”

“주최를 하는 건 아니고요?”

“네. 그냥 자리를 얻어 참가만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요? 라고 물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클로에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혹시, 만약에 전하께서도 내일 시간이 되신다면… 참석을 해 주십사 하고….”

클로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제이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걸 알아차린 덕분이었다.

“…죄송합니다. 방금 이야기는 잊어 주세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말하는 클로에에게 “잠시만요, 피엘투레르 양.” 하고 손을 든 뒤 제이는 재빨리 옆에 앉은 하르트만에게 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거, 꼭 가야 하는 겁니까?”

“네? 그럴 리가요. 이런 작은 행사에까지 전하께서 참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르트만의 대답에 제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였다.

“전하. 부인회 행사에는 언젠가 한 번은 참여하셔야 할 겁니다.”

헤르타가 차분한 목소리로 제이에게 속삭였다.

“이번 행사는 아니지만 부인회와 왕실이 함께 주최하는 행사가 몇 개 있습니다. 그때는 전하께서 총책임자가 되시는 겁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 데리고 일하기가 쉽지 않으실 테니 차라리 이번처럼 작은 행사에 같이 참여하셔서 미리 안면을 터두는 게 낫지 않나 싶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이니까요.”

한마디로 꼭 참여할 필요는 없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참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행사란 소리였다.

어쩌지. 제이는 고민에 빠졌다.

헤르타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어차피 한번은 같이 일을 진행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 거라면 미리 얼굴을 익혀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그거였다. 과연 내가 참석하기를 저 사람들이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걸까, 하는 거.

물어 보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겠지….

제이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그렇다고 마냥 언제까지나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개도 못 들고 있는 클로에가 불쌍해, 제이는 이번 딱 한 번만 그녀의 머릿속을 읽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저쪽도 예의상 건네 본 말일 확률이 컸다. 속으로는 정말로 올까 봐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깔끔하게 거절해 주는 게 저쪽을 위해서도 좋은 거니까- 라고 갖은 핑계를 다 갖다 붙이며 클로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찰나였다.

- 어떡하지. 괜한 말을 했나 봐. 역시 거절 할 걸 그랬어. …아아, 하지만 다들 너무 기대하고 있어서. 나라면 말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랬단 말이야. 꼭 모시고 와 달라고, 그래서….

예상도 못했던 이야기에 제이는 몹시 당황했다. 진심으로 자신이 참여해 주길 바라고 있단 사실보다, 며칠 동안 그 말을 아무도 못 해서 미루고 미룬 끝에 클로에가 그 역할을 떠맡았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이었다. 특히 이번 행사의 총괄을 맡은 하르트발 백작 부인은 자신에게 행사에 참여해 달란 말을 하고 싶어서 지난 일주일간 세 번이나 접견실을 찾았다가 세 번 다 딴소리만 하고 간 모양이었다.

“아, 그럼… 한번 시간을 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이는 여전히 당황한 상태로 말했다. 옆에서 하르트만이 “네?” 하고 소리쳤다. 클로에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 말씀은, 참여를 하실 수도 있다는, 그런 말씀이신가요…?”

믿기지가 않는지 클로에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일단은… 네.”

그런 겁니다. 제이는 크게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이 행사에서 부인회가 만들어 팔기로 한 품목이 무엇이었는지, 뒤늦게야 기억이 난 까닭이었다. 쿠키였다.

***

내가 왜 그랬을까.

노트북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제이는 생각했다. 모니터에 띄워 놓은 동영상 화면 속에서는 핸드 믹서기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며 계란 흰자를 크림으로 만들고 있었다. 곧 엄청난 양의 버터와 설탕이 그 위로 쏟아졌다. 보고만 있는데도 입안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결국 동영상의 정지 버튼을 누른 제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오늘 내내 수백 번은 더 했을 생각을 다시 한 번 더 반복했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왜 참석한다고 한 걸까.

다른 것보다 쿠키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혼자 살면서 음식은 이것저것 만들어 봤지만 쿠키는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시그니가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만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만들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 만들 자신이 없느냐 하면,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 음식은 대체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아무리 먹어도 그저 달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쿠키를 만든단 말인가. 맛도 제대로 못 볼 게 분명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왕 하기로 한 거 기본적으로 만드는 방법 같은 건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뒤늦게 침대에 누워 인터넷으로 쿠킹 동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뭘 봐도 설탕이 정말 많이 들어가는구나, 버터도 엄청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모르겠다. 그냥 힘쓰는 일이나 시켜 달라고 해야지.

막 노트북을 닫으려는 찰나 동영상 사이트에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지금 해당국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영상을 확인해 보세요!  제이는 무심코 팝업 화면에 뜬 문장을 클릭했다. 잠깐 화면이 하얗게 변하나 했더니 곧 ‘HIT’ 말머리를 단 영상 몇 개가 순서대로 주르륵 떠올랐다. 제일 상단에 위치한 동영상의 썸네일을 확인한 순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하고 말았다. 자신과 리욘의 시청 앞 인터뷰 영상이었다. 다른 영상들에 비해 조회수며 코멘트 개수가 압도적이었다.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보면 본인만 부끄러워질 거란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과연 이걸 봤을까.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마 재생 버튼은 못 누르고 터치 패드에 손가락을 댔다, 뗐다를 반복하고 있자니 마침 그 당사자가 욕실 문을 열고 나오며 말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거야?”

제이는 대답 대신 노트북의 화면을 리욘 쪽으로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모니터를 응시하던 리욘이 “오.” 하며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새 왕비가 예뻐 죽는 팔불출 국왕 폐하시잖아.”

역시 봤구나.

제이는 웃으며 노트북을 닫았다.

“길링이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

사이드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침대로 올라오던 리욘이 말도 말라는 듯 한숨을 쉰다.

“엄청 혼났어. 위엄은 어디로 내팽개치고 거기서 그렇게 웃고 있느냐고. 앞으로 왕비 전하와 함께하실 땐 특히 표정 관리에 유의하셔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를 하더군.”

“관리한다고 되겠습니까.”

농담처럼 말하자 리욘이 “안 돼, 무리야.” 하고 고개를 젓는다. 그대로 제이를 끌어안으며 그는 말했다.

“보고만 있어도 이렇게 좋은데.”

그 말이 정말인 것처럼 웃으며 다정하게 입 맞춰 오는 남자를, 제이는 자신도 웃으며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일주일 사이에 조금 더 부푼 배가 신기한지 리욘이 “이제 이렇게 안으면 배가 먼저 닿아.” 하고 웃었다.

“전부터 그랬습니다.”

“그랬나?”

잘 모르겠어. 중얼거리며 리욘이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살며시 배를 어루만졌다.

“이제 곧 움직이겠지?”

“아마도요.”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자신의 몸의 변화를 하나하나 다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리욘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사랑스러움이 넘쳐흘렀다. 빈말로도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여자와는 달리 몸이 부드럽지도 않고, 적당한 굴곡도 없어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마른 몸에 배만 나온 모습이 스스로가 보기에도 조금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리욘은 늘 이렇게 예쁘다고 말하고, 신기하다고 말한다.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 더욱 그러했다. 힘들 걸 알면서도 그의 손길을 거절할 수 없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직은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흉한 모습이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서, 여전히 그에게는 성적인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폐하….”

제이는 신음하듯 리욘을 불렀다. 배를 쓰다듬던 손은 어느덧 제이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단단해졌어.”

손끝으로 유두를 건드리며 리욘이 말했다.

“그것도 전부터… 아, 폐하.”

아픕니다. 제이는 조금 헐떡이며 말했다. 정말로 아파서 아픈 게 아니라, 너무 느껴서 아프다는 걸 눈치챈 건지 리욘이 웃으며 손을 떼고는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그대로 입에 머금고 쪽, 소리가 나도록 세게 빠는 바람에 제이는 신음하며 리욘의 머리를 끌어안고 말았다. 밀어내야하는데, 마음과 다르게 몸은 더욱 리욘을 원하고 있었다.

“폐하… 폐하, 너무, 세게는, 으응, 그렇게 깨물면 아픕, 니다.”

심지어 살살 깨물어 달라고 주문까지 하고 있었다. 리욘이 젖꼭지를 입에 문 채 웃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도리가 없었다. 결국 리욘이 반대쪽 유두를 입에 무는 순간 제이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폐하, 이제 그만… 그만하십시오.”

떨리는 손으로 밀어내며 말하자 리욘이 웬일로 곧장 가슴에서 입을 뗐다. 의외라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리욘이 속옷을 내리고는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제이는 당황해서 폐하, 하고 그를 불렀다. 설마 삽입하려는 건 아닐 테고, 손으로라도 해 달라는 건가. 입덧 때문에 입으로 하는 건 무린데. 그 짧은 순간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제이.”

뒤로 돌아봐. 낮게 명령하는 리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살짝 갈라져 있었다. 설마, 라고 생각하면서도 제이는 그가 시키는 대로 돌아누웠다. 리욘에게 등을 보인 채 옆으로 누워 있자니 불안하면서도 떨리는 마음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넣는 건 안 된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리욘의 손이 제이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다리 모으고, 허벅지에 힘 줘 봐.”

아….

그제야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제이는 얼른 시키는 대로 했다. 두 다리를 붙인 상태로 힘을 주자 곧 뜨거운 것이 허벅지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 생경한 열기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베개를 움켜쥘 틈도 없이 허벅지 사이의 것이 쑥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좁은 공간을 비집고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맨살에 비벼대다 보니 몇 번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허벅지 사이가 홧홧하게 아려 왔다. 다행히 리욘의 성기에서 흘러나온 프리컴 덕분에 금세 허벅지 사이가 젖어 들었다. 하지만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성기가 허벅지 사이를 드나드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각도가 계속 엇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폐하….”

일부러 그러는 건지 자꾸만 제 성기를 툭툭 건드려 대는 남자의 물건 때문에 제이는 미칠 것만 같았다. 두툼한 귀두가 속옷 안에서 크게 부푼 음낭을 건드릴 때마다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앞뒤로 쏟아진 액으로 속옷은 아까부터 흠뻑 젖어 있었다.

“폐하, 그만, 그만하세요….”

결국 제이는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리욘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을 하자마자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남자의 성기가 가파른 각도로 허벅지 사이를 드나들며 연달아 제이의 성기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더니 실수인 척 기어이 제이의 회음을 쿡, 찌르고 말았다.

“헉…!”

소리 지르며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뒤챘다.

“이런.”

미안해, 제이.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며 리욘이 제이의 자세를 다시 바로 하게 했다.

“자, 다시 다리 모으고, 그래. 허벅지에 힘을 줘야지.”

웃으며 말하는 리욘의 목소리 같은 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제이는 다급히 자신의 속옷을 끌어내렸다. 떨리는 손으로 발기한 성기를 움켜쥐려는데 리욘이 조금 더 빨랐다. 그의 손이 성기를 꽉 쥐자마자 제이는 비명을 지르며 사정하고 말았다.

“이런. 싸 버린 거야?”

리욘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순간 구멍이 꽉, 조여 들었다. 남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몸이 멋대로 다음 순서를 기대하며 혼자 수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마터면 넣어 달라고 말할 뻔한 걸, 제이는 겨우 참아내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왕비께서 파정을 하셨군.”

그런 제이의 목덜미에 키스하며 리욘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귀가 확 뜨거워졌다. 그리고 불가사의하게도 그 순간 애액이 거의 쏟아지듯 흘러나와 밑을 적셨다.

“흣….”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제이는 신음을 삼켰다. 그사이 다시 리욘의 물건이 허벅지 사이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제이, 힘을 줘야지.”

이러면 못 해. 리욘이 달래듯 말했지만 제이로서는 도리가 없었다. 사정의 여파인지, 아직도 경련하듯 떨리는 내부 때문에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남자의 물건을 품고 싶어 안달이 난 듯 구멍은 계속 움찔거리며 애액을 흘려 냈다.

힘들어하는 걸 알았는지 리욘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성기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계속 제이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그는 뒤늦게나마 사과했다. 미안해, 못 참아서. 정말 미안해.

“제이.”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남자를, 제이는 여전히 헐떡이며 돌아봤다. 입술이 겹쳐졌다. 이미 흠뻑 젖은 허벅지가 리욘의 정액으로 다시 한 번 젖어 들었다. 신음하며, 제이는 눈을 감았다.

***

참여해 주길 바랐고, 참여하겠다는 답변까지 받았지만 역시 참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제이가 제과 전문학교의 실습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모든 부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역시 안 오는 게 나았으려나.

제이는 문의 손잡이를 붙잡은 채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지나가던 행인인 척하고 문을 닫아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찰나 준비실에서 커다란 설탕 봉지를 들고 나오던 클로에가 “전하…!” 하며 소리쳤다.

“정말 와 주셨군요!”

설탕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달려오는 클로에를 향해 제이는 조금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시간 내 보겠다고 말씀드렸지 않나요.”

“아, 아뇨, 말씀하셨어요! 말씀은 하셨지만….”

그래도 정말 오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요. 클로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그녀가 제이를 안쪽으로 안내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귀족 부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달려 나와 왕비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여기저기서 전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어 버린 현장을 진정시킨 건 이번 행사의 총괄을 맡은 하르트발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흥분한 귀족 부인들을 일단 다 자리로 돌려보낸 뒤, 본인이 대표로 왕비의 앞에서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고는 정중한 말투로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보시다시피 한창 음식을 만들던 중이라서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전하께 예를 갖춰 인사드려야 옳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못 됨을 부디 이해해 주세요.”

“아,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도 양해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라고 제이는 미안한 낯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쿠키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요. 아까운 재료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데, 오늘은 그냥 참관만 해도 될까요.”

“어머, 물론이죠.”

그렇잖아도 왕비에게 밀가루 반죽을 만들게 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인지 하르트발 백작부인은 어서 이쪽으로 오시라며 실습실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로 제이를 이끌었다.

“이곳에서 편히 쉬시면서 보십시오.”

가로가 길고 의자 여러 개가 놓인 걸로 봐선 아마 시식용 테이블인 듯했다. 감사합니다. 제이는 정중하게 인사한 뒤 의자에 앉았다. 그사이 클로에가 간단한 음료수와 먼저 만든 쿠키들을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테이블에 그것들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다시 한 번 수줍게 말했다.

“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전하.”

클로에가 정말, 정말 기뻐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제이는 도리어 미안해졌다. 오라고 해서 오긴 했지만 딱히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쿠키를 만들어 보겠다고 나서면 분명 이 사람들 중 누군가는 본인의 할 일을 포기하고 자신의 옆에만 붙어있어야 할 판이었다. 근처의 부인들도 자신이 신경 쓰여 제대로 일을 못 할 게 뻔했다. 도움은 못 되더라도 전력에 마이너스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사람들은 새 왕비가 이곳에 얼굴을 비춘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계속 이쪽을 힐끔거리더니 한 번씩 눈이 마주치면 수줍은 미소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제이도 작게 고개를 숙여 화답하곤 했다. 하면서도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일일이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해 줘야 하는 거지. 설마 오늘 일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눈앞이 아찔해졌는데, 다행히 삼사십 분 정도가 지나자 부인들은 왕비의 존재 따위 잊은 듯 맹렬히 반죽을 치대고 계란물을 휘저어 가며 쿠키를 만드는 데에만 몰두했다. 덕분에 제이도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좀 더 편안해진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자세가 편해지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어젯밤의 여파인지 오늘은 종일 이렇게 몸이 나른하고 피곤했다. 삽입은 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섹스는 섹스라고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삽입을 해 버렸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로, 급한 욕구만 처리해 버린 까닭인지 오히려 찝찝하기만 했다. 리욘은 그래도 어제 그렇게 하고 나서 조금 해소가 됐는지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았지만 이쪽은 아니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몸의 열기 때문에 거의 자질 못했다. 몸도 불편했지만 마음은 더욱 그러했다.

알고 있다. 이건 모성애와는 상관없는 문제라는 걸. 임신 중에도 성욕은 느낄 수 있고, 호르몬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더욱 관계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걸 제이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계속 고민하고 자괴감에 시달리는 건 결국 그런 거였다. 자신은 어쨌거나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한 건, 아이를 갖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부터였다. 정확히는 ‘어차피 지울 아이를 갖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부터였지만. 연구소나 블라스트 안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졌던 일이지만 바깥세상에서는 누구라도 경악할 만한 끔찍한 발상이라는 걸 니나와의 대화를 통해 알았다. 이제 와서 새삼 난 역시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닌가 보다, 라고 자책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걸로 크게 괴로워한 적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 뒤에 붙는 호칭이 달라지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자 사소한 것 하나에도 마음이 쓰이고 걱정이 됐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행동이 결국 ‘자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부적격자라는 판단을 얻게 되면 그 과오는 리욘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은 싫었다.

물론 자신이 임신 중에도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고 해서 그걸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아니,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그런 거 알지도 못했다. 다만 혼자서 뜨끔할 뿐이었다. 이 상황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일까, 그래도 엄마라면 아이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행동은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심지어 내 실수로 한 번 잃기까지 했었던 아이인데, 유산 가능성도 남들보다 높은 상황인데, 보통 이런 경우에는 성욕조차 안 이는 게 보통이 아닌가, 라고.

…정말 쓸데없는 고민이지.

제이는 눈을 감은 채 웃었다. 말 그대로 쓸데없는 고민이고, 그러다 보니 따로 해결할 방법도 없는 고민이었다. 굳이 해결할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이건 아이를 낳고 나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앞으로도 자신은 이런저런 쓸데없는 고민들로 골머리를 썩여야 할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그냥, 벌써부터 조금 넌더리가 날 뿐이었다. 본인의 이런 성격이 싫어지고 리욘이 부러워졌다. 그러면서 조금 얄밉기도 했다. 그러게 왜 사람을 이런 자리에다 앉혀서 이런 쓸데없는 고민까지 다 하게 만드는 건지. 어제도 모처럼 흐뭇한 얼굴을 하고 옆에서 자는데 평소 같았으면 ‘그래, 한 사람이라도 좋았으니 된 거지.’ 하고 말았을 걸, 어제는 괜히 한 대 걷어차 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치솟아 더 잠을 못 잔 것도 있었다.

진짜 당분간만이라도 각방을 써야 하나 어째야 하나, 16주만 지나면 분명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 올 텐데. 그때는 밀어낼 핑계도 없었다. 물론 밀어낼 이유도 없긴 했지만.

“전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제이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하르트발 백작 부인이 새로 완성된 쿠키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그나저나 곤하셨나봅니다. 송구하다는 듯 말하는 백작 부인에게 제이는 아뇨, 아닙니다, 하고 얼른 대답했다.

“잠시 뭐 좀 생각하느라고요.”

말하고 나니 부끄러웠다. 소아암 환자를 위한 자선 행사에 내놓을 쿠키를 만들고 있는 경건한 장소에서 겨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자신은 쿠키를 맛 볼 자격도 없었다.

차라리 힘쓰는 일이라도 시켜달라고 할까.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침 키 작은 부인 하나가 높은 찬장에 있는 접시를 꺼내려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으로 다가갔다. 부인의 손이 몇 번이나 닿았다 떨어진 접시를 꺼내 건네며 물었다.

“이거 꺼내려고 한 거 맞습니까?”

부인은 당황한 듯 어머, 하고 한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제이가 내미는 접시를 받아들며 “아, 네, 맞습니다.” 하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합니다.”

접시 하나 꺼내 줬을 뿐인데, 무슨 큰 귀한 선물이라도 받은 양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부인의 모습에 당황해 제이는 손까지 저으며 “아닙니다.” 하고 말했다.

“그, 저는, 키가 크니까요.”

말 안 해도 뻔히 다들 아는 사실을 굳이 이야기한 건, 그러니까, 자신에게 이런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어필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부디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부탁하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비에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말하기는 망설여졌던 모양이다. 부인들은 제이가 몸을 일으킬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저으며 “아닙니다, 전하.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는 재빨리 일을 처리해 버렸다. 결국 제이는 마지막까지 참관자로서의 임무만을 성실히 수행…하다 가나 했는데, 아니었다. 실습실을 저녁 6시까지 빌리기로 했다더니 오후 4시 반이 넘어가자 그때부터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완성된 쿠키의 수량이 당초 예상했던 바에 크게 못 미친다는 걸 알아차린 부인들이 뒤늦게야 부랴부랴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는 왕비고 뭐고 없었다.

“전하, 저 접시 좀 꺼내 주세요!”

“전하, 이 초콜릿 좀 잘게 부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전하, 이 병조림 뚜껑 좀 열어 주세요!”

여기저기서 요청이 빗발쳤다. 물론 제이는 성실히 부인들의 요구를 다 들어줬다. 주로 큰 키와 강한 악력 등을 요구하는 일들이 그에게 주어졌다.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던 병조림 뚜껑이 간단하게 열리고 꽝꽝 얼어붙어 있던 초콜릿이 순식간에 다져지자 부인들은 신이 나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우리 폐하 결혼 정말 잘하신 것 같다고. 왕비 전하가 남자라 너무 좋다고.

그 와중에도 제이가 임산부라는 건 잊지 않았는지 조금이라도 무거운 걸 들라 치면 다들 기겁을 하고는 “안 돼요, 전하! 그건 하지 마세요!”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특히 10kg짜리 밀가루 포대를 옮겨 주려 했을 때는 얼굴까지 하얗게 질려서는 제이를 말렸다.

“무거운 건 절대 들면 안 됩니다. 그건 저희가 옮길 테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10kg이 무거운 거였던가, 라고 생각하면서도 제이는 얌전히 밀가루 포대를 내려놓았다. 괜히 괜찮다고 높이 들어 올렸다간 옆에 선 쇼나르 후작부인에게 등짝이라도 얻어맞을 기세였기 때문이다.

부인들의 고군분투 덕분에 다행히 쿠키는 아슬아슬하게 수량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쿠키들이 오븐에서 구워지는 동안 클로에가 제이에게 다가와 말했다.

“쿠키 한 번 만들어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저 말입니까?”

제이는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클로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까요. 기념으로 한 번 만들어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요. 여기 재료도 다 준비돼 있잖아요.”

“아뇨, 저는….”

못 합니다, 그런 데는 재주가 없어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제이는 결국 삼키고 말았다. 클로에보다도 클로에의 뒤에 서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뭇 여인들의 표정이 몹시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래, 뭐… 어차피 내가 쿠키를 잘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말 그대로 온 김에 기념 삼아 한 번 만드는 것뿐이었다. 재료들도 다 쓰고 남은 걸 활용하는 거니까 실패한다고 해서 크게 미안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제이는 클로에와 함께 쿠킹 테이블로 향했다.

클로에는 초심자가 도전해 보기 좋은 과제라며 버터 쿠키를 추천했다. 과연 초심자용답게 레서피가 간단했다. 그나마도 클로에가 레서피에 맞춰 모든 재료들을 다 계량해 준 덕분에 제이는 그냥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것들을 순서대로 섞고 저어 대기만 했다. 의외로 별거 아니군, 이라고 생각하자마자 최대의 난관이 닥쳤다. 바로 쿠키의 모양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여기 이 짤주머니에 담아서요, 이렇게 유산지 위에 모양을 만들어 그리면 되는 거예요.”

당연히 틀을 이용해 만들 거라고 생각했던 제이는 심히 당황한 표정으로 클로에를 쳐다봤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았는지 클로에가 “이 쿠키는 원래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전하.” 라며 웃었다.

“반죽이 물러서 틀을 사용하면 다 묻어 버려요. 그리고 짤주머니를 이용하면 훨씬 더 섬세하고 예쁜 모양이 만들어지거든요.”

“그… 알겠습니다.”

뭔가 말하려던 제이는 곧 단념하고 짤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어쩌겠는가. 선생님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야지. 그냥 대충 흉내만 내 보자. 그럼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했으나 어떻게든 되지 않았다. 힘 조절이 잘 안 돼선지 짤주머니가 계속 터졌다. 옆으로도 터지고 밑으로도 터졌다.

“너무 긴장하셨나 봐요.”

안 그러셔도 돼요, 전하. 새 짤주머니에 쿠키 반죽을 채우며 클로에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냥 기념 삼아 만들어 보는 거잖아요. 꼭 예쁘게 안 만드셔도 돼요. 중요한 건 맛이잖아요.”

클로에의 격려에 힘입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도전해 봤다. 다행히 짤주머니는 터지지 않았지만, 대신 굉장히 해괴한 모양의 쿠키가 만들어졌다. 게다가 몇 개는 간격이 너무 좁아서 나중에 다 구워 내고 나면 분명 거대한 하나의 쿠키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요. 분명 맛있을 거니까.”

예열된 오븐에 쿠키 반죽을 집어넣으며 말하는 클로에에게 제이는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피엘투레르 양.” 하고 드물게도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돈 받고 팔지는 않을 거죠?”

“그건 하르트발 백작 부인께서 결정하시겠죠?”

다 만들어진 쿠키의 상태들을 보고 값을 정하는 건 하르트발 백작 부인의 역할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당장 하르트발 백작 부인에게로 향하려는 제이를 붙잡으며 클로에가 “아이, 괜찮아요. 전하.” 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만드신 거라구요. 모양이랑 상관없이 몇 배의 값을 주고라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거예요. 장담해요.”

클로에가 너무 신이 난 목소리로 말해서 “그게 더 싫은데요….”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냥 바자회가 열리는 날 제일 먼저 가서 내가 저 쿠키를 사 버려야겠다고 제이는 굳게 마음먹었다.

***

차는 미끄러지듯 왕궁의 후문을 통과했다. 왕비궁 현관 앞에 차를 대기 위해 열심히 핸들을 돌리던 하르트만이 “어라?” 하고 눈을 크게 떴다.

“폐하께서 오셨나 봅니다.”

제이는 고개를 들어 왕비궁을 바라봤다. 현관 근처에 제1 특별 경호 중대 대원들이 몇 명 서 있었다. 그들은 차가 들어오는 걸 확인하자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섰다.

“오셨습니까.”

제이의 차가 현관 앞에 멈춰 서자 로겐이 문을 열어 주며 인사했다.

“폐하께서 와 계십니다.”

“언제부터 와 계신 겁니까?”

“한 십 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아마 저녁 식사 시간을 이용해 잠깐 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바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방에서 십 분 씩이나 앉아 기다리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전하, 오셨습니까.”

궁 안으로 들어서자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말에 제이는 “접견실이요?” 하고 되물었다. 사용인이 “네.”, 하고 대답했다.

왜 침실도 아니고 응접실도 아니고 접견실이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제이는 1층 제일 안쪽에 위치한 접견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서 있던 경호원들과 에이나르가 꾸벅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제이가 묻자 에이나르는 글쎄요, 하고 웃었다.

“폐하께서 전하를 찾으시는 데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여전히 웃으며 말하는 걸 보니 에이나르도 방문의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제이는 짧게 노크한 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리욘이 고개를 들며 “왔나?” 하고 말했다.

“언제부터 기다리신 겁니까.”

제이는 다가가며 물었다.

“글쎄. 십 분 정도 됐을걸.”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다 그냥 맞은편 소파에 가 앉았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지?”

코트를 벗던 제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차량 이용 내역을 봤다면 어디 다녀오는 길인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굳이 묻는다는 건 결국 이게 목적이라는 뜻이었다.

“부인회에서 이번 주말에 열릴 바자회 준비를 한다고 해서요.”

“그래서, 거기 다녀왔다는 건가?”

“네.”

흠, 하고 리욘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쿠키를 만들었거든요.”

제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리욘이 뭐? 하며 미간을 좁혔다.

“뭘 만들었다고?”

“쿠키요.”

“당신이?”

“네. 제가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리욘이 곧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부인회 일로 나간 건 알았지만 뭘 만들기 위해 나간 건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뭐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제이는 벗은 코트를 옆의 소파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당신이, 당신이 쿠키를 만들었다니까.”

말하면서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지 리욘은 고개를 숙인 채 큭큭거렸다. 한참을 소리 내어 웃던 그는 약 2분 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진정이 된 건지 하아, 하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몇 번인가 호흡을 고른 그는 제이의 얼굴을 보며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는 안 가도 되는 거였어, 제이.”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왜 간 거지?”

“그 사람들이 제가 와 주길 바랐으니까요.”

흠, 하며 리욘이 팔짱을 꼈다.

“사람들이 해 달라면 다 해 줄 건가? 그게 뭐든지?”

“그럴 리가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간 것뿐입니다. 제이는 차분히 말했다.

“그리고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모이는 자리였고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리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나라면 안 갔을 거야.”

“폐하는 그러셨겠죠.”

제이는 담담히 말했다. 딱히 리욘을 비난하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리욘이라면 정말 안 갔을 걸 알아서, 그래서 한 말이었다.

“그래. 일의 경중이라는 게 있으니까.”

리욘 역시 제이의 의도를 알았는지 다른 말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힐 뿐이었다.

“그런 일에 참여하는 것보단 차라리 그 시간에 좀 더 쉬고, 다른 일에 그 체력을 쓰는 게 옳다고 생각하거든.”

“예를 들면요?”

“여러 가지가 있지. 고위 귀족을 따로 만난다거나, 아니면 더 큰 규모의 행사에 참여를 한다거나.”

제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맞은편에 앉은 리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제 방식이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웃으며 말하자 리욘이 바로 “그건 아니야.” 하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야. 그대의 방식은 나름의 공정함을 갖추고 있으니까. 합리적이지.”

“그런데요?”

“그런데, 썩 효율적이진 못한 방식인 거지.”

내 생각엔 그래. 리욘은 적당히 여지를 두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임을 밝혀서 ‘네가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그저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뿐이다’라고 어필을 하려는 것이다.

리욘치고는 굉장히 조심스럽고 정중한 화법이었다. 그리고 제이는 리욘이 이렇게까지 조심스레 말을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리욘 본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본인의 발언이 지나친 간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말을 하는 건 결국 그거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얘길 하는데, 웬만하면 네 방식은 버리고 내 방식대로 해 주면 안 되겠느냐 하는 거였다. 왜 편하게 앉아 남들에게 대접만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차 버리고 굳이 고생을 사서 하느냐는 거였다.

“거듭 말하지만, 그대의 방식이 틀렸다는 건 아니야.”

리욘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계속 이야기하는 걸 보니 자기도 말해 놓고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했다. 바로 며칠 전에도 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때 분명 리욘은 얘기했었다. 그대의 일이니 그대의 방식대로 하는 게 맞다고. 그대가 좋으면 좋은 거라고.

그렇게 두 번이나 말해 놓고는 이삼 일 만에 또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마음에는 안 드니까. 이러라고 왕비 자리에 앉혀 놓은 게 아닌데, 받으라는 대접은 안 받고 엉뚱한 짓만 하고 있으니 리욘은 속이 상한 거다.

아마 리욘은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이다. 당장 여기서 어떻게 이야기를 잘해서 “그래, 그대가 좋을 대로 해.” 라는 대답을 얻어낸다고 해도 분명 며칠 후면 또 똑같은 얘길 꺼내서 자신에게 압박 아닌 압박을 줄 게 분명했다. 그때마다 어르고 달래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욘이 원하는 답을 들려 줄 수는 없었다. 그가 말했다시피 그에게는 그의 방식이 있고, 자신에게는 자신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왕비라는 이름을 달고 이 이름 위에 쌓인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편한 방식으로,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일을 처리해야지, 리욘의 기분에 맞춰 주자고 그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평생 가시방석 위에 비단 한 장 깔고 자는 기분으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그냥 이참에 확실히 이야기를 끝내야겠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안 그러면 언제까지 이 이야기로 도돌이표를 찍어야 할지 몰랐다. 어차피 리욘도 다 알면서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거였다.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니 굳이 이해를 시키고 납득을 시키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조금 치사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냥 아예 다시는 이 이야기를 못 꺼내도록 입을 막아 버리는 게 제일 좋았다.

“폐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한참 만에야 제이는 입을 열었다.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도 잘 알겠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리욘이 “그래?” 하고 미소 짓는다.

“네. 결국 절 위하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지 않습니까?”

“맞아. 그거야.”

리욘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이야기가 통하려나 보다, 이제야 내 말을 들어 주려나 보다. 뿌듯한 미소로 가득 찬 리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제이는 말했다.

“폐하의 말씀대로 지금부터는 일의 경중을 따져서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옳,”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은 본궁에서 주무십시오.”

“…뭐?”

리욘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본궁에서 주무십시오.”

왕비궁에는 오지 마십시오. 제이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은 말씀 못 드렸습니다만, 폐하 때문에 거의 한 달 째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습니다.”

“누가, 당신이?”

“그럼 누구겠습니까.” 제이는 쯧, 작게 혀를 찼다.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그러니 당분간은 본궁에서 주무시고 왕비궁으로는 오지 마십시오.” 하고 반쯤 명령하다시피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지금부터라도 숙면을 취하고 체력을 얻어서 중한 일들을 해결하도록 할 예정이니 협조해 주십시오.”

“잠시만, 제이.”

리욘이 여전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 때문에 잠을 못 잤다는 게 무슨 뜻이지? 내가 코라도 골았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잠버릇이 있었나?”

감이 안 잡힌다는 듯 묻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밤마다 그렇게 만져 대고 하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는데 어떻게 잡니까?”

저는 사람 아니고 남자 아닙니까? 짜증스레 말하자 그제야 리욘이 아…,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아니,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기뻐하는 듯한 그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날선 투로 “말하고, 하자고요? 유산 위험을 무릅쓰고?” 하고 따지듯 묻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과격하게는 말고, 조심해서 잘하면,”

“아뇨, 전 자신 없습니다.”

제이는 딱 잘라 말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폐하도 못 믿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리욘이 음, 하고 시선을 내린다. 바로 반박하지 않는 걸 보면 아마 본인도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방면으로는 둘 다 자제력이 꽝이라는 사실을.

“알겠어.”

한참을 고민한 끝에 리욘이 말했다.

“그럼 이번 주만 본궁에서 지내면 되는 거겠지? 어차피 다음 주면 16주가 되는,”

“아뇨. 9월까지요.”

“뭣…?”

이번에야말로 리욘의 목소리가 커졌다. 제이는 뭘 그렇게 놀라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입니다.”

“제이.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의 경중을 따지라고 하셨으니까요.”

리욘의 말을 가로막으며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접견실의 문을 향해 걸어가며 그는 말했다.

“지금 제게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 보라고 하면 이렇습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뱃속의 아이입니다. 어쨌거나 엄마로서 이 아이를 열 달 동안 안전하게 지켜 무사히 세상에 태어나도록 하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폐하도 동의하시겠죠? 제이는 리욘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야 당연하지.”

리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은 왕비된 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겠고요. 많은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니까요.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쓰느라 큰일을 그르치면 안 되겠죠.”

이쯤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챈 듯 리욘이 차분한 목소리로 “제이.” 하고 불렀다.

“내가 실수한 것 같아. 일에는 경중이라는 게 없,”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욘의 말을 가로막으며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출입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는 소파에 앉아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리욘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의 배우자로서 임무를 다하는 겁니다.”

“제이.”

리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숨을 쉬며 제이를 향해 걸어온 그는 제 아이의 엄마이자 이 나라의 왕비이자 자신의 배우자인 남자의 손을 붙잡으며 “미안해. 내가 잘못 생각했어.” 하고 말했다.

“그래, 일에 경중이 어디 있어. 모든 일은 다 중요한 거지. 그게 뭐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해 낸다는 자체가 중요한 거야.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는,”

“아뇨.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매정한 손길로 리욘을 뿌리치며 그보다 더 매정한 어투로 제이는 말했다.

“일에는 경중이 있는 법인데 말입니다. 뭐가 더 중요한지를 알고 현명하게 처신했어야 하는 건데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제이.”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먼저 힘을 쏟고 여력이 남으면 마지막 임무에 대해서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현명하신 폐하께서는 당연히 협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짧게 고개를 숙인 뒤 제이는 접견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리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복도에 서 있던 유브를 불러 명령했다.

“당분간 폐하께서 왕비궁에 출입 못 하게 하십시오.”

왕비궁엔 오더라도 침실에는 못 들어오게 하라고 하자 유브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왕비궁 현관에서 대기 중인 로겐에게도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제2 특별 경호 중대의 지휘관인 유브는 그렇다 쳐도 제1 특별 경호 중대 소속인 로겐은 난색을 표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시원하게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의 침실에는 출입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현명한 로겐은 부부가 싸웠을 때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지 매우 잘 아는 눈치였다.

덕분에 그날 밤, 제이는 왕비궁으로 옮겨온 후 처음으로 혼자 잠을 자게 되었다. 처음에는 늘 둘이던 침대에 혼자 누워 있는 게 어색해 조금 뒤척였지만 금세 긴장이 풀리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바람대로, 정말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

4월의 첫째 주말,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바자회 오픈시간은 정오였지만 그 전부터 천막을 치고 매대를 설치하느라 오전 내내 소란이었다.

제이는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어 광장에 도착했다. 마침 주일 미사가 막 끝난 참이라 미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광장으로 몰려들어 바자회의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멘글라다의 이름이 새겨진 천막 아래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왠지 다가가면 방해가 될 것 같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고만 있는데 어떻게 알아본 건지 부인회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전하께서 여기까지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감동에 겨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데 차마 내가 만든 쿠키를 회수하러 온 거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그 거리에서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괜히 머쓱해져서 묻자 하르트발 백작 부인은 제이의 뒤에 서 있는 경호대원들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제이는 아, 하고 중얼거렸다. 하긴, 이런 차림으로 여럿이 우르르 다니면 눈에 띌 수밖에 없겠지.

깨닫고 나자 그제야 주변에서 힐끔힐끔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일단은 조금 흩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에 제이는 경호원들을 밖에 세워 두고 자신은 천막 아래로 들어갔다. 매대의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자 쿠키가 들어있는 박스를 정리하고 있던 클로에가 “어머, 전하!” 하고 소리쳤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냥, 잠깐 들러 봤습니다.”

어차피 바로 앞이니까요. 제이는 대충 둘러댔다.

“설마 전하께서 만드신 쿠키를 사러 오신 건 아니겠죠?”

눈치 빠른 클로에의 말에 제이는 당황했다.

“아뇨, 그건… 네, 맞습니다.”

아니라고 하려다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쿠키를 회수해 가려면 누군가에게는 말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에만 온 건 아닙니다.”

믿거나 말거나, 라고 생각하며 말했지만 의외로 클로에는 “알아요.” 라며 미소 지었다.

“이쪽 상황이 궁금해서 오신 거잖아요. 그날 만들었던 쿠키들이 잘 팔리고 있나,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있나 궁금하셔서.”

그렇죠? 살짝 눈을 접으며 묻는 클로에에게 제이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네, 뭐, 하고 대답했다. 클로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더니 의자를 가지고 와 “여기 앉으세요.” 하고 말했다.

“아뇨, 금방 갈 겁니다.”

“쿠키, 안 가져가실 거예요?”

무슨 쿠키? 라고 표정으로 묻자 클로에는 품에 안고 있던 상자 안에서 쿠키가 들어 있는 봉투를 하나 꺼내며 “이거요.” 하고 말했다.

“이따 경매로 팔 거예요.”

클로에가 들어 보인 봉투 안에는 말도 못할 정도로 괴상하게 생긴 밀가루 과자랄까, 쿠키의 잔해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냥 지금 저한테 파십시오.”

“안 돼요. 경매로 엄청 비싸게 팔 거란 말예요.”

“제가 그 값으로 지금 사겠습니다.”

“아이 참, 안 된다구요. 경매로 얼마에 팔릴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 경매 때까지 여기 앉아서 기다리시라며 의자를 두드리는 클로에가 너무 신나 보여서 제이는 그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의자에 앉으며 제이는 생각했다. 아무튼 참 눈치 빠른 아가씨라고.

아마 클로에는 짐작했을 것이다. 자신이 설령 이곳에 좀 더 오래 있고 싶어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게 쑥스러워 그러지 못 하리라는 걸. 그래서 애꿎은 경매 시간을 들먹이며 자신이 조금 더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핑계를 마련해 준 것이다.

눈치도 빠르고 센스도 좋았다. 티 나지 않게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능력도 갖추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고 사랑도 받겠지. 최고위 귀족의 딸이지만 자신의 집안보다 작위가 낮은 가문의 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좋은 왕비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클로에를 보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된다. 만약 저 아가씨가 왕비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 폐하의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저 아가씨면, 어떤 그림이 됐을까. 어떻게 됐을까.

뭘 해도 자신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더 자연스러운 그림이 됐을 것이다. 좋은 집안에서 사랑만 받고 자란 아가씨였으니까. 마치 리욘처럼.

사랑만 받고 자라 온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당당함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해도 사람들이 날 용서하고 사랑만 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어느 쪽이냐면, 정 반대였다. 그런 걸 바랄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어진 몫을 무조건 다 해 낼 뿐이었다. 어쨌거나 맡겨진 일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해 내면 그걸로 칭찬을 받지는 못해도 트집 잡혀 욕을 먹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운이 나빠 다 하고도 좋은 소릴 못 듣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런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난 내 몫의 일을 제대로 해 냈다는 자신만 있으면 타인의 판단에는 휘둘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리욘과 관련이 되면 그게 잘 안 된다. 분명 잘하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계속 의심하고 고민하게 된다. 타인의 판단이 두렵게 느껴진다. 그들이 내리는 판단이, 결국 나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나를 선택한 리욘에 대한 판단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속도 모르고 좀 더 멋대로 굴어라, 마음대로 행동해라, 당치도 않은 주문만 해 대고 있으니.

세상 사람이 다 자기 같지만은 않다는 걸 언제쯤 알는지. 한숨을 쉬며 팔짱을 끼는 찰나였다.

“저기….”

문득 부르는 소리에 제이는 뒤를 돌아봤다. 바자회 진행 요원 복장을 한 어린 아가씨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사진 찍어도 되나요…?”

제이는 당황해서 “저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네… 같이요.”

진행 요원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보니 그녀의 손에는 작은 디지털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카메라를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새하얬다. 들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절로 목소리가 들렸다.

- 거절하려나? 당연히 거절하겠지? 그래도 괜찮아. 덕분에 이야기 나눠 봤으니까. 목소리 엄청 좋다. 텔레비전에서 듣던 거랑은 달라. 사람들한테 자랑해야지.

잔뜩 긴장한 와중에도 흥분한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 안 되겠죠…?”

역시? 라고 진행요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아뇨, 라고 중얼거렸다.

“사진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답변에 놀랐는지 진행 요원이 정말요? 하며 소리쳤다.

“정말, 사진 찍어도 되나요? 정말로?”

“네, 뭐. 원하신다면요.”

진행요원은 꺄악 소리를 지르더니 곧 후다닥 들고 있던 카메라의 렌즈 캡을 열며 제이의 옆으로 와서 섰다.

“찌, 찍을게요! 전하.”

스탠바이를 외치며 셔터를 누르는데 저렇게 손이 떨려서야 제대로 찍을 수나 있을까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찍힌 사진을 보니 가관이었다. 그나마 이쪽은 덜 흔들렸지만 렌즈에 더 가까이 있던 카메라 주인은 거의 유령처럼 나왔다. 그래도 좋은지 진행 요원은 소리를 지르며 렌즈의 캡을 닫았다. 한 번만 더 찍자고 할 법도 한데, 그런 부탁의 말도 없었다. 이걸로도 충분하다는 듯 그녀는 정말 기뻐하며 몇 번이고 제이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평생 간직할게요.”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 평생 간직할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럴 거면 차라리 제대로 다시 찍으라고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다른 진행 요원이 다가와서 “전하, 저랑도요! 저랑도 사진 찍어주시면 안 되나요?” 하고 물었다. 아마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손에는 카메라 어플이 작동 중인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눈앞에서 다른 진행 요원이 찍는 걸 봤을 텐데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고 하기가 뭣해 같이 찍어 줬다. 사진을 찍는 데 성공한 진행 요원이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멘글라다와 같은 천막을 공유하고 있던 인형 판매 부스의 사람들이 우르르 단체로 몰려와 같이 사진을 찍길 권했다. 이즈음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유브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안 됩니다. 물러나세요. 카메라 끄세요.” 를 연발하는 유브에게 사람들이 울상을 지으며 “딱 한 장만 찍을게요.” 하고 애원했다.

“정말이에요. 딱 한 장만 찍으면 돼요.”

“안 됩니다.”

유브도 유브였지만 인형 부스의 사람들도 물러날 기미가 안 보였다. 차라리 빨리 한 장 같이 찍고 돌려보내는 게 낫겠단 생각에 제이는 카메라를 받아들어 유브에게 건넸다. 그냥 빨리 찍고 가자고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유브는 푹 한숨을 쉬면서도 카메라를 들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사진을 찍자마자 카메라 전원을 끄고선 주인에게 그것을 돌려줬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이는 동의했다. 아쉽지만 쿠키 회수는 못 하겠구나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천막 뒤로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왔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다 누구 한 사람이 들어가니까 이때다 싶어 너도나도 따라 들어온 모양이었다.

다행히 천막 밖에서 대기 중이던 경호원들이 재빨리 뛰어 들어와 막아선 덕분에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천막 안은 금세 난리통이 되고 말았다. 너도나도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으려고 드는 바람에 사방에서 플래시와 함께 셔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나마도 경호대원들에게 떠밀려가며 찍은 거라 제대로 찍히지도 않았을 텐데, 그래도 좋은지 사람들은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연신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전하! 제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도 했다.

“아휴, 이게 무슨 일인지.”

겨우 조용해진 천막 뒤로 들어오며 하르트발 백작부인이 혀를 내둘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제이가 사과하자 하르트발 백작 부인은 “어머, 아닙니다. 전하.” 하고 놀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덕분에 쿠키가 엄청 많이 팔린 걸요.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면서 얼마나 많이 사 갔는지 몰라요. 그 사람들 몰려 있는 거 보고 다른 사람들도 뭔가 하고 와서 하나씩 사갔고요.”

“그런가요….”

“네. 지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많이 팔렸어요.”

본의 아니게 호객 노릇을 하게 된 모양이지만 그래도 역시 소란을 일으킨 사실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인.”

“벌써 가시려구요?”

“네.”

더 있으면 방해만 될 것 같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찰나였다.

갑자기 바깥이 웅성거린다 했더니 곧 시커먼 경호대원들을 줄줄이 단 멘글라다의 천막 아래 와서 섰다. 그리고 잠시 후 느긋한 표정을 한 리욘이 그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매대에 앉아 있던 부인회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둥지둥 예를 갖춰 인사하는 부인들을 향해 의무적인 미소를 지어보인 뒤 리욘은 허리를 숙여 매대 위의 쿠키들을 살펴봤다.

“왕비께서 직접 만드신 쿠키가 있다고 들었는데.”

리욘의 말에 클로에가 “아, 네!” 하며 얼른 상자 안에서 예쁘게 포장된 쿠키를 꺼냈다. 제이가 말리기도 전에 쿠키는 리욘의 손에 건네졌다. 분명 모양을 보고 한마디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리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버터 쿠키인가?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데.” 하고 웃을 뿐이었다.

“얼마입니까?”

리욘이 지갑을 꺼내며 묻자 하르트발 백작부인이 대경실색하며 “아닙니다, 폐하.” 하고 손을 저었다.

“전하께서 만드신 쿠키를 어찌 폐하께 돈을 받고 팔겠습니다. 그냥 가십시오.”

“왕비가 만든 것이니 더욱 내가 돈을 주고 사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웃으며 말한 그는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하르트발 백작부인에게 건넸다.

“폐하, 이건 너무 많습니다.”

당황하여 도로 건네려는 하르트발 백작 부인에게 리욘이 “그 정도 값은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하고 말했다.

“좋은 일에 쓰인다고 해서 왕비가 직접 만든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 뜻대로 좋은 일에 쓰십시오.”

그렇게 말한 뒤 리욘은 매대 뒤에 서 있는 제이에게 눈짓했다. 이제 그만 가자는 뜻이었다.

“…….”

제이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린 걸음으로 천막 뒤에서 빠져나와 리욘에게 다가가는 찰나였다.

“전하!”

뒤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제이를 불렀다. 돌아보자 웬 꼬마애 하나가 깃털로 만든 장식품을 손에 쥔 채 제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거요.”

아이는 제이의 앞에 서서는 손에 들고 있던 장식품을 건넸다.

“이거 있으면, 뱃속의 아기가 튼튼하게 자란대요.”

제이는 어?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제이의 반응에 당황했는지 아이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멀찍이 서 있던 여자가 웃으며 아이에게 손짓했다. 아마 아이의 엄마인 모양이었다. 그제야 제이는 아이의 엄마가 아이의 손에 대신 들려 보낸 선물임을 알아차렸다.

“아, 그래? 이게 그런 거야?”

웃으며 말하자 아이는 배시시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가지고 있으면, 아기가 잘 자란대요.”

제 엄마가 일러 준 듯한 내용을 아이는 다시 한 번 또박또박 전했다. 하얀 깃털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건강한 아이를 낳는다고, 이 나라에 그런 미신이 있다고 언젠가 헤르타에게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고마워.”

제이는 아이의 손에 들린 장식물을 두 손으로 건네받으며 말했다. 아이는 수줍은 얼굴로 헤, 웃더니 이내 휙 돌아서서 제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아이의 엄마가 달려오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잘했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아이의 엄마는 제이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수줍게 웃는 얼굴이 아이와 똑같았다.

***

리욘은 집무실 책상에 앉자마자 쿠키의 포장을 열었다.

“맛있는데?”

이번에도 모양이 어떻다는 얘기는 없었다.

“맛있어.”

두 개를 연달아 집어 먹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리욘에게 제이는 “그야 정석 레서피대로 했으니까요.”라고 했다.

“음. 아주 잘 구워졌어. 식감이 부드러우면서도 바삭해.”

“굽는 건 오븐이 한 겁니다. 시간만 맞춰 놓으면 알아서 구워 주죠.”

“소질이 있나봐.”

“그럴 리가요.”

제이는 소파에 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피엘투레르 양이 계량까지 다 해서 준 겁니다. 전 그냥 옆에서 시키는 대로 한 것밖에 없어요.”

“그래도.”

어쨌든 맛있게 잘 만들었잖아. 벌써 네 개째의 쿠키를 집어 드는 리욘에게 제이는 네, 뭐,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귀족들 만나야 할 시간에 가서 만든 쿠키니까요. 맛이라도 있어야죠.”

리욘이 컥, 하며 기침했다. 사래가 들렸는지 몇 번 더 기침을 하더니 이내 시치미를 떼고는 “아무튼… 맛있어.” 하며 다시 쿠키를 먹기 시작했다. 제이는 그런 리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천천히 드세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비서관이 커피와 차를 가져왔다. 리욘이 커피와 함께 쿠키를 먹는 동안 제이는 소파에 앉아 말없이 자신의 손에 들린 깃털 장식물을 바라봤다.

“왜?”

문득 리욘이 물었다. 제이는 뭐가요? 라고 하듯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그걸 보고 있느냐고.”

“제 표정이 어떤데요?”

“거울 보여 줘?”

제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봐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에 들린 장식물의 깃털을 하나 뽑아 가만히 흔들며 보며 제이는 말했다.

“그냥, 이 나라 사람들이 폐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어서요.”

“그걸 이제야 안 거야?”

여전히 겸손의 미덕이라곤 모르는 말투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저 오만한 말투도 별로 얄밉지가 않다.

“알기야 전부터 알았죠.”

“그런데?”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그런 소릴 하느냐는 뜻이다.

“그냥요.”

제이는 하얀 깃털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이 사람들은 단지 내가 폐하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좋아해 주는구나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해서요.”

이런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조건적인 호의와 애정으로만 가득 찬 시선들을 마주하는 건. 늘 반대의 경우만 겪어 보다 처음으로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어색하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니. 당신이 오래전부터 내 경호원으로서 날 지켜줬다는 건 사람들도 다 알아. 게다가 왕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도 낳아 줬지. 그것도 그렇게 예쁜 딸로. 그래서 다들 고마워하고 좋아하는 거야.”

그대를, 이라고 리욘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같이 사진도 찍어 줬다며.”

“그건 좀.”

제이는 힘없이 웃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리고 몇 명 찍어 주지도 않았고요.”

“다른 왕비들은 그런 거 해 준 적 없어.”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나도 안 해. 그런 거.”

리욘의 말에 제이는 뒤늦게야 아… 하고 중얼거렸다.

“혹시, 하면 안 되는 거였나요?”

“안 되는 건 없지만, 만일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까.”

가급적이면 안 하는 게 좋겠지. 리욘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중얼거리며 제이는 생각했다. 하긴, 내가 경호중인 요인이 갑자기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나라도 놀랐을 거라고. 정말 사진만 같이 찍어 주고 헤어진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냐마는, 그렇게 접근한 사람 중에 어떤 위험한 인물이 끼어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야, 스스로 그런 사람들을 어느 정도 가려낼 수 있으니 걱정 없이 사진을 찍어 준 거지만 경호대원들은 노심초사했겠구나 생각하자 갑자기 미안해졌다.

하지만….

“너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와서요.”

“그 사람들이?”

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라도 한 번 나눠 보고 싶어서 그렇게 말을 한 거였어요.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 줄 수 있느냐고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에게 말을 건 이유도 하나였다. 자신이 좋고, 가까이서 보니 더 신기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서였다. 멘글라다에서 굳이 참여를 부탁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도 아니고, 후원이 필요해서도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그냥, 자신과 좀 더 친해지고 싶었던 거다.

그런 감정들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표정과 눈빛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어졌다. 큰 걸 바라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말 한마디 건네 주고, 같이 사진만 찍어 주면 되는 거였다. 그런 게 정말 어색했지만, 스스로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안 해 주는 것보단 해 주는 게 나았다. 고마웠으니까. 그 마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이렇게나 좋아해 주고 아껴 주니까, 자신도 그만큼 보답을 해 주고 싶었다.

“사람들도 다 알았을 거야. 당신이 왜 거절을 안 했는지.”

그래서 더 당신을 좋아하는 거고. 리욘의 말에 제이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럴까요.

“당연하지.”

리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제이는 그런 리욘을 잠깐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손에 들린 깃털 장식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던 그는, 자신의 옆에 앉는 남자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일의 경중이라는 게 있으니 좀 더 큰일에 마음을 쓰라고 하셨지만요.”

전 아무래도 좀 더 간절한 쪽에게 마음이 기우는 편이라서요. 제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간에 말입니다.”

“알아.”

리욘이 짧게 답했다. 제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겨 주며 그는 덧붙였다. 그래서 그대가 좋은 왕비가 될 거라는 거야.

“하지만 난 그대가 좋은 왕비가 되는 것보단, 그냥 행복한 왕비가 되길 바랐거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렇게 살길 바랐어.”

“그러길 바라신 거면 절 왕비 자리에 앉히지 말았어야 했어요.”

제이는 쓰게 웃었다. 맞아. 곧바로 리욘이 수긍했다.

“하지만 그대는 왕비가 아니라 내 정부였다고 해도 아마 똑같았을 거야. 절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지.”

그런 거라면 그냥 내 옆에 있는 게 낫잖아. 리욘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날 위해서 희생할 거라면, 내 뒤에 있는 것보다는 내 옆에 있는 게 나아. 내 옆에서 당당하게 누릴 거 다 누리고, 대접받을 거 다 받고 그렇게 사는 게 낫다고.”

리욘의 말이 옳았다. 어차피 평생을 이 사람 때문에 걱정하고, 조심하고, 이 사람을 위해서 살 거면 뒤에 서 있는 것보단 옆에 서 있는 게 나았다. 그래야만 모든 의무도, 권리도, 당당하게 행할 수 있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시그니와 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게 좋았다.

“어쨌거나 난 그대의 생각을 존중해.”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고 자세를 바로 하며 리욘이 말했다.

“물론 그대의 방식도 존중하고 있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계속 고집 부렸던 건 미안해. 익숙지 않은 사과를 하느라 진땀을 빼는 리욘의 모습이 귀여워 제이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런데 맹세코, 그대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야.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덜 번거롭길 바라서 한 얘기지.”

“알고 있습니다.”

제이는 시원스레 말했다.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 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자 리욘이 슬그머니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붙잡으며 말한다.

“그럼 용서해 주는 건가?”

“글쎄요. 애초에 제가 용서를 할….”

제이는 말을 멈추고 리욘을 바라봤다. 어느새 그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용서해 줄 거냐는 게 그 뜻이었나.

“그거랑은 별갭니다.”

제이는 손을 뿌리치며 부러 냉담하게 말했다.

“아니, 대체 왜?”

조금 전까지 납작 엎드려 사과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금세 리욘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간절한 쪽에게 마음이 기운다면서? 그런데 내 간절함은 왜 무시하는 거지? 간절하기로 따지면 그 사람들보다 내가 더 간절하게 당신을 원한다고.”

눈빛을 보니 과연 간절함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흐르고 있었다.

“하고 싶다는 게 아니야.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 안 건드릴 테니까, 잠만 같이 자자고. 손만 잡고, 아니, 손 안 잡고 자도 돼. 그냥 한 침대에서, 옆에서만 자자고. 우린 부부잖아.”

자넨 어떨지 몰라도 난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잤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눈이 좀 충혈된 것 같긴 했다. 피부도 좀 푸석한 것이 전체적으로 수척해진 것도 같았고.

“알겠습니다.”

제이는 못 이기는 척 리욘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혼배 예식 때까지로 기한을 줄이도록 하죠.”

“뭐…?”

그 애매한 기한은 뭐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리욘에게 제이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폐하께선 손도 안 잡겠다고 하셨지만 전 그 말을 믿지 않거든요.”

말은 저렇게 했지만 막상 침대에 누우면 분명 굿나잇 키스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손이라도 잡아야 같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하며 지분거릴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또 밀어내지 못하고 다 받아 줄 게 분명했고.

“그냥 따로 자는 게 상책입니다. 폐하껜 죄송한 말이지만 전 이틀 동안 꽤 잘 잤거든요.”

모처럼 꿈도 안 꾸고 잘 잤다고 하자 리욘이 “그래?” 하고 눈에 띄게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그야, 전 그동안 제대로 못 잤으니까요.”

“그건 날 의식해서 못 잤다는 거지? 내가 좋아서, 그렇지?”

“네, 뭐… 굳이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

“네, 맞습니다. 폐하가 너무 좋아서 그랬습니다.”

제이는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혼배 예식 때까지는 계속 일이 많을 거라서요. 밤에는 좀 푹 자고 낮에 멀쩡한 정신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낫나 싶습니다.”

어차피 혼배 예식 때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잖습니까. 제이는 부러 리욘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한 달 동안 컨디션 조절 잘해서 혼배예식 당일에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기도 하고요.”

“누구한테, 사람들한테?”

리욘이 시큰둥하게 묻는다. 참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제이는 리욘이 원하는 답을 그대로 들려줬다.

“아뇨, 폐하께요.”

살짝 웃음까지 지어보이며 말하자 그제야 만족한 듯 리욘이 “그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한 달 후의 왕비의 모습을 기대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는 리욘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설렘이 담겨 있었다. 순간 실수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제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당일에는 홍보실에서 알아서 꾸며 줄 건데, 뭐. 그 전까지 무조건 잘 자고 잘 쉬면서 체력이나 비축해두는 게 현명했다.

***

그리고 혼배 예식 당일, 제이는 본인의 예상대로 장장 네 시간에 걸쳐 꾸밈을 받게 되었다. 의상, 메이크업, 헤어 등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두 달라붙어 오전 내내 그를 꾸며 줬으나 애석하게도 기대했던 것만큼 드라마틱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여자들처럼 화장을 화려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아름답게 말아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옷마저 늘 입던 대로 슈트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평소에 입던 그런 슈트가 아니라 예식용 연미복이긴 했지만 그래 봤자 그게 그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객으로 참석한 귀족들과 각계의 인사들이 저마다 입을 모아 왕비가 인물이 폈다, 한 달 전이랑은 얼굴이 다르다, 훨씬 잘생겨졌다, 고 말을 한 건 한 달 동안 몸무게가 무려 4kg이 늘면서 얼굴이 전보다 훨씬 좋아진 까닭이었다. 물론 달수가 차고 배가 불러 오면서 몸에도 살이 붙어 그렇게 된 거겠지만, 어쨌거나 제이로서는 리욘에게 할 말이 생긴 셈이었다. 보십시오. 사람이 잠만 잘 자고 컨디션 조절만 잘해도 이렇게 얼굴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라고.

물론 리욘은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입장인 듯했다. 그는 두 신랑의 입장을 기다리며 성전의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동안 계속 제이에게 말했다. 혼배 예식 같은 거 집어치우고 빨리 궁으로 가고 싶다고.

“그럼 주교님께 말씀하세요. 성경 봉독이랑 강론 빨리 끝내 달라고.”

“이미 수십 번도 더 말했지만.”

기대 안 해. 리욘은 고개를 저었다.

“라파엘 주교는 강론을 10분 안에 끝내면 지옥에 떨어지는 줄 아는 사람이거든.”

리욘의 말대로 라파엘 주교는 “오늘은 폐하께서 특별히 부탁을 하셨으니 짧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중간에 혼자 성가도 부르고 본인이 어린 시절에 이곳 킬피르 대성당에서 봤던 선선대 국왕의 혼배 예식 장면에 대한 감상도 밝히고 얼마 전에 세례를 받은 국왕 부부의 첫째 딸이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에 대한 칭찬까지 다 마친 뒤에야 비로소 30여 분에 걸친 강론을 마무리 지었다.

10분을 예상했던 강론 시간이 무려 20분을 초과하면서 나머지 순서들에 대한 신속 진행이 불가피하게 됐다. 각각 두 신랑의 증인으로 참석한 에이나르와 하르트만은 증인 선서만 하고 내려갔다. 미리 준비했던 축하문은 둘 다 꺼내 보지도 못했다. 리욘이 밑에서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 대표로 축하의 기도문을 준비한 쇼나르 후작도 기도문의 절반만 낭송하고 내려와야 했다. 기도문의 뒷장을 넘기는 순간 리욘이 손으로 컷하라는 시늉을 해 보였기 때문이다. 후다닥 기도를 마무리 짓고 내려가는 쇼나르 후작을 보며 라파엘 주교가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빨리 서약의 키스를 하고 싶으신 듯하니 다들 눈치껏 합시다.”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인 주제에, 본인이 원흉인 줄도 모르고 껄껄 웃으며 말하는 라파엘 주교 때문에 리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더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강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순서를 반 토막 내 진행한 덕분에 하이라이트인 신랑들의 혼인 서약은 좀 더 느긋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거룩한 세례로 축성하신 두 분을 오늘 특별히 혼인 성사로 풍요하고 굳건하게 하시어 두 분이 한 평생 신의를 지키며 혼인 생활의 모든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제 교회 공동체 앞에서 두 분의 뜻을 물어 보겠습니다. 두 분은 서로 어떠한 강박도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마음으로 혼인하려고 합니까?”

라파엘 주교의 물음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대답하면 난리가 나겠지.

순간 잠시 피어오른 망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제이는 리욘과 함께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다시 라파엘 주교가 물었다.

“두 분은 혼인 생활을 하면서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까?”

“네,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다.”

“두 분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녀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기르겠습니까?”

“네, 그렇게 기르겠습니다.”

라파엘 주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은 이제 거룩한 혼인 계약을 맺으려는 것이니 서로 오른손을 잡고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두 분의 뜻을 밝히십시오.”

그의 말대로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선 채 서로의 오른손을 잡고 각자의 서약서를 읽었다.

서약이 끝나면 다음은 예물 교환이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시그니가 예물이 담긴 은쟁반을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행여 반지를 떨어뜨릴까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는 왕녀를 보며 하객들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과 신의의 표지로 주고받는 이 반지에 주님 친히 강복하소서.”

주교가 예물에 축성을 내리자 리욘이 먼저 제이의 반지를 집어 들고 말했다.

“나의 사랑과 신의의 표지로 당신께 드리는 이 반지를 받아 주십시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제이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제이 역시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들고 같은 말을 리욘에게 전한 뒤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것으로 두 분은 주님 안에서 완전한 부부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분이 교회 앞에서 맺은 오늘의 이 서약을 당신 은혜로 확고하게 하시어 두 분에게 복을 가득 내리실 것입니다.”

원래 이렇게 성혼 선포를 하고 나면 바로 노래가 나오고 신랑신부는 퇴장을 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순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자, 신랑께서 그렇게 기다리시던 순간이 왔습니다.”

라파엘 주교의 말에 성당 안에 웃음이 번졌다.

“두 분은 서로가 서로에게 오늘의 이 맹세를 굳건히 지킬 것을 다짐하고 서약하는 의미에서, 진실 된 마음을 담아 키스를 나누십시오.”

“감사합니다, 주교님.”

리욘이 큰소리로 외쳤다. 하객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리욘은 그런 하객들을 향해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곧 제이에게 키스했다. 뜨거운 환호와 박수가 성전을 울렸다. 제이는 어쩐지 귀가 조금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자신도 리욘에게 키스했다. 주교의 말대로, 진실 된 마음을 담아서.

혼배 예식을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엄청난 인파가 성당은 물론 왕궁을 지나 사원 근처까지 몰려들어있었다. 광장을 한 바퀴 도는 형태로 길게 줄을 서 있는 이들은 국왕부부의 웨딩 카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차에 오르기 직전까지도 리욘은 물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무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지금이라도 그만둬도 돼. 안전 문제로 취소됐다고 하면 되니까.”

“지금 어떻게 그럽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괜찮습니다. 차에 오르며 그는 말했다.

“금방 끝날 거잖아요. 그리고 마차도 아니고 차니까요.”

원래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전용 마차로 하려고 했으나 바로 며칠 전에 무개차로 바꾸었다. 아무래도 마차보다는 차가 안전성을 포함해 여러 면에서 낫다고, 굳이 퍼레이드를 할 거라면 무개차로 바꾸라고, 안 그러면 못 한다고 리욘이 명령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리욘이 차에 올랐다.

“안 해도 되는 거라니까.”

한숨 쉬는 리욘의 가슴 주머니에 새 부토니아를 꽂아주며 제이는 말했다. 하지만 다들 보고 싶어 한다니까요.

“그리고 아마 이게 마지막일 겁니다.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정말 다 보여 주는 건요.”

“장담하는데, 자넨 그렇게 말하고선 또 보여 줄 거야.”

리욘이 너무나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해서 제이는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그러려나, 라고 생각하고 있자니 리욘이 덧붙였다.

“국민들이 보고 싶어 한다고 하면, 어떻게든 보여 줄 거야.”

좋은 왕비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리욘에게 제이는 쓰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좋은 배우자는 아니죠.”

“그거야 그대가 하기에 달린 문제지.”

당장 오늘 밤에 두고 보겠어. 귀에 나직하게 속삭이는 리욘의 말에 제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냥 지금 보세요.” 하고 말했다.

“옆에 있는데 보면 되지 뭘 밤까지 기다리십니까.”

“모르는 척 하려나 본데, 절대 안 돼.”

오늘은 안 돼, 라고 리욘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제대로 첫날밤 치를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폐하….”

제이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제이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자신도 가슴에 부토니아를 꽂았다. 원래 퍼레이드용 옷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배 때문에 옷을 갈아입기가 힘들어 그냥 부토니아만 좀 더 화려한 걸로 바꾸고 옷은 갈아입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 다 같은 꽃으로 만든 부토니아였지만 디테일이 조금 달랐다. 제이의 부토니아에는 공작새의 흰 깃털이 함께 장식되어 있었다. 요전에 바자회에서 선물 받은 그 장식물에서 떼어낸 깃털이었다. 의상 담당자에게 전해 주며 부토니아 만들 때 고려해 달라고 했더니, 좀처럼 요구사항이 없던 왕비가 먼저 부탁을 해 온 게 신기했는지 담당자는 이 깃털을 써서 가장 아름다운 부토니아를 만들어오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정말 아름다운 부토니아를 오늘 제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폐하, 결혼 축하드려요!”

“행복하시길 빌어요!”

사방에서 사람들이 환호하며 외쳐댔다. 그들은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주여, 귀한 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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