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22)

“좋아요, 제이. 자. 1분만 더 하면 됩니다. 잘하고 있어요.”

트레이너 클로이가 타이머를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저 1분만 더 하면 됩니다, 란 소릴 지금 몇 번째 하고 있는 건지. 클로이의 문제는 바로 저거였다. 그냥 처음부터 몇 분이 남았는지 확실히 말해 주면 될 텐데, 1분만 더, 1분만 더, 하면서 5분이 넘도록 끌고 간다는 거. 지금도 저 1분만 더, 소리를 벌써 세 번은 한 것 같다. 그래서 도대체 몇 분이 남았다는 건지. 제이는 이를 악물며 TRX(Total Resistance Excercise)의 손잡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힘차게 끌어당기자 바닥에 거의 누워 있던 몸이 수직에 가깝게 바로 세워졌다.

오늘의 메인 훈련은 TRX를 이용한 Low Row 운동이었다. 쉽게 말하면 천장에 매달린 끈을 붙잡고 뒤로 완전히 누웠다, 끈을 잡아당기며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하는 훈련이었는데 간단한 것 같지만 코어 근육을 사용하는 운동이라 처음은 쉬워도 몇 분만 지나면 온몸이 다 부들부들 떨려 왔다. 끈을 붙잡고 있는 팔과 어깨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만! 자, 됐어요. 자세 바로 하고요.”

마침내 클로이가 타이머를 누르며 외쳤다. 제이는 끈을 내려놓고 후들거리는 팔을 주물렀다.

“이리와요, 제이. 어깨 풀어 줄게요.”

클로이가 마사지 베드를 두드렸다. 다가가 눕자 클로이는 천천히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괜찮죠? 통증 없고?”

“네. 괜찮습니다.”

“팔 돌려 볼래요?”

제이는 양쪽 팔을 차례로 돌려 보았다. 역시 어깨의 통증은 없었다. 방금 전의 운동으로 팔뚝이 조금 뻐근하게 저려 올 뿐이었다.

“좋아요. 오늘은 더 이상 팔 움직이지 말아요.”

푹 쉬고 내일 보자는 말로 클로이는 오늘의 훈련이 모두 끝났음을 알렸다.

“고마워요, 클로이.”

인사하며 제이는 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사지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락카룸에서 옷을 챙겨 샤워실로 향하며 제이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역시 이곳 재활 센터로 오길 잘했다고.

먼저 입원했던 오스파크 병원에도 재활훈련과가 있긴 했다. 아마 시설 자체는 그곳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야 에시르 최고의 국립 병원이었으니까. 의료진의 수준이나 장비 같은 건 다른 곳과 비교가 안 될 수준일 터였다. 하지만 거긴 너무 불편했다. 두 달이나 입원해 있으면서 담당 의료진들 뿐 아니라 병원 내 모든 직원들이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재활 훈련과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행여 재활 도중에 다치지는 않을까, 도로 덧나지는 않을까 조심 또 조심하며 공 쥐기부터 시작하자고 할 게 뻔했다. 그래서 오스파크 병원으로 가라는 리욘의 말에도 극구 고개를 저으며 직접 인터넷을 뒤져 바로 이곳 알로프 재활 훈련 센터를 찾았다. 사설 재활 센터로 스포츠 재활 전문이다 보니 훈련 메뉴라든가 트레이너들의 방식이 일반인에게는 조금 하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이에게는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조금 더 강도를 높여도 좋을 것 같았지만 이제 겨우 3주차라 한 달은 채우고 말을 해 볼 생각이었다.

샤워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고 로비로 나왔다. 데스크에서 회원카드를 받아 돌아서다 척추 전문 트레이너 베르겐과 마주쳤다.

“제이, 오늘 훈련 벌써 끝났어요? 아쉽다. 조금만 일찍 올 걸.”

누가 봐도 게이인 베르겐은 제이가 센터에 온 첫날부터 대놓고 추파를 던져 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은근슬쩍 추파나 던지는 수준이라 다른 말없이 적당히 상대하며 거리를 두는 중이었다.

“오늘은 TRX 트레이닝이었거든요.”

“저런, 힘든 거 했네요. 안 아파요?”

슬쩍 팔을 만지려 드는 걸 자연스레 피하며 “전혀요.” 하고 말했다. 머쓱했는지 베르겐은 괜히 로비 한쪽에 설치된 대형 TV 화면을 바라보며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아, 왕세자는 여전히 잘 생겼네. 도대체 결혼은 언제 할라나.”

“대관식 끝나고 하겠지. 애인도 있다는데.”

데스크 직원인 안나의 말에 베르겐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애인이라니? 누구? 설마 뵐룬트에서 터뜨린 그 남자 애인 말하는 거야?”

뵐룬트(Wölund)는 왕실 사람들을 포함하여 국내외 샐럽들의 가십을 다루는 대표적인 타블로이드지다. 지난달 말, 뵐룬트는  본지 독점 공개! 왕세자의 숨겨진 연인, 그 충격의 실체 라는 요란한 타이틀로 기사를 실었는데, 내용인 즉 왕세자는 양성애자이며 그에겐 이미 오래된 남자 연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변이 없는 한 그 남자 연인과 결혼을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연인의 신변 보호를 위해 공식적인 입장 발표 전까지는 꽁꽁 입을 닫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도 점쳤다.

“나 참, 믿을 게 없어서 그딴 삼류 잡지에 난 기사를 믿어?”

베르겐이 코웃음을 쳤다. 그럴 만도 했다. 뵐룬트는 항간에 떠도는 모든 가십과 루머를 여과 없이 실어 대는 걸로 유명한 찌라시였으니까. 심지어 판매고를 올리기 위해 사실무근의 루머도 날조하여 실어 대기 일쑤였던지라 거기 실린 기사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냐. 거기 은근히 진짜도 많이 실린다고. 그리고 걔네가 암만 겁이 없어도 그렇지 설마 왕실 얘기를 그렇게 함부로 하겠어? 왕실 모독죄로 고소당하려고?”

안 그래요, 제이? 안나가 난데없이 동조를 구해 오는 바람에 제이는 당황해서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얼버무렸다. 여기서 뭐라고 더 의견을 덧붙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 또 다른 직원 호르네가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열심히 해요?”

“글쎄, 안나가 왕세자가 그 남자 애인이랑 결혼 할 것 같다잖아.”

“아, 그 얘기였구나.”

나도 들었어요. 호르네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대리모 사이에서 낳은 애도 있다던데요?”

“누가 그래?”

기겁하며 묻는 베르겐에게 호르네가 “인터넷에서요.” 라고 했다.

“제가 가는 웹사이트에 그런 글이 올라와 있더라고요.”

“뭐야, 난 또.”

베르겐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왜요? 인터넷 소문 무시하면 안 돼요.”

“그래? 그럼 내가 그 남자 애인이라고 하면 믿을래? 그 웹사이트에 글 올리면 믿을 거야?”

“그야… 당연히 안 믿죠.”

호르네의 말에 베르겐이 발끈해서 “뭐야, 똑같이 인터넷에 올라온 글인데 왜 그건 안 믿는다는 거야?” 하고 따지기 시작했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믿을 걸 믿어야지.”

안나가 코웃음을 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세잔데 아무나 만날까 봐? 남자를 만나든 여자를 만나든 똑같아. 집안, 인물, 학벌, 재산, 기타 등등 다 따져보고 만나지, 아무나 안 만나. 절대.”

“맞아요. 아마 무슨 귀족 가문 아들이거나, 아니면 대기업 총수 아들이거나 그럴 거예요. 어쩌면 배우나 모델일 수도 있고요.”

“내 생각엔 평민은 아닐 것 같아.”

그렇죠, 제이? 다시 안나가 제이를 향해 물었다. 제이는 이번에도 난감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

“진짜? 인터넷에 그런 소문이 났대? 어떻게?”

“어떻게는요.”

제이는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왕실에서 낸 소문인데 어떻게고 자시고 할 게 뭐 있겠어요.”

“아, 그런 거야?”

뜨악한 얼굴로 되묻는 것도 잠시, 수잔은 곧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잡지에 기사 낸 것도 왕실이라고 했지.”

먼저 루머인 척 가장해 일부 진짜 내용을 흘린다. 그 후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 더할 건 더하고 뺄 건 뺀 다음 확정된 공식 입장을 발표한다. 이건 왕실에서 미디어를 이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법이었다.

“그런데 왜 대리모가 낳은 아이라고 한 거야?”

“왕세자와 남자 애인 사이에 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들은 충격이 클 거예요. 그런데 심지어 그 남자애인이 제노스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난리 나려나?”

“난리까지는 아니겠지만 당장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좀 걸리겠죠. 그나마 대리모를 통해 낳은 아이라고 하면 거부감은 덜 할 테니까요.”

그렇게 해서 둘 사이에 이미 아이가 있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게 할 생각인 거다. 지금은 인터넷에 떠도는 뜬소문 정도로만 돌아다니겠지만 아마 곧 뵐룬트나 혹은 비슷한 성격의 가십지에 좀 더 자세한 내용의 기사가 실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삼류 가십지가 쓴 소설 따위 안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느새 기사에 실린 내용을 반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어느 날 갑자기 왕실의 공식 입장이 떴을 때 역시, 라고 한숨은 쉴지언정 아노미 상태에 빠지지는 않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무엇을 알리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 알리느냐는 것이었다.

“지금 몇 시죠?”

제이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으며 물었다.

“다섯 시 십 분 전이야. 오, 몸 많이 좋아졌는데.”

“멀었어요.”

새 니트를 걸친 뒤, 반쯤 열려 있는 옆 방문을 향해 외쳤다.

“시그니, 다섯 시야.”

“걔 지금 로키랑 노느라 정신없어.”

로키는 이제 생후 3개월이 된 사모예드로, 열흘 전 시그니가 처음 교리 수업을 받던 날 리욘이 선물로 보낸 강아지였다. 시그니는 요즘 밥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로키만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수업 시간은 잊지 않았는지 곧 방문이 열리고 노트를 손에 쥔 시그니가 구르듯 달려 나왔다.

“준비 다 했어?”

준비라고 해 봤자 노트와 연필 한 자루가 다였지만 그래도 물어 봤다. 시그니는 응! 하며 양손에 쥔 노트와 연필을 흔들어 보였다. 잘했어. 제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마침 복도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던 마르타 수녀가 시그니와 제이를 발견하곤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안녕, 시그니.”

“수녀님! 나 기도문 벌써 두 개나 외웠어요!”

시그니는 마르타를 보자마자 자랑부터 했다. 기특하다는 듯 미소 짓는 마르타에게 시그니를 맡기며 제이는 말했다.

“제일 짧은 거 두 개 외웠어요. 식사 전 기도와 영광의 기도였나, 아무튼 그거 두 가지요.”

“어머, 우리가 하루 동안 가장 많이 드리는 기도네요.”

잘했어요. 마르타는 시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시르는 여느 북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16세기 무렵부터 루터교를 국교로 지정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이를 따르도록 했다. 그러다 이천 년 대에 이르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면서 국교를 폐지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국민의 89% 이상이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임을 자부하는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였다. 당연히 국왕과 그의 가족들은 복된 성가정의 표본으로서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대부분의 왕족은 성인의 본명을 따 이름을 짓거나, 아니면 자신의 세례명을 미들 네임으로 하여 본인이 신실한 기독교인임을 증명해야 했다. 시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그니는 내년 봄에 세례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3개월간 일주일에 두 번씩 킬피르 대성당 소속의 마르타 수녀에게 성공회의 교리에 대해 배워야 했다.

두 사람이 교리 수업을 위해 기도의 방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본 뒤, 제이는 자신도 서재로 향했다. 제이도 내년 봄에 시그니와 함께 세례를 받을 예정이었다. 그래야 성당에서 혼배 예식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는 교리 수업은 따로 받지 않기로 했다. 리욘이 제이의 교리 수업 거부에 마음대로 하라고 고개를 끄덕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시그니가 교리 수업을 받는 동안, 제이는 그보다 더 골치 아픈 수업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안녕, 제이. 오늘 재활 훈련은 잘 다녀왔나요?”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르트만이 반갑게 인사했다. 그가 앉아있는 책상 의자 맞은편에는 뢰벤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왕궁의 비서들이었다. 하르트만은 리욘의 비서고 뢰벤은 전 왕세자비, 즉 베아테의 비서였다. 혼배 예식을 치르기 전까지 앞으로 남은 3개월 동안 제이는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 에시르의 왕비로서 행해야 할 모든 임무와 의무와 책임과 맡겨진 과제들에 대해 익혀야 했다.

“오늘은 왕실 행사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죠.”

하르트만이 커다란 서류봉투에서 뭔가를 꺼내며 말했다. 왕실에서 발행한 2022년도 달력이었다.

“이런 것도 있나요.”

“물론이죠. 매년 300만부 이상씩 팔리고 있어요.”

하르트만의 말에 뢰벤이 “우리 국민 3명 중에 한 명은 이 달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죠.” 하고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달력에는 1월에서 12월까지 왕실의 주요 행사들과 기념일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당장 첫 번째 월요일인 1월 3일에는 새 국왕의 대관식이 있었고 22일에는 어업의 날 기념행사가 있었으며 29일에는 신년 감사회가 있었다. 그 외에도 선왕인 루카스 왕의 탄생일과 이제 왕대비가 될 리우지엔의 생일, 제3 왕자에서 이제는 대공이 될 프란츠의 생일 등 국왕 일가의 생일을 비롯해 건국 기념일, 독립 기념일, 헌법 제정 기념일, 연방 수립 기념일 등 각종 기념일들이 한 달 걸러 하나씩, 아니, 한 달에 두세 건씩 기재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왕실 주최 디너 파티와 후원 행사, 자선 모금을 위한 경매회 등은 달력에 적혀 있지도 않았다. 거기다 왕실에서도 참가해야 하는 각종 기업 행사와 문화 행사, 종교 행사들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일 년 내내 쉴 틈이 없었다.

달력의 페이지가 뒤로 넘어갈수록 제이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욘에게 속은 기분이었다. 이게 도대체 뭐가 좋은 자리라고 그렇게 뿌듯한 표정을 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네게 줄게.” 라고 한 건지.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돼서 지금 이렇게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는 있는데, 정말이지 돈 주고 하래도 못할 짓 같았다.

“괜찮아요, 제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제이의 안색을 살피며 뢰벤이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이죠. 안 괜찮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계속 하죠. 제이는 펜을 돌리며 부러 쾌활한 어투로 말했다. 따지려면 리욘에게 따져야지 죄 없는 비서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자, 그리고 드디어 12월인데요.”

하르트만이 달력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며 말했다. 다행히 12월에는 별다른 행사가 없었다. 25일 크리스마스와 29일 리욘의 생일이 전부였다. 내년부터 12월 29일은 국왕의 탄생일로서 법적인 국가 공휴일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12월 29일은 리욘이 그나마 소소하게 축하받으며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생일이었다. 물론 그래 봤자 어디까지나 왕실 기준의 소소함이었지만.

“이날, 사냥 대회 열리는 거 알고 있죠?”

“들었습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이미 그렇지만, 아마 12월 20일이 넘어가면 대관식 준비로 왕궁 전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예정이었다. 때문에 거의 모든 연말 행사 초대장에 일찌감치 불참 회신을 보내둔 상태였다. 물론 왕실 주최의 행사도 대폭 건수를 줄였다. 원래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는 모든 귀족들을 불러 성대한 만찬회를 열고, 만찬회가 끝나면 다 같이 킬피르 대성당으로 이동해 전야 미사에 참석하게 되어 있었는데 올해는 그 만찬회도 없애 버렸다. 어차피 29일에 사냥 대회도 열리겠다, 그날 대회 끝난 후 시상식을 거행할 때 리욘의 생일 기념 파티를 겸한 만찬회도 함께 열기로 한 것이다. 매년 12월 중순에 열리던 사냥 대회를 굳이 월말로 미룬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냥 대회와 크리스마스 기념 만찬회, 왕세자의 생일 기념 파티를 한 번에 해치우기 위해서였다.

“아마 이날, 엄청 많이들 올 거예요.”

“그렇겠죠. 행사 세 개가 한꺼번에 열리는 셈이니까.”

“경제적이고 합리적이죠.”

웃으며 말한 뢰벤이 아참, 하고 다시 제이를 향해 물었다.

“사냥대회에는 참가할 예정이신가요?”

“저 말입니까?”

제이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게 가능하냐는 뜻이었다.

“부인들도 사냥에 참가 가능해요. 다들 추우니까 안 하는 것뿐이지.”

그래도 할 사람들은 해요. 하르트만이 옆에서 거들었다.

“부부가 같이 참가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부인이 남편 대신 참가하는 경우도 있고요. 현 왕비도 매년 참가하고 있어요.”

“베아테 양도 두어 번인가 전하 대신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요?”

제이가 묻자 뢰벤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요.”

하르트만이 “총이 워낙에 구식이라서 그래요.” 하고 웃었다.

“사냥에 소질이 없기도 했지만 총도 워낙에 낡은 거였거든요.”

“잠깐,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총 돌려받았나?”

뢰벤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총이요?”

“네. 베아테 양이 처음으로 전하 대신 참가하셨을 때 폐하께서 하사하셨던 건데… 이번에 물건 정리할 때 못 봤던 것 같아서요.”

총이라. 제이는 손가락으로 펜을 돌리며 신음했다. 굳이 돌려받아야 할 필요까지 있을까,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뢰벤이 말했다.

“전(前) 왕비 전하께서 쓰시던 총이었거든요.”

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은장식이 달린 건데, 그 은장식이 왕비 전하께서 직접 디자인까지 하셨던 거라서요.”

“그런 거라면… 돌려받아야겠네요.”

제이의 말에 하르트만이 혀를 차며 “일부러 이러는 거야, 분명해.” 하고 화를 냈다.

“벌써 몇 개째야. 이런 식으로 안 내놓고 간 물건이.”

제이가 알기로는 네 번째였다. 왕실에서 후원하는 빈민 구제 단체에서 감사의 뜻으로 직접 만들어 선물한 조각상부터 몇 만 달러를 호가하는 보석까지. 베아테는 이쪽에서 안 돌려받을 수 없는 물건들만 골라 자신의 가방 안에 집어넣고 가 버렸다. 보석은 그렇다 치고, 값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왕실에는 나름 의미가 깊은 물건들만 골라 가져갔다는 점에서 그 악랄한 성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건 제가 소르스테인 가에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뢰벤이 면목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

리욘은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왕세자궁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2022년도 왕실 달력을 보여 주며 도대체 이게 어디가 보상이냐고 물어보려던 제이는 말없이 그 계획을 포기했다. 오늘따라 코트를 벗으며 키스해 오는 리욘의 얼굴이 유난히 초췌해 보였기 때문이다. 거의 사흘 만에야 집무실에서 탈출한 셈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럼 바로 자기 침실로 가서 자면 될 텐데, 굳이 이 방으로 온 이유를 알 수가 없… 지는 않았다.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달력 얘길 꺼낼 수가 없었다.

“시그니 세례명, 결정했다면서.”

넥타이를 풀며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아, 네, 하고 대답했다.

“클로틸디스요.”

“클로틸디스?”

“저는 잘 모르지만 수녀님 말로는 어느 나라의 왕비였고 또 성녀였다고 하더군요.”

축일이 6월 3일이라고 하자 리욘이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그니의 생일과 같군.”

마르타 수녀의 말로는 이렇게 자신의 생일과 축일이 같은 성인의 이름을 따 세례명을 짓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고 했다.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

“시그니 한 클로틸디스 아그나르.”

욕실로 향하며 리욘은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해봤다. 그러더니 마음에 드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멋진데.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침대에 앉아 있는 제이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 성은 어머니 걸 따른 건가?”

샤워하는 내내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글쎄요.”

제이는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말했다.

“어머니 성이 그건 아닐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성을 모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름도 모르고요.”

“그래?”

리욘은 조금 놀란 듯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럼 그 성은 어떻게 얻게 된 거지?”

“아마 담당자 추천이었을 겁니다.”

“담당자?”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열 살에 출생 신고를 했으니까요.”

물론 자신만 그런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2세대와 3세대는 연구소가 폐쇄된 1998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이름과 국적을 얻게 되었다. 그 전에도 연구소 내에서 불리던 이름은 있었으나 성은 없었다.

“국적을 선택하면서 성도 같이 고를 수 있게 됐죠. 그래 봤자 다들 잘 모르니까, 해당 국가에서 가장 흔한 성씨가 뭐냐고 물어서 그중에서 고르는 식이었지만요.”

일본 국적을 택한 사람들은 거의 스즈키 아니면 타나카였다. 중국 국적을 택한 사람들은 왕, 리, 장, 세 가지 성 중에 하나를 골랐고 한국 국적을 택한 사람들도 이 아니면 김이었다.

“그런데 그 나라 언어로는 국가명이 한국이라고 그래서, 한(Han)이라는 성도 많이 쓴다고 하기에 그 성을 고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잘 모르니까 아무거나 해 달라고 했는데 그때 서류 작성을 도와주던 담당자가 한으로 하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된 거였군.”

“네. 별거 없죠.”

제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좋은 이야기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기가 차서 “도대체 뭐가요.” 하고 웃었다.

“어쨌거나 네가 그 성을 얻게 된 과정이라는 거잖아. 그리고 시그니 이름에 그 성이 들어가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 그럼 좋은 이야기지. 만약 시그니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면 교과서에 실릴지도 몰라. 여왕의 이름에 얽힌 유례, 라고 해서 말이야.”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는데 갖다 붙이기는 참 잘도 갖다 붙인다 싶어 피식 웃음밖에 안 나오는 제이였다.

“아무튼 그래서 제이드 한이 된 거였군.”

제이드 한. 리욘은 몇 번이나 그 이름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역시 제이가 더 어울려.”

제이는 리욘이 한사코 제이드보다 제이라는 이름이 더 좋다고 우기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앨런 때문이었다. 원래도 제이라는 이름이 더 좋다고는 했지만 제이드라는 이름을 앨런이 지어줬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더욱더 제이라는 이름이 좋다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고 있었다.

“저도 제이라고 불리는 게 더 좋습니다.”

그쪽이 더 익숙하거든요. 웃으며 말하자 리욘이 역시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짓더니 침대에 걸터앉으며 그 이름을 불렀다.

“제이.”

“네.”

“제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리욘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제이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시선을 내리며 네, 하고 답하자 다시 리욘이 불렀다.

“제이.”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입술이 포개어졌다. 제이는 눈을 감았다. 입을 조금 더 크게 벌리자 뜨거운 혀가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제 입속에서 능란하게 움직이는 혀를 쫓아 열심히 얽어 대는 사이 리욘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제이는 나직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핀란드에서 돌아온 이후로 거의 매일 하다시피 했으니까. 리욘이 집무실에서 밤을 새거나 일 때문에 못 들어온 날을 제외하고는 늘 했던 것 같다. 리욘의 말대로라면 허니문 기간이니 굳이 자중하거나 얌전을 뺄 필요는 없긴 했지만….

…안 피곤한가.

그게 제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보통 이틀, 사흘씩 잠도 못 자고 일만 하다 왔으면 바로 침대에 뻗는 게 예산데 리욘은 그런 게 없었다. 어떻게든 섹스는 꼭 했다. 가끔 정말 피곤해 보여서 오늘은 그냥 자겠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날에도 어김없이 키스부터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쓰러뜨리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다리 더 벌려 봐.”

재촉하듯 말하더니 그 새를 못 참고 자기가 직접 무릎을 잡아 양쪽으로 벌린다. 훤히 드러난 곳이 반쯤 젖어 있는 걸 확인하곤 곧바로 발기한 물건을 집어넣었다. 제이는 신음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괜찮아?”

“네.”

짧게 대답하며 제이는 리욘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느리게 문질렀다.

“그래도 조금만 천천히 하세요.”

“그러지.”

말하기가 무섭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제이는 한숨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아마 지금은 천천히 하라고 해봤자 들리지도 않을 거였다.

이십 대라서 이런 건가….

확실히 앞자리 숫자에 따라 몸의 기량이 확확 바뀌긴 한다. 그래도 분명 기초 체력은 자신이 더 좋다고 자부했는데. 이제는 그 말도 못하게 생겼다. 역시 재활이 끝나도 스포츠 센터는 꾸준히 다녀야겠다고, 제이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

“제이.”

베아테는 제이를 보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그렇죠?”

“…그런 것 같군요.”

제이는 썩 달갑지 않은 투로 인사하며 어깨에 메고 있던 스포츠 백을 콘솔 위에 내려놓았다. 반쯤 열려 있는 옆 방문 틈새로 시그니의 목소리와 더불어 귀에 익은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카엘이었다. 아이들은 강아지와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웬일로 직접 왔습니까.”

베아테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며 제이는 말했다.

“물건이 물건이니까요. 다른 사람을 보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베아테는 바닥에 놓여 있던 상자를 들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목에는 칩이 장착된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다 돌려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미안해요, 제이. 하지만 맹세코 일부러 가져간 건 아니었어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베아테는 태연히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안 열어 보나요?”

상자를 가리키며 베아테가 말했다.

“굳이 열어 볼 필요 있습니까.”

제대로 가지고 왔겠죠. 베아테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제이는 말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물건이 아니었다. 다른 물건들처럼 사람을 시켜서 보내면 될 걸 굳이 본인이 직접 들고 왔다는 건, 거기다 미카엘까지 데리고 왔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말하시죠.”

제이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뭘… 말인가요?”

베아테는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거 아닙니까.”

길게 시간 끌 필요 없으니 어서 이야기하라고 하자 베아테는 잠시 굳은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제이 말이 맞아요. 사실은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요.”

그게, 사실은 저…. 그녀가 어렵사리 말을 꺼내려는 찰나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뭐야?”

곧바로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베아테가 외쳤다.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문 밖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제가 알던 방의 주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놀란 눈치였다.

“들어와.”

베아테는 제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본인이 먼저 허락했다. 마치 이 방, 아니, 이 집의 주인마냥 굴고 있는 그녀를 제이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은쟁반을 든 사용인이 들어왔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는 동안 베아테는 테이블에 팔을 괸 채 오만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용인이 물러나자 그제야 베아테는 다시 제 두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는 겸손한 어투로 말했다.

“사실은 제이, 미카엘에 대해 부탁할 게 있어요.”

역시, 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미카엘을 다시 왕궁에서 거둬 줬으면 좋겠어요.”

“글쎄요.”

제이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아이가 원치 않을 것 같은데요.”

“그건 상관없어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제이는 멈칫했다.

“아이를 위해서 하는 부탁 아니었습니까…?”

“정확히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하는 부탁이죠.”

미카엘도 크고 나면 내게 고마워할 거예요. 베아테는 차분히 말했다.

“아무렴 이름만 공작가인 몰락 귀족의 성보단 그래도 왕가의 성을 이어받는 게 훨씬 나으니까요.”

비록 리욘과 베아테는 이혼을 했지만 미카엘은 아직 리욘의 장자로 아그나르 왕가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상태였다. 리욘이 친자 확인 소송을 건 게 아니기 때문에 법률상으로는 여전히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왕세손 자리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테가 왕궁을 떠나던 날, 미카엘도 왕궁을 떠나 소르스테인 가로 돌아갔다. 리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린 까닭이었다.

“알아요. 언젠가는 미카엘에 대한 친자 확인 소송 절차를 밟을 예정이란 거. 그러니까 일찌감치 데리고 가라고 한 거겠죠.”

언젠가는, 이라고 해 봤자 결국 5년 이내의 이야기였다. 아이들이 열 살쯤 될 무렵이면 슬슬 왕세자 책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

“리욘은 아마 그 핑계로 미카엘에 대한 친자 확인 검사를 실시할 거예요. 그리고 검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왕세손을 폐하고 시그니를 왕세녀로 봉할 생각인 거겠죠. 그건 상관없어요. 정말이에요. 왕세자 자리에는 욕심 없으니까.”

다만, 아그나르란 성은 앗아 가지 말아 줘요. 베아테는 무릎 위에 내려놓은 자신의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부탁했다.

“왕가의 사람으로만, 국왕의 아들로만 남게 해 줘요.”

네? 제이. 부탁이에요. 베아테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정말로 그것만이면 돼요.”

애원하는 베아테를 보며 제이는 이번에도 글쎄요, 라고 답했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뇨,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베아테가 재빨리 말했다.

“리욘은 당신 말이라면 다 들어 주잖아요.”

당신이 부탁하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확신에 차서 말하는 베아테를 보며 제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리는 찰나였다.

“어머니!”

벌컥 시그니의 방문이 열리더니 미카엘이 잔뜩 울상을 지은 채 뛰어나오며 외쳤다.

“나도 강아지 키울래요!”

미카엘은 베아테의 다리에 매달리며 말했다. 뒤늦게야 로키를 품에 안은 채 방에서 나온 시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미카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나도 강아지 키우고 싶어요. 강아지 사 줘요.”

그래도 왕세손이라고 일찍부터 왕실의 예법을 익히긴 한 모양이었다. 제 유모에게 패악을 부릴 때와는 딴판으로 말투가 단정했다. 물론 떼쓰고 억지 피우는 건 그때와 똑같았지만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렴.”

“나도 강아지 키울래요. 강아지 키우고 싶어요.”

“강아지 저기 있잖니.”

베아테가 시그니의 품에 안긴 로키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가서 같이 데리고 놀아.”

“싫어요. 저건 내 강아지가 아니잖아요.”

“미카엘.”

“내 강아지가 아니라고 못 만지게 한단 말이에요.”

제이는 방 한쪽에 서 있는 시그니를 쳐다봤다. 정말 그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이는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울먹이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미카엘이 자꾸만 콧잔등을 때리잖아. 그렇게 하면 아프다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계속 때려서, 그래서….”

시그니의 말에 베아테가 인상을 찌푸리며 “강아지 콧잔등을 왜 때려?” 하고 말했다.

“때린 거 아니에요! 훈련시킨 거예요.”

미카엘의 항변에 베아테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훈련을 네가 왜 시켜? 네 강아지도 아닌데.”

“그러니까 나도 강아지 사 달라고요.”

울먹이던 미카엘은 결국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큰소리로 울어 대는 아이를 보며 베아테가 한숨을 쉬었다.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러대던 그녀는 곧 시그니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시그니, 착하지? 미카엘이 로키랑 조금만 더 놀 수 있게 해 줄래?”

시그니가 머뭇거리자 베아테는 더욱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시그니는 오늘이 아니라도 늘 로키와 함께 놀 수 있잖니.” 하고 달랬다.

“그러니 오늘만 미카엘이 로키와 함께 놀 수 있게 해 주자. 응? 가엽잖니. 로키랑 놀고 싶어서 이렇게 우는데.”

베아테의 말에 시그니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천천히 걸어왔다. 그대로 조심스레 미카엘의 앞에 로키를 내려놓으려는 시그니를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시그니.”

시그니가 응? 하며 고개를 들었다.

“왜 미카엘에게 로키를 주려는 거야?”

제이는 테이블에 팔을 괴며 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는 아이에게 제이는 “네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하고 물었다. 그제야 질문의 뜻을 이해한 듯 아이는 잠시 망설인 끝에 말했다.

“아니….”

“그런데 왜 주는 거야?”

시그니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여전히 품에 강아지를 안은 채 눈치를 보듯 베아테와 미카엘 쪽을 쳐다보더니 이내 울먹이며 말했다.

“그치만, 미카엘이 로키랑 놀고 싶어 하니까….”

“미카엘이 놀고 싶어 하는 거랑은 상관없어.”

알겠어, 시그니? 제이는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네가 주고 싶으면 주는 거야. 그리고 주기 싫으면 안 주면 되는 거고. 미카엘이 로키를 데리고 노는 게 좋으면 줘도 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줄 필요 없어. 주고 나서 계속 걱정하고 후회할 거라면 주지 마.”

“그럼… 나 로키 안 줘도 돼?”

조심스레 묻는 시그니에게 제이는 물론이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키는 네 강아지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럼 나 안 줄래.”

얼른 말하며 시그니는 강아지를 더욱 꼭 품에 안았다. 그대로 한 발 물러서는 시그니를 보며 미카엘이 “뭐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주기로 했잖아! 같이 놀게 해 준다며. 빨리 줘어!”

“안 돼. 안 줄 거야.”

한발 더 물러서며 시그니가 말했다.

“로키 괴롭힐 거잖아. 안 줄 거야. 내 강아지야.”

“누가 네 거 아니래? 잠깐만 데리고 놀다 줄 거야!”

“그래도 안 돼.”

시그니는 단호히 말하더니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곧바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은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더니 암만 해도 문이 열리지 않자 결국 또 울음을 터뜨리며 제 엄마에게 달려왔다.

“어머니, 시그니가 문을 안 열어요. 문 열라고 해 줘요.”

울며 매달리는 미카엘을 향해 베아테가 잔뜩 짜증 섞인 목소리로 “네 일은 네가 좀 알아서 해!” 하고 외쳤다.

“지금 얘기 중이잖아. 그깟 강아지가 뭐라고, 정말.”

“베아테 양.”

“미안해요, 제이. 금방 그칠 거예요.”

베아테는 얼른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냥 떼쓰는 거예요. 안 된다는 거 알면 그치니까,”

“아뇨, 안 그쳐도 됩니다. 그대로 두십시오.”

어차피 더 할 얘기도 없으니까요. 제이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방금 당신이 한 말이 정답입니다.”

베아테가 네?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베아테에게 제이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방금 미카엘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뭘….”

“본인 일은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요.”

순간 베아테의 얼굴이 굳었다.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군요.”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돌아가십시오. 저는 전하께 어떤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제이는 짧게 인사한 뒤 돌아섰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는 제이를 향해 베아테가 “기다려요!” 하고 소리쳤다.

“기다려요, 제이.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요.”

허겁지겁 달려온 베아테는 무작정 제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탁해요, 제이. 제발요. 한 번만, 한 번만 리욘에게 말해 줘요.”

“베아테 양.”

“내가 이렇게까지 부탁하잖아요. 네? 한 번만요. 이번 한 번만이에요. 다시는 당신에게 이런 부탁 안할게요.”

“베아테 양.”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억지를 부리는 거죠.”

“제이.”

“그리고, 설령 당신이 부탁을 했다고 해도 그걸 내가 들어 줘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제이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베아테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곧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지키고 싶은 게 있다면 스스로 지키십시오.”

그렇게 말한 뒤 제이는 굳게 닫힌 시그니의 방문을 쳐다봤다. 다시 베아테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어린애도 하는 걸 당신은 왜 못합니까.”

베아테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달아오른 채 잔뜩 구겨진 얼굴로 제이를 노려보던 그녀는 곧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너한테야 쉽겠지.”

그야 넌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도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 베아테는 잔뜩 비아냥거렸다.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 머릿속까지 들여다보고 있잖아. 미리 다 읽어내고선 상대방이 원하는 말,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 주면 누군들 안 좋아하겠어. 안 그래?”

베아테의 말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정말 그런 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웃지 마.”

곧장 베아테가 소리쳤다.

“난 네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속이 뒤틀려 미칠 것 같으니까.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웃는 거야, 도대체.”

괴물 주제에. 베아테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네 그 잘난 능력도 결국 네가 괴물이란 증거밖에 안 되는 거야. 그런데 뭐가 잘났다고 늘 그딴 식으로 웃는 건지. 정말 볼 때마다 역겨워 미칠 것 같아.”

거침없이 말을 쏟아 낸 베아테는 잠시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곧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그녀는 말했다. 그래, 이제 됐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암, 내가 알아서 하고 말고.”

웃으며 말한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있는 미카엘에게 다가갔다.

“애초에 너 따위 찾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이의 손을 낚아채며 그녀는 말했다.

“처음부터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았어야 했어. 그렇지? 사람인 척하는 괴물을 붙들고 이야길 했으니 말이 통할 리가 있나.”

잔뜩 악에 받친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어떻게든 상처를 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제이의 앞에 퉤, 침을 뱉은 뒤 방을 나섰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마구잡이로 행동하는 그 모습에 제이는 외려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서서 웃고 있자니 방문이 열리고 수잔이 들어왔다.

“왜 그래?”

“뭐가요?”

“왜 그렇게 웃고 있느냐고.”

“아녜요, 아무것도.”

제이는 여전히 웃으며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쉰 뒤 굳게 닫힌 시그니의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시그니, 괜찮아?”

잠깐 문 좀 열어 볼래? 방문을 두드리며 묻자 잠시 후 살짝 문이 열리고 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미카엘 갔어?”

“응, 갔어.”

로키는 어때? 제이가 묻자 시그니는 방문을 조금 더 활짝 열어 안을 보여 줬다. 로키는 다행히 시그니의 침대 아래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자는구나.”

제이는 웃으며 말한 뒤 시그니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며 “이제 교리 수업 받으러 가야지.” 하고 말하자 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고 나와.”

“응.”

아이의 방문을 닫고 돌아서자 그 사이 테이블 의자에 앉은 수잔이 상자를 가리키며 “이건 또 뭐야?” 하고 말했다.

“총이요.”

“총?”

수잔은 눈을 크게 뜨더니 상자를 열어 보았다. 화려한 은장식이 달린 사냥총을 꺼내며 그녀는 이게 뭐야,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엄청 구식이네.”

“구식이죠. 벌써 한 이삼십 년 정도 된 물건이니까.”

“쓸 수는 있는 거야?”

“쓸 수야 있겠죠.”

끄덕이며 제이는 창가로 향했다.

“그런데 그냥 장식용으로 걸어 두는 쪽이 훨씬 잘 쓰는 방법일 걸요.”

“그래 보인다.”

그런데 누구 건데? 총을 도로 상자 안에 집어넣으며 수잔이 물었다.

“전 왕비… 전하의 어머니께서 쓰시던 총이래요.”

그 은장식도 직접 디자인까지 다 해서 만들어 붙인 거라고 하자 수잔은 그래? 라고 하며 다시 한 번 총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봤다.

“사냥 좋아했나 봐?”

“대회에 나가면 웬만한 귀족 남자들보다 더 많이 잡아 오셨대요.”

“흠, 리욘도 총 잘 쏜다고 하지 않았나?”

엄마 닮았나 보네. 수잔의 말에 제이는 아마도요,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너도 이거 들고 사냥 대회 나서게?”

“설마요.”

제이는 창틀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안 갈 거야?”

“모르겠어요. 그런데 만약 간다고 해도 사냥은 안 할 거예요.”

“그럼 왜 가? 그냥 가지 말지.”

“전하의 생일 기념 파티 겸이라서요.”

물론 기념 파티 만찬회는 사냥대회가 끝난 후 왕궁에서 이뤄지겠지만 그날 대회 자체가 리욘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생일 축하도 참 요란하게 한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혀를 차는데 내년부터는 아예 국가 공휴일로 지정돼 온 국민이 함께 축하할 예정이라고 하면 뭐라고 할지가 궁금해지는 제이였다.

“왕세자니까요.”

이제 곧 왕이 될 사람이기도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제이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커튼을 걷고 밑을 내려다보자 빠른 걸음으로 후원을 가로지르는 베아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꼭 쥔 채 뒷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 차를 그쪽에 세워 놓은 모양이었다.

“제이, 나 준비 다 했어!”

시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며 말했다.

“그래?”

제이는 커튼을 내리고 돌아섰다. 덕분에 그는 후원을 가로지르던 베아테가 잠시 걸음을 멈춘 걸 미처 보지 못했다. 한참 고민하던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돌린 것도, 그 방향이 왕비궁 쪽이라는 사실도, 제이는 결코 알지 못했다.

***

에시르 왕실의 사냥 대회는 의외로 그 역사가 꽤 깊었다.

“원래는 농가 피해를 막기 위해서 겨울철에 병사들을 산으로 올려 보내 여우를 잡게 한 거였어요.”

날이 추워지면서 먹이를 구할 수 없게 된 여우들이 산 밑으로 내려와 농가를 습격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8세기 초 러시아와 스웨덴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에시르는 스웨덴에 군사를 지원하게 되었고, 당장 겨울철에 여우를 잡을 병력이 부족해지자 당시 국왕이었던 가누토 4세는 전국의 귀족들에게 각자 동원할 수 있는 만큼의 하인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왕궁 바로 뒤에 위치한 그라니(Grani) 산에는 국왕이 직접 오르게 된 거죠. 백여 명에 가까운 귀족들을 이끌고 말이에요.”

전쟁이 끝나자 여우를 잡는 일은 다시 병사들의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라니 산만큼은 예외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그곳의 여우를 사냥하는 건 국왕과 그 신하들의 몫이었다. 국민들을 위하는 일에 짐이 어찌 동참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했지만, 사실은 그저 즐거웠던 거다. 사냥개를 이끌고 눈 덮인 겨울 산을 누비며 여우를 사냥하는 그 행위 자체가.

“높으신 분들께만 어필하는 매력이 있나봅니다. 영국에서도 사냥 금지 운동이 벌어졌을 때 왕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반발했다던데.”

제이의 말에 운전석의 하르트만이 그럴 수도 있고요, 하며 웃었다.

“어쨌든 덕분에 여우 사냥은 꽤 오랫동안 왕궁의 대표적인 겨울 레저로 사랑받았어요. 1800년대까진 그랬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동물 보호 개념이 생기고 특히 여우가 보호종으로 지정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성행하던 여우 사냥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에시르 역시 1938년, 전국에 여우 사냥 금지령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왕실에서는 이미 겨울철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자리 잡은 이 특별한 이벤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여우 포획을 금지하고, 대신 일 년에 단 하루, 보호종이 아닌 모든 야생동물을 인당 제한된 수량 안에서 잡을 수 있게 하여 아예 왕실 주최의 사냥 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말을 안 타다 보니 여우 사냥만큼의 박진감은 없는 거죠. 그래서 순위를 정해서 폐하께서 직접 상을 내리게 되신 거예요. 상금 액수가 꽤 돼서 그런지 은근히 열 내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더라고요. 물론 그냥 참가에 의의를 두는 사람도 많지만요.”

이야기하던 하르트만이 “아, 저기 보이네요.” 하며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제이는 고개를 들어 하르트만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산 중턱을 깎아 만든 주차장에 버스 여러 대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초대형 카바나 텐트가 설치돼 있었는데 사이즈로 보아 100명은 족히 수용하고도 남을 듯싶었다.

“버스가 몇 대가 서 있는 거죠?”

“아마 25인승 버스 여섯 대일 겁니다. 참가 인원만 칠십 명 정도라고 했으니까 부인이랑 보좌까지 데리고 온 사람들 생각하면 백오십 명 정도 되겠죠. 본인 차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을 거고요.”

버스가 있는데 왜 굳이 본인 차를 가지고 오는 거냐고 묻자 “사냥개를 데리고 와야 하니까요.”란다.

“사냥개요?”

“네. 얘기했잖아요. 은근히 열 내는 사람들 많다고.”

하르트만이 핸들을 꺾으며 웃었다. 갑자기 기우는 차체에 제이는 암레스트를 붙들며 한숨을 쉬었다. 다들 참 열정적으로 사는구나 싶었다.

사냥 대회는 정확히 오전 열 시에 시작해 오후 두 시에 끝이 난다. 하르트만의 말에 따르면 오후 두 시라고 해도 산은 해가 빨리 져서 그때 이미 하늘의 색이 짙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제이는 일부러 열한 시를 훌쩍 넘겨 왕궁에서 출발했다. 산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가 조금 지나 있었다. 두 시간만 버티면 되겠군. 차에서 내리기 직전 시간을 확인하며 제이는 생각했다. 어쨌거나 사람들 사이에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들어가실 건가요?”

천막을 가리키며 하르트만이 물었다.

“안 들어갈 이유가 있나요?”

“물론 없죠.”

짧게 말한 하르트만이 천막을 걷었다.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는 순간, 제이는 어째서 하르트만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건지를 깨달았다. 천막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로 쏠린 것이다. 심지어 그 상태로 다들 십여 초가 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재잘거리는 소리들이 천막 밖에까지 다 들릴 정도였는데,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앉으시죠.”

하르트만이 빈 의자 하나를 가져오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서 있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거의 여자들밖에 없는 천막에 키 큰 사내가 삐죽이 서 있으면 더 눈에 띌 것 같아 말없이 앉았다. 눈치 빠른 하르트만이 의자를 하나 더 가지고 와서 바로 맞은편에 앉았다. 최대한 사람들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막아 주려는 것임을 알고 제이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이래서 안으로 들어갈 거냐고 물은 거였군요.”

“아뇨.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맞습니다. 하르트만은 곧 시인했다.

“왕궁 안에는 거의 다 소문이 난 상태라서요.”

그렇겠지. 제이는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안 그래도 말 많고 소문 빠른 동네였다. 왕실의 공식 입장 따위 없어도 이미 알 만한 사람들끼린 다 알고 열심히 입방아를 찧어 대고 있었을 터였다. 애초에 리욘도 대외비로 취급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듯했다. 보란 듯이 왕세자궁에다 데려다 놓고 비서들까지 붙여 일찍부터 준비를 하게 했으니까. 게다가 제이 본인이야 재활 센터와 병원에 갈 때 외엔 왕세자궁 바깥으로 출입을 안 한다지만 시그니는 매일 로키를 데리고 후원에 나가다시피 했다. 후원은 왕궁 정원과 달리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출입증을 가진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었는데 거기서 어린애가 시커먼 경호원들을 줄줄이 달고 놀고 있는 걸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 쟤가 소문의 그 왕세자의 딸이구나, 라고.

“물론 제이가 낳은 아이라는 건 몰라요. 대리모를 통해 얻은 딸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상대가 제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요.”

“정확히는 제이 새윈 콜스케그 대위라고 알고 있겠죠.”

제이의 말에 하르트만이 그렇죠, 했다. 제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불쌍한 친구 아닙니까.”

“누구… 새윈 콜스케그 대위 말씀이신가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인가 얼굴도 모르는 그를 떠올릴 때마다 제이는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왕세자 때문에 하루아침에 강제로 개명당한 것도 억울한데, 얼마 전까진 그 왕세자와 집무실에서 나뒹구는 사이라고 소문이 났다가 이제는 대리모를 통해 애까지 둔 오래된 연인이 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공식 발표 전까진 계속 그런 오명을 쓰고 있어야 할 텐데, 어디 숨어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 엄청 속 끓이고 있지 않겠느냐고 하자 하르트만이 글쎄요, 별로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하고 말했다.

“전하께서 충분히 보상하셨을 테니까요. 지금쯤 카리브 해에서 서핑이라도 즐기고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돌아오면 영관급 장교로 진급도 할 테니 그 친구 입장에선 아주 남는 장사죠.”

“그럴까요.”

“그럼요. 맹세할 수 있어요.”

하르트만의 확신에 찬 말투가 그나마 제이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사방에서 속닥속닥 들려오는 콜스케그의 이름을 듣고 있자니 여전히 그를 향한 송구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이미 이곳의 귀족 부인들 사이에서 새윈 콜스케그 대위는 희대의 요부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가 별 볼일 없는 시골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신분 상승을 노리고 사관학교에서 왕세자를 꼬여낸 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왕세자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재빨리 대리모를 구해 아이까지 낳은 거라고, 몇몇 귀부인들은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 물론 그 이야기들을 대놓고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으로 열심히 흉보며 시기하고 질투할 뿐이었지만 칩을 차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다 보니 그 강렬한 혐오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다 전해져왔다.

“답답한데 잠깐 나가죠.”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하르트만이 기다렸다는 듯 따라 일어섰다. 말은 안 하지만 그도 영 이 곳의 공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아마 공식 발표 전까지는 어딜 가나 계속 이런 분위기일 듯싶었다. 사실은 제노스고, 경호 임무를 위해 잠시 그의 신분을 빌렸다고 하면 적어도 죄 없는 새윈 콜스케그는 더 이상 소환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또 다른 종류의 억측과 헛소문들이 나돌게 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었다. 지금은 거기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죠.”

위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하르트만이 그러죠, 하며 얼른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은 천천히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완만하기도 했고,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지나간 곳이라 땅이 잘 다져져 있어 구둣발로도 걷기 편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이의 생각이었고, 평소 운동이라곤 한 적 없는 하르트만은 벌써부터 미끄러지고 비틀거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괜찮아요, 하르트만?”

“그럼요, 헉, 괜찮습니다. 괜찮고, 허억, 말고요.”

말과는 다르게 얼굴은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차 안에서나 기다리라고 할 걸 그랬나. 고민하는 찰나 근처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는 하르트만의 손을 붙잡은 채 위로 걸어 올라갔다. 커다란 드럼통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사람들이 그 주위로 둘러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총을 그대로 메고 있는 걸 보면 사냥 도중에 잠깐 몸이나 녹이다 갈 요량으로 그러고 있는 듯했다.

“아니, 콜스케그 대위 아닌가.”

제이를 알아본 쇼나르 후작이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그의 말에 드럼통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제이를 쳐다봤다. 그 묘한 기시감에 쓴웃음을 지으며 제이는 쇼나르 후작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하르트만을 이끌고 모닥불 근처로 다가갔다. 쇼나르 후작이 얼른 옆에 자리를 만들어 주며 “이리로 오게.” 했다.

“자네들 그렇게 입고 춥지도 않나.”

양복에 코트 차림인 제이와 하르트만을 보며 로포텐 남작이 자기가 다 춥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복장을 보니 사냥을 하러 온 건 아닌 모양이고, 경호로 왔나?”

“그런 셈이죠.”

제이의 대답에 누군가가 큭, 소리 내어 웃었다. 제이는 고개를 들어 웃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봤다. 피엘투레르 공작이 알파인 스틱으로 드럼통 안을 쑤시며 큭큭 웃고 있었다.

“…이만 내려갈까요.”

하르트만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뇨.”

제이는 곧장 말했다. 굳이 목소리를 낮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제 막 왔지 않습니까. 손 좀 더 녹이고 가죠.”

“하지만….”

하르트만이 난감해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이는 하르트만이 얼른 자리를 피하고자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피엘투레르 공작과 얽히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작에 대해서는 제이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제 딸의 약혼자였던 카이옌이 사망하자 제2 왕자와 왕비가 왕세자를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노골적으로 비난을 해 대던 양반이었다고 했다. 그 후로도 계속 왕실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그는 얼마 전 소르스테인 가의 비리 건이 터지고 왕세자 부부의 이혼설이 나돌자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리욘의 집무실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둘째딸을 왕세자비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왕세자가 이혼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이혼과 동시에 들려온 소식이 왕세자에겐 이미 결혼할 남자가 있다더라 하는 것이었으니. 공작의 입장에선 눈이 뒤집힐 만도 했다. 게다가 그 남자가 자신도 왕궁에서 몇 번인가 마주쳤던 왕세자의 경호대원이라니, 심사가 뒤틀려도 이만저만 뒤틀린 게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먼저 그를 피할 이유는 없었다. 제이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피엘투레르 공작을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대위.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

여전히 드럼통 안을 뒤적이며 그가 말했다.

“덕분에요.”

“걱정 많이 했다네.”

자네가 없으면 전하를 지킬 사람이 없잖은가. 피엘투레르 공작의 말에 그의 옆에 서 있던 보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흘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참 이상했다. 자신이 리욘과 그런 관계라는 걸 몰랐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 온 신임 대위가 젊구나, 저 나이에 벌써 대위라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능력이 뛰어난가 보다’ 하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런데 자신과 리욘의 관계가 드러나자 이제는 하나같이 ‘애초에 능력도 안 되는 자가 왕세자와 연애 놀음이나 하려고 얼토당토않은 직급까지 얻어 궁으로 왔다’고 믿고 있다. 사실 어느 쪽도 진실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어느 쪽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자네 걱정으로 밤잠을 못 이루셨다고 들었네만.”

다분히 의미심장한 공작의 말에 이제는 다른 몇몇 귀족들까지도 슬그머니 웃음을 짓고 있었다. 피엘투레르 공작처럼 대놓고 자신을 조롱하려는 의도는 아니라 해도 이 상황을 재미있게 관망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 이게 싫다는 거야.

제이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쓰게 웃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리욘이 이런 식으로 제 아랫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 공식 발표가 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문제긴 했으나 굳이 그때까지 기다리고 싶지가 않았다. 이쯤에서 가여운 새윈 콜스케그 대위의 명예도 한 번쯤 회복시켜 주고 싶기도 했고.

“그나저나 많이 잡으셨습니까.”

제이는 짐짓 태연한 어조로 피엘투레르 공작을 향해 물었다.

“아니, 오늘은 영 운이 붙질 않아. 토끼 한 마리 못 잡았네.”

“사냥은 운보단 실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뭐, 가끔 운이 정말 안 따라 주는 날도 있긴 하죠. 제이는 여전히 코트에 손을 집어넣은 채 말했다. 공작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대위,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 같은데.”

공작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려 들지도 않고 말했다.

“사냥은 실력보단 운일세. 제 아무리 명사수라도 사냥감이 눈앞에 나타나질 않으면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습니까?”

제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피엘투레르 공작의 얼굴이 더욱 험하게 구겨졌다. 노기 어린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그는 곧 평온을 되찾은 듯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제이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대위는 운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실력이 좋다는 건가? 사냥감이 눈에 띄기만 하면 절대 놓치지 않고 다 잡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피엘투레르 공작의 말에 옆에 있던 바예리 백작이 “그러고 보니 대위가 총을 잘 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하고 거들었다.

“잘 쏜다고 할 것 까지도 없습니다. 그냥 목표물을 발견하면 놓치기 전에 빨리, 정확히 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간단한 일이죠.”

“호오, 그래.”

피엘투레르 공작의 눈빛이 번뜩였다. 걸려들었다, 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 자네가 나 대신 좀 잡아 줄 텐가?”

자기가 걸려든 줄도 모르고 그렇게 묻는 공작을 향해 제이는 부러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애석하게도 오늘 총을 안 가지고 와서요.”

“총이야 여기 널린 게 총인데 뭐가 걱정인가. 자, 여기 내 총 빌려 주지. 이거 들고 가게나.”

예상대로 공작이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벗으며 말했다. 그는 옆에 서 있던 보좌에게 총을 건넸다. 보좌가 제이에게 총을 가져다 주는 사이 공작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보자, 이제 대회 끝나기까지… 한 시간 이십 분 정도 남았군. 충분하지. 암, 충분하고말고. 자네 정도 솜씨면 한 시간 이십 분 동안 못해도 꿩 대여섯 마리 정도는 잡지 않겠나.”

어디, 솜씨 좀 보여주게나. 피엘투레르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좋은 곳을 알려 주지. 저기 저 숲길 보이나, 대위? 저 안쪽으로 들어가면 별천지일세. 토끼는 물론이고 운 좋으면 엘크도 볼 수 있을 걸세. 자네라면 절대 놓치지 않겠지.”

제이는 공작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의 사냥총을 든 채 주위를 둘러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사냥개 여러 마리가 나무에 묶여 있는 게 보였다. 제이는 총 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공작님의 개도 있습니까?”

“응? 물론이지. 저기 저 갈색 목줄을 찬 녀석일세.”

왜, 사냥개도 필요한가? 피엘투레르 공작이 이죽대며 물었다. 제이는 대답 대신 그쪽을 향해 총을 겨눴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당황한 목소리로 제이를 불렀다. 피엘투레르 공작 역시 사색이 되어 “이보게,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하고 외쳤다.

“이봐, 대위!”

공작의 비명과 동시에 탕! 총성이 울렸다. 총소리에 개들이 놀라 날뛰기 시작했다. 그중 한 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갈색 목줄을 찬, 공작의 사냥개였다.

“뭐야, 지금 총으로 줄을 끊은 거야?”

“말도 안 돼…!”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치는 사이 제이는 다시 공작의 개를 향해 총을 겨눴다. 개는 공작이 가리킨 숲길을 미친 듯 달려가고 있었다. 다시 타앙─! 요란한 총성과 함께 이번에는 개의 목에 걸려 있던 갈색 목걸이가 끊어졌다. 여기저기서 감탄에 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상처 하나 없는 개는 제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미친 듯이 숲속을 향해 내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제이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피엘투레르 공작에게 총을 건네며 말했다.

“따라가 보십시오. 혹시 압니까. 개가 눈 먼 토끼라도 한 마리 물어다 줄지.”

공작의 품에 총을 안기다시피한 뒤 제이는 자리를 떠났다. 역시 넋을 놓고 사냥개가 사라진 방향만을 바라보고 있던 하르트만이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는 제이와 함께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요. 제이, 정말 줄을 끊은 거예요?”

올라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며 하르트만은 몇 번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세상에. 이건 그냥 사격 솜씨가 좋은 정도가 아니잖아요. 이 정도면 거의 신,”

“총알로 끊은 게 아닙니다.”

“네…?”

하르트만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총알은 개가 묶여 있던 나무에 박혔을 겁니다. 처음부터 그쪽을 노리고 쐈으니까요.”

어차피 못 맞힐 거라면 개가 안 다치는 게 좋잖아요. 제이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나뭇가지를 붙잡으며 말했다.

“어, 그럼… 그 줄은 어떻게 끊은 거예요?”

“총알보다 더 정확한 게 있죠.”

하르트만은 감을 못 잡는 눈치였다. 한참만에야 그는 “설마?” 하고 외쳤다. 제이는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비밀입니다.”

쉿, 검지를 입술에 대며 말한 제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내려가고 있자니 뒤에서 하르트만이 푸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는 다시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느냐고 표정만으로 묻자 하르트만은 “아뇨, 아무것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막 든 생각인데요, 왠지 국민들에게 굉장히 인기 많은 왕비 전하가 될 것 같아요.”

“그래요? 난 자신 없는데.”

얼어붙은 바위 위로 구둣발을 내딛으며 제이는 말했다.

“아녜요. 내가 장담해요.”

특히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더 제이를 많이 좋아할 거예요. 하르트만의 말에 제이는 산길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그런 건가, 애들 입장에선 약간 초능력 전사 같은 느낌이려나, 하고.

***

두 사람은 1시 10분쯤에 천막에 도착했다. 다행히 그 사이 먼저 사냥을 마치고 온 사람들이 있어서 다들 그쪽으로 몰려가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반드레예브 후작이 잡아 온 엘크가 아주 인기였다. 사람들은 엘크의 커다란 뿔을 붙잡고 사진을 찍는 등 소란을 피워 댔다. 다른 한쪽에선 막 사냥에서 돌아온 무리가 뜨거운 차를 마시며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있었다.

“오늘 야생 엘크만 벌써 여섯 마린가 잡혔다며.”

“엄청난데. 누가 다 잡은 거야?”

“반드레예브 후작이 한 마리 잡았고, 하랄드 남작도 한 마리 잡았을 거야. 전하께서도 두 마리나 잡으셨다고 아까 열한시 반쯤에 들은 것 같아.”

“그럼 지금쯤 세 마리는 잡으셨겠군.”

“가능한 얘기지.”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올해가 십이 년 만에 다시 참가하신 거였던가?”

“맞아. 그때도 토끼를 기가 막히게 잡으셨는데.”

“어렸으니까. 혹시 사고라도 당할까 엘크는 처음부터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지, 그때도 잡으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을 거야.”

“앞으로 매년 상금은 전하께서 도로 가져가시겠군.”

“원래도 왕실에서 내놓고 왕실에서 가져갔는데, 뭐.”

“그건 그래.”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셔.”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제이는 차를 마시며 맞은편에 앉은 하르트만에게 물었다.

“지금 누구 얘길 하는 건가요?”

“뭐가 말입니까?”

“상금을 왕실에서 내놓고 왕실에서 가져갔다는 거 말이에요.”

“아, 왕비 얘기일 거예요.”

의외의 대답에 제이는 그래요? 하고 눈을 크게 떴다.

“네. 1등은 못 해도 3등이나 4등은 꼭 했거든요.”

“전(前) 왕비 전하께서도 사냥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요. 왕비 자리에 뭐가 있나 봐요. 대대로 최고의 명사수만 허락하는 걸 보면요. 혹시 알아요? 내년엔 제이가 1등을 할지.”

“내가 하면 반칙이라고 난리가 날 걸요.”

하르트만이 “아, 그러려나요.” 하고 중얼거렸다.

“칩 장착하고 하면 되잖아요.”

“믿겠습니까, 어디.”

“하긴. 지금 왕비도 아마 그 능력으로 잡은 걸 거라고 사람들은 얘기하고 있어요.”

하르트만이 속닥거렸다. 그럴만하다는 듯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제노스라고 알고 있으니까. 거기다 칩도 소용없는 S급이라고 알고들 있는데 아무리 총으로 잡았다고 해봐야 믿을 리가 없었다.

“억울하겠군요. 정말 본인 능력으로 잡은 걸 텐데.”

“자업자득이죠.”

어깨를 으쓱인 하르트만이 “그런데 그 능력도 이젠 영 안 따라 주나 봐요.” 하고 말했다. 제이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오늘 거의 못 잡았다고 그러더라고요. 오전 내내 꿩 한 마리인가 밖에 못 잡았대요.”

“컨디션이 별론가 보죠.”

제이는 여상히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컨디션이 좋으면 그게 더 말이 안 될 상황이긴 했다.

사실 제이는 오늘 사냥대회에 리우지엔이 참석했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당연히 불참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유롭게 사냥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그 속이 편하지는 못할 거라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래서 더 기를 쓰고 나온 걸 수도 있지. 다 마신 종이컵을 구기며 제이는 생각했다. 왕비궁에 숨어 죽은 듯 지내라던 자신의 말에 일부러 더 보란 듯이 밖으로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고작 너 따위의 말에 기가 죽을 내가 아니란 걸 보여 주기 위해서. 마침 사냥이라면 자신도 있겠다, 잡아 온 사냥감들을 늘어놓으며 사람들 앞에서 잔뜩 과시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오늘은 운이 따라 주지 않은 모양이지만.

“지금 몇 시죠?”

제이는 작게 구긴 종이컵을 코트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한 시 사십 분 조금 넘었습니다.”

“두 시 정각에 내려가는 건가요?”

“그때까지 사람들이 다 모이면요.”

…절대 두 시에는 못 내려가겠군.

제이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얼핏 봐도 돌아온 사람보다 안 돌아온 사람이 더 많았다. 아직 이십 분 정도가 남았지만 아무래도 그 시간 안에 모든 사람이 다 돌아오기란 무리일 듯싶었다. 당장 리욘부터가 어디까지 간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어라.”

문득 하르트만이 중얼거렸다. 무척이나 당황한 기색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제이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하르트만의 시선은 천막의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무심코 그쪽을 바라본 제이는 곧 하르트만의 반응을 이해했다. 베아테가 막 천막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놀란 건 하르트만뿐이 아니었다. 천막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란스럽던 천막 안은 순식간에 묘한 침묵의 기류에 사로잡혔다. 베아테는 아랑곳 않고 우아한 걸음으로 제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멈춰 서자마자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제이는 반쯤 웃는 얼굴로 물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거절할 수 없을 걸요.”

베아테 역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서 얘기하죠.”

“난 여기도 상관없는데요.”

“나오십시오.”

짧게 말한 뒤 제이는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따라 일어서는 하르트만에게 여기 있으라고 눈짓한 뒤 그는 혼자 천막을 나섰다.

밖은 그 사이에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해가 밑으로 기울며 산 전체에 그림자가 지기 시작한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제이는 한숨을 쉬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당당히 말을 걸 생각을 한 건지.

하긴, 사람들 앞이니까 말을 걸 생각을 한 거다. 베아테가 머리를 잘 썼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상대로 협박을 한 셈이었다. 이 많은 귀족들 앞에서 소란을 피워 리욘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릴 것이냐, 아니면 나와 함께 나가서 조용히 이야기를 할 것이냐. 자신이라면 절대 후자를 택할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까지 갈 셈이죠?”

뒤에서 베아테가 외쳤다. 제이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 샌가 주차장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베아테가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써도 천막까지는 소리가 닿지 않을 터였다. 제이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렇게 패기 넘치게 사람을 협박할 땐 언제고, 베아테는 어느 샌가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건, 말씀하십시오.”

제이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말했다.

“무슨 이야길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까.”

“제이.”

베아테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상태로 잠시 바닥을 내려다본 그녀는 곧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전에 내가 했던 얘기, 생각해봤나요?”

“전에 했던 얘기라니요?”

제이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베아테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미카엘이요.”

베아테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예상대로의 답변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 섞인 목소리로 베아테를 불렀다.

“베아테 양.”

그 문제라면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이는 지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요. 전하께 직접,”

“리욘에겐 이미 말했어요.”

베아테가 말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뭐라고 했을 것 같아요?”

베아테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제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이 먼저 답했다.

“미친 소리 말라고 하더군요. 얌전히 감옥에 갈 준비나 하라고요.”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다는 듯 베아테는 팔짱을 끼며 웃었다.

“미카엘 친부가 누군지 궁금하면 자기가 알려 주겠대요.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나도 모르는 애 아빠를 언제 또 다 알아내서 찾은 건지.”

“미카엘 친부가… 누군지 모른단 말입니까?”

“몰라요.”

베아테는 내뱉듯 말했다.

“졸업 기념 파티 때 술이며 약에 잔뜩 취해서 마구잡이로 해 댄 걸요. 뭐, 그래도 우리 학교 학생 중 한 명일 테니 아주 별 볼일 없는 인간은 아닐 거예요. 리욘도 그러더군요. 애 양육비 정도는 부족하지 않게 받아 낼 수 있을 거라고요. 개자식.”

“베아테 양.”

“왜요? 듣기 싫어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사실인걸. 그 자식은 개자식이에요.”

“그만하십시오.”

“실컷 이용해 먹고 내팽개치는 거잖아. 처음부터 미카엘이 자기 아들이 아니란 거 알고 있었으면서! 그럼 애초에 받아들이질 말,”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제이의 말에 베아테가 “뭐라구요?” 하며 눈을 치켜떴다.

“그렇잖습니까.”

제이는 여전히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말했다.

“당신도 왕세자비가 되고 왕비가 되고 싶어 전하를 이용한 거 아닙니까. 서로 이해가 일치해 손잡았던 거고, 이제 그 이해 관계가 균형을 잃어 협약이 깨진 건데 전하를 욕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제이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선 분명 경고하지 않으셨습니까. 언제든 당신에게서 왕세자비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고요. 그러니 자중하고 선을 넘지 말라고,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 왜 말을 안 들은 겁니까.”

정확히는 주제넘게 굴지 말라, 고 명령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노골적인 표현은 가뜩이나 흥분한 베아테를 더욱 자극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잖아도 제이가 이야기하는 동안 베아테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래서, 지금 이게 다 나 때문이라는 거야?”

결국 또 악을 쓰듯 소리 지르는 베아테를 보며 제이는 혀를 찼다.

“전하만 탓할 거 없다는 얘깁니다. 당신도 다 알고서 시작….”

제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는 그에게 베아테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고 소리쳤다.

“이야기하다 말고 어딜 보는 거야? 제대로 얘기 안 해요?”

제이는 대답 대신 자신의 뒤로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을 올려다봤다. 하얗게 눈이 쌓인 언덕 위로 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바람에 잘게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착각인가.

제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초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베아테의 표정을 읽지 못한 채 그는 곧바로 “아무튼,” 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도 다 알고서 시작한 일이었으니 일방적으로 전하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요. 이 일의 유일한 피해자는 미카엘뿐인,”

말을 멈춘 제이는 본능적으로 눈앞의 베아테를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몸을 날려 구르듯 바닥 위로 쓰러졌다.

“아악!”

베아테가 비명을 질렀다.

“뭐야! 뭐 하는 짓이야!”

발버둥 치며 밀어내려는 베아테를 힘으로 누른 뒤 제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그곳에는 눈 쌓인 언덕만이 고즈넉이 서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이는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저 언덕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 감각은 분명 살의였다.

“미쳤어? 저리 안 비켜?”

“가만히.”

낮게 말하며 제이는 언덕의 위쪽을 응시했다. 상대가 칩을 차고 있다면 소용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들릴지 모를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그때였다.

푹─

무언가가 오른쪽 어깨에 꽂혔다. 그 선뜩한 감각에 제이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내가 비키라고 했잖아.”

베아테가 빨갛게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칼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사냥용 단검이었다.

“베….”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어깨에 꽂혀 있던 칼이 쑥 빠져나갔다. 동시에 울컥 피가 솟구쳤다. 제이는 짧게 신음하며 어깨의 상처를 눌렀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이번에는 왼쪽 팔뚝에 푹, 칼이 꽂혔다.

“──!”

제이의 몸이 다시 앞으로 숙여졌다. 곧장 그의 팔뚝에서 칼을 뽑아내며 베아테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원하는 게 있으면 내 손으로 얻으라고 했지?”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소리 지르며 그녀는 칼을 쥔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대로 목을 찌르려는 걸 제이는 가까스로 붙잡았다.

“놔! 이거 놔!”

손목을 붙잡힌 베아테는 발악하듯 비명을 질러 댔다. 제이는 그녀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멀리 집어던졌다.

“이 괴물! 악마 같은 놈!”

악을 질러대며 발버둥치는 베아테를 피해 몸을 일으켰다. 어깨와 팔에서 동시에 왈칵 피가 쏟아졌다. 바닥에 흩뿌려지는 핏방울을 보면서도 제이는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칼에 찔렸다는 자체보다, 베아테가 자신을 찔렀다는 사실이 더 황망하게만 느껴졌다. 적어도 제이에게는 그랬다. 자신의 발목을 날려 버릴 뻔했던 전장의 지뢰보다도, 밤사이 막사로 쏟아진 적군의 포탄보다도 전 왕세자비인 공작 영애의 손에 쥐어진 나이프가 훨씬 더 낯설고 믿기지가 않았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온 거였구나.

뒤늦게야 제이는 깨달았다. 애초에 이야기를 나누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베아테는 이럴 작정으로, 자신을 밖으로 이끈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곳을 찾아 여기까지 그녀를 데리고 나온 자신이 제이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어쩌면 베아테는 그것까지 다 염두에 두고 칼을 숨겨온 건지도 모르겠지만.

“가지 마!”

베아테가 소릴 지르며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곧 정신없이 몸을 일으켜 이번엔 제이의 오른쪽 어깨에 매달렸다. 칼에 찔린 상처가 벌어지며 다시 후득 피가 튀었다. 제이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 베아테를 밀쳐 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찰나였다.

탕!

커다란 포성이 허공을 뒤흔들었다. 거의 동시에 퍽, 소리와 함께 총알이 바닥에 박혔다. 제이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아슬아슬하게 다리를 스쳐 바닥에 박힌 총알은 분명 자신을 노리고 날아온 것이었다.

“…….”

제이는 여전히 숨을 멈춘 채 뒤를 돌아봤다. 눈 쌓인 언덕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차분한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제이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리우지엔이었다.

“붙잡고 있어.”

조준경으로 정확히 제이의 머리를 조준하며 리우지엔이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베아테가 제이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베아테!”

소리 지르며 제이는 베아테를 밀어냈다. 팔에 힘을 주자 다시 울컥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 제이가 멈칫하는 사이 베아테가 다시 그의 몸에 매달렸다. 다시 밀어낼 힘도, 겨를도 없었다. 결국 제이는 베아테에게 붙들린 채 그녀와 함께 몸을 옆으로 굴렸다. 리우지엔의 총구가 그대로 따라왔다.

이제 쏜다─고 생각한 순간 철컥! 빈 탄창에 노리쇠 헛도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이런.”

리우지엔이 인상을 찌푸리며 조끼 주머니에서 새 탄창을 꺼냈다. 그녀가 총알을 장전하는 사이 제이는 재빨리 다시 몸을 일으켰다. 후드득, 왼쪽 팔뚝에서 흘러내린 피가 제이의 밑에 깔려있던 베아테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잠시, 그녀는 아까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제이를 붙잡았다.

“어딜!”

일부러 왼쪽 팔을 붙잡아 세차게 잡아당겼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으며 베아테의 몸을 밀어 냈다. 아니, 밀어 내려 했다. 하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상처에서 피만 더 쏟아질 뿐이었다. 제이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베아테가 그악스레 제이의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넘어뜨리는 힘에 제이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넌 오늘 여기서 나랑 같이 죽는 거야.”

피투성이가 되어 드러누운 제이를 보며 베아테가 웃었다. 제이는 겨우 몸을 일으키다 베아테에 의해 다시 쓰러뜨려졌다. 양손을 다 쓸 수가 없으니 속수무책이었다. 당연하지만 두 사람 모두 칩을 착용해서 염동력도 뭣도 통하지가 않았다.

그사이 총알 장전을 마친 리우지엔이 베아테를 향해 명령했다.

“비켜 서, 베아테.”

“나한테 명령하지 마. 중국인 년아.”

베아테는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도 재빨리 비켜섰다. 리우지엔은 베아테의 말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곧바로 제이를 향해 총을 겨눴다. 물 흐르듯 차분한 손놀림과 달리 표정은 도무지 숨길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며 말했다.

“안녕, 제이드.”

제이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죽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막상 마지막이 눈앞에 닥치고 보자 두렵다거나 억울하다는 생각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시그니도 리욘도,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쨌든 둘이 함께라면 덜 외로울 테니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눈을 감는 찰나였다.

탕──!!

거대한 총성이 설산을 뒤흔들었다.

제이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여전히 리우지엔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총구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피였다.

총을 겨눈 그 자세 그대로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한 리우지엔은, 결국 소리도 없이 눈밭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몸이 무너지자 마침내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욘…!”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외친 베아테는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야 총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사람들을 향해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손을 내저었다.

“살려 줘요! 리욘이 날 죽…!”

타앙! 곧바로 커다란 총소리가 울렸다.

“아아아아아아악!”

베아테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총알은 정확히 그녀의 왼쪽 허벅지를 꿰뚫었다. 달려오던 사람들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경악하여 걸음을 멈춘 사이 리욘은 유유히 언덕에서 내려왔다.

곧장 제이에게 다가간 그는 들고 있던 총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제이를 안아 들었다.

“전하….”

“조용히.”

리욘은 낮게 명령했다. 그런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경직되었다고 생각한 건지 그는 곧 제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안심시키듯 말하며 그는 제이를 안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몇몇 사람들이 주차장 한쪽에 세워져 있던 구급차로 달려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구급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왕실 의사와 간호사가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일단 병원으로 출발하죠.”

제이의 상처를 본 왕실 의사는 바로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한시가 급하니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응급처치를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리욘은 직접 제이를 안고 구급차에 올랐다. 리욘의 보좌가 막 구급차의 문을 닫으려는데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소, 소르스테인 양도 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문을 가로막고 앉아 있던 간호사가 얼른 자리를 비켰다. 사람들이 반 실신 상태의 베아테를 들어 차 안으로 옮기려는 찰나, 리욘이 말했다.

“태우지 마라.”

사람들이 당황한 얼굴로 “네…?” 하고 되물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둬라.”

리욘은 베아테 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어느 누구도 저 자를 차에 태워선 안 된다. 헌병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 어떤 구조 활동도 하지 마라. 누구든 죄인을 도와주는 자가 있다면 공범으로 간주하고 같은 처벌을 내리겠다.”

단호한 왕세자의 명에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베아테를 도로 차에서 끌어내렸다. 리욘은 그제야 구급차의 문을 붙잡고 서 있는 자신의 보좌를 향해 말했다.

“헌병대에 연락해라. 왕비는 총기 오발사고로 인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거니 그렇게 알고.”

“알겠습니다.”

보좌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가 문을 닫자 곧바로 구급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사이 급한 대로 지혈을 마친 의사가 지혈대를 꽉 묶으며 말했다.

“다행히 동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어요. 생각만큼 출혈이 심하지는 않습니다. 상처도 그렇게 깊지 않고요.”

“단검이었거든요.”

사냥용이고, 날 길이는 5, 6인치 정도 돼 보였다고 하자 의사는 식염수 통을 집어 들며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칼의 위생 상태가 관건이긴 하겠지만 지금 현재로선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의사의 말에도 제이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팔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리우지엔이 죽었다.

그것도, 리욘의 총에 맞아서.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이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리욘도 그러할 터였다. 그래서 더욱 제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리욘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본인의 목숨을 앨런에게 내어 준 거나 다름없었으므로.

구급차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산길을 내달렸다. 얼어붙은 산길을 빠르게 달려가는 차 뒤로 짙은 어둠이 바짝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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