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외전 1) (19/22)
  • 베르겐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삼 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처음 출근한 날이었다. 재활 훈련 센터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던 그는 자신의 바로 맞은편에 주차된 세단을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우아하게 빛나고 있는 검은색 벤틀리는 분명 제이의 차였다. 그가 다시 재활을 받기로 한 걸까? 베르겐은 떨리는 심장을 누르고 승강기에 올랐다. 밤새 울적했던 게 거짓말처럼 가슴이 설렜다. 1층 버튼을 누르며 그는 생각했다. 그래, 맞아. 실연의 상처는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하는 게 가장 좋은 법이지.

    스페인에서 휴가를 보낸 베르겐은 어제 오전에 마드리드 공항에서 출발했다. 휴가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맛있는 음식이 그의 혀를 축복해 줬고, 그보다 더 맛있게 생긴 남미의 핫가이들이 그의 눈을 즐겁게 해 줬다. 그러나 꿈같았던 순간들을 곱씹을 틈도 없이, 그는 벨리에스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끔찍한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새 왕비, 역시나 남자가 맞대.”

    마중 나온 룸메이트 티파니는 베르겐을 보자마자 외쳤다. 베르겐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티파니는 보름 사이 온갖 가십지에 실린 남자의 사진과 그의 신상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노스래. 대리모가 아니라 본인이 낳았던 애고. 국왕이 2왕자이던 시절부터 같이 했던 경호원이라는데, 너무 멋지지 않아?”

    베르겐은 티파니가 이렇게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얄미운 소꿉친구는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국왕을 사모해 왔다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어디 자신뿐이겠는가. 북유럽의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국왕이 제2 왕자이던 시절부터 그를 흠모해 왔듯이, 이곳의 수많은 게이들도 그를 상대로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해왔다. 왕실 모독죄로 잡혀가기 싫어 감히 입 밖으로 말을 꺼낸 적은 없었지만, 베르겐은 자신할 수 있었다. 이 나라 게이들 중에 국왕을 생각하며 자위 한 번 안 해 본 자는 없을 거라고.

    그런데 이제 그가 진정 남의 남자가 되고야 만 것이다. 차라리 여자가 낚아채 갔으면 이렇게까지 속이 쓰리진 않을 텐데, 같은 남자가 그를 차지했다니 유난히 더 배가 아프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베르겐이었다. 심지어 경호원 출신이라니. 그 바쁜 와중에 국왕을 꼬셔 아이까지 가진 걸 보면 보통 여우 같은 작자가 아닐 터였다.

    그렇게 속상한 마음에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애꿎은 베갯잇만 물어뜯다 출근을 했더니, 주차장에 제이의 차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베르겐으로서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베르겐이 한창 눈독 들이고 있던 남자였다. 동양계 특유의 스토익하면서도 섹시한 분위기가 아주 매력적인 그에게, 베르겐은 석 달 전 센터에서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버렸다. 자신보다 두 살이 많지만 자신보다 다섯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외모조차도 마음에 들었다. 동양계치고는 키도 굉장히 커서, 자신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젊은 나이에 벤틀리를 끌고 다닐 정도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베르겐은 훈련장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제이를 볼 때마다 그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분위기로 봐서는 젊은 사업가 같았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교통사고로 어깨를 크게 다쳤다고 하는데,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었던 사람치고는 훈련 메뉴를 소화해 내는 속도가 무시무시했으니까.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운동을 했던 게 틀림없었다.

    굉장히 열심히 재활에 임했던 사람인데 올 초부터 갑자기 센터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이대로 그만두는 건가, 다시는 못 보는 건가, 아쉬워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휴가에서 돌아온 첫날, 주차장에서 그의 차를 발견한 것이다. 베르겐은 이거야말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가엾게 여겨 제이를 이곳으로 보내 주신 게 틀림없다고. 오늘이야말로 데이트 신청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실연으로 인한 상처를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로비 데스크 앞에 서 있는 제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지저스, 이건 정말 운명이야. 베르겐은 신이 나서 달려갔다. 덕분에 그는 로비 곳곳에 서 있는 검은 양복 차림의 사내들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인 안나가 하얗게 굳은 얼굴로 서류를 뒤지고 있는 것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이!”

    그래서 베르겐은 더없이 발랄한 목소리로 제이를 불렀다. 제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꾸벅 인사하는 그에게 바싹 다가가며 베르겐은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제이! 그동안 왜 안 왔어요.”

    “사정이 좀 있어서요.”

    제이는 늘 그렇듯 짧게 말했다. 베르겐은 이 남자의 이런 과묵한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그의 중저음의 목소리도 좋았고 뭐든 다 좋았다.

    “그렇구나. 상관없어요. 지금부터 다시 열심히 다니면 되는 거니까. 운이 좋아요. 나도 마침 휴가 갔다가 오늘 돌아온 참이거든요.”

    제이가 짧게 아, 하고 중얼거렸다. 아, 그래서… 라는 의미가 담긴 중얼거림이었지만 베르겐은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제이의 팔뚝을 살짝살짝 터치해 가며 정답게 말을 걸 뿐이었다.

    “오늘 트레이닝은 벌써 마친 거예요? 아니면, 이제 시작인가?”

    “음… 아뇨. 당분간은 트레이닝은 못할 거 같아서요.”

    지금 연기가 얼마나 가능한지 물어 보려고 온 거예요. 제이의 말에 베르겐은 자기도 모르게 “왜요?” 하고 소리쳤다.

    “왜 연기하려고요? 안 돼요, 재활은 때 놓치면 안 된단 말예요.”

    “아, 그건 아는데… 사정상 어쩔 수가 없어서요.”

    “무슨 사정이요? 왜요, 무슨 일인데요!”

    안달이 나 외치는 베르겐을 보며 금욕적인 분위기가 매력인 동양계의 미남은 조금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곧 그는 드물게도 살짝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실은 내가 임신을 해서요.”

    ***

    리욘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였지만, 사실 제이는 그렇게 걱정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면, 오히려 될 대로 돼라, 는 쪽에 가까웠다. 일 관련이 아닌 경우에는 대부분 그랬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그냥 잊고 있다가 언제든 상황이 닥치면 그때 가서 해결하자는 마인드였다. 만약 해결이 안 되면 그 역시도 그때 가서 걱정할 문제였다. 어쨌거나 미리부터 골머리를 앓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금도 최악인데 여기서 더 최악의 상황이 닥쳐 봤자 얼마나 더 최악이 되겠느냐, 가 그의 인생 모토였다. 언젠가 니나가 말한 대로 그는 낙관적인 비관론자였다.

    그런데 리욘과 관련되면 그게 잘 안 됐다. 사서 걱정하고 사서 고민하는 게 일이었다. 물론 그가 평범한 위치의 사람이었다면 절대 이러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평범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소한 실수와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감당 못 할 정도의 큰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제이가 그런 얘길 할 때마다 리욘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이 나라 사람들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자랑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덤덤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말투로 그는 그렇게 건방진 소릴 종종 하곤 했다.

    그리고 최근, 제이는 리욘의 그 자신감이 허투루 생긴 것이 아니란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2월 첫째 주 금요일이었다. 북유럽 전역에서 가장 높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가십지 <뵐룬트>는 긴급 입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두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구도로 보나 노이즈 가득한 해상도로 보나 파파라치가 찍은 게 분명한 그 사진 속에는 왕궁 후원에서 강아지와 함께 놀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기사의 헤드 타이틀을 읽기도 전에 여자아이의 정체에 대해 알아차렸다. 소문의 그 아이였다. 국왕과 그의 동성 연인이 대리모를 통해 얻었다는 바로 그 아이.

    그 정도로 국왕을 꼭 닮은 아이였다. 특히 이마와 눈매가 어린 시절 국왕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심지어 눈동자마저 회색이었다. 아그나르 왕조 역사상 회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는데, 아이는 기적처럼 제 아버지의 그 눈동자 색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신기한 건, 국왕을 꼭 빼다 박은 와중에도 아이가 묘하게 이국적인 분위기를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아이의 머리가 검은색이란 점을 들어 혹 대리모가 아시아계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그리고 거의 확신에 가까워질 무렵, 인터넷 사이트들을 중심으로 사실은 대리모가 아니라 그 남자가 직접 낳은 아이라더라, 전(前) 왕비와 같은 제노스라더라, 용병단 출신의 경호원이라더라, 하는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 나라 국민들에게 제노스는 그리 낯선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은 놀라기보다 오히려 안도하는 반응을 보였다. 어쨌거나 대리모든 누구든 제삼자가 끼면 항상 후일의 이야기가 복잡해지는 법이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뒤늦게 대리모가 모친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 왕실을 쑥대밭으로 만들 일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여전히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이 일부 있긴 했지만 전체적인 여론은 대리모보다는 차라리 제노스가 낫다, 로 흐르는 듯했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이 걱정한 건 국왕의 연인이 제노스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가 ‘용병단 출신의 경호원’이라는 점이 사람들은 못내 불안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TV나 신문 등지에서 접한 국왕의 경호대원들은 하나같이 시커먼 곰 같은 사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을 훨씬 웃도는 키에 덩치도 보통 사람들의 두 배에 이르는 거구들이 늘 국왕의 뒤에 산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시커먼 곰 같은 경호대원과 국왕이 눈이 맞아 아이까지 낳았다니. 상대가 남자라는 사실보다, 제노스라는 사실보다 국왕의 독특한 심미안에 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에시르 국민들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뒤, 뵐룬트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가십지 <트얄피(Thjalfi)>에서 보란 듯이 남자의 사진을 터뜨렸을 때 사람들은 다른 의미에서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생김새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사진 속에서 남자는 아이 손을 잡고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 검은 슈트 차림을 하고선 경호원들과 함께 병원 건물을 나서고 있는 남자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고, 훨씬 더 말랐으며, 훨씬 더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남자의 키가 절대적으로 작은 키는 아니었다. 하지만 2미터의 키에 몸무게 100kg이 넘는 일반적인 왕실 경호대원의 이미지만을 상상해 온 사람들에게, 185cm의 키에 70kg이 조금 넘는 남자는 너무나 작고 말라 보였다. 아무래도 옆에 서 있는 곰 같은 경호원들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인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여하튼 세간에 처음 공개된 남자의 모습은 모든 이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 내용 - ‘최근 병원 출입이 잦은데, 왕실 소식에 정통한 관계자 제보에 따르면 아마 결혼 발표와 임신 발표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을까 한다.’는 추측 - 에 대해서는 다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진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는 한편 크게 안도했다. 몇몇은 공공연하게 국왕의 심미안을 의심해 왔던 지난날들을 반성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국왕의 연인은 제법, 아니, 상당히 잘생긴 미남자였다. 어쩌면 기대치가 낮아서 더 그렇게 느껴진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국왕의 옆에 나란히 세워뒀을 때 크게 빠지는 인물은 아닌 듯싶었다. 국왕보다 일곱 살이나 많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얼굴만 보면 둘이 또래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 점도 사람들은 내심 마음에 들었다.

    제이는 사진이 잡지에 실리기 전에 먼저 받아 봤다. 그것도 원본으로 봤다. 파파라치를 가장한 전문 사진사는 다각도의 연구 끝에 왕실에서 요구한 그대로의 사진을 뽑아냈다. 하지만 수잔은 그 사진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앞머리 올리지 그랬어. 앞머리 올리면 훨씬 더 잘생겨 보이는데.”

    “그럼 인상이 너무 세 보여서 안 된대요.”

    그리고 병원에 가면서 뭘 앞머리를 올려요. 제이는 조금 기가 차서 웃었다. 사실 따지자면 병원 가는 사람이 정장을 입은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평소 병원에 갈 때 제이의 옷차림은 티셔츠에 재킷 또는 점퍼였다. 그런데 이 날은 정장에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잡지에 실을 사진 찍는 날이라고 홍보실에서 골라 준 대로 입고 간 것이다. 누가 봐도 연출한 티가 역력한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임을 전혀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그냥 경호원 출신이라고 하니 으레 평소에도 슈트 차림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진이 공개된 다음날 온갖 인터넷 사이트에 제이의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물론 새로 공개된 사진은 아니었다. 리욘이 왕세자이던 시절의 기사 사진과 뉴스 영상에서 잘라낸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시커먼 경호원 무리들 가운데서 용케도 제이를 찾아내 그의 사진만 잘라 웹사이트 여기저기에 올려 댔다. 수잔의 바람대로 앞머리를 올린 사진도 많이 나왔는데, 놀랍게도 그쪽이 더 반응이 좋았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하르트만이 귀띔해줬다.

    “의외네요. 난 앞머리 올리면 너무 정 없게 생겼단 소리 듣는데.”

    “그러니까 젊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거죠.”

    뒤늦게야 제이는 납득했다. 국왕의 상대로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성으로서 흥미 있어 한다는 거였구나.

    국민들의 관심도가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왕실은 묵묵부답이었다. 다만 이따금씩 가십지나 일간지를 통해 사진을 한 장씩 내보낼 뿐이었다. 모두 파파라치 사진을 가장한 연출 사진들로 거의 병원이나 킬피르 대성당에 드나드는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즈음 결혼 임박설에 대한 이야기가 슬슬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결혼할 것 같다, 고 사람들이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남자의 사진에 꼭 함께 찍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데마르 공작 부인이었다.

    ***

    “전(前) 왕비 전하께서는 의외로 화려한 걸 좋아하셨어요.”

    헤르타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본인의 이름보다 발데마르 공작 부인으로 더 자주 불리는 그녀는 리욘의 모친, 그러니까 라나 전 왕비의 수석 시녀(Mistress of the Robes)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왕실에는 왕실 시녀(Lady-in-waiting)라는 게 존재했다고 한다. 그건 단순한 메이드라기보다는 귀족 부인들의 직급에 가까웠는데, 당시 이십 대 후반이었던 발데마르 공작 부인은 아이슬란드에서 온 왕세자비의 수석 시녀가 되어 그녀의 결혼 준비를 바로 옆에서 도왔다고 했다.

    “내 기억으로는 결혼 예복만 몇 벌씩 주문을 하셨던 것 같군요. 그런데 그땐 그럴 만했어요. 혼인 신고식에 혼배 예식에 결혼식에 웨딩 카퍼레이드까지. 모두 옷을 다르게 입어야 했으니까요. 같은 옷을 입는 건 국민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하는 분이셨어요. 그게 본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신 거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종종 왕실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곤 하니까요.”

    이번엔 혼인 신고만 한다지요? 제이에게 물은 뒤 헤르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혼배 예식도요.”

    “아아, 맞아. 그랬지, 참.”

    자꾸만 까먹는다니까. 찻잔을 내려놓으며 노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나이가 드니 방금 들었던 말도 잊게 되네요.”

    엄살이었지만 마냥 엄살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부인의 나이가 올해로 벌써 예순 일곱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왕세자비의 결혼 시중을 들었던 것도 벌써 사십여 년 전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왕실 시녀라는 것도 없어진지 오래라 자질구레한 시중은 왕실 사용인이라고 부르는 공무원들이 담당하고 있었고, 결혼 준비는 의전관과 비서단에서 맡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욘은 굳이 헤르타를 불러 제이 옆에 붙여 놓았다. 그녀에게 뭔가 역할을 기대하고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새 왕비의 시중을 들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에시르 최고의 귀족 발데마르 공작의 부인이라는 것을.

    사실 ‘발데마르 가문의 여자가 모시는 새 왕비’라는 프레임이 필요했던 거라면 굳이 헤르타를 부르지 않아도 되는 문제였다. 루트의 부인 캐롤린을 불러 옆에서 시중드는 척을 하게 만들었어도 되는 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욘이 나이 많은 노(老) 공작 부인을 불러낸 건 그녀가 발데마르 가문의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헤르타는 딱히 굴욕스럽다거나 수치스럽단 생각은 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협상이었으니까. 리욘은 헤르타가 자신의 명령을 받아들여 제이와 행동을 같이 하는 대가로 발데마르 가문에서 있었던 사고를 영원히 묻어주기로 했다. 또한 연내로 루트가 공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노라 약속까지 했다. 헤르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수치스럽다 느낄 필요도 없었다. 다만 노구를 이끌고 병원이며 성당이며 따라다니는 게 귀찮을 뿐이었다.

    “힘드실 텐데 늘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덕분에 이 나라 국민들이 좀 더 나를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제이는 적당히 공치사를 늘어 놓았다. 다 알면서도 공작부인은 이런 입 발린 소리 한마디에 기분을 풀곤 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대며 그녀는 말했다.

    “제가 아니었어도 국민들은 충분히 당신을 환영했을 거예요. 처음에 기사가 났을 때도 반응은 나쁘지 않았잖아요?”

    “의외로요.”

    제이는 짧게 대답했다. 곧바로 헤르타가 고개를 저었다.

    “의외가 아닙니다. 당연한 거지요.”

    여기 사람들은 그런 게 있어요. 그녀는 다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차별에 대한 강박이 있죠. 차라리 당신이 여자였다면 대놓고 싫다, 마음에 안 든단 소릴 할 수 있었겠지만 남자라 그런 말도 못했을 거예요. 까딱하면 차별주의로 몰릴 수 있거든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다.”

    제이는 쓰게 웃었다.

    에시르는 덴마크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동성 커플 간의 시민 결합을 법적으로 인정한 국가다. 또한 네덜란드에 이어 두 번째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국가이기도 하다. 이 나라 국민들은 그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어 동성애에 편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호의마저 내비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정치인이 커밍아웃을 하거나 동성 연인과 결혼한 사실을 밝힐 경우엔 예외 없이 지지율이 상승하곤 했다. 오죽하면 선거에 당선되고 싶으면 성전환 수술을 하거나 동성애자가 되면 된다, 는 농담이 있을 정도일까.

    “그런데 꼭 그게 아니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 유럽의 온갖 왕실들이 결혼 문제로 난리가 났잖아요? 멀리 갈 것도 없어요. 당장 우리 연방 안에서도 일이 터졌으니까.”

    헤르타가 말하는 연방 안에서의 일이라는 건 노르웨이 왕실의 이야기였다. 현재 노르웨이의 왕인 호콘 8세의 아내 메테 마릿 왕비는 무려 마약 파티에서 캐스팅되어 TV에 출연한 전적이 있는 여자였다. 본인이 마약 중독자였음은 물론이고, 마약 사범이자 마피아인 전 남자 친구와의 동거에서 얻은 아이까지 있었다. 당시 노르웨이의 왕실 지지율은 80%가 넘었는데, 왕세자였던 호콘 8세가 메테 마릿과의 결혼을 발표하자마자 지지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건 물론 왕실 퇴출 운동까지 벌어졌다. 다행히 국왕 하랄드 5세가 나서서 국민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왕세자 본인도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에게 사과하며 이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왕위도 내놓을 수 있노라 눈물의 고백을 전함으로써 여론이 가라앉긴 했으나, 메테 마릿은 왕세자비가 된 후에도 섹스비디오 스캔들 등의 문제로 끝없이 구설수에 올랐다.

    그렇게 완벽한 비교 대조군이 같은 연방 안에 있어서일까, 똑같은 평민 출신의 신데렐라라고 해도 메테 마릿과는 달리 에시르의 새 왕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따사롭기 그지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같은 평민이라고 해도 이쪽은 그쪽과는 달리 마약 사범도 아니었고, 또 같은 미혼모라고 해도 이쪽의 경우엔 결국 따지고 보면 국왕의 아이를 먼저 낳아 키우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그것도 8년 전에 국왕이 먼저 구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을 생각해 거절한 뒤, 혼자 아이를 낳아 키웠다는 부분에서 오히려 가산점까지 붙은 듯했다.

    수잔은 “구애는 거절해 놓고 애는 또 혼자 낳아서 키웠다는 게 말이 되나?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 에이나르에게 스토리 다시 짜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라고 했지만, 의외로 이곳 북유럽에서는 그게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왜냐하면 이 동네에서는 애초에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결혼 없이 동거의 개념으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합의하에 헤어지곤 했는데 스웨덴에서는 이걸 아예 삼보(Sambo)라고 해서 새로운 가족 결합의 형태로 인정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도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어서 에시르를 포함한 북유럽 전역에서는 한 해 비혼모의 출산율이 60%를 넘어선 지가 오래였다.

    그렇다보니 ‘8년 전 왕자와 경호원으로 만나 연인이 되어 아이까지 갖게 되었으나 입장 차이에서 오는 부담감으로 인해 국왕의 구애를 거절하고 혼자 외국에서 아이를 낳아 키웠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일 관계로 만나 재결합을 하게 됐다’는 에이나르의 소설이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놀라워한 건 지난 7년 동안 국왕의 양육비를 거절하고 남자가 혼자서 아이를 키워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 엄청난 양육비를 거절할 수 있을 정도라면 꽤 능력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플러스 요소가 있긴 했죠. 그런데 그런 거 다 필요 없다는 거 당신도 알지 않나요? 결론은 국왕 폐하께서 당신을 선택했다는 거잖아요. 알겠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국왕 폐하라면 껌뻑 넘어가요. 당연히 폐하께서 선택한 당신을 반대할 리가 없죠.”

    굳이 이것저것 이유를 갖다 댈 필요도 없다며 헤르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 나라 국민들은 정말로, 리욘이라면 껌뻑 넘어가는 눈치였다. 오죽하면 에이나르가 그랬을까. 에시르 국민들은 폐하께서 스바르트 시내에 불을 질러도 폐하 덕분에 올 겨울은 따뜻하게 날 수 있겠다고 박수치며 환호할 거라고. 그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도대체 이 압도적인 지지는 어디서 오는 건지.

    차마 말은 못하고 속으로 한숨만 삼키자니 어떻게 안 건지 헤르타가 먼저 말을 꺼냈다.

    “2왕자 시절부터 그랬어요. 당시 왕세자 전하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답니다. 국민들의 자랑이었지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잘생긴 데다 똑똑하고, 용맹하기까지 했으니까.”

    거기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잖아요. 헤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잘생긴 데다 똑똑하고 용감하기까지 한 완벽한 왕자가 어릴 때 어머니를 잃어 사랑도 제대로 못 받았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애틋하겠어요. 게다가 누가 봐도 형보다 훨씬 뛰어난데, 동생이라는 이유로 왕세자로 책봉되지도 못했어요. 이 나라 사람들은 그것도 다 2왕자가 착해서, 형에게 양보했던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다 그 형이 미심쩍은 죽음을 맞이하자, 죽은 형의 몫까지 대신해 더욱 훌륭한 왕이 되고자 군복을 벗고 혹한의 국경 지대에서 돌아온 이가 바로 지금의 국왕이었다. 국민들로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폐하께서 다른 조건은 하나도 보지 않고 선택한 사람이 당신이라는 거잖아요? 싫어할 리가 없죠.”

    오히려 아주 좋아하면 몰라도요. 헤르타는 안심시키고자 한 말이었겠지만 제이로서는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이야기보다 가슴을 무겁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

    “왜 살이 더 빠진 것 같지?”

    리욘은 소파에 앉아 있는 제이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정말 이유를 몰라서 하는 말씀이십니까.

    물어 보려던 제이는 곧 관두기로 했다. 결혼 준비를 하고 있는 건 리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본인이 직접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따지면 이쪽도 직접 하는 건 없었다. 그저 이런저런 이유로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혼자 받고 있는 것뿐이지. 어쨌거나 이 건으로 리욘에게 책임을 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맘때면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한다고 돼 있었는데.”

    리욘이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또 저녁 내내 임신, 출산 관련 서적만 들여다보고 온 모양이었다. 오늘이 정확히 12주째 되는 날이니 집무실에 쌓인 수십 권의 관련 서적 중에서 12주차 또는 3개월 차 관련 항목들만 몇 번씩 읽고 왔을 게 분명하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폐하.”

    그런 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제이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긴, 하고 리욘이 슈트의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넌 입덧 같은 것도 안 했으니까. 이제 막 입덧 끝나고 제대로 먹기 시작하면서 애도 크고 엄마도 살이 붙는 시기라고 했으니 네게는 해당이 안 될 수도 있겠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걸 이제야 비로소 확실히 인지한 모양이었다. 물론 내일이면 또 까먹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제이는 다 이해했다. 리욘에겐 처음 있는 일이니까. 모든 게 설레고 신기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본인이 직접 겪는 일도 아니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나, 어떤 증상이 있었나, 마냥 궁금하고 걱정도 되고 그렇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쪽은 두 번째다 보니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그래도 리욘의 말마따나 자신은 입덧도 없었고, 아직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약간… 아주 약간 괴로운 부분이 있긴 했지만 어디에다 말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까닭에 혼자 열심히 삭이는 중이었다. 과연 언제까지 삭일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의료실에 다녀갔다고 하던데.”

    닥터 블리스는 뭐라고 하던가? 넥타이를 풀며 리욘이 물었다. 제이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별 얘기는 없었습니다. 아이도 건강하고요.”

    “그래? 다행이군.”

    풀어낸 넥타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리욘이 침대로 다가왔다. 제이의 옆에 앉으며 그는 말했다.

    “하지만 혼배 예식은 아직 무리겠지?”

    “이미 5월로 미뤘으니까요.”

    이제 와서 다시 날짜를 앞당기는 것도 힘들지 않겠느냐고 하자 리욘은 “그건 그렇지.”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해 버리고 싶었는데.”

    원래 예정대로라면 제이는 3월 둘째 주에 세례를 받고, 그 다음 주에 리욘과 혼배 예식을 치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임신 사실이 확인되면서 혼배 예식 일자가 두 달 늦춰지고 말았다. 12주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의사들이 입을 모아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는 예정대로 다음 주말에 받되, 혼배 예식은 지금부터 천천히 다시 준비를 시작해 5월 둘째 주 금요일에 치르는 걸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폐하께서 직접 날짜까지 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땐 워낙에 바빴거든. 5월까진 금방이라고 생각했지.”

    지금이라고 해서 그때보다 덜 바쁜 것도 아닐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리욘은 부쩍 혼배 예식 날짜를 뒤로 미룬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빨리 결혼을 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빨리 네가 내 비가 됐으면 좋겠어.”

    제이의 손을 잡으며 리욘은 어젯밤에도 한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사람들이 널 왕비 전하라고 부르는 것도 보고 싶고.”

    그게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제이도 잘 알고 있었다. 리욘은 결국 그런 거였다. 자신이 귀한 사람으로서 모든 이들에게 대접받는 걸 보고 싶은 거였다.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럽고, 기쁘면서도 쑥스러워 제이는 손을 빼며 말했다.

    “곧 그렇게 될 건데요, 뭐.”

    “그렇지.”

    곧 그렇게 되겠지. 웃으며 말한 리욘은 곧 몸을 일으켰다. 셔츠의 단추를 풀며 욕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여 제이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욕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오늘도 여기서 주무실 생각이신가보군.

    대관식 이후 리욘은 본궁 4층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왕비궁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본궁은 다른 말로 왕의 궁(The King’s Palace)이라고도 불렸는데, 그 말 그대로 4층이 온전히 왕의 개인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개인 서재와 침실은 물론, 그랜드 다이닝 룸이라 불리는 식당과 파티용 홀, 심지어 수영장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중에서도 전문가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꾸민 공간이 바로 침실이었다. 늘 업무에 시달리는 왕을 위해 숙면을 취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으로 꾸며 놓았다고 얼마 전 뉴스에서 소개하는 내용을 봤던 것 같은데, 문제는 리욘이 거기서 잠을 잔 게 한손에 꼽을 정도라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제이가 퇴원을 한 뒤로는 그랬다. 아무리 새벽 늦게 업무가 끝나도 항상 리욘은 이곳 왕세자궁으로 와 잠을 자곤 했다. 섹스 때문은 아니었다. 어차피 섹스는 하지도 못했다. 임신 초기에 부부 관계는 절대 금물이라고 니나가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고, 그 전에 리욘도 이 시기가 가장 위험하다는 걸 알아 스스로 조심하는 눈치였으니까. 관련 책들을 그렇게 읽어댔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문제는, 책에 그런 내용만 적혀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이었다. 분명히 이런 것도 같이 적혀 있었을 거다. 관계 대신에 따뜻한 스킨십으로 서로의 애정을 다지는 게 좋다고. 임신한 부인이 ‘남편에겐 더 이상 내가 성적인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 걸까’란 생각이 들게 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인지 요즘 따라 리욘은 유난히 스킨십이 잦았다. 아니, 원래도 스킨십을 좋아하긴 했다. 그게 거의 예외 없이 섹스로 이어지다 보니 단순한 스킨십이라기보다는 섹스의 전초전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 그게 문제였다.

    그렇게 늘 자연스럽게 섹스로 넘어간 덕분에 이제는 리욘이 어떻게 만져도 전희 단계처럼 느껴지고야 마는 것이다. 본인은 그럴 의도가 아니라고 해도 받아들이는 쪽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본인이 그런 의도가 아니다 보니 더욱 난감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만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는 찰나 욕실의 문이 열리고 리욘이 나왔다. 속옷 차림에 배스로브 한 장만 걸치고 나온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침대로 다가왔다. 제이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그대로 있으라는 듯 손짓한 그는 말없이 제이의 옆에 걸터앉았다. 제이가 입고 있는 얇은 티셔츠자락을 조심스레 걷어 올리더니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지난주보단 배가 좀 더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뭐… 벌써 12주째니까요.”

    이제 한 주가 다르게 더 배가 나올 거라고 하자 리욘은 그런가, 하고 중얼거렸다. 조심스럽게 배 위에 손바닥을 갖다 대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감이 잘 안 나. 여기에 아이가 들어 있다니.”

    정말로 실감이 안 나는지 그는 한참이나 조심스레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한 나라의 국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북유럽 전체를 다스리는 수장이 겨우 이런 일로 감탄하며 신기해하는 모습이 귀여워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그게 실수였다. 그런 제이를 보며 리욘이 자신도 미소 지으며 자연스럽게 입을 맞춰 온 것이다. 단순한 굿나잇 키스라면 좋았겠지만 굿나잇 키스치고는 지나치게 농도가 짙었다. 결국 길고 진한 입맞춤 중에 손이 자연스럽게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제이.”

    이제 막 조금씩 단단하게 부풀기 시작한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리욘이 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터무니없는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시트를 움켜쥐며 신음을 참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다.

    ***

    3월 둘째 주 일요일, 제이는 시그니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은 별거 없어요. 금방 끝날 거예요.”

    에이나르는 그렇게 말했지만 제이는 장장 한 시간에 걸쳐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고 주교가 외는 기도문의 절반을 따라 읽고 선서까지 마친 뒤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시그니와 달리 교리 수업도 따로 받지 않았고 기도문이라고 외우는 것도 거의 없다 보니 세례식 내내 제이가 한 생각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별거 없이 금방 끝난다는 세례식이 이렇게 길고 장엄한데 혼배 예식은 얼마나 더 복잡하고 오래 걸릴까. 종일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도 어쨌거나 무사히 세례식을 마치고 제이는 엘리시우스(Eliseus)라는 세례명을 얻게 되었다. 엘리시우스는 리욘이 골라준 세례명이었다. 리욘의 세례명 엘리아스(Elias)는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 엘리아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엘리시우스는 바로 그 엘리아스의 후계자이자 수많은 기적을 행한 예언자였다. 물론 리욘이 제이를 자신의 후계자처럼 취급하여 그런 세례명을 골라준 건 아니었다. 그저 엘리아스와 함께 항상 언급되는 예언자였고, 또 두 성인의 이름도 비슷해 함께 부르면 제법 정다운 부부처럼도 느껴진다는 이유로 그 세례명을 추천한 것뿐이었다. 성인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그저 필요에 의해 세례를 받을 뿐인 제이로서는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다는 쪽이었지만 리욘은 본인이 고른 세례명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비서들에게 몇 번이나 세례명 정말 잘 고르지 않았느냐고 묻고, 주교에게까지도 그런 소릴 했다는 얘길 듣고 제이는 괜히 자기가 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드디어 루터교 신자가 된 다음 날, 제이는 리욘과 함께 시청으로 향했다. 혼인 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혼배 예식이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결합을 뜻한다면 혼인 신고는 말 그대로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됐음을 신고하고 확인받는 절차였다. 결혼식이라는 걸 따로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에시르다보니, 사실상 일반 시민들에게 있어 부부의 결합 과정 중 메인이벤트는 바로 이 혼인 신고였다. 신랑과 신부가 각자 데리고 온 증인 앞에서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 직원 앞에서 그것을 읽은 뒤 그대로 제출하면 되는 거였다.

    왕실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국왕도, 왕세자도, 왕자도, 모두 혼배 예식 전에 직접 시청으로 가서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서류를 작성해 제출해야 했다. 그러면 그 상대가 누구든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온전한 부부임을 인정받게 되는 거였다. 물론 왕실의 사람들에게는 그 후의 절차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바로 시청 건물 앞 계단에서 인터뷰를 하고 자신들이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국민들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런 고로, 제이에게는 사실상 오늘이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얼굴을 내비치는 날이었다. 그 전에 파파라치 사진을 가장한 연출 사진으로 몇 번 얼굴을 알리긴 했으나, 어쨌든 공식 발표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오전 내내 옷을 몇 벌이나 입었다 벗었다 하며 쇼를 벌였는지 모른다. 다 똑같이 생긴 슈트를 들고 와서는 이게 조금 더 낫다, 이쪽이 더 진중해 보인다, 이건 인상이 너무 어두워 보인다, 이쪽은 덩치가 커 보인다, 하면서 계속 갈아입게 만드는데 나중엔 그냥 차라리 벗고 가면 안 되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왕실 홍보실과 비서단에서 심혈을 기울여 골라 준 옷을 입고 머리 손질까지 마친 뒤에야 비로소 제이는 시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오늘 멋있는데.”

    차에 오르며 리욘이 말했지만 이미 진이 다 빠진 제이는 인사치레로라도 “폐하도 그렇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도 인터뷰해야 합니까.”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욘은 그런 제이의 안전벨트를 직접 채워주며 말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제이가 비슷한 질문을 할 때마다 리욘은 늘 같은 대답을 들려 줬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소리였다. 본인이 직접 약속했기 때문이다. 네가 귀찮을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심지어 왕실에서 발행한 2022년도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꼭 참석해야 하는 행사 몇 가지만 지정해 주기도 했다. 이거 외에는 굳이 참석할 필요 없다고.

    “이런 거 다 안 챙겨도 돼. 꼭 참석해야 하는 행사 몇 개에만 얼굴 비치고, 나머지는 그냥 무시해. 물론 네가 가고 싶으면 가도 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가지 마. 그럴 필요 없어. 뭐든 억지로 하지 마. 난 그러라고 널 왕비 자리에 앉힌 게 아니니까. 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한 뒤 그는 그 달력을 접어 쓰레기통 안에 던져 넣었다. 이런 거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듯 손까지 내젓는 그에게 제이는 다시 한 번 확인받듯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전 정말로 안 나갑니다.”

    “나가지 마. 나갈 필요 없어.”

    리욘은 이번에도 시원하게 말했다. 내가 꼭 참석해야 한다고 말하는 행사에만 참석하면 돼.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해서 제이는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리욘이 먼저 약속을 한 바니, 자신은 그저 그 말에 따르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때는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순진하게도.

    “네, 서류 확인했습니다.”

    시청 직원은 간결한 어조로 말했다. 미리 당부가 있었는지 국왕 부부라고 해서 더 편의를 봐주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저 필요한 서류를 건네주고, 건네받고, 내용을 확인한 뒤 도장을 찍고 사인을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눈 한 번 마주치는 일 없이 입을 꼭 다문 채 이쪽이 서류 작성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상당히 특이한 경우긴 했다. 지난 반 년 간 제이가 지켜본 바, 리욘은 어딜 가나 모든 국민들에게 환대만 받았기 때문이다. 국왕을 어디의 톱스타 바라보듯 하는 동네다 보니 한 번이라도 더 눈을 맞추고 말을 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곤 했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 마주 앉은 상태로 입을 앙다문 채 시선을 피하고 있으니 폐하가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혹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나, 사랑하는 폐하께서 남자 제노스와 결혼한다는 사실이 영 싫은 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두 분은 에시르 법안이 허락하고 스바르트 시청에서 공인한 부부가 되셨습니다. 두 분이 부부임을 증명하는 혼인 증서입니다.”

    증서를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축하드려요.” 라고 속삭이는 여직원의 상기된 얼굴에서 제이는 그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젊은 시청 직원은 그저 긴장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아마 내내 머릿속으로 말을 골랐던 모양이었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폐하의 혼인 서류에 사인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리욘과 악수를 하며 여직원은 정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제이에게 악수를 청하면서는 그보다 더 다정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축하드려요, 전하. 건강한 아기 낳으실 수 있도록 기도할게요.”

    여전히 눈은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지만 귀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수줍게 미소 짓는 여직원을 보고 있노라니 제이는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졌다.

    “고맙습니다.”

    여직원과 악수한 뒤 돌아서자 증인으로 참석했던 에이나르와 하르트만이 나란히 서서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그리고, 전하.”

    시청에 들어설 때만해도 제이, 라고 불렸는데 서류 한 장 제출하고 돌아서자 호칭이 전하가 되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리욘의 이름 뒤에 붙던 호칭이었다. 그래서인지 제이는 마냥 어색하고 듣고 있기가 부담스러웠는데 의외로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류 접수실을 나서자마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비서들과 경호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축하 인사를 건넸다.

    “경하드립니다, 폐하! 경하드립니다, 전하!”

    그 우렁찬 소리에 복도를 지나가던 시청 직원들도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고는 덩달아 예를 갖추어 인사를 전했다.

    “고맙네. 자네들이 수고가 많았어.”

    리욘은 축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가 자신의 비서들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하는 동안 이제는 제1 특별 경호 중대가 된, 과거의 제3 특별 경호 중대 대원들이 우르르 제이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전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아, 고마워.”

    제이는 짧게 인사했다.

    “이제 드디어 전하라고 부를 수 있게 됐군요.”

    로겐의 말에 페르들란이 “어휴, 드디어!” 하며 발을 굴렀다.

    “그동안 계속 대위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떻게 불러야 하나 엄청 고민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멀리서 전하 뵙고 그대로 도망간 적도 많았어요. 인사를 드리긴 해야 하는데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요.”

    페르들란의 말에 여기저기서 “어? 나도 그랬는데.”,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하는 공감의 목소리가 잇따랐다.

    “어쩐지.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도 인사는커녕 아는 척도 안 하고 도망가더라고.”

    단체로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있나 했지. 제이의 농담에 대원들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하고 일제히 손을 저었다.

    “곧 결혼하실 건 알았지만, 아무래도 법도라는 게 있으니까요.”

    로겐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그가 고개 숙여 말하자 다른 대원들도 모두 고개를 숙이며 축하드립니다! 하고 외쳤다.

    “고마워.”

    제이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악수를 청하는 대원들의 손을 하나씩 다 맞잡아 준 뒤, 그는 습관처럼 그들의 제일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 앞에서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리욘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거기 서 있는 거지?”

    “네?”

    “그대는 이제 여기로 와야지.”

    리욘이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제이를 부르는 호칭도 아주 자연스럽게 자네에서 그대로 바뀌어 있었다.

    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제이는 리욘의 옆에 섰다.

    “익숙해져야 돼.”

    제이의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두르며 리욘이 말했다.

    “노력하겠습니다.”

    제이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깨에 두르고 있던 손을 떼며 리욘이 웃었다.

    “그 말투도 좀 어떻게 하고.”

    “말투는… 평범하지 않나요.”

    당황해서 묻자 리욘이 아니, 절대, 하며 고개를 저었다.

    “쓰는 단어야 평범하지. 하지만 말투는 아니야. 너무 정중한 데다 경직돼 있어.”

    군인 같아. 리욘의 말에 제이는 “그야 군인 출신이니까요.” 라고 대답했다.

    “그래. 군인 출신의 왕비지.”

    왕비, 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리욘이 웃었다. 무언의 압박에 제이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말투를 교정해 줄 담당 교사가 하나 붙을 듯싶었다.

    시청 건물을 나서자마자 엄청난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국왕 부부가 시청에 도착하기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앞 다퉈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몰려 들었다.

    “폴리스 라인을 지켜 주세요. 뒤로 조금만 더 물러나 주세요. 안 그러면 인터뷰 못 합니다.”

    경호대원들이 뒤로, 뒤로, 뒤로, 더 뒤로 물러날 것을 명령하며 손짓했다. 이건 너무 멀지 않느냐, 이럴 거면 폴리스라인은 왜 세워 둔 거냐고 항의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기자들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새 왕비가 임신 중이다 보니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먼저 조심하는 눈치였다.

    말이 인터뷰지 사실은 담화문 발표나 다름없었다. 리욘이 미리 준비해 온 발표문을 읽는 동안 제이는 말없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엊그제 종일토록 선왕의 혼인신고 당일 뉴스들을 찾아본 바, 국왕이 발표문을 읽는 동안 왕비들은 다 이렇게 옆에 서서 말없이 국왕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물론 그녀들은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채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을 담아 국왕을 바라보았지만, 거기까지는 미처 캐치하지 못한 제이는 늘 그렇듯 열중쉬어 자세로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리욘을 바라볼 뿐이었다.

    덕분에 기자들은 국왕 옆에 저 사람이 왕비가 맞는 건가, 왕비와 닮은 경호원이나 비서인가, 아주 잠깐 혼란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발표문을 읽는 내내 국왕이 한껏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본 덕분에 “왕비 전하는 어디 계십니까?” 같은 실례되는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됐지만, 이후로도 기자들은 몇 번이나 곤혹스러운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다.

    “왕비 전하께도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국왕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기자 중 누군가가 외쳤다. 보통은 국왕의 발표가 끝나면 왕비가 짧게라도 한마디 덧붙이는 게 상례였다. 왕세자비 시절부터 매스컴을 상대하는 데 익숙했던 라나 전 왕비는 미리 준비해 온 발표문을 짧게 낭독했었고, 여배우 출신이었던 리우지엔은 익숙지 않은 노르드어 대신 능숙한 영어로 자신의 소회를 밝힌 뒤 카메라 앞에서 국왕과 정다운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번의 왕비는-

    “굉장히 기쁩니다.”

    이 한마디가 전부였다.

    기자들은 몹시 당황했다. 이게… 끝입니까? 라고 묻지도 못하고 마이크를 든 채 눈만 껌벅이고 있자니 그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왕비가 마지못한 얼굴로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직 혼배 예식은 치르지 못했지만 일단 합법적인 부부가 됐으니까요. 성심성의껏 폐하를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덧붙인 한마디마저도 너무나, 너무나 간결했다. 이건 아무리 들어도 왕비의 결혼 소감이 아니라 어디 신임 비서관이나 신임 경호부대 지휘관의 각오 같았다. 하필 왕비의 옷차림까지 그래서 더욱더 그렇게 느껴졌다.

    당연한 얘기지만 기자들의 혼란스러운 심경은 제이에게도 고스란히 다 전해졌다. 제이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분명히 아무 말 안 해도 된다고 해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마디 해 달라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무난한 말로 소감을 말한 건데 기자들이 단체로 눈만 껌벅여 대며 이게 끝이냐는 표정을 지어 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길게, 최대한 무난하고 예의바른 표현을 골라 다시 한 번 말했는데 이번에도 영 반응들이 신통찮았다.

    “저, 국민들에게도 한 말씀 해 주시죠.”

    기자 한 명이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 말에 기자들이 일제히 다시 눈을 빛내며 마이크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뭐라고 좀 길게 이야기를 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제이는 더욱 난감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를 해 오는 거였는데. 안 해도 된다는 리욘의 말만 믿고 정말 안 해도 되나 보다 하며 온 게 실수였다.

    어떡하지.

    제이는 작게 미간을 좁혔다. 리욘은 이렇게 회견장 분위기가 삭막할 때면 늘 가벼운 농담 한 두 마디로 기자들의 긴장을 풀어 주곤 했다. 나도 그렇게 해야 하나. 제이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고민했지만, 당장 생각나는 농담이라곤 “불법 자금 운용은 안 하겠습니다.” 같은 것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농담은 이런 자리에선 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다 포기하고, 이번에도 짧게, 간략하게, 핵심만 간단하게 추려 전달했다.

    “감사합니다. 폐하를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좀 더 길게 한마디 해 달라고 부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기자들은 그래, 이럴 줄 알았다, 하는 표정으로 마이크를 내렸다. 아마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다들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새 왕비는 이런 식의 인터뷰에 익숙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앞으로도 이 왕비에게 세 마디 이상의 긴 인터뷰를 기대해선 안 되겠다는 사실도.

    “수고했어.”

    기자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며 리욘이 제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이는 조금 억울해져서 “안 해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하고 말했다.

    “맞아. 안 해도 되는 거였어. 그냥 폐하께서 다 말씀하셔서 따로 할 말이 없다고 하고 한 번 웃어 주면 되는 거였어.”

    “어떻게 그럽니까.”

    말해 달라고 일부러 요청까지 하는데. 제이는 낯을 찌푸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질문을 안 했다면 모를까, 뻔히 한마디 해 달라고 마이크까지 내미는데 거기다 대고 어떻게 할 말이 없다고 한단 말인가.

    “왜 못 해. 하면 되지.”

    이제 그런 데에도 익숙해져야 돼. 리욘은 담담히 말했다.

    “상대방 기분 신경 안 쓰고, 생각 안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좀 멋대로 굴어도 돼. 제이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리욘은 말했다.

    “난 그러라고 그대를 왕비 자리에 앉힌 거니까.”

    리욘의 말투가 너무나 태연해서 제이는 도리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말이지 이건 리욘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평생을 이렇게 상대방의 기분 따위 신경 안 쓰고, 생각 안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아 온,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리욘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지금 말씀을 기자들 앞에서 하셨어야 했는데요.”

    “그래도 다들 좋아했을걸.”

    리욘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폐하께서는 부인을 아낄 줄 아는 사내라고, 멋있다고 좋아들 했을 거야.”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 나라 사람들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으리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까닭이었다.

    계단을 내려오자 두 대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리욘은 오후 일정이 있어 제이 혼자 왕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드디어 운전대를 못 잡게 할 구실이 생겼군.”

    제이의 차 문을 열어 주며 리욘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부터 제이는 왕실의 엠블럼이 박힌 벤틀리 차량을 타게 되었다. 그 전에 타고 다니던 경호용 차량도 벤틀리였지만 이쪽은 벤틀리사에서 에시르 왕가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한정 에디션인 만큼 외관부터 기능까지 모든 것이 다 달랐다. 그렇다보니 운전도 따로 교육을 받고 연수 과정을 마친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리욘은 제이가 재활 센터에 가거나 혼자 외출을 할 때 직접 운전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나면 뒷좌석의 사람보다 운전석의 사람이 훨씬 더 많이 다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왕이나 왕비도 왕실 엠블럼이 박히지 않은 개인 차량을 이용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공식 차량과 달리 개인 차량은 이용 기록이 따로 남지 않다 보니, 너무 자주 이용할 경우엔 여기저기서 의심의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쓸데없는 의혹을 사기 싫으면 얌전히 공식 차량만 이용하는 게 답이었다.

    “앞으로 개인 차량은 딴 남자나 딴 여자 만나러 갈 때만 이용하십시오. 알겠습니까, 왕비 전하.”

    웃으며 말한 리욘은 제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 문을 닫았다. 출발하라는 듯 차체를 탕, 가볍게 두드리자 운전기사가 곧바로 액셀을 밟았다.

    “음, 벌써 반응들이 뜨겁네요.”

    차가 출발하자마자 패드를 꺼내 든 하르트만이 인터넷 뉴스 사이트들을 확인하며 말했다. 만약 반응이 좋았다면 신이 나서 “이것 보세요, 전하. 이런 댓글들이 달렸어요.” 하고 패드를 내밀었을 텐데 아무 말 없이 조용한 걸 보면 반응들이 뜨겁긴 하되, 좋은 방향으로 뜨거운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인터뷰를 그런 식으로 했으니 반응이 좋을 리가 있나.

    제이는 차 시트에 몸을 묻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별론가요?”

    암 레스트에 팔을 걸치며 묻자 하르트만이 “음… 아뇨, 지금 보고 있는데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요.” 하고 말했다.

    “한번 보실래요?”

    손을 내밀자 조수석에서 패드가 건네져 왔다. 하르트만이 보고 있던 뉴스 페이지에는 인터뷰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차마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볼 용기는 없어 곧바로 스크롤바를 내려 코멘트부터 살폈다. 예상대로 새 왕비는 굉장히 과묵한 거 같다, 군인 출신이라더니 과연 무뚝뚝하다, 서 있는 자세부터 군인 같다, 왕비가 아니라 경호원인 줄 알았다, 하는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초반에 등록된 코멘트들은 거의 다 그런 식이었는데, 중반부터 약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혹시 계약 결혼 아닐까?’, ‘폐하께서 강력한 제노스 후계자를 얻기 위해 인공 수정을 감행하신 걸지도!’, ‘원래 왕실의 결혼이란 다 그런 거야. 애정보다는 목적이라구.’ 아슬아슬한 수위의 농담들이 몇 개 눈에 띄나 했더니, 그 밑에 누군가가 남긴 하나의 코멘트로 인해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

    ‘멍청이들아. 폐하 표정을 좀 봐라.’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스크롤바를 위로 올려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뉴스 영상이 재생되는 순간, 그는 그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본인 때문은 아니었다. 군인마냥 경직된 표정과 자세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은, 그래, 그러려니 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제이를 당황스럽게 만든 건 그런 본인을 바라보고 있는 리욘의 표정이었다. 옆에서 뒷짐을 진 채, 아주 흐뭇하다 못해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

    제이는 당황하여 동영상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자기가 다 부끄러워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스크롤바를 내리자, 아니나 다를까 그 코멘트 이후로 온통 리욘의 표정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밖에 없었다. ‘맙소사, 폐하 표정이 저게 뭐야.’, ‘좋아 죽는구나.’, ‘우리 집 강아지를 바라볼 때 내 표정이 딱 저래.’, ‘결혼 전에 애가 벌써 둘인 이유가 있었어.’, ‘그런데 나 이상해. 계속 보고 있는데 내 표정까지 폐하랑 똑같아지고 있어.’ 등등, 무뚝뚝한 왕비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 가고, 그렇게 무뚝뚝한 왕비를 보고 좋아 죽으려고 하는 국왕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했다. 다들 2왕자 시절부터 그를 봐 왔지만 이런 표정은 난생 처음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부왕보다도 더 왕 같다는 소릴 듣던 리욘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던 그가, 새 왕비가 인터뷰하는 걸 지켜보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마냥 웃고 있으니 다들 신기해하며 즐거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폐하더러 첫사랑에 빠진 소년 같다고 그러네요.”

    패드를 돌려받은 하르트만이 그사이 새로 뜬 뉴스 기사의 타이틀을 읽어 주며 웃었다. 그러더니 뒤늦게야 조금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홍보실은 난리가 났겠는데요.”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국민들에게 비칠 국왕 부부의 이미지를 고려해 오늘 종일토록 단추의 색상부터 앞머리 가르마 방향까지 고심하고 또 고심하던 홍보실이었다. 진중하게, 하지만 너무 가라앉은 느낌은 들지 않게. 차분하면서도 여유로운 두 사람의 모습과 위엄이 돋보일 수 있도록- 이라는 컨셉에 맞춰 열심히 꾸며 내보내 놨더니, 왕비는 신임 경호대장인 줄 알았단 소리를 듣고 국왕은 사랑에 빠진 열일곱 살 소년 같단 소릴 듣고 말았다. 홍보실장 길링은 지금쯤 뉴스 사이트의 반응들을 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말투 교정에 이어 화술과 화법, 그리고 미디어를 대하는 애티튜드를 가르칠 담당 교사까지 붙을 듯싶었다. 제이는 한숨을 쉬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

    차는 왕세자궁이 아닌 왕비궁 앞에 도착했다.

    “이제 전하께서 이 궁의 주인이 되시는 겁니다.”

    차의 문을 열어 주며 하르트만이 말했다. 웬만하면 감동이라든가, 가슴 벅찬 설렘 같은 걸 느껴보고 싶었지만 인터뷰의 여파 때문인지 그저 피곤하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 오후 일정은 이제 아무것도 없죠?”

    “네. 접견은 내일부터니까 푹 쉬시면 됩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며 곧장 침실로 향하려던 그는 “그런데 궁 안을 한번 둘러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라는 하르트만의 말에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본궁의 반의반도 안 되는 작은 규모의 궁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왕궁은 왕궁이었다. 3층짜리 건물 곳곳을 다 들여다보고 각 공간을 담당하고 있는 사용인들과 일일이 인사까지 나누고 오자 그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제 진짜 쉬어도 되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2층 침실에 도착한 제이는 소파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네, 이제 정말 쉬십시오.”

    하르트만은 송구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얼른 침실을 나섰다. 침대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던 제이는, 그러나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도로 소파에 앉고 말았다.

    “전하, 왕녀께서 오셨습니다.”

    “아, 들여보내 주세요.”

    곧 문이 열리고 시그니가 들어왔다. 시그니의 유모인 뢰드네 부인과 왕자궁 소속의 비서인 닐센이 함께 들어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문 앞에 서서 제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그니는 그런 두 사람을 조금 긴장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큰 소리로 제이를 향해 외쳤다.

    “전하께 문안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더니 어설프게나마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아이를 보며 두 수행원이 흐뭇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제이도 웃으며 그런 시그니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서기를 기다려 제이는 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이었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서자 제이는 소파의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리 와.”

    그 말을 기다렸던 것처럼 아이가 헤헤 웃으며 쪼르르 달려왔다.

    “새로 옮긴 궁은 마음에 들어?”

    제이는 시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응! 거기 방이 열한 개나 있는데, 그거 다 내 방이래!”

    있잖아, 로키 방도 따로 있다? 시그니는 자랑하듯 말했다.

    오늘 날짜로 두 사람이 혼인 신고를 하고 정식 부부가 되면서 마침내 시그니도 리욘의 친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지난달, 양육권 문제를 포함한 친자 소송 건이 마무리되어 미카엘이 소르스테인가의 성(姓)으로 옮겨가게 된 바, 시그니는 명실상부한 리욘의 장녀로서 아그나르 왕가의 Family genealogy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아직 왕세녀로 책봉되기 전이라 시그니 역시 왕자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는데, 다행히 아이는 그곳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혼자 자기 싫으면 여기 와서 자도 돼.”

    “나 혼자 아니야. 수잔도 있고, 로키도 있고, 일레나도 있어.”

    일레나는 뢰드네 부인의 이름이었다.

    “다행이네.”

    웃으며 말한 제이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시그니, 하고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돼. 알았지?”

    “우리 벌써 다 사이 좋아!”

    “알아.”

    제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뢰드네 부인이랑 닐센이랑, 다 시그니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

    “그치? 우리 사이좋다니까.”

    자랑하듯 말한 아이는 곧 제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근데 있잖아….”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제 계속 왕비 전하라고 불러야 돼? 제이라고 부르면 안 돼?”

    “상관없어, 제이라고 불러도.”

    “있지,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일레나가 안 된대.”

    이제 전하라고 불러야 된대. 풀죽어 말하는 걸 보니 뢰드네 부인이 어지간히 단호하게 말한 모양이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선 그럴 만도 했다. 어쨌거나 그녀에겐 왕녀의 유모된 자로서 왕녀가 왕궁의 예법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시그니가 남들 앞에서 그릇된 행동을 하면 뢰드네 부인에게 화살이 돌아갈 게 분명했다.

    “그럼 사람들 앞에서만 그렇게 불러.”

    “왕비 전하라고?”

    “응. 우리 둘이 있을 땐 그냥 제이라고 해도 돼.”

    “그럼 지금도 제이라고 불러도 돼?”

    시그니가 살그머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제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제이! 제이!”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신이 나는지 연신 제이의 이름을 부르며 소파에서 내려온 아이는 그대로 제이의 품 안으로 파고들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얼른 몸을 뗐다.

    “괜찮아. 안아도 돼.”

    제이는 시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진짜? 안아도 돼…?”

    조심스러운 얼굴로 묻는 아이에게 제이는 “그럼, 세게 안아도 돼.” 하고 웃었다. 그렇게 말해도 아이는 불안한지 살짝 겁먹은 얼굴로 다가와 가만히 제이의 배를 만져 볼 뿐이었다.

    “여기 동생 있어?”

    응, 거기 있어.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얼마나 자랐어?”

    “글쎄. 아직 쬐끄말걸.”

    제이는 시그니의 손을 잡고 주먹을 쥐게 했다.

    “아마 이거보다 작을 거야.”

    시그니는 힉, 하는 표정을 짓더니 “정말? 진짜로?” 하고 물었다.

    “이렇게 작아? 그런데 나중에 사람처럼 커지는 거야? 어떻게?”

    사람처럼 커진다는 표현이 재미있어 제이는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 사람처럼 커져서 나올 거야.”

    시그니 아기 때 사진 봤잖아. 제이는 시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뱃속에서 나올 땐 그 정도로 커져서 나와.”

    “진짜…?”

    신기하다. 시그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언제 그렇게 커져서 나오는 거야?”

    “아마 9월쯤?”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돼?”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시그니는 곧 손바닥으로 제이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빨리 보고 싶어. 뱃속의 아이에게 속삭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이는 쓰게 웃으며 시그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금방이야.”

    시그니는 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사용인 하나가 조심스레 문을 열더니 곧 저녁 식사가 준비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본궁 4층의 그랜드 다이닝 룸에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만약 원하신다면 이곳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제이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저녁 여섯 시였다. 점심 식사 이후로 다섯 시간이나 지나 있었지만 원체 피곤해서인지 식욕이 없었다. 그래서 시그니의 식사만 부탁을 하자 사용인은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전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하고 말했다.

    “폐하께서 식사에 각별히 신경 쓸 것을 당부하셔서요.”

    조금이라도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용인은 잔뜩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말 한마디를 하는 데에도 쩔쩔 매는 걸 보니 리욘이 어지간히 엄포를 놓은 모양이었다.

    “그럼 간단하게, 정말 간단하게만 부탁할게요.”

    거듭 말하자 사용인은 고개를 숙이며 알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물론 제이는 기대하지 않았다.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간단히’라는 말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도 안 돼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방으로 날라져 왔다. 제이는 결국 뢰드네 부인과 닐센은 물론, 막 쇼핑을 마치고 돌아온 수잔과 1층 비서실에 있던 하르트만까지 불러 식사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 닐센과 하르트만 덕에 음식은 남기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제이는 자신의 몫으로 덜어 둔 음식에조차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입맛이 없는 건 둘째 치고 속이 불편해 도무지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 아마 너무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제이는 물로 입안을 헹구며 생각했다.

    ***

    “식사를 거의 못 했다고.”

    예상대로 리욘은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 얘기부터 했다. 죄 없는 사용인들과 요리사들이 혼나는 일이 없길 바라며 제이는 최대한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요.”

    낮에 먹은 게 소화가 잘 안 됐는지 아직도 식욕이 없다고 하자 리욘은 “하긴, 오늘 오전부터 바쁘긴 했지.” 하고 수긍하듯 말했다.

    “그래도 이제 당분간 왕궁 밖으로 나갈 일은 잘 없으니까.”

    재킷을 벗으며 말하는 리욘에게 제이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정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정말이지, 그럼. 이제 혼배 예식 전에는 딱히 큰 행사도 없잖아.”

    그리고 설령 행사가 있다 해도 그대가 참석할 필요는 없어. 벗은 수트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리욘은 제이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오며 말했다.

    “홑몸이 아니잖아. 지금은 왕궁 안에 틀어 박혀서 꼼짝도 안 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못 해.”

    거기다 당신은 얼마 전까지 환자였다고. 제이의 옆에 앉으며 리욘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하면 다 회복되기도 전에 아이를 가진 거니까.”

    그래서 그런가…. 제이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시그니를 가졌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그때는 이십 대였고 지금은 삼십 대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보다는 작년 가을에 입었던 부상의 여파가 큰 듯했다. 그때 이후로 체력이 아주 엉망이 되어 버렸다. 석 달 가까이 거의 움직이지도 못한 데다, 퇴원하자마자 또 다시 병원신세를 지고 말았으니까. 중간에 한 달 정도 재활센터에 다녔던 걸 제외하면 거의 숨만 쉬고 살았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물 한 잔도 제 손으로 먹지 못했다. 혹시라도 뱃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온 간호사들이 달라붙어서 종일 꼼짝도 못 하게 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허벅지까지 째고 병원에서 탈출을 했으니.”

    “…….”

    “왜, 뭐 할 말 있나?”

    삐딱한 어조로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시선을 내리며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럴 땐 그저 내가 잘못했습니다, 할 말 없습니다, 하고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실제로 그건 자신이 잘못한 일이기도 했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생각을 다 한 건지.”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다는 듯 리욘이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제이는 리욘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뱃속의 아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리욘은 임신 사실을 알고 기뻐하기보다 걱정을 더 먼저 했으니까. 그렇게 아이 타령을 해 대던 사람이 의사들 말대로 수술을 하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보자고 진지하게 말했을 정도였다.

    결국 리욘이 화를 내는 포인트는 그거였다. 유산의 위험도 위험이지만, 자신이 스스로 몸에 상처를 냈다는 사실이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대관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경호대원들을 탓하기보단 자신에게 더 많이 화를 냈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무모하냐고. 하필 도망을 쳐도 그런 식으로 도망을 치는 거냐고.

    그때 리욘의 표정과 목소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해서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런 제이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리욘도 이 이야기가 나오면 굳이 길게 끌고 가지는 않았다.

    “하여간에 세상에서 제일 터프한 왕비님이라니까.”

    늘 이렇게 한숨을 쉬며 농담 섞인 진담으로 마무리를 짓는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왕비궁 입성 소감을 안 물어 봤군.”

    어때? 리욘이 제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마음에 듭니다.”

    “그게 단가?”

    “그거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제 집인데요. 제이는 리욘을 보며 말했다.

    “제 마음에 들면 그게 제일 좋은 거죠.”

    더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리욘이 웃으며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이제 그대의 집이니까. 그대가 맘에 들었다면 그걸로 된 거지.”

    리욘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누구라도 마음에 들어 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외관도 그러했지만 고풍스러운 건물 형식과 달리 세련되고 모던한 느낌의 실내가 딱히 취향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런 디자인이었던 것이다.

    원래는 디자인 컨셉도, 가구도 왕비가 직접 골라야 하는 거라고 했다. 지금까지 왕비궁은 늘 주인의 취향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꾸며왔던 거라고, 원하시는 바가 있으면 뭐든 기탄없이 말씀해 달라고 공사를 맡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면서 카탈로그와 브로슈어를 수백 장씩 가져다 놓은 걸, 난 이런 쪽으로는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고, 그냥 당신네들이 알아서 하라고 다 돌려보내고 말았는데 그게 정답이었다. 비록 특색은 없었지만 딱 심플하고 모던하고 미니멀한 느낌으로 제이가 원한 그대로의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도 침실 정도는 직접 꾸몄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

    리욘은 못내 아쉽다는 듯 말했지만 제이는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자신이 가구며 벽지며 골라 봤자 이만큼 괜찮은 디자인이 나올 리도 만무했고, 정말 자신의 취향대로 하자면 침실에는 딱 침대 하나만 있는 게 좋았다.

    “아무것도 없이 침대 하나만?”

    “네.”

    “그건 너무 야한데.”

    “네, 그래서 안 했습니다.”

    사람들이 흉볼까 봐요. 제이는 태연하게 말했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보며 웃더니 “뭐 어때.” 하고 말했다.

    “왕비전하의 취향이 그렇다는데.”

    “고상한 취향은 아니니까요.”

    폐하께서만 알고 계십시오. 제이는 일부러 나직하게 속삭였다. 리욘은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곧 제이의 입술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뭘 줄 거지?”

    “이미 다 드렸지 않습니까.”

    “뭘 줬지?”

    기억이 안 나는데. 중얼거리며 리욘은 턱과 목덜미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깊게 팬 쇄골을 지나 얇은 티셔츠 위로 흘러내리듯 손길이 이어졌다.

    “기분 탓인가 했는데.”

    가슴이 커진 거 맞지? 단단해진 가슴을 손바닥으로 감싸듯 하며 리욘이 말했다.

    “운동 많이 한 것 같지 않습니까?”

    일부러 눙치듯 말하자 리욘이 “그럼 이거보단 더 단단해야지.” 하며 손끝으로 살짝 가슴을 누른다.

    “아프지는 않아?”

    “아직은요.”

    리욘은 신기하다는 듯 옷 위로 가슴을 어루만지더니 도톰해진 유두를 손끝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모유는 안 나온다고 했던가?”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야. 그랬으면 두 배로 고생했을 테니까.”

    말로는 다행이라고 하는데, 표정은 왠지 모르게 아쉬워하는 것도 같았다. 기분 탓인지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점점 농밀해지는 느낌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유두를 만지작거리더니 기어이 옷 위로 그것을 머금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역시, 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손길부터가 평소랑은 다르더라니.

    “폐하….”

    제이는 나직이 리욘을 불렀다.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리욘은 듣지 못한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더욱 세게 젖꼭지를 빨 뿐이었다.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제이는 리욘의 머리를 끌어안으려다 이내 제 옆의 쿠션을 움켜쥐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계산이 멈추지 않았다.

    오늘로 15주째… 아니, 14주째였던가.

    병원에서는 12주까지는 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고 했다. 그 이후는 상관없다고 했으나 니나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유산 경험이 있는 데다 아주 초반에 여러 일이 있었던 만큼 최소 16주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말은 안했지만 리욘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러니 12주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다거나, 하면 안 되느냐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참고만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이 한계인 모양이었다. 아니, 한계는 이미 한참 전에 찾아왔었다. 그저 리욘이 답지 않게 어마어마한 인내력으로 꾹꾹 눌러 참고 있었던 거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오늘이 될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지.

    제이는 고민에 빠졌다.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지금이라도 밀어내고 조금만 더 참아 보라고 달래야하는 걸 아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리욘의 혀가 유두를 건드릴 때마다, 젖은 섬유의 감촉이 그곳에 달라붙을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발기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피곤한 상태라 다행… 이라고 하기엔 이미 뒤는 흠뻑 젖어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만만이었지만 말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확 정신이 들었다. 폐하. 제이는 크게 숨을 삼키며 리욘을 불렀다.

    “폐하, 안 됩니다.”

    하면 안 됩니다. 어깨를 붙잡으며 말하자 그제야 리욘이 가슴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 없이 나직하게 숨만 몰아쉬는 모습이 정말 안 되느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흐트러진 앞머리 때문인지 평소보다 어려 보이는 그의 모습에 새삼 가슴이 일렁였다. 제이는 떨리는 손으로 리욘의 앞머리를 살짝 올려 주며 아시잖습니까, 하고 말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아직은, 좀 위험하니까….”

    위험… 이라고 리욘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내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래, 하고 말했다.

    “16주까지는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

    아마 몰라서 방금 같은 일을 저지른 건 아닐 터였다. 알지만, 알고 있지만 자기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여 버린 거다.

    “미안해, 제이.”

    리욘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길게 내뱉는 한숨에서 그의 괴로운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괜찮습니다.”

    제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보며 여전히 괴로운 얼굴로 짧게 웃더니 그때까지도 단정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돌아섰다. 제이는 욕실로 향하는 리욘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고민에 빠졌다. 아마 샤워하면서 해결할 생각인 거겠지. 저 상태라면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테니까.

    어떡하지. 손으로라도 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욕실로 들어간 리욘이 문을 닫았다. 탁, 욕실 문이 소리를 내며 닫히는 순간 제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관두자.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는 생각했다. 지금 욕실에 따라 들어가면 절대 손으로는 안 끝날 거다.

    “미치겠군….”

    천장을 올려다보며 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도 모르게 배에 손을 갖다 댄 채 그는 중얼거렸다. 아가, 너 도대체 언제 나올 거냐.

    “폐하 말라 죽겠다.”

    그리고 나도, 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왠지 미안해서.

    ***

    오전부터 접견 대기자들이 줄을 이었다. 하룻밤사이에 접견을 신청한 사람만 백오십 명가량이라고 했다.

    “아마 오늘은 더 늘겠죠.”

    접견실로 들어서며 하르트만은 담담히 말했다.

    “오늘까지는 일단 찾아온 순서대로 만나실 거고요, 내일부터는 미리 신청한 순서대로 만나실 겁니다.”

    즉 오늘은 그거였다. 일찍 일어난 새에게 기회를 준다는 거다.

    “두 시간 동안 몇 명이나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오늘은 사실 접견이라기보다는 인사가 목적이라… 정말 빨리 진행한다면 한 시간에 대여섯 명 정도는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제이는 신음했다. 겨우 인사만 하는 데도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단 말인가. 인사라면 말 그대로 인사만 하고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말하고 가볍게 악수 한 번 나눈 뒤 헤어지면 딱 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죠.”

    그냥 간단하게 인사만 받고 끝내면 안 되는 거냐고 묻자 하르트만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일단 예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라고 했다.

    “전하께서 왕비가 되시고 처음으로 인사를 받는 자리잖아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식으로 예를 갖춰서, 절차를 밟아 진행토록 하라고 폐하께서 엄중히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한마디로 왕비 된 자로서 한껏 위엄을 부리며 귀족들이 굽실거리는 모습을 구경하라는 뜻이었다.

    하여간에….

    제이는 두 손을 허리에 짚은 채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명령을 내린 건지는 알겠다. 무슨 마음으로 그런 명령을 내린 건지도 충분히 알 것 같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됐으니까 그냥 최대한 빨리 진행시켜 주세요.”

    제이는 접견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네? 하지만 폐하께서….”

    “폐하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염려 말고요.”

    어차피 인사는 내가 받는 거 아닙니까. 목에 맨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하며 제이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백오십 명, 이백 명, 언제 다 만납니까. 예법 같은 거 됐으니까 그냥 빨리 빨리 해치웁시다.”

    “하지만 전하, 폐하께서는,”

    “하르트만은 누구 비섭니까.”

    올려다보며 묻자 하르트만이 헉,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바짝 군기가 든 자세로 말했다.

    “물론 전하의 비서입니다.”

    “그래요? 난 또 폐하의 비서인 줄 알았네.”

    제이는 부러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 왕비궁 비서실 소속입니다. 전하의 비서입니다.”

    “그럼 내 말에 따라야죠.”

    그리고, 하며 제이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다섯 시까지 볼 겁니다.”

    “다섯 시요? 그럼 네 시간 동안 보시겠단 말씀이신가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마흔 명 정도라고 했죠? 웬만하면 그 사람들은 오늘 중으로 끝내고, 내일부터는 사전 신청자들 하루에 열 명씩 끊어서 만나죠.”

    “그… 알겠습니다.”

    뭐라고 말하려던 하르트만은 곧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또 폐하 타령을 했다간 곧바로 본궁으로 돌려 보내질 걸 직감한 눈치였다.

    “그리고 대기자들 몸수색할 때 준비한 선물, 금품, 다 압수하세요.”

    “금품은 그렇다쳐도… 선물까지요?”

    “네. 그게 뭐든 일단 나한테 주겠다고 가지고 온 건 다 압수하고, 나갈 때 돌려주세요.”

    속사정이 뭐건 간에, 전 왕세자비가 폐위된 직접적인 원인은 불법 자금 운용과 뇌물 수수 혐의였다. 애초에 뒷돈 따위 챙길 마음도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작정하고 오명을 뒤집어씌워 같은 방식으로 끌어내리고자 하는 자들이 있을지.

    “알겠습니다.”

    이유를 짐작한 듯 하르트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경호대원들에게 전달 사항을 알리러 간 사이 헤르타가 접견실에 도착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노 공작 부인을 향해 제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에스코트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오늘 그녀는 왕비의 수석 시녀 자격으로 접견에 동석할 예정이었다. 하르트만과 함께 접견자들의 면면을 살펴 그들에 대한 정보를 제이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제가 필요합니까. 전하께서는 그들의 머릿속을 다 읽을 수 있지 않나요?”

    “그렇죠. 하지만 전 그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부인.”

    제이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웃었다. 헤르타는 흠, 하고 짧게 숨을 내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제가 기꺼이 전하를 도와드리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하르트만이 돌아오고 곧 접견이 시작되었다. 정계, 재계, 문화계, 노동계 할 것 없이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이 새 왕비에게 인사를 전하기 위해 접견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유독 부부가 함께 접견실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가끔 부인만 오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남편만 오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부부가 함께였다. 그리고 유독 시계를 비롯한 각종 액세서리들을 팔이며 목에 휘감고 있었다. 행여라도 생각을 읽힐까 이중삼중으로 방비를 하고 온 눈치였는데, 어차피 읽을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시계나 팔찌 따위 없이 그냥 온 이들도 많았다. 왕세자 시절부터 리욘을 지지했던 귀족들과 의원들은 칩 따위 차지 않고 당당하게 접견실로 들어섰다. 오히려 그들은 새 왕비가 내심 자신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국왕에게 일러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 사람은 폐하를 배신할 것 같지는 않더라고, 마음으로부터 폐하를 깊이 존경하고 있더라고.

    사실 그런 건 굳이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감으로 대충 알 수 있었다. 원래도 전체적인 느낌이랄까, 이쪽에 대한 호오 정도는 쉽게 판별이 가능했는데 임신을 하고 호르몬 수치에 변화가 생기면서 좀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남자들과 여자들의 온도차가 극명했다. 확실히 여자들이 상황의 변화에 대해 좀 더 유동적이고 수용하는 폭이 넓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특히, ‘신분 상승을 노리고 사관학교시절부터 작정하고 왕세자를 꼬여 낸 여우 같은 새윈 콜스케그’에 대해 혐오감을 불태우던 귀부인들이 ‘신분의 차이 때문에 왕세자의 구애도 거절하고 6년이나 혼자서 아이를 키워 냈던 미혼모’를 향해 애틋한 시선을 보내올 때마다 제이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세파에 찌들어 본 적 없는 귀부인들이라 그런지 의외로 마음도 여리고 감성도 풍부한 듯했다.

    물론 남자들은 그런 것 따위 없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이쪽을 경계의 대상으로만 볼 뿐이었다. 새로운 왕비로 본다기보다는 국왕 옆의 또 다른 권력자로 본다고 해야 옳을 듯싶었다. 줄을 대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쪽이 국왕의 뒤에서 멋대로 국정을 휘두를까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선물을 받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쪽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무슨 꿍꿍이인가 의심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어쨌거나 쓸데없는 예법과 절차를 걷어치우고 신속, 정확, 간단을 모토로 빨리 빨리 접견을 진행시킨 바, 네 시간 동안 서른여덟 명의 접견 요청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 중 미처 접견실에 들이지 못한 네 사람은 내일 사전 신청자들을 들이기 전에 먼저 만나기로 했다.

    마지막 접견자가 접견실의 문을 열고 나가는 것과 동시에 리욘이 들어왔다. 두 시간 전부터 계속 접견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냐고 왕비궁의 비서들을 닦달했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는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왜 접견을 네 시간동안이나 진행한 거지?”

    “두 시간은 너무 짧으니까요.”

    제이는 탄산수로 입안을 헹궜다.

    “너, 아니, 그대는 지금 임신 중이야.”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제이.”

    리욘은 제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발데마르 부인과 하르트만이 슬쩍 자리를 비켰다.

    “얘기했잖아. 다른 사람들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오늘 와서 못 만나면 내일 와서 만나면 되는 거야. 리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원래 그런 거라고. 왕비를 접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아야 돼.”

    “오전부터 내내 기다려서 겨우 5분 얼굴 보고 인사만 하고 갔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어렵게 만난 거 아닙니까?”

    “인사도 정식으로 예를 갖춰서 올리게 했어야지.”

    “폐하.”

    제이는 탄산수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리욘을 불렀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건지도 잘 알고 있고요.”

    그런데 저는 이게 좋습니다. 제이는 단호히 말했다.

    “어떤 이유로든 시간을 낭비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미뤄 두는 것도 싫어하고요. 눈앞에 보이는 일은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해치워야 속이 편합니다.”

    잠깐 숨을 내뱉은 제이는 옆에 앉은 리욘의 손을 붙잡았다.

    “폐하께서 제가 귀한 대접을 받길 원해 그러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제 위치를 확인시켜 주고 싶어 그렇게 명령을 내리신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 마음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이는 말했다.

    “하지만 폐하의 말씀대로 했다면 저는 아마 오늘 오후 내내 절 못 만나고 간 사람들이 마음에 걸려 불편했을 겁니다.”

    절 아시지 않습니까. 제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절 위해서라도, 제 방식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말해놓고 나니 말투가 너무 딱딱한가 싶었다. 제이는 일부러 리욘의 눈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폐하.”

    예상치 못한 미소에 당황한 듯 리욘이 뭔가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제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곧 한숨을 쉬며 “마음대로 해.” 라고 했다.

    “그대의 손님들이고 그대의 집에서 이뤄지는 접견이니 그대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는 게 맞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여 리욘이 다시 마음을 바꿀까 제이는 재빨리 그렇게 말했다. 그 속내를 눈치챈 듯 리욘이 조금 기가 찬다는 얼굴로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는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자넨 정말 좋은 왕비가 될 거야.”

    그렇게 말한 뒤 리욘은 접견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제이는 리욘이 미처 하지 못한 뒷말을 스스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좋은 배우자는 못 되겠죠.”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울컥,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을 막으며 제이는 생각했다. 뭐지. 어제부터 계속 왜 이러지.

    “…….”

    잠시 후 그는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 기록을 찾은 뒤 니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왕비궁으로 와 줄 수 있느냐고.

    ***

    “뭐겠어요, 입덧이죠.”

    니나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말했다. 제이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열심히 머릿속으로 자신이 아는 정보들을 나열해 봤다. 그리고 정리를 마친 뒤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건 보통 4주나 6주쯤에 시작해서 12주가 지나면 사라지는 거 아니었나요? 난 지금 14주짼데요.”

    “폐하께 늘 드렸던 말씀을 전하께도 드려야 하나요?”

    제이가 아, 라고 중얼거리기도 전에 니나가 먼저 말했다.

    “사람마다 다 달라요. 8개월 이후까지 입덧한 사람도 의외로 많아요. 6개월 지나서 입덧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고요.”

    “아니, 그건 압니다.”

    그런데 난 첫아이 때도 입덧은 안 해서요. 제이는 변명하듯 말했다.

    “첫째 다르고 둘째 다르고 셋째 달라요. 애들 성격이 다 다르고 식성이 다 다르듯이 엄마가 겪는 증상도 다른 거죠.”

    청진기를 가운 주머니에 넣으며 니나가 “최근에 혹시 스트레스 받는 일 있으세요?” 물었다. 그런 뒤 자기가 먼저 대답했다.

    “물론 있으시겠죠. 그것도 엄청 많이.”

    어쩌면 그래서일 수도 있어요. 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시적으로 잠깐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는 거죠. 입덧이라는 건 아직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어요. HCG 호르몬이 주원인이고 그 외에 자율 신경계 불균형 등도 이유로 꼽히긴 하는데, 그보다 더 큰 요인으로 꼽히는 게 심리적 요인이에요. 사실 모든 게 다 그렇죠. 특히 임신 중에는 산모 심리 상태에 몸이 즉각 반응을 하니까요. 그래서 무조건 안정, 안정, 또 안정을 취하라고 하는 건데 지금 전하께선 여건상 그게 힘든 상황이시잖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증상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예요. 지금 계속 일도 많고, 심지어 어제부터 거처도 이곳 왕비궁으로 옮기셨잖아요. 환경이 바뀌는 것도 꽤 스트레스예요.”

    “글쎄요. 환경이 바뀐 건 딱히 불편하지 않은데.”

    어차피 왕세자궁에서 지낸 것도 두 달 정도밖에 안 됐다. 거기가 너무 편해서 여기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곳으로 옮기고 나니 확실히 내 공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심리적인 안정감은 더했다. 그러니 환경이 바뀐 걸로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닌데….

    “뭐, 따로 짚이는 이유라도 있으세요?”

    니나가 진료 가방을 챙기며 물었다. 제이는 잠시 생각 끝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니나의 뒤에 서 있던 수잔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니나가 “왜요?” 하며 돌아봤다.

    “아아, 아녜요.”

    신경 쓰지 말아요. 수잔은 여전히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런 수잔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니나는 다시 진료 가방을 챙겨들며 제이에게 말했다.

    “아무튼 힘드시겠지만 최대한 안정하시고, 스트레스 안 받으시는 게 좋아요. 다행히 입덧 증세가 심각한 건 아니니 뭐든 드실 수 있으면 조금씩 드시고요.”

    당부한 뒤 니나는 응접실을 나섰다.

    제이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이어질 수잔의 놀림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왜? 말하지 그랬어. 욕구 불만이라고.”

    낄낄 웃으며 맞은편 소파에 앉는 수잔에게 제이는 한숨을 쉬며 “그런 말을 어떻게 합니까.” 했다.

    “왜 못 해? 배란 유도제 사용하는 방법까지 배웠으면서.”

    “그건 그거고요….”

    이건 안 돼요. 제이는 테이블에 한쪽 팔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 말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수잔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뭐야, 그렇게 심각해?” 하고 물었다.

    “아, 미치겠어요.”

    제이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짧게 혀를 찼다.

    “이상하다? 너 시그니 가졌을 땐 안 이랬잖아.”

    “안 이랬죠.”

    정확히는 못 이랬던 거지만.

    “그때는 이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까요.”

    “하긴, 그때는 애를 지우느냐 마느냐로 종일 고민할 때였으니까.”

    “수잔이 매일 수술하러 가자고 닦달을 하던 때이기도 했고요.”

    “아, 그 얘긴 그만하라니까.”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고 화를 내는 수잔에게 제이는 “아무튼요.”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때는 폐하가 옆에 없었죠.”

    “그게 문제로군.”

    그렇다. 그게 문제였다. 다른 이유는 다 부차적인 것들이다. 그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결국 리욘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리욘이 옆에서 지분대느냐 마느냐의 차이였지만.

    “하고 싶으면 그냥 해. 뭐 어때.”

    “안 돼요.”

    제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16주까지는 절대 안 돼요.”

    “조심해서 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냐는 듯 말하는 수잔에게 제이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조심해서 할 자신이 없어요.”

    난 나를 잘 알아요. 제이의 말에 수잔이 음, 하며 팔짱을 꼈다. 젊은 시절의 제이를 잘 아는 만큼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는 그녀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리욘한테 만지지 말라고 해.”

    “이유는 뭐라고 하고요?”

    하고 싶어지니까 만지지 말라고요? 제이는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냐는 듯 수잔이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설마 그런 말하는 게 부끄러운 거야?”

    “그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럽다기보다는.”

    모르겠어요. 자신의 뒷목을 매만지며 한숨 쉬었다.

    “임신 중이잖아요. 아직 조심해야 하는 시기고요.”

    그리고 난 내 실수로 한 번 유산을 한 적이 있고요. 제이는 시선을 반쯤 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런 와중에 섹스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좀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면 안 되는 게 아닌가 해서요.”

    “무슨 소리야.”

    헤이, 임신 중에도 다들 해. 수잔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임신 중에 더 하고 싶어진다는 사람도 많다고.”

    “그건 알아요. 아는데.”

    제이는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뜻이 제대로 전달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먼저 읽은 듯 수잔이 말했다.

    “네가 모성애라는 게 없어서 그런 걸까 봐, 그게 겁나는 거야?”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상황에 자신의 대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제이.”

    수잔이 한숨을 쉬었다.

    “넌 가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그냥 자기 배로 낳아서 키우면 그게 엄마야. 수잔은 테이블에 놓인 제이의 손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다고. 알잖아. 그리고 모성애라는 건 결국 책임감의 한 종류일 뿐이야. 엄마가 자식에게 가지는 책임감을 모성애라고 부르는 것뿐이라고.”

    “그건 알지만.”

    제이는 쓰게 웃었다. “알면 된 거야.” 틈을 주지 않고 수잔이 말했다. 짝, 소리 나게 제이의 손등을 때리며 그녀는 덧붙였다.

    “그리고 넌 내가 아는 녀석들 중에 제일 책임감이 투철한 녀석이야. 아주 징그러울 정도라고.”

    수잔이 정말 징그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무책임한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지만. 수잔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 가끔은 그냥 네 멋대로 했으면 좋겠어. 그런 책임감이나 의무감 같은 거 다 집어치우고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 멋대로 굴었으면 좋겠다고.”

    수잔의 말에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왜 웃어?” 의아한 듯 묻는 그녀에게 제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뇨.” 하고 말했다.

    “어제도 그 얘길 들었거든요.”

    “그래?”

    누구한테 들었는데? 눈을 크게 뜨며 묻던 수잔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걘 가끔 그렇게 내 마음에 드는 소릴 하더라.”

    그래서 싫어.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하는 수잔에게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좋아, 겠죠.”

    “아냐, 싫어.”

    수잔은 단호히 말했다.

    “내가 할 말을 늘 자기가 먼저 해 버리잖아.”

    난 두 번째는 싫단 말이야. 수잔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무튼 네가 그런 쓸데없는 고민까지 하는 거 보니 마음이 놓인다.”

    뜬금없는 수잔의 말에 제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네가 그랬잖아. 시그니 때는 이런 고민 같은 거 하지도 못했다고. 할 겨를이 없었다고.”

    “아….”

    그랬죠. 제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애를 지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고민만 하고, 낳기로 결심한 뒤에도 이게 잘한 결정일까, 내가 얘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계속 걱정만 했잖아. 그때에 비하면 지금 고민은 복에 겨운 거지.”

    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그런 쓸데없는 고민까지 하는 거 아니냐는 수잔의 말에 제이는 그런가요, 하고 웃었다.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냥 리욘한테 말해. 각방 쓰자고.”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 거죠.”

    “왜긴 왜야.”

    그 자식만 좋은 거 꼴 보기 싫으니까지. 수잔이 앙칼지게 외쳤다.

    “그건 아녜요. 폐하도 나름 힘들어하고 계시는,”

    “그래? 그럼 더더욱 각방 써야겠네. 둘 다 힘든데 뭣 하러 굳이 같은 방 쓰고 있어. 각방 쓰면서 편하게 자면 되지.”

    안 그래? 반박의 여지가 없는 수잔의 말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건… 그렇죠, 라고.

    ***

    루터교가 국교나 다름없는 에시르라고 해도 혼배 예식을 치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루터교에서 혼배 예식은 7성사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왕가에서 결혼을 할 때도 결혼식이나, 혼인 신고식에 비해 그다지 주목도가 높은 이벤트는 아니었다고 한다.

    “제일 성대하게 치르는 건 아무래도 결혼식이죠. 그 다음이 혼인 신고였고요. 아무래도 순서상으로는 혼인 신고가 제일 먼저니까요. 시청 앞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결혼 사실을 공표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결혼식 다음으로는 혼인 신고가 중요한 거죠. 혼배 예식은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리욘과 베아테의 혼배예식 때는 중계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고 에이나르는 말했다. 당시 국경 지대에서 복무 중이던 리욘이 하루 날 잡고 휴가를 나와서는 베아테와 함께 성당에 찾아가 주교 앞에서 서로 반지만 끼워 주고 끝이었다고.

    “그때만 해도 나중에 성대하게 결혼식을 할 거라고 다들 생각을 했으니까요. 혼배 예식이랑 결혼식이랑 둘 다 중계하는 경우는 없으니까, 혼배 예식은 간단하게 하고 나중에 결혼식을 화려하게 할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거죠.”

    물론 리욘은 처음부터 결혼식이고 뭐고 아무것도 할 생각 없이 조용히 ‘결혼’만 하고 말 생각이었지만, 그걸 몰랐던 왕실에서는 이 조촐한 혼배 예식을 허가하고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국왕의 첫 결혼은 너무나 조용하고도 간소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성사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좀 성대하고 화려하게 하고 싶었단 말이죠. 혼배 예식만이라도요….”

    웅얼거리는 에이나르에게 제이는 “이 정도면 충분히 성대하고 화려한 거 아닌가요?”하고 물었다.

    “텔레비전 생중계도 하잖아요.”

    “텔레비전 생중계만 하는 거죠.”

    그건 원래 해야 하는 거예요. 에이나르는 여전히 침울하게 말했다. 옆에서 의전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가의 의무 중 하나죠. 일종의 쇼맨십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런 것도 필요합니다. 국민들은 왕실의 화려한 행사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곤 하거든요.”

    “부담주지 마.”

    본인의 집무실 책상에 앉아있던 리욘이 짧게 말했다.

    “중계하기로 한 거면 됐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하니까 성당 내부 좀 화려하게 꾸미고, 마지막에 꽃가루 좀 날려 주면 되는 거야.”

    리욘의 말에 에이나르와 의전관이 납작 고개를 숙이며 네, 알겠습니다, 했다. 과시욕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리욘이 이렇게 기특한 소릴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왕비가 뒤늦게 입덧을 시작했단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고 닥터 블리스가 첨언해 준 게 효과가 컸다. 덕분에 리욘은 혼배 예식을 더 늦출 생각까지 했지만 그건 제이가 반대했다. 5월이 가장 좋았다. 그 이후가 되면 배가 무거워서라도 움직이기 힘들 터였다.

    안 그래도 의상 때문에 담당자가 고민이 많다고 의전관이 전했다.

    “드레스라면 배를 가리는 디자인도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슈트는 그게 힘드니까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는 눈치더라는 의전관의 말에 제이는 하객 명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럼 드레스를 입을까요?”

    순간 집무실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네?” 하고 소리쳤다. 그 격한 반응에 놀라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당연히, 라고 덧붙이자 그제야 사람들이 아,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는 심히 당황스러웠다. 아니, 들으면 농담인 걸 모르나. 이걸 굳이 농담이라고 말을 해야 아나. 혹시 리욘도 같은 반응인가 싶어 슬쩍 쳐다봤다. 다행히 그는 일찌감치 농담인 걸 알아들은 듯 혼자 웃고 있었다. 다만 농담이라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 그게 더 제이의 마음을 심란하게 할 뿐이었다.

    “아무튼 의상은 담당자에게 맡기기로 하고요.”

    의전관이 이마에 흐른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예식은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한 시간은 걸릴 겁니다. 아시다시피 주교님 강론이 워낙 길어서요. 보통 미사 때마다 강론만 30분씩 하시는 분이시라,”

    “10분으로 줄여 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의전관은 결국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예식을 최대한 간략히 진행하는 방법에 대해 다각도로 연구한 끝에, 총 예상 예식 시간을 한 시간 반에서 45분 정도로 줄일 수 있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할 건 다 하니까.”

    자신의 폐하께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길 바라마지 않았던 에이나르가 눈물을 삼키며 펜의 뚜껑을 닫았다.

    “그런데 마차 퍼레이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것도 생략인가요? 하르트만이 조심스레 물었다. 원래 왕실에서 결혼식이 열리면 식장인 사원에서부터 의전용 마차를 타고 출발해 광장 둘레로 2km 정도를 돈 다음 다시 사원으로 오게 돼 있었다.

    “이 경우에는 똑같이 성당에서 출발해서 광장 둘레로 돈 다음에 다시 성당으로 돌아오면 되겠지만….”

    “힘드실까요?”

    의전관이 제이에게 물었다. 어차피 모든 건 제이의 의사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제이가 힘들다고 하면 못 하는 거였다.

    “글쎄요.”

    제이는 중얼거렸다. 마차에 가만히 앉아있는 게 뭐가 그리 힘들겠느냐마는, 퍼레이드는 그냥 그렇게 앉아있기만 해선 안 됐다. 양옆으로 몰려든 시민들에게 내내 손을 흔들어주고 웃어 주고 이따금 손도 잡아 줘야 했다. 육체적으로 힘들다기보다 정신적으로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손은 안 흔드셔도 됩니다. 물론 잡아 주실 필요도 없고요. 평소보다 마차와의 간격을 좀 멀리 띄우겠습니다. 사람들이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로요.”

    의전관이 조심조심 말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마차 퍼레이드를 어지간히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이런 것도 다 왕가의 의무라고 했으니까. 국민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만족시켜 주는 게 왕실 사람들의 가장 큰 의무 중 하나라고 의전관은 말했다.

    “그럼 할,”

    “안 돼.”

    리욘이 제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낮게 말했다.

    “퍼레이드는 안 돼. 이건 위험해.”

    “폐하, 보안에 대해 걱정하시는 거라면,”

    “임산부에겐 무리야.”

    리욘은 단호히 말했다. 재고의 여지 따위 남아있지 않은 그의 말투에 의전관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예식 장면 중계하기로 했으면 된 거야. 국민들이 원하니까 배불러서 힘든 와중에도 예식 다 치르고 중계까지 하기로 한 거잖아. 그거면 됐어. 퍼레이드까지는 안 해도 돼.”

    리욘의 말에 에이나르가 “아, 네, 맞습니다. 혼배 예식 중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고 얼른 편을 들었다.

    “국민들도 이해할 거예요. 그럼요, 이해하고말고요.”

    “아무렴요. 그것도 안 할 줄 알았다는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는걸요. 두 분 혼배 예식 장면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하고 있어요.”

    두 비서가 어떻게든 국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의전관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마차 퍼레이드의 생략이 결정되며 회의는 일단락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집무실을 나서자 리욘이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의전관은 저게 병이야. 뭐든 화려하고 거창하게 하려고 드는 거.”

    “폐하의 스타일에 맞춘 거겠죠.”

    “내 스타일이지 그대의 스타일은 아니니까.”

    제이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리욘을 쳐다봤다. 웬일이십니까. 표정만으로 묻자 리욘이 책상에 걸터앉아있던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말했잖아. 이제 무조건 당신한테 맞출 거라고.”

    “그렇습니까….”

    “뭐지, 그 표정은?”

    리욘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접견도 그대의 방식대로 진행하게 해 주지 않았느냐는 리욘의 말에 제이는 “그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접견 신청자가 확 줄었다지?”

    사실이었다. 새 왕비가 선물을 모두 돌려보냈다더라, 나중에 몰래 보내라는 뜻인가 했더니 아예 비서와 공작 부인을 양옆에 앉혀 놓고선 따로 말 붙일 여지도 안 주더라, 게다가 한 사람당 접견 시간이 5분도 안 돼서 다 똑같은 인사만 주고받고 나오는 모양이더라, 등등의 이야기가 돌면서 접견 신청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그런 거라면 굳이 얼굴 도장 찍을 필요 없겠구나, 안 간다고 해서 따로 불이익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겠구나, 이 왕비는 그런 쪽으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 라고 모두가 알아차린 덕분이었다.

    “어때, 만족해?”

    “네.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제이의 말에 리욘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천상 군인이야.”

    절대 정치인 체질은 못 된다는 리욘의 말에 제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냥 시간 낭비하는 게 싫을 뿐입니다.

    어차피 인간관계라는 건 상대적인 거였다. 상대가 진심이라면 이쪽도 진심으로 대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쪽에서도 굳이 용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피차 진심도 아닌 말을 늘어놓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느니 서로 주고받을 인사만 깔끔하게 주고받고 끝내는 게 나았다.

    “뭐, 각자의 스타일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왕비께서 그게 좋으시다면 좋은 거겠지요. 리욘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대로 자신의 책상을 향해 걸어가며 그는 조금 투덜거리는 어투로 덧붙였다. 내가 원한 그림은 이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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