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22)
  • 시그니는 처음 타 보는 자가용 비행기가 마냥 신기한 듯했다. 막 탑승했을 때에는 여느 비행기와 다른 화려한 복도만 보고 “예쁜 비행기다!” 하고 좋아하더니, 안쪽을 안내해 드리겠다는 승무원의 손을 잡고 잠시 방을 나갔다 온 뒤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제이, 이 비행기 이상해. 비행기 안에 집도 있고 회사도 있어.”

    비행기 안에 침실과 욕실이 달린 스위트룸이 있고 식당 겸용 대회의실에 회견장을 겸한 기자석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린아이 특유의 직설적이고 꾸밈없는 표현이 마냥 귀여운지 승무원들은 함박미소를 지으며 “더 둘러보고 싶은 곳 있으세요? 승무원실에도 구경 가 보실래요?” 하더니 먼저 아이의 손을 잡고 나머지 장소들의 탐방에 나섰다. 덕분에 제이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신문을 차분하게 읽어 볼 수가 있었다.

    어제의 날짜가 찍힌 핀란드 일간지는 1면부터 6면까지가 국빈 방문 중인 에시르 왕세자의 소식으로 가득 차있었다. 신문에는 왕세자의 핀란드에서의 일정은 물론, 지난 열흘간 거쳐 온 나라와 각국 총리와의 대담 내용까지도 간략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번 순방과는 무관한 왕세자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었는데 지난주에 왕세자와 합의 이혼함으로써 이제는 전(前) 왕세자비가 되어 버린 소르스테인 가의 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기사는 친인척의 잇따른 비리 혐의에도 꿈쩍 않던 그녀가 본인의 불법 자금 운용 사실과 뇌물 수수 혐의가 터지자 그제야 합의 이혼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꼬집으면서, 에시르에서 공직자의 뇌물 수수 죄는 최하 징역 4년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임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

    뭐랄까,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이렇게 남의 나라 신문 기사로 한 번 더 되새기고 있자니 새삼 리욘의 용의주도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실이야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보자면 이 이상 완벽한 이혼은 없었다. 어쨌거나 모든 귀책사유는 왕세자비에게 있었고 왕세자에게 이혼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니까. 심지어 그 덕에 이혼 확정 판결까지 걸린 시간도 2주가 채 되지 않았다. 에시르에서는 미성년 자식을 둔 부부가 합의 이혼을 할 경우 원래 석 달간의 숙려 기간이 주어지는데, 배우자에게 심각한 귀책사유가 있을 경우 예외적으로 숙려 기간 없이 곧바로 이혼 확정 판결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징역 3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 받은 중한 범죄 행위가 바로 그 심각한 귀책사유에 해당했다.

    만약 이 세상에 절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사람이 둘 있다면 그건 바로 리욘과 수잔일 거라고, 제이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며 신문을 내려놓는 찰나였다.

    “제이, 나 이 비행기 너무 좋아!”

    벌컥 소리와 함께 스위트룸의 문이 열리고 시그니가 들어왔다. 승무원 없이 혼자 방 안으로 들어온 아이는 잔뜩 신이 나서는 “우리 집에 올 때도 이거 타고 오자, 응?” 하며 제이에게 매달렸다.

    “근데 이거 몇 시간 타고 가?”

    “금방 내릴 거야.”

    이제 세 시간 정도 남았다고 하자 시그니는 눈을 크게 뜨며 “그렇게 빨리 내려?”하고 말했다. 2년 전 텍사스에서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 칭얼거리다 막판에는 이제 비행기 안 탈 거라고 울기까지 했던 시그니였다. 그런데 너무 빨리 내려서 아쉽다고 하는 걸 보니 이 전용기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핀란드는 근처니까. 노르웨이 바로 옆이야.”

    “그래? 그럼 우리 핀란드 가지 말고 텍사스에 가자.”

    “텍사스에 가면 전하랑 썰매 못 타는데?”

    그래도 텍사스에 갈까? 하고 묻자 아이는 얼른 아니아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핀란드 가서 전하랑 같이 썰매 타고, 전하랑 같이 텍사스 가자.”

    “텍사스는 너무 멀어. 전하는 너무 바쁘고.”

    이번에는 핀란드에서 썰매 타고, 나중에 텍사스에 가자. 제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좋은지 시그니는 응응, 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는 이륙 한 시간 반 만에 노르웨이 상공에 진입했다.

    “이제 두 시간 후면 이발로 공항에 도착할 거예요.”

    상냥한 미소로 설명한 승무원은 뭔가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물어왔다.

    “맘버그 있으면 한 병만 갖다 주겠습니까.”

    “맘버그는 없지만 다른 브랜드의 탄산수는 있어요. 그걸로 갖다 드릴까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주문한 탄산수가 나왔다. 병을 집어 들던 제이는 멈칫했다. 병에 그려진 라임 열매 그림이 낯익다 했더니, 발데마르 공작의 저택에서 앨런이 가져다 준 바로 그 라임수였다.

    “…….”

    제이는 병의 마개를 열었다. 한 모금을 들이켠 다음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목이 조금 따가웠다. 침을 삼키며, 제이는 시트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자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

    어제 오전, 병원에서 퇴원한 제이는 곧바로 왕궁으로 향했다. 빌라 안의 물건들은 진즉에 왕세자궁의 거처로 옮겨진 상태였다. 수잔과 시그니가 왕실 사용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왕세자궁 곳곳을 둘러보는 사이 제이는 왕비궁으로 갔다.

    구금은 해제되었지만 여전히 왕비궁의 경호는 제3 경호 중대가 맡고 있었다.

    “대위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놀란 얼굴로 묻던 페르들란은 옆에 서 있던 푸벤에게 옆구리를 찔리고서야 “아, 대위님이 아니라, 그, 저….” 하며 더듬거렸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페르들란에게 편할 대로 부르라고 한 뒤, 제이는 말했다.

    “왕비는, 안에 있나?”

    “아, 네.”

    페르들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구금이 해제된 뒤에도 여전히 궁 안에서 나오고 있지 않다는 듯했다.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그 전에도 여간해서는 궁을 나오는 일이 없던 그녀였으니까. 제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궁 안으로 들어갔다. 전실을 지나 곧바로 안쪽의 서재로 향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제이를 보고 리우지엔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많이 닮았구나.”

    그게 제이를 본 그녀의 첫마디였다. 누구와 닮았다는 건지는 굳이 물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야 한 명밖에 없을 테니까. 수술 전의 앨런이었다.

    제이는 말없이 리우지엔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목에는 화려한 디자인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지만 그 안에 칩은 들어 있지 않았다. 덕분에 제이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앨런이 리우지엔에게 맹목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이다.

    “앨런의 아이를 가졌었군요.”

    리우지엔은 별로 놀라지도 않는 눈치였다. 어차피 읽힐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딱히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편한 자세로 카우치에 몸을 뉘이며 그녀는 말했다.

    “그래. 낳지는 못했지만.”

    앨런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똑같은 아이가 태어날까 봐 두려워했다. 리우지엔, 아니, 메이는 어떻게든 낳고 싶어 했지만 앨런의 입장은 강경했다. 결국 메이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지우기로 결심은 했지만 돈이 없어서 병원에도 갈 수가 없었다. 연구소 폐쇄 후 앨런은 메이와 함께 자신의 모국인 한국으로 향했으나 텔레키네시스 신드롬 환자에 대한 사회 인식이 엉망이었던 그곳에서는 변변한 일자리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결국 앨런은 수소문 끝에 싼 값에 약을 지어 준다는 곳을 알아냈고, 그가 구해 온 약을 먹은 메이는 이틀간 시커먼 피를 쏟아 낸 끝에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눈을 뜬 건 다시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앨런의 목소리를 들었다. 메이의 손을 꼭 붙잡은 채 그는 울었다. 울면서 그녀에게 맹세했다.

    “널 위해서 뭐든 다 할게. 정말이야. 널 위해서라면, 네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할 거야.”

    이후 두 사람은 메이의 뜻에 따라 그녀의 고국인 중국으로 향했다. 설령 제노스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관심과 열기가 전과 같지 않다 해도, 한국에 있는 것보단 나으리란 판단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이가 옳았다. 리우지엔이라는 이름으로 첫 TV쇼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빼어난 미모와 능력으로 단숨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버라이어티에 출연해 준비된 소품들을 공중에 띄우고 방청객이 고른 카드를 집어내는 동안, 앨런은 무대 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우지엔이 보내는 사인에 맞춰 물건들을 움직이고 그녀의 귀에 달린 귀걸이 모양 송수신기로 방청객이 고른 카드의 순서를 알려 주었다. 앨런이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염동력과 정신 감응 능력이 모두 A급이었던 그는 약의 힘을 빌려야만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물건을 움직이고, 모니터 너머 상대의 생각을 읽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능력 향상이 확실한 만큼 부작용도 심했다. 힘들어하는 앨런을 볼 때마다 리우지엔은 중국으로 온 걸 후회했다. 몇 번이나 일을 그만둘까 고민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를 말린 건 앨런이었다. 전에 없이 예쁜 옷을 입고,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메이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우지엔은 언제 이 어설픈 연극이 들통날지 모른다는 사실에 늘 불안해했다. 곧 그녀는 일을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TV쇼와 드라마 출연을 거절하고 영화에만 집중하던 그녀는 어느 날 홍콩 유력 인사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남자를 소개해 준 지인은 그가 에시르 귀족의 사생아라고 살짝 귀띔해 줬다. 성인되기 전까지는 매년 부친이 보내 준 양육비로 부족한 거 없이 살았으나 대학에 들어가고부터는 일체의 지원이 끊겨 전처럼 흥청망청 살지는 못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년 전 모친이 사망하자마자 학교도 그만두고 고국으로 돌아와 주색잡기로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탕진 중이라고 했다.

    그래도 나름 고귀한 핏줄이라고 명문가의 자제들과 친분을 쌓아 중국과 대만을 넘나들며 온갖 파티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남자는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떠벌려 댔다. 리우지엔은 그날 밤이 새도록 남자의 옆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물론 그녀가 밤새 자리를 지킨 건 남자에 대한 호감이 아니라 그의 부친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동양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에시르 왕위 계승 서열 3위의 귀족은 그녀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반년 후, 영화 촬영을 끝마친 리우지엔은 북유럽으로 떠났다. 에시르의 공항에는 남자가 마중 나와 있었다. 리우지엔을 만나자마자 남자는 잔뜩 들뜬 어투로 말했다. “그쪽 비서 통해서 약속 잡았어. 발뺌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더라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이틀 후에 호텔로 데리러 오겠대.” 리우지엔의 손등에 연신 키스를 퍼부으며 남자는 말했다. 정말 고마워. 당신이 용기를 내 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난 평생 아버지를 만나볼 생각조차 못했을 거야.

    이틀 후 발데마르 공작이 보낸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앨런은 남자가 준비한 친자 증명 관련 서류들을 품에 안고 차에 올랐다. 그 시각 남자, 그러니까 진짜 앨런 최는 몇 조각의 살점과 내장이라는 형태로 흩어져 스바르트 시내의 하수도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앨런이 똑똑한 아들이자 유능한 비서로 발데마르 공작의 신임을 얻는 동안 리우지엔은 느긋하게 북유럽 여행을 즐겼다. 낮에는 관광 명소를 찾아다니며 여느 여행객들처럼 사진을 찍었고, 밤에는 호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공작 부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를 거쳐 마침내 에시르에 도착한 그녀는 공연 관계자가 준비해 준 초대장을 들고 국립 극장으로 향했다. 그 시각 앨런은 그녀의 지갑을 미리 발데마르 공작의 의자 밑에 떨어뜨려 놓았다. 계획대로라면 공연 시작 직전에 자신의 자리를 찾은 발데마르 공작이 지갑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시 앨런에게 건네야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발데마르보다 먼저 지갑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루카스 국왕이었다. 심지어 그는 지갑의 주인을 보자마자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신이 당신을 만나게 하려고 이 지갑을 내 앞에 떨어뜨리셨던 모양이라고.

    “나야말로 생각했지. 신이 이 남자를 만나게 하려고 날 이 나라로 보내셨구나, 라고.”

    당시만 해도 리우지엔은 왕비가 될 마음이 없었다.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국왕의 정부 자리면 만족했다. 그의 옆에 있는 동안 잔뜩 호사를 누리다, 헤어질 때 위자료나 왕창 받아 낼 생각이었다. 만약 프란츠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왕비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국왕의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부터였다. 자신이야 어떻게 돼도 상관없었으나 자신의 아들을 사생아로 만들기는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뱃속의 아이는 그저 그런 귀족의 씨앗도 아닌 왕의 자식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은 제 아들이, 어미가 왕비가 아니라는 이유로 한낱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타고 난 제 아들에게, 당당히 국왕의 자리를 물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앨런이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는 만큼 그녀에게는 두려울 게 없었다. 실제로 일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 그녀는 아들을 낳은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왕세자를 지병으로 위장해 숨통을 끊어 놓자 2왕자 리욘은 왕세자가 되길 거부하며 국경 지대로 떠났다. 사실상 자신을 피해 도망간 거나 다름없었다.

    2년 후 리욘이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지만 리우지엔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앨런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리욘은 왕이 되기 위해 돌아온 게 아니라고 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온 거니, 그 목적만 이루게 되면 스스로 왕세자 자릴 내놓고 왕궁을 나갈 거라고.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일이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한 건.”

    앨런의 말을 믿고 기다리는 동안 리욘은 성실하게 왕세자의 직무를 수행하며 왕궁 안팎으로 신뢰를 쌓아 갔다. 왕세자의 지지율 상승세에 대한 뉴스가 보도될 때마다 리우지엔은 앨런의 말을 상기하며 애써 불안을 삭이려 했다. 그러는 사이 리욘의 대관식 날짜가 정해졌다. 마음이 급해진 리우지엔은 결국 스스로 먼저 앨런을 찾아갔다. 지금이라도 리욘을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닦달을 했지만 앨런은 여전히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지금 리욘이 죽으면 그 화살은 너와 프란츠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러다 리욘이 왕이 되면 어떡할 거냐는 리우지엔의 말에 앨런은 그럴 일은 없다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되면, 그땐 내가 리욘을 죽일 거야. 그러니 걱정 마. 리우지엔으로서는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리욘은 자신과 같은 사관학교 출신의 신임 대위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제3 특별 경호 중대의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되어온 그를 본 순간, 리우지엔은 알아차렸다.

    “앨런이 기다린 게 바로 너였다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앨런이 늘 얘기하던 그의 동생임을. 그 정도로 앨런과 닮아 있었다. 생김새도 그랬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아주 흡사했다. 보는 사람이 더 외로워지게 만드는 그 공허한 느낌이.

    “거기다 눈동자도 초록색이었고.”

    얼핏 까만색처럼 보이지만 밝은 곳에서 보면 아주 깊고 짙은 초록색 눈동자라고 했다. 그래서 제이드란 이름을 붙여 줬다고, 앨런은 늘 자랑하듯 말했었다.

    “앨런도 그렇거든. 어두운 곳에서 보면 검은 눈동자인가 싶지만 사실은 짙은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이야.”

    그래서 그의 이름은 재스퍼(Jasper)였다.

    “재스퍼….”

    제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게 앨런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는 연구소에 있을 때 거의 매일 네 얘기를 했어. 그래 봤자 오늘은 어디서 제이드를 봤네, 오늘은 제이드를 못 봤네, 하는 정도였지만.”

    난 그게 좀 지겨웠어. 리우지엔은 찌푸린 얼굴로 웃었다.

    “물론 내색은 안 했지. 그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생각했거든.”

    원래 IART 안에서 가족 관계는 철저히 불문에 부쳐졌다. 물론 필요에 따라 아주 가끔씩 예외를 두기도 했는데, 앨런의 경우가 그랬다. 정확히는 앨런이 아니라 그의 모친 쪽이었지만.

    “능력치는 엄청났지만 우울증도 심하고, 심리적으로 컨트롤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하더군.”

    특히 임신하고 증상이 더욱 심해져서 종일 울며불며 제 아이만 찾아대는 통에 할 수 없이 앨런을 데려다 놓았던 모양이었다. 그야 소중한 슈퍼 프로바이더였으니까. 그중에서도 유독 뛰어난 능력을 가진 모체였으니 같은 능력을 지닌 건강한 아이를 얻기 위해서라도 연구소 측은 최대한 협조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모친은 창문에서 뛰어내렸고, 사람들은 그녀의 배를 가르고 달수도 다 차지 않은 아이를 끄집어냈다. 역할을 마친 앨런은 다시 병동으로 돌려보내졌고, 그날 이후 십 년이 지나도록 그는 단 한 번도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이따금 연구소 안에서 마주쳤을 때,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아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곳곳에 감시하는 사람이 있어 한 번도 말을 걸어 보진 못했지만, 아이는 자신이 누군지조차도 몰랐지만,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앨런은 행복했다. 자신이 제이드라 이름 붙인 아이가, 그 이름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불리며 커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게 그에겐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였다. 연구소가 폐쇄된 후 동생도 같이 고국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앨런에게 리우지엔이 절대 그것만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은 건.

    “네가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언젠가는 너 때문에 크게 일을 그르칠 것만 같았거든.”

    그런데 봐, 결국 이렇게 됐잖아. 리우지엔은 자기가 말하고도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너 때문에 모든 게 다 무너졌어. 네가 모든 걸 다 망친 거야.”

    리우지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너만 아니었다면 내 계획대로 모든 것이 다 이뤄졌겠지. 그럼 나도, 앨런도 다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행복한 건 당신만이겠죠.”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부터 약을 먹어 왔는데 앨런의 몸이 멀쩡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당신 아들이 왕이 되기도 전에 그는 죽었을 겁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그는 행복했을 거야. 리우지엔은 미소 지었다.

    “내가 행복하면 자기도 행복하다고 했으니까.”

    그녀는 자신을 위한 앨런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의 몸이 상하는 게 걱정돼 배우 활동을 그만 둘 생각까지 했던 과거의 메이는 이제 없었다. 발데마르 공작과 만나기 위해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리우지엔은 앨런을 마음에 걸려했다. 이 일을 위해 성형 수술까지 해야 하는 그가 걱정돼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감행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 역시도 앨런 때문이었다. 이번 한 번만 고생하면, 이 일만 무사히 해 내면 자신도, 앨런도 공작의 돈으로 남은 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십 수 년 전의 이야기였다.

    “다시 올 거야.”

    약속했으니까. 리우지엔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진정으로, 그녀는 앨런이 다시 올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와서 리욘을 죽이고 프란츠를 왕위에 올려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야 앨런은 한 번도 자신을 배신한 적이 없으니까. 자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했으니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다시 올 거라고 믿었다.

    “앨런은 안 올 겁니다. 아니, 못 옵니다.”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우지엔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뜨고 쳐다봤다.

    “약속했습니다. 당신의 구금을 해제하고, 더 이상 신체의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전하를 해치지 않겠다고요. 다시는 전하의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앨런이 그랬다고?”

    몸을 일으키며 리우지엔이 말했다. 반응을 보아 하니 앨런과 리욘이 협상을 했단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그제야 제이는 이번 협상 내용이 앨런의 독단이었음을 깨달았다. 하긴, 리우지엔과 상의하고 싶어도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모든 연락 수단을 차단당했을 터였다. 칩인 척 장착하고 있던 송수신기도 죄 압수당했겠지.

    “그럴 리가 없어. 앨런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어.”

    리우지엔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란 걸 앨런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그렇게 멋대로, 자기 멋대로 결정을 내렸을 리가 없어.”

    앨런을 만나게 해 줘. 리우지엔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녀는 제이를 향해 말했다.

    “직접 물어 봐야겠어. 빨리 앨런에게 연락해 봐.”

    “못 합니다.”

    “왜 못 한다는 거야?”

    아하, 하고 리우지엔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지? 네가 그를 설득했지?”

    제이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로, 절대로 앨런이 먼저 그런 얘길 꺼냈을 리가 없어. 내가 원한 게 그게 아닌데 그런 식으로,”

    “당신을 살리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리우지엔의 말을 가로막으며 제이는 외쳤다.

    “알겠습니까? 앨런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는 많이 다쳤고,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자신에게는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힘과 능력을 끌어 모아 그녀의 목숨을 지켜 주고, 남은 시간 동안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마지막이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여전히 그를 탓하고 원망하고 있군.”

    당신 같은 여자를 위해서 평생을 바친 앨런이 불쌍해.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인간인데 말이야.”

    리우지엔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감히… 감히 누구한테 그딴 소릴….”

    목소리가 떨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리우지엔을 보고 있자니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 제이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왕비였다고, 이 와중에도 앨런에 대한 걱정보다 자신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말투에 더 분노하는 그녀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 돌연변이 주제에, 괴물 주제에. 연구소가 폐쇄되지 않았다면 평생 그곳에서 실험체로나 쓰이다 죽었을 거면서.

    심지어 그녀는 자신을 업신여긴 이가 다름 아닌 제노스라는 사실에 심한 모욕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제이는 더욱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돌연변이의 교미 상대로 연구소에 돈 받고 팔린 게 바로 당신 아니었나.”

    리우지엔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그런 리우지엔을 향해 제이는 고저 없는 억양으로 말했다.

    “언제부터 에시르의 왕비였다고 이런 대우에 파르르 떠는 건지 모르겠군. 메이메이.”

    제이는 부러 그녀를 아명으로 불렀다. 연구소에서는 내내 그 이름으로 불렸을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명심해.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순전히 앨런 덕분이야. 물론 앞으로도 그럴 테지. 그러니 매 순간 앨런에게 감사하면서, 얌전히 지내도록 해.”

    왕비궁에 숨어서 죽은 듯 지내면 아무도 널 건드리지 않을 거야. 그렇게 알고, 얌전히 지내. 제발. 제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앨런이 목숨을 바쳐서 살려 낸 여자를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한 뒤 제이는 돌아섰다. 순간 등 뒤에서 엄청난 분노와 살기가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걸어 나왔다. 어차피 리우지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앨런 없이는 혼자 힘으로 살아남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여자였다.

    앨런은 오래 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길어야 이삼 년 정도겠지. 앨런이 죽고 나면 리우지엔의 처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리욘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앨런과의 의리를 지켜 그녀를 살려 달란 말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의리는 앨런이 살아있는 동안 지켜 준 걸로 충분했다. 그 이상을 리욘에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도 안 되는 거였다.

    왕비궁을 나왔을 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온통 새하얗게 변해 버린 후원을 가로질러 왕세자궁으로 향하던 제이는 문득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후원 한쪽 구석에 놓인 벤치에 머물러 있었다. 하얗게 눈이 쌓인 벤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곧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새하얀 눈길 위로 발자국이 생겼다 곧 사라졌다. 눈은 긴 시간 동안 그치지 않았다.

    ***

    비행기는 4시가 조금 넘어 이발로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바깥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아마 썰매는 못 탈 거야. 그치?”

    시무룩해져 버린 시그니를 달래 공항을 빠져나오자 차와 함께 대기 중이던 에이나르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추운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제이.”

    “고생은요.”

    “전하께서는 언제 도착하셨나요?” 차에 오르며 묻자 에이나르는 한 시간 쯤 전이라고 답했다.

    리욘은 이틀 전 18일에 헬싱키에 도착했다. 1박 2일의 순방 일정을 소화한 뒤 19일에 오울루로 향해 테크노폴리스를 방문했다. 오늘 오전에는 오울루 대학에서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해 강연 후 대학생들과 짧은 대담의 시간을 가졌고, 직후에 다시 라플란드로 이동한 참이었다. 어느 나라의 왕이든, 대통령이든, 총리든 순방길에 이런 극지방까지 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핀란드 정부에서도 퍽 당황한 눈치였다고 한다. 게다가 방문을 한 달 가량 앞두고 갑자기 일정을 바꾼 터라 뒤늦게 문화부와 관광청이 달려들어 순방 코스를 짜기 시작한 걸 리욘이 개인 일정이라는 핑계로 사양하고 본인의 수행원들만 데리고 라플란드로 이동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개인 일정이라 해도 엄연한 순방 기간 내의 스케줄이라서요. 만에 하나라도 불의의 사고가 생기거나 하면 핀란드 정부 측에서 아예 책임을 안 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어떻게든 정부 관계자를 대동시키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또 순방의 연장이 되는 셈이었다. 그래서 양쪽이 타협을 한 게, 핀란드 주재 에시르 대사가 동행하는 거였다.

    “대사요?”

    “네. 전하와 사적으로 친분도 있고, 또 핀란드 정부 관계자라면 관계자랄 수도 있으니 나름 적당한 사람으로 고른 셈이죠.”

    차는 사리셀카로 향했다. 이발로 공항에서 사리셀카까지는 차로 30분 정도가 소요됐다. 눈길이라 조금 더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에이나르는 꽁꽁 얼어붙은 도로 따위 아랑곳 않고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았다. 하긴, 에시르 역시 일 년의 절반 이상이 눈으로 뒤덮여 있는 나라였다. 그곳의 운전자들은 모두가 빙판길 전문 드라이버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설원의 드라이버 덕분에 공항을 떠난 지 정확히 30분 만에 사리셀카의 이글루 빌리지에 도착했다. 에이나르는 빌리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리셉션 하우스 앞에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춰 서자마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리욘의 수행 비서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수행 비서는 그렇게 말한 뒤 시그니가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대로 아이를 안아든 비서는 리셉션 하우스가 아닌 바로 옆의 캐빈으로 향했다. 제이는 캐리어를 들고 따라오고 있는 에이나르를 쳐다봤다. 그대로 가면 돼요, 라고 하듯 에이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하셨습니다.”

    비서가 캐빈의 문을 열며 말했다. 오두막 내부는 단출했다. 벽난로 맞은편에는 주방 기기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사이에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시그니.”

    리욘이 비서의 품에 안긴 시그니를 받아 안으며 아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어 뒤에 서 있는 제이에게도 잘 왔다는 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는 아마 제이가 당황하거나 난색을 표하며 피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가만히 키스를 받고 있는 제이를 보고는 자기가 더 놀란 얼굴로 “뭐지?” 하며 작게 속삭였다.

    “뭐가 말입니까?”

    “아니, 뭔가 반응이 내 예상과는 달라서.”

    제이는 대답 대신 테이블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사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그제야 리욘은 아하,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래도 손님들 앞이라고 자기 체면을 생각해 얌전히 따라주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눈치였다.

    “앞으로 키스하고 싶을 땐 사람들 앞에서 해야겠군.”

    농담처럼 말한 그는 제이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향했다.

    “스캬벤, 제이일세.”

    “제이! 만나서 반가워요.”

    스캬벤이 환한 미소와 함께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쪽은 스캬벤 반하. 핀란드 주재 에시르 대사지.”

    제이는 리욘의 소개가 끝나길 기다려 스캬벤의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제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스캬벤이라고 부르십시오.”

    크게 손을 흔든 스캬벤이 자신의 아내를 제이에게 소개했다.

    “올리비아입니다. 제 처죠.”

    “만나서 반가워요, 제이.”

    올리비아는 화사한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전형적인 북구의 미인이었다. 그녀가 미소 짓자 오두막 안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잘 부탁해요, 올리비아.”

    “제가 할 소리인걸요. 이쪽은 우리 아이들이에요. 소르할, 울리카.”

    올리비아의 부름에 옆에 서 있던 두 아이가 차례로 인사했다. 오빠가 소르할, 여동생이 울리카였다. 소르할은 17세로 갭이어를 맞아 애프터스쿨에 다니는 중이었고 울리카는 종합학교 8년이라고 했다.

    “그리고 시그니란다.”

    리욘은 자신의 품에 안긴 시그니를 아이들에게 소개했다. 미리 이야기를 들은 듯 두 아이는 다른 질문 없이 정답게 인사만 건넬 뿐이었다. 시그니는 처음 보는 언니 오빠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 오자 조금 부끄러운 눈치였다. 수줍게 웃더니 다시 리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귀여워요!”

    울리카가 제 두 손을 마주잡으며 황홀한 목소리로 외쳤다.

    “말했잖아.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다고.”

    겸손은 어디다 내다 버렸는지 한 술 더 떠 자랑을 해 대는 리욘을 보며 스캬벤이 맙소사, 하는 표정을 지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까지 저어 대며 웃는 스캬벤의 옆에서 올리비아는 조용히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미소에 여유마저 묻어나는 것이 당연히 저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반대로 소르할은 퍽 당황한 듯했다. 리욘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그 전에 시그니의 존재 자체가 신기한 듯했다. 정말 저 아이가 전하와 저 남자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일까, 정말로 저 남자가 저 아이를 낳은 걸까, 도대체 어떻게 낳은 걸까, 정말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다양한 의문들이 그의 파란 눈동자 안에 가득 들어 차 있었다. 제노스가 뭔지도 알고, 그들의 신체적 특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지만 막상 그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자 뭔가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그런가 하면 울리카는 어떠한 거부감이나 의문도 없이 그저 시그니가 귀엽기만 한 듯했다. 빨리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제이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그런 울리카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리욘이 시그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는 썰매를 타러 가 볼까.”

    “우리 썰매 탈 수 있어요?”

    시그니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밖에 깜깜해요. 밤 됐어요. 그래도 탈 수 있어요?”

    “원래 순록 썰매는 깜깜할 때 타야 제맛인 거야.”

    “순록이 뭐예요?”

    눈을 깜박이며 묻는 시그니에게 리욘이 “사슴.” 이라고 답했다.

    “산타 할아버지 썰매 끄는 사슴 있지? 그게 순록이야.”

    시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타 할아버지 썰매 끄는 건 루돌픈데?”

    “그래. 루돌프가 순록이야.”

    “그럼 그거 하늘 날아요?”

    아이의 말에 오두막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빨간 코 순록이 있다면 아마 날 수도 있겠지?”

    시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리욘이 말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순록들은 다들 코가 까만색이라 날 수가 없어. 대신 눈밭 위를 기가 막히게 잘 달리니까 기대해도 좋을 거야.”

    리욘의 말에 시그니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리욘이 답하자 스캬벤이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파란 옷을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새파란 천에 수놓아진 색색의 다양한 문양들이 그가 사미(Sami)족 사람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는 두꺼운 방한복과 신발 등이 들려 있었다. 스캬벤이 얼른 그것들을 건네받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제이에게 남자를 소개했다.

    “기론입니다. 사미족 사람이죠.”

    사미족은 라플란드의 소수민족으로 사리셀카의 순록 목장 운영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순록 썰매를 포함하여 허스키 사파리, 스노모빌 등의 액티비티 활동을 지원하는 액티비티 센터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라플란드의 호텔들은 저마다 특정한 액티비티 센터와 계약을 맺고 있었다. 호텔은 센터로부터 일정 금액의 커미션을 받고 투숙객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기론은 이곳 이글루 빌리지의 호텔과 계약을 맺은 사미족 중 한 명으로, 이 오두막은 그의 사무실이자 쉼터라고 했다. 그걸 친구인 스캬벤을 위해 오늘과 내일까지 통째로 내준 것이다.

    “애들은 이걸 입으면 돼. 꼬마 아가씨는 여기 이 옷을 입으면 되겠군.”

    기론은 노르드어로 말하며 아이들에게 각자의 사이즈에 맞는 방한복을 안겨 주었다.

    “올리비아, 당신은 안 갈 거지?”

    스캬벤의 물음에 울리카가 옷 입는 걸 도와주던 올리비아가 기론을 향해 말했다.

    “기론, 오늘은 순록의 엉덩이를 가려 줄 천이 준비됐나요?”

    “그런 건 없수다, 부인.”

    올리비아는 들었죠? 하는 표정으로 스캬벤을 바라봤다.

    “난 썰매를 타고 싶은 거지, 순록들이 엉덩이를 실룩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에요. 온전히 썰매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 그때 타도록 할게요.”

    올리비아의 말에 기론이 코웃음을 치며 한 마디 거들었다. 결국 평생 안 타겠단 소리야, 그건.

    “제이, 너는?”

    기론이 가져다 준 옷으로 시그니를 꽁꽁 싸매며 리욘이 물었다. 제이는 잠시 생각한 끝에 테이블 위에 놓인 방한복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려고?”

    리욘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추울 텐데.”

    “그러니 방한복을 입는 거겠죠.”

    “어제 퇴원했잖아.”

    …도대체 왜 물어 보신 겁니까.

    제이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코트를 벗었다.

    “어차피 썰매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럼 상관없죠.”

    제이는 방한복을 걸치며 말했다.

    다들 방한복에 신발, 고글까지 갖춘 뒤에야 오두막을 나섰다. 중무장을 한 덕분인지 영하 20도의 기온에도 그럭저럭 몸을 펼 정도는 됐다. 올리비아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은 기론이 몰고 온 벤을 타고 그의 순록 농장으로 향했다.

    기론이 먼저 골라 놓은 순록들이 다른 사미족 관리인들과 함께 미리 출발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썰매는 기본적으로 1인용이었지만 아이들은 두 명까지 탈 수 있었다. 소르할과 울리카가 함께 타고, 리욘은 시그니를 안고 타기로 했다.

    “우리는 하나씩 타면 되겠군요.”

    스캬벤이 먼저 적당한 순록을 골라 썰매에 앉았다. 가벼운 썰매가 먼저 출발하는 게 좋다는 기론의 말에 제이는 제일 앞에 놓인 썰매에 앉았다. 가운데 썰매에 소르할과 울리카가 앉고, 가장 뒤쪽 썰매에 리욘과 시그니가 앉았다.

    “출발합니다.”

    큰 소리로 외친 기론이 줄을 당기자 그의 순록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선두의 순록이 움직이자 나머지 순록들도 따라 움직였다. 녀석들은 타박타박 일정한 속도로 걸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올라가긴 했지만 그래 봤자 빠르게 걷는 정도였다.

    제이는 출발하자마자 올리비아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주변 경관을 둘러보지 않고 시선을 정면에만 두고 있으면 순록의 엉덩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딴에는 무거운 사람을 태우고 열심히 앞만 보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빤히 엉덩이만 쳐다보고 있기가 미안해 제이는 일부러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래봤자 보이는 거라곤 온통 눈밖에 없었지만 까만 밤과 새하얀 숲의 조화가 나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공기가 무척이나 좋았다. 크게 숨을 들이켜자 가슴 속까지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순록이 끄는 썰매보다 눈 쌓인 전나무 숲의 고요한 정취에 더 마음을 빼앗길 무렵 기론이 썰매를 멈췄다. 나머지 썰매도 줄줄이 멈춰 섰다.

    “여기가 끝입니다. 이제 여기서 잠시 모닥불을 피우고 차를 한 잔 마신 다음에, 다시 썰매를 타고 돌아갈 겁니다.”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아예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게끔 각종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는 게 보였다. 기론이 그것들을 이용해 모닥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는 동안 썰매에서 내린 시그니가 제이를 향해 달려오며 외쳤다.

    “제이, 제이! 나 썰매 탔어!”

    “그래. 재미있었어?”

    “응응, 너무 재미있어.”

    시그니는 잔뜩 신이 나서는 출발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순록이 막 빨리 걷는 거야. 그래서, 전하가 줄을 잡아당겼어.”

    “응, 그랬더니?”

    제이는 장갑을 벗고 새빨갛게 얼어붙은 아이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랬더니, 순록이 갑자기 멈춰 서는 거야! 줄만 당겼을 뿐인데!”

    “정말? 똑똑한 순록이었나 보다.”

    손으로 감싸 쥐고 문지르자 다행히 아이의 뺨은 조금씩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대신에 제이의 손이 차가워졌다. 기온이 기온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손끝이 시리다, 는 생각이 들 무렵 뭔가가 손등에 닿았다. 뜨거운 차가 담긴 종이컵이었다.

    “쥐고 있어.”

    제이는 리욘이 건넨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리욘은 제이가 그랬던 것처럼 시그니의 뺨을 가만히 감싸 쥐며 물었다.

    “춥니?”

    “아니요!”

    시그니가 제꺽 대답했다. 기특하다는 듯 미소 지은 리욘은 시그니를 데리고 모닥불 근처로 갔다. 모닥불 주위에는 여러 개의 간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적당한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곧 제이를 향해 눈짓했다. 제이는 종이컵을 들고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다른 일행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기론은 그들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나눠 줬다. 울리카와 시그니에게는 따로 준비한 핫초코를 주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날이 맑습니다, 그려. 어제까진 계속 눈이 내려서 손님들이 죄 오로라 헌팅에 실패했다우.”

    기론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스캬벤이 제이에게 설명했다.

    “핀란드에서는 오로라를 레번툴리(Revontulet)라고도 합니다. 여우의 불이라는 뜻이죠. 핀란드 사람들은 불의 여우가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불꽃이 하늘로 솟아올라 오로라가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여우를 잡으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어서 그 환상 속의 동물을 잡기 위해 사냥을 떠난 이들도 많이 있었죠. 물론 지금의 오로라 헌팅은 말 그대로 오로라를 구경하러 나가는 걸 뜻하는 거지만요.”

    그리고 그 오로라 헌팅이 이곳 사리셀카 액티비티 클럽들의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특히 신혼부부들은 무조건 이용한다우. 오로라를 보고 아이를 낳으면 천재가 태어난다는 속설이 있거든.”

    기론의 말에 소르할이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피식 웃었다.

    “그럼 핀란드 사람들은 다 천재게요?”

    “사람들은 원래 다 천재로 태어난댔어. 그래서 자라는 동안 뇌를 많이 쓰는 사람은 커서도 그대로 천재인 거고, 뇌를 많이 안 쓰는 사람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거래.”

    “헛소리야.”

    제 말을 한마디로 일축해버리는 오빠를 보며 울리카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울리카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시그니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신이 난 울리카는 더욱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시그니는 결국 까르르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벌써 친해진 거야?”

    리욘이 시그니를 향해 물었다. 신나게 웃을 땐 언제고 막상 친해진 거냐고 묻자 또 수줍은 얼굴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시그니를 보며 울리카가 “곧 친해질 거예요.” 하고 말했다.

    “그래. 어차피 오늘은 둘이서 같은 방을 쓸 테니까. 친해질 시간은 얼마든지 있지.”

    “울리카랑 나랑요?”

    “응. 오늘은 울리카가 시그니와 함께 잘 거야.”

    왜, 싫어? 리욘의 말에 시그니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울리카에게 가서 잘 부탁한다고 말해.”

    리욘이 시그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잠시 주저하던 시그니는 곧 울리카에게 다가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말했다.

    “잘 부탁해요, 울리카.”

    울리카는 대답 대신 소리를 지르며 시그니를 끌어안았다. 모두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특히 두 아빠들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둘 다 입꼬리가 귀에 걸려서는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이미 친해진 것 같은데?”

    “동생을 갖고 싶어 했거든요, 울리카가.”

    듣고 있던 기론이 “이참에 울리카에게 천재 동생 하나 만들어 줘!” 하고 외쳤다.

    “나야 그러고 싶지만 그랬다간 올리비아가 날 죽이려 들 거야.”

    스캬벤의 말에 리욘과 기론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눈알을 굴리던 소르할이 뒤늦게야 의미를 알아차린 듯 으엑,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열일곱 살의 섬세한 영혼에겐 심히 폭력적인 대화 주제였다.

    차를 다 마신 뒤 다시 썰매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에는 사리셀카의 명물 얼음 호텔에 들렀다. 핀란드에 살고 있는 스캬벤 가족과 열 살 이전까지는 매 겨울마다 사리셀카에 왔다는 리욘에겐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관광 명소였지만 태어나 이런 걸 처음 보는 시그니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몇 번이고 리욘에게 물었다.

    “진짜로 안 녹아요? 얼음인데도요?”

    “절대 안 녹아. 하지만 여름이 되면 녹겠지.”

    그래서 이 얼음 호텔은 매년 10월부터 4월까지만 운영된다고 스캬벤이 설명했다.

    “침대도 얼음이야!”

    객실로 들어선 시그니가 신기하다는 듯 외쳤다. 그 말대로 커다란 얼음 침대 위에 두꺼운 곰 가죽이 깔려 있었다.

    “시그니, 한 번 누워 볼래?”

    그렇게 말하며 리욘은 시그니를 곰 가죽 위에 내려 주었다. 시그니는 잠깐 드러눕더니 얼른 일어나며 “추워어….” 하고 울상을 지었다.

    “그런데 정말 여기서 자는 사람들이 있긴 한 건가?”

    리욘이 시그니를 안아들며 한 말에 기론이 “아, 그럼요.” 하고 대답했다.

    “이맘때엔 늘 예약이 꽉 차 있습죠. 다들 못 자서 안달인 걸요. 오늘 이 방도 예약이 돼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용케 방이 비어 이렇게 들어와서 구경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요.”

    “여행 잡지에 많이 소개가 됐거든요.”

    스캬벤이 거들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묵어 봐야 할 이색 숙소로 소문을 타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꽤 인기가 많은 모양이에요. 만약 사리셀카에서 사흘을 지낸다면 이 스노우 호텔과 글라스 이글루, 통나무 오두막에 하루씩 묵는 걸 가장 이상적인 코스로 여기죠.”

    “확실히 젊은 사람들 아니고선 묵기 힘든 곳이긴 하군.”

    리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는 곧 제이를 향해 말했다.

    “네가 추위를 많이 타지 않았다면 오늘 여기서 잘 수 있었을 텐데.”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얼핏 농담인 듯하면서도 정말로 조금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하긴, 평생에 한 번이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잊지 못할 추억은 될 테니까.

    “전하께서 그러고 싶으시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리욘이 “뭐?” 하며 제이를 돌아봤다. 진심이냐는 표정이었다.

    “하룻밤 정도 지낸다고 해서 큰일 날 것도 아니니까요.”

    “여기 지금 영하 3도야. 실내 온도가 영하라고.”

    “그래서 사고가 났다면 진작 폐쇄됐겠죠.”

    멀쩡히 운영되고 있는 거 보면 다들 아무 문제없이 묵고 나온 거 아니겠느냐고 하자 리욘이 당황한 듯 “그건 그렇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긴 너무 추워.”

    안 돼. 너는. 절대로 안 돼. 몇 번이나 고개를 젓더니 아예 뒤로 돌아서며 “어이, 이제 그만 나가지.” 하고 말했다. 행여 더 머물렀다간 제이가 정말 객실 열쇠라도 받아올까 얼른 피하는 눈치였다.

    “농담 두 번 했다간 큰일 나겠군.”

    썰매에 오르며 리욘이 한숨을 쉬었다. 그 반응에 제이야말로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얼음 호텔에서 하룻밤 묵는 게 도대체 뭐라고 저렇게까지 정색을 하는 건지. 어차피 남들 다 묵는 곳이라는데.

    이래서야 평생 빚 갚을 일은 요원할 듯싶었다. 제이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썰매에 올랐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갤러리와 사원 등 몇 군데를 더 둘러본 뒤 오두막으로 향했다. 오두막에서는 식사 준비를 마친 올리비아가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 준비라고 해 봤자 테이블을 세팅해 두는 것뿐이었다. 요리는 바로 옆의 레스토랑에서 만들어 직접 이곳 오두막까지 서빙해주기로 했다.

    “이 식당에서 제일 유명한 건 순록고기입니다. 여기 이 스테이크인데, 사실 맛은 그렇게 없어요.”

    레스토랑에서 가져다 준 메뉴판을 펼쳐 보이며 스캬벤이 말했다. 맞아요, 하고 옆에서 올리비아가 맞장구쳤다.

    “라플란드까지 왔으면 순록고기는 먹어 봐야 한다고 해서 다들 그걸 많이 시키는데 소고기나 양고기에 비해선 질긴 편이거든요. 처음 먹는 사람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오히려 이 집은 소고기 요리가 맛있습니다. 특히 스튜가 정말 일품이에요.”

    “생선 요리도 괜찮아요. 대구 스테이크가 맛있거든요.”

    “아아, 맞아. 생선도 맛있지.”

    부부가 열심히 메뉴를 추천하는 동안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던 리욘이 말했다.

    “그래도 라플란드까지 왔으면 순록고기 정도는 먹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소고기나 생선 요리는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럼 전 순록 스테이크로 하겠습니다.”

    제이는 메뉴판을 덮으며 말했다. 스캬벤과 올리비아가 동시에 눈썹을 찌푸리며 “정말요?” 하고 물었다. 제이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레스토랑 직원에게 메뉴판을 돌려 주며 네, 하고 대답했다.

    “모처럼 라플란드까지 왔으니까요.”

    한번쯤 먹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하자 반하 부부는 “그건… 그렇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한번쯤은 먹어 볼 만해요.”

    “의외로 입맛에 맞을 수도 있고.”

    고개를 끄덕인 부부는 이제야 본인들의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시그니를 위한 키즈 메뉴를 고르던 제이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리욘이 턱을 괸 채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리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빤히 제이의 얼굴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야 “아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과는 다르게 표정은 퍽 복잡해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다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리욘이 굳이 말을 삼간 것도 어쩌면 그 이유일 수 있었다.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고개를 저었을 확률이 높았다. 애초에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서 삼켜 버린 걸 수도 있었고.

    주문을 끝내고 얼마 안 있어 요리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식전 빵은 조금 딱딱했지만 샐러드를 비롯한 애피타이저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특히 생선 스프가 맛이 진한 게 매우 마음에 들었다. 순록고기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약간 냄새가 나기는 했으나 못 참을 정도도 아니었고, 와인으로 만든 소스의 향이 고기 냄새를 어느 정도 가려 줘서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정작 소고기 요리를 주문한 리욘은 고기를 너무 익혔다며 절반 정도를 남겼다. 그는 가니쉬로 나온 매시드 포테이토가 맛있다고 했다.

    식사가 끝나자 후식이 나왔다. 이 추위에도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아이들을 향해 존경의 뜻을 담아 한숨을 쉬어 보인 뒤, 어른들은 뜨거운 차를 주문했다. 약간의 술이 들어간 차가 몸을 데우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직원의 조언에 따라 리욘은 핫 토디를, 스캬벤과 제이는 뱅쇼(Vin chaud)를 주문했다. 올리비아는 아이리시 커피를 골랐다.

    “그럼 이제 뼈는 완전히 다 붙은 건가요?”

    스캬벤이 자신의 찻잔에서 시나몬 스틱을 건져 내며 말했다.

    “그렇죠.”

    “움직이는데 불편함은 없고요?”

    “팔을 들어 올릴 때 약간 뻐근한 건 있지만 그 외에는 딱히.”

    뻐근한 것도 재활을 하면 금방 좋아질 거라고 하자 스캬벤은 “어우, 재활이 제일 힘들죠.” 하며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이도 어깨뼈가 탈골된 적이 있거든요.”

    올리비아의 말에 리욘이 “뭐 때문이었지?” 하고 물었다.

    “테니스 하다가 그렇게 됐다고 했나?”

    “아뇨. 스쿼시였습니다.”

    “아아, 맞아. 스쿼시 연습 도중에 그랬다고 했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스쿼시 하다가 팔이 빠지는 거야. 리욘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웃자 올리비아가 말도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골프채 휘두르다가도 빠진 적이 있는 걸요.”

    “그건 어쩔 수 없어. 어깨는 한 번 탈골되면 그 뒤로는 누가 가볍게 당기기만 해도 탈골이 돼 버린다고.”

    “그건 습관성 탈골의 얘기구요. 의사가 아직 습관성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부주의해서 그런 거라구요. 아니, 그 전에, 그렇게 어깨가 잘 빠진다는 걸 알면서 골프 같은 걸 왜 치러 간 거예요?”

    쏘아붙이는 올리비아의 말에 스캬벤이 할 말 없다는 듯 쩝 입맛만 다셨다.

    “아무튼, 조심 좀 해요. 당신도 이제 사십 대예요. 당신 마음이 언제까지나 청년인 건 상관없지만 몸은 그렇지가 않다는 걸 알아야 해요. 이젠 뼈 같은 건 부러지면 잘 붙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운동은 한꺼번에 하지 말고, 매일 조금씩 적당한 강도로 하라구요. 술은 그만 마시고, 고기보단 생선 위주로 먹고요.”

    뾰족하던 말투는 결국 걱정스런 한숨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래도 자네 걱정해 주는 사람은 올리비아밖에 없군.”

    위스키 대신 데킬라를 넣은 핫토디를 한 모금 마시며 리욘이 미소 지었다. 스캬벤은 동의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살며시 옆에 앉은 올리비아의 손을 붙잡고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올리비아는 흥,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면서도 잡힌 손을 빼지 않았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남자들에게 효과적인 건강 관리법과 운동 종류로 넘어갔다.

    “이 방면에서는 제이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체력 단련에 유용한 팁 같은 거 뭐 없을까요.”

    “그런데 이 사람은 격투기 전문이라.”

    리욘의 말에 그때까지 내내 지루한 표정으로 녹은 아이스크림만 뒤적이던 소르할이 번쩍 눈을 뜨며 “격투기요?” 했다.

    “격투기면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 무에타이 같은 거? 우슈?”

    “음, 아니. 내가 있던 곳에서는 주로 시스테마를 익혔어.”

    “시스테마? 러시아 특공 무술이요?”

    소르할이 의자를 바싹 당기며 “그건 다른 무술 두 가진가 세 가지 정도 익혀야 배울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하고 말했다.

    “그럼 제이는 최소 세 가지 이상 격투기를 할 줄 안다는 소리겠네요? 어떤 걸 할 줄 알아요? 유술? 크라브마도 익혔어요, 혹시?”

    다른 얘기엔 관심도 안 두더니 격투기 얘기에만 눈을 빛내는 모습이 꼭 왕년의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그 누군가도 그렇게 생각한 건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소르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누군가 오두막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리고 수행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하, 모시러 왔습니다.”

    리욘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아, 벌써 아홉 신가?” 했다. 이제 그는 비서단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가 오늘 하루 동안의 보고를 전해 듣고, 필요한 지시사항을 전한 뒤 내일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올 예정이었다.

    “늦을 테니 먼저 호텔로 가도록 해. 난 그쪽으로 바로 가지.”

    먼저 들어가라고 하는 걸 보니 제법 시간이 걸릴 모양인 듯했다.

    “알겠습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욘은 시그니에게 굿나잇 키스를 한 뒤 캐빈을 나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우리도 슬슬 일어날까요.”

    그렇게 말하며 스캬벤은 휴대폰으로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 곧 외투를 두툼하게 껴입은 호텔 직원들이 오두막에 도착했다. 그들이 캐리어를 들고 나서는 동안 코트를 걸치며 올리비아가 말했다.

    “오늘 날씨가 맑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죠?”

    “그러게. 어제까진 계속 눈이 내렸다는데 말이야. 신기하지.”

    오늘의 숙소는 전 세계에서 오직 사리셀카에만 있다는 이글루 호텔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얼음으로 만든 진짜 이글루는 아니고, 외벽이 유리로 마감된 글라스 이글루였다.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도대체 그런 곳에 왜 돈을 주고 묵나, 사방이 유리라면 밖에서 다 보일 텐데 불편하지도 않나 생각했는데 막상 실물을 보니 굳이 그 비싼 돈을 주고 묵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멋있죠? 가만히 서서 한 바퀴 빙 둘러보면 꼭 설원 한가운데에 내 방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느낌이라니까요.”

    올리비아의 말대로였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다 보니 끝없이 펼쳐진 눈밭 한가운데에 침대 하나가 놓여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바깥의 기온은 영하 20도인데, 유리벽 하나를 사이로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은 땀이 날 정도로 따뜻하다는 것도 큰 매력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침대에 누워서 보는 밤하늘이 무척 아름다웠다. 글라스 돔 위로 끝없이 펼쳐진 북구의 밤은 아득한 곳에서 빛나는 수만 개의 별과 어우러져 신비롭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였다.

    “사리셀카에는 멋진 호텔들이 많지만 침대에 누워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날이 맑아서 아마 늦게라도 분명 볼 수 있을 거예요.”

    오로라 자체야 아이슬란드에서 지겹도록 봤지만 이왕 핀란드까지 왔으니 이곳 사람들이 그토록 잡고 싶어 한다는 여우의 불꽃을 한번쯤은 보고 싶기도 했다.

    “오늘 여기서 나랑 시그니가 자는 거예요?”

    울리카가 양쪽에 놓인 침대 중 하나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래. 내일 돌아갈 거니까 샤워는 하지 마. 괜히 감기 걸리면 안 되니 그냥 세수만 하렴. 대신 손발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알았어요.”

    울리카가 가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는 동안에도 시그니는 유리로 만들어진 이글루 안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이 방 안인데 밖이야. 하늘도 다 보여.”

    글라스 돔 천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들릴 것 같지가 않았다. 제이는 울리카에게 시그니의 옷이 들어있는 캐리어를 건네며 말했다.

    “잘 부탁할게. 세수나 양치질 같은 건 혼자서 잘하니까 잠옷 갈아입는 것만 도와줘. 가끔 단추를 엉뚱하게 끼우거든.”

    “걱정 마세요.”

    울리카는 맡겨 두라는 듯 씩씩하게 말했다. 제이는 울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아직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시그니를 향해 말했다.

    “시그니, 나 간다.”

    시그니는 그제야 어? 하는 표정을 짓더니 쪼르르 제이에게 달려와 “그럼 이제 우리 내일 아침에 보는 거야?” 하고 물었다.

    “응.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울리카랑 잘 자.”

    “알았어. 제이 잘 자.”

    시그니가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제이가 허리를 숙이자 아이는 뺨이 아닌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제이는 시그니를 꼭 한 번 안았다 놓아준 뒤 이글루를 나섰다.

    “그럼 우리도 들어가 볼게요.”

    스캬벤과 올리비아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두 사람의 이글루는 아이들의 이글루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혼자 통나무 오두막에 묵길 원한 소르할과도 인사를 한 뒤 각자의 숙소를 향해 떠났다.

    “제 방은 어디입니까?”

    제이는 앞장서서 걷고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서 7분 정도만 더 걸어가면 돼요.”

    그의 말대로 조금 더 걷다보니 곧 커다란 이글루 하나가 나타났다. 다른 이글루들과 뚝 떨어진 곳에 혼자 위치한 것도 그렇고, 크기도 유난히 큰 것 같아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문을 열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더블 베드가 놓여 있었다.

    “혹시, 웨딩 챔버입니까?”

    제이는 캐리어를 옮기고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혹시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나 잔뜩 겁먹은 얼굴로 묻는 직원에게 제이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하고 말했다.

    “그냥 물어본 것뿐이에요.”

    “아, 그렇군요.”

    가슴을 쓸어내린 직원이 그럼, 하고 고개를 숙였다.

    “편히 쉬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인터폰 눌러 주시고요.”

    직원이 돌아가자 제이는 코트를 입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실내 온도는 24도 정도였지만 계속 눈밭을 걸어와서인지 당장 몸이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멀리 끝없이 펼쳐진 눈밭을 응시하고 있노라니 괜히 한기가 드는 것도 같았다. 그걸 핑계로 제이는 끝까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사실은 그저 귀찮았을 뿐이지만.

    그렇게 한참을 침대에 앉아 유리벽 너머의 눈밭을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열 시가 된 참이었다. 그럼 한 시간 만에 끝내고 왔다는 건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리욘이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 앉아 있는 제이를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아직도 그러고 있지?”

    “조금 전에 도착해서요.”

    제이는 대충 둘러댔다.

    “전하야말로 더 늦게 도착하실 줄 알았는데요.”

    “아아, 빨리 끝냈어.”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리욘이 말했다.

    “어차피 내일 오후면 돌아갈 건데 반나절 늦게 처리한다고 해서 큰일 날 일들도 아니고.”

    이런 방에는 혼자 있으면 외롭거든. 리욘은 미니바의 문을 열며 말했다. 지나가듯 가벼운 어조였지만 제이는 왠지 가슴 한쪽이 조금 욱신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핑계를 갖다 붙여도 결국 리욘은 자신 때문에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온 거였다. 여기까지 와서 이 방에 혼자 있을 자신이 안쓰러워서.

    “그나저나 안 씻을 건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리욘이 물었다.

    “먼저 씻으십시오.”

    “그러지.”

    리욘은 물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와이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며 욕실로 향하던 그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더니 뒤로 돌아보며 말했다.

    “사우나나 갈까?”

    “사우나요?”

    “그래. 핀란드까지 왔으면 사우나는 해 봐야지. 바로 근처에 있어. 저기 저 나무 보이지? 저 뒤에 있어. 옆에 야외식 온천도 있고.”

    “그러죠.”

    제이는 몸을 일으켰다.

    “사우나까지는 가운을 입고 가는 건가요?”

    코트를 벗으며 묻자 리욘이 대답 대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어 보려던 제이는 리욘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오늘 왜 이러는 거지?”

    “네…?”

    뭐가 말입니까. 제이는 당황해서 물었다. 그렇잖아. 리욘이 곧바로 대답했다.

    “너 이상하게 순순히 굴고 있다고.”

    “제가요?”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조건 다 알겠습니다, 그러죠, 좋습니다, 라고만 하잖아. 아까는 스캬벤과 올리비아가 있어 그런 건가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러고 있어.”

    “글쎄요. 전 늘 전하껜 그런 대답만 드렸던 것 같은데요.”

    “양심도 없군.”

    1초도 망설이지 않은 리욘의 말에 제이는 그만 웃고 말았다. 리욘은 그런 제이의 팔을 붙잡아 도로 침대에 앉힌 뒤, 자신도 그 옆에 앉으며 말했다.

    “됐으니까 앉아 봐, 제이. 얘길 좀 하자고.”

    “얘기 할 게 뭐가 있습니까.”

    “무슨 얘기든 해 봐. 난 네가 이러면 불안해.”

    뭘 또 불안할 것까지야 있습니까, 라고 말하려던 제이는 이어진 리욘의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네가 내게 다정했던 건 꿍꿍이가 있을 때뿐이었다고.”

    아마도 배란 유도제를 먹었을 때의 이야기인 듯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말에 쓰게 웃고만 있자니 리욘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래 놓고 갑자기 아이슬란드로 돌아가 버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제이는 얼른 대답했다.

    “텍사스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야 당연하죠.”

    저는 아무 데도 안 갈 겁니다, 전하. 제이는 조금 당황해서 말했다.

    “이제 왕세자궁에서 지내기로 약속했지 않습니까.”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정말입니다.”

    이제 전하를 속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이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전하께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리욘은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래,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유난할 정도로 고분고분하게 구는 건지. 아니,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말고.”

    자기가 말하고도 이게 참 무슨 말인가 싶은 모양이었다. 연신 혀를 차던 리욘은 곧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난 솔직히 네가 하루 종일 나와 시그니와 같이 있기나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그야, 핀란드에 오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니까. 뭐, 그럴 만도 하지. 추운 걸 싫어하잖아. 거기다 퇴원하자마자 온 거니 몸 상태도 별로일 테고.”

    “퇴원이야 병원에서 해도 된다고 해서 한 건데요, 뭐.”

    “그래도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니까.”

    “금방 좋아질 겁니다.”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인 리욘은 곧바로 목소릴 낮추며 말했다.

    “그럼 이제 딴소리 그만하고 말해 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데 아무래도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고서는 그의 의심을 풀 방법이 없을 듯싶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그냥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제이는 솔직히 말했다.

    “전하께는 빚을 많이 졌으니까요.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전하께서 저를 위해서 많은 걸 해 주셨으니까요.”

    저도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제이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래서, 그게 뭐든지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무조건 다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그런 거죠.”

    제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름 오래 생각하고 고민해서 내린 마음의 결론이었는데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니 참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달까, 굉장히 보잘 것 없는 결심으로 여겨져 스스로도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리욘은 놀란 눈치였다. 한숨을 쉬듯 웃는 모습이 조금 기쁜 듯도 했고, 왠지 모르게 살짝 허탈한 듯도 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웃으며 말한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시릴 정도로 맑은 밤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곧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앨런 때문에 그러는 건가?”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욘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확실히 그건 크긴 하지.

    “그래서 네가 왕세자궁에 들어와 사는 걸로 계산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네가 정 그게 마음에 걸려 어떻게든 갚고 싶다면, 그래, 어쩔 수 없지. 좀 더 확실히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수밖에.”

    확실히 갚을 수 있는 방법이라니 그런 게 어디….

    “…….”

    제이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리욘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하자.”

    그거면 돼. 리욘이 짐짓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비가 되어 주면 되는 거야.”

    “죄송합니다만.”

    그건 전하께서 제게 해 주기로 한 보상 아니었습니까? 제이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절 힘들게 했던 일에 대한 보상으로 왕비 자리를 주겠다고, 분명 전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랬지. 그런데 이젠 네 쪽이 더 큰 빚을 졌다고 하니까. 그렇게 갚고 싶으면 왕비가 되라는 거지.”

    리욘은 태연히 미소 지었다.

    제이는 그런 리욘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정말 그거면 됩니까?”

    “…진심이야?”

    자기가 말해 놓고도 놀란 표정으로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뇨. 그냥 해 본 말입니다.”

    “이봐.”

    리욘은 기가 찬다는 듯 웃더니 곧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역시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굳은 얼굴로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는 곧 고개를 들어 제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내 청혼 안 받아 줄 셈인가?”

    제이는 잠시 생각 끝에 대답했다.

    “안 받아 주는 게 아니라 못 받아 주는 겁니다.”

    “도대체 왜?”

    “말씀드렸잖습니까. 전하 입장을 생각해서,”

    “나도 분명히 말했을 텐데. 제발 내 입장 좀 그만 생각하라고.”

    “어떻게 그럽니까.”

    이번에는 제이가 한숨 쉴 차례였다.

    “전하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저도 안 이럽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말했을 텐데. 그게 나한테는 더 큰 상처라고.”

    다시 제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리욘이 말했다.

    “네가 내 입장을 생각한다는 핑계로 내 마음을 짓밟고, 깔아뭉개고, 난도질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는 생각 안 해봤나?”

    “무슨… 제가 언제 그렇게까지 했습니까.”

    당황하여 묻는 제이에게 리욘이 미간을 좁힌 채 “조금 전까지 그랬어.” 하고 대답했다.

    “넌 늘 내 생각만 한다고 하지만 그건 절대 내 생각하는 게 아니야.”

    그렇게까지 말하면 이쪽도 조금 억울해진다. 제이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전하. 제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남을 위해서 희생한 적이 없습니다.”

    “알아. 그러니 이제 그 희생에 보답하게 해 달라는 거잖아.”

    “보답이 안 된다니까요.”

    “그럼 희생한 김에 조금만 더 희생해.”

    앞뒤 안 맞는 막무가내의 말에 제이는 그만 기가 차서 웃고 말았다. 그런 제이를 보며 리욘도 웃었다. 본인이 말해 놓고도 웃긴지 한참을 소리 내어 웃던 그는 곧 크게 한숨을 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 상태로 유리 천장 너머의 까만 밤하늘을 한참 동안 응시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제이,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가 좋은 왕비가 될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래? 리욘은 물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나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끝내 주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정말로.”

    리욘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네가 그럴 자질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먼저 네게 말했을 거야. 미안하지만 내 정부로 남아 달라고. 대신 내 정처보다 훨씬 사랑하고 아껴 주겠다고.”

    하지만 넌 정부로만 두기엔 너무 아까워. 리욘의 눈빛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려는 제이의 손을 붙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하며 리욘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봐, 제이. 넌 이 나라의 국왕이 될 날 존경하고 귀하게 여겼어. 그래서 내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네 온몸을 바쳐 밤낮으로 계속 주의를 기울였던 거고. 내가 혹시라도 국민들에게 지탄받는 행동을 할까 봐 항상 경계하도록 했지. 이 이상 훌륭한 왕비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 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전하, 저는 이 나라 사람도 아니고,”

    “우리 어머니도 외국 사람이었어.”

    “같은 북유럽 사람이었잖습니까.”

    “리우지엔은 중국 사람이었지만 그녀의 국적을 문제 삼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할 말이 없었다. 제이는 잠시 생각한 끝에 다른 핑계를 댔다.

    “학력도 별롭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중등학교 교과 과정까지만 배웠다고.”

    “하지만 머리가 좋고 현명하지. 바둑도 잘 두잖아.”

    “무슨 상관입니까, 그게.”

    어이가 없어 말하자 리욘이 “똑똑하단 얘기야.” 하며 웃는다. 제이는 이번에도 기가 차서 픽 웃고 말았다.

    “정말이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쉰 그는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아주 많이요.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게 네 직업이니까.”

    곧바로 리욘이 이유를 설명했다.

    “직업 군인이잖아. 군인이 전쟁터에서 살려면 별수 있나. 적이 자길 죽이기 전에 자기가 먼저 죽여야지.”

    “그건 그렇지만,”

    “걱정 마. 고해성사하면 돼.”

    “…네?”

    예상도 못 했던 말에 제이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고해성사요?”

    “그래.”

    아, 그러고 보니 무교였던가? 리욘은 뒤늦게야 생각났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미안해, 제이. 깜박하고 말을 안 했는데, 나와 결혼하려면 세례를 받아야 돼.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국법상 왕가의 사람은 루터교 신자가 아닌 자와는 결혼할 수 없게 돼있거든.”

    괜찮아. 세례 받기 전에 고해성사하면 돼. 리욘이 제이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그럼 주교가 주님의 이름으로 네 모든 죄를 사해줄 거야.”

    바쁘다고 주일 미사도 수시로 건너뛰던 사람이 갑자기 주님 타령을 해 대자 제이는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리욘이야말로 프로테스탄트의 이름을 빌린 무신론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뒤늦게야 그는 리욘이 자신의 허물을 최대한 별거 아닌 것처럼 흘리기 위해 부러 딴소릴 하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맥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하. 저는 제노스입니다.”

    마침내 제이는 말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냥 편하게 불러서 제노스지, 사실은 텔레키네시스 신드롬 환자라고 해야 맞습니다. 제가 가진 이 능력은 공식적으로는 질병의 증상으로 분류되고 있고요.”

    결국 다른 건 다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이것이 자신이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진짜 이유였던 것이다. 그리고 리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내 경호원이 될 수 있었고 내 아이도 낳을 수 있었잖아.”

    마치 이 이야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리욘은 말했다. 그건 병이 아니야, 제이. 붙잡은 손에 꽉 힘을 주며 그가 말했다.

    “축복인 거지.”

    “…….”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아프게 조여 들었다. 축복이라니.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물론 스스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본인이 스스로의 몸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언제나 똑같았다. 불행 중 다행, 혹은 1승 1패. 이런 몸으로 태어난 자체는 불행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능력치를 가지게 된 건 다행이라고, 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모든 게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니, 다행인 정도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덕분에 자신을 만날 수 있었고, 자신의 아이도 낳을 수 있었으니까. 그것은 병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인 거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있다.

    “어때, 더 갖다 댈 핑계가 있나?”

    있으면 얼마든지 대보라는 듯 그가 미소 지었다. 무슨 핑계를 갖다 대도 다 반박할 자신이 있다는 듯 웃고 있는 그를 보자 더 이상 생각할 기운도 없어지는 제이였다. 어차피 자신은 이 사람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제이.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말하면 할수록 네가 왕비에 적합하단 생각밖에 안 들어.”

    이것 봐. 제이는 웃으며 생각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자신의 모든 허물을 장점으로 바꿔 버리는 신묘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었다. 절대,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정식으로 청혼해야겠군.”

    그렇게 말한 리욘은 침대에서 내려와 제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황해서 옆으로 피하려는 제이의 두 손을 붙잡아 그 손등 위에 차례로 입을 맞춘 뒤, 다시 고개를 들어 제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이. 나와 내 딸과, 내 국민들을 위해서 나와 결혼해 줘.”

    그 말을 하고 잠시 멈칫한 리욘은 곧 젠장, 하며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지를 준비하는 건데.”

    할 수 없지. 한숨을 쉰 그는 자신의 오른손 검지에 끼고 있던 묵주 반지를 빼냈다. 제이의 약지에도, 검지에도 너무 큰 그 반지는 결국 제이의 엄지에 끼워졌다.

    “그럴싸한데?”

    어쨌거나 제이의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자신의 반지를 보며 리욘은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자, 그럼.” 하고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들일 거면 그대로 끼고 있고, 또 내 입장 생각한다는 핑계로 내 마음을 실컷 짓밟고 깔아뭉개고 난도질하고 싶으면 빼.”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뺍니까.”

    “그래, 그러니까 빼지 마.”

    이럴 줄 알았다. 제이는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숙이자 어쩔 수 없이 엄지에 끼워진 묵주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그걸 바라보던 제이는 곧 고개를 들고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는 이제 정말 전하 입장은 생각 안 할 겁니다.”

    절대로요. 제이는 거듭 말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신경 안 쓸 겁니다. 이기적으로 굴 겁니다. 저만 생각하고, 시그니만 생각하고, 전하만… 전하의 마음만 생각할 겁니다.”

    “그래. 그게 내 소원이야.”

    웃으며 말한 리욘은 곧 몸을 일으키며 덧붙였다.

    “그리고 말했잖아. 넌 정말 완벽한 왕비감이라고. 네가 만약 내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땐 더더욱 나와 결혼해야 하는 거야. 너보다 자질 부족한 그 누군가가 이 자리를 차지하게 두면 안 되는 거라고.”

    말로는 정말 당할 수가 없다. 연거푸 한숨을 쉰 제이는 지친 얼굴로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미치겠군, 정말. 나직하게 중얼거리다 다시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서 있는 리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은 지겨울 정도로 많이 했어.”

    “철회하려면 지금뿐입니다.”

    “아니. 철회 못 해.”

    리욘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니까 철회할 생각 하지 마.”

    팔짱을 끼며 웃는데 제이는 따라 웃을 수도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이게 최선인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굳은 제이의 얼굴을 보며 리욘이 물었다.

    “제이. 도대체 뭐가 문제야.”

    싫어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 자신의 옆에 앉으며 묻는 남자에게 제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두려워서 싫은 겁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데.”

    리욘이 다시 제이의 손을 붙잡았다.

    “사람들이 널 비난할까 봐? 아니면 날 비난할까 봐?”

    “절 비난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전하는,”

    “제이. 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리욘은 단호히 말했다. 실로 21세기의 가장 강력한 전제 군주다운 그 말투에 제이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이젠 널 비난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아무도 널 비난하지 못하게 할 거야.”

    어떤 식으로든 네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 거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리욘이 말했다.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더 이상 네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

    “…….”

    “내 모든 걸 걸고 약속하지.”

    그의 회색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푸른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그 새파란 불꽃 앞에서, 차마 제이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만 쉬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제대로 대답해야지.”

    이 상황에서 대답을…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오랜 고민 끝에 제이는 말했다.

    “결혼식은 안 할 겁니다.”

    “뭐?”

    달콤한 프러포즈 수락의 멘트만 기다리고 있다 난데없는 물벼락을 맞은 표정이었다. “이봐, 제이.” 잔뜩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리욘은 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나 결혼식 한 번도 안 해 봤어.”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해야지.”

    “아뇨, 안 할 겁니다.”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리욘은 뭔가를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그래, 뭐.” 하고 대답했다.

    “일단은 알았어.”

    “일단은, 이 아니라 여기서 확실히 약속해 주세요.”

    결혼식은 안 하는 겁니다. 제이는 재차 말했다.

    “…알았어.”

    “그리고 또,”

    “아니, 나머지는 천천히 정해. 무조건 다 들어 줄 테니까.”

    마음이 급한지 일단 대답부터 하라고 재촉하는 리욘에게 제이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중에 딴소리 안 하시는 거죠?” 하고 물었다.

    “청혼 받아들이고 나면 계약서 써 줄게.”

    “전에 계약서로 장난치셨던 분이 계셔서 그것도 딱히 믿을 수가,”

    “안 해. 장난 안 쳐. 안 친다고.”

    어느덧 리욘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미간에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혹시 화내시는 겁니까?”

    “아니야, 그럴 리가.”

    오해야. 리욘이 얼른 손을 저었다.

    “내가 화를 낼 리가 있나. 지금 이 행복한 순간에.”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며 리욘은 미소 지었다. 한껏 잡아당긴 입매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거기까지 지적했다간 정말로 폭발할 것 같았다. 짧게 심호흡한 뒤 제이는 말했다.

    “그럼, 네, 알겠습니다. 하죠.”

    “…뭘?”

    “결혼이요.”

    달리 뭐가 있겠느냐고 묻자 리욘이 팔짱을 끼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연신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뭔가 이게 아닌데, 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싫으시다면 물러도 되고요.”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승낙의 멘트가 뭔가 좀… 아냐, 됐어.”

    리욘은 고개를 저었다.

    “난 프러포즈를 했고, 넌 받아들였으니까. 그래, 그거면 된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듯 거듭 말하는 리욘에게 제이는 “네, 그거면 된 겁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계약서를 쓰죠.”

    뭔가 계약서로 쓸 만한 종이가 없나 주위를 둘러보는 제이의 손을 붙잡으며 리욘이 말했다.

    “그 전에, 먼저 할 게 있지 않아?”

    “뭘….”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겹쳐졌다.

    아, 서약의 키스…인가.

    생각하며 제이는 살짝 눈을 감았다. 그런데 서약의 키스는 결혼식에서나 하는 거 아니었나. 청혼할 때도 하는 거였나. 의아해하는 사이 리욘의 혀가 입술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느리게 입안을 훑는 뜨거운 살덩이에 벌써 숨이 막혔다. 같이 혀를 얽으려다 서약의 키스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얌전히 입만 벌리고 있었다. 경건한 맹세의 키스니까, 너무 난잡하고 야하게 굴면 안 되는….

    “뭐 하시는 겁니까.”

    제이는 자신의 옷 안으로 들어온 리욘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뭐가?”

    “왜 갑자기 손이 들어오는, 잠시만요.”

    그 와중에도 유두를 더듬는 손가락에 식겁하고 떼어 내며 외쳤다.

    “누가 서약의 키스를 이런 식으로 합니까.”

    “서약의 키스라니?”

    이번엔 리욘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걸 왜 여기서 해. 그건 결혼식 때나 하는 거야.”

    “그럼… 뭘 하자는 거였습니까?”

    당황해서 묻자 리욘이 “뭐긴 뭐야.” 하고 웃었다. 다시 제이의 뺨을 붙잡고 다정하게 입을 맞춘 그는 그대로 천천히 제이와 함께 침대 위로 쓰러지며 말했다.

    “허니문부터 즐기자는 거였지.”

    “…허니문도 결혼식 당일부터 치는 거 아니었습니까?”

    “우린 결혼식 안 하기로 했잖아.”

    그럼 결혼식하고, 그날부터 해? 몸을 일으키는 리욘의 팔을 붙잡으며 제이는 얼른 “아뇨,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지금 해치우는 게 나으니 그냥 지금 하죠.”

    “제이, 이봐. 해치우다니.”

    허니문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한숨 쉬며 웃는 걸 보니 또 뭔가 자신이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뭔지는 알 것 같은데 사과를 하기도 애매해 제이는 늘 그랬듯 키스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 전했다.

    “또 이런 식으로 넘기려고 하는군.”

    이젠 안 넘어갈 거라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리욘은 침대에 누운 제이의 뺨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제이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리욘의 손바닥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다시 시선을 들었을 땐 리욘의 표정이 한껏 누그러져 있었다. 제이는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 남자의 상냥한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결국 리욘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던 그는 곧 제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 가득 체취를 음미한 뒤, 핥듯이 목덜미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따금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빨아들이기도 하고 아플 정도로 깨물며 여린 피부에 잇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제이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더욱 뒤로 젖혔다. 아찔한 통증을 수반한 쾌감에 온몸이 저릿하게 저려오는 듯했다. 젖기 시작한 아래가 뜨거웠다.

    “살이 많이 빠졌어.”

    어느새 훤히 드러난 제이의 가슴에 입을 맞추며 리욘이 말했다.

    “살보단 근육이 빠진 걸 겁니다.”

    거의 움직이지 못했으니까요. 자신의 젖꼭지를 깨무는 남자의 뒷머리를 움켜쥔 채 제이는 짧게 한숨을 토했다.

    “재활 시작하면 금방 다시 돌아올 겁니다.”

    “무리는 하지 마.”

    기세 좋게 덤빌 때는 언제고, 두 달 새 눈에 띄게 마른 몸이나 아직 크게 남아 있는 수술 자국을 보자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깊은 삽입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선호하던 후배위는 관두고, 당연하다는 듯 자신이 편한 정상위로 삽입하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자세도 자세지만 행여 다치게 하거나 아프게 할까 봐 잔뜩 긴장한 채 조심스레 움직이는 모습이 평소의 그와는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넣을 때도 조금만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바로 멈추고선 “괜찮아? 그만할까?” 하고 묻더니, 다 넣고 난 뒤에도 조심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자신이야 덜 아프고 편해서 좋았지만 이래서야 오늘 밤 안으로 끝나기는 할까 싶었다. 그 정도로 평소 리욘의 섹스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름 점잖게 시작했다가도 이따금 절정에 다다르면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상대방 생각 따위 못하고 과격하게 움직이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공주님 대하듯 조심스레 안고 움직이는 걸 보니 고마움을 넘어서 미안할 정도였다.

    “전하, 좀 더… 마음껏 하셔도 됩니다.”

    결국 제이는 자기가 먼저 말했다. 응?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욘의 등을 끌어안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충분히 괜찮아져서 퇴원한 거니까요. 이 정도 움직이는 건 괜찮습니다. 안 아파요.”

    그러니까 더 세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말하자 리욘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지금 내 마음대로 해 버리면 큰일 나.”

    “그러니까 상관없다니까요.”

    “다친다고.”

    “차라리 그쪽이 낫습니다.”

    지금은 저도 힘들어요. 제이는 찌푸린 채 웃었다. 그제야 의미를 알아차린 듯 리욘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런 거야? 하고 물었다.

    “네. 그러니까 그냥 평소대로 하세요.”

    아니, 해 주세요. 제이는 일부러 아래를 살짝 조이며 말했다. 그 조르는 몸짓에 리욘이 난감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이윽고 제이의 뺨에 입을 맞추며 리욘은 그럼 조금만 편하게 할게, 라고 말했다.

    “아프면 말하고.”

    제이는 대답 대신 리욘의 등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걸 신호로 하듯 리욘이 허리를 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 속도가 빨라지면 깊이는 얕아질 수밖에 없는데 리욘은 그렇지도 않았다.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힘에 제이는 하마터면 시작하자마자 소리를 지를 뻔했다. 겨우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참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연이은 깊은 삽입에 어쩔 수 없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아프기만 한 건 아니다 보니 신음소리에도 그게 다 드러났다.

    “이 정도는 괜찮은가 보지?”

    리욘이 웃으며 제이의 골반을 붙잡았다. 퍽,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부딪쳐올 때마다 몸이 훅 침대 아래로 꺼지는 듯했다. 뱃속을 커다랗고 뜨거운 것이 마구 들쑤시고 있었다. 가장 안 쪽, 깊숙한 곳을 두꺼운 성기 끝으로 찔릴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전하, 조금만 천천히….”

    제이는 리욘의 셔츠자락을 붙잡으며 헐떡였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허리는 더욱 격정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미친 듯이 흔들어 대며 남자의 성기를 조였다. 아프게 부풀어 한껏 민감해진 내부를 크고 굵은 것으로 깊숙이 쑤실 때마다 날카로운 교성이 터졌다.

    “으읏, 전하, 거기는, 아, 조금만 더, 흐윽, 으으읏!”

    “조금만 더 세게? 아니면 천천히?”

    “세, 세게… 아니 천천, 히, 아윽, 전하! 전하, 거기…!”

    “어느 쪽이야. 제대로 말해.”

    웃으며 리욘이 더욱 세게 쳐올렸다. 제이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았다. 허벅지에 힘을 주자 저절로 안쪽이 꽉 조여 들며 남자의 성기를 더 세게 물었다. 리욘이 낮게 신음하며 자세를 낮췄다. 한 팔로 제이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하, 아, 응… 전하, 너무 빠,른, 으으응, 전하.”

    남자의 밑에서 속절없이 흔들리며 제이는 연신 신음했다. 몸이 쉬지 않고 흔들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등이 조금 아파 왔다. 몸 전체에 잔뜩 힘이 들어간 상태라 어깨 쪽도 금방 뻐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온몸을 뒤흔드는 강렬한 쾌감에 다른 감각들은 금세 잊히거나 아주 희미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리욘도 슬슬 절정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아까부터 조금씩 흘러 들어오던 그의 생각이 이제 아주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듣지 않으려고 해도 양쪽 다 칩을 장착하고 있지 않다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리욘의 머릿속은 온통 자신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노골적인 욕망으로만 가득해서 제이는 본인이 더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생각 좀 그만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 듣고 있으려니 표정이 관리가 안 될 지경이라 필사적으로 리욘의 움직임에만 집중해 같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 문득 그가 입을 맞춰 왔다. 사정의 징조임을 알고 제이는 남자의 성기를 품고 있는 아래에 꽉 힘을 줬다. 리욘이 깜짝 놀란 얼굴로 입술을 떼더니 곧 허리를 들었다. 그대로 빼려는 걸 재빨리 막으며 제이는 말했다.

    “안에다 하세요.”

    허리를 안아 세게 끌어당기며 말하자 리욘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임신하면,”

    “안 합니다.”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제이는 자기가 먼저 리욘에게 키스했다.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천천히 입을 맞추자 잠시 망설이던 리욘이 곧 혀로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되돌려주듯 다정하게 키스하며 리욘은 제이의 몸 안에 사정했다. 뜨거운 것이 끝도 없이 뱃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생경한 그 감각에 절로 몸이 떨렸다. 리욘의 목을 끌어안은 채 제이는 자신도 사정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사정의 여운으로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는 제이의 몸을 끌어안으며 리욘이 말했다. 안에다 사정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약도 안 먹었는데요, 뭐.”

    제이는 부러 가볍게 말했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약 같은 거 먹지 마.”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며 그가 말했다. 본인이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도 약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낯빛이 어두워지는 리욘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제이는 자신의 이마를 쓸어 주고 있는 리욘의 손을 가만히 붙잡아 그 손끝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위에 갖다 댄 뒤, 조용히 말했다.

    “약속할게요.”

    리욘은 기쁜 듯도 하고, 슬픈 듯도 한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제이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서로의 혀를 빨고, 입술을 핥고, 턱을 깨무는 사이 몸속에 들어와 있던 리욘의 것이 더욱 단단해졌다. 자연스럽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제이는 나직하게 신음했다.

    “전하….”

    “리욘이라고 불러.”

    어서. 리욘이 부드럽게 재촉했다.

    “리욘.”

    제이는 시선을 내리깐 채 조용히 그 이름을 불렀다. 곧 귀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한 번 더.”

    부드럽게 귓불을 깨물며 리욘이 말했다. 제이는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리욘.

    “한 번만 더.”

    “리욘.”

    한 번만 더, 라고 할 줄 알았는데 돌아온 건 깊은 입맞춤이었다.

    “제이.”

    긴 입맞춤 끝에 리욘이 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사랑해.”

    순간, 가슴 안쪽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툭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마도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과 그 사이에서 빛나는 수만 개의 별 때문이리라.

    그런 제이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밤은 한없이 깊어져만 갔고 별들은 더욱 아름답게 빛나기만 했다.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만큼, 이 밤도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곧 멀리 별들 사이로 아스라한 푸른빛이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벌써 새벽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새벽을 닮은 여우의 불꽃이었다.

    ***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열선을 넣은 유리벽 때문에 눈은 이글루에 쌓이는 대신 비처럼 녹아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라리 비가 왔으면 운치라도 있을 텐데.”

    이글루를 나서자마자 휘몰아치는 눈발에 리욘이 투덜거렸다.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걱정 마. 이 정도로는 아무 문제없으니까.”

    하긴, 겨우 이 정도 눈발로 결항이라면 이곳 일대의 공항은 일 년 중 절반 이상은 비행기를 띄우지 못했을 것이다.

    오두막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그 사이 새로 쌓인 눈 덕분에 걷기가 힘이 들어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오두막까지 걸어가는 동안 리욘은 몇 번이나 그 질문을 반복했다. 어제 밤새 무리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전하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기초 체력은 전하보다 제가 더 좋습니다. 제이는 차분하게 말했다.

    “알아. 하지만 지금은 환자잖아.”

    리욘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어젯밤에는 그 생각을 못하셨느냐고 물어보려던 제이는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젯밤 최대한 조심하려고 애쓰는 그를 괜찮다는 말로 부추긴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두막 앞에서 반하 부부와 마주쳤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리욘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했다. 국왕 일가와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자들은 평소에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만큼, 첫인사와 끝인사 때는 예를 갖추는 게 보통이었다.

    “어제 오로라 봤어요, 제이?”

    스캬벤이 오두막의 문을 여는 동안 올리비아가 말했다.

    “네. 봤습니다.”

    금방 사라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오랫동안 떠있더라고 하자 올리비아는 드물게도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핀란드에서 3년째 살고 있는데 그렇게 선명하고 화려한 오로라는 처음이었다니까요. 밤하늘에 초록색 커튼 자락이 나부끼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 표현 멋있네요.”

    “어머, 칭찬 고마워요.”

    기분이 좋아졌는지 올리비아는 오두막에 들어서자마자 차를 끓이겠다며 물을 데웠다.

    “아이들 깨우기 전에 우리끼리 티타임이라도 가져야죠.”

    “도와줄까요?”

    “그럼 컵 좀 꺼내 줄래요?”

    그러죠. 제이는 찬장 문을 열어 컵을 꺼냈다. 쟁반 위에 그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있자니 올리비아가 “음?”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제이, 엄지에 그거 전하의 묵주 반지 아닌가요?”

    “아, 네.”

    맞습니다. 제이는 조금 당황해서 대답했다.

    “전하께 청혼 받았나 봐요?”

    “뭐… 그런 셈이죠.”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대충 얼버무리자 올리비아는 웃으며 “축하해요.” 하고 말했다. 별로 놀라지도 않고 말하는 걸 보니 대충 이렇게 될 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리욘이 뭔가 말을 한 건가 싶었는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스캬벤이 깜짝 놀라서 “청혼이라고요?” 하고 외친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계획된 프러포즈였다면 미리 반지까지 다 준비했을 테니까.

    “그럼, 결혼하시는 겁니까?”

    “그래. 식은 안 올리겠지만.”

    리욘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말투가 퉁명스러운 걸 보니 결혼식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럼 이번에도 혼배 예식만 치르시는 겁니까?”

    “뭐, 그렇겠지.”

    여전히 퉁명한 어조로 대꾸한 리욘은 곧 손을 저으며 “아, 그 이야긴 이제 됐으니까,” 하고 말했다.

    “그보다 시그니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 좀 해 봐.”

    “뭘… 말입니까.”

    “아직 내가 아빠란 걸 모른다고 했잖아.”

    리욘의 말에 스캬벤이 아, 그러셨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결혼도 하기로 했겠다, 슬슬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아아, 그렇죠. 이젠 말씀을 하셔야죠.”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밝히는 게 좋을까 해서.”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아빠의 장장 한 시간에 걸친 고민은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금씩 눈발이 걷히기 시작할 무렵 벌컥 오두막 문이 열리더니 시그니가 큰 소리로 외치며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제이, 전하가 아빠야?”

    하마터면 거기 있던 어른들은 넷 다 동시에 뭐? 라고 외칠 뻔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이가 당황한 얼굴로 묻자 시그니는 “울리카가 그랬단 말이야.” 하고 발을 굴렀다.

    “진짜 전하가 아빠야?”

    뒤따라 들어온 울리카는 설마 자기가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했다간 울리카가 남의 집안사를 가지고 함부로 이야기를 한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릴 판이었다. 제이는 부러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응, 전하가 아빠 맞아.”

    “진짜?”

    시그니는 눈을 크게 뜨며 소리치더니, 이번엔 옆에 앉아 있는 리욘을 향해 물었다.

    “전하가 아빠예요?”

    리욘도 제이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조금 전의 황망해하던 표정은 어디가고 어느 샌가 여유로운 미소마저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응. 몰랐어?”

    “몰랐어요!”

    “왜 몰랐지? 시그니랑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봐, 소르할이랑 스캬벤 아저씨도 똑같이 생겼잖아. 리욘은 시그니를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울리카도 그렇고.”

    “울리카는 올리비아랑 더 똑같이 생겼어요.”

    “원래 엄마랑 아빠랑 반반씩 닮는 거야. 시그니도 제이랑 닮았잖아.”

    “응. 나 제이랑 머리카락 색이 똑같아요.”

    시그니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리욘은 그런 시그니를 보며 맞아, 하고 미소 지었다.

    “나랑은 눈동자 색이 똑같고.”

    “응응, 맞아요!”

    시그니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는 곧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전하가 아빠였구나….”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아이는 오두막 안에 가득 퍼진 달콤한 향에 어? 하며 고개를 들었다. 향기의 진원지가 울리카가 들고 있는 컵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시그니는, 폴짝 리욘의 무릎에서 뛰어 내리며 올리비아를 향해 달려가며 말했다.

    “핫초코, 나도 핫초코 마시면 안 돼요?”

    “왜 안 되겠니.”

    올리비아는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시그니의 몫으로 꺼내둔 컵에 물을 부었다. 잘 저은 뒤 건네주자 시그니는 컵을 받아들며 “고마워요, 올리비아.” 하고 인사했다.

    행복한 얼굴로 호오, 호오, 핫초코를 불어 대는 시그니를 보며 리욘이 허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걸로 끝이야? 아니, 이렇게 끝이야?”

    “끝이죠.”

    제이는 태연히 말했다. 뭘 더 바란 거냐고 묻자 리욘은 여전히 허탈한 표정으로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하고 말했다.

    “나름 엄청 기대했던 이벤트였거든. 뭐, 그렇다고 해서 딱히 요란하게 알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그니 반응이 이럴 줄은 몰랐단 말이지.”

    한마디로 아이의 반응이 기대했던 것에 비해 지나치게 덤덤해 맥이 빠진다는 소리였다. 아마 그는 자신이 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시그니가 눈물까지는 안 흘리더라도 최소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정말요? 정말 전하가 우리 아빠예요? 진짜예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말 안 한 거예요?” 하고 물어 볼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때 대답해 주려고 그럴싸한 이유까지 만들어둔 눈친데, 애가 질문은커녕 금세 납득하고 핫초코나 마시러 가버렸으니, 맥이 빠질 만도 했다.

    “아직 아빠란 존재에 대해 크게 실감을 못 해서 그럴 겁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제이는 변명하듯 말했다.

    “주변에 아빠 있는 친구가 더 드물어서 없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살아왔다고요.”

    존재에 대해 실감을 못하니 당연히 부재를 느낄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시그니에겐 지금 이 정도의 반응이 지극히 당연한 거라고 하자 리욘은 팔짱을 끼며 그런가, 하고 중얼거렸다.

    “크면서 깨닫게 되겠죠. 자기가 조금… 많이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걸요.”

    “우리 딸 사춘기 걱정되는데.”

    리욘이 팔짱을 낀 채 신음했다. 그때가 되면 뭐라고 말을 해줘야할지 벌써부터 고민하는 눈치였다.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제이는 식은 찻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그야 사춘기 따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시그니가 착한 아이라는 건, 리욘이 겪어보면 저절로 알게 될 사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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