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22)
  • 차는 그라니 산에서 가장 가까운 뵈이틴 종합병원에 도착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곳 병원에서 우선 처치를 받고, 오스파크 국립 병원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제이가 응급실에서 상처를 소독하는 사이 왕궁에 있던 에이나르가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그는 다친 제이보다 더 창백한 안색을 하고선 연신 휴대폰을 들고 병원 건물을 들락거렸다. 수시로 리욘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가 그새 울려 대는 휴대폰을 들고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이야기하는 모습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듯싶었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쯤 왕궁은 발칵 뒤집히다 못해 난리가 났을 터였다. 사실 리욘이 지금 이 상황에 병원 응급실에 앉아 보고나 받고 있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전하, 이제 그만 왕궁으로 돌아가십시오.”

    결국 제이는 자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전 괜찮습니다. 이야기 들으셨지 않습니까. 이제 봉합만 하면 되니까, 빨리 가 보십시오.”

    “이제 봉합만 하면 되니 그거까지 보고 가지.”

    “전하.”

    그냥 가십시오. 제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하께서 그렇게 지켜보고 계시면 의사도 손이 떨려서 제대로 뭘 못합니다. 그러니 절 위해서라도 이제 그만 왕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에이나르가 기다렸다는 듯 “맞습니다.” 하고 맞장구 쳤다.

    “이만큼 지켜보셨으면 된 겁니다. 나머지는 의사에게 맡기고 이제 그만 왕궁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는 사이 다시 에이나르의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어 댔다. 한숨을 쉬며 응급실을 나선 에이나르는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돌아왔다.

    “벌써 기자들 몰려오기 시작했답니다.”

    “전하.”

    어서 가십시오. 제이는 재차 말했다.

    결국 리욘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대 혼자선 움직이지 마. 곧 경호부대가 도착할 테니 반드시 같이 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따 오스파크에서 보지.”

    리욘은 제이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응급실을 나섰다.

    얼마 안 있어 상처 봉합을 맡은 의사가 들어왔다. 응급실 호출을 받고 내려왔다는 성형외과 전문의는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제이의 어깨와 팔의 상처를 꿰매 주었다.

    일차적인 처치가 모두 끝나자 제이는 다시 구급차를 타고 오스파크 국립 병원으로 향했다. 구급차 안에는 제1 특별 경호 중대 대원 여섯 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유브의 말에 따르면 나머지 대원들은 오스파크 국립병원에서 대기 중이라고 했다.

    오스파크에서 대기 중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대위님, 맙소사.”

    니나는 구급차에서 내리는 제이를 보자마자 신음했다.

    “왜 하필 또 어깨예요.”

    자기가 더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는 니나에게 제이는 부러 웃으며 “그래도 그때보단 덜 다쳤는데요.” 하고 말했다.

    “한 이삼 주 정도면 다 아물 상처예요.”

    사실 입원까지 할 필요도 없다고 하자 니나는 “그건 의사가 결정할 문제죠.” 하며 한숨을 쉬었다.

    제이는 곧바로 12층 입원실로 향했다. 일단 진통제와 수액을 맞으며 안정을 취한 다음, 저녁 무렵에 다시 필요한 검사들을 할 예정이었다.

    “대위님, 혹시나 해서 물어 보는 건데요.”

    진통제와 수액이 들어있는 팩을 링거 폴에 걸며 니나가 말했다.

    “임신 가능성 있어요?”

    “네…?”

    제이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임신 가능성 있냐고요.”

    아, 다른 뜻 있어서 물어 보는 거 아니에요. 니나는 손을 저었다.

    “당연한 절차예요. 진통제든 뭐든 약 투여 전에는 당연히 물어 봐야 하는 거예요. 왜요, 가능성 있어요?”

    “아뇨, 그건 아닌… 잘 모르겠습니다.”

    제이는 여전히 당황한 상태로 대답했다.

    “그런데 아마 아닐 거예요.”

    “확실하지 않다는 거죠?”

    니나는 조금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링거 폴을 뒤로 밀며 “일단 검사부터 하죠.” 하고 말했다.

    “혈액 검사 준비 좀 해 줘요.”

    니나의 말에 간호사가 네, 하며 얼른 입원실을 나섰다.

    “뵈이틴에서는 아예 얘기도 안 했죠?”

    그럴 거예요. 니나는 본인이 먼저 대답했다.

    “그 사람들은 대위님이 제노스라는 거 모르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제이는 재차 말했다.

    “그건 검사해 보면 알겠죠.”

    니나의 말과 동시에 입원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녀가 제이의 팔에 솜을 문지르고 주삿바늘을 꽂는 동안 니나는 말없이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혈액 채취가 끝나자 간호사는 곧바로 다시 입원실을 나섰다.

    “검사 결과는 오늘 중으로 나올 거예요.”

    니나는 링거 폴에 걸려있는 진통제를 빼내며 말했다.

    “그동안 진통제를 안 맞을 수는 없으니까, 일단은 임산부도 맞을 수 있는 걸로 바꿔 줄게요.”

    큰 의미는 없지만요. 니나는 짧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녀는 정확히 세 시간 만에 자신의 말을 번복하게 됐다.

    “2주째네요.”

    어쩌면 3주째일 수도 있고요. 니나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말했다.

    “남자 제노스는 월경 증세라고 할 만한 게 따로 없어서 날짜 가늠하기가 힘드네요. 뭐, 초음파 검사해 보면 알겠죠. 아기집이 보이면 3주라고 생각하면 돼요. 안 보이면 2주고.”

    “…….”

    “대위님?”

    내 말 듣고 있어요? 니나의 말에 제이는 “아, 네.” 하고 대답했다.

    “당황스럽죠.”

    니나가 한숨처럼 웃으며 말했다. 제이는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황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솔직히…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라서요.”

    그야 관계를 계속 가지긴 했지만 배란 유도제도 뭣도 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르몬제건 뭐건 아무것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얘기했잖아요. 한번 임신하고 출산을 하고 나면 몸이 바뀐다고. 대위님은 이제 난임도 뭣도 아니에요. 그리고 원래 유산 직후가 임신이 가장 잘 되는 시기예요. 자궁이 제일 깨끗한 상태니까요. 다만 임산부 몸에 무리가 가니까 최소 3개월 후에 아이를 가지길 권하는 건데….”

    어쩐지 꼭 리욘을 책망하는 듯한 말투였다. 제이는 다급히 말했다.

    “아뇨, 이건 전하의 잘못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이렇게 될 줄 모르셨을 겁니다. 내가 계속 약을 안 먹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연히 임신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말했고요.”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대위님이 전하를 위해 변명하는 모습을 다 보고.”

    반농담조로 말한 니나는 그러고 보니, 하고 덧붙였다.

    “3개월이 지나긴 했네요. 그때가 9월 초였고 지금이 12월 말이니까요. 이 정도면 거의 4개월째라고 봐도 되죠, 뭐.”

    짐짓 너그러운 투로 말하는 것도 잠시, 니나는 금세 심각한 표정이 되어 제이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일단 대위님이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보통 이 시기, 그러니까 임신 1주에서 3주까지의 시기요. 이 시기의 약물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All or None, 이라는 표현을 써요. 아예 유산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런 문제가 없거나. 왜냐하면 이제 막 착상하는 단계라 배아가 손상을 받으면 그냥 죽어 버리거든요. 못 버틴단 소리죠. 그 얘기는 반대로 말하면 일단 생존해서 무사히 착상하기만 하면 끝이란 거예요.”

    대위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위님은 오늘 뵈이틴에서 바르는 마취제도 사용했고, 진통제와 항생제도 사용했어요. 만약 이게 문제가 된다면, 다른 거 없어요. 그냥 유산이에요. 그리고 만약 유산이 안 된다면? 그럼 그냥 그걸로 끝이에요. 그 약물들이 배아에게 미치는 영향은 제로라고 보면 돼요. 즉 약으로 인한 기형이라든가, 기타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뜻이죠.”

    거기까지 말한 니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말을 고르는 듯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들고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문제는 이거예요, 대위님. 오늘 일로 대위님은 유산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어요. 꼭 약물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래요. 여러 가지 일이 있었잖아요? 당장 출혈이 그렇게 심했는데, 영향이 전혀 없을 순 없다고 봐요. 아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요, 대위님. 난 유산 가능성이 70% 이상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이제 대위님이 선택을 해야 하는 거예요. 니나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유산할 거, 빨리 중절 수술을 한 다음에 마음 편히 치료에 전념할 것인지, 아니면 혹시 모르니 좀 더 지켜볼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거죠. 참고로 전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이건 대위님이 선택할 문제니까요.”

    선택이라.

    제이는 소리 없이 뇌까렸다.

    한참 후 그는 니나를 향해 말했다.

    “미안한데, 닥터 블리스… 생각할 시간을 좀 줄 수 있을까요.”

    니나는 그런 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작게 미소 지었다.

    “지울 생각 없군요.”

    제이는 고개를 숙였다. 오랜 시간 링거 바늘을 꽂고 있느라 파랗게 부어오른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지우는 게 맞는 거겠죠.”

    아마 리욘도 그렇게 말할 거다. 지금은 지우는 게 맞는 거라고. 어차피 시그니가 있으니까. 이런 상황에 굳이 몸 상해 가며 아이를 낳을 필요는 없다고, 게다가 이미 유산 확률이 높은 상태라면 더욱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고 치료에만 전념하는 게 좋다고 그는 말할 것이다. 제이 역시 그게 옳은 결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아이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니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이는 부인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 지금 뱃속의 아이가 그때 그 아이는 아니라는 건. 그 아이는 이미 죽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제대로 존재하지도 못했다. 그때는 아직 심장도 뭣도 없을 때였으니 아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있는 건 아마도 그때 꾼 꿈 때문일 것이다. 일부러 찾아와서 인사까지 하고 떠났던 아이의 모습이, 리욘보다 자신과 더 닮았던 그 얼굴이 계속 뇌리에 남아서, 그래서.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아요.”

    “대위님. 그건 대위님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물론 이번도 그렇고요.”

    “알아요.”

    “전혀 모르는 눈친데요.”

    작게 한숨을 쉰 니나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진통제, 임산부용으로 하길 잘했네요.”

    어차피 큰 의미는 없다지만 그래도 All에 다가갈 요인은 하나라도 줄이는 게 좋으니까요.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그녀는 말했다.

    “그럼 이만 쉬세요, 대위님.”

    무조건 마음을 편히 갖는 게 중요하다고 니나는 거듭 당부했다.

    물론 제이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밤 아홉 시가 다 되어 수잔이 시그니를 데리고 병원에 왔다. 다행히 시그니는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어쨌거나 옷으로 어깨와 팔의 붕대만 가리면 겉으론 큰 이상이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병원에 왔다는 건 어딘가에 병이 났다는 이야기란 걸 아이는 잘 알고 있었다. 계속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묻는 아이에게 제이는 전에 다친 곳이 조금 덜 나아서 마저 치료하러 온 거라고 둘러댔다.

    “그럼 궁에는 언제 가는 거야?”

    “글쎄. 열 밤 정도 자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나 많이 자야 돼?”

    시그니는 왕궁에 두고 온 로키가 벌써 보고 싶은 듯했다. 그러면서도 왕궁으로 갈 거냐고 물으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제이랑 있을 거야. 다부지게 말하더니 잘 시간이 되자 알아서 세수까지 마치고는 제가 전에 쓰던 방으로 가 냉큼 침대 위에 올랐다.

    “잘 자, 제이. 잘 자, 수잔.”

    손까지 흔들어 보인 뒤 푹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는 걸 보고서야 두 사람은 문을 닫고 나왔다. 제이는 응접실로 나오자마자 텔레비전을 틀었다. 어딜 틀어도 긴급 소식을 전하는 뉴스 채널이 나오고 있었다. 내용은 모두 동일했다. 오늘 있었던 사냥 대회에서 총기 오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왕비가 부상을 입어 중태에 빠졌으며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이다, 경찰에서 사고와 관련해 조사를 진행 중인 가운데 왕실에서는 예정대로 1월 3일에 대관식을 거행할 것임을 공식 발표했다, 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사망으로 안 내보내고 중태로 내보낸 거야?”

    소파에 앉으며 수잔이 말했다.

    “그래야죠. 사망이라고 하면 대관식 못 치러요. 장례식이다 뭐다 해서 한 달 이상 미뤄야 할걸요.”

    “이미 죽은 거 본 사람들 있지 않아?”

    “입단속 시키겠죠.”

    하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한 두 명도 아니고, 현장에만 15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물론 왕비의 시체를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길어야 열흘 정도일까. 아마 그쯤이면 세간에 이미 왕비의 사망소식이 파다하게 퍼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열흘이나 갈까.”

    “일주일, 아니, 닷새만 가도 괜찮아요.”

    애초에 리욘도 길게 숨길 생각은 없는 듯했다. 숨긴다고 해서 숨겨질 사안도 아니었고. 일단 대관식을 무사히 치르는 게 목표이므로 그때까지만 사람들의 입을 봉하면 되는 거였다. 대관식만 끝나고 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왕실에서 먼저 발표를 할 확률이 높았다. 오랫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있던 왕대비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노라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이미 대관식도 다 치렀겠다, 새로운 국왕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잔뜩 부풀어 혼수상태의 왕대비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심지어 새 국왕이 왕세자이던 시절부터 대립각을 세워온 계비였다. 오래전에 사망한 제1 왕자의 죽음과도 관련해 여러 가지 소문을 몰고 다녔던 그녀인 만큼, 그 죽음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안도하며 기뻐하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었다.

    “뭐, 그렇게 되면 다행이긴 하지. 다행이긴 한데….”

    수잔은 잠시 말을 멈췄다. 곧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닌 거잖아, 그렇지?”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대답 따위는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정도로 자명한 사실이었다.

    “앨런이 언제 알게 되느냐가 관건이지.”

    “앨런은….”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앨런은, 아마 금방 알게 될 거예요.”

    “그래?”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이 있는 눈치였어요. 아마 왕비파 귀족 중에 한명이 아닐까 싶지만.”

    “그럼 지금 벌써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네.”

    “그럴 수도 있죠.”

    수잔은 골치 아프다는 듯 혀를 찼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의 소리를 낮추던 그녀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그런데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왕비가 먼저 널 죽이려고 했다고. 정당방위였어.”

    “그런 거 생각 안 할 거예요.”

    제이는 차분히 말했다.

    “그 사람에게 중요한 건 리우지엔이 죽었다는 사실 뿐이니까요. 우리가 약속을 깼다고만 생각하겠죠.”

    “먼저 약속을 깬 건 왕비야.”

    “그렇게 말해도 믿지도 않을 거고, 설령 믿는다고 해도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았느냐고 도로 원망할 확률이 높아요.”

    “환장하겠군.”

    수잔은 정말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걔 지금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지 않아? 자기가 지금 뭘 어떻게 해 봤자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리욘만 죽는 게 아니잖아. 자기도 죽을 수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 거 아냐.”

    “그걸 아니까 더 망설일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 차라리 몸이라도 멀쩡한 상태였다면 본인의 남은 날을 위해서라도 더 냉정하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앨런은 지금 그런 생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본인이 오래 못 살 거란 사실을 아는 눈치였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남은 모든 힘을 긁어모아 리우지엔의 목숨을 보장받고자 했던 것이다. 파비안 백작과 클로리넨 남작을 죽이고 나머지 귀족들을 일으켜 가면서까지 그가 원한 건 단 하나였다. 리우지엔을 살려 둘 것. 절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 것. 그녀가 손가락 하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난 정말 모르겠다. 아무리 사랑이 어쩌고 해도 결국은 내가 아닌 남인데, 그렇게까지 맹목적일 수가 있는 건지.”

    수잔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보지 못했으니까. 앨런의 그 미소를.

    “아름답다는 뜻의 한자를 두개 써서 메이메이라고 읽습니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한 미소였다. 그 시절의 리우지엔에 대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앨런은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곤 했다.

    “지금도 예쁘지만 어릴 땐 더 예뻤거든요. 연구소에서 처음 봤을 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아니, 선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때 제이는 깨달았다. 앨런에게 리우지엔은, 메이메이는, 자신에게 있어 리욘과 같은 존재였다는 걸. 그녀는 앨런이 지옥 같은 연구소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앨런은 리우지엔이 있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연구소에서의 생활도, 그리고 삶 자체도.

    그런데 그 유일한 버팀목이, 삶의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소멸해 버렸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지켜주고 싶었던 소중한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앨런의 심정이, 제이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앨런은, 아마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버티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

    “2주차가 맞나 봐요. 아직 아기집은 안 보이네요.”

    젤이 묻은 탐촉자로 배 위를 느리게 문지르며 니나는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모니터에 비친 자궁은 아직 깨끗하기만 했다.

    “임신이 맞긴 한 건가요?”

    제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모니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론이죠. 엊그제 피검사 결과 확인했잖아요. 어제 소변 검사 결과도 양성으로 나왔고요.”

    “그건 그렇지만.”

    뭔가를 말하려던 제이는 곧 입을 다물었다. 눈치 빠른 니나가 “왜요, 아직 아무런 증상이 안 나타나서요?” 하고 물었다.

    “당연한 거예요, 대위님. 이제 겨우 2주째잖아요. 아직 착상 단계라구요. 전에도 바로 증상이 나타났던 건 아니었잖아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시그니 때는 6주가 지나서야 처음으로 몸의 변화가 감지됐고, 능력치의 향상을 실감한 건 3개월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지난번의 경우에도, 아마 4주차 정도는 됐을 거예요. 테스트기에는 안 나타났지만 배란일을 따져 보면 그래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직 착상도 제대로 안 됐는데 벌써 증상이 나타날 리가 만무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안 믿겨서.”

    제이는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럴 수 있죠. 니나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쯤이면 아마 아기집이 보일 거예요. 그럼 슬슬 실감이 나겠죠. 참, 전하께는 아직 말씀 안 드렸죠?”

    안 드린 게 아니라 못 드렸다고 해야 옳다. 말을 할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이틀 전 뵈이틴 병원에서 헤어진 뒤로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리욘은 오스파크에서 보자고 말했지만 결국 그는 그날 병원에 오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해서 12층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부터 했더니 그나마도 에이나르가 받았다. 개인 전화를 에이나르가 받았다는 건 그만큼 리욘이 바쁘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어제는 아예 전화도 하지 않았다. 해 봤자 못 받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분간은 그냥 말씀 안 드리려고요.”

    니나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언제 유산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다 이제 괜찮다는 진단이 떨어지면 그때 말할 생각이었다.

    “만약 유산이 되면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는 거고요.”

    “그래요. 그것도 한 방법이죠.”

    그런데 왠지 마음 놓아도 될 것 같아요. 기계의 전원을 끄며 니나가 말했다. 제이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수건을 집어 들며 말했다.

    “사실 유산을 할 거였으면 어제 오늘 중으로 증상이 나타났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 기미가 없는 걸 보면 의외로 문제없이 착상이 된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뭐, 정확한 건 다음 주가 되면 알 수 있겠지만요.”

    일단 기대는 하지 말고, 그렇다고 아예 포기하지도 말고 차분히 기다려보자는 니나의 말에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가 장비의 선을 정리하는 동안 니나는 마른 수건으로 제이의 배에 묻은 젤을 닦아 주었다.

    “그런데 대위님, 오늘 열이 좀 있네요.”

    “오후부터요.”

    “아마 상처 때문일 거예요. 해열제는 맞았나요?”

    “…맞아도 되는 건가요?”

    “내키지 않는다면 권하진 않을게요.”

    니나는 제이의 상의를 내려 주며 말했다.

    “하지만 임산부에게 안전한 약도 있으니까, 안 되겠다 싶으면 말하세요. 약도 약이지만 열이 더 높아지면 그쪽이 더 위험할 수도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저녁에 다시 한 번 들를게요.”

    니나와 간호사가 돌아간 뒤 제이도 병실에서 나왔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있던 수잔이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뭐래?”

    “2주차 맞다고요.”

    “그렇군.”

    수잔은 퍽 복잡한 표정이었다. 말은 안하지만 내심으로는 임신이 아니길 바란 모양이었다. 이유를 아는 만큼 제이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걱정 마요. 어떻게든 되겠죠.”

    “그렇겠지.”

    여전히 복잡한 얼굴로 말한 뒤 수잔은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뉴스에서는 올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할 생각으로 한껏 들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연말이고 연초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난히 즐겁고 행복한 표정으로 리포터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토록 즐거운 모습으로 새해를 기다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내년에는 바야흐로, 새로운 국왕이 탄생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새해 소망보다도 새 국왕에게 거는 기대를 먼저 이야기하며 에시르의 발전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다. 의식 불명 상태의 왕비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새로운 국왕과, 그가 이끌어 갈 새로운 내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

    열은 저녁까지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제이는 니나의 말대로 해열제를 맞은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주사를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효가 바로 나타나는 건 아니었다. 제이는 꽤 오랫동안 뒤척였다. 어깨와 팔의 통증까지 더해져 선잠이 들었다가 금세 깨곤 했다. 깊이 잠들지 못해서인지 잠깐씩 눈을 붙일 때마다 꿈을 꿨다. 꿈의 내용은 모두 제각각이었는데, 실제로 겪었던 과거의 한 장면을 마치 VCR로 재생하듯 그대로 반복하는 꿈도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얼토당토않은 상황들이 이어지는 꿈도 있었다. 그리고 전자와 후자가 교묘하게 섞여 더욱 헷갈리게 만드는 꿈도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꾼 꿈이 그랬다.

    꿈속에서 제이는 아홉 살이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옆에 스테이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이시는 제이와 같은 3세대로 동갑내기 친구였다. 스테이시는 아홉 살 가을에 죽었다. 약 부작용으로 봄부터 이미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해 여름엔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아있지가 않았다. 꿈속에서 스테이시는 두꺼운 비니를 뒤집어쓴 채,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운동장에서 도지 볼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는 그 옆에 앉아 운동장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실은 다른 아이들과 같이 공놀이를 하고 싶었지만 스테이시가 외로울 것 같아 함께 있어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나란히 앉아있기만 할 뿐이었다.

    “방금 알렉세이가 반칙을 했어.”

    불쑥 스테이시가 말했다. 알렉세이는 그들보다 두 살이 많은 3세대 러시아인이었다. 워낙에 덩치가 크고 성격이 괴팍해서 제멋대로 게임을 진행시켜도 아무도 말리질 못했다. 제이는 고개를 들어 운동장을 바라봤다. 알렉세이가 어디 있나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점심시간의 운동장은 늘 그렇듯 사람이 너무 많아 도무지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E병동과 점심식사가 겹치는 바람에 알렉세이만큼 덩치 큰 사람들도 많았다. 결국 제이는 알렉세이를 찾길 포기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던 그림을 마저 그리기 위해 다시 돌멩이를 집어 드는 찰나였다.

    “왜 여기 있어?”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제이는 고개를 들었다. 키가 큰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이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가 누군지 알았다.

    “안 놀아?”

    리우지엔의 말대로였다. 밝은 햇살 아래에서 본 남자의 눈동자는, 어두운 곳에서 볼 때와는 딴판이었다. 짙은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의 눈동자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정한 온기를 담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요?”

    제이는 남자에게 물었다.

    “난 너무 지쳐서.”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 남자는 무척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키에 비해 너무 마른 몸이 안쓰러웠다. 게다가 왼쪽 팔마저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선, 그래도 남자는 자신을 보며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재스퍼!”

    누군가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높고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잠깐 뒤를 돌아보더니 이내 제이를 향해 말했다.

    “난 이만 가야 할 것 같다. 친구가 기다려서.”

    남자는 제이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리며 인사했다.

    “안녕, 제이드.”

    ***

    이마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 제이는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고 있었다. 아마 체온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아직도 다 내리지 못한 열 때문인지 상대방의 손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차가운 건 체온 만이었다. 늘 그렇듯 이마를 더듬는 손길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했다. 덕분에 제이는 어둠 속에서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

    목이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전하.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부르자 리욘이 “이런.” 하며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깨운 건가.”

    더 자도록 해. 이불을 끌어 올려 주며 말하는 리욘에게 제이는 아뇨, 하고 여전히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요.”

    젖은 옷이 찝찝해서 아까부터 계속 자다 깨다 하던 중이었다고 하자 리욘은 그래? 하고 되묻더니 그제야 병실의 불을 켰다.

    “샤워도 못 할 텐데 옷만 갈아입어야 하나.”

    “수건으로 대충 닦으면 되니까요.”

    리욘은 몸을 일으키는 제이를 도와주며 그렇군, 했다. 그가 침대에 부착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병실의 문이 열리고 대기 중이던 간호사가 들어왔다.

    “환자가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찝찝하다고 하는데.”

    리욘의 말에 간호사가 얼른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잠시 후 두 명의 간호사가 병실로 왔다. 그녀들의 손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와 여러 장의 수건, 그리고 새 환자복이 들려 있었다.

    간호사들이 땀에 젖은 제이의 옷을 벗기기를 기다려 리욘이 말했다.

    “닦는 건 내가 하지.”

    두 명의 간호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닦아 주겠다고.”

    그는 이미 수트까지 벗은 상태였다. 와이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며 그는 간호사들에게 명령했다.

    “부르기 전까진 밖에서 기다리도록.”

    “알겠습니다.”

    간호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뒤 얼른 병실을 나섰다.

    …괜찮은 걸까.

    제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이 의외로 리욘은 능숙하게 수건을 적셔 꾹 물기를 짜 냈다. 아직도 김이 오르는 뜨끈한 수건을 들고 침대로 다가온 그는 제이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조심스레 등을 닦으며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네, 하고 대답했다.

    “땀을 많이 흘렸나 보군.”

    “열이 좀 있어서요.”

    “그러게. 아직도 뜨거워.”

    젖은 수건을 목덜미 쪽에 갖다 대며 리욘은 작게 혀를 찼다. 그대로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닦아 내리며 그는 말했다.

    “베아테는 사형에 처해질 거다.”

    “네…?”

    제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리욘을 쳐다봤다.

    “왜 놀라는 거지?”

    당연한 거 아닌가. 오른쪽 어깨에 감겨 있는 붕대를 피해 견갑골 주변을 천천히 닦으며 리욘이 심상한 투로 말했다.

    “왕비를 시해하려 한 잔데.”

    그 왕비가 리우지엔이 아닌 자신을 가리키는 말임은 문맥만 살펴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아직 왕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리욘은 쉬이 수긍했다.

    “하지만 곧 왕비가 될 사람이란 걸 베아테는 알고 있었어. 그걸 뻔히 알면서도 죽이려고 들었으니 왕비 시해 미수죄를 적용해도 문제없지. 국왕 일가 살해, 살해 미수, 모두 반역죄에 해당한다.”

    반역죄인에겐 예외 없이 사형이 선고됐고. 식어 버린 수건을 들고 일어서며 리욘은 말했다.

    그제야 제이는 베아테를 구급차에 태우려는 사람들에게 리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누구든 죄인을 도와주는 자가 있다면 공범으로 간주하고 같은 처벌을 내리겠다. 리욘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막연히 베아테를 총기 오발 사고의 주범으로 만들 계획인가보다, 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반역죄를 적용시킬 생각이었던 거다.

    하긴, 단순 과실 치사였으면 죄인이라고 칭했을 리가 없지.

    또한 헌병대를 부를 필요도 없었을 거고, 공범 운운하며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줄 이유도 없었을 거다.

    “리우지엔도 마찬가지야.”

    새로운 수건을 들고 온 리욘은 이번엔 제이의 팔을 닦아주며 말했다.

    “주동자는 베아테가 되겠지만 가담자로 같은 처벌을 받게 될 거야. 대관식이 끝나는 대로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베아테는 법정에서 자기 입으로 증언하게 되겠지. 자신이 왕비와 짜고서 널 해하려 했던 거라고.”

    …그래서 안 죽이고 살려뒀던 거구나.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리욘의 성격상 그 자리에서 바로 베아테를 죽였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 굳이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만 쏘고 말기에 그래도 옛정이 있어 목숨은 살려 주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스스로 법정에서 자백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니. 이쯤 되면 자신이 무른 건지, 리욘이 지나치게 철저한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물론 사안이 사안인 만큼 베아테가 직접 제 입으로 사실을 인정하게끔 하는 게 가장 뒤탈이 없긴 할 터였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이런저런 의혹과 더불어 무수한 뒷이야기들이 생겨날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만.”

    제이의 말에 리욘이 “무슨 뜻이지?” 하고 물었다.

    “그렇잖습니까. 왕비는 이미 죽었고, 베아테 양도 굳이 반역죄를 적용시키지 않아도 지금 드러난 죄목만으로도 징역은 불가피합니다. 소르스테인 가는 이미 몰락했다고 봐도 무방하니 그냥 이대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미 대관식 직전에 왕비가 사고를 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일단 사망이 아닌 중태로 발표가 난 상황이고, 또 당장 눈앞에 닥친 대관식이 더 큰일이다 보니 사람들도 그와 관련해선 굳이 입을 열지 않는 분위기지만 대관식 이후 사망 발표가 나면 그때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거기에 더 충격적인 소식을 연달아 터뜨리는 게 전하께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서요. 아무래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면 결국 화살은 전하께로 향하게 될 테니까요. 특히 왕비가 모의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제이.”

    문득 리욘이 손을 멈췄다. 그리고,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거라고 생각하나?”

    차분한 리욘의 음성에 그제야 제이는 아차, 했다. 뒤늦게야 자신이 속 모르는 소릴 떠들었음을 깨닫고 그는 얼른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귀가 화끈거렸다. 그래, 자신이 아는 걸 리욘이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나 이쪽은 그의 전문 분야였다. 어떤 식으로 일을 마무리 짓는 게 본인에게 더 이득일지는 누구보다 리욘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알면서도 그가 베아테와 리우지엔에게 반역죄를 물어 이미 죽은 사람에게조차 벌을 내리기로 마음먹은 건 결국 자신 때문이었다.

    “이 나라의 왕비가 될 사람에게 총을 겨눴던 자다. 이대로 왕가의 묘지에 묻히게 둘 수는 없지. 응당한 처분을 받아야 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리욘이 말했다. 그 말에 제이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말 그런 거라면, 자신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거라면 더더욱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주제넘는 간언으로 그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 상황이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리욘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이 진심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리욘이 다시 팔을 닦아주며 “다만,” 하고 말했다.

    “네 말대로 가뜩이나 어수선한 분위기에 그런 이야기들이 연달아 터지면 국민들의 충격이 더 클 테니, 시기에 대해선 좀 더 고민을 해 보도록 하지.”

    그 말은 즉, 일단은 발표를 보류하겠단 소리였다. 그렇다는 건 그 사이에 얼마든지 결정을 재고할 수도 있단 이야기였고. 물론 리욘의 성격상 번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만큼이나 양보를 했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감사합니다.”

    제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면서도 어쩐지 송구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몸을 다 닦은 리욘이 젖은 수건을 내려놓고 새 환자복을 집어 들며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한숨 쉬는 리욘의 말에 제이는 그가 이끄는 대로 옷에 팔을 꿰면서도 뭐가 말입니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 마음만 생각한다고 하고선 내 입장만 생각할 줄 알았다고.”

    네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혀를 차며 리욘은 제이가 옷을 마저 입는 걸 도와주었다.

    “장담하는데, 몇 년 만 지나면 그럴 거야. 폐하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국민들 입장도 좀 생각을 해 보라고. 그때가 되면 이젠 내 입장조차도 생각을 안 하는 거지.”

    “뭘… 몇 년 후의 이야기를 벌써 하십니까.”

    제이는 당황해서 말했다.

    “눈에 빤히 보여서 그래.”

    왜냐하면 넌 정말 좋은 왕비가 될 거거든. 리욘은 퉁명스레 말했다.

    “하지만 좋은 배우자는 안 될 것 같아.”

    국왕의 좋은 배우자가 결국 좋은 왕비가 되는 게 아니었나. 제이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그 둘이 다른 거라면 좋은 배우자보다는 차라리 좋은 왕비가 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아무렴 그 편이 더 많은 사람에게 좋을 테니까…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굳이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리욘이 기다렸다는 듯 말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좋은 왕비의 마인드지 좋은 배우자의 마인드는 아니라고. 잔뜩 투덜거리며 말할 게 분명했다.

    그때 문득 펑, 소리와 함께 창밖이 환하게 밝아졌다. 멀리서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제이가 놀란 얼굴로 창문 쪽을 바라보자니 리욘이 말했다.

    “1월 1일이군.”

    제이는 그제야 아, 하고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긴 바늘과 짧은 바늘이 모두 정확히 숫자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해의 첫 순간이 막 지나간 것이다.

    “제이.”

    리욘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제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곧 입술이 겹쳐졌다.

    “Godt Nyttår(Happy new year).”

    가볍게 닿았다 떨어질 뿐인 키스를 전하며 리욘이 말했다. 제이는 어쩐지 가슴이 조금 뻐근해져 오는 기분을 느끼며, 자신도 리욘을 향해 말했다. Godt Nyttår.

    “전하의 해가 밝았군요.”

    “그래. 앞으로 몇 십 년은 계속 나의 해겠지만.”

    웃으며 말한 리욘은 제이의 환자복 단추를 하나하나 잠가 주었다. 마지막으로 접혀진 목의 깃을 바로 펴 준 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난 이만 가 봐야겠군.”

    “지금, 말입니까?”

    당황해서 묻자 리욘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재킷을 집어 들며 그래, 하고 말했다.

    “사실은 새해를 같이 맞이하고 싶어서 온 거라.”

    아…. 제이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병원에나 와 있을 때가 아닌 사람이었는데. 정말 새해가 시작되는 순간을 함께 맞이하고 싶어서 그 바쁜 와중에 잠깐 시간을 내 들른 모양이었다.

    “또 오지.”

    나오지 마.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며 말한 리욘은 곧 병실을 나섰다. 그러는 사이에도 창밖에서는 쉴 새 없이 폭죽이 터졌다. 펑, 펑 소리에 맞춰 밤하늘은 연신 환해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즐거운 함성이 차가운 밤공기를 타고 멀리까지 퍼졌다. 제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새 다시 어두워진 바깥 때문인지 유리창에는 자신의 얼굴밖에 비치지 않았다. 밤하늘만큼이나, 아니, 밤하늘보다 더 어두운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욘은 마지막까지 앨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리우지엔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앨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건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리욘이 그의 존재를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건 이 병실 앞에 배치해 둔 경호 병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두 달 전 앨런과 협상을 맺으면서 철수시켰던 제1 특별 경호 중대를 그대로 다시 불러들였다. 그건 결국 리욘도 예상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앨런의 다음 행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앞에선 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그거였다. 자신이 관여하지 못하게 할 셈인 거다. 앨런을 처리하는 일에.

    제이는 두 달 전, 이 입원실을 나서며 리욘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다 잊을 거라고. 이 방을 나서는 순간, 녀석이 네 혈육이라는 사실을 잊을 거라고. 그러니 너도 다시는 내 앞에서 관련 사실을 언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아주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잊지 못한 모양이다. 누구보다도 잊고 싶었을 텐데, 결국 잊지 못했나 보다. 그러니 이 와중에도 자신을 배려하느라 앨런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하긴 잊을 수가 없겠지.

    어떻게 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카이옌을, 제 형을 죽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 언제까지고 리욘은 잊지 못할 것이다. 제 형을 죽인 사람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형이라는 사실을.

    어느덧 창밖이 잠잠해졌다. 준비한 폭죽을 모두 다 쏘아 올린 건지 더 이상 밤하늘에 불꽃이 터지는 일은 없었다. 사람들의 환호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새벽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이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둠 속에서 벨이 울리는 순간 제이는 직감했다.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처음 보는 번호일 테니까.

    “Godt Nyttår.”

    아니나 다를까,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인사했다.

    제이는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앨런.”

    대답 없는 남자에게 제이는 먼저 물었다.

    “지금 어디야.”

    “어디겠어.”

    지옥이지. 앨런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곧바로 그는 제이에게 물었다.

    “왜 약속을 어겼지?”

    “우리가 약속을 어긴 게 아니야.”

    리우지엔이 먼저 총을 겨눴어. 제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앨런이 말했다. 그건 이유가 안 돼.

    “죽일 필요는 없었어.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는 한이 있더라도, 죽이지는 말았어야 했어.”

    “앨런.”

    “머리에 구멍이 났다지?”

    그럼 리욘도 똑같은 꼴을 당해야지. 안 그래? 너무나 차분해서, 그래서 더 심장을 내려앉게 만드는 그의 말에 제이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앨런 기다려.”

    전하께는 잘못이 없어. 제이는 곧바로 말했다.

    “날 살리기 위해 그런 거야. 리우지엔이 날 죽이려고 했다고.”

    “…….”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려면 날 그렇게 만들어야지. 그게 계산이 맞지 않아?”

    나 때문에 죽은 건데. 제이는 거듭 말했다.

    앨런은 대답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이따금 짧게 숨을 삼키고 내뱉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제야 제이는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한참 뒤에야 앨런이 말했다.

    “너를 죽이는 게 낫겠어. 그게 리욘에게는 훨씬 더 끔찍한 지옥일 테니까.”

    “그래, 그러니까,”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죽이겠어.”

    “…….”

    제이는 숨을 삼켰다. 가슴을 날카로운 것으로 찔린 듯했다. 그 끔찍한 통증에 하마터면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입술을 깨물며 제이는 전화기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앨런.”

    대답 없는 앨런을 향해 제이는 말했다. 앨런, 듣고 있겠지.

    “지금 네 상태론 무리야. 전하께 손도 한 번 못 대 보고 죽을 거라고.”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앨런, 제발.”

    제이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주먹 쥐고 있던 손에 어느새 흥건하게 땀이 배어나 있었다.

    “쓸데없는 짓 말고 차라리 떠나. 그나마 힘이 있을 때 도망가라고.”

    “도망가라고?”

    “그래.”

    “어디로?”

    “어디로든 상관없어. 그냥 멀리, 최대한 멀리 떠나.”

    정말 떠날 마음이 있다면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였다.

    “네가 함께 가 준다면 그렇게 할게.”

    “……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네가 나와 같이 떠나면 되겠어. 그쪽이 리욘에게도 훨씬 더 큰 복수가 될 테고 말이야.”

    그냥 내뱉는 말이라고 하기엔 목소리가 진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 그 병원에서 나와, 제이. 나와 함께 떠나자.”

    앨런이 다시 한 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앨런.”

    “네 딸도 함께 가자. 그게 네 딸에게도 더 나을 거야. 왕궁에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알잖아. 사람들은 아무도 너희를 이해 못해. 괴물로만 본다고.”

    그러니까 우리끼리 살자. 앨런은 웃으며 말했다. 웃으며, 그는 울고 있었다.

    “우리는 다 알잖아. 우리끼린 말 안 해도 서로 다 알잖아. 그러니까, 같이 떠나자. 제이.”

    제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로는 리욘에게 더 큰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앨런이 함께 떠나자고 하는 진짜 이유를 제이는 알고 있었다.

    “대관식 날 보자, 제이. 우리 처음 이야기 나눴던 곳 기억하지? 그곳에서 만나자. 대관식 시작하기 전까지 기다릴게. 그때까지 기다리다가, 네가 오지 않으면 곧바로 대관식장으로 갈 거야. 그곳에서 리욘을 죽일 거야.”

    “앨런.”

    “알아. 넌 오지 않겠지.”

    그래도 기다릴게. 앨런은 웃으며 말했다.

    “안녕, 제이드.”

    짧은 인사를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

    “끊어졌습니다.”

    경시감이 말했다. 경시 총감은 곧바로 옆에 앉은 수사관을 바라봤다. 추적기의 화면만 노려보고 있던 수사관이 곧 헤드셋을 벗으며 고개를 저었다. 놓쳤다는 뜻이었다. 낮게 한숨을 내쉰 경시 총감은 곧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함께 고개를 숙이는 경시감의 옆에서 에이나르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도중에 눈치 채고 끊은 것 같죠?”

    “아니.”

    리욘은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채 답했다.

    “도중에 눈치를 챈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약속 장소를 정확히 지칭하지 않고 처음 이야기 나눴던 곳, 이라고 둘만 알 수 있는 내용으로 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긴. 천하의 앨런이 전화 추적에 대해 생각을 못 했을 리가 없죠.”

    에이나르가 맥 빠진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리욘은 거기에 대해선 별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니만큼 절대 제이에게 전화를 걸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후자의 예상이 빗나간 게 다소 유감스럽긴 했지만, 역시 그 외의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들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대관식 날 잡아야겠군요.”

    제4 특별 경호 중대의 지휘관인 올레우그 중위가 말했다. 그가 골치 아프게 됐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찰나 테이블 위에 놓인 리욘의 휴대폰에서 불이 반짝였다. 얼른 전화기를 집어든 에이나르가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뒤 말했다.

    “제이입니다. …안 받으실 거죠?”

    리욘은 말없이 에이나르를 쳐다봤다. 알면서 왜 묻느냐는 뜻이었다. 에이나르가 얼른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왜 안 받으시는 겁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는 경시감에게 리욘은 도로 “왜 받아야 하지?” 하고 물었다.

    “어차피 할 말이라곤 뻔한데.”

    그래, 뻔했다. 아마 제이는 말하겠지. 앨런에게 전화가 왔노라고. 그가 대관식 날 전하를 해칠 생각을 하고 있으니 가급적이면 대관식을 비공개로 바꾸고 중계만 내보내라고, 그렇게 말할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 덧붙일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먼저 만날 것을 제의해 왔으니 자신을 그쪽으로 보내 달라고. 그럼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전하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확실히 매듭짓겠노라고.

    “아니, 그걸 마다할 이유가 있습니까? 대위께서 협조만 해주신다면 일은 훨씬 쉬워집니다. 대관식 시작 전에 끝낼 수도 있어요. 굳이 대위님 손에 피를 묻힐 일도 없을 겁니다. 대위님께서 그 자의 주의를 끄는 동안 우리가 붙잡으면,”

    “지금 내 비가 될 사람을 미끼로 쓰자는 건가.”

    리욘이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비스듬한 시선으로 보며 말했다. 경시감이 뜨악한 표정으로 “아닙니다, 전하.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고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냥, 그냥 말 그대로 아주 조금만 협조를 해 주신다면,”

    “절대 안 돼.”

    리욘은 딱 잘라 말했다. 소파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하며 그는 자신의 방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분명히 말했다.

    “제이는 그날 병원에서 나와선 안 된다. 성당 근처에도 와서는 안 돼. 앨런을 잡는 데에 절대 관여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전하.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저희도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하고 경시총감은 짐짓 우려스럽다는 어투로 말했다.

    “오히려 혈육이니만큼 대위께서 그를 잡는 데 더욱 앞장서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이후에 말이 퍼져 이와 관련된 이상한 억측이나 오해가 발생하면 그 또한 대위께는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자네들만 입을 다물면 말이 퍼질 일이 뭐가 있겠나.”

    리욘은 일축했다. 곧바로 그는 자신의 옆에 모여 앉아 있는 경시청 관계자들을 향해 “핑계는 그만 대지.” 하고 말했다.

    “이미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제노스 하나 잡으려고 병원에 입원해있는 사람까지 불러들여야 하나. 그럴 거면 자네들이 지금 그 옷을 입고 그 모자를 쓰고 여기에 앉아 있는 이유가 뭔가.”

    경시청 관계자들이 찔끔하여 고개를 숙였다. 더는 변명 거리도 찾지 못한 그들이 낮게 헛기침만 하며 딴청을 피우는 사이 에이나르가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죠.” 하며 얼른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대관식을 비공개로 진행하는 겁니다만.”

    “그건 안 된다고 이미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아, 그러니까, 지금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거지만 전하께서 원치 않으신다고요. 네.”

    아무렴, 그건 안 되죠. 에이나르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도와주려는 듯 맞은편에 앉아있던 로겐이 “기본부터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통상적인 방법이라면 역시 사방에 저격수를 배치하고, 참관객으로 위장한 경호 인력들을 투입시키는 건데요.”

    “그게 의미가 없는 게, 앨런은 모니터를 통한 공격이 가능해요.”

    에이나르가 그동안 모아둔 데이터를 뒤적이며 말했다.

    “국왕 폐하의 입원실에 침입도 안 하고 호흡기를 뗄 수 있었던 게 그래서였거든요. 상황실 CCTV를 보면서 움직인 거죠.”

    “지금은 못 해.”

    리욘은 짧게 말했다. 에이나르가 네?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못 한다고요?”

    “그래. 원래 S급이 아닌데 약으로 무리하게 능력을 끌어올린 타입이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될 경우 컨디션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고 제이는 말했다. 그리고 앨런은 지금 겨우 숨만 붙어있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녀석이 마지막으로 죽인 게 파비안 백작과 클로리넨 남작인데, 두 사람 다 녀석과 직접 접촉한 흔적이 있었지.”

    만약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죽이는 게 가능했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두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추적당할 걸 알면서도 제이에게 전화를 건 걸 보면, 정신 감응 능력도 전 같지 않은 게 분명했다. 혹은 그 경호 병력을 뚫고 가까이 다가갈 만큼의 여력이 없다는 뜻이거나.

    “그럼 접근전이 불가피하겠군요.”

    “그렇지.”

    대신 가까이 접근만 하면 순식간이야. 리욘은 차분히 말했다.

    “그러니 일단 접근을 못 하게 하는 걸 최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 뚫렸을 때를 대비해서 대책을 마련해야지.”

    “전하의 뒤로, 그러니까 단상 위에 저격수를 배치하는 건 어떨까요.”

    “내 뒤에 총을 든 시커먼 저격수들이 서 있는다고?”

    그 광경을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보여 주라고? 리욘의 물음에 에이나르가 “그럼 급한데 어떡합니까….” 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돼. 그리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 대관식은 연방 5개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 120개국에 동시에 생중계 될 예정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대관식 도중에는 아주 작은 소동도 일어나선 안 돼.”

    그런데 하물며 단상 위에 저격수라니. 리욘은 기가 차서 웃었다.

    “차라리 내가 총을 들고 서 있는 게 낫지 않겠어? 보기도 훨씬 깔끔할 거고, 맞추기도 웬만한 저격수들만큼 맞힐 자신 있는데.”

    “음, 그거 멋있겠는데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멋진 대관식이 될 거라고 로겐이 진지하게 말하는 사이 에이나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하고 우는 소릴 했다.

    “저격수도 안 되면 원래 세우기로 한 경호원들밖에 못 서 있는데 그 사람들이 앨런을 발견하고 총을 뽑아 들면 너무 늦는다구요.”

    “그래. 거기다 실수로 잘못 맞추기라도 하면 그땐 끝장인 거지. 대관식에서 국왕의 경호원이 쏜 총에 참관객이 맞는 희대의 불상사가 발생하는 거야. 그걸 전 세계의 사람들이 생중계로 지켜본다고 생각해 봐.”

    리욘의 말에 로겐이 “그럼 즉 전하의 말씀은.” 하고 정리에 나섰다.

    “결국 총 없이, 다른 피해자도 없이, 정확하게 딱 앨런 한 사람만, 그것도 아주 작은 소동도 일으키지 않고 소리 없이 죽여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죄송합니다만, 그게 가능한 사람이 대위님 말고 또 있습니까?”

    조심스러운 로겐의 물음에 에이나르가 먼저 대답했다.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도 제이밖에 없어요.”

    “아니지. 한 사람 더 있잖아.”

    에이나르가 네? 하며 눈을 크게 떴다.

    “한 사람 더 있다고요?”

    “그래.”

    “도대체 누구….”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리던 에이나르가 아! 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스 맥나이트!”

    그래, 그 사람이 있었지, 라고 하듯 환한 표정으로 외치는 것도 잠시, 이내 에이나르는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수락할까요. 제가 봤을 땐 그분이 전하를 엄청….”

    “싫어해.”

    그것도 아주 많이. 리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락할거야. 내가 싫은 것 이상으로 제이를 많이 아끼는 사람이니까.”

    “그럴까요? 그럼 이따 날 밝는 대로 한번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에이나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웃고 있는 표정을 보니 벌써 수잔이 앨런을 잡아온 것 마냥 마음을 놓은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비록 나이는 많으나 슈퍼 프로바이더 출신의 S급 제노스였고, 심지어 오랫동안 용병단을 이끌어온 백전노장이었다. 평소의 앨런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그로서는 그녀의 상대가 안 될 터였다. 하지만….

    “어시스트가 필요할 거란 말이지.”

    리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옆에서 올레우그가 “어시스트요?” 하고 물었다.

    “그래. 시간을 벌 장치가 필요해.”

    결국 관건은 수잔이 언제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앨런을 찾아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찾아내기만 하면 그 즉시 사살이 가능할 터였으니까. 그러니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수잔이 그를 찾아내는 사이, 만에 하나라도 앨런이 먼저 이쪽을 향해 공격을 해 버리면 끝이었으므로.

    “그럼 역시 제이를….”

    “헛소리 말고.”

    일축한 뒤 리욘은 눈을 감았다. 손끝으로 소파의 암레스트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앨런… 앨런이라.

    일단은 그에게 안겨진 핸디캡을 파악해야 한다. 그는 현재 왼쪽 팔이 없다. 하지만 어차피 손을 써서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므로 그다지 큰 핸디캡이라곤 할 수 없다. 물론 달아날 때는 힘들겠지. 그 몸으론 빨리 뛸 수도 없을 것이다. 원래 체력이 약했으니까. 그리고 지병이 있었다.

    “앨런이 평소에 어디가 안 좋다고 했지?”

    리욘은 눈을 뜨며 말했다.

    “다 안 좋았지만… 특히 편두통이 굉장히 심하다고 했죠.”

    “편두통?”

    “네. 그래서 늘 진통제를 상비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특이 사항이 있었지? 리욘의 물음에 에이나르가 “그리고.” 하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특이 사항이랄까. 옷차림이 좀 그랬죠. 발데마르 공의 비서 자격으로 공무에 참석할 때가 아니면 궁에 드나드는 옷차림치곤 후줄근하다 싶게 입고 다녔어요.”

    “그러고 보니 늘 어두운 색 재킷에 모자를 쓰고 다녔지.”

    “네. 그 너덜거리는 버킷 햇이요.”

    버킷 햇이라. 리욘은 다시 손끝으로 소파의 가죽을 두드렸다. 그래, 앨런은 정장 외의 옷을 입을 때면 늘 버킷 햇을 썼다. 옷은 바뀌어도 모자는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결국 그 옷차림의 핵심은 모자라는 이야기다. 그 모자를 쓰기 위해서 위화감이 없는 옷차림을 하고 다녔을 확률이 높다.

    “사람들이 모자를 쓰는 이유가 뭐지.”

    “네? 그야 멋을 내려고 쓰는 거지만… 그게 아니라면 원래 용도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거겠죠.”

    햇빛을 가리기 위한 모자.

    그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에이나르, 지금 당장 의료실에 가서 앨런이 처방 받았던 진통제 목록 가지고 와 봐.”

    리욘의 명령에 에이나르가 “아, 네.” 하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의료실에서 돌아온 그는 리스트와 함께 타이레놀 한 상자를 건넸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거의 타이레놀 밖에 안 받아 갔어요. 그 외 자잘한 위장약이나 진경제 같은 걸 받아 간 적이 있긴 하지만 손에 꼽을 정도고요. 타이레놀은 거의 일주일에 두세 통씩 받아 갔어요.”

    리욘은 타이레놀 상자를 개봉했다. 복용법이 적힌 안내문을 꺼내 약의 효능‧효과에 대한 설명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길게 적힌 설명문을 읽어 내려가던 그의 시선이 어느 한 단어에서 멈췄다.

    Keratalgia(각막통).

    “…….”

    리욘은 말없이 손에 쥔 안내문을 구겼다.

    ***

    제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수잔. 지금 나온 대관식 안내 뭐예요?”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수잔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혹 자신이 잘못 들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제이의 마음의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앵커가 방금 전의 안내를 다시 한 번 반복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내일 있을 대관식 장소가 킬피르 대성당에서 델링그 광장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데요, 대관식이 거행되는 시간은 기존과 같습니다. 정오에 시작되어 두 시간 동안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번 대관식은 총 120개국 동시 생중계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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